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 부부에겐 대화가 필요해 (37/43)

외전 - 부부에겐 대화가 필요해

결혼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하객은 엘프들뿐이라 조촐하게 느껴질 법했지만,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 허전한 느낌이 없었다.

나는 사실 결혼식을 치른다기에 많이 긴장해 있었다. 신랑 신부는 준비과정 때문에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녹초가 되어버린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다. 내가 한 일이라곤 엘프들이 들이미는 수많은 선택지 중 마음에 드는 걸 손가락으로 가리킨 게 다였다. 결혼식에선 그들이 잘 닦아놓은 길을 따라 걸었을 뿐이고.

오늘은 결혼식을 치렀다기보단 한차례 관광을 끝내고 온 기분이었다. 나는 결혼식 내내 엘프들이 꽃과 손자수로 꾸민 천과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촛대들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정말 친구들을 부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카카나 님.”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내 머리를 다듬어주던 엘프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쉽겠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제국의 황제인 오로라를 퀄리티미엄에 초대할 순 없잖아.”

숨어 살아야 하는 엘프의 입장에선 재고할 가치도 없는 사항이었다.

“친구가 모두 황제인 건 아니잖아요.”

“결혼식을 준비해준 것만도 고마운데 너희에게 그런 폐까지 끼칠 순 없어.”

“카카나 님의 친구라면 믿을 수 있는데……. 아, 혹시 제국에서 또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신 건가요?”

나는 대번에 질려버린 표정이 되었으나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알아보는 엘프는 내가 이만 화제를 돌리고 싶어 한다는 걸 대강 눈치챘다. 그들은 내 머리를 편하게 정돈하고 옷을 갈아입힐 준비를 시작했다.

‘결혼식에 웨딩드레스 말고 또 입을 게 있던가?’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는 엘프의 손에 들린 옷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잠깐!”

“네?”

“그, 그그, 그거 뭐야?”

순진하게 눈을 끔뻑이던 엘프가 남사스러운 반투명 슬립을 앞뒤로 흔들며 대꾸했다.

“그야 오늘은 초야니까요. 결혼 문화에 대해 알아보니 인간들은 결혼한 날 밤에 아주 특별한 의식을 치른다면서요?”

“의, 의식?”

“번식 행위 말이에요.”

눈앞이 아찔해졌다.

“초야엔 이런 옷이 도움이 된다고 본 적이 있거든요.”

“설마 용사들한테도……?”

“물론이죠. 남성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옷을 입힐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엘프가 칭찬해달라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 널찍한 가슴 앞판이 훤히 드러나도록 느슨한 실크 가운을 입히고 속옷은 안 입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죠. 걸을 때마다 은밀하게 보이는 하반신이…….”

“그만!”

나는 비명을 질렀다.

“다, 당장 취소, 아니 용사들이 순순히 입긴 했어?”

“흔쾌히 입었다던데요? 저희의 예술성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셨다고 했어요. 자, 이젠 카카나 님 차례예요!”

“난 필요 없…….”

거절의 기색을 내비치기 무섭게 엘프의 눈망울이 축축해졌다.

“혹시 내키지 않으세요? 준비 많이 했는데…….”

‘윽.’

나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짓눌렀다. 엘프는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낯이었다. 저런 식으로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게 더 마음을 후벼 팠다.

‘일단 입자. 입고 엘프가 나가면 후다닥 갈아입는 거야.’

엘프들은 거짓말을 금방 눈치채기 때문에, 마음부터 정돈해야 했다. 어차피 갈아입을 테니 엘프가 저 슬립을 내게 입히든 말든 상관없었다.

“아냐, 괜찮아. 슬립 진짜 예쁘다. 고마워.”

섬세한 장식을 잘하는 엘프들이 손수 정성을 다해 만든 슬립은 수수하면서도 정교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옷까지 하나하나 준비해준 엘프들에겐 진심으로 고마웠고, 당장은 저걸 입어도 괜찮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다행히 통했는지 엘프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예뻐서 다행이에요! 밤새워 만들었거든요!”

‘휴…….’

나는 피부에 감기는 매끄러운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차마 슬립을 입은 나를 두 눈 뜨고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곧 초야를 치를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여기서 조금만 쉬고 계세요!”

엘프가 후다닥 방을 나갔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의자에 앉았다. 퀄리티미엄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창밖을 멀거니 구경하던 나는 문득 결혼식을 치를 때보다 몸이 훨씬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기대 어린 떨림과 닮은 긴장이었다. 그러나 거기엔 분명히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

[결혼식을 올리면 다섯 명이랑 같이 꽃이불 덮기로 약속했잖아.]

아다르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이게 문제였다.

애써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본격적인 초야 전용 슬립까지 입고 있자니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대기하는 시간이라 더 초조해졌다.

용사들은 내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건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그만하라고 단호하게 외치면 되는데 내 입에서 싫다는 소리가 나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용사들은 이미 내 몸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고, 애태우는 데엔 도가 터 있었다. 나는 매번 스스로의 욕망에 졌다. 그들이 선사하는 달콤한 늪에 자진해서 빠지는 것이다.

엉엉 울고 힘들어 죽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절하기까지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용사들이 그만큼 완급조절을 잘하니 더 문제였다. 내가 그어 놓은 선을 어찌나 귀신같이 알아채는지 거절할 기색을 보이면 칼같이 부드럽게 변했다.

좋고, 억울하고, 좋고, 힘들고, 좋고, 너무 좋아서 도망치고 싶고, 그런 번뇌의 연속이었다.

‘어쩌지.’

감당이 안 되기 시작했다.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고 내 심장은 이제 버거울 만큼 쿵쾅대고 있었다. 나는 슬립을 입었다는 것도 까먹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정신없이 제자리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포도주도 입에 부어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긴장한 탓에 손발이 차가워지고 몸이 떨려서 따뜻한 가운을 덧입었다. 그래도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좀 버거워도 기분 좋긴 할 텐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거지?’

정말로, 좋아하는 남편과 첫날밤을 앞두고 있는 신부라도 된 것처럼.

‘볼 장 다 본 사이에 부끄럼 타기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생각해보지만, 얼굴은 속수무책으로 빨개졌다. 긴장이 한계치를 넘어가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마법배낭을 뒤지기에 이르렀다. 배낭엔 스노아가 만들어준 마법스크롤이 상점을 내도 될 만큼 가득 쌓여있었고 그중엔 텔레포트 스크롤도 있었다.

나는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종이를 찢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미친 짓이었다.

***

테라스 난간에 등을 기댄 채 맥주를 들이켜던 이블라는,

“푸웃―!”

제 방에 뚝 떨어진 카카나 때문에 기겁해서 마시던 걸 세차게 뿜었다.

“컥, 콜록! 카카나?!”

카카나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찢어진 채 제 손에 들린 마법스크롤을 보고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심각한 기세로 부들부들 떨기에 걱정이 치민 이블라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미친. 미친 거 아냐?! 어떡해! 미쳤나 봐!”

카카나가 절규하듯 뺨을 부여잡으며 악을 썼다.

“아아아아악! 어떡해!”

“왜, 왜 그래?”

“도망쳐 버렸어! 퀄리티미엄으로 돌아갈 텔레포트 스크롤도 없는데!”

“뭐?”

“오늘 용사들이랑 결혼하고 초야를 치르는 밤이었는데, 도망쳐 버렸다고!”

“아니 너 결혼했어?! 왜 말 안 해줬, 뭐?”

이블라의 얼굴이 곧 카카나와 똑같이 새하얘졌다.

첫날밤에 신부가 도망쳤다. 소박맞은 남편들은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무력과 힘으로 이름이 드높은 남자들이다. 그리고 그 도망간 신부가 눈앞에 있다.

냉철하고 눈치 빠른 용병답게 이블라는 단박에 상황을 파악하고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장 나가!”

“이블라! 네가 어떻게!”

“너야말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첫날밤에 나한테 도망치면 어떻게 하냐고!”

“손에 잡힌 텔레포트 스크롤이 너희 집이었단 말이야!”

“알 게 뭐야!”

이블라의 집 안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 남자들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도망쳐, 도망치길!”

“어떡하지?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다들 뭔가로부터 도망쳐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처음엔 그다지 무섭지 않다가도 뭔가가 뒤를 본격적으로 따라온다고 생각하면 공포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게 설사 친한 친구여도 죽을힘을 다해 쫓아오면 더 도망치고 마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카카나도 마찬가지였다. 뒤를 쫓아올 남자들을 생각하니 너무 무서워서 가슴 안이 선뜩해질 지경이었다.

“지금 당장 돌아가!”

“하,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야! 이미 해도 다 떨어져서 벌써 늦었다고! 일이 커지기 전에 얼른 돌아가!”

돌아가서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그들이 무슨 반응을 보이든 도저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카카나가 비장하게 속삭였다.

“나는 최근 혼자인 적이 없었어. 항상 걔네랑 함께였거든.”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러니까 이런 잠깐의 일탈도 필요한 거야! 솔직히 걔네가 잘못했지!”

그랬다. 카카나는 자기 합리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초야에 다섯 명이랑 동침이라니! 누구 죽일 일 있냐고!”

“설마 걔네가 강요했어?”

이블라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카카나의 목소리가 급속도로 작아졌다.

“내가 약속했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한 거야?”

“그땐 결혼식 치를 줄 몰랐단 말이야.”

이블라가 마른세수를 했다.

“세상이 네 생각대로 굴러가는 것도 아닌데 그런 약속을 왜 했어.”

카카나도 알고 이블라도 아는 사실이지만 지금 와서 한탄해 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카카나는 이미 겁에 질려서 돌아갈 생각은 꿈에도 못 할 것 같았다.

이블라는 어쩔 수 없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단 넌…… 진정할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생각이랑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라도 벌어보자.”

“그, 그럴 수 있을까?”

상대는 과거의 용사들이다. 하지만.

“넌 지금의 용사잖아. 충분히 따돌릴 수 있을 거야.”

카카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약물 만드는 것뿐인걸.”

“더 잘된 일 아니야? 약물은 걔네가 전혀 모르는 분야잖아. 획기적으로 도망칠 수 있을지도?”

이블라의 말이 힌트가 되었다.

카카나는 위기에 봉착한 머릿속이 놀라운 속도로 돌아가는 걸 감지했다. 창의적인 생각은 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폭발하는 법이다.

카카나에게 종이가 필요한 걸 깨달은 이블라가 눈치껏 깃펜과 양피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착잡한 심정으로 그녀를 구경했다. 하얀 가운 안에 야한 슬립을 입고 남편들에게서 도망칠 궁리로 머릿속이 한가득한 천재 치료사라니.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이블라! 너 동생 많다고 했지?”

이블라는 불길한 직감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

“제일 어린 동생이 몇 살이야?”

“열 살.”

“이름이랑 외형 좀 말해 봐.”

이블라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설마…….”

“네 생각이 맞아.”

“내 동생으로 둔갑하겠다고? 진심이야?”

“응. 혹시 불쾌해?”

“아니, 그건 아닌데 둔갑한다고 소용이 있어? 넌 이제 초월자잖아. 마나만 느껴도 정체가 탄로 날 텐데?”

“둔갑이라는 건 다른 껍데기를 뒤집어쓴다는 거야.”

카카나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무해한 어린아이로 둔갑하면 안에 어마어마한 마나가 들었는지 성인 여자가 들었는지 어떻게 알겠어?”

“그러니까, 평범한 여자아이로 느껴지게끔 네 몸과 마나를 포장할 거다?”

카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능해?’

이블라는 속으로만 물었다. 카카나와 함께 있으면 하루에 꼭 한 번은 나오는 질문이기에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카카나가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올렸다.

“나는 이제 마나에 대해 잘 알잖아? 만들 수 있는 약물의 폭이 예전과 차원이 달라졌다는 말씀!”

이블라는 카카나를 항상 천재라고 생각했지만, 오늘만큼 통감한 적이 없었다.

카카나는 용사들이 빠르게 따라붙을 거라면서 황급히 수정구로 전신을 넣더니, 금방 재료를 공수했다. 그럴 수밖에. 치료사 협회는 이미 그녀의 발아래에 있었다. 다들 그녀와 말이라도 한번 섞어보려고 기를 썼다.

카카나는 1시간 만에 약물을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마저 재료를 실은 마차가 이블라의 집까지 오는 데 40분이나 걸려서 20분 만에 만든 약물이었다.

그녀가 허겁지겁 약물을 삼키고 채 5분이 지나지 않아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블라와 어려진 카카나는 등허리로 식은땀이 동시에 주욱 흐르는 걸 느꼈다.

“카카나 여기 있지?”

용사들은 이미 확신하고 찾아온 듯했다.

“오밤중에 찾아와서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별의별 의뢰를 완수하며 능글거리기가 용사들 못지않은 이블라가 수준급 연기를 선보였다.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이미 카카나가 갈 법한 곳은 다 뒤지고 왔거든.”

아다르의 말에 스노아가 피곤한 낯을 했다.

“하필이면 마법스크롤을 사용하는 바람에 마나의 흔적이 남지 않아 고생했죠.”

“카카나가 사라졌다고?”

이블라는 끝까지 시치미를 뚝 뗐다.

“이렇게 여유롭게 남의 집이나 뒤지고 있는 걸 보면 위험한 상황은 아닌가 보지?”

“본인의 의지로 도망친 거야. 퀄리티미엄에 있었거든.”

아다르가 가늘어진 눈으로 이블라를 살피며 설명했다.

“정말 여기에 오지 않았나?”

“나한테 물어볼 필요가 있나? 이 근처에 카카나가 없다는 건 마나만 느껴도 알 수 있을 텐데?”

“글쎄요.”

스노아가 눈을 새파랗게 빛내며 읊조렸다.

“초월자가 된 카카나라면 마나를 숨기는 것쯤은 손쉬울지도 몰라요. 벌써 한 시간이나 흘렀으니 그녀가 약물을 복용하기엔 충분했을 겁니다.”

이블라는 무릎에 힘이 풀리려는 걸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신부가 사랑스러운데 너무 유능하기까지 하면 남편으로선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니까.”

“네 집에서 마나의 기척이 느껴져.”

할릭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끼어들었다.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마나를 아예 없앨 순 없지.”

“그러니까 그 콩알만 한 마나가 카카나일 거다?”

카카나가 맞았다. 이블라의 뒷덜미는 이미 진땀으로 축축했다.

“한 번만 확인하게 해주실 수 없으십니까? 부탁드립니다. 사례는 톡톡히 치르겠습니다.”

이들 중 그나마 정상인 첼러스가 간절하게 부탁했다.

‘난 할 만큼 했다, 카카나.’

이블라가 마음대로 하라는 양 자리에서 비켜섰다. 여기서 더 공방을 펼쳤다간 되레 의심을 사고 말 거다.

다섯 남자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더니, 망설임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마나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을 열었을 때 보인 건 10살 정도 되는 어린 소녀였다. 이블라와 똑같은 장미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아이였다. 콧잔등에 주근깨가 있고 눈망울은 머리와 똑같은 붉은색이다. 개구쟁이 같은 인상이 물구나무를 서서 봐도 카카나와는 딴판이었다.

“내 동생 로즈야.”

이블라가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했다.

“이제 의심은 걷혔겠지?”

***

나는 푹신한 러그 위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다섯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두려워서 눈물이 다 나려고 했지만 필사적으로 순진무구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언니, 이 사람들 누구야?”

“내가 저번에 친한 친구가 있다고 했었지?”

“응.”

“그 친구 남편들이야. 친구가 말도 없이 어디 갔나 봐.”

“그랬구나.”

그때 아르모어가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놀라서 자지러질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가 대뜸 내 겨드랑이에 손을 껴서 위로 주욱 끌어올렸다. 나는 순식간에 그에게 잡힌 작은 곰돌이 인형이 된 모양새로 대롱거렸다. 아르모어 특유의 핏빛 눈이 코앞에서 기이한 이채로 번들거렸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

“…….”

그 자세로 숨 막히는 대치가 한참을 이어졌다. 다른 인간들 눈엔 둘이 대체 뭐 하고 있는 건가 싶겠지만, 우리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페로몬으로.

‘젠장, 페로몬을 생각 못 했어!’

남성 페로몬을 뒤집어쓴 몸이 불가항력으로 페로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려진 몸으로 감당하기엔 장미향이 너무 무겁고 공격적이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자 아르모어의 눈이 대번에 실처럼 가늘어졌다.

‘들켰다.’

이블라의 동생은 인간일 테니 페로몬을 아예 느끼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반응하는 것도 모자라서 페로몬까지 뿜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아르모어가 그 상태로 나를 오랫동안 관찰했다.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허옇게 질린 입술만 움찔거렸다. 그가 곧 나를 땅에 조심스럽게 내려주더니 용사들에게 돌아갔다.

할릭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뭐 한 거야?”

나는 바짝 긴장해서 아르모어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무심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묵비권이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아르모어는 평소에도 타인의 질문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무시한 적이 많았다. 용사들은 저 인간이 한두 번 저러는 것도 아니라며 더 캐묻지 않았다.

“언니, 나 이제 토끼씨랑 놀아도 돼?”

나는 귓불이 빨개지는 창피함을 감수하고 토끼 인형을 품으로 끌어왔다. 이블라가 찰떡같이 알아듣고 용사들을 쫓아냈다.

“봤지? 카카나는 아니니까 이만 돌아가.”

용사들은 그렇게 찝찝한 기분을 누르며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돌린 줄 알았으나!

“왜 또 온 거지?”

“내가 알아?!”

나는 이블라의 품에 안긴 채 그녀와 격한 어조로 소곤거렸다. 이블라에게 줄 선물을 한 아름 챙긴 용사들이 아침 해가 밝기 무섭게 찾아온 참이었다.

설마 아르모어가 다 털어놓은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르모어가 그럴 성격도 아닐뿐더러, 용사들이 무작정 나를 추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아주 이상한 제안을 했다.

“동생이 놀러 온 거라고 했지? 심심하다면서.”

할릭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블라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우리가 놀아주는 건 어때?”

“뭐?”

“너는 일 때문에 바쁘잖아. 우리는 자유롭게 제국을 돌아다닐 수 있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구경시켜주려고.”

“의도를 모르겠는데.”

“어제의 무례를 사과하는 의미라고 생각하면 돼.”

이블라는 돌연 몹시 피곤한 얼굴을 했다. 그 순간, 나는 이블라가 본래 어떤 성격이었는지 떠올리고 그녀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그녀는 예전부터 용사와 나 사이에 끼는 걸 극도로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한 발을 슬쩍 빼고 멀리서 구경하곤 했다. 이번에도 날 도와주긴 했지만 분명한 한계를 보였다. 여기까지였다.

그녀가 나의 간절한 시선을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니! 난 싫어!”

“쉬이, 로즈. 겁먹지 말고 이리 와.”

아다르가 상냥하게 속삭이며 팔을 뻗었다.

“맛있는 디저트 가게에 데려가 줄게. 분명히 로즈도 마음에 들 거야.”

나는 아다르의 딱딱한 손가락이 허리에 감기자마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블라의 보드랍고 말랑한 품에서 벗어나 돌덩어리처럼 단단한 가슴팍에 고개를 처박자 위기감이 치솟았다. 감옥에라도 갇힌 기분이었다.

“잘 다녀와, 로즈.”

이블라가 선선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마 내 명복을 빌어주는 것 같았다.

“언니이이이.”

나는 절규하며 용사들에게 끌려갔다.

***

나는 곧 그들의 의도를 알아챘다. 용사들은 내가 진짜 로즈인지, 아니면 로즈의 탈을 뒤집어쓴 무언가인지 끊임없이 간을 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랬다.

“그러고 보니 카카나가 아끼는 약초함에 불이 붙었다고 엘프들이 안절부절못하던데. 촛대가 흔들리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며?”

“캑, 쿨럭, 커헉!”

나는 딸기 케이크를 맛나게 먹다 말고 격하게 기침했다. 아다르가 눈을 빛내며 곧장 고개를 숙였다.

“왜 그래, 로즈? 뭐 놀랄 말이라도 들었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입에 남은 케이크를 억지로 씹어 삼켰다. 오른쪽 뺨이 마치 살아있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태연한 척하기 위해서 모든 신경을 쏟아 부어야 했다.

“케, 케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허겁지겁 먹다가…….”

입에 들어온 게 케이크인지 스펀지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은 잘만 나불거렸다. 이건 생존본능이었다. 나는 어느새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데에 내 목숨까지 걸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이블라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들에게 돌아갔어야 했다. 나는 점점 더 겁을 먹고 있었다. 이미 늦은 후회지만 말이다.

“급하게 먹으면 큰일 나. 안 되겠다, 먹여줄게.”

할릭이 내 그릇을 휙 뺏어가더니 포크를 뺏어 들었다. 그러더니 케이크를 푹 찍어서 내게 들이밀며 한다는 소리가…….

“자, 아아앙.”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내가 쪽팔려서 싫어하는 짓만 골라 하고 있었다.

‘나는 로즈다. 나는 열 살짜리 로즈야…….’

자기최면을 걸며 병아리처럼 입을 벌렸다.

“아앙.”

“오구, 귀여워라. 착하기도 하지.”

포크가 입 안으로 쏙 들어왔다.

수치심에 귀는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시뻘게졌다. 이건 내가 막거나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로즈, 덥니? 얼굴이 붉어졌어.”

스노아가 차가운 손으로 내 뺨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나는 딸기 케이크 한 입, 주스 한 입 번갈아 받아먹으며 통통한 방울토마토가 되어가고 있었다.

“로즈, 상이 높진 않습니까?”

“예, 옙?”

첼러스가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왕자님의 얼굴로 사르르 웃었다.

“편하게 앉도록 도와줄 테니 이리 오세요.”

“아, 아뇨, 저기, 저는…….”

어린이용 의자가 따로 있지 않냐고 소리치려 했는데, 당황한 나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어버버 하는 사이 첼러스가 나를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등으로 그의 딱딱한 복근이 느껴지자 몸이 경직되었다.

“입에 크림이 묻었군요.”

하얀 손수건이 다가와 내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자, 다음엔 무얼 드시겠습니까?”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나는 상에 놓인 갖가지 디저트를 영혼이 빠져나간 눈으로 관찰하다가 입을 우물거렸다. 뭔가 대답을 해야 했다.

“저기, 그러니까 나는…….”

“예, 로즈?”

“나는 그러니까…….”

나는 로즈가 아니야. 카카나야.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그러나 혀끝까지 올라왔던 말들은 눈을 희번덕이는 용사들을 보자마자 도로 꿀꺽 삼켜졌다.

“말씀하세요, 로즈.”

“편하게 말해.”

“듣고 있어.”

“자, 어서.”

나는 부르르 떨었다. 단언컨대 이런 상황에 놓이면 간을 배 밖에 내놓고 다니는 사람이라도 겁을 먹을 것이다.

“그러니까, 마카롱이 좋다고요…….”

과거의 나를 죽이고 싶어졌다.

***

“로즈 말이야. 아무리 봐도 카카나 같지?”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건들건들 움직이던 아다르가 툭 얘기를 꺼냈다.

“카카나는 완전히 속아 넘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우리를 우습게 본 거지.”

그가 픽 웃었다.

“자기 남편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말투나 행동거지만 봐도 누군지 딱 보이는데. 아마 영혼만 뽑아놓고 누구냐고 물어봐도 알아맞힐걸?”

카카나가 들으면 초월자 전용 레이더라도 생긴 거냐고 분개할 말이었다. 할릭이 지친 얼굴로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벌써 일주일째야. 인내심 한계라고.”

“여기 있는 사람 중 한계가 아닌 사람이 어딨어? 물론 아닌 것 같은 사람도 있지만…….”

아다르가 슬쩍 아르모어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우리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는 걸 카카나도 알아차린 것 같아. 그래서 더 겁을 먹은 것 같더라고.”

할릭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문제였다. 어떻게든 살살 달래서 실토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카카나는 이미 세상 끝까지 겁을 먹어 버렸다.

그들의 속은 드글드글 끓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꿈 같은 결혼식을 치르고 달콤한 첫날밤을 보내기 전에 신부가 도망가버렸으니…….

아니,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카카나 없이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애초에 그녀에 의해 되살아난 목숨이고 삶이었다. 그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게 내가 성질 죽이라고 했잖아.”

할릭이 기어코 아다르에게 성을 냈다.

“네가 저번에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다 용서해주겠다고 구슬리는 바람에 이젠 머리카락 한 올 보기 힘들다고!”

아다르도 기다렸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그럼 그렇게라도 시도해야지 손가락만 빨고 있어? 수치심을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카카나는 벌써 적응해버렸다고!”

이제 그녀는 용사들이 찾아오면 넋부터 빼고 봤다. 아무 생각 없이 입을 벌려 음식을 받아먹고 용사들이 온 힘을 기울여 소꿉놀이해주면 영혼이 없는 눈으로 재밌다는 반응을 취했다. 아다르의 말대로 나름 열 살짜리 아이 몸에 적응을 끝낸 것이다.

용사들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다. 우리는 화나지 않았다, 돌아오면 평소처럼 대해주겠다는 표현을 돌려서 해보기도 했다.

물론 카카나는 새끼손톱만큼도 믿지 않았다. 그들이 카카나를 파악하는 동안 그녀도 용사들을 속속들이 알아버린 탓이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남편들이 짐승처럼 거칠어지기 전에 제일 부드러워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카카나의 걱정은 정확했다. 용사들은 일주일간 떨어져 있었던 여파로 상당한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달했다. 솔직히 돌아왔을 때 침착하게 대할 자신이 없었다.

“아르모어, 우리도 이제 다 아니까 그만 말해주는 게 어때요?”

스노아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로즈가 카카나 맞죠? 처음 만났을 때 로즈를 오래 껴안고 있었잖아요?”

“…….”

“그때 페로몬으로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요?”

“그러네! 수인족은 페로몬이 나오지!”

할릭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입을 떡하니 벌렸다. 아르모어가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내려놓으며 후, 연기를 뿜어냈다.

“그래. 카카나가 맞다.”

“빌어먹을 용 영감탱이 같으니!”

아다르가 악을 썼다.

“여태 그걸 알면서도 우리가 지랄하는 걸 구경만 했단 말이야!”

그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자 아르모어가 말없이 입꼬리만 올리며 쿡쿡 웃었다.

“진정하십시오. 아르모어가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가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넌 침착해서 좋겠다, 첼러스.”

“그렇게 보이십니까?”

아다르가 첼러스의 시린 하늘색 눈을 바라보았다.

“미안, 내가 실언했다.”

첼러스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대책을 논의하는 게 좋겠군요. 이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카카나가 로즈라고 시치미 뚝 떼면 방법이 없잖아. 진짜 로즈도 이블라가 꽁꽁 숨긴 것 같고. 방법이 있긴 해?”

아다르가 상당히 부정적으로 대꾸하자 할릭이 제안했다.

“약초로 유인하는 건 어때?”

“이제 우리 도움 없이도 희귀한 약초 구할 수 있잖아. 망할 치료사 협회인지 뭔지, 카카나 발가락이라도 핥을 기세라고.”

“그렇다고 카카나가 아끼는 약초를 인질 삼아 위협하는 건 제가 바라는 방법이 아닙니다.”

첼러스가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강제적이지 않은 방법이 필요합니다.”

잠자코 대화를 듣던 아르모어가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카카나가 수인족이라는 걸 또 잊은 것 같군.”

스노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르모어가 늘쩍지근하게 미소 지으며 소파에 허리를 묻었다. 여기서 여유로운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페로몬을 계속 뿜으면 견디지 못하고 자백할 거다.”

순간 아다르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까먹고 아르모어의 미소를 보며 저건 진정 악마의 미소라고 생각했다.

“페로몬은 다양한 방법으로 쓰이지. 이성 수인족을 유혹할 때 쓰이기도 하고, 상대를 제압하거나 압박감을 줄 때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강제적이지 않은 방법을 찾는다면 그녀가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걸 택해야지.”

아르모어의 말이 백번 옳아서 그들은 잠시 말을 잃고 침묵했다.

“하지만 이미 카카나는 약속을 깨고 도망쳤잖아.”

할릭이 억울함을 토로했다.

“도망친 이유는 짐작이 가지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말했다면 들어줬을 거야. 대화로 풀 수 있었다고. 나는 우리가 많이 참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 또한 맞다.

아다르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에게 여유 따윈 사라지고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아다르가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선포했다.

“잡으러 가자.”

“지금요?”

스노아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지금. 당장. 어차피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잖아. 시간만 끌어봤자 무슨 소용인데?”

***

카카나는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다 말고 노크 소리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이블라였다.

“무슨 일이야?”

“찾아왔어.”

“누구?”

“네 남편들.”

그녀는 읽고 있던 약초 책을 거의 집어던지다시피 하며 침대 밑에 쑤셔 넣었다.

“이 시간에? 너무 늦었다고 돌아가게 하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블라는 한숨을 쉬었다. 카카나를 좋아하는 그녀로선 최근 일주일이 좀 피곤하긴 해도 퍽 즐거웠기에 더욱 아쉬운 탓이다.

‘초월자로 각성한 후로 좀처럼 놀 시간이 없었지.’

하지만 근래엔 정말이지 원 없이 놀았다. 비록 친구가 어린 동생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몸이 작아졌을 뿐이지 우정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즐거운 시간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블라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용사들이 모든 사실을 알고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 작정하고 온 것 같더라.”

카카나도 내심 오래 버텼다고 생각했다. 다섯 남자를 상대로 일주일이면 길게 버틴 거다. 그렇게 위로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몸은 자연히 다음 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너 뭐 해?”

“도망가.”

“농담이지?”

“나 뒷문으로 나가게 시간만 좀 끌어주라.”

“야, 야!”

카카나는 단출한 짐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후다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마나를 느끼는 초월자를 상대로 무슨 도망이야, 카카나.’

이블라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섰다. 아무래도 궁지에 몰린 제 친구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지. 다시는, 절대 다시는! 용사들 상대로 도망치지 말아야지!

수십 번 곱씹으며 나는 숨이 넘어가도록 뛰었다.

‘아니 왜 하필이면 밤에!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있을 때 오냐고!’

하다못해 시뮬레이션 돌릴 시간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용사들이 아침 해가 밝으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뭐라고 할지 대사는 다 짜놨다는 것이다. 발을 재게 놀리며 외웠던 것을 빠르게 되짚어 보았다.

그동안 도망쳐서 미안해. 처음에는 그다지 깊이 생각하고 한 짓이 아니었어. 그냥 어쩌다 보니 텔레포트 하게 된 거야. 그런데 한번 도망치기 시작하니까 너무 무서워지더라고. 너희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고 내가 잘못한 걸 알아서 더 용기가 안 났어…….

그러나 그 길고 긴 변명과 사과의 말소리는, 코앞에서 아다르를 마주하자마자 증발해버렸다. 대신 내 입을 찢고 튀어나간 건 비명이었다.

“꺄아아아아악!”

오밤중에, 그것도 음침한 골목길 사이를 쥐새끼처럼 누비고 있는데, 코앞에 전신이 시커먼 저승사자가 나타났다. 그것도 분노와 기대, 흥분, 집착이 끈적하게 눌어붙은 눈을 하고서.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어딜 그렇게 가, 카카나?”

이제 날 로즈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아다르가 발발 떨고 있는 내 허리에 팔을 감아 안아올렸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지만, 왠지 ‘좋은 말로 할 때’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며 약을 먹었다.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지듯 감춰졌던 마나의 소용돌이가 폭발적으로 주위를 휘감았다. 몸이 서서히 커지며 붉은 색상이 빠지고 본래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다르는 완연한 성인이 된 내 몸을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놓아달라며 버둥거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다르가 나무토막처럼 굳은 나를 땅에 내려줬다.

“카카나.”

뒤에서 스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들은 기분이었다. 나는 끔찍한 기분으로 뒤돌아섰다. 첼러스, 스노아, 아르모어, 할릭이 각자 의미심장한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노아는 팔짱을 끼고 있었으며 할릭은 한쪽 눈썹을 위로 추켜세우고 있었다. 첼러스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있었다. 저기서 평소와 같은 건 오직 아르모어뿐이었다.

나는 뒷걸음질 치다가 아다르의 몸에 등을 부딪치고 바짝 얼었다. 귓가로 뜨거운 숨이 내려앉았다.

“왜? 또 도망치려고?”

나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그러모은 채 소리쳤다.

“자, 잘못했어!”

살려줘.

“사과할 짓을 왜 해?”

아다르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보통 금방 용서해주는데, 이번엔 화가 단단히 난 게 틀림없었다. 지금 보니 눈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었네.’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었던 건 처음이었다. 내 감으로 유추해보건대, 저 팔짱은 이성을 잃고 날 더듬으려는 손짓을 봉인한 행위에 가까웠다.

‘일단 진정부터 시켜야겠어.’

“정말 미안해. 막상 첫날밤이 되니까 너무 긴장되고 그래서…….”

“왜 그렇게 겁을 먹어? 우리가 널 씹어 먹기라도 한대?”

솔직히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죄인이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보라. 그들은 지금도 날 한입에 꿀떡 삼켜버릴 것처럼 열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다르도 제가 말해놓고 찔끔했는지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일단, 퀄리티미엄으로 돌아갈까요?”

가끔 스노아가 대마법사라는 게 불만스러울 때가 있었다. 가령 지금처럼 순식간에 퀄리티미엄의 집으로 돌아올 때라든가.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돌아와 버린 현실에 약간 허무함을 느꼈다. 심지어 방도 초야를 치를 예정이었던 그 야하고 호화찬란한 방이었다. 용사들에게 사과할 생각만 잔뜩이었던 나는 설마 못 나갔던 진도를 오늘 빼는 건가 싶어서 당황했다.

“아, 아니지?”

대뜸 그렇게 묻자 아다르가 씩 웃었다. 많이 봐온, 그만의 성격 나쁜 미소다.

“약속을 어긴 대가는 치러야지, 카카나.”

오늘따라 선정적으로 붉은 입술이 상당히 그다운 말을 내뱉었다. 대가 운운하고 있는 걸 보니 코앞에 악마라도 강림한 것 같았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다르가 그런 내 입술을 대신 적셔주고 싶은 것처럼 자신의 아랫입술을 야살스럽게 핥았다. 금세 눈앞이 그렁그렁해졌다.

“자, 잘못했어.”

“말로만?”

할릭이 내 귓바퀴를 질근, 씹으며 달라붙었다. 이대론 안 된다.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우, 우리 대화 좀 해.”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줄 알았는데, 그들은 의외로 순순히 떨어졌다.

나는 진정하기 위해 테이블 근처로 걸어가 앉았다. 오늘 돌아올 거라고 미리 말을 해 두었는지 테이블에 과일주와 마른안주가 놓여 있었다.

망설임 없이 술을 들이켜려 했으나, 첼러스가 병을 뺏어갔다.

“첼러스?”

“대화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건 맞는데, 맨정신으로 말하긴 좀…….”

대담하게 행동하는 첼러스를 몇 번 봐온 탓인지, 나는 그가 제법 고지식한 면이 있다는 걸 가끔 까먹었다.

첼러스가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기 괴로운 이야기가 있더라도, 술에 의지하는 버릇은 들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하, 하지만…….”

“저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술의 힘을 빌리실 겁니까?”

그는 오늘 하루만이라면 봐줄 의향이 있어 보였지만, 나는 다음에 또 술을 마실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이런 주제로 진지한 대화를 할 때마다 술에 취해서 말할 순 없었다.

나는 억지로 의자에 앉았다. 방은 무척 컸고, 테이블과 의자도 용사들과 둘러앉을 만한 자리가 있었다. 새삼 시야를 꽉 채우는 다섯 남자를 보고 있노라니 기가 막혔다.

저들과 동침하려고 했다니. 미친 거야.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너희 모두와 초야를 치르는 건 무리야.”

“어떤 점이 싫은지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좋겠어요. 카카나는 초월자가 돼서 이제 체력이 부족하진 않으니까요.”

스노아가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나는 성관계에 대해 이토록 이성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을 늘어놓아야 한다는 게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부부에겐 꼭 필요한 대화였다.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었다. 당연한 거고, 필요한 거였다.

그런데 얼굴은 왜 내 의지를 안 따르고 붉어지는지.

나는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으려고 노력했다.

“너희가 아프게 하거나 싫은 건 아닌데…….”

“아닌데?”

“솔직히 너무 좋아서 힘들어.”

그들의 얼굴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너무…… 추상적인 표현입니다, 카카나.”

오묘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던 첼러스가 진중하게 되물었다.

젠장,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낯부끄럽기 짝이 없었으나 이대로 얼렁뚱땅 넘어갈 순 없었다. 지금 넘어가더라도 나중에 또 같은 문제로 대화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적당히’를 몰라.”

나는 질끈 감고 소리쳤다.

“조, 좋은 것도 적당해야 감당이 되잖아. 그런데 너희는 내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그만하라고 소리쳐도 더 몰아붙이잖아.”

“……즐거워하는 줄 알았는데, 괴롭게 하고 말았군요.”

스노아가 처연한 눈을 했다. 나는 대번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니까 좋긴 한데! 만족스럽긴 해!”

“그건 다행이네요.”

“하지만, 그러니까, 어? 나는 뭐랄까…….”

‘젠장,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날이 그다지 덥지도 않은데 땀이 뻘뻘 났다. 어떻게든 말을 쥐어짜냈다.

“나는 나른하게 기분 좋은 정도가 좋아. 하고 나면 단잠을 잘 수 있을, 딱 그 정도. 하지만 너희랑 하고 나면 난 거의 기절해버린단 말이야.”

한번 말문을 트자 그간 쌓여있던 설움이 왈칵 쏟아졌다.

“너희는 너, 너무 짐승 같아!”

“……!”

“완전히 고삐 풀린 종마들 같다고!”

‘말이 너무 심했나?’

하지만 이미 쏟아진 말이다.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시작한 말이라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이성이라곤 조금도 없고! 완전히 본능에 몸을 맡겨서! 너무 흥분해서 내 살을 씹어 먹는 건 아닐까 가끔 걱정도 해!”

“!”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말이야! 너희가 주는 자극은 너무 버, 버거워서 눈을 까뒤집을 것 같단 말이야. 나까지 머릿속이 하얘져서 추, 추해질까 봐 걱정된다고!”

“카카나, 당신은 절대 추하지…….”

“물론 너희 눈엔 그렇겠지!”

나는 첼러스에게 눈을 부라리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내가 싫다고! 죽을 것같이 좋은 건 별로야!”

한 명 한 명이 전부 그런 식으로 날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그런데 뭐? 다 같이 꽃이불 덮자고?

“그런 걸 동시에 감당하라니 못 해! 안 해! 헉헉…….”

버럭 소리치고 나니 온 기운이 빠졌다.

나는 팽팽하게 늘어난 뒤 맥이 풀려 흐물흐물해진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할 말은 다 했으니 마음 같아선 이제 방에서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일방적인 통보로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초췌한 낯으로 마른안주를 씹었다. 바짝 말린 과일이 새콤달콤해서 기운이 조금 났다.

“서로의 부드러운 온기를 느끼고 따뜻한 사랑을 하는 느낌이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첼러스가 제대로 짚었다.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래! 짐승처럼 마구, 거칠게, 그런 거 말고!”

“당장 몇 번은 네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가능할지도 몰라.”

아다르가 답지 않게 진지한 눈으로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거친 걸 좋아해서, 그런 거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할 거야. 계속 불만이 쌓일 거고, 이런 건 언제든 문제가 되고 말겠지.”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아다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누가 제일 거칠게 하는데?”

“너.”

나는 망설임 없이 아다르를 지목했다. 그가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가, 다리를 꼬며 발을 까딱거렸다.

“흠……. 예상외인데. 할릭은?”

“나도 거친 걸 선호하긴 하는데…….”

할릭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알다시피 난 그렇게 몰아붙이면 안 될 것 같아서.”

할릭은 나랑 덩치 차이가 제일 많이 났다. 그의 거대한 바위 골렘 같은 몸 아래에 깔리면 복상사하는 건 먼 이야기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행히 할릭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도 만만치 않게 몰아붙이는 스타일이었으나 다섯 남자 중에서 제일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나는 절대 그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다르가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나와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납득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는 카카나가 좋아하는 것이 좋습니다.”

첼러스가 별다른 고민 없이 내게 전부 맞춰주겠노라 선언했다.

“신중하게 생각해, 첼러스. 다 맞춰준다고 카카나를 위한 일이 아니야.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테니까, 나중에 뒤탈이 없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아닙니다, 저는 정말 괜찮을 겁니다.”

아다르의 조언에 첼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정신적인 만족이 제일 중요합니다. 본디 육욕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습니다. 카카나가 가장 기뻐하는 방식이 저를 가장 만족시키는 방식일 겁니다.”

“무슨 수절한 신의 종도 아니고…….”

하여튼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결한 새끼라며 아다르가 괜히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첼러스를 질투하는 것 같았다.

나도 약간 놀랐기 때문에 아다르의 심정을 이해했다. 첼러스는 동화나 꿈으로만 접할 수 있는 신비의 종족처럼 말하고 있었다.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엔 없을 것 같은 말이 아닌가.

“아, 아무튼 첼러스는 그럼 해결된 거네.”

“그렇습니다.”

“그럼 이젠…….”

우연히 스노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는지 스노아가 조심스럽게 항의했다.

“저는 거친 편이 아니지 않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는 거칠지 않지. 하지만 지나치게 집요해.”

“어떤 점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가 울음을 터트릴 때까지 애태우잖아.”

잠시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저는 직접적인 관계보다, 카카나를 예뻐해 주는 것이 훨씬 만족스럽고 좋은걸요.”

스노아가 처량하게 말했다.

나는 골치가 아파서 잠시 관자놀이를 짚었다. 하긴 사람이 여섯인데 각자 취향이 똑같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기는 하는데, 한편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편이 많거나 부인이 많은 사람은 모두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걸까?

‘저번에 들어보니 반려가 열 명이나 되는 사람도 있다고 했었는데…….’

그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해결했을까? 이렇게 일일이 맞춰나갔을까? 아니면 열 명이 한 사람에게 헌신하는 형태였을까?

‘하지만 나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관계는 싫어.’

이상적인 말이긴 했지만, 다 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방법을 모색하고 싶었다. 하다못해 배려라도 주고받고 싶었다.

“일단 스노아의 의견은 알겠어. 방법은 나중에 생각해 보고, 이번엔 아르모어의 의견을…….”

나는 말하다 말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상당히 노련한 탓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버거울 정도로 몰아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내 상황이나 체력을 살펴서 적당히 물러날 때도 있었다. 들쑥날쑥해서 영 아리송했다.

‘설마 이럴 때를 대비해서 일부러 그랬나?’

섬뜩한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그렇지 않을 거라고 자위했다. 아르모어의 성격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지만, 순순히 납득하기엔 너무 오싹한 일이지 않은가.

아르모어가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는 요망한 얼굴이었다.

‘젠장, 그렇게 웃지 마요.’

소름이 돋는 걸 막을 수가 없어서 팔뚝을 손바닥으로 삭삭 문질렀다.

“아, 아르모어는 큼! 크흠! 문제가 없네요…….”

“그거 다행이군.”

아르모어가 여유롭게 고개를 까딱였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태도로.

‘아, 진짜 무섭다.’

아르모어한테는 절대 개기지 말아야겠다는 새삼스러운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나머지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견을 조율할 때였다.

“일단 아다르, 내가 멈춰 달라고 할 때 멈춰주면 좋겠어.”

“너는 조금만 못 견디겠어도 그만하라거나 싫다고 하잖아. 몸으로는 그렇게 좋…….”

“직접적인!”

나는 악을 쓰며 그의 말을 잘랐다.

“직접적인 표현은! 삼가면 좋겠는데.”

“그래, 그럼…… 네 말대로 진짜 멈추면 애타는 눈으로 쳐다보잖아.”

“큼! 커흠!”

“나로선 구분할 방법이 없다고.”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제안했다.

“그러면 신호를 정하는 건 어때? 내가 양이라고 외치면 그만두는 거야. 그럴 때는 억지로 더 기분 좋게 만든다거나 하면서 유도하면 안 돼!”

아다르가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문제도 같은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을까요?”

스노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제 문제도, 할릭의 문제도 비슷하니까요.”

“그러네.”

할릭이 밝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이렇게 쉽게 해결된다고?’

나는 약간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그들과 한바탕 술래잡기를 한 후라 몹시 피로했다. 그만 쉬고 싶었다.

“그럼 일단 이 주제는 끝!”

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아서 딱 못을 박았다.

“잠깐만.”

아다르가 인상을 구겼다. 워낙 눈썹이 진하고 사나운 인상이라 나는 조금 쪼그라들었다.

“왜, 왜 그래?”

“약속은? 그냥 아예 없었던 일이 되는 거야?”

“약속?”

“꽃이불 말이야. 기대 많이 했는데…….”

아다르는 놀랍게도 상당히 시무룩해졌다.

나는 난감하게 눈을 굴렸다. 별문제 없겠지, 안일하게 생각하며 ‘그래.’라고 외쳤던 과거의 조동아리를 때리고 싶었다.

“이, 일단 지금은 무리야. 좀 익숙해지고 서로서로 규칙에 잘 적응한다 싶을 때쯤 고려해보는 건…….”

“언젠가는 하는 거야?”

‘이번에도 말을 잘못한 것 같은데.’

아다르의 번뜩이는 눈에서 불길함을 읽은 나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영원히 안 할 수도 있고…….”

“네가 싫으면 안 하는 게 맞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다르의 목소리엔 기운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가 실망한 낯이었다.

대체 이 남자들은 초야에 무슨 짓을 벌이려고 했던 걸까? 어떤 상상을 했기에 이렇게 실망을 감추지 못해서 서글픈 눈을 하냐 이 말이다.

그들에게 마음이 많이 약해진 터라, 저 낙담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안 좋아졌다.

“우리에겐 시간이 많잖아.”

나는 어쭙잖게 위로를 시도했다.

“앞으로 영원의 시간이 남았는데, 미래에 언젠가 한 번은 하지 않겠어?”

아다르는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들의 약속은 잘 지켜지는 듯했다.

물론 남편이 절륜하고 그걸 받아내는 이가 나 한 명뿐이라는 문제엔 변함이 없었지만, 나름 견딜 만했다. 하지만 이엔 대단한 착각이 하나 존재했는데, 견디고 있는 게 나 혼자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때는 해상 무역의 나라, 트리포아 왕국에서 나태한 휴양 생활을 보낼 때였다.

나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한적한 해변의 모래사장에 드러누워 있었다. 모래는 산호가 섞여 눈가루처럼 희었으며 바다는 에메랄드빛이었다. 속이 비치는 보석처럼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투명한 바다였다. 고개를 숙여 안을 들여다보면 파란 줄무늬 물고기와 분홍색 물고기가 어지러이 섞인 물감처럼 떼를 지어 헤엄치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왜 귀족들이 이곳으로 관광 오지 못해 안달인지 알겠네.’

나는 느른하게 무거워진 눈꺼풀을 느끼며 생각했다.

심지어 트리포아는 섬나라여서 사방이 바다였고, 독자적인 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진귀한 해상 물품, 달마다 있는 축제, 열정적이고 독특한 사람들, 드넓게 펼쳐진 해수면. 어딜 가든 눈이 즐거운 요즘이었다.

“카카나.”

“응…….”

나는 꿈속을 헤매며 대꾸했다. 단단한 팔뚝이 등허리를 파고들어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잠드신 겁니까.”

부드럽고 신중한 미성이 노래처럼 귀로 흘러들었다. 나는 혼몽한 눈을 떴다. 첼러스가 석양이 지는 오렌지빛 하늘을 등지고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금발이 불꽃 같은 햇살을 받아 화사하게 반짝거렸다.

밤의 별이 하얗고 시리다면, 오후의 별은 석양이 비친 첼러스의 금발처럼 화사하고 따뜻하지 않을까? 멍하니 생각하며 철썩이는 바다의 소리를 들었다.

쪽. 쪽. 쪽. 쪽. 뜨끈한 입술이 얼굴 구석구석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내가 어깨를 움켜쥐자 첼러스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그의 흥분한 입김이 목 아래쪽으로 요요히 흩어졌다. 나는 가볍게 몸을 떨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첼러스…….”

“예, 카카나.”

“할, 큼. 할릭은?”

“그는 아직 왕궁에 있습니다.”

“아직도?”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겁니다.”

트리포아는 할릭의 고향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피부가 구릿빛이었는데, 할릭 또한 트리포아 출신이어서 피부색이 어두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크라켄 따위 잡지 않았을 거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른한 웃음을 터트렸다.

“최초의 신화급 용병이니까 그런가 보네. 내가 왕이었으면 할릭을 단상에 세우고 귀족을 다 불러서, 이 사람이 바로 할릭 갈로프사라고 떵떵 소리쳤을 거야.”

첼러스가 묘한 얼굴을 했다.

“지금 거의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긴 합니다.”

“정말이야?”

나는 정신이 깨는 걸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트리포아에 오지 않는 건데.”

“괜찮습니다, 카카나. 견디기 힘들면 그는 진작 뛰쳐나왔을 겁니다. 우리에겐 그런 힘이 있지 않습니까.”

그의 부드러운 위로에 힘이 들어갔던 미간이 풀어졌다.

‘맞아. 우리에겐 돈도, 명예도, 권력도, 힘도, 시간도 있지.’

사실상 모든 걸 다 가졌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하지만 이런 혜택을 누릴 때마다, 우리의 어깨 위에 앉아있는 책임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초월자는 중간계를 인간의 손으로 지키기 위해서 태어나는 존재들이었다.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후의 일일지 알 수 없으나 언젠간 또 마수를 뻗쳐오는 세력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기 전까지 푹 쉬어둬야지.’

나는 다시 힘을 쭉 뺐다.

“방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이제 밤이라 날이 추워질 겁니다.”

“아직 따뜻한데…….”

“그만 자고 식사해야지.”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아다르가 뒤에서 나타나 내 뒤통수와 양갈래 머리에 붙은 모래를 탈탈 털어주고 있었다.

“밥 귀신! 식사 귀신!”

나는 유치하게 악을 썼다.

아다르의 독촉이 오죽 넌덜머리나면 이러겠는가. 그는 날 먹이는 데 집착하는 병을 아직도 고치지 못했다. 아침에 늦잠을 자본 적이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가 아침을 먹으라며 깨우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한두 번은 걸러도 괜찮단 말이야!”

“초월자가 아무리 영원을 산다지만, 몸은 망가질 수 있어. 망가진 우리를 치료한 게 너였잖아.”

그의 잔소리가 또 시작되었다.

“잔소리 아다르! 시끄러운 아다르!”

“너는 생존 본능이 있긴 한가 싶을 만큼 먹는 거에 관심이 없어. 내가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도 먹기 싫어하는데 오죽하겠어? 버릇될 때까지 이렇게 할 거야.”

“버릇이라고?”

“내가 독촉하지 않아도 네가 알아서 먹을 걸 보챌 때까지 이럴 거라고.”

나는 하얗게 질렸다.

“내가 그렇게 되는 일은 없을 거야.”

“글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시간은 많으니까.

이어진 뒷말을 듣고 혈압이 오를 찰나 아다르가 나를 번쩍 안아서 귓가에 상냥하게 뽀뽀했다. 토라진 마음이 바보처럼 풀어졌다. 사랑에 빠지면 호구가 된다더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술에도.”

“어디. 여기에?”

아다르가 내 왼쪽 입꼬리 부분에 쪽 입을 맞췄다.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 애매한 뽀뽀는 뭔가 싶어서였다.

“아니면 여기?”

이번엔 오른쪽 입꼬리에 쪽 뽀뽀한다.

“여기도 해줘야겠네.”

그가 윗입술 아랫입술을 차례로 뽀뽀하더니, 이번엔 전체를 부드럽게 포갰다. 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부들부들 풀어졌다.

내 입술이 헤, 벌어지자 뜨끈한 것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입술 안쪽만 살짝 빨아들이면서 거침없이 걸어갔다. 앞도 보지 않고 어떻게 걸어가는지 모르겠다.

‘육체를 극단까지 단련해서 초월자가 된 경우랑 나는 다르니까.’

알고는 있지만 퍽 아쉬웠다. 그들의 신체적 능력이 편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도 비슷한 효능을 내는 약물을 개발해 볼까?’

생각하는 사이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트리포아의 왕족이 특별한 날에만 사용한다는 건물을 통째로 빌린지라, 내부는 몹시 호화로웠다.

해변이 잘 보이도록 바닷가 쪽 한 면을 탁 터놓았다. 거대한 유리창은 어찌나 깨끗한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시야가 맑았다. 안쪽은 푸른색과 흰색이 적절히 섞인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밝은 색상인 탓에 산뜻하고 여유로운 휴양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아다르가 정성껏 요리한 음식의 냄새를 맡았다. 제철 채소와 토마토소스, 바질, 파슬리, 후추를 넣고 오븐에 구운 요리였다.

“빵에 곁들여 먹는 거야.”

아다르가 바게트를 먹기 좋게 잘라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먹음직스럽게 잘린 야채와 소스를 빵에 얹어 먹었다. 따뜻한 토마토소스가 스며들어 적당히 눅눅해진 빵, 그리고 향긋한 야채가 환상적인 풍미를 자랑했다.

“맛있어.”

“먹길 잘했지?”

“응.”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게 눈 감추듯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나와 달리 우아하게 식사하던 아르모어가 간간이 냅킨으로 내 입가를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내가 쑥스러워하자 곧 그만두었다. 역시 아르모어는 눈치가 빨랐다.

그릇을 거의 다 비우고 빵빵한 배를 두드릴 때쯤, 할릭이 돌아왔다. 그는 어째선지 눈이 조금 충혈되어 있었다.

“할릭! 잘 하고…… 왔어……?”

나는 뒤로 갈수록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상태가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사흘 만에 이곳으로 돌아온 탓에 나는 퍽 반가웠지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카카나.”

할릭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더니 나를 단숨에 안아서 입가를 핥았다.

“음.”

내 부드러운 입술과 빵 부스러기 등을 개처럼 샅샅이 핥은 할릭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맛있네. 토마토소스 뭐로 만든 거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의 단단한 어깨를 주먹으로 팡팡 때렸다.

“미쳤나 봐, 진짜……!”

“아, 좋아. 카카나 냄새.”

할릭이 내 당황한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불끈 쥔 내 주먹이 솜방망이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살 것 같아.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그의 숨에서 불이 붙을 것처럼 도수 높은 보드카의 냄새가 났다.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할릭. 술 마셨어?”

“아니. 식사만 하고 바로 나왔어.”

“근데 왜 이렇게 술 냄새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할릭은 착실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의 널찍한 방이었다.

“어디 가나요?”

할릭을 불러 세운 건 스노아였다.

“내 방에.”

“왜요?”

“하러.”

그리고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건 나였다.

“뭐?”

“할 거야.”

할릭의 목소리가 어찌나 단호한지, 바위도 뚫을 것 같았다. 그러자 다 먹고 남은 음식과 식기를 치우던 아다르가 팩, 고개를 돌렸다.

“뭐? 안 돼. 오늘은 나랑 하는 날이라고!”

‘제발 큰 소리로 항의하지 마!’

나는 창피하고 민망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런데 나를 꼭 껴안은 할릭의 숨이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의아하게 손가락을 벌리며 할릭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상당한 분노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다르를 향해 살기라도 뿜을 기세여서 깜짝 놀랐다. 아무리 못마땅해도 그들은 웬만하면 서로에게 살기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크게 싸울 징조였다.

할릭이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위협하듯 입을 벌렸다.

“나는 사흘을 왕궁에 붙잡혀 있었고, 그동안 카카나와 함께하지 못했어. 양보해.”

“내 코가 석 자인데 양보를 왜 해?”

아다르가 지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그걸 날름 뺏어가겠다는 거야?”

“넌 저번에도 했잖아!”

“그건 벌써 이 주 전이야!”

“나는 두 달을 카카나와 못 했어!”

“네가 운이 없는 걸 왜 내 탓을 하는데?”

할릭이 나를 내려놨다.

화가 나는 와중에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나는 더 걱정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양손이 자유로워진 할릭이 그대로 아다르에게 주먹을 날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까이 맞붙은 둘이 눈을 부라리며 뭐라 언성을 높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갑자기 돌변한 흐름을 따라잡기 힘들어서 멍하니 서 있었다. 느지막한 오후의 해변에서 선잠에 빠졌다가 여유로운 식사를 마친 직후 아니었는가.

“제기랄.”

할릭이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육탄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이 험악했다.

나는 할릭의 눈가에 핏발이 서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욕구불만에 오랫동안 시달린 사람 특유의 성마른 느낌이 표정에 만연해있었다.

‘할릭이랑 두 달이나 안 했던가?’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것도 너무 잦은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수인족은 발정기가 아니면 성욕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때가 되면, 상황이 되면, 혹은 뜬금없이도 성욕이 들끓는 게 평범한 인간이었다.

‘게다가 얘네는 절륜하잖아.’

나는 머리를 짚었다.

‘나는 매주 하고 있어서 잦다고 생각했지만, 용사들은 아니야. 생각을 못 했어.’

그마저도 내가 거절하면 용사들은 깔끔하게 물러났다. 나를 배려해서였겠지만 속이 어지간히 끓었을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언젠가 터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스노아가 한숨을 내쉬며 정적을 깼다.

“남편이 다섯 명이니까요. 피할 수 없는 문제죠.”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요일에, 며칠에, 누구와 한다고 약속할 수도 없잖아.”

나는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사랑을 나누는 게 의무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게 되면 일 같아서 점점 싫어질 거야.”

“저도 동의해요.”

“분위기를 타다가, 어쩌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게 관계인데…….”

나는 머리가 아파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괜찮아?”

할릭이 죄책감이 인 얼굴로 내 등을 쓸었다.

“미안해. 내가 요즘 예민해져서. 괜히 소란을 피웠어.”

“아냐. 이건 우리가 얘기를 나눠야 하는 문제 같아.”

저번의 의견 조율로 깔끔하게 해결된 것 같았지만 삶이 그렇게 단순할 리 없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씹었다.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나는 지진이 일어나는 눈으로 할릭과 아다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젠장할. 왜 하필이면 첫 시도가 이 둘인 거야?’

둘 다 거친 걸 선호하는 성격이었다.

솔직히 망설여졌지만 고통받는 남편들을 마냥 손 놓고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 해결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할릭처럼 두 달간 수절하게 된다면 나라도 괴로울 것 같았다. 어느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들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더욱.

도구라도 사서 버텨보라고 하기엔 한 명 한 명이 소중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굳은 결심을 했다.

“둘 다 이리 와.”

할릭과 아다르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손짓했다. 그러자 아다르가 검은색 민무늬 앞치마를 벗고 내게 걸어왔다.

할릭은 제 옆에서 걸어오는 아다르가 거슬리는 눈치였으나,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스트레스 받을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착하다니까.’

나도 모르게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하면서 왼손엔 아다르, 오른손엔 할릭의 손을 잡았다.

“자, 내 방으로 가자.”

아다르와 할릭이 어리벙벙한 얼굴로 내게 질질 끌려왔다. 그런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아르모어가 갑자기 다가와서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어줬다.

“뭐예요?”

“윤활제.”

나는 얼굴을 확 붉혔다. 내가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눈치만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첼러스와 스노아도 뒤늦게 뭔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아르모어가 조금 걱정되는 낯으로 내 이마에 입술을 비볐다.

“흥분제도 가미되었으니 도움이 될 거다.”

“이, 이이, 이런 걸 왜 가지고 있어요?”

“음.”

아르모어가 노곤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트리포아엔 다양한 부부용품을 팔더군.”

“세상에…….”

“다음엔 함께 가보는 게 좋겠군. 자주 들를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주머니를 쳐다보았다.

“가, 같이 하게?”

할릭이 덜덜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오랜만의 관계에 들뜨는지 손까지 떨고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눈엔 걱정이 가득했다. 그가 선명한 주황색 눈망울을 깜박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카카나. 억지로 그러지 마. 여태 거부해 왔잖아.”

“그럼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는 순서를 쭉 기다릴 작정이야?”

그러자 할릭의 얼굴이 한층 더 핼쑥해졌다.

“기분만 좋으면 장땡이지. 우리 ‘양’으로 신호도 정했잖아. 서로 배려하면서 보완해 가는 게 부부관계야.”

내가 말했지만 퍽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나 곧 발정기인 것 같거든. 그땐 다 같이 해보자. 이건 그 연습이야.”

이번엔 스노아와 첼러스마저 깜짝 놀란 눈을 했다.

“가자! 내 방으로!”

지나치게 비장하게 말한 것 같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저번에 다 털어놓으며 대화를 나눈 이후로, 그들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따라주었다. 물론 가끔 자제가 안 될 때도 있었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내 말을 들으려고 낑낑대는 걸 보면 퍽 귀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비록 몸은 힘들지라도.

‘피하기만 하면 안 돼. 대화를 나누고 이것저것 시도해 봐야 해.’

그들은 나를 강제하지 않는다. 이건 용사들이 지금까지 내게 보였던 순수한 노력과 성의가 견고하게 쌓아올린 신용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내 뒤에 앉은 할릭이 귓바퀴를 깨물며 물었다. 나는 조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선 아다르가 천천히 옷을 벗기고 있었다. 야릇하게 빛나는 검은 눈이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그림자처럼 짙어져 있었다.

“긴장을 많이 했네.”

아다르가 그답지 않게 상냥한 어조로 속삭였다.

“둘이 하는 건 처음이라 무서워?”

“무, 무섭긴. 아무렇지도 않아.”

“몸은 이렇게 뻣뻣한데, 허세 부리긴.”

“윽.”

나는 목을 움츠렸다.

“자……. 그럼.”

아다르가 입맛을 다시듯 제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긴장을 푸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기나긴 밤의 시작이었다.

***

“으…….”

나는 낮게 신음했다. 누가 계속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정신이 조금 들자 크고 뜨거운 손이 허벅지와 다리를 마사지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억지로 잠에서 깬 탓에 짜증이 났었는데, 기분 좋은 자극 덕분에 조금 누그러들었다.

“목 아프지?”

아다르가 내게 조심스레 물을 먹여주었다. 따끔거리고 부은 목구멍에 따스한 물이 들어가자 조금 살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눈을 떴다. 아다르가 보슬보슬한 내 머리를 손수 땋아주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니 할릭은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의 안마 실력은 여전히 뛰어났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할릭의 시원한 자극에 눌려서 그다지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몸은 어때?”

“밑이 조금 쓰라려…….”

나는 팍 쉰 음성으로 속삭였다.

“윤활제를 빨리 썼어야 했는데, 미안해. 다음엔 이런 실수 없을 거야. 혹시 관계 도중에 아프진 않았어?”

“으응. 아니야. 너희가 워낙 조심하니까…….”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탓에 말끝이 흐려졌다. 아다르가 눈가에 쪽쪽 뽀뽀했다.

“으. 근데 둘이 뭐 하고 있는 거야?”

“네가 자면서 끙끙 앓길래.”

할릭이 붉은 울혈 자국이 남은 내 목덜미를 흘끗 살피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도 중간에 풀어졌었잖아.”

아, 맞아. 그래서 심하게 엉켰더랬다.

“스노아가 청결마법을 걸어줘서 아다르가 땋았어.”

“지금 몇 시야?”

“10시.”

이 시간까지 자게 내버려 두다니, 밥 귀신 아다르가 인간 다 됐군.

“그럼 해변이 환하게 잘 보이겠다.”

“응. 내려갈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다.

다행히 할릭이 안전하게 받아서 부축해주었다. 무릎에 힘이 전혀 안 들어갔다.

‘아무래도 약을 먹어야겠다.’

역시 할릭이랑 아다르를 붙여놓는 건 옳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음엔 첼러스를 섞거나, 스노아를 섞거나 해야 할 것 같았다.

거실엔 나머지 용사들이 이미 나와 있었다. 그들은 내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차려놓고, 외출하기에 편한 옷이나 모자 같은 걸 이미 준비해놓고 있었다.

“오늘은 이 옷이 어때요, 카카나? 편해 보이지 않나요?”

스노아가 하얀 원피스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

“매번 궁금했는데 시종이 하는 일을 왜 나서서 하는 거야?”

“이건 저희의 소소한 기쁨 중 하나니까요.”

스노아가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퍽 오랜만에 과분한 사랑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첼러스가 울어서 부어버린 내 눈가에 차가운 수건을 대어주며 굿모닝 키스를 해왔다.

“몸은 괜찮습니까?”

“응. 그럭저럭.”

“오늘은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바다를 보고 싶어.”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아르모어가 내 어깨에 따스한 외투를 걸쳐주었다.

어차피 이 별장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잠옷 차림으로 쐬는 바닷바람도 꽤 운치가 있을 터였다.

“페로몬이 제법 풀어졌군.”

아르모어가 내 목덜미에 코를 대었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일주일 후 발정기가 시작될 텐데, 괜찮나?”

“이 정도는 괜찮아요.”

나는 현관 밖으로 나가며 대답했다.

쏴아아, 바닷물이 해변으로 세차게 밀려들어오는 소리가 평화롭게 귀를 메웠다.

“우리 모두와 함께 밤을 보내는 것도?”

용사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르모어의 목에 팔을 감으며 가볍게 뽀뽀했다.

“이왕 마음먹은 거 해 보죠, 뭐. 뭐든.”

아르모어가 입술만 조용히 끌어올려 웃더니, 내 뺨에 입술을 묻었다.

나는 아르모어 너머로 보이는 용사들과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맞춰나가요, 우리.”

그게 부부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