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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계획된 신 (27/43)

Chapter 3. 계획된 신

“아무리 봐도 인간인 것 같은데, 수인족이란 말이냐?”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날이 밝자마자 휘라의 안내를 받아 신관의 거처로 이동했다.

신관, 아르소 밀리아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환영 마법을 사용하는 중이라고 설명했지만, 마법에 까막눈인 그녀는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끝까지 경계를 놓지 못하는 신관님의 입장도 이해가 가.’

그녀는 이곳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최고 연장자였다. 수인족들의 숨겨진 거처에 쳐들어온 여섯 명의 인간만큼 위협적인 존재가 없기에, 거듭 확인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얼굴까지 보이는 건 껄끄러운데.’

나는 결국 휘라를 이해시켰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아르소에게 내 정체를 알려주었다. 그녀는 아주 신중하게 내 귀를 만지작거리더니, 곧이어 수인족이 아니라면 답할 수 없을 질문들도 몇 가지 덧붙였다.

양 수인족만의 고충이라든가.

“그렇지 않아도 마을에 여인이 부족한 참인데, 이곳에서 지내는 게 어떠냐.”

내가 수인족이라는 걸 확신했나 보다. 아르소가 태도를 싹 바꾸며 물었다. 듣자 하니 마을에는 여인이 턱없이 부족하단다.

한 여인이 두 명 이상의 연인이나 남편을 두는 것이 보편적이라며, 이곳에 있으면 제국 어디보다 안전하다고 열을 올렸다.

“이곳에는 잘 빠지고 건강한 남성 수인족이 많다.”

“잘 빠지고 건강한…….”

할릭이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아르소의 말을 따라 읊으며 망연한 얼굴을 했다.

“무엇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일이 있지 않냐.”

“어떤……?”

“수인족의 가장 큰 고충이라고 할 수 있는 발정기 말이다. 너는 필히 만족하지 못할 거다. 그래, 안 그래. 응?”

용사들은 초월자다. 체력에 끝이 없는.

나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다고 대답하려다가, 대화가 길게 이어져서 좋을 게 없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그래서 오직 이 순간을 어서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대답했다.

“그, 그렇겠죠.”

용사들이 충격에 빠진 얼굴을 했다.

‘저걸 어떻게 수습하냐.’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려 아르소를 바라보았다.

“거봐라! 연애든 결혼이든, 서로 잘 이해할 수 있는 종족끼리 눈이 맞아야 해.”

아르소가 멀찍이 서 있는 아르모어에게도 다 들릴 정도로 우렁차게 대꾸했다.

“그래야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는 게야. 엘프랑 드워프가 결혼했다고 상상해보려무나.”

“하하…….”

“자신이 만든 물건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드워프를 과연 엘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똑같은 게야!”

나는 어떻게든 이 대화를 어물쩍 넘어가려는 미소를 지었다. 아르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곳이라면, 네 그 공허했던 마음을 꽉 채워줄 남정네들이 널렸단다. 잘 생각하거라.”

“며, 명심할게요.”

“착하기도 하지.”

아르소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죽을 맛이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용사들의 얼굴에 하나하나 새겨지고 있는 위기의식을 확인했다. 웬만한 일에 평정심을 잃지 않는 용사들의 눈에 초조감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아르소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기라도 할까 피가 마르는 모양이었다.

‘같은 종족이면 더 편한 게 있긴 해.’

아르모어가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인데도 내가 쉽게 적응한 건 다 그 덕분이었다. 아르소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사실을 토로하자면, 여행이 끝나고 한 번쯤은 숨겨진 수인족의 마을을 찾아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핍박받는 소수 일족으로 제국에서 홀로 살아남는 것은 외롭고 쓸쓸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할릭이 허리를 끌어안으며 머리에 코를 묻었다.

“우리랑 함께 있을 거지? 응?”

어미에게 매달리는 새끼 고양이처럼 가냘픈 어조였다. 그런데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묵직한 으르렁거림을 들은 것처럼, 이상하게 몸이 긴장되었다.

할릭의 뜨거운 숨이 귓가로 쏟아지자 더욱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솥뚜껑만 한 손이 위협적인 호랑이 발바닥처럼 내 배를 쓸었다. 만약 도망치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았다.

내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자, 그 장면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아르소가 돌연 지팡이로 바닥을 치며 호통을 쳤다.

“틸로! 어디 있냐, 틸로 리민 이놈아!”

그러자 거처 바깥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틸로가 길게 하품을 하며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에요?”

“하여튼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

“또 괜히 화내고 그러시네.”

틸로가 이젠 놀라울 것도 없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아르소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에게 이어서 소리를 내질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리 와봐라!”

그의 가느스름한 눈이 같은 공간에 서 있는 내게 흘끗 머물더니, 곧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들어섰다. 그가 지닌 특유의 느슨한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아르소가 혀를 차며 내 등을 떠밀었다.

“환영 마법인지 뭔지, 마법을 쓰고 있어 비록 인간처럼 보이지만 수인족 여인이라 한다.”

“그렇군요. 반가워요.”

틸로가 어제 있었던 일은 꿈이었다는 듯이 능구렁이처럼 인사했다. 나도 덩달아 그의 장단에 맞추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두 번째 통성명을 마치고, 악수까지 했다. 내게 은근한 시선을 주었던 것과 달리 그는 담백하게 악수만 하고 뒤로 물러섰다. 자신의 매력을 호소할 수는 있겠지만, 억지로 상대의 마음까지 강요하는 성격은 아닌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며 한숨 돌리는데, 아르소가 은근하게 말을 이었다.

“카니는 양 수인족이라고 하는구나.”

“그렇군요.”

틸로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둔한 놈.”

아르소가 다시 한번 욕을 읊더니, 그제야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우리에게 차원균열지대의 유적을 보여줄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스노아가 내 손을 잡아끌어 틸로와 거리가 벌어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곤 나를 아예 자기 등 뒤로 숨기면서 입을 열었다.

“어제 이오렌 씨가 이야기했듯이, 바깥으로 나가면 마물이 우리를 공격할 겁니다.”

틸로가 한쪽 눈썹을 슬그머니 추켜세우며 나와 용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가시방석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신관님께선 위험해지실지도 모릅니다.”

“괜찮다. 너희에게 보여주려는 유적은 마을 안에 있으니 말이다.”

아르소가 자부심이 느껴지는 어조로 첨언했다.

“틸로! 너도 따라와라.”

투덜거릴 것 같았던 틸로가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나와 함께할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릴 정도로 바보 같은 사내는 아니었다. 휘라가 용사들과 틸로 사이에 감도는 묘한 긴장감을 예리하게 인식하고는,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쳤다.

“설마 어제 사고라도 친 거야?”

“그냥 관심을 표출했을 뿐이야.”

휘라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네 그 망할 코가 허락한 향이 드디어 나타났나 보지?”

틸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검은 모래가 조금씩 흩날리는 마을의 길을 따라 쭉 걷기 시작했다. 어둑한 검갈색으로 통일된 단조로운 모양의 집들이 들쭉날쭉 늘어서 있었다.

간혹 층이 높은 건물은 위로 향하도록 만들어 놓은 사다리가 기대어 놓여있었다. 작은 창문과 조경이라곤 없는 황량한 풍경, 온통 무채색인 가운데 홀로 황토색인 항아리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그늘을 만드는 용도인 듯, 나뭇가지를 겹쳐 만든 차양이 자주 보였다.

‘더울 땐 엄청 덥다고 했지.’

차원균열지대의 생태는 종잡을 수 없으므로, 한겨울처럼 춥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불판 위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늘은 다행히 조금 서늘한 정도였다.

우리는 호수가 있는 마을의 광장까지 빠져나온 뒤, 그 뒷길을 따라 마을의 외딴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인가가 싹 없어지며, 낮은 담벼락으로 공간을 분리한 곳이 나타났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수인족 두 명이 아르소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담벼락 안에는 성벽 탑처럼 생긴 새하얀 석조건물이 검은 모랫바닥에 반쯤 파묻혀있었다.

나는 입을 벌리며 그녀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르소가 불을 붙인 호롱을 위로 들어 올리더니 구부정한 허리를 폈다. 이곳에서만큼은 노쇠한 그녀의 허리도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듯 꼿꼿해졌다.

“영광으로 알아라. 이곳을 본 외부인은 너희가 최초이니.”

아르소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 위대한 유적을 수인족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도 알릴 수 있어 기쁜 감정이 꿈결처럼 녹아있었다.

나는 검은 바닥과 묘한 대조를 이루는, 갓 짜낸 염소젖처럼 흰 유백색 건물 내벽을 자세히 살폈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벽화군요.”

스노아가 고개를 끝까지 뒤로 젖히며 말했다. 웅장하고 장대한 광경이었다.

“그래. 이곳에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지.”

아르소가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곳으로 걸어가 등잔을 들이밀었다. 고대에 그려진 그림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다채로운 색조가 쓰인 벽화가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내었다.

아니, 고대가 아니라 미래에서 온 그림처럼 보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건물 내부의 벽화는 칠 하나 벗겨진 곳 없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알아볼 수 없는 글씨가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이곳의 수인족들은 글자를 읽을 줄 아는 모양이다. 아르소가 글자를 읽으며 설명했다.

“여기, 인간을 보호하고 계시는 분이 천족님이다.”

그녀가 새하얀 날개를 등에 단 노란 머리의 천족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성한 순백의 날개는 천족님이 하늘에 계신 절대자의 사자라는 걸 가리키고 있지.”

그녀의 말대로, 천족의 날개에는 오직 신만이 가지고 있는 권능 중 하나인 빛이 광채처럼 표현되어 있었다. 천족은 은백색으로 만들어진 방패를 높이 쳐들고, 검은색 박쥐 날개를 펼쳐 든 검은 존재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그 존재를 어렵지 않게 추론했다.

“마족이군요.”

“그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마족도 그런 존재이지. 이들은 절대자의 찌꺼기 같은 존재야.”

아르소가 거부감이 역력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기에 그들 자신만으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존재기도 하다.”

그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아르소의 눈이 은근하게 나를 훑었다.

“마족은 천족을 갈망하는 존재다. 그들의 마나는 음산하고 차가우며, 끝없이 무(無)를 향해 되돌아가지.”

“무(無)요?”

“그래. 그래서 다른 마나를 먹어치우며 발버둥 치는 게야. 그렇게 해야만 살아있음이 증명되는 존재인 게지.”

“그렇다면 천족은요?”

“반대다.”

아르소가 오른쪽으로 조금 걸음을 옮겨 그림에 불빛을 비추었다. 날개를 쥐어뜯긴 마족이 바닥을 기며 천족을 향해 애타게 손을 뻗고 있는 그림이었다.

“천족의 마나는 스스로 불어나며, 공허한 마족과 달리 절대적인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지.”

나는 엘프와 내 마나를 떠올리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신화에서 천족님이 위대한 치유의 힘을 지녔다고 묘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오, 짧게 감탄한 할릭이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아르소가 은근히 할릭 근처로 걸음을 옮기며 신나서 설명했다.

“그래서 마족은 언제나 굶주려 있고, 천족님에게 달라붙어 마나를 빼앗아 먹으려고 안달을 한다.”

아르소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세월이 발자국을 찍어놓고 간 깊은 주름과 검버섯 사이로, 그녀의 깨어있는 파란 눈망울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사기와 마물이 그대에게 몰려들었다지?”

“네.”

나는 긴장된 목구멍에 침을 밀어 넣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앞서 설명해주었던 천족의 일화에서 무언가 짐작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기와 마물이 그렇게까지 눈이 뒤집혀서 인간에게 몰려드는 일은 없어. 그대에게 천족님의 마나나 그 존재와 흡사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사기와 마물은 마족이 아니잖아요.”

“마족은 아니지만, 마족의 흔적이다.”

아르소가 호롱을 높이 치켜들었다. 돔 형식으로 둥글게 만들어진 천장에 고대어와 그림이 원 모양으로 빽빽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둘둘 말린 거대한 양피지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멀거니 입을 벌리며 그 놀라운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용도로 사용됐던 곳이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불길한 것들은 마족이 다루는 어두운 마나의 찌꺼기야.”

아르소가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오는 악마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거칠게 말을 뇌까렸다. 그러더니 그림에 정신이 팔려있는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눈이 무서운 옛 얘기를 해주는 할머니처럼 음산하게 뜨여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사기를 혹시 본 적이 없나?”

나는 그녀의 음습한 기세에 질려 뒤로 주춤 물러섰다.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그래? 어땠는지 말해 봐라.”

나는 지하묘지의 입구로 지네처럼 기어 나오던, 덩어리진 짙은 사기를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네 같은 모양이었어요.”

“그 사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라지지 않았다면 정말 지네 모양의 마물이 되었을 거다.”

나는 믿기지 않아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사기가 마물이 된다고요?”

“그래. 마물은 고밀도로 결합된 사기로부터 탄생한다. 그러니 차원균열지대의 원흉은 마물보단 사기라고 할 수 있지.”

상상이 되진 않았지만, 내게 달라붙거나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던 사기를 떠올리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사람들이 서로 얼싸안고 있는 그림으로 호롱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사기에 휩싸여 공포에 떠는 기사들이, 성검을 높이 치켜든 한 사람에게 매달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기는 마족의 마나 찌꺼기다. 그래서 더욱 다른 마나를 흡수하려고 하지.”

“체내의 마나보유량이 적은 사람일수록 심하게 영향을 받겠군요.”

스노아가 말했다. 아르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그래. 반면 마나보유량이 풍부하고 강한 자들에게선 도망치려고 한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서 되물었다.

“그냥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게 아닌가요?”

“아니. 강자가 손을 휘젓기만 해도 사기는 흩어져서 멀리 도망가 버려.”

아르소가 다소 지친 사람처럼, 노쇠한 음성에 무거운 숨을 섞으며 대답했다.

“여기 쓰인 고대어에 따르면, 주인과 제대로 융화된 마나들은 자신을 빼앗으려 하는 사기에 포악하게 반응한다고 나와 있다.”

나는 눈을 굴려 용사들을 바라보았다.

“소수의 강한 인간들이 지닌 마나에 사기가 덤비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는 어두컴컴한 내부를 둘러보았다.

매캐한 모래 먼지의 냄새. 석조건물의 세월이 풍기는 고즈넉한 분위기. 그것들이 나를 머나먼 과거 언저리로 데려다 놓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의 이야기가 끝난 듯, 아르소가 호롱의 불을 끄고 출구로 걸어갔다. 나는 마저 둘러보지 못한 그림들을 샅샅이 살피다가, 가장 늦게 퇴장 대열에 합류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었다. 날씨는 이상토록 차고 음산했지만, 겨울이 다가오기 전의 차가운 입김 정도로 느껴졌다. 이 땅은 특별한 무언가로 보호를 받고 있으니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왜 천족의 유물이 있는 겁니까.”

내 옆으로 은근슬쩍 다가오는 틸로를 경계하며, 첼러스가 내 팔뚝을 제 쪽으로 끌어당긴 채 물었다. 천족의 유적을 벗어나자, 거짓말처럼 구부정해진 허리를 손으로 통통 두드린 아르소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눈으로 대꾸했다.

“차원균열지대는 먼 과거 천마전쟁이 벌어진 땅이기 때문이지.”

첼러스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이곳이 이리 황폐해진 이유도, 아직 그때의 충격이 이 땅에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 때문이야.”

“충격이라 함은…….”

“공간에 상처가 났지.”

아르소가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온 거처의 뻑뻑한 문을 열기 위해 애를 썼다. 보다 못한 할릭이 대신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공간에 상처가 났다고요?”

“나는 마법에 대한 건 까막눈이지만, 천족님의 흔적을 공부하면서 이 세상의 공간이 마나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틸로가 의자에 앉은 아르소에게 미지근한 물을 건네주었다. 말을 많이 하느라 모래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건조해진 입을 잠시 축인 아르소가, 길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천마전쟁에서 마족의 마나와 천족의 마나가 첨예하게 부딪쳤고, 그 탓에 공간이 일그러지거나 파괴되었다고 기록되어있어.”

“…….”

“그러다 마계와 가까운 공간이 찢어지며 마족의 찌꺼기인 사기가 이곳으로 흘러들게 되었지.”

“이곳의 이상 생태와 사기가 그 때문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포레스트링의 뚜렷한 경계는 균열지대의 확산을 막고자 천족님이 쳐둔 결계다.”

아르소가 존경이 담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절대자의 어두운 그림자에 잠겨, 당신이 만든 가여운 피조물들이 스러지지 않도록 천족님을 중간계에 내려주신 게야.”

아르소는 중간계의 주인이 인간이라 말하던 드래곤과 상당 부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격동의 시대에 이 땅을 지켜낸 존재는, 용사로 불리는 초월자가 아니었던 건가?’

나는 천족을 향한 아르소의 독실한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면 천족이 아닌, 절대자를 따르는 게 더 맞지 않나요?”

“어리석은 소리!”

아르소가 괴팍하고 외골수적인 단면이 여실히 드러나는, 단단한 음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천족님은 절대자의 분신이나 다름없어! 천족님을 따른다는 건 곧 절대자를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인 게야!”

“하지만, 벽화의 그림만 보고 천족이 신과 같은 존재여서 따른다는 건 다소 이해하기 힘드네요.”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천족의 가호라는 것도 어떤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고요.”

신화가 왜 신화이겠는가. 진실 여부를 가릴 수 없기에 신비롭고, 신비로운 만큼 허무맹랑한 이야기기에 신화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진실로 믿고 따르며, 천족이 선하다고 굳게 믿는 아르소의 절대적인 충성과 헌신이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틸로가 기울어진 태양의 각도를 재보듯, 창밖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며 얘기했다.

“곧 기도 시간이에요.”

아르소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몹시 많은 것처럼 보였지만, 전부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기도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이 과단성 있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틸로가 대신 설명을 늘어놓았다.

“저희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천족님께 기도를 올려요. 뻔한 내용이죠.”

“다시 강림하시어, 천족의 가여운 핏줄인 수인족을 굽어살펴달라는 내용.”

휘라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신매매단에 납치되어 겪었던 경험들이 뼈에 사무치는 듯, 서늘하고 음울한 눈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건물을 나갔다.

그녀의 퇴장을 빤히 바라보던 틸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제국에서 입지가 나쁘잖아요.”

“그렇죠.”

나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틸로! 꾸물대지 말고 빨리 오거라!”

어느새 하얀 의복을 갖춰 입은 아르소가 호통을 치며 지팡이를 흔들었다. 틸로가 느긋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들의 뒤를 살그머니 따라갔다. 광장에 마을의 수인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손수 빚은 것이 분명한 천족의 석상 앞에 바짝 엎드려서, 오랜 시간 엄숙한 기도를 이어갔다.

퍽 고된 과정이었다. 그들에겐 수십 명이 앉아있을 수 있는 의자가 없었고, 그렇다고 바닥에 깔 만한 것들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맨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왕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어 엎드려 있는 노예들처럼.

‘계속 저러고 있으면 다리가 저리지 않을까.’

그런데도 자세가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그들의 남루한 옷차림과 무채색의 마을, 그리고 건조한 장마철처럼 서늘한 바람이 불행을 그려놓은 그림처럼 음울하게 정지해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돌려 배정받은 집으로 돌아왔다. 용사들이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엔 저 벽화 말고도 다른 유적들이 있는 것 같아요.”

스노아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푸른 머리칼을 단정하게 묶으며 얘기했다.

“고대의 마도구가 간혹 보이더군요. 그들이 언급하는 천족의 가호는 실제 천족이 사용했던 결계나 방어 마법일 확률이 높아요.”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나무 의자에 앉은 것처럼 딱딱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황녀에게선 연락이 없고 우리는 마족이 필멸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그들을 무찔러야 해.”

“너랑 얽혀있는 수상한 현상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고.”

아다르가 첨언했다.

스노아가 그의 검은 눈동자를 잠시간 응시하더니, 곧 고개를 수그리며 턱을 매만졌다. 깊은 생각에 빠질 때면 나오는 스노아의 습관이었다.

“우선, 차원균열지대를 샅샅이 뒤져봐야 할 것 같아요.”

“마을 말고, 바깥?”

나는 두려움에 잠겨 물어보았다. 스노아가 내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곱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촉촉하고 매끄러운 감촉이 차게 식은 내 손끝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카카나에게 달려드는 사기와 마물이 걱정이라면, 여기서 기다리셔도 좋아요.”

“밖은 왜 나가보려는 건데?”

“휘라가 했던 말이 신경 쓰여서요.”

나는 그녀가 했던 많은 말 중에서 어떤 게 스노아의 마음에 걸렸는지 잠시간 되짚어 보았다.

“제국의 탐색대가 늘었다는 것 말이야?”

“네.”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물과 유적을 발견하고도 그냥 돌아간다고 했었잖아요.”

“응.”

“분명 다른 뭔가를 찾고 있나 본데, 그게 마족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더라고요.”

황실이 파견한 탐색대이니 타당한 의심이었다.

나는 별안간 속이 착잡해져서 한숨을 쉬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는 용사들의 침착함이 부러웠다.

마족에 대해 정보가 모이고, 일에도 진척이 있었지만 나는 마족만 생각하면 심란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등 뒤로 바짝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가끔은 초월자인 용사들이 마족에게 지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본래의 힘을 되찾은 마족은 이곳에서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천족과 필적하는 존재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그런 나약한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용사들의 싸움을 본 적이 없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디카타 산맥의 양이 나를 용사들에게 이끈 걸 보면, 천족이 내게 무슨 짓을 해놓은 것 같긴 한데…….’

나는 내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수인 폭시를 다루고, 마족과 마물이 눈이 뒤집혀서 내게 달려들 리 없었다.

‘날 써먹을 거면 뭘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달란 말이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당장 용사들과 함께 차원균열지대를 탐색하는 데도 발목이 잡히고 있지 않은가.

나는 괜히 하늘로 고개를 추켜올리며 눈을 부릅떴다. 저 어딘가에서 천족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 상상하면서.

“우선 카카나는 마을에 있는 게 좋겠어.”

아다르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의 차가운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스치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다르가 움츠러든 내 몸을 더 강하게 옥죄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많은 마물과 사기의 시선을 끌면, 제국의 탐색대를 발견하더라도 몰래 지켜보는 일은 하지 못할 거야.”

“맞아. 잘못해서 다칠지도 모르고.”

할릭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 한 줌을 움켜쥔 사람처럼, 조마조마한 얼굴로 맞장구쳤다.

“그냥 싸우는 거랑 지키면서 싸우는 건 다르잖아. 나는 그런 거 못 해. 기사인 첼러스에게 맡기는 것도 한계가 있고.”

같이 따라갈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배제하려 애쓰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나는 내게 들러붙은 용사들을 탈탈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답답했다.

“볼일 좀 보고 올게.”

산책한다고 하면, 호위랍시고 따라붙을 게 분명했으므로 그렇게 둘러대었다.

용사들은 나를 혼자 내보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볼일을 보겠다는데 따라가겠다고 말하기는 뭐한지 구겨진 얼굴로 날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절대 따라오지 마.”

나는 그들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퍽 싸늘해진 바람이 뺨을 스쳤다. 어느새 해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곧 어두워질 것 같아서,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딱 해가 떨어질 때까지만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마을의 규모가 작아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더라도 용사들의 감각 안이었다.

‘혼자 있고 싶은 티를 팍팍 냈으니, 쫄래쫄래 쫓아 나오지는 않겠지.’

나는 변소 근처에서 얼쩡거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용사들이 배려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으로 겁에 질리게 하진 말자.’

나는 멀리 가지 않고 용사들이 있는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을 뺑뺑 맴돌았다. 숨이 거칠어지도록 빠르게 걸었더니,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에 차차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깃들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싸움을 큰 피해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마족과 황실에 대한 정보가 쌓이다 보면, 분명 얽혀있는 사람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나타날 거야.’

나는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므리나 이소리하도 그 시기에 모습을 드러내겠지…….’

그러다 누군가에게 거하게 부딪혔다.

“억.”

“어이쿠.”

여유로운 태도와 부드러운 미성.

나는 콧방울을 움켜쥐고 고개를 들었다. 틸로가 넘어지지 않도록 내 허리를 받쳐주고 있었다. 얼떨떨하게 눈을 끔벅이고만 있자, 그가 아래로 처진 단풍나무 잎처럼 어두운 오렌지 색 앞머리 아래로 눈가를 휘며 웃었다.

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용사들과 수없이 부대낀 끝에, 그 얼굴이 작업을 걸기 위한 초석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틸로는 쫓아오는 대신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작업을 걸려고 왔어요.”

“아, 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네?”

틸로가 풋,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복슬복슬한 여우 꼬리가 나를 현혹하려는 것처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조만간 마을에 발정기가 와요.”

나는 그의 말을 속으로 곱씹다가 신중하게 되물었다.

“틸로 님이 곧 발정기시라고요?”

“아뇨. 마을 전체에 발정기가 와요.”

통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나는 혼자 심각해져서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금방 이해하고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수인족들의 발정기 시기는 원래 제각각이지만, 이성 수인족의 페로몬에 지속해서 노출되면 변화가 생긴다. 아르모어가 내 페로몬 때문에 발정기를 빨리 맞았듯이 말이다.

그런 상황이 수년에 걸쳐 반복되면, 수인족 연인이나 부부의 발정기 시기가 완전히 똑같아지는 때가 온다. 틸로가 말하는 ‘마을의 발정기’도 같은 원리다.

작은 마을에서 수십 명의 수인족이 서로의 페로몬과 부대끼며 생활하고 있다. 모두의 발정기 시기가 똑같아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두 해로 이루어질 일은 아니고, 적어도 몇 세대 동안 반복되면서 비슷해졌으려나…….’

수인족의 마을이 흔하지 않기에 이론으로만 간혹 상상하곤 했던 일이었다. 그걸 실제로 마주하고 있으려니 생경했다.

“신관님은 발정기 시기가 오기 전에 카니를 뺀 나머지 모두를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틸로가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신관님은 카니 동료 중에 남성 수인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까요.”

“그렇군요.”

“만약 그 사실을 알아도 퍽 곤란해하실 거예요.”

“왜요?”

“물론 두 명 다 소중한 동족이자 수인족인 건 마찬가지지만…….”

그가 이해한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얄브스름한 눈매가 내 표정 언저리에 불쾌감이 스쳐 지나가진 않는지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마을에 여성 수인족 수가 많이 부족해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발정기를 혼자 보내는 건 고통스럽잖아요.”

틸로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남성 여럿이 여성 한 명과 파트너를 맺는데, 마을 여자들에게 이미 무리가 되는 정도거든요.”

“아…….”

“아무튼, 그래서 예정보다 마을에서 빨리 나가시게 될 것 같아요. 괜찮을까요?”

“어쩔 수 없죠.”

발정기는 치부다.외부인에게 고스란히 보여줄 촌장은 없다. 게다가 주민들의 페로몬이 일시에 폭탄처럼 터져버리면 머물러도 문제인 건 마찬가지였다. 나와 아르모어가 그 페로몬에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발정기 시기가 앞당겨지면 우리를 보호해야 하는 용사들 입장이 난감해질 거야.’

나는 머리가 아파 이마를 짚었다.

마음 같아선 시원하게 나가겠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단서를 잡을 때까지 머무를 장소가 필요했다.

‘용사들이 차원균열지대에서 정보를 모으려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데.’

“머무르신다면 저와 함께하는 건 어떤지 의견을 여쭈고 싶어요.”

아주 정중한 제안이다. 나는 선뜻 거절하지 못하고 대답을 미루다가 다른 질문을 했다.

“마을의 발정기는 언제 시작되는 거죠?”

“관심이 있으신가요?”

틸로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치떴다. 한번 찔러보긴 하겠지만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왠지 민망해져서 헛기침했다.

“여기서 며칠이나 더 신세를 질 수 있을지 궁금해서 그래요.”

“발정기는 나흘 후에 시작돼요.”

생각보다 촉박했다. 나흘 후면 내일이나 모레부터 마을에 페로몬이 풀리면서 전조증상이 시작될 터다.

‘용사들이 나를 마을에 절대 혼자 두려 하지 않을 텐데.’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인사들이 아니었다.안 그래도 틸로가 관심을 보인 후부터 경계심이 바짝 올라 있었다. 그야말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었다.

내가 나지막하게 앓는 소리를 내자, 틸로가 눈을 가늘게 휘어 웃으며 은근하게 물었다.

“제 파트너가 되어주시겠어요?”

“아니요.”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탓에, 상대가 민망할 정도로 즉답하고 말았다.

내가 한 말에 스스로 놀라서 퍼뜩 고개를 들었다.어조가 차갑게 나가서 눈치가 보였다.

‘억지로 권유한 것도 아니고 부드럽게 요청했을 뿐인데…….’

이놈의 주둥아리는 사고를 안 치는 날이 없다고 한탄하며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행히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크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나는 두 손을 좌우로 경박스럽게 흔들면서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 저는 파트너가 필요 없거든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틸로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혹시, 동료분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라고 대답하기엔 이미 아르모어와 거하게 일을 치른 전적이 있다.

속수무책으로 그와의 뜨거운 밤이 떠올랐다. 자물쇠를 꽁꽁 걸어두었던 상자가 열리면서 그날의 기억이 팍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던 달콤한 말과 농염한 손길. 나를 안쪽에서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움직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날의 밤이 내 몸에 새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랫배가 싸르르 떨렸다. 돌연 갈증이 일어서 말라붙은 목구멍에 침을 밀어 넣었다.

틸로는 눈치가 빨랐다. 내 묘한 반응에서 금세 무언가를 유추해내고는, ‘흐응’ 하고 가늘게 콧소리를 내었다.

그 은근한 시선을 받자 더 견딜 수 없어졌다. 나는 머리를 쥐어짜서 간신히 다음 말을 이었다.

“제, 제가 사실 약제사예요!”

“그렇군요.”

틸로가 가볍게 대꾸했다. 그 대답을 듣자 설명을 더 해야 한다는 필사적인 마음이 들었다. 나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바, 바발, 발정기 억제제를 만들었거든요. 그거 먹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어요! 파트너는 필요 없답니다!”

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으로 대뜸 그에게 제안했다.

“티, 틸로에게도 하나 줄까요?”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틸로가 마음만 받겠다며 웃었다.

“발정기는 수인족이 천족의 자손이라는 중요한 증거거든요.”

꿈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의 어조가 아리송해졌다.

“신관님이 그러는데, 천족님도 발정기와 비슷한 생리현상이 있었대요.”

나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이 없는지라 그의 말을 반 이상은 못 알아듣고 있었지만 괜찮다. 그도 나를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옛이야기를 꺼낸 느낌이었다.

예상이 맞았는지, 내 멍청한 눈에 총기가 깃들자마자 틸로가 건성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천족도 수인족도, 자연과 가까운 존재인 탓이라고 자주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시거든요.”

“그렇군요.”

“마을의 발정기는 아주 중요한 행사예요. 천족님을 기리는 날이죠. 그나저나…….”

틸로가 내게 다가왔다.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어서 물러서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너무 피하면 상대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걸 용사들과 함께 지내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틸로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쉽게 됐네요. 꼭 카니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좋은 사람이 분명 생길 거예요.”

나는 그의 적극적인 호소를 못 알아들은 척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주기적으로 원정대를 꾸려 수인족을 구하러 바깥세상에 나가신다면서요.”

“카니 같은 사람은 더 없을 거예요.”

틸로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정말 제 취향이시거든요. 천족님이 계시다면, 당신을 붙잡으라고 이곳에 보내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

“이 같은 인연이 또 생기긴 힘들겠죠.”

그가 먼저 골목길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마침 돌아가려던 참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섰다. 거절의 연속인 대화를 주고받은 참이다. 우연히 동선이 겹치면 어색할 것 같았다.

그런데 틸로가 그런 내 고민을 안다는 듯이 편안한 어조로 물었다.

“이곳의 길이 많이 헷갈리시죠?”

“네?”

“건물이 모두 똑같이 생겼잖아요.”

그가 자기 옆을 손짓하며 골목 벽에 바짝 붙어 섰다.

“모셔다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예의 바른 안내를 따라 움직이는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틸로의 친절한 얼굴을 말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얌전히 옆으로 가서 섰다.

골목이 좁은지라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향을 음미하는 사람처럼 그의 폐부가 크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곧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 향이 그렇게 좋나.’

수인족에게 페로몬의 향이 좋다고 말하는 건 최고의 칭찬이다. 페로몬의 궁합이 잘 맞을수록 만족스러운 발정기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외모보다 페로몬을 더 중요시하는 수인족이 대부분인 것도 그 탓이었다.

‘사람은 정말 괜찮은데. 무례하지도 않고, 부담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거절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혼자 열심히 고민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틸로가 고개를 까딱 숙여 목례했다. 나도 편하게 손 인사를 했다.

그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질척거리는 게 전혀 없네.’

신기한 기분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헉!”

그리고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용사들을 보고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내가 나갔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둘러앉은 채였다. 심지어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저렇게 심각한 얼굴로 거실에 앉아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용사들은 보기만 해도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눈알이 일제히 내게 굴러왔다. 등줄기로 소름이 내달렸다.

“왜, 왜 그렇게 봐?”

질겁하며 물어보자 아다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그 망할 여우랑 무슨 대화 나눴어?”

확실히 이런 질문을 하는 데 가장 거리낌이 없는 성격이긴 했다.

그가 비장한 얼굴로 씩씩거렸다. 난감하게 얼굴을 구기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다르의 검은 눈이 질투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이글거리고 있었다.

“우리를 알아보랬지, 누가 그 여우를 알아보랬어?”

아다르가 참을 만큼 참았다며 울분을 터트렸다.

“대화든 육탄전이든 상관없다고 했는데 진척이라곤 조금도 없고!”

“나는 나름 최선을…….”

다했나?

입술이 접착제를 바른 것처럼 딱 붙어버렸다. 약물 개발하랴, 시험 치랴, 마물 피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렇게 보니 마음이 편해진 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이전처럼 그들과의 관계가 신경 쓰였다면 좋으나 싫으나 더 관심을 가졌을 테니 말이다.

아다르가 속이 터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어쩌겠는가. 내가 어리숙한 탓인걸.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침묵을 지켰더니 그것마저 역정이 치밀었는지 아다르가 툴툴거렸다.

“걔랑 대화 나눌 시간에 우리랑 한 마디라도 더 얘기를 나누면 되잖아.”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펴보던 할릭이 아다르를 어깨로 툭 치며 입을 열었다.

“야.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왜 그래.”

아다르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눈을 뒤집으며 맞받아쳤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면 질투도 하면 안 돼?”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처럼 앙칼지다.

바깥에서 낯선 냄새를 묻히고 온 주인에게 성질내는 집고양이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되레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생기면 짜증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비틀어진 만족감이 속에서부터 은밀하게 차올랐다.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수습하고, 용사들이 둘러앉아 있는 테이블에 합석했다. 이곳에 앉아 틸로와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을지 머리가 쪼개지도록 고민했을 용사들이 상상되었다. 그 모습이 언뜻 귀엽게 생각되었다.

‘귀엽다고?’

나는 생각한 것을 습관적으로 검열했다가 충격을 받았다. 그 영향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서 입매를 만지작거리는데, 아다르가 나를 뾰족하게 노려보며 요구했다.

“그래서, 끝까지 말 안 해줄 거야? 숨길 정도로 은밀한 대화였어?”

‘저 정도로 질투가 나면 본인도 좀 창피해지지 않나.’

가감 없이 드러내는 아다르가 대단해 보일 지경이다.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냥 별거 아닌 대화를 나눴을 뿐이야.”

“그러니까 어떤 거. 별거 아니라면 말해줄 수 있겠네.”

나는 다 얘기해도 될지 고민했다. 어차피 용사들도 알아야 하는 사항이었다.

‘이곳에서 나흘밖에 못 있는 거라면 숨겨서 득 될 게 없겠지?’

내가 시간을 끌자 아다르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결국 이기지 못하고 토로했다.

“마을에 발정기가 온대. 나는 여기에 있는 걸 허락받았지만 너희는 출입금지야. 당장 나흘 후가 시작이고.”

“마을에 발정기가 온다는 건 무슨 소리야?”

나는 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진저리치다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을 전체가 발정기에 빠진단 말이야?”

할릭은 세상이 무너진다는 소식을 들은 얼굴이었다.

“잠깐, 여기 남성 수인족이 몇 명이나 있었지?”

“카카나가 수인족이라는 걸 알고 눈빛이 변한 사람이 늘었던 거로 기억해요.”

아다르와 스노아가 이성적으로 분석을 시작했다.

“양 수인족이라는 점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첼러스마저 소소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아마 초식과 남성 수인족일 것이다. 이곳엔 육식과가 대부분이지 않나.”

아르모어가 용사들을 차분하게 이해시켰다.

‘난리 났네.’

나는 이마를 짚었다.

‘나흘 안에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단서고 뭐고 다들 눈이 뒤집혀서 발정기 얘기만 하고 있었다.

지금 얘기를 꺼내봤자 듣지 않을 것 같아서, 턱을 괸 채 대놓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건 아르모어와 나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전야처럼 무시무시한 분노를 눌러 담은 고요가 찾아왔다. 그 정적이 깨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몇 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영원히 이러고 있을 기센데.’

내일 아침 해가 밝아올 때까지 끝나지 않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서서 마무리 지을 각오로 말을 쥐어 짜내었다.

“나는 억제제를 먹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너희는 따로 방법을 찾아보는 게…….”

“그 말은, 마을에 있겠다는 소리야?”

아다르가 새되게 물었다. 아까랑 비교도 안 되는 흥분이 그의 어조에서 너울거렸다.

“이곳 전체가 발정기에 빠진다는데?”

“억제제가 있으니까 그거 먹으면 괜찮을 거야.”

“하.”

아다르가 할 말을 잃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억제제를 복용하면 열이 오르지 않습니까.”

언제고 침착함을 잃지 않는 첼러스마저 걱정근심이 그득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산 모양으로 아슬아슬하게 휘어버린 그의 눈썹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카카나를 간호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첼러스. 나는 너희랑 함께하기 전부터 혼자 발정기를 넘겨왔어. 괜한 걱정 하지 마.”

“열이 오르는 건 부차적인 문제라고 쳐.”

할릭이 혈안이 되어서 날 바라보았다. 눈치를 살피면서 아다르의 어깨를 칠 때는 언제고, 지금은 날 한입에 잡아먹을 것처럼 날이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야성적인 구릿빛 얼굴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할릭은 평소에도 금수처럼 포악한 분위기가 몸에 휘감겨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세등등하면 말도 못 하게 무서워졌다.

내가 바짝 얼어버린 걸 알아차렸는지, 그가 최대한 부드러워지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무서웠지만.

“틸로, 그놈은 억제제를 먹지 않겠다고 했다며.”

“그랬지.”

“이오렌 씨 얘기를 들어보니 향기에 민감해서 여태 발정기를 순탄하게 넘겨본 적이 없다더라.”

그는 노골적으로 튀어 나가려는 말을 애써 순화했다. 가상한 노력이었다.

“그래서 여태 파트너를 맞은 적이 한 번도 없대. 욕구불만 상태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단 얘기지.”

할릭이 제 부풀어 오르는 불안감을 사그라트리기 위해 마른 입술을 훑었다. 나는 조용히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내 표정을 살핀 할릭이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어떻게든 판판하게 펴려고 발악했다.

“내 말은, 그러니까, 그가 이성을 잃고 너에게 달려들면 어떡해?”

“맞아. 페로몬은 남아있는 마지막 이성의 끈을 끊어버리는 역할을 한다며.”

아다르가 거들었다. 나와 함께하면서 수인족에 대해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많은 용사들이었다. 저렇게 따지고 드니 뭐라고 설득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착잡한 심정이 되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차원균열지대의 모든 마물을 토벌할지언정, 나를 이곳에 두고 나가진 않을 듯했다.

첼러스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염려되는 부분이 많군요.”

그의 단호한 호숫빛 눈망울을 보고 있으니 내 잘못도 아닌데 괜히 눈치가 보였다.

“내가 틸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이상 너희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리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카카나.”

첼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나흘 후면 시간이 없으니, 그 안에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기랑 마물만 달려들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제일 먼저 마음을 추스르고 자리에 앉아있던 스노아가 냉정하게 얘기했다. 여태 혼자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노레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겠어요.”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그가 날카로운 제안을 찔러 넣었다.

“노레스는 갑자기 왜?”

이제야 좀 진정이 됐는지, 할릭도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타액이나 피를 섭취해서 사기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알려줬던 사람이 노레스잖아요.”

“아, 맞네.”

“분명 아는 게 더 있을 거예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할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던 첼러스의 얼굴에도, 누구 하나 죽일 기세였던 아다르의 흉흉한 미간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내가 다른 사람과 엮일지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 저렇게 돌변한다. 나중에는 어쩌려고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섯 명이 서로 연적인 상태가 아닌가.

‘용사들끼리는 질투 안 하는 건가? 아니면 초월자니까 서로 이해해주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근데 여기서 노레스랑 연락이 닿아?”

아다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상 생태 때문에 다른 지역과 연결 짓는 종류의 마법은 안 통한다며.”

“텔레포트가 아니라 단순히 전신을 주고받는 것뿐이라면 시도할 가치가 있어요.”

스노아가 내 마법가방을 뒤적거리며 대꾸했다.

“저는 유능하니까요.”

저런 말을 하면 재수 없을 법한데, 너무 맞는 말이라서 전의가 일지도 않았다.

스노아가 전신용 수정구슬을 꺼내 테이블 가운데에 놓았다. 그리고 검지로 수정구슬의 반질반질한 표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도구의 작동 조건이 충족되었음에도, 까맣게 죽은 수정구슬에 빛이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역시 쉽지 않네요.”

스노아가 아예 손바닥으로 수정구슬을 덮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뭐라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마도구에 반응이 오지 않으니 직접 마법을 걸어 억지로라도 전신을 연결할 요량이었다.

스노아의 마법은 대부분 몇 초 안에 시전되었기에, 깜깜무소식인 수정구슬이 유독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차원균열지대의 마나는 불안정하다더니 장난 아니구나.’

내심 실패했다는 생각에 기운이 빠졌다. 아쉽게 어깨를 늘어트리는데 돌연 구슬에 희끄무레한 빛이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약한 빛이었으나 작동되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노레스?”

스노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한순간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전신이 끊기는 모양이었다. 손짓 한 번이면 숨 쉬는 것처럼 쉽게 마법을 사용하던 스노아가 잔뜩 긴장한 채 구슬을 움켜쥐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슬에서 익살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야, 잡음이 끝내주는데요? 거기 어디예요? 악당 잡으러 지옥에라도 가셨나.」

‘성공이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연결이 끊어질 것처럼 가늘고 잡음이 많이 섞여 있었다. 용사들과 내가 조용히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했을 뻔했다. 빛이 꺼질 것처럼 흐려지자, 구슬을 붙들고 있던 스노아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차원균열지대예요.”

「대화를 길게 나누진 못하겠군요.」

노레스가 스노아의 뜻을 눈치 좋게 알아들었다. 스노아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전신이 끊어지지 않는 데만 집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첼러스가 대신 이야기를 끌어갔다.

“노레스. 첼러스입니다. 이전에 사기 다루는 법을 간단하게 알려주셨던 일 기억하십니까.”

「기억해요.」

“더 자세히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첼러스의 시선이 내게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수정구슬로 굴러갔다.

“차원균열지대의 마물과 사기가 카카나를 노리고 있습니다.”

「아이고, 또 무슨 일이래요. 그런 경우는 처음 들어보는데.」

“아직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만, 저희는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수정구슬 너머로 희미한 한숨 소리가 흘러들었다.

“타액을 섞는 것으로 며칠 동안 버틸 수 있겠습니까.”

「사기랑 마물이 작정하고 카카나 씨를 노리고 있는 거라면 힘들걸요?」

노레스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하루도 아니고 며칠 동안이라면서요.」

“그렇습니다.”

「거기서 온종일 입을 붙이고 지낼 게 아니라면 불가능할 거예요.」

“…….”

「카카나 씨는 피도 못 마시잖아요. 무리예요.」

첼러스가 확인차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두 팔을 겹쳐 엑스 자 모양을 취했다. 더불어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를 마시는 건 불가능하다. 이래저래 어떻게 삼키더라도 모조리 게워낼 공산이 컸다.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카카나 씨를 안전한 곳에 모셔놓고, 용사님들만 차원균열지대를 탐색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곳은 텔레포트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첼러스가 좁혀진 미간을 문지르며 얘기했다.

“퀄리티미엄처럼 숨겨진 장소가 아니라면 안심할 수 없을 겁니다.”

「카카나 씨가 혼자 두기엔 많이 아슬아슬한 분이긴 하죠.」

내가 뭐 어떻다고.

불만스럽게 구슬을 노려보자 그 시선을 느낀 사람처럼 노레스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워낙 능력이 출중한 분이지 않습니까. 으하하하.」

“됐고요. 방법이나 빨리 말해 줘요.”

나는 그의 웃음을 뚝 잘라먹으며 재촉했다.

「으음……. 그래도 역시 마을에 계시는 게…….」

노레스가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렸다. 미간을 좁힌 첼러스가 못을 박았다.

“카카나를 혼자 두는 건 안 됩니다. 돌발 상황이 생겼을 때 저희가 바로 복귀할 수 없을 테니까요.”

「용사님들 중 몇 명이 카카나 씨와 함께 있는 건요?」

“안 됩니다.”

「상당히 회의적이시네요.」

첼러스가 무거운 침묵을 입에 달고서 애꿎은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마지못해 얘기했다.

“차원균열지대에서 함께할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전력을 나누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엄청 위험한 놈들에게 쫓기기라도 하고 있나 보죠?」

마족에 관한 사실은 용사들과 나, 그리고 황녀만 알고 있었다. 노레스가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성격은 아니다. 그러나 도움을 청할 일이 있지 않은 이상에야 괜한 걱정을 살 필요는 없었다.

노레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삼 일만 유지되는 정도지만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한 번만 가능한 방법입니까?”

「아뇨. 사흘에 한 번씩 해주기만 하면 돼요.」

첼러스의 눈썹이 슬그머니 위로 꺾여 올라갔다.

“왜 그 방법부터 말씀해주지 않으신 겁니까? 지금 상황에 가장 적합한 방법 같습니다만.”

「끄응…….」

노레스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도대체 뭐기에 저렇게 망설이는 거야?’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고서 그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스노아가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일갈했다.

“어차피 말해야 하는 거면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해요. 힘들다고요.”

「죄송해요. 이 방법은 그러니까, 큼, 크흠, 카카나 씨의 의견이 제일 중요해요.」

노레스가 수차례 헛기침을 했다.

“제 의견이 왜요?”

「카카나 씨, 외람된 질문이지만 피임약 가지고 계세요?」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되물었다.

“그건 왜 물어봐요?”

「……를 해야 하거든요.」

노레스가 부모님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음질이 나쁜데, 입 안으로만 중얼거리니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팍 쓰고 되물었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를 해야 한다고요.」

답답해서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나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탕 내려치며 노기 섞인 음성으로 그를 재촉했다.

“아,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어요!”

「성관계를 맺으면 된다고요! 그, 있잖아요! 타액 말고, 예?」

정적이 내려앉았다.

노레스가 허둥지둥 얘기했다.

「저, 저도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거예요! 이 방법이 오래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거예요. 그럼 무운을 빌어요!」

뚝.

연락이 끊겼다.

스노아가 수정구슬에서 손을 뗐다. 그 후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물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내 머릿속은 방금 세탁한 빨랫감처럼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할릭이 열기를 채 감추지 못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괜히 테이블을 노려보았다. 아다르는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르모어가 옷소매로 입가를 가리고 어깨를 소리 없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첼러스가 흐트러진 표정을 재빨리 추스르더니, 최대한 사무적인 어투로 의견을 구했다.

“노레스의 말대로 카카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할 것 같군요.”

“나, 나?”

나는 지나가다가 봉변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질색하면서 물었다.

“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첼러스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었다.

“수인족의 마을에서 혼자 발정기를 보내실지, 아니면 저희와 가실지 선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런 걸 선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

나는 사색이 되어서 용사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조용히 내 대답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으로 땀이 줄줄 흘렀다. 손바닥에 고인 미끈한 땀을 치맛자락에 문질러 닦고서 어떤 대답을 내릴지 고민했다. 전자를 택해도 문제, 후자를 택해도 문제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아랫입술만 질겅질겅 씹고 있었더니, 아르모어가 위기에 처한 나를 구해주었다.

“발정기는 나흘 후 시작이니 급하게 결정할 것 없다.”

역시 아르모어밖에 없다. 내 감동 어린 시선을 느낀 아르모어가 미미하게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까지 천천히 고민해보면 될 거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느냐.”

막혔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였다. 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마구 끄덕였다.

“그래. 나흘 안에 단서를 찾을 수도 있는 거니까.”

웬일로 아다르가 나를 배려하며 부드럽게 얘기했다. 나는 혹시라도 얘기가 달라질까 싶어 서둘러 쐐기를 박았다.

“지금 당장 대답하기는 어려워.”

“그렇습니까.”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발정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단서를 찾도록 해보겠습니다.”

차원균열지대는 넓다. 나흘 안에 단서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내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용사들이라면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나를 괴롭혔다. 그 정도로 결정짓기 어려운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뻣뻣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으로 나흘.

그 안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

“에잉, 쯧쯧. 어떻게 된 게 갈수록 얼굴이 이렇게 수척해지냐. 으응?”

나는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상태에서 채소를 씹었다. 포레스트링에서 최근 가져온 채소라더니 아삭아삭한 게 아주 싱싱했다.

“다 부족한 인간들과 함께하느라 욕구불만이 쌓여서 그런 게야. 그렇지 않느냐, 카니. 응? 대답해 봐라.”

“하하, 그럴까요…….”

나는 가르친 말만 반복하는 앵무새처럼 웅얼거리며 그릇을 뒤적였다. 먹을 것이 없어 아쉬운 사람처럼 비쳤는지, 아르소가 내 그릇에 채소와 과일 몇 개를 더 얹어주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입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생각 없이 먹는 행위가 그나마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주기 때문이다.

아르소가 곰 같지 않은 예리한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능구렁이 같은 어르신이야.’

나는 긴장하며 음식을 삼켰다. 입을 벌릴 때마다 언뜻 보이는 아르소의 혀가 구렁이의 그것처럼 끝이 갈라져 보일 지경이었다. 체할 것 같아서 미지근한 물을 들이켰다.

“요즘, 네 동료들이 뻔질나게 밖을 싸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더구나.”

“아, 네. 알아볼 게 있어서요.”

“알아볼 게 있어?”

아르소가 반색하며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러면 너는 이곳에서 안전하게 지내야겠구나. 마물이 우르르 몰려온다지 않았어.”

‘그 빌어먹을 사기와 마물 때문에 제 번뇌가 시작되었죠.’

나는 속으로만 대꾸하며 음료를 들이켰다.

“틸로에게 마을의 발정기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다지?”

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불편해지고 있었다.

‘요즘 들어 더 노골적으로 회유하시네. 마을의 발정기가 코앞이라 그런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짓눌렀다.

“발정기가 시작되면 힘이 많이 들 테니, 지금부터라도 먹어두는 게 좋을 거다.”

아르소는 이미 혼자 결론을 지은 모양이었다. 퍽 확정적인 어투로 중얼거리더니 발정기를 준비하는 손녀를 챙겨주는 할머니처럼 음식을 더 얹어주었다.

나는 속이 더부룩해져서 식기를 내려놓았다.

‘발정기 억제제가 있다고 확 얘기해 버릴까.’

그러나 충동적으로 행동하기보단 인내하기를 택했다. 아르소가 기함을 할 거라고 극구 만류했던 휘라가 떠올랐던 탓이다.

발정기를 억제하는 약을 먹는 건 곧 천족님의 자손임을 부정하는 행위다. 노발대발하실 게 뻔하다며, 괴팍한 아르소의 성질을 건드렸다간 더 불편해질 거라고 아주 넌더리를 냈다.

나를 들들 볶으며 가르치려 들 아르소가 선명하게 상상되었다. 그래서 여태 말 안 하고 잘 버텼는데 예상외의 부작용이 생기고 말았다. 내가 틸로와 함께 발정기를 보낼 거라고 아르소가 굳게 믿어버리게 된 것이다.

‘어쩌면 착각이 아닐지도 몰라.’

눈앞의 나이 지긋한 곰 수인족은 틸로와 나를 일부러 엮기 위해서라도 충분히 이럴 수 있는 노인이었다.

“그 집은 침대가 영 불편하지 않던?”

“네?”

“내가 틸로와 함께 발정기를 보낼 수 있는 집을 따로 마련해두마. 거기엔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준비되어 있을 거다.”

“전 괜찮…….”

“마을의 발정기는 아주 큰 행사야.”

아르소가 내 말을 끊어내며 얘기했다.

“특별히 온 수인족 손님이 신성한 발정기를 그런 곳에서 치르도록 만들 순 없지. 암, 그렇고말고.”

“아뇨, 저는…….”

‘뭐라고 말하지? 바깥에 나갈 거라고? 아니면 틸로랑 함께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바싹 마른 입 안을 음료로 잠깐 달래주고, 거부감이 역력한 음성으로 얘기했다.

“저는 발정기에 혼자 있을 거예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아르소의 쇳소리 나는 음성에 벼락같은 격정이 깃들었다.

“나 같은 늙은이는 더 이상 발정기가 오지 않아 다행이지만, 너같이 어리고 팔팔한 녀석이 어떻게 발정기를 혼자 견디겠다고.”

“괜찮아요. 익숙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라. 그건 결코 익숙해질 수 없어.”

내 구겨진 얼굴이 펴질 줄 모르자, 아르소 눈에 진심 어린 걱정이 떠올랐다.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 틸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야?”

그녀가 주름이 잡혀 쭈글쭈글하고 거친 손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그러면 다른 수인족 남자들을 소개해주마. 발정기를 어찌 혼자 보내겠다고 이리 고집을 피우는 게야. 그게 어떤 고통을 부르는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게야?”

“저는 괜찮아요.”

“몸이 안 좋으냐? 앓고 있는 전염병이 있어?”

아르소의 상상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랐을 때, 틸로가 등장했다. 그가 아르소와 내가 비운 접시들을 하나둘 치우면서 넌지시 말을 꺼냈다.

“계속 그렇게 다그치지 말아요. 카니가 겁먹었잖아.”

“이놈아! 그동안 수차례 발정기를 혼자 보내놓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게야!”

아르소가 호통을 쳤다.

“제 코를 이기질 못해서 매달 수명을 깎아먹는 녀석이 말은 잘하는구나!”

틸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저, 아직도 사리 분별을 못 하고…….”

아르소가 이마를 짚는 사이, 틸로가 내게 바깥을 턱짓했다. 퍽 의미심장한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휘라가 당신을 찾던데요.”

“휘라가요?”

“지금 저랑 같이 나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찮죠, 신관님?”

아르소가 틸로를 노려보다가 나를 의식하고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틸로가 나머지 식기들도 모두 치운 뒤, 저를 노려보는 아르소에게 찡긋 윙크하며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1년 365일 화나 있는 것 같은 아르소도 아르소지만, 그에 개의치 않는 틸로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거의 악의 소굴처럼 느껴지는 아르소의 집에서 빠져나와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다 찌뿌둥한 기분이었다.

“미안해요. 신관님이 수인족이라면 다 제 손주들처럼 아끼시거든요. 걱정되어서 저러시는 거예요.”

마을의 존속이 매해 위협받는, 차원균열지대의 촌장이다. 그럴 수 있었다.

틸로가 짓궂게 말을 덧붙였다.

“많이 제멋대로긴 하지만요. 그간 겪어보셨으니 이건 말 안 해도 알겠죠?”

“근데 휘라는 어디에 있어요?”

“포레스트링으로 사냥을 나갔어요.”

나는 눈을 멀거니 깜박거리다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물론 거짓말이죠.”

틸로가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처음에도 이런 식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를 구해주었었다.

나는 황당해서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아르소를 제 손바닥 위의 구슬처럼 꿰고 있는 틸로가 웃겼다.

“그나저나 문제네요. 아마 제가 눈에 밟혀서 더 카니를 설득하려고 할 거예요.”

“왜요?”

“그간 발정기를 파트너와 보내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요.”

틸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으로 제가 인정한 향기이니, 신관님은 이런 기회가 다시없을 거라고 여기시는 것 같아요.”

‘수명을 깎아먹는다는 게 그 소리였구나.’

발정기를 파트너 없이 보내면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 당연히 몸에 좋지 않았다. 그걸 아는데도 발정기 억제제를 거부하는 이곳의 신앙심이 새삼 견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정기를 홀로 보내게 할 정도로 예민한 코는 어떤 걸까.’

그리고 그 코에 최초로 향기롭게 느껴지는 페로몬이라는 건…….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틸로가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 같으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릴 것 같은데.’

만약 그랬다면 승낙하고 말았으리라. 아르소의 말마따나,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기 때문에.

“시간이 늦었네요. 자신은 없지만, 신관님은 제가 설득해볼게요. 이만 집으로 들어가 보세요.”

“고마워요.”

틸로가 씩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용사들은 나흘 안에 단서를 잡아보겠다고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을 바깥에서 보냈다. 내가 잠들 때 집으로 돌아와, 세 시간 정도 쪽잠을 잔 뒤 바로 바깥에 나갔다.

‘오늘은 일찍 돌아온댔지.’

정말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일모레가 발정기 시작이었다. 이곳을 벗어난다는 결정을 내리면 당장 내일 방을 빼야 했다.

‘고민을 더 붙들고 있을 수 없어.’

틸로는 아르소를 설득해보겠다고 했지만, 외골수인 아르소가 틸로를 압도할 가능성이 크다. 틸로가 아무리 영민한 사람이어도 고집을 부리는 노인의 뜻을 꺾긴 힘들 테니 말이다.

‘뭐야. 그러면 결국 마을에 있으면 틸로랑 발정기를 보내게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내가 결정해야 하는 건 어느 장소에서 시간을 보낼지가 아니었다. 틸로와 잘 것인가, 아니면 용사들이랑 잘 것인가. 둘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면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틀 동안 머리털이 빠지도록 고민한 것이 무색하도록, 금방 결정이 났다.

‘당연히 용사들이랑 자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10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원하게 결론을 내리고서 희희낙락하게 용사들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드는 생각에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나는 신나게 흔들던 두 다리를 조용히 내려놓고서, 두 손을 깍지 껴 입과 코를 가렸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틸로 리민은 호감형인 사람이다. 조금 능글맞지만, 성격이 모난 곳 없이 서글서글했다.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았으며, 외모 또한 출중했다.

용사들과 틸로에게 품고 있는 마음이 호감뿐이라면 당연히 고민은 별다른 진척 없이 이어졌을 것이다. 용사들 다섯 명이 내게 고백을 해왔을 때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해 쩔쩔매면서 말이다.

‘정 때문인가.’

고개를 저었다.

‘틸로보다 정이 든 건 맞지만, 용사들이 편해서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게 아니야.’

나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내 생각에 몰두했다.

‘오히려 더 불편하지. 계속 함께해야 하잖아.’

그러면 남는 이유는?

“…….”

멍하니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며 모래투성이가 된 용사들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바깥 공기의 싸늘한 기운이 사기의 그림자처럼 전신을 감싸며 흘러들었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떠올린 내 생각이, 아니, 그건 생각이 아니다. 찰나 동안 내 전신을 지배한 어떤 감정이 준 충격이 채 꺼뜨리지 못한 불씨처럼 잔류해 있었다. 뜨거운 것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온몸에 불을 지피는 느낌이었다.

아다르가 몸에 튄 모래알갱이와 마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더러운 찌꺼기들을 털어내며 혀를 찼다.

“망할 마물 때문에 뭘 편하게 알아볼 수가 없네.”

스노아가 한숨을 쉬며 모두에게 청결마법을 걸어주었다. 오늘도 허탕이었다.

“역시 나흘 안에 단서를 잡는 건 무리였나 봐요.”

“매번 허탕만 치니까 김이 새네. 차원균열지대도 무식하게 넓고.”

할릭이 쭉 기지개를 켜며 얘기했다.

솔라리소드의 날에 이물질이 묻지 않았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첼러스가 검을 검집에 꽂아 넣으며 얘기했다.

“제국이 휩쓸고 지나간 곳을 발견하지 않았습니까. 그 방향으로 쭉 나아가면 될 겁니다.”

“마을에 발정기가 찾아오기 전까지 찾는다는 목표는 실패한 거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어때, 카카나. 오늘은 결정을 내려야 해.”

나는 할릭의 말을 듣지 못하고 멍하니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이상한 기색을 알아차린 할릭이 근처로 와 허리를 숙였다.

나는 그가 지닌 특유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제대로 된 조명시설이 없어 어둑한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하는 주황색 눈망울이 환한 촛불처럼 근처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뜨뜻미지근하게 대답했다.

“아, 응. 그래야지.”

“무슨 일 있었어?”

아다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꽉 막힌 목구멍에 침을 밀어 넣고 입을 열었다.

“아니, 심란해서.”

“결정 내려야 하는 것 때문에?”

나는 침묵을 유지하다가 부러 분위기를 환기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결정은 이미 내렸지.”

“뭔데?”

“너희랑 같이 가기로 했어.”

가볍게 대꾸하자 실내가 조용해졌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용사들이 하나같이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뭐 하는 건가 싶어 그들의 조용한 눈싸움을 구경하고 있는데, 머리를 그러모아 오른쪽 어깨 위로 늘어트린 아르모어가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그대.”

“네?”

“누구와 함께 밤을 보낼지 결정했는가?”

중대한 사항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누구랑 잘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용사들을 한 명씩 마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로 열이 화르륵 몰렸다.

‘맙소사.’

피가 몰려서 귀가 뜨뜻해지다 못해 핑그르르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묵념하는 사제처럼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우렁차게 뛰어서 꼭 가슴 안에서 천둥이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마른입술을 핥고 심호흡했다. 용사들이 내 대답이 떨어지기를 애타게 고대하고 있었다. 서로 도끼눈을 뜬 채 견제 중이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기회만 되면 나를 유혹하지 못해 안달이던 아다르까지 조용히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느긋하게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아르모어뿐이다.

“나, 나는…….”

‘한 번 사고 친 이력이 있으니까, 역시 아르모어가 덜 껄끄러우려나?’

나는 그날의 밤을 떠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신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 쾌락을 다시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아, 안 돼. 아르모어는 너무 벅차. 그러면? 첼러스?’

이번엔 첼러스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갓 내려온 천사처럼 휘황찬란한 금발과 흰 피부. 내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호숫빛 눈망울.

그 눈부신 미모를 보고 있자니 성관계의 목적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조차 죄짓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다급하게 시선을 돌려 아다르를 바라보았다. 일상생활에서도 나랑 싸우지 못해 안달인 녀석이었다. 어떤 식으로 나를 괴롭힐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할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의 거대한 덩치를 보자마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내 혼란스러운 시선의 정착지는 스노아였다. 언제고 이성을 잃지 않는, 그의 중성적인 외모를 바라보고는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스노아랑 잘래.”

“뭐라고?”

아다르가 제 귀를 믿지 못하겠다는 양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두 손으로 뺨을 움켜쥐고 있는 꼴이 절규를 표현했다는 어느 화가의 음울한 그림과 똑 닮아 있었다.

나는 못 본 척하면서 은근슬쩍 스노아에게 달라붙었다. 뜻밖이었는지, 놀라서 치뜬 눈으로 날 바라보던 스노아가 곧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내 머리에 짧게 입을 맞추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왜? 어째서 저 녀석인 거야? 남자 구실도 제대로 못하게 생겼, 컥!”

스노아가 날린 아쿠아볼에 정통으로 맞은 아다르가 쫄딱 젖은 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스노아가 웃는 얼굴로 아다르에게 분이 섞인 마법을 몇 차례 더 날렸다. 그리고 언제 그런 흉악한 마법을 썼냐는 듯이 내게 꽃처럼 웃었다.

“아다르의 멍청한 소리는 신경 쓰지 마세요, 카카나.”

나는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스노아를 선택한 이유도 용사 중에 그나마 주도권을 잡기 쉬워 보였기 때문이지만, 지금 그런 얘기를 했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대체 왜 스노아인 거냐고!”

아다르가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양 항의했다.

‘이유를 대지 않으면 하루 종일 저러고 있을 것 같은데.’

혹은, 생각을 바꾸게 해주겠다면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지도 모른다.

전자나 후자나 둘 다 피곤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가 찍소리도 내지 못할 명분을 댔다.

“스노아라면 다음 날이 되어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해줄 것 같거든.”

“그런 건 나도…….”

“정말?”

나는 그의 가출하기 직전인 양심을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지켜보면서 추궁했다.

“툭하면 상기시키면서 날 괴롭힐 거잖아.”

이렇게까지 확신하니 제아무리 아다르여도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다. 그간 내게 했던 짓이 좀 많았는가. 그가 괜히 의자를 발로 차면서 화풀이를 했다.

스노아가 그의 몸에 있던 물기를 날려주면서,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 일련의 행동이 얄밉게 보였는지, 혼자 뭐라 투덜거린 아다르가 팩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스노아의 품에 코를 묻었다.

‘아, 이 향기.’

굳이 발정기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근거리에 있으면 희미하게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나는 스노아의 청량하고 깨끗한 체취를 양껏 들이켰다. 심란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스노아가 투명한 물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맑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

‘평소엔 남색이 조금 섞인 것처럼 보이는데, 오늘은 아니네.’

기름 램프의 불빛 때문인지 따스한 호박색이 물빛 눈망울 안에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가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그의 미모에 홀려서 멍하니 되물었다.

“뭐가?”

“내일 집을 비워야 하니, 오늘 미리…….”

“아.”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수그렸다.

대화를 듣고 있던 할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낙 몸이 큰지라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만으로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가 시선을 피하며 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할릭?”

놀라서 그를 붙잡았다. 할릭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한숨을 쉬는 것 같은데, 괜히 내 걱정을 살까 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경 쓴 모양이다.

그가 어떻게든 갈무리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씁쓸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해졌다.

“둘이 일을 치르려면 집을 비워줘야 할 거 아니야. 내일 오후쯤에 들어올게.”

그가 옆에서 뚱하게 서 있던 아다르의 뒷덜미를 잡아채 확 끌어냈다.

“너도 가자.”

“뭐야. 난 안 나갈 거라고!”

“그럼 여기서 보고 있을 거야?”

할릭이 헛소리하지 말라며 그를 잡아끌었다. 아다르가 힘으로 버텼다. 할릭의 팔뚝에 힘줄이 불거져 나오는 걸 보아 마나까지 운용해서 버티고 있는 눈치다.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신기한 생물을 보듯 했더니 아다르가 표독스럽게 얘기했다.

“내가 더 기분이 좋아질 수 있도록 도와…….”

상상을 초월하는 언행에 황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미쳤나 봐!”

나는 그가 입을 다문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떼고 악을 썼다.

“네가 무슨 조수야? 옆에서 거들게?”

“왜? 잠자리 조수도 있을 수 있지.”

또라이도 저런 또라이가 없다. 나는 기가 질려서 뒷걸음질 쳤다.

할릭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 서 있는 아다르의 몸을 아예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들쳐 멨다. 통나무를 두 어깨에 짊어진 나무꾼 같은 뒤태에 넋이 나갔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할릭이 손을 흔들면서 집을 나갔다. 그제야 집 안에 평화가 깃들었다. 나는 진이 빠져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다섯 명이랑 정식으로 사귀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지는 건가…….’

나는 끝까지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던 아다르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꽤 시달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첼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전에 한 번 겪은 상황이어서 그런지, 다른 두 남자보다는 눈에 띄게 태연했다. 그가 내게 짧게 목례를 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아르모어가 따라 나갔다.

방에 스노아와 나만 남았다.

나는 뒤에 선 스노아의 묵직한 존재감을 느끼면서 뻣뻣하게 굳은 목을 가다듬었다. 벌써 어색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서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빙글 몸을 돌렸다.

은은하게 호롱불 몇 개만 켜진 공간에 스노아가 물의 여신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긴장해서 얼어붙었던 것마저 잊고 그의 외양을 감상했다.

바닷물을 떠와 머리에 고스란히 엎질러놓은 것처럼, 새파란 머리카락이 찬찬하고 섬세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호박색 불빛이 바닷가의 석양처럼 불그스름하게 물든 채 번지고 있었다.

‘예쁘다.’

온갖 잡념이 사그라지고, 그 생각만 들었다.

그의 백옥처럼 흰 피부, 색채가 없는 물빛 눈망울과 대조를 이루는 파란 속눈썹까지 심금을 울리도록 어여뻤다. 심지어 스노아는 동그란 콧방울과 미끈하게 생긴 입술의 주름마저 예술적으로 고왔다.

저 정도면 인형이라는 비유가 그에게 실례될 수준이었다. 그가 한 손을 뒤로 가져가, 짧게 꽁지머리를 하고 있던 머리끈을 풀었다.

굵게 파도치는 굴곡진 머리가 그의 날카로운 턱선 언저리로 사르륵 떨어졌다. 스노아가 손빗으로 두어 차례 머리를 빗어내며 뭉친 부분을 풀었다. 그리고 윤기가 흐르는 옆머리를 오른쪽으로 곱게 넘겨 귀에 걸었다.

‘치장하고 있는 아가씨를 몰래 훔쳐보는 것 같네.’

꽤 구체적인 감상을 늘어놓으며 눈을 깜박이는데, 스노아가 내게 천천히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왜 그러세요? 아까부터 계속 멍해 보여요.”

“아.”

나는 붉어진 뺨을 숨기려 애쓰며 눈을 굴렸다.

“네가 예뻐서…….”

“네?”

나는 손부채질을 하다 말고 그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사람은 밑에서 올려다보면 못생겨 보이기 마련이던데, 스노아는 콧구멍 모양마저 완벽했다.

‘장인의 혼을 녹여 완성한 걸작도 이보단 못하겠다.’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

나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괜히 큼큼, 헛기침했다.

“우선, 피임약부터 먹자.”

내 붉어진 뺨을 훑어보는 스노아의 은근한 시선을 느끼며 마법가방을 뒤졌다.

수인족인지라,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어 피임약을 항상 쟁여두는 편이었다. 미리 만들어둔 수량이 꽤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작은 파란색 구슬 모양의 알약을 넘겨주었다.

“그냥 삼키면 되는 건가요?”

“씹어서 삼켜야 해.”

둘 중 한 사람만 피임약을 복용할 경우 피임 성공률이 떨어져서 같이 복용하는 편이 좋았다.

나는 통에 든 알약 하나를 손에 떨궈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꼭꼭 씹어 삼켰다.

내가 하는 양을 빠짐없이 관찰한 스노아가 신중한 얼굴로 피임약을 씹어 삼켰다. 그의 더없이 진지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버렸다. 내가 악동처럼 키득거리자, 스노아가 붉어진 얼굴로 살짝 불퉁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아니. 꼭 처음인 것처럼 굳어 있길래.”

스노아의 냉철한 이성이 흔들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가 긴장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약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 웃음이 터졌다.

까치발을 들어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그런데 스노아의 흰 피부가 점점 붉게 달아오르는 게 아닌가.

나는 커다랗게 치뜬 눈을 두어 차례 끔뻑거렸다. 처음엔 램프의 불빛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손에 닿은 뺨과 귓바퀴가 뜨끈뜨끈했다.

“스노아?”

스노아가 청순한 눈망울을 아래로 가련하게 내리깔며 속삭였다.

“처음 맞아요.”

“어?”

“이렇게 제대로 성관계를 가져본 건 처음이에요.”

“헉.”

나는 예상외의 난관에 봉착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서투른 건 싫죠?”

내 곤란한 눈을 본 스노아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주위를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아니야, 스노아! 나는 네가 처음이어서 싫은 게 아니라, 이, 이래도 괜찮은 건지 미안해져서…….”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마음을 주고받기 위한 관계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차원균열지대로 쫓겨날 내일을 대비해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성관계야 처음이든 아니든 의미 있는 일이고 항상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저렇게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왕이면 더욱 낭만적인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런 관계는 슬프잖아.’

그리고 허무할 것이다. 그 감정을 스노아가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다른 용사들을 불러와야 하나? 아니, 그들에게도 상처가 되는 건 똑같나?’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버렸다.

끙끙거리고 있는데 스노아가 달아오른 얼굴로 내 옷 소매를 잡아당겼다. 한껏 물먹은, 떨리는 음성이 쑥스러움을 타는 것처럼 느릿한 속도로 내 귓가에 스며들었다.

“좋아요.”

연기에 능한 그가 습관적으로 숨겨왔던 제 감정을 드러내고, 내게 고백했다.

“카카나여서, 좋아요. 지금 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스노아의 떨림이 전염이라도 된 듯 내 얼굴도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심장에서 세찬 핏물이 정수리 끝, 손가락 끝까지 쫙 뻗어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폭발하기 직전인 얼굴을 숨기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누가 보면 웃겨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 둘이 음침한 방 한가운데에 서서, 대역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서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 스노아는 처음이니까 내, 내내, 내가 주도해야지.’

나는 지난 과거의 경험들을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띄워 보려 노력하며 말을 텄다.

“그, 음, 나부터 옷을 벗을까? 아니면 너부터?”

말투에 당황이 역력하게 배어있긴 했으나 이 정도면 성공적이다. 내가 경험자의 미소를 띠고 필사적으로 여유로운 척하자, 스노아가 꽃밭에 선 소녀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귀여워요, 카카나.”

부드럽고 미지근한 살덩어리가 내 입술을 덮었다.

나는 크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근거리에 있는 스노아의 나비 날개 같은 파란 속눈썹이 설렘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 허리에 팔을 감으며 그가 고개를 비틀었다. 입맞춤이 깊어졌다.

그의 키스는 물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래서 방심하고 키스에 빠져들었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입맞춤이 농밀해져 있었다. 내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깊숙이 스며들어와 날 함빡 적시고 물러가는 가랑비 같았다.

그와 입맞춤을 몇 번 주고받았을 뿐인데, 우리는 어느새 침대에 앉아있었다. 나는 스노아가 뺨에 뽀뽀를 할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그의 어깨를 끌어와 침대에 눕혔다. 의도를 알아챈 스노아가 기쁘게 웃으며 내 목에 팔을 감았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에게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러다 돌연, 아주 중요한 사실을 떠올리곤 빠르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잠깐.’

나는 그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다 말고 쩡 얼어붙었다.

‘발정기 아닐 때 하는 건 처음인데.’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또렷하다 싶었다.

발정기 때는 대부분 이성이 거의 날아간 상태에서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스노아를 똑바로 인지하고 있는 지금 상황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흐트러진 숨소리, 나를 올려다보는 울망거리는 눈동자, 그리고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까지. 선정적인 모습에 목덜미가 선득하도록 솜털이 곤두섰다.

나는 본능대로 움직였던 그간의 행위들을 되짚어 보며, 이 이후에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입술을 비비는 것을 끝으로 움직이지 않자, 스노아가 의아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롯이 나를 향하는 그의 순수한 시선을 느끼고 있으니, 안 그래도 빨리 뛰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차근차근 해보자.’

하얗게 질려 있던 머릿속에 조금씩 생각이 깃들었다.

내 목과 허리에 감긴 스노아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수그렸다. 스노아와 나의 찐득찐득한 숨결이 욕망으로 뭉뚱그려지며 섞였다. 그의 차끈한 입술이 내 귓불 언저리로 다가온 순간, 뜨거운 쇳물처럼 달아오른 흥분이 머릿속을 휩쓸어 갔다.

격정의 시간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나는 녹초가 된 채 침대에 누워, 스노아의 규칙적인 숨결을 느끼고 있었다.

“스노아.”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던 스노아가 땀이 희미하게 배어 나온 목덜미에 코를 박으며 대답했다.

“네.”

힘이 없어서 멀리 시선을 두고 있던 나는, 뜨겁고 말캉거리는 무언가가 목덜미를 훑자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목적이 분명한 관계였던지라 한 번 일을 치르고 나면 깔끔하게 끝날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다. 초월자들에게 육체적인 한계는 없는 수준이었고, 스노아는 끊임없이 나를 원했다. 그 탓에 관계가 끝이 날 듯하면서 끝나질 않았다.

나는 그의 아름다운 외모와 요청에 약했다. 발정기가 아니었던지라 힘에 부쳐서 고개를 젓다가도, 스노아의 간절한 시선 한 번이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몸을 맡기곤 했다.

처음에는 내가 그를 리드했지만, 나중엔 너무 지친 나머지 스노아가 주도했다. 그는 나를 어르고 달래, 마지막의 마지막 흥분까지 눈물에 적셔 끌어냈다.

처음이라는 말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빠른 습득력이었다. 그는 오늘 하룻밤 만에 내 몸의 민감한 부위를 거의 모두 찾아냈다. 밤일할 때도 학자다운 면모가 드러나는 건가 싶다가도, 이 정도면 타고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솔솔 쏟아져서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깜박였다.

“피곤하죠?”

“그러게 나한테 왜 그랬어.”

나는 팍 쉰 목소리로 볼멘소리를 했다.

“미안해요. 카카나가 너무 예뻐서.”

세상에서 제일 예쁜 스노아가 나더러 예쁘다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장기 대신 돌이라도 든 것처럼 무거운 몸을 억지로 돌렸다. 스노아의 얼굴을 또 보고 싶었다.

나만을 바라보는, 그의 깨끗한 눈망울은 평생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너는 땀을 흘려도 청량한 향기가 나.”

그의 너른 가슴팍에 코를 묻고 숨을 쉬다가, 고개를 들었다. 땀에 젖은 스노아의 뺨에 머리카락 몇 올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을 손으로 떼어주며 스노아의 완벽한 미모를 감상했다.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스노아는 영원히 변하지 않겠지.’

그의 축축한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손가락에 문득 힘이 들어갔다.

‘날 사랑하는 마음까지.’

나는 옹송그린 손을 품으로 가져온 뒤 그의 쇄골에 이마를 박고 몸을 웅크렸다.

‘용사들은 죽지 않으니까.’

“왜 그러세요, 카카나?”

나는 그의 허리를 안아 품으로 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온몸에 열이 올라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뜨거워진 눈가를 그의 가슴팍에 문질러 흔적을 없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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