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판도라의 상자 (28/43)

Chapter 4. 판도라의 상자

“가여운 카카나.”

몽롱한 꿈에 잠겨 있는 것처럼,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바드가 문득 중얼거렸다. 줄곧 옆에 앉아 그를 노려보던 아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바드를 타박했다.

“바드. 너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끼익끼익—

흔들의자에 앉아 영혼 없이 몸을 흔들던 바드가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창가에 앉아있던 까마귀 몬스터가 까악, 소리를 내며 울더니 푸드득 하고 날아갔다.

아무스는 미간을 설핏 찡그린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래 오크들이 살던 서식지여서 아직 희미하게 악취가 났다. 몬스터가 자주 나와 사람이 살지 않는 드넓은 늪지대 위에 나무로 된 길을 띄우고, 또 그 위에 집을 지은 곳이었다. 기운이 차고 습해서 오래된 오두막집의 틈마다 이끼가 끼어있었다.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악쓰지 마.”

“카카나 페아가 어디 있는지 당장 말해.”

아무스가 무섭게 얼굴을 굳히고서 요구했다. 누구 하나 죽일 기세로 테이블을 친 탓에 그렇지 않아도 낡은 책상이 두 쪽으로 쩍 갈라지며 쓰러졌다.

하지만 바드는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아무스가 이를 벅벅 갈며 소리쳤다.

“용사들을 그냥 놓아준 것도 모자라 하급마족까지 죽여 버리다니, 너 그러다가 반감 산 동족들한테 살해당한다고!”

“알 게 뭐야.”

바드가 흐물거리는 오징어처럼 흔들의자에 축 기대어놓았던 고개를 까딱이며 대꾸했다. 아무스가 제 답답한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퍽 쳐대며 숨을 골랐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드가 픽 웃으며 그의 속내를 푹 찔렀다.

“이것까지 계획에 두고 날 중간계로 끌어들인 거 아니었어?”

멈칫 굳은 아무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경고조로 뇌까렸다.

“바드.”

“나한테까지 연기할 거 없어, 아무스. 나는 제멋대로인 녀석이긴 하지만, 네 음침한 속내에 가장 근접해 있는 건 나일 테니까.”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아무스가 이마를 짚으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네가 일찍 죽어버리는 건 내 계획에 없는 일이야.”

“그래? 그건 의외네.”

바드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순간 욱한 듯 아무스가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나 간신히 분노를 잠재우고 억눌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동족들이 군대를 형성해서 용사들을 잡으러 가는 게 아니라 너부터 족치러 올 거라고.”

“카카나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너무 궁금해.”

바드가 아무스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딴소리를 했다.

“하아…….”

아무스가 쪼글쪼글해진 미간을 검지로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바드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걸 새삼스럽게 상기해낸 얼굴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드는 카카나 생각뿐이었다.

바드는 상급마족의 실험체로 살아왔다. 그는 저와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 전혀 다른 성정을 지닌 카카나를 뺏기고 싶지 않은 장난감처럼 여겼다. 제 위태로운 목숨보다 신경을 쓸 정도로 말이다.

“내 파편이 지금 카카나의 마음속 어둠에 상주하고 있잖아.”

“그래서 지금 동족들이 위치 알려달라고 혈안이 돼서 닦달하고 있는 거 아냐!”

아무스가 바드의 흔들의자를 검은 연기로 마구 흔들어대며 성질을 냈다.

“너는 네 장난감 뺏기기 싫어서 이곳에 잠적해있는 거고!”

뾰족한 어투로 현실을 짚어주는데도, 바드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가 새로 차지한 성인 남성의 몸은 이전과 달리 건강했음에도, 붕대로 감은 목을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카카나의 마음속 어둠은 신기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희생적일 수 있는 걸까?”

“뭐?”

“나는 살기 위해서 친구들을 모두 제물로 바쳤어. 나 대신 죽은 하급마족의 수만 오십이 넘어갈 거야.”

언제든 독설을 뿜을 수 있도록 살짝 벌어져 있던 아무스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바드가 그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앤 그러지 않았어. 그래서 강한 녀석일 줄 알았는데, 모순적으로 너무 약해서 그런 거더라.”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황당하지?”

바드가 흥미롭게 눈을 반짝이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정에 한해선 얼마나 마음이 나약한지, 타인을 사랑하는 것조차 무서워하고 있어.”

“그런데?”

“이렇게 소극적이고 나약한데, 어떻게 그게 강인함의 원동력이 될 수 있지?”

바드가 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얘기했다.

“이런 약해빠진 정신머리로 어떻게 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느냔 말이야.”

“…….”

“너무 나약해서, 소중한 사람이 상처 입는 것조차 견디질 못해. 그래서 강해지려 하고 있어. 신기하지?”

바드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난 이 모순이 참을 수 없으리만치 흥미로워.”

바드의 눈에는 이제 흥미가 아닌 광기 엇비슷한 것이 어려 있었다.

아무스는 별다른 대답 없이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도 아니었다.

‘카카나 페아가 단순히 신기해서 저러는 게 아니야.’

아무스가 착잡하게 찌그러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검은색 수정구슬을 들여다보는 바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정구슬 안에선 고문에 가까운 실험을 당하면서도, 제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는 과거의 카카나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것을 웃는 얼굴로 보는 모습이 소름 끼칠 만한데도, 아무스는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쟤는 자기가 왜 카카나에게 집착하고 있는지 알기는 할까.’

“난 이만 간다.”

바드가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그 성의 없는 작별인사에 고개를 흔든 아무스가 낡은 오두막집에서 나왔다. 눅눅하고 차가운 늪 특유의 공기가 물씬 풍겨왔다.

그는 그 살풍경한 광경을 바라보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아무스의 싸늘한 눈이 어느새 냉정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집착할 걸 아니까 바드를 중간계로 데려온 거지만.’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

“어우씨, 죽겠다.”

나는 입 안에도 모래가 굴러다니는 것 같아서 맹물로 입을 몇 번 헹구고 뱉어냈다.

차원균열지대의 기후가 어찌나 제멋대로인지 오늘은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있었다. 머리와 얼굴로 모래알갱이가 귀싸대기 때리듯이 날아오는 건 일상이었다. 간혹 입 안으로까지 들어와서 길 가다 날벌레 먹은 사람처럼 캑캑대며 모래를 뱉어내야 했다.

머리는 가렵고 옷은 안쪽까지 모래가 굴러다녀 꺼끌거리고 바람은 싸늘하면서도 햇빛은 강렬했다. 여름 옷을 입어야 하는지 아니면 가을 옷을 입어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나는 짜증이 난 손으로 땋은 머리 하나를 손에 들고 탈탈 털었다. 비듬처럼 떨어지는 모래알갱이에 콧방울이 간질거렸다. 시원하게 재채기를 하려는 찰나, 유적 너머로 동향을 살피던 아다르가 갑자기 내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갈 곳을 잃은 재채기가 귀 안쪽을 세게 치고 지나갔다. 내가 눈물이 찍 나온 눈으로 노려보자, 아다르가 검지로 입가를 누르며 쉬이 소리를 냈다.

“제국군이 왔어.”

‘이런 거지 같은 타이밍에…….’

이 잡듯이 뒤질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투덜거리며 유적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용사와 나는 망망대해처럼 끝없는 검은 모래언덕 끄트머리에 숨어있었다. 마침 근처에 무너진 건물의 잔해로 보이는 유적이 있어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저 녀석들이 탐색대인 건 확실해 보이는데.”

아다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우선 한 놈만 데리고 와서 뭐 하고 있는지 캐물어 볼까?”

용병 할릭이 주먹구구식 방법을 제안하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가 손을 한 번씩 꺾을 때마다 우두둑, 우두둑, 하는 살벌한 소리가 났다.

그러자 이 막무가내인 팀에서 신중함을 기하는 역할의 첼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왜?”

“탈영병이 있다는 것을 들키면 수많은 제국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 겁니다.”

“그렇다고 저 많은 인원을 전부 죽여 버릴 순 없는 노릇이지 않나요?”

스노아가 고운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차원균열지대는 포레스트링을 왔다 갔다 움직이면서 탐색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에요. 분명 어딘가에 제국군의 야영지가 있을 거예요.”

“맞습니다.”

“탈영병 때문에 많은 제국군이 동원된다면, 오히려 비어버린 야영지를 탐색하기 좋지 않겠어요?”

그러나 용사들이 채 어떻게 하기도 전에 제국군이 수십 팀으로 찢어져 차원균열지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네 명이 한 조를 이루어 뒤지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할릭이 제 거대한 몸을 골조가 드러난 오래된 유적지에 찰싹 붙이며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한 명만 빼내 오긴 글렀네. 저렇게 소수가 조를 이루어 움직이면 바로 들킬 거야.”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대충 제안했다.

“그러면 한 조 전체를 털면 되지. 탈영병이 많으면 사태도 심각해지니, 수색대가 대규모로 짜일 거 아니야.”

용사들이 심각한 얼굴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을 잘못했나 싶어 어깨를 움츠렸다.

“왜? 별로야?”

“아니. 너무 괜찮은 생각이어서.”

아다르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한 조를 통째로 납치한 다음 위장해서 야영지에 들어가는 건 어때?”

“굳이 위장할 필요가 있어?”

할릭이 팔짱을 끼며 스노아를 바라보았다.

“모습을 안 보이게 하는 마법 없어? 야영지 위치를 파악해서 숨어 들어가면 되잖아.”

“인비저블이라고, 투명화 마법이 있긴 해요.”

“거봐.”

할릭이 어깨를 으쓱이며 잘난 체를 했다.

슬프게도 그의 자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차게 부는 모래바람이 내 눈가를 때리지 않도록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가려주던 첼러스가 반박했기 때문이다.

“군사기지에는 외부의 마법을 막기 위한 결계용 마도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첼러스가 내 팔을 잡아 바람이 잘 들지 않는 위치로 끌어당겼다. 품 안에 갇힌 듯한 형태가 되자, 대부분의 모래바람이 검술로 다져진 그의 다부진 몸에 막혀 이르지 못했다.

내 얼굴이 한결 편해 보이자 그제야 첼러스가 고개를 들었다. 할릭도 바람을 막기 위해 어느새 내 근처에 와 서 있었다.

‘이동하는 요새랑 함께하는 기분이네.’

정작 당사자들은 대화에 푹 빠져서 나를 배려하고 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스노아의 인비저블 마법은 바로 발각될 겁니다.”

“그럼 위장하는 것도 물 건너간 거 아니야?”

할릭이 골이 깊게 팬 미간을 문지르며 얘기했다.

“우리는 이미 환영마법이 걸린 스노아의 반지를 착용하고 있잖아.”

“마도구는 대부분 마나의 흐름을 인식하게 되어있어요.”

스노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 마도구는 뒤틀린 마나의 흐름이 외부로 발산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들키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인비저블 마법을 반지에 주입하는 건?”

“당장은 어려워요.”

할릭이 한숨을 쉬었다.

“위장하는 게 제일 나은 방법이에요. 환영마법을 제국군의 외양으로 변형하는 건 할 수 있거든요.”

“그럼 8명 정도 여기로 납치해오자.”

용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제국군이 서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흩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멀리 볼 수 있는 내 시야에도 위치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할릭과 아다르가 움직였다.

“백일몽.”

여의주를 꺼낸 아르모어가 여덟 마리의 정백을 소환했다. 그리고 아다르와 할릭에게 각각 네 마리씩 붙여 함께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군들이 잠에 빠진 것처럼 몽롱한 얼굴로 열을 지어 할릭과 아다르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홀드.”

제국군이 발악할 것을 대비해, 스노아가 방음마법과 구속마법까지 꼼꼼하게 시전했다.

“누구를 깨울까?”

아르모어가 지체하지 않고, 가장 순하게 보이는 남자의 몸에서 백일몽을 회수했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침을 질질 흘리며 헤벌쭉 웃고 있던 남자가 진저리를 치며 깨어났다.

“헉!”

정신을 차린 남자가 자기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용사들을 발견하고는 바짝 굳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남자의 가련한 발버둥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도끼눈을 뜬 할릭의 살기를 정통으로 맞자마자 반쯤 정신이 이탈했기 때문이다.

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남자에게 애도를 보냈다. 할릭에게 위협을 당한 남자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

“야영지는 어느 쪽에 있지?”

“그, 그건…….”

남자가 퍼렇게 질린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말을 하지 않으려고 버텼다. 아다르가 그의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아악!”

강한 힘으로 압박하자,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아다르의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네가 얘기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아낼 방법이 있어. 네 속을 술술 불게 만드는 능력자가 많거든.”

아다르의 눈이 나와 아르모어를 슥 훑었다.

“그러니까 쉽게 가자.”

일개 병사인 그가 용사들 앞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가 눈물을 줄줄 쏟으며 털어놓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물었지만, 오래된 석판을 찾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석판? 특별한 유적을 찾고 있는 건가?’

“슬립.”

스노아가 남자를 잠재웠다. 그리고 여덟 명의 제국군에게 인비저블 마법을 걸어 오래된 유적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그럼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자. 복귀 시간은 오후 6시라고 했으니까.”

아다르가 나를 끌어안으며 제안했다.

“그러면 간이 천막을 칠까요?”

동의한 용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평범한 천막이 아닌, 스노아의 마법이 깃든 기상천외한 천막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하잘것없는 천으로 대충 지은 장막으로 보인다. 그러나 입구를 걷고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별장처럼 널찍한 내부가 드러났다.

나는 아다르의 품에서 벗어나 간이 소파로 걸어가다가 손목을 잡힌 채 뒤로 죽 끌렸다.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할릭이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할릭?”

“미안.”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손목을 살폈다. 달아오른 피부를 보더니 울상을 짓는다.

“살짝 잡는다고 했는데, 너무 세게 잡아당겼어. 아팠어?”

“아니, 괜찮아. 왜?”

“그게, 오늘은 나랑…….”

“아.”

차원균열지대에 온 뒤로도 계속 스노아와 관계를 갖고 있었다. 용사들은 공평하게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며―특히 아다르가― 열을 올렸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힘들었다. 사실을 토로하자면, 스노아만으로도 버거운 참이었다.

밤 기술이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고 있어서 도무지 감당이 안 되었다. 얼마나 운 건지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팅팅 부어있기 일쑤였다.

그는 내가 엉엉 울며 이제 해달라고 빌 때까지 몸을 풀어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서투른 자기가 상처를 낼지도 모른다며 매번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 그 집요함 때문에 이제 스노아와의 밤이 점점 무서워지고 있었다.

‘절륜한 아르모어를 피했더니 이 꼴이라니…….’

스노아는 순진한 얼굴로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았다. 마물을 피하기 위해서라지만 이러다 성관계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고 있었다.

아무튼, 스노아만 혜택 아닌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따로 시간을 내어달라는 게 용사들의 주장이었다. 오늘은 할릭의 차례였다.

“안고 싶어.”

그가 부끄러움도 없이 요구했다.

천막엔 당연하지만 방이 따로 있지 않았다. 다른 용사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으나 며칠 반복한 탓인지 조금은 익숙해졌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할릭이 내 몸을 낚아채 품에 가두었다. 등허리로 그의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쳤다.

“너에게서 스노아의 냄새가 나.”

할릭이 내 머리에 코를 묻은 채 낮게 으르렁거렸다. 스노아와 계속 밤을 보낸 탓에 향기가 섞인 모양이었다.

‘수인족처럼 코가 예민하네.’

나는 목을 움츠리며 눈을 굴렸다. 위험천만한 야생동물이 내 체취 맡는 것을 잔뜩 굳은 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할릭의 코끝이 목선을 따라 은밀하게 미끄러졌다. 윽,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아다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할릭과 내가 앉아있는 자리까지 와서 대뜸 선언했다.

“키스하고 싶어.”

첼러스, 스노아의 시선이 곧장 이곳으로 날아왔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에 휩싸여서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할릭이랑…….”

“뭐 어때. 저놈이 불만이든 아니든, 네 의견이 더 중요하지. 안 그래?”

할릭이 조용히 아다르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핏줄이 불거져 나온 그의 굵은 구릿빛 팔뚝이 내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등에 닿는 근육이 팽팽하게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눈치를 살폈다. 아다르가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거절하기엔 후환이 두렵다.

“대신 내가 할래.”

“좋아.”

“가만히 있어야 해.”

아다르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속까지 꽉 찬 마른근육이 느껴졌다. 돌덩이 같은 몸을 안으로 잡아당기자, 아다르가 순순히 허리를 숙였다.

나는 그의 입술에 살짝 뽀뽀했다.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만. 그러고 떼려는데, 아다르가 입술을 붙인 채 뜨거운 숨을 뿜으며 속삭였다.

“더.”

허스키한 음성이 고막을 쫙 긁어내렸다. 등허리가 찌르르, 울리며 머리털이 곤두섰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그의 입술을 가볍게 빨아주었다.

“더.”

아다르가 고개를 비틀며 요구했다.

“이제 그만…….”

고개를 뒤로 물린 순간, 아다르가 나를 덮치듯 몸을 밀어붙였다.

“흡!”

뒤통수가 할릭의 어깨 근처에 콩, 부딪히며 입술을 잡아먹혔다. 뜨겁고 두툼한 혓바닥이 안으로 비집어 들어왔다. 할릭에게 등을 깊숙이 기댄 채 아다르의 밀어붙이는 키스를 받고 있으려니 의식이 순식간에 희미해졌다.

눈물이 찔끔 나온 순간, 할릭이 아다르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하악.”

숨을 몰아쉬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게 느껴졌다.할릭과 아다르가 서로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시뻘게진 얼굴로 입술을 문지르며 빽 소리쳤다.

“너희 계속 이러면 나 다 집어치울 거야!”

선언하는 순간 스노아가 아다르를 마법으로 공중에 휙 들었다. 첼러스가 곧장 이곳으로 걸어와 아다르의 멱살을 잡아 뒤로 끌어당기더니, 내 뺨에 쪽 뽀뽀했다.

“용서하십시오.”

나는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화나게 해서 미안해.”

둘만 남자 할릭이 내 귓불을 가볍게 씹으며 용서를 구했다.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너무 열이 올라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견디기 힘든 자극이 연속으로 몸을 일깨우자 괜히 갈증이 일었다.

“카카나. 키스해도 돼?”

더는 무리다.

내가 붕붕 고개를 젓자, 할릭이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대충 왜 아다르는 되고 나는 안 되냐는 몸짓이었다.

‘살려줘…….’

역시 무리다.

다섯 명은 내게 무리였던 게 분명하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턱에 쪽 뽀뽀하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혀 넣어도 돼?”

할릭이 아쉬움이 진득하게 남은 뽀뽀를 내 뺨에 흩뿌리더니, 입가를 핥으면서 애원했다.

‘살려줘!’

그때, 거짓말처럼 첼러스가 천막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6시가 다 되었습니다, 할릭.”

“가야지! 지금 간다!”

나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고스란히 고꾸라졌다.

“조심해야지.”

할릭이 균형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코가 깨졌을지도 몰랐다.

마음 같아선 혼자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무릎이 자꾸만 꺾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온몸이 푹 퍼진 면발처럼 힘이 없었다.

내가 울먹거리면서 몸을 주체하지 못하자 할릭이 작게 웃었다.

“귀여워.”

그리곤 뺨에 쪽 뽀뽀하며 바깥으로 나가는 걸 도와줬다.

‘쪽팔려…….’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나가자, 해가 저물어 가는 불그스름한 하늘이 보였다.

“카카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아주 붉습니다만.”

“석양 때문에 그래!”

나는 손부채질을 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가자.”

내가 민망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용사들이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제국군이 모이기로 한 장소의 좌표를 찾아 이동했다. 그들의 말대로 야영지 근처에 탐색대들이 열을 맞춰 복귀하고 있었다.

“아픈 척 잘하는 사람?”

아다르가 손을 들며 물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부상병인 척하는 사람은 자동으로 스노아가 맡게 되었다.

“어차피 절 시킬 거였으면서 의견은 왜 물어본 거예요?”

스노아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카카나가 하고 싶어 할 수도 있잖아.”

“내가 왜?”

나는 황당해져서 물었다.

‘내가 미쳤다고 그런 위험한 걸 하겠냐.’

그런데 그는 생각이 다른 듯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국군 상대로 사기 치는 게 흔한 경험은 아니잖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아니? 내가 넌 줄 아니?”

“아니면 말고.”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스노아를 부축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가타부타 말 없이 유적지를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나는 기가 막혀서 그를 바라보다가, 곧 제국군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걸 확인하곤 뻣뻣하게 굳었다.

“어떻게 된 거냐!”

우리를 발견한 분대장이 사색이 되어서 물었다.

스노아는 거의 아다르의 어깨에 매달린 시체 수준으로 늘어져 있었다. 일부러 아다르 무거워지라고 두 다리에 힘까지 빼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상처를 입다 못해 넝마가 된 꼴로 비틀거리는 연기를 시작했다. 물론 환영마법이기에 나는 다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기 편한 치마차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괜히 더 긴장되고 제국군의 눈치가 보였다.

다행히 스노아의 마법이 잘 먹혀준 모양이었다. 이상하다고 의심하는 제국군은 아무도 없었다.

“수, 수상한 녀석이 갑자기…….”

크흑, 눈물까지 삼키며 영혼의 연기를 불사른 아다르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불쌍한 피해자를 연기하고 있는 아다르의 시커먼 눈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입꼬리가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도록 신경 썼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2조가 도와줘서 이렐릭과 저는 목숨을 건졌습니다만 나머지 두 놈은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괴한의 인상착의는 어떻게 되나.”

분대장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다르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술술 나불거렸다.

“괴물 같은 놈이었습니다. 몸은 오우거처럼 크고, 근육이 바위골렘처럼 불거져 나온 녀석이었지요.”

‘구체적인데?’

나는 그가 즉석에서 지어냈을 것이 뻔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아다르가 멈추지 않고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상의는 야만인처럼 벗고 있었으나, 하의는 팬티조각처럼 작은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놈은 인간이 아닌 몬스터의 아인종처럼 보였습니다…….”

이쯤 되자 굳이 누구를 상상하며 지어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큰 덩치는 우리 중에 할릭밖에 없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서, 씰룩이며 미소를 지으려는 입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쓰기 시작했다. 흘끗 시선을 돌린 곳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할릭의 손이 보였다. 더욱 웃음을 참기 힘들어졌다.

나는 몸을 배배 꼬면서, 거의 우는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거렸다.

“놈들이 무슨 말을 하진 않았나?”

“차원균열지대에서 뭘 찾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분대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가 머리가 띵해진 것처럼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 있다가, 곧 거의 보랏빛으로 질린 얼굴을 하고 물었다.

“놈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지?”

“못생긴 멧돼지처럼 생겼습니다.”

“크헙!”

결국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러자 분대장 뒤에 심각한 얼굴로 서 있던 제국군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혔다. 식은땀으로 등허리가 흥건하게 젖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아다르에게 업혀 있던 스노아가 갑자기 몸을 꿈틀거리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악몽에 몸부림치는 척하면서 축 늘어뜨려 놓았던 한쪽 팔로 아다르의 목을 세게 졸랐다. 여기서 더 헛소리하면 네 멱을 따버리겠다, 정도로 해석되는 움직임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다못해 거의 눈물을 흘리는 지경까지 왔다.

“이렐릭…….”

스노아가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했다. 나는 재빨리 그의 기지에 편승했다. 웃음을 너무 참아 헐떡거리는 숨과 떨리는 음성을 슬퍼서 그런 것처럼 위장하며 우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허, 허허헛, 헉, 허어으윽…… 이렐릭…….”

아랫입술을 짓씹은 분대장이 우리가 야영지로 향할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며 명령했다.

“알았다. 너희의 부상은 보고해둘 테니 의무대에 가보도록.”

“가, 감사합니다…….”

우리가 머리를 꾸벅 조아리며 야영지로 걸음을 옮기자, 분대장이 뒤에서 주요 인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장 그 괴한을 잡아야 합니다. 잡혀간 병사들이 괜한 정보라도 흘렸다간…….”

뛰어난 청각으로 하는 말을 들어보니 당장 수색대를 꾸릴 작정인 듯했다.

우리는 야영지의 마법을 감지하는 마도구의 감시망을 무사히 통과해 안쪽까지 진입했다. 병사 대부분이 탐색대, 혹은 수색대로 바깥에 나가고 없었기에 야영지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어 칠흑같이 어두워져 있었다. 타인의 마나도 감지할 수 있는 용사들의 감에 의지해 인적이 없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자기 어떤 인간이 내 앞을 막아섰다.

“야.”

나는 바짝 굳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병사나 기사라고 보기엔 뒷골목 양아치처럼 불량한 얼굴이었다. 그가 나를 위아래로 진득하게 훑어보았다.

혹시 우리의 수상한 점을 알아채서 저러는 건가 싶어 조마조마해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데, 그가 픽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뭐? 괴한? 아인종?”

나는 바짝 긴장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물이면 몰라도 차원균열지대에? 그 핏자국은 뭐야. 대단한 영웅담이라도 만들고 싶어서 분장한 거냐?”

그러자 그와 함께 서 있던 병사들 몇몇이 킬킬거리면서 우릴 비웃었다.

“새끼들 이제 뺑끼치려고 별짓을 다 하네.”

나는 긴장했던 것도 싹 잊고 정색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진상을 가리려고 다가온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냥 흔하게 있는 괴롭힘인 모양이었다.

‘방금 막 동료를 잃고 온 사람까지 괴롭히고 싶나?’

빤히 쳐다보았더니, 남자가 내 뺨을 한 대 칠 것처럼 손을 바짝 쳐들며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얻다 대고 눈을 부라려?”

괜히 내가 다 화가 나서 그에게 맞서 주먹질을 하려고 손을 올렸다.

그때, 뒤에서 거대한 손이 쏜살같이 날아왔다. 어찌나 빠른지 나는 조류형 마물이라도 습격한 줄 알았다.

화들짝 놀라서 머리를 움켜쥐고 허리를 구부리는 순간, 거대한 손에 뺨을 맞은 남자가 억 소리를 냈다.

퍽-!

분명 손바닥으로 쳤는데, 꼭 주먹으로 후려친 것처럼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귀싸대기를 맞은 남자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서로 웃느라 정신이 없던 병사들마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귀싸대기를 날린 손의 주인은 할릭이었다. 그가 자비심이라곤 쥐뿔도 없는 눈으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챈 나머지 인원이 큰 소리를 내기 위해 거세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스노아가 더 빨랐다.

“슬립.”

사람들을 불러 우리에게 엿 먹일 생각으로 불그죽죽하게 뜨여 있던 남자들의 눈이 허옇게 뒤집혔다.

“마법 쓰면 마도구에 걸린다며.”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물론 많은 인원이 수색대로 차출되어 차원균열지대에 나가 있긴 했다. 그래도 소란을 피우면 금방 복귀해 일을 엉망으로 만들 것 같아 초조감이 일었다. 쓰러진 남자들을 쓰레기 굴리듯이 구두코로 툭툭 치던 아다르가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다.

“야영지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상관없어.”

“마법을 써도?”

“응. 결계용 마도구는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침입자를 막으려고 있는 거니까.”

“다행이네.”

“그럼 어떻게 할까?”

할릭이 구겨진 얼굴로 물었다.

“우선 이 사람들을 감추죠.”

우리는 남자들에게 인비저블 마법을 걸어 인적이 없는 장소에 숨겼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발각되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릴 터다.

나는 스노아가 방음마법을 걸어주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 아까 실수로 웃었을 때는 얼마나 간담이 서늘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골수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다르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울분을 터트렸다.

“야! 너 때문에 다 들킬 뻔했잖아!”

“왜 나한테 성질이야?”

아다르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잘 둘러댄 덕분에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잖아. 분대장 얼굴 시퍼렇게 질렸던 거 기억 안 나?”

아다르가 할릭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내 주먹이 다 떨릴 정도로 얄미운 얼굴이었다.

“다 이 몸의 실감 나는 설명 덕분에 그럴 수 있었던 것, 컥!”

결국 참지 못한 할릭이 아다르에게 달려들었다. 우리가 여기 놀러 온 것도 아니고, 투덕거리고 있는 용사들을 보니 긴장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는 몸에 힘을 빼고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말 더럽게 안 듣는 어린애들이랑 장례식장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저러다 사고 치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착잡한 한숨이 치밀어 올랐다.

‘지네들이 여길 쑥대밭으로 만들든 어쩌든 알아서 하겠지.’

일반인이 맞으면 즉사할 것 같은 주먹으로 치고받는 두 남정네를 내버려 두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심각하게 서서 야영지를 어떻게 탐색할지 의논하는 나머지 용사들에게 걸어갔다.

“야영지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네요. 하늘을 날아서 확인해 봐야 할까요?”

스노아가 제 머리를 쥐어뜯을 기세로 부는 강한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얘기했다. 할릭의 주먹에 감긴 바람과 아다르의 과격한 방어 때문에 작은 모래 폭풍이 회오리처럼 불고 있었다.

‘저런 걸 등 뒤에 두고 아무렇지도 않나?’

나라면 불똥이 튈까 봐 어디론가 숨을 것 같은데.

스노아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이곳에서 찾은 것을 감춰두는 창고가 있을 겁니다.”

첼러스가 검은 모래와 똑같은 색상의 천막들을 살피며 얘기했다. 그때 쿠웅, 소리와 함께 첼러스의 바로 옆자리에 거대한 삽으로 퍼낸 것 같은 모래 웅덩이가 생겼다. 아다르가 피한 곳에 할릭의 주먹이 꽂힌 탓이다. 발을 잘못 디뎠다간 개미지옥처럼 빠져나오기 힘들 만큼 깊은 구렁이었다.

그 수많은 모래 중 하나가 기어이 바늘처럼 튕겨와 첼러스의 뺨에 생채기를 냈다.

나는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변화가 거의 없는, 첼러스의 선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으스스한 바람과 사기가 불러온 듯 칠흑 같은 밤이 무색하도록, 그가 평소와 똑같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스노아가 한숨을 쉬며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정말 여러모로 귀찮게 하네요.”

그리곤 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동시에 첼러스가 허리춤에 꽂혀 있던 검집에서 태양처럼 빛나는 솔라리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허공에 자를 대고 선을 그은 것처럼 정확히 일자로 검을 휘둘렀다. 솔라리소드의 검날이 두 개로 분리되듯, 화려한 백금색 검기가 검날로부터 빠져나와 횡으로 날아갔다.

너무 빠른 속도여서 나는 반응도 하지 못했다.

“헉!”

스노아가 허공에 모래벽을 일으켰다. 그곳에 가로로 긴 홈이 파였다. 힘 조절을 했음에도 무시무시한 규모였다. 그 아래에 할릭과 아다르가 머리를 움켜쥐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제야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첼러스가 할릭과 아다르를 향해 검기를 날린 것이다.

“야! 우릴 죽이려고 작정했어?”

아다르가 씩씩대며 화를 냈다. 첼러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침착한 얼굴로 솔라리소드를 검집에 집어넣더니, 평소와 똑같은 어투로 말했다.

“그러면 죽지 그러십니까.”

‘무, 무서워…….’

첼러스는 사람을 팰 때도 착한 얼굴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나는 은근슬쩍 발을 물려 아르모어의 등 뒤로 숨었다. 첼러스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걸 알아챈 아다르가 뭐라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좁은 공간 안에서 이토록 난리를 쳤는데, 바깥 사람들이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신기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스노아의 방음마법만 있다면 화기성 마법이 폭발해도 아무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하셨나 봅니다.”

첼러스가 싱긋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의 말대로 할릭과 아다르는 언제 개싸움을 벌였냐는 듯 진정되어 있었다. 역시 이 중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아르모어와 첼러스인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장 가까운 천막부터 확인해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아르모어가 노곤하게 감긴 눈꺼풀을 깜박이며 말했다.

“중요한 정보는 지휘소에 있지 않겠느냐.”

“물론 그렇습니다만, 이 중 어떤 천막이 지휘소인지…….”

“경비병이 따로 서 있는 천막이 있다.”

아르모어가 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그가 가리킨 부분을 보려고 애를 써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밤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육안으로 확인하기엔 거리가 너무 먼 듯했다. 용사들은 감지되는 마나로 아르모어가 말한 천막이 어디인지 대강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인비저블 마법을 걸어 드릴 테니, 지휘소 뒤편에서 만나죠.”

“난 어떡해?”

투명화 마법이 걸리면 용사들의 모습이 안 보여서 따라가는 건 무리였다. 물론 수인족은 육감이 발달해 있지만, 그렇다고 기척을 숨기는 용사들을 알아챌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아르모어가 내 손을 부드럽게 감아쥐며 얘기했다.

“그대는 나와 함께 가면 된다.”

우리가 준비를 모두 마치자 스노아가 인비저블 마법을 걸어주었다. 나는 손에 감긴 아르모어의 따스하면서도 느슨한 감촉에 의지해 조금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야영지는 마물의 눈에 띄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조명기구가 하나도 없었다. 있는 빛이라곤 천막 틈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는 희끄무레한 불빛과 밤하늘의 달빛이 전부였다.

‘이렇게 깜깜한 어둠은 퀄리티미엄 이후로 오랜만이네.’

물론 분위기는 퀄리티미엄과 확연하게 달랐다. 공간에 상처가 났다고 했던가. 확실히 불안정한 느낌이 있었다. 음산한 분위기가 물에 젖어 우는 종이처럼 사람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황량한 벌판에서는 이따금 마물의 울음소리 같은 소름 끼치는 소음이 바람에 섞여 실려 왔다. 나는 을씨년스러운 풍경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걷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음울한 땅에 발이 묶이고 만 망령처럼 눈빛이 죽어있었다.

‘여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던 걸까?’

이렇게 많은 인원을 착취하면서 제국이 찾는 게 무엇일지 상상되지 않았다.

나는 아르모어를 놓치지 않도록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말대로 경비병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는 지휘소가 나타났다. 사람을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하는 데 귀재인 아다르가 눈 깜짝할 사이에 경비병을 해치워버렸다.

[어떻게 할까요?]

스노아가 텔레파시로 얘기했다.

[천막을 걷으면 안에 있던 사람들한테 바로 들킬 거예요.]

[들키든 들키지 않든, 제국의 꿍꿍이를 알아내기 전까지 우리는 이곳의 모든 천막을 뒤집어봐야 해.]

할릭이 대꾸했다.

[선택권이 없단 소리지.]

[일단 들어가고, 안에서 해결을 보자는 건가요?]

[방법이 없잖아.]

고민에 빠진 듯 스노아가 조용해졌다.

[그런데 지휘소치곤 규모가 꽤 크군요. 창고용 천막과 엇비슷할 정도입니다.]

첼러스의 의아한 목소리를 파고들며, 아다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에서 사람이 나오는데?]

절호의 기회였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누군가가 안을 향해 호통을 치고 있었다.

“젠장, 언제까지 우리 애들을 이런 곳에서 굴려야 한다는 겁니까!”

경비병들이 천막을 젖혀주고 있는 동안 서둘러 들어가야 했다. 아르모어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다행히 아르모어의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신속하게 옮겨졌다.

천막 내부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꽤 좁았다. 한 늙은 마법사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의자에 푹 파묻혀 있었다. 황실마법사의 복식을 갖춰 입은 데다, 제 안방처럼 지휘소에서 편히 쉬고 있는 걸 보면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인 듯했다.

그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이곳의 기사들과 일반 병사들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남자가 분명했다. 남자가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어그러진 눈으로 마법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지냈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차원균열지대의 이상 생태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그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마물과의 계속된 싸움으로 다들 한계입니다!”

“그리 목소리를 높이면 해결이 되나?”

마법사가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운 음성으로 되받아쳤다.

“이래서 검만 사용하는 무식한 인간들은 안 된다니까.”

잘 우려낸 홍차를 호로록, 들이켠 마법사가 대놓고 우롱하는 소리를 했다. 남자의 싸늘한 눈빛이 목을 졸라 죽일 듯이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걸 보면 한두 번 있었던 트러블이 아니었다.

‘혹은 단순히 낯짝이 두꺼운 사람일 수도 있고.’

“나를 그리 노려볼 시간에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탐색할 수 있을지 작전이란 걸 좀 짜보시오.”

마법사가 되레 신경질적으로 그를 닦달하며 손을 흔들어 재꼈다.

“혈판을 아직 다섯 개밖에 찾지 못했소. 적어도 열 개는 찾아야 윗선에 고개를 들 수 있을 거 아니오?”

‘혈판이 뭐지?’

마법사의 태평한 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바깥으로 나갔다. 더는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듯싶었다. 마법사가 쯧, 혀를 차며 제 뭉친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이런 곳에서 계속 지내려니 온몸이 쑤시는구만.”

‘이런 곳’이라고 깎아내리기엔 지휘소는 지나칠 정도로 호화스러웠다. 간이침대는 물론이요 들쭉날쭉한 날씨를 고려해 냉난방 기능을 탑재한 마도구까지 있었다.

그뿐이랴. 야영지에서 사용하기엔 사치스러운 취사도구, 심지어 마법사의 기분에 따라 바꿔 쓸 수 있는 모자까지 두루 갖춰져 있었다.

마법사가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자가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더니 문득 벽에 대고 손짓하며 누군가를 불렀다.

“밀리엄, 게 있느냐.”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벽을 뚫고 한 남자가 귀신처럼 나타났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역시, 저 벽은 환영이었군요.]

[환영이라고?]

[네. 숨겨진 공간이 있어요.]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비리비리한 체형의 부하를 바라보았다. 밀리엄이라고 불린 남자 또한 황실마법사 소속이었다. 그러나 나이도 처지고 복색도 단출해 늙은 마법사보다 지위가 한참은 낮아 보였다.

게다가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그는 죽을 날을 선고받은 사형수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늙은 마법사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긴장해 있으면 마족님을 몸에 받을 수 있겠느냐?”

영 마뜩잖은 듯, 마법사가 끌끌 혀를 차며 얘기했다.

“나머지들도 준비는 끝났겠지?”

“……네.”

밀리엄이 고개를 푹 숙이며 웅얼거렸다.

“신전의 실험이 거의 끝나간다.”

[방금 실험이라고 한 게 맞습니까?]

첼러스가 제가 들은 게 확실한지 물었다.

[어. 분명히 실험이라고 했어.]

어떤 실험인지 대번에 감을 잡은 아다르가 차갑게 식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때가 다가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마족님이 중간계에 오실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해.”

밀리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가 그의 등을 두드리며 숨겨진 공간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안쪽엔 밀리엄까지 포함해 총 네 명의 마법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황실마법사의 복식을 하고 있었고, 하나같이 표정이 겁에 질려 있었다. 마법사가 허튼 생각 하지 말라는 듯 그들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곤 몸가짐을 가지런하게 가다듬은 후 가운데에 있는 기다란 6인용 테이블로 걸어갔다.

목재의 옹이와 나뭇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급스러운 우드슬랩 테이블이었다. 그 위에 다섯 개의 석판이 주르륵 놓여 있었다.

석판은 수인족들의 거주지에 있던 염소젖처럼 새하얀 건물과 달리 새카맸다. 꼭 다 타고 남은 재처럼 보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테이블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법사가 그중 네 개의 석판 앞에 마법사들을 한 명씩 세웠다. 지위가 낮거나 고작해야 수습마법사처럼 보이는 그들은 이제 거의 기절할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오늘 드디어 석판 다섯 개가 모였다. 열 개가 모였을 때 의식을 시작하고 싶었으나…….”

늙은 마법사가 제 탐욕스러운 얼굴을 못마땅하게 구기며 끌끌 혀를 찼다.

“저 망할 일데르 경은 탐색대를 수도로 돌려보내지 못해 안달인 것 같더구나.”

마법사가 심술궂게 입술을 삐죽였다.

“일이 복잡해지기 전에 오늘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런 좋은 일을 굳이 미뤄가며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안 그래? 응? 흐흐흐…….”

마법사가 두 손을 비비며 음침하게 웃더니,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내 제자로 들어온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저, 스, 스승님.”

“뭐냐.”

그때 밀리엄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히 제 말을 끊은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마법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밀리엄이 그의 지푸라기색 머리카락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쭈물 말을 잇고 있었다.

“저, 저는…….”

“설마 소환 의식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뭐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마법사가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지레짐작하며 호통을 쳤다. 밀리엄의 어깨가 즉시 오그라들었다.

“내가 밀리엄 네 녀석의 재능을 알아봐 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거라고 했지?”

“…….”

“하잘것없는 평민인 넌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서 동생과 함께 죽었을 거다!”

마법사가 침을 튀기며 흥분했다.

“넌 내 덕분에 황실마법사가 된 거야! 그런데 이번엔 마법사가 된 것도 모자라 무궁무진한 마족의 힘을 네 손에 차지할 수 있게 된 거란 말이다!”

밀리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멍청한 제자의 모습을 섬뜩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마법사가 쉰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밀리엄.”

그리고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밀리엄이 마법사의 기색에 질려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이곳은 희끄무레한 빛에만 의지하고 있어 특히 어둑했다. 그래서 그런지 광대뼈가 튀어나온 깡마른 마법사의 음영 진 얼굴이 무덤을 파헤치고 튀어나온 스켈레톤처럼 무시무시했다.

그가 소름이 끼치도록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라, 밀리엄. 이곳까지 와서 혈판을 본 이상, 네놈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은 없어.”

“하, 하지만 전 마족은…….”

짜악―!

마법사가 밀리엄의 뺨을 거세게 올려붙였다. 나는 흠칫 어깨를 좁혔다. 밀리엄의 어깨가 조용히 들썩이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지만, 마법사는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밀리엄의 어깨를 으스러질 듯 움켜쥐고서 잔인한 말을 속삭였다.

“그러니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을 차버리려는 멍청한 노력은 하지 마라. 알겠어?”

“으, 흐으…….”

“그럴 시간에 마법을 갈고 닦아 내 발밑이라도 따라잡으려 노력해라.”

밀리엄이 차마 소리 내어 대답하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쓰러울 정도로 전신을 떨고 있었다.

“아터니 시르부스라는 내 이름에 먹칠을 하는 순간 너희 모두 무사하지 못할 거다. 허투루 하는 소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알겠느냐?”

“…….”

“대답해야지.”

“네.”

그제야 만족한 듯, 마법사가 밀리엄을 뒤로 강하게 밀쳐내며 손을 털었다.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리자, 나머지 수습마법사들이 황급히 밀리엄의 몸을 받쳐주었다.

“번복은 없다. 공격마법에 특화된 우리에게 특별히 주어진 기회야.”

아터니는 동조하는 사람 한 명 없이 혼자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황성엔 이 혈판을 얻지 못해 혈안인 자들이 한가득이다! 마법사에게 제일 먼저 기회가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이지. 다른 놈들이 더 많은 혈판을 찾기 전에, 우리가 하나라도 더 찾아서 이득을 취해야 해!”

아터니가 신경질적으로 밀리엄의 손을 가져왔다.

“다들 똑바로 서라! 어서!”

겁에 질린 수습마법사들이 검은색 석판 앞에 차례로 섰다. 아터니가 밀리엄의 손을 가져와 날카로운 단검으로 손목을 강하게 그었다. 자비 없는 칼질에 살이 뎅겅 잘리며 핏물이 석판으로 왈칵 쏟아졌다.

“피를 내라. 시간을 끌어서 나를 화나게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터니가 똑같이 자신의 손목을 그어 석판에 피를 흘려보내며 경고했다.

나머지 마법사들이 기절 직전의 얼굴로 손목을 그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그로테스크한 광경인지 알 수가 없어서 몸을 벌벌 떠는데, 텔레파시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판에 피로 된 글씨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첼러스의 음성이었다.

내 두려움을 느낀 아르모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내 기척까지 함께 지워주느라 아직도 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혈판이 마족이 중간계로 올 수 있었던 매개체인 것 같습니다.]

[예상은 했어요. 저주가 걸려있는데 무턱대고 넘어올 순 없었겠죠.]

스노아가 말했다.

[황녀는 분명 차원전쟁이 끝난 순간부터 황실이 마족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다고 했어요.]

[차원균열지대에서 저 석판을 찾은 게 원흉이었군.]

할릭이 징글징글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럼 어떻게 해? 지금 소환하려고 하는 거잖아!]

나는 어서 막아야 하지 않나 싶어서 몸을 긴장시켰다. 당장 뛰어나가고 싶었으나 괜히 일이 꼬일까 봐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피가 제물인 것 같아요. 소환의식은 벌써 시작되었고, 막을 수 없을 거예요.]

스노아가 절망적인 소리를 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카카나. 마족은 완전한 형태로 이곳에 소환되지 못할 거예요. 소환된다고 해봤자…….]

[이곳에 있는 마법사들의 몸을 빌려 나타나게 될 거다. 그간 우리가 보아왔던 마족처럼.]

아르모어가 내 등을 천천히 쓸어주며 설명했다. 말을 아끼는 아르모어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부러 설명을 해주었다고 생각하니 억지로라도 마음을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쓸데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아르모어를 괴롭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 자리에 서 있던 다섯 명의 마법사들 발밑에 마법진이 동시에 형성되었다. 나는 그 놀라운 광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섯 명의 마족이 인간의 몸으로 깃드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두가 잠든 것처럼 일시에 자리에서 쓰러졌다.

‘엥?’

나는 잠에 빠진 마법사들을 당황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검은 바람이 분다거나, 핏빛 섬광이 천막 안을 가득 채운다거나 하는 화려한 효과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노아의 슬립 마법이라도 맞은 양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눈을 끔벅이며 그들을 살피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스노아가 인비저블 마법을 취소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용사들이 시야에 빠듯하게 들어오자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스노아가 능숙하게 지휘소의 천막 전체에 방음 마법을 쳤다.

“왜 잠든 거지?”

나는 아르모어의 품에서 내려오며, 일말의 희망과 기대를 담아 물었다.

“의식이 실패했나?”

“아뇨, 그건 아닐 거예요.”

스노아가 발끝으로 서로 겹쳐서 쓰러진 마법사들의 몸을 밀어 떨어트렸다. 그리고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옷을 벗겼다.

“옷은 왜 벗겨?”

“여기 보세요.”

맨살을 구석구석 살핀 스노아가 밀리엄의 빗장뼈를 가리키며 말했다.

“문양이 생겼어요. 아무래도 마족이 빙의했다는 걸 나타내는 증표인 것 같아요.”

“마법사들이 곧 깨어날 듯하다.”

여의주를 꺼내든 아르모어가 마법사들이 기절했을 때 한 마리씩 붙였던 나비를 회수하며 얘기했다.

“의식이 돌아오고 있어.”

스노아가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인비저블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원래 있었던 장소로 돌아가 몸을 숨기려고 했으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늙은 마법사 아터니가 눈을 뜨자마자 공격마법을 퍼부은 것이다. 나는 평범한 남색이었던 아터니의 눈에 일순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것을 보곤 짧게 헛숨을 들이켰다.

파이어볼 여섯 개가 정확히 우리에게 날아오자마자 스노아가 실드를 쳤다.

콰앙—!

대기가 찢어지는 것 같은 파공음이 울렸다. 천막의 반 이상이 그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날아갔다. 아터니가 허공에 부웅 떠오르며 중얼거렸다.

“언제 쥐새끼들이 숨어든 거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역정이 스민 음성으로 중얼거리던 아터니가 돌연 머리를 움켜쥐고 신음했다. 그가 머릿속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혼자 뭐라 중얼거렸다. 그러다 본래 성격 어디 못 가고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녀석들은 내가 직접 처리할 수…….”

그러다 곧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바짝 긴장해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아르모어가 나를 품으로 끌어당기며 여의주에서 기다란 채찍을 뽑았다. 전기가 새파랗게 튀는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롭게 모래바닥을 할퀴었다.

내게 여러 겹의 실드를 씌운 스노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일 났군요.”

나는 그의 탄식을 따라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 하나가 휑뎅그렁하게 뜬 밤하늘에 다섯 명의 마법사들이 검은 연기로 몸을 휘감으며 떠 있었다.

수습마법사들은 언제 겁에 질려 있었냐는 듯 고압적인 눈을 하고 있었다. 아터니가 우릴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중간계에 오자마자 이런 인간을 만나다니…….”

아터니, 아니 마족이 얄브스름한 아랫입술을 핥아 올리며 말했다.

“요즘 인간들은 다 너희들처럼 강한가? 그러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제가 차지한 늙은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가 목을 이리저리 틀어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이곳이 야영지 한복판이고, 근처에 병사들이 있다는 건 그들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중간계의 인간을 차지한 마족 다섯 명이 동시에 용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아르모어와 붙어있던 나는 다른 마족이 어떤 식으로 용사들을 공격했는지 알지도 못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음이 수 갈래의 가죽끈처럼 내 뺨을 올려붙였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얼얼한 고막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질끈 눈을 감은 나를 아르모어가 뒤에서 강하게 끌어안으며 보호했다. 아르모어에게 붙은 놈은 밀리엄에게 깃든 마족이었다. 그는 검은 연기를 뭉쳐서 만든 롱소드를 든 채 시시껄렁한 자세로 서 있었다.

“하필이면 마법사의 몸이네. 이런 비쩍 곯은 몸을 마구 굴렸다간, 내일 몸살로 앓아누울 텐데. 흐음…….”

그가 싱긋 웃으면서 허공을 발로 차며 날아왔다.

“뭐, 마법이랑 섞어가면서 쓰면 되겠지.”

공기로 된 폭탄이 허공에서 터지듯, 그가 날아오는 구간마다 맹렬한 바람이 불었다. 여의주에서 뽑아 든 아르모어의 채찍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마족을 향해 날아갔다. 몸을 구속하기 위해 감싸 쥘 찰나, 마족이 여유롭게 주문을 외웠다.

“브레스 오브 데스.”

“윈드!”

멀찍이 서서 마족과 마법을 주고받던 스노아가 회오리처럼 용솟음치는 바람을 날려 보냈다. 그러자 마족의 입에서 독가스처럼 뿜어져 나오던 초록색 안개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나를 지켜내기 힘들어질 것을 직감한 아르모어가 자리에서 위로 높이 도약했다. 마족이 섬광 같은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으므로 나를 배려하는 평소와 달리, 감당할 수 없는 속도였다.

“억!”

힘을 이기지 못한 몸의 관절들이 빠질 것처럼 덜그럭거렸다. 위로 잡아당기는 강한 힘에 사지가 뽑힐 것처럼 아팠다. 고개조차 똑바로 들 수가 없었다. 고개는 무슨, 눈도 못 뜨겠다.

앞을 보지 못하니 마족과 아르모어가 어떤 식으로 합을 주고받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어느 방향으로 피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누지 못하는 몸이 아르모어가 방향을 틀 때마다 정직하게 휩쓸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숨을 쉬는 것뿐이었다. 바람이 내가 빨아들일 산소까지 앗아가는 탓에 호흡하는 것조차 여의치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가 아래로 확 꺾이며, 기어코 코피가 터졌다. 이러다 아르모어의 품에 안긴 채 이동하는 것만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비현실적인 공포가 들기 시작했다.

마족이 빈틈을 보이자마자 아르모어가 나를 공중으로 집어던졌다.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던져졌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나를 안은 사람에게서 비누 냄새가 난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날 보호하는 사람이 아르모어에서 첼러스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요.”

코피가 터져 피범벅이 되어버린 내 얼굴을 확인한 첼러스가 조심스럽게 바닥에 착지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 건방진 놈 봐라. 안 되면 네가 뭘 어떻게 할 건데? 응?”

첼러스를 상대하던 마족이 제 손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내며 말했다.

그 피를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충격받은 마음을 추스르며 고개를 돌렸다. 가볍게 긁혀 피가 흐르고 있는 첼러스의 목덜미가 보였다.

‘설마 용사들이 밀리고 있는 건가?’

나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빛의 흔적만 눈으로 간신히 좇을 만큼 마족과 용사들은 빠른 합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무리 눈을 부릅떠봤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용사들이 고전하고 있는 상황인 건 확실해 보였다.

‘인간의 육체를 다 차지하지 못한 마족이 잠깐 힘을 선보인 것만으로 이렇게…….’

내 두려움을 느낀 사람처럼, 첼러스가 나를 굳은 힘으로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스노아!”

가히 사자후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그는 인내심이 강하고 쉽게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이렇게 큰 목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스노아가 제게 어둠 계열의 마법을 퍼붓고 있는 마족을 상대하다 말고 씨스아이를 휘둘렀다. 상황을 여유롭게 관전하던 마족이 배를 부여잡고 비웃었다.

“노력이 가상한걸! 실드인가? 그래, 나쁘지 않아. 마지막까지 발버둥 쳐보라고!”

내 주위로 하나둘씩, 스노아의 파란 결계가 쳐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결계를 바라보았다. 그간 스노아가 펼치던 실드 마법과 다르게 보였다.

‘결계가 대체 몇 겹인 거지?’

실드가 계속 덧씌워지고 있었다. 내가 육안으로 센 결계의 수만 열 겹이었다. 반면 용사들에겐 실드가 한 겹도 쳐지지 않았다.

‘아니 싸우고 있는 주체는 용사들인데, 왜 나한테 실드를 쳐?’

심지어 이 세상이 멸망해도 나만은 살 수 있을 것처럼, 수십 개의 결계를 겹친 후 압축한 초고밀도의 결계였다.

“여자라도 살리려는 건가. 난 인간들이 보여주는 이런 감동적인 장면이 좋더라.”

마족이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빈정거렸다. 첼러스가 즐거워 죽는 마족에게 솔라리소드를 똑바로 겨누며 말했다.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흐음?”

첼러스의 흔들림 없는 음성에서 불길한 무언가를 감지한 것처럼, 마족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첼러스가 거의 결계에 갇힌 형국이 된 내 앞을 막아서며, 검에 환한 백금색 검기를 씌웠다.

“그녀를 실드로 보호한 건 우리의 힘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첼러스는 더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가 검자루를 두 손으로 움켜쥔 순간, 일련의 동작들이 마치 물 흐르듯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이번만큼은 누구의 방해 없이 코앞에서 첼러스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왼발을 앞으로 내질렀다. 동시에 검자루를 쥔 손을 정수리에 닿을 정도로 높이 추켜올렸다. 검날이 하늘의 달에 닿을 정도로 꼿꼿하게 세워졌다. 첼러스가 오른발을 앞으로 내지르며 솔라리소드를 사선 방향으로 크게 휘둘렀다. 백금색 검기를 씌운 그의 검은 어느새 집채만 하게 커져 있었다.

그것이 허공으로 세차게 튕겨 나갔을 때, 나는 처음에 그가 공간을 벤 줄 알았다. 내가 보고 있는 공간 전체가 얇게 날려 보낸 첼러스의 검기로 이등분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따른 사선 방향이었다. 일시적으로 이등분된 두 공간이 반으로 갈린 치즈처럼 각각 다른 방향으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공간을 벤 것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소리까지 베어낸 듯했다. 목이 잘린 소음이 시체처럼 나동그라져 사방에 불던 바람 소리 하나까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비로소 도망갔던 생명의 기운이 베인 공간으로 밀려 들어왔을 때,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바람 소리. 솔라리소드에서 웅웅 울리는 금속성의 비명. 검은 모래가 해일처럼 위로 솟구쳐 차원균열지대에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모든 소리가 내 귀로 재해처럼 욱여들어 왔다.

“윽……!”

나는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후드드득—

한껏 웅크린 뒤통수와 목덜미, 그리고 등으로 모래가 장마철의 굵은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나는 이리저리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러다 쓰러질 것 같아 귀를 막던 손을 내려 바닥을 짚었다. 모래알갱이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크으윽!”

고통을 참는 신음에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확인해야 했다. 지금 위기에 몰린 것은 마족인가, 아니면 용사들인가?

뿌옇게 흩날리는 먼지가 엎질러져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싸늘한 사기가 돌풍처럼 일대를 쓸어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희끄무레하게 흔들리는 두 명의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헐떡이고 있었다. 마족이었다.

깊은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첼러스는 꼿꼿하게 서서 검은 피를 토해내는 마족을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됐……!”

됐다, 그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뱃가죽을 꿀렁거리며 피를 토하던 마족이 순간 자리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눈을 감았다 뜬, 잠깐의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어?”

멍청하게 반응하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위기를 알리는 본능이 내 턱을 틀어쥐어 위로 당기고 있었다. 별 한 점 없는 음울한 밤하늘과 유독 환하게 빛나는 차가운 달이 보였다. 달빛에 간신히 비추어진 몇몇 검은 점이 쏜살같이 내게 날아오고 있었다.

‘마물? 날벌레?’

눈을 가늘게 떴다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족!’

그들이 저마다 검은 무기를 바람의 흐름에 맞춰 늘어뜨리고서, 추진력을 모으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게 온다. 날카로운 예감이 손톱을 세워 등골을 할퀴었다.

“아악!”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현명한 짓이었다. 나는 큐에 맞은 당구공처럼 튕겨 날아갔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뭔가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안다. 스노아의 방어막이 깨졌다. 마족들이 남아있던 모든 힘을 긁어모아 방어막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왜 나를?’

“카카나!”

누군가의 비명 같은 부름이 들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코를 킁킁대는 마족의 짐승 같은 숨소리도 들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는 끝도 없이 날아갔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이건 천족의 냄새야. 천족의……!”

그 숨소리는 곧 강렬한 갈증과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사기나 마물과 달리, 마족은 내 안에 있는 용사의 흔적을 뚫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어깨가 붙잡혔다. 실에 묶인 소시지처럼 팔뚝이 터져버릴 것 같다.

지독한 고통에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귀신처럼 새하얗게 질린 용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정작 마족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머리는 이미 내 목덜미로…….

“아윽!”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던 현실이 갑작스레 제 속도를 찾았다.

목덜미를 물렸다. 독에 몸부림치고 학대에 피를 흘려봤으나, 신체적 훼손이 이토록 명백한 고통은 당해본 적이 없다.

눈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너무 아파서 입을 한껏 벌렸는데 비명이 나가지 않았다. 아팠다. 아파. 죽을 것 같아.

“아아악!”

마족이 피와 살을 쯥쯥, 빨아먹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 먹지 말고 석판에 뱉어!”

동료 마족이 그를 채근했다. 살이 너덜너덜해진 목덜미에서 억지로 고개를 든 마족이 입 안에 든 피를 여분의 석판에 퉤, 뱉어냈다.

‘석판?’

의식이 아찔하게 멀어졌다. 마족이 내 몸뚱어리를 쓰레기처럼 버렸다. 밑으로 하염없이 추락하는 나를 누군가 날래게 낚아채 품에 안았다.

“카카나!”

“하아, 하…….”

내가 느끼기에도 숨소리가 옅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이었다.

손수건으로 추정되는 하얀 무언가가 목덜미를 짓눌렀다. 고급 원단으로 만들어 부드러울 것이 뻔한데,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통증이 올라왔다.

헐떡거리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차라리 기절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치솟았다. 누군가 내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했다.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드래곤이 만든 바위골렘의 손에 팔다리가 끼어있는 느낌이다.

울컥 올라온 설움과 억울함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싫어……!”

“쉬이, 카카나. 괜찮습니다. 착하죠.”

눈물에 젖은 것처럼 축축하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를 달랬다. 첼러스의 음성이다.

그 소리를 듣자 더 눈물이 났다. 목덜미의 통증은 여전히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너무 아파서 강하게 지압하고 있는 손을 떼어내고 싶었다. 떨어져 나간 살덩어리를 상처 부위에 대놓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 정도로 아팠다.

아무리 힘을 줘도 벗어날 수 없어서, 첼러스의 팔과 손등을 손톱으로 마구 긁어댔다. 떼 줘. 누르지 마. 이 손 좀, 나 좀, 아프지 않게…….

“으윽, 흐윽.”

“지혈해야 합니다, 카카나. 제발…….”

“싫어…….”

“카카나, 기절시켜 드릴까요?”

첼러스가 고통스럽게 물었다.

“차라리 그게 낫겠습니까? 작게 말해보세요.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기절시켜줘. 그냥 잠들게 해줘.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구역질이 나도록 기분 나쁘고 징그러운 무언가가 내 단전으로 훅 빨려 들어오는 느낌에 휩싸였다. 마치 뭔가가 내게 들어오는 것처럼…….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고통이 잊혔다. 그 정도로 큰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내 피가 빠짐없이 흡수되던 석판이 떠올랐다. 수세에 몰린 마족이 무엇을 노렸던 것인지 이제야 알아차렸다.

‘내 피로 마족을 소환한 거야.’

나는 단전을 움켜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상을 알아챈 첼러스가 나를 끌어안았다. 아프게 느껴질 정도로 세게 끌어안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이미 늦었다. 늦고 만 것이다. 마족들은 이미 동료 한 명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내 몸을 이용해서!

“이거 놔!”

이제 나는 용사들을 공격하는 저 수습 마법사들처럼 돌변하고 말 것이다. 목덜미가 아픈 것마저 잊고 마구 발버둥 쳤다.

벗어나야 했다. 이렇게 끌어안고 있으면, 내 몸을 차지한 마족이 용사들을 공격해서…….

“움직이면 안 돼, 카카나!”

아다르가 곁에서 악을 썼다.

‘안 돼. 제발…….’

용사들이 날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들도 진정한 힘을 끌어올려야 막을 수 있는 마족이다. 그런데 그 상대가 나라면?

용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것이다. 방어를 위한 공격이라 할지라도 용사들이 날 공격할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떤 끔찍한 참사가 일어날지 예상이 되었다. 아니, 상상하지 않기 위해서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그저 지금은, 이들에게서 도망치는 것만이 최우선이었다.

그런데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들이 평소에 나를 위해 힘을 조절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이리라고 실감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날 놔줘! 첼러스!”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혀를 질끈 깨물었으나 소용없었다. 악귀 같은 어둠에 발목을 잡혀 속수무책으로 끌려 들어갔다. 나는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카카나!”

걱정하는, 언뜻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나는 손을 뻗어 마지막 동아줄 같은 목소리를 움켜쥐었다. 어둠은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이 목소리를 놓치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눈을 떠야 했다. 이대로 질 수 없었다.

“카카나.”

정신 차려야 해. 용사들을 잃을 순 없어. 내 손에 그들이 다치게 둘 수 없어. 그들이 없으면. 나는 이제 용사들이 아니면…….

[아니면?]

눈을 떴다.

‘어?’

나는 하늘에 떠 있었다. 양옆으로 다섯 명의 마족들이 함께 떠 있었다. 마치 동료처럼.

그래, 동료처럼.

그들은 싸우고 있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농을 주고받으며 킬킬 웃고 있었다. 용사들은?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희끄무레한 인영이 보였다.

“아.”

검은 모래사막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용사들이 보였다. 잠을 자는 건지, 아니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쓰러져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피 웅덩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사막의 검은 모래들이 용사들의 피를 탐욕스럽게 먹어치워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그들의 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붉은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럴 리가 없었다.

용사들은 제국에서, 아니 대륙에서 가장 강했다. 아무도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마족이라 해도 다를 건 없었다. 첼러스의 검기 한 번에 마족들이 수세에 몰렸을 정도였다. 고작, 나 같은 마족이 하나 더 생겼다고 해서…….

‘나라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용사들은 날 다치게 하지 못해.’

그래서? 공격에 당하고만 있었나?

‘바보처럼. 바보처럼…….’

[그래, 네가 죽인 거야. 카카나.]

나는 숨을 멈추었다.

티끌만큼 남아있던 머릿속의 이성이 단숨에 증발했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 용사들을 바라보았다.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이 흘러, 무표정한 입가를 짭짤하게 적셨다. 숨은 여전히 쉴 수 없었다. 이대로 영원히 멈춰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에서는 계속 아, 아아, 하는 이상한 소리만 나왔다.

내 마음이 어떻게 되어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가슴이 쥐어뜯기는 것처럼 아팠다.

용사들이 없다면. 내 이름을 불러주던 입술이, 그들의 다정한 시선이, 손길이, 차가운 죽음 위에 늘어져서…….

[이건 너무 강했나?]

목소리가 뭐라 중얼거렸다.

그러나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계속 서 있었다. 존재할 뿐인 석상처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대신해줄까?]

목소리가 속삭였다.

“응, 이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지, 카카나?”

그때, 누군가 허공에 나타나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것을 바라보았다.

“잔인한 연출인걸.”

그게 뭔지 한참 후에 생각이 났다. 아, 그래. 바드였던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눈물에 젖은 얼굴로 바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검은 고깔모자를 푹 눌러쓰며 휘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모자에 가려져 있어서 눈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숙인 고개를 보아 용사들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가여운 카카나. 용사들이 그렇게 좋았어?”

“…….”

“네 마음 안의 가장 취약한 어둠이, 용사들이 되어버릴 정도로?”

그게 무슨 소리지?

[누구냐! 날 방해하지 마라!]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바드가 우두커니 선 내 몸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낄낄 웃었다.

“너 하급 마족이지? 이렇게 서툴러서야, 원. 카카나가 마음이 얼마나 여린 아이인데, 정신을 아예 붕괴시켜버리려고 하면 어떡해?”

[무, 무슨…….]

“서서히 빼앗아야 육체가 네 몸처럼 잘 따르지. 이런 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해야 한다고.”

순간, 바드의 웃음이 뚝 멎었다.

“물론 카카나는 내 거라서 뺏길 생각이 추호도 없지만.”

[안 돼! 감히 내 먹잇감을……!]

“내, 장난감이야.”

바드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물에 떨어진 잉크를 풀어헤치는 것처럼 풍경이 어그러졌다.

검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던 내 몸도, 오줌을 지려 축축했던 사타구니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강하게 주먹 쥐고 있던 손도 환영처럼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어둠 속에서 홀로 남은 바드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가 신기한 것을 구경하듯이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후회하지 않아도 돼.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거든.”

“……무슨 소리야?”

“아무도 죽지 않았단 소리지.”

그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도 모르겠어? 너 지금 꿈꾸고 있는 거잖아.”

어?

“기대되네.”

그가 꽉 끌어안고 있던 내 몸을 풀어주었다.

“네 나약하기 그지없는 사랑이, 반대로 널 얼마나 강하게 만들어줄지.”

바드의 몸이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분명히 눈을 뜨고 있었는데, 나는 다시 눈을 떴다.

“허억!”

“카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첼러스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빗줄기가 떨어지나 했는데, 비가 아니라 그의 맑은 호수빛 눈망울에서 미지근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내 뺨으로 떨어져 양탄자에 스며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알던 곳이었다.

단출하지만 세련된 조명시설과 소파 몇 개, 매끄러운 융단, 그리고 공간을 꽉 메우는 청량한 향기. 스노아가 마법으로 내부 공간을 증축한 천막 안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검은 모래 언덕에 몸을 누였던 용사들의 싸늘한 시신을 기억했다. 나를 덥혀주던 온기가 생기를 잃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던 소름 끼치는 감각을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느꼈던 절망과 감정들이 아직 망가진 마음 언저리에 남아있었다. 조금 더 얘기를 나눌걸,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질걸, 그들이 많이 웃을 수 있는 말을 해줄걸…….

‘꿈이어도 상관없어.’

나는 손을 뻗어 첼러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째선지 오른쪽 팔이 움직이지 않아서 왼팔로만 그를 끌어안았다. 첼러스가 안기 쉽도록 몸을 낮춰주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들의 배려가 살아있는 것처럼 따뜻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널찍한 어깨에 이마를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왜 그래, 카카나? 많이 아파?”

아다르가 피처럼 끈적끈적한 내 이마의 땀을 맨손으로 슥슥 쓸어주면서 달랬다.

“어떻게 해줄까? 네 마법가방을 가져올까? 진통제가 있어?”

“흐윽, 흐으으…….”

그가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울음소리가 커졌다.

용사들이 얼음물에 빠졌다 나온 양처럼 떠는 날 애타게 바라보았다. 아다르가 차마 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침묵하자 할릭이 그를 제치고 내게 바짝 붙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무서웠어? 안 그래도 아르모어가 깨우려고 했는데, 네가 스스로 일어났어.”

“으윽, 흐윽.”

“울지 마, 카카나. 괴로워? 안아줄까? 아니, 안아줄래. 그래도 될까?”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왼손은 이미 첼러스에게 걸려 있었다. 당시엔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작정 안아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첼러스가 손을 직접 풀어 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혀주었다. 여태 신경 쓰지 않았던 아픔이 갑자기 두피를 짜릿하게 찌르며 올라왔다. 어떻게 된 건지 오른쪽 목덜미가 속까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아팠다.

깃털로 스치기만 해도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으윽…….”

고통스럽게 신음하자 첼러스가 바짝 마른 내 입술을 축축한 수건으로 툭툭 두드려주며 신신당부했다.

“조심해야 합니다, 할릭. 간신히 멎은 출혈이 또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 어떻게 안아야 하는데?”

할릭이 제 커다란 두 손을 어정쩡하게 든 채 굳었다. 날 만지지도 못하고 입술을 질겅질겅 씹는 게 영락없이 두려움에 질린 얼굴이다. 언제고 야성을 잃지 않는 구릿빛 얼굴이 납빛으로 질려있었다. 입술은 어찌나 물어뜯었는지 피딱지가 앉아있다.

“그냥 안아주십시오.”

“그러니까 어떻게!”

“몸을 숙여서, 이렇게.”

결국 첼러스가 시늉까지 하면서 할릭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이불처럼 카카나를 덮어주란 말입니다.”

“그래도 괜찮을까? 상처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할릭은 이제 너무 무서운 나머지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첼러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러면 제가 당신을 죽여드리겠습니다.”

그제야 할릭의 얼굴에 안도가 깃들었다.

“응. 고마워, 안심이다.”

‘무슨 대화를 하는 거야…….’

슬픈 와중에도 그들의 대화가 우습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범벅인 얼굴로 킥킥 웃었다. 그러다 끔찍한 고통에 어금니를 악물고 숨을 쌕쌕 쉬었다.

할릭이 어정쩡하게 내게 몸을 붙이고서 뺨에 수차례 뽀뽀했다. 입술이 꺼슬꺼슬해서 그리 좋은 감촉이 아닌데도 만족스러웠다.

그는 상처를 건드릴까 봐 무서워서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떻게 봐도 안는 행위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좋았다. 높이가 낮은 지붕 하나가 더 생긴 기분이었다. 아늑했다.

나는 첼러스에게 했던 것처럼 할릭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다시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할릭이 내 눈물을 핥아 마셨다. 짐승이 울지 말라고 위로하는 것처럼.

‘진정해야 하는데…….’

그런데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정말 꿈일까 봐. 그들이 죽은 게 현실일까 봐.

“여긴 꿈이 아니다, 카카나.”

사르르륵, 검은 머리카락이 내 이마를 스쳐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을 떴다. 할릭의 굳건한 어깨 너머로 아르모어의 얼굴이 보였다.

“그대는 잠깐 악몽을 꾸었을 뿐이야.”

열이 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숨이 뜨겁고 살이 퉁퉁 부어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데도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르모어를 보고 싶어 하는 걸 알아챈 할릭이 옆으로 조금 비켜주었다.

“우리가 환상인 것 같으냐?”

아르모어가 물었다. 그 질문을 듣자 눈물이 차올랐다.

“전, 저는, 읍…….”

아르모어가 내 뜨거운 입술에 미지근한 혀를 집어넣으며 안을 휘저었다. 힘없이 입을 벌리고 그를 받아들였다. 아르모어의 혀에서 밍밍한 맛이 났다. 전투 중에 입 안쪽이 터진 걸까. 피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동시에 풍성한 장미향이 콧속까지 꽉 채웠다. 아르모어는 느리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오돌토돌하면서도 미끄러운 혀가 제 입 안을 누비듯 내 입천장을 쓸었다.

“으응…….”

달게 신음하며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가 여기에 있음을,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재하고 있음을 느긋하게 확인시켜주는 움직임이었다.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물이 퐁퐁 솟아났다. 음습한 장마철처럼 내리쏟아지던 아까와 확연히 다른 기쁨의 눈물이었다.

‘살아있어.’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진 걸 느낀 아르모어가 입을 뗐다. 은사가 길게 이어지다가 툭 끊겼다. 그가 입 바깥으로 흘러나온 타액까지 삭삭 핥아 마시면서 내 이마에 쪽 뽀뽀했다.

“마족들은 죽였다.”

“확실히……?”

“확실히.”

그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쉬어라.”

믿기 어려우리만치 안온한 잠이 쏟아졌다. 나는 푹신푹신한 솜이불에 깔린 사람처럼 수면의 늪으로 아늑하게 가라앉았다.

***

눈을 떴을 땐 다시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비브로스의 별장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바깥 풍경이었다. 스노아가 근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커튼이 차랑차랑 흔들리는 창밖으로 눈을 굴렸다. 단풍이 들고 있는 나무와 높은 소리로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렸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계절을 알 수 없는 칙칙하고 불안정한 차원균열지대에 있었던 탓에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불그스름한 이파리를 보고 있자니 여우 수인족 틸로의 머리카락이 생각났다.

“일어나자마자 그 남자를 생각하는 건가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왼편을 바라보았다.

스노아가 책을 덮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을 맞은 세상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데, 오직 그 혼자만 벌써 겨울을 맞은 것처럼 시리고 새파란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블루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머리카락과 그의 눈밭 같은 피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흐리게 끌어올려 웃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갈라지는 음성으로 묻자, 스노아가 마법으로 허공에 물방울을 만들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단풍나무를 오랫동안 쳐다봐서요.”

차가운 물방울이 내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입을 벌리자 물이 안으로 들어왔다. 누워있는데도 사레들리는 법 없이 식도로 시원하게 내려갔다.

“여기 교수님 별장이지?”

“네.”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스노아가 책을 덮어 선반 위에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이틀이 지났어요. 몸은 어때요?”

그의 물뱀처럼 차갑고 촉촉한 손이 내 따끈한 뺨을 스쳤다. 나도 모르게 가볍게 진저리쳤다. 그러다 오른쪽 목덜미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져 어금니를 악물었다.

식은땀이 훅 솟으며 갑자기 방 안이 추워진 것처럼 몸이 떨렸다. 스노아가 이불을 위로 끌어올려 꼼꼼하게 덮어주더니 미간을 그러모았다. 자기가 다친 것처럼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내가 약한 탓이야.”

모래 언덕에 널브러져 있던 용사들의 시체가 생각났다.

“내가 약해서…….”

눈을 감아 그 광경을 지워냈다.

“카카나?”

“그때 어떻게 된 거야?”

스노아의 걱정 어린 부름을 무시하고 물었다.

스노아가 잠시 날 말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색이 없는 물빛 눈망울이 수수께끼 같은 감정을 담고서 너울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가 의자를 침대에 바짝 끌어와 앉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세에 몰린 마족들이 동족을 한 명 더 부르자고 마음먹은 게 발단이었어요.”

“석판이 내 피를 먹은 것까지는 기억나.”

스노아의 시선이 얼음덩어리처럼 차게 식어서 내 목덜미 근처로 굴러떨어졌다.

“그래요. 카카나는 계약을 한 거예요. 원해서 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목이 막혀서 말이 나가지 않았다.

나는 입을 다물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뭐가 걸린 것처럼 목구멍이 꽉 막힌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가 한심하게 떨려 나가지 않도록 수십 번 가다듬은 다음, 침착하게 되물었다.

“내가 너희를 공격했어?”

“아뇨. 카카나는 계속 잠들어 있었어요.”

“잤다고?”

“네. 계약을 이행한 제국의 마법사들이 전부 잠에 빠져들었던 것처럼요. 그리고 폭시가 왔죠.”

“폭시?”

갑작스러운 신수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노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폭시가 마족의 영혼까지 물어뜯어 버렸거든요.”

‘그래서 완벽하게 해치울 수 있었구나.’

나는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면 마족이 차지하고 있던 마법사들은……?”

폭시는 덩치가 컸다. 물어뜯겼다면 살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했다. 스노아는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차만 들이켰다.

‘죽었구나.’

가슴 안이 싸늘해졌다.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스노아가 짐짓 가벼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늦은 걸 알았는지 폭시가 카카나 곁에서 한참을 낑낑거렸어요. 걱정하는 눈치였으니, 움직일 수 있게 되면 한번 보러 가요.”

“알았어.”

스노아가 김이 폴폴 올라오는 찻잔을 가져와 향을 음미했다. 여유롭게 몇 모금 들이켜는 모습을 보고 있자 복잡했던 심정이 조금쯤 풀어졌다.

“처음에 마족들은 기세등등했어요. 그런데 뭐가 잘못됐는지 화가 난 것처럼 얘기를 나누더군요.”

“내가 쓰러지고 난 후에 말이야?”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들이 싸우는 도중에 카카나의 석판, 그러니까 마족과 계약을 마친 혈판이 반으로 부서져 버렸어요.”

“혈판이 부서졌다고?”

마족들이 힘 조절을 잘못해서 부술 리는 없었다. 바드의 짓이었다.

‘왜 나를 도와준 거지?’

나는 그가 내게 깃든 마족을 내쫓으면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려고 머리를 쥐어 짜내었다. 대강, 나는 ‘자기 것’이니까 건들지 말라고 했다.

‘마족은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어서 육체를 서서히 빼앗는 거야.’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바드는 어떻게 나타난 거지? 스라일리 경매장에서 나를 쉽게 추적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마음 안 어딘가에 숨어있는 건가?’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왜 잠잠히 있었던 걸까.

용사들과 내가 무방비하게 있어서 공격할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동족들에게 사실을 알려 제국군들을 이곳으로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동족이나 제국이 바드의 말을 무시했을 린 없고, 단지 그가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자기 것’이기 때문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노아는 여전히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영혼까지 샅샅이 살펴보는 기색이었다. 그의 다정한 관찰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구석구석, 눈으로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드의 속삭임이 메아리처럼 돌아와 머릿속에서 웅웅 울렸다.

[가여운 카카나. 용사들이 그렇게 좋았어?]

젠장.

[네 마음 안의 가장 취약한 어둠이, 용사들이 되어버릴 정도로?]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어렴풋이 알게 된 진실을 간신히 덮어놨더니 이 꼴이었다. 꽁꽁 닫아놨던 마음을 마족이 강제로 열어젖히고, 아프게 휘저어버렸다. 그 안에 숨겨놨던 보물 같은 감정들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채 바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이것저것 섞여버려서 이 많은 감정들이 어떻게 그 안에 얌전히 숨을 수 있었던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스노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용사들이 다칠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그렇게 두고 볼 수는 없지.’

한심해지고 싶지 않다. 자리에 주저앉아 질질 짜고 싶지 않았다. 그건 많이 해봤다. 그렇게 친구들을 잃었다.

영원을 살게 될 용사들을, 내 죽음 뒤에 이어질 그들의 세월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생각 또한 없다. 아끼는 무언가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었다. 그게 설령 친구를 대신해 고문을 받는 것일지라도. 또는, 불가능한 목표를 새로이 세우는 것일지라도…….

“뽀뽀하고 싶어.”

“푸읍!”

스노아가 홍차를 마시다 말고 바닥에 뿜었다.

[8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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