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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용솟음치는 격동 (32/43)

Chapter 4. 용솟음치는 격동

얼마간 눈이 내렸다.

겨울을 향해 무섭게 내달리던 시간은 눈이 내리자 잠시 멈췄다. 세상은 함박눈에 포근하게 둘러싸여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창문을 내다보면 두툼한 솜이불을 덮고 잠에 빠진 숲을 구경할 수 있었다.

비브로스는 겨울초와 관련된 공동연구 작업으로 한창 바빴다.

“아그리마 녀석, 같이 연구하자니까 할 일이 있다면서 계속 발을 빼지 뭐냐.”

비브로스는 종종 그렇게 투덜거렸다.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여튼 하나에 꽂히면 도통 뒤를 돌아보지 않는단 말이야.”

‘그건 스승님이랑 닮았네.’

나는 그가 아그리마에 관한 걱정을 늘어놓을 때마다 종종 아리마 그라간을 떠올렸다. 그건 므리나를 상대하는 내 마음가짐에 아픈 자극을 주었다.

나는 천천히 마음을 정리했다. 끝을 맺을 준비를 해야 했다.

벽난로의 불빛이 은은하게 거실을 비추는 오후엔 참을 수 없이 잠이 쏟아졌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 잠들었다.

문득 눈을 뜨자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두툼한 담요가 가슴팍까지 얌전히 올라와 있었다. 고개를 들어 매끈하게 빠진 턱선을 올려다보자 아르모어가 나를 껴안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한참 쳐다보았더니 그가 눈을 떴다. 불빛이 번져 동백꽃처럼 더 붉어 보이는 눈망울이 천천히 내게로 미끄러졌다. 그가 손을 들어 내 이마를 쓸어주었다. 아르모어만의 인사였다.

“잘 자더군.”

“요즘 이상하게 잠을 많이 자네요.”

나는 약간 민망해져서 말했다.

“평소에는 잠을 설치니, 잘된 일이지.”

아르모어가 나른하게 대꾸하더니 담요를 더 위로 끌어당겼다.

“날씨가 추워졌다. 더 따뜻하게 입거라.”

“저는 추위를 잘 안 타요.”

“그러면 더 주의해야겠군.”

아르모어가 드물게 단호한 어조로 못을 박았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몸을 늘어트렸다. 몸에 잠기운이 들러붙어 기운 없이 흐물거렸다. 아르모어의 품이 이불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따스했다.

그때 싸늘한 냉기 한 줄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피부를 쓸었다. 부르르 떨며 고개를 돌렸다. 뭘 하고 온 건지 네 명의 용사들이 신발 밑창에 붙은 눈을 털어내고 있었다.

마법으로 자신에게 붙은 눈만 깔끔하게 털어낸 스노아가 거실로 들어왔다.

“카카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다가왔다.

“설마 여기서 잠든 건가요?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잠깐 잠들었을 뿐이야.”

“잠깐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가 나른하게 눈을 끔뻑이는 아르모어와 그에게 안겨 있는 날 번갈아 쳐다보았다.

“따뜻하게 주무신 것 같으니 오늘은 봐줄게요.”

“카카나! 깼구나!”

할릭이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오며 소리쳤다.

“우리가 뭘 했는지 알아? 고구마를 구워 왔지!”

“고구마를 굽는데 왜 밖에서 들어와?”

“스노아가 도와줬어.”

나는 스노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피곤한 얼굴을 하고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제 마법으로 고구마를 구워달란 인간은 저 치들밖에 없을 거예요.”

“많이 구웠어. 다 불러서 함께 먹을 작정이거든. 내일이 헬리스의 안식일이잖아.”

스노아가 뭐라고 중얼거리든 할릭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얘기했다.

그의 말마따나, 결전의 날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우리는 헬리스의 안식이 끝나고 많은 사람이 신전으로 향할 때 인파에 묻혀 잠입할 예정이었다.

“승부를 펼치기 전에는 배를 든든하게 채워줘야지.”

‘보통 긴장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지 않나.’

나는 당연한 의문을 제쳐두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부르다니 누굴?”

“네가 알 만한 사람들.”

아다르가 대신 대답하며 나를 아르모어에게서 끌어냈다. 담요가 미끄러지자 찬 기운이 옷을 파고들었다.

“윽, 추워.”

진저리치기 무섭게 그가 나를 끌어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래봤자 밖에 오래 서 있던 탓에 아다르의 옷자락에서 냉한 기운이 끼쳤다. 몸을 웅크리는데, 커다란 손이 겨드랑이를 파고 들어와 배를 감쌌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으앗!”

“마나가 제법 많이 모였네.”

아다르가 뒤에서 내 목덜미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희미하게 눈 냄새가 났다. 할릭은 옆에 앉아서 열심히 고구마 껍질을 까고 있었다.

“자, 카카나.”

김이 펄펄 나는 고구마를 호호 불어 식힌 할릭이 내게 내밀었다. 순간 군침이 확 돌아서 노랗게 익은 속살을 베어 물었다. 꿀처럼 달콤했다.

나는 뜨거운 고구마를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식히다가 꿀떡 삼켰다. 그리고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마나가 얼마나 모였는데? 제2자각자가 될 수 있을까?”

“응. 가능성이 충분해.”

아다르가 기특하다는 듯이 내 뺨에 제 머리를 비비며 얘기했다. 그의 회색 머리칼이 눈 때문에 살짝 젖어있어서, 꼭 커다란 늑대가 털을 비비며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마나친화력과 마나수용력은 타고나야 하거든. 근데 네겐 보통 마법사보다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아다르의 두툼한 검지가 내 단전 근처로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간지러워서 허리를 뒤로 뺐더니, 그가 목 안으로 웃음을 삼키며 낮게 웃었다.

“지금처럼 마나를 모으면, 여기에 마나핵이 형성될 거야.”

“마나핵?”

“마나들이 모여 살 수 있는 집이 생기는 거야. 그러면 더 많은 마나를 흡수하고 저장할 수 있어.”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예의 바른 첼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이하러 나갔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고 싶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다르가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붙들고 있었던 탓이다.

결국 눈만 굴려 거실로 들어온 손님들을 살폈다. 놀러 온 사람은 올리넨과 노레스, 반크 그리고 이블라였다. 하도 봐서 그런지 이제 저들이 함께 있는 걸 봐도 별로 놀랍지가 않았다. 이 범상치 않은 모임에 익숙해지는 스스로가 조금 무서워졌다.

“그러면 곧 시작될 계획을 짚어볼까요?”

자리를 잡은 반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계획 때문에 온 거였어?!’

“딱딱하게 용건부터 말하는 거야? 그러지 말고 좀 먹어.”

할릭이 능구렁이처럼 이야기를 넘기더니 고구마를 내밀었다. 반크는 얘기를 꺼냈다가 졸지에 입에 고구마를 물고 우물거렸다. 아무래도 놀러 오라고 초대했다는 건 철저히 할릭의 관점이었나 보다.

‘저렇게 긴장감이 없을 수가…….’

나는 기가 막힌 와중에도 할릭이 까주는 고구마를 열심히 받아먹었다.

“헬리스의 안식이 시작되는 시간은 밤 9시라고 했죠?”

스노아가 물었다. 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도시 사람들이 전부 몰려들 테니, 숨어들기엔 적격일 겁니다.”

“역시 카카나는 이곳에 있는 게 어때?”

나는 어림도 없다는 의미로 아다르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구부렸다.

“나는 신전의 서재에서 볼일이 있다고 했잖아.”

내 힘을 정확히 알아야 마족을 상대할 때 써먹을 수 있다. 이번만큼은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나는 이블라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블라랑 아르모어도 나랑 함께 있고, 이번엔 폭시를 부를 수 있는 호각도 미리 꺼내놓을 건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넌 항상 걱정이야.”

아다르가 불만스럽게 미간을 찡그렸다.

“언제 봐도 위태롭다고.”

“뭔 소리야.”

내가 뭘 어떻게 얘기해도 불만을 가질 놈이기 때문에, 나는 더 달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반크가 챙겨온 자료들을 이것저것 들추었다.

‘헬리스의 안식일’은 겨울이 되면 신전에서 주최하는 가장 큰 종교의식이었다.

제국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이 지나면 대지가 딱 한 번 휴식기를 갖는다고 믿었다. 백성들의 배를 불리는 작물의 계절도 중요하지만, 수확이 끝난 후 땅이 휴식을 취하는 겨울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그래서 제국인들은 이 시기에 대지가 제대로 쉬지 못하면 겨울 이후의 계절 작물이 망가진다고 굳게 믿었다.

“신전의 성직자들이 거리로 나와 의식을 거행하는 날이 헬리스의 안식일인 거죠?”

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의식이 시작되는 아침 9시부터 도시가 잠에 빠진 것처럼 조용해지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이 전부 모인다면서요. 시끄럽지 않을까요?”

“헬리스의 안식은 대지를 잠재우는 의식입니다. 말소리가 나지 않게 하는 것이 원칙이죠.”

“신기하네요.”

“과거엔 성직자들이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끄러운 사람들을 벌하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반크가 과일 주스를 들이켜며 말했다.

“하지만 이젠 간소화되어서, 광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별로 구경할 건 없겠네요.”

반크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용하고 긴장된 분위기일수록 장관인 것들도 있습니다. 헬리스의 안식이 딱 그렇죠.”

줄곧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올리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에 사용되는 성물은 값비싸고 화려하답니다. 열심히 구경하도록 하세요.”

호로록, 차를 들이켠 그녀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이후로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푸근하거나 가볍지 않았다. 나는 대답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불행히도 나는 의식을 구경할 수 없었다. 뒤늦게 나온 의견 때문이었는데, 지하에서 소동이 벌어지면 위층인 서재에 반드시 문제가 생길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용사들보다 빨리 신전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의식이 끝나는 예상 시간은 18시. 그때 성직자들 틈에 숨어든 용사들이 신랑으로 단숨에 진입하므로, 18시 전까지 서재를 둘러봐야 했다.

‘지금쯤이면 광장에서 한창 의식이 진행되고 있겠지?’

나는 무심코 전신거울을 봤다가 낯빛을 흐렸다.

‘이대로 괜찮은지 모르겠네.’

스노아의 환영 마법은 완벽하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을 떨치기 힘들었다. 함께 신전의 서재로 들어가기로 한 이블라도 불안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적당한 타협점을 금방 찾아냈다. 한 명씩 반지를 빼서 환영마법이 작동 중인지 확인해보는 방법이었다.

다행히 사제의 환영이 제대로 씌워져 있었다. 아르모어는 애초부터 걱정이란 걸 하지 않았으므로, 호들갑을 떠는 우리를 멀찍이서 구경하기만 했다.

“준비됐지? 이제 바로 서재에 들어갈 거야.”

이블라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스노아가 만들어준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어 신전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의식을 위해 많은 성직자가 빠져나가고 없는 신전은 고성처럼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나는 꼿꼿하게 선 기사들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다행히 별 의뢰를 다 겪어봤을 이블라가 능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쭈뼛거리면 괜한 의심만 불러일으킨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쫓아가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으려고 노력했다.

예상대로 기사들이 우리를 막아섰다.

“잠깐, 멈추십…….”

아르모어가 사제의 신분패를 보이는 척하며, 그들의 머리로 정백을 흡수시켰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으나, 가까이 있었던 나는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벗을 보아 기분이 좋구나.”

기사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흐리멍덩해졌다.

‘신전이 크지만 않았어도, 아르모어의 정백으로 실험실에 들어가는 건데.’

실험이 진행 중인 신전은 네 곳이다. 몰래 잠입하자는 계획을 세운 이유도 다른 신전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신전의 크기와 사람 수였다. 서재가 목적지인 지금과 달리, 지켜보는 눈이 많은 실험실은 정백으로 해결하기 어려웠다. 신전이 크고 넓어서, 멀리 숨어있는 사람에게 정백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노아의 슬립 마법으로 신전의 모든 사람을 재워버리기엔 마족이 눈치챌 가능성이 높았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안 돼.’

나는 쿵쿵 뛰는 맥박을 느끼며 미동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제단 근처에 특히 감시자를 많이 붙여놨을 거야.]

아다르의 조언이 떠올랐다.

[우리는 사제들 무리에 섞여서 신랑으로 진입할 거지만, 너희는 그럴 필요 없어.]

그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신전의 지도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측랑을 빙 돌아서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 혹시라도 제단에 다가가는 짓은 하면 안 돼.]

그때 이블라가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도 인사를 하는 것처럼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사제님이시군요. 저희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기사들이 멍한 얼굴로 얘기하더니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이블라의 뒤를 바짝 붙어 따라갔다.

휠라메스 신전은 그 명성에 맞게 으리으리하게 컸다. 신전답게 화려한 장식은 없었지만, 차분한 분위기일 뿐 눈이 닿는 곳마다 값비싼 것투성이였다.

나는 주위를 너무 두리번거리지 않도록 억지로 목을 고정했다. 웅장한 건 둘째 치고, 건물이 너무 커서 여기가 어디인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도로 보는 거랑 다르네.’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용도를 알 수 없는 방은 끝이 없고 복도는 복잡해서 미로에 들어온 것 같았다. 반면 이블라와 아르모어는 머릿속에 지도를 집어넣기라도 한 것처럼 망설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블라가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섰다.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문에는 신의 사자들이 뿔나팔을 불고 있는 그림이 양각되어 있었다. 이블라가 문을 열자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여기서 조용히 정보만 빼고 나오는 거야.’

찾아야 할 것은 분명했다. 필요한 건 시간뿐이었다.

서재에는 하얀색 사제복을 입은 사서가 앉아있었다. 그의 시선이 잠깐 내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곧장 고서가 꽂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렇게 많은 책을 언제 다 뒤지지.’

나는 수량에 압도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이걸 해 떨어지기 전에 전부 살펴보려면 손이 열 개여도 부족했다. 그렇다고 마음 가는 대로 책을 찾았다간 급하게 뭔가를 뒤지는 사람처럼 보일 게 뻔했다.

옆에서 책을 살펴보던 아르모어가 허리를 꼿꼿하게 펴더니, 텔레파시로 물었다.

「찾는 것이 무엇이지?」

‘함께 찾아주려는 건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솔직하게 토로했다.

「천족의 마나에 관해서 알아보려고 해요. 그리고 제게 그 마나가 왜 깃들었는지도 알아야 하고요.」

천족에 관한 정보는 이제 차원균열지대와 신전에 남아있는 것들이 전부다. 차원균열지대에서는 이미 아르소를 통해 얻을 만한 정보를 얻었고, 남은 건 신전뿐이었다.

아르모어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신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원하는 건 아닐 테지.」

나는 고개를 돌려 아르모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것이라면, 금서를 모아놓은 곳에 정보가 있을 거다.」

「뮤나스의 교수 전용 열람코너처럼요?」

「그렇지.」

아르모어의 눈이 사서에게 굴러갔다.

「사서의 기억을 훑어보는 게 빠르겠군.」

그가 결정을 내리자마자 사서에게 걸어갔다. 이블라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근거리에 서서 책을 읽는 척하고 있었다. 서재에는 우리 셋과 사서 말고 아무도 없었다.

아르모어가 짧은 시간 동안 사서의 기억을 훑어보더니, 웬 열쇠를 들고 걸어왔다. 크고 투박한 데다 검은색이어서 오래된 보물함의 열쇠라도 들고 오는 줄 알았다. 그의 뒤로 잠에 빠진 사서의 모습이 보였다.

혹시 서재에도 우릴 지켜보는 눈이 있지 않았을까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곧 떨쳐냈다. 그랬다면 아르모어가 진작 알아챘을 것이다.

“이곳을 나가는 게 좋겠다.”

아르모어는 이제 텔레파시도 하지 않았다.

“이 열쇠는 어떻게 하고요?”

“실험실 근처에 숨겨진 서고가 있는 모양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요?”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지. 나머지 인원과 합류해서 함께 신랑으로 진입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맙소사.”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눈을 여러 차례 깜박였다가, 이마를 짚었다. 혼란스러웠지만 서재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면 얼른 발을 빼는 게 좋았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투박한 열쇠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래도 열쇠는 얻었으니 다행인가.’

“혹시 모르니까 다른 책들을 빨리 훑어볼게요. 사서는 언제 깨어나죠?”

“한 시간쯤 자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움직였다. 숨겨진 서고가 있다면 이곳의 정보는 허울뿐일 가능성이 컸지만, 한 번은 확인해봐야 했다.

천족과 관련된 서적을 모조리 골라내어 바닥에 펼쳐놓았다. 하나씩 찾는 것보다 옆에 쌓아놓고 원하는 내용을 찾는 것이 빨랐다.

바닥에 앉아 본격적으로 책을 뒤지는데, 갑자기 아르모어가 고개를 쳐들었다.

“왜 그래요?”

그의 시선이 창문에 고정되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불길한 징조가 뒷덜미를 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창문에 뭐가 비쳤어요?”

“곤란하군.”

그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는 순간, 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뭔가 잘못됐어.”

이블라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여길 벗어나야 해!”

그녀의 목소리가 비명으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아르모어가 내 허리에 팔을 꿰었다. 나는 꽥, 소리를 내며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부딪쳤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나지 않았다. 그는 곧장 창문을 열어 몸을 날렸다.

나는 겨울바다에 빠진 사람처럼 눈도 뜨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아르모어의 뒤를 쫓아 이블라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쾅!

“악!”

신전의 1층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고위귀족의 저택만큼 커다란 신전이 무너질 것처럼 우르르 떨리자 세상이 멸망할 듯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마법가방이 머리 위로 훌러덩 벗겨져 날아가려 하기에 급히 손을 뻗어 잡아챘다. 동시에 아르모어가 신전의 첨탑에 뿔처럼 치솟은 기둥을 잡고 버텼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썰물에 맨몸으로 나동그라지면 이럴까. 거센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날려갈 것 같았다.

“윽!”

차마 눈 뜰 용기는 없고 그의 옷자락을 틀어쥐고 버티는데, 돌연 이블라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이곳의 높이도 잊고 눈을 번쩍 떴다.

“이블라!”

그녀가 기둥을 놓쳐 날아가고 있었다.

쯧, 혀를 찬 아르모어가 여의주에서 채찍을 뽑았다. 나는 뱀처럼 날아간 채찍이 그녀의 허리를 감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했다. 다행히 전기의 속성은 스며들어 있지 않았다.

대롱대롱 매달린 이블라 밑으로 온통 시뻘겋게 물든 신전이 보였다. 부글거리는 불똥과 뜨거운 화기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지옥불처럼 치솟던 불길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문이었다.

나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기절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우리가 하늘을 날고 있다거나, 높이가 까마득하게 높다거나 하는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진 저 지옥이 현실이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감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까마득하게 먼 땅을 내려다보았다. 신전의 무너진 외벽을 타고 사기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벌써 기절해서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우리가 늦었나 보군.”

현실이라는 걸 깨달은 건 아르모어의 담담한 소감을 들은 후였다.

그가 후후, 음산하게 웃었다. 아르모어의 웃음소리를 들은 나는 식겁했다. 지금 상황이 ‘그 아르모어’가 즐거워할 정도로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블라 역시 아르모어의 괴팍한 웃음소리를 듣고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피딱지처럼 탁한 아르모어의 시선이 내게 떨어졌다. 그의 시커먼 머리카락이 사신의 해진 망토 자락처럼 섬뜩하게 날렸다.

“카카나!”

청량한 목소리가 부유하는 내 의식 언저리를 두드렸다. 나는 간신히 눈꺼풀을 깜박였다. 언제 텔레포트 한 건지, 스노아가 희게 질린 얼굴로 날 끌어안았다.

“괜찮으세요?”

나는 다 죽어가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주, 죽을 것 같아…….”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아르모어. 카카나가 겁먹잖아.”

금세 상황을 파악한 할릭이 아르모어의 등짝을 두들기며 타박했다. 물론 아르모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 겁먹을 상황 맞는 것 같은데.”

아다르가 신전 근처를 내려다보며 한 소리 했다. 나는 더 눈을 뜨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 아르모어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았다.

“인명피해가 심각하겠는데.”

“불길한 마나가 심상치 않아. 실험실이 있는 곳에서 사기가 퍼지고 있어.”

할릭과 아다르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간이 올리넨과 반크의 목소리도 들렸다. 주위가 북적북적했다. 신전의 낌새가 이상해지자마자 텔레포트로 이곳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노레스는 건물에 깔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출하고 있다는 말이 들렸다.

“난 노레스를 도우러 내려가 볼게.”

이블라의 인기척이 순식간에 멀어지는 느낌이 났다.

나는 억지로 실눈을 떴다. 뭐가 어떻게 됐든 간에 우선 땅에 내려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대가 높은 탓에 칼바람이 따가울 정도로 차가웠다.

건조한 바람을 타고 마수처럼 손을 뻗는 불길을 스노아가 마법으로 진압했다. 이곳까지 미치는 열기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근처에 있는 사람은 사제밖에 없을 거야. 대부분 의식이 진행 중인 광장에 있으니까.”

할릭이 얘기했다.

“이런 폭발이 일어났는데 의식이 계속 진행될 리 없어. 신전과 광장은 그다지 멀지 않잖아. 게다가 이 사기…….”

아다르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러면 카카나에게도 영향이 갈 텐데.”

마물과 사기는 내게 달라붙으려고 한다. 용사들이 걱정하는 건 그 점이었다.

‘그래서 밑으로 못 내려가고 있었던 거구나.’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아르모어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어떻게 하지? 나 먼저 이곳을 벗어나야 하나?’

용사들은 아직 별말이 없었지만, 조만간 나를 피신시키려 할 것이 뻔했다. 높은 곳에서 보내는 일분일초는 내게도 지옥이었다. 용사들이 상황파악을 끝내면 이번에는 나도 순순히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반크가 입을 열었다.

“안 좋은 소식입니다.”

‘여기서 더 안 좋을 수가 있다고?’

나는 높이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헛구역질을 삼켰다.

“다른 신전에서도 같은 폭발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부?”

아다르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예. 휠라메스 신전은 부지가 넓어 아직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다른 신전은 사정이 안 좋습니다.”

“기사나 치안유지군은 보나 마나 귀족들 피신시키느라 바쁠 테고. 애꿎은 평민들만 죽어 나가겠군.”

“그리고…….”

“또 있어?”

잠시 쌩쌩 부는 바람 소리만 났다. 반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기를 뿜으며 검은 마나를 사용하는 인간의 형상이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신전당 한두 명 정도입니다만…….”

“…….”

반크가 흐릿하게 말을 줄였다. 배 속이 선득해지는 기분이라 자동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신전은 불길할 정도로 조용했다. 사제의 비명 소리도 더는 나지 않았고, 간혹 건물이 무너지면서 돌무더기가 굴러가는 소리만 났다.

시끄러운 쪽은 오히려 먼 곳에서 나고 있었다. 광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소리였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도시가, 눈 깜짝할 사이에 휠라메스 신전처럼 엉망이 되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니 심장이 불쾌하게 쿵쿵거렸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마족의 기운은 여섯이에요. 인력을 나누어서 몇 명은 다른 신전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스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분위기가 더욱 숨 막히게 느껴졌다. 이쯤 되니 도저히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새파랗게 날리며 떠 있는 스노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냉정한 얼굴 뒤로 꾸물꾸물 몰려드는 회색 구름이 보였다. 곧 눈이 내릴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내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물었다.

“그러면 마족이 해방되었다는 뜻이야?”

실험실이 터졌다. 사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검은 마나를 쓰는 사람이 튀어나와 날뛰고 있다. 이것들이 가리키는 건 두 가지다.

실험에 실패했거나, 성공했거나.

‘실패했다면 마족들이 이렇게 대놓고 날뛸 리 없어. 실험하기 위해 애써 만든 보금자리잖아.’

그러면?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가 늦었다.”

아르모어가 아플 정도로 잔인한 진실을 읊었다.

“신전에서 느껴지는 마족의 마나량이 위협적입니다. 여태 힘을 겨룬 마족과 차원이 달라요.”

첼러스가 굳건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피해를 줄이는 게 최선입니다.”

나는 목에 핏대가 서는 것도 모르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 더 인력을 쪼개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찢어졌다가 죽을 일 있어?”

“…….”

“마족은 천족과 힘을 겨룬 종족이야. 천족을 신처럼 떠받들던 수인족을 생각해 봐. 그들의 저주에 당해서 죽어가던 드래곤도…….”

“진정해요, 아가씨.”

나는 퍼뜩 입을 다물었다. 올리넨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분하게 이를 사리물고 눈을 감았다. 이럴 때면, 나도 그들처럼 전투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크. 다른 신전은 한두 명이라고 했지요?”

올리넨이 묻자, 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가 사르메 신전을 맡도록 하죠.”

심장이 밑으로 쿵 떨어졌다.

사르메는 휠라메스에서 가장 먼 신전이었다. 자유롭게 텔레포트 할 수 있는 올리넨이 사르메로 가는 게 맞았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올리넨의 미소를 다신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초조해졌다. 손은 이미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르모어가 크고 따뜻한 손으로 희게 질린 내 손을 움켜쥐었지만, 그래도 떨림이 가시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정이 들었지?’

요즘의 나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정을 너무 쉽게 주고 있었다. 옛날, 친구들에게 매달렸을 때처럼. 또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봐 불안감이 목구멍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그러면 마탑주님이…….”

“저는 혼자가 아니랍니다.”

올리넨이 말했다. 예의 그 의미심장한 어조였다.

나는 어렵게 입을 다물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마족이 날뛰고 있어요.”

그녀의 차분한 시선이 신전으로 떨어졌다. 아르모어와 비슷한 초연함이 담긴 눈이었다.

“이제 정체를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건 중간계를 침략하겠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해요. 그렇지요?”

나는 올리넨의 말에 집중하지 못했다.

‘저게 뭐지?’

굽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선 그녀의 등 뒤로, 수많은 그림자가 나타나고 있었다.

처음엔 그게 뭔지 알아채지 못했다. 새 떼가 그녀의 뒤를 지나가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사람의 형상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바라보자, 그들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굽은 고깔모자, 바람에 휘날리는 값비싼 로브, 괴짜처럼 웃고 있는 입술. 그들의 키보다 크고 주먹만 한 보석이 박혀있는 막대, 스태프.

마법사다. 걸출한 인재들이 모인다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있었다.

“마탑주님 호출은 최초인 것 같구려.”

땅의 현자, 베딜락 울라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지. 그렇지 않나, 스노우? 아가씨도 오랜만에 보는구려. 껄껄!”

여전히 염치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스노아의 제자, 아니, 물의 현자 아레사 나이제르.

“신전에서 사기가 흘러나오다니 신기한 일이군. 내 최근 사기를 연구한 적이 있는데…….”

“혼자 연구했단 말이오? 분명 내 마물연구와 함께 하자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마탑주님의 호출이면 세상의 존망이 걸린 일 아니오? 마탑은 중립구역이니 말이오.”

“호출을 받고도 한가하게 수다나 떨고 있는 꼴이라니! 이러니 마탑의 마법사들이 괴짜란 소릴 듣는 거요!”

사이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지만 실력만은 확실한 탑의 기둥, 현자들.

그리고 현자들의 뒤로 그들을 따르는 마법사들이 끝도 없이 나타났다. 올리넨이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면 나중에 봐요. 아가씨.”

나는 얼이 빠져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올리넨의 텔레포트 마법 한 번에 이곳을 가득 메우던 마법사들이 동시에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방금 내가 뭘 본 건지 믿기지 않았다.

“와, 역시 마탑주는 마탑주인가 봐요. 할머니 보고 멋있다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어느새 신전의 지붕까지 타고 올라온 노레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건물에 깔린 사제들을 구하면서 불에 조금 그을렸는지, 옷자락 끝이 살짝 타 있었다.

“저도 질 수는 없죠. 우리는 라포네사 신전을 맡도록 할게요.”

“우리?”

나는 혈혈단신인 노레스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되물었다. 노레스, 아니 용병왕이 이블라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씨익 웃었다.

“용병들이 있잖아요. 돈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족속들이지만, 저를 따르는 용병 길드장이 꽤 있거든요.”

“이 녀석의 술친구는 끝이 없거든.”

이블라가 픽 웃으며 한마디 얹었다.

“그럼 이만!”

노레스가 짧게 경례하더니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휠라메스 신전을 격파한 후 바로 이동할 수 있도록 스노아가 미리 만들어준 마법스크롤이었다.

“그러면 남은 곳은 한 곳뿐이군요. 저는 킬라이아 신전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반크가 당연한 것을 읊듯이 얘기했다.

“반크가 이끄는 무리는 정보 길드잖아요. 괜찮겠어요?”

“정보 길드는 모든 곳과 이어져 있답니다.”

“걱정 안 해도 돼, 카카나.”

아다르가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 얘기했다.

“반크는 거미 같은 놈이고, 새벽은 흑사회 전체에 거미줄을 쳐놨거든.”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미간을 찡그렸다.

“병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뜻입니다.”

반크가 아다르의 살벌한 설명을 단순하게 일축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른 놈들 걱정하지 마. 가장 큰 문제는 휠라메스 신전이니까.”

할릭이 눈가를 찡긋거리며 설명했다.

다른 신전은 마족이 한두 명 출현한 데 비해 휠라메스는 칩거 중인 마족이 여섯 명이나 됐다. 가장 규모가 큰 신전인 만큼 성공한 실험체 수도 많은 듯했다.

“아아, 그래. 여기가 제일 심각한 것 같긴 하네.”

나는 낮게 내리깔린 아다르의 음성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정신이 어찔해지며 눈앞이 빙빙 도는 것 같았으나 쓴 침을 삼키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까마득하게 먼 땅에서 짙게 뭉친 사기가 조금씩 마물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고밀도로 결합한 사기는 마물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갑작스럽다.

마물의 수는 차원균열지대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고, 신전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 만들어진 게 아니라 꼭 차원의 문을 타고 마계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나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높은 곳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했다.

“우선 카카나부터 피신…….”

스노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나를 끌어안은 아르모어의 팔이, 아니 우리가 디디고 선 건물 지붕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기 시작했던 탓이다.

“대, 대체, 이, 이게 무슨…….”

이러다 폭삭 주저앉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공포감에 이를 딱딱 부딪치며 진저리쳤다.

“길을 막은 건물 잔해를 날려버리면서 이동하는 모양인데.”

아다르가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이곳이 더는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아르모어가 훌쩍 뛰어 반대편 지붕으로 넘어갔다. 나의 마지막 안전지대였던 지붕에서 그가 붕 떠오르자, 내 정신도 함께 붕 떠올랐다.

나는 반쯤 정신을 놓고 흐느적거렸다. 눈에 초점이 돌아왔을 땐, 신전의 입구가 비교적 선명히 내려다보이는 낮은 지붕 위였다.

흐릿한 시야에 마물을 거느린 여섯 명의 인간이 바깥으로 느릿느릿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검은 마나로 이루어진 무기가 그들 손에 들려있는 게 이 거리에서도 보였다. 마물들은 마치 어떤 명령에 복종하는 것처럼 일제히 광장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저만한 마물에 노출된 도시는 순식간에 피바다가 될 것이다. 나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마물을 해치우면서 마족까지 상대하려면 꽤 빡빡하겠는데. 여기가 황무지도 아니고.”

할릭이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밑으로 내려가요, 아르모어.”

나는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사정했다. 우선 사람들을 살려야 했다.

***

오늘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들은 오랜 기간 숨죽여 살아왔다. 차원 전쟁이 시작된 그날부터 지금까지 1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숨 한번 편히 쉬어본 적이 없다.

필멸 저주에 걸려 죽지 않도록 인간의 몸에 웅크려 숨어있어야 했고, 황족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인간의 믿음을 사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정신이 약한 인간은 금방 지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인간은 그들의 몸을 빼앗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마족의 증표인 검은 낙인을 찍는 데도 며칠이 걸리곤 했다.

마족은 오랜 준비 기간에 싫증이 난 상태였다. 필요할 때 몸을 내어줄 수 있도록 인간의 신뢰를 유지하는 것도 성가시고 귀찮았다. 그렇다고 몸을 아예 빼앗아버리려니 필멸 저주가 그들을 막았다.

그래서 마족은 여태 황녀를 죽이는 간단한 일도 못 하고 있었다. 아직은 희미하게 의식이 있는 황제가, 뒤늦게 마족을 거부할까 봐.

하지만 이제 그럴 걱정이 없었다.

“드디어 황녀를 죽일 수 있는 건가?”

눈엣가시인 반푼이 황녀. 멍청한 주제에 이상토록 눈에 거슬리는 짓만 하는 백치.

오죽하면 온갖 구실을 긁어모아 궁에 유폐해 놓았겠는가. 그렇게 만들기까지 황제의 귀에 달콤한 말을 끊임없이 속삭여야 했다. 이제 그럴 필요도 없지만.

“이 빌어먹을 필멸 저주. 털어내니 어깨가 다 가볍네.”

마족이 킬킬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실험을 도운 일등공신은 물론 용사들이었다.

“용사들 몸에서 180년 동안 뽑아낸 마나가 아니었다면 실험이 백 년은 더 걸렸을 거야.”

마족이 실험실 구석에 쌓여있는 마나석 하나를 들어 올리며 히죽 웃었다. 마나가 고밀도로 응집된 최고급 마나석이었다.

런 품질의 마나석은 광산 깊은 곳을 캐도 몇 개 나오지 않는다. 마족들은 용사에게 찾아가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서로 농을 주고받았다.

“인간들을 아무리 잡아들여도 용사들의 마나량에 비할 바가 아니지.”

“다른 신전들은 인간의 마나가 부족해서 고작해야 한두 명 해방됐다고 했나?”

“맞아.”

“우린 운이 좋았네.”

휠라메스 신전은 용사들의 마나석을 가장 많이 숨겨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한 마족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마족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필멸 저주는 거름망이다. 한번 벗어나기만 하면 영원히 따돌릴 수 있었다. 마족들은 먼 과거부터 줄곧 그 점에 집착해 왔다.

실험은 순조로워서, 인간의 마나로 만든 고농축 생명에너지를 복용하면 필멸 저주의 눈을 피할 수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몸을 완전히 차지한 다음, 인간의 생명에너지를 복용해서 저주의 눈을 속이는 것이다.

물론 마나를 생명에너지로 전환하는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다. 생명에너지도 고작 새끼손가락만 한 약병에 담을 만큼 만드는 데 어마어마한 마나가 들었다.

용사들에게서 잔뜩 뽑아낸 인간의 마나가 아니었다면 분명 아직도 난관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이다. 많은 인간에게서 마나를 뽑아내야 하니, 그들의 실험을 숨기는 데도 고생을 퍽 했을 테고 말이다.

“마나를 제공해준 건 기특한데 이제 성가셔지겠네.”

마족이 어깨를 으쓱였다.

“감옥에 붙잡혀 있을 때 못 죽였으니 이제 되찾은 힘으로 바락바락 대들 거 아니야.”

“동족들을 중간계로 더 불러들이면 될 일이다.”

무뚝뚝한 성격의 마족이 단호하게 얘기했다.

“그러면 우선 이 도시의 인간들 마나부터 뽑아볼까?”

한 마족이 목을 으드득, 꺾으며 얘기했다.

“마나가 많이 필요해. 동족들이 저주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해야 완전한 파훼법도 찾지.”

“맞아. 혈판이 부서지면, 다시 마계로 쫓겨나잖냐. 그나저나…….”

거친 인상의 마족이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역시 중간계의 마나는 먹음직스럽네. 서로 죽고 죽여야 살아남는 마계랑 다르단 말이지.”

마족은 공허의 존재들이다. 그들의 마나는 새로이 태어나는 생명을 탐해야 고갈되지 않았으며, 때문에 항상 목이 말라 있었다.

“생명의 힘이 느껴져? 군침이 도는 차원이야.”

“대기 중에 마나가 이렇게 흘러넘치는데, 인간들은 통 활용할 줄 몰라.”

“가장 먹고 싶은 차원은 천계지만 말이야.”

마지막 말을 들은 마족들이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천계 얘기는 하지 마.”

그 지긋지긋하고 오만한 종족과 몇천 년에 걸쳐 전쟁을 치른 이후로 마족들의 먹잇감은 줄곧 중간계였다. 얘기를 꺼냈던 마족이 무안한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 하면 되잖아.”

“쓸데없는 잡담은 이쯤 하고 슬슬 나가자. 도시의 마나를 챙겨야지.”

“생명에너지도 더 만들어야 하고. 빌어먹을 이가카르 황제의 몸을 얼른 차지해야 해.”

그들이 황실로 향하면, 황제는 비로소 모든 의식을 잡아먹히게 될 것이다.

황실에 있는 마족이 해방된다는 건, 중간계의 지배가 머지않았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이번엔 천족도 방해할 수 없었다. 저주는 천족에게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보처럼 마족이 중간계에 오지 못하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을 것이다.

발 빠르게 스며들어 쉼 없이 침략을 준비한 마족이 달콤한 승리를 맛볼 때였다.

“그럼, 내 귀여운 애들부터 풀까?”

마물을 제 권속으로 두어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마족 소환사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중간계의 마물은 이제 마계의 존재라 볼 수 없으니까.”

“허약하긴 해. 차원균열지대의 그 벌레 같은 놈들을 생각해 봐. 역시 흔적은 흔적이야.”

동료 마족이 맞장구치며 다리를 불량하게 흔들었다.

“그러니 내가 정성껏 키운 애들로 파티를 열자고.”

소환사 마족의 손짓을 따라 공간이 주욱 찢어졌다. 그러자 그 틈에서 끈적하고 징그러운 거품이 부글부글 끓는 듯싶더니, 민달팽이처럼 생긴 마물이 쑤욱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마물이 쉼 없이 쏟아졌다. 그의 검은 마나를 먹고 자란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인간들을 물어와.”

마물이 일제히 신전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여섯 명의 마족들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계단을 올랐다. 걸어가면서 거추장스럽게 발에 밟히는 사제복을 벗어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하얗고 펑퍼짐한 로브 형식의 의복은 천족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더 눈치 볼 게 없었다.

마족들이 찢어발기듯 옷을 벗자, 흑진주처럼 검어진 피부가 드러났다. 생김새는 여전히 사제의 그것이다. 그러나 몸이 마족의 마나와 생명에너지에 지배되면서 체질이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의 새로운 몸은 마족처럼 회복이 빠르고, 강하게 변질될 것이다.

신전의 바깥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뺨을 스쳤다. 마족은 늦장 부리지 않고, 휠라메스 신전의 부지를 벗어나 인간이 모여있는 도시로 텔레포트 했다.

그때쯤엔 하늘에서 서서히 굵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마계에선 눈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하늘로 향했다. 뿌연 회색 구름이 가마솥을 덮는 솥뚜껑처럼 도시를 덮고 있었다.

그러나 짧은 감상은 금세 흐트러졌다. 그들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게 뭐야?”

웬 사제 한 명이 정신없이 하늘을 쏘다니고 있었다.

아니, 하늘이라 하기엔 뭔가 애매했다. 높이 날 용기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 정도 마법 실력은 안 되는 건지, 땅에 바짝 붙어서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심지어 사제도 아닌 것 같았다.

마족은 저 자그마한 인영이 치밀하게 계산된 환영마법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더 놀라운 건, 분명 마족 소환사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마물들이 그녀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인은 그걸 노려서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을 빙글빙글 돌며 마물을 유인하고 있었다.

킁, 냄새를 맡는 것처럼 코를 씰룩인 마족이 돌연 넋이 나가서 중얼거렸다.

“저 인간에게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

그들은 이 그리운 향기를 어디서 맡았었는지 금방 떠올려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냄새였다.

“천족의 마나야.”

심지어 냄새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마족이 차지한 몸이 서서히 변하면서, 후각도 좋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천족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심복을 심어놨었군!”

호전적인 마족이 검은 마나를 움직여 자신의 덩치만 한 톱으로 응축시켰다. 그리곤 그것을 어깨에 걸치며 거칠게 웃어 젖혔다.

“저건 내 먹잇감이야!”

“아니, 내 먹이야!”

그들이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검은 마나가 그들의 기백에 호응하듯 거센 압력과 함께 여인에게 터져나갔다. 악, 비명을 지른 작은 몸이 바람에 날리는 눈발처럼 매가리 없이 날아갔다. 그것을 짐승의 앞발 같은 위협적인 손으로 잡아채려는 순간, 마족 마법사가 선방을 쳤다.

“무식한 놈들. 먹을 건 눈으로 먼저 음미해야 하는 거야.”

“방해하지 마! 저건 내 거라고!”

“천족의 마나를 지닌 인간이 어떻게 생겨 먹은 녀석인지, 얼굴은 봐야 하잖아?”

뒷말을 이은 마족 마법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여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의 마법에 대항하듯 온갖 공격 마법이 쏟아졌지만, 그는 가볍게 실드를 치는 것으로 막았다.

작은 인영을 집요하게 쳐다보던 여섯 쌍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여인의 본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구불구불한 살구색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둥글게 말린 뿔 밑으로 축 처져 있는 보들보들한 귀.

달려 나가던 마족이 움찔 굳으며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환영마법이 벗겨진 인간은 사제도 뭣도 아니었다. 수인족이었다.

“카카나!”

그때, 천족이 중간계에서 부활했나 싶을 정도로 강한 힘이 마족이 선 공간을 후려쳤다.

“크윽!”

마족들이 두 팔을 교차해 얼굴을 가리고 버티는 동안, 용사들이 재빠르게 카카나에게 달라붙었다. 스노아가 바닥에 엎어진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왔다.

“어서 저택으로…….”

“안 돼!”

카카나가 피가 배어 나온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홱 쳐들었다.

“이곳 사람들은! 저 녀석들 상대하면서 마물도 해치울 수 있어?”

“하지만…….”

“마물을 유인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야아, 이 힘은 뭐야? 용사님들인가?”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그들의 치열한 대화를 파고들었다.

첼러스가 카카나 앞을 막아서며 검을 치켜들었다. 스노아는 그녀에게 몇 겹의 결계를 두르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확실하네.”

용사들의 반지까지 전부 부숴버린 마법사 마족이 히죽 웃었다.

“다섯 용사와 수인족이라. 묘한 조합이네.”

비명이 난무하고 불길이 솟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마족과 용사들이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카카나는 숨쉬기도 힘들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캑캑거렸다.

“더 성가셔지기 전에 여기서 없애주마!”

톱 모양의 검을 바닥에 늘어뜨린 채 질질 끌고 오던 마족이 갑자기 자리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첼러스의 형상이 물에 비친 그림자를 흩트리듯 허물어졌다.

카가가가각―!

하늘에서 두 개의 거대한 힘이 파공음을 내며 맞붙었다. 보지 않아도 마족과 첼러스가 싸우는 중이란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코앞에서 천둥이 치면 저런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카카나가 스노아의 옷자락을 멱살 잡듯이 끌어당기며 거친 음성으로 속삭였다.

“내게 방법이 있어!”

할릭이 달려오는 마족의 머리통을 그러쥐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약했다.

“광장에 실드를 쳐줘!”

카카나의 뒷덜미를 짓쳐들어오는 마족의 단검을 아다르가 쳐냈다. 스노아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카카나, 대체 뭘 하려고…….”

“대화 나눌 시간이 없다.”

아르모어가 채찍을 뽑으며 말을 잘라냈다. 카카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각오 서린 눈을 치떴다.

“마물은 내가 처리할 거야. 그러니까 내 말에 따라.”

그녀의 의지가 충분히 느껴지는 명령이 떨어졌다. 스노아는 그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

“흐아아아앙. 엄마아아아.”

여인은 어느 순간 귀를 파고드는 울음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눈을 뜨고도 한참을 누워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인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땅은 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탓에 위로 부옇게 일어난 모래 먼지가 눈알에 뻑뻑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코로 거칠게 숨을 쉬자 잔기침이 일었다. 손으로 입을 막으려다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특히 다리에서 심한 통증이 올라왔다.

여인이 바닥에 머리를 기댄 채 간신히 고개를 숙였다. 피딱지가 눌어붙은 머리카락이 모래바닥에 엉망으로 문질러졌다.

여인은 땟국이 줄줄 흐르는 눈꺼풀을 몇 차례 깜박였다. 발목이 기이한 모양으로 꺾여 있었다. 시퍼렇게 부풀어 오른 피부를 보자 갑자기 통증이 심해졌다.

“악…….”

“엄마아. 엄마아아. 흐어어엉.”

통증 때문에 부들부들 떠는 사이,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다시 귀를 파고들었다. 그제야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인식이 되었다. 여인이 발작적으로 상체를 일으키며 소리 질렀다.

“이레타! 아가!”

오늘은 성스러운 의식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여인과 그녀의 딸 이레타도 헬리스의 안식일을 기리기 위해 광장으로 향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갑자기 신전 쪽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린 직후였다.

사제들은 언제 경건한 의식을 치렀냐는 듯이 혼비백산한 표정을 지었고, 그 얼굴을 본 평민들은 겁에 질렸다.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사제의 얼굴이 두려움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은 침묵해야 하는 날이었다. 독실한 신자들은 헬리스 신이 벌을 내릴 거라며 무서운 소리를 늘어놓았다.

여인은 독실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괴물이 등장한 것은, 부부가 딸아이를 품에 안은 채 집으로 막 도망쳤을 때였다. 사람들의 뒤를 쫓은 괴물이 부부의 집을 습격했다.

건물의 반이 날아가며 그 충격으로 벽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남편은 건물 잔해에 고스란히 깔려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거실에 엎어진 돌벽 밑으로 피 웅덩이가 크게 고여있었다.

토기가 치밀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녀의 어린 딸, 이레타가 책상 아래에 몸을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다행히 아빠의 시체는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창밖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끝없이 들려왔다. 하늘엔 멸망의 징조처럼 검은 재가 흩날리고 있었다. 어느 집이 불타고 있음이 확실했다. 여기까지 불길이 번지면 고스란히 타 죽는다.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이레타, 이리 와. 어서!”

“엄마, 흐으윽, 아빠는?”

“조용히 해. 소리 내지 마.”

그녀는 어금니를 악물고 모포로 이레타의 몸을 감쌌다.

밖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제국의 겨울은 혹독했다. 얇은 옷차림의 어린아이는 동사하기 쉬웠다. 접질린 발목으로 땅을 짚을 때마다 식은땀이 죽죽 솟았지만, 그녀는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한 결정 중에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다.

크르르르—

몸통은 도마뱀을 닮았는데, 머리가 네 갈래로 쪼개진 것처럼 생긴 끔찍한 괴물이 새하얀 입김을 뿜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엄마 품에 안겨 있던 소녀의 젖은 눈이 뒤로 회까닥 뒤집혔다.

“꺄아아아, 읍.”

여인이 황급히 딸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늦었다. 괴물의 고개가 이쪽으로 휙 돌아왔다.

‘제발, 누가 우리 좀……!’

여인이 죽기 직전의 힘을 끌어올려 이레타를 끌어안았다.

‘제발 누군가……!’

그리고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괴물의 손짓 한 번에 근처 건물이 내려앉자 그녀의 도주는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아아악!”

이미 발목이 접질려 속도가 느린 여인이 건물의 잔해에 깔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치 사냥놀이를 하듯, 시뻘겋게 번들거리는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뒷골이 차가워졌다.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건물 잔해에 다리가 끼어있었다.

땅에 주저앉은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자신은 뛸 수 없다. 그러면 이레타라도 살려야 했다.

“이레타!”

소녀는 무시무시하게 소리치는 엄마의 목소리에 울음을 터트리지도 못했다. 새파랗게 질려서 가랑이 사이로 오줌을 질질 흘렸다. 그녀가 발악하며 이레타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의 몸은 미끼를 자처하듯 괴물을 향해 있었다.

“도망쳐, 이레타!”

공포에 질린 이레타가 괴물과 엄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알사탕처럼 커진 눈알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의 흰옷은 먼지와 오줌으로 엉망이 되어버렸고, 넘어진 탓에 무릎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다리를 심하게 떨었다.

딸이 도망칠 수 없으리라는 필연적인 직감이 여인을 두려움에 잠기게 했다.

‘살려줘!’

남편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조차 울지 않았던 여인이 결국 울음기를 머금고 소리쳤다.

“제발, 이레타. 제발!”

괴물의 머리통이 서서히 네 갈래로 쪼개졌다. 시뻘건 속살에서 수 갈래의 촉수가 혓바닥처럼 기어 나왔다. 그것이 여인의 머리를 감싸서 으깰 것처럼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여인의 눈은 이레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도망치라는 듯이. 너만이라도 살라는 듯이.

“싫어, 엄마!”

이레타가 빽, 소리친 순간.

“아아아악!”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작은 몸뚱이가 거리를 데굴데굴 굴러왔다. 이레타는 물론이고 아이의 엄마까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휙 틀었다.

어떤 여인이 엉망이 된 몰골로 땅을 기고 있었다. 그들처럼 괴물로부터 도망치는 중이었나 보다고 생각할 찰나, 여인이 발딱 고개를 쳐들었다.

이제 보니 그냥 사람이 아니었다. 두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굵고 풍성했으며, 머리에 뿔이 달려있었다.

‘수인족?’

수인족이 순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살벌한 욕지거리를 씨불였다.

“씨X!”

그녀가 손에 들린 작은 막대기 모양의 물건을 쾅쾅 바닥에 내려찍었다.

“부유 마도구를 써본 적이 있어야 사용하지, 제기랄!”

동시에 아이의 엄마에게 고정되어 있던 괴물의 고개가 뒤로 휙 돌아갔다.

“조심하세요!”

괴물은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인족에게 달려들었다. 돌무더기에 깔린 자신이 훨씬 가까운데도!

수인족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리에서 붕 떴다. 손에 들린 부유 마도구를 써서 날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용해본 적이 없는 것일까, 몹시 불안정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저러면 나는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낮게 뜬 여인이 괴물을 달고 다른 곳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다른 사람에게 달려드는 중인 괴물까지 수인족에게 정신이 팔려 쫓아갔다.

“괜찮으십니까!”

괴물에게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남자가 헐레벌떡 여인에게 뛰어왔다.

“엄마아!”

이레타까지 여인에게 안겨들었다.

“저 수인족은 대체…….”

그녀는 자신의 기도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나타난 구세주에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그녀에게 쏟아진 돌무더기를 치우던 남자가 땀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북쪽 도개교에서 여기까지 도망쳐 왔습니다만, 저 수인족에게 세 번은 도움을 받은 것 같습니다.”

믿기지 않는 말에 여인이 멍하게 입을 벌렸다.

“거기서 여기까지 살아서 도망쳤다고요?”

“이상하게 괴물들이 저 수인족을 쫓아가더군요.”

그녀는 엉엉 우는 이레타를 달래면서 다리를 빼려고 노력했다. 가장 큰 잔해에 꽉 짓눌려 있어서 발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면 다른 괴물에게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혹시 발을 뺄 수 없습니까?”

“전 틀렸어요.”

여인이 냉정하게 남자의 말을 끊어냈다.

“제 딸을 데리고 먼저 가세요. 부탁이에요.”

“싫어, 엄마!”

여인의 말을 들은 이레타가 자지러지며 울었다. 남자가 여인과 소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곤란하게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묻혔다.

쾅―!

이미 잔뜩 겁에 질려있던 셋은 헛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돌렸다. 수인족이 날아간 곳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불은 폭발하듯 일대를 뒤흔들어 놓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치 마법처럼.

“저게 무슨…….”

그들이 넋이 빠져서 불기둥이 치솟았던 장소를 바라보는데, 어떤 작은 인영이 쏜살같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자 모습이 자세히 보였다. 아까 어디론가 날아갔던 바로 그 수인족이었다.

그녀가 빠르게 접근해오더니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 두 발로 모래바닥을 죽 긁으며 멈춰 섰다. 발로 오십 미터쯤 제동을 걸어야 했지만 이번엔 아까처럼 땅을 구르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미숙한 듯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녀가 제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구불구불 타들어 갔다는 것도 모르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들은 아까 치솟았던 불기둥이 괴물을 처치하기 위한 수인족의 소행이라는 것을 눈치껏 알아차렸다.

“비켜봐요!”

여인이 거칠게 남자의 어깨를 밀었다. 수인족은 힘이 세다더니 정말이었다. 그녀가 두 손으로 커다란 돌덩어리 끝을 잡고 끄응, 앓더니 곧 그것을 멀리 치워버렸다.

남자가 멍청한 얼굴로 수인족을 바라보았다. 여인도 노예 계급인 수인족에게 도움을 받는 상황이 생소한 탓에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고, 고맙…….”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여인이 감사 인사를 하려는 찰나, 수인족이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이름이 뭐예요? 전 카카나라고 해요.”

“노, 노라…….”

“네, 노라 씨. 만나서 반가워요. 발목이 부러졌네요.”

수인족이 빠르게 눈을 굴렸다. 그리곤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넘어졌는데 갈비뼈가 폐를 찌르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예, 예?”

“갈비뼈도 부러졌잖아요. 근데 발목 상태가 왜 이래요. 부러진 채로 뛰셨어요?”

한 번 훑어만 보고도 그녀의 부상을 죽 읊는 수인족이 워낙 범상치 않은지라, 노라는 함부로 말도 못 붙였다.

그녀는 넋이 나가서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카카나가 가방을 마구 뒤지며 말을 이었다.

“이거 마셔요. 딸 이름은 뭐죠?”

“이레타…….”

노라가 약병을 받아들며 멍하니 대답했다.

“이레타, 애기야. 이리 와.”

카카나가 소녀를 부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인상을 구긴 채 노라를 바라보았다. 그저 순하기만 한 얼굴인 줄 알았더니 인상을 쓰자 제법 사나웠다.

“안 마시고 뭐 해요? 시간 없어요.”

노예인 수인족이 감히 명령하는데,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기분에 휩싸였다.

노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간절하게 붙잡고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약에서는 시원한 민트향이 났다.

그녀는 제법 돈을 버는 상인이었다. 몸에 좋다는 약물은 여러 가지 먹어봤지만, 이렇게 맛까지 좋은 약은 처음 먹어봤다. 물론 효능은 두 눈을 의심할 수준이었다.

노라는 기이하게 꺾인 제 발목이 알아서 제자리를 찾는 걸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숨 쉬는 것도 아까보다 훨씬 편해졌다.

“애기는 약 하나 더 먹어야겠네요.”

노라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제 딸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벤티타 병에 걸렸어요. 초기인 것 같은데.”

벤티타라니, 약을 먹어도 낫지 않기로 유명한 병이었다. 노라가 눈물을 지으려는 찰나, 카카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초기니까 모를 만도 하죠. 애기야, 이거 먹자.”

수인족을 처음 보는 이레타가 카카나를 크고 맑은 눈으로 빤히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지옥의 땅 위에서, 카카나는 너무 손쉽게 사람들의 생명을 주무르고 있었다.

카카나에게 공경심을 품은 듯 소녀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제, 제 딸은 그럼 얼마나 살 수 있는 거죠?”

노라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더 놀란 건 카카나였다.

“이레타에게 다른 병도 있어요?”

“예? 아, 아니 아까 벤티타 병에 걸렸다고…….”

“그래서 약 준다고 했잖아요.”

“벤티타는 약을 먹어도 잘 낫지 않는다고…….”

“아녜요. 이거 먹으면 나아요.”

카카나가 무슨 생뚱맞은 소릴 하냐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레타에게 성급하게 약 두 개를 먹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쉽게 납득할 수 없었을 텐데, 눈앞의 수인족은 달랐다. 당연한 사실을 짚듯 목소리에 힘이 실려있었다. 마치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사람을 홀리는 힘이었다.

“이제 가요.”

노라는 저도 모르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처럼 두 손을 그러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카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탁탁 털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자기가 노예계급인 수인족을 공경의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쳤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멀쩡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카카나의 얼굴이 갑자기 와그작 일그러졌다.

“안 돼. 여기 사람 있어. 다른 곳으로 유인해.”

그녀가 목에 걸린 펜던트를 잡고 몇 번 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짧게 결정을 내렸다.

“내가 빨리 데려갈게.”

그녀가 다급하게 노라와 이레타의 손을 그러쥐었다.

“여길 벗어나야 해요. 죽고 싶진 않죠?”

잔뜩 긴장한 노라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카카나의 뒤를 쫓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었다. 중간에 이레타의 속도가 뒤처져 카카나가 아이를 업고 뛰기까지 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오늘 아침, 평화롭게 의식이 진행되던 광장이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광장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투명한 하늘색 돔 같은 것이 광장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노라는 그게 마법이라는 걸 몹시 어렵게 알아차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무릎을 짚고 헉헉대던 카카나에게 누군가 물을 내밀었다. 광장에 있던 할아버지가 자신의 생수통을 건넨 것이다.

“고마우이. 참으로 고마우이, 아가씨.”

광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카카나가 구조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그녀가 수인족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죽음을 관장하는 신처럼 갑자기 나타난 여인은 자비를 베풀듯 그들의 멱살을 잡고 이승으로 잡아끌었다.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카카나를 신처럼 떠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구조한 사람들보다 몰골이 엉망이었다. 홀몸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구했는데 지쳐 쓰러지지 않는 게 더 신기했다.

부유 마도구를 사용하는 게 미숙한 탓에 무릎과 팔꿈치에 쓸린 상처가 수두룩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를 뒤집어쓴 건 물론이고, 땀을 많이 흘려서 꾀죄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경스럽게도, 그런 모습의 카카나가 신전의 고위 사제들보다 훨씬 신성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사제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구원을 바라는 사람이 많은데.

“뭐?”

카카나가 펜던트를 잡은 채 또 혼잣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새까만 인영이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광장의 실드를 후려쳤다.

쿠구구궁—

실드를 길게 긁으며 날아온 인영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패닉에 빠졌지만, 굉음 사이로 울려 퍼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듣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움직이지 말아요!”

카카나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녀가 걸걸하게 쌍욕을 지껄이며 굉음이 울린 쪽으로 달음박질쳤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았다. 결계 바깥에 떨어진 사람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검은 마나를. 하늘을 덮을 것처럼 음습하게 손을 뻗는 악마의 기운을.

보통 사람이었다면 살 수 없었을 텐데, 엎어진 남자가 꿈틀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가 기괴하게 몸을 꺾으며 부러진 뼈를 맞추더니, 허리를 곧추세웠다.

시커먼 피부와 새빨갛게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등에 박쥐의 그것처럼 돋아난 새까만 날개. 그건 몇 없는 동화 속에서 묘사하는 마족의 모습과 똑같았다.

“마, 마족!”

“꺄아아아악!”

“신이시여!”

“어떻게 마족이 이곳에!”

“저주를 받은 게야! 헬리스 신의 노여움을 사고 만 게야!”

사람들의 비명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몇 명은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소름 끼치는 존재가 눈을 번뜩이며 광장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 마나가 안 모이나 했더니, 이런 곳에 모아놓고 보호 중이었군?”

그가 손을 가볍게 털자, 그의 검은 마나 중 일부가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다섯 마리의 까마귀로 변하더니 하늘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동족을 이곳으로 부르는 패밀리어였다.

그가 뱀처럼 끝이 갈라진 혀로 입술을 삭 핥으며 카카나를 노려보았다.

“맛있는 먹이도 여기 있네?”

뿜어져 나온 마나가 순식간에 거대한 톱의 형상을 취했다. 그가 그것을 두 손으로 잡고 광장의 결계를 향해 힘을 주었다. 통나무 베듯 이곳을 통째로 썰어버리려는 의도였다.

사람들은 기절초풍했으나 마족의 기운에 짓눌려 움직이지도 못했다. 마족이 든 톱은 바다도 가를 수 있을 것처럼 컸다. 일순 그 까만 톱날에 하늘이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톱날의 검은 그림자가 지는 순간, 빛이 번쩍 터지며 듣기 싫은 마찰음이 이어졌다.

“첼러스!”

카카나가 소리쳤다. 사람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눈에 담았다.

“저건……!”

“기, 기사님이다!”

그 거대한 톱을 백금색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날이 막고 있었다. 첼러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흘끗 뒤를 확인했다. 카카나가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눈이 뒤집혀 첼러스의 얼굴이 몇 달 전 제국에 나붙었던 수배지와 똑 닮았다는 것마저 잊고 열광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성스러운 느낌의 남자였다.

심지어 그의 손에 들린 빛나는 검은 마족의 사악한 기운을 막고 있었으며, 가장 앞서서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지는 뻔했다. 심지어 검날에는 성스러운 검기가 둘려 있었다. 사람들의 눈이 빠져나올 것처럼 홉뜨였다.

“저건……!”

“소드마스터는 먼 과거에 있었다는 용사 한 명뿐이라고 들었는데…….”

“그 후로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대륙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응?”

광장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농땡이 피우다가 나동그라진 기사도 있었고, 용병도 있었으며, 운 좋게 주인으로부터 도망친 고급 마법사 노예도 있었다.

“저 얼굴 어디선가…….”

기사 신분이었던 자들이 첼러스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는 듯 하다가 곧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도망친 노예 수배지’였다는 걸 떠올렸던 탓이다. 게다가 격렬한 싸움이 계속 이어지는 탓에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에이, 아니겠지.”

평범한 상인이나 농부들은 혼이 빠져서 기사나 용병들이 흥분해서 내뱉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저, 저렇게 백금색으로 빛나는 검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헤, 헬리스 신께서 보내주신 게야!”

급기야 상황을 관전하던 한 할아버지가 광분에 차 소리쳤다.

“헬리스 신께서 사악한 마족으로부터 당신의 가여운 피조물들을 위해 또다시 용사님을 보내주신 게야!”

와아아아—

광장이 사람들의 함성으로 가득 메워졌다. 일종의 광기와도 같은 함성이었다.

카카나는 기가 질려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마족이 인간들의 환호에 화가 난 듯,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기뻐할 수 있을지 보자고.”

하늘에 여섯 명의 마족이 나타났다.

눈발이 날리는 하늘이 이상할 정도로 어두워졌다. 정신없이 소리치던 사람들도 머리 위로 내리쬐던 햇빛이 시커먼 그림자에 먹히자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광장 전체에 불길한 기운이 숨 막히게 내려앉고 있었다.

***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싸우게 생겼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광장은 이미 미어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곳이 마족의 총공격을 받아서 결계가 깨지기라도 하면 끔찍한 인명피해가 날 것이다.

용사들은 최대한 피해가 나지 않도록 신경 쓰며 마족을 상대하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마족이 사용하는 마법이나 기술이 기상천외해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했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스노아가 건네준 마도구를 알차게 써먹으며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걸 이용해볼 생각도 해봤지만, 결계 밖으로 나가는 순간 용사들에게 폐만 끼칠 것 같았다.

“용사님이다!”

“또 다른 용사님께서 나타나셨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마족과 치열하게 맞붙는 중인 용사들에게 열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들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 싸하게 굳었다. 등허리에 닭살이 돋아나고 섬뜩한 느낌이 물귀신의 손가락처럼 가슴팍을 차게 쓸어내리는 느낌이었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으나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떨리는 눈을 옆으로 굴렸다.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인간이 서 있었다. 그림자처럼 시커먼 모습을 보자마자 알았다.

‘마족.’

나는 불현듯 기겁해서 고개를 쳐들었다. 휠라메스 신전에 출몰한 마족은 여섯 명이었다. 지붕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마족과 싸우는 용사들도 여섯 명의 마족을 상대하고 있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두 명의 마족을 상대하는 식으로.

‘그럼 저건 뭐지?’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결계 밖의 검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쉬이, 조용히 하라는 듯 그가 검지로 입술을 누르고 있었다.

혹시 내가 평범한 사람을 마족으로 몰아간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의 손이 흑진주처럼 검었다. 로브 안에서 귀신의 눈처럼 번뜩이는 눈은 시뻘건 핏빛이었다.

그가 이리 오라는 듯 천천히 손짓했다. 가히 사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나는 실드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더 지체할 것도 없이 텔레파시로 이 사실을 용사들에게 알리려 했다.

그런데 남자가 결계 안으로 웬 시커먼 물건을 던져 넣었다. 결계를 부드럽게 통과한 걸 보면, 평범한 물건 같은데 생김새가 심상치 않았다. 만지기만 해도 저주에 걸릴 것처럼 새까맣게 타들어 간 사람 인형이었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보고 있어 아무도 그가 근처에 있다는 걸 몰랐다. 남자가 다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의 부름을 못 알아들은 척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이, 일단 저 인형부터 어떻게 해보자.’

나는 억지로 발걸음을 떼어서 인형에 다가갔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역시 이걸 맨손으로 만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를 휘휘 둘러보다가, 굴러다니는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주웠다. 그걸로 인형을 바깥으로 밀어낼 작정이었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한참을 인형 근처에 서 있었다.

‘빨리 내보내고 신경 끄자.’

나는 인형을 툭툭 밀면서 결계 근처로 밀기 시작했다. 사람이 없는 곳까지 한참 인형을 밀다가, 실드의 경계선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덜덜 떨리는 나뭇가지 끝이 인형의 옆구리에 닿으려는 순간, 인형이 번쩍 눈을 뜨며 나뭇가지를 잡아챘다.

농담 아니고,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흐어억!”

어찌나 놀랐는지 무릎이 떨려서 자리에 서 있기 어려웠다. 인형은 여전히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부정 탈 것 같아서 나뭇가지를 내팽개치며 손을 미친 듯이 털었다. 그러다 근처에 서 있던 문제의 마족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가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튀어나오지 않으면 여길 쑥대밭으로 만들겠단 경고였다. 물론 용사들에게 연락을 취하려는, 수상한 행동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나뭇가지를 주우려 했는데, 남자가 손을 들었다.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려는 것처럼 엄지와 중지를 맞붙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마법을 쓰려는 것처럼.

‘아, 제기랄…….’

방법이 없다. 최대한 개겨 봤지만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가, 서서히 결계 바깥으로 나갔다. 남자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제 곁으로 충분히 접근할 때까지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근처에 온 내 멱살을 확 끌어당기며 비죽 웃었다.

“생각보다 순진하네.”

그의 말을 멍청하게 듣고만 있다가, 내가 속았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바짝 쳐올렸다.

“뭐?”

“내가 불에 탄 평범한 인형으로 뭘 할 수 있겠어?”

“평범한 인형이라고?”

남자가 씨익 웃었다.

“환각초 원액을 정성껏 바르긴 했지만. 신전엔 별별 약물이 참 많거든.”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친 것 같은 충격이 찾아왔다.

“사람들을 살리려는 네 노력은 잘 봤어. 높이 살 만한 정신이야. 요즘 세상에 너 같은 녀석은 참 없거든.”

마족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계속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래서 천족의 힘이 네 안에서 각성한 건가? 일리가 있군.”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나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마족이 충격으로 멍하니 있는 내 멱살을 더 세차게 그러쥐더니, 반쯤 무너진 건물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냄새가 참 좋아. 수인족들은 천족의 피가 섞여 있어서 원래 냄새가 좋은 편이긴 하지만.”

마족이 엉망으로 무너진 집 안에서 낡은 나무 의자 하나를 끌고 오더니, 다리를 꼬고 앉으며 심심한 감상을 내놓았다.

그의 기분 나쁜 검은색 마나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내 옷자락을 파고들었다. 바드에게도 비슷한 짓을 당한 적이 있었지만, 몇 번을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그런데 넌 증표도 없네?”

“윽…….”

“천족의 심복이 아니라는 건, 스스로 능력을 깨우친 경우인가? 수인족은 천족의 씨앗이 남아있는 중간계의 개체니까.”

그가 혼자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어지간히 숭고한 정신을 가진 녀석인가 보네.”

나는 계속 얼이 나가 있다가 뒤늦게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숭고한 정신이라고?”

“천족의 씨앗을 개화시켰잖아. 그거 아무나 못 하는 거거든.”

그의 말을 통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기울이려는 찰나, 갑자기 등허리에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뭐지?’

나는 이 알 수 없는 감각이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 알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팔다리가 가늘게 떨렸다. 무언가가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저 비슷한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어디였지? 누가 저런 말을 했었지?

[씨앗이 개화할 정도로 맑고 순수한 영혼인 거야. 그러니까 얼른 눈을 떠. 기다리고 있어.]

꿈에서, 동생이.

먼지 쌓이도록 묻혀 있던 찝찝한 기억이 불시에 수면 위로 불거졌다. 용사들과 퀄리티미엄의 입구를 찾고 있을 때의 기억이었다. 그걸 지금 어떻게 떠올려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누가 일부러 기억을 심어놨다가, 기회가 되니까 내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팍 쉬어버린 음성으로 물었다. 지나치게 긴장해서,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처, 천족의 씨앗을 개화한다는 게…….”

“아아.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지금 시대의 인간들은 모르려나. 묻힐 만도 하지.”

마족이 날카롭게 비소를 터트렸다.

“콧대 높은 천족들이 힘이 개방되는 조건을 까다롭게 정해놨거든. 개화한 수인족이 없어서 꼼짝없이 묻혔을 거야.”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인 채 내 얼굴을 관찰하던 마족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석상처럼 굳어있는 내 주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반쯤 무너진 건물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마족의 발에 밟히는 자잘한 돌멩이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아그작, 아그작, 소리를 내며 주위를 천천히 돌던 마족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음산한 기운이 내 등허리에 찰싹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너희에겐 천족의 피가 흘러. 이건 알고 있지?”

그가 내 귀에 입을 바짝 붙인 채 속삭였다. 뱀이 사는 깊숙한 동굴을 통과해 온 바람처럼,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매끄럽고 소름 끼치는 숨결이 느껴졌다.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천족의 힘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야. 하지만 바로 사용할 수 없어. 천족보다 하등한 몸으로, 어떻게 그 힘을 바로 끌어올려 사용하겠어. 그렇지?”

“…….”

“그러니 스스로 단련해서 깨우쳐야 하는 거야. 마나를 느끼려고 발악하는 이곳의 초짜 마법사들처럼.”

그의 콧날이 내 목덜미 근처로 나붓하게 내려앉았다. 스테이크의 육즙을 기대하듯, 내 목덜미에서 피의 냄새를 듬뿍 들이켠 마족이 입 안으로 웃음을 되삼켰다.

더는 견딜 수 없어졌다.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터 비틀었다. 그러나 채 걸음을 떼기도 전에 마족이 내 손목을 우악스럽게 그러쥐었다.

“이거 놓, 악!”

몸이 무력하게 끌려가 벽에 처박혔다. 딱딱한 돌벽에 뒤통수를 박자 머리가 댕, 하고 울렸다. 그가 힘이 쭉 빠진 내 몸을 짜부라트릴 기세로 밀어붙였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어깨를 속박한 그의 팔뚝을 뜯어내려고 몸부림쳤으나 소용없었다. 그는 이 재미있는 사냥의 시간을 짧게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독기에 차서 눈을 부라렸다.

“이거 놔!”

“인간의 몸을 완전히 차지할 수 있어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네 황홀한 냄새를 맡지 못했을 테니까.”

“놓으라고!”

“네 냄새는, 아아, 정말 황홀해.”

마족이 눈을 반쯤 까뒤집으며 파르르 속눈썹을 떨었다.

“나는 다른 마족 놈들에게 널 빼앗기고 싶지 않아. 내게 네 마나를 바치면, 아주 극진하게 보살펴 주지. 어때?”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조금이라도 떨어지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혔으나, 차가운 벽이 빈틈없이 맞물려 있었다. 그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싫은가 보지?”

나는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이 혐오스러운 감각으로부터 한 걸음이라도 도망치고자 몸을 꿈틀거릴 뿐이었다.

마족은 어차피 처음부터 내 의사 따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계속 대답이 없으니 그도 날 회유하길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사냥의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수인족이 천족의 힘을 이렇게까지 각성시키다니…….”

나는 색색,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족이 내 턱을 틀어쥐어 목을 더 드러나게 했다. 그가 또 한 번 향기를 맡자 나도 모르게 눈꼬리에 질금질금 눈물이 새어 나왔다. 벗어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고문이라도 했나?”

“저리 꺼져!”

“얼마나 많은 독을 견뎠나. 응?”

마족이 입술을 삭 핥아 올리며 떠들었다.

“이 정도면 매일매일 독약이라도 들이켠 것 같은데. 아닌가?”

“그게, 무슨……?”

“보잘것없는 수인족의 몸을 이렇게까지 천족에 가깝게 바꾸었잖아. 육신에 잠든 천족의 힘을 끌어올릴 때까지 독을 썼겠지. 맞나?”

나는 모른다.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므리나 이소리하일 것이다.

‘이거였나.’

그녀가 수인족들을 끌어다 감옥에 가둬놓고 실험을 한 이유가.

하지만 대체 무얼 위해서란 말인가.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단 말인가. 므리나 이소리하의 배후가 마족이라면, 왜 같은 마족인 이 남자가 실험에 대해 모르고 있는 건가.

그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는 내가 마음에 든다는 듯 히죽 웃었다.

“교묘하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독을 복용했나 보군. 끔찍했을 텐데 잘도 버텼어. 그래서. 체질을 바꾼 다음은, 어떻게 했지?”

“나에게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그야, 너처럼 완벽하게 각성한 수인족을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마족이 군침을 꿀꺽 삼키며 떠들었다.

“몸이 준비되어 있으니, 마족의 기운을 쐬어 천족의 마나가 깃드는 건 순식간이었겠고.”

나는 미간을 와그작 찌푸렸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날 바라보다가, 느지막하게 얘기했다.

“모르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족이 나를 지긋이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천족의 마나엔 마족이 뿜는 공허의 마나를 상쇄하려는 본능이 있지.”

“…….”

“힘겨루기를 하는 거야. 간단하지.”

마족이 눈매를 휘어 웃었다.

“넌 천족의 체질로 변형되었잖아? 마족의 마나를 쐬었는데 정결의 마나가 깃들지 않고 배기겠어?”

“…….”

“그런데 이상하네.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군.”

마족이 비로소 내 속박된 몸을 풀어주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나는 여태 꽉 눌려있던 목과 어깨를 부여잡고 바닥에 엎어졌다.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기침이 터져 나왔다.

“이상하군, 이상해. 체계적으로 개조된 것처럼 보이는데, 왜 정작 너는 모르는 걸까?”

그가 바닥을 기는 내 옆구리를 발로 후려쳤다. 숨이 콱 틀어막히며 끔찍한 통증이 올라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옆구리를 움켜쥐고 맨바닥을 굴렀다. 그가 몸부림치는 내 몸 위에 올라와서 커다란 손으로 목젖을 짓눌렀다.

“말해. 누가 널 개조했지? 아무리 봐도 스스로 한 것처럼 안 보이거든?”

“컥, 윽……!”

“물론 네 훌륭한 그릇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그건 오해하지 마. 너 서운할까 봐 말해주는 거야.”

나는 이제 그가 뭔 헛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고 있었다. 머리로 올라오지 못한 뜨거운 피들이 목에 고여서 핏줄이 터져나갈 것처럼 울리고 있었다.

‘젠장, 목을 놔줘야 말을 하든 말든 하지…….’

마족 새끼들은 어떻게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놈들만 있는 걸까. 넌덜머리가 났다.

그는 내 숨이 넘어가든 말든 혼자 먼 옛날의 기억에 잠겨서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능적인 녀석인 줄 알았더니 내 착각이었다. 이 새끼는 그냥 광증을 앓고 있는 또라이였다.

“옛날에도, 아주 가끔 너 같은 인간이 태어나곤 했거든.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너희들이 말하는 신 헬리스가 점찍은 영혼이라도 있는 건지. 다른 생명을 끝도 없이 구원하는 인간이.”

“크읍, 큭…….”

“우습게도 천족들은 너 같은 녀석더러 ‘숭고한 정신’을 지녔다고 하더군.”

그가 시뻘게진 얼굴로 줄줄 울고 있는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리고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지. 너 같은 그릇은 반드시 대천족에 버금가는 힘을 갖게 된다는 거야. 알아?”

나는 더 이상 발버둥 치지 못하고 자리에 축 늘어졌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천족을 이끄는 대장들의 힘. 그걸 구현하는 네 마나. 얼마나 달콤할지 내가 어떻게 기대를 안 할 수 있겠어?”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분명 인간의 몸을 차지하고 있을 텐데, 모든 치아가 송곳니처럼 뾰족했다. 마족을 완전히 받아들인 그의 몸은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체질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가 내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시야의 끝에 걸리는 게 있었다. 건물의 망가진 문 틈으로 아주 자그마한 인영이 보였다. 곰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잔뜩 겁에 질려있는 소녀가 보였다.

‘이레타?’

나는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번뜩 떴다.

‘어떻게? 왜 여기에 있지? 설마 내 뒤를 쫓아왔나?’

어린 소녀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마족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마음을 다잡은 듯 입술을 깨물더니, 날 잡아먹을 것처럼 고개를 숙인 마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마 마족의 모습이 괴물이 아니라 인간과 흡사해서 그나마 용기를 낸 것 같았다. 굉장한 결단력이지만 내겐 심장이 떨어지는 행동이었다.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노라의 얼굴이었다.

‘딸을 놓치면 어떻게 해!’

광장은 사람이 많고, 모두 흥분에 빠져서 하늘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라도 잠깐 시선이 팔렸던 게 분명했다.

“언니를 괴롭히지, 꺄악!”

소리치며 달려온 이레타가 마족의 몸에 부딪히자마자 나동그라졌다. 마족의 바위처럼 단단한 몸을 밀치기엔 아이의 몸이 너무 작고 물렁했다. 그러나 그의 신경을 거스르기엔 충분한 행동이었다.

즐거운 식사시간을 방해받은 마족이 신경질적으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이 물러서자마자 잔뜩 오그라들어 있던 숨통이 뻥 트였다.

“허억!”

숨을 들이켜며 몸을 뒤집었다. 바닥이 핑글핑글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두 팔로 간신히 상체를 받친 채 억지로 손을 움직였다. 목에 걸려 있는 두 개의 목걸이 중, 호각이 달린 걸 끌어와 무작정 입에 물었다.

숨이 차서 거의 부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작게 삐익 소리가 났다.

‘너무 작아서 못 들었을까?’

폭시는 비브로스의 곁을 지키라는 명을 수행 중이었다. 여기까지 뛰어오는 덴 문제가 없다. 신수는 공간을 넘어 내게로 다가오니까. 그러나 소리가 너무 작은 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한 번 더 불 힘도, 시간도 없었다.

“꺄아아악.”

자리에 넘어지면서 운 좋게 공격을 피한 이레타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손바닥에 유리 조각이 박히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이레타에게 몸을 날렸다. 잘한 짓이었다. 검은 갈퀴 같은 것이 이레타가 있던 바닥을 흉포하게 긁었다.

“나는 방해받는 게 제일 싫더라.”

마족이 으득, 으득, 어금니를 갈며 중얼거렸다.

“날파리는 죽어야지?”

그는 화가 나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놀라운 힘으로 이레타를 끌어안고 건물을 빠져나가 달렸다. 아이를 안느라 텔레파시용 펜던트를 손에 쥘 수가 없었다.

‘용사를 불러야 하는데!’

슬프게도 폭시가 호루라기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들었으면 바로 내 앞에 나타났을 테니 말이다.

빠르게 따라붙은 검은 마나가 그림자처럼 뒤꽁무니에 따라붙었다. 그것이 망설임 없이 내 허리에 감기더니, 뒤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 반동으로 뱃가죽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컥!”

비명을 삼키며 손에 힘을 주었다. 마족이 있는 곳으로 딸려가다가 아이를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힘들고 괴로웠지만, 아직 희망은 있었다.

어차피 내 본래 목적은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 허리만 속박되어 있었다.

“이레타, 언니 목에 호루라기 보이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불어!”

내가 아이의 몸을 놓아주자마자 이레타가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나는 손이 빈 틈을 타 마법 가방을 뒤졌다. 손에 매끈한 감촉의 약병이 잡히자마자 꺼내서 뚜껑을 따고, 마족의 얼굴에 들이부었다.

동시에 호루라기 소리가 높다랗게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이익―!

“으아아아악!”

홀리니스를 맞은 마족이 고통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그의 검은 마나에서 해방된 내 몸이 맨바닥을 굴렀다.

때맞춰 폭시가 공간을 넘어 이곳으로 왔다. 나는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소매로 대충 훑어내며 악을 썼다.

“물어!”

폭시가 망설이지 않고 마족의 어깨를 물었다.

나는 홀리니스의 약병을 하나 더 따서 비명을 지르는 마족의 입에 강제로 처박았다. 용사들의 몸에 깃든 마족을 쫓아낼 때 썼던 약이었다. 몸을 완전히 빼앗긴 사람에게도 효용이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마족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폭시가 턱에 힘을 주었다. 나는 마족이 해충약을 맞은 벌레처럼 버둥거리자 약을 하나 더 따서 그의 입에 콸콸 들이부었다.

‘혈판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 더 빠르게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하는 찰나, 남자의 몸이 처음부터 신기루였다는 듯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제기랄, 두고 보자!”

그가 사라지는 와중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해치웠다는 생각에 다리 힘이 풀렸다. 나는 풀썩 주저앉아서 울고 있는 이레타를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멍하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뀨우.

폭시가 애달프게 울면서 내 이마에 흐르는 핏물을 훑어 없애주었다.

“하아……. 피곤해…….”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몸을 늘어트렸다. 날 따라온 걸 혼내야 할지 아니면 용기 낸 걸 잘했다고 칭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얘 때문에 살았네.’

이레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머리를 흔들어 괜한 상념을 지워낸 뒤, 아이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주었다. 이렇게 울고 있는데 엄하게 혼내기도 난처했다. 게다가 마족에게 어찌나 호되게 목을 졸렸는지 목소리도 안 나왔다.

‘약물은 사람들한테 다 써버리고 없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었다.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결계 밖에 계속 있으면 위험했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휘둥그런 눈으로 폭시를 구경하는 이레타를 번쩍 안아 들어 폭시의 등에 태웠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나도 폭시의 몸에 올라탔다. 폭시는 이제 곰 한 마리보다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미치겠네. 이대로 가면 시선을 끌 텐데.’

폭시가 어디 좀 화려한가. 특이하게 생겼지, 털은 은빛이지, 머리엔 하얀색 뿔인지 보석인지 아무튼 정체를 알 수 없는 게 달려 있지.

단순히 야수라고 치부하기엔 심히 눈에 띄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걸어서 광장으로 가는 건 무리였다. 가다가 마물이라도 만나면 최악이었다.

‘용사들은 마족이 내게 접근했다는 걸 왜 몰랐을까.’

아무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도, 마족과 싸우는 이상 이질적인 기운이 나타나면 느끼는 게 보통이었다. 여태 용사들이 그래왔기 때문이다.

‘신기루처럼 흩어져버리다니. 마족의 본체가 아닌가?’

나는 생각에 잠겼다.

‘꼭 패밀리어처럼 사라졌단 말이지.’

광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간 게 아니었으므로, 복귀는 빨랐다. 광장 근처로 다가가자 이미 그곳은 소란이 일어나 있었다. 다들 살아남았다는 동지애 때문인지, 한마음 한뜻으로 딸을 잃어버린 노라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녀는 실신 직전까지 가서 분수대 근처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이레타가 엄마에게 갈 수 있도록 폭시에서 내려주었다.

“엄마!”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에 쏠렸다. 당연한 수순으로 폭시 또한 그들의 눈에 띄었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 광채가 깃들자마자 질끈 눈을 감고 묵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아, 제길. 벌써 피곤하다.’

마음 같아선 폭시의 몸에서 얼른 내려오고 싶었다. 여기서 더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시의 등에서 내려가자마자 광장 바닥에 드러누울 게 뻔했다.

“여, 역시 보통 수인족이 아니었어…….”

“저렇게 생긴 동물은 처음 보는군.”

“영물을 타고 있는 수인족이라니…….”

하필 귀도 좋아서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나는 반쯤 체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수상한 수인족이었다. 마물을 끌고 다니고 신기한 동물을 타고 다니다니.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나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내려놓고 상황을 살피기 위해 눈을 치켜떴다.

이리저리 뒹굴었던 탓에 목에 힘을 줘서 머리를 들어 올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목에 붙어있는 바윗덩어리라도 들어 올리는 것 같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바쁘게 눈을 굴렸다. 용사들의 싸움은 광장을 보호하는 동시에 낯선 힘을 상대하느라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여기서 멀어지려고 애를 쓰는 것 같은데, 마족이 득달같이 이곳으로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사람으로 보이는 형상이 흔들리는 시계추처럼 멀어졌다가 근처로 돌아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장소를 바꿀 수 있다면 편할 텐데.’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폭시를 보내면 그나마 수월해지지 않을까.’

나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마법가방을 움켜쥐었다. 아직 여분의 홀리니스가 있었다. 용사들에게 마족이 씌었던 경험 탓에 불안을 해소하고자 여러 개 만들어 두었다.

‘이걸 마족에게 이용할 수 있다면 제일 안전하게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약물을 만드는 것뿐이니 영 입맛이 썼다. 물론 이상적인 방법은 그들을 중간계에 묶어두고 있는 혈판을 찾아 부수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수로 찾겠는가. 결계 밖을 나돌아 다니기엔 너무 위험했다.

‘이 근처에 있을 거란 보장도 없고.’

나는 문득 머리가 어지러워서 폭시의 목덜미에 이마를 기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숨만 몰아쉬고 있자니, 불현듯 광장의 분수대가 눈에 들어왔다. 도시를 대표하는 휠라메스 신전을 본받아 만든 분수대였다. 한겨울이었지만 물이 얼지 않도록 마법적인 조치를 취한 것 같았다.

분수대는 신전을 후원하는 귀족의 재력에 힘입어 무식하게 컸다. 마족의 기운에 영향을 받은 어둑한 하늘 아래, 오직 신 헬리스를 모방한 신의 석상만이 새하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는 장인이 잠도 줄여가며 깎았을 신의 석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의 고결한 발 아래로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물이 차갑게 부서지며 물방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물방울.

그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입술을 짓씹고 윗몸을 일으켰다. 몸에 힘을 주려니 알알이 뭉친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식은땀을 흘리며 폭시에게 속삭였다.

“분수대로 가, 폭시. 얼른.”

내가 걱정되는지 안절부절못하고 낑낑거리던 폭시가 분수대로 걸어갔다. 콩나물처럼 광장에 오밀조밀 모여 있던 사람들이 알아서 두 갈래로 비켜서 주니 기분이 이상했다. 왠지 훤히 트인 길에 레드카펫을 깔고 화려한 꽃을 뿌려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폭시의 등을 두드렸다.

“얼른 가자.”

나는 사람들의 부담스럽고 맹목적인 시선을 느끼며 분수대로 다가갔다. 물은 충분했다. 문제는 홀리니스의 양이었다.

‘부족할 거야. 새로 만들어야 해. 양을 제대로 맞출 수 있을까.’

미약한 두려움을 느끼며 폭시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자세를 낮춰줘.”

쉰 목소리가 희미한 바람처럼 새어 나왔다.

용케 알아들은 폭시가 몸을 낮추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을 무시하며 등에서 기어 내려와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분수대의 대리석이 열이 나고 뭉쳐있는 허벅지를 차게 식혔다.

나는 잠시 바르르 떨다가 마법가방을 뒤져 약병을 꺼냈다.

남은 홀리니스는 열 병.

먼저 분수대의 물을 깨끗하게 정화해주는 정화수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홀리니스의 뚜껑을 따 모조리 분수대에 쏟아 부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렸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긴 하지만, 설득할 생각에 벌써 한숨이 치밀어 올랐다.

“그, 그만두시게!”

상대할 기운조차 없는데 놀란 얼굴로 다가온 그들은 기어코 날 뜯어말릴 작정인 듯했다.

“신 헬리스 님의 석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오?”

“그래봤자 분수잖아요.”

“뭘 모르는군!”

그가 열을 올렸다.

“이 분수대는 성물이나 다름없소!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단 말이오.”

“그, 그렇소.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만두시는 게…….”

“전 석상엔 손도 대지 않았어요.”

나는 목이 잔뜩 부어서 턱턱 끊기는 음성으로 말했다.

“설마 이 물이 전부 성수라고 말하고 싶으신 건 아니죠?”

그들은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큰소리칠 순 없는지 옆에서 알짱거리고만 있었다. 폭시가 방해하지 말라는 듯 그들을 향해 으르렁거리자,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기까지 했다.

나는 그냥 무시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분수대에 손을 넣고 희석된 내 마나의 양을 가늠해서 약물이 얼마나 부족한지 가늠해보았다.

‘이 정도면 지금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겠어.’

나는 마법가방에서 홀리니스의 약재를 꺼냈다. 급할 때 바로 만들 수 있도록, 계량된 약재를 각각 보관해 놓은 함이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그것을 조심조심 꺼냈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날 지켜보던 남자가 기어코 소리를 질렀다.

“광장을 지켜주시는 헬리스 신의 심기를 거스르려 했다간……!”

나는 피곤했다. 마음 같아선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을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거였다.

몰라서 저러는 거 안다. 근데 몸이 힘들어서 짜증부터 치솟았다. 머리로 열이 오르자 뒷목이 심하게 당겼다. 뻣뻣하게 굳은 목줄기를 주무르며 깊이 심호흡을 했다. 신이고 뭐고 저들을 지켜주는 건 우린데 방해하니 다 때려치우고 싶어졌다. 나는 억지로 이해심을 끌어올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지금도 아슬아슬하게 살아있는 형국인데,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질까 봐 무섭겠지. 이해한다. 공포는 사람의 이성을 흐리게 하니까.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신을 부르짖는다는 것도 안다. 그토록 연약한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나 불량한 마음이 내 인내심을 뚫고 머리를 치켜들려 했다.

애초에 이곳 사람들은 용사를 ‘헬리스 신’이 보내준 사자쯤으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나는 눈을 서늘하게 내리떴다.

날 결계 밖으로 유인했던 마족의 말이 생각났다. 다른 생명을 끝도 없이 구원하는 인간이 있다고 했다. 정말 신 헬리스가 점찍은 영혼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게 나라고 꽤 단정적인 어조로 못까지 박았다.

천족이 말하는 숭고한 정신에다, 대천족에 버금가는 마나를 가진 수인족이 나란다.

천족이 정말 신과 맞닿은 존재라면, 지금 그들이 가장 따라야 하는 존재는 바로 내가 아닌가? 그들을 구원할 존재는, 그들의 어리석고 불쌍한 영혼을 굽어 살피는 신의 사자는 바로 내가 아니냔 말이다.

나는 눈앞이 하얗게 물드는 것 같아 질끈 눈을 감았다. 마족에게 걷어차인 옆구리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들었다. 유리 조각에 갈린 손바닥은 피딱지가 말라붙은 채 화끈거리는 통증으로 감각조차 무뎠다. 내 손에 들린 것이 약함인지 눈을 떠야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이제 초점이 흐려져서 눈을 뜬들 그게 보일지 모르겠다. 머릿속은 부옇게 변해서 어둠에 잡아먹힌 것만 같다. 힘들어서 쓰러지고 싶었다. 한계였다.

그러니까…….

“당신들 눈엔, 이 아이가 뭐로 보이지? 야수?”

더는 날 방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 심기를 이 이상 불편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녀석은 신수야.”

내가 당신들을 살려주겠다. 그러니까…….

‘내 말에 따라.’

그르르릉, 폭시가 길게 목울음 소리를 냈다.

신수란 소리에 일대가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졌다. 헬리스의 안식일이 방금 시작된 것처럼 묵직한 침묵이었다.

머리 위에선 여전히 격렬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고개를 들어 싸움을 구경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자그마한 빛까지 끌어 모아 반짝이는 것 같은 은빛 신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엉망인 몰골로 주저앉은 내 자그마한 인영을 눈에 담았다. 나는 분수대에 쓰러지듯 기대앉아, 한쪽 손을 맑고 투명한 물에 담그고 있었다.

근처엔 귀해 보이는 약초와 내 취향을 반영한 아름다운 약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신수가 피가 흐르는 내 이마를 조심스럽게 핥았다. 그리고 자신의 웅대한 몸을 둥글게 말아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받쳐주었다.

꿀꺽, 어디선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를 말릴 인물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꺼져가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어서 만들어야 해…….’

나는 홀리니스의 약재를 하나씩 분수대에 풀었다.

진주를 녹여 만든 듯 유백색으로 반짝이는 신수의 눈물. 신의 푸른 피를 깎아 만든 것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인어의 비늘. 70제곱미터의 땅에서 제일 먼저 싹을 틔운 봄꽃의 새순.

귀한 약재들이 하나같이 성스럽게 반짝이며 분수대로 떨어졌다. 그 궤적을 사람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쫓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마나를 제법 모았지만 이 분수대의 물을 전부 홀리니스로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계속 마족의 시야 아래 둘 수 없었다.

‘성공해야 해.’

나는 눈을 감았다.

‘실패는 없어.’

대기 중의 마나를 끌어 모으는 동시에, 내 안으로 흡수된 마나를 바로 분수대에 흘려 넣었다. 단전에 모여 있던 마나는 금세 동났다. 몸의 마나를 쥐어짜기 시작하자 뱃가죽이 경련을 일으키며 식은땀이 치솟았다.

나는 조금씩 피부에 달라붙는 마나를 느끼려고 애를 썼다. 통증은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내 몸을 갈아가며 마나를 모은들, 분수대의 물을 전부 홀리니스로 바꿀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론 부족했다. 더 많이 필요했다. 흐리멍덩하게 퍼진 마나 말고, 밀도 있게 뭉친 진하고 농후한 마나가 필요했다.

거친 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고, 이미 기절해도 골백번은 의식이 끊겼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실처럼 가늘어지는 정신줄을 억지로 붙들었다. 생리적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저 독기에 차서 허공에 눈을 부라렸다. 어금니를 악물고 생각했다.

‘천족을 이끄는 대장들의 힘이라고 했어.’

바라서 이런 몸이 된 건 아니었으나, 나는 므리나 이소리하로 인해 훌륭하게 다듬어졌다. 완벽하게 각성한 천족의 그릇. 나는 이게 마나에게 얼마나 달콤한 대상인지 알았다.

‘대천족의 힘을 구현해보고 싶지 않아?’

마치 유혹하듯, 내게 달라붙는 마나를 단전으로 끌어당기며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뜨거운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내가 너희를 써줄게. 창조의 힘을 내게 줘. 내 손으로 만들어낸 생명의 샘에, 너희의 숨을 불어넣으란 말이야.’

이리 와. 내 몸으로 들어와.

내 것이 돼.

그리고 기적이 되어서 사람들을 구해.

내 손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 거야.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하는 바람이 내 주위로 휘몰아쳤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뜨거운 인두가 단전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 헉, 숨을 집어삼켰다. 깜박깜박 끊어질 듯 의식이 멀어지던 머릿속이 아예 까맣게 암전되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그저 분수대를 움켜쥐고 버텼다.

바람에게 호되게 쥐어뜯기던 머리가 결국 풀어져서 산발로 나부꼈다. 이마를 쳐올리는 머리카락과, 낑낑거리는 폭시의 울음소리와, 어디선가 비명처럼 울리는 용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 몸을 말았다. 제2자각자가 되면 몸에 마나핵이 생긴다고 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다. 내 단전에 돌덩어리처럼 뭉치는 이 뜨거운 것, 이게 마나핵이었다.

그런데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무섭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터, 터질 것 같아……!’

마나핵이 생긴 이후엔 어떻게 되는지 들은 적이 없었다. 이게 정상일까? 이런 식으로 커지다가 터져버리는 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듯 생각했다.

‘죽는 건가?’

단전에 방금 만들어진 마나핵에 균열이 생겼다. 그 틈에서 피처럼 흘러나오는 되직한 마나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진하게 뭉쳤는데도 마나들이 무식하게 쳐들어오고 있었다. 대기 중에 떠돌던 마나가 내게 들어오려고 피부를 뚫고, 피를 끓이고, 마나핵을 찢어발기며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고개를 마구 저으며 저항해 봤지만 소용없다. 몸이 찢어질 것 같았다.

결국, 단전에 형성된 마나핵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깨졌다. 나는 충격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악…….”

비명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끊겼다. 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의 격통이었다. 잠깐 빛이 눈앞에서 번쩍인 것도 같았다. 그러나 벼락 같던 통증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멎었다.

“헉, 허억…….”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산산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벌벌 떨리는 손은 유리 때문에 피범벅인 것 말고는 멀쩡했다.

단전에 집중되어 있던 농도 짙은 마나가 전신에 퍼져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핏줄 하나하나를 꽉 메우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 꼭 온몸이 마나핵이 된 것처럼.

반사적으로 깨달았다.

‘제3자각.’

초월자의 바로 전 단계. 마법사라면 현자라고 불리는 단계. 제2자각자를 건너뛰고 바로 제3자각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흐르는 진땀을 어깨로 닦아내며 이게 꿈은 아닌지 잠시 고민해야 했다.

‘가능한 일인가?’

감상에 젖어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몸에 넘쳐흐르는 마나를 분수대에 퍼부었다. 분수를 이루는 약물이 진한 천족의 마나를 흡수하면서 은은한 은색으로 희미한 빛을 뿜었다. 사람들이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마나가 전부 녹아들자 빛이 사라지고 홀리니스가 완성되었다.

나는 마법가방에 오랜 기간 박혀 있던 마법스크롤을 꺼냈다. 언젠가 약재 중 하나인 필란테아 늪의 안개를 담기 위해 사놓았던 마법스크롤이었다.

분수의 홀리니스 약물이 물안개가 되어 공중으로 뿌옇게 솟아올랐다. 마침 해를 가리고 있던 음산한 구름이 거센 바람에 날려 옆으로 움직였다. 일직선으로 내리꽂힌 햇살이 물안개에 부딪혀 몽환적인 흰 빛으로 반짝거렸다.

나는 스노아가 준 바람 마법스크롤을 찢어 물안개를 전부 위로 날려 보냈다. 용사들이 마셨던 홀리니스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순도 높은 약물로 이루어진 물안개다. 그것이 신의 징벌처럼 마족을 둘러싸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마음껏 들이마시고, 여기서 꺼져.”

여섯 명의 마족이 독약이라도 들이마신 것처럼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일제히 밑으로 추락했다.

나는 결계에 부딪혀 나동그라진 마족 하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까 내게 찾아왔던 마족이었다. 녀석이 핏줄이 터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희미하게 꺼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도플갱어.”

그러자 마족의 검은 마나로 이루어진, 그와 똑같은 인영이 생겼다.

‘저걸로 날 찾아왔던 거군.’

나는 바짝 얼어붙어서 마족의 도플갱어를 노려보았다.

‘괜찮아. 이 결계는 넘어오지 못해.’

스노아의 결계는 쉽게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과 기대로 번들거리던 그의 눈을 다시 한번 마주 보니 무릎에 힘이 풀렸다. 나를 잡아먹겠단 일념으로 똘똘 뭉친, 기이한 이채가 도는 시선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공포에 질려 뛰어오는 도플갱어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 모아 결계를 찢으려고 발악했다. 움직여야 하는데 자리에 앉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카카나!”

할릭의 음성이 고막을 쟁쟁하게 울렸다. 나는 간신히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의 무시무시한 주먹질에 마족의 도플갱어가 풍선처럼 터져 사라졌다. 동시에 바닥에 쓰러진 사제의 몸에서 마족이 튕겨 나가듯 사라졌다.

그제야 하얗게 질려있던 몸이 녹진하게 풀어지며 뜨거운 피가 돌았다. 곁으로 다가온 할릭이 꼭 해초처럼 흐느적거리는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그의 곰 같은 덩치가 싸움의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반면 나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처럼 차가웠다. 한계까지 몰아붙인 탓인지, 아니면 오늘 하루 여러 충격이 겹친 탓인지 몸이 자꾸 떨렸다. 조금 추운 것도 같았다.

끈적한 땀이 느껴졌지만, 불쾌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피부에 맞닿는 근육이 따끈따끈했다.

“왜 이렇게 다쳤어, 응?”

저도 이곳저곳 피투성이인 주제에, 할릭이 속상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골격이 크고 핏줄이 튀어나온 그의 손이 차마 내 이마를 쓸어주지도 못한 채 근처에서 벌벌 떨었다. 그의 환한 주황색 눈망울이 눈물에 젖어 울렁거렸다.

그게 바닷가를 붉게 물들인 황혼처럼 보여서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이 피, 네 거야? 어쩌다 이렇게 됐어?”

할릭이 나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운이 나쁘게도 옆구리를 조이는 바람에 숨이 안 쉬어졌다. 망할 마족이 어찌나 세게 걷어찼는지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윽, 하아…….”

아파서 눈물이 질금질금 새어 나왔다. 물에 적신 차가운 손수건이 내 얼굴의 피를 닦아주었다. 스노아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어쩌다 다친 거예요. 마물의 짓인가요?”

“마족.”

“마족은 우리가 한 마리도 못 빠져나가게 붙잡고 있었어. 그런데 왜…….”

아다르가 끼어들며 얼굴을 무섭게 구겼다. 나는 가볍게 설명해줄 필요성을 느꼈다.

“도플갱어란 이상한 마법을 쓰던데.”

“젠장.”

그가 머리를 헤집으며 짧게 욕지거리를 했다.

“이 새끼들은 하나같이 괴상한 마법만 쓰네.”

“아무래도 기척을 잡기 힘들도록 본체에 기운을 집중하나 봐요. 앞으로 주의해야겠어요.”

스노아가 딱딱한 얼굴로 대답했다.

“잠깐.”

돌연 아다르의 얼굴이 싹 굳었다. 나는 뒤늦게 손을 주먹 쥐며 숨기려 했지만 손목이 잡혔다. 그가 마족보다 무서운 얼굴로 채근했다.

“너 손이 왜 이래.”

“우선 상처부터 치료해야겠습니다.”

첼러스가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며 얘기했다. 고개를 끄덕인 아다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날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정상인 곳을 찾을 수 없을 테다. 그의 얼굴이 더 험상궂게 굳었다.

“곧 노레스와 반크가 이곳에 도착할 거야.”

아다르가 서늘한 어조로 얘기했다. 이곳을 떠나도 된다는 말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은 채 우리 근처로 다가왔다. 그들의 시선은 용사들을 한 명씩 꼼꼼하게 훑었다가 마지막엔 내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했다.

“감사합니다, 용사님.”

‘지금 나한테 용사라고 한 거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의 사자님이시죠? 용사들을 이끄시는 분도, 우리의 용사님이십니다.”

그들이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신의 사자라니…….’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호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뺨이 창피함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신이 보냈다며 추앙한 용사들에게 둘러싸인 나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부담스럽고 어색했다.

폭시가 두 갈래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게 머리를 비볐다. 스노아가 내 얼굴을 보더니,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는지 순간이동을 시전했다.

‘앞으로 피곤해지겠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성스러운 수인족과 그녀를 따르는 다섯 용사의 소문이 제국에 쫙 퍼졌다.

마족은 제국 곳곳에서 끊임없이 솟아났다. 반크가 알아두었던 다섯 군데의 신전은 용사와 무리가 막았지만, 그 외의 지역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은 후였다.

마족에 관한 이야기는 끔찍한 괴담처럼 양산되어 제국을 두려움에 빠트렸다. 사람들은 웬만하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밤이 되면 온 도시와 마을이 조용해졌다.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던 타국은 마족이 나타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되레 성벽을 높게 올려 쌓았다. 제국은 신이 버린 땅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설상가상 황실이 마족에게 지배당했다는 소문이 돌아 백성들을 더한 절망에 빠트렸다. 수배지의 그림과 똑같이 생긴 용사들의 외모도 황실이 마족에게 지배당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따라붙었다. 사악한 마족이 용사들을 해치우기 위해 진작 계략을 펼친 거라는 설명이었다.

하루하루 살아남기만을 소망하는 백성들일지라도 오늘을 버티게 하는 희망 하나쯤은 있었다. 신 헬리스의 사자인 수인족이 가장 큰 희망이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다. 헬리스의 석상이 지키고 선 분수가 그녀의 의지를 따라 움직였으며, 그것이 마족을 몰아냈다는 내용이 주 골자였다.

게다가 그녀는 신의 증표나 다름없는 신수를 제 수족으로 부렸다. 기적을 행할 땐 거센 바람이 불었으며, 그녀의 몸에서 찬란한 은빛이 반짝였다는 자세한 설명이 뒤따랐다.

사람들은 그 신비로운 힘이 마족에게 진노한 헬리스가 그녀의 몸을 빌려 행하신 기적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제 제국인들은 성스러운 수인족에게 기도를 올렸다. 누군가는 오래된 기록에 남아있는 다섯 용사를 떠올리며 새로운 영웅이 나타났다며 찬양했다. 그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대였다. 세상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역병이 돌아 하루에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사기가 들끓어 사람들이 미쳐갔다.

오직 한 명의 수인족만이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그 끔찍한 역병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녀에 관한 소문은 끝없이 부풀어 올랐다.

[9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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