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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깨어나세요, 용사여 (1) (34/43)

Chapter 2. 깨어나세요, 용사여 (1)

다다나를 떠나보냈을 때, 므리나 이소리하의 시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흐릿한 기억이지만, 이만 끝낼 때가 됐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증오도 슬픔도, 이제 그만 손에서 놓아줄 때가 됐다는 생각. 할 만큼 했다는 생각.

모순적이지 않은가. 그토록 벗어나려 애를 썼는데, 사실 손에 꼭 쥐고 있던 게 나였다는 사실을 동생을 잃고 나서야 안 것이다.

손에서 놓고 나니 속이 허했다. 지독하게 외로운데, 날아갈 듯 홀가분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앉아, 어떻게 하면 친구들을 구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곧 벌어질 천마 전쟁도 뇌리를 스쳤다. 숨을 옥죄는 문제들인데 신기하게도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 모든 걸 끝내야지. 그럴 때가 됐어. 이제 마무리 지을 때가 됐어. 충분히 오래 괴로워했어.

마음 안의 속삭임이 부드럽게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에겐 이미 그럴 힘과 능력이 있었다. 아리마와 비브로스가 보여주었던 무한한 신뢰가 드디어 내 안에 토대를 쌓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걸 인정했을 때, 나는 이미 어떤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

“이 늦은 시간에 왜 갑자기 온다는 건지, 원.”

비브로스가 뜨거운 커피를 손에 든 채 눈썹을 그러모았다.

바깥은 칠흑 같은 어둠과 눈바람이 어둠의 주문처럼 으스스한 소리를 내며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뱅뱅 맴돌았다. 영 불길했다.

결국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한숨을 내쉬며 근심으로 깊어진 눈가의 주름을 손으로 문지르던 비브로스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희미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는 한달음에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착각이 아님을 알려주듯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휘오오오오, 어둠을 가로지르는 겨울바람이 높은 소리로 울며 집 안에 들이닥쳤다. 발밑이 냉기로 금세 싸늘해졌다.

“교수님.”

비브로스는 얼음처럼 섰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갈라지는 음성이 퍼석거리며 귓가에 닿았다. 카카나가 낯선 얼굴로 웃고 있었다.

비브로스는 왜 그렇게 보이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불안정하게 통통 튀었던 카카나의 분위기가 심연처럼 깊게 침잠되어 있었다. 그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채 숨겨지지 않은 성숙의 잔향을 맡고 숨을 죽였다. 그리고 소중한 제자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성장은 아팠기에 온 거다.

“카카나, 괜찮니?”

그렇게 묻자 카카나가 심장을 찔린 것처럼 훅 숨을 들이켰다. 비브로스가 상처 입은 작은 몸을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기억도 하지 못하는 부모님의 품이 제 어깨를 감싸는 느낌에, 카카나의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

비브로스는 자세한 사정을 묻는 법 없이, 아그리마 트리시에게 연락을 넣었다. 다행히 그녀는 깨어있었다. 불안해 보이는 용사들을 부드럽게 떨쳐내고, 나는 아그리마의 집으로 향했다.

“어지간히 급한, 안색이 왜 그러니?”

“그냥, 좀…….”

“세상에, 창백한 거 봐. 추워서 그러니? 기다려 봐. 유자청이 있거든. 그거 타 줄게.”

나는 그녀가 내어준 자리에 앉아서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잠옷 차림의 아그리마가 유자차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걱정근심으로 흐려져 있었다. 나는 새삼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겁도 없다. 이 시간에 집을 찾아오고. 밤 외출은 자제해야 해. 세상이 무섭잖아.”

“…….”

“나한테 꼭 할 말이 있다고 했지? 마나석이 말썽을 부리니?”

아그리마가 나를 유심히 살피더니 묘한 눈을 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너무 빤히 쳐다봤죠.”

긴장한 탓에 손에 피가 안 돌고 몸이 떨렸지만, 꼭 쥐고 있는 찻잔의 온기가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아그리마는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조용해져 있었다. 나는 털어놓을 시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어떤 식으로 얘기해야 할지 고민이 컸는데, 막상 입을 여니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재미없는 동화책의 줄거리를 읊어주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스승님이 어떻게 죽었고, 거기에 내가 어떻게 얽혔는지를.

아그리마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은연중에 그녀가 나와 말도 섞기 싫어서 그런 거라 생각하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으니 당연했다.

“하아.”

푹 숙인 내 정수리로 아그리마의 진한 한숨이 닿았다. 나는 움찔 어깨를 좁혔다.

“정말 바보 같네.”

아그리마가 작게 중얼거렸다.

“찾던 사람이 코앞에 있었는데 여태껏 몰랐다니.”

“…….”

“바보처럼, 왜 캐볼 생각을 하지 않았지? 생각해보면 너만큼 재능이 뛰어난 약제사는 없는데.”

이어지는 말이 뭔가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그리마는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고 보니 넌 환영마법 반지를 끼고 있었지. 아, 진짜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지?”

“저기…….”

“너 수인족이니?”

“……네?”

나는 얼이 빠져서 되물었다.

“그러니까 너 양 수인족이냐고. 그래? 그 환영마법 반지 좀 잠깐 벗어볼래?”

“자, 잠깐…….”

아그리마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설마 소문의 그 수인족이야? 마족을 해치웠다는?”

내 눈이 이상해진 건지, 심지어 아그리마는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말한 양 수인족이 소문의 그 수인족이 아닐까 생각했었거든.”

그녀의 반응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무, 무슨……. 저를 알고 계셨어요?”

“대충은. 아버지가 간혹 네 얘기를 했거든. 자세한 내막이나 사건은 전혀 몰랐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녀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알게 되네.”

‘그게 끝?’

나는 믿어지지 않아서 입술만 달싹였다. 그녀는 내게 화를 내야 했다. 왜 아버지를 사지로 내몰았냐 원망하고 분을 터트려야 했다.

“왜 화를 내지 않으세요?”

“내가 왜? 아버지가 널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나는 희게 질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때 네가 나보다 한참은 어린 나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네 칭찬을 늘어놓을 때마다 어찌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지금 생각하니 추억이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가 화를 내면 무릎을 꿇고 빌 생각만 했다. 내게 품은 그녀의 호의 어린 마음이 흔들림 없이 굳건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님은 저 때문에 봉변을 당하셨잖아요. 저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에 휘말릴 일도…….”

나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주장했다. 그러자 아그리마의 얼굴이 확연하게 굳었다. 그녀가 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건 참아줄 수 없구나. 아버지의 의지를 우습게 여기는 거니?”

나는 사색이 되었다.

“제, 제가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런데 왜 너에게 휘말렸다고 생각하는 거니?”

“…….”

“휘말린 게 아니야. 본인이 선택한 길이었고, 널 도운 건 아버지에게 긍지였어.”

아그리마가 의심의 여지 없이 굳건하고 강인한 음성으로 못을 박았다.

“난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아버지를 존경했어.”

그녀의 말은 사실인 듯, 아버지를 떠올리는 아그리마의 눈이 자긍심으로 영롱하게 빛났다. 내 눈가에 눈물이 번지자, 아그리마가 상냥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쨌든, 그 살인마가 처참하게 죽었다니 이제야 막힌 속이 뚫리는 기분이야. 목이 찔려 죽었다고? 이렇게?”

그녀가 검지로 제 목덜미를 두드리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제 위험하니 뒤를 캐지 말라고 비브로스의 잔소리를 들을 일도 없겠구나. 편지의 주인도 찾았으니.”

“편지요?”

아그리마가 기다리라는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방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걸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편지봉투가 들려 있었다.

“아버지가 네게 남긴 편지야.”

나는 감히 그 봉투를 건네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었다. 그녀가 직접 내 손을 들어 그 위에 편지를 얹어주었다. 살짝 닿은 그녀의 손이 부드러웠다.

“뭐, 일종의 유언인 셈이지.”

편지를 붙든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발발거렸다.

“아, 알고, 알고 계셨어요? 보, 본인이 죽을 거라는 걸…….”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판단하셨겠지.”

“저는 몰랐어요. 제게, 거, 걱정하지 말라고…….”

각오하고 도와준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색이 되어 부정했지만, 나는 정말로 스승님의 각오를 우습게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저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와 엮여 운이 나쁘게 죽은 거라고, 바보처럼 보잘것없는 수인족 한 명 돕다가 비명횡사한 거라고 여겼다.

이건 분명히 모욕이었다. 나는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르는 것 같아 마른침을 삼켰다. 머리가 뜨끈뜨끈했다.

“자리를 비켜줄 테니 한번 읽어볼래?”

나는 편지를 움켜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리마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자리를 피해 주고도 한참을 봉투만 들여다보았다. 뭐라고 적혀있을까 두려웠다. 막연한 공포였다.

곧 마음을 다잡고 봉투를 뜯어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내용이 제법 길었다. 그것을 첫 줄부터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나는 울먹이며 일그러진 입술에 미소를 띠었다.

뭘 걱정했던 걸까. 스승님이 직접 쓰셨다는 것은 굳이 아그리마가 증언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편지를 읽는데 스승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탈출이 실패로 끝나고 혼자 고통받을 날 걱정하는 목소리가, 무슨 시련이 오든 잘 해낼 거라는 믿음과 위로가, 너울거리며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모든 걸 손에서 놓아버린 뒤 허했던 속이 조금은 채워질 정도로, 바보같이 따뜻한 편지였다.

나는 스승님을 끌어안듯 편지를 품에 안은 채 눈을 감고 잠시간 그 온기를 느꼈다. 착각일까, 스승님의 체온이 내 어깨를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며칠이 지나자, 천마 전쟁의 조짐이 보였다. 제국 곳곳이 시커멓고 새하얀 섬광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반짝였다는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제국 사람들은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내용은 몰랐다. 그러나 자신이 발 디딘 땅이 서서히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건 느꼈다.

대부분의 상가가 문을 닫았으며, 사람들은 이제 대낮이 되어도 바깥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제국이 아닌 이웃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온 세상이 고양이 앞의 쥐처럼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상해…….’

나는 손을 들여다보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나는 분명히 몸이 변한 줄 알았다. 그래서 그에 맞춰 천마 전쟁을 종식할 방법과 친구를 구할 방법을 강구해냈다.

그런데 뭔가에 막혀 있는 것처럼, 몸이 변화를 코앞에 두고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어쩐지 용사들이 아무런 말도 없더라.’

변화가 시작되었다면 용사들이 가장 먼저 알아챘을 터였다. 물론 나를 보며 간혹 미묘한 표정을 짓곤 했지만, 긴가민가한지 그뿐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앉아 고민을 거듭해봤자 소용없었다.

오늘은 폭시에게 마나를 먹이는 날이었다. 나는 저택을 빠져나와 숲으로 걸음을 옮기다 말고 멈칫 굳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폭시가 요즘 왜 날 찾지 않지?’

숲에서 잘 놀다가 간혹 찾아오곤 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최근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날 피하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 만나서 상태를 보면 괜찮겠지.’

오랜만에 혼자 움직이려니 어색했다.

용사들은 마을 하나 날려버리는 게 우스운 마족들을 막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다행히 저택을 포함한 숲 일부까지 스노아가 견고하게 짜놓은 결계로 보호받는 중이라, 어느 정도 혼자 움직일 수 있었다.

“폭시!”

나는 자리에 서서 큰 소리로 신수를 불렀다.

“폭시! 이리 와! 밥 먹을 시간이야!”

한참을 불렀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역시 이상해. 평소라면 벌써 와있었을 텐데…….’

나는 하는 수 없이 목에 달고 있던 작은 호각을 꺼냈다. 얇은 막대를 입에 물고 삐익, 힘을 주어 불자 얼마 지나지 않아 폭시가 공간을 넘어왔다.

“폭시, 왜 이렇게……. 폭시?”

나는 폭시에게 달려가려다 말고 움찔 멈추었다. 폭시가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태도가 몹시 기이하여 가만히 쳐다보았더니, 수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이마의 뿔이 원래 저렇게 컸었나?’

언뜻 보면 하얀 보석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마의 뿔이 거대하게 솟아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뿌리를 내린 식물처럼, 폭시의 이마와 머리를 뿔의 줄기 같은 것이 꽉 움켜쥐고 있었다.

‘꼭 기생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심각하게 눈썹을 구겼다.

“폭시, 어디 아파?”

내 목소리를 들은 폭시가 더 괴로워진 듯 낑낑거렸다. 나는 폭시의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하얀 침 거품을 보고 망설임을 끝냈다.

죄책감이 치밀었다. 최근 바빠서 폭시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아픈 줄도 모르고 하나뿐인 주인이 찾지도 않았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힘들면 날 찾아오지 그랬어.”

나는 속이 상해서 폭시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폭시. 괴로웠지? 편하게 해줄게.”

폭시가 침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좌우로 거칠게 도리질하더니, 다가오는 날 보고 뒷걸음질 쳤다. 나는 최대한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쉬이, 괜찮아. 이리 와.”

나는 거칠게 숨을 씩씩거리는 폭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옳지.”

그리고 아이의 등에 손을 올린 순간.

콰득―!

폭시의 날카로운 이빨이 내 팔뚝을 꿰뚫었다. 나는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가, 별안간 악 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였다.

눈앞에서 별이 튀는 고통에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거칠게 숨만 들이쉬는데, 폭시가 나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면 결계 바깥이었다.

나는 너무 아파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꾹 깨문 뒤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비명처럼 높다랗게 찢어졌다.

“폭시, 안 돼! 폭시!”

물린 팔뚝 때문에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면서 폭시의 눈을 확인했다. 초점이 없었다. 이마의 뿔은 이제 거의 투구처럼 폭시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보통 뿔이 아니다. 이게 문제를 일으킨 게 분명했다.

폭시! 다시 소리 지르려는 찰나, 정신이 아찔하게 멀어졌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내 이성이 몸 바깥으로 밀려 나오는 듯한 느낌. 소름 끼치도록 불쾌한 감각이었다.

신수의 이빨은 마음만 먹으면 영혼도 꿰뚫을 수 있다. 그제야 폭시가 단순히 내 팔뚝을 깨문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수는 천계의 동물이었다.

천계.

[뭐, 아직 방법은 많으니까요.]

아나스타스의 말이 떠올랐다.

‘이게 그 방법이구나.’

나는 흐릿해진 눈으로 폭시의 뿔을 바라보았다.

신수는 평생 한 명의 주인만 모신다고 들었다. 폭시가 이런 걸 원했을 리가 없다. 뿔이 비극의 원흉이었다.

아나스타스의 계획은 아주 오래되었다. 이전에 벌어졌던 격동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왔다.

‘아무 이유 없이 천계의 동물인 신수가 퀄리티미엄에 숨겨져 있을 리 없지.’

나는 비소를 머금었다. 이곳에서 마음껏 부릴 ‘도구’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녀를 향한 내 분노에 활화산 같은 불길이 옮겨 붙은 동시에, 의식이 끊어졌다.

그리고 그런 카카나를 막아선 존재가 있었다.

그가 제정신이 아닌 폭시를 간단히 기절시키고 카카나의 팔뚝을 지혈하며 품에 안아 올렸다. 그녀가 결계를 벗어난 걸 느낀 용사들이 즉시 숲으로 찾아들었다. 카카나를 안은 수상한 남자가 자기를 에워싼 용사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

“정신이 들어요?”

나는 헉,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가 싶어 눈을 비볐다. 사면에 하얀 벽지를 바른 방이 아니라, 말 그대로 뻥 뚫린 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근처엔 테이블과 소파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가 화들짝 놀라며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폭시가 물었던 흔적이 없다.

‘진짜 꿈인가?’

얕게 신음하며 이마를 짚는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기겁하며 일어섰다. 나를 흘끗 바라본 그녀가 화려한 은발을 귀 뒤에 꽂으며 설명했다.

“저는 아나스타스가 아니에요.”

나는 적대감이 만연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네가 아나스타스가 아니면 누군데.”

“제 몸을 보세요.”

그녀가 차고 엄정한 어조로 뇌까리며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았다. 우아한 몸짓이었다.

“제가 누구지요?”

망설임이 없고 강인한 목소리. 나는 그녀의 맑은 제비꽃 색 눈망울을 빤히 바라보며 느지막하게 대답했다.

“황녀?”

“그래요.”

그녀가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진짜 황녀라고?”

오로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했을 뿐인데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나는 절로 가지런해지는 몸가짐을 의식하며 도로 소파에 앉았다.

황녀는 오늘 처음 보았지만, 이런 분위기의 사람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나스타스에게 놀아나며 한껏 나약하고 유약해진 사람일 거라 예상했다.

‘그러고 보니, 아나스타스의 정신에 끝까지 저항했다고 그랬지.’

마치 황제의 재목을 타고난 사람처럼 위압감을 몸에 두르고 있는 여인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말에는 무게가 있었으며, 평생 기사의 길을 걸은 사람처럼 허투루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자그마한 체구로 얌전히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상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전신에서 흘렀다.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의 고귀한 혈통을 주장하는 것 같았다.

아르모어처럼.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흔들림이 없는 그녀의 깊고 진중한 눈빛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죠?”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황녀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한 번 눈꺼풀을 움직일 때마다 은빛 속눈썹이 유려하게 팔랑거렸다.

“무엇이 말이죠?”

“여긴 어디고, 제가 어떻게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거죠? 당신은…….”

“신수에게 물렸을 겁니다. 맞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이 약해진 틈을 타 아나스타스가 침투했을 거예요.”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제, 제가 몸을 빼앗겼다는 건가요?”

“아니요. 중간에 방해를 받았어요. 어중간하게 정신이 혼재해 있는 상태입니다. 여긴 깊은 의식 속이에요.”

오로라가 간결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저와 당신이 만날 수 있었던 거죠. 걱정하지 말아요. 곧 깨어날 테니.”

아직 혼란스러운 것투성이였지만, 황녀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태도가 내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어깨에 힘을 풀고 소파에 늘어졌다. 긴장이 풀리면서 신경줄도 같이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초월자가 됐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군요.”

나는 편하게 쉬다 말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오로라는 폭탄 발언을 한 사람답지 않게 태연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모르는 게 이상하지요. 초월자는 범인이 아닙니다. 정신이 혼재해 있으니 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어요.”

“…….”

“당신도 제 기운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확실히 그렇다. 나는 오로라의 압도적인 분위기와 사람을 휘어잡는 눈빛을 여실히 느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인족의 몸으로 이리나엘의 마나를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중간계의 마나로 초월자의 단계에 이른 지금의 용사들과는 상황이 달라요. 당신은 중간계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천계의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황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종족으로 따지면 혼혈로서 최초의 초월자로군요. 차원이 당신을 중간계의 주인으로 받아들인 건 꽤 괄목할 만한 부분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세요?”

“전 아나스타스와 일평생을 함께했습니다.”

오로라의 한쪽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눈으로 많은 것을 지켜보았고, 그녀의 생각으로 많은 정보를 넘겨받았지요.”

오로라가 문득 입을 다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하게 한숨이 섞인 음성으로 속삭였다.

“중간계를 침입한 천족의 목표는 새 시대를 여는 겁니다. 열등한 종족을 쓸어버리고, 악 한 점 없는 낙원을 세우려 하고 있어요.”

“제정신이 아니군요.”

악 한 점 없다는 건 무슨 말인가. 이미 그들 스스로가 악이 아니던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더니, 놀랍게도 오로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을 뿐인데 놀라울 정도로 따뜻해 보였다.

“솔직한 분이시군요.”

그녀에게 차갑고 냉정한 모습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냉정할 땐 냉정하고, 따스할 땐 따스한 황제의 핏줄이라…….’

나는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단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오로라가 슬며시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천계에서도 이미 쫓겨나거나 감금되어 있던 인물들입니다.”

“그러니까, 천계의 사상범들이 중간계로 내려와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건가요?”

“정확한 표현이군요.”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오로라가 그런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친구들을 걱정하고 있지요?”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다 말고 움찔 멈추었다. 눈만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로라가 내 사나운 기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비록 육체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이나 정신은 또렷하게 살아있어요. 저처럼 의식 깊은 곳에 봉인 당했을 뿐이지요.”

“…….”

“다다나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통해 모든 진실을 알았을 거예요. 비슷한 육체를 지녔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늦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로라가 힘을 주어 대답했다.

“희망을 가져요, 카카나. 당신은 해낼 수 있습니다.”

나보다도 확신에 찬 어투였다. 오로라가 내 마음 언저리에 끈질기게 붙어있던 불안의 찌꺼기를 대신 없애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상당히 이상한 감각이었다. 나는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어정쩡하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곧 깨어나겠네요.”

“지, 지금요?”

오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된다. 아직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자, 잠깐만요! 전 어떻게 해야 하죠?”

“무엇을 말이죠?”

“초월자가 됐는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면서요.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죠?”

오로라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깜박였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도와줄 인물이 있어요.”

“그게 누군가요?”

오로라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 애매한 표정이었다.

잘못 봤나 싶어 그녀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폈지만,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어느새 담담하게 돌아와 있었다.

“아나스타스를 막고 싶어 하는 마족이 있습니다.”

***

아다르가 카카나의 자그마한 몸을 끌어안아 등을 도닥였다.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안아주면 조금이나마 따스한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젠장, 왜 항상 이렇게 되는 거야.’

아다르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카카나는 계속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녀를 혼자 두는 것 같아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

아다르가 거칠게 한숨을 내쉬자, 근처에 앉아 발을 까딱이던 마족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렇게 열 내지 마, 형씨. 분명히 깨어날 테니까. 내가 타이밍을 잘 잡았거든.”

“닥쳐.”

아다르가 으르렁거렸다.

“너를 어떻게 믿지?”

“내 이름은 너가 아니라 아무스라니까.”

아무스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다르는 아무스가 가져온 우리에 갇혀 낑낑거리는 신수와, 물린 상처의 통증이 조금 괜찮아진 듯 쌕쌕 숨을 내쉬는 카카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스가 아니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그가 카카나를 구하지 않았으면 아마 그 자리에서 아나스타스에게 몸을 빼앗겼을 테니까.

‘대체 무슨 속셈이지?’

“찢어버리기 전에 그만 입을 열지?”

아다르가 위협적으로 중얼거렸다.

“네 말대로, ‘편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집에 초대해줬잖아? 안 그래? 저 바드 새끼도 포함해서 말이야.”

고깔모자를 코까지 푹 눌러쓴 채 팔짱을 끼고 있던 바드가 입만 드러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언제 봐도 기분 나쁜 녀석이었다.

“그래, 그래. 안 그래도 저 거대한 형씨가 내 목을 물어뜯을 것 같아서 벌벌 떨고 있던 참이거든.”

아무스가 할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엄살을 피웠다.

‘진짜 쥐어 패버리고 싶은 성격이네.’

아다르의 몸에서 갈무리되지 않은 살기가 넘실거리며 흐르려 하자 카카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황급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쉬이. 카카나. 미안해.”

그가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흐트러진 잔머리를 정리해주자, 아무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얼굴에 철판을 깐 그여도 아다르의 애틋한 행동을 맨눈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스가 짝, 손뼉을 치며 말했다.

“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겐 계획이 있어. 그리고 우리 용사님들에게도 참 좋은 계획일 거야.”

할릭이 대놓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스가 아랑곳하지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중간계에서 지긋지긋한 마족이랑 천족을 쫓아내고 싶지 않아? 난 그게 목푠데.”

용사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험악해지자 아무스가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억눌렀다.

“물론 마족이 이런 말을 하면 수상하겠지.”

“자각은 있군.”

벽에 기댄 채 서 있던 아르모어가 천천히 눈을 뜨며 대답했다. 어둑한 거실에서 시뻘겋게 번뜩이는 눈과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친 아무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잔악한 색상이 저렇게까지 잘 어울리는 인간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붉은 눈을 가진 마족보다 더 오싹한 분위기의 수인족이었다.

아무스는 마족의 본능으로 말미암아,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이 저 용 수인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조금 더 진지한 태도로 접근할 필요성을 느꼈다.

“당신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어. 마족은 절대악이 아니야.”

“…….”

“천마전쟁은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선악의 부대낌으로 단순하고 쉽게 정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아무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너희들과 다른 생명, 힘, 몸을 지녔지만 똑같이 신의 피조물이란 거지.”

“그래서?”

“중간계를 침입하는 데 반대하는 마족들도 있어.”

아다르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래서 네가 그 ‘반대하는’ 입장이다?”

아무스가 쓰게 웃었다.

“좀 다르지. 난 반대한다기보다 아나스타스를 막고 싶은 것뿐이거든.”

거실이 조용해졌다.

아무스는 아나스타스를 향한 용사들의 적대감이 상상 이상임을 실감했다. 대기를 짓누르는 압박감과 그를 바라보는 다섯 쌍의 눈알들이 제각각 인간이라 볼 수 없는 이채를 띠고 번들거렸다.

아무스의 등으로 슬그머니 식은땀이 비쳤다. 초월자가 내면에 숨겨둔 분노란 자연재해에 가까웠다.

‘대체 뭘 하고 다닌 거냐, 아나스타스.’

그녀의 목표는 카카나 페아의 몸이다. 용사들이 애지중지하는 그녀에게 상상도 하지 못할 상처를 줬을 것이 분명했다.

얼굴에 꽂히는 형형한 눈빛을 애써 흘려보내며, 그는 계획을 조금 변경했다. 원래는 적당히 거짓말을 내두르며 용사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 했다.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니까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하지만 이런 녀석들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자신의 체스판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말들이 아니다. 진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그가 준비한 체스판을 아예 부숴버릴 작자들이다.

“아나스타스는 내 이복동생이야. 혼혈이지.”

의외의 말인 듯, 잠자코 경청하던 스노아의 눈썹이 위로 슬쩍 들렸다.

“그 아이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천계로 갔어. 천족은 콧대가 높고 자존심이 강한 종족이야.”

아무스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곳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예상이 되지?”

“…….”

“아나스타스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더러운 피를 혐오하고 천족에 집착했어.”

아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말하자면 ‘천족스러운’ 데 집착한 거지.”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착잡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용사들은 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가 마족이다 보니 쉬이 믿음이 가지 않았던 탓이다.

그들이 여태 맞닥뜨렸던 마족은 보통 교활한 족속들이 아니었다. 또 어떤 술수를 펼치려고 저러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당한 일이 있는 데다, 한번 강하게 형성된 편견 때문에 상황을 따지기가 여의치 않았다.

“아나스타스의 생각은 극단적이었고 천계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극단적?”

“천족 외의 존재들은 하등하고 타락하기 쉬우니 없애자는 주장이지. 물론 동생과 달리 제정신인 다른 천족들은 고개를 내저었고.”

아무스가 벌레라도 씹은 얼굴로 중얼댔다.

“그러는 자기도 혼혈이면서?”

아다르가 빈정거리자 아무스가 픽 웃었다.

“혼혈인 동시에 천족이기도 해. 아나스타스가 천족에 집착하고 있다 했잖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계속 ‘천족스러운’ 짓을 하면 자기가 순혈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타고난 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혼혈과 순혈 천족의 간극을 줄일 순 없을 것이다. 아나스타스는 서서히 미쳐갔다.

“천족들이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니까 이곳에서 새 출발을 하려고 마음먹은 모양이더군.”

“너는 동생을 왜 막으려고 하는 건데.”

아다르가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아무스가 픽 웃으며 반문했다.

“설마 내가 마족이라서 정이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지?”

제발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의견을 제시한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투였다. 아다르의 눈가가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리자, 아무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물론 마족은 잔인한 성정을 타고나지. 마계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땅이니, 살인이 밥 먹듯이 일어나고.”

“…….”

“하지만 가족은 달라. 아나스타스는 내게 하나 남은 가족이라고. 저대로 계속 난리 피우게 둘 순 없어.”

아무스가 고통스럽게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저러다 언젠가 천계로 끌려가서 참수당할 거야.”

“참수?”

할릭이 험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 천계와 마계는 평화협정을 맺은 상태야. 마족이야 원래 싸우라고 태어난 존재들이니 그냥 내버려 둘지 몰라도 천족은 아니야. 꽤 고지식한 종족이거든. 여기서 더 가면 분명히 아나스타스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무스 또한 아나스타스와 발맞춰 아주 오랫동안 계획을 세웠다. 시간을 들여 준비하고, 그에 맞춰 움직이고, 철저히 계획에 따라 상황을 주무르고……. 우스울 정도로 닮은 성격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 걸지도 몰랐다.

마족은 하나에 집착하면 끝이 없는 종족이었다. 바드가 집착하는 대상이 카카나 페아라면 아무스의 집착 대상은 아나스타스였다.

그때 아르모어가 갑자기 자세를 바로잡더니 아무스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한 손을 뻗어 아무스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수십 마리의 검붉은 나비가 아무스의 머리를 뒤덮었다. 그는 홀린 듯 몸을 늘어트렸다.

아르모어가 사람 머리가 아니라 물건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아무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감정이라곤 한 톨도 깃들지 않은 눈이었다.

“거짓은 아니군.”

그가 손을 떼며 말했다. 아무스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얼이 빠진 눈을 했다.

“이렇게 막 대해지는 거 머리털 나고 처음인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첼러스가 진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무스가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왜 진작 나서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바드의 행동도 납득할 수 없군요.”

“중간계를 꿀꺽하려는 마족들 틈에 숨어들어서 이런 계획을 세우기가 쉬운 일인 줄 알아?”

그간 고생한 게 생각나는 듯 아무스가 역정을 냈다.

“바드도 어제가 되어서야 내 진짜 의도를 알았다고.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바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질린 눈으로 바라본 아무스가 짧게 첨언했다.

“얜 재미있으면 장땡이거든. 다행히 카카나에게 꽂혔고. 그럴 것 같아서 데려오긴 했지만.”

용사들이 몹시 거슬린다는 듯 굵직한 눈썹을 구겼다. 첼러스가 검지로 미간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래서, 마족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시간을 끌었단 말입니까?”

“다양한 이유가 있지. 내 계획엔 조건이 필요했거든.”

아무스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중 첫 번째는, 아가씨의 힘.”

그의 눈이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한 카카나를 가리켰다.

“곧 완벽해질 거고.”

용사들의 표정이 의아하게 물들었다.

아무스는 이것에 대해선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눈으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들의 힘. 무기도 다 찾았고, 천족과 마족은 정체를 드러냈고, 곧 우르르 바깥에 나와서 전쟁을 치를 예정이지.”

“…….”

“전쟁에서 이겨야 하니까 힘이 더 필요하겠지? 가지고 있는 유물은 모두 사용해서 동료를 부를 거야.”

아무스가 활짝 웃었다.

“일망타진하기 지금처럼 딱 좋은 때가 없어. 최적의 시기란 소리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하나 남았어. 이 귀여운 아가씨가 ‘깨어나면’ 되는 거지.”

그가 마치 돈 많은 손님을 접대하는 상인처럼 두 손을 맞비비며 입맛을 다셨다.

“최적의 패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성장해줄 줄이야. 나는 이미 완벽한 각성이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성장할 여지가 더 있지 뭐야?”

그가 코를 킁킁거렸다.

“터져 나오지 못한 천족의 마나가 안에서 고통스럽게 소용돌이치고 있어. 마족은 알 수 있지.”

바드마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용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카카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다르는 이미 카카나를 품에 안은 채 그들에게서 한참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좋은 말로 할 때 앉아.”

할릭이 위협했다.

“그러지 마. 아가씨를 위해서 하는 거야. 진짜야.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 저 무서운 형씨가 나비로 내 혼을 홀려도 좋아.”

아무스가 말하기 무섭게 아르모어가 능력을 사용했다. 한 번쯤은 고민할 줄 알았던 그의 손속에 자비가 없자 아무스가 컥, 하는 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아르모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스의 목을 놓아주었다. 죽이지 않았다는 건 이상이 없다는 얘기다. 그가 눈물이 삐죽 솟은 얼굴로 목을 잡고 캑캑거렸다.

“아, 진짜. 당신 사실은 마족 아니야?”

아르모어의 미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대충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설명이나 제대로 하라는 얼굴이었다.

아무스가 진저리를 치며 항복하듯 두 손을 들었다.

“알았으니까 설명해줄게. 바드가 아가씨에게 아주 강력한 저주를 걸 거야. 효능은 믿어도 돼. 바드는 제일가는 흑마법사거든.”

할릭이 그의 말을 잠자고 듣더니, 제 귀를 새끼손가락으로 후벼 파며 말을 이었다.

“방금 죽여달라고 말한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아다르가 아니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아무스가 버럭 소리쳤다.

“잘못 들은 거야! 들어 봐. 지금 육체가 성장 속도를 못 따라가서 아가씨의 힘이 갇혀 있어. 이걸 강제로 뚫어주려는 거야.”

“저주를 걸어서?”

아다르가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너희들 천족의 마나가 어떤 건지 몰라?”

아무스가 곧장 건들거렸다.

“저주가 아가씨를 죽이는 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어. 천족의 마나는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

“독극물이 그녀의 몸을 깨웠듯이, 저주가 그녀를 깨울 거야. 알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바깥에서 조금 금이 가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아무스가 빙긋 웃었다.

“아가씨가 깨어나면 장난 아닐 거야. 분명히 천마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거라고. 확신해.”

“시간 끌지 말고 그만 비키지.”

인내심에 한계가 온 지 오래인 바드가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비키라고 턱짓했다.

“그러고 있으면 저주를 못 걸잖아.”

그래도 용사들이 비키지 않자, 그가 한숨을 쉬며 아공간에서 묵직한 보자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으니 안에서 유리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영 못 믿겠으면 이거 가져. 축복과 정화의 기도가 깃든 헬리스의 눈물이니까.”

아무스가 진정 감동한 얼굴로 바드를 바라보았다.

“야, 네가 웬일이야? 이런 계획성을 보이고?”

바드가 짜증 난다는 듯이 아무스를 밀었다.

“그냥 보이길래 신전에서 훔쳐놓은 거야.”

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스노아가 약물을 확인했다. 빛에 비추어보자 은은하게 금빛이 감돌았다. 보통 성수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정말 헬리스의 눈물이네요.”

양이 얼마나 많은지 욕조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아무리 강한 저주여도 헬리스의 눈물로 채운 욕조에 들어갔다 나오면 정화되지 않곤 못 배길 것이다.

“저렇게 기운이 막혀 있는 상태로 있으면 카카나에게도 안 좋아.”

아무스가 결정타를 날렸다. 용사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도 카카나의 분위기가 달라진 건 알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성격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카카나가 지나다니는 곳마다 대기의 마나들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마치 달라붙어도 되는 인간인지 아닌지 헷갈린다는 것처럼.

용사들이 잠깐 망설이는 찰나, 바드가 귀신같이 카카나에게 저주를 걸었다. 그가 걸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이고 위협적인 저주였다.

그녀의 안색이 시체처럼 푸르스름하게 질리자 용사들의 기색이 대번에 변했다. 스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싸늘한 물빛 눈망울로 바드를 노려보았다.

“혹시 모르니, 전 욕조에 미리 헬리스의 눈물을 받아놓을게요.”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 잘못되면 누가 책임지는 거지? 아니, 책임을 질 수는 있는 건가?”

아다르가 너무 시커메서 거의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눈으로 바드를 노려보았다. 아무스가 끌끌 혀를 찼다.

“그렇게 그녀를 믿지 못해서야. 아가씨가 당신들 질린다고 말 안 해?”

“…….”

“좀 믿는 시늉이라도 해봐.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녀는 훨씬 유능하다고.”

그건 용사들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카카나가 조금이라도 잘못될 가능성을 견디지 못할 뿐이었다. 카카나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에 한해서 용사들이 지나치게 나약해지기 때문이었다.

“무식하긴 해도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아가씨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아무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독을 섭취해서야. 끊임없이.”

“그 입 안 닥치면…….”

이 위험천만한 상황과 불안을 더 견딜 수 없었던 용사들이 마족에게 달려들려던 찰나였다.

“저거 봐.”

아무스가 아다르의 말을 잘라내고 카카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벌써 깨어나고 있잖아.”

용사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카카나의 몸에서 실바람 같은 미풍이 불어 나오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을 에워싼 대기의 마나가 크게 흔들렸다.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맞닥뜨린 것처럼.

잠잠한 호수에 거대한 바위가 낙하한 것 같은 파동이 한참을 이어졌다. 용사들은 이 증상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 상황을 겪고 난 뒤에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카카나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카카나의 몸을 잠식하던 저주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몸은 마치 폭시의 갈기처럼 은은한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그녀가 가진 마나의 색상인 게 분명했다.

어느 순간, 우리에 있던 폭시도 움직임이 잠잠해졌다. 아르모어가 눈을 굴려 신수의 상태를 살폈다. 침을 질질 흘리며 이마에 박힌 뿔이 괴로운 듯 계속 머리를 흔들던 신수가 조용해져 있었다.

그는 예민한 수인족의 눈으로 폭시의 뿔에 금이 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나스타스가 농탕질을 쳐놓은 족쇄가 카카나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깨져나가고 있었다.

폭시는 카카나의 권속이었다. 자신의 권속을 돌려받을 때였다.

그는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최적의 시기를 찾아 변화하고 있는 카카나의 신체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뺨이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고 키는 전보다 살짝 작아졌다. 발그레한 복숭아처럼 보슬보슬한 솜털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앙증맞고 귀여운 입술은 어여쁘게 붉은 물이 들고 고생을 많이 해 푸스스한 머리카락은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초월자.

영원을 사는 존재.

아르모어의 입술에 비스듬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오래도 걸렸군…….’

그가 나른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대가 말한 게 이것이었나? 드래곤로드.’

[그 순간이 오면 마침내, 허무한 삶에서 초월자로서의 모든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아아, 그래. 확실히 알겠다.

한자리에 모인 용사들은 그녀로 인해 울고 웃으면서 다시 태어났다. 초월자가 되면서 오히려 숨이 죽은 모순적인 영원 속에서, 정신을 다시 일깨우고 감정을 배웠다.

그들은 깨달을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 그 지독하고 허무했던 자신의 지난 삶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무엇을 위해 그 긴 시간을 버텨야만 했는지.

이제야 막, 진정으로 깨어나려 하는 소중한 존재가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카카나 페아.

그들의 의미, 존재의 이유, 삶과 영원, 그들의 신.

그것을 깨닫자, 먼저 깨어난 초월자로서 해야 할 일도 명확하게 정의되었다.

‘용사가 깨어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지키는 것, 인가.’

아르모어의 붉은 눈이 깨어나려는 듯 파르르 떨리는 카카나의 눈꺼풀로 향했다.

그의 입술에 최초로, 만개한 미소가 떠올랐다.

***

눈을 떴을 때 나는 상당히 기묘한 감각에 휩싸여 있었다. 뭐라 말로 간단하게 형용할 수가 없는 느낌이었다.

몸은 지나치게 가벼웠고, 정신은 커피를 들이부은 것처럼 선명해서 되레 조금 어지러웠다. 게다가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는 듯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말하자면 온수로 가득 찬 얇은 비누 거품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괴상한 경험에 얼굴이 자동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눈앞에 보이는 건 내 자그마한 방인데, 이상하게 감각이 넓었다.

나는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낯선 인기척 둘과 복도에서 서성거리는 용사들을 느낄 수 있었다…….

“헉!”

몽롱하게 멀어지던 정신이 별안간 되돌아왔다. 나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내가 미쳤나?’

“뭐지?”

나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손으로 삭삭 쓸었다. 몸으로 넘어오는 감각 정보가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웠다. 아니, 혼란스러워야 하는데 팔다리를 쓰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불안감으로 심장이 콩콩 뛰었다. 가슴팍을 짓누르며 호흡을 고르고 있자니 누군가가 내 방 문을 두드렸다.

아니, 누군가가 아니다. 나는 저들이 누군지 안다. 용사들이다. 다섯 명 전부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얼어붙어서 문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당황하고 겁먹은 정신에 서서히 이성이 돌아왔다.

‘초월자가 된 건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신거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평소의 나인데, 미묘하게 다른 얼굴이 비쳤다. 훨씬 생기가 돌고 싱그러운 느낌이었다. 그래, 방금 막 꽃을 활짝 피워내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식물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 얼떨떨하게 뺨을 쓸었다. 내가 만지는데도 참을 수 없이 부드럽고 몰랑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적응이 안 됐다. 내 몸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인형의 몸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아다르가 뛰쳐 들어왔다.

나는 휘둥그렇게 뜨인 토끼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씩씩거리며 신경질적으로 열린 문을 두드렸다.

“몇 번이나 노크했는지 알아? 나중에 오라고 대답이라도 해주든가!”

“미, 미안…….”

“이젠 복도에 서 있는 게 우리라는 걸 바로 알았을 거 아니야!”

“그, 그렇긴 한데 적응이 안 돼서…….”

나는 멍하니 대답하다가 별안간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소리쳤다.

“그런데 왜 큰 소리야? 그럴 수도 있지!”

앙칼진 반응에 아다르의 눈이 동그래졌다. 화낸 나도 깜짝 놀랐다.

“어렸을 땐 좀 더 불같은 성격이었나 봐?”

아다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게 차분해진 거였다니…….”

“뭐, 뭐라고?”

“모르겠어? 너 조금 어려졌잖아. 키가 작아졌던데?”

“뭐라고?!”

나는 절규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거울만 봐서는 그 차이를 느끼기 힘들었다.

나는 냉큼 아다르에게 걸어가 키를 비교해보았다. 면밀하게 대보고 고민해볼 필요도 없었다. 그를 보기 위해 전보다 더 심하게 목을 꺾어야 했다.

나는 얼굴을 부여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안 돼! 난쟁이가 되어버렸잖아!”

아다르가 킥킥 웃으며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뭐 어때, 귀엽기만 하고만.”

“이거 안 내려놔?”

그의 머리를 틀어쥐고 흔들어 재끼는데 뭐가 그렇게 행복하고 기쁜지 아다르는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용사들이 모두 방 안으로 들어오자 북적이는 느낌이 들었다. 문을 닫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첼러스가 나를 보며 상냥하게 눈가를 휘었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나는 발그레한 얼굴로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멍하니 대꾸했다.

“좋은 것 같아.”

“다행이군요.”

가까이 다가온 첼러스가 갑자기 고개를 비틀더니, 아다르의 품에 안겨있는 내 입술을 쭉 빨아 당겼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첼러스가 내 눈가에 연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다르만 기분이 좋은 줄 알았더니 첼러스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새삼 용사들의 얼굴을 한 명씩 확인해 보았다. 모두 날아갈 듯이 행복해 보였다.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이는데 아다르가 나를 침대에 내려주더니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한테 뭐 할 말 없어?”

“응?”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나를 바라보는 다양한 색상의 눈들이 기대로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별안간 무언가를 깨닫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응? 카카나.”

아다르가 은근하게 채근했다. 스노아는 이미 내 오른편에 앉아 귓가에 입술을 지분거리고 있었다.

사실은, 세상이 요지경만 되지 않았더라도 수명이 늘어나자마자 고백을 할 작정이었다. 꽃을 준비하고, 분위기 좋은 장소를 찾아서. 수명도 늘어났겠다, 더 급할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렇게 기대하는 눈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약해졌다.

망설이는 사이 침대가 뒤로 조금 기울었다. 할릭이 내 뒤로 와 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첼러스는 왼편에 서서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고, 아르모어는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정인에게 둘러싸인다는 게 이런 걸까. 계속 이러고 있다간 내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입을 열면 혓바닥 위로 심장이 안착할 것 같은 기분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을 꺼냈다.

“너희들.”

입을 열자마자 그들이 주의를 바짝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처음 기세와 다르게 목소리가 점점 바닥으로 기어들어 갔다. 나는 푹 익은 얼굴을 밑으로 숙이며 거의 속삭이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 내, 내 거…….”

“응?”

아다르가 웃음기가 묻어나는 다정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나는 땋은 머리카락 한 줄기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죄인처럼 속삭였다.

“내, 거, 하자.”

‘이게 무슨 멍청이 같은 소리지.’

당장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졌지만 이미 늦었다. 내 말을 듣기 위해 숨까지 죽이고 있던 용사들의 귓바퀴로 전부 굴러 들어간 뒤였다.

“이, 이제 내 방에서 나, 앗!”

몸이 뒤로 풀썩 넘어갔다. 다행히 할릭의 가슴팍에 부딪혀 반쯤 앉은 자세였지만 몸은 이미 누워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할릭이 내 몸을 꽉 조이며 목덜미에 입술을 짓누르는 동시에, 아다르의 뜨거운 혀가 입을 가르고 들어왔다.

“으응!”

금세 그렁그렁해진 내 눈물을 스노아가 받아마셨다. 첼러스가 부들부들 떨리는 내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의식이 쭈욱 미끄러져 육신을 벗어났다. 나는 경악과 아득한 느낌이 혼재한 눈으로 아르모어에게 구원 요청을 보냈다.

그가 내게 천천히 다가오긴 했지만, 구해주러 온다는 느낌이 없었다. 아르모어가 욕정이 치미는 것처럼 제 윗입술을 느릿하게 핥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몸의 솜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이 미친놈들아, 떨어져!’

한 명씩 상대해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고백한 당일에 다섯 명과 침대에서 뒹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못 버틴다.

나는 못 해!

“으브응, 으읍!”

아다르를 밀어내려고 두 다리를 미친 듯이 버둥거렸더니, 그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물러서 주었다. 나는 죽을 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학, 하악!”

“왜 그렇게 밀어내. 싫어?”

“다, 다섯 명은 싫어! 모, 모, 못해!”

두려움과 무서움이 어그러진 눈물이 한가득 차오르자, 아다르가 입맛이 동한 사람처럼 뜨거운 숨을 뱉었다. 그 모습이 내 두려움을 더 부채질한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급기야 울기 직전인 나를 아다르가 상냥하게 달래기 시작했다. 지금 내 심정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그들을 한 명씩 상대할 때도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다섯 명은 싫어?”

“응, 으응.”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내가 같이 있어 줄까? 쟤들은 내보내고?”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야!”

할릭이 개수작 부리지 말라며 뒤에서 성질을 내는 소리도 안 들렸다.

“야. 들었지? 다 나가.”

아다르가 언제 웃었냐는 듯이 표정을 싹 바꾸며 그들을 내몰았다. 양몰이 하는 개, 아니 늑대 같은 얼굴이었다.

“불공평하잖아.”

할릭이 투덜거리자 아다르의 낯빛에 야차 같은 기색이 어렸다.

“공평하려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어야지. 아니야?”

‘무슨 기회……?’

이해가 되지 않아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용사들이 납득한 얼굴로 순순히 물러섰다.

탁, 문이 닫혔다.

아다르가 뱀처럼 길게 찢어지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나는 흠칫 놀라 몸을 물렸다.

“자, 단둘이 됐어. 카카나.”

“자, 잠깐…….”

몸이 뒤로 넘어갔다. 아다르가 먹잇감의 목을 무는 맹수처럼 물 흐르듯 내 위로 올라와 입술을 샐쭉하게 휘었다.

나는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아다르의 낮은 음성이 귓가에 진동하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왜 그렇게 떨어, 카카나. 누가 보면 내가 너 잡아먹는 줄 알겠어. 응?”

그제야 ‘공평한 기회’가 뭔지 깨달았다. 다섯 남자 중 나와 잠자리를 하지 않은 사람은 아다르가 유일했다.

나는 순식간에 겁에 질렸다. 여태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평소 그의 성격이 어떤지 생각해보라!

“쉬이, 겁먹지 마. 상냥하게 할게. 응?”

“거, 거거, 거짓말.”

나는 그의 말을 한 톨도 믿지 않았다. 아다르가 상냥하게 할 리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오들오들 떨었다. 평소에 그가 보였던 사디스트 같은 면모가 공포의 기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 아프게, 아프게…….”

“당연히 그렇게 안 하지. 그런 건 내 취향이 아니거든.”

아다르가 입술을 삭 핥으며 말했다.

“난 오히려 그 반대가 좋아. 울고 싶을 정도로 기분 좋게…….”

응? 되묻자 그가 빠르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카카나. 너를 원해. 미칠 정도로.”

“으, 흐으…….”

“허락해 줘. 나에게도 기회를 줘. 왜 나만 미워해. 불공평하잖아.”

아다르가 정말로 서글프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짜 상냥하게 할 거야?”

“당연하지.”

“너무 오래 하는 건 싫어.”

“알았어. 카카나가 싫다는 건 안 할게. 네가 ‘원하는’ 것만 할게.”

“정말로?”

아다르가 생긋 웃었다. 그건 아무런 문제도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응. 원하게 만들어줄게.”

그때는 그게 그렇게 무서운 말인지 몰랐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허락의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다르의 얼굴이 곧장 가까워졌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네가 녹아 없어질 정도로 부드럽게 해줄 테니까…….”

아다르가 씩 웃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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