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 - Chapter 1. 제국 제일의 치료사 (2) (25/43)

Chapter 1. 제국 제일의 치료사 (2)

약물의 변화를 살펴가며 유동적으로 약재를 추가하거나 뺀다니, 상상만으로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기가 질리기는커녕 되레 생기가 돋은 내 얼굴을 보고 상당히 의아한 눈을 했지만, 곧 무신경한 성격답게 제 할 말을 이었다.

“마법이 약물에 완전히 스며들 수 있도록, 즉석에서 임기응변을 활용해야 한다는 소리야.”

아그리마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구겼다.

“그러니 난도가 훌쩍 뛰게 된다. 금패 치료사들 중에서도 마법진을 이용한 치유연금물약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은 아주 드물어.”

나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번엔 네가 말해봐라.”

아그리마가 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이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팔짱을 끼고 말했다.

“학위도 따지 않아 약제사도 뭣도 아닌 학생이 마법진을 이용한 치유연금물약 실습을 하겠다며 찾아왔어. 너 같으면 어떨 것 같니.”

“…….”

“내가 해줄 수 있는 배려는 여기까지야. 그러니 비브로스랑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

“아그리마.”

비브로스가 그녀를 막아서려고 하자, 그녀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쾅 내려치며 눈을 치떴다.

“비브로스. 네가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놈이어도 이건 아니지. 내가 데려오지 말라고 했잖아.”

“한번 보기라도 하고…….”

“보긴 뭘 봐, 뻔하구만. 성공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비브로스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능할 리가 없다. 내가 처음 카니를 만났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

“뭐?”

“눈앞에서 보여주면 해결되는 일이겠군.”

비브로스가 내 손목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그로우본 약물을 만들어보지. 그러면 되나?”

“야!”

“카니, 이리 와.”

비브로스가 아그리마의 허락도 맡지 않고 대뜸 방을 나섰다.

“이, 이래도 괜찮아요? 교수님 저택도 아니잖아요.”

나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질질 끌려가다가, 뒤를 흘끗 쳐다보곤 죽어가는 소릴 냈다.

“뒤에서 연금술사님이 눈 뒤집혀서 쫓아오고 있는데요!”

“상관없어. 나는 항상 아그리마랑 이 저택에서 작업을 했거든.”

그가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며 날 안심시켰다.

“연구실이 어디 있는지 눈 감고도 갈 수 있어.”

‘연구실을 찾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눈물이 앞을 가리기 시작했지만 딱히 보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혹시라도 날 놓칠까 비브로스가 깍지까지 껴가며 아그리마의 저택을 제집처럼 쏘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헐레벌떡 쫓아온 아그리마가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호통 쳤다.

“기어코 정신이 나갔어? 네 제자가 내 연구실 날려먹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책임질게.”

비브로스가 아그리마의 반박을 뚝 잘라먹으며 문을 열었다.

나는 마나석들이 쌓여있는 상자와 각종 마도구들을 보고 입을 벌렸다. 비브로스가 연구실 오른편으로 익숙하게 걸음을 옮기더니, 약탕기에서 천을 걷어내고 무작정 내 등을 떠밀었다.

“그로우본 베이스 약물은 가지고 있지?”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물은 마법가방에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아그리마와 실습을 하면서 쓰일 만한 약물을 미리 챙겨왔기 때문이다.

그로우본은 부러지거나 금이 간 뼈를 다시 붙도록 도와주는 치유연금물약이었다. 비브로스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보이자 아그리마가 한숨을 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말리는 건 포기했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다시는 비브로스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눈빛에서 전해졌다.

‘부담스럽네, 진짜.’

나는 한숨을 쉬며 마법가방을 뒤졌다. 그리고 그로우본의 재료가 될 약물을 꺼내 약탕기에 부었다.

“몇 성급 그로우본을 만들까요?”

“1성.”

치유연금물약은 같은 종류여도 효능의 정도에 따라 별이 붙었다. 1성 그로우본이면 금이 간 뼈가 붙을 수 있도록 해주는 정도였다.

나는 기포가 서너 방울 올라올 때쯤 큐어 마법이 담긴 마나석을 꺼냈다. 마나석을 약탕기에 넣자, 아그리마가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조금만 실수해도 터지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예민한 마나석들이 반응하여 함께 터질까 봐 걱정이 되는 듯했다.

마나를 다룰 줄 몰랐다면 나도 아그리마처럼 연구실을 날려먹을까 봐 몹시 불안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훈련을 해왔기에 실패 없이 마법을 녹여낼 자신이 있었다.

눈을 감고 내 안에 있는 마나를 느껴보았다. 실패 없이 한 번에 치유연금물약을 성공하려면, 마나석에서 마법이 녹아나올 때 적절한 속도로 약물을 섞어주어야 했다. 아르모어의 도움으로 나는 생명체가 아닌 물건에 마나를 담을 수 있었다.

[무생물에 마나를 담으려면, 마나량을 정확히 지정해서 그 마나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막대에 마나를 넣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 아르모어는 적극적으로 날 도우며 설명해주었다.

[그러니 그대 안에 있는 마나가 어느 정도 되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해.]

나는 마나혈을 따라 돌고 있는 마나수용량을 훑었다. 용사들이랑 비교하면 턱도 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새끼손톱만큼의 마나량을 지정한 뒤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막대를 쥐어 위치를 확인했다.

마나를 멀리 보낼수록 감각을 유지하기 힘들어지므로, 약물 속 마나를 느낄 수 있는 거리까지만 보내야 한다. 그래서 최대한 신체와 가까우면서도 약물과 맞닿은 막대의 부분을 확인했다.

얇은 비눗방울에 마나를 담는다고 상상한 뒤, 마나를 운용해 흐름을 만들었다. 바람에 날려가는 비눗방울처럼, 그것을 막대로 살살 밀어낸 뒤 더 나아가지 않도록 어느 순간 콱 붙들었다.

‘성공했다.’

이게 가능하도록 치유연금물약을 만들면서 끝없는 연습을 했다. 정신력을 요하기 때문에 하고 나면 몹시 피로했지만, 연습을 거듭할수록 점점 익숙해졌다.

아르모어가 옆에서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더욱 잘 되었다. 막대에 불어넣은 내 마나를 통해 약물에 서서히 퍼지고 있는 마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약물을 젓기 시작했다. 제조법에 따르면 1성급 그로우본은 오른쪽으로 작은 원을 세 바퀴, 그리고 왼쪽으로 큰 원을 다섯 바퀴 그려야 했다. 약물이 점성을 가지고 끈적끈적해지면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사용된 큐어 마나석은 제조법에 나와 있는 것보다 마나량이 더 많이 담긴 모양이었다. 마법이 터져 나오듯 약물에 섞이고 있었다.

‘작은 원 모양으로 휘저으면 부족할 것 같은데.’

충분히 섞이지 못해 마법이 중심에 고이면 그건 고스란히 폭발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급하게 큰 원을 그리면, 부글부글 끓고 있어 불안정한 약물이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아제포아 약재가 들어갔으니까, 속도는 이 정도가 적당하겠다.’

연금술사가 아닌 치료사가 약물의 최종단계를 담당하는 이유는, 어쨌거나 약물에 쓰인 첨가제와 변화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빠르지도, 혹은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큰 원을 그렸다.

제조법과 다르게 원을 그리자 비브로스가 옆에서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 침착함을 되찾고 내가 하는 양을 고요히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비브로스는 내가 마나 다루는 걸 모르는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태 내가 어떻게 약물을 휘젓든, 전부 믿고 지켜봐준 건가?’

매번 성공하긴 했지만, 나를 향한 비브로스의 신뢰가 얼마나 견고한지 느껴져서 마음이 찌르르 울렸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아그리마에게 인정받고 싶어졌다.

예상대로, 그로우본 약물이 성공적으로 완성되었다. 나는 막대를 쥐고 있던 손을 뗐다. 그러자 막대에 머물렀던 마나가 고무줄 튕기듯이 탄성 있게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나는 선단이 날카롭지 않도록 구부러진 핀셋으로 빈 마나석을 건진 후 몸을 돌렸다.

“완성됐어요.”

비브로스가 기특해 죽겠다는 얼굴로 내 등을 토닥였다.

“이것 봐! 잘하잖아! 학위를 가진 수습치료사들보다 우리 카니가 훨씬 낫다고!”

그러나 아그리마는 비브로스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입을 벌리고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로우본을 한 번에 완성시킨 것 때문에 놀랐다고 하기에는, 입술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왜 저러지?’

뭔가에 단단히 충격을 받은 듯싶어서 걱정스레 입을 떼려는 순간,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대뜸 내 오른손을 가져가려 했다.

스노아가 더 신경 썼다고는 하지만, 환영마법 반지를 끼고 있는 이상 접촉해서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몸을 뒤로 빼려고 하는데 아그리마가 눈을 빛내며 애원했다.

“네가 사정이 복잡한 애라는 건 알아. 학위도 따지 않은 학생이 비브로스 눈에 들었다는 건 비현실적인 일이니까.”

아그리마가 조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아무것도 캐묻지 않을 테니, 잠깐 손 좀 다오.”

목소리가 너무 간절했다. 잠시 갈등하면서 비브로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뒤로 빼려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아그리마가 내 손을 홱 가져가서 손가락을 하나씩 만지작거렸다.

뭐 하는 건가 싶어서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는데, 아그리마가 내 검지를 잡고선 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세상에, 맙소사…….”

“왜 그래?”

아그리마의 얼굴이 이젠 물에 빠져 죽은 주검이라 해도 될 정도로 파랗게 변했다. 비브로스마저 자랑스러운 감정을 내려놓고 걱정을 비쳤다. 아그리마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애, 마나를 사용할 줄 알잖아.”

“뭐라고?”

비브로스가 너무 놀라서 넋이 나가있는 사이, 아그리마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너, 설마 물약에 마나가 퍼지는 걸 느끼면서 막대를 저은 거니?”

이제 와 숨겨봤자 무엇 하리.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에 힘이 풀린 비브로스가 근처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신동이 아니고서야 이 나이에 무생물에 마나를 주입하는 법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것도 학위 없는 수습치료사가.

‘그런데 내가 마나 쓰고 있다는 걸 어떻게 눈치챘지?’

연금술사이니, 마나를 느끼기 위해 눈을 감거나 막대를 신중하게 젓는 모습에서 촉이 왔을 수 있었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엔 더 티 나지 않게 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마나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워낙 희귀하니 눈에 띄어 좋을 게 없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그리마가 나를 제 품에 콱 끌어안았다.

“컥!”

어찌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순간 목이 졸려서 숨이 안 쉬어졌다.

“나랑 살자, 얘야. 응?”

“뭐, 윽, 뭐라고요?”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팔을 퍽퍽 쳤다. 같이 사는 거고 뭐고, 지금 당장 목이 졸려 죽을 기세였다.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아그리마를 떨어트리려고 갖은 손짓을 다 하는데 광기 섞인 음성이 귓가로 떨어졌다.

“이 앤 내 제자야, 아그리마!”

비브로스가 옆에서 광분하고 있었다.

‘데자뷔가 느껴지는데.’

나는 아예 뮤나스에 들어와 같이 살지 않겠냐며 겁주었던 초창기의 비브로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카니를 놓지 못해! 감히 내 애제자를!”

그가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자, 아그리마가 날 끌어안은 채 몸을 돌리며 그를 피했다.

“카니, 잘 생각해 봐. 저런 미친놈의 제자가 하고 싶니?”

아그리마가 흥분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회유했다.

“내 밑으로 오렴. 너는 천부적이란다. 아마 마나석을 만드는 법도 빠르게 배울 거야!”

“아그리마!”

비브로스와 아그리마가 벌이는 전쟁의 시작이었다. 나는 반쯤 포기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저러다 제풀에 지치겠지.’

다행히도, 그들의 치열한 공방전은 열흘이 지나자 조금 사그라졌다. 연금술사는 될 생각이 없다고 지속적으로 어필한 탓도 있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브로스의 집을 찾아와 날 좀 만나게 해달라며 질척거리던 아그리마가 오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겠다.’

나는 막대를 넣고 천천히 젓다가, 약물이 터질 기미를 보이자 얼른 뒤로 물러섰다. 레스토레이션 마나석이 담긴 약물이 펑 소리를 내며 연기를 내뿜었다.

‘익모초를 너무 많이 넣었나.’

나는 수첩에 실패 요인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적은 다음, 의자에 앉아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레스토레이션이 너무 예민해서 어떤 약물을 써도 부대끼네.”

이렇게 제한적이면 내가 원하는 효능을 뽑아내기 힘들었다.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고민을 거듭했다.

‘마나 안정화 약물이랑 섞어야 하나?’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약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

시간이 흘러, 가을이 되었다.

치료사 협회의 인사처 사람들은 함께 모여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지금쯤 각자 물약을 만드느라 바쁘겠지만, 조만간 치료사 협회에 입회를 원하는 사람들의 시험이 있었다. 그들은 어떤 시험을 낼지 한창 얘기를 나누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날씨가 많이 풀어졌구려.”

“햇볕이 따갑긴 하지만, 습기는 가셨더이다.”

게다가 비슷한 지위의 사람들끼리 모여 있어서 그들은 서로 친한 편이었다. 껄껄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우편물을 확인하러 잠깐 밖으로 나갔던 한 치료사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보게들! 이것 좀 보시오!”

그가 거의 반쯤 넘어질 뻔했다가, 제 손에 뭐가 들려있는지를 뒤늦게 깨닫고는 있는 힘을 다해 균형을 잡았다. 개중 가장 나이 많은 한 치료사가 눈썹을 찡그리며 끌끌 혀를 찼다.

“뭐가 그리 급해서 난리를 치는감.”

“비, 비브로스 샥스가 새로 만든 약물을 보내왔소!”

그러자 나이 많은 치료사부터 젊은 치료사들까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웅성거렸다.

“제자가 만든 거라며, 학위는 없지만 약물을 개발했으니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내용이오!”

그러자 차에 혀가 덴 사람처럼 마시던 것을 도로 뱉어낸 치료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론 무릎이 아파서 신음을 하고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긴 했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눈을 동그랗게 뜬 다른 치료사가 허, 기막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성질을 그렇게 고약하게 써먹더니 벌써 노망이 온 겐가? 학위 없는 학생이 어찌 치유연금물약을 개발해?”

그는 비브로스를 깎아내리면서도 어떤 물약인지 궁금한 듯 눈을 흘기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래서, 어떤 물약이라고 하는가?”

그러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치료사가 너무 흥분해서 말을 더듬었다.

“리, 리리, 리…….”

“리?”

그가 통 말을 잇지 못하자 듣던 치료사가 가슴을 치며 졸라댔다.

“거참, 그렇게 말하면 어찌 알아듣겠나. 좀 정확히 발음해보게. 어서!”

“리, 리리, 리커…….”

치료사가 차갑게 식은 손바닥으로 제 뺨을 두어 번 짝짝 때리더니, 그제야 조금 진정하고 말을 내뱉었다.

“리커버리 약물이라고 하오!”

쨍그랑!

자리에 앉아있던 치료사들이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쳤다. 비싼 도자기 잔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그들의 발치를 굴러다녔지만, 다들 얼이 빠진 채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있었다.

리커버리 약물.

약물을 제조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환상물약사전뿐만 아니라 동화책에서도 숱하게 등장하는 약물이며, 모든 치료사들이 바라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궁극의 약물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연금술사들이 돌을 금으로 만들기를 바랐던 것처럼 이루지 못할 소망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리커버리 약물을 만들었단다. 비브로스도 아닌, 학위도 없는 제자가!

그들은 결국 흘기거나 무시하던 태도를 내려놓고, 그가 들고 있는 우편물로 일제히 달려들었다. 리커버리 약물의 효능이 적힌 전신과 약물이 작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

비브로스가 우편을 보내러 가겠다며 외출한 아침, 나와 스노아는 잠깐 마탑을 들렀다. 2주 후에 시험이 시작될 거라고 했으므로, 늑대 수인족을 만나려면 지금이 기회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예요.”

그녀가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한 스노아가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괜찮겠어요? 많이 예민한 성격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나를 해칠까 퍽 불안한 눈치였다. 제가 만든 반지가 나를 지켜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근데 왜 독방을 쓰고 있는 거야?”

“경계심이 심해 혼자 있지 않으면 밤에 잠을 자지 못한다고 했다네요.”

왜 그런지 알 것 같아 기분이 침울해졌다.

‘나는 수인족이라 밝히면 그렇다 치지만, 스노아까지 끌고 들어가도 되는 걸까?’

나는 리커버리 약물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복종 포션의 해독약은 아직 만들지 못했지만, 우선 그녀가 걸을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 방문했다. 부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평안이 깃들길 바랄 뿐이었다.

“괜찮으니까 나 혼자 들어갈게.”

“하지만…….”

“네가 만들어준 반지가 있잖아.”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아랫입술을 짓씹은 스노아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개입할 작정인 듯했다. 이거라도 허락하지 않으면 날 뜯어말릴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여 승낙한 뒤 문을 두드렸다.

수인족은 귀가 밝다. 이미 문 밖에서 두 명의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텐데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다시 문을 두드렸다.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돌아가라는 의미일까.’

털을 최대한 세우고 경계하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도움이 될 만한 약을 챙겨 왔어요.”

그래도 반응이 없다.

이렇게까지 거부하면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텐데, 이런 식으로는 평생 진전이 없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침대 위를 살폈다. 가에 앉은 여자가 눈을 하얗게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열려 있던 문을 닫고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복도에서 새어 들어오던 빛이 없어지자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구지?”

그녀는 내가 그녀를 구해줬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렇게 경계심이 심한 걸 보면, 아직도 저를 도와준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있는 듯싶었다.

제국에서 수인족의 삶이란 인간과의 끊임없는 전쟁이었다. 싸구려 동정심으로 자기를 도와준 인간이 언제 마음을 바꾸어 처지를 역전시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날 구해준 건 고맙지만, 되도록 날 혼자 두었으면 좋겠어.”

“저는 양 수인족이에요.”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 뭐라고?”

그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되물었다. 당황한 석회색 눈망울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다 곧 늑대 수인족 특유의 그르렁거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나를 놀리는군. 너에겐 꼬리도 뿔도 없어. 그런 어쭙잖은 거짓말은 왜 하는 거지?”

“지금은 환영마법을 쓰고 있어서 그런 거예요.”

나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설명했다.

“수인족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놓고 돌아다닐 수 있을 리 없잖아요.”

날카롭게 드러난 송곳니가 별안간 입술 안으로 숨었다. 그녀가 신중한 눈으로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당신을 해치러 온 게 아니에요. 마탑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도 당신을 보호하기 위한 거예요.”

“……알고 있어.”

“제가 수인족이라는 말은 믿지 못하더라도, 잠깐만 시간을 내주실 순 없을까요?”

머리 위로 쫑긋 솟아있던 새카만 늑대귀가 아래로 축 처졌다.

“허락합니다. 위협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녀도 자신이 어떤 혜택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려놓지 못한 그녀의 경계와 의심을 이해했다. 도망칠 수 있는 두 다리마저 잃었기에 더더욱.

“오늘은 당신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왔어요.”

나는 방 불을 켜며 얘기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야무진 눈이 믿기 힘들다는 듯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볼수록 타도라를 닮았어.’

그래서 더욱 눈에 밟혔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마법가방을 뒤졌다. 그녀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 말고 소리쳤다.

“정말입니까? 걸을 수 있는 겁니까?”

“전 약제사거든요. 시험을 치르면 곧 치료사가 되고요.”

“어, 어떻게…….”

“운이 좋았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많이 좋았죠. 수인족은 감히 누리지 못할 것들을 손에 쥐게 되었어요.”

나는 약병을 찾아 꺼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그리고 침대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걸어가 약물을 내밀었다.

리커버리 약물.

레스토레이션 마나석 안정화 작업을 거친 후, 이전에 만들었던 소생약을 응용하여 완성했다. 마법이 섞이는 과정에서 자꾸 약물이 변질되어 골치를 앓았지만, 마나석 안정화 약물의 양을 줄이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이름이 뭐예요?”

떨리는 손으로 약물을 받아들던 늑대 수인족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짓누르며 대답했다.

“휘라 이오렌. 휘라라고 부르세요.”

‘역시 타도라가 아니었네.’

안심이 되면서도 묘하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머리를 휘휘 저으며 내 소개를 했다.

“저는 카니 페트리예요. 카니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옆에 앉았다. 휘라는 움찔 몸을 떨었지만 다행히 싫어하거나 떨어지고 싶은 기색을 내비치진 않았다.

“그냥 마시면 돼요.”

휘라가 약물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그녀의 눈이 기대에 들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공포감을 억누르지 못해 떨리고 있었다. 속아서 또 복종 포션 같은 걸 먹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그녀의 의심을 풀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수인족이라는 걸 확신하면 완전히 경계를 풀 것 같은데.’

수인족들은 단합력이 좋다. 엘프, 드워프와 달리 인간과 섞여 살고 있는 유일한 다른 종족이면서도 핍박받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휘라, 잠시 손을 줘보시겠어요?”

그녀가 불안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스스로 손을 내밀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녀가 내 기색을 유심히 살피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조심스럽게 끌어서 내 머리 근처로 가져왔다.

환영마법은 사람들의 눈에 다른 외양을 보여줄 뿐, 폴리모프처럼 실제로 몸을 변형시켜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겉으로 뿔이나 양의 귀 같은 것이 보이진 않았지만, 만지면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을 내 머리에 동그랗게 말린 채 붙어있는 뿔로 이끌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단단한 것이 잡히자 휘라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양의 뿔이에요.”

“이, 이 부드러운 건 뭐죠?”

그녀가 몹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손을 움직였다. 뿔 밑에 자리 잡은 보들보들하고 따스한 살덩어리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보이질 않으니 뭐.’

나는 간지러워서 절로 움츠러드는 목을 억지로 펴며 대답했다.

“제 귀예요.”

“아, 미, 미안합니다.”

휘라가 민망한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너무 작고 부들거려서…….”

양 수인족 중에서도 내 귀가 작은 편이긴 했다. 나는 뻣뻣하게 서있는 그녀의 늑대 귀를 바라보곤 이해했다.

“양 수인족은 처음이신가 봐요.”

“제가 본래 지내던 곳에선 육식과 수인족이 훨씬 많았어요.”

그녀가 완전히 경계가 풀어진 얼굴로 대꾸했다.

“본래 지내던 곳이요?”

나는 강렬한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어린 시절은 므리나의 저택에서, 그 이후로는 죽음의 숲에서 줄곧 혼자 지냈던 터라 수인족들이 숨어 사는 장소는 하나도 아는 곳이 없었다.

‘어쩌면 거기에 친구들이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곳이 어디냐고 캐물으려다가, 곤란해하는 휘라의 얼굴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수인족이어도 친하지 않은데 그런 정보를 알려줄 리 없지.’

어쩌면 인간들에게 붙은 수인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미안해요. 여태 혼자 지냈었거든요.”

나는 민망해져서 괜히 내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면 휘라는 왜 거주지에서 벗어나신 거예요? 계속 그곳에 있는 게 안전했을 텐데.”

“늑대를 봤거든요.”

“늑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지내는 곳은 일반 동물이 살 수 없는 환경이에요. 몬스터와 마물이 들끓는 장소죠.”

그녀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늑대가 있는 거예요. 있을 수 없는 장소에 말이죠.”

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뭐지?’

디카타 산맥에서 내가 겪었던 일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나도 모르게 무척 심각해져선, 그녀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나 점점 의문이 깊어져 가는 나와 달리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설명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그게 ‘계시’라는 걸 바로 알아보았어요.”

“계시요?”

“계시를 모르시는군요.”

휘라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가, 곧 납득하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겠네요. 부모님께 수인족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 들으며 자라는 수인족은 아주 소수니까요.”

“…….”

“저도 공동체의 이웃 어른께 건너들은 얘깁니다.”

그녀가 손에 들린 약병을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며 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수인족은 천계와 중간계의 아이라는 걸 아시나요?”

드래곤이 얘기해주어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모르고 있다고 판단한 휘라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아직 세상이 분리되지 않았을 시절, 천계와 중간계의 존재가 사랑하여 최초로 낳은 아이가 수인족이라고 해요. 그래서 본인이 마음 먹은 차원에 뿌리내릴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종족이에요. 자신의 본토를 스스로 정할 수 있죠.”

“혼혈이요.”

“예.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그런 존재인 거죠. 그래서 두 세계와 모두 이어져 있다고 해요.”

이어져 있다는 말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면이 있었다. 퍼뜩 와 닿지 않는 표현이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휘라가 그런 나를 살피면서 얘기했다.

“세계가 분리되면서 수인족은 중간계에 남게 되었고, 시간이 많이 흘러 천계와의 연결고리가 흐릿해졌죠.”

“…….”

“하지만 수인족들 중 소수는, 아직도 천계와 이어져 있어 천족의 전언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천족의 전언.’

전신으로 소름이 내달렸다. 실마리가 잡힐 것 같아 손바닥에 땀이 고이고 있었다. 그것을 치맛자락에 문질러 없앴다. 가슴이 어찌나 쿵쾅거리는지 입 밖으로 심장을 뱉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수인족들은 그 전언을 계시라고 칭했습니다. 천족은 선을 대표하는 신과 같은 존재기에 그랬지요.”

“천족의 전언이 동물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건가요? 해당 수인족와 같은 종의?”

“이해가 빠르시군요. 맞습니다.”

‘계시라니.’

나는 넋이 나가서 멍청하게 눈꺼풀을 끔벅거렸다.

‘그게 용사들을 만나라는 천족의 전언이었단 말이야?’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덜컥 해답을 얻고 나니 이건 이것대로 혼란스러웠다.

‘왜? 아니, 잠깐만. 그러면 천족도 마족이 중간계를 침입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건가?’

왜 하필 나한테 전언을 보냈을까. 내가 근처에 있어서? 약제사니까? 온갖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소용돌이 쳤다.

‘근처에 있기 때문에 전언을 보낸 게 아니야.’

나는 여태껏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알아내고 두 팔로 스스로를 감쌌다. 오싹한 기분이 들면서 몸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디카타 산맥을 방문하기 바로 전날 엉킨 마나에 도움이 되는 약물을 만들었어. 이게 과연 우연일까?’

천족이 수인족에게 전언을 내릴 수 있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어떤 계시를 받았는지도 몰랐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하지 못하는 일상 사건들 중에 약물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중 무언가에 천족이 개입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카니? 괜찮나요?”

휘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보았다. 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팔을 풀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너무 나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아니에요. 그냥 좀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나는 눈을 굴리다가, 마지막으로 하나 더 질문했다.

“그래서, 당신은 그 계시를 쫓아가서 무엇을 얻게 되었나요?”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휘라가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대로 납치당해서 다리 힘줄이 잘리고 노예가 되어버렸죠. 다행히 구출되긴 했지만, 제 꼴을 보세요.”

그녀가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철없이 살아온 제 지난 삶을 벌주기라도 하듯 참혹한 몰골이지 않습니까.”

나는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서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화가 일단락된 듯 보이자 휘라가 약물의 뚜껑을 땄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단숨에 들이켰다.

“힘줄이 완전히 복원되려면 10분 정도 걸릴 거예요. 그러니 무리해서 움직이려고 하지 말아요.”

그냥 약물과 치유연금물약의 대표적인 차이 중 하나가 치유효과가 나타나는 속도에 있었다.

일반 약물은 멍을 빼내는 데만 몇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연금약은 마법의 힘으로 그 기간을 파격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 휘라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하는 제 발뒤꿈치를 보더니, 아랫입술에 힘을 주었다. 억지로 붙잡아둔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울음을 참으려고 하는 것까지 타도라와 닮았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다가, 시선이 마주치고 흠칫 놀랐다.

“미안해요. 마음이 안 좋아서…….”

“아닙니다.”

휘라가 먹먹하게 잠긴 음성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만 가 봐야겠다. 나 때문에 못 우는 것 같으니까.’

나는 크로스백 형태의 마법가방을 도로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종 포션의 해독제도 만들고 있어요.”

휘라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왜 그렇게까지 하죠? 해독제를 만든다고 해서 당신에게 득 될 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녀가 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물었다.

“노예로 끌려 들어온 사람들에겐 해독제의 값을 지불할 돈이 전혀 없을 겁니다.”

“대가를 바라고 만드는 게 아니에요. 제가 좋아하고,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하는 것뿐이에요.”

그녀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날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네?”

휘라가 침대를 짚은 손에 힘을 주며 낮게 읊조렸다.

“어쩌면, 그 늑대는 당신과 제가 만나길 바랐던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군요.”

나는 보름달처럼 빛나는 그녀의 크고 동그란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네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

복종 포션의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 연구실에만 틀어박힌 나날만 보내던 어느 날, 아다르가 쳐들어왔다. 정확히는, 뒤에 네 명의 용사들을 우르르 끌고.

“뭐야?”

나는 그들이 다 같이 불쑥 나타났을 땐 항상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경계가 잔뜩 돋은 얼굴로 기색을 살폈다.

물론 아다르는 나의 위협용 눈빛이라든가 얼른 꺼지라는 뉘앙스의 말투에 눈도 깜짝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대뜸 내 팔목을 움켜쥐었다.

“이런 데서 계속 연구만 하면 머리도 굳어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최근 연구에 진척이 없고 지지부진했다. 나는 속으로 그의 말에 무척 동의했지만, 겉으론 아닌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쏘다닐 계획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하고 초조한 탓에, 진척이 없더라도 연구실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나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아다르가 눈을 빛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잠깐 나갔다 오자.”

“싫어.”

나는 손을 흔들며 어떻게든 그를 떼어내려고 했다.

“하루하루가 아까운데 어딜 놀러 갔다 와?”

“여기서 제일 가까운 도시 있잖아. 이맘때쯤에 가을꽃이 활짝 피어서 거리만 걸어도 예쁘대.”

“관심 없어.”

“무역도시 그란디아랑 가까워서 특이한 것도 많이 판대. 행상인들이 많이 방문한다나 봐. 구경해보고 싶지 않아?”

순간 솔깃해졌지만, 애써 관심을 돌렸다. 조만간 치료사 협회에서 시험이 있다. 그것도 준비해야 하고, 해독제도 만들어야 했다. 여유부릴 시간이 없었다.

“됐어. 살 게 뭐가 있다고.”

“왜? 다른 나라의 특이한 약초를 팔 수도 있지.”

나는 이미 망해버린 약물을 치우다 말고 멈칫 굳었다.

“듣자 하니 그 도시가 치료사들의 성지라는 것 같더라. 비브로스의 사유지인 이 산도 그렇고, 근처에 약초가 많이 자라잖아.”

아다르가 혼잣말을 하듯, 그러나 내게 똑똑히 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실 치료사들도 약초를 살 때는 무조건 그 도시에서 산다는데…….”

“그래서 언제 간다고?”

나는 늘어놓았던 약재들을 주섬주섬 정리하며 말했다. 내 태세전환에 아다르가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웃지만 말고 빨리! 약초만 슥 둘러보고 올 거야.”

“네가 퍽이나 그러겠다. 한 가게에만 한 시간은 있을 거면서.”

나는 불만을 구시렁거리며 옷에 묻은 약재가루와 이물질을 털어냈다. 아다르가 손이 닿지 않는 등을 같이 털어주면서 말했다.

“지금 당장 가자.”

“정말?”

“그래. 젠장, 할릭한테 들키지만 않았어도 둘이서 다녀오는 건데.”

아다르가 할릭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다 소문내서 이게 뭐야? 우르르 단체 데이트라도 하게 생겼잖아.”

“뭐 어때? 도시에 가면 한 번씩은 보이는 풍경인데. 단체 데이트.”

나는 기대돼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말고 얼굴을 싹 굳혔다. 생각해보니 용사들 모두와 연애 아닌 연애를 하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행하는 것도 아니고, 잠깐 나들이를 다녀오는 것이니 엄밀히 말하면 데이트였다.

다섯 명과의 데이트.

‘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서로 투닥거리는 용사들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 많은 인원들이랑 어떤 식으로 도시를 돌아다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평소처럼 하자.’

나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중결혼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이런 처지가 되다니…….’

혼자 보낸 세월이 긴 탓일까, 다중연애 중인 평민을 길거리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한 여인이 세 명의 남성에게 예쁨을 받는 모습을 보고 기가 질렸었지.’

여러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언뜻 좋아 보이지만, 그 여인은 세 명의 남성들을 모두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치지 않나?’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경험 탓에 정을 주기도 겁이 나는 나로선 범접할 수 없는 영역처럼 보였었다. 그런데 웬걸, 나는 지금 내가 좋다는 남성 다섯 명과 나들이를 가고 있었다.

‘인생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구나.’

나는 반쯤 체념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스노아의 편리한 텔레포트의 도움을 받아 도시로 이동했다. 어느 도시를 가든 외곽은 반드시 빈민촌이 있었기에 일부러 도시 안쪽으로 텔레포트를 한 듯했다. 내가 신경을 쓸 게 뻔하니까.

‘예전에는 빈민가가 이렇게 많지 않았는데.’

나는 씁쓸하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가난한 외곽과는 딴 세상인 것처럼 상권이 발달한 도시가 떠들썩한 소음으로 시끄러웠다. 거리마다 행상인들이 천막을 설치하고 특이한 물건들을 팔았다.

“야, 카카나. 저기에 너 있다.”

나는 아다르가 가리켰던 곳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양 그림이 그려져 있는 모직 가게를 발견하고 그의 정강이를 발로 차버렸다. 그는 당연히 내 공격을 피했다.

분하게 여길 틈 없이, 아다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할릭이 대신 뒤통수를 후려쳤다. 뻑, 하고 바위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헉.”

나는 놀라서 아다르를 바라보았다. 머리뼈가 깨지진 않았을까 걱정되었던 탓이다. 다행히 그건 아닌지, 아다르가 눈물이 찍 나온 얼굴로 머리를 문질렀다.

“무서워서 뭔 말을 못 하겠네.”

“짓궂은 장난 좀 치지 마. 그렇게 미움 받으면서까지 놀리고 싶어?”

“응.”

‘덜 맞았네.’

그의 머리가 언제 걱정되었냐는 듯이 마음이 팍 식었다.

“넌 진짜 인성파탄자야. 알고 있지?”

“고작 인성파탄자라니 고맙네.”

나는 질색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아예 그에게서 관심을 끊어내고 거리나 구경했다.

얘기가 오간 대로 거리에 색색의 꽃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원래 도시 조경에 신경을 쓰는 편인지, 아니면 약초가 많이 나는 도시라는 걸 어필하고 싶은 건지 퍽 친환경적인 광경이었다.

나는 약초를 찾으려 눈을 굴리다가 한 행상인의 천막을 바라보았다. 다양한 머리핀과 끈을 파는 곳이었다. 머리장식은 충분히 있었지만 비늘 모양으로 조각된 청록색 자개 머리핀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스노아한테 잘 어울리겠다.’

어차피 넘쳐나도록 있는 게 돈이었다. 나는 쓸데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죽이지 않고 냉큼 천막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뻤다. 무지개를 녹여 만든 것처럼, 자개가 빛을 받을 때마다 오색으로 반짝거렸다. 나는 핀을 사서 스노아에게 돌아갔다.

“스노아, 허리 좀 숙여봐.”

거리를 구경하고 있던 스노아가 내 손에 들린 머리핀을 발견하더니, 이내 작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풀어져있는 그의 옆머리를 끌어올려 핀을 꽂아주었다. 본래부터 자기 물건이었던 것처럼 어울리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그의 머리에서 돋아난 비늘처럼 찰떡이었다.

“스노아, 진짜 인어인 건 아니지?”

이쯤 되자 합당한 의심인 것 같아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물어보았다. 스노아가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럴 리 없잖아요.”

“바다에 놀러 갔을 때도 물에 들어가는 건 피했잖아. 인어로 변해서 그런 거 아니야?”

“아니에요.”

스노아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더니, 입술에 쪽 뽀뽀했다. 나는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노아의 물빛 눈망울에서 사랑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귀여워요, 카카나.”

“윽…….”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빨개진 얼굴의 열을 식혔다. 너무 예쁘게 생겨서 심장에 해로웠다.

‘이렇게 허구한 날 설레는데, 난 이미 용사들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들의 우월한 미모를 올려다봤다가 금방 생각을 정정했다. 생판 처음 보는 남들도 그들의 본래 모습을 봤다면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을 거다. 이렇게 대놓고 유혹을 해대는데, 멀쩡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머, 손님. 설마 한 남편분께만 핀을 선물하실 생각인가요?”

그때, 핀을 팔던 상인이 상술을 부리며 입을 털었다.

“그러면 다른 남편분들께서 서운해하실 것 같은데요.”

남편이 아니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퀄리티미엄에서 겪은 일 때문에 역치가 높아졌나.’

여기까지 오면서 이미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대화소리와 시선에 익숙해졌다. 다중연애를 하는 사람이야 종종 보이지만, 남편이나 부인이 다섯이나 되는 사람은 극히 드문 탓이다.

‘일일이 오해를 풀면서 다닐 수도 없고.’

나는 용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자기만 핀을 못 받았다고 삐질 것 같진 않았지만, 날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을 감내하고 있자니 그럴 듯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천막으로 걸어갔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둘러보세요!”

딱히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스노아 말고 머리핀이 어울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르모어한테 어울리는 건 몇 개 보이네.’

왕님에게 선물하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보였지만, 개중 그럴 듯한 것도 있었다. 나는 검은색 나무 막대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상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그건 동양에서 온 물건이에요, 손님.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동양이요?”

“예. 비녀라고 하는 물건이에요. 틀어 올린 머리를 풀어지지 않게 고정해주죠.”

그가 비녀로 머리를 휘휘 감은 뒤 꽂는 시늉을 하며 설명했다.

“흔하지 않은 물건이니, 기회가 있을 때 사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안 그래도 붉은색 보석이 핵심 장식으로 사용된 것이 마음에 든 참이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아르모어가 바로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비녀를 구매했다.

“아르모어, 비녀 사용할 줄 알아요?”

나는 그에게 비녀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동양의 물건이래요.”

“내게 주는 건가?”

“그럼요. 이건 아르모어 말고 아무도 안 어울릴걸요.”

내 확신에 찬 말에 그가 살짝 웃더니 비녀를 받아 머리로 가져갔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머리의 반을 갈라 쥔 다음, 비녀에 둘둘 감아 깔끔하게 쪽쪘다.

막대로 머리를 어떻게 묶는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 입을 벌렸다. 그의 검은 머리가 신기할 정도로 깔끔하게 고정되었다.

“와.”

나는 그의 뒤로 돌아가 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럽게 꽂혀 있는 비녀를 구경했다.

“이렇게도 가능하구나. 잘 어울려요, 아르모어.”

“고맙다.”

“나는?”

그때, 옆에 서있던 아다르가 내 허리에 팔을 감더니 제 품으로 훅 끌어당기며 칭얼거렸다.

“머리 짧다고 차별하는 거야? 네가 원한다면 기를 수 있는데.”

“뭔 소리야?”

나는 구겨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넌 그냥 이대로가 나아.”

“쳇.”

“그리고 너한테 어울리는 핀이 어디 있어? 아무런 장식도 없는 실핀이면 몰라도.”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등을 툭툭 쳤다.

“이런 걸로 질투하지 마.”

“그럼 뽀뽀.”

나는 그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탁, 쳤다.

“까분다.”

“스노아가 뽀뽀하는 건 봐줬으면서.”

“넌 안 돼.”

그가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리며 반문했다.

“왜?”

“재수 없으니까.”

“와,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거야?”

“그 주제는 됐고, 이거에나 대답해 봐. 다른 애들도 마음 상한 것 같아?”

아다르가 할릭과 첼러스를 몰래 살펴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나한테 물어?”

“이런 거 묻기엔 네가 제일 만만하잖아.”

“너무하네, 진짜.”

그가 기막히다는 듯이 웃다가, 곧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띠며 허리를 숙였다.

“마음이 상하긴 뭘 상해. 너랑 같이 나들이 나온 것만으로 선물인데.”

“웩.”

토하는 시늉을 하며 그의 얼굴을 뒤로 밀어버렸다. 아다르가 왜 그런 반응이냐는 듯이 눈을 치떴다. 나는 내가 느낀 심정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그런 말 좀 하지 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러면 특히 더 어색하단 말이야.”

“왜, 싫어?”

“싫다기보단 민망하잖아.”

“호오?”

나한테 그렇게 타박을 받아놓고도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아다르가 또 개구지게 웃었다. 괴롭힐 건수 하나를 잡았단 얼굴이다. 이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지 예상이 갔다.

‘창피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내 반응을 즐기겠지.’

그것도 다른 사람이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나는 그가 실행에 옮기기 전에 첼러스의 옆으로 도망쳤다. 우리를 지나치는 행인들을 눈으로 살피던 첼러스가 의아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즉시 아다르를 제재했다.

“괴롭히지 마십시오, 아다르.”

아다르가 나를 노려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를 대놓고 손가락질하며 낄낄거렸다. 역으로 놀리니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곧 상당히 아다르 같은 짓을 했다는 걸 깨닫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소용없는 뒷수습이었다.

“저기 공연 같은 거 하나 봐.”

그때 할릭이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연이 아니라 행사인 듯하다.”

눈이 밝은 아르모어가 할릭이 가리킨 방향을 확인하며 말했다.

“연인만 참가할 수 있다고 쓰여 있군.”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정 없이 시작된 행사인 터라 준비된 단상이나 좌석은 없었지만 인파가 몰려 상당히 북적거렸다.

‘광장 근처라 그런지 관상용 석상이 몇 개 보이네.’

나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면서 얼굴을 구겼다.

‘오래되어 보이는데. 안 치우나?’

게다가 사제 석상이어서 왠지 더 꼴 보기 싫었다. 타락한 신전의 실태를 알고 나서부터 반감이 쌓인 탓이다.

짜증이 그득한 표정을 짓자 인파 때문에 불편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지, 용사들이 사람이 없는 부분을 찾아 나를 끌어주었다. 끈으로 선을 그어놓은 공터 뒤편으로 행사를 어떻게 진행할지 한창 이야기 중인 개최자들이 보였다. 나는 나무로 엉성하게 만든 입식 팻말을 확인했다.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어떤 행사인가 했더니, 별 거 아니었네.’

축제가 자주 열리는 도시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시합이었다. 연인을 안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하거나 팔굽혀 펴기를 해서, 제일 오래 버틴 사람에게 상품을 주는 방식이다.

“해보자, 카카나!”

할릭이 어서 산책을 나가고 싶어 안달 난 애완동물처럼 눈을 빛내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움직이고, 돌아다니고, 여행하면서 힘을 발산해야 스트레스를 안 받는 할릭의 성격을 알기에 딱 잘라 거절하기 힘들었다.

저 말똥말똥 빛나는 눈을 보라. 어린아이처럼 신나서 무구하게 웃고 있으니 더 모질게 대하질 못하겠다.

“꼭 하고 싶어?”

할릭이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평소라면 칼같이 거절했겠지만, 스노아랑 아르모어에게만 선물을 해줬던 일이 신경 쓰였던 참이었다.

“게다가 1등한테는 특별상품으로 약물도 준대.”

그가 입식 팻말을 가리키더니 나와 함께 참여하게 될 거란 묘한 확신을 담고서 중얼거렸다. 나는 읽다 만 설명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맨 밑에 상품으로 무엇을 제공하는지 쓰여 있었다.

‘보나마나 관심을 끌기 위한 허접한 약물이겠지.’

이런 식으로 제공되는 약물에 매달렸다가 낭패를 본 일이 많았던 터라,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넘어오리라는 걸 확신한 할릭의 얼굴을 흘끗 살폈다. 눈에서 거의 별이 튀고 있었다. 저 커다란 남자가 두 주먹까지 옹송그리고서 내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간질거렸다.

‘조금 귀엽네.’

나는 약물이 탐이 나는 척하며 입식 팻말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꾸준히 발라주면 아기 피부로 만들어준다는 약물이었는데, 상당히 수상한 냄새가 났지만 확인차 얻기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런 미용 약물은 설령 가짜라 해도 몹시 희귀하기 때문이다.

‘피부에 직접 바르는 외용약인 건가? 아니면 복용약?’

심드렁했던 마음이 살짝 동했다.

“그래, 가자.”

“좋아!”

할릭이 날 듯이 기뻐하며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얼마 안 되는 비용을 지불하고 할릭과 함께 행사에 참여했다.

“와, 저 사람 근육 좀 봐…….”

“저걸 어떻게 이겨.”

할릭의 덩치가 상당했기에 당연히 우리를 얘기하는 건 줄 알았더니, 사람들은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헉…….”

나는 중앙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꼭 거대한 바위가 굴러오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을 넣고 부풀린 듯 빵빵한 근육과 투박한 손가락, 가슴팍까지 억세게 자라있는 풍성한 수염이 눈에 들어왔다.

키는 또 얼마나 큰지, 덩치가 거의 오우거와 맞먹어 보였다. 기가 질린 나와 달리 할릭은 신이 났다. 얼마나 강한 상대가 오든 초월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심지어 이런 간단한 힘자랑 같은 경우는 행사라 해도 할릭이 즐길 만한 요소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났지?’

“나를 들고 버텨봤자 힘들면 얼마나 힘들다고, 뭐가 그렇게 신났어?”

“그래서 시시하지 않게 스노아한테 미리 부탁해 놨지.”

“뭐를?”

“시합이 시작되면 너한테 마법을 걸어달라고 했어.”

내가 미간을 좁히자 할릭이 설명을 덧붙였다.

“무게를 늘리는 마법.”

행사가 시작되고 사회자가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할릭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

“한 이천 킬로그램 정도?”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네?’

“시작부터 기를 죽이는 사람이 여럿 있네요! 특히 제일 왼쪽에 서 계시는 분! 아주 대단하십니다!”

확성 마도구에 대고 소리를 지르던 사회자가 화제의 바위 같은 남자를 지목하며 얘기했다. 그는 옆구리에 상냥한 외모의 여인을 두고 있었는데, 체구 차이 때문인지 여인이 바늘처럼 가늘어 보였다.

“자, 그럼 가볍게 규칙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장황하게 얘기를 늘어놓고 있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버텨라’ 이 소리였다. 힘을 쓰는 쪽이 연인을 땅에 내려놓으면 패배, 끝까지 내려놓지 않는 쪽이 승리였다.

“시작은 가볍게 연인을 안고 있는 것으로 해볼까요!”

할릭이 기다렸다는 듯이 날 안아들었다. 나는 설마 지금도 마법이 적용 중인가 싶어 작게 소곤거렸다.

“혹시 지금도 마법이 걸려 있는 거야?”

“아니. 이제 곧 스노아가, 오.”

나를 안고 있는 할릭의 팔뚝에 순간 푸른 핏줄들이 와락 돋아났다. 나는 놀라서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할릭의 턱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나를 고쳐 안으면서 얘기했다.

“장난 아닌데?”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그럼 이천 킬로그램이 늘어났는데 당연히 장난이 아니지.’

생각해보니 내가 그만큼이나 무거워졌다는 말 아닌가.

‘내 몸무게가 이천 킬로그램이라니…….’

움직이거나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있는 등 내가 행동하는 덴 아무런 제약이 없어서 신기했다.

“대단합니다! 올해는 버티는 사람이 꽤 많군요! 그럼 슬슬 자세를 바꿔볼까요!”

사회자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연인을 등에 업고 팔굽혀 펴기! 30초 안에 자세를 바꾸지 못하거나 연인의 발이 땅에 닿으면 탈락입니다!”

매달린 채로 어떻게 자세를 바꾸라는 건지 난감해졌으나, 할릭이 힘으로 해결했다. 한 손으로 자세를 바꿀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그에게 폭 안겨 있다 보니, 불끈거리는 근육과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더 잘 느껴졌다. 근육 모양대로 갈라지는 복근의 느낌이 신기해서 손끝으로 살살 쓸어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할릭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후에 추억으로 남을 이 순간을 함께한 사람이 정말 카카나 페아가 맞는지 거듭 확인하는 사람처럼.

“할릭, 이런 게 좋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투기장도 그렇고, 행사도 그렇고 떠들썩한 걸 좋아하나 보네.”

“딱히 시끄러운 걸 좋아해서 이러는 건 아냐.”

“그러면?”

“나는 한계에 부딪히는 게 좋아.”

그가 씩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한계에 부딪히고 궁지에 몰리면, 내가 살아있다는 게 뼈저리게 느껴지거든.”

“…….”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괜히 입을 우물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평소엔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거야?”

“네가 날 살게 하지.”

할릭이 나를 고쳐 안으며 대꾸했다.

“이런 건 잠깐의 유흥이야. 초월자가 되기 전에 느꼈던 활력을, 잠시 되찾아주는 유흥.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유치한 거.”

우리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며 분위기를 띄웠다. 나는 관람객들을 멀거니 응시하다 말고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그저 모험과 스릴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이러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용사들에 대해서 아직 모르는 게 많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관람객들의 환호가 점차 사그라졌다.

그러다 경기가 한 시간이 넘게 이어지자 자리를 떠나는 관람객까지 생겼다. 모든 참가자들이 탈락하고, 오우거 같은 남자와 할릭만 남은 상황이었다. 사회자는 이미 목이 다 쉬어버려서 더 이상의 자세변경을 요구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다 평생 안 끝나겠어.’

스노아도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다.

적당히 놀고 오라는 뜻으로 내 무게를 더 늘린 게 틀림없었다. 갑자기 할릭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나는 조만간 경기가 끝나겠다고 생각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할릭의 투지와 승부욕이 더 들끓어 올랐기 때문이다.

[저 무식한 인간.]

스노아가 텔레파시로 할릭 욕을 하는 게 너무 웃겨서 폭소가 터졌다. 내가 깔깔거리며 움직이니 더 죽을 맛일 텐데, 할릭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반지를 잡으며 얘기했다.

[이 정도 가지곤 어림도 없겠는데?]

[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금수 같네요.]

스노아가 아주 부드러운 어조로 신랄하게 비꼬았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경기에 집중하던 할릭이 돌연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팩 고개를 돌렸다.

“이런.”

“왜?”

그가 가타부타 말없이 갑자기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식겁해서 할릭을 끌어안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그가 뛰어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쓰러지는 중인 석상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어쩐지 불안불안하다 했어!’

길거리에 꽃 심는 시간에 저런 것들이나 치웠으면!

이곳이 행사가 자주 열리는 장소인지, 인파에 부대끼던 석상이 결국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나를 땅에 내려준 할릭이 두 손으로 쓰러지는 석상을 받쳤다.

그 밑에 마지막까지 할릭과 경쟁을 이어가던 오우거 같은 남자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끄윽!”

할릭이 드물게 앓는 소리를 내며 석상을 옆으로 치운 후, 두 무릎을 짚은 채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두 시간 동안 이천 킬로그램짜리 양 수인족을 들고 있다가 뛰어가서 석상까지 막았으니 오죽하겠는가.

나는 부부가 다치진 않았는지 확인하다가, 문득 등골이 오싹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관람객들과 사회자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망했네.’

생각하기 무섭게 할릭이 나를 어깨에 들쳐 메고 자리에서 도약했다. 서둘러 모습을 감출 셈인 듯했다. 나는 행사장을 한참 벗어난 장소까지 다다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할릭의 목을 졸라댔다.

“야! 내 약물은 어쩌고!”

‘이왕 참가까지 한 거 약물도 얻었으면 좋았을 텐데!’

행사장이 있었던 곳을 바라보며 애통해하자, 할릭의 옆으로 뛰어온 아다르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저리 가!”

또 무슨 말을 하며 성질을 긁으려고 저러는지 모르겠어서 대뜸 화부터 내니, 아다르가 투덜거렸다.

“약물도 챙겨왔는데 거 너무하네, 진짜.”

“정말?”

나는 시무룩하게 입꼬리를 내리다 말고 홱 고개를 틀었다. 정말로 그의 손에 약물이 들려 있었다.

“이리 줘.”

손을 뻗기 무섭게 아다르가 손을 위로 들었다. 나는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어 눈을 불태웠다.

“뭐 하는 거야?”

“뽀뽀해주면.”

그놈의 뽀뽀, 뽀뽀, 아주 노래를 부른다. 하여튼 얄밉고 치졸하기로는 제일가는 놈이었다.

나는 인적이 없는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할릭의 옷자락을 잡아당겨서 자리에 멈추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내려와 아다르의 멱살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놀란 토끼처럼 기겁한 아다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술을 부딪쳤다. 그리고 물어뜯듯이 윗입술을 치아로 우물우물 씹은 다음, 그 안에 숨어있는 뜨거운 혀를 찾아 강하게 빨아들였다. 더불어 도톰한 아랫입술도 몇 번 치댔다.

쭈압,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떼는 순간까지도 아다르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넋이 나간 그를 밀어내고 손에 들린 약물을 홱 낚아챘다. 투명한 유리병과 상큼한 노란색 약물을 보자마자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저 그런 약물이 아닌가 본데?’

나는 뚜껑까지 따서 향을 맡아보았다. 적어도 서너 가지 약초가 뒤섞인 냄새가 났다. 기대하지 않았던 약물에서 예상외의 가능성이 발견되자 사랑이 무럭무럭 솟았다.

나는 약병에 뺨을 맞대며 흐응, 길게 콧소리를 내었다. 행복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약물한테 졌네요.”

“그러게. 졌네.”

내가 하는 양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할릭과 스노아가 주거니 받거니 감상평을 늘어놓았다. 아다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가리며 할릭을 째려보았다.

“너희 조용히 안 해?”

“그러게 왜 심술을 부려.”

스노아에게 청결마법을 받아 보송보송해진 할릭이 끌끌 혀를 찼다.

“그러니까 약물한테 밀리지.”

“밀린 거 아니야!”

“그럼 저건 뭔데?”

할릭이 나를 가리켰다. 나는 유리에 광이 나도록 소매로 문지른 후, 통통하고 동그란 약병의 배 부분에 쪽쪽 뽀뽀를 하는 중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아다르가 조용해졌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첼러스가 위로하듯이 그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약초를 사러 가자!”

나는 도시로 온 목적을 떠올리고 힘차게 선언했다.

“여기서 제일 큰 약초방으로!”

지금 당장 많고, 다양하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귀여운 약초들을 보고 싶어졌다. 스노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장 크고 유명한 약초방이 있었다.

나는 여태 보아왔던 약초방과 다르게 귀족의 저택처럼 으리으리하고 세련된 건물을 올려다보며 육성으로 감탄했다.

“우와. 이렇게 큰 약초 가게는 처음 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용사들과 함께 약초 가게로 우르르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쌉싸름한 향기가 코를 에워쌌다.

약초를 자주 만지다 보면 향기만 맡아도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곳의 약초들은 모두 품질이 우수한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이 쏙 빠져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생각보다 종류가 적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뭐지? 생각보다 적은데.”

“희귀한 것들은 모두 따로 보관 중이랍니다.”

그때 계산대에 서있던 가게의 종업원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특별히 찾으시는 것이 있나요?”

“목록 같은 건 없나요? 보면서 고르고 싶어서요.”

“물론 있지요.”

그가 계산대 위로 목록 표를 꺼내며 설명했다.

“목록 중에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약초가 있지요?”

나는 작은 노란색 별이 달린 약초 이름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지금 저희에게 없지만, 예약하시면 약속드린 기일 내에 입수할 수 있는 약초랍니다.”

“그렇군요.”

“예약을 원하시면 오른쪽 공란에 성함을 적고 값을 지불하시면 돼요.”

“오오…….”

목록 중에 나조차 별로 본 적이 없는 약초가 몇 개 보였다.

‘큰 약초 가게는 이런 것도 파는구나.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여기에 들러야겠다.’

흥미롭게 목록을 훑어보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약용 공란으로 시선이 갔다. 많은 치료사들이 이곳의 약초방을 들른다는 말은 사실인 듯, 다양한 이름들이 보였다.

그것을 쭉 훑어보던 나는 한 이름을 발견하고 헉, 헛숨을 들이켰다. 열심히 약초를 고르다가 갑자기 기겁하니, 종업원이 의아하게 목록 표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가 놀란 이유를 지레짐작하며 입을 열었다.

“아, 손님도 아시는군요? 아주 유명한 황실 치료사님이시죠.”

“화, 황실 치료사요?”

“네. 지금은 예전만큼 유명하지 않으시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이룬 분이세요.”

종업원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므리나 이소리하 님이요.”

널따란 가게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내부를 구경하던 용사들의 시선이 단숨에 이곳으로 집중되었다. 나는 목 졸린 음성으로 되물었다.

“이곳을 자주 찾나요?”

“그럼요. 이소리하 님 말고도 많은 치료사 협회 분들이 찾으신답니다.”

치료사 협회.

문득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아서 비틀거리자, 아르모어가 내 어깨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시선을 맞추었다. 손은 연신 내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진정해라.”

“괘, 괜찮아요.”

“어디 아프신가요, 손님?”

종업원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식은땀으로 흥건해진 이마를 소매로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빈혈이 있어서…….”

“아, 그러시군요.”

“저,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그럼 므리나 이소리하도 치료사 협회 회원인 건가요?”

그러자 종업원이 아주 이상한 질문을 들은 사람처럼 미간을 좁혔다.

“네? 치료사면 당연히 협회 회원이시죠.”

“아…….”

“죄송하지만, 손님에 관한 건 이 이상 말씀드릴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나는 가시가 걸린 것 같은 목구멍에 침을 밀어 넣으며 대충 아무 약초나 가리켰다.

“이거 열 묶음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종업원이 뒷문으로 사라졌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계산대를 잡고 버티다가, 의자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첼러스의 손을 따라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그러쥐었다.

사방이 절벽인 좁은 땅 위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아 숨이 가팔라졌다.

‘황실 치료사가 됐다고? 그 여자가?’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높은 자리를 추구했다. 명예욕이 많아서 수인족을 대상으로 한 실험 말고도 다양한 연구를 했다. 공동연구를 함께 한 숱한 사람들 중 한 명이 스승님이었다.

‘스승님도 처음엔 므리나 이소리하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셨어.’

그녀는 명예와 권력에 욕심이 많은 만큼 다른 사람들에겐 철저하게 본성을 숨겼다. 우아하고 교양 있는 말투를 표방하며 환자를 안쓰럽게 여기는 연기까지 불살랐다. 그녀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측근이거나 피실험체인 수인족들뿐이었다.

황실 치료사로 발탁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황실 치료사면 마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겠어.’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치료사 협회 회원이면, 앞으로 마주칠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손님? 주문하신 약초 나왔어요.”

“아, 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계산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값을 지불한 뒤 약초주머니를 챙기고 터덜터덜 가게를 나섰다. 들어왔을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혼돈의 도가니에 갇혀버린 기분이었다.

“카카나, 괜찮으십니까?”

잠깐 앉아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공원의 벤치부터 찾았더니, 첼러스가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으며 물었다. 솔직히 전혀 괜찮지 않았다. 속이 엉망이었다.

“이소리하가 황실 치료사래.”

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그 끔찍한 인간이 정식 치료사가 된 거야. 하!”

갑자기 헛웃음이 터졌다.

나는 끄윽거리는 소리를 내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러다 기운이 빠져서 입을 다물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울음이 차올랐다. 나는 눈가를 꾹꾹 짓누르며 중얼거렸다.

“나는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시험 자격을 취득했으니, 아마 이 소식이 이소리하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거야.”

“카카나.”

“시험을 치를 때 감독관으로 들어오면 어쩌지?”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쪽팔리고 속상해서 신경질적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그 여자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약물을 만들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실수할 때마다 채찍에 맞아가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던 나날들이 뇌리를 스쳤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손가락이 다 헐도록 빻았던 약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인체 실험. 내 몸을 타고 돌던 불 같은 독극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내가 지린 배설물 위에서 바르작거리며 한계까지 주입되는 독을 견디기 위해 이를 악물고 끙끙거렸던 밤.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몰래 약초를 숨겼다가 고문처럼 이어지던 형벌. 그 고통 위에 그녀의 눈이 있었다. 친구들의 몸에 남겨진 시퍼런 멍처럼 소름끼쳤던 검보라색 눈망울.

그녀는 그 눈을 악귀처럼 번뜩이며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지켜보곤 했다. 그런데 똑같은 짓을 하라고? 므리나 이소리하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험을 치르고 약물을 만들라고?

이게 악몽의 재현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나는 탈출에 성공한 전날 밤까지 그녀가 요구한 약물을 만들다 지쳐 쓰러지는 삶을 살았다. 그 약물로 친구들을 살릴 수 없었다면, 나는 약초를 증오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유일한 무기이자 나를 이때까지 살아남게 해준 동아줄, 약초.

약물. 약제사. 치료사.

황실 치료사.

그리고 그 위에 또다시 나타난 눈. 내 고통을 지켜보는, 므리나 이소리하의 악귀 같은 검보라색 눈.

“카카나, 숨 쉬어. 응?”

할릭이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초조하게 타일렀다.

나는 막힌 숨을 조심스럽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턱에 힘을 주고 나를 바라보는 듯하던 첼러스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꼭 끌어안았다. 막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풍기는, 향기롭고 따스한 비누향이 정신을 일깨웠다.

그의 품에 머리를 박고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눈물에 젖은 얼굴을 가리고 소리 없이 울었다. 이까짓 일에 충격을 받고 질질 짜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황실 치료사면 지위가 높으니, 고작 입회 시험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겁니다.”

첼러스가 내 등을 두드리며 다정하게 위로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게다가 황실 소속인 거잖아.”

좌불안석인 얼굴로 내 주위를 정신없이 뱅뱅 맴돌던 아다르가 급하게 첨언했다. 그의 거친 손바닥이 첼러스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내 손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마족이랑 한 패일 확률이 높을 거야.”

“그래. 우리가 마족을 해치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야.”

할릭이 아다르와 말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나를 진정시키려는 용사들을 바라보다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렵고 끔찍한 기분은 여전했지만, 조금쯤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첼러스가 제 품에 안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얘기했다.

“지켜드리겠습니다, 카카나.”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허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딱딱한 배에 이마를 기대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지킬 거야.”

이번엔 잃고 싶지 않았다. 죽어가는 동생을 무력하게 지켜보며, 절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때처럼…….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다시 한번 읊조렸다.

“내가, 전부 지켜줄 거야.”

***

시험 날이 가까워졌다.

비브로스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떤 치료사들이 감독관으로 오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중에 므리나 이소리하는 없었다. 나는 큰 관심이 없는 척 넌지시 질문해서, 해당 사실을 여러 번 확인받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내겐 치료사라는 명패가 반드시 필요했다. 므리나로부터 용사들을 지키고 그녀에게 대항할 힘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을 늘려야 했다.

특별한 절차를 밟아 시험자격을 얻었으므로, 나는 다른 수습치료사들과 시험과정이 달랐다. 시험장에 들어가 필기시험을 치르는 것까진 같다. 하지만 치료사들이 요구하는 치유연금물약을 즉석에서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이 달랐다.

다른 수습치료사들은 이틀의 시간이 주어지고 그 안에 성공하면 된다고 했다.

“필기시험에서 탈락하면 어쩌죠?”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내게 비브로스는 이렇게 얘기해주었다.

“협회의 필기시험은 내가 내는 쪽지시험보다 쉬울 거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걱정근심을 대부분 내려놓았다.

치료사가 되기 위해 협회를 찾은 사람들의 나이대는 천차만별이었다. 척 보기에도 어려 보이는 사람들은 손에 꼽았는데, 그중에 몇 명은 내게 깊은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네가 그 소문의 수습치료사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콜리나 살라소나에 대한 추억이 물씬 떠오르는 질문이었다. 나는 사건 사고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싹을 노련하게 잘라냈다.

“아니.”

“그렇구나, 미안.”

어린 치료사가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멀리 걸어갔다.

‘어떻게 하면 내가 편해질지 감이 잡히네.’

훈련 시켜줘서 고맙다고 콜리나에게 편지라도 써야 하는 건가. 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의 관심은 피곤했지만, 오래 시달리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저녁을 먹고 나면 바로 시험이었지? 빨리 별장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다른 수습치료사들이 이틀 동안 이곳에 붙잡혀서 미리 공지된 약물과 싸우는 동안, 나는 약물 하나를 만들고 복귀하면 끝이었다.

간절한 소망과 달리 시간은 빨리 가지 않았다. 저녁은 하필 고기로 된 음식이었다. 나는 아다르가 싸준 간단한 야채 도시락을 영혼 없이 해치우면서 시계만 쳐다보았다. 저녁 대신이라기보단 간식이었지만, 덕분에 굶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실기시험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아그리마의 저택에서 만들었던 그로우본을 생각하자.’

따지고 보면 그때가 지금보다 더 긴장되고 무서웠다. 연구실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쳤다간 그녀가 비브로스와 나를 둘 다 죽일 기세였기 때문이다. 시퍼렇게 빛났던 아그리마의 도깨비 눈을 떠올리자 실기시험이 별것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거짓말처럼 깃든 마음의 평화를 느끼며 시험장에 입실했다.

“오오, 저 학생이 바로…….”

“그 샥스의 제자라니, 얼마나 지독한 녀석일까 싶었는데 한참은 어리구만.”

“본래 재능과 천재성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오는 법이잖소.”

“리커버리 약물은 혁신적이었지.”

내가 들어서자마자 시험장이 시끌시끌해졌다. 나는 조제 도구와 약재들이 준비된 공간을 살피면서 적당한 곳에 가 섰다.

‘부담스러운 배치네.’

리커버리 약물이 워낙 거센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감독관이 많을 거라고 얘기를 듣긴 했다. 너도나도 보고 싶다면서 감독관을 자처한 탓이었다. 그러나 설마, 조제 공간 앞뒤로 감독 좌석이 빼곡할 줄은 몰랐다.

‘내가 무슨 무대 위에 선 서커스단도 아니고…….’

가히 길거리 공연을 방불케 하는 인기다. 저리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으려니 신경줄이 실시간으로 가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약물을 만들면 되죠?”

시간을 끌었다간 토할 것 같아서 초조감에 한 말이었는데, 뒤늦게 너무 자신만만하게 물었나 싶어졌다.

[가서 호구처럼 머리끄덩이 잡혀서 이리저리 휘둘리지 마! 당당하게 하고 와, 당당하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한 비브로스의 영향이 틀림없었다. 심지어 스라일리 경매장에서 영혼의 연기를 불살랐던 탓에, ‘척’해야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때의 인격이 튀어나왔다. 지금처럼 말이다.

내 과감하고 싹수없는 말투에 감독관들이 저 맹랑한 것 좀 보라며 수군거렸다.

“역시 비브로스 샥스의 제자답구만. 의심한 내가 멍청했지.”

“그 인간 밑에서 버텼으면, 보통 독한 게 아닐 거요.”

“어떤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갈수록 궁금해지는군.”

‘너희들이 원하는 실력 마음껏 뽐내 볼 테니까 제발 문제를 내!’

바닥에 엎어져서 사정하고 싶어졌다. 다행히 가장 권력이 세 보이는 감독관이 장내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카니 페트리 수습치료사.”

“네.”

“학위도 없이 치유연금물약을 개발해 시험자격을 얻은 사람은 자네가 최초일세. 물론 알고 있겠지만.”

‘아니요? 최초인 건 모르고 있었는데요?’

나는 눈을 부릅뜨고 굳었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하하, 물론 알고 있었습니다.”

깐깐해 보이는 안경을 위로 밀어 올리며 잠시 침묵한 감독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자네가 정말 본인의 힘으로 약물을 개발한 게 맞는지, 치료사의 패를 갖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야 해.”

“네.”

“새로운 약물을 개발할 능력이 있다는 것은, 조제법에 나와 있는 가장 어려운 약물도 만들 수 있다는 뜻이지. 동의하나?”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받치며 요구했다.

“블러드인크리즈 약물을 만들어보게.”

가장 앞줄에 앉아있는 치료사들은 이미 얘기가 된 듯 태연한 얼굴이었으나, 뒷줄부터 헉 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제가 맞게 들었는지 의심스러운 듯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들이 왜 저렇게 기겁하는지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떨어져라 이 소리네.’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블러드인크리즈를 요구한 감독관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만들 수 있으면 만들어 봐, 그런 얼굴이었다.

[잘 들어, 카니. 그 지긋지긋한 것들은 리커버리 약물을 믿지 않을 거야.]

비브로스의 충고가 떠올랐다.

[무슨 수로 안 믿어요? 사용하면 효과가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을 텐데.]

[아니, 네가 만들었다는 걸 믿지 않을 거라고.]

그는 환멸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분명히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할 거야. 학위가 없는 수습치료사는 취급도 안 하는 놈들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요?]

[네게 터무니없는 약물을 만들어보라 시키겠지. 실패 없이 한 번에 성공해야 하니, 그때만큼 네 발을 걸어 넘어트리기 좋은 기회가 없거든.]

당시에도 악질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당해보니 기분이 끝내줬다. 나도 모르게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감독관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러니까 난도가 최악인 것부터 만드는 연습을 하자.]

[그게 뭔데요?]

[블러드인크리즈 약물.]

그들이 아무리 잘난 머리를 굴려 봤자 비브로스의 손바닥 안이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고 싶은 심정을 애써 억누르며 솥에 물을 부은 뒤 불을 붙였다. 그리고 약장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피나무 껍질을 챙겨와 시루밑을 넣은 약시루 위에 얹었다.

블러드인크리즈는 피를 많이 흘린 환자에게 먹이는 응급 물약이었다. 만드는 방법은 별것 없지만 쓰이는 마나석이 몹시 예민하고 약재 또한 변질이 쉬워서 만들기 어려운 축에 속했다.

‘물론 리커버리 약물이 제일 어렵지만.’

나는 약시루에 피나무 껍질을 넣으며 생각했다.

블러드인크리즈는 사실 비브로스가 꼽은 최악의 약물 중에서 그나마 제조하기 쉬운 녀석이다.

나는 레이즈 마법이 걸린 마나석과, 슬로우 마법이 걸린 마나석을 하나씩 챙겨왔다. 레이즈가 워낙 성급한 성질이 있는 탓에, 두 가지 마나석을 함께 녹여내야 했다.

솥 위에 피나무 껍질을 넣은 약시루를 올리고 찌는 동안, 베이스가 될 약물을 만들었다. 마지막엔 약작두로 완성된 피나무 껍질을 일자로 자르고 베이스 약물에 첨가했다.

“버리는 부분 없이 약재를 아주 잘 다루는군.”

“한두 번 만들어 본 게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오?”

“동의하는 바네. 약재들 손질하는 것 좀 보게. 수십 년간 칼만 잡은 요리사처럼 능숙하군.”

지켜보던 감독관들이 서로 쑥덕거리며 얘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못 들은 척하며 마나석 두 개를 동시에 넣었다. 그러자 기함한 감독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저저! 잘하다 왜 갑자기 무식한 짓을 하는지!”

“약물이 터지는 것도 시간문제겠구만. 에잉, 쯧쯧.”

마나석 두 개를 동시에 넣으면 마나 충돌로 약물이 터질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나는 아르모어와의 특훈으로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상태였다. 그걸 알 리 없는 감독관들이 도통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앞줄에 앉은 감독관이 주의를 주었다.

“조용히 하게.”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나는 막대를 이용해 대량으로 흘러나오는 마나를 느끼면서 내용물을 휘저었다.

‘어라?’

그러다 이상한 점을 알아채고 미간을 좁혔다.

‘마나석 하나가 왜 이러지? 흘러나오는 마나량이 너무 적은데.’

나는 약물을 젓는 속도를 늦추며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레이즈 마나석에 하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 젠장. 슬로우도 아니고 하필이면 레이즈 마법이잖아.’

레이즈는 혈액을 증가시키는 블러드인크리즈 약물의 핵심이었다. 이대로면 무조건 실패였기에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실패하고 마나석에 하자가 있었다고 주장해봤자 감독관들이 믿을 리 없어.’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레이즈 마나석을 하나 더 넣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레이즈와 슬로우 마법이 벌써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러면 더 심해질 거야.’

이 자리에 서기까지 어떤 개고생을 했는데 물거품이 되기 직전이었다. 나는 속상하고 화가 나서 어금니를 악물었다.

약재에 생긴 문제였다면 어떻게든 해결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나석 하자의 문제라 날고 기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치료사가 되어도 마법에 얽매여서 이렇게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니.’

치유연금물약을 만들 수 있는 치료사라는 거창한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무력하지 않은가. 나는 포기하고 약물 젓기를 멈출까 하다가,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해볼까?’

성공할지, 심지어 약물에 도움이 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손 놓고 실패의 길로 가만히 미끄러지는 것보단 발악이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작정하고 내 안에 있는 마나를 싹싹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보유 중인 마나량이 적은 탓에 찌꺼기까지 그러모아도 한 주먹도 안 되는 양이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막대를 쥔 손으로 끌어왔다.

‘제발…….’

이렇게 많은 양의 마나를 주입해 본 적이 없어서 진땀이 뻘뻘 흘렀다. 약물을 오래 가열해서 좋을 게 없으므로 서둘러야 했다.

소량의 마나가 다시 내 몸 안으로 튕겨 돌아오긴 했지만, 대부분이 막대로 넘어갔다. 그간 치유연금물약을 많이 만든 덕분이었다.

‘뿜어.’

나는 깨물린 입술에 피가 나도록 힘을 주며 질끈 눈을 감았다.

‘뿜어!’

마나들이 꼼짝도 하지 않고 막대에 들러붙어 있으려 했다. 나와 연결되어있는 마지막 연결고리를 놓치기 싫다는 듯이.

[네가 주인임을 잊지 마라. 감히 널 휘두르게 두어선 안 돼.]

아르모어의 음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눈알이 빠지도록 막대를 노려보았다.

‘난 이번 시험을 반드시 통과해야 해.’

마음 안에 잔류해 있던 일말의 망설임까지 불태워 없애고 단호하게 마나를 밀어낸 순간, 막대에 뭉쳐 있던 마나들이 약물로 힘차게 뻗어 나갔다. 나는 두 손으로 막대를 움켜쥐고 재빨리 약물을 저었다. 한 번에 주입된 마나량이 많아서 고이는 것이 없도록 꼼꼼하게 휘저어야 했다.

‘내 마나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레이즈 마법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시도만 해보는 거야, 시도만.’

나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어깨의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계속해서 약물을 저었다.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생각하면 할수록 더 서글퍼지고 있었지만, 축축해지는 눈알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리고 떨리는 고개를 숙여 부글부글 끓고 있는 약물의 색깔과 냄새를 확인했다.

붉은색.

비린 생선 냄새.

겉으로 보기엔 블러드인크리즈의 특징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일단은 완성이었다.

나는 막대를 쥐고 조리대를 짚었다. 진이 빠져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여서 뜨거운 약물 일부를 마법 용기에 부었다. 열이 식어 미지근한 온도가 되자 약병에 담아 감독관에게 약물을 내밀었다.

여유를 부리던 초반과 달리 곧 쓰러질 사람처럼 초췌해진 나를 감독관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죽을 것 같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젠 어떤 결과가 나와도 받아들여야만 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군.”

그녀가 천장의 조명에 약병을 비춰보며 중얼거렸다.

“효능은 장담할 수 없으나 약물을 터트리지 않고 한 번에 만들어 내다니, 자네에게 왜 학위가 없는지 의아할 정도야.”

그녀가 약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귀에 걸린 마도구에 대고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뒷문을 통해 죽어가고 있는 실험용 흰 토끼가 들어왔다. 경과를 지켜볼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 상자에 들어있었다. 감독관이 상자 안으로 손을 넣더니, 약병을 기울여 블러드인크리즈를 토끼의 입에 흘려 넣었다.

십 년 같은 일 분이 흘렀다.

나는 쓰러진 토끼의 털 한 올의 움직임까지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토끼가 언제 축 늘어져 있었냐는 듯이 귀를 바짝 세웠다.

‘움직였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켜 상자 안을 돌아다녔다. 나는 믿기지 않아서 토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맙소사. 정말 한 번에 성공할 줄이야.”

“게다가 일 분만에 효능이 돌지 않았소. 저렇게 효능이 빠르게 나타나는 블러드인크리즈는 처음 보는군.”

“속도만 보면 2성급 약물 아닙니까? 사람에게 적용해도 같은 속도일지 궁금하군요.”

감독관들이 감탄을 터트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성공했어.’

시험에 통과해서 기쁜 마음보다 얼떨떨하고 당혹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정말 효과가 있다고? 레이즈가 아닌, 내 마나만으로?’

솔직히 실패할 줄 알았다. 마법이 아닌 마나만 흘려 넣은 게 아닌가.

심지어 내 마나는 가벼운 상처만 치유하는 정도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약물이랑 섞이면서 힘이 강화된 건지, 아니면 소량이나마 섞여 있던 레이즈 마법의 잔여물 덕분에 성공한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흠…….”

쌩쌩해진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감독관이 내게 걸어왔다. 어려운 약물부터 요구하기에 인성이 글러먹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웬일로 감독관의 노쇠한 눈에 기특해하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자네의 미래가 기대되는군.”

합격이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다가, 의자의 등받이를 붙잡아 간신히 균형을 되찾았다. 나의 다사다난했던 치료사로의 여정이 비로소 끝을 맺고 있었다.

나는 치료사 협회 본부의 뒷문으로 빠져나와, 근처에 있는 작은 언덕을 올랐다. 약속된 장소에 스노아가 이미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가 내 희멀건 얼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카카나? 안색이 왜 그러죠?”

“아…….”

나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퀄리티미엄에서 맡았던 것과 비슷한, 청량하고 순수한 자연의 향기가 났다. 그 향을 흠뻑 들이마시며 지친 마음을 달랬다.

놀란 사람처럼 숨을 들이켠 채 호흡을 멈추고 있던 스노아가, 섬세한 손길로 내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무슨 일 있었나요?”

“일단 별장으로 돌아가자.”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별장 1층 홀에 서 있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폭죽이 터지며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채 기계적으로 수술을 흔들어 재끼고 있는 저택의 사용인들을 바라보았다.

“치료사가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탄탄대로를 걸으시겠군요!”

“성공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이번에는 ‘제자님 치료사 되신 날’이라는 대문짝만 한 현수막이 벽에 나붙어 있었다. 비브로스가 공연의 클라이맥스를 알리는 주인공처럼 중앙계단을 내려오며 두 팔을 벌렸다.

“사랑스러운 내 제자! 고생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저 아직 합격했단 소리 안 했어요, 교수님.”

“그래서. 불합격했냐?”

“아뇨.”

“거봐! 합격했잖아!”

그가 믿고 있었다는 듯이 내 등을 두들겼다.

“그런데 왜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냐? 거기 놈들이 너에게 무슨 몹쓸 말이라도 하든?”

비브로스가 당장이라도 협회로 돌아가 사람 한 명 죽일 기세로 물었다. 여기서 농담했다간 돌이킬 수 없겠다 싶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랜만에 많은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피곤해서요.”

나는 내 어깨에 올라와 있는 그의 손을 슬그머니 밀어 떨어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이만 방에 들어가 쉴…….”

“피곤할 땐 역시 단 게 최고 아니겠냐!”

비브로스가 해맑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럴 줄 알고 선물을 준비했다!”

‘쉬게 해주는 게 선물이에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를 따라 다이닝룸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곧 후각을 자극하는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에 번쩍 눈을 떴다. 기다란 테이블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달콤한 요리가 진열되어 있었다.

딸기 케이크부터 초콜릿 쿠키, 고소한 빵, 호박파이까지 없는 게 없었다.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키며 홀린 듯 의자에 앉았다.

“요리는 아다르가 수고해 주었다!”

비브로스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근처까지 걸어온 아다르가 음료수를 놓아주며 윙크했다.

“힘 좀 썼지.”

“너 제빵도 할 줄 알아?”

“내가 못하는 건 없어.”

“어련하겠어.”

아다르가 킥킥 웃으며 포크로 케이크를 떠서 들이밀었다.

“자, 아.”

평소라면 무슨 창피한 짓이냐며 거부했겠지만, 너무 맛있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가 케이크를 쏙 넣어주고 목이 막힐까 봐 음료수까지 가져다주었다.

“진짜 맛있다.”

나는 과일주스를 삼켜내고서 감탄했다.

“입맛에 맞아 다행이네. 당근 케이크야.”

“당근으로 케이크를 만들 수 있어?”

“당연하지.”

감탄하며 군것질거리들을 입으로 가져와 우걱우걱 씹었다. 그가 천천히 먹으라며 내 등을 두들겨주었다. 거짓말처럼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배불러서 더는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음식을 먹었다. 달아서 혀가 아릴 지경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달콤한 음식 덕분인지, 아니면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교수님과 용사들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행복했다.

이게 정말 내 삶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

나는 오늘도 마나를 수련하기 위해 아르모어의 방을 들렀다. 마나를 수련하다 보니 자연스레 어제 겪었던 일들이 대화의 주제로 떠올랐다.

“레이즈 마나석 대신 마나를 넣었는데, 성공했단 말이냐.”

아르모어가 제가 똑바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듯, 담담한 어조로 물어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홀짝였다.

“신기하죠? 그래서 어제 포션을 만들어 봤어요. 정제수에 제 마나만 섞은 포션이요.”

“그런데?”

“별 효능이 없더라고요. 그냥 얕은 상처를 치유해주는 정도?”

아르모어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홍차를 들이켰다.

나는 턱을 괴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걸까요?”

“정제수가 아닌 약물에 마나를 섞어본 적이 있나?”

나는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아뇨, 그건 안 해봤어요.”

“그렇게 해봐라.”

“마나석 대신으로요?”

“그래.”

아르모어가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점잖게 말을 이었다.

“네 마나가 약물의 효능에 맞추어 기능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는 수도 있으니.”

“와,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상상만으로 행복해져서 히죽 웃었다.

“그러면 마나석이나 마법이 전혀 필요 없잖아요. 그냥 제 마나만 넣으면 되니까.”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군.”

아르모어가 귀신같이 짚어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환상물약사전보다 꿈같은 얘기인걸요.”

“그래도 확인 작업을 해두는 게 좋다. 알아두어야 급할 때 사용할 것 아니냐.”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귀담아듣는 눈치가 아닌 걸 그도 알았는지, 아르모어가 입을 가리고 후후 웃었다.

“만약 내 가정이 맞는다면, 그대는 마나를 더 수련해야 할 거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졌다. 질색하며 입을 열었다.

“왜요?”

“마나가 부족할 것이 아니냐.”

아르모어가 내 단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법사들이 마나가 부족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듯이 말이다.”

“조금 웃기네요.”

나는 킥킥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럼 저는 마나 흡수하는 법을 모르니까 1서클 마법사 정도 될까요?”

“기본적인 마나 운용은 할 줄 아니, 그대의 말대로 1서클 정도 되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모어가 책장에 꽂혀 있던 마나 운용 관련 책 한 권을 꺼내 자리로 돌아왔다. 내게 마나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하나둘씩 사들인 책이었다.

“이 책을 빌려줄 테니, 시간이 날 때 읽어봐라.”

나는 그가 건네는 책을 품에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모어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나를 흡수하기 위해선, 그대 몸에 흡수되는 마나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몸 안의 마나량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지.”

“흐음, 굳이 마나를 흡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약물에 마나를 사용해보고 내일 다시 내게 오거라.”

아르모어가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 뺨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때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으니.”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마나 흡수하는 법까지 배울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다.

그랬는데…….

“미친 건가?”

나는 약물을 들여다보며 거의 비명에 가까운 혼잣말을 했다.

“아니, 진짜로 미친 건가?”

나는 테이블 위에 약물을 올려놓고 한참을 노려보았다.

마법을 녹여내는 대신 내 마나를 넣었을 뿐인데, 약물의 색과 냄새가 합격점이었다. 그걸 보고 믿기질 않아서 뼈가 부러진 폭시 친구를 데려와서 먹여보기까지 했다. 효능까지 완벽했다.

나는 약물을 싸 들고 아르모어의 방으로 찾아가 문이 부서지도록 두드렸다. 이 양반은 처음부터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아르모어!”

지금만큼은 그의 속 터지는 움직임을 참을 수 없어서 우렁차게 이름까지 불러댔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모어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나는 성난 황소처럼 그의 몸을 어깨로 밀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효과가 있었어요!”

눈을 거의 반쯤 뒤집은 채 소리쳤다.

“진짜 효과가 있었다니까요?”

“무엇이 말이냐?”

아르모어가 태연하게 물었다. 다 알고 있지만, 나를 진정시키려고 부러 물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되레 더욱 흥분해서 날뛰었다.

“약물이요!”

문을 닫고 비스듬하게 서 있는 아르모어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위로 바짝 쳐올리고 얘기했다. 그리고 그의 코앞에서 약물을 흔들었다.

“마나를 담는 것만으로 약물이 만들어졌다고요!”

“진정하거라.”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나는 이마에 손을 댄 채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돌았다.

“제가 레스토레이션 마나석을 약물에 녹여내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는지 아세요?”

“…….”

“이제야 좀 요령을 알 것 같은데, 전부 필요 없어졌잖아요! 젠장! 제 마나만 넣으면 된다고요!”

나는 손에 들린 약물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커버리 약물을 만드는 것까지 성공했어요! 이건 미친 일이에요!”

아르모어가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인 내 등을 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리며 넌지시 질문했다.

“그래서 이 상황이 허무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아뇨?”

나는 생뚱맞은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좋아요. 좋다고요!”

나는 그의 두 손을 움켜잡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물론 아르모어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나만 어깨춤을 들썩이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혼자 꺄르륵 웃었다가 중얼거렸다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입을 놀리던 나는 그와 춤을 추다 말고 정색했다.

“그 대신 마나량을 신경 써야 하네?”

순식간에 기분을 잡쳤다.

나는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리며 약물을 마법가방에 주섬주섬 담았다. 그리고 가만히 입꼬리를 위로 끌어올린 채 날 보고 있는 아르모어를 티 테이블로 끌어와 앉히고 마주 앉았다.

“제 마나량을 늘려 줘요, 아르모어. 절 어떻게 굴리시든 상관없어요.”

“…….”

“저는 마나가 필요해요. 완전 많이. 이 한 줌도 안 되는 마나 가지곤 제 욕심의 반의반도 채울 수 없다고요.”

나는 비장하게 눈을 빛내며 얘기했다.

“세상 모든 사람을 한 번씩 먹이고도 남을 만큼 많은 약물을 만들고 싶어요.”

“욕심이 대단하군.”

“그럼요. 그 정도는 되어야죠.”

나도 모르게 단전으로 손을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하면 마나핵이 형성되는 곳이었다.

이 마나핵에 보유하고 있는 마나량에 따라 서클이 나뉜다고 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10서클로 만들고 싶었다.

‘그건 당연히 무리겠지?’

나는 내 허무맹랑한 생각이 웃겨서 혼자 웃었다가, 고개를 젓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 마나라면 복종포션의 해독제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

“아, 이소리하 님!”

황궁의 복도를 걷던 므리나 이소리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두툼한 서류를 품에 안은 신입 황실치료사가 존경심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므리나의 뛰어난 약물에 반해 치료사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여인이었다.

므리나의 머루 같은 검보라색 눈망울이 여우처럼 가늘어진 채 여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멍청하게 생겨선.’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 므리나가 싱긋 미소 지었다. 여인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므리나를 올려다보았다.

‘실제로 뵈니까 더 아름다우시다.’

핀으로 느슨하게 고정한 금발이 커스터드 크림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부색은 또 어떤가. 체리처럼 붉은 립스틱을 제 입술처럼 소화하고 있었다.

도도하고 우아한 치료사 므리나는 여인의 오랜 롤모델이었다. 비록 최근엔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만간 대단한 약물을 또 만들 거라고 여인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약방에 가시는 길인가요?”

“그래요.”

므리나가 희미하게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신경질적인 성미를 숨기듯, 곱게 웃은 므리나가 몸을 돌렸다. 여인이 짧은 다리를 날래게 움직여 므리나의 훤칠한 걸음을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므리나의 미간에 기어코 얇은 주름이 잡혔다.

“아직 신입이라, 할 일이 별로 없나 봐요.”

므리나가 웃는 눈으로 물었다.

“무, 물론 이소리하 님보다는 한가하죠!”

여인이 설렘으로 붉게 달아오른 채 대답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할 말 없으면 이만 꺼지는 게 어떠냐는 질문이었지만, 여인은 눈치가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려 애쓰며 얘기했다.

“혹시 소문 들으셨나요?”

“그만…….”

“학위도 없는 수습치료사가 치유연금물약을 개발해서 금패 치료사가 됐대요!”

얼굴에 살얼음이 끼듯, 므리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밑으로 우수수 빠지려는 서류를 황급히 무릎으로 받친 여인이 콩콩 뛰며 말을 이었다.

“최초로요! 저도 방금 들었어요. 치료사 협회가 발칵 뒤집혔다지 뭐예요?”

“…….”

“개발한 약물이 리커버리 약물이라는 거 있죠?”

“리커버리?”

므리나의 목소리가 격정으로 어그러졌다. 포악한 성질머리가 얄팍한 가면을 찢어발기고 고개를 내밀었다. 이번엔 둔한 성격의 여인도 그 변화를 알아챘다.

그녀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므리나가 조용히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보라색 눈에서 잔인한 이채를 발견한 여인이 어깨를 움츠리며 물었다.

“이소리하 님?”

“아, 미안해요.”

므리나가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에 꽂으며 대꾸했다.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있었지만 입은 능숙하게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혹시 어디 안 좋으세요?”

여인이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물었다.

“오늘따라 몸 상태가 영 별로네요. 과로해서 그런가 봐요.”

“죄, 죄송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귀찮으셨죠?”

므리나가 대답 없이 여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5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머무르는 동안 푸르죽죽한 시체의 늪에 빠졌다 나온 기분이 엄습해왔다.

여인의 뒷덜미에 식은땀이 엷게 배어 나왔다.

“아니요. 흥미로운 얘기를 들으니, 활력이 솟네요.”

므리나가 여인이 들고 있던 서류를 반 나눠 들어주며 친절하게 얘기했다.

“더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여인이 눈치를 보듯 므리나의 얼굴을 살폈다. 소름 끼치고 음산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얀 치료사 복식이 잘 어울리는 노련한 여인 한 명이 서 있을 뿐이다.

‘황실에 들어오고 너무 긴장했나 봐.’

여인이 제 몸 탓을 하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어떤 게 궁금하세요?”

“이름이라든가, 외모 같은 것?”

‘리커버리 약물이 뭔지 물으실 줄 알았는데.’

여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대꾸했다.

“이름은 카니 페트리라고 들었어요.”

‘카니 페트리? 카카나와 이름이 비슷한데…….’

므리나가 조용히 경청하자, 여인이 신나서 설명을 이었다.

“다들 약물에만 관심이 있어서, 외모가 어떤지는 들은 게 없어요. 검은 머리의 여인이라는 것 정도?”

“검은 머리가 확실한가요?”

“네.”

‘그래. 수인족이 치료사 협회의 시험을 치를 수 있을 리 없지.’

카카나에 대한 집착을 좀 내려놓는 게 어떠냐는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므리나가 설핏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뛰어난 인재가 들어왔다면서, 제국 제일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라며 감독관들이 극찬했대요. 아, 저는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봐야 해요.”

여인이 므리나의 품에 들려 있던 서류를 도로 가져가며 밝게 웃었다.

“만나 봬서 영광이었어요!”

“수고해요.”

므리나가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여인이 씩씩하게 서류를 고쳐 안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자그마한 체구가 복도 끄트머리로 완전히 빨려 들어갈 때까지 물끄러미 시선을 두던 므리나가 이내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황실의 화려한 복도를 거니는 걸음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므리나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웃음기 한 점 없는 싸늘한 얼굴로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곁가지처럼 뻗은 복도로 방향을 틀어 다른 장소로 옮겨갔다.

그녀는 하인들조차 거의 출입하지 않는 버려진 별궁으로 향했다. 관리가 되지 않아 발목까지 올라오는 잡초마당을 건너자 별궁의 쪽문이 나타났다. 그녀가 쪽문으로 들어간 뒤 응접실로 이어지는 오래된 마호가니 양개문을 열었다.

허름한 응접실에 한 남자가 들어와 이미 앉아있었다. 그가 제 목덜미 지방 사이에 낀 개기름과 땀을 손수건으로 닦다 말고 입가를 씰룩거렸다. 양옆으로 길게 뻗은 그의 콧수염이 우스꽝스럽게 움찔거렸다.

“늦었지 않소.”

“그럼 주제도 모르고 말을 거는 애송이까지 여기로 끌고 와?”

므리나가 표독스럽게 대꾸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지? 황궁엔 웬만하면 걸음 하지 말라고 얘기했을 텐데.”

“역시 모르고 있었군.”

므리나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무슨 말이야.”

“아리마의 죽음을 누가 꾸준하게 캐고 있소. 이러다 꼬리를 밟히게 생겼단 말이오.”

므리나가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짓눌렀다. 뿌옇게 먼지가 내려앉은 조명이 그녀의 역정이 치민 얼굴 위로 흐리멍덩한 빛을 흩뿌렸다.

남자가 연신 땀을 닦아내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몬스터의 발톱처럼 뾰족하게 깎인 그녀의 손톱이 당장이라도 제 두꺼운 피부를 찢어발기고 심장을 파낼 것 같았다.

‘소름 끼치는 여자.’

남자가 속으로만 생각하며 작은 눈을 흘겼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지?”

그녀가 성질을 억누르고 물었다. 폭발하기 직전의 노기를 느낀 남자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얘기했다.

“아, 아리마가 오래전에 죽긴 했지. 나도 이런 소식을 전하고 싶진 않았…….”

“간단하게!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해.”

“나, 나는 그저…….”

므리나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오래된 꽃병을 남자에게 집어던졌다. 그의 귀를 스치고 벽으로 날아간 꽃병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다.

“딸! 딸이 있지 않았소!”

남자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므리나가 아무렇게나 뭉쳐놓은 밀가루 반죽처럼 허여멀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딸?”

“그렇소! 다 큰 아리마의 딸이 제 아비의 주, 죽음을 캐고 있는 것 같소.”

“부녀가 쌍으로 내 신경을 긁지 못해 안달이군.”

므리나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이를 갈았다.

“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아리마는 유명한 치료사였소. 그의 죽음에 으, 음모가 엮여 있다는 게 알려지면 퍽 피곤해질 거요.”

“하…….”

푹, 한숨을 쉰 므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흐트러진 제 옷매무새며, 머리 같은 것을 정돈한 뒤 말했다.

“죽여.”

“주, 죽이란 말이오?”

남자가 마치 제게 사형선고라도 내려진 사람처럼 불안하게 목소리를 떨었다.

“딸까지 죽이면 수상히 여기는 자가 생길 거요. 제법 유명한 연금술사가 된 데다, 권위 있는 치료사랑 친분이 있어서…….”

“닥쳐.”

므리나가 신경질적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남자가 풀칠이라도 된 듯 입술을 딱 붙였다. 므리나가 악에 받친 눈을 번뜩이며 그를 닦달했다.

“죽이는 것 말고, 그 딸을 막을 방법이 있어?”

“…….”

“오래전 사건이야. 그걸 지금까지 매달려서 캐고 있는 거라면, 죽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겠단 소리야. 그러니 숨통을 끊어놓는 수밖에.”

그녀가 제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며 문을 열었다.

“알아서 해결해.”

그리고 응접실을 빠져나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걷다 말고 머리가 지끈거려, 잠시 석조건물의 기둥에 등을 기대고 휴식을 취했다. 분노와 짜증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거슬리는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신경 쓸 일이 많은데, 수상한 금패 치료사에 아리마까지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녀는 제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특히 참지 못했다. 결국, 애꿎은 기둥을 주먹으로 치며 분을 삭였다.

‘대체 언제까지 실험이나 하며 시간을 죽여야 하는 거지?’

새로운 세상의 요직을 내어주겠다던 말만 믿고 달려오길 몇 년이었다. 므리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카카나의 약물 조제법이 뚝 떨어지고 난 후부터, 점점 실추하고 있는 제 명성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국 제일의 치료사는 나야! 내가 맡아놓은 자리라고!’

그녀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선 치료사 협회 간부들의 숨통을 모조리 끊어놓고 싶었다.

[뛰어난 인재가 들어왔다면서, 제국 제일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라며 감독관들이 극찬했대요.]

기둥을 계속해서 친 탓에 상처가 났다. 피가 흐르는 손을 소매 안으로 숨긴 므리나가 후우, 긴 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카카나 같은 성공체를 빨리 만들어야 해. 내가 만들지 못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야.’

그녀는 조금이라도 빨리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알 수 없는 치료사가 감히, 그녀의 자리를 빼앗게 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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