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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 Chapter 1. 뜻깊은 진전 (29/43)

Chapter 1. 뜻깊은 진전

다행히 내게 튀진 않았지만, 왜 저렇게 기겁하고 놀라나 싶어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스노아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며 의자째 뒤로 물러섰다.

“가, 갑자기…….”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 분명히 잠자리에선…….”

“그, 그만하세요!”

스노아가 찻잔을 집어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쨍그랑,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날 줄 알았더니 잔이 알아서 둥실둥실 뜨더니 티 테이블로 날아가 안착했다.

‘부럽다, 마법. 편해 보이네.’

내가 한가한 생각을 하든 말든, 스노아는 여전히 달아오른 제 얼굴을 식히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선 투덜거렸다.

“아, 빨리. 나는 지금 못 움직이잖아.”

“정말이지…….”

스노아가 가까이 다가와서 불그스름한 얼굴을 숙였다. 쑥스러움을 타는 얼굴이 귀여웠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면 그의 뺨을 쓰다듬어줬을 텐데.

“조금 변한 것 같아요. 카카나.”

스노아가 분한 사람처럼 억눌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짧게 키들거리며 그의 수줍은 뽀뽀를 기다렸다. 뜨거운 입술이 말캉거리며 건조한 입술 위를 지나다녔다.

눈을 감고 그 감촉을 즐기는데, 돌연 훨씬 습하고 뜨거운 것이 슬그머니 입술을 스쳤다. 나는 번쩍 눈을 떴다가 할 말을 잃고 스노아를 바라보았다. 가느스름하게 뜨인 그의 물빛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이거 좀 위험한가.’

나는 저 눈을 알았다. 잠자리에서 수없이 봤던 눈이다. 저 눈을 본 날이면 어김없이 힘든 밤을 보내야 했다.

“스노아, 나는 뽀뽀만…….”

그의 정갈한 치아가 내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키스, 안 되나요?”

‘키스만 한다고 했다가 이것저것 다 할 거잖아!’

귀신같이 진도를 빼는 스노아였다. 차원균열지대에서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어야 할 때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알몸이 되어있곤 했다.

“으.”

그의 혀가 안으로 들어올 듯 말 듯, 입술 가장자리를 왔다 갔다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실수인 척 깊이 파고들어오자 등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혀를 넣고 싶어요. 카카나 안에, 깊숙이 넣어서 문지르고 싶어요.”

‘키, 키스 얘기하는 거야. 착한 생각 하자.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어느새 처지가 뒤바뀌었다. 나는 홍당무처럼 벌게진 얼굴로 질끈 눈을 감았다.

“읏…….”

“카카나는 아프니까.”

스노아가 쪽쪽, 뽀뽀하며 말을 이었다.

“딱, 키스까지만 할게요.”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스노아가 달갑게 내 타액을 빨아 마시며 입을 맞춰왔다.

***

“흐윽!”

발작하듯 깨어났다. 이불이 갈퀴 달린 덩굴처럼 몸에 엉겨 붙어 다시 침대로 끌어들이려 했다. 숨을 껄떡거리며 거칠게 이불을 헤집었다. 식은땀이 흥건한 피부에 옷자락이 들러붙어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허벅지에 감기는 치맛자락을 찢어내듯이 떼어내고 침대 밑으로 우당탕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기어갔다.

어둡고 좁은 장소가 필요했다. 가까운 곳에 옷장이 있었다. 정신없이 달려들어 문을 열다가 바보처럼 이마를 찧었다. 음습한 악몽으로 진탕이던 두개골이 크게 흔들렸다.

“윽…….”

어지러이 섞인 생각이 곤죽이 되어 흐느적거렸다. 나는 이마를 짚고 한참 동안 끙끙댔다.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자리에 앉아 멍하니 마룻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숨만 골랐다.

오랜만에 꾸는 악몽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 잡은 흉터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지끈거렸다. 나는 턱에 고인 식은땀을 팔뚝으로 슥 닦아내고 창밖을 확인했다. 달덩이가 커다랗게 떠 있었다. 한밤중이었다. 잠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꿈을 꾸는 게 며칠 만이지.’

인식하지 못한 사이 악몽은 잊히고 있었다. 용사들과 만나기 전에는 불면증에 시달렸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서 편히 자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 사실을 여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악몽 따위는 잘 꾸지 않았던 사람인 양, 용사들과 함께하는 달콤한 수면을 당연시했다.

식은땀 때문에 기온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혹 내 악몽 때문에 아르모어가 잠에서 깨진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내 두려움을 느꼈을까?’

악몽을 꾸고 나면 항상 혼자 있고 싶어 했기에, 일부러 찾아오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씻자.’

차고 끈끈한 땀이 불쾌했다.

뜨거운 물로 조심해서 몸을 씻었다. 마족에게 물린 흉터가 아직 낫지 않았다. 검은 기운을 쐰 상처가 심상치 않게 상해 보통 약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았던 탓이다.

이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리커버리 약물을 만들어 치료해야 했다.

‘자면 또 악몽을 꿀 것 같은데…….’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베개를 들고 첼러스의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신성한 분위기에 심취해 잠이 들면, 그런 어둡고 음습한 악몽은 감히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 같았다.

문을 두드리자니 창피해져서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런 이유로 깨워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역시 방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나의 결심은 금방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첼러스가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일어났는지 언제나 단정했던 백금발이 이리저리 뻗쳐있었다. 데구르르 눈을 굴려 그의 차림을 확인했다. 펑퍼짐한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목 부분이 넉넉해서 오른쪽 목덜미까지 셔츠가 아찔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게 이상토록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카나?”

“아.”

놀라 동그래진 호수빛 눈망울을 마주하자 수치심이 왈칵 올라왔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붉어진 얼굴을 가리고 우물쭈물했다.

안 돼, 역시 못 말하겠다. 열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같이 자도 되냐는 게 웬 말인가.

‘평소처럼 옷장에서 자면 되잖아. 대체 여길 왜 왔지?’

창피해서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져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나는 무슨 말이든 꺼냈다.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카카나의 기척은 특히 예민하게 느껴집니다.”

첼러스가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자세를 비틀었다.

“들어오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어.”

“여기에 줄곧 서 계시지 않았습니까.”

귓불이 확 뜨거워졌다.

“아, 아니야.”

첼러스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만 가볼게. 피하듯 웅얼거리곤 얼른 걸음을 옮겼다. 어디든 가서 숨고 싶었다. 따라오지 않는 건지 한참 내 발걸음 소리만 들려 안심했는데, 갑자기 어깨 위로 외투가 떨어졌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산책하시려는 겁니까?”

키가 한참은 큰 첼러스의 음성이 정수리로 떨어졌다. 나는 괜히 머리 위를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밑을 바라보니 그의 그림자에 완전히 잠긴 내 몸이 보였다. 그가 곁에 바짝 붙어 서며 함께 움직였다.

“응.”

“베개를 끌어안고 말입니까?”

잊고 있었다. 괜히 혼자 뜨끔해서 팔에 힘이 풀렸다. 첼러스가 떨어지는 베개를 능숙하게 잡아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근육이 불거진 팔뚝이 유연하게 내 허리를 낚아채어 품으로 끌어들였다. 헉, 숨을 집어삼키며 고개를 드는 순간 조심스럽게 다가온 손가락이 목덜미 위를 스쳤다.

“읏.”

거즈를 두껍게 대놓았는데도 깃털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 근처로 닭살이 돋아났다.

“거즈 바깥으로 멍이 번져 있었는데, 이제 괜찮아졌군요.”

“으, 응…….”

“내일 리커버리 약물을 만든다고 하셨지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안는 것만으로, 제 힘이 당신을 다치게 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의 다정한 미성이 걱정으로 흐려진 채 내 머리 위로 흘러내렸다. 벌꿀처럼 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숨을 죽이고 몸을 웅크렸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대신 허리를 옭아맨 첼러스의 손등 위로 내 손을 겹쳤다.

‘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가볍게 밀어내는 것만으로 구속이 사르르 풀어졌다. 뒤로 움찔 물러서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괜찮아. 여태 날 아프게 한 적 없잖아.”

“…….”

“생각해보니 산책하기엔 시간이 많이 늦은 것 같아. 그러니까, 저기…….”

나는 그의 손에 들린 베개로 시선을 내렸다.

“내 베개 좀…….”

“제 방에서 함께 주무시는 건 어떻습니까.”

괜찮아, 라고 거절하기도 전에 손을 잡혔다.

그가 곧장 걸음을 옮겼다. 어안이 벙벙해서 첼러스의 너른 등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그가 앞을 바라본 채 얘기했다.

“악몽을 꾸셨죠.”

“어, 엇?”

어떻게? 아니 무슨 수로?

“차라리 귀신의 눈을 속이는 게 쉬울 겁니다.”

첼러스가 옅게 웃음이 밴 음성으로 속삭였다.

탁.

문이 닫혔다.

‘언제 방까지 들어왔지?’

그 소리에 기겁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순간, 번쩍 몸이 들렸다.

“으와앗!”

첼러스가 버둥거리는 내가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힘을 준 후,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혀주었다. 그가 동그래진 눈을 끔뻑이는 날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이, 이렇게 치명적인 사람이었나.’

누운 자세로 첼러스를 올려다보다가, 넉넉하게 늘어진 상의 안으로 눈이 굴러갔다. 달빛이 희미하게 더듬어 간 옷자락 안으로 꽉 짜인 복근이 보였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첼러스가 파르르 떠는 날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부드럽게 내 손목을 쥐어 자신의 상의 안으로 끌어들였다. 얇은 상의를 비집고 들어간 손바닥에 울퉁불퉁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그야말로 소스라쳤다. 딱딱하고 따끈따끈한 감촉에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손가락을 굽혔더니, 첼러스가 눈가를 휘며 내 귓가에 사분거렸다.

“제 근육이 좋으시면, 만져도 됩니다.”

‘얘가 미쳤나 봐, 진짜!’

“무, 무무무, 무슨…….”

‘뭐 잘못 먹었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전 당신의 것이니까요.”

그가 내 귓불에 뽀뽀했다.

“귀엽습니다, 카카나. 잘 익은 딸기처럼 붉습니다.”

“야아악!”

나는 괴력을 끌어올려 바다처럼 넓은 그의 가슴팍을 찰싹 때렸다. 첼러스가 눈가를 찡긋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일그러진 얼굴마저 쓸데없이 야했다.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로 열심히 도망갔다. 그리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너 미쳤어?!”

“아하하.”

첼러스가 제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까지 요망한 짓을 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맑고 순수한 웃음이었다.

나는 첼러스가 장난쳤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넋이 나가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다 아다르 때문이었다.

‘첼러스가 못된 걸 보고 배우잖아!’

나는 분해서 파르르 떨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네, 네가, 이상한 짓을 하니까 그렇지!”

“제가 어려우십니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금 베개를 팡팡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런데 왜 제겐 허락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뭐를?”

“카카나를.”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멀뚱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나?”

“제겐 기회를 주지 않으셨잖습니까. 포옹도, 키스도, 섹…….”

“그마아안!”

마족이 문 목덜미가 아픈 줄도 모르고 기어가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첼러스가 당황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첼러스와 제대로 스킨십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다른 용사들과는 자의든 타의든 항상 그럴 만한 일들이 있었는데, 그와는 접점이 생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카카나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어느 날 문득 제가 너무 지켜보기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저도 노력을 해야 했는데, 바라기만 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손을 휘휘 흔들었다.

“아냐. 왜 네가 사과를 해. 그건 단지…….”

“단지?”

그의 맑은 눈이 나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고 조용해졌다. 이러면 내가 내 무덤을 판 꼴이었다.

‘이걸 노린 건가?’

그러나 그의 선한 눈망울에서는 어떤 음험한 속내도 읽히지 않았다.

“단지?”

내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계속 시간을 끌자, 첼러스가 다시 물었다. 자꾸 침묵하면 더 의심만 살 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백했다.

“사실, 첼러스는 너무 신성하게 생겨서 그, 그렇고 그런 의도를 갖고 바라보면 죄짓는 느낌이 들어.”

속사포처럼 고백하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첼러스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말을 잘못했나 싶어서 살그머니 오른눈을 떴다. 그가 제 귀를 의심하는 눈으로 되물었다.

“예?”

‘완전히 충격받은 얼굴이잖아.’

좋게 말하면 죄짓는 느낌이 든다는 소리지, 나쁘게 말하면 네 얼굴 때문에 도저히 그 짓은 못 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나는 어떻게 하면 그가 상처를 덜 받을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저 잘못 말했다는 강렬한 죄책감만 들 뿐이었다.

말을 하려고 해도 입을 뻐끔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착각인지 뭔지 첼러스의 눈망울이 서서히 축축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위기감에 머릿속에서 시뻘건 불이 깜박였다.

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게, 있지. 처음엔 이러지 않았거든? 네 첫인상은 뭐랄까, 지체 높은 귀족가의 망나니 자제 같은 느낌이었어. 그래서 저 얼굴로 어쩌면 저렇게 바르게 컸나 신기하게 여기기까지 했단 말이지.”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지!’

어쨌든 이미 물은 엎질러졌기에 영혼 없이 떠들어댔다.

움직여, 주둥아리야. 난 모르겠으니까.

“그런데 너랑 함께하면 할수록, 네 성격이 너무 올곧은 거야. 뭐라고 해야 할까, 모범적이라고 해야 하나. 거룩하고, 성스럽고, 고결하고.”

성기사의 표본 같은 사람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걸 알고 나니까 네 얼굴도 망나니 자제가 아니라 하늘에서 갓 내려온 천사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거 있지? 생각해봐.”

나는 예술품을 보고 숨을 헐떡이는 변태처럼 눈을 음흉하게 치떴다.

“거룩하신 천사님한테 ‘키스 좀 하시겠습니까, 천사님. 후후, 나는 좋소.’ 어떻게 그래? 응? 그렇지 않아? 내가 너무 파렴치한 같잖아!”

첼러스의 얼굴이 웃음을 참는 것처럼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열을 올렸다.

“그건 아주 불경한 짓이라고!”

“그러니까, 제가 싫은 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네가 왜 싫어! 잘생겼지, 얼굴 예쁘지, 몸 좋지! 완벽하다고!”

“그런데 죄짓는 느낌이 드신다고요.”

“응. 내가 널 더럽히는 느낌이야.”

첼러스가 작게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눈을 굴렸다.

“곤란하군요…….”

그러더니 내 어깨를 툭 밀쳐 침대에 쓰러트렸다.

‘응?’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첼러스가 윗입술을 슥 핥으며 내 몸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변한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흐트러진 앞머리 밑으로 맑은 눈을 야릇하게 내리뜨며 얘기했다.

“그러면, 제가 파렴치한이 되면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뭣…….”

첼러스가 목 안으로 가둔 것처럼 꽉 막힌 웃음소리를 내며 내 입매를 천천히 핥아 올렸다. 뜨겁고 습한 혀끝이 예민한 입술을 립스틱 바르듯 움직이자 발가락이 꽉 움츠러들었다.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타락한 천사라고 생각하면 쉽겠군요.”

‘아니, 안 쉬워. 안 쉽다고!’

“지금은 어떻습니까?”

습관처럼 미소 짓고 있던 입매가 적당히 비뚜름하게 비틀리고, 맑은 호수빛 눈망울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정염이 득실거렸다. 저런 표정을 짓는 첼러스는 맹세코 처음 본다.

‘부, 부활했어.’

유흥가를 드나드는 귀족가의 망나니 자제 같던 첫인상이 부활했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성스러운 성격으로 저런 얼굴이라니 반칙이잖아.’

나는 울먹거리며 자라목을 했다. 기가 질렸다. 온몸에 뜨거운 피가 돌자, 마족에게 아프게 물렸던 오른쪽 목덜미가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꽃처럼 흐드러지게 핀 첼러스의 물오른 미모도 일그러져 보였다.

‘어지러워…….’

“카카나?”

나는 그의 말을 끝으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응? 그러게 리커버리 약물 만드는 걸 도와줄 테니 얌전히 따르라고 했냐, 안 했냐.”

비브로스는 아니나 다를까, 폭풍 잔소리를 했다.

“직접 만들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피우더니 기어코 쓰러지고. 대체 그 오밤중에 뭘 했던 거냐?”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한다.

내가 입을 가리고 고개를 휘휘 젓자 비브로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침대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하여튼 스승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그가 내 얼굴을 확인하곤 버럭 성을 냈다.

“뭘 잘했다고 억울한 얼굴이야!”

할 말이 많았다. 내가 그렇게 기절해버린 건 첼러스의 탓이라고 항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비브로스가 첼러스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 뻔했다.

비브로스뿐이랴. 아마 용사들도 눈이 뒤집혀서 첼러스를 책망하리라.

사실을 고하자면, 첼러스 탓도 아니었다.

‘악몽 꾸고 발버둥 쳐서 그렇지.’

그것도 모르고, 불쌍한 첼러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지 요 며칠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다 만들어졌나요?”

“거의가 아니라 완성했다. 마나석만 넣으면 돼.”

나는 비브로스가 레스토레이션 마나석을 넣기 전에 서둘러 달려가 막대를 빼앗았다.

“이놈 보게?”

“이후부터는 제가 만들게요!”

“왜? 이왕이면 레스토레이션이 다 녹을 때까지 내가…….”

“방학 끝나서 수업하다 말고 오신 거잖아요. 이것만이라도 제가 하게 해주세요. 네?”

아픈 몸으로 그를 밀어내느라 억지로 힘을 주었더니, 다칠까 걱정되었는지 비브로스가 혀를 차며 연구실 바깥으로 나갔다.

“알았으니까 힘주지 마. 그러다 상처 또 덧난다.”

“감사해요, 교수님.”

“혹시라도 중간에 못 하겠으면 꼭 부르고!”

“알겠어요!”

나는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그리고 황급히 솥으로 걸어가 내 마나를 주입했다.

최근 계속 아팠던지라 모아놓은 마나의 양이 퍽 적었다. 그래도 리커버리 약물 하나 만드는 데는 문제없어서 마나를 주입하고 약물을 완성했다.

부글부글 끓는 약물을 마법 용기에 넣어 식힌 후 마시기 쉽도록 약병에 담았다. 그리고 천천히 흔들어 가라앉는 잔여물이 없도록 만든 후 쭈욱 들이켰다. 몸이 붕 뜨는 것처럼 가벼워지더니 목덜미에 지독하게 남아있던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다.

이렇게 상쾌한 몸 상태가 되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오른손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팔이고 어깨고 뻐근했다.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리고 기지개를 켜자 살 것 같았다.

“카카나!”

그때, 연구실 문을 열고 아다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가 스트레칭 중인 나를 바라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손 그렇게 들어도 돼?”

“이제 괜찮아.”

“다 나은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갑자기 왜 찾아?”

“그런 눈 하지 마. 누가 보면 내가 널 볼 때마다 괴롭히는 줄 알겠다.”

아다르가 킬킬거리면서 걸어왔다.

‘볼 때마다 괴롭히는 거 맞잖아.’

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괜찮은 정보 길드를 찾았어.”

아다르가 테이블에 놓인 약병 하나를 들어 구경하면서 얘기했다. 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찾았다고? 빨리 찾았네?”

“내가 누군데.”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난 체를 했다. 하루라도 밥맛으로 굴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걸까. 신경질적으로 노려보자, 아다르가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넘겼다.

“아무튼, 거기라면 수상한 실험이 진행 중인 신전도 찾을 수 있고 므리나 이소리하에 대한 정보도 의뢰할 수 있을 거야.”

심장이 꽉 조이는 것처럼 아려왔다. 긴장감과 막연한 기대가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껄끄러웠다.

‘물러서지 않기로 했잖아.’

나는 아다르의 검은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방해되는 건 전부 없애버리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쟁취할 거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지체 높은 제국의 황제든,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마족이든, 세상을 지배하는 시간이든 상관없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약물을 조명에 비춰보던 아다르가 검은 눈을 스르르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날카롭고 서늘한 시선이 퇴폐적으로 가늘어졌다. 그가 붉은 입술을 길게 찢어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내가 앉은 의자를 손으로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왜 그런 뜨거운 눈으로 나를 보실까?”

“내가 언제 그랬다고.”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잡아먹고 싶다는 듯이 쳐다보던데.”

“너처럼 맛없는 건 안 먹어.”

“먹어보지도 않고 투정 부리는 거야?”

아다르가 상의를 슬그머니 들쳐 맨살을 보였다. 자잘한 흉터가 하얗게 올라온 조각 같은 근육과 쑥 들어간 배꼽, 그리고 늘씬한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집요하게 쳐다보자 아다르가 장난기 그득한 얼굴로 바지까지 밑으로 살짝 잡아 내렸다. 딱딱한 근육 바깥으로 푸르게 튀어나온 핏줄을 보자마자 손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내 심장 소리 때문에 시끄럽고 정신이 없었다.

“넌 도대체가 정도를 몰라.”

투덜거리자 아다르가 소리 내어 웃으면서 근처로 걸어왔다. 슬금슬금 발을 물렸지만, 눈을 가리고 있어서 멀찍이 도망갈 수가 없었다. 이내 음습한 숨결이 다가온다 싶더니 미끄러운 혓바닥이 내 붉어진 귓바퀴를 삭 핥아먹었다.

“힉!”

“귀여운 소리.”

“죽을래?”

성질을 부리자 아다르가 선심 쓰듯이 변명했다.

“맛없다고 매도하니까 발끈해서 그런 거지.”

“나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럼? 다른 의미론 맛있을 것 같다는 얘기야?”

아다르가 잔뜩 달아오른 내 광대뼈에 쪽쪽 뽀뽀하면서 다정하게 사분거렸다.

“자꾸 500살 산 구렁이처럼 징그럽게 굴래?”

아다르가 또 웃는다. 저 망할 새끼.

“그래서 정보 길드엔 언제 갈 건데.”

“너 나으면 가려고 했는데 나았다니까 오늘 가도 되겠네.”

“지금? 당장?”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직 첼러스와 화해를 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싸운 건 아니었지만, 아직도 자책하고 있을 첼러스를 생각하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대화를 나눠야 하잖아.’

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면 첼러스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게다가 아다르랑 단둘이 가면 가는 내내 괴롭힐지도 몰라.’

그는 나를 계속 곤란하게 했다. 당황하고, 얼굴을 붉히고, 심장이 쿵쾅거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순간을 즐겼다.

그나마 지금까진 다른 용사들이 아다르를 말려줬기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둘이 갔다간 어떤 사달이 날지 알 수 없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물으면 여관에서 하루쯤 쉬어가도 좋지 않겠냐며 정신을 쏙 빼놓을 거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를 홀라당 잡아먹을 놈이었다.

“첼러스도 데려가자.”

“걔를 왜?”

아다르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내 마음이야.”

이렇게 대꾸하면 그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아다르가 불만스럽게 툴툴거리면서 뒤를 쫓아왔다.

“모처럼 단둘이 데이트 할 수 있었는데.”

“너무 실망하지 마. 너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어서 이렇게 조심하는 거니까.”

“뭐?”

별장의 현관을 나가자 가을 하늘의 쨍한 햇빛이 곧장 내리꽂혔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과 가벼운 몸, 화려하게 물든 단풍잎이 사그락거리며 부대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아갈 듯이 상쾌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여름이 완전히 가셨나 봐. 날씨 좋다. 그렇지?”

빙글 돌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을 공기를 한껏 실은 바람이 솨아아, 불어오며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날렸다.

나는 아다르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바람에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얘기했다.

“넌 둘이 있으면 기회를 노려서 무슨 짓이든 할 거잖아. 그래서 미리 조심하는 거야.”

“…….”

“어때? 기쁘지? 내가 너에 대해 잘 알게 되어서?”

대화든 육탄전이든 자기를 속속들이 알아보라고 성을 냈던 아다르다. 이런 식으로 되받아칠 줄 몰랐는지, 여전히 나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언제 그렇게 말재주가 늘었냐면서 능글거렸을 텐데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몇 올 흘러내린 잔머리를 귀에 걸며, 발에 채는 손바닥만 한 단풍잎을 들었다. 그리고 이 단풍잎 크기 좀 보라며 고개를 들었다가 멈칫 굳었다. 아다르가 멍한 얼굴로 날 주시하고 있었다.

‘왜 저래?’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들어 눈앞에 흔들어보았다. 미동도 없다.

‘내가 너무 완벽하게 받아쳐서 넋이 나가버렸나?’

문득, 아다르의 눈이 내게 스르르 굴러왔다.

음영 진 검은 눈이 소름 끼치도록 새까매서 뒤로 흠칫 물러선 순간, 허리에 올가미 같은 팔이 감겼다. 뭐 하는 짓이냐는 소리까지 그에게 잡아먹혔다. 아다르가 내 아랫입술을 강하게 흡입했다.

아릿한 통증이 올라와서 가슴팍을 밀쳤다. 아다르가 달콤한 사탕을 뺏긴 사람처럼, 제 입술에 번진 타액을 빨아먹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자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피가 몰려 징징 울리는 것 같은 입술을 손으로 문대며 버럭 소리쳤다.

“누구 마음대로 키스하래!”

“네가…….”

아다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나는 화내던 것마저 잊고 그에게 다가갔다. 아다르가 피하듯이 고개를 돌리며 슬그머니 내 어깨를 밀었다.

“저리 가.”

“뭐야?”

나는 눈썹을 위로 산처럼 추켜올렸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다르가! 무려 아다르가!

“너 부끄럼 타?”

홍당무처럼 새빨개져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그냥 넘길 내가 아니다. 평소엔 아다르가 나를 놀리지만, 나도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뼛속까지 우려서 그를 놀려먹었다.

아다르가 낭패라는 듯이 두 손으로 아예 얼굴을 가려버렸다. 조막만 한 얼굴이 큰 손에 거의 다 가려졌지만, 불그스름한 귀와 뺨 언저리는 잘 보였다.

“뭐야? 뭐가 그렇게 쑥스러워서 고개도 못 들어? 응?”

“…….”

“설마 나 보면서 야한 생각 했어? 그래서 그래? 대체 무슨 상상을 했기에, 천하의 능구렁이인 네가 어쩔 줄 몰라 할까?”

“그만해라.”

아다르가 경고조로 읊조렸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괜찮아. 다 이해해 줄게. 그러니까 왜 그러는지 말해봐. 응?”

너무 웃어서 광대가 눈을 세모꼴로 밀어 올렸다. 남이 보면 비열하고 졸렬한 표정이라며 손가락질할 것 같은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참을 수가 없다. 나는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면서 계속 자극했다.

“너무 창피해? 그러면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려 봐.”

양의 귀를 친절하게 들어 올리며 그의 턱 부근에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아다르가 윽, 소리를 내며 분한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통쾌해서 목청이 터지도록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그리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까치발을 띄웠던 발을 바로 했다.

“말하기 싫음 말고.”

“네가 너무 예쁘게 웃으니까.”

아다르가 꾹 억눌린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뭐?’

“억!”

그의 말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몸이 비틀거렸다. 아다르가 짧게 혀를 차며 내 손목을 잡아당겨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도 쉽게 균형을 잡지 못했다.

아다르는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나를 꼭 잡아주고 있었다. 그 손이 쓸데없이 따스하고 다정해서, 열기가 옮아온 것처럼 내 목과 머리도 뜨끈해졌다.

“두 분,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나는 나쁜 짓을 하다 부모님에게 걸린 아이처럼 허리를 뻣뻣하게 곧추세웠다. 첼러스가 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근처에 서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와 헐렁한 상의, 야하게 내리뜬 눈망울은 꿈이었다는 듯이 평소와 같은 모습이다. 나는 아다르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지며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아다르가 그런 나를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널 찾으러 나온 거야.”

“상처는.”

“흐악!”

그의 늠름한 몸이 순식간에 코앞으로 당도해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첼러스가 당황한 얼굴로 내 팔뚝을 잡아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속도 조절을 해야 했는데…….”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팍에 손을 댔다.

‘평소엔 일부러 느리게 움직이는 건가?’

생각해보니 용사들이 평범한 사람의 속도로 걸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괜히 심장이 쾅쾅거렸다.

“괘, 괜찮아.”

“목덜미의 상처는 다 나으신 거군요.”

첼러스가 깊이 안도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날 밤, 갑자기 정신을 놓으셔서 놀랐습니다.”

“그거 네 탓 아니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날 악몽에 시달리고 무리하게 움직여서, 그래서 그랬던 거야.”

“그 말을 해주기 위해 일부러 절 찾은 겁니까?”

첼러스가 크게 뜬 눈을 사르르, 휘며 눈웃음을 짓는 순간 아다르가 끼어들었다.

“그날 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전에 카카나가 제 방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밤에?”

첼러스가 잠시 아다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네 방을, 밤에 찾았단 말이지.”

검은 눈망울이 내게 스윽 굴러왔다. 나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첼러스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아, 아무튼! 오늘 잠시 마을을 갈까 하는데, 같이 가고 싶어서 널 찾고 있던 참이었어. 그렇지, 아다르?”

나를 은근하게 주시하던 아다르가 다소 뚱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 정보 길드를 찾았거든.”

“괜찮은 곳을 찾은 겁니까?”

“어찌나 꼭꼭 숨어있던지.”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생색을 냈다.

“다른 애들 다 끌고 가면 눈에 너무 띄니까, 카카나랑 둘이 가려고 했는데 얘가 너도 데려가자고 하잖아.”

그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짜증 난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정보 길드라면 카카나를 데려가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므리나 이소리하에 관한 일에는 직접 참여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평소라면 완고하게 반대했을 첼러스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에 관해선 쉽게 굽혀주는 법이 없는 용사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존중이 므리나 이소리하를 직접 상대하겠다는 내 다짐을 밀랍으로 단단하게 굳혀주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편한 옷에 로브를 뒤집어쓰고 스노아의 방을 찾았다. 거리가 멀어서 그의 텔레포트가 필요했다.

“돌아올 때는 마법 스크롤을 찢으면 돼요. 비브로스 샥스의 별장 좌표가 찍혀 있어요.”

스노아가 첼러스, 나, 아다르에게 차례로 스크롤을 건네주며 설명했다.

“실수로 찢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반만 찢어도 안 돼요. 몸의 반만 이동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요.”

“살벌하게 얘기하지 마. 카카나가 겁먹잖아.”

아다르가 타박했다. 스노아의 투명한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

“역시 제가 함께 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건 안 돼. 세 명도 이미 눈에 많이 띈다고.”

아다르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면 첼러스 대신 제가 가는 건요?”

마법은 무력 이상의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타인을 지키는 데 첼러스가 더 능숙하더라도, 전쟁터 한복판이 아니라면 스노아와 함께 가는 게 효율적이었다.

아다르가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첼러스 얘기를 꺼낸 게 너니, 직접 결정하라는 눈치였다.

스노아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고개를 저었다. 자기에게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첼러스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스노아는 차원균열지대에서 이미 다른 용사들의 원성을 살 정도로 많은 혜택을 받지 않았던가.

혜택이라니.

‘낯간지러워…….’

“첼러스랑 같이 갈 거야. 지금까지 첼러스는 큼, 크험! 함께할 기회가 별로 없었으니까.”

“없긴 왜 없어? 항상 같이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뻔히 알면서 아다르가 볼멘소리를 했다.

“그렇군요.”

스노아는 다행히 아다르보단 성숙한 사람이었다. 언뜻 보면 차가운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풍경이 바뀌었다.

“그냥 텔레포트 해주면 되지, 뽀뽀는 왜 해?”

나는 아다르의 불평을 무시하고 주위를 살폈다. 어둑한 골목이었다. 제법 큰 도시인지, 좁은 골목길로 왁자한 소음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아야.”

뒷골목 특유의 악취에 콧잔등을 찌푸릴 찰나, 손등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아다르가 스노아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을 이로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황당해서 손을 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물었다.

“뭐 해?”

“뭐 하긴. 그 녀석 흔적 지우고 있잖아.”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아다르의 회색 머리통을 후려쳤다. 악, 소리 지른 아다르가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더러워 보이는 인상을 더 험악하게 찌푸렸다.

“네가 무슨 짐승이야? 침 묻히면서 흔적을 지우게?”

“그럴 수도 있지.”

“작작 좀 해. 매번 이럴 것도 아니고. 너만 더 피곤해져. 왜 점점 더 심해지는 건데?”

“나도 당황스럽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퀄리티미엄에서 절대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을 텐데…….”

“퀄리티미엄?”

“못 들은 거로 해.”

아다르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멀찍이 걸어갔다.

‘왜 저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첼러스와 함께 뒤늦게 골목을 벗어났다.

도시는 눈이 돌아가도록 상가가 발달해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마을이나 도시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여태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닌 탓에, 나는 꽤 많은 도시를 눈에 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역도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지나다니는 사람 모두가 부유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곳은 제국에서 몇 없었다.

“설마 여기 황도야?”

“황도는 아니지만, 버금가는 곳이지.”

아다르가 길게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 스노아의 환영마법 덕분에 모자를 쓸 필요는 없었지만 그간 별장에서 편하게 지낸 터라 걱정이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었다. 황도에 버금가는 곳이라면 치안유지군이 많을 것이다. 자칫 소동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다. 정보 길드와 접촉하러 길을 떠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범상치 않은 일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긴장은 했어도 퍽 가벼운 마음가짐이었다. 돈은 많으니까, 적당히 흥정해서 정보만 깔끔하게 사고 나오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상가에서 약초나 장신구를 사들이듯이.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건 푸줏간이 있는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상가가 빽빽하게 들어선 대로변과 달리 근처에 다른 가게 하나 없이 썰렁했다.

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물이 질퍽하게 퍼져있었다. 이곳으로 고기를 사러 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빠서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돌려 가게의 상태를 살폈다. 낡아서 녹물이 불그스름하게 번진 흔적이 있는 나무 간판이 보였다. ‘새벽의 푸줏간’이라고 쓰여 있었다.

‘뭐가 이렇게 음산하냐…….’

쇠고리에 걸린 간판이 바람이 불 때마다 끼익, 끼익, 하는 소리를 냈다. 활짝 열린 푸줏간의 창문은 경첩 하나가 나가떨어져서 덜렁거렸다. 언뜻 보기엔 폐가처럼 보였으나, 그것을 제외하면 멀끔했다. 열린 문 위쪽엔 앙증맞은 새끼돼지 모양의 종까지 달려 있었다.

“안 좋은 시기에 왔나 본데.”

아다르가 오물을 피해 골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의 뒤를 얌전히 따라갔다.

환하게 불이 켜진 푸줏간에 지키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도끼처럼 생긴 거대한 도살용 칼이 벽을 따라 주르륵 걸려 있는 모습이 섬뜩했다.

“윽.”

나는 콧방울을 움켜쥐고 신음했다. 피 냄새가 지독했다.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6인용 테이블처럼 큰 도마에 눈이 갔다. 고기를 썰다 사라졌는지 덩어리 몇 점이 보였다.

‘무슨 고기지?’

피가 쓸데없이 흥건했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선 까막눈이지만, 보통 고기를 매달아 피를 빼고 손질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마가 피 칠갑이 되어있어서 본래 색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고기는 작은데 무슨 피가 저렇게…….”

도마뿐만이 아니었다. 그 근처까지 핏방울이 튀어있었다. 물감을 머금은 붓을 벽에 대고 일직선으로 털어낸 것 같은 흔적이었다.

그 핏자국의 정체를 어렴풋하게 유추한 순간, 전신이 얼음 호수에 빠진 듯 차가워졌다.

‘그럼 저 고기는?’

동시에 아다르가 손을 뻗어 내 눈을 가렸다. 나는 깜깜한 어둠 속을 노려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왜 하필 우리가 올 때 이 난리가 난 거야, 성가시게.”

아다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어조였다. 첼러스가 정갈한 걸음걸이로 푸줏간을 한 바퀴 휘이 둘러보았다.

“편하게 복귀하긴 그른 것 같습니다만.”

“그러네.”

“왜? 무슨 일인데?”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아다르가 로브에 달린 후드를 내 머리에 깊숙이 눌러 씌웠다. 동시에 검은 인영 수십 명이 우리를 에워쌌다.

아다르가 희미하게 떨고 있는 내 몸을 제게 딱 붙이며 고개를 불량하게 기울였다.

“우리는 아무 관계 없다 해도 믿지 않겠지?”

“판단은 마스터께서 하실 거다.”

무뚝뚝한 대답이 들려왔다.

우리는 걸음을 옮기는 수상한 남자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보이진 않지만 날카로운 무언가가 목덜미를 노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했다간 찔릴 것이다.

[나중에 또 오면 그건 그거대로 귀찮아지겠지?]

이 와중에 아다르가 반지의 텔레파시 기능을 이용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어떻게 된 신경줄인지 황당했다.

‘애초에 아다르는 뒷세계 사람이었지.’

나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상기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다른 정보 길드는 어떻습니까. 카카나에게 이런 불결한 곳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만.]

[어쩔래?]

‘무서워 죽겠는데 묻지 좀 마라.’

나는 로브 안으로 손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반지를 잡았다. 반지를 잡아야만 텔레파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걷고 있는 남자에게 의심을 살까 봐 식은땀이 흘렀다. 하여튼 이놈의 용사들은 긴장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럼 이 상황은 어떻게 타개하려고?]

아다르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다 죽여야 하지 않을까?]

‘뭐라고요?’

[보내 달라고 하면 얘네들이 퍽이나 보내주겠어? 그렇지, 첼러스?]

[마법 스크롤을 찢는 시간조차 주지 않을 겁니다.]

[맞아. 추적자도 붙을 테고. 융통성 없고 무식한 게 이 바닥이거든.]

추적자야, 스노아에게 돌아갈 수만 있다면 환영 마법을 바꾸어 해결할 수 있다.

물론 단점도 있다. 노레스나 이블라, 비브로스에게 얼굴이 익숙해지도록 다시 공을 들여야 했다.

나는 신중하게 대꾸했다.

[일단 마스터란 사람을 만나보자.]

[그래, 그럼. 만나게 해줄 것 같진 않지만.]

푸줏간의 뒷문과 이어진 계단을 적어도 3층은 올라간 듯싶었다.

드디어 계단에서 복도로 걸음을 돌린 남자가 끄트머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와 비교도 되지 않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나는 숨을 멈추고 어깨를 움츠렸다. 아다르가 내 머리의 후드를 더욱 깊이 눌러쓰게 했다. 이젠 앞에 선 남자의 발뒤꿈치도 보이지 않았다. 마룻바닥만 보였다. 그런데 점점이 튄 핏방울이 내 발 근처까지 퍼져있는 것이 보였다. 속이 메슥거렸다.

후우, 하고 누가 연기를 내뿜는 소리가 났다. 지독한 시가 냄새가 피비린내 언저리를 맴돌았다.

“끝났어?”

앞에서 굵직하고 낮은 음성이 들렸다.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저것들은 뭐야. 살릴 필요 없다니까.”

쯧, 남자가 혀를 찼다.

“칼 좀 가져와 봐. 도살용이라 기가 막히게 썰릴 거야.”

목구멍에서 신물이 울컥 올라왔다.

토기가 치밀어서 쓴 침을 계속 삼켰다. 시가와 피 냄새가 섞여서 울렁거리는 속을 부채질했다. 여기서 게워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참았다.

“야, 신참. 이름이 뭐랬지? 도리스? 오리스?”

“스올리스입니다.”

“그래, 스리스. 이리 와. 오줌 그만 지리고. 그렇게 무서웠어?”

치이익, 물인지 핏물인지 시가를 꾹 눌러 불을 꺼트리는 소리가 났다.

“이 바닥이 그래. 싹 죽여야 다시는 안 기어올라. 너도 익숙해져야 할 거야. 한 명 골라. 처음이 어렵지 두 번부턴 안 어려워. 칼 똑바로 쥐고.”

“마스터.”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남자가 그를 말렸다.

“왜?”

“이들은 피트의 끄나풀이 아닐 수도…….”

“그래. 우린 손님이야.”

아다르가 남자의 말을 잘라내며 말했다.

“조직 싸움이라도 난 것 같은데, 우린 상관없어. 의뢰하러 왔다고.”

조직의 마스터가 말없이 지켜보는 느낌이 났다.

“흐음.”

그가 짧게 침음을 삼키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얘네들 묶어서 골방에 박아놔.”

“그럴 시간 없지 않겠어?”

아다르가 덜덜 떠는 내 등을 삭삭 쓰다듬으며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남자가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경고했다.

“이봐. 자꾸 내 말 끊으면 재미없어.”

“네 말대로, 끄나풀은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싹 죽여야 후환이 없지.”

“뭐?”

“마스터란 인간이 저리 둔감해서야.”

비난하기 무섭게, 우지끈 나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비명을 삼키며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소리만 들어선 천장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 구멍으로 수많은 인기척이 우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이들을 적대하는 놈들의 끄나풀임이 확실했다.

“이런, 젠장!”

남자가 욕지거리를 하는 동시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푸욱, 푹, 하는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너 마스터 아니지?”

아다르가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구석으로 후다닥 뛰어가서 머리를 처박고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내장까지 뱉어낼 기세로 꿀렁거리고 있자니, 첼러스가 근처로 뛰어오는 소리가 났다.

그가 눈물 콧물 질질 짜며 토하는 내 끈적한 뺨을 닦아주었다. 그리곤 더럽지도 않은지 맨손으로 토사물이 묻은 입가까지 닦아주었다. 창피해서 팔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기운이 없어서 금세 포기했다.

뜨거운 손바닥이 차갑게 식은 얼굴 가죽을 연신 쓸어주자 조금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괴로우십니까? 죄송합니다. 저희 잘못입니다.”

“나는 괜찮, 웨에엑.”

나는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 구역질을 했다. 자꾸 도마 위에 있던 그 살덩어리가 떠올랐다. 속을 다 게웠는지 아무것도 안 나오는데 위장이 몸부림쳤다.

“피, 우욱, 냄새 때문에, 웩…….”

“아다르!”

첼러스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아다르를 불렀다.

“많이 괴로워?”

아다르가 헐레벌떡 근처로 뛰어왔다. 기겁을 한 목소리였다. 나는 걱정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다르의 어깨를 밀어젖히며 몸부림쳤다.

“저리 가! 너한테서 피 냄새가, 웨엑.”

이곳의 끄나풀들을 아다르가 단숨에 해치웠다는 걸 피 냄새로 알았다.

나는 바닥을 향해 왈칵, 위액을 게워냈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탈진해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보통 녀석들이 아니야! 저들을 잡아!”

남자가 발작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몸이 들렸다. 첼러스가 나를 안정적으로 받치고 뛰기 시작했다.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곳으로 가자. 거기서 대화하는 게 낫겠어.”

‘대화고 뭐고 상대방은 눈이 뒤집혀서 우릴 죽이려는 것 같은데.’

그러나 용사들에겐 상대방의 의도는 상관없었다. 용사들이 다른 방으로 가고 싶다면 가는 거고, 대화를 나누겠다면 나누는 것이었다.

뒷세계는 힘이 곧 법이다. 나는 로브로 대충 입가를 닦아내고 코를 첼러스의 목덜미에 박았다.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났다. 혹은 샤워 후에 바르는 향유 냄새와 비슷한 체취가 피 냄새를 지워냈다.

‘첼러스의 향기로 샤워하는 기분이네.’

비린내가 흐려지자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었다.

나는 파리해져서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늘어졌다. 정보 길드고 나발이고 다 꼴 보기 싫어졌다.

우리는 계단을 널뛰어 지하까지 내려가서, 먼지가 자욱하게 깔린 무기창고로 들어갔다. 살짝 서늘한 기온이 감돌았다.

널찍한 공간 가운데에 서자 검은 옷을 입은 조직원들에게 순식간에 포위되었다. 용사들은 그들이 죽일 기세로 우릴 둘러싸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아다르는 피 냄새가 내게 끼칠까 봐 멀리서 발만 동동 굴렀고, 첼러스는 내 등을 어린애 잠재우듯이 토닥였다.

나는 그들의 걱정까지 피곤해져서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괜찮으니까 호들갑 좀 그만 떨어.”

“네가 지금 네 얼굴을 못 봐서 그래.”

아다르가 사색이 된 낯짝으로 말했다.

“지금 죽을 사람처럼 창백하다고.”

이렇게 심하게 토한 건 오랜만이긴 했다.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몇 명이 우릴 지켜보고 있는지 알긴 하는 건가. 쪽팔려서, 원.

나는 버둥거려서 첼러스의 품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으나 그럭저럭 설 수 있었다.

“정체가 뭐냐!”

남자가 소리쳤다.

‘험상궂은 곰처럼 생겼네.’

내 후드는 벗겨진 지 오래였다.

나는 남자를 비롯한 조직원들을 유심하게 살폈다. 복면을 쓰고 있어서 마스터 말곤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우글우글 모인 개미 떼 같았다.

‘그런데 보통 두목의 위치일수록 더 얼굴을 숨기지 않나?’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얼굴마담도 아니고 뭐지?’

“아, 진짜.”

아다르가 희게 질린 내 얼굴과 조직원들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마를 짚었다.

“계속 짜증 나게 하네.”

그가 화가 났음을 깨달았다.

음울하게 빛나는 눈이 시커먼 사신의 그림자처럼 주변을 훑자, 조직원들이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끄나풀들을 일시에 도륙한 남자였다. 그들도 머리란 게 달려 있다면 눈앞의 작자가 말도 못 하게 무서운 괴물이란 걸 진작 눈치챘을 것이다.

마스터의 얼굴 또한 식은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스터를 데려와. 좋은 말로 할 때.”

아다르가 경고했다.

“마스터는 나야.”

“헛소리 말고.”

아다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직접 끌어내는 수가 있어.”

“이 새끼……!”

남자가 품에서 무기를 꺼내려는 것처럼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갑자기 지하창고의 문이 열리며 호리호리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만, 타제로.”

여태 마스터를 흉내 내고 있던 남자, 타제로가 흠칫 몸을 굳혔다.

나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낭창한 몸매의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타제로와 달리 가볍고 부드러운 느낌의 남자였다. 그러나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의 시선이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뱀처럼 우리를 스쳤다.

“여, 여긴 어쩐 일로…….”

타제로가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조직의 진정한 마스터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아다르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다르도 마찬가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마스터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다…….”

“쉿.”

첼러스가 내 손을 잡아 말리며 검지로 입가를 눌렀다.

나는 휘둥그렇게 뜨인 눈으로 새삼 남자를 유심하게 살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형체 없는 그림자 같은 남자였다. 눈앞까지 걸어왔는데도 인기척이 없어 꼭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다르는 그때까지도 남자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혼자 헛웃음을 터트렸다.

“흑사회 땅바닥이 워낙 좁으니 살아있으면 언젠가 만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다르가 돌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일 줄은 몰랐어, 반크.”

아다르가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검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반크가 오싹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제 이름을 알고 계시는군요.”

그게 내 귀에는 죽어달라는 의미로 들렸다. 반크가 조직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아다르가 망설임 없이 반지를 뺐다. 당연히 나와 첼러스는 기겁했다.

“야, 너 뭐 해!”

“미치셨습니까!”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서, 첼러스는 여기서 더 귀찮아지고 싶지 않아서 내지른 호통이었다. 그런데 손을 까닥여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되는 반크가, 얼음처럼 굳었다.

가늘어서 뜨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실눈이 한계치까지 벌어지고, 얇고 미끈한 입술이 어리벙벙하게 벌어졌다.

반크가 아다르의 본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러다 아다르 얼굴에 구멍이라도 낼 기세였다.

“마스터?”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무기를 고쳐 잡던 타제로가 의아하게 반크를 불렀다. 이윽고 반크가 아다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스터?”

상황을 선뜻 인지하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마스터와 마스터?

‘뭔 상황이야?’

“오랜만이야.”

아다르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반크가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아다르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거의 몸에 밴 행동이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타제로와 조직원들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반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정신 차렸다. 마스터가 고개를 조아렸다면 그들도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우릴 죽일 듯이 둘러싼 인물들이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차례로 몸을 숙였다. 절대복종의 자세였다. 길거리를 지나는 황제가 이런 기분일까. 이제 우리보다 높은 곳에 머리를 두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반크의 얼굴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뒤늦게 감을 잡았다. 할릭의 정체를 알게 된 노레스가 그런 얼굴이었고, 스노아의 얼굴을 처음 본 물의 현자 아레사가 그런 얼굴이었다.

과거,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범죄를 추적해 해결했었다는 청부살인업체 ‘여명’. 지금까지 그 명성이 남아있어 음유시인과 연극의 소재로 쓰이는 전설 같은 조직.

반크는 여명의 조직원이었다.

그리고 먼 과거, 여명의 리더는 아다르 아로아였다.

***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제3자각자면 200년에서 400년 정도 살던가. 너도 징글징글하게 오래 살겠구나.”

아다르가 블루베리를 입에 탈탈 털어 넣으며 얘기했다. 반크가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고서 대답했다.

“마법사라면 현자라고 불릴 위치니까요.”

“현자면 6에서 8서클 사이던가?”

“예.”

나는 알콩달콩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반크의 집무실 오른편에는 타제로가 두 손을 위로 치켜든 채 벌을 서고 있었다. 이게 무슨 우스꽝스러운 연출인지 모르겠다. 타제로는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수상한 녀석들을 쫓았는데 알고 보니 마스터의 스승이라니. 운명의 장난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에게 짧은 애도를 보냈다.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라고 했지.’

그렇게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닌 자가 마스터라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만날 인연이었다는 거지.’

나는 턱을 괴고 둘을 바라보았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여명 애들을 다 죽여버리다니. 제국도 참 너무하지 뭐야.”

장난스러운 얼굴과 다르게 아다르가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검은 눈이 그릇에 굴러다니는 블루베리들을 의미 없이 좇고 있었다. 속을 읽을 수가 없다.

반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원들은 두목을 아버지처럼 따랐으니까요. 제국 입장에선 성가셨을 겁니다.”

킥, 아다르가 목 안으로 짧게 웃음을 삼켰다

“여동생 살리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여동생도 죽고 여명도 죽고. 다 죽어버렸네.”

반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나는 공기가 불편해져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런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하면 좋은지 모른다. 화제를 돌려도 상처일 것 같았고, 위로해도 그의 마음만 더 쓸쓸하게 만들 것 같았다.

“새 출발 하지 않고 왜 아직도 이 짓거릴 하고 있어?”

“제가 할 줄 아는 건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두 손을 맞잡은 반크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마스터와 용사들이 차원의 균열에 빨려 들어갔다는 제국의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제3자각자가 되어 오래 살게 되니, 갑자기 마스터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졌죠. 흐릿해질 수 없는 기억인데도.”

“수상한 냄새를 맡고 일부러 조직을 키웠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 만나리라 생각했습니다. 살아 계시다면 말입니다.”

“정확했네.”

반크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여명의 숨겨진 조직원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제국의 은밀한 숙청에서 살아남은 건 천운이었으니까요.”

“지금은 나에 대한 기억이 전부 돌아온 거야?”

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게도요.”

“어떤 건방진 마법사가 그러더라.”

아다르가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블루베리 몇 개를 집었다.

“존재 마법을 파훼하는 방법은 잊힌 존재와 그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자의 맞대면이라고.”

아다르가 블루베리 하나를 집더니 내 입에 넣어주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았지만 거부하지 못하고 우물우물 씹었다. 아다르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지금 무슨 심정인지 모르겠다. 아다르가 내게 집중하니 반크의 시선도 내게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만난 사람들만 기억이 돌아오지만.”

“그렇습니까.”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네.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존재 마법을 알게 되었는데?”

“…….”

“어디까지 알고 있어?”

아다르가 물었다.

“타제로.”

반크가 이름을 부르자 타제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꾸벅 허리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남아있는 자들은 반크와 용사들, 그리고 나뿐이었다.

“황실이 마족에게 먹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휘둥그렇게 뜨인 눈으로 반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는 아주 긴 세월을 암흑 속에서 지냈습니다.”

반크가 담담한 어조로 설명을 이었다.

“그 오랜 세월 내내 제국의 뒤를 캤습니다. 마족은 뒷세계부터 먹어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모를 수가 없었죠.”

“…….”

“황실의 마법사들은 오만합니다. 석판에 눈이 돌아가 차원균열지대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요.”

‘그러고 보니, 아터니 시르부스라는 그 늙은 마법사도 입이 가벼웠지.’

밀리엄을 괴롭히며 마족이니, 혈판이니 조심하지 않고 마구 입을 놀렸었다.

“그러니 하명하십시오. 마스터를 위한 조직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다르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

마탑주 올리넨 아비스는 뒤늦게 마법의 재능이 발현되어 마탑주가 되었다고 한다. 늙은 모습이지만, 사실 100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나이였다. 나이 들어 몸의 시간이 느려진 탓이었다.

초월자가 되면 가장 젊었을 적의 시절로 회귀하여 시간이 멈추지만, 그건 초월자의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올리넨은 젊은 쪽에 속한 사람이었다. 나는 입을 가리고 홀홀홀 웃는 마탑주 할머니와, 이블라에게 머리를 쥐어뜯기고 있는 중인 현역 용병왕 노레스와, 제국의 암흑 조직 위를 군림하는 최대 규모의 정보 길드 ‘새벽’의 마스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거물들이 나란히 앉아 홍차나 홀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현실감이 없었다. 세간에서 잊힌 비운의 용사들까지 모여서 바글바글했다.

‘황녀까지 있었으면 숨 막혀 죽을 뻔.’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녀가 있었다. 마탑주, 용병왕, 새벽의 마스터, 황녀, 그리고 용사들이 둘러앉아 심각한 논의를 거친 참이었다.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황녀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홀랑 사라져버렸지만 말이다. 나머지는 느긋하게 얘기나 나누자며 자리에 남았다.

서로 하는 일이 완전히 다른 거물들끼리 모여 앉아서 대체 무슨 얘기를 더 하자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다. 나 같은 찌끄러기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할머니, 마탑엔 열 명의 현자가 있죠?”

나이 120살은 먹은 노레스가 자기보다 어린 100살짜리 마탑주 할머니, 올리넨에게 물었다. 혼란스러워졌지만 마른세수를 하는 것으로 참았다.

“그래요.”

“그러면 현자들도 모두 모아서 하는 게 어때요?”

“믿을 만한 자들부터 섭외해야지요.”

올리넨이 신중하게 답했다.

“마족의 혈판을 찾아 부수는 작업은,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아야 하니까요.”

그렇다. 오늘 우리는 믿을 만한 제국의 거물들과 함께 마족에게 대항할 방법을 논의했다. 노레스에게도 마족의 존재를 알린 참이었다.

마족은 인간의 몸에 기생하고 있다. 숙주를 죽여도 인간만 죽을 뿐 마족은 해할 수 없다. 물론 방법이야 있다. 신수의 독을 이용하는 것이다.

폭시의 이빨에서 분비되는 독은 마족에게만 드는 것으로, 그들을 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독을 따로 채취하면 특유의 효능이 사라져버렸다. 무기에 발라 마족에게 휘두를 수 없다는 뜻이었다. 효능이 사라지는 원인은 대강 짐작이 되었지만, 쓸 만하게 만들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혈판을 부수면 돼요.]

그때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황녀였다.

그녀도 용사들과 내가 두문불출하는 동안 다양한 정보를 모았다고 했다. 황실은 마족의 소굴이니, 기회가 우리보단 많았을 것이다.

[숙주를 죽이면 마족은 다른 인간에게 기생할 수 있어요. 그러나 혈판을 부수면 중간계에서 완전히 추방되죠. 매개체니까요.]

희망적인 내용이었다.

우리는 혈판 부수는 작업을 중요한 일 중 하나로 점찍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신전을 찾는 일이었다. 마족이 필멸 저주에서 벗어나면 혈판을 부순 일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실험부터 막아야 했다.

차원균열지대의 늙은 마법사, 아터니는 실험이 ‘신전’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제국에서 헬리스를 모시는 신전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많은 신전 중 어디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내는 작업은 새벽의 마스터인 반크가 맡게 되었다.

나머지 인원은 반크가 정보를 모으는 동안 혈판을 찾아 부수기로 입을 맞추었다.

[마족에게 씌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황녀는 마지막에 그렇게 주의를 주었다.

[혈판은 중요한 매개체예요. 마족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니, 부서진 혈판을 중심으로 우리의 흔적을 찾으려 들 거예요. 마족이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들 수 있다는 소리죠.]

어떤 방식으로 숨어드는 거냐 물었지만, 황녀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글쎄요, 미적지근한 답만 내놓고선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용사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이미 황녀가 경고하기 전에 혈판을 부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원균열지대에서 마족들을 해치운 직후의 일이었다.

“혈판을 부수는 건 우리만 하는 게 좋겠어.”

할릭이 초콜릿 쿠키를 먹으며 말했다.

“벌써 부순 적이 있거든. 위험한 물건이라면, 이미 손을 댄 사람들이 하는 게 좋을 거야.”

거물들이 힘을 합쳐 혈판을 부순다니까, 이제야 일이 착착 진행되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규모가 큰 사건은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 안정감이 있네.’

나는 구름 모양의 쿠키를 먹으며 생각했다.

“카카나 씨는 따로 내고 싶은 의견이 없나요?”

올리넨이 우아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나는 무려 마탑주가 내게 말을 걸어줬다는 사실에 황송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나 같은 들러리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되는 건지 의문을 느끼고 있던 있었다.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겸연쩍게 웃으면서 대답했더니 올리넨의 초록색 눈이 동그래졌다.

“카카나 씨 덕분에 모두가 이 자리에 모일 수 있었을 텐데요.”

“에이, 아니죠. 여러분들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들러리죠, 들러리.”

저런 거물들과 내가 한 부류라니 말도 안 된다. 나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극구 부인했다.

진저리를 치자 올리넨은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퍽 의아한 눈치였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척하며 가방을 뒤졌다.

“그러고 보니, 여러분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요. 황녀님한테는 아까 줬고.”

나는 네 명분의 약병을 테이블 위로 꺼냈다.

“리커버리 약물이에요. 용사들은 제가 따로 챙기면 되지만 여러분들은 평소에 저랑 떨어져 있잖아요.”

그리고 차례로 노레스, 이블라, 반크, 올리넨에게 건네면서 설명을 이었다.

“죽은 사람은 못 살리지만, 크게 다치더라도 살아만 있으면 이 약물로 해결이 될 거예요.”

이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마족들을 상대하는데 이 정도는 챙기고 다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모두의 시선이 내게 한참 머무는 느낌이 났다. 나는 의아해서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런 걸 주면서 들러리라고요.”

노레스가 반쯤 해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환상물약사전에 나오는 약을 알사탕처럼 나눠주는 본인이 괴물 같다는 생각은 안 해요?”

“안 하는데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즉답했다.

“물론 내가 좀 대단한 치료사긴 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탑주, 용병왕, 제국 제일 암흑조직 마스터에 비할 바는 아니죠. 용사들도 마찬가지고요.”

“…….”

모두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 채 침묵했다.

“그 얘기 비브로스 교수님한테도 똑같이 해봐.”

이블라가 체념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기가 죽어서 되물었다.

“왜? 나 방금 이상했어?”

“응. 완전.”

나는 방금 한 얘기를 비브로스에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어렵지 않게 분노하는 교수님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 기준이 이상하다는 건 사립학교 뮤나스에서 깨우친 바가 있었다. 그러니 이블라의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별로 실감은 안 나지만 말이다.

낯이 뜨거워져서 어깨를 움츠렸다. 창피했다.

“얘가 원래 이래. 익숙해지는 게 좋을걸.”

아다르가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분위기를 바꿨다.

“저는 이만 일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반크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방을 나섰다. 나는 멍하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카나?”

“나 반크 씨에게 잠깐 할 말이 있어서!”

다섯 명의 용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드르륵,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도끼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따라오지 마!”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아버렸다.

반크는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복도 너머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 것 같아서 전력을 다해 뛰었다. 거리가 이상하리만치 좁혀지지 않았다. 그는 꼭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을 뛰고 나서야 뒤꽁무니에 따라붙을 수 있었다.

“헉, 허억, 왜 이렇게 빨라요?”

“아, 이런, 카카나 님.”

반크가 그제야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제게 볼일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저는 이전엔 암살자였으니까요.”

반크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보법(步法)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마스터와 함께 다닐 때 느껴보신 적이 없습니까?”

“아뇨, 전혀요.”

아다르는 항상 내 속도에 맞춰 걸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들을 자꾸 편하게 대하는 이유도, 평소엔 너무 평범하기 때문이다. 초월자가 되어본 적이 없으니 내게 어떤 배려를 베풀고 있는지조차 아리송했다.

반크가 놀란 것처럼 멈칫했다. 그러나 내가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을 무렵엔 이미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시군요.”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구나.’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허리를 폈다. 반크는 키가 컸다. 몸이 말라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느낀 반크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의뢰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이쪽으로 오시죠.”

이곳은 정보 길드 ‘새벽’의 본거지였다. 은밀하게 숨어 의견을 나누기엔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둘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가 금방 마련되었다. 반크가 빈 객실로 들어가 의자를 빼주었다.

‘귀족 대하듯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그의 예절을 어색하게 느끼면서 자리에 앉았다. 반크가 맞은편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의뢰 내용이 무엇인가요?”

기다리던 질문이 떨어졌다. 내 발로 정보 길드까지 걸어와 의뢰를 맡기기까지 속을 스치던 숱한 갈등과 두려움들이 떠올랐다.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다가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의 뒤를 캐 줬으면 해요. 이름은 므리나 이소리하.”

나는 가방에서 화폐가 두둑하게 든 주머니를 꺼냈다. 얼마가 들지 알 수 없어서 돈을 많이 챙겨왔었다.

“황실치료사예요. 사소한 정보라도 좋아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어서, 알아내는 대로 소식을 전해줬으면 좋겠어요.”

“흐음…….”

반크가 느지막하게 침음을 삼키며 돈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실눈이 의중을 알 수 없게 접혀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런 점은 아다르와 똑같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저 같은 사람 앞에선, 먼저 자기의 패를 보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카카나 님.”

“패요?”

“지금은 손님이시니, 돈이 카카나 님의 패가 되겠지요.”

그가 황금빛이 너울거리는 돈주머니를 내게 밀어주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돈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것보다 더 있어요.”

내가 다급해져서 말하니, 반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료로 알아내 드리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네? 왜요?”

그러고 보니 반크는 나를 계속 ‘카카나 님’이라고 불렀다. 그가 아주 당연한 사실을 얘기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카카나 님은 마스터의 소중한 분이 아니십니까.”

내 황당하단 얼굴을 본 반크의 입술이 소리 없이 미소를 그렸다.

“마스터께선 카카나 님을 사랑하고 계시지요?”

이번엔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말도 못 하고 입을 뻐끔뻐끔 움직였다. 반크가 따스한 온기가 스민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고 있노라니 더 열이 올랐다. 손부채질을 하면서 억지로 말문을 텄다.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깊은 상관이 있죠. 저는 마스터의 심복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반크의 어조가 흐릿해졌다.

“그러니 마스터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겁니다.”

“그 말은, 아다르가 이런 걸 원할 것 같기 때문에 무상으로 해주겠다는 말이에요?”

말투가 자연히 뾰족해졌다.

반크가 의아하게 날 바라보았다. 나는 돈주머니를 그에게 신경질적으로 밀어붙였다. 거의 집어던지듯이 밀어 재낀 탓에 주머니가 탁자 밑으로 미끄러지려고 하자, 반크가 서둘러 주머니를 잡았다. 짤그랑,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받아요. 돈.”

“기분 나쁘게 해드렸다면…….”

“예! 기분 나빠요!”

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잘 들어요, 반크 씨. 이건 내 일이에요. 그리고 전 당신에게 정식으로 의뢰를 하려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 거고요.”

“…….”

“므리나 이소리하에 대한 정보는 제게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얼마나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감히 제 인생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예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당신의 마스터가 바라는 일이니 뭐니, 그런 감정적이고 물러터진 이야기를 들으려고 의뢰를 맡긴 게 아니에요. 아시겠어요?”

이런 말을 듣게 될 줄 몰랐던 모양이다. 반크의 실눈이 놀란 기색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평소에 의뢰를 받을 때도 그렇게 감정적으로 말해요? 그렇게 일해도 실수 없이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전지전능하면 인정할게요.”

반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또 아닌가 보네요? 그럼 뭔가요?”

나는 웃음기가 조금도 배어 나오지 않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제가 지금 우습게 보인 건가요?”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반크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바로 사과를 하시니 다행이네요. 아니었으면 주먹을 날리려고 했거든요.”

아다르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그렇지, 나도 성격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반크가 아까보다 희게 질린 얼굴로 조곤조곤하게 설명했다.

“카카나 님을 우습게 봐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마스터께 다시 소중한 분이 생긴 게 기뻐서…….”

반크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전쟁 이후에 용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을 들은 후로 계속 기운이 없었다. 아무래도 심복인 자기가 아다르를 지키지 못한 데다, 구해내지도 못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래서 내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던 건가.’

뱀을 닮아 피부를 찌르면 피도 나오지 않을 것처럼 생겼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나는 마음이 풀어져서 팔짱 끼고 있던 팔을 내렸다. 반크는 표정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아다르를 보며 그렇게 기뻐하고 있는 줄 몰랐다.

“아무튼, 그 돈 받아요.”

“이건 너무 많습니다.”

“팁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고집을 피웠다. 돈은 많았다.

“부담스러워지라고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똑바로 처리해줘요. 완벽하게, 한 치의 틈 없이,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말고.”

므리나 이소리하를 생각하니 자동으로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그녀가 모시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게 했던 만행들이 그녀의 주인을 위한 실험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끔찍한 비밀이 심연처럼 깊은 곳까지 퍼져있을 것이다. 그녀와 누가 엮여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거물이 튀어나올 거라는 직감이 있었다.

반크는 어느새 정보를 다루는 능숙한 장사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다르의 심복이 아닌, 한 조직의 마스터로서 나를 대하고 있다. 그걸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끈적끈적했다. 그것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자, 날 주의 깊게 관찰하던 반크가 작게 중얼거렸다.

“왜 빠지셨는지 알 것 같군요.”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닙니다.”

그가 돈주머니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뢰를 받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겨우 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내겐 가장 의미 있는 한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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