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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 세 번째 밤, 아다르 (40/43)

외전 - 세 번째 밤, 아다르

“망할 첼러스 녀석, 내가 하려던 걸 중간에 가로채다니.”

나는 구시렁거리며 코코아를 내주는 아다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제의 여파로 아직도 머릿속이 몽롱했다. 험하게 하지 않아서 체력은 충분했지만, 정신적으로 심하게 괴롭혀진 기분이었다.

“가로채……?”

“그래. 어제 욕실에서 했잖아.”

어벙하게 벌린 내 입으로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도 욕실에서 하면 지겨울 거 아냐? 젠장…….”

그는 욕실에서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겨서 상당히 원통한 모양이었다.

나는 뭐라 딴죽을 거는 걸 포기하고 코코아를 들이켰다. 달고 따끈한 게 기분이 좋았다. 아다르가 돌연 내 눈치를 봤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삼 일 연속으로 정말 괜찮겠어?”

“이러다 밤에는 다시 불타오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사실상 밤에 불타기 위해 이러는 거였다. 소등된 상태랄까.

그런데 아다르는 내가 괜찮다는데도 도통 걱정을 놓기 힘든 모양이었다. 내 안색이며 체온이며 이것저것 신경 쓰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제안했다.

“힘들면 난 건너뛰어도 돼.”

“방금까지 첼러스가 가로챘다면서 구시렁거린 건 어디 사는 누구더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다르가 신경질을 내며 내 입에 샌드위치를 물려주었다. 나는 푹신한 빵과 싱싱한 채소를 오물오물 씹었다.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떻게 해.”

“정 그렇게 걱정되면 좀 부드럽게 해 봐.”

내 말을 들은 아다르가 놀랍게도 슬픈 눈을 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한심하게 자제가 안 돼. 네가 허락해주면 이성을 잃어버린다고.”

“응, 그런 것 같더라.”

나는 영혼 없이 수긍했다.

“내 목에 초커라도 채울래?”

“풋, 캑!”

내가 코코아를 마시다 말고 캑캑거리자 아다르가 손수건으로 턱을 받쳐주었다. 나는 사레가 들려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쟤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미스터리였다.

“너 미쳤어?”

“왜? 마침 이블라가 선물로 준 거 있잖아. 개 목줄 같은 거. 체인까지 연결되어 있던데 딱 아니야? 망나니 남편들을 그걸로 잘 교육하라고 했다면서.”

아다르가 피식 웃었다.

“걔도 참 악취미야.”

“너만 하겠니?”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걸 차고 싶어?”

“네가 해준다면?”

나는 손으로 얼굴을 짓눌렀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질주하면 그 목줄이라도 잡아당겨 봐. 혹시 알아? 그러면 내가 정신을 차릴지?”

“아니, 자극을 받아서 아예 고삐가 풀릴 것 같은데.”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아다르가 어떤 표정을 지으면서 날 괴롭힐지 눈에 선했다. 그건 장난감 목줄을 한 늑대나 다름이 없었다. 흐응, 웃으면서 어디 한번 더 해 보라는 듯이 응징할 게 뻔했다.

“그럴 것 같긴 하다.”

아다르가 떨떠름하게 수긍했다.

‘역시 그런 어쭙잖은 목걸이로 얠 길들일 수 있을 리 없지.’

저 짐승을 훈육하려면 적어도 칼이나 화살 정도는 있어야 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날 묶는 거야.”

“애초에 널 속박할 수 있는 도구가 세상에 존재하긴 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팔짱을 꼈다.

“평소엔 신경 쓰지 않고 잘만 하더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해? 너답지 않게.”

“네가 발정기잖아.”

고개가 자동으로 기울어졌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수인족은 발정기 때 가장 정력적이고 절륜하다며. 평소엔 네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눈치를 보면서 했는데, 이번엔 그런 것도 없을 거 아니야.”

나는 다른 점에서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게 눈치를 본 거였다고?”

“내가 네 눈치를 얼마나 보는데 그래?”

나는 배를 움켜쥐고 그야말로 박장대소했다.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정말인데…….”

아다르가 기운 없이 쭈그러든 음성으로 투덜거리며 내가 먹고 남긴 음식을 치웠다. 그러다 뭐가 생각났는지 번뜩 고개를 들고 제안했다.

“이참에 부부용품점에 들러볼까?”

나는 순간 혹했지만 바로 정신을 차렸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알아. 도구까지 동원하면 우리는 더 난장판이 될 거야.”

“흠…….”

아다르가 별다른 말 없이 싱크대를 왔다 갔다 했다.

식탁엔 어느새 먹음직스러운 디저트가 차려져 있었다. 나는 캐러멜 소스가 뿌려진 탱글탱글한 푸딩을 한 입 떠서 입에 넣었다. 내가 달콤한 것을 좋아하니 아다르는 어느 순간부터 디저트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이제 수준급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숟가락을 놀리다 실수로 유리잔을 툭 쳤다. 우유가 담겨있던 잔이었다. 다행히 번개같이 움직인 아다르가 잔을 받아냈지만 우유가 내 허벅지에 쏟아지고 말았다.

“다치진 않았어?”

아다르가 마른 수건으로 허벅지를 닦아주며 말했다. 나는 그때까지 멍하니 허벅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카나?”

왜 우유가 쏟아지는 순간 생각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카카나? 왜 그래?”

내가 멍하니 허벅지만 보고 있자 아다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가 세게 쥐면 깨질 섬세한 유리 공예품을 만지듯 내 턱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침착하게 폭탄을 던졌다.

“피임 안 했어.”

아다르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혼자서 한참 해석해보더니, 나중에야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발정기 때부터.”

“엊그제부터?”

“엊그제부터.”

“몇 시간 동안 계속했잖아.”

“계속했지.”

아다르의 질문에 대답할수록 정신이 육체를 이탈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나와 달리 아다르는 상당히 침착했는데, 과연 어떤 위기에도 침착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뒷세계에서 평생을 구른 사람다웠다.

“어쩌다 잊은 거야?”

“원래는 억제제에 피임 기능이 들어 있거든.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그런데 이번엔 너희랑 함께하려고 억제제를 안 먹었고…….”

“고스란히 까먹었다 그 소리지?”

“그런 거지…….”

갑자기 골이 띵하게 아파왔다.

내가 이마를 움켜쥐자 아다르가 냉큼 두통에 좋은 국화차를 끓여와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거 먹고 정신 차리라는 뜻 같아서 나는 손을 덜덜 떨며 차를 마셨다.

아다르가 옆에서 등을 쓸어주며 물었다.

“수인족이랑 인간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기도 해?”

“임신이 어렵지만 있긴 있어.”

“그러면 발정기의 수인족과 수인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다르와 나는 잠시 침묵했다. 제일 먼저 관계를 치른 게 아르모어였다. 내가 머리를 쥐어뜯자 아다르가 그러지 말라는 듯이 내 손을 잡아서 내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임신하지 않았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우리는 초월자잖아. 하도 오래전에 들은 얘기라 확실하지 않은데, 초월자는 아이를 낳을 수 없어.”

“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아다르가 침착할 수 있었던 건 또 다른 이유 덕분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잖아. 영원을 사는데 평범하게 번식할 수 있을 리가.”

“그걸 누구한테 들었어?”

“아르모어에게.”

나는 뭔가 깨달았다.

당시에 내가 피임을 잊었다고 해서 아르모어까지 잊었을 리는 없었다. 그는 내가 억제제를 먹지 않았다는 걸 알았음에도 거리낌 없이 관계를 맺었다. 그의 성격을 고려해보건대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면 분명히 말해줬을 것이다.

“아르모어는 어떻게 알았대?”

“그거까진 기억이 안 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르모어는 드래곤로드에게 들었다고 했다.

그는 우리 중에서 가장 긴 삶을 살아온 자였다. 어떤 과거를 지나왔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게 당연하긴 했지만, 스케일이 달라서 조금 놀랐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잠깐 짬을 내서 만든 약으로 몸을 검사해본 뒤 정말 임신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내가 아랫배를 만지작거리자 옆에서 알짱거리던 아다르가 내 손을 커다란 손으로 덮으며 물었다.

“아쉬워?”

“아니.”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이는 원하지 않아.”

대답을 들은 아다르는 조금 묘한 얼굴이었다. 나는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넌 원해?”

“조금? 왜. 내가 아이를 원한다니까 이상해?”

“아니, 딱히…….”

사실 아다르는 말이 험하고 까탈스러워서 그렇지 가정적인 성격이었다. 그렇지 않은 척해도 세심하게 보살피는 능력이 탁월했고 요리도 잘했다. 만약 아이가 있었다면 그는 아이를 물고 빨고 핥으며 극진하게 양육했을 것이다.

나는 조금 무거워진 마음으로 털어놓았다.

“아이가 있으면 슬플 것 같아. 견디지 못했을 거야.”

“…….”

“우리는 영원하지만, 아이는 언젠가 죽을 테니까.”

사랑하고 애정을 준 이의 죽음. 그건 초월자가 지고 가야 하는 마음의 짐이었다.

영원히 가슴에 묻고 간직해야 한다는 건 또 다른 지옥이었다. 세상에 인간이라곤 남지 않는 시대가 오더라도, 홀로 그들을 기억하며 그리워해야 할지도 몰랐다. 초월자의 삶은 그런 것이다. 거기에 자식의 죽음까지 끼어들게 된다면 무너질 거다.

죽음은 쌓이고 쌓일 테니까. 영원히.

“나는 너희들만 있으면 돼.”

“카카나.”

“…….”

“울지 마.”

아다르가 내 눈물을 닦아주며 쉰 목소리로 다시 속삭였다.

“울지 마, 카카나.”

나는 말없이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아다르가 나를 번쩍 안더니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 꼭 끌어안았다. 온몸이 빈틈없이 맞붙는 느낌이 좋았다.

“초월자 되더니 울보가 다 됐네.”

“너희가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울먹였다.

“초월자가 되기 전에는 이 무게를 몰랐어. 어떤 감정을 품게 되는지, 영원하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하나도 알지 못했어.”

“모르는 게 당연하지.”

“너희가 내게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 그리고 어떤 용기를 냈는지도 전혀 몰랐는데…….”

나는 울면서 고백했다.

“사랑해, 아다르…….”

아다르가 음습한 욕망에서 비롯된 젖은 숨을 토했다.

“나와 영원히 함께해줘.”

“이젠 네가 싫다고 해도 그렇게 할 거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감정, 영원히 남은 시간, 그 지옥을 누군가가 함께해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 모든 건 섞이면 절대 깨지지 않을 단단한 집착이 된다. 나는 그걸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었다.

내게 그들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될 것이다. 아다르도 그걸 느낀 것 같았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어떤데?”

“가슴이 부풀도록 짜릿하면서도 서글프고 안타까워.”

아다르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비비며 위로했다.

“미안해, 카카나. 넌 앞으로도 계속 아플 거야.”

나는 울면서 동시에 조금 웃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게 도와주는 거야?”

“환상을 품는 것보단 낫잖아. 그게 깨져나갈 땐 더 아플 테니까.”

“너는 잔인해.”

하지만 그만큼 다정하다.

그는 악역을 자처하는 선인이었다. 나는 그가 드리운 안온한 어둠을 느끼며 매달렸다.

“아무 생각도 안 나게 해줘.”

“기꺼이.”

곧 내게로 밤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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