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깨어나세요, 용사여 (2)
초월자의 지치지 않는 체력은 축복이자 저주였다.
나는 햇빛이 들이치는 창을 멍청하게 올려다보았다. 옆에서 색색거리는 고운 숨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아다르가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저 아기처럼 잠든 사내가 어젯밤 날 괴롭히던 당사자라니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몸이 건강해서 그런가, 생각보다 견딜 만하네.’
물론 아다르의 방식은 견딜 만하지 않았지만. 나는 어제 그 때문에 내 안에 남아있던 모든 눈물까지 끌어 모아 울어야 했다.
‘상냥한 것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괴롭힐 수 있구나.’
아주 뜻 깊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별로 알고 싶진 않은 교훈이었다.
나는 아다르의 회색 머리카락을 검지에 감으며 가지고 놀았다.
‘그래도, 기분 좋았으니까.’
여러 번 할 짓은 못 되지만 일 년에 한 번 정도라면 깜짝 놀랄 자극 정도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일 년에 한 번이라니, 아다르가 들으면 펄펄 뛸 것이다.
‘말 안 하면 되지.’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용사들 모두 잠들어 있는 듯 저택이 조용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두툼한 카디건을 걸치자 아다르가 단전에서 끌어올린 것처럼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방금 일어나서 그런지 걸걸해서 못 알아들을 뻔했다.
“어디 가.”
“연구실.”
나는 그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
“꼭두새벽부터?”
“응. 생각이 떠올라서.”
“어떤 거.”
“음……. 마족과 천족을 ‘치유’할 수 있는 약물?”
아다르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지는 게 보였다. 나는 쿡쿡 웃으며 방을 나섰다.
***
나는 초월자로 각성하는 걸 도운 인물이 아무스와 바드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바드가 내게 한 짓이 있는 터라 받아들이기까지 퍽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턴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인간 편이든 마족 편이든 천족 편이든, 바드의 태도엔 변함이 없을 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날 잃기 싫어서 위험할 때 도와주기까지 한 인물이 아니던가.
날 빼앗기고 싶지 않은 장난감처럼 여기는 그의 한결같은 태도가 바드를 파악하기 쉽게 만들어주었다.
관계가 재정립되고 나니 계획은 척척 진행되었다.
“영 내키지 않는데요.”
물론 마족과 인간이 합심하려니 삐걱거릴 때도 있었다.
스노아가 팔짱을 낀 채 상당히 불만 어린 표정을 했다. 아무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잖아? 여기서 마법을 제일 잘 다루는 건 당신이라고.”
“전 흑마법은 다루지 않아요.”
“그러니까 연구만 같이 하자는 거지. 저주를 강화하는 건 바드가 할 테니까. 그렇지?”
바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주 유능한, 흑마법사니까 말이야.”
“저주에 관해선 날 따라올 자가 없지.”
바드가 느릿한 어조로 거들먹거렸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필멸 저주를 이계의 유물도 잡아낼 수 있도록 강화하는 게 가능하다는 거지?”
“파훼하는 건 다른 문제지만, 더 강하게 만드는 건 가능해.”
바드가 별것 아니라는 양 대답했다.
‘뭐야. 그러면 천마 전쟁도 끝낼 수 있는 거 아니야?’
나는 얼굴을 괴상하게 찌푸린 채 되물었다.
“중간계에서 인간의 몸을 차지한 천족과 마족도 해치울 수 있겠네? 혈판과 펜던트가 부서지면 끝이잖아.”
그런데 바드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필멸 저주를 피한 존재들은 소용없어. 적어도 그들이 ‘인간’의 몸에서 빠져나와야 해.”
“그러면 유물을 부술 수 있어?”
바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사용되지 않은 유물들도 빠짐없이 다 부술 수 있고. 새로 중간계에 유입되는 존재들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 거지.”
“저주를 강화하는 게 쉽다며?”
아다르가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그러면 통과한 녀석들도 잡게 만들면 되는 거 아냐?”
빈정거리는 말에 바드가 뭐 저런 무식한 녀석이 다 있냐는 듯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저주를 ‘강화’하는 거랑, 구조를 ‘변화’시키는 거랑 같나? 통과한 녀석들을 다시 잡으려면 마법식을 아예 바꿔야 해.”
아다르는 마법에 까막눈이었다. 분명한 선이 그어지는 대화였다.
아다르가 고개를 저으며 팔짱을 꼈다. 아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스노아를 설득했다.
“봤지? 이건 마법사가 해결해야 해.”
“어쩔 수 없군요.”
스노아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으로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무스가 이대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더 설득했다.
“중간계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는 너잖아. 너와 저주에 가장 뛰어난 마족인 바드가 아니라면 이 일을 누가 할 수 있겠어?”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악마처럼 쉼 없이 혀를 놀려댄다. 차가운 인상의 스노아가 눈가를 슬며시 일그러트렸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게 습관인가 보죠?”
“마족의 본능이라고 해줘.”
“남 조종하는 것만 하지 말고 당신도 뭔가를 해보는 게 어때요?”
호락호락하게 당할 스노아가 아니었다. 냉담한 말이 차가운 겨울비처럼 아무스에게 쏟아졌다.
“계획이 전부 잡혔는데 당신만 하는 일이 없잖아요?”
입만 살아서 떠들어대지 말란 음성이 북풍한설처럼 차갑다. 너무 날카로운 일갈이 아닌가 싶지만 스노아의 말이 사실이었다. 할릭이 어깨를 으쓱이며 맞장구쳤다.
“맞아. 나랑 용병들은 차원균열지대에 남은 이계의 흔적을 부수는 임무를 맡았고.”
그곳엔 수많은 이계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나중에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어 아예 없애버리기로 결정한 참이다.
할릭이 첼러스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첼러스는 카카나를 보호하기로 했잖아.”
“아르모어는 카카나와 함께 천족과 마족을 ‘치유’하는 데 협조하고요.”
스노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심지어 아다르도 새벽과 함께 전쟁지역의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지 않았나요?”
자신을 저격하는 말에 아무스가 너무 그렇게 열 내지 말라는 듯이 웃었다. 그 얄미운 얼굴이 더 사람을 열 받게 한다는 걸 진정 모르는지.
“나도 아주 중요한 임무가 있지.”
“그게 뭐죠?”
“아가씨의 걱정을 덜어주는 거!”
스노아가 죽이고 싶다는 듯이 주먹을 떨었다. 아무스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아가씨의 계획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잖아?”
나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현재 우리가 세워놓은 계획은 내가 떠올린 ‘아이디어’를 토대로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실패할 가능성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여러 번 꼼꼼히 검토했다. 대부분 해결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딱 한 가지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손볼지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것만 해결하면 천마 전쟁은 안전하게 종식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걸 내가 해결해주지.”
“어떻게?”
“아가씨의 방법이 통하려면 천족과 마족이 건물 바깥으로 나와야 하잖아?”
나는 못마땅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쟁을 치른다고 모든 천족, 마족이 바깥에 나와 싸우진 않을 거야. 분명 몇몇 놈들은 건물이나 천막 안에 남아있겠지.”
아무스가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런 녀석들은 살아남을 거고. 그놈들을 내가 찾아줄게.”
“전쟁이 끝나고 나서?”
옆에 앉아있던 바드가 픽 웃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군.”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너와 스노아의 힘이 필요한 거지.”
아무스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아가씨의 방법으로 바깥에 나온 녀석들을 ‘치유’하면, 소수밖에 안 남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바드가 얼굴을 찡그렸다.
“동료를 더 부르지 않게, 전쟁 전에 필멸 저주 강화에 성공하란 얘기야?”
“정확하군!”
스노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교활하고 뻔뻔한 작태에 절로 한숨이 치미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소수를 찾아내?”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천족, 마족이 내 약물에 당하고, 동료까지 못 부르는 상태면 패닉에 빠져서 숨어있을 텐데?”
“내 특기는 그림자 쫓기야, 아가씨.”
아무스의 눈이 내 발밑에 짙게 물들어있는 어둠으로 떨어졌다.
“그림자가 있는 녀석들은 모두 내 손아귀 안이지. 중간계 주민은 추적하기 어렵지만, 동족인 마족이나 천적인 천족은 아주 쉽게 추적할 수 있어.”
그의 말을 잠자코 듣던 아다르가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기분 나쁜 능력이네.”
아무스는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
문화가 활짝 꽃핀 도시는 초상을 치르듯 거무죽죽하고 음침한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격전지는 황제의 궐이 있는 황도였다.
“여기서 전쟁이 나면 피해가 막심할 거야.”
내 근심 어린 말에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지. 중간계를 효율적으로 집어삼키려면 황족을 이용해야 하잖아. 여기서 싸움이 벌어지는 건 당연해.”
“황궁은 마족의 본거지이기도 합니다.”
첼러스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아나스타스는 반드시 이곳을 칠 겁니다.”
나는 사람 한 명 찾아볼 수 없는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 있는 사람이 첼러스와 아르모어, 아다르 그리고 나밖에 없었다.
오늘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건 아무스가 물어온 정보를 통해 알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무스가 변절자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홀라당 속아 넘어가서 중요한 정보를 턱턱 넘겨주니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아무스의 뻔뻔한 성격과 연기력은 타고난 수준이었다.
“스노아와 바드의 저주 강화는 성공이었다고 했지?”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일주일 동안 연구실에 콕 틀어박혀서 꼼짝도 안 할 수가 있지. 나는 그렇게 못 해.”
아다르가 질린 투로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스노아는 이 말 싫어하겠지만, 바드랑 둘은 닮았어.”
아마 둘이 눈이 뒤집혀서 연구에 매달리지 않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쥐 한 마리 없는 어둑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기척을 숨기곤 있지만 괜히 눈에 띄어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카카나, 이제 가야 한다.”
아르모어가 내게 손을 내밀며 얘기했다. 나는 잠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불편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아르모어? 그걸 하면 아르모어가…….”
“내가 결정한 일이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대가 다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
마음이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방법엔 아르모어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나는 고개를 억지로 끄덕였다.
“아다르, 이곳의 사람들을 부탁해. 괜찮지?”
“난 혼자가 아니니까.”
아다르가 새카만 그림자에 기척 없이 녹아든 채 웃었다. 골목엔 아무도 없었으나 나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반크와 새벽의 일원들이 내뿜는 강렬한 마나의 파동이 황도의 온 골목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내가 아르모어의 품에 안기자, 그가 여의주를 꺼내 공중으로 떠올랐다. 첼러스가 부유 마도구를 이용해 곧장 뒤를 쫓아왔다. 우리는 공중으로 끝없이 솟아 올라갔다.
오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던가. 나는 밑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올라가면 오히려 덜 무섭다는 걸 알게 된 참이었다. 그래서 아르모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어깨에 이마를 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귀가 먹먹해지고 숨이 가빠졌다. 이미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전신에 소름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웬만큼 높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나는 쌕쌕거리며 적응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럴 때면 내가 초월자가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평범한 수인족의 몸으론 힘들었을 것이다.
“괜찮으냐?”
아르모어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내 허리를 꽉 옥죄며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요. 조금 추워서 그런 것뿐이에요.”
“더 따뜻하게 입을 걸 그랬군.”
나는 옷깃을 여미며 눈을 떴다. 응결된 수증기가 짙게 뭉쳐있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곳에 우리가 둥둥 떠 있었다.
“위치는 잘 잡은 건가요?”
아르모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밑이 황궁이다.”
“좋아요.”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비장하게 입매를 굳히며 말했다.
“시작해요.”
***
눈이 오려는 듯이 하늘이 꾸물거렸다.
“이상하군. 오늘은 눈이 오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지루하게 대기하고 있던 마족이 가늘게 뜬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색 마나로 이루어진 검을 어깨에 걸치며 투덜거리던 키 큰 마족이 팽 콧방귀를 뀌었다.
“위대하신 천족 놈들은 날씨도 부리나 보지.”
그러자 그의 옆에 서 있던 마족이 낄낄거리며 맞장구쳤다.
“지하에 사는 우리랑 근본부터가 다르시다잖냐. 하여튼 웃기는 놈들이야.”
“똑바로 서. 대열이 흐트러지잖아.”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왜 걔들이 쳐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냐고!”
“그럼 여길 버리고 떠나?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야야.”
지금껏 조용히 있던 마족이 다투기 일보 직전인 동료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마족은 본래 인내심이 없어 불같은 성정이었다. 짜증이 가득 밴 눈이 자기를 향하자 그가 정면으로 턱짓했다.
“온다, 저기. 새하얀 것들.”
그의 말대로였다.
우중충한 먹구름이 두껍게 깔린 하늘에 굵은 소금을 뿌린 것처럼 하얀 점들이 쏜살같이 날아들고 있었다.
대기 중이었던 마족들의 얼굴에 희열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간을 보거나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마족은 닥치는 대로 싸움을 시작하는 전투종족이다. 천족은 자존심이 강해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는 종족이다. 서로를 발견하는 순간 부딪친다. 그게 천족과 마족이었다.
천족도 대기 중인 마족을 발견했다. 하늘을 나는 두 진영은 서로를 발견하는 즉시 자석처럼 들러붙었다.
쾅!
그러나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들이 막 서로의 무기를 겨누려는 순간 하늘이 화를 내는 것처럼 우레 같은 천둥소리를 낸 것이다. 천족과 마족은 거짓말처럼 우뚝 멈추었다.
그냥 눈이 오려고 하늘이 성을 내는 거였다면 그들도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할 수 없는 위기감이 그들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있었다.
인간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육감이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며 경고신호를 보냈다.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들은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쿠르르르릉…….
거대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아슬아슬한 대기를 뒤흔들고, 별안간 번쩍 번개가 쳤다. 순간 환하게 밝아진 하늘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마족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야.”
“…….”
“저게 뭐냐……?”
시커먼 하늘에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건 거대한 뱀처럼 보였다. 혹은 바실리스크 같기도 했다. 그들은 중간계에 하늘을 나는 바실리스크나 뱀이 있단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떻게 봐도 뱀이었다.
크기는 바실리스크보다 훨씬 컸으며, 온몸에 흑요석처럼 새까맣고 반짝거리는 비늘이 덮여 있었다. 간혹 구름 밑으로 드러나곤 하는 다리엔 위협적인 발톱이 달려 있었다. 작은 언덕쯤은 한 번 할퀴기만 해도 뭉개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손은 비어있으나, 다른 한 손엔 거대한 진주처럼 생긴 구슬이 들려 있었다. 청보랏빛 바다를 들여다보는 듯 신비로운 색감의 구슬이었다.
콰과강―
또다시 천둥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천족과 마족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쯤엔 그 ‘뱀’은 거의 구름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뱀의 머리쯤에서 시커먼 연기 같은 게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족이 눈을 크게 떴다. 용사와 함께 움직이며 끈질기게 마족의 전염병을 없애던 수인족이 뱀의 머리에 올라타 있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개수작을 부리고 있군……!”
저것을 죽여야 했다.
그렇게 생각한 건 천족도 마찬가지였다. 죽여야 할 대상이 바뀌었다. 새하얗고 새카만 기운이 더럽게 뒤얽히며 뱀의 뒤를 쫓았다.
쾅, 천둥 번개가 치며 사방에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백금빛 섬광이 번뜩였다.
“윽!”
눈을 멀게 만들 지경인 빛줄기에 천족과 마족이 눈가를 가렸다. 첼러스가 찰나의 시간을 벌어주자 카카나가 서둘러 소리쳤다.
“아르모어, 지금이에요!”
‘조금만 버텨줘요.’
1분 1초도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아르모어가 이 모습으로 날씨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후유증이 심해서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카카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몹시 추운 겨울 끝물이었지만, 아르모어의 힘으로 비가 내릴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제발, 빨리!’
천족과 마족이 전쟁을 벌이는 한복판이었다. 시간이 맞지 않으면 그들에게 둘러싸여 찢어 발겨질 것이다.
초월자가 아무리 압도적인 인간이라지만, 쪽수에서 한참 밀리는 상황이었다. 아르모어의 울음소리가 내는 저주파의 영향은 오래가지 않았다. 첼러스의 저항도 이제 한계였다.
그의 백금색 성검이 한 번 허공을 가를 때마다 구름이 위로 들리고 폭풍이 불었지만, 천족과 마족이 너무 많았다.
카카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들을 둘러싼 이계의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놀라운 속도로 따라잡히고 있었다. 오돌토돌 소름이 돋은 피부에 따귀를 때리듯 날카로운 바람이 불었다.
카카나가 약병을 으스러트릴 기세로 손에 힘을 주었다.
“맹랑한 것!”
자연재해 수준인 첼러스의 검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천족이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카나!”
놀라운 순발력으로 천족의 공격을 튕겨낸 첼러스가 반동으로 아르모어의 거대한 몸체에 처박혔다.
“크윽!”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카카나는 입으로 피를 쏟는 첼러스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첼러스!”
그 찰나의 순간을 마족 한 명이 파고들었다. 그가 희게 질린 얼굴로 굳어있는 카카나에게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족히 이십 센티미터는 될 법한 날카로운 손톱이 경직된 카카나의 볼을 쿡, 찌르는 순간.
톡―
작은 물방울이 그 마족의 뺨으로 떨어졌다.
크게 벌어진 마족의 눈이 위로 굴러갔다. 동시에 대야로 들이붓듯이 비가 쏟아졌다. 빗방울이 어찌나 굵은지 커다란 물 덩어리들이 철퍽철퍽 소리를 내며 그들의 몸을 치대는 소리가 들렸다.
마족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이, 이게…….”
마족이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가련하게 몸을 떨었다.
“학! 하아!”
공포에 질려 여태까지 숨을 참고 있던 카카나가 간신히 호흡을 골랐다.
“이게, 대체, 무슨…….”
규칙적으로 퍼덕이던 마족의 박쥐 같은 날개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카카나는 그의 손톱에 찔린 뺨에서 핏자국을 훑어내며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기분이 어때?”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의 뒤로 먼저 힘이 빠진 마족이 한둘씩 땅으로 추락했다. 마족뿐만이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는 천족들이 날개 뽑힌 새처럼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고 있었다.
“치료해주는 거야.”
“감히, 감히이!”
천족이 발악하며 떨어졌다.
“무슨 소리야!”
마족이 겁에 질린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의 얼굴은 상태가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마치 빗물에 검댕이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마족 특유의 시커먼 피부가 녹아 흘러내리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서서히 본래의 살구색 피부가 드러났다. 몸 주인이 자신의 것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네 것이 아닌 몸, 얌전히 돌려주고 네 세계로 꺼지란 소리야.”
카카나가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마족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밑으로 떨어졌다.
황도에선 새벽의 일원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받아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 시커먼 검은 구멍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 카카나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저 구멍이 올리넨이 말했던 ‘그것’인 게 틀림없었다.
「차원의 문이 열렸어요!」
그녀가 텔레파시 마도구를 통해 소식을 보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마탑의 현자들과 마탑주가 구멍이 있는 곳으로 텔레포트했다.
수많은 마족과 천족의 정신이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가면서 열린 차원의 문은, 그대로 두면 공간에 상처를 낸다. 황도가 차원균열지대처럼 변하게 두지 않으려면 문을 닫아야 했다.
마탑주 올리넨이 카카나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믿어요, 아가씨. 차원의 문을 닫는 것쯤은 쉽답니다.」
「부탁해요, 마탑주님.」
주름진 올리넨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마탑주는 무슨, 그냥 할머니라 부르세요.」
그 푸근한 미소에 카카나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얼굴을 진지하게 굳히고 준비해두었던 약의 뚜껑을 하나 더 땄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새로 꺼낸 작은 약병에서 폭발적인 검은 연기가 위로 솟구치며 올라갔다. 대기 중으로 흩어진 뒤 수증기에 들러붙도록 만든 약. 끈적한 기름처럼 중간계에 들러붙은 사기와 그 찌꺼기들, 그리고 마물을 녹아 없애도록 제조한 약이었다.
홀리니스를 변형한 것에 불과해서 제조에 그다지 어려움을 겪진 않았다. 그러나 그건 만든 이가 카카나 페아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약병에 담긴 건 마나를 담지 않은 약물의 진액이었다. 그것이 특별한 약재로 인해 공기와 만나 발화하여 연기로 치솟아 오르면, 카카나가 공중에서 그 연기에 자신의 마나를 섞어야 했다.
초월자가 아니라면 하지 못했을 작업이었다. 마나를 수족 부리듯 편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했고, 황도 전체를 덮을 정도로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죽죽 쏟아지는 빗줄기에 약이 전부 섞일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었다. 아르모어의 거대한 몸이 부드럽게 유영하며 하늘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괜찮나?’
카카나가 고개를 숙여 밑을 바라보았다. 천족과 마족이 차지했던 사람들이 창백한 얼굴로 하나둘씩 눈을 뜨고 있었다. 나쁜 사람도 분명히 있겠지만, 죄가 없는 인간들도 섞여 있을 것이다. 죄를 묻고 처벌을 하는 것은 그 이후에 해결해야 할 문제다.
‘난리가 끝나면 황궁에 피바람이 불겠지.’
당장 친구들의 얼굴을 찾아서 상태를 살피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아르모어, 괜찮아요? 더 돌아다닐 수 있겠어요?”
그녀가 묻자 용의 입이 열리며 하얀 뭉게구름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대답은 텔레파시처럼 머릿속을 울리며 들려왔다.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게 본래 약속이지 않았나.」
“하지만 그러면…….”
「괜찮다.」
아르모어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오랜 잠을 자게 될 뿐이니.」
매끄러운 비늘을 짚고 있던 카카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눈물이 차오른 얼굴을 밑으로 수그렸다. 몸이 비에 폭삭 젖어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저만 믿어요, 아르모어.”
「…….」
“그리 오래 자게 두지 않을게요. 전,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치료사니까.”
「든든하군.」
카카나가 울먹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르모어와 함께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치유의 비를 내렸다. 제국의 땅덩어리가 워낙 커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날아다녀야 했다.
대륙을 점령했던 사기와 찌꺼기들은 치유의 비를 견디지 못하고 차츰 정화되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전염병 또한 사라졌다.
창문과 문을 걸어 닫고 공포에 질려있던 사람들은 한 명씩 바깥으로 나왔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빗방울에 홀린 얼굴들이었다.
“비……?”
“해, 햇빛이야! 해가 비치고 있어!”
끝없는 밤이 이어지듯 우중충했던 하늘에 몇 달 만의 새하얀 햇빛이 비쳐들었다. 두꺼운 먹구름이 남아있었지만, 그렇기에 틈으로 곧게 비치는 빛줄기가 더욱 성스럽게 보였다.
무거운 공기는 산뜻하고 청량해졌다. 사람들은 자신을 젖게 만드는 비를 맞으면 맞을수록, 제 영혼에 깃들었던 케케묵은 어둠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눈물이 맺힌 미소를 지으며 하늘로 손을 뻗었다. 울먹이는 눈망울에 낮은 높이로 날고 있는 용과 비를 몰고 다니는 수인족의 상이 맺혔다.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의 손가락 끝으로 상냥하고 따스한 햇볕이 내려앉았다.
그렇다.
마침내, 봄이었다.
***
“아아아악!”
분을 이기지 못한 아나스타스가 테이블 위의 물건을 전부 바닥으로 집어던지며 분노를 터트렸다. 은발은 이미 산발이 되어 구정물이 군데군데 들어있었고, 옷은 반쯤 찢겨 너덜너덜했다.
분노밖에 남지 않은 그녀의 보랏빛 눈망울에 증오의 감정이 시퍼렇게 불타올랐다.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그녀의 계획은 완벽했다. 천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벼르고 별렀다.
중간계에 최적화된 신수를 제 수족처럼 부릴 작정으로 신목에 신수의 알을 숨겨두었다. 순진한 수인족들이 천족을 찬양하도록 작위적인 유물을 일부러 많이 남겨두었다. 실험도 꾸준히 했고, 빼앗을 만족스러운 육체도 준비했다.
혹시나 중간에 계획이 틀어질까 봐 황녀 행세를 하며 가까이서 그 탐스러운 육체를 직접 지켜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무엇도 성공하지 못했다. 모든 게 다루기 쉬운 체스 말처럼 그녀의 손아귀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모래알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조금만 더 하면 끝이었는데!’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유물은 모두 박살이 나버렸고, 더 이상 천족을 불러 모을 수도 없었다. 수상한 비를 맞은 동료들은 모두 천계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아아아악!”
그녀가 머리를 움켜쥐고 자리에 주저앉은 순간, 그녀의 그림자에서 검은 신형이 불쑥 위로 치솟았다.
“우리 동생은 여전히 앙칼지기도 하지.”
아나스타스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다른 이의 것이었지만, 익숙한 기운이었다. 능글거리는 표정의 남자가 싱긋 웃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아나스타스가 문득 사납게 눈을 일그러트렸다.
“아무스?”
“하하, 안녕? 아나스타스.”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응응, 그래. 아나스타스. 무섭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말렴.”
아무스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아나스타스가 짝 소리가 나도록 그 손을 쳐냈지만, 아무스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네 죗값을 다 치르려면 오래 걸릴 거야. 하지만 괜찮아. 그 긴 세월을 곁에서 함께해줄 테니까.”
“무, 무슨…….”
“천계에서 이리나엘이 기다리고 있단다.”
아나스타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상황이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전쟁이 끝나서 얼마나 다행이니?”
“…….”
“다행히 널 죽이는 건 봐주겠다고 하시더구나.”
“우,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죽는 것보다 괴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살아있다면 볕들 날이 온단다.”
아나스타스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무스가 마족 특유의 잔인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못을 박았다.
“천계로 데려다주겠다, 아나스타스. 이리 와.”
“하! 마족인 네 더러운 피가 감히 천계에 출입할 수 있을 것 같아?”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아나스타스. 마족과 천족은 그저 다를 뿐이야.”
“아니야!”
아무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넌 천계로 갈 거고, 난 널 잡아서 천계에 보낸 뒤 정당한 죗값을 치르도록 할 거다.”
“네가 무슨 권리로 그런다는 거야!”
“그러게. 가족이 아니라면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네.”
아무스가 냉랭하게 중얼거렸다.
“넌 내 가족이 아니야!”
“아니. 가족이야. 마족인 내가, 네 오빠지.”
“닥쳐!”
아나스타스가 힘을 불러일으켰다. 아무스는 결국 이쯤에서 카카나를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마지막 천족 발견. 좌표는 마법사님이 알고 있지?」
아나스타스는 중간계에 남은 최후의 천족이었다.
앞장서서 거사를 주도한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전쟁을 피해 안전한 곳에 은신해 있었다. 그 결과가 어떻든, 전쟁 후에 이어질 일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스도 그런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전쟁은 승리 혹은 패배로 이어지지 않았다. 결과는 전멸이었고 눈 깜박할 새에 판도가 아예 뒤바뀌어버렸다.
아나스타스는 감이 좋았다. 그녀는 심상치 않은 흐름을 읽고 빠르게 몸을 숨겼다. 그렇게 쫓기고 쫓겨 이런 신세가 되는 사이 주요 인사들이 모두 당했다.
이제 남은 천족은 아나스타스 한 명. 마족은 아무스와 바드 말고 아무도 없었다.
아무스가 텔레파시를 보내자 곧 카카나가 이곳에 당도했다. 아르모어를 제외한 네 명의 남자들도 대동한 채였다.
“건드리지 마!”
카카나와 네 남자를 확인한 아나스타스가 즉시 단도를 들어 제 목에 들이밀었다.
“더 다가오면 황녀의 목을 찔러 죽여버리겠어!”
“진짜 귀찮게 하네.”
아다르가 짜증이 가득 올라온 얼굴로 중얼거렸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아나스타스가 독이 바짝 오른 얼굴로 제 목젖에 칼날을 꾹 짓눌렀다. 그러자 한 줄기 핏물이 밑으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아나스타스.”
아무스가 마른세수를 하며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안한 눈으로 계속 카카나를 흘끗흘끗 살폈다.
‘저거 뭔가, 사고 칠 것 같은…….’
카카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아나스타스가 눈을 번쩍 빛내며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한쪽 발은 황녀의 몸에 담근 채 정신체를 그녀에게 쏘았다.
챙강!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이리나엘의 거울이 아나스타스를 한 번 튕겨냈다. 이로써 거울에 두 번째 금이 갔다.
아무스가 급하게 황녀의 몸을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단도로 제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빙의를 시도했다가 카카나의 몸을 먹어버리면 그대로 도망칠 작정인 게 분명했다.
상대가 ‘카카나’라면 다섯 용사는 더욱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이거 상황이 안 좋은데.”
아무스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카카나는 일말의 동요 없이 아나스타스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아무리 초월자가 되었다지만, 지나치게 아무렇지 않은 거 아닌가? 아무스가 기묘하게 여기는 사이 거울에 정신체가 또 부딪쳤다.
챙!
이리나엘의 거울에 세 번째 금이 갔다. 이대로 두면 당한다.
답답한 속을 이기지 못한 아무스가 무슨 생각이냐고 직접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인형처럼 고요히 서 있던 카카나가 불현듯 황녀의 몸을 향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오로라!”
그러자 그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거기 있죠! 지금이 기회니까 올라와요!”
새하얀 정신체가 황녀의 몸으로 쏜살같이 돌아갔다. 아나스타스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무슨 개수작이야!”
“오로라!”
“이게 무슨!”
그때, 바락바락 악을 쓰던 아나스타스의 입이 꽉 다물렸다.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떼려고 했지만, 다물린 입이 거짓말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카카나는 초월자의 날카로운 눈으로 황녀의 몸을 주시했다. 팔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모아두었던 모든 힘을 끌어올려, 황녀가 저항하고 있었다.
‘저건 마지막 저항이야.’
카카나가 눈도 깜박이지 않고 황녀의 몸을 관찰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끝이야.’
마침내 목으로 파고들던 단도가 잠시 떨어진 그 순간.
촤아아악!
카카나가 손에 들린 홀리니스를 그녀의 온몸에 뿌렸다.
“꺄아아아아악!”
아나스타스가 유령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무스는 멍하니 카카나를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안 돼, 안 돼!!”
“자, 혼날 시간이야. 아나스타스.”
아무스가 끝까지 발버둥 치는 아나스타스의 몸을 품으로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악을 쓰며 절규했다.
“싫어!”
“그래, 그래.”
“이거 놔! 차라리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아아악!”
“그건 내가 봐줄 수 없겠는데.”
아무스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책임감이 뭔지부터 가르쳐 줘야겠네. 그냥 죽어버리는 건 책임을 지는 게 아니란다, 아나스타스.”
아나스타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자, 같이 천계로 가자.”
꺄아아아……. 아나스타스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아무스가 카카나를 올려다보았다.
“고마웠어, 아가씨.”
“…….”
“바드를 부탁해.”
그에게 망설임 없이 홀리니스를 뿌려 쫓아낼 작정이었던 카카나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 녀석, 아가씨랑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거든.”
아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떻게 하든 아가씨 선택이지만.”
그가 카카나가 건네주었던 홀리니스를 몸에 뿌렸다. 둘의 몸이 축 늘어지며 하얗고 검은 정신체가 위로 봉긋하게 올라왔다. 아니, 정확히는 검은 연기가 하얀 것을 움켜쥐고 쏜살같이 위로 솟구쳤다.
카카나는 갑자기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아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요해진 오두막집 내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로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다는 게 조금 얼떨떨했다.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좀 착잡한 기분이네.’
카카나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오로라가 눈을 떴다.
그녀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넝마나 다름없는 치마를 탁탁 털었다. 그리고 떡이 지고 엉킨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빗은 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끈 하나를 주워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었다.
오랫동안 씻지 않아 몸에선 냄새가 나고 거지꼴이었다. 그러나 숨겨지지 않는 총명함이 그녀의 선명한 눈망울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황녀가 허리를 꼿꼿하게 편 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지난 과거의 영광으로 반짝이는 황금빛 궁이 보였다.
“끝났군요.”
“그래.”
“숙청의 시간이네요.”
“으, 응?”
아리따운 황녀의 입에서 무서운 말이 나오자 카카나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황녀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죗값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 황궁에 너무 많이 들어앉아 있으니까요.”
“아…….”
“아바마마도 피해갈 순 없겠지요.”
냉정한 말에 카카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청소가 끝나면 용사님들을 황궁으로 초대하겠습니다.”
황녀가 정중하게 얘기했다.
“원하신다면, 여러분이 바라는 자의 목을 잘라 바쳐드리지요.”
황녀를 빤히 쳐다보던 아다르의 한쪽 눈썹이 위로 슥 들렸다. 그가 생각했던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조금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황녀는 용사들을 지하감옥에 가두고 모욕을 줬던 자들을 마음에 드는 형태로 잘라 헌상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제 곧, 자신이 가장 지체 높은 존재가 될 몸임에도 불구하고.
“하, 하지만 그들은 마족에게 조종당했을 뿐 아니에요?”
카카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스스로 마족을 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황녀가 차분하게 뇌까렸다.
“직접 석판을 찾고, 계약하기를 원했지요. 더 크고, 강대한 힘을 위해서. 빛나는 부귀영화를 위해서. 자신의 나약함을 없애기 위해서.”
“…….”
“아바마마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황녀가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눈부신 봄 햇살이 집 안으로 길게 들어왔다.
“그런 자가 황제의 자리에 앉아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게 두어선 안 되는 일입니다.”
“…….”
“아바마마는 제가 아나스타스의 눈으로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마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황녀의 창백한 입술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오라버니들도요.”
그녀가 오두막을 나섰다. 우리는 그녀가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빛무리를 한참 지켜보았다.
***
“바드……?”
나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어둑한 방 안에 바드가 방만하게 턱을 괴고 앉아 테이블을 손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반사적으로 소름이 올라왔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같은 편이 되어 적을 물리쳤다지만, 좀처럼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마족이었다.
바드가 나를 바라보더니 재미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는 세상만사 귀찮다는 식으로 굴다가도 나만 보면 저렇게 오싹한 미소를 짓곤 했다. 날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이 께름칙한 느낌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웬일?”
바드가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그, 그냥…….”
“친구 소식이 궁금한가 보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깔모자에 숨겨진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나는 솔직하게 토로했다.
“그래. 괜찮은지 궁금해.”
“넌 참 한결같아.”
바드가 중얼거렸다.
“나약하기 짝이 없지.”
“무례하게 굴면 당장 마계로 쫓아낼 줄 알아.”
“그러면 네 친구들에게 걸린 저주는 누가 없애고?”
나는 두 손을 강하게 옹송그렸다.
저주가 천족의 것만 아니었어도 내 마나를 섞은 약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 텐데, 같은 천족의 마나라 곤란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저주는 아나스타스가 사라졌음에도 그대로 남아있어서, 바드의 힘이 필요했다.
바드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의 쉰 숨소리가 동굴을 울리는 유령의 키들거림처럼 느껴졌다.
“난 네가 정말 재미있어. 이렇게 유쾌했던 적이 없어.”
“그래 보여.”
나는 상당히 떨떠름한 얼굴로 맞장구쳤다.
“나만 보면 소름 끼치게 웃잖아. 그렇게 좀 안 웃으면 안 돼?”
“이제 곧 안 웃게 되겠지.”
바드가 언제 웃었냐는 듯이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우며 대꾸했다.
“네 친구들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내 재미있고 흥미로운 장난감은 시시해지고 말 테니까.”
“바드!”
“과거의 악몽에 붙잡혀서, 친구에게 쩔쩔매는 널 보는 게 제일 흥미로웠는데.”
바드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 왜 날 돕는 건데?’
반사적으로 드는 의문을 입 안으로 삼켰다. 나는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화기를 한 차례 억누른 후, 그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 녀석, 아가씨랑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거든.]
문득 아무스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친구들이 건강을 되찾고 있는지나 말해.”
“엄청 재촉하네.”
바드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나 나를 방 밖으로 쫓아내지는 않고, 바닥에 주저앉아 낡은 흑마법서의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겨댔다.
“천족은 저주에 능통하지 않아.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히 파훼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어중간하게 죽어있는 네 친구의 몸을 다시 깨울 수 있다는 소리지.”
나는 불쾌했던 기분마저 잊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벅차고 기뻐서 활짝 피어난 웃음이 광대뼈와 눈가로 사르르 퍼졌다. 자리에서 방방 뛸 수도 있을 것 같은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말 사실이지?”
“난 유능한 흑마법사야.”
바드가 오만하게 말했다.
“허무맹랑한 얘긴 안 하니까 믿어도 좋아.”
“친구들이 저주 때문에 고통스럽진 않았을까? 아픈 건 아니지?”
“몸의 감각을 못 느끼니까 아프진 않을걸.”
“다행이야…….”
“그렇게 좋아?”
바드가 묘한 기색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차피 어렸을 때 친한 친구였던 것뿐이잖아?”
“다 소중한 내 친구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나를 바드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곧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일주일이면 깨어날 것 같아.”
“이, 일주일? 일주일 후면 깨어난다고?”
끄악, 나도 모르게 행복에 겨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아니었다면 천족의 저주를 파훼하지 못해 오랜 기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바드는 천족이 부리는 고대의 저주에 능통했고 올바른 방법으로 파훼할 줄 알았다.
얄미운 데다 어딘가 찜찜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녀석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순수하게 바드가 고마웠다.
“갑자기 기운이 쭉 빠지네.”
“뭐?”
그런 나를 줄곧 쳐다보고 있던 바드가 돌연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기운이 빠진 듯, 꺼져가는 음성이었다.
나는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린 채 바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마른세수하며 의자에 앉았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구는 그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스가 이상한 소릴 하던데. 네가 나와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나.”
“걔가 그랬어? 쓸데없는 소릴.”
바드가 혀를 찼다.
“비슷한 과거가 뭔데?”
“별 거 아냐. 인체실험에 관한 이야기야. 나도 너처럼 실험을 당했거든.”
“…….”
바드는 한참을 조용히 있더니 갑자기 혼자 픽 웃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했나 보지?”
“…….”
“뭐, 실험을 당할 때 너 같은 녀석이 곁에 있었으면 뭔가가 달랐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긴 해.”
“그건…….”
입을 뗀 찰나 방문이 열리며 아다르가 들어왔다. 그가 바드와 나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느끼더니 짝다리를 짚었다. 그는 한 손에 편지를 들고 있었는데, 나와 바드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굉장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봐, 너.”
아다르가 턱짓으로 바드를 가리켰다.
“여기서 언제 꺼질 거야?”
“아다르!”
나는 엄한 목소리로 그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아다르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툴툴거렸다.
“이젠 남의 엉덩이를 이렇게 막 때리고……. 난 이제 다 잡은 물고기라 이거지?”
“자꾸 헛소리 할래?”
그의 뺨을 잡아당기며 으름장을 놓자 아다르가 불만스럽게 눈을 흘겼다. 날카로운 눈매가 더 가늘게 좁혀지며 적대적으로 번쩍였다.
“네가 허구한 날 저 녀석이랑 함께 있으니까 그렇지!”
“친구를 깨어나게 해준다잖아!”
“젠장! 친구랑 약초가 나보다 더 중요하지?”
“유치하게 굴지 마!”
“미안한데.”
바드가 그들의 말을 막으며 질린 얼굴로 축객령을 내렸다.
“그런 대화는 나가서 해. 비위 상하니까.”
나는 얼굴을 화르륵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
“그렇게 닭살이 돋으면 얼른 꺼지든가.”
아다르가 끝까지 빈정거렸다. 바드가 픽, 웃으며 목 근처를 긁적였다.
“조만간 꺼져줄 테니 걱정 마.”
나는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다르도 순순히 떠난다고 대답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눈을 커다랗게 홉뜨고 있었다.
바드는 놀란 우리와 다르게 어딘가 후련한 얼굴이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찾아야겠어. 이번에야말로 오래 가지고 놀 수 있는 거로. 아가씨는 이제 질렸어.”
“나는 물건이 아니야.”
불쾌하게 얼굴을 찡그렸더니 바드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왜 그렇게 열을 내? 내가 이런 새끼인 거 몰랐어?”
“…….”
“난 평생을 이렇게 살았어. 이렇게 컸고, 또 앞으로도 이렇게 살겠지.”
그는 애정을 표현하는 법 따위 모르는 마족이다. 소중하게 여기는 법도, 그걸 올바르게 표현하는 법도, 지키는 법도 모른다. 바드는 모든 게 뒤틀려있는 마족이었고 본인도 그걸 알았다.
그런 그가 방금,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으로 원하는 걸 채우는 행위를 했다. 이젠 떠날 때였다.
“내가 진짜 바라는 게 뭐였는지 아까 깨달았거든. 곧 바라는 걸 얻을 것 같아서, 떠나려고.”
바드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네가 바라는 게 대체 뭔데?”
아다르가 꺼림칙한 걸 묻듯 음성을 낮추었다. 바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가씨가 친구들을 그 끔찍한 악몽에서 되찾는 거.”
“…….”
“그게 내가 정말 바랐던 거야.”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바드가 진정으로 집착했던 대상이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친구들을 기어코 되찾았듯이, 그도 누군가가 자기를 그 악몽에서 꺼내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는 내 친구를 되살리면서, 제 발목에 차고 있던 과거의 족쇄를 비로소 풀어내고 있었다.
아다르와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바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슬슬 지루해.”
바드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아가씨의 친구들이 깨어나면 난 마계로 돌아갈 거야. 중간계는 밍밍하기 그지없으니까.”
이만 가 봐. 대화를 끊어낸 바드가 손가락을 휙 움직였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나는 문이 닫히기 직전에 말했다.
“고마워, 바드. 친구들을 구해줘서.”
닫히려던 문이 움찔 멈추었다. 문틈으로 바드의 고깔모자 쓴 얼굴이 보였다. 나는 꿋꿋하게 말했다.
“네가 구한 거야.”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을 떨었다.
“그래봤자 내가 다 해놓은 밥에 숟가락을 얹은 정도지만.”
그의 입술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른 순간, 문이 닫혔다. 나는 복도에 덩그러니 서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네.”
“아무 생각 없는 녀석은 아닌 모양이지.”
아다르가 약간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화가 그런 식으로 치달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근데 손에 들린 건 뭐야?”
“아, 이거. 황제의 초대장.”
“화, 황…….”
“오로라 말이야. 황궁이 깨끗해졌으니 놀러 오래. 연회를 열겠다면서.”
아다르가 픽 웃었다.
“황궁에 밴 피 냄새가 빠지긴 했는지 의문이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어서 어색하게 웃었다.
황궁엔 몇 차례 피바람이 불었다. 오로라는 놀라울 정도로 손속에 자비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칼끝에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그녀는 마법이나 검술에 뛰어나진 않았지만, 지략이 우수했다. 홀몸으로 황궁에 들어가 제 자리를 되찾고, 귀족들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나는 그녀가 풍기던 무거운 위압감과 카리스마를 떠올리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아무리 마족 때문에 황궁이 엉망진창이 되었다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나는 약간 질린 기분이 되고 말았다.
‘날 바라보는 다른 치료사나 약제사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지금이 되어서야,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어쩔래?”
“꼭 가야 하는 거야?”
“아니, 전혀? 네 마음대로 해도 돼.”
나는 자리에 서서 잠시 고민했다.
우리의 업적과 이름은 이미 제국을 넘어 온 세상에 퍼졌다. 타국의 귀족들은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 본국의 귀족들은 우리를 붙잡아두기 위해 벌써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그 영향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도록 목줄을 단단히 쥐고 있는 건 황제인 오로라였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은 독이 되어 초월자가 어떤 존재인지 결국 세상에 공표될 테고, 싸움은 극으로 치달을 것이다.
“오로라의 뜻이 뭔지는 알 것 같아. 우린 좀…….”
나는 열심히 말을 골랐다.
“비참하게 살았잖아.”
“흠.”
“난 수인족이었고, 너희는 음모에 당해 죄인이었지.”
아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명을 마저 벗기고 온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려는 거야. 하지만 꼭 그래야 하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다 알려졌잖아. 귀족적인 체면치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솔직히 이 초대에 응하면 왠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오로라가 어떤 인물인지 생각하면 더 귀찮아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을 하다 보니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한 나라에 붙잡혀 살고 싶지 않아.”
“네 말이 맞아.”
아다르가 씩 웃었다.
“붙잡혀 ‘줄’ 필욘 없지.”
“여행하고 싶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놀러 다닐 거야. 할릭이 크라켄을 잡았다는 바다도 가보고, 아르모어의 고향 땅도 디뎌보면서. 그러다 지치면…….”
나는 까마득하게 이어질 미래를 상상했다.
영원이었다.
그게 너무 아득하게 느껴지는데, 무섭거나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늑하고 밝은 곳에서 잠깐 쉬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내겐 함께할 다섯 명의 반려가 있었다.
“드워프의 마을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고.”
아다르가 나를 따라 천천히 입술을 끌어당겨 웃더니, 고개를 숙여 깊이 키스해왔다.
“그래. 다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