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세상에, 아르모어! 정신이 들어요? 맙소사!”
한참 동안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만 있던 아르모어가 느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입을 쓰지 않은 탓에 걸걸하게 갈라지는 음성이었다.
“내가 얼마나 잤지?”
“반년이요! 제 약이 좀 들었나 봐요. 1년은 꼼짝없이 잘 줄 알았는데, 다행이에요!”
카카나가 울먹이며 대꾸했다.
아르모어가 이마를 짚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띵한 듯, 잘 움직이는 법이 없는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정확히는 9개월이에요!”
아르모어가 눈을 굴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겨울 초입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밝고 따스해 보였다.
그는 새삼스레 방을 훑어보았다. 자연친화적인 물건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여기 어디게요. 맞혀봐요.”
장난스러운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르모어는 마치 작은 새가 근처에서 곱게 지저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나름 평범해 보이도록 잘 꾸몄거든요. 왠지 아르모어는 이런 방이 어울릴 것 같아서.”
카카나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조잘거렸다.
“침구도 따로 구해왔어요. 편하죠?”
꿀 두 덩이를 뭉쳐놓은 것 같은 사랑스러운 두 눈이 연신 영롱하게 반짝였다.
분홍빛 뺨과 더 자연스럽게 웃을 줄 알게 된 얼굴. 매일매일 영양이 충분한 식단으로 끼니를 챙겨 먹은 건강한 몸과 불이 붙을 듯 젊은 혈기.
그녀의 표정은 삭막하고 신경질적이었던 과거와 달리,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미소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더 사랑스러워졌군.”
아르모어가 그녀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카카나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더니 금세 목덜미가 있는 곳까지 물들었다. 아르모어는 이쯤 하고 물러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아르모어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씹더니 쪽 뽀뽀하곤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닌가.
아르모어의 눈이 크게 홉뜨였다.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아르모어. 보고 싶었어요.”
“…….”
그는 사납게 일어서는 욕정을 다스리기 위해 잠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9개월의 공백이 길긴 했나 보다. 카카나의 변화는 좋은 쪽이었지만, 자극이 커서 저도 모르게 거칠게 대할 것 같았다.
가볍게 벌어진 아르모어의 두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진득하게 흘러나왔다. 그는 거의 까맣게 보이는 붉은 눈으로 카카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몸을 면밀하게 살폈다. 다행히 근처에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달력이 있었다.
그가 깨어나길 하루하루 기다렸는지 지나간 날짜는 엑스 표시를 해놓은 흔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발정기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쉽군.’
아르모어가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윗입술을 핥았다. 카카나가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선 줄도 모르고.
“아, 아르모어?”
“그래서, 여긴 어디지?”
“아, 그……. 퀄리티미엄이요.”
‘그래서 바깥 날씨가 저렇게 좋은 거였군.’
경계심이 바짝 오른 초식동물처럼 카카나가 그의 숨겨진 난폭함을 유심히 살폈다. 그간 나머지 남자들에게 어지간히 시달렸던 탓이다. 그녀는 이제 ‘그런 분위기’만 형성되어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단계까지 와 있었다. 눈치는 밥 말아 먹고 없는 카카나의 무신경한 본래 성격을 생각하면 놀라운 성장이었다.
“아르모어를 계속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그렇군.”
아르모어가 천천히 눈을 굴리다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친구들은?”
그 질문에 담긴 따스함과 걱정을 느낀 카카나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친구들은 황궁에 있어요.”
“황궁?”
“네. 오로라가, 아, 황녀가 황제가 됐거든요. 아무튼, 오로라가 대대적으로 나라를 갈아엎고 있어요.”
그게 친구들과 무슨 상관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아르모어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카카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녹는 음성이었다.
“수인족은 더 이상 지배받는 신분이 아니에요.”
아르모어의 눈이 커졌다.
“친구들은 궁에서 오로라를 돕고 있어요.”
“……그렇군.”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국을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꺼낸 용사가 바로 수인족인 카카나 페아가 아니던가.
“아르모어는 운이 좋아요. 마침 저희가 돌아왔을 때 깨어났으니까.”
“돌아왔을 때?”
“최근 트리포아를 다녀왔거든요. 할릭이 크라켄을 잡았다는 바다도 구경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카카나의 목에서 행복에 겨운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다음엔 동양에 가보고 싶었는데 너무 잘됐어요! 마침 아르모어가 깨어났…….”
“깨어났다구요오오오오?”
순간 카카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르모어가 고개를 돌리자,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던 엘프 리나스가 기다란 다리를 휘적휘적 움직이며 다가왔다. 리나스는 저번에 카카나의 몸단장을 도왔던, 의상에 일가견이 있는 엘프였다.
짝짝짝, 박수친 리나스가 명랑하게 소리쳤다.
“세상에, 완벽한 타이밍이에요! 이제 결혼식만 올리면 완벽하겠네요! 카카나 님을 위해 준비해두길 잘했어요!”
“리, 리나스. 나는 그런…….”
“에헤이, 또 거짓말한다! 엘프한테 거짓말은 소용없다니까요! 사실 조금은 바라시잖아요.”
카카나가 시뻘게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리나스의 말이 맞다. 카카나는 결혼식을 원했다. 근사할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 걸린 약속을 떠올리자 역시 안 되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 아니에요. 리나스, 역시 전……!”
“자자, 준비는 이미 다 끝내놨어요. 완벽한 결혼식장일 거예요!”
리나스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러더니 눈을 부라리며 아르모어를 위아래로 훑었다.
“기력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죠? 하지만 워낙 튼튼하신 분이라 일주일이면 충분할 거예요!”
그 말은 일주일 후에 결혼식을 진행하자는 얘기였다.
리나스가 쏜살같이 밖으로 향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카카나가 아르모어를 흘끗 살피더니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찬란한 녹음의 빛깔이 눈가로 쏟아졌다. 그녀는 눈을 찌푸린 채 기다란 이파리 미끄럼틀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런 그녀를 공중에서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으악!”
“카카나,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할릭이 그녀를 품에 안아 들며 뺨과 입술, 눈가에 쉼 없이 뽀뽀를 퍼부었다.
“나, 읍, 잠깐, 으브, 으, 급하게…….”
“응응, 귀여워. 사랑스러워.”
단언컨대 그는 이미 카카나를 발견한 순간부터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의 뽀뽀 세례를 받던 카카나가 열이 받아 주황색 머리를 콱 틀어쥐었다. 할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으브, 당장!”
“당장 뭐? 키스해달라고?”
아다르가 등장했다. 카카나는 이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알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할릭에게서 벗어나려 애써 보지만 그의 장대한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파고들더니,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으응……!”
곧장 아다르의 진득한 혀가 밀려 들어왔다. 카카나의 눈가가 붉어졌다.
사납게 몰아치는 움직임이 버거워서 숨을 몰아쉬었더니, 그것마저 싹 훑어서 가져간다. 카카나가 아다르의 어깨를 탁탁 때렸다. 할릭은 이를 세워 카카나의 목덜미를 갉작대고 있었다.
‘히, 힘들어. 죽을 것 같아…….’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흘러나올 듯 눈앞을 흐렸다. 그녀가 작게 훌쩍이기 무섭게, 구원의 손길이 카카나에게 미쳤다. 첼러스가 할릭에게 안긴 카카나의 몸을 제품으로 옮긴 것이다.
“학, 하아…….”
그녀가 첼러스의 어깨에 이마를 박은 채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로 해롱거렸다.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그가 엄한 어조로 둘을 꾸짖었다.
“짐승이 따로 없군요.”
옆으로 다가온 스노아가 카카나의 눈가에 뽀뽀하며 둘을 향해 차갑게 일갈했다.
“괜찮나요? 카카나.”
“야!”
정신을 차린 카카나는 분노를 참지 않았다.
두 손을 뻗자 첼러스가 눈치 좋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아다르와 할릭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지 말랬지! 죽을 것 같다고 했잖아!”
“죽긴 뭘 죽, 아악!”
“한 번만 더 이래라! 어?!”
“네가 귀여운 걸 어떡, 미, 미안해. 미안, 미안!”
아다르와 할릭의 비명이 번갈아 가며 터졌다.
“들어봐, 카카나. 난 널 위해서 이런 거라니까?”
아다르가 협상을 시도했다.
“결혼식을 올리면 다섯 명이랑 같이 꽃이불 덮기로 약속했잖아.”
카카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꽃이불을 덮는다는 건 초야를 치른다는 의미였다.
다섯 명과 함께? 안 될 말이다. 공포다. 죽을 거다. 분명 죽을 거야.
“그건 결혼식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카카나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러게 누가 생각 없이 약속하래?”
“그건 네가 자꾸 내가 생각하지 못하게 움직여서……!”
카카나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터져도 무방하겠다 싶을 만큼 시뻘게져 있었다.
“자,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그렇지, 얘들아?”
이것에 관해서는 그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무언의 동의를 담은 침묵이 이어지자 카카나는 이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때, 언제 밑으로 내려왔는지 아르모어가 편안한 차림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카카나의 얼굴이 금세 해맑아졌다.
“아르모어!”
말 그대로 ‘살았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아르모어가 자신의 편을 들 줄 알았다. 언제나 그랬고, 다섯 남자 중 가장 성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모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아다르인가 싶을 정도로 짓궂은 말이었다.
“식을 올리면 초야를 치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
“역시 아르모어밖에 없, 네? 뭐, 뭐라고요?”
카카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어, 어떻게 아르모어마저…….”
호된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이었다.
“우리 이미 다 해서 초야도 아니잖아요…….”
“그런 식이라면 결혼식은 왜 올리지? 우리는 이미 영혼의 반려가 아닌가.”
“…….”
“의식이란 그런 거다. 부부가 치르는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약속이지. 그러니 그렇게 싫어하지 말거라.”
카카나는 그 ‘의식’이 절대 아름답고 숭고하지 않을 거라는 데에 자기 오른팔도 걸 수 있었다.
“분명 좋아하게 될 거야.”
그의 음성이 은근하게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카카나는 진저리를 쳤다.
“아, 안 좋을 거예요. 죽을 거라고요.”
“초월자의 몸은 쉽게 죽지 않지.”
“바로 그 점 때문에! 죽을 거라고요!”
카카나가 절규했다. 아르모어가 거의 평평해 보이는, 미미한 웃음을 입술에 띠며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빨아 당겼다.
“익숙해져야 하지 않나.”
“으, 흐으…….”
“그대의 반려는 다섯 명이나 되니 말이다.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될 상황이야.”
기어코 바깥으로 비죽 배어 나온 눈물을 첼러스가 이슬을 빨아 마시듯 입술로 흡입했다.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다섯 남자가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자 카카나의 마음에 저도 모르게 체념의 감정이 들어앉았다. 뭘 어떻게 해도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내가 진짜 싫다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해.”
“당연하지.”
아다르가 능글거리며 대꾸했다.
“우리가 언제 네가 싫어하는 걸 했어? 좋아하는 걸 해줬지.”
그것도 정도란 게 있는 법 아니겠는가. 카카나는 그냥 한숨만 쉬고 말았다.
쿡쿡 웃은 그들이 제각각 자신이 입을 맞출 수 있는 곳에 키스하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너를 아프도록 사랑할 거야.”
가장 먼저, 아다르 아로아가.
“그대를 사랑한다.”
다음엔 차분한 분위기의 아르모어 다오르가.
“사랑을 맹세합니다.”
첼러스 밀라다스는 맹목적으로.
“카카나의 모든 걸 사랑해요.”
스노아 칼리시스는 헌신적으로.
“더 사랑해 줄게.”
할릭 갈로프사는 데일 듯 뜨겁게.
그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영원히.”
[깨어나세요, 용사여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