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첫 번째 밤, 아르모어
발정기 억제제를 복용하는 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일주일 동안 앓게 되는 발정기는 번거롭고 고통스러운 과정이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약을 먹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때가 다가오면 침대 근처에 꼭 억제제를 놔서 발정기를 대비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몽롱한 정신으로 선반을 더듬었을 때 아무것도 없는 걸 느끼고 의아했다.
‘왜 준비하지 않았지?’
몸에 미열이 나기 시작하고 무기력했다. 이는 발정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신호였다. 분명 전날에도 이런 신호를 느꼈을 것이다.
‘내가 억제제를 챙기지 않았을 리 없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억제제를 깜박하다니? 멍한 정신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상황을 파악한 건 아르모어가 내 방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풍성한 장미향에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이마 위로 아르모어의 차갑고 매끄러운 모발이 주르륵 흐트러졌다.
“음.”
그가 내 뺨에 코를 묻고 숨을 깊게 들이쉬는 듯하더니 허리를 폈다.
“오늘 밤부터 시작되겠군.”
“페로몬 냄새를 맡고 온 거예요?”
나는 갈라지는 음성으로 물었다.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의 격렬한 일주일을 위해 몸이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리라.
“그래. 그대가 걱정되어.”
나는 아르모어의 희고 고고한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대부분의 수인족은 이성의 강렬한 페로몬 냄새를 맡았을 때 이성을 잃거나 당황한다. 혹은 유혹당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아르모어에겐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우아하고 노련한 품위가 있었다.
‘어떻게 발정기인 상대를 눈앞에 두고 저렇게 느긋하지?’
“아르모어는 초인이에요?”
‘초월자에게 뭘 물은 거람.’
발정기여서 생각에 빈틈이 많았다. 내가 뜨거운 숨을 뱉는 사이, 아르모어가 조금 고민하다가 답했다.
“비슷하긴 하지.”
“제 방에 페로몬이 가득 차 있잖아요.”
“그래.”
“근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아르모어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체온은 미지근했다.
“표정이 그대처럼 다양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면 혹시 당황했어요?”
“페로몬을 맡고 왔으니 당황하진 않았지.”
“그럼요?”
“…….”
아르모어가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는 한 마디를 뱉기 전에 꽤 오랜 시간 생각을 거치는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보채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대가 바라는 대답이 무얼까.”
아르모어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붉은 눈을 치떴다. 그 안에 무언가가 들끓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그대를 원하는지, 적나라하게 말해주길 바라나?”
“아…….”
“귀가 붉어지도록.”
그가 밑으로 처진 내 양의 귀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천박한 말을 해줄 수도 있다.”
그대가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지, 뒷말을 덧붙인 아르모어가 부드러이 웃었다.
나는 온몸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미향 때문에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의 페로몬에는 희미한 과일 향도 섞여 있어서 달콤한 술을 한껏 들이켠 기분이 되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헐떡이자, 아르모어가 흐리멍덩하게 풀린 내 눈두덩을 차가운 손으로 짓눌러주었다.
“아무래도 아직은 아닌 것 같군.”
“아, 앞, 앞으로도 아, 아닐 것 같아요…….”
내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남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유난히 어려운 남자이지 않았는가. 나는 색색, 숨만 들이쉬었다.
“몸은 어떻지?”
“힘들어요.”
“견디기 힘들면 약을 먹거라.”
“하지만 발정기 때 같이 동침하기로 약속했잖아요.”
나는 어젯밤에 뭘 하다 잠들었는지 깨닫고 얼굴이 벌게졌다.
발정기 첫날부터 다섯 명과 함께하는 건 허들이 높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엔 발정기인 몸 상태가 괴로울 것 같아서 순서를 정했었다. 잠자리가 상냥한 두 명의 남편을 중간에 적절히 배치하면서.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짤 때 배덕감이 느껴져서 괴로웠는데, 슬슬 그것을 실현할 시기가 다가오자 몸이 배배 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남편이 다섯 명이나 되는 건…….”
나는 괴롭게 중얼거렸다.
“부인에게 죄책감을 주는 일인 것 같아요.”
“왜지?”
“제가 어제 뭐 했는지 알아요?”
나는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순서를 정했어요.”
“흠.”
아르모어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나는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발정기는 일주일 동안 이어지잖아요. 그동안 성관계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죠.”
“그래.”
“첫날부터 동침하는 건 자신이 없었어요. 발정기는 시작하고 엿새째 절정에 이르잖아요. 그래서 엿샛날에 동침하는 게 제일 낫다고 생각했죠.”
“합리적이군.”
아르모어가 웃음기를 싹 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경청해주자 자연히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나는 열심히 조잘거렸다.
“하지만 그러면 앞선 닷새가 비잖아요. 그동안 저는 계속 괴로울 테고…….”
“닷새만 억제제로 흘려보낼 순 없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발정기는 몸이 일주일 동안 서서히 변화하다가, 엿새 만에 절정을 이루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흐름이에요. 그걸 토막 내서 일부만 경험하는 건 불가능해요.”
이제 슬슬 본론을 말할 때였다. 나는 뺨이 뜨끈해지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순서를 정했어요. 엿새가 되는 날까지…….”
“누구와 할지 하루하루 상대를 정한 거로군.”
“바로 그거죠.”
나는 애써 태연해 보이려고 미소를 머금었다. 끔찍하게 부자연스러운 표정이라는 게 거울을 보지 않아도 느껴졌지만, 아르모어는 잔잔하게 내 말을 들을 뿐이었다.
“저는 이게 부당한 것 같아요. 이것저것 재면서 순서를 정하다니 꼭 물건을 다루는 것 같잖아요.”
그 말을 끝맺자 믿을 수 없게도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훌쩍이기 시작했다. 숨어있던 감정들이 꾸물꾸물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술에 얼큰하게 취한 기분이었다. 아르모어의 페로몬을 담뿍 마시고 있었으므로 아마 취한 상태이긴 할 것이다.
“카카나.”
그가 미간을 좁히며 내 눈물을 받아마셨다.
나는 딸꾹질까지 하며 울었다. 이런 모습을 숨기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게 나의 솔직한 모습이었다.
“저는 이래야 한다는 게 괴로워요. 제가 다섯 명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니면 남편이 한 명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요.”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르모어가 열과 눈물에 녹아서 흐느적거리는 날 일으켰다. 머리가 핑글 돌며 지독한 현기증이 일었다. 덕분에 눈물은 멎었지만 진정되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내 아내는 속이 깊어 탈이군.”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까부터 오열하며 고백한 탓에 귀가 밝은 남편들은 아마 방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다 듣고 말았을 것이다. 신경이 쓰였지만, 당장 괴롭고 슬픈 마음이 커서 생각이 깊어지진 않았다. 나는 그저 울었다.
“우리는 상처 받지 않는다. 그대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대가 우리를 걱정하듯이 우리도 그대를 걱정한다. 얼마나 힘들지, 어떤 고민을 할지, 어떤 배려를 하고 있는지 놓치지 않으려고 하지. 우리는 다섯 명이고, 과한 애정을 받아내는 건 그대 한 명뿐이니까.”
나는 코를 훌쩍이며 아르모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미안한 마음은 우리가 더 클 거다. 그대는 귀해서, 우리와 함께하는 것만으로 불공평한 짓을 하는 것 같지.”
“그게 뭐예요.”
나는 빨개진 코를 찡긋거리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르모어가 특유의 나직하고 잔잔한 음성으로 내 웃음을 막았다.
“사실이다, 카카나. 그대는 믿어야 해.”
진지한 눈빛에 내 입가의 웃음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농담이 아니었다. 아르모어는 진실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제 믿는 얼굴이로군. 눈물은 멎었나?”
나는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아르모어가 눈물 자국을 마저 닦아주고 날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바람을 쐬러 테라스로 나갈 작정인 것 같았다.
민망하고 창피해서 내려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빈말로라도 혼자 걷겠다는 말이 안 나왔다. 발정기에 울기까지 해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가 테라스의 하얀 난간에 날 앉혀주었다. 제국은 현재 끔찍하게 추운 겨울이었다. 우리는 혹독한 계절을 피해 따스한 곳으로 여행을 왔다. 바깥은 막 시작된 초봄의 바람이 불어서 기분 좋게 선선했다.
“그래서, 첫 번째는 누구지?”
아르모어가 달큼한 숨을 내쉬며 물었다. 나는 갑자기 공격을 당한 사람처럼 당황했다.
“가,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는군.”
아르모어가 발갛게 부은 내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의 품에 꽉 안긴 채 어쩔 줄 몰라서 눈을 굴렸다.
아르모어의 요염하고 위험한 눈이 내 표정을 살피는 듯하더니 이내 정염으로 끓어올랐다.
“나로군.”
정말이지 그에겐 숨길 수가 없었다. 조금만 함께해도 속이 간파당해서 영혼까지 낱낱이 드러났다.
아르모어가 느릿하게 윗입술을 핥더니, 돌연 사납게 내 목을 깨물었다.
“앗!”
놀라서 어깨를 짚자 그가 날 안아서 휙 몸을 돌렸다. 침실이 있는 자리였다.
“다음 순서는 누구지?”
나는 그에게 뭔가를 숨기는 걸 포기했다. 부끄럽고 민망한 감정을 짓누르며 기어들어 가듯 고백했다.
“체, 첼러스요…….”
내 말을 들은 아르모어가 사납게 웃었다.
“그러면 거칠게 해도 괜찮겠군.”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첼러스가 아무리 내게 맞춰준다지만, 그 또한 초월자였고 평생을 훈련하며 지낸 기사였다.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과감하게 움직여야 할 때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첼러스와 함께 잠자리에 들 때 얼마나 당황하는 일이 많은지 그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아뇨 아르모어, 저는…….”
그 순간, 방음 마법스크롤을 찢은 아르모어의 몸에서 드높은 파도처럼 페로몬이 쏟아져 나왔다. 발정기인 내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특별제작된 스노아의 스크롤이었다. 덕분에 아무런 부대낌 없이 아르모어의 페로몬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이성이 순식간에 위로 붕 떠올랐다. 아르모어가 입을 벌린 채 넋이 나가버린 내 뺨에 입술을 문질렀다. 솜털이 곤두선 피부로 그가 뿜어내는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그대는 아름다워.”
그는 꼭 페로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정하고, 달콤하고, 그윽한 페로몬이 붉은빛으로 시야를 가리는 기분이었다.
놀라고 긴장된 마음이 단숨에 녹아 사라졌다. 황홀한 감정이 북받쳤다.
아르모어는 절대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항상 내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으로 관계를 시작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누고 있는 거다. 그걸 잊지 않았다는 듯이.
“사랑스러워서, 전부 먹고 싶어진다.”
내 페로몬에 도취하는 아르모어를 보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