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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 두 번째 밤, 첼러스 (39/43)

외전 - 두 번째 밤, 첼러스

‘죽을 것 같다.’

진부하지만, 남편과 밤을 보낸 다음 날은 무조건 이 생각과 함께 눈을 떴다. 나도 지겹다고 느끼지만 정말 힘든 걸 어쩌겠는가.

어제 종일 아르모어와 함께하고 발정기의 열기는 그나마 사그라졌지만, 잠깐 휴식기를 갖는 것뿐이었다. 밤부터 다시 끓어오를 게 분명했다. 몸은 여전히 축축 처졌으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발정기를 맞이한 수인족의 몸은 어떻게든 체력을 회복하려 했으므로 더욱 그랬다.

“으으, 삭신이야.”

끙끙 앓으며 몸을 옆으로 튼 순간, 지나치게 화사한 머리를 보고 눈을 찡그렸다. 붉은 눈과 시커먼 머리만 보다가 황금빛이 반짝이니까 적응이 안 됐다.

“첼러스?”

나는 한참 후에 정체를 파악하고 물었다.

그러자 움직이지 않는 석고상처럼 앉아있던 첼러스가 허리를 조금 굽혔다. 그마저 각도가 완벽해서 사람이 아니라 장인이 애초부터 저런 자세로 빚은 예술품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체, 첼러스가 왜 여기 있어?”

한 남편과 밤을 보내고 나면 다음 날 아침까지 그와 함께 있는 게 보통이었다. 평소엔 각방을 쓰므로 같이 잠을 잘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까지 한 부부가 각방을 쓰는 건 너무하지 않냐며 항의가 빗발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의 잠버릇은 제각각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은 몰라도 매번 여섯 명이 함께 자는 건 무리였다. 그러니까 결론은, 어제 아르모어와 밤을 보냈으므로 그가 내 옆에 누워있어야 정상이란 소리였다.

‘아르모어는 어디 가고 첼러스가 있지?’

내 혼란을 알아차린 첼러스가 점잖게 설명했다.

“제가 함께 있겠다고 했습니다.”

“응? 왜?”

“오늘부턴 저의 시간이니까요. 맞습니까?”

나는 그의 말을 속으로 헤아려보다가 돌연 쥐구멍으로 숨고 싶어졌다.

“혹시 어제 아르모어랑 나눈 얘기 다 들었어?”

“그가 방음 마법이 걸린 스크롤을 찢기 전까진, 예. 그렇습니다.”

“으악!”

“저희는 귀가 밝으니까요.”

“들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까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아…….”

나는 뒤늦게 밀려들어 오는 부끄러움에 허덕였다. 베개를 팡팡 두들기고 싶었지만 힘이 별로 없어서 얼굴을 파묻는 것으로 대신했다.

“꼴사납게 운 것도 다 들었을 거 아니야!”

“감사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됐어!”

나는 혼자 씩씩거리다가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그렇게 험한 잠자리를 했음에도 이른 아침이었다. 단언컨대 아다르가 밥 먹으라며 하도 깨워서 습관이 든 게 분명했다.

나는 한숨을 쉬다 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원래는 훈련하는 시간이잖아.”

“이런 기회는 흔하게 오지 않으니까요. 시간을 조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첼러스가 훈련하는 걸 ‘낭비’라고 하다니!

“훈련하는 건 빼놓을 수 없는 일과라고 하지 않았어?”

“일과를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걸 잊는 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첼러스는 몹시 단호했다. 나는 그의 화창한 봄날 같은 미모를 감상하다가 별안간 제안했다.

“훈련하는 거 구경해도 돼?”

“……예?”

“그러면 나랑 함께 있으면서 훈련도 할 수 있잖아.”

“제가 훈련하는 걸 보고 싶으십니까?”

“응. 여태 아다르가 깨울 때 간신히 일어나서 아침밥 먹는 게 고작이었잖아.”

“지루하실 겁니다.”

“아니야.”

첼러스를 구경하는 게 지루할 리 없었다. 그의 기운은 태산처럼 크고 거대해서 구경할 때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기운이 저렇게 묵직한데 압사당하지 않고 두르고 있는 게 퍽 기이하기 때문이다. 행동거지는 뼛속까지 귀족이어서 나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첼러스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내가 바라는 얼굴을 하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는 좀처럼 허튼 행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면 훈련을 하겠다는 의미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첼러스가 허리를 숙였다.

“목에 팔을 감으십시오.”

“응?”

“몸에 힘이 없지 않습니까.”

아르모어도 그렇고 첼러스도 그렇고 발정기가 끝날 때까지 내 발로 못 걷게 할 셈인가. 제법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거절하려고 눈치를 보다가 첼러스의 눈을 보고 체념했다. 어떤 변명이나 핑계도 먹히지 않을 얼굴이었다. 나는 그가 마음을 먹었을 때 얼마나 흔들림 없는지 안다.

“몸이 뜨겁군요. 이대로 밖에 나가도 괜찮습니까?”

“으응. 괜찮아. 발정기여서 그런 거니까.”

“지금은 상태가 어떻습니까?”

“밤까진 괜찮을 거야. 어제 충분히…….”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첼러스를 바라보았다. 괜한 말을 꺼냈단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하셨습니까?”

“응, 충분히 했, 아니!”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혀를 깨물었다. 내 머릿속 대사를 첼러스가 고스란히 읊은 바람에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해서 수긍하고 말았다.

‘전혀 그럴 것처럼 생기지 않아서 진짜 거침없다니까!’

나는 기가 차서 숨만 헐떡였다.

‘저런 성스러운 얼굴로 충분히 했냐는 질문을 하다니…….’

매번 생각하지만 첼러스의 외모는 죄가 많았다. 날 번뇌에 빠지게 했다.

“넌, 그걸, 그렇게!”

“살이 쓰리지는 않습니까? 오늘 밤에도 해야 하는데, 걱정되는군요.”

“무슨, 너, 대체, 말을!”

“아르모어가 너무 빨아…….”

나는 참지 못하고 첼러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왕자님의 얼굴로 대체 무슨 음담패설을 내뱉고 있는 것인가! 심지어 그의 순수하고 청명한 하늘색 눈망울엔 어떠한 음심도 담겨있지 않아서 더 수치스러운 기분이었다.

저속한 것과는 아예 연이 없는 저 눈을 좀 보라!

“첼러스!”

나는 환장하겠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해!”

그는 아직 내게 입이 막혀있었으므로 눈만 휘며 웃었다. 요망하기 짝이 없었다. 자각 없이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이렇게 위험하다.

나는 뜨거운 얼굴이 식을 때까지 그의 입을 막고 있다가 적당히 손을 떼어냈다.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으시군요.”

“너는 너무 망설임이 없어.”

“그렇습니까?”

나는 속이 터졌다.

“그냥 그렇습니까,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야! 나는 다섯 명 중에서 네가 제일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첼러스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을 했다.

“스노아와 아다르도 퍽 속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긴 한데…….”

나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걔네는 그래도 패턴이 있는 느낌이야. 아다르답다. 스노아답다. 이런 느낌? 그런데 너는 정반대야. 첼러스가 이런다니! 이런 느낌?”

첼러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나는 꿋꿋하게 의견을 표명했다.

“하다못해 아르모어도 일관적인 부분이 있는데 넌 아니란 거지.”

“예를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음…….”

나는 그가 날 앞마당의 파라솔이 있는 의자에 앉혀줄 때까지 깊이 고민했다.

“너는 평소엔 침착하고 고지식하잖아.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큰 산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

“그래서 든든한 기둥처럼 기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산이 번개처럼 움직이는 거야.”

“……예?”

첼러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딱 그런 기분이야. 응. 이게 정확해.”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산.

나는 내 표현에 대만족한 나머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신중한데 행동파고, 성스러운데 아무렇지 않게 저속한 말을 하고, 그러면서 또 의도는 순수하고!”

“……종잡을 수가 없군요.”

“맞지? 내 말이 맞지?!”

나는 흥분해서 동의를 종용했다.

“네가 딱 그래!”

첼러스는 내 예상보다 충격받은 낯이 아니었다.

그는 차분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해주며 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 쉬운 편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에는 그 점이 퍽 불만이었습니다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

“당황한 카카나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가 가볍게 내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그건 꽤 즐거운 경험입니다.”

내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소리 내서 어떤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그의 널따란 어깨나 가슴팍을 주먹으로 치는 걸 택했다. 팡팡 두드리니 그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안으로 삼켜지며 목울대를 울리는 웃음이었다. 즐거워하는 첼러스의 얼굴을 보자 벌써 밤이 두려워지려고 했다.

그가 잠자리를 내게 전부 맞춰준다고 해서, 그 관계가 쉽고 편안한 건 아니었다.

잠자리는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방법이었다. 부부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다. 거칠다, 부드럽다, 로 나눌 수 있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란 소리였다.

부드러워도 어렵거나 버거울 수 있었고, 거칠어도 편안할 수 있었다. 다른 용사들은 그걸 오해하고 있었다.

첼러스와 나누는 사랑의 속삭임은 예상할 수 없는 변수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가 상상하지도 못한 행동이나 말을 곧잘 하므로 나는 긴장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만 했다.

그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고,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으리만치 대담하게 행동했다.

‘어, 어떡하지.’

첼러스가 훈련에 돌입했지만 나는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오늘 밤엔 또 어떤 기상천외한 경험을 하게 될지 솔직히 겁이 났다. 첼러스가 저 선한 눈으로 아다르나 할 법한 부탁을 하면 수치심으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말하는 건 첼러스인데 수치심은 왜 내가 느끼는 거지.’

나는 멍하니 지난 관계가 어땠는지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잠들어버렸다. 놀랍게도!

‘내가 발정기이긴 하구나.’

침대에서 눈을 뜬 나는 해탈한 감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침과 달리 몸은 꽤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팠다. 감각이 선득하게 곤두서고 몸살이 난 것처럼 떨렸다.

‘빌어먹을 몸뚱어리.’

이를 득득 가는 사이 욕실 문이 열렸다. 나는 수건 한 장만 걸친 첼러스의 광채 나는 몸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아으아악!”

“카카나?”

“어후, 깜짝이야, 어후!”

나는 심장을 움켜쥐고 괴로워했다.

“왜 내 방 욕실에서, 아니, 차림은 대체 왜 그래? 가운 없어?”

하루라도 날 놀라게 하지 않으면 몸에 종기라도 나나 보다.

나는 기가 막혀서 첼러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다 말고 변명했다.

“가운이 제 방에 있습니다. 카카나의 가운은 작아서……. 보기 흉합니까?”

흉하기는 개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너무 아름답, 아니, 너무 자극적이잖아! 불도 이렇게 환한데!”

나는 항의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첼러스가 곧게 걸어와서 무릎 한쪽을 침대에 올렸기 때문이다.

나는 벌어지는 수건 틈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첼러스의 눈을 노려보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몸이 괴로워 보입니다.”

“나, 난 안 씻었단 말이야!”

“그래서 더 좋습니다.”

첼러스가 땀이 옅게 배어 나왔을 내 손목 안쪽을 진득하게 핥았다.

“카카나의 맛이 진하게 나서…….”

“꺄아악!”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아, 안 돼! 씻을 거야!”

“청결 마법스크롤을 쓰시겠습니까?”

“아니! 욕조에 있다 나올 거야!”

일단 좀 진정하고 싶었다. 그런데 첼러스가 나를 단숨에 안아 올렸다.

“같이 씻는 건 어떻습니까?”

넌 방금 씻었잖아……?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꼭 해 보고 싶었습니다.”

“뭐, 뭘?”

그가 놀란 토끼 눈을 한 나를 보더니,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드럽게, 천천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뭘 하려는 건데!

나는 욕실과 첼러스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체념하고 목을 끌어안았다. 어차피 마음먹은 첼러스가 과감하고 망설임이 없다는 데엔 변함이 없었다. 내게 남은 일은 그의 넘치는 사랑을 버겁게 받아먹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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