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차원균열지대 (26/43)

Chapter 2. 차원균열지대

나는 단전을 감싸고 있는 첼러스의 손을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여태 검을 잡아 온 탓에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여 있었다.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핏줄은 하얀 손등에 깨끗한 강물처럼 불거져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혈관을 콕 찔렀다. 그러자 혈관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 야릇한 느낌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첼러스가 입을 열었다.

“마나를 제법 모으셨군요.”

온화하고 유순한 음성이 녹은 크림 거품처럼 귓가로 흘러들었다.

나는 어깨를 끌어올리며 자라목을 했다. 첼러스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낮은 음성이 뒤통수에 대고 어찌나 웅웅거리는지 괜히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그래?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혔는데, 그래도 제법 모였나 보네.”

“카카나는 마나 다루는 데에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흠.”

“이렇게 빨리 배우고 있으니까요.”

나는 이제 제2자각자였다. 몸에 흡수되는 마나를 느끼고, 단전에 마나핵이 형성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빠른 습득력이어서 겸연쩍게 말을 돌렸다.

“아르모어가 도와준 덕분이지, 뭐.”

나는 그의 손을 떼어내서 넓적한 손바닥을 쓸었다. 바위 표면을 만지는 것처럼 거칠었다. 뼈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조물거리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그의 따스한 품에 안겨 있으니 솔솔 잠이 쏟아졌다.

“주무시겠습니까?”

그가 다시 내 배를 마사지하듯 문질러주며 말했다.

“복종포션의 해독제를 만들어내느라 그간 고생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품에서 꾸물꾸물 빠져나왔다.

“마나석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서 그다지 힘들지 않았어. 약물을 만드는 데 애를 쓰긴 했지만.”

“졸려 보입니다.”

“네 품이 아늑해서 그래.”

나는 첼러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준 뒤 의자에 가서 앉았다.

우리는 마탑의 객실에서 농땡이를 피우는 중이었다. 완성된 해독제를 배부하기 위해 기껏 들렀더니, 용사들이 대신 전해주겠다며 홀라당 들고 사라진 탓이었다. 첼러스는 나와 함께 객실에 남는 역할을 떠안게 되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나는 깊은 의문을 느끼며 물었다.

“해독제를 전해줄 뿐인데, 뭐가 위험하다고.”

“그들에게 카카나는 생명의 은인,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첼러스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음성으로 말을 잘라냈다.

“독실한 신자가 있다면 카카나를 신의 사자라 여길지도 모릅니다.”

“무슨 신의 사자야.”

콧방귀를 뀌어가며 손을 저었더니, 첼러스가 정색하고 물었다.

“농담으로 드린 말이 아닙니다.”

‘저렇게까지 정색하니까 뭔 말을 못 하겠네.’

나는 민망해져서 괜히 눈을 굴렸다. 첼러스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카나는 자신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대단한 일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기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다나가 복종포션을 만들려다가 실패했다는 소식이 있어서 더욱 저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첼러스의 한숨을 더 늘리는 꼴이 될 것 같아서 굳이 말하진 않았다.

“복종포션의 해독제는 괜한 적을 만들 공산이 큽니다. 특히 노예를 많이 부리는 고위 귀족들에겐 더욱 달갑지 않은 소식일 테지요.”

“…….”

“그들의 감시망에 카카나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잡히게 두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다른 이들은 몰라도, 황실과 연관이 깊은 고위 귀족들은 모두 마족의 손아귀 안에 있지 않습니까.”

“알았다니까.”

용사들에게 저 소리를 돌아가면서 한 번씩 들었다. 첼러스까지 가세하면 다섯 번이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아예 몸을 돌리고 앉아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심심해서 별별 생각을 다 하다, 결국 마탑 하면 떠오르는 사람에게로 생각이 기울었다.

‘휘라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깃펜을 손가락으로 도르륵 굴리며 걱정되는 마음을 달랬다.

‘혼자 본래 거주지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야 스노아가 텔레포트로 보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녀는 수인족이었다. 거주지의 기역 자도 입에 올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아다르가 방으로 들어왔다.

“잘 있었어?”

그가 내 뺨에 쪽 뽀뽀하며 물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에 어이가 없어져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다르가 뻔뻔하게 내 손을 잡아끌더니,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잠깐 가자. 늑대 수인족이 너 보고 싶대.”

나는 황당했던 심정마저 잊고 정신이 팔려서 되물었다.

“휘라가?”

“응.”

나는 그의 힘에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게 투덜거렸다.

“죽은 듯이 방에 있으라 할 때는 언제고…….”

“네게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다나 봐.”

아다르가 민망한 얼굴로 변명했다.

“단순히 감사 인사를 전하려는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 가에 앉아있던 첼러스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잠깐 다녀오겠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었더니,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이마에 짧게 입술을 짓눌렀다. 다녀오라는 의미였다.

‘마, 말로 할 것이지.’

나는 괜히 창피해져서 얼른 걸음을 옮겼다.

서로 알아가기로 한 이후부터 용사들의 유혹이 점점 대범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다섯 명인 탓에 괜한 경쟁까지 붙어서 은근슬쩍 도망쳐야 할 때도 있었다.

웃기는 건, 도망친 곳에 항상 아르모어가 나른한 얼굴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나는 그의 안전한 휴식 범위 내에서 한숨 돌리곤 했다.

“여긴데. 같이 들어갈까?”

휘라마저 의심스러운지 아다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팔짱을 꼈다. 나는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그냥 복도에서 기다려. 휘라가 같은 수인족 아니면 싫어하는 거 알잖아.”

“돌발 상황이 생기면 어떡해?”

“휘라가 날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별걱정을 다 하네, 정말.”

“휘라 이오렌은 늑대고, 넌 양이잖아.”

“야!”

나는 헛소리 말라는 의미로 그의 발을 콱 짓밟았다. 아다르가 억 소리를 내며 뒤로 피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언제 돌변해서 널 공격할지 누가 알아?”

“너 그거 과보호야.”

“알아.”

아다르가 순순히 인정하며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걱정되는 걸 어떡해.”

“설마 그런 것도 해결 못 할까 봐 겁먹은 거야? 천하의 초월자가?”

가볍게 도발하자 아다르가 피식 웃으며 항복하듯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젠 말로 나를 들었다 놨다 하네.”

“진정됐으면 옆으로 피해 봐. 언제까지 복도에 세워둘 참이야?”

아다르가 마지못해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그의 마음이 바뀔까 봐 냉큼 걸음을 옮겨서 문을 두드렸다.

“휘라, 나예요, 카니.”

“들어와요.”

나는 그에게 멀찍이 떨어져 서라는 의미로 복도 건너편을 턱짓했다. 아다르가 뭐라 투덜거리며 더 거리를 벌리자마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전에 왔을 때와 달리, 방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휘라의 안색 또한 눈에 띄게 좋아져 있었다.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어둠 속에 숨은 채 눈만 서슬 퍼렇게 빛나던 과거와 달랐다.

그녀가 언뜻 보면 은빛으로도 보이는 석회색 눈망울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리고 내 옆자리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옆엔 아무도 없는데.’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휘라가 뻣뻣한 제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어 올리며 대답했다.

“카니, 제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하셨죠?”

나는 치솟아 오르는 기대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같이 가볼래요?”

“수, 수인족의 마을에요?”

설렘이 꾹꾹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수인족의 마을이면 도망친 친구가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심장이 뛰어서 나도 모르게 입에 미소를 머금었다가 곧 용사들을 떠올리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과 함께 가는 걸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휘라가 뜻밖의 호의를 베풀었다.

“물론 카니의 동료들도 함께요.”

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이해할 수 없어서 미간을 찡그렸다.

“왜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침묵을 지키는 입술과 굵은 눈썹, 흔들리지 않는 시선에서 그녀의 강인함이 느껴졌다. 휘라가 달빛을 닮은, 신비로운 회색 눈을 늑대처럼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대꾸했다.

“늑대가 있어요. 카니 곁에.”

나는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내 눈엔 늑대가 보이지 않았다. 휘라가 말하는 늑대는 전에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천족의 전언이 틀림없었다.

‘그게 내 곁에 있다고?’

휘라가 신발 끈을 꽉 동여매기 위해 허리를 숙이다 말고 내 근처로 시선을 두었다. 마치 내 주위를 맴도는 무언가를 눈으로 좇는 것처럼, 눈망울을 천천히 굴리고 있었다.

그녀가 곧 신경을 끄고 말을 이었다.

“준비를 단단히 해두세요. 숨겨진 거주지까지 길이 많이 험난하거든요. 살아서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저렇게까지 경고를 하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위험한 곳인가요?”

“이상 생태와 마물이 판을 치는 버려진 땅 한가운데에 있거든요.”

휘라가 날씨 얘기를 하듯이 평이하게 대꾸했다. 나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설마 차원균열지대요?”

물어보면서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휘라가 거짓말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나는 떡하니 입을 벌렸다.

생물이 살 수 없는 땅이라고 들었는데, 그곳에 어떻게 거주지를 꾸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마침내, 차원균열지대로 떠나는 날이 왔다. 나는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좋아. 차원균열지대든 어디든, 다 좋다 이거야.’

그간 얼마나 답답했던가. 야수처럼 빛나는 비브로스의 감시 아래, 아빠 몰래 데이트 나가는 딸내미처럼 까치발을 띄며 외출하길 수십 번. 나는 온실 속 화초나 다름없는 답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나날이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꽤 자극이 필요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이 몹시 달가웠다. 심지어 발로 이동하는 모험이 아닌가.

차원균열지대는 불안정한 대기 중 마나와 이상 생태 때문에 스노아의 텔레포트가 먹히지 않아 직접 걸어야 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행은 물론이고 마을도 가기 싫어했던 과거와 180도 달라진 스스로가 어색하면서도 유쾌했다. 그래서 휘라 이오렌과 함께 수인족 거주지로 향하는 여행은 다양한 이유로 나를 벅차오르게 했다. 내심 친구들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출발 전날은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머릿속에 꽃만 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휘라는 분명히, 각오하라고 경고까지 해주지 않았던가.

“허억, 헉……. 하지만 이런 말은 없었잖아! 그냥 각오만 하라고 했지, 이런, 이런……!”

나는 절규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을 쏟아 붓기 일보 직전인 내 얼굴을 본 휘라가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지렁이처럼 몸에 휘감기려고 하는, 뚜렷한 보랏빛 사기를 손으로 휘저으며 헐떡거렸다. 그녀가 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리곤 무릎에 묻은 모래 먼지를 손수 털어주며 걱정을 늘어놓았다.

“괜찮아요, 카니? 안색이 영…….”

“죽을 것 같아요.”

나는 눈을 반쯤 뒤집으며 내게 달려들려고 애쓰는 중인 사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대체 왜! 나한테만! 달려드냐고요!”

휘라가 난감한 표정을 했다.

우리는 차원균열지대로 향하는 포레스트링의 끝자락에 진입해 있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차원균열지대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는 숲이었다.

‘처음에는 분명 괜찮았어! 그런데 왜!’

포레스트링은 몬스터가 없는 숲이라 간혹 초식동물도 마주치고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문제는 차원균열지대와 맞닿아있는 경계구역부터 생겼다.

파릇파릇한 풀잎들이 점점 이상한 회백색, 석탄색을 띠더니 검은 모래가 섞인 지역까지 다다르자 사기가 무섭게 끼쳐왔기 때문이다.

솔직히 방심하고 있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의 나는 제2자각자이기 때문이었다. 사기는 예상하지 못한 문제였지만, 그때보다는 덜 시달리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내 착각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사기는 마나에 까막눈이었던 그때보다 지금 더 내게 달라붙으려 했다.

나는 오한이 들어 벌벌 떨리는 몸을 할릭에게 바짝 가져다 붙였다. 보다 못한 그가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제 목에 팔을 감도록 해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꿀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덤비는데?”

커다란 손으로 등을 쓱쓱 쓸어주던 할릭이 얼굴을 구기고 말했다.

“우리가 전쟁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차원균열지대의 사기가 이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었는데.”

“맞습니다. 포레스트링의 경계구역까지 침범하다니, 이상하군요.”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스노아가 내게 달라붙는 사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피하기는커녕, 예전보다 더 심해지다니. 이유가 뭘까요.”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황량하게 펼쳐진 검은 모래 언덕을 내다보았다. 본격적인 차원균열지대의 시작이었다. 거대한 곤충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보랏빛 사기가 보이자 소름이 끼쳐서 부르르 떨었다.

“이오렌 씨. 당신은 마나를 사용할 줄 아시나요?”

“아니, 몰라요.”

“그런데 왜 사기가 당신에겐 달려들지 않는 거죠?”

스노아가 내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맨살에 스친 스노아의 흔적을 피하듯, 이마 부근만 따스한 감각이 맴돌았다.

나는 할릭의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아예 벌거벗은 채 안기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저희는 모두 마나를 사용할 줄 알거든요.”

휘라의 의아한 시선을 느낀 스노아가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사기는 마나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라붙지 못하는 특성이 있어요.”

“그건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요?”

“저는 평생 사기와 마물이 존재하는 차원균열지대에서 살았어요.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겠어요?”

스노아가 입을 다물었다가, 눈을 서늘하게 빛내며 의문을 표했다.

“마나 없이, 평생을 이곳에서 버티셨다고요.”

“네.”

휘라가 망설임 없이 대꾸하며 날 바라보았다. 내게 유독 달라붙는 사기가 영 이상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미심쩍은 부분은 있었지만, 휘라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애초에 용사들은 그녀가 마나를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것을 초월자의 감각을 이용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는 가호를 받고 있어요.”

집요한 시선에 못 이긴 휘라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사기가 달려들지 못하는 건 당연하죠.”

“당신을 감싸고 있는 희미한 기운의 정체가 가호인가 보군요.”

“자세한 이야기는 마을에 가서 할게요.”

휘라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흘끗 살폈다.

“카니에게 유독 사기가 달려드는 이유도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요.”

“지, 지금, 다, 당장 해결해야 해.”

나는 불규칙적으로 숨을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수, 숨을 못 쉬겠어.’

사기의 농도 자체는 짙지 않았다. 그러나 덫처럼 내게 매달려서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릭이 등을 두드리고 맨살을 쓸어주어도, 사기는 그의 움직임을 빗겨 가는 물줄기처럼 갈라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나는 꺽꺽, 숨을 들이켜며 손에 쥔 옷자락을 힘껏 구겼다.

“카니?”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할릭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이름을 불렀다.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나를 잡아먹으려는 것 같아.’

기분 탓이 아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코와 입 속으로 사기가 함께 들어와 온몸을 돌아다녔다. 지배하고 싶은 것처럼.

속에서 신물이 올라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떨자, 할릭이 힘으로 손을 떼고 곧장 입술을 부딪쳤다.

“무슨!”

휘라가 깜짝 놀라든 말든, 나는 갈급하게 입을 벌렸다.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짐작한 휘라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나도 민망한 상황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우선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할릭의 키스는 여전히 버거웠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여서, 적극적으로 응하기는커녕 감내하는 것만으로 한계인 지점까지 몰렸다.

사기로 인해 생기를 잃었던 몸에 다시 온기가 찾아올 무렵,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아직 부족한데……!’

진동이 울리는 통에 치아가 부딪히자, 할릭이 결국 떨어져 나갔다.

“제길, 마물도 늘었나 보네.”

할릭이 왼손의 반지를 두어 번 톡톡 두드렸다. 스노아의 마법으로 숨겨져 있던 붉은 건틀릿이 물감처럼 흘러나오며 그의 손을 감쌌다.

“무슨 일이야?”

나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주위가 기지개를 켜는 골렘의 등 위처럼 떨리고 있었다.

“마물이 오고 있습니다.”

첼러스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설명했다. 혀를 찬 휘라가 이곳으로 오기 전 마을에서 미리 사들인 활을 꺼내 들었다.

“이상하네요. 마물이 경계구역까지 오는 일은 없는데.”

“잠깐, 뭔가 이상합니다.”

첼러스가 솔라리소드의 검자루를 강하게 움켜쥐며 말했다. 경계하듯 주위를 살핀 스노아가 즉시 마법을 시전했다.

“플라이.”

할릭과 내가 공중으로 떠오르자마자, 타고 남은 잿더미처럼 검은 모래 바닥에서 거대한 지네 형태의 마물이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무쇠를 녹여 만든 것 같은 붉은 더듬이가 아슬아슬하게 발바닥을 스쳤다. 소스라치며 고개를 숙였다가, 몸을 경직시켰다. 높이가 너무 높았다. 심지어 마물은 바닥을 기어 다니는 곤충형인 주제에 성채처럼 위로 우뚝 서 있었다.

마치 나무에 매달린 인간을 잡아먹기 위해 위로 힘차게 뛰어오른 악어 같은 모양새였다.

“으아악! 왜 마물까지 날 노리는 거야!”

나는 할릭의 가슴팍에 이마를 들이받으며 소리쳤다.

“어쩌냐, 너 고생 좀 해야겠다.”

할릭이 주둥이를 집게발처럼 딱딱거리는 마물을 내려다보며 태평하게 얘기했다.

“지금 수십 마리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 같거든.”

나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뭐라고?”

흩날리는 검은 모래 속에서 할릭이 손을 흔들었다. 그게 스노아를 향한 무언의 신호였던 모양이다. 몸이 밑으로 훅 꺼졌다.

“아아악!”

이러다 혀를 씹을 것 같아, 어떻게든 입을 다물었다. 할릭이 내 몸을 받치고 있던 왼쪽 팔뚝에 단단히 힘을 주며 허리를 숙였다.

“내 목 잡아.”

군말 없이 그의 목에 매달렸다. 할릭이 한 손으로 나를 안은 채 머리를 한껏 위로 치켜든 바실리스크만 한 지네의 등으로 가뿐하게 착지했다.

장소가 어디든, 공중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조금은 안도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몸이 어찌나 큰지 까맣고 딱딱한 평지 위에 안착한 느낌이었다. 비록 쓰러지는 첨탑처럼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우리가 공기 속을 가르는 건지, 아니면 바람이 부는 건지 머리가 세차게 날렸다. 모래 알갱이가 뺨을 쳐대는 탓에, 할릭이 오른쪽 눈을 감은 채 주먹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의 검붉은 건틀릿에 저물어 가는 석양 같은 주홍빛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할릭과 꼭 닮은, 정열적이고 뜨거운 색깔의 마나였다.

콰앙—!

그의 주먹이 지네의 등허리 어딘가를 강타했다. 불꽃 같은 마나로 둘러싸인 그의 주먹과 딱딱한 지네의 등껍질이 부딪친 순간, 공기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굉장한 바람이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옆으로 날리던 양갈래 머리가 일제히 하늘을 향해 곤두섰다. 지네가 바닥에 던져진 공처럼 고꾸라지며 검은 모랫바닥에 처박혔다.

쿠우웅.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하는 듯한 굉음에 등허리가 뻣뻣해졌다. 할릭이 바닥에 착지하며 나를 고쳐 안았다.

“내가 안고 있는 건 위험해.”

그가 징징 울리는 건틀릿을 가볍게 두어 번 털며 고개를 돌렸다.

“첼러스!”

마물의 목을 뎅겅 썰어버린 첼러스가 곧장 우리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식은땀에 절어 축축해진 내 몸을 받아 들었다.

“휘, 휘라는…….”

“그녀는 가호로 인해 마물의 공격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첼러스가 솔라리소드를 한번 휘둘러 성스러운 태양빛 검날에 묻은 마물의 피를 털어냈다.

“하, 하지만 이대로면 휘말릴 거야.”

내가 걱정을 털어내지 못하고 불안한 눈을 하자, 그가 조심스레 나를 고쳐 안았다.

“스노아가 마법으로 그녀를 보호하며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다, 다행…….”

“혀를 깨물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등 너머로, 까맣게 몰려오는 마물의 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라 간의 전쟁이 벌어지면 말을 타고 파도처럼 몰려오는 적군이 딱 저런 모양일 것 같았다.

“첼러스를 엄호해. 마물들의 목적은 카니야.”

아다르가 미물에 가까운 손바닥만 한 눈알 마물을 발로 짓이겨 터트리며 소리쳤다. 할릭과 아르모어가 첼러스 주위로 모였다.

아르모어의 손에는 일전에 그가 언급한 적이 있었던 전류가 흐르는 채찍이 들려 있었다. 막대에 기다란 가죽끈이 달린 일반적인 채찍 모양이 아니었다. 그는 하늘을 까맣게 물들이는 먹구름 사이에서 막 뽑아낸, 기다란 번개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휘라,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죠?”

스노아가 허공에 만들어낸 불 구슬의 크기를 늘리며 소리 질렀다.

그것으로 몰려오는 일대의 마물을 전부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평생을 차원균열지대에서 살았을 휘라가, 이렇게 많은 마물은 처음 본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북쪽을 가리켰다.

첼러스가 다리에 마나를 휘감은 뒤, 자리에서 크게 도약했다. 설상가상 마물은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에서도 조류형 마물이 날아들고 있었다.

“헉. 허억…….”

그의 검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곳에 마물의 시체가 켜켜이 쌓였다. 그리고 그 시체에서 사기가 독가스처럼 뿜어져 나왔다.

첼러스에게 안겨 있는 것밖에 하는 일이 없었지만,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저승의 문턱에 한쪽 발을 걸고 있는 것처럼 몸이 싸늘하게 식고, 턱이 덜덜 떨렸다. 설상가상 환청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할릭과 키스를 충분히 하지 못했어.’

작은 태양처럼 뜨거웠던 그의 체액이 내 안에서 서서히 빛을 잃고 있었다.

이곳의 사기는 카타스의 지하묘지처럼 빽빽하게 모여 있지 않았지만, 훨씬 난폭하고 공격적이었다. 내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집요하게 달라붙고, 살결 위를 기어 다니고, 발톱을 세워 숨통 안쪽을 날카롭게 긁었다.

“이런, 카니.”

첼러스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내 뺨을 쓸어내렸다.

“견디기 힘드십니까?”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처럼 그의 눈이 일그러져 있었다. 대답해야 하는데, 여유가 없었다. 숨을 쉬기 버거워 목을 움켜쥐고 캑캑거렸다. 첼러스가 어금니를 악물며 주위를 살폈다.

차원균열지대는 검은 모래로 이루어진 넓은 사막처럼 생겼다. 용사들이 마음껏 힘을 쓰기에 좋은 장소였지만 휘라 이오렌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첼러스가 내 목에 밧줄처럼 감긴 보랏빛 사기를 손으로 흩어내며 이를 갈았다.

“제 타액을 삼킬 순 있으시겠습니까?”

타액이고 뭐고, 키스할 짬이 나지 않았다. 첼러스가 와락 구겨진 얼굴로 달려드는 마물을 베어 물리쳤다.

“거의 다 왔어요!”

그때, 휘라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주위는 오직 황량한 모래와 오래된 유적밖에 없었지만, 그녀의 눈은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날 내려줘요!”

스노아가 그녀를 바닥으로 내려줬다.

늑대 수인족 특유의 빠른 발놀림으로 그녀가 북쪽을 향해 뛰었다. 휘라의 뒤를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뒤를 마물이 바짝 따라붙었다.

그녀가 허허벌판 한가운데서 상의의 옷깃을 옆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녀의 빗장뼈에 엉킨 넝쿨처럼 새겨진 흰색 문양으로부터 빛이 터졌다. 부신 눈을 도저히 뜨고 있을 수 없어 찰나 동안 감았다가 뜨자, 일대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나는 질식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주위를 살폈다. 키 낮은 집이 판자촌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황량한 풍경의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를 에워싸던 마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숨통이 트여 거칠게 호흡을 골랐다. 나를 집요하게 쫓던 사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첼러스가 내 머리에 붙은 모래를 털어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턱에 고인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균열지대는 비록 검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어 사막처럼 보이지만 기온이 높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싸늘하게 식은 체온이 돌아오지 않아 어깨가 떨렸다.

그가 솔라리소드를 검집에 넣으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쿵쿵, 규칙적으로 울리는 딱딱하고 강한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제야 긴장이 노곤하게 풀리며 뜨거운 피가 돌았다.

“맙소사, 설마 너 휘라야?”

첼러스와 포옹하고 있길 한참,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나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늑대 수인족 남자가 옷가지가 들려 있던 바구니를 놓치며 휘라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의 비명 같은 부르짖음을 들은 수인족들이 하나둘, 우리에게 모이기 시작했다. 작은 촌락이었기에 마을의 수인족이 모이기까지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경악하거나 놀란 눈으로 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은 사람이 무덤을 파헤치고 다시 살아 돌아온 꼴이라도 본 듯한 얼굴들이었다.

나는 목덜미에 달라붙은 잔머리를 떼어내려던 것마저 잊고 마을 사람들을 살폈다. 휘라의 말대로 대부분의 수인족이 육식과였다. 표범, 늑대, 재규어, 여우…….

간혹 초식 수인족도 보였지만 토끼나 사슴이 다였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머리카락이나 눈의 색이라든가, 그들이 두르고 있는 분위기까지 손으로 일일이 만져보듯이 훑었다. 그러나 아는 얼굴이 한 명도 없었다. 친구들이 성장하면서 변한 모습을 고려하더라도, 비슷한 사람조차 없었다.

가슴 깊숙한 곳이 얼음을 댄 것처럼 차가워졌다.

‘므리나의 저택 근처에서 차원균열지대까지 흘러들었다는 건 말이 안 돼.’

죽으려고 작정한 게 아닌 이상 이곳까지 오는 수인족은 없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기대를 하고 만 것이다. 바보처럼.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살아는 있을까.

“휘라 이오렌!”

그때 곰의 귀를 달고 있는 우직한 인상의 늙은 수인족이 앞으로 나서며 호통을 쳤다. 그녀는 나무를 대충 깎아 만든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 탓인지 걸음걸이가 불안정했다.

검버섯이 핀 얼굴에 흉악한 분노를 담은 그녀가 지팡이로 휘라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돌아왔느냐! 계시를 받고 떠났으면 끝까지 천족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 아니야!”

천족이 언급되자 용사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맞은 부위가 따가운지, 휘라가 구겨진 얼굴로 엉덩이 부근을 쓸었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게 천족님의 뜻이어서 따른 것뿐이에요 신관님.”

‘수인족들만 모여 사는 곳에도 신관이 있다니.’

그러나 그들이 믿는 신은 제국에서 모시는 사랑과 증오의 신 헬리스가 아닌 듯싶었다. 헬리스교에서는 몸에 문양을 그려 넣는 행위를 금지했다. 신에게 받은 소중한 육신에 해를 가하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수인족들은 모두 휘라처럼 빗장뼈에 흰색 문양을 가지고 있었다. 신관이 허튼소리 말라는 듯이 떽, 소리를 내며 위협을 가했다.

“어허, 이놈이 그래도? 겁이 나 이곳으로 돌아온 게 아니냐!”

휘라가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신관이 엄하게 꾸짖었다.

“네가 설령 제국의 노예가 되어 고생하더라도, 은혜를 베풀어주신 천족님의 뜻을 거스르는 건 용서되지 않는 일이다!”

“계시가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어요!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고요!”

휘라가 답답하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계시를 받고 떠난 수인족이 이곳으로 돌아오는 일은 여태 한 번도 없었어!”

“수인족들이 계시를 받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이놈이! 어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바락바락 대드는 거냐!”

신관이 나무껍질처럼 어두운 고동색 눈망울을 날카롭게 빛내며 우리를 살폈다. 환영 마법을 쓰고 있으니, 그녀의 눈에는 내가 수인족으로 비칠 리 만무했다. 다섯 용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휘라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부당한 방법으로 잡혀간 노예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 때 모두가 그렇듯이, 나는 휘라가 환영받을 거라 예상했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어.’

신관처럼 대놓고 그녀를 나무라는 수인족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사 귀환을 기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바람 부는 소리만 을씨년스럽게 울릴 뿐이었다.

신관이 끌끌 혀를 차며 바짝 말린 건포도처럼 쪼글쪼글한 얼굴을 들었다. 이렇게 나이 지긋한 수인족은 처음 보아서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신관이 허, 하고 헛숨을 삼키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건장한 수인족들이 무기를 들고 우리를 에워쌌다.

“신관님!”

휘라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계시가 이 여인 곁을 줄곧 맴돌았단 말이에요!”

“시끄럽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기와 마물이 이 여인에게 달라붙지 못해 안달했어요!”

순간, 신관의 낯빛이 변했다.

“계시는 제가 증명할 방법이 없지만, 이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어요. 지금 당장 마을 밖으로 나가서 증명할 수도 있다고요!”

듣는 척도 하는 것 같지 않던 신관이 고집스레 다물린 입을 못마땅하게 비틀더니, 곧 억눌린 음성으로 되물었다.

“사기랑 마물이 정말 그랬단 말이냐?”

휘라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마물이 그렇게 우르르 몰려오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제 진정성을 알아봐달라는 듯 필사적인 얼굴이었다.

“갈증에 시달리며 달려드는 모습이 딱 천족에게 달려드는 마족 꼴이었다고요! 이래도 제 말을 믿지 않으시겠어요?”

“크흠…….”

신관이 영 탐탁지 않게 눈을 흘기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여우 수인족이 팔짱을 낀 채 끼어들었다.

“휘라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끼어들지 말거라, 틸로.”

“여우가 저 여인 곁에 머무르고 있어요.”

신관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천족의 계시를 증명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나타나자 아무리 신관이라도 더 고집을 피울 수 없게 된 탓이다.

휘라가 놀란 눈으로 틸로를 바라보았다.

“극진히 대접해야 천족님이 노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신관의 몸에 다소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듯하다가 팩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다른 수인족을 불러 방과 음식을 내어주도록 명령했다.

휘라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용서해요. 워낙 안전에 집착하시는 분이라…….”

“당연하죠. 괜찮아요.”

휘라가 고맙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진흙을 빚어 만든 평평한 지붕의 건물로 들어갔다. 가구들은 모두 낡고 허름했지만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있어야 할 것은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동물의 가죽을 벗겨 만든 모피가 군데군데 걸려 있고, 자그마한 창문과 독특한 색감의 직물이 눈에 띄었다.

날이 어둑하게 저물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내부는 다소 어둑했다. 휘라가 기름 램프에 불을 붙이며 주저앉듯 의자에 몸을 누였다. 피곤한 얼굴이었다.

“신관님이 노발대발하리라곤 예상했지만, 상상 이상이네요.”

“이곳의 문화는 제국과 많이 다른 것 같군요.”

스노아가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며 눈을 굴렸다.

“전에는 신관님과 사이가 어떠셨나요?”

휘라가 은쟁반처럼 보이는, 석회색 눈망울을 천천히 깜박이며 스노아를 바라보았다. 불그스름한 황토색 불빛이 손대면 얼어붙을 것 같은 그의 새파란 머리카락을 미지근하게 덥히고 있었다.

그녀가 어깨에 힘을 풀며 대꾸했다.

“가족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런데 왜 되레 화를 내는 거죠? 살아 돌아왔는데도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어서요.”

“이곳의 수인족들 중 소수는 천족의 전언인 계시를 받을 수 있어요.”

휘라가 모래 먼지가 낀 가죽장갑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계시를 받은 수인족은 몇 년이 지나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 거주지를 떠나고요.”

“떠난다고요.”

“네. 우리는 계시를 받은 수인족이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거주지를 떠난다고 믿고 있어요.”

휘라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문화가 생긴 건 최근이지만…….”

“얼마 되지 않았다고요?”

“이전에는 계시를 받는 수인족이 없었어요. 고서에나 쓰여 있었죠. 그런데 한두 명씩 계시를 받기 시작하더니, 이젠 떠난 사람이 열 명이나 돼요.”

휘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거주지를 빠져나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요.”

“그렇군요.”

“마을 사람들에게 저는 불명예스럽게 돌아온 사람이나 다름없는 거예요.”

휘라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지금은 그럭저럭 오해가 풀렸지만.”

“그 계시가 천족의 전언이라는 걸 어떻게 확언할 수 있는 거지?”

아다르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의 근원이 되는 동물이 환영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은데.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잖아.”

“아다르.”

스노아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휘라가 괜찮다는 듯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외부인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죠.”

“그러면?”

“저희의 먼 조상인 수인족들은 천족의 물건을 통해 이곳에 이르렀다고 해요.”

휘라가 어렸을 때 들었던 구전동화를 떠올려내듯, 흐릿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수많은 유적이 있죠. 우리는 제국보다 더 많은 것을 일찍 발견했을 뿐이에요.”

할릭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곳은 오랫동안 버려진 땅이었으니까. 제국 손에 들어간 것도 고작해야 18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휘라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얘기를 꺼내야 할지 가늠하듯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내일 유적을 간단하게 보여드릴게요.”

그녀가 눈가를 찌르는 긴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신관님이 앞뒤로 꽉 막히신 분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천족님의 뜻이라면 가장 적극적으로 변하시거든요.”

“그렇군요.”

“이곳의 유적에 관한 건 신관님이 제일 잘 알아요. 도움을 청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때, 신관을 설득하는 데 크게 한몫한 여우 수인족 틸로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넓적한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식기와 온갖 고기 요리가 올려져 있었다. 기름이 잘잘 흐르는 다리 요리를 발견한 할릭이 꿀꺽, 군침을 삼켰다.

다들 나를 보호하랴, 휘라에게 비현실적인 힘을 숨기랴, 애쓰면서 여기까지 당도하지 않았는가. 벌써 해가 저물고 있는 시간대이니 몹시 시장할 터였다. 그가 요리를 세팅해주며, 가느다란 눈으로 휘라를 흘겨보았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그러더니, 어떻게 다 커서도 소동 없이 넘어가는 법이 없어?”

“시끄러워.”

“신관님이 거품 물고 쓰러지지 않으신 게 신기할 정도야.”

“너 여우 안 보였지?”

휘라가 다리 고기를 송곳니로 뜯어먹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나는 유일하게 고기가 아닌 구운 감자와 수프를 먹다 말고 목이 막혀서 가슴을 쳤다.

옆에 앉아있던 첼러스가 조심스레 물을 밀어주었다. 잔을 두 손으로 들어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더니, 지켜보던 틸로가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민망해서 귀까지 벌겋게 물들이자, 그가 가느다란 눈을 도로 휘라에게 굴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퍽 능청스러운 얼굴이었다.

“당연하지. 계시를 받는 게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인 줄 알아?”

“신관님이 아시면 자지러질 텐데. 뭐 하러 날 도왔어.”

휘라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이었다. 틸로가 의미심장하게 용사들을 눈으로 훑으며 미끈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는 손님 여러분이 조용히만 해주면 그럴 일은 없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

단풍잎 색 꼬리로 휘라가 앉은 의자 등받이를 탁, 쳐댄 틸로가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그가 건물을 나가자마자 휘라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음험한 녀석.”

고맙긴 하지만 그의 행동거지가 썩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뜨거운 감자의 껍질을 벗겨서 호호 불어 먹었다. 푹 익은 윗부분을 베어 물자 포슬포슬한 감자가 부드럽게 으깨졌다. 그것을 꿀떡 삼키며 바쁘게 식사했다.

그러다 체한다며 아다르가 잔소리를 했다.나는 무심코 그의 접시에 놓인 고기 덩어리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드는 불길한 생각에 눈을 크게 뜨고 휘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기 있는 고기들은 모두 어디서 얻은 거예요? 설마…….”

내 흔들리는 눈을 본 휘라가 생각을 훤히 읽어냈는지, 작게 쪼개 웃었다.

“마물 고기 아니니까 그런 표정 말아요.”

“차원균열지대에 서식하는 생명체는 마물밖에 없다고 들었는데요.”

좀처럼 의심을 놓지 못하자 휘라가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포레스트링에 사냥을 나가요.”

“위험하지 않나요?”

“천족님의 가호를 받고 있어서 공격당할 일이 없잖아요. 제국 사람들 눈에만 안 띄면 돼요.”

문득 휘라가 미간을 찡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요.”

“무슨 소리예요?”

“예전과 달리, 요즘은 포레스트링을 다녀오는 것도 그리 안전하지 않아요.”

휘라가 한숨을 쉬었다.

“차원균열지대로 파견되는 제국의 탐색대가 늘고 있거든요.”

아르모어의 검붉은 눈이 휘라에게로 의미심장하게 굴러갔다. 나는 바짝 긴장하며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찾는 건지, 황실마법사들까지 꼭 한 명씩 껴서 이 넓은 차원균열지대를 샅샅이 살피고 있어요.”

“숨겨진 보물과 유적이 많으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첼러스가 점잖게 지적했다. 휘라가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구겼다.

“보물과 유적을 고스란히 놓고 돌아간 적도 있어요. 다른 뭔가를 찾는 것 같아요.”

때마침 식사도 전부 끝나, 식기 부딪히는 소리 없이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불편한 공기가 마음을 뒤숭숭하게 옥죄어 올 때쯤, 틸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휘라, 신관님이 부르셔.”

휘라가 지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는 끝?”

“응.”

휘라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바깥으로 나갔다.

틸로가 휘라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곧이어 안으로 들어와 식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가 필요한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부부인가요?”

“아니에요!”

발끈해서 일단 아니라곤 했는데, 뭐라고 더 둘러대야 할지 난감해졌다. 친구? 아니면 연인? 둘 다 우리의 관계를 정확히 설명하기엔 모호한 감이 있었다.

나는 적당한 단어를 찾아 둘러대었다.

“동료예요.”

틸로의 눈이 습관적으로 가늘어졌다.

“그렇군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예상하셨겠지만, 여러분은 모두 이곳에서 같이 주무셔야 해요.”

“문제없어요.”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맹금류를 닮은 노란색 눈망울이 가느다란 여우 눈 사이에서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왜 저렇게 쳐다보나 싶어져 어색하게 눈을 좌우로 굴렸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틸로 리민이라고 해요.”

“카니 페트리예요.”

“페트리라 부르면 될까요?”

“카니면 돼요.”

흠, 그가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썹을 구긴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당신은 정말 인간이 맞나요?”

“네, 넷?”

나는 크게 당황해서 뒤로 주춤 물러섰다.

틸로의 가느다란 눈이 더 실처럼 가늘어지며 나를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그가 숨을 길게 한 번 들이켰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포근한 음식 냄새, 그리고 그 사이에서 신기루처럼 떠다니는 무언가를 섬세하게 잡아내듯 느린 호흡이었다.

“제가 코가 예민한 편이거든요.”

“…….”

“카니, 당신에게서 아주…….”

그가 얇은 입술을 붉은 혀로 핥아 올리면서 한 걸음 다가왔다. 적절한 말을 골라내는 것처럼 잠시간 침묵을 유지한 틸로가 느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아주, 매력적인 향기가 나요.”

“하하, 그렇군요.”

나는 부자연스럽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수인족이라는 사실은 휘라만 알고 있었다. 거주지까지 와서 내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얘기할까?’

저런 날카로운 의심의 눈초리를 감내하는 것보단, 그냥 말하는 게 낫겠다 싶어 입을 벌렸다.

그런데 아르모어가 내 허리를 뒤에서 느릿하게 끌어안았다. 틸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르모어를 바라보았다. 아르모어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영원처럼 이어졌다.

사이에 끼어있는 나는 분위기에 짓눌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나무토막처럼 굳었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람.’

상대가 아무 말 없으니 틸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모양이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아주 고약한 냄새라도 맡은 사람처럼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거 흥미롭네요.”

그가 한 손으로 코를 움켜쥐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아르모어에게 향해 있었다.

그가 아주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제가 맡은 그 향기로운 냄새를 도저히 못 잊겠다는 듯, 시선은 내게 똑바로 고정한 채.

그 얼굴을 보자 용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났다. 용사들의 눈에 서린 명백한 경계심에 틸로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와우. 동료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게, 지금은 좀 애매하달까…….”

내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목까지 발개진 채 우물거리자 틸로가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는데, 머리 긴 남자분이랑 카니는 수인족이 맞지요?”

나는 결국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모습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마킹까지 할 리 없으니까요.”

“마, 마킹이요?”

나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르모어가 나른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말이 많은 여우로군.”

“당신은 느낌이 아주 색다르네요. 도통 무슨 동물인지 알 수가 없어요.”

틸로가 캐물으려다 말고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애매한 관계라니 잘됐어요. 제가 워낙 특출한 코를 가지고 있다 보니, 향기 때문에 아무나 못 사귀거든요.”

그가 아주 큰 곤란에 처한 사람처럼 눈썹을 산 모양으로 그러모았다.

“그런데 이렇게 아찔한 냄새는 처음이에요.”

틸로가 나를 향해 짧게 윙크를 했다.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얼어버렸더니, 그가 짧게 키득거리며 몸을 돌렸다.

“잘 부탁해요, 카니.”

그리고 이만 쉬라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내부는 그가 떠나고 나서도 조용했다. 내 정수리에 소리 없이 입을 맞춘 아르모어가 스르르 뒤로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그가 막 잠에서 깬 것 같은, 흐트러진 자세로 테이블에 상체를 기대며 말을 이었다.

“수인족의 마을이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군.”

“대체 마킹이 뭐야?”

아다르가 분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자, 아르모어가 대신 답해주었다.

“수인족들은 발정기 때문에 성인이 된 직후부터 파트너를 찾아 헤맨다. 하루걸러 파트너가 바뀌더라도, 혼자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

“반대로, 혼자인 수인족들은 눈에 불을 켜고 상대를 찾으려 하겠군요.”

스노아가 똑똑하게 핵심을 짚었다. 아르모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수인족은 반드시 연인에게 마킹을 해둔다. 냄새로 표시를 해두는 것이지. 다른 이성 수인족만 맡을 수 있는, 경고의 냄새다.”

나는 착잡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냥 연인이라고 뻔뻔하게 뻥이라도 칠 걸 그랬나.’

괜히 애매한 관계라고 해서 틸로를 완전히 떨어트려 놓지 못하게 됐다. 처음에 동료라고 말한 시점부터 이미 마킹에 관한 틸로의 의심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수인족들은 체질 때문에 제국민보다 훨씬 성에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내내 은근한 신호를 보내올 것이 틀림없었다.

“이 마을은 정보를 조금 캐다가 얼른 뜨는 게 좋겠어.”

할릭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난 그 수많은 수인족들을 연적으로 삼고 싶진 않거든. 우리는 인간이니까, 밀릴 게 뻔하잖아.”

뭐가 어디에서 밀린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용사들은 할릭의 말에 동의하는 듯 자존심이 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기막힌 광경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수인족이 인간을 부러워하는 건 숱하게 봤어도, 인간이 수인족을 부러워하는 건 처음 봤다.

“나도 카카나의 향기 맡고 싶네. 아르모어만 맡을 수 있다니 불공평해.”

아다르가 거들었다.

“카카나. 너 설마 그 자식이 마음에 든다거나, 뭐 이런 건 아니겠지?”

“엉?”

갑자기 불똥이 내게 튀었다.

나는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아다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망울이 엇나가려는 마음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쥔 채, 음험한 빛을 머금고 내게 매달려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

그냥 대충 둘러대선 넘어가지 않을 건가 보다.

나는 졸지에 틸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되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양옆으로 길게 찢어져 있는 눈은 퍽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야 용사들이 워낙 잘생겨서 그렇지, 틸로도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미남에 속했다. 만약 발정기가 찾아왔고, 억제제가 없어 급하게 상대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쁘지 않지.”

나도 모르게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해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사실을 깨닫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용사들의 얼굴에 짙은 패배의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그들은 그런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얼굴을 야차처럼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하긴, 용사인 그들이 패배감을 느낄 만한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후후…….”

상황을 방관하던 아르모어가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무, 물론 틸로보다 너희가 훨씬 낫지!”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변명했지만 귀 기울여 듣는 용사는 한 명도 없었다. 한숨을 쉰 스노아가 가볍게 손을 저어 청결 마법을 시전했다. 엉망이었던 몰골이 깨끗하게 씻겨나갔다.

“밤이 깊었으니, 우선 잠부터 청하죠.”

나는 부루퉁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둘러보았다. 제법 넓었지만, 침대는 하나밖에 없었다.

‘몇 명이 누울 수 있으려나.’

구겨진 채 서로 붙어 자도 기껏해야 두세 명 정도일 듯했다. 나무틀에 가죽끈을 이어 만든 침대라 특히 더 불편해 보였다.

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딱딱한 베개를 바라보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여기서 그대로 잤다간 몸이 배길 것이 뻔하므로, 두툼하고 부드러운 모피를 펼쳐 가죽끈 위를 덮었다. 그러자 그럭저럭 누워서 쉴 수 있는 곳으로 보였다.

“침대엔 누가 잘까?”

“일단 너.”

아다르가 고민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굳이 그들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은 더 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하러 여러 명이 누워. 그냥 너 혼자 편하게 자.”

아다르가 손을 흔들며 얘기했다. 할릭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히 더 피곤해진다.”

그의 시선이 다른 용사들에게 차례로 굴러갔다. 뭐가 피곤하다는 건지 듣지 않아도 알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모피의 푸근한 털 때문에 제법 아늑했다. 딱딱한 베개가 적응되지 않았지만, 목에 힘을 빼자 곧 편해졌다.

어둠에 잠긴 차원균열지대의 마을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무겁게 처지는 몸이 물속 깊숙한 곳으로 잠겨가듯, 의식이 서서히 수면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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