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재회 (30/43)

Chapter 2. 재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용사들은 올리넨과 노레스, 그리고 반크의 도움을 받아 차원균열지대 탐색에 나섰다. 아직 계약이 되지 않은 석판을 찾아 부수기 위함이었다.

제국의 탐색대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그곳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수인족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석판 두어 개를 찾아 부수고 돌아온 용사들은 간혹 휘라와 틸로가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을 전해주곤 했다.

그리고 오늘 밤, 나는 두 번째 악몽을 꿨다. 전에 꾸었던 악몽보다 심하진 않았다. 그래서 꿈에서 깨자마자 정신을 차렸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역시 므리나 이소리하에 관한 꿈이었을까? 아니면 친구들?’

곰곰이 생각하자 어렴풋하게 무언가가 떠올랐다. 모래바닥을 뒹구는 용사들의 시체를 본 것 같았다.

“하아…….”

나는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쉬었다.

‘그때 이후로 계속 악몽을 꾸네.’

곤란했다.

이제 겨우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나 했는데, 새로운 그림자가 생기고 말았다. 그림자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내게 깃든 마족을 바드가 쫓아냈었지.’

사실 그때 일이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꿈을 꾸고 깨어나면 그렇듯이, 흐리멍덩하게 두려운 무언가가 떠오를 뿐이었다.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떠올리려 하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옜다.

이만큼 떠올릴 수 있는 것도 악몽의 균열이라고 할 수 있는 바드의 존재 덕분이었다.

‘그가 이것저것 힌트가 될 만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으니 소용없었다.

나는 생각하길 관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을이 깊어지자 날씨가 꽤 쌀쌀해졌다. 품이 넓은 아이보리색 카디건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몸에 달라붙는 기분 나쁜 땀을 바람에 날려버리고, 사그락거리는 낙엽을 밟다 돌아오고 싶었다.

잠이 깨지 않아 몽롱한 정신으로 움직였더니 다리가 습관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첼러스의 방 문 앞을 지나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 데이트다운 데이트도 못 했네.’

기회를 준다고 정보 길드까지 함께 갔는데, 낭만적인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 설사 그런 상황이 생겼더라도 연인다운 스킨십을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아다르가 눈에 불을 켜고 우릴 지켜봤기 때문이다.

불만을 토로하는 법이 없는 첼러스가 처음으로 고백한 서운함이었기에 특히 신경이 쓰였다. 첼러스를 대하듯, 그의 방문을 손바닥으로 슥 쓸어보던 나는 문득 이상한 소리를 듣고 귀를 기울였다.

“윽…….”

신음 소리였다. 문을 열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이 정도 기척이면 보통 첼러스가 알아서 문을 열어주는데.’

하지만 반응이 없다. 뭘 하는지 안에서 괴로운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나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는 대신 똑똑, 두드렸다. 노크 소리가 울리자마자 신음이 멎었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문에 이마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입을 열었다.

“첼러스? 나야. 깨워서 미안. 괴로운 소리가 들려서…….”

“……카카나.”

뜨거운 숨이 팔 할은 섞인, 낮고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디 아파? 들어가도 돼?”

“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첼러스가 침대에서 막 상체를 세우고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얼굴이 땀에 젖어서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걸음을 빨리해서 곧장 첼러스에게 걸어갔다. 손을 뻗어 이마의 열을 재자 차가운 체온이 느껴졌다. 손바닥에 엉겨 붙는 끈끈한 땀을 확인했다. 식은땀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튼을 걷어 달빛이 방 안으로 한가득 쏟아지게 만들었다. 그러자 밤하늘의 달덩이만큼이나 허옇게 질린 첼러스의 얼굴이 잘 보였다.

“아픈 곳이 있어?”

“괜찮습니다.”

첼러스가 흔들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조로 대꾸했다.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얼굴을 구기고 그를 타박했다.

“내가 아플 땐 멀쩡한 척하지 말라고 했잖아.”

“멀쩡한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몽을 꿨을 뿐입니다.”

“악몽?”

나는 얼굴을 미묘하게 구긴 채 그를 바라보았다. 첼러스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무뚝뚝하게 닦아냈다. 악몽을 꾼 사람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나와는 달리.

“종종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연속으로 꾼 적은 처음입니다만…….”

그의 백금색 속눈썹이 가련하게 떨렸다.

“아마, 차원균열지대에서 카카나가 마족에게 공격당했던 일이 충격으로 남았던 모양입니다.”

남 얘기를 하듯 덤덤했다. 묻지 않고선 참을 수가 없어서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야?”

“악몽을 꾸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달빛에 비친 호수가, 아니 첼러스의 눈망울이 시리게 울렁거리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 있자 갑자기 심장이 찡하게 아파져 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쓸었다. 종종 용사들이 손을 뻗어 내 뺨을 쓸어주듯이.

“당신은 제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카카나를 잃을 뻔했으니, 악몽을 꾸는 건 당연합니다.”

그가 뺨에 닿은 내 손을 떼어 손등에 깊이 입을 맞추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뿐입니다.”

“…….”

“카카나가 제 곁에 계속 있어 준다면 괜찮습니다.”

나는 죽는다. 곁에 계속 있어 주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잔인한 말을 하는 대신 그의 머리를 품으로 끌어와 꼭 안아주었다. 첼러스의 팔이 포옹에 응하듯 내 허리를 조였다.

‘내가 죽으면 용사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영원을 살아갈까. 아니면…….

가슴팍에 뭉개지는 그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쓸다 말고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상한 일이다. 영원은 많은 사람의 염원임에도 용사들에겐 되레 저주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라면 이런 용감한 사랑은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싹을 틔우는 감정을 뜯어내고, 매몰차게 굴었을 것이다.

‘차라리 오래갈 수 있는 걸 사랑하지.’

물건이나 마을처럼. 퀄리티미엄을 수호하는 드래곤이 그랬듯이.

나도 모르게 첼러스의 동그란 뒤통수를 쓸었다. 그는 울고 있지 않았지만, 손길은 자연히 상냥해졌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용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흐릿하게 미소를 띠고 있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눈도 같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사실 울음을 참고 있었던 게 아닐까.’

용사들에겐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빠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부인이 한 달 후에 죽는다는 선고를 받은 남편과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어떻게 나를 볼 때마다 웃을 수 있는 걸까. 나라면 울기만 했을 거다. 억지로 미소 지어도, 울음이 섞여 있어서 우스꽝스러운 표정만 지었을 것이다.

햇살을 녹여 실을 짜낸 것 같은 백금발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지금에 매달리는 걸까.”

“예?”

내 혼잣말에 첼러스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더 캐묻지 않았다.

‘긴 세월을 살다 보면 능숙해지는 건 체념뿐일지도 모르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은 일찌감치 체념하고, 다른 방식을 찾는 거다. 마음속 구멍은 다 채우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슬픈 얼굴입니다.”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첼러스가 날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나는 깊게 팬 그의 미간을 검지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런 거 아니야.”

허리에 감긴 첼러스의 두툼한 팔뚝 위로 손을 올렸다. 근육이 불거져 있어서 잘 쥐어지지 않았다. 떼어내려고 했는데 어림도 없다.

“이제 그만…….”

“조금만 더 이러고 있게 해주십시오.”

그가 답지 않게 응석을 부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몸을 맡겼다. 동그란 머리통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첼러스는 수인족이 아닌데도 내 살 냄새를 좋아했다. 피부에 닿는 그의 뾰족한 코에서 숨결이 흘러나와 간지러웠다. 첼러스가 정말 수인족처럼 내 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문득 그에겐 체취가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했다. 아르모어는 군침이 도는 우유 냄새와 닮았다고 했었다.

“나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

그가 멈칫, 몸을 굳히더니 침묵을 택했다.

“첼러스?”

“질문이 야합니다.”

첼러스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가?’

첼러스가 그렇다니까 민망해졌다. 나는 붉어진 얼굴로 살짝 허둥댔다.

“미, 미안.”

“변했습니다.”

“응?”

“예전에는 단호하게 절 밀어내셨을 겁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랬었나?”

“기대는 것도, 애정을 표현하는 것도 죄인 것처럼 삼가셨으니까요.”

“어색해서 그랬을 거야.”

첼러스의 연한 분홍빛 입술에 봄 햇살처럼 따사로운 미소가 걸렸다.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어색하진 않지.”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고작 몇 개월 만에 정이 많이 들었어.”

“그렇습니까.”

첼러스가 약초를 다루느라 거칠어진 내 손바닥을 조심스레 쓸면서 말했다.

“지금이라도 응석을 부려주셔서 다행입니다.”

응석을 부리는 건 너잖아. 그러나 그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다 되삼켜졌다.

‘생각해보니까 첼러스의 머리를 먼저 껴안은 건 나였잖아?’

그는, 아니 용사들은 내 감정변화에 민감했다.

‘내 불안을 읽어서 그런가.’

마음 한쪽의 어둠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먼저 몸을 부대껴왔을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니까. 그게 배려였을까.

‘이제야 깨닫다니.’

그건 배려가 맞다. 여태 모르고 갓난애처럼 돌보아졌을 걸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데 요즘은, 왜 이렇게 잘해주십니까?”

“내가 뭘 해줬다고?”

첼러스의 말간 호수빛 눈망울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틈을 자주 보여주고 계시잖습니까.”

목이 타는 사람처럼, 그가 윗입술을 핥았다.

“틈?”

“이렇게.”

굵직한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비집고 들어왔다. 굳은살이 박여 거칠거칠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두피를 쓸자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나는 헉, 숨을 들이켰다. 첼러스가 내 뒤통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고개가 숙여지고, 밑에 대기하고 있던 습한 동굴이 날 집어삼켰다. 약간은 차고, 촉촉한 입술이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핥는 것처럼 내 입술 위를 지분거렸다. 허리가 자꾸만 흠칫흠칫 떨렸다.

“하아…….”

그 떨림을 느낀 첼러스의 입에서 흥분 섞인 숨이 흘러나왔다. 미지근한 입술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뜨거운 입김이다. 그것이 농밀하게 얼굴을 훑고 지나가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의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예전이었다면, 이렇게 파고들 틈을 주지 않았을 겁니다.”

온몸이 달아오른 인두처럼 뜨거웠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추슬렀다. 타액이 야릇하게 번진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내다 괜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시뻘건 얼굴로 호흡을 고르자 첼러스가 흐릿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명백하게 욕정이 치밀어오른 눈이었으나, 표정만은 용케 담백했다. 그 간극이 오히려 날 달아오르게 했다.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잇새로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

“첼…….”

“왜 틈을 주십니까?”

첼러스가 느지막하게 원망하는 투로 물었다. 돌연 억울해져서 말을 더듬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렇습니까.”

내 손을 가져간 첼러스가 뜨거운 입술로 손등을 꾹 짓눌렀다.

“그러면, 제 잘못이겠군요.”

“잘못이라니?”

“카카나를 자꾸 건드리고 싶습니다. 이러고도 한때 기사의 길을 걸었던 몸이라니 한심합니다.”

“아니야. 첼러스는 용사 중에 가장 스킨십이 적어.”

나는 어째선지 그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필사적인 마음이 되어서 떠들었다.

“요즘 애들이 더 대범해졌거든. 내가 느슨하게 굴어서 그런가?”

근데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첼러스의 선한 눈이 실처럼 가느다래졌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화났어?”

첼러스가 싱긋 웃었다.

“그럴 리가요.”

‘화난 것 같은데.’

나는 그를 따라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행동부터 나가는 자들에게 경멸이 일어날 뿐입니다.”

“첼러스가 많이 배려해주긴 하지. 그래도 내가 정말 싫어하면 다들 안 해.”

“그건 당연한 겁니다.”

첼러스가 한 치의 틈도 없이 대꾸했다.

“아무래도, 다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의 말이 맞다.

용사들은 이전의 나를 아무리 두드려도 응답 없는 철벽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응답해주는 것도 모자라 호응까지 해준다. 그러니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내 안에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용사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구나.’

갑자기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언제까지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소리 내어 말하려던 게 아니었다. 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예?”

몽롱하게 풀어졌던 첼러스의 눈이 삽시간에 얼어붙으면서 커졌다.

“그러니까, 그게…….”

첼러스가 고개를 들었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크게 뜨인 눈에 담긴 것은 오롯한 공포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아까보다 희게 질린 얼굴로 웅얼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정해, 첼러스.”

너무 딱 달라붙어 있어서 눈을 보고 얘기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어깨를 밀었는데, 그가 힘으로 버텼다. 갓난아기처럼 필사적인 스킨십이었다. 나는 결국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게 남은 시간이 너희에 비해 짧다는 소리였어.”

“…….”

“어디 아프다거나 그런 거 아니야. 미안, 말을 잘못했어.”

첼러스가 내 손을 잡아끌어 자기 옆에 앉혔다. 앉는 것만으로 눈높이가 달라져서 그의 매끈한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야 했다. 첼러스가 내 이마에 키스할 듯 말듯, 고개를 수그리며 사분거렸다.

“카카나는 백년해로할 겁니다. 수인족의 수명은 150년 정도이니, 앞으로 100년은 가뿐히 사실 겁니다. 저희가 지킬 테니까요.”

‘진지한 얼굴을 하기에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짧게 웃음을 터트리려다 입이 막혔다.

“읍.”

몸이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첼러스의 몸이 날랜 재규어처럼 위로 올라왔다. 맞붙은 건 입술뿐인데 온몸이 짓눌리는 것처럼 압박감이 느껴졌다.

용사들은 전부 덩치가 컸다. 몸은 근육으로 알차게 짜여있어서 무게도 상당했다. 내가 누운 곳에 첼러스의 무게까지 더해지자 침대가 끼익, 신음하며 가라앉았다.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두꺼운 혀가 버겁다.

으응, 칭얼거리며 허리를 뒤틀자 어깨가 붙잡혔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나를 끌어안은 첼러스가 다급하게 입술을 빨아들였다. 사막에서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 같았다. 거칠고 난폭했다.

당황스러워서 그의 어깨를 밀었다. 순순히 물러난 첼러스의 입술이 고스란히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체, 첼러스?”

허리를 조이고 있는 원피스의 끈이 느슨하게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기겁해서 그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짓눌렀다. 첼러스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지만, 돌연 모든 행동을 멈추고 우뚝 정지했다.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아서 날 끌어안은 채 기절이라도 한 줄 알았다.

“첼러스? 왜 그래?”

의아해서 한 번 더 부르며 묻자 그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걱정이 치밀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데, 첼러스가 내 말을 막으며 딱딱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카카나. 지금 나가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제 그의 안색은 종잇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새하얬다.

“나가라고? 지금?”

‘갑자기?’

그의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얼이 빠졌다.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자, 일어나십시오.”

첼러스가 내 말을 무시하고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듯이. 지금 내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왜 그러냐니까? 너 얼굴이 너무 창백해. 괜찮은 거야?”

상체를 가까스로 일으켜 얼굴을 확인했다. 이마가 살짝 번들거렸다. 식은땀이었다.

호수빛 눈망울이 흐트러진 몰골을 한 채 앉아있는 날 일그러진 시선으로 응시했다.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목에 핏대가 서 있었다.

‘저녁에 먹은 게 체했나?’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환자의 몰골이 될 순 없었다. 서둘러 이마에 손을 올리려 했지만, 그마저 단호하게 붙잡혔다.

“으앗!”

첼러스가 날 달랑 안아 들더니 문을 열고 나가 복도에 내려주었다. 내가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손수 내쫓아준 것이다.

‘도대체 왜? 내가 뭐 잘못하기라도 했나?’

이젠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나려 했다. 나는 목에 힘을 주고 물었다.

“왜 그러냐니까!”

그 순간, 첼러스가 잡은 나무문이 으드드득 부서졌다. 나는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 붙은 나무 부스러기를 무덤덤하게 털어낸 첼러스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내 원피스의 허리끈을 다시 묶어주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뻗친 머리카락도 정리해주고, 구겨진 소매도 탁탁 털어 펴준다. 어느새 나는 그의 방에 들어오기 전처럼 멀끔하게 돌아와 있었다.

첼러스가 뜨거운 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방으로 곧장 들어가십시오.”

쾅, 문이 닫혔다.

나는 굳건히 닫힌 문을 노려보며 한참 동안 복도에 서 있었다.

걱정과 달리, 다음 날 첼러스는 지난밤을 깡그리 잊은 것처럼 멀쩡했다. 상냥하게 웃고 있는 첼러스더러 어제 왜 그랬냐고 따져 묻기도 난처했다. 결국 불편한 침묵을 택하고 내가 할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용사들과 나는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정보 길드 ‘새벽’의 아지트 중 하나로 이동하기 위함이었다. 그간의 성과를 얘기하고 긁어모은 정보를 교류하는 날이었다.

스노아의 텔레포트는 역시 유용했다. 새벽의 아지트는 제국 곳곳에 고루 분포해 있었지만, 스노아의 방대한 마나라면 아무리 멀어도 못 갈 곳이 없었다.

건물 안으로 텔레포트한 탓에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미리 마중 나온 반크를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가 깍듯하게 인사하며 우리를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인테리어를 신경 쓴 아지트를 골랐습니다. 귀한 손님을 또 푸줏간 위층 같은 곳에 초대할 순 없으니까요.”

반크가 자부심이 느껴지는 어조로 간단히 설명했다. 방은 저번에 만났던 곳과 비슷한 구조였지만 넓고 화려했다. 황금장식이 들어간 오크 나무 테이블과 비단으로 푹신하게 제작된 나무 의자가 눈에 띄었다.

이미 마탑주 올리넨과 용병왕 노레스, 이블라, 그리고 황녀가 앉아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한 명이 더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로브를 뒤집어쓴 작은 체구의 사람이 황녀 옆에 앉아 있었다.

‘누구지?’

왠지 시선이 떼어지지 않아서 무례인 줄도 모르고 계속 쳐다보았다.

“다니, 인사해야지.”

나를 은근하게 살피는 듯싶던 황녀가 우아한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나는 목에서 뼈 소리가 나도록 홱, 고개를 돌렸다. 황녀가 청초한 보랏빛 눈망울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자그마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믿기지 않아서 입을 벌렸다.

“본격적으로 혈판을 부수고 있으니, 다니도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마족에 대항할 수 있는 약물을 개발 중이거든요.”

“…….”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제 기회가 된다면 데려오려고 해요.”

황녀가 날 바라보며 얘기했다.

“카카나 페아 씨도 치료사이자 약제사니까요.”

그러나 정신이 팔린 나머지 뭐라 하는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물론 그 전에 가볍게 서로 인사는 나눠야겠지요?”

다니, 아니 다다나가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하나로 동그랗게 말아 고정한 살구색 머리카락과 창백한 개나리색 눈망울. 살짝 마른 것처럼 보이는 무정한 느낌의 입술.

이렇게 마주 보는 건 퀄리티미엄에서 재회한 후로 처음이다. 의자를 뒤로 드르륵,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누고 싶은 대화가 많은 것처럼 보이네요. 느긋하게 나누시길. 이야기를 나눠야 할 일이 점점 많아질 테니.”

이어지는 황녀의 말에도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떠올라서, 입을 열면 한 바가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입술만 뻐끔거리고 말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 뭔가가 걸려서 막힌 기분이었다.

나와 다다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스노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 내용은 나중에 정리해서 알려드릴게요.”

걱정하지 말고 다다나와 시간을 보내고 오란 소리였다. 동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주제에 나는 망설였다.

“하지만…….”

“신전의 위치와 혈판에 관한 정보가 주를 이룰 거예요.”

스노아가 나를 안심시켰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카카나를 부를게요.”

“바로 옆에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상황을 눈치껏 이해한 반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다다나와 나란히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정말 바로 옆에 작은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객실이라 하기엔 단출하고 좁았지만,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쓸데없이 넓고 화려한 방은 우리 사이의 침묵만 도드라지게 만들 뿐이었다.

편안히 얘기 나누라며 반크가 방을 나섰다. 다다나가 능숙하게 로브를 옷걸이에 걸고 의자를 빼 앉았다.

나는 동생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사소한 행동거지에서 성숙한 어른의 태가 났다. 걸핏하면 고집을 피우는 어린아이였는데.

‘언제 적 생각을 하는 거야.’

눈시울이 시큰거려서 얼른 걸음을 뗐다. 맞은편에 앉은 뒤 테이블 위로 고개를 떨구었다. 찬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못 봤는데, 우리를 안내하며 반크가 놓아준 모양이었다. 깨끗한 유리 표면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오랜만이야.”

다다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죄인처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동생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언제부터 저런 얼굴로 살아온 걸까.

“다다나.”

한심하게 울먹거리는 음성이 나갔다. 다다나는 그런 나를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변했네.’

동생은 끔찍한 환경에서도 곧잘 웃는 아이였다. 눈망울도 지금은 표정이 없어 옅어 보이지만, 당시엔 갓 피어난 개나리처럼 싱그러웠다. 도저히 웃지 못할 것 같은 위기 속에서도 동생을 보면 웃음이 났었다.

‘어디 아파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다다나는 므리나 이소리하의 실험으로부터 내가 유일하게 제외시켰던 아이다. 친구까진 아니더라도 동생만큼은 지켜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이었대도 상관없었다. 나는 어차피 모두를 구해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므리나와 목숨을 건 거래를 했었지.’

므리나가 만들 별 잡스러운 약물을 대신 조제한다는 조건으로 동생을 빼냈다. 그 잔악한 실험을 동생이 감당하지 않아도 돼서 행복했다.

가끔 신통한 약물을 개발하면 므리나는 더한 선심도 베풀었다. 그날 하루는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실험으로 고통받지 않을 수 있었다.

아프지 않은 밤. 그게 얼마나 값진 하루였는지…….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지?’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건강해 보이네.”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잔뜩 고여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다다나가 내 우는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무슨 일이냐고 달려들었을 텐데. 나랑 같이 울음을 터트려줬을 텐데.

계속 과거와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띠었다.

“너는 괜찮아?”

눈물을 닦아내고 물었다. 다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

다다나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되었다. 잘 지내고 있으면, 지금 내게 어떤 태도를 보이든…….

황녀는 제국의 딸이다. 그녀의 권력과 명예, 부가 다다나를 계속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행복하다면 됐어.”

신묘하게 반짝이는 황녀의 눈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다다나가 따르는 사람이 황녀여서 다행이야. 그녀는 영민하니까.’

마족이 득시글거리는 황실에서 흔들림 없이 제 뜻을 관철하는 여인이다. 그게 안심이 되었다.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네. 어렸을 땐 말괄량이였는데.”

나는 푸스스, 미소 지었다.

“그래도 친근한 부분이 남긴 했어. 잔등에 퍼진 주근깨 말이야. 여전하네.”

“…….”

“크면서 눈 색이 옅어졌나 봐. 지금은 버터나 크림 같은 색이야. 예전엔 개나리 같았는데.”

어째서인지, 나를 바라보던 다다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네 차분한 분위기랑 잘 어울려. 그런데 뭐 좀 먹어야겠다. 왜 이렇게 말랐니?”

나는 아다르가 들으면 기막혀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떠들었다.

“혹시 입맛이 없어? 아니면 여전히 가리는 음식이 많아?”

다다나는 턱선이 날카로웠다. 언뜻 드러난 손목도 살집 하나 없이 앙상했다.

“혹시 지금도 콩을 좋아해?”

“콩?”

다다나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예전에 콩 좋아했었잖아.”

“내가?”

“지금은 아니야?”

다다나가 눈을 옆으로 굴렸다.

“나는 가리는 음식 없어.”

“좋아하는 음식은?”

다다나가 천천히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없어.”

“…….”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 차례 눈을 깜박인 다다나가 날 빤히 응시하다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 거 말고 나한테 궁금한 건 없어?”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결국 다다나가 직접 물었다.

“언니를 찾아가지 않았잖아. 어디 살고 있는지, 진작 알았으면서.”

“…….”

“왜 원망하지 않아?”

어색하게 말아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나는 손을 들어 눈가를 짓눌렀다. 꼴사납게 흐느끼고 싶지 않았다. 볼 살을 꽉꽉 짓씹는 고통으로 울음기를 삼켰다. 다행히 마른 눈물이 안으로 삼켜졌다.

“왜 원망하지 않냐니? 내가, 내가 널…….”

아, 안 된다. 점점 참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나는 물을 들이켰다. 식도에 빽빽하게 돋은 가시를 물이 역방향으로 쓸며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널 어떻게 원망해. 넌 내 동생이야.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넌 내 동생이야.”

“그래?”

다다나의 시선이 테이블로 떨어졌다.

“그렇구나.”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몇 분이나 그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돌연 다다나가 자신의 얘기를 했다.

“나는 황녀님과 염원을 이루려 하고 있어.”

이곳에 함께 앉은 후로 처음 나오는 사적인 얘기였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다다나가 하는 말을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어. 언니는 계획에…….”

다다나가 잠시 멈칫, 말을 멈추었다.

“계획에?”

옅은 노란색 눈이 눈치를 살피듯 흘끗 나를 살폈다. 나는 어서 얘기해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에, 중요한 부분이었거든.”

중요한 ‘부분?’

“……그래?”

“개인적인 이유를 챙기기보다, 계획에 도움이 되는 쪽을 선택했어. 그래서 말하지 않은 거야.”

“그렇구나.”

“계획 때문에 그랬다는 얘길 하면, 분명히 언니가 화를 낼 거라고 했는데.”

“누가?”

“황녀님이.”

나는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다다나의 자그마한 손을 그러쥐었다. 스킨십이 어색한 듯 다다나가 손가락을 움츠렸다.

“어떤 계획인지, 네가 얼마나 큰 결심을 한 건지, 무엇을 희생하고 한 선택인지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

“그러니 더 얘기해봐.”

“계획은 말 못 해줘.”

“말할 수 있는 걸 해봐.”

다다나의 시선이 자기를 꼭 붙잡고 있는 내 손으로 향했다. 어린아이처럼 헤매는 얼굴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면 지금 생각나는 걸 말해봐.”

다다나가 잠시 침묵했다.

“용사들이 무사히 언니에게 달라붙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들은 중요한 패거든.”

나는 얼굴을 설핏 굳혔다. 내 표정을 보지 못한 다다나가 조금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언니도 알잖아. 그걸 바로잡는 데 용사들만큼 적격인 인물이 없어.”

나는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눈을 여러 번 깜박여야 했다. 패라니, 사람을 빗댈 말이 아니었다. 용사들과 나는 친분이 있었다. 그렇기에 내게 대놓고 할 수 있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말하는 게 서툴러서 그런가?’

나도 말을 예쁘게 하는 편은 아니었기에 억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래. 용사들은 강하니까.”

“맞아. 용사들의 무력이 필요해. 죽일 사람이 많잖아.”

내 손을 잡은 다다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다다나를 쳐다보았다.

“므리나는 가장 마지막에 죽길 고대하고 있어. 충분히 공포에 떨다가 죽어야 하잖아.”

“…….”

“용사들이라면, 세상을 공포에 빠트릴 수 있어. 그 악마들을 겁에 질리게 할 수 있단 말이야.”

나는 생침을 집어삼켰다.

다다나가 눈을 굴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감한 눈이 분노와 증오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사막처럼 바싹 말라붙은 감정에 검은 설움이 신기루처럼 떠올라 있다. 그걸 코앞에서 바라보자 숨이 막혔다.

피하고자 고개를 숙였더니 시선이 자연히 다다나의 배로 향했다. 새삼스러운 의문이 떠올랐다.

‘다다나는 어떻게 살아난 거지?’

분명히 배가 뚫렸었다.

므리나가 인정사정없이 뱃가죽을 찢고, 그 안의 내장까지 끄집어냈다. 다다나는 땅바닥에 엎어져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런 동생을 홀로 두고 나는 절벽으로 떨어졌다.

재회하기 전까진 틀림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세상을 더럽히는 악마의 종자들은 모두 죽여야 해.”

다다나가 아직도 배가 아픈 사람처럼 창백한 입술을 짓씹었다.

“황녀님은 내가 보아왔던 사람 중에서 가장 뜻이 굳센 분이야.”

“…….”

“황녀님이라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드실 수 있을 거라 판단했어. 그래서 따르기로 한 거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다다나의 이어지는 말을 듣기만 했다.

“언니가 황녀님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어서 다행이야.”

문득, 동생이 말간 얼굴을 들었다.

“잘못된 길로 빠져있었다면 언니를 직접 죽일 생각이었어.”

“……뭐라고?”

“므리나 이소리하. 기억하지?”

멍하니 되묻는 말을 무시하고, 다다나가 감정 없는 인형처럼 무감하게 주욱 말을 이었다.

“언니도 알다시피, 손쓸 수 없이 타락한 사람에겐 죽음만이 구원이야. 언니를 구원해줄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생각했거든.”

“…….”

“어렸을 때부터 언니는 선했잖아.”

다다나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친구들이랑 날 위해 항상 희생했어. 그래서 언니를 믿었어. 다행히 변하지 않았네.”

마치 기색을 살피는 것처럼, 내 머릿속을 샅샅이 뜯어보듯 다다나가 날 훑어보았다.

“여전히 선해서 다행이야.”

이건, 이건 잘못됐다.

머릿속이 백지장이어서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차분히 짚을 틈이 없었다. 그러나 다다나를 잡은 손끝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온몸이 주검처럼 차갑게 굳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다다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동생이 처음으로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용사들의 무력이라면, 죽여야 할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

“마족 말고도 끔찍한 인간들이 많아.”

“다다나,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난…….”

“아.”

다다나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내가 너무 혼자 떠들었지. 예를 들면서 얘기할 걸 그랬어.”

그게 아니었다. 초점이 어긋난 이유를 짚은 다다나가,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다시 말을 이었다. 책이라도 읽는 듯한 어투였다.

“이를테면, 잡초가 너무 많이 자란 거야. 물론 이로운 풀도 섞여 있지만, 일대를 아예 제초해버리는 것 말고는 수가 없는 거지.”

다다나가 정말 잡초 얘기를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첨언했다.

“흙을 갈아엎는 거야. 씨도 안 남게. 그러면 깨끗해지겠지. 세상도 똑같아.”

“네가 이런 생각 하고 있다는 걸 황녀님도 아니?”

나는 목이 졸린 음성으로 물었다. 다다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곧 대답을 내놓았다.

“황녀님이랑 이런 속 얘기까지 주고받지 않아.”

“그래?”

“나는 황녀님의 계획이 마음에 들었고 충성을 맹세했어. 그뿐이야. 그 과정에 언니가 끼어있었던 것뿐이고.”

다다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얼굴을 보는데 전신으로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소름은 고스란히 슬픔이 되었다. 동생을 보며 진저리치는 내가 충격적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언니도 므리나가 죽길 바랐잖아.”

내가 잘못한 걸까? 어렸을 때 므리나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던 게 교육상 안 좋았던 걸까? 아니면 실험당하는 친구들이, 고문을 받는 내가, 다다나에게 충격을 줬던 걸까? 역시, 므리나에게 심한 고통을 받은 게 잘못이었을까?

모든 게 엉망진창이어서, 무엇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다다나, 이건 잘못됐어.”

다다나의 얼굴이 미묘하게 얼어붙었다.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증오할 수 있다. 철천지원수를 죽여서 원한을 갚을 수도 있다. 인간이니까. 하지만 그것도 죄다.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죽음만이 구원이라는 말을 저렇게 가뿐하게 할 순 없다. 살기 위해 타인을 죽여야만 하는 세상이더라도, 마음 안의 인간성까지 놓아버려선 안 되는 것이다.

답이 하나로 뚝 떨어지는 문제가 아니기에 고뇌하게 되는 것이 생명이 걸린 문제다. 언제나 그렇다. 그런데 이 당연한 의문과 궁금증이 다다나의 눈엔 남아 있지 않았다. 텅 비어있었다.

동생이 내게 붙잡혀 있던 손을 빼내며 덤덤하게 얘기했다.

“적어도 도움은 되겠지.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이 맞아? 너는 지금…….”

해충 박멸을 위해서라면,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들꽃까지 전부 뽑아서 죽이겠단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필요한 일이야.”

다다나가 당연한 것을 설명하듯,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온몸을 웅크린 채 굳었다. 상체를 뒤로 젖히며 멀찍이 물러난 다다나가 물을 조금 들이켰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덤덤한 눈망울 언저리에 시뻘건 광기가 희끄무레하게 모습을 드러내다 사라졌다.

“마족이 이곳저곳에 퍼져있어. 마족에게 씌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악한 사람이 많아.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다다나가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참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역겨워.”

“다다나…….”

“몸이 너무 망가져 버리면 약물로 치료가 안 되잖아. 똑같은 거야. 인신매매가 판을 치고, 음지에선 인체실험이 파다해.”

“다다나!”

“힘 있는 자는 없는 자를 강간하고, 부모는 자식을 버리고, 같은 사람끼리 당연하다는 듯이 노예를 부리지.”

다다나가 감정 없는 인형처럼 말을 이었다.

“이게 어떻게 세상이야? 언니가 말해봐.”

내가 침묵하자 다다나의 눈이 희미하게 가늘어졌다. 마치 웃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을 다시 만들어야 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희생?”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희생을 네가 결정하는 거야?”

목소리가 너무 떨려서 꼭 울음소리 같았다. 다다나의 공허한 시선이 내게 잠시 머물렀다 떨어졌다.

나는 돌아앉은 다다나의 작은 등을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한 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여리고 가느다란 몸이었다.

“희생 없이 나아지지 않는 일도 있는 거야.”

다다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로 걸어갔다.

“그걸 모르면 그냥 위선자일 뿐이야.”

그녀가 로브를 걸치자마자 누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세요, 다다나가 차분하게 읊조렸다. 반크가 문을 열자 그 뒤로 고아하게 서 있는 황녀가 보였다. 그녀의 보랏빛 눈망울이 내 안색을 살피더니 놀란 듯 홉뜨였다.

다다나가 아랑곳하지 않고 황녀의 곁에 섰다. 동생과 나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를 짚어내는 것처럼, 잠시 조용히 침묵하던 황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얘기는 잘 나누었니?”

“네.”

황녀의 걱정 어린 시선이 내게 잠시 머물렀다.

“무슨 일 있었나요? 안색이 나빠 보이는데…….”

황녀가 다다나를 무시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게 고개를 젓는 일 말고는 없었다.

황녀가 내게 더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곤란한 낯으로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이후에 일정이 있는 듯했다.

“오늘 점심으로 먹은 게 얹혔나 봐요.”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고 살펴 가세요.”

“그래요…….”

황녀가 다다나를 흘끗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봐요. 사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다다나도 계속 참여할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가 나를 좀 더 지켜보다가 다다나와 함께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스노아가 만들어준 텔레포트 마법스크롤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철렁 내려앉은 심장이 발바닥에 들러붙어서,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는 이상하게 한 가지 의문이 남아 끈질기게 날 괴롭히고 있었다.

‘다다나는 어떻게 살아난 거지……?’

곧이어 용사들이 내가 있는 방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무슨 일이야? 얼굴이 창백하잖아.”

“체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맞아? 소화제를 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들이 내 마법 가방을 손수 뒤져 소화제를 꺼내더니 손에 들려주었다. 나는 빈속처럼 쓰린 위에 약물과 물을 들이부었다. 얹힌 것처럼 답답한 가슴이 소화제로 시원해질 리 없을 텐데도.

***

“뭐?”

황당해서 용사들을 바라보았다.

다섯 명이 작당이라도 한 것처럼 내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하나같이 멋지게 꾸며 입고선 누구에게 더 시선이 가냐는 듯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사준 비녀를 꽂고 있었지만, 오직 아르모어만 평소와 비슷했다. 덕분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틀었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해서 밤잠을 설쳤다.

잠이 부족하니 머리는 더욱 멍하고 생각이 곧잘 끊겼다. 나는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너희한테 둘러싸여서 마나를 쌓으라고?”

“그래.”

아다르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마나 수련을 할 때 통 집중을 못 한다며?”

벌써 얘기가 그렇게 돌았는가.

나는 스노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악의라곤 없는 투명한 눈을 보고 있자 금방 전의가 상실되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뭐? 미리 말해두겠는데, 너희한테 둘러싸이면 더 집중이 안 될 거야.”

“조금만 집중해도 돼. 이럴 땐 물량으로 승부하는 방법이 있거든.”

“물량?”

“그래. 우리 주위에는 항상 마나가 바글바글하잖아.”

아다르가 두 팔을 벌렸다.

초월자들은 마나를 끌어모은다.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게 도움이 되나 싶다.

“그게 뭐? 내 마나도 아니고 너희 거잖아. 마족처럼 너희 마나를 훔쳐다 쓰라는 거야?”

“몸에 흡수되지 않은 마나는 저희 것이 아니에요.”

스노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기울였다. 다행히 아다르가 이해하기 쉬운 예시를 들었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가게를 생각해봐. 손님이 가게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 있잖아.”

“그렇지.”

“마나도 똑같아. 우리가 맛집이어서 찾아왔는데 가게가 붐벼서 들어갈 수 없는 거야. 착석은커녕 건물에 들어가지도 못했으니 엄연히 말하면 손님이라고 할 수 없고.”

“너희한테 들러붙은 예비 손님을 중간에 가로채라는 소리네.”

아다르가 미적지근하게 눈썹을 구겼다.

“말이 그렇게 되나?”

“예시를 들었을 뿐이에요. 카카나는 그저 마나의 농도가 짙은 곳에서 수련하는 것뿐이죠.”

스노아가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많은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방법이에요. 마나가 희박한 장소에선 마나수용량을 늘리기 힘들거든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머릿속으로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둥글게 둘러앉은 용사들 가운데에 앉아서 눈을 감고 마나를 끌어모으려 애쓰는 내 모습.

한 명도 부담스러운데 다섯 쌍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연습해야 한다니 창피했다. 용사들은 마나에 관해선 달관한 자들이 아닌가. 나의 부족한 점을 시연하는 것도 아니고 부담스러워서 집중은 될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았는지, 할릭이 선수를 쳤다.

“역시 다섯 명은 부담스럽지? 내가 도와줄게. 근처에 초월자 두 명만 있어도 혼자 연습할 때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그래, 할릭이랑 나를 선택하면 되겠다.”

아다르가 냉큼 편승했다.

나는 구겨진 얼굴로 할릭과 아다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미쳤다고 저 둘 사이에 껴서 마나를 연습하겠는가. 둘은 성격이 불같아서 곧잘 맞붙곤 했다. 피곤한 상황이 생길 게 뻔했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할릭이었으니, 다른 한 사람을 고르면 끝이었다.

“할릭이랑 첼러스. 이렇게 둘이랑 연습할래.”

“뭐?”

“다음엔 너랑 할게.”

아다르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되지?”

“너 그 말 꼭 지켜야 한다.”

아다르가 요요하게 빛나는 눈으로 말했다.

“거짓말하면 안 돼.”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알겠으니까 눈 좀 그만 부라리고 돌아가.”

혀를 찬 아다르가 몸을 돌려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르모어가 내 뺨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거라.”

“그럴게요.”

그와 스노아까지 방으로 돌아가고, 남은 사람은 할릭과 첼러스뿐이었다.

“장소는 어디로 할까?”

“뒷마당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마법가방을 챙기는 척 곁눈질로 첼러스를 살폈다. 다다나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서 최근에야 깨달았는데, 역시 첼러스가 이상했다.

미미한 변화여서 처음엔 뭐가 달라졌는지 몰랐다. 그러나 확실히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그걸 아다르가 내게 서슴없이 매달리는 순간 깨달았다.

첼러스가 스킨십을 일절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길래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갑자기 사색이 되어서 나를 내쫓던 첼러스가 떠올랐다. 그때 일만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아직도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다.

그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나를 피했다. 웬만하면 맨살이 닿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도 태연하게 보이지만, 일정 거리를 지키고 절대 다가오지 않았다.

‘이유가 뭐지.’

아무래도 마나 수련을 하는 동안 틈틈이 그를 관찰해야 할 듯싶었다.

우리는 별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떨며 걸음을 옮겼다. 비브로스 별장의 뒷마당은 가을이 되자 낙엽이 무성해졌다. 나는 짙은 청록색 원피스를 가지런하게 잡고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나 수련은 되도록 자연과 친밀한 상태에서 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할릭이 어디에 앉을까 자리를 살피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역시 한 명이 안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질색했다.

“안긴 상태에서 어떻게 집중하라고?”

“어차피 이번 수련은 마나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게 핵심 아니었어?”

“…….”

“당연하지만, 우리랑 떨어질수록 마나 농도가 흐려져.”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그러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서 눈을 부릅떴다. 나는 첼러스를 홱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첼러스가 날…….”

“할릭이 덩치가 크니, 그에게 안기면 되겠군요.”

첼러스가 더없이 부드럽고 온화한 어조로 칼같이 말을 끊었다.

“편하게 집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와, 철벽…….’

저보다 정중하고 확실하게 선을 그을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와 함께 있지 못해 안달이던 첼러스가 도리어 철벽을 치니 마음이 상했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릭은 선뜻 양보한 첼러스가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헤벌쭉 웃는 얼굴로 다가오기에 손을 들어서 막았다. 이대로 넘어갈 순 없었다. 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웬만하면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얘기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기회를 놓치면 그럴듯한 상황이 생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이미 많이 참았다. 나는 첼러스의 앞으로 걸어가서 대놓고 물었다.

“너 왜 자꾸 나 피해?”

할릭이 조용히 우리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할릭, 미안한데 자리를 피해줄 수 있을까? 오늘 첼러스랑 결판을 지어야 할 것 같거든.”

“그래?”

그는 실망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눈망울에 이미 슬픔이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열 내지 마.”

“알았어.”

할릭이 미련이 남은 걸음으로 느릿느릿 움직였다. 나는 걸음을 옮기는 할릭에게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첼러스의 말마따나, ‘틈’을 보이면 파고들 것 같았다.

내 단호한 의지를 느낀 그가 곧 자리를 떴다. 드디어 둘만 남았다.

첼러스가 난감한 얼굴로 뒷걸음질 치려 하기에, 손을 뻗어 손목을 잡아챘다. 굵고 무거워서 가볍게 뿌리치기만 해도 놓칠 것 같았으나 다행히 첼러스가 얌전히 잡혀주었다.

“자, 말해. 왜 날 피하는지.”

“카카나, 무슨 오해가…….”

“첼러스. 내가 아무리 눈치를 밥 말아 먹었어도 학습 능력은 있어.”

신랄하게 얘기하자 첼러스가 할 말을 잃은 얼굴을 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따박따박 파고들었다.

“과거와 현재를 대조해볼 줄 안다고. 알겠어? 저번에 갑자기 날 내쫓은 후부터 이상해졌잖아. 너 나랑 신체접촉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거 알고 있어?”

“…….”

“누가 보면 너한테 카카나 페아 알레르기라도 생긴 줄 알겠다고!”

까치발을 들고 두 손으로 첼러스의 양 뺨을 움켜쥐었다. 그가 계속 내 시선을 피하는 탓이었다.

힘을 줘서 끌어당기자 손목을 붙잡혔다. 첼러스가 뺨을 그러쥔 내 손을 힘으로 떼어냈다. 그리고 밑으로 끌어내렸다. 포승줄에 묶인 것처럼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비틀어보고 손가락을 꿈질거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까지 첼러스는 줄곧 곤란한 얼굴이었다.

“봐.”

나는 증거품을 제시하는 사람처럼 붙잡힌 두 손목을 그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빼도 박도 못 하겠지?”

“…….”

“왜 그러는 거야? 이유를 알려줘야 내가 도와주든, 조심하든 할 거 아니야.”

“카카나의 탓이 아닙니다.”

첼러스가 침울한 어조로 시인했다. 나는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내 탓이 아니지. 너한테 잘못한 거 없잖아.”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나는 자그맣게 줄어든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걱정된다구.”

내 손목을 그러쥔 첼러스의 손가락이 움찔, 오므라들었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정수리에 꽂히는 첼러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흘끗 눈을 드니, 위아래로 꿀꺽 움직이는 목울대가 보였다. 첼러스가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입술을 핥았다. 얼굴이 살짝 창백하게 보였다.

가늘게 좁혀진 미간과 꽉 악물린 어금니, 이리저리 정처 없이 흔들리는 시선에서 미력한 두려움이 읽혔다. 나는 돌연 심각해졌다. 그를 추궁하긴 했지만 사실 큰일이라고 여기진 않았다. 올곧고 반듯한 첼러스의 성격이나 신념 문제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게 축객령을 내리기 직전에 우리가 뭘 하고 있었던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굴었던 행동이 문제가 되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죄책감을 느껴서 피하는 게 아니었나?’

저건 단순히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위협을 느끼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안 되겠어. 이리 와 봐.”

앉아서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첼러스가 고개를 저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게 낫습니다. 이렇게, 훤히 트여있는 곳에서.”

“말할 생각이 든 거야?”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물러서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응. 얘기를 나눠보고 결정하려고 했는데.”

나는 아직도 나를 붙들고 있는 첼러스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긴장한 사람처럼 손바닥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러는 거 보니까 끝까지 캐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

“말하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첼러스가 나를 잠시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의아해져서 고개를 기울일 찰나,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토로했다.

“카카나를, 억지로 안게 될 것 같습니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목구멍이 막히는지, 그가 억눌린 침음을 흘렸다. 나는 선뜻 이해되지 않아서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 되물었다.

“뭐?”

“저는 여태 통제를 잃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 또한 이성을 잃고 행동하는 첼러스는 본 적이 없다. 그는 관리가 잘 된 검 같은 사람이었다. 한 번도 허투루 움직이는 법이 없었고, 반드시 의도를 가지고 움직였다.

“처음이었습니다. 그때가.”

‘나를 침대에 눕히고 키스했던 일을 말하는 건가?’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때가 있지 않나? 우리가 아예 남남도 아니고.’

나만 해도 충동적인 결정으로 아르모어와 잠자리를 함께했다.

‘나를 좋아하면 충동이 드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 멈추라니까 확실히 멈췄고.’

“두렵습니다.”

첼러스가 고통스럽게 토로했다. 오묘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첼러스는 바르고 정직한 사람이지만, 순진하진 않았다. 되레 생각지 못한 행동으로 날 유혹해서 정신을 쏙 빼놓는 인물이다. 금욕적인 분위기를 지니고서 한 번 마음먹으면 행동은 과감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날 억지로 안을 것 같아서 무섭다니? 첼러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시군요.”

첼러스가 쓰게 웃었다.

“제가 지금 어느 정도로 음습한 욕망을 품고 있는지, 카카나가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이상할 정도입니다.”

“아니 무슨, 너만 발정해?”

첼러스가 길게 신음했다.

“카카나, 말 좀…….”

“네가 수인족 앞에서 웃기는 소릴 하니까 그렇지.”

나는 코웃음을 쳤다.

“누구나 다 성욕이 오를 때가 있어. 망상이나 욕망이나, 나도 더러운 거 많이 상상해봤는데 여기서 말해줘?”

첼러스가 오른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제발 참아주십시오…….”

“그래. 그건 자연스러운 거야. 상상만 하는 거잖아. 근데 뭐가 문제라고 그러는 거냐고.”

첼러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돌연 후우 하고 긴 숨을 뱉었다.

“어느 정도라고 해야 카카나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첼러스가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약을 한 것 같습니다.”

‘엥?’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이라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이성을 놓을 것 같습니다.”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나는 잡힌 손을 뒤틀었다. 이번엔 첼러스가 순순히 놓아주었다. 피부에 발갛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확실히 이상하다. 내가 아는 그였다면 자국조차 남지 않게 조심해서 날 잡았을 것이다. 첼러스가 잡고 있던 부분에 땀이 차서 끈적끈적했다.

“그건, 평범하게 욕망을 느끼는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첼러스가 불그스름하게 자국이 남은 내 흰 피부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짐작이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뭔데?”

“황녀의 경고를 기억하십니까?”

‘뭐더라.’

나는 흐릿한 기억을 쥐어 짜내었다. 첼러스가 대신해서 짚어주었다.

“마족에게 씌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마족이 너한테 무슨 요술이라도 부린 것 같다고?”

“석판을 찾아 부순 지 한참은 되지 않았습니까. 마족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마족이 용사들에게 깃들기라도 하면…….’

골수가 차갑게 식었다. 머리가 띵하게 아파서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잖아.”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뭔가를 잘못 먹었을 수 있어. 이곳은 약산이니까, 최음 효과가 있는 걸 잘못 먹고…….”

나는 말끝을 흐렸다. 첼러스가 길가의 아무 풀이나 뜯어 먹을 리 없었다.

‘아다르가 요리 재료로 이상한 걸 썼나?’

이것도 말이 안 됐다.

“어느 순간부터, 밤마다 악몽을 꿉니다.”

머리가 빠져라 고민하고 있는데 첼러스가 덤덤하게 고백했다.

“동시에 카카나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제게 직접 속삭이는 목소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 안의 어둠을 무언가가 계속해서 부풀리는 느낌이 듭니다.”

그의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했던 과거의 나를 패고 싶어졌다.

‘악몽에 격앙된 감정. 나한테 마족이 깃들었을 때랑 비슷하잖아.’

나는 낮게 탄식했다.

“이런, 제기랄.”

“카카나, 말을…….”

“지금 말이 중요해? 왜 그걸 지금 얘기해! 이미 늦었을 수도 있잖아!”

“제 상태를 살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기우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지금 말했으니까 기우가 아니라는 거네?”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합니다. 제가 위화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새삼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던 첼러스의 초인적인 인내심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도대체 자기 안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음습한 욕망으로부터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걸까.

한 번 겪어봤기에 알았다. 마족의 유혹은 치명적이다. 악몽으로 정신을 흩트리고, 달콤한 말로 꾀어내니 까딱 잘못하면 넘어가기 십상이었다. 마족이 첼러스의 몸에 숨어든 게 사실이라면, 여태 계속 정신공격을 당해왔다는 소리가 아닌가.

‘첼러스가 악몽을 꿨을 때 더 자세히 살펴볼걸.’

후회되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속상한 마음을 숨겼다. 지금이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다른 용사들도 이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네 피부터 검사해보자. 잘못 먹은 게 없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아.”

“이상이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르모어를 찾아가야지.”

나는 그의 옷소매를 조심스럽게 쥐어 끌어당겼다.

“아르모어의 정백이라면, 네 정신에 뭐가 파고들었는지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첼러스가 자신의 소매를 쥐고 있는 내 손을 빤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급했지만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었다. 나는 첼러스의 피를 채취하고 경과를 지켜보았다.

첼러스의 피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깨끗했다. 그러면 남는 원인은 하나였다.

우리는 칙칙한 얼굴로 아르모어의 방을 찾았다. 혹시 방에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문이 열렸다. 아르모어가 평소보다 창백해 보이는 첼러스와 심각한 얼굴을 한 나를 살펴보더니, 왜 찾아왔냐 묻는 말도 없이 안으로 들였다.

방에 들어선 나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차를 즐기고 있었는지, 테이블 위의 티포트에서 은은한 차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르모어가 뒤집힌 찻잔 두 개를 꺼내 차를 따라주었다. 첼러스와 나는 차가 놓인 자리에 앉았다.

아르모어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차를 홀짝였다. 그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어깨에 힘이 빠졌다. 나는 침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르모어, 첼러스한테 마족이 깃든 것 같아요.”

“그렇군.”

아르모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는 찻잔을 어정쩡하게 든 채 되물었다.

“안 놀라요?”

“마족이 대항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첼러스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아무리 그래도 아르모어의 초연한 분위기는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저런 얼굴일까.’

나는 의아해하는 걸 관두고 첼러스의 안색을 살폈다.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지만, 나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확인해주실 수 있나요?”

아르모어가 대답 대신 여의주를 소환했다. 그의 손에서 튀어나온 신비로운 보랏빛 구슬이 반질반질 빛났다.

“부정한 것이 얽혔는지 궁금하구나.”

검붉은 나비가 첼러스의 몸으로 들어갔다. 아르모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잠깐의 침묵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별안간 아르모어가 나비를 회수했다.

“그렇군.”

“어때요?”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 마족이 있어요?”

“마족이라 하기엔 미력하고, 뭔가가 섞이지 않았다고 하기엔 불순하다.”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르모어가 깔끔하게 정리해서 다시 말해주었다.

“마족이 빙의한 것이 아니라, 그 찌꺼기가 숨어든 모양이다.”

“마족의 일부분이라고요?”

“그래.”

나는 잠시 패닉에 빠졌다가, 고개를 휘휘 내젓곤 두 손을 옹송그렸다. 아직 궁금한 것이 많았다. 아르모어의 힘으로 부정한 것을 쫓아낼 수 있는지, 그리고 다른 용사들에게도 마족의 찌꺼기가 깃들었는지.

그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불현듯 생각난 일이 있었다.

‘잠깐. 바드도 내 꿈에 나타났었잖아.’

갑자기 전신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유추만 했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첼러스와 달리 여태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아서 더 잊고 있었다. 나는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핥았다.

‘말해야겠지?’

용사들이 난리를 피울 게 불 보듯 뻔했지만, 시간을 더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이참에 확인해보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마음먹고 얘기했다.

“아르모어, 혹시 저도 확인해주실 수 있나요?”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분한 시선이지만 굉장한 압박감이 느껴져서 최대한 에둘러 표현했다.

“저번에 마족에 씌었을 때, 꿈에 바드가 나타났거든요. 혹시나 해서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첼러스의 고개가 내게로 떨어졌다. 아다르나 할릭처럼 호들갑을 떨진 않았지만, 묵직한 시선에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그가 눈썹을 일그러트리고서 침묵을 지키다가, 한참 후에 말을 이었다.

“혈판이 부서진 이유가 역시 따로 있었군요.”

“확인해보겠다.”

아르모어의 나비가 즉시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아르모어가 손에 들린 찻잔을 컵 받침에 내려놓았다. 달그락, 도자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르모어가 아까와 달리 약간 불쾌한 어조로 뇌까렸다.

“불순한 게 섞여 있다.”

한숨이 터졌다.

“그렇군요.”

충격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여태 아무 일도 없어서 그런가.’

어쩌면 지금까지 충격받을 일이 하도 많아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일일이 놀라기도 지쳐버린 기분이었다.

‘다른 마족이 아니라 바드라면 되레 안심이지.’

그는 날 독점하고 싶어 했다. 그건 내게 이용가치가 충분한 요소였다. 다른 마족이었다면 이미 모든 마족에게 내 정보가 돌았을 것이다.

“쫓아낼 수 없습니까?”

첼러스가 초조하게 물었다. 누가 보면 마족이 씐 사람은 나뿐이라고 오해할 정도다. 나는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저 혼자 방법을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만, 단순한 정신계열 마법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군.”

아르모어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천족과 마족이 거론된 서적은 별로 없습니다만, 하나같이 마족을 부정한 것으로 묘사하더군요. 정신을 조작하는 것은, ‘정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그대의 추측이 맞다.”

“그럼 안 된다는 건가요?”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분명히 마족을 쫓아낸 적이 있었다.

“아르모어는 바드를 쫓아낸 적이 있잖아요. 그때처럼 정백을 사용하면…….”

“그때 바드가 어떤 상태였는지 기억하느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도 기괴해서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용사들의 공격을 받아 망가진 육체를 검은 연기가 이어붙이고 있었어요. 구울처럼, 죽어도 죽은 것 같지 않게 움직였고요.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나요?”

“차이점이 있지 않느냐. 육체는 죽어 있었지. 그리고 부정한 것이 드러나 있었다.”

“…….”

“나는 그 사체를 정화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부정을 떼어낸 것뿐이야.”

“이번엔 떼어낼 수 없나요?”

아르모어가 흐릿하게 웃었다.

“살아 있는 마음에 물들어버린 어둠이다. 그걸 잘라내면, 그대를 잘라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큰일이군요.”

첼러스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나는 결국 열불이 뻗쳐서 그의 얼굴을 잡아 강제로 내게 돌렸다. 첼러스가 놀란 얼굴을 했지만, 숨을 씩씩거리며 눈을 시퍼렇게 치뜨고 호통쳤다.

“나는 문제가 아니야! 네가 문제지! 아까부터 왜 계속 나만 걱정하고 있는 거야!”

“카카나가 왜 문제가 아닙니까?”

“바드는 나랑 오래오래 놀고 싶어 하거든.”

나는 비뚜름하게 웃었다.

“최근 악몽을 꾸긴 하지만, 너처럼 위화감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욕망을 못 참겠다거나. 그랬다면 나는 종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살았을걸.”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안심할 수 없지. 제일 안심할 수 없는 건 너지만 말이야.”

반박할 수 없는지 첼러스가 조용해졌다.

“아르모어, 예방은 안 되는 거예요? 물들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막을 수 있다. 마족이 나를 건드리지 못한 건 그 때문일 거다.”

“그럼 용사들 데려올게요!”

나는 아르모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었다. 반지의 텔레파시 기능으로 부르면 쉬웠을 것이 아닌가.

어쨌든 눈이 뒤집힌 나는 용사들의 방을 차례로 찾아갔다. 몇 명은 방에 있지 않아서 스노아를 찾아갔다. 텔레포트로 비브로스의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여기서 뭐 해?”

아다르는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었다.

“너 먹일 샐러드를 만들고 있었지. 최근에 장을 봐왔거든.”

드레싱을 만들던 도중이었나 보다. 고맙긴 한데 지금 태평한 소릴 할 때가 아니었다.

“이리 와. 갈 곳이 있어.”

“안 돼. 재료 상해.”

“좋은 말로 할 때 와. 급하다고!”

“요리는 시간이 생명…… 컥!”

나는 아다르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무식하게 끌어왔다.

“아악, 야! 너무한 거 아니야!”

“그래서 좋은 말로 할 때 오라고 했잖아!”

얘한테도 마족이 수작을 부려놨을까 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욕망에 사로잡힌 용사들이라니.’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우여곡절 끝에, 용사들을 우르르 끌고 아르모어의 방을 찾았다. 불친절한 아르모어가 무슨 일인지 설명해줄 리 만무했다. 다짜고짜 나비를 용사들의 몸으로 흘려보냈다.

하나 다행인 건, 모두가 아르모어의 방식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다들 언젠가 설명해주겠지, 하는 얼굴이었다.

물론 불행한 점도 있었다. 이미 늦었다는 거다.

“말도 안 돼!”

나는 뺨을 그러쥐고 절규했다.

“이미 늦었다.”

아르모어가 냉정하게 현실을 일러주었다.

“다요? 아르모어 빼고 전부?”

“그래.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들었구나.”

“말도 안 된다고요!”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었더니, 용사들이 그제야 궁금한 기색을 비쳤다.

“무슨 일인데 그래?”

할릭이 은근슬쩍 물었다. 스노아는 옆에서 숨을 쉬라며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선 용사들의 무력에 반 토막 나는 세상이 그려지고 있었다.

‘솔직히, 마족이 침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위협적인 것 같은데.’

저 무식한 인간들이 손가락 한 번 잘못 튕겼다가 산이 통째로 날아가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사실 제일 문제는 스노아 아닌가?’

메테오를 빗줄기처럼 뿌려댈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곳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중간계가 제 고향처럼 변했다며 좋아하는 마족이 상상되었다.

“안 돼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와, 여전히 설명해줄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는 아르모어를 대신해 첼러스가 입을 열었다.

“마족이 깃들었습니다.”

스노아, 할릭, 아다르의 고개가 첼러스에게 홱 돌아갔다.

“카카나한테?”

세 명이 동시에 물었다.

첼러스가 잠시 날 바라보았다. 나까지 마족이 깃들었다고 하면 총체적 난국일 게 뻔했다.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으나, 첼러스가 내 바람과 정반대로 진솔한 설명을 이었다. 저럴 거면 난 왜 쳐다봤는지 의문이었다.

예상대로 셋은 질겁했다. 자기들도 마족이 씌었다는데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보다 너희들이 문제라고!’

결국 나는 그들에게 공을 들여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내게 집착하는 바드의 의뭉스러운 행동과, 지금 우선해서 해결해야 하는 점이 무엇인지 말이다.

물론 그들은 귀담아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시종일관 내 걱정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나는 악을 썼다.

“나는 이상해지면 너희가 막으면 되잖아! 너희가 이상해지면 대체 누가 막으라는 거야!”

아무도 못 막는다. 심지어 마족 중 일부가 내 편이 되어서 용사들을 막는다고 해도 안심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최근 악몽을 꾸기 시작했는데, 마족이 물밑 작업을 하는 거였군요.”

스노아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식겁했다.

할릭이 깜짝 놀라며 대꾸했다.

“너도 악몽을 꿨어?”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오들오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리에 서 있는 세 명을 차례로 가리켰다.

“설마 너희 전부?”

“나도 요즘 악몽 꾸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아다르가 쐐기를 박았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세상이 멸망할 거야!”

“진정해요, 카카나. 아직 악몽을 꾸고 있을 뿐이니까요.”

스노아가 부드럽게 타일렀지만, 전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맞아. 악몽을 꾸는 건 흔한 일이거든.”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마족이 아예 씐 건 아니라며. 찌꺼기라는 건 무슨 소리야? 설명이 더 필요한데, 아르모어.”

아다르가 아르모어를 콕 집어서 설명을 요구했다. 느른하게 긴 숨을 뱉은 아르모어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상대가 용사들이니 마족도 신중히 처리하는 거다. 이미 몇 명의 마족이 우리 손에 당하지 않았느냐.”

“그래서요?”

“미약한 힘으로 오래 공을 들여 쇠약하게 만들 작정이었을 거라 예상한다. 직접 속삭이는 음성은 들은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모어가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군. 우리의 정보가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되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우리의 정보.”

첼러스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몰래 꾀어내려고 잠잠히 있었겠지만, 들켰다는 걸 깨달으면 마족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마족이 알아낸다는 ‘정보’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위치.’

바드는 스라일리 경매장을 찾아왔다. 에르메타에게 숨어서 내게 접근했었다.

‘바드의 일부가 내 몸에 깃들어 있어서 위치를 들켰던 거야.’

그런데도 여태 아무 일 없었던 건, 순전히 그 마족이 바드이기 때문이다. 그가 침묵하고 있어서.

‘하지만 다른 용사들은?’

“피해야 해.”

얼굴에서 피가 싹 빠져나갔다. 곧 기절할 사람처럼 창백해지자 용사들의 표정이 변했다.

“왜 그러십니까.”

첼러스가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설명을 해야 하는데 몸이 얼음덩어리처럼 굳어버려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등과 목덜미로 식은땀이 주욱 솟아 나왔다.

‘몰래 꾀어내려고 잠잠했던 거라면, 지금은?’

우리가 눈치챘다는 걸 마족이 깨달았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설사 알 수 있는 게 위치뿐이더라도, 여긴 비브로스의 별장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들이닥쳐서 별장을 발견하면 늦는다. 우리가 누구와 연관되어 있는지 들키는 순간 비브로스도, 비브로스의 친한 사람들도, 이곳의 사용인들도 위험해지고 만다.

‘이미 여기서 시간을 오래 보냈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다른 곳으로 이동해도 늦었다. 마족이 한 번쯤은 비브로스의 저택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이 숨겨진 별장이고 사유지 또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브로스는 유명인이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어서 일부러 마련한 장소였다.

‘마족은 권력자의 몸에 숨어들었어. 이곳의 실소유자를 밝혀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야.’

일단은 숨어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오래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스노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어.”

마족이 알아낼 수 있는 게 위치뿐이라면 아직 시간이 있었다.

“마족이 우리 위치를 알고 있을 거야. 지금이라도 빨리 장소를 옮겨야 해.”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긴장되어서 말을 자꾸 더듬었지만, 용사들은 침착하게 귀를 기울였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비브로스와 사용인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마족에 관한 이야기를 빼고 얘기한 탓에 군데군데 구멍이 있었지만, 비브로스는 깊이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끝나자 스노아가 마법으로 저택을 비웠다. 비브로스가 가지고 있는 별장이 많은 탓에 짐을 다른 곳에 보관하는 건 쉬웠다. 우리의 부탁으로 그간 정들었던 별장과 사유지에 사람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남지 않게 되었다.

설사 나중에 마족이 이곳을 찾더라도 다른 정보는 알아낼 수 없도록.

“아르모어는 교수님이랑 함께 있어줘요.”

아르모어의 검붉은 눈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

그에겐 마족이 깃들지 않았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교수님을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르모어뿐이었다.

“부탁해요.”

“…….”

아르모어는 별로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애절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 마족이 위치 외의 다른 정보를 얻었다면, 분명히 교수님을 공격할 거예요. 반지를 끼고 있으니까, 아르모어가 텔레파시로 우릴 부를 수 있잖아요.”

아르모어라면 비브로스의 정신과 마음까지 마족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우리는 늦었어도, 비브로스마저 마족에 씌는 일은 없도록 해야 했다.

“그렇겠지.”

“부탁해요.”

아르모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까치발을 띄워 그의 뺨에 짧게 흔적을 남겼다. 아르모어의 입술에 미미한 웃음이 걸렸다.

“조심하도록.”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여기에 있어.”

그런데 아다르가 내 어깨를 아르모어 방향으로 밀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곧 사납게 일그러트렸다.

“싫어.”

“바드 녀석은 꽤 오랫동안 네 안에 있었던 것 같다며. 근데 여태 아무 일 없었잖아. 무슨 꿍꿍이속인지 몰라도 당장은 안전하니까…….”

아다르가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도 자신이 안일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아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말을 이었다.

“그러면 아르모어랑 있는 게 나아. 우리랑 함께 있으면 위험할 거야.”

아다르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어두운 욕망을 자극한다며. 우리의 욕망이 뭐일 것 같은데?”

“…….”

“아르모어랑 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드가 변덕을 부리면? 교수님을 그대로 곤경에 빠트리라는 소리야?”

“카카나.”

“낙관적으로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잖아.”

“네가 다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겠지.”

“아다르, 일이 벌어지고 나면 늦어.”

아다르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치는 꼴은 죽어도 못 봐. 스노아, 텔레포트 해줘.”

스노아가 잠시 아다르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어금니를 악물며 고개를 돌려버리자, 한숨을 쉬며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목적지는 죽음의 숲이었다. 어쨌거나 마족은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죽음의 숲으로 접근했다간 애써 얻은 몸이 망가지고 말 것이다. 제국군을 움직이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시간은 벌 수 있을 거야.’

눈을 감은 채로 깊게 숨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맡는 죽음의 숲 특유의 그리운 냄새가 났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내 저택이 있었던 텅 빈 공터에 낙엽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돌아왔지만…….’

나는 슬그머니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말았네.’

모순적이게도 지금부터 가장 위험한 존재는 용사들이었다. 시시각각 위태로워지고 있는 용사 네 명. 똑같이 마족이 깃들었지만 제일 안전한 나.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마법스크롤을 찢었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지난겨울 이후로 오래간만에 보는 저택이 공터를 꽉 채웠다.

우리는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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