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마음 안의 어둠 (31/43)

Chapter 3. 마음 안의 어둠

우리가 처음 시도한 건 폭시에게 물리는 것이었다. 폭시가 워낙 크고 이빨이 위험해서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지만, 내겐 리커버리 약물이 있었다.

“미안해 폭시. 할릭을 물어 줘.”

뀨우우―

폭시는 고개를 붕붕 가로저으면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정말 미안해. 하지만 방법이 없어.”

나는 덜덜 떠는 폭시에게 가혹한 명령을 내렸다.

희생양은 할릭이었다. 그가 제일 덩치가 커서 그나마 폭시의 이빨을 오래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할릭은 옛날부터 거친 일은 자기 몫이었다며 태평하게 웃었다. 시퍼렇게 질린 나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계획을 실행했는데, 결과는 서글펐다.

“죽일 정도로 치명상을 주려면 폭시에게 잘근잘근 씹혀야 하나 봐.”

할릭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그에게 리커버리 약물을 퍼붓다 말고 근육이 불거진 팔뚝을 차지게 때렸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지금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스노아가 거실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를 마법으로 날려주어 망정이었다. 할릭이 핏물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면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사실이잖아.”

할릭이 해쓱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마족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잠깐 기를 죽여놓을 순 있을 것 같지만, 이게 최선인 것 같아.”

“내가 폭시의 독으로 연구해볼게.”

“따로 채취하면 효과가 사라져버린다며.”

“뭐든 시도해 봐야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나는 일단 연구를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제일 고통스럽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마족이 오지 않았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쁜 소식은 있기 마련이었다. 나는 텔레파시로 들리는 아르모어의 목소리에 활짝 미소 지었다.

[정말이에요? 마족이 왜 비브로스를 추적하지 않는 걸까요?]

[우리가 머물렀던 별장조차 방문한 적이 없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덕분에 크게 한시름 놓았다. 이제 신경 써야 할 건 죽음의 숲에 있는 네 명의 용사들이었다.

[고마워요, 아르모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우리가 괜찮아질 때까지 비브로스와 함께 있어 줘요.]

[그대가 원한다면.]

텔레파시가 끊겼다.

나는 작업 책상에 엉망으로 퍼져 있는 약초와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생각이 이리저리 엉켜서 곤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다다나까지 떠올랐다.

나는 머리를 틀어쥐고 몸을 웅크렸다.

***

“너무 초조해하지 마.”

일주일쯤 지났을 때, 아다르가 말했다. 나는 퀭한 얼굴로 요리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용사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한겨울이어서 눈보라가 몰아쳤었다. 지금은 쌀쌀한 정도지만, 1년 전 이맘때쯤으로 돌아온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는 멀쩡하니까.”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지 그래.”

나는 싸늘하게 일갈했다.

“너희가 어딜 봐서 정상이란 거야?”

용사들은 하나같이 나와 떨어져 앉아 있었다. 내가 앉은 소파엔 엉덩이를 들이밀지도 않았다. 한 소파에 우겨 앉기 힘드니까 몇 명은 서 있었다. 저러고도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니 기막힌 심정이 되었다.

“뭐, 매일매일 인내심을 시험하는 기분이긴 해.”

아다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말해주면 안 돼?”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용사들의 마음속 어둠에 기생하는 마족이 대체 무슨 방식으로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나랑은 다른가?’

똑같은 방식이라면 그들도 저렇게 태연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망한 용사들의 환영을 보았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떤 부분을 파고들고 있는 걸까?’

“궁금하다고? 정말?”

아다르가 달걀부침을 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위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저 얼굴을 보는 순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었다.

대답 대신 침묵을 택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니, 아다르가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들으면 당황할 텐데?”

저렇게 얘기하니까 더 궁금해졌다.

나와 가까이 있지 않으려고 하는 용사들 때문에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욕망이 한계치까지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뜻을 불현듯 깨달았다. 첼러스랑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쉬웠다. 나는 질린 얼굴을 했다.

“너희들 머릿속엔 그렇고 그런 거밖에 없어?”

“웬일로 눈치챘네?”

아다르가 재미가 식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더니,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았다.

“우리의 이성을 끊어놓기 쉬운 쪽으로 파고들고 있어. 끔찍한 꿈을 계속 보여줘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으니까,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는 모양이야.”

“끔찍한 꿈?”

“응. 네가 죽는 꿈.”

나는 입을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런 꿈을 꾸는데도 괜찮아?”

“이미 한번 겪어봤잖아. 네가 기적적으로 살았지만.”

나는 충격으로 입을 벌렸다.

“겪어봤다고? 언제?”

“포이즌이 걸린 애로우 마법에 맞고 죽을 뻔했잖아.”

나는 그가 죽음의 숲에서 겪은 일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대체 언제 적 얘기야?”

“카카나.”

아다르가 정색하고 탁, 소리가 나도록 주방 도구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의 사나운 기세에 움찔 어깨를 좁혔다.

한동안 말실수를 하지 않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 사고 친 것 같았다. 나는 내 경솔한 입술을 치아로 꽉 짓씹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아다르가 싸늘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넌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우린 네가 꼼짝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사제도 가망이 없다 했고. 잊을 수 없는 일이야.”

“…….”

“너에게도 그런 사건이 있잖아. 지겨울 정도로 널 겁먹게 만들고, 끈질기게 발목을 잡는 과거가 말이야.”

“미안.”

“괜찮아. 네가 무신경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말투가 날카로웠다. 신경이 저토록 예민하게 서 있는 아다르를 본 적이 없었다. 마족에게 계속 시달리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다르의 말대로라면 그게 한번 겪었다고 괜찮아지는 일인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분위기상 더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다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그러진 음성이었다.

“그때 이미 우리는 가장 추악한 스스로를 발견했어. 이제 와 다시 보여주면서 충격을 주려고 해봤자 쉽게 이성을 잃지 않는다는 소리야.”

“…….”

“마족이 어떤 식으로 꿈을 보여주는 줄 알아? 일단 널 죽여. 그런 다음, 이성을 놔버리라고 종용해. 마음 가는 대로, 원망스러운 놈들을 죽이라고. 자유롭게.”

아다르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웃기는 소리지. 우린 맨정신으로 그 추악한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거든. 우리에게서 널 빼앗아 간다면.”

그렇게 얘기하는 아다르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

“어둠은 어둠으로 맞서는 거지, 안 그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러다 마족이 우리에게 질려서 먼저 도망가는 건 아닌가 싶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킬킬, 웃었다. 아다르의 웃음소리를 듣는데 닭살이 오돌토돌하게 올라왔다. 그들이 마음 안의 어둠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마족에게 대항할 수 있는 거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오싹했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미 범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낀 적이 있지만, 생각보다 더 깊고 어둡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족도 머리가 있으니까 깨달은 거지. 그래서 이젠 네가 죽는 꿈 더는 안 꿔.”

“그럼 무슨 꿈을 꾸는데?”

“이성을 놓고 싶게 만드는 꿈을 꿔.”

아다르가 테이블에 음식을 늘어놓으며 다른 용사들을 곁눈질로 흘끗 살폈다.

“너희도 똑같은 꿈을 꾸지?”

할릭과 스노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첼러스는 창백한 안색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식탁으로 걸어갔다. 이런 황당한 대화를 주고받는데도 배는 고팠다. 아다르표 샐러드와 스튜를 떠먹으며 착잡한 심정을 숨겼다. 용사들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원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용사들의 눈앞에서 내가 완전히 사라지면 좀 나으려나?’

날 보면 괜한 충동만 들 것이 아닌가.

‘근데 용사들이 꾸고 있다는 꿈의 내용,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긴 한가?’

통 추상적으로 얘기하니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음료를 마시다 말고 확인차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희가 하고 싶은 게 나랑 섹…….”

네 쌍의 눈알이 내게 일제히 굴러왔다.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다들 나와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평소처럼 식사하고 있었다. 시선만 내게 두었을 뿐이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방금 음료를 들이켰음에도 목이 말라붙어서 마른침이 넘어갔다.

나는 진땀으로 미끈미끈해진 손바닥을 슬쩍 치맛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어둑한 시선이 내 어깨서부터 미끄러지며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 테이블에 막혀 다시 위로 올라왔다.

말을 뱉지 못하고 움찔거리는 입술을 샅샅이 훑는다. 숨이 막혔다.

“아, 음.”

말을 끝맺지 못하고 테이블에 거의 처박듯이 고개를 숙였다.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용사들이 식기를 달그락거리며 식사를 재개했다. 심장이 쾅쾅거려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이게 내 심장 소리인지, 아니면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다.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포크를 들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다르가 내 그릇에 과일과 샐러드를 얹어주며 말했다.

“너무 겁먹지 마. 네게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거니까.”

아다르의 동공 열린 눈을 보니 전혀 믿음직스럽게 들리지 않았다. 새삼스레 위기감이 느껴졌다. 나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으음, 너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을까?”

“그건 역효과만 낼걸.”

할릭이 탐탁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네가 눈에 보이니까 이 정도인 거야. 보이지 않으면 더 심해져.”

“보고 있는 게 더 괴롭지 않아?”

“네가 안전하게 우리 곁에 있다는 게 안심이 되잖아.”

할릭이 씩 웃었다.

“그러니까 멀쩡하다는 걸 계속 보여줘. 우리가 정말로 미쳐버리지 않게.”

평소였다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타박했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농으로 들리지 않았다. 정말로 용사들이 미쳐버릴까 무서웠다.

“마족에 씐 사람이 넷이나 되니까 다행이지, 뭐.”

아다르가 낄낄 웃으면서 포크로 할릭을 가리켰다.

“너랑 카카나가 단둘이 저택에 있었어 봐. 지옥이었을걸.”

“찬성.”

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를 못 믿는데, 카카나를 건드리면 날 죽여버릴 너희는 믿거든. 참 다행이지.”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양배추를 씹었다.

“가장 믿음직스러운 건 역시 첼러스인가?”

“맞아. 스노아도 이성적인 녀석이지만, 감정에는 약하잖아. 인내심 최고는 첼러스라고.”

주거니 받거니 할릭과 아다르가 살벌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묵묵히 식사 중인 첼러스를 곁눈질로 살폈다. 그는 음식을 먹다 말고 목에 걸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불쌍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치밀었다. 얹혀도 단단히 얹힌 듯 안색까지 희게 질려 있었다.

‘소화제를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첼러스가 괴로운 눈으로 토로했다.

“절 너무 믿지 마십시오.”

“와. 나 이렇게 자신감 없어진 첼러스 처음 봐.”

할릭이 신나서 얘기했다.

“아무리 너여도 카카나는 조금 힘든가 보지? 응?”

“그만하십시오, 할릭.”

첼러스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내가 적당히 하란 의미로 큼큼, 헛기침하자 다행히 조용해졌다. 이런 식으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마족의 일부분만으로 이 정도면 나중엔 어떻게 되는 거지.’

일부분이 아니라 마족 한 명이 통째로 용사에게 깃들 수 있었다. 지금은 마족도 조심하고 있다지만, 우리에게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걸 그들도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마족이 왜 조심하고 있는 걸까?”

용사들이 멀뚱히 날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에게 깃드는 것도 아니고 너희에게 깃드는 거잖아. 자살하려는 게 아닌 이상에야 딱히 위험부담이 없지 않나?”

“카카나가 있잖아요.”

“엥? 나?”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들은 카카나가 천족의 심복이라고 굳게 믿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닌가요?”

“어라. 그러네.”

“카카나를 알게 된 마족들은 전부 죽었지만, 잠깐 사이에 정보를 교환했을 수 있으니까요.”

‘정말 나 때문에 마족들이 몸을 사리고 있는 거라면…….’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마족들의 행동에서 짚이는 바가 있었다.

“나보고 천족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고 했었잖아. 이게 마족을 해할 수 있는 단서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몸을 사릴 이유가 없어.”

“일리가 있네요.”

스노아가 수긍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야, 먹던 건 다 먹고 가야지.”

아니나 다를까, 아다르가 핀잔을 주었다.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연구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빈 양피지를 꺼내 그간 내 마나에 대해 알게 된 정보를 정리했다.

가장 먼저 정리한 건 내 마나의 속성이었다. 숫자를 매겨서 끼적였다.

< 1. 날것으로 사용했을 때 미약한 치유의 힘을 지닌다.

2. 치유연금물약에 사용하면, 필요한 마법을 알아서 보충하고 효능을 증폭시킨다.

3. 엘프, 야수와 교감할 수 있다. >

그 다음에는 내 마나의 수상한 점을 정리했다.

< 1. 알렉 브래든과 상쇄반응을 일으킨 직후 속성이 생겼다.

2. 천족의 마나와 흡사하다.

3. 마족과 마물을 홀린다. >

나는 정리한 내용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후다닥 서재로 뛰어갔다. 잠을 못 잔 탓에 몸이 무겁고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당장 궁금한 걸 해소하지 않으면 또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마족과 천족에 대해 설명해 놓은 책을 있는 대로 꺼냈다. 책을 들고 연구실로 돌아가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맨바닥에 앉아 책을 쌓아놓고 읽었다.

‘알렉 브래든은 당시에 마족의 심복이었어. 그를 만나고 내 마나에 속성이 깃들었으니까, 그와의 접촉이 조건이었다면?’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수인족들은 천족의 혼혈이야. 정말로 천족의 마나랑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중얼거리며 차락차락, 책을 넘겼다. 전부 허무맹랑한 옛날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짜증이 나서 다른 책을 뒤졌다. 사정은 비슷했다.

결국 수인족에 관한 책까지 모조리 꺼내왔다.

‘만약 천족의 혼혈이어서 특별한 마나를 가진 거라면, 다른 수인족들도 똑같아야 하는 거 아닌가? 차원균열지대의 수인족들은 사기에 항상 노출되어 있잖아. 충분히 각성 요소가 될 수 있어.’

나는 가늘게 좁혀진 미간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고뇌했다.

‘나랑 다른 수인족들의 차이점이 뭐지? 약물을 잘 만든다는 거? 아니면…….’

우뚝, 하던 행위를 멈추었다. 나는 숨 쉬는 것마저 잊고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실험?’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피부가 단단하게 오그라들었다. 뒤를 따라 훅 끼쳐오는 열기가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며칠 동안 마음고생을 한 탓에 핏줄이 빨갛게 터진 눈알이 뻑뻑했다.

‘므리나 이소리하의 실험?’

나는 그녀의 실험 때문에 수많은 독에 노출되었었다. 다른 수인족과 나의 차이점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오금이 저려서 나도 모르게 두 다리를 그러모았다. 걷잡을 수 없이 몸이 떨리고 있었다.

‘므리나는 대체 무슨 실험을 했던 거지?’

마족과 마물을 홀리는 노예 수인족을 만들어서 뭘 하려는 걸까. 그녀가 뭘 의도하고 있는 건지 알지도 못하는데, 끔찍한 걸 본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차원균열지대의 수인족 신관, 아르소의 말이 귓가에서 왱왱거렸다.

[마족은 언제나 굶주려 있고, 천족님에게 달라붙어 마나를 빼앗아 먹으려고 안달을 한다.]

결국 참지 못하고 웨엑, 속을 게워냈다.

므리나 이소리하. 다다나. 천족의 마나. 용사들을 위협하는 마족.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한 후유증이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눈앞이 까맣게 암전되었다.

***

정신이 든 건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나는 윗몸을 일으켰다.

입술이 쩍쩍 갈라지고 목이 말랐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탁자에 찬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을 들어 마시다 말고 벽을 바라보았다. 첼러스가 눈을 감은 채 등을 기대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걸까.

“첼러스.”

“많이 아팠습니다. 열이 내리지 않더군요.”

“아…….”

나는 땀이 끈적끈적하게 묻어나오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며칠간 극도로 긴장하고 초조해했던 게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비브로스가 생각나서 휙, 고개를 들었다. 첼러스가 그간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르모어가 사유지를 포함한 일대를 넓게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마족이 마나를 사용한 흔적이 곳곳에 퍼져 있었다고 하더군요.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것처럼.”

“왜?”

“저희의 추측일 뿐입니다만, 마족은 아무래도 대략적인 방향만 알 수 있는 모양입니다.”

“방향?”

“그렇습니다.”

그제야 감겨 있던 눈이 뜨였다. 호수빛 눈망울이 드물게 침잠되어 있었다. 지쳐 보여서 걱정이 되었다.

“저희가 몸의 감각을 느낄 수 있듯이, 마족도 자신의 일부를 느낄 수 있는 겁니다. 방향을 찾아 움직일 수는 있지만 정확한 좌표는 모르는 거죠.”

“그럴듯하네.”

“지도를 보고 위치를 알아내는 것과 감각으로 가늠하는 건 다르니까요.”

“근데 감각을 따라서 교수님의 저택 근처에 와봤을 수 있잖아. 그러면 위치를 알았을 텐데.”

“걸어서 말입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초월자는 공기 중의 마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근처에서 마법을 사용했다면 저희에게 들켰을 겁니다. 은밀하게 물밑 작업을 하는 것이 애초의 의도였으니, 계획이 틀어질 일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교수님은 안전하겠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안전하다는 거잖아. 그거면 됐어.”

나는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근데 첼러스. 어디 안 좋아? 전보다 더…….”

입술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보다 더 아픈 사람 같았다.

첼러스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인내하듯이.

“문제는 저희입니다.”

첼러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죽음의 숲으로 들어오기 곤란하니, 마족이 저희를 함락시키는 방법에 매달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건 조금 의외였다.

‘몸이 망가져도 일단 들어올 줄 알았는데.’

바드가 검은 연기로 시체를 움직였듯이 말이다.

‘역시 그러면 힘이 반감되려나?’

게다가 바드는 하급 마족을 우롱하는 말을 했었다. 바드가 상급 마족이란 점을 고려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소수일지도 몰랐다.

“미안, 내가 그간 연구를 하지 못해서…….”

다른 방법은 없다. 내가 마나를 연구하든, 폭시의 독을 연구하든 마족을 몰아낼 무언가를 만들어야 했다.

‘정화’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신전이지만, 믿을 수 없었다. 마족의 실험이 신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말 다 한 거나 다름없었다.

‘사제들의 힘과 비슷한 효능을 내는 약물을 만들 순 없을까?’

그때, 첼러스가 내게 다가왔다.

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순간 겁먹어서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첼러스가 한쪽 무릎을 내 침대 위로 올리며 가까이 달라붙었다. 턱을 붙잡혀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맑게 빛나던 눈망울이 지독한 정염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카카나.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아픈 게 제일 힘이 듭니다.”

작게 속삭인 그가 고개를 틀며 다가왔다. 뜨거운 숨이 입가로 쏟아졌다. 맞붙은 입술이 까칠까칠하고, 또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내 턱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목에 핏대가 돋아 있었다. 나는 움츠러든 몸을 펴고 그를 바라보았다. 몸에 너무 힘을 주고 있어서 그런가, 첼러스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카나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입술이 다 헐어 있다. 저런 얼굴로 걱정하지 말라니까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편하게 해줄까?”

첼러스가 한참 후에 되물었다.

“예?”

“나 지금부터 사제만 사용할 수 있는 신성 마법을 알아볼 거야. 정화계열로.”

나는 손을 쥐락펴락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려면 마나가 많이 필요해. 지금 내 몸에 있는 마나만으론 힘들어. 주위에 초월자가 붙어 있으면 마나를 모으기 쉽다며.”

“…….”

“네가 필요해.”

나는 두 팔을 벌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붙어서 마나를 충분히 긁어모아도 버틸 수 있을 만큼, 나를 안아 봐. 쏟아부어 봐.”

꽉, 어금니를 악문 탓에 첼러스의 턱이 불거졌다. 그가 깊게 숨을 들이켜고, 잠시 뒤에 또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어둑한 방 안에서 그의 눈망울만 기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응? 네가?”

“아니, 카카나가.”

첼러스가 한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달빛을 받은 그의 손등에 혈색이 하나도 없었다.

“괜찮아. 버틸 수 있어.”

“안 됩니다, 카카나. 안 됩니다.”

가늘게 떨리는 음성이 거의 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진짜 우나 싶어서 얼굴을 확인했는데, 밑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가리고 선 석상처럼 자리에 선 채 머리카락 한 올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지한 그림을 보는 느낌이었다.

“네게 모여 있는 마나가 필요해. 마족을 몰아낼 물약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 혼자만의 힘으론 힘들어. 시간을 끌면 너희만 힘들어질 거야. 인내심이 끝나는 순간, 알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첼러스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지금 나랑 붙어 있어도 괜찮겠어? 마나를 모을 때까지, 참을 수 있겠어?”

“……못 합니다.”

“너는 용사 중에서 가장 인내심이 강해.”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첼러스에게 걸어갔다. 순간 그의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첼러스의 셔츠 아래로 돌덩이처럼 긴장한 몸이 보였다. 핏줄이 시퍼렇게 돋아 있는 건 물론이었다.

“네 마음에 찰 때까지 해. 시간 끌지 말고 얼른.”

“후회하지 마십시오, 카카나.”

첼러스가 이번엔 화가 난 어조로 중얼거렸다. 손에 가려진 눈이 드러났다. 언제고 유한 웃음을 머금던 첼러스의 눈이 사납게 어그러져 있었다.

나는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치려다가, 억지로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거칠게 호흡을 고르던 첼러스가 나를 달랑 안아 올렸다. 으앗, 놀라며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첼러스의 뜨거운 숨이 등으로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울지 마십시오.”

쫙쫙 갈라지는 음성이 귓가에서 사분거렸다. 소름이 돋아서 질끈 눈을 감았다.

“저는 그래도 카카나를 놓지 못할 겁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나는 참 충동적인 인간이었다. 충동적으로 결정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으면 모든 건 이미 늦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첼러스의 위협적인 몸이 내 위로 올라왔다. 그가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는 날 살피더니, 눈가를 휘었다. 조금은 일그러진 눈웃음이었다.

“겁먹으셨군요.”

그의 손이 내 뺨을 소중하게 쥐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 이성을 잃는 건 안 돼. 그럼 말짱 도루묵이니까.”

너른 어깨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첼러스가 잠깐 조용히 침묵하다가, 이내 꽉 막힌 음성으로 말했다.

“이성을 잃을 순 없습니다.”

어조가 절절하게 들끓고 있었다.

“하나하나, 전부 지켜볼 겁니다. 놓치는 일 없이. 지금만큼은 마족이 절대 절 넘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아까운 짓을 할 수 없다는 양, 결연한 목소리였다.

‘그거 참 안심이 되네.’

나는 속으로 실성한 웃음을 흘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잘못했어요, 소리가 혀끝까지 튀어나왔지만 곧 입이 막혔다. 기나긴 밤의 시작이었다.

***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창문 너머로 중천에 뜬 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잠깐 잠들었나?’

눈을 깜박이고 싶은데, 하도 부어서 움직임이 더딘 게 느껴졌다. 옆에서 보면 붕어 입처럼 튀어나왔을 거라는 데에 내 오른손도 걸 수 있었다.

목도 땡땡 부어서 침을 삼키는 것마저 힘들었다. 이미 편하게 늘어져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도 까딱이기 싫었다.

솨아아—

첼러스가 욕실에서 샤워하는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칵, 소리가 나며 그가 방으로 들어섰다.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얼굴이 그나마 조금 풀어져 있었다. 무서운 점은, 완전히 해소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갑자기 그의 목에 매달려서 잘못했다고 빌었던 일이 생각났다. 살려달라고 했더니, 첼러스가 죽이는 게 아니라고 얘기했던 것까지 떠올랐다. 내가 얼마나 처절하게 울음을 터트렸으면 그렇게 대답했을까.

지금 생각하니 웃겼다. 처음엔 첼러스도 여유가 없어서 대답하지 않고 날 사랑하는 데 몰두했다. 내가 하도 우니까 어르고 타이르기 시작한 거다. 그런데 사람 속도 모르고 더 기분 좋게 해주겠다며 날 벼랑으로 몰아세웠다.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기절했을 거다. 그것도 자제해서 그 정도였다.

너무 창피하다 못해 죽고 싶은 심정이 치밀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이불을 끌어왔다. 그걸로 얼굴을 가리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첼러스가 근처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침대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카카나, 씻어야 합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씻기는 개뿔이, 누워서 숨만 쉬는데도 힘들어 죽겠는데.’

“제가 씻겨드리겠습니다.”

나는 식겁해서 이불을 치웠다.

“안……!”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목을 부여잡고 캑캑거리자, 첼러스가 급히 미지근한 물을 들이밀었다. 그걸 야금야금 들이켜고 목을 가다듬었다. 한 세월 가다듬어도 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안아드리겠습니다.”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첼러스가 미안한 얼굴로 상냥하게 속삭였다.

“더는 하지 않을 겁니다. 약속합니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그는 저렇게 미안한 얼굴이었다. 목소리도 상냥했다. 하지만 행위는 상냥하지 않았다.

계속, 계속…….

나는 흘러내리는 콧물을 훌쩍, 빨아들였다.

‘거짓말쟁이.’

내 원망스러운 눈을 본 첼러스가 나를 끌어안아서 등을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밑이 쓰라려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허벅지도 뻣뻣하니 아프고, 허리도 지끈거렸다. 배도 아픈 것 같았다. 더 서러워졌다.

‘이제 싫어…….’

이성을 잃지 말라고 했는데, 정작 이성이 끊긴 건 나였다. 그는 내가 요구했던 대로, 한계치까지 참았던 욕망을 쏟아냈다. 당연한 수순으로 나는 한계치까지 기분이 좋아져야 했다. 말이 기분 좋은 거지, 이 정도면 고문이었다.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한 번 안고 나니 욕망이 더 커졌습니다만…….”

나는 고개를 팩 쳐들었다. 그리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개고생을 했는데, 뭐? 욕망이 더 커져?’

첼러스가 자기를 잡아먹기 직전인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자연스럽게 말을 비틀었다.

“신체가 이완되어서 그런지 전보다 훨씬 쾌적한 기분입니다. 진정하세요, 카카나.”

나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그래. 인간적으로 이렇게까지 해댔으면 좀 가라앉아야지. 아니면 네가 사람이니?’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다는 몽마도 그렇게 하면 흥분이 죽을 거다.

입에 올리지 못할 여러 말들이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짓눌렀다. 어차피 입을 열어 말했어도 목소리가 쉬어서 쇳소리밖에 나지 않았을 거다. 나는 슬그머니 그의 사타구니로 시선을 내렸다.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긴 했어.’

뭔 생각을 하는 거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핑그르르, 세상이 돌아갔다.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자 첼러스가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싫어.”

이번엔 가까스로 소리가 났다.

“정말 안 합니다.”

첼러스가 거듭 강조했다. 믿을 수가 없어서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첼러스가 기어이 내 새끼손가락에 자기 새끼손가락을 걸고 가볍게 흔들었다.

“약속합니다.”

그래도 믿을 수 없었다.

내 뺨에 짧게 뽀뽀한 첼러스가 옹송그린 내 손을 살살 폈다. 뭐 하는가 싶어서 물끄러미 구경했다. 그가 내 손바닥에 엄지를 꾹 누르더니, 말간 얼굴로 말했다.

“지장도 찍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첼러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저 정도면 정말로 안 하겠다 싶었다.

그에게 머리를 기대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첼러스가 잠깐 샤워한 10분 정도의 시간 말고 잠들지 못했다. 첼러스가 정수리에 연신 입을 맞추는 것을 느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애가 대체 왜 안 나오냐고!”

‘무슨 소리야…….’

나는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눈을 떴다.

‘잠든 지 얼마나 됐다고 이 난리야.’

그러나 그런 생각은 곱게 접어 넣어두어야 했다. 문밖에서 발광 중인 목소리에서 무슨 일인지 짐작할 만한 단서가 나왔기 때문이다.

“왜 계속 못 들어가게 하는데? 벌써 하루가 지났잖아!”

‘내가 하루나 잤어?’

근데 잔 것 같지 않았다. 몸은 되레 더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여기저기 결리고 허리는 끊어질 것 같았다.

‘역시 약이 최고야…….’

나는 마약한 사람처럼 해롱해롱 풀어진 얼굴로 선반 위를 더듬었다. 마법 가방이 손에 잡혔다. 내가 잠든 동안 첼러스가 가방을 뒤져본 것이 틀림없었다. 내게 먹일 적당한 약을 찾고 싶었겠지만 실패했을 것이다. 나는 약병에 이름을 붙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 사랑스러운 약물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걸.’

해죽, 웃었다가 얼굴을 굳혔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생각이 조금 바뀌려 했다.

‘용사들도 필요할 때 꺼내서 쓸 수 있게 이름표를 붙여놔야 하나…….’

고민하며 약병을 손에 쥐었다. 좀 아깝긴 하지만, 나는 과감하게 리커버리 약물을 꺼냈다.

온몸에 남은 키스 마크, 쉬어버린 목소리, 땡땡 부은 몸, 전신의 근육통까지 한 방에 해결하려면 리커버리가 깔끔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아도 과연 이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을지 궁금해졌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자.’

용사들을 정화할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리커버리 약물을 쭈욱 들이켰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몸이 금세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아다르가 문을 열고 방으로 쳐들어왔다. 나는 기겁해서 내 몸을 확인했다. 다행히 편안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과연 섬세한 첼러스다. 옷 입혀주는 걸 잊지 않은 모양이다.

“너 얼굴이 왜 그러냐?”

아다르가 상당히 묘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괜히 찔려서 얼굴을 더듬었다.

“내 얼굴이 왜?”

리커버리 약물의 효과로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나갔다. 아다르가 창끝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날 위아래로 훑었다. 긴장한 채 그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뭔가 이상한데. 해쓱해 보이잖아.”

“네 착각이겠지.”

“그리고 피곤해 보여.”

“멀쩡한 거 안 보여?”

아다르는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면 왜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은 거야?”

문득 계속 변명하기도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를 위해 한 일이지 않은가. 나는 당당하게 시인했다.

“첼러스랑 잤어.”

“첼러스가 기어코 정신을 놓고 널 덮쳤다고?”

‘첼러스랑 잤어’가, ‘첼러스가 날 덮쳤어’로 변하는 기적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기겁했다. 아다르는 암살자다. 눈 깜짝할 새에 첼러스를 죽일 것 같았다. 나는 두 손을 떨어져라 흔들며 부인했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콩콩 뛰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자자고 했다고!”

“그런 위험한 짓을 왜 했어!”

아다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나 곧 중간에 멈춰 섰다. 그가 분한 듯 어금니를 악문 채 씩씩거렸다. 아다르가 나를 이리저리 살피면서 말했다.

“첼러스가 거칠게 하지 않았어?”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우리 모두를 위해 함구했다.

“왜 그런 거야?”

“마나를 모아야 하는데, 혼자선 힘들 것 같아서. 첼러스가 근처에 있으면 좀 나을 거 아니야.”

“하는 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첼러스가 날 계속 안고 있어야 하잖아. 충분히 풀어두면 날 안고 있을 때 덜 고통스러울 거 아니야.”

아다르가 불만스럽게 입매를 어그러트렸다. 나는 다음에 이어질 말을 예상해보았다. 왜 자기가 아니라 첼러스를 선택했냐고 말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다르의 고개가 첼러스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진정됐냐? 참을 수 있겠어?”

‘어라?’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다르를 바라보았다.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다르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뭐야? 네가 웬일로 그냥 물러서?”

방문을 연 아다르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상처받았나?’

홀린 사람처럼 자리에 일어섰다가 비틀거렸다. 리커버리 약물을 먹었는데도 기력이 달린 건지, 아니면 놀라서 힘이 빠진 건지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우뚱 넘어지려 하자, 첼러스가 황급히 나를 받쳐주었다.

아다르가 기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다르가 상황을 금세 알아채곤 첼러스를 닦달했다.

“적당히 좀 하지, 카카나를 저 꼴로 만들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첼러스가 담담하게 받아쳤다. 그 한 마디에 아다르는 말문이 막혀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기죽은 음성으로 물었다.

“아픈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약 먹었어.”

‘그거 하느라 약까지 먹었단 소릴 해야 하나.’

나는 푹 익은 얼굴에 손 부채질을 했다. 그러다 괜히 성을 냈다.

“너 때문에 넘어질 뻔한 거야. 네가 평소랑 다르게 그냥 물러서니까.”

아다르가 동그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피했으나 이유는 들어야겠어서 꼿꼿하게 목을 세우고 기다렸다. 아다르가 달아오른 얼굴로 우물거렸다.

“나는…… 못…… 같으니까…….”

“뭐? 안 들려.”

“나는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을 거라고.”

아다르가 괜히 앞머리를 정돈하는 척하면서 몸을 돌렸다.

“첼러스나 가능하지.”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무척 수치스러운 기색이었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다르가 도망치듯이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어리벙벙한 눈으로 아다르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거실로 내려와 보니, 부엌엔 맛있는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이후부터 나의 일정은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이 똑같아졌다. 오전엔 첼러스에게 안겨서 마나를 흡수하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오후엔 아침에 모은 마나로 약물을 개발했다.

약물을 개발해야겠다고 결정하기 전에 다른 시도도 해봤다. 이를테면 내 마나를 첼러스의 몸에 주입하는 것이 그 방법 중 하나였다.

천족의 마나와 흡사하니까 어떤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주입하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첼러스가 예상하기론, 자기에게 기생 중인 마족이 흡수한 것 같다고 했다. 마나를 바로 주입하는 방법은 바로 기각되었다.

폭시의 독을 잠깐 연구하기도 했다. 폭시의 독은 신수의 마나가 가진 속성 중 하나인 걸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효력을 유지하는 방법까지 알아내기엔 마나의 문제라 내 능력 밖이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약물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목표는 사제가 내릴 수 있는 축복 중 하나인 ‘갓블레싱’을 약물로 만드는 것이었다. 온갖 부정한 것을 씻어내고 정화하는 신성마법이었다.

이 마법을 찾기까지 내 서재의 온갖 서적을 뒤져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양한 책을 사놓을 걸 그랬다고 후회를 많이 했다.

‘사제의 신성마나는 치유의 힘이 있어. 그리고 내 마나에도 똑같이 치유의 힘이 있지.’

사제의 마나와 내 마나는 다르다. 그러나 치유의 힘이 신성마법의 본질이라면 희망이 있었다.

만들 약물의 이름은 ‘홀리니스’라고 지었다.

‘어떻게 해야 만들 수 있을까? 부정한 것을 씻어내려면 그에 걸맞은 약재가 있어야 할 텐데.’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보관마법이 걸린 약재 창고를 탈탈 털어서 연구실에 콕 틀어박혔다.

***

홀리니스를 성공적으로 개발하기까진 꼬박 두 달이 걸렸다.

겨울의 초입이 지나자 날씨는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목도리를 둘둘 감고 종아리까지 오는 부츠를 신었다. 이번 겨울은 얼마나 추워질 작정인지 벌써 칼바람에 귀가 떨어져 나가려 했다.

새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용사들과 손을 잡고 장소를 이동했다. 하필이면 회담 장소가 북쪽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건물 안으로 텔레포트한 탓에 공기가 퍽 아늑하다는 점이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반크는 여전했다.

나는 올리넨 할머니와 노레스를 반쯤 죽은 눈으로 응시하다가, 걸음을 옮겨 이블라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꺼져가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단언컨대, 제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여러분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예요.”

모두의 관심이 이쪽으로 쏠렸다.

“그러고 보니, 여태 왜 회담에 오지 않은 거죠?”

노레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마족이 용사에게 깃들어서 큰일이었거든요.”

“뭐?”

이블라가 내 어깨를 붙잡아 홱 돌려세웠다.

“너 괜찮아?”

“마족이 깃들었던 건 용사들이었다니까?”

물론 내게도 마족이 깃들었지만, 쏙 빼놓고 얘기했다. 귀찮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홀리니스 먹고 괜찮아졌으니, 말 안 해도 되겠지.’

눈을 옆으로 데구르르 굴리는데, 내 심드렁한 표정이 답답한지 이블라가 악을 썼다.

“그래서 너한테 괜찮냐고 한 거잖아! 저 망할 용사들이 제정신이 아니었으면, 가장 위험한 건 너라고!”

‘용사가 다 듣고 있어, 이블라.’

그러나 이블라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돌연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이, 이것저것 고려해서 말이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만했다.

마족은 가장 음습한 욕망과, 잊고 싶은 기억과, 추악한 본성을 건드리며 사람을 뒤흔들었다. 용사들이 내게 얼마나 절절매는지 잘 아는 이블라는 걱정스러운 나머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보는 것처럼 난 멀쩡하니까, 진정해.”

“그럼 지금도 마족이……?”

노레스가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요. 약물을 만들어서 쫓아냈거든요.”

“약물로요……?”

노레스가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원하던 질문이었다. 나는 홀리니스에 들어간 약재를 주욱 읊었다.

“신수의 눈물, 인어의 비늘, 70제곱미터의 땅에서 제일 먼저 싹을 틔운 봄꽃의 새순…….”

“저, 전부 신성하게 여겨지는 것들뿐이네요.”

“그래요. 아주 귀한 것들이에요.”

“죽음의 숲에 계속 계셨던 것이 아닙니까?”

반크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 약재들을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귀한 약재들은 당연히 제 창고에 하나쯤은 있죠.”

나는 무슨 그런 허술한 질문을 하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제 보물창고엔 약재가 많아요. 마도구로 철저하게 보존 중이고요.”

“그렇습니까.”

반크가 약간 질린 투로 대꾸했다.

“물론 희귀해서 없는 것도 있었어요. 그런 건 비브로스 교수님이랑 아르모어가 대신 구해줬죠.”

“그들이 죽음의 숲을 방문했단 말입니까?”

“저희가 나갈 순 없잖아요.”

“하지만 카카나 씨가 동행하지 않으면 위험한 것 아니었습니까?”

죽음의 숲의 악명은 타국에도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치명적인 독초만 피하면 저택에서 제가 치료해주면 되니까요.”

“용사들이 독초를 잘 아는 모양입니다.”

“아뇨. 그건 아닌데, 독초를 피하는 요령은 알아요. 그렇지?”

나는 용사들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내가 몇 년을 걸쳐 죽음의 숲에 만들어 놓은 길, 우량 세이피지아를 말하는 걸 알고 용사들이 키들거리며 웃었다.

물론 1년간 숲을 비웠던 탓에 곤란한 점도 있었다. 우량 세이피지아는 번식할 수 없는 데다 내가 관리도 해주지 않아서 대부분 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부분은 텔레파시로 해결을 보았다.

“만들기가 어찌나 까다롭던지.”

나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어찌어찌 성수 비슷한 걸 만들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뭐.”

“성수보다 성스러운 것 같습니다만…….”

반크가 흐릿한 어조로 웅얼거렸다.

“나중에 다시 마족이 씌기라도 하면 어떡해? 이번에는 곱게 넘어갔지만, 다음엔 정말 큰일 날지도 몰라.”

이블라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더 이상 마족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아르모어가 막아주고 있어.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근데, 오늘은 황녀의 모습이 안 보이네?”

나는 애매하게 찡그린 얼굴을 했다.

이 심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다다나를 만나지 못해 싫으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다다나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홍차를 들이켜던 올리넨이 어깨를 으쓱였다.

“요즘 황실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요. 평소라면 자잘한 사건이 한두 개쯤 터질 시기인데…….”

“오지 못한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반크가 물었다. 올리넨이 주름이 곱게 잡힌 눈가를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 있다는 거지요. 없는 사람 얘기를 해도 바뀌는 건 없으니, 모아놓은 정보를 듣도록 할까요?”

내뱉는 말이 퍽 사무적이었다. 반크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죽음의 숲에서 썩어있는 동안 용병왕과 새벽, 그리고 마탑주는 많은 일을 해놓았다. 마족이 깃든 것으로 의심되는 귀족, 실험이 진행 중인 신전 네 곳을 알아낸 것이다.

차원균열지대에 묻힌 석판을 부수는 건 성적이 지지부진했지만, 그건 제국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나마 여유가 있었다.

나는 넓게 펼쳐진 제국의 지도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붉은색 우드볼이 달린 압핀으로 몇몇 지역이 점 찍혀 있었다. 신전이 위치한 곳이었다.

“실험이 진행 중인 곳은 총 네 곳입니다.”

반크가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집중해서 그의 말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점점 복잡해지자 머릿속이 꼬였다. 신전은 네 군데나 되는데, 그 네 신전에서 실험이 진행 중인 곳은 또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휠라메스 신전은 성당의 제단이 놓이는 내진 뒤편인 후진에 숨은 계단이 있었고, 그곳을 통해 내려가는 지하에 실험실이 있었다.

사르메 신전은 제실이 10개나 되었는데, 그중 대주교 묘비가 있는 제실 벽 뒤에 실험실이 숨겨져 있었다.

라포네사 신전은 또 어떤가. 이곳은 신랑으로 이어지는 남쪽 현관의 두 번째 기둥 뒤편에 쪽문이 있었다. 그 쪽문을 지나 숨겨진 공간으로 한참 들어가야 실험실이었다.

나는 골치가 아파서 머리를 짚었다.

“네 군데를 동시에 치는 건 무리 같은데요?”

“맞습니다.”

반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하루에 전부 해결을 보긴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망칠 시간을 주는 꼴이니, 마족이 실험을 할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납니다.”

“그러면 여기부터 치는 게 좋겠네.”

아다르가 황도와 가까운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휠라메스 신전은 제국에서 제일 큰 신전이야. 성직자들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지.”

“이단자로 몰아서 사람 잡기엔 안성맞춤이겠네.”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비꼬았다.

“여기 보여?”

아다르가 신전의 뒤편을 손톱으로 콕 찍었다.

“전쟁고아랑 가난뱅이들이 몸을 웅크리고 붙어 사는 빈민촌이야. 휠라메스는 원래 빈민구제의 목적으로 지은 신전이었어. 지금이야 어떻게 변했을지는 불 보듯 뻔하지만.”

“저도 휠라메스가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반크가 동의했다.

“신도로 잠입한 조직원의 말을 빌리면 실험 규모가 가장 큰 곳이라고 합니다.”

휠라메스 신전 다음 타자도 아다르의 주도하에 순조롭게 결정되었다. 그는 지도를 보고 가장 적당한 장소를 선정하는 데 제법 일가견이 있었다. 오랫동안 기사단에 몸담았던 첼러스 또한 말을 섞으며 그럴싸한 계획을 세워나갔다.

계획은 한 달 후, 성직자들이 거리로 나와 의식을 올리는 헬리스의 안식일에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다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잠깐 만나러 왔기에, 이전과 달리 올리넨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텔레포트로 마탑에 돌아가자마자 노레스와 이블라도 차례로 사라졌다.

“아아, 그동안 망할 마족이랑 일 때문에 바빠서 네가 너무 부족했어.”

아다르가 칭얼거리며 내 목에 매달리더니 이마에 뽀뽀했다. 옆에 앉아있던 반크의 눈이 알사탕만 하게 커졌다. 나는 질색하며 아다르의 뺨을 밀어냈다. 사정없이 밀어 재꼈더니 아다르의 얼굴이 바닥에 던져진 푸딩처럼 짜부라졌다.

“그렇게 밀지 마, 카카나. 섭섭하게.”

“미쳤나 봐!”

그가 내 붉어진 눈가와 뺨에 연속으로 입을 맞추었다.

“반크가 쳐다보고 있어서 부끄러운 거지? 귀여워 죽겠네.”

“좋은 말로 할 때 저리 비켜라.”

“좋은 말로 한 적도 없잖아?”

아다르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나는 팔뚝까지 시뻘게져서 고개를 숙였다. 부하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체면을 차리게 되지 않던가. 근데 이 새끼는 어떻게 돼먹은 정신구조인지, 되레 똑똑히 보라는 듯이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할릭!”

나는 결국 팔을 뻗으며 발버둥 쳤다. 할릭이 파리지옥처럼 허리를 감싸고 놔줄 생각이 없는 아다르의 손아귀에서 날 끄집어냈다.

굵직한 손이 어깨를 감싸며 앞으로 나섰다. 튼튼한 보호막이 생긴 기분이다.

아다르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을 반크가 충격받은 얼굴로 지켜봤다.

‘방금 마스터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졌겠지.’

나는 별 영양가 없는 걱정을 사서 하며 흐르는 진땀을 닦아냈다.

“얘가 오늘 낮술이라도 했나 봐요.”

변명해보지만, 반크는 이미 귀신이라도 본 낯이 되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워졌다.

“그럼 우리도 갈까요?”

스노아가 텔레포트를 하기 직전에 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안 돼. 나 반크랑 할 말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렇죠, 반크?”

“예?”

반크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따귀라도 올려붙여야 하나.’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이해하기 쉽도록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저한테 할 말이 있을 거 아니에요. 설마 신전에 관한 정보만 알아본 건 아니겠죠? 전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아.”

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멀리 외출했던 넋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물론, 신전만 알아본 건 아니지요. 자리를 옮길까요?”

“좋아요.”

나는 용사들에게 잠시 기다리란 뜻으로 좌석을 턱짓했다. 므리나 이소리하에 관한 건 직접 부딪치겠다고 선언했으니, 용사들도 내가 반크와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대충은 알 것이다.

우리는 저번에 얘기를 나누었던 객실로 들어왔다. 반크가 똑같이 의자를 빼 앉도록 해주었다. 꼭 집사가 주인을 섬기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의 행동에 일일이 간섭하면 끝도 없을 듯해서 나는 그냥 반크의 태도에 익숙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므리나 이소리하에 관한 정보는 얻기 어렵던가요?”

나는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렇게 어렵진 않았습니다. 그녀는 암살자를 자주 고용하는 편이거든요.”

나는 얼굴을 굳혔다.

반크가 내 기색을 신중하게 살피기에 뒤늦게 표정 관리를 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예리한 시선을 회피하며 다른 질문을 했다.

“므리나는 황실치료사라고 알고 있어요. 황실에서 입지가 높은 편인가요?”

그럴 거라고 반쯤 확신하면서 물은 말이었다. 그녀는 권력을 좇았다.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분명히 권력이 강한 자일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의외의 말이 떨어졌다.

“아니요. 오히려 명성이 과거에 비해 떨어졌습니다.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거든요.”

“입지가 별로라고요?”

“평범합니다.”

나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질문을 퍼부었다.

“황실에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요? 그녀를 총애하는 귀족이 없나요?”

“이상할 정도로 깨끗합니다. 가깝게 지내는 인물도 없어서, 황실에서는 그녀를 꽤 미스터리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더군요.”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습관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므리나 이소리하가 암살자를 고용한다고 했죠? 혹시 그 이유도 알아내셨나요?”

“최근 의뢰를 한 흔적이 있더군요. 웬 연금술사인데…….”

‘연금술사?’

그가 공간마법이 걸린 가방에서 둘둘 말린 양피지를 꺼냈다. 특수한 끈으로 봉인된 양피지가 반크의 손에서 무력하게 풀리더니, 초상화와 글줄이 드러났다. 나는 그림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십니까?”

“이, 이 사람을 죽이라는 의뢰였나요?”

“맞습니다.”

반크의 눈이 신중하게 내 안색을 살폈다.

“혹시 아시는 분입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초상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우선 자리에 앉았다. 진정해야 했다.

‘므리나 이소리하를 상대하는 거야. 벌써 놀라면 안 돼.’

나는 침착함을 가장한 채 물었다.

“이유는 알아내셨나요?”

“물론입니다.”

반크가 또 다른 양피지를 풀어 내 앞에 펼쳐놓았다. 그것도 초상화였다.

나는 흡, 숨을 멈추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펼쳐진 두 점의 그림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눈만 깜박였다. 사고가 정지해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에 아리마 그라간이라는 치료사를 죽인 적이 있습니다.”

반크가 입을 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가 말한 단어의 뜻을 한참 곱씹고 나서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실감이 되지 않았다. 내 바짝 마른 입술에서 꺼질 듯이 희미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죽였다고요……?”

반크가 날 빤히 바라보다 뜸을 들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얼굴을 감추듯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피곤해서 그래요. 집중이 잘 안 되네요. 미안해요.”

“…….”

“그래서, 그 여자가 죽였다는 거죠? 아리마 그라간이라는…… 치료사를.”

“네.”

“암살한 이유는 뭐였죠?”

스스로 놀랄 만큼 차분한 질문이 나왔다. 나는 이게 지나친 충격으로 인한 건지 아니면 허탈함 때문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발밑이 꺼진 것처럼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솟아난 줄도 모르고 마른세수를 했다. 얼굴이 땀에 젖어 차끈했다.

“아리마 그라간과 므리나 이소리하는 공동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으나, 그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잠시 침묵.

“그렇군요. 계속 말해봐요.”

반크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얼굴을 살피던 반크가 속에서 갈등이 이는 듯 입을 다물었다. 눈을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망설이지 말고 전부 털어놓으라는 듯이.

반크가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설명을 이었다.

“아리마 그라간의 죽음은 사고사로 위장되었지만, 그의 딸은 의심을 품었습니다. 꾸준히 아버지의 죽음을 캐왔죠.”

“…….”

“그게 결국 므리나 이소리하의 눈에 띈 겁니다.”

나는 비뚜름하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버지를 죽이고, 이번엔 귀찮게 하는 그의 딸까지 죽이겠다 이거로군요.”

나는 초상화를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딸의 성이 다르네요.”

“딸이 어머니의 성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얼굴이 익숙했던 거구나.”

자조적인 웃음이 터졌다.

반크가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린 채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는 척하며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오늘은 이걸로 됐어요. 생각할 것이 있으니, 혼자 있게 해주겠어요?”

반크는 내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앉아있었지만, 내가 고개를 들지 않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인사치레를 하지 않았다. 반크가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두 장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아리마 그라간과 아그리마 트리시가 놀라울 만큼 비슷한 얼굴로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아그리마 트리시.”

비브로스 샥스의 연금술사 친구.

내게 약물에 마나석을 녹여내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

그리고 아리마 그라간의 딸.

스승님의…… 딸.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싶었는데, 이거였는가. 결코 이런 식으로 알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래. 그렇지. 일이 내 뜻대로 흘러갈 리가 없지.”

입에서 비식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끈끈한 눈물이 밴 독기 서린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금발의 여인이 앉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지, 므리나?”

하얗게 질리도록 힘이 들어가 있던 주먹이 초상화를 발견하자 맥없이 풀렸다. 나는 그 초상화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아리마 그라간이 날 바라보며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입술을 비집고 버석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스승님.”

목울대가 우는 것처럼 심하게 떨렸다.

“돌아가셨어요? 그 여자 손에?”

물어보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은 채 음산한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공동연구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 문제가 뭐였는지 짜증 날 정도로 쉽게 예상이 되었다. 들켜버린 거다. 므리나 이소리하에게, 내 탈출을 도왔다는 사실을 들킨 거다.

벌써 십 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나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겠다고 했잖아요…….”

내가 므리나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 므리나는 내가 개발한 약을 갈취해 상당히 유명해졌다. 함께 연구하고 싶다는 약제사가 줄을 이었다.

아리마 그라간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가 올 무렵의 므리나가 얼마나 들떠있었는지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

“카카나. 이번 기회가 몹시 중요하다는 건 너도 알겠지?”

므리나가 잔뜩 고조된 어조로 말했다. 어리고 힘이 없었던 나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나는 이 연구를 성공리에 마치고 싶어. 알아듣겠니?”

내 상태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던 므리나의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나는 깨끗하게 씻겼다. 더러운 걸레를 빨아도 이보단 상냥하겠다 싶은 손길이 이어졌다. 멍이 든 피부를 벗겨내듯이 문지르고, 핏자국이 엉겨 붙어 있던 옷은 찢어 없애버렸다.

나는 겁에 질려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구나.”

그녀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보이지 않는 곳을 때리고 학대했다. 그 값을 톡톡히 한다며 웃은 므리나가 자못 상냥한 어조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리마 그라간이 하는 걸 지켜보고 밤마다 내게 보고해. 실수는 용서하지 않아.”

당시엔 공포에 질려서 왜 그런 일을 시키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알았다. 므리나 이소리하는 그와 함께 공동연구할 실력이 없었던 거다.

그녀는 지금까지 내 힘으로 명성을 쌓아 올렸듯이, 이번 공동연구도 내 눈과 손으로 이뤄내고 싶어 했다. 공동연구에 성공하면 작위를 받을 수도 있단 생각에 눈이 뒤집혀서. 그건 내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아리마 그라간은 므리나의 저택을 방문하자마자 내게 관심을 보였다.

“저 아이는 누구요?”

“제 노예예요. 제법 값이 비쌌던 아이랍니다.”

노예라고 했을 때 일그러지던 아리마의 얼굴. 내 목에 걸린 수상한 마도구 근처를 오래 배회하던 상냥한 시선.

“저 마도구는 무엇이오?”

“도망가지 못하도록 채워놓은 목줄이에요. 관심이 있으신가요? 원하신다면…….”

“아니, 아니오. 괜찮소.”

나는 한눈에 알아봤다. 죽기 직전의 동물이 저를 살릴 은인을 본능적으로 깨닫듯이. 경계심으로 털을 잔뜩 세우면서도 그의 주위를 배회하고 어떤 사람인지 끈질기게 관찰했다.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몹시 말랐구나.”

노예에게 말을 거는 귀족.

“양 수인족인 것이냐.”

수인족을 짐승이라 생각하지 않는 별종.

“종족에 대해 무지하여 벌어지는 일이란다. 수인족이 이런 취급을 받아선 안 되는데…….”

다신 오지 않을 기회라는 걸,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아주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처음엔 바보 같은 인간이라고 여겼다. 제국에서 저런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하루하루가 지옥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본래 평민이었으나 능력으로 작위를 받은 자였으며, ‘깨어있는’ 학자였다.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은 아저씨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상관없어.’

하지만 무시했다. 다른 사람을 살필 여유 따윈 없었다.

짜악―!

나는 등을 할퀴는 유리 묻힌 채찍을 견뎌내며 헐떡였다.

“잘 들어, 카카나. 그 앙큼한 머리로 수상한 짓을 꾸몄다간, 네 친구와 동생을 죽일 거야. 고통스럽게.”

므리나는 이런 식으로 협박하면 내가 시도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고, 친구와 동생 일이라면 죽는 시늉도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기회에 매달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네가 그 약물을 어떻게 만든 것이냐. 혹, 제조법을 알고 있느냐?”

나는 아리마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목에 걸린 마도구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방법은 많았다.

므리나 이소리하가 기억은 할까? 당신의 약물이 전부 내 손에서 탄생했다는 걸.

“이것도 만들어 보아라.”

“어떻게 이런 일이……. 네가 이 제조법까지 어떻게 아는 것이냐.”

“이건, 설마 내가 하는 걸 보고 네가 개발해낸 것이냐?”

“혹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는 않으냐?”

“네 피의 성분이 이상하구나. 왜 이렇게 독이 많은 것이냐.”

“이 저택의 지도구나. 이런 지하실이 있다고 들어본 적은 없는데…….”

나는 다양한 방법으로 스승님에게 단서를 던졌다. 바보 같을 정도로 속이 무른 스승님은 내 간절한 신호를 차마 무시하지 못했다.

“네 재능은 신이 내린 권능이로구나. 이대로 수인족 노예로 있기엔 아까워. 참으로 아깝구나.”

므리나는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드높아진 유명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자리를 잠깐 비우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었다.

아리마는 금세 수상한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내려 했다.

“너를 이대로 둘 순 없다.”

그는 현명하고 따스했으며, 한번 마음먹은 일엔 놀라운 결단력을 보였다.

“므리나, 나는 계속 이곳에서 연구를 하고 싶소.”

그는 므리나를 설득했다.

“나도 많은 돈을 긁어모았지만, 감히 그대의 저택에 비할 바가 아니오.”

“그라간. 그렇게 내 기분 띄워 줄 필요 없어요.”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오.”

므리나는 지금까지 특별한 문제가 없었던 탓에 방심하고 있었다. 귀족이 하잘것없는 수인족 노예를 도우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리마 그라간이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고.

“내 저택의 연구실에선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없을 거요. 명성과 비교하면 빈약한 연구실을 가지고 있다오.”

므리나 이소리하는 탐욕스럽고 세속적이어서, 특히 그런 달콤한 말에 약했다. 기어코 승낙을 얻어낸 아리마는 끝끝내 진실을 파헤쳤다. 그리고 잔인한 인체실험의 실태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비참함과 부채감, 죄책감이 목을 꽉 조여들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고 당시의 나는 희망에 차 있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스승님은 적극적으로 날 도왔다. 나는 그가 대가 없이 퍼부어주는 폭포 같은 지식들을 전신으로 빨아들였다. 스승님은 내가 마음을 연 최초의 어른이자 기댈 수 있는 안식처였다.

마지막 날.

나는 아리마가 건네준 몇몇 마도구와 므리나의 감옥 열쇠를 이용해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 결과는, 알다시피.

“젠장…….”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걱정하지 말고 도망치라고 하셨잖아요…….”

눈앞이 어지러웠다. 탈출 이후로 스승님의 이름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은 건 살아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는 없어야 할 과거여서, 그래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웅크렸다. 이대로 덩치가 점점 작아져, 세상에서 없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왜 살아있을 거라고 믿었을까.’

사실 이유를 알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길 바랐던 것이다.

아그리마 트리시의 초상화 위로 내 뜨거운 눈물이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그게 꼭 아그리마가 흘린 눈물이 번진 것처럼 보였다.

***

“도통 카카나의 속내를 모르겠어.”

아다르가 마른세수를 하며 토로했다.

카카나는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이상한 녀석이었다. 그녀는 대부분 속을 알기 쉬웠다. 그런데 가끔 거짓말처럼 수수께끼로 변할 때가 있었다. 요 며칠 사이 특히 그랬다.

“뭐가 문제지?”

아다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 끝엔 싸늘하게 식은 죽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끼니를 걸렀다. 비장의 무기인, 입맛을 돋우는 아다르표 음료수까지 내었는데 실패했다.

“갑자기 저럴 이유가 없는데…….”

생각을 곱씹는 듯, 아다르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의 새까만 눈망울이 카카나의 방이 있는 곳으로 스르르 굴러갔다. 그러자 할릭이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아다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안 치워?”

“그렇게 음험하게 쳐다보면 방에서 나오다가도 도망쳐.”

아다르가 반박하려는 듯이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음험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맞았기 때문이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얼굴을 찡그렸다. 할릭이 경고의 의미로 어깨를 툭툭 쳤다. 할릭뿐만 아니라, 아다르를 감시하는 인원이 넷이나 되었다. 방에 쳐들어가서 울고 있는 카카나의 눈물부터 핥을 생각이었던 아다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성격대로 못 하니까 스트레스 받네.”

“궁지로 몰아서 이것저것 캐낼 생각이었냐?”

어떻게 알았냐는 듯 아다르의 눈이 동그래졌다. 할릭이 혀를 찼다.

“너 같은 사디스트까지 상대해주는 카카나가 용하다.”

“시끄러워.”

“기운을 쏙 빠지게 만들면 술술 얘기하지 않을까요?”

스노아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자 나머지 용사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스노아는 자기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이 선한 눈을 아리땁게 휘며 웃고 있었다.

“정신없을 때 물으면 속을 털어놓기 마련이거든요.”

“어떻게 기운을 빼놓으려고?”

할릭이 질린 얼굴로 물었다.

“효율적인 방법이 있잖아요? 정신도 없고, 기분도 좋아지고, 기운까지 빠지는 방법이요.”

스노아가 청초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만져주면 카카나가 이성을 놓는지 잘 알거든요.”

할릭과 아다르의 몸에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아다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흥분해서 소리쳤다.

“야, 솔직히 내가 저 새끼보단 낫다!”

할릭이 입매를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분하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첼러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갑작스럽습니다. 저는 카카나의 기운을 북돋아 줄 목표가 새로 생겼다고 여겼습니다만…….”

“그건 무슨 소리죠?”

스노아가 물었다. 첼러스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카카나는 홀리니스 약물을 만든 후에도 제게 도움을 청해서 마나 수련을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약물을 더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닌가요?”

“약물을 만드는 데 충분한 마나보다, 더 큰 마나를 모으고 싶다고 했습니다.”

첼러스가 망설이는 사람처럼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른 목표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스노아의 눈이 커졌다.

“그건…….”

“수명을 늘리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군.”

아르모어가 스노아를 대신해서 말을 끝맺었다. 용사들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침묵했다.

할릭이 소파에 등을 묻으며 돌연 뇌까렸다.

“나는 카카나가 왜 계속 입을 닫고 있나 했는데, 그것 때문이었구나.”

그의 선명한 주황색 눈망울이 사막의 태양처럼 일렁거리며 타올랐다.

“마음은 진작 열었잖아.”

할릭이 담담하게 사실을 짚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용사들이 입을 다문 채 눈을 깜박였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눈들이었다.

“자기는 일찍 죽어버리니까?”

잠시간의 침묵 끝에, 아다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서 노력하고 있었던 거야?”

시간에 붙잡혀 끌려가는 관계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가.

그녀의 수명이 길어지면, 혹시라도 초월자가 된다면, 그녀는 확실하게 용사들을 쟁취할 수 있었다.

역시 카카나는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묘한 사람이다. 약하면서도 강하고,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듯하면서도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었다. 위로 말려 올라가는 입매를 주체하지 못해, 아다르가 숨기듯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가 얼굴에 그림자가 질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탄식했다.

“아, 큰일이네. 지금 당장 카카나를 안고 싶어.”

“진정해라.”

할릭이 견제하며 그의 팔뚝을 그러쥐었다. 아다르는 그가 잡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도 지금 카카나를 찾아갈 생각은 아니었다. 그랬다간 엉망으로 울려버릴 것 같았다.

‘좋아서 우는 얼굴은 최고지만, 날 더 피하면 곤란하니까.’

아다르가 음험한 생각을 하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다른 용사들의 머릿속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그저 티 내는 사람이 아다르 하나일 뿐이었다.

“으, 너무 행복해.”

아다르가 몸부림치며 혼자 중얼거렸다. 기쁜 건 자기도 마찬가지인 스노아가 큼큼,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첼러스의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적극적이고 기운찼던 카카나가 이상할 정도로 갑자기 변했다는 게 요점이죠?”

“그렇습니다.”

목이 타서 테이블 위의 찬물을 들이켜던 할릭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랑 비슷하지 않아? 동생을 처음 만났을 때도 저랬잖아. 집에 틀어박혀서 코빼기도 안 보이고.”

“정말이네요.”

스노아가 턱을 문질렀다.

“카카나가 충격적인 이야기라도 들은 걸까요? 그런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반크뿐이네.”

아다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자, 아다르가 현관문을 엄지로 가리켰다.

“우선 반크부터 족치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홀로 평화롭게 집무 중이던 반크는 갑자기 쳐들어온 네 용사에게 둘러싸여 영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무서운 경험을 해야 했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사색이 되어 매달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반크는 지옥에서 갓 기어 올라온 아다르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보고 망했음을 직감했다. 아다르의 협박은 정보 길드 마스터이자 뛰어난 암살자인 반크의 오금을 속수무책으로 저리게 만들었다.

가여운 하룻강아지 반크는 결국 용사들에게 탈탈 털리고 말았다.

***

나는 일주일 후 기운을 차렸다.

스승님이 므리나에게 당했다면, 도망친 친구들도 붙잡혔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자 이대로 주저앉아있을 수 없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스승님의 하나뿐인 딸인 아그리마도 지켜야 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속죄의 길이었다.

나는 억지로 일어나 몸을 움직였고, 바쁘게 지내니 기분이 차차 나아졌다. 무슨 이유에선지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용사들의 도움도 크게 한몫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아그리마를 만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나는 헬리스의 안식일에 시행할 계획이 마무리되면 아그리마를 만나러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반크에게 그때까지 그녀를 보호해달라는 추가 의뢰를 부탁했다.

그는 정보 길드의 마스터였으나, 그렇기에 어둠의 방면에서 뛰어난 인재를 두루 알고 있었다. 최고의 암살자와 호위무사들이 아그리마에게 붙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반크. 얼굴이 왜 그래요? 전보다 훨씬 말랐어요.”

정보를 받을 때마다 매번 반크를 찾아갈 수 없어서, 나는 그에게 전신용 수정구슬을 받은 참이었다. 구슬 위로 신기루처럼 떠오른 반크의 얼굴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그는 어째서인지 나를 두렵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업무가 바빠서 그렇습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약을 보내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보다는 카카나 씨의 몸부터 챙기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네?”

반크가 누가 봐도 억지웃음인 미소를 지었다.

「제발, 아프지 말고, 건강하고, 잘 웃고, 몸을 챙기십시오. 그럼 이만.」

“예? 잠깐만요. 반크!”

전신이 끊겼다. 나는 까맣게 빛이 꺼진 수정구슬을 보며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지?’

그러다 곧 어깨를 으쓱이며 구슬을 주머니에 넣었다. 애초에 친한 사람 외에는 관심이 없는 성격이었다. 할 일이 너무 많기도 했다.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해결해야 했다.

스승님을 생각하면 아직 속이 울렁거렸지만,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적어도 지금은 약해지면 안 돼. 난 그럴 자격도 없어.’

아그리마를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조만간 반크가 므리나에 대한 정보를 물어다 줄 거야.’

당장은 기다리는 것만이 약이다. 뒷일을 해결하려면 곧 있을 실험실 기습 작전부터 성공해야 했다.

나는 억지로 휠라메스 신전의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복도를 깃펜으로 확인하며 살피기 시작했다.

‘신전의 서재에는 천족, 마족과 관련된 고서가 많다고 했어.’

그곳에서 내 마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천족과 얽힌 건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러면 마족을 상대하기에 앞서 그 정체를 가려내는 게 좋을 거다.

이제 막 계획을 적어보려는데, 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카카나! 마나 수련 시간이야!”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다르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문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눈썹을 구기고 그를 노려보았다. 최근 용사들이 마나 수련을 도와주겠다며 달라붙는데, 통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나야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나는 미심쩍은 기분을 내려놓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일이 많았지만 마나 수련은 꼭 해야 했다.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삶 대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끝이 다가오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순 없으니까.’

그리고 용사들을 울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나는 두꺼운 로브를 걸치고 아다르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현관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그곳으로 겨울 하늘의 차가운 빛무리가 새하얗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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