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낙원을 위하여
“카카나.”
“빌어먹을 귀족 놈들.”
나는 뒷골이 당겨서 잠시 의자에 축 늘어졌다. 스노아가 걱정 어린 눈으로 옆에서 찬물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꿀꺽꿀꺽 들이마시며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여기저기 전염병이 돌아 몸이 열 개여도 부족했다. 마족과 마물, 사기가 팽배한 탓에 온 제국인들이 날이 서 있었다.
의심과 경계심이 강한 사람들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설득을 시도하다가, 우리는 결국 환영마법을 벗어던지는 방법을 택했다.
사람들은 소문 속 그 모습을 쏙 빼닮은 우리를 황제나 신처럼 모셨다. 신수인 폭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내가 주는 약을 순순히 받아먹으며 시키는 대로 따랐지만, 부작용이 하나 있었다.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데 왜 자꾸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거야!”
귀족들이 헐레벌떡 뛰어와 자기들부터 봐달라며 통사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이곳에서 자기네들을 수호해주면 안 되겠냐는 제안까지 받았다. 괘씸하고 이기적인 모습에 내가 그들의 목을 졸라 죽이려는 걸 첼러스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나는 아직도 열이 올라 열심히 손부채질을 했다.
“안 그래도 시간이 없는데!”
나는 초조하게 발을 떨며 물었다.
“마족의 기운은?”
스노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없어요. 하지만 오래 있지 못할 거예요. 소문이 워낙 빨리 돌아서요. 마족이 추적하기 전에 자리를 떠야 해요.”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이 나타나고 있는 거야?”
바퀴벌레가 따로 없었다. 찾아놓은 석판을 황실 지하창고 같은 곳에 쌓아두기라도 했는지, 수가 너무 많았다.
전염병을 치료하느라 나도 바빴지만, 마족이 나타나는 족족 처리하고 있는 용사들도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어쩔 땐 마족의 수에 밀려 크게 다쳐서 돌아오기도 했다.
“확실한 건, 마족의 수는 줄어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히려 계속 늘어나겠죠.”
스노아가 냉정하게 현실을 짚어주었다.
“이 전염병은 대기 중의 마나를 인간이 억지로 흡수하게 만드는 거니까요.”
그게 제일 큰 문제였다. 제국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간 이 전염병은 마족이 저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일부러 풀어둔 저주였다.
“사람들이 사기로 오염된 마나를 흡수하다 죽으면, 시체에 엉겨 붙은 마나를 수거하러 마족이 오는 거죠. 분명 인간의 마나를 잔뜩 얻어내기 위해서 벌이는 짓일 거예요.”
“지들이 과수원 농부들이야, 뭐야.”
영근 열매를 따러 오듯이, 시체의 마나를 수거하러 온다니. 소름이 돋아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환자가 많이 남았나요?”
“얼마 안 남았어. 다다나가 치료하러 갔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나마 다다나와 함께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전염병을 치료할 약도 그녀와 함께 만들었다고 하셨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있어서 다행이지.”
“황녀도 황실에서 도망쳐 나와 숨어 지내고 있다고 들었어요. 급한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몸을 숨기느라 그랬을 줄은 몰랐네요.”
동의하는 바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탁자에 턱을 괴었다.
“이제 황실에 숨어든 마족들도 가릴 게 없다 이거지. 마족이 씌지 않는 황녀부터 죽일 생각이었나 봐.”
스노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서 있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면 지금은 안전한 곳에 있는 건가요? 그런 곳은 별로 없을 텐데…….”
“다다나 말에 따르면 그렇다네.”
“그렇군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스노아를 곁눈질로 바라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할 말 있어?”
“괜찮으세요?”
“뭐가?”
스노아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다다나와 자주 싸우는 것처럼 보여서요.”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가 다다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갑자기 두통이 도지는 것 같았다.
마침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다다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눈을 쳐다보기만 했다.
스노아가 눈치를 살피더니 마실 걸 들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아 물을 몇 모금 들이켰다.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불편한 눈치네.”
다다나가 얘기했다. 나는 말없이 찡그린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랫입술을 짓씹자 하얗게 말라붙은 살이 터지며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다다나가 그런 나를 주시하다가 근처로 다가오더니 상 위에 빈 약병을 올려놓았다.
“이곳의 영주는 죽었어.”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철재로 만들어진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것이 산산조각으로 깨져나가는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다다나가 그런 나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태 비슷한 이유로 자주 싸웠지만, 담담하면 담담했지 한 번도 저런 눈을 한 적이 없었다.
내 눈이 크게 뜨일 찰나, 동생이 다시 무감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왜? 내가 죽인 것 같아?”
“다다나.”
“내가 죽인 게 아니야. 미쳐버린 기사들이 합심해서 죽인 거지. 사기란 그런 거잖아. 사람을 미치게 해.”
다다나의 건조한 시선이 속이 텅 빈 약병으로 떨어졌다.
“진실한 마음이 드러나게 도와주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그러는 걸 보고만 있었어?”
평소였다면 바로 반박했을 다다나가 이번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동생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여태껏 망설임이 없었던 동생의 눈에 짧은 번민이 스쳐 지나갔다. 다다나가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그러면 나서서 막아?”
뭘 기대했던 걸까.
나는 머리가 지끈거려서 입을 다물었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머리털이 짜릿하게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다다나와 이런 식의 공방전은 지칠 정도로 많이 나누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그 창백한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예전의 나는 죽었어. 그러니까 언니도 예전의 나를 기대하지 마.]
동생과 내 의견은 좀처럼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다나의 믿음은 굳건했다. 내가 잘못된 점을 지적하거나, 생각을 돌리려고 애쓰면 므리나 이소리하를 들먹이며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므리나 이소리하와 친구, 그리고 동생은 내 약점이었다. 다다나가 작정하고 그때의 일을 들먹이면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동생도 알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상대는 더러운 귀족인데. 언니도 빌어먹을 귀족이라며 아침부터 미워했잖아.”
“그게 죽는 걸 두고 보라는 의미는 아니었어!”
나는 분노에 차 소리 질렀다.
“이곳의 영주는 오만하고 어리석지만, 그건 나약해서 그런 거야.”
꽉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곳을 버리지 않고 남은 몇 없는 귀족이었다고! 이곳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은 이유가 뭐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
“그 영주가 먹을 걸 나눠줬기 때문이었어, 다다나.”
동생이 턱에 힘을 주고 어금니를 악물더니, 곧 독기 서린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그래서 감싸주는 거야?”
“감싸?”
나는 차갑게 웃었다.
“나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 거야!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증오심을 불태우면 마음이 편하니? 넌 지금 어리광을 피우는 거라고!”
나는 다다나의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바라보며 숨을 씩씩거렸다.
‘내가 바라는 건 별거 아닌데…….’
동생과 이전처럼 오늘 일과가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게 그렇게 어렵니?’
나는 원망이 밴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다다나는 시종일관 움직이는 인형처럼 굴었다. 감정이 조금이라도 섞인 것처럼 보일 때는 사람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이글거릴 때가 유일했다.
다다나가 내 동생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모습은 동생이 맞는데 알맹이가 바뀌어버린 것 같았다.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이렇게 소중한 동생인데,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황녀님은 절대적인 선이고 귀족들은 악이야? 네가 하는 행동을 보면 꼭 그런 것처럼 보여. 네가 그렇게 따르는 황녀님도 귀족이야!”
다다나가 내 말에 발끈한 표정을 짓더니, 눈썹을 사납게 일그러트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녀님을 모욕하지 마!”
“완벽한 사람은 없어. 완벽한 선도 없고!”
“그래? 그럼 언니 마음 편한 대로 생각해.”
다다나가 버석하게 마른 음성으로 뇌까렸다.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고? 그래서 피우면 안 돼? 우리가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얼만데 이제 와서 가르치려 드는 거야? 날 죽게 내버려 두고 도망친 주제에.”
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었다.
다다나가 분노에 차서 말을 주절대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날 바라보았다. 개나리색 눈망울이 풍랑에 흔들리는 돛단배처럼 어지러이 움직이고 있었다. 동생이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거의 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볼게. 황녀님을 모셔야 하니까.”
다다나가 미련 없이 마법스크롤을 찢어 자리에서 사라졌다. 나는 빈 공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노아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물이 두 컵 놓인 쟁반을 근처에 내려놓더니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스노아에게 안기고 나서야 나는 내가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미지근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동생이 내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만 돌아갈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잠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스노아가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가혹한 겨울바람이 휘몰아쳤다.
나는 옷깃을 여미며 어두컴컴한 숲길을 지나 비브로스의 숨겨진 저택으로 들어갔다. 따스한 벽난로가 거실을 후끈하게 달구고 있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침 해가 밝을 시간이었지만, 제국의 낮은 시커먼 어둠에 잡아먹힌 지 오래였다. 마족이 출현한 이후로 전역에 사기가 들끓어 오르고 있는 탓이었다.
“오늘은 좀 늦었네.”
이미 자리에 돌아와 있던 할릭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러다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카카나, 울었어?”
‘다다나는 울고 있을 때 위로해줄 사람이 없었을까?’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할릭이 울지 말라며 내 뺨을 닦아주었다.
“넌 이만 가 봐.”
할릭이 내 어깨를 그러쥐고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스노아에게 턱짓했다.
“이제 내가 함께 있을 테니까.”
스노아가 말없이 할릭을 바라보았다.
“애초부터 그런 약속이었잖아?”
아랫입술을 짓씹은 스노아가 짧게 혀를 차며 물러섰다.
“금방 올게요. 따뜻한 물이라도 마시고 있어요. 알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노아가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카카나.”
할릭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있는 입맞춤 시간이었다. 제국은 천족의 몸과 마나를 가진 내가 살기에 가혹한 환경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차원균열지대의 사기 정도는 이제 끄떡없지만, 불행히도 마족이 등장한 후부터 사정이 바뀌었다.
그들이 작정하고 흩뿌린 기운은 찌꺼기처럼 남아있던 중간계의 사기들과 비교가 불가능했다. 용사들의 키스를 받아내지 않으면 몸이 불편하고 신경이 곤두섰다. 특히 전염병이 도는 지역에서는.
촉촉, 할릭이 위로하듯 따스한 입술을 문질렀다.
“조만간 대도시를 방문할 거야.”
낮고 절절한 음성이 귓가로 떨어졌다. 그의 입술은 감로수를 마시듯 눈물이 맺힌 내 눈가를 훑고 있었다.
“대도시는 사기가 본격적으로 들끓는 장소야. 그곳에선 키스만으로 안 될 거야.”
나는 말없이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내가 아무 생각 안 들게 해줄게.”
불에 델 듯이 뜨거운 할릭의 시선이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내게 모든 걸 쏟아내, 카카나.”
나는 기운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느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뜨겁고 두툼한 혀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나는 나직하게 신음하며 버거운 사랑을 받아들였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갔다. 그걸 노렸다는 듯이 거친 움직임이 이어졌다.
“으, 읏.”
힘들다.
그가 숨 쉴 틈을 내어주며 일그러진 눈썹에 입을 맞추었다.
“눈 감을래?”
나는 파르르 떨리는 눈을 내리감았다. 그가 가뿐하게 내 몸을 들어 올리고 걸음을 옮겼다. 몸이 따뜻한 이불에 파묻히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완벽한 사람은 없어. 완벽한 선도 없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왜 침착하지 못했을까.
다다나는 송곳이 가슴을 파고드는 걸 느꼈다. 서늘하고 차가워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가슴 안쪽으로 시리게 부피감을 키우던 그것이 기어코 소름 끼치는 의심의 손이 되어 심장을 움켜쥐었다.
다다나는 제 근간을 이루는 뿌리를 휘어 잡힌 사람처럼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답지 않게 흥분하고 말았다. 본래 그녀였다면 코웃음 치고 넘어갈 말이었는데.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녀는 카카나가 저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잘 알았다. 도망친 게 아니란 것도 알았다. 언니의 말이 맞다. 다다나는 어리광을 피우고 있었다.
분명 처음엔 이러지 않았다. 다다나는 숲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호수처럼 항상 잔잔한 상태를 유지했다. 잔인한 것도, 슬픈 것도, 좋은 것도 다다나를 흔들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이 만족스러웠다. 어렸을 때처럼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서 더욱.
‘언니를 만난 이후로 변했어.’
잠들어있는 영혼을 언니의 목소리가 꾸준히 두드리는 기분이었다. 깨어나라고 하는 것 같았다. 퀄리티미엄에서 재회한 이후로, 서서히, 아주 천천히, 영혼이 기지개를 켜는 느낌이 들었다.
감정이 눈을 뜨고 다다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너는 부활하고 있다고.
다다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대로 몸만 산 채로 죽어있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언니의 말대로 애써 외면했던 진실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았다.
보고 싶지 않았기에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던, 그 수많은 것들을.
‘안 돼.’
다다나의 본능이 소리쳤다.
‘그랬다간 정말로 죽을 거야. 끝까지 그대로 있어. 그냥 죽은 척하고 있어.’
마음 깊숙한 곳에, 몸을 웅크린 채 숨어있던 어린 다다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다시 죽고 싶지 않다고, 그냥 이대로 편하게 있고 싶다고 악을 썼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아랫입술을 짓씹다가,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를 쓸었다. 와장창, 깨지는 가구 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을 긁었다. 숨이 거칠게 내쉬어졌다. 몸은 이미 공포에 질려 웅크려져 있었다.
다다나는 단언컨대, 다시 그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배가 뚫리고, 내장이 끄집어내지는 그 순간을 다시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네. 어렸을 땐 말괄량이였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다나는 분하게 눈물을 닦아냈다.
[네가 행복하다면 됐어.]
바보 같은 언니.
다다나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손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잡혀 올라왔다. 그것을 꺼내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다다나는 황녀에게 장소를 제공해준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의문을 품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저 복종할 뿐이었다.
그런 다다나가 처음으로 의문을 품은 건, 저택 근처에서 작은 돌멩이를 발견했을 때였다. 그녀는 돌멩이에 그려진 작은 뿔 모양의 인장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았다. 아주 많이 낡고, 오래된 기억 속에서 찾아낸 단서였다. 그러자 여태 눈에 띄지 않았던 인장이 저택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녀는 당연한 수순으로 인장을 찾기 시작했다. 그건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결국 다다나는 그 인장이 저택의 숨겨진 지하 공간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가지 않았다. 딱 거기까지 알아보고 몸을 돌렸다. 사실을 밝혀내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말괄량이.”
다다나가 인장이 그려진 돌멩이를 쥐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다 곧 울음 섞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비틀비틀 걸으며 알아놨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눈물이 쉼 없이 떨어지고 있었고, 마음 안의 공포가 점점 부피를 키워가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너는 괜찮아?]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무릎에 애써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벽을 손으로 짚으며 걸음을 떼었다. 언니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
“못 지내고 있어.”
[그래도 친근한 부분이 남긴 했어. 콧잔등에 퍼진 주근깨 말이야. 여전하네.]
“그건 내 콤플렉스야.”
[혹시 지금도 콩을 좋아해?]
다다나는 지하 계단으로 이어지는 시커먼 어둠을 내려다보며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좋아해.”
그리고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어둠 끝에 희미한 빛이 파고들었다. 지하실에 도착한 다다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인장을 알아봤구나. 용기를 내줘서 고마워.」
그리고 그곳에서 목소리를 들었다.
「울지 말렴, 다다나. 네 탓이 아니야. 우린 괜찮아.」
눈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다나는 아예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눈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건 상관없었다. 음성은 익숙하고 친근했다.
누구인지 알았다. 이들은…….
「우리가 진실을 가르쳐줄게.」
다다나가 그 음성을 받아들이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니인 카카나와 제국의 전염병을 치료하러 돌아다닌 지 딱 한 달이 되던 날이었다.
***
“그래서, 카카나의 힘은 대천족인 이리나엘의 것과 비슷하다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낡은 고서의 끝자락을 가리켰다. 휠라메스 신전의 지하에서 몰래 들고 나온 책이었다.
고대의 언어로 쓰여 있는 탓에 이걸 번역하기까지 많은 고생을 했다. 아마 마탑주인 올리넨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이 고서의 첫 줄도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충격이네. 그간 사제가 보였던 기적이 사실 천족의 마법일 뿐이었다니.”
할릭이 문틀에 기대어 선 채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나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있던 용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휙 뒤를 돌아보았다. 할릭이 아무 해도 끼치지 않겠다는 의미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글쎄, 난 이제 괜찮다니까.”
할릭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항의했다.
“그래! 내가 무슨 짐승인 줄 알아? 아무 데서나 카카나를 눕히진 않는다고!”
“닥쳐!”
아다르가 파르륵 경련을 일으키며 악을 썼다.
“네놈 새끼가 얼마나 해댔는지 알기나 해?!”
다다나와 대판 싸웠던 날, 나는 대도시를 방문하기에 앞서 할릭과 관계를 맺었다. 할릭이 덩치가 크고 내가 작은 탓에 관계하는 내내 우여곡절이 많았다. 물론 할릭은 기어코 해내고야 말았지만, 나는 그의 모든 것이 버거워서 끙끙거렸다.
처음엔 아파서 울었고, 중간엔 휘몰아치는 쾌락이 무서워서 울었으며, 나중엔 힘들어서 울었다. 그는 내가 부서질까 내내 조심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나는 힘에 부치고 그가 커서 죽을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안 들게 해준다더니 정신을 나가게 해주겠단 의미였나 싶을 정도였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용사들이 마족과의 싸움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후였다. 이곳은 비브로스가 따로 내준 빈 저택이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오후 내내 저택을 울렸던 비명과 울음소리 때문에 민망해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건 비브로스에 한정된 얘기고, 용사들은 모든 걸 들었다. 열심히 하고 있는 도중에 문을 열고 들어올 수도 없고, 마음을 많이 졸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내가 훌쩍이며 문을 열자마자 날 둘러메서 할릭에게서 떼어내더니 여기저기 주물럭거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디 부러진 데는 없냐는 것이었다. 그때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이놈들은 내가 할릭과 관계를 맺었을 뿐이라는 걸 알긴 하는 건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 지었다. 나중엔 내가 그 정도로 처절하게 울어 재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민망해졌다. 시뻘건 토마토가 되어서 난리를 피우는 용사들을 피하느라 진을 뺐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신전이 천족의 치유 마법을 독점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요.”
내가 피곤한 얼굴을 하자 첼러스가 눈치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날 걱정하던 스노아가 냉큼 말을 받았다.
“그러게요. 큰 파란이 일어나겠죠. 지금은 세상이 이래서, 더 최악이 될 것도 없겠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속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거야? 신성마나가 천족의 마법을 구현하기 위해 모방된 마나라니 충격이네.”
나는 얼떨떨한 어조로 물었다.
“계속 같은 마법을 시도했다면 가능할 수 있어요. 때로는 마법이 시전자의 마나를 물들이기도 하거든요. 흑마법처럼요.”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하지만 사제들은 인간이잖아요. 진짜 천족의 마나를 얻을 순 없었을 거예요.”
“말하자면 가짜네. 카카나 네가 가진 건 진짜고.”
용사들에게 그렇게 욕을 들어먹었는데 전혀 기죽지 않은 할릭이 씩씩한 어조로 말했다.
“그보다 이리나엘이라는 대천족의 힘이 궁금한데.”
왁왁거리며 할릭과 말다툼하던 아다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의 얼굴은 제3자각자가 된 나에 대한 자부심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미 용사들에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던 나는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용사들은 물론이고 반크, 올리넨, 노레스에게 돌아가며 칭찬을 받았더니 이젠 창피했다.
사실 아직도 내가 제3자각자가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마법사로 치면 현자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용병왕인 노레스도 제3자각자였지?’
이렇게 생각하니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일으킨 게 실감이 되었다. 나는 흘끗 시선을 들었다. 용사들은 뭐가 그렇게 기쁜지 저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수명이 길어지면 용사들에게 고백할 작정이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필이면 마족의 침공으로 세상이 멸망으로 향하는 시국이었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어떻게 고백하더라. 반지를 준비할까? 아니면 꽃?’
“카카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나는 화들짝 놀라서 아다르를 바라보았다. 그가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자 회색 머리카락이 까만 눈망울 위로 사르륵 흩어졌다.
얼굴을 봤을 뿐인데 갑자기 열이 오르는 것 같아서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가 뜨끈뜨끈했다.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나는 괜히 아다르 탓을 했다.
“이리나엘의 힘이 뭐냐니까?”
“아, 이리나엘. 큼큼.”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고서에 따르면, 이리나엘의 이명은 ‘영혼을 지키는 자’라고 해.”
“영혼을 지키는 자?”
“천족 중에서 가장 강한 치유의 힘을 지녔다고 나와 있어. 그 힘은 상처 입은 영혼까지 수복할 정도라고 하네.”
“그게 네 마나의 근본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 이유가 뭐야?”
나는 근처에 놓여있던 약병 하나를 쥐고 흔들었다.
“내 마나는 치유연금물약에 부족한 마법을 알아서 보충하고 효능을 증폭시키잖아.”
“하지만 단독으로 사용할 땐 힘이 약하잖아.”
“그럴 수밖에. 나한텐 생명의 힘까지는 없거든. 천족이 아니니까. 하지만 치료사가 만들어낸 약물엔 생명의 샘이 녹아있지.”
나는 빈 약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스노아가 내 말을 곱씹으며 혼자 생각하더니 이해한 내용을 짧게 간추려서 얘기했다.
“카카나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생명의 샘과 영혼을 지키는 이리나엘의 마나가 금상첨화로 어우러졌다는 말이군요.”
“바로 그거지. 잘 아네, 스노아.”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 힘의 시작이 므리나 이소리하의 실험이었다는 게 우스워.”
용사들이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므리나 이소리하의 실험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내게 전해 들은 참이었다. 수인족의 몸에서 천족의 힘을 깨우기 위한 실험이었다는 말에, 용사들도 많이 놀랐다.
나는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마족이 본래의 힘을 해방하면서 바빠진 탓에 반크의 조사가 늦어지고 있었다. 본래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그에게서 므리나 이소리하의 숨겨진 저택과,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보를 넘겨받았을 시기였다.
그리고 그 정보는 내 긴 편지와 함께 아그리마에게도 넘어가기로 되어있었다. 이미 반크 조직원의 손에 수많은 암살자가 목숨을 달리했다. 므리나가 아그리마에게 꾸준히 암살자를 보내고 있는 탓이었다.
‘계속된 실패로 충분히 의심을 샀으니까 곧 므리나가 직접 움직일 수도 있어.’
나는 심각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음?”
눈을 반쯤 내리깔고 홍차를 들이켜던 스노아가 갑자기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압하다 눈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잠깐이지만, 뒷마당에서 마나 이동이 느껴졌어요.”
“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반크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더 급해졌다.
거의 굴러떨어지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 스노아가 일러준 뒷마당으로 나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는 탓에 살이 에이는 것처럼 추웠다. 자라목을 하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웬 낡은 가죽 주머니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눈이 내리고 녹지 않은 탓에 진한 고동색 주머니가 더 눈에 띄었다.
나는 부드득, 부드득, 눈을 밟고 걸어가 그것을 주워들었다. 의외로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어째서인지 주머니를 열어보려는 손이 떨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머니를 노려보았다.
“물건만 텔레포트 해서 보냈네요?”
“악, 깜짝이야!”
나는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 질렀다.
“놀랐잖아, 스노아!”
“미안해요. 하지만 카카나 혼자 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가 내 뺨에 부드러이 키스하며 봐달라는 듯이 사분거렸다. 나는 작게 투덜거리며 주머니의 꽁꽁 묶인 입구를 풀었다.
스노아 때문에 크게 놀란 탓인지 기묘하게 심장을 죄어들던 긴장감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투박한 돌멩이를 보고 황당해서 눈을 홉떴다.
‘웬 돌멩이지?’
“음? 표식이 새겨져 있네요.”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던 스노아가 돌멩이에 희미하게 새겨진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림이 그려져 있잖아요.”
“그림?”
나는 그가 지적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을 살폈다.
‘이 그림, 어디선가…….’
나는 숨을 멈추고 고드름처럼 얼어붙었다.
“그림으로 신호를 주고받기로 한 사람이 있었나요?”
스노아가 그런 나를 눈치채지 못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대답할 수가 없어서 돌만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뭔가 이상한 걸 알아챘는지 스노아가 허리를 숙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카카나?”
“아? 어, 응. 그, 그랬지.”
나는 돌멩이를 황급히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다나랑 전염병에 관해서 새로 알게 된 게 있으면, 이런 식으로 정보를 주고받기로 했었어.”
스노아가 미간을 그러모으며 반문했다.
“돌멩이로요?”
“전염병이 도는 지역의 돌멩이야. 춥다. 얼른 들어가자.”
말을 얼버무리며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스노아는 더 반문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반응이 이상한지 자꾸 눈을 마주치려고 했다. 나는 꿋꿋하게 앞만 보고 걸었다. 그리고 연구할 게 있다는 핑계로 방에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마법가방을 뒤졌다. 손에 딱딱하고 비싼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친구들에게 간혹 쓰곤 하는 편지지였다.
그것을 꺼내 펼쳐놓고, 옆에 놓아둔 돌멩이와 함께 대조해보았다. 편지를 봉하는 밀랍인장의 문양과 돌멩이에 그려진 문양이 똑같았다.
“내,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눈을 열심히 비벼가며 확인했다. 그래도 똑같이 보이기에, 이번엔 인장까지 꺼냈다. 돌멩이에 그려진 그림과 인장을 직접 대조해보니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똑같다. 뿔 모양의 인장이었다.
이건, 이 그림은…….
[탈출에 성공해서 숨어 살게 되면, 우리만 알아볼 수 있는 인장을 만들자!]
[그걸 뭐 하러 만들어?]
[귀족들이 문서나 편지에 가문의 인장을 밀랍으로 찍잖아. 우리도 그렇게 하는 거야!]
[멋있다!]
므리나 이소리하의 지하감옥에 갇혀있을 때, 친구들과 만든 인장이다. 탈출에 성공할 먼 훗날을 기약하면서 모양을 구상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일이 틀어지고 뿔뿔이 흩어지면서 인장을 사용할 일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쉬운 대로 혼자 인장을 만들어서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쓸 때마다 찍어두곤 했다.
나는 편지지와 인장 그리고 돌멩이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가죽 주머니를 뒤졌다. 작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다다나의 필체였다.
「저택 근처에서 돌을 발견했어. 텔레포트 마법스크롤을 동봉했으니 혼자 와. 수인족이 아닌 인간들에게 이곳을 들키고 싶진 않으니까. 용사들도 마찬가지야.」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법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이미 어딘가의 좌표가 찍혀 있었다.
내 몸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극심한 혼란을 느끼고 의자를 꺼내 앉았다. 맥박 소리가 목덜미에서 뛰고 있는 것처럼 우렁차게 울렸다. 땀이 배어 나와 끈적한 손가락으로 돌멩이를 말아 쥔 채 가파르게 호흡을 골랐다.
‘지금 같은 세상에, 혼자 밖으로 나가는 건 자살 행위야.’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이마를 책상에 기대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걸 무시할 순 없어. 어쩌지? 함정일까?’
나는 작은 쪽지를 유심히 노려보았다.
‘우리가 머무는 저택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일행들뿐이야. 저건 다다나의 필체가 확실하고.’
시선이 다시 돌멩이의 문양으로 옮겨가 머물렀다. 앳된 친구들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토록 바랐던 순간이다. 만날 수 있다. 내가 이 스크롤을 찢기만 하면, 살아남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억지로 눈을 감고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려 애썼다. 몸이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 문양은 다다나, 나, 그리고 친구들밖에 몰라.’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족이나 므리나의 함정이라고 의심하기 어려웠다.
‘다다나의 필체는 협박해서 쓰게 만들면 돼. 하지만 문양은?’
다다나가 나서서 함정을 팠다고 여기기엔 마족과 므리나를 병적으로 혐오하는 모습과 일치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목에 신수를 부르는 호각이 제대로 달려 있는지 확인했다. 지금 당장 스크롤을 찢고 싶어 견딜 수 없었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야 했다.
‘멍청이처럼 갔다가 당할 순 없지.’
나는 마법스크롤을 몰래 꺼내어 사용할 수 있도록 몸 여기저기에 숨겨두었다. 제일 큰 문제는 혼자 가야 한다는 점이다.
‘용사들을 무슨 수로 따돌리지?’
나는 서둘러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저녁까지 여유가 있었다.
용사는 초월자이니 나 같은 약 만드는 수인족이 따돌릴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들의 몸은 어쨌거나 인간이었다. 나는 특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재워버리는 수밖에.’
나는 저녁이 되자마자 저택의 부엌으로 뛰어갔다.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긴장해서 부들거리는 뺨을 손으로 퍽퍽 치댔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상대는 아다르였다. 그의 눈치가 좀 귀신같은가? 어쭙잖게 건드렸다간 바로 들킬 거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살그머니 부엌으로 들어섰다. 아다르가 짝다리를 짚은 채 스튜의 간을 보고 있었다.
그가 가볍게 맛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도마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능숙하게 채소를 썰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나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인간이라는 걸 잠깐 깜박했다.
나는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심호흡을 하고 걸어갔다. 아다르는 내가 먹을 샐러드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그가 썰어놓은 야채 하나를 입으로 가져와 씹으며 물었다.
“오늘 저녁은 뭐야? 스튜 만드는 것 같던데, 무슨 스튜?”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
아다르가 보글보글 끓는 냄비의 뚜껑을 닫으며 개구지게 웃었다.
“미리 아는 게 뭐 어때서? 어차피 먹을 거.”
내 무신경한 대답에 그가 혀를 찼다.
“메뉴가 뭘까 기대하는 맛도 있는 거야. 됐고, 여긴 웬일이야? 네가 부엌에 다 들어오고, 수상한데.”
벌써 수상한 기색을 들켰다. 식은땀이 주욱 솟아났다. 나는 아다르의 가늘어진 시선을 회피하며 머리를 굴렸다.
‘내가 그렇게 부엌에 안 들어왔었나? 그래도 가끔은 요리를…….’
안 했네. 어떻게 지금까지 한 번도 요리를 안 할 수가 있었지.
나는 어리벙벙하게 입을 벌렸다.
‘아다르와 살기 시작한 후로 부엌과 연이 없는 삶을 살았구나.’
나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다르가 씻어놓은 야채를 물에서 건져 채에 올려놓더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날 내려다보았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가끔은 요리도 하고 그럴 걸, 후회가 치밀었다.
“나, 나도 가끔은 부엌에 올 수 있고 그런 거지.”
“네, 네.”
그래봤자 아다르는 별로 귀담아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능숙하게 채소를 손질하는 걸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든 넘어갔다.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몸을 편하게 해주는 약물을 가져왔어. 식후에 차 마실 때 얘도 타.”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약병을 내밀었다. 아다르가 심드렁한 얼굴로 약병을 받아들었다. 순간 그의 시꺼먼 시선이 궤적을 그리며 면밀하게 내 얼굴을 뜯어 살폈다. 심장이 밑으로 쿵 떨어졌다.
평소라면 몰랐을 텐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치를 살피는 상황이 되니 그 시선이 낱낱이 느껴졌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날 살폈었나?’
소름이 돋았다.
‘평범함을 가장하느니 차라리 인상을 쓰자.’
마른 입술을 핥은 후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귀족들도 속여먹었다고. 자신 있게 하는 거야.’
나는 뭐 불만 있냐는 식으로 그를 몰아붙였다.
“약을 줘도 불만이야?”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렇지.”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갑자기 이런 약은 왜? 그것도 부엌까지 찾아와서.”
“곧 대도시로 가잖아.”
나는 뻔뻔하게 받아쳤다. 위기에 몰린 몸이 내 의지를 떠나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안 돼. 들키면…….’
그러나 이 쓸모없는 몸뚱어리는 한 번도 내 마음을 따라준 적이 없었다. 얼굴은 이미 홍당무처럼 빨개졌을 게 뻔했고, 아다르가 그걸 못 알아챌 리 없었다. 숨기긴 다 틀렸단 생각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아랫입술을 짓씹고 분한 어조로 웅얼거렸다.
“거거, 걱, 걱정이 돼서…….”
서러움에 목이 막혀서 말이 끝까지 나가지 않았다. 머릿속은 이미 용사들을 설득할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아다르가 식칼을 내려놓고 허리를 숙였다.
“걱정됐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어, 엉?”
“뭐야, 갑자기. 귀엽게. 이제 솔직해지려는 건가? 수명도 길어졌겠다.”
아다르가 알 수 없는 말을 빠르게 중얼거리며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믿어준 건가?’
“이게 뭐라고 그렇게 새빨개졌어.”
아무래도 그는 내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힌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아다르가 못 견디겠다는 듯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세게 안은 탓에 뼈가 부러질 것 같았지만, 이번만큼은 참아주었다. 아다르를 감쪽같이 속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네가 준 거니까, 효과는 퍽 좋겠지.”
아다르가 내 이마에 두어 번 뽀뽀를 더 남기더니,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찻주전자 근처에 약병을 올려놓으며 얘기했다.
“잊지 않고 쓸 테니까, 가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만드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도망치듯이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이 발목을 잡아채는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친구를 만나는 건 일평생 동안 꿈꿔왔던 일이다. 안전만 따지다가 이대로 기회를 놓쳐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성공리에 식사까지 마쳤다. 딱히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아다르가 만들어낸 요리의 훌륭한 맛에 집중하기만 하면 시간은 금방 흘렀다.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차를 마시며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일부러 약효가 돌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수면제를 이용했다. 용사들은 대부분 저녁을 먹은 후에 방에서 시간을 보냈으므로,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잠들게 될 것이다.
나는 신중을 기해서 두 시간 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사들의 방을 차례로 방문해 그들이 모두 자고 있는지 확인했다.
‘혹시 모르니까, 날 찾을 수 있게 쪽지를 남겨놓자.’
수면제는 한 시간이면 효력이 떨어진다. 일부러 시간을 짧게 잡았다. 함정이면 한 시간을 버티면 되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후일을 기약한 뒤 다시 찾아오면 된다.
나는 마법스크롤의 좌표를 뜯어본 뒤, 모두와 함께 저녁을 먹었던 상 위에 쪽지를 남겨두었다. 평소에 스노아의 마법스크롤을 많이 보았던 게 좌표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러면 금방 찾으러 오겠지.’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는 몸 구석구석에 숨겨진 마법스크롤과, 상 위의 쪽지를 확인한 뒤 망설임 없이 스크롤을 찢었다.
몸이 어디론가 훅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칼날 같은 바람이 옷 틈을 파고들었다.
“윽…….”
아무리 추위에 강한 나라지만 귀가 잘리는 것 같아 짧게 신음했다.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불었다. 스산하게 헐벗은 겨울의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며 공허한 소리를 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했다. 쟁반 같은 달이 환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 빛에 의지해서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인적이라곤 조금도 없는 깊은 숲이었다. 그 가운데에 오두막집 한 채가 우뚝 서 있었다.
다다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했지만, 불이 전부 꺼져있었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문을 두드렸다.
“다다나! 나야! 문 좀 열어 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너무 늦게 왔나?’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집 주위를 천천히 배회했다. 창가에 얼굴을 들이밀고 안을 확인해보기도 했지만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두막집을 빙 돌아 뒤편까지 걸어갔다. 이곳은 돌산인 모양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자갈들이 눈에 띄었다.
‘이런 데에 집이 있다니 특이하네.’
나처럼 마법스크롤을 이용한 집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가죽 주머니에 담겨 온 돌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침 구름에 가려진 달이 다시 고개를 내밀며 이곳을 환하게 비추었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가 깜짝 놀라 돌을 떨어트렸다. 수많은 돌밭 위로 내게 들렸던 돌 하나가 덜그럭거리며 떨어졌다.
“잘못 봤나?”
고개를 기울이며 돌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도로 주우려던 찰나, 무언가를 보고 손을 우뚝 멈추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지도 못한 채 시선을 서서히 위로 들었다. 이곳에 즐비하게 늘어선 돌에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휘이이이, 거센 바람이 불며 숲이 비명을 질렀다.
“헉!”
나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소스라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림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징그러울 정도로 빽빽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 다다나가 내게 보낸 작은 돌멩이처럼, 뿔 모양의 인장이 돌 전부에 새겨져 있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쉽게 인식이 되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돌들을 바라보다가, 작은 자갈을 하나 들었다. 여기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작은 창이 나 있었다. 고작해야 사람이 얼굴을 내밀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좁은 창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모여 있는 돌을 바라보았다. 확인해보니 창이 있는 쪽의 돌들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꼭…….
‘저 창문으로 돌을 던진 것 같잖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뾰족한 돌들이 바닥을 짚은 내 손바닥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희게 질린 얼굴로 얼마나 주저앉아 있었을까,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파스스, 파스스, 얼어붙은 눈밭을 깨부수며 다가오는 인기척에 조용히 숨을 죽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그스름한 빛이 이곳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울퉁불퉁한 돌밭 위로 엿가락처럼 늘어난 그림자를 신중하게 살폈다. 그림자에 뿔이 없었다. 수인족이 아니다.
“카카나 씨?”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황녀가 기름 램프를 든 채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깊이 터졌다.
“여기서 뭐 하세요?”
그녀의 화려한 은발이 기름 램프의 호박색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호흡을 고르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말은 아낄수록 좋았다.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혀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황녀는 더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의아한 기색으로 날 살피더니, 혼자 알아서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다니가 불렀나 봐요?”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연락을 넣는다고 했어요. 들어와요. 다니는 지금 약물을 만들고 있어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들었을 거예요.”
황녀가 먼저 몸을 돌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긴 했지만, 그녀를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내 발밑에는 뿔 그림이 그려진 돌이 수북하게 밟히고 있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황녀가 거센 겨울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안 들어오세요?”
‘확인해야 해.’
어금니를 악물고 그녀를 따라 오두막으로 들어섰다.
벽난로에 불을 땐 흔적은 안 보이는데, 오두막 안은 공기가 후끈후끈했다. 천장 구석을 바라보니 마도구가 맹렬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황녀가 내게 자리를 내주곤 따뜻한 코코아를 들고 나타났다.
“마셔요.”
“괜찮아요.”
“얼굴이 새파란데, 춥지 않나요?”
“괜찮아요.”
나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황녀가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어둠이 깔린 오두막. 그녀가 밝힌 기름 램프만 희미하게 빛을 뿜는 거실. 점점 세기를 더하는 겨울바람에 요란하게 흔들리는 창틀.
그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황녀의 찻잔이 테이블 위로 안착했다.
달그락.
그녀가 어깨를 감싼 숄을 여미며 부드럽게 웃었다. 음영이 져서 그런가, 그 얼굴이 이상토록 음산하게 느껴졌다.
“다니를 만나러 가시겠어요?”
그녀가 사분거리는 어조로 물었다. 나는 뒤늦게 되물었다.
“네?”
“빨리 동생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서요.”
반달로 휘어있는 황녀의 미소 어린 시선이 내게로 스윽, 굴러왔다.
“그런데, 아직도 추우세요?”
“아니, 전…….”
“떨고 있잖아요.”
나는 축축하게 젖은 눈을 위로 굴렸다. 황녀는 나를 향해 싱긋 웃고 있었다. 무릎 위로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따라오세요.”
황녀가 답도 듣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나는 소매에 감춰두었던 마법스크롤을 언제든 찢을 수 있도록, 축축하게 젖은 손아귀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오두막은 마법이 걸려있었다. 밖에서 봤을 땐 터무니없이 작았는데, 복도를 거니는 황녀의 걸음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나는 그녀가 멈춰선 문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복도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이어져 있었다. 그 시커먼 어둠 속을 바라보니 악귀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니는 여기에 있어요.”
황녀가 친절하게 설명하며 문을 열었다. 나는 갑자기 환하게 쏟아져 나오는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빛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사이 황녀가 먼저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비틀비틀 쫓아가며 여러 차례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빛에 적응된 시야에 서서히 작은 윤곽이 잡혔다.
다다나였다. 동생은 의자에 앉은 채…….
나는 다다나에게 달음박질치며 한 손에 들려 있는 마법스크롤을 손가락으로 뚫어서 찢었다. 푸르스름한 실드가 순식간에 다다나와 나를 감쌌다. 동시에 황녀의 꾀꼬리 같은 웃음소리가 높다랗게 울려 퍼졌다.
나는 식은땀에 젖은 눈꺼풀을 깜박였다. 황녀가 문 근처에 선 채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내 덜덜 떨리는 옷자락을 다다나가 손을 뻗어 그러쥐었다. 동생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나는 황녀를 바라보던 것을 그만두고 다다나의 입에 물린 재갈부터 풀었다. 아이의 가느다란 손목을 꽉 옥죈 밧줄도 성마르게 풀어헤쳤다.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아갔다.
무슨 일이지. 어떻게 된 거지.
황녀의 웃음소리가 울렁거리는 속을 비집고 내 신경을 좍좍 긁었다. 머릿속에서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그래요. 이래야 카카나답죠. 안 그래요?”
나는 다다나의 안색을 살폈다.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어디가 안 좋은 걸까. 이마를 쓸어 열을 재보았다. 체온이 지나치게 낮았다.
“준비를 철저히 해 왔네요?”
어디가 문제인지 알기 위해 여기저기 살폈으나,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동생이 끄윽거리며, 마른 울음을 삼켰다. 나를 밀어내며 고개를 마구 내젓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라는 듯이.
아니 그럴 수 없다. 또다시 널 버릴 순 없어.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다다나의 작은 몸을 억지로 품에 안았다. 꼬리를 물고 바짝 따라붙는 불안감이 심장을 틀어쥔 채 놔주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대체…….’
얕은 숨을 들이쉬며 바짝 오른 경계심으로 주위를 살폈다. 신중하게, 현명하게 행동해야 하는데 이해 못 할 작금의 상황이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볼 살을 강하게 짓씹었다. 짜릿한 통증에 머리 위로 부유하던 정신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도, 돌아, 돌아가.”
동생이 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인 음성으로 매달렸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숙였다. 아이가 울고 있었다. 그렇게 무감했던 동생이, 감정이 말라붙어 눈물을 보이지 않던 다다나가…….
“여, 여기서 빨리…….”
“갑자기 날 왜 불렀나 했는데, 이것 때문이었어요? 황녀님.”
다다나와 내 몸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다다나의 몸을 품으로 끌어당겼고, 동생은 꺽꺽거리며 숨을 들이켰다. 몸 이곳저곳에 숨겨놓았던 마법스크롤을 의식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내 얼굴은 식은땀으로 온통 번들대고 있었다. 풍성한 금발과 요염한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도톰한 입술, 요사스럽게 빛나는 보랏빛 눈. 절대 잊을 수 없는 인간.
“왜?”
나도 모르게 그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처음엔 내 음성인지 몰랐다.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진 목소리였다. 황녀와 므리나 이소리하가 나를 바라보며 똑같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나는 멍청하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황녀가 왜?
므리나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인장이 그려진 돌은?
동생은?
이 오두막은 뭐 하는 곳이지?
“다다나는 호기심이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므리나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그녀의 표독스러운 눈 안에 많은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분노 같기도 했고, 혐오 같기도 했으며, 끔찍한 갈증처럼 보이기도 했다.
므리나가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아 올리며 비뚜름하게 웃었다.
“그런데 지하를 들여다봤나 보네요. 황녀님도 실수를 하나요? 아니면, 이 일도 계획하신 건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작게 속삭이는 음성으로 물었다. 므리나와 황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제 금발을 검지로 빙글빙글 돌리며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아, 물론 계획하신 거겠죠? 그러니까.”
신경을 거스르는 높은 톤의 목소리가 순간, 음침하게 낮아졌다.
“카카나가 살아있다는 것도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겠죠.”
“너무 화내지 말렴, 므리나.”
그제야 황녀가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용사와 내가 함께 있을 때처럼, 특유의 친절한 미소를 가면처럼 얼굴에 덧씌운 채였다. 그녀가 벽에 등을 기댄 채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상냥한 시선이 제 소중한 것을 들여다보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보랏빛 눈망울이 므리나의 눈과 겹쳐 보였다. 나는 짤막한 현기증을 느끼고 잠시 비틀거렸다.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치밀어 오를 듯,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온몸이 차가운데, 정신없이 뛰어대는 심장과 머리만 불쾌하게 뜨거웠다.
“나는 이 상황이 몹시 필요했단다.”
황녀가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딱 알맞은 시기야. 카카나의 힘은 충분히 개방되었고, 필요한 무대는 준비가 되었어. 나는 이 시기를, 정말 오래 기다려왔어.”
그녀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또각또각, 마룻바닥을 두드리는 구두 굽 소리가 정갈하게 울렸다. 그녀는 내가 친 실드에 막혀 더 다가오지 못했지만, 나는 무언가에 턱을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근거리에서 황녀가 황홀한 표정으로 미소짓고 있었다.
“날 너무 원망하지 말아요, 카카나. 어쩔 수 없었는걸요.”
“…….”
“당신의 절망이 제겐 필요했답니다.”
황녀가 나붓하게 웃었다.
“나락까지 추락해서, 긴 잠에 빠져야 하거든요. 당신이 말이에요.”
“…….”
“카카나라면 이해해 주겠죠? 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니까요.”
다다나가 간혹 입에 올리곤 하던 말이었다.
구원.
“불쌍하게도, 다니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게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을 거예요.”
황녀가 보란 듯이 웃었다.
“그러니까 동생을 너무 원망하진 말아요. 아셨죠?”
“세상을 구원해?”
내 입에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고저 없이 이어지는 냉소적인 어조에 싸늘한 비웃음이 묻어났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얘기했다.
“저 여자랑 함께 있는 네가 감히 구원을 입에 담아?”
“그런 얼굴도 하는군요, 카카나 씨.”
오로라가 사르륵 흩어지는 은발을 우아하게 뒤로 넘기며 감상조로 중얼거렸다.
“당신에게 제 위대한 뜻을 이해하라고 말하진 않을게요. 당신은 그저 ‘제 것’을 돌려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네 것?”
황녀의 입이 가로로 길게 찢어지며 아귀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제비꽃 색 눈망울을 옆으로 굴리며 손에 뺨을 기댔다. 살롱의 귀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가식이 섞인 몸짓이었다.
“그 몸은 이제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힘을 개방해서 고작 약이나 만들다니, 너무 아깝잖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뭐……?”
황녀는 대답하는 대신 눈웃음을 쳤다.
나 또한 그녀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을 끌 방법이 필요했다. 황녀의 배신에 넋이 빠진 사람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기회를 벌어야 했다.
나는 바닥을 짚은 손을 조심조심 움직이고 있었다. 동생과 함께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때, 오로라가 불쑥 말을 걸었다.
“마법스크롤은 사용하지 말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악, 커억.”
그 순간, 동생이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럽게 신음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매에서 스크롤을 천천히 꺼내다 말고 경기를 일으키듯 고개를 들었다. 곱슬곱슬한 머리가 이마와 뺨에 착 달라붙을 정도로 동생이 땀에 젖어있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디가 아픈지 묻고, 마법가방을 뒤져야 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내 시선 끝에 서서히 번져가고 있는 붉은빛이 보였다. 동생의 배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다다나는 이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씹은 채 고통을 참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눈꺼풀을 두어 번 깜박였다. 나는 결국 케케묵은 기억을 꺼내 들었다. 옷을 들추지 않아도, 어떤 형태의 상처인지 알 것 같았다. 므리나 이소리하에게 배를 꿰뚫렸을 때도 저런 식으로 피가 나왔었다.
“아…….”
“동생을 빨리 죽이고 싶은 건 아니죠?”
“아아…….”
턱을 덜덜 떨며 바라보다가, 뒤늦게 무릎걸음으로 다다나에게 기어갔다. 손이 떨려서 배를 움켜쥔 다다나의 등으로 팔을 올리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나는 말을 잃은 멍청이처럼 신음했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내 의식이 어디론가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친구들이 지르는 비명이 환청처럼 머릿속에서 웽웽거렸다.
눈꺼풀을 깜박이자 미지근한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착각이 분명할 바람이 느껴졌다. 지옥에서 뻗은 갈퀴처럼 내 머리채를 휘어잡는 바람이다.
달빛 한 점 없는 어둠, 의미심장한 폭풍이 불던 새벽. 언제든 날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등 뒤의 시커먼 절벽.
그리고 배에서 피를 흘리며 눈앞에서 죽어가는 동생.
과거의 그 장소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가장 여리고 나약한 트라우마가 내 정신을 어그러뜨리며 목을 틀어쥐었다. 나는 꺽, 꺽, 숨을 들이켰다.
“사, 살려야. 살려야…….”
황녀가 흥미진진하게 날 구경하고 있단 사실도 모르고 마법가방을 뒤졌다. 손이 몇 번이나 미끄러져서 여러 번의 시도 끝에야 입구를 열 수 있었다.
만들어 두었던 리커버리 약물을 손에 쥐었다. 아파서 입을 열지 못하는 다다나의 입술 사이에 약병의 입구를 비집어 넣었다.
약이 대부분 바깥으로 흘러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를 더 땄다. 계속 먹였다. 다다나도 최선을 다해 야금야금 삼키고 있었다.
이 정도면 피가 멎어야 했다. 그런데 다다나가 앉은 의자에 피가 고이고 있었다. 뜨끈뜨끈한 붉은 물이 의자의 다리를 타고 밑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전신을 달달달 떨기만 했다. 약병을 떨어트리고 다다나의 배를 함께 눌러 지압하려 애썼다. 배 부분을 짓누르자 뭉클한 감촉이 느껴졌다. 상처가 너무 컸다. 이대로면 장기가…….
“왜, 대체 왜……?”
왜 리커버리 약물이 듣지 않지? 이건 내 걸작인데. 세상 사람들이 찬사를 보냈는데.
‘이걸로 치료하지 못한 외상이 없었어.’
나는 속으로 악을 썼다.
‘왜 가장 중요한 때에 먹히지 않는 거야!’
“어머, 될 리가 없잖아요.”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황녀가 후후,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황녀가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 쭈그리고 앉더니, 나와 눈높이를 맞추곤 기쁘게 웃었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오른팔로 턱을 괸 오로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상냥하게 설명했다.
“당신은 천족이 아닌걸.”
“아, 아…….”
“이미 오래전에 죽은 목숨이잖아요. 다다나는.”
죽은 목숨.
나는 그녀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개를 흔들 때마다 바닥으로 흘러내린 다다나의 핏물 위로 내 눈물이 튀었다.
나는 아예 눈을 감았다. 고개를 젓기만 하는 내게 황녀가 평온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그 숨을 붙여놓을 수 있는 건, 우월한 우리 천족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에요. 제가 거두어 가면 끝이지만.”
왜, 왜 의심하지 않았는가.
수상한 점은 꾸준히 있었다.
다다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난 걸까. 바드와 처음 맞닥뜨렸을 때, 그는 왜 근처에 숨어있던 황녀를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가 만들었던 검은색 결계를 뚫고 들어왔던 빛의 화살은 정말 사제가 쏜 것이었을까.
황녀는 왜 모든 걸 아는 것처럼 내게 얘기했었지? 나에게 특별한 힘이 있으니 무시하지 말고 천천히 알아가라고 조언한 것도 그녀였다. 첫 만남부터 내게 단서를 던져왔던 거다.
정체를 숨기고, 마족을 공격하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처음부터 답이 정해진 문제다. 수상한 꿈과 신수, 날 용사들에게 이끌었던 양.
천족.
그것도 모두 황녀의 짓이었을까? 내게 양을 보내서 지금껏 여행하게 만든 자가 눈앞의 저 잔악무도한 존재인가? 정말로?
대체 누구를 위한 낙원이지? 저 피 묻은 손으로 이 땅에 무엇을 실현하려 하는가.
‘다 필요 없어.’
진실 따윈 상관없다.
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눈물을 너무 흘려서 눈가와 뺨이 뻑뻑했다. 희게 질린 얼굴로 몸을 무너트리는 다다나를 품에 안았다.
내게 중요한 건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다. 내가 마음을 준 소중한 존재들.
큰 욕심을 낸 적 없다. 대부분 순종하고, 주어진 것들은 기쁘게 영위했다. 내가 바라는 소원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진 못하더라도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다. 적어도 지옥에 있지는 않길 원했다.
이게 그렇게 큰 바람인가?
“제, 제발……. 도, 동생, 동생을…….”
대체 왜 매번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는가.
“세상에, 카카나. 바보처럼 왜 그래요?”
황녀가 입을 가리고 웃긴다는 듯이 경박하게 깔깔거렸다.
“전 당신의 절망이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나는 우리를 막고 있던 실드를 없애고 앞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황녀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살려주세요. 동생을……. 시키는 거 뭐든 할 테니까, 제 몸이라도 드릴 테니까…….”
“쟤가 저런다니까요.”
멀거니 구경하던 므리나 이소리하가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징글징글할 정도로 변하지 않았네요.”
‘그렇구나.’
그녀의 말대로다. 내 인생은, 징글징글할 정도로 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잠깐 행복한 꿈을 꾸었다 깨어나니 이 모양이다.
황녀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카카나. 당신의 희생은 절대 잊지 않을게요. 제가 이 중간계를, 악의 한 점 없는 깨끗한 세상으로 만들겠어요.”
나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었다. 내게 중요한 건 동생이었다. 세상이고 뭐고, 내겐 동생이…….
“그러니까 당신이 더 큰 존재가 되지 못하는 거예요.”
황녀가 애달픈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옷에 매달려있는 내 손을 탁, 쳐냈다. 나는 우당탕 바닥으로 떨어지며 앞으로 기어가려 했다. 황녀가 급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뒤처리를 부탁해요, 므리나.”
“그래도 되나요?”
므리나가 의외라는 듯이 여우 같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기다리던 순간이었을 텐데.”
“그건 므리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황녀가 다정하게 배려했다.
“카카나가 살아있다는 걸 여태 함구해서 제게 화가 났잖아요?”
황녀의 말이 사실인 듯, 므리나가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용서해요. 카카나의 소질이 남달라서 중간에 계획을 변경했거든요. 그녀에게 더한 희망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었답니다.”
“그래서 죽음의 숲에서 끌어낸 건가요?”
“맞아요. 힘을 더 개방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려면 마족과 대항해야 했죠.”
황녀가 만족스러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결국 카카나는 해냈어요. 각성했고, 제3자각자가 되었으며, 희망에 부푼 사람이 되었죠. 이제 필요한 건 절망뿐이에요. 제가 빼앗기 쉽게.”
그녀가 또각또각 걸어가더니 므리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니까 대미를 장식할 기회를 주는 거예요. 항상 원했잖아요? 이런 기회를. 괘씸한 카카나를 그 손으로 망가뜨릴 수 있게 해주겠다는 뜻이에요.”
“당신답지 않은데.”
“모든 선엔 대가가 따르는 법이죠.”
제비꽃 색 눈망울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내게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녀의 몸에 해가 가선 안 돼요. 아시겠죠?”
가증스러운 목소리였다.
“앞으로 도래할 낙원을 위해서.”
황녀가 사라졌다.
나는 다시 다다나에게 돌아가 약을 먹이고 있었다. 천족의 힘을 완전히 거두어 간 건 아닌지, 다다나가 희미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이대로 버티기만 한다면 방법이 생길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희망을 부풀렸다. 그래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약물은 개발하면 그만이다. 내게도 천족의 마나가 있었다. 그것도 영혼을 지키는 이리나엘의 마나였다. 내게도 그 비슷한 무언가가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무언갈 시도해보기도 전에, 므리나에게 머리채를 잡혀 뒤로 질질 끌려갔다.
“악!”
“모처럼 온 기회니까, 내 발로 걷어차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온 방이 카랑카랑하게 울리도록 므리나 이소리하가 악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털이 뽑힐 것 같아 그녀의 팔뚝을 할퀴다가 나는 분노로 시뻘게진 눈을 떴다. 그리고 저주를 쏟아내는 마녀처럼 독기로 절절 끓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낙원? 악의 한 점 없는 깨끗한 세상? 그러면 너를 제일 먼저 죽였어야지!”
므리나 이소리하는 완력 증강 약물이라도 복용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작정하고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들어 재꼈다. 수인족의 힘이 있는데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아픈 줄도 모르고 눈이 뒤집혀서 침을 튀겨가며 발악했다.
“너를 제일 먼저 죽였어야 했어! 근데 왜 황녀는 너 같은 걸……!”
“얘, 카카나. 넌 아직도 그렇게 하나밖에 생각할 줄 모르니?”
므리나가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마룻바닥에 손톱을 세웠다. 동생에게서 떨어질 수 없었다. 다다나가 배에서 피를 흘리며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었다.
또, 이런 식으로. 동생만 두고 나 혼자…….
“안 돼!”
“예외란 게 있는 거야. 위대한 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뒤에서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거라고. 희생 몰라, 희생?”
“다다나!”
내가 버둥거리자, 스크롤을 사용할까 봐 걱정되었는지 므리나가 천으로 된 머리끈을 풀어 내 손을 결박했다.
“다다나 저 멍청한 애도 그걸 모르더라? 참 우습지. 아는 척 별 유세를 다 떨더니. 결국 너랑 똑같아.”
있는 힘을 다해 버텨도 내 몸은 다다나에게서 계속 멀어지고 있었다. 손톱이 뒤집히며 손가락 끝이 피로 범벅되었다. 므리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난 운이 좋아. 이왕 손 더럽히는 거, 새로운 세상을 위해 하는 게 낫지. 안 그러니? 이 얼마나 숭고한 작업이야?”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므리나는 기어코 날 방에서 끄집어내 기다란 복도로 줄줄 끌어갔다. 므리나 이소리하가 시커먼 악귀의 입 속 같은 지하계단을 경쾌한 걸음으로 내려가며 혼잣말을 했다.
“나한테 궁금한 게 많지? 다 설명해줄게.”
“흐으…….”
“네가 여태껏 외면하고, 억지로 관심을 주지 않으려 했던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보여주면서 설명하면 더 이해가 쏙쏙 되겠지.”
므리나가 희끄무레한 빛이 들어오는 지하실 바닥으로 날 집어던졌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널브러진 나는 머리를 빠르게 좌우로 털었다. 울분인지 서러움인지, 속이 뜨거웠다.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그게 답답해서 터져나갈 것 같았다. 게워내고 싶은데, 헛구역질만 나오고 가슴이 괴로웠다.
나는 심장 부근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며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헛구역질해댄 탓에 입 바깥으로 끈적한 침이 흘러나왔다. 옷소매로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지하실은 마법 공간으로 규모를 대폭 늘려놔 거의 귀족의 저택 수준이었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거대한 시험관이 보였다. 기다란 관에 수상쩍은 액체가 차 있고, 그 안에 사람이 눈을 감은 채 떠 있었다.
그들은 황녀의 목에 걸려있던 ‘천족의 펜던트’라는 목걸이를 모두 차고 있었다. 귀신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망할 네 친구들이 나 몰래 인장을 그렸지 뭐니? 몇 년 내내 꾸준히 한 모양이야.”
뒤에서 므리나가 카랑카랑한 어조로 소리쳤다.
“이러면 알아줄 거라고 생각한 건지. 뭐, 성공했다고 봐야겠지. 다다나가 찾아냈으니까.”
“…….”
“숲에도 인장의 흔적이 많으려나? 다 내 사유지라, 실험체들 데리고 여기저기서 별짓을 다 했거든.”
므리나가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 그림이 뭔지 캐내기까지 고생 많이 했어. 네 친구 한 명을 고문하다 죽여버리고 말았지 뭐야? 아깝게.”
나는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고 멍하니 있어? 충격받았니? 저런, 가여워서 어째.”
“…….”
“나도 어쩔 수 없어. 황녀가 네 정신을 철저하게 부숴버리라고 했잖아. 호호호!”
므리나가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계속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본 소감이 어때? 반갑지?”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떨렸다. 나는 돌연 고개를 옆으로 틀고 왈칵 속을 게워냈다. 폐를 쥐어짜듯 토하는 내 머리 위로 므리나의 잔인한 음성이 쏟아졌다.
“여태 다 너처럼 도망쳤을 줄 알았니? 멍청한 년.”
“…….”
“걔넨 나한테 금방 잡혔어. 네 바람과 다르게 말이야.”
므리나 이소리하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실험을 계속 이어갔지. 황녀, 아니 천족님에겐 힘을 개방시킨 몸이 많이 필요했거든. 어떻게 얻은 수인족인데, 내가 쉽게 놓쳤겠니.”
“아, 아니야…….”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처, 천족은…… 아르소 할머니가…… 중간계를 지켜주는…….”
“얘 봐. 벌써 미쳐가나 보네.”
므리나가 깔깔 웃었다.
“널 잔인한 함정에 빠트린 것도 천족이잖아. 황녀님이 한 말 잊었어? 재미없게 벌써 왜 이래?”
“뭘 위해서, 낙원이, 내 친구들한테 무슨 짓을…….”
“카카나, 중간계를 손에 넣기 위해서 실험을 한 게 마족뿐인 줄 알았니?”
나는 여러 차례 눈을 깜박였다.
므리나가 옆에 쭈그리고 앉아 내 턱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친구들 못지않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위로 쫑긋 솟아있는 늑대의 귀. 차원균열지대를 쏘다니며 다부지게 성장한 몸. 쾌활하게 웃던 얼굴.
늑대 수인족, 휘라 이오렌이 시험관에 갇힌 채 친구들과 똑같이 눈을 감고 있었다.
[우리는 계시를 받은 수인족이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거주지를 떠난다고 믿고 있어요.]
휘라의 뒤편으로 10명의 수인족이 더 있었다.
[거주지를 빠져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요.]
나는 그들이 모두 ‘천족의 전언’을 듣고 차원균열지대의 거주지를 벗어난 수인족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충격적인 진실이 사탄의 불길처럼 머릿속을 태워 없앴다. 피눈물이 나오고 있는 걸까. 눈앞이 온통 붉었다. 거칠었던 내 호흡은 이제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하게 얕아져 있었다.
므리나가 가늘게 떨리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나스타스 님이 계시를 이용해서 수인족을 빼내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오로라 그랑루이의 정신이 저항을 오래 했거든.”
므리나가 턱짓으로 휘라 뒤편의 시험관을 가리켰다.
“봐봐. 고작 열 명밖에 안 되잖아. 저 늑대 수인족이 와서 이제 열한 명이지만.”
“…….”
“이 정도면 충분하지 뭐.”
므리나 이소리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하실엔 친구와 차원균열지대의 거주민뿐만 아니라 무수한 수인족이 잡혀 있었다. 마을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수였다.
“그거 알아? 계시를 받은 수인족은 천족의 힘을 개방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거?”
처음부터 계시를 이용해서 실험했다면 일이 더 쉬웠을 거라며, 므리나가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너 이후로 성공한 실험체가 없었는데 요령을 터득하니까 쉽더라. 그래도 네가 제일 성공작이긴 해.”
역겨운 자부심을 보이던 므리나가 문득 목소리를 낮게 낮추어 속삭였다.
“아나스타스 님은 무서운 분이야. 천족이 절대적 선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오랜 기간 준비하셨거든. 천족이나 마족이나, 중간계의 인간처럼 그저 한 차원의 주민들일 뿐인데 말이야.”
그녀가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다.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말라붙은 눈망울에 휘라와 친구들의 얼굴이 맺혔다.
나는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빛이 꺼져 싸늘하고 공허한 음성이 피맺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죽은 거야?”
“죽은 거면 네가 어쩌려고?”
“너도 죽어야지.”
나는 소름 끼치도록 차분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므리나가 진정 유쾌하다는 듯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가 완벽한 반달 모양을 그리는 눈으로 허리를 숙였다. 화려한 금발이 즐겁게 반짝이는 그녀의 눈망울 근처로 흘러내렸다.
“드디어 너도, 망가지는구나.”
쾌락에 젖은 목소리가 노래의 한 가락처럼 내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안타깝게도, 죽은 건 아니야. 하지만 산 것도 아니지. 그 경계에 있는 실험체야.”
나는 시선을 조금 돌렸다. 언제 온 건지 황녀가, 아니 천족 아나스타스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 눈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녀가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덧그렸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네요. 성공적으로 낙원이 도래한다면, 빛나는 명예는 전부 당신 거예요.”
므리나 이소리하의 입술에 찢어지는 미소가 걸렸다.
아나스타스가 천천히 내게 걸어왔다. 그녀가 지척에 서서 시험관에 갇힌 훌륭한 실험체들을 바라보았다. 언제든 천족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는, 힘을 개화시킨 육체들.
그녀가 두 손을 좌우로 뻗으며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영롱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입술엔 가면 같은 미소가, 허공을 향해 부릅뜬 눈엔 희열이 수면 위로 가열하게 올라와 있었다.
“자, 여러분. 모든 준비가 끝났답니다. 그러니 이제 눈을 떠요.”
그녀의 음성 끝자락에서 뿌리내린 광기가 절절하게 들끓었다.
황녀를 막아야 한다는 본능의 소리를 듣고 손을 뻗었지만 늦었다. 그녀의 발밑에 눈부시게 빛나는 마법진이 나타났다. 순백색으로 빛나는 마법으로 눈을 뜰 수조차 없다. 수십 줄기의 번개가 동시에 이곳으로 들이닥친 것 같았다.
친구들의 목에 걸려있던 펜던트가 환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므리나 이소리하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틀었다.
빛은 한참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감은 눈 바깥으로 머릿속을 백지로 만드는 빛이 조금 사그라졌을 때쯤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어찌나 밝은지 눈에 잔상이 남아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의 시험관이 모조리 깨졌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바닥이 시험관에 차 있던 액체로 축축하게 젖어서 내 옷과 다리를 적시고 있었다.
“아나스타스. 이곳의 우매한 것들을 낙원으로 인도합시다.”
낯선 천족이 친구의 입을 빌려 말을 건넸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더러운 손을 뻗친 마족들부터 몰아내야겠지요.”
아나스타스가 우아하게 화답했다.
“그대의 몸인가?”
천족의 시선이 흘끗 내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소름이 돋고 한기가 느껴져서 피부가 오그라들었다.
“그래요.”
아나스타스가 치마를 살짝 위로 추어올리며 기품 있게 말했다.
“곧 따라가죠.”
수많은 인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휘라도, 친구들도…….
“자, 이제 당신이 제게 몸을 주셔야죠?”
아나스타스가 내게 일직선으로 걸어오더니, 아까와 다르게 살짝 여유가 사라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카카나. 이리 와요. 대천족의 마나를, 제가 더 알뜰하게 써드릴 테니.”
“시, 싫…….”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게 오로라의 정신과 똑 닮았군요. 이제 그것도 끝이지만.”
그녀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희미하게 신경질적인 숨을 뱉었다.
아나스타스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녀의 발밑으로 환한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저항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지만, 손을 들어 내 몸을 끌어안았다.
‘빼앗길 수 없어.’
그녀가 동생을 살릴 리가 없다. 내가 해야 했다. 그것 말고도 남은 일들이 많았다.
나는 재빨리 깨진 시험관 유리에 손목을 묶은 끈을 문질렀다. 두 손이 결박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때, 여태 내 옆구리에 얌전히 매달려있던 마법가방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황녀의 가슴팍에서 흰 빛이 터져 나오는 걸 지켜보던 나는 홱, 고개를 숙였다. 안에 폭탄이라도 든 것처럼 떨리던 가방의 뚜껑이 터져나가듯 열리며 무언가가 쏜살같이 위로 솟구쳤다.
아나스타스의 새하얀 정신이 내게 들어오려다 말고 그 작은 물건에 부딪혀 막혔다.
쨍―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비집었다. 물건과 부딪힌 하얀 덩어리가 어찌나 발악하며 빛을 뿜는지 눈이 빠질 것처럼 부셔왔다. 그것은 결국 작은 물건의 끈질긴 방어를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가듯 황녀의 몸으로 돌아갔다.
나는 헐떡거리는 숨을 집어삼키며 바닥으로 떨어진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거울이었다. 본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라며, 퀄리티미엄의 드래곤이 건네주었던…….
[나는 예지의 드래곤이라 불리는 글라모스의 마지막 자손이다. 생각이 제법 잘 들어맞을 때가 있지.]
[요긴하게 사용할 날이 올 것이니, 몸에서 떼어놓지 말거라]
늙은 드래곤의 음성이 벼락처럼 뇌리로 내리꽂혔다.
“그냥 천족의 거울인 줄 알았는데…….”
정수리로 떨어지는 음산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나스타스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은발을 정리도 하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우아하고 친절한 미소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굵직하게 금이 가 있는 거울이 싸늘하게 식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리나엘의 거울이군요.”
갑자기 튀어나온 익숙한 이름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아, 천계에서도 나를 감옥에 가둬두지 못해 안달하던 분이셨죠.”
아나스타스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입 안으로 웃음을 삼켰다. 낄낄거리며 웃는 마족보다 그녀의 웃음이 더 어둡고 스산해서 뒷덜미가 차가워졌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뒤로 슬그머니 물러섰다. 아나스타스가 흐트러진 머리를 뒤늦게 정돈하더니, 나를 향해 웃었다.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분의 물건이 중간계에 남아 아직도 절 방해하다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에요. 그렇죠?”
“…….”
“그 거울은 드래곤이 줬다고 했나요? 아, 그래요. 맞아요. 그 드래곤이 어떤 존재였는지 잊고 있었네요.”
그녀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지의 드래곤이라 불리는 글라모스의 마지막 자손이었죠.”
예지의 드래곤.
그때도 드래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때마침 끈이 끊어졌다. 나는 필사적으로 거울을 잡아 품에 끌어안았다. 한 번 금이 갔지만, 아직 완전히 부서지진 않았다. 아나스타스도 그걸 아는지 내 몸에 들어오는 걸 더 시도하지 않고 있었다.
“개입하지 않는 게 그들의 규칙인 줄 알았는데, 어지간히 카카나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건방지게도.”
보랏빛 눈망울이 정신을 차리고 맑아진 내 눈을 보더니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그녀가 흰 치아로 아랫입술을 잡아 뜯으며 분노에 찬 말을 씹어뱉었다.
“한 번은 당신에게서 그 거울을 받아 확인해야 했는데, 내 불찰이에요.”
아나스타스의 기분이 위아래로 널을 뛰어 쫓아갈 수가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 마법스크롤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금세 미소를 되찾은 그녀가 내게 손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뭐, 아직 방법은 많으니까요.”
“뭐?”
“조만간 다시 봐요.”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빈자리를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통 동생 생각뿐이었다.
서둘러 지하실로 뛰어가려다, 누군가의 발에 걸려 대차게 넘어졌다. 계단 모서리에 코를 찧어 코피가 왈칵 터졌다. 므리나 이소리하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아까처럼 무력하게 끌려가진 않을 것이다. 동생이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을 치다 내 머리채를 잡은 그녀의 팔뚝을 우지끈 깨물었다. 뼈를 부러트릴 각오로 턱에 힘을 주었더니 살이 잘리며 핏물이 확 튀었다.
“아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날 놓쳤다.
나는 입에 고인 흥건한 핏물을 뱉어내고 마법스크롤을 찢으려 했다. 그러나 곧 득달같이 달려온 므리나와 충돌해 바닥을 굴러야 했다.
바위처럼 날아온 그녀의 몸을 정통으로 받아내고 유리 조각이 낭자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탓에 정신을 바로 차리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내 옷을 찢어발기며 숨겨져 있던 마법스크롤을 우악스럽게 끄집어냈다. 하나는 내 손에 쥐어져 있었지만, 목을 졸라대는 통에 힘이 빠졌다. 그것까지 므리나가 악착같이 빼앗아갔다.
머릿속이 점점 새하얘졌다.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에 그나마 남은 힘으로 바닥의 유리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걸 망설임 없이 므리나의 허벅지로 휘둘렀다.
“아악! 이 개 같은 게……!”
막힌 숨통이 트였다. 나는 몸 위를 짓누르듯 앉아있는 므리나를 밀쳐내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상처투성이인 몸에서 피가 투둑투둑 떨어졌다.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코앞이 동생이 있는 방이었다.
나는 피 웅덩이에 누워있는 다다나를 발견하고 눈이 뒤집혀서 달려갔다. 끈질기게 뒤쫓아온 므리나가 괴물 같은 힘으로 내 뺨을 올려쳤다. 귀가 먹먹하게 멀어지며 눈앞이 시퍼렇게 점멸했다. 삐이, 울리는 이명을 들으며 기절하듯 바닥에 엎어졌다.
“네가 동생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녀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바락바락 고함을 내질렀다.
“헉, 허억…….”
“넌 똑같이 동생을 죽게 할 거야! 혼자 도망쳐서 또 그렇게 살아남겠지!”
“닥쳐!”
“이젠 어떻게 할 거니? 이번에도 살아있을 거라 기도하며 이기적으로 회피하는 삶을 살 거니? 응?”
그녀가 이번에야말로 죽일 기세로 목을 졸랐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던 아나스타스의 명령은 이미 눈에 뵈지 않는 상태였다. 그녀는 질투와 시기, 증오, 혐오로 버무려진 시커먼 감정들을 내게 쏟아 부으며 지옥문이 열린 것 같은 주둥아리를 쉼 없이 놀렸다.
“그렇게 동생을 살리고 싶어 했지? 피를 토하고 채찍 맞아가면서?”
그녀가 킬킬거리며 정신 나간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넌 네 몸을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도 못 지킬 거야. 넌 저주받았으니까.”
“닥, 쳐!”
“가여운 카카나. 어쩌니. 너 때문에 스승님도 죽고, 친구도 죽고, 동생도 죽고, 다 죽어버렸네? 넌 이제 또 혼자가 될 거야.”
므리나가 눈을 크게 뜨고서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다시, 네 동생의 배를 찢고 장기를 끄집어낼 거거든.”
“윽, 으욱, 건드…….”
“다 죽어가면서도 동생 걱정이야? 끝까지 고결한 척, 난 그게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네 그 맑은 눈만 들여다보면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고! 알아? 어?”
므리나가 내 목을 강하게 짓눌렀다.
“내가, 왜, 너 같은 녀석한테!”
“윽, 크윽!”
“걱정하지 마.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죽여버릴 테니까.”
안 돼.
“나란히 묻어줄게. 죽어선 함께할 수 있겠다.”
안 돼!
“죽어버……. 컥!”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푸르게 질린 내 얼굴 위로 뜨거운 핏물이 쏟아졌다. 눈을 깜박일 수가 없다.
므리나가 입 밖으로 왈칵 피를 토하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선에 날카로운 단도가 꽂혀있었다.
“다다나……?”
다다나가 유령 같은 얼굴로 서 있다가 쓰러졌다. 므리나가 발버둥 치며 마물의 것 같은 뾰족한 손톱으로 다다나의 배를 할퀴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목을 막아보지만, 손가락 사이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의 엉덩이 밑에는 벌써 다다나가 흘린 양만큼 피가 고이고 있었다.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 건지 입을 벌리지만 부륵, 하고 피거품 끓는 요상한 소리만 날 뿐이다.
나는 피를 뒤집어쓴 채 그 꼴을 지켜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다다나!”
무릎걸음으로 뛰어가 다다나를 품에 안았다. 돌덩어리를 안은 것처럼 무겁고 딱딱했다. 온기 한 점 없는 몸으로, 동생이 나를 향해 눈을 굴렸다.
밝고 명랑한 내 동생. 반짝이는 개나리색 눈망울이 나를 보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입술은 이미 시체의 것처럼 푸르다. 죽은 몸이었다. 회생할 수 없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남아있던 생기를 끌어모아 므리나를 공격한 게 분명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미, 안해, 언니.”
“말하지 마. 이러면…….”
다다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죽은 몸에 기생하듯 붙어있는 정신이었다. 아나스타스가 잔인하게 거두어 가 꺼져가는 숨결이 아직 희미하게 그 눈망울에 담겨 있었다.
동생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밝았다. 내가 오기를 기다렸던 걸까. 떠나지 않고, 이 아픈 몸에서.
동생이 손을 들어 눈물로 범벅이 된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눈빛이 다정한 색으로 반짝이다가, 이내 까무룩 뒤집혔다. 툭, 동생의 손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다나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앉아있었다. 턱에 고인 눈물방울이 다다나의 평온한 얼굴 위로 떨어졌다.
“다다나?”
“…….”
“다다나. 다다나.”
몸을 흔들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입에서 짐승의 흐느낌 같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동생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다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뿔을 만지작거리고, 눈물에 젖은 뺨을 쓸어주었다. 주근깨가 남은 콧잔등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만져보았다.
다다나의 발끝에서부터 희미한 빛이 아른거리더니 서서히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돌려 사라지는 다다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일종의 대가일지도 몰랐다. 아나스타스는 죽은 자를 이승에 억지로 붙들어 놓았으니까.
떠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울먹이는 미소를 지었다. 보내줘야 했다. 이 이상은 내 이기심이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키고 목소리를 쥐어짜내었다.
“고생했어, 다다나.”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악몽 같은 이곳에 붙잡혀 있느라고, 정말 고생했다. 살아남은 감정이라곤 증오밖에 없는 죽은 삶을, 오래도 버텼다.
더는 이곳에 머무르지 않고 가뿐하게 날아가 버리기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기를.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체를 따스한 품에 끌어안았다.
“옆에 있어 줄게. 무섭지 않지?”
이번엔, 언니 품에서.
“잘 가, 다다나.”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용사들이 도착한 건 다다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였다. 동생은 가루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내 바람을 알아들은 것처럼 흔적조차 없이,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