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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제국 제일의 치료사 (1) (24/43)

Chapter 4. 제국 제일의 치료사 (1)

다음 날, 숲에서 약초를 캐는 동안 할릭이 호위를 맡아주기로 했다.

냉기 마도구가 있는 방만 골라서 생활하다가 바깥으로 나오자 숨이 턱 막혔다. 그나마 나무의 그림자들과 풀잎 덕분에 모래바닥보다는 열기가 덜했지만, 습해서 뜨거운 수증기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온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헥헥거리기 시작했다. 벌이었으므로, 마법스크롤 같은 꾀는 부리지 않기로 비브로스랑 약속까지 한 참이었다.

나는 마법가방 안에 얼음물이 든 통이 있나 꼼꼼하게 확인한 후, 걸음을 뗐다.

“안아줄까?”

내 얼굴이 심상치 않게 붉어지자 할릭이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빙빙 돌았다. 이러다 쓰러지기라도 할까 피가 마르는 표정이었다.

“됐어. 내가 해야 의미가 있지.”

“하지만…….”

“벌써 약초가 보이네.”

내 신경이 순식간에 다른 데로 쏠리자 할릭이 한숨을 쉬며 따라왔다.

비브로스가 약초산이라고 그렇게 자랑을 해대기에 어느 정도인가 싶었는데, 군집해서 자라는 약초가 정말 많았다. 약초 백 포기를 캐오라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봐준 듯했다.

“금방 모을 수 있겠는데?”

“그래?”

할릭이 눈에 띄게 반색하며 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톡톡 두드려 닦아주었다.

“물 좀 마실래?”

“괜찮아.”

“더우면 참지 말고 쉬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약초를 캤다.

산을 몇 시간 헤집고 돌아다니자 벌써 거의 다 모았다. 나는 유난히 나무기둥이 굵은 고목나무 근처에 천을 깔고 앉았다. 근처에 개미 몇 마리가 열을 지어 움직이고 있었지만, 더위 때문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는데 기둥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으니,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느껴졌다. 내 체온이 높은 건지, 은은한 바람이 퍽 시원하게 느껴졌다.

할릭이 근처로 걸어와 물통을 내밀었다. 나는 깜짝 놀랄 만큼 차가운 얼음물을 속에 들이붓고 열심히 호흡을 골랐다. 할릭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힘든 게 아니라, 단순히 날씨가 덥기 때문에 맺힌 땀이었다.

“생기가 아주 넘쳐 보인다, 너.”

새삼 용사들의 끝없는 체력이 부러워졌다. 내가 지친 얼굴로 질투하자 할릭이 해맑게 웃었다.

“너랑 둘이 같이 있는 건 오랜만이니까.”

‘하긴 요즘 바빠서 용사들 얼굴을 잘 못 보긴 했어. 아르모어 빼고.’

“더 돌아다닐 수 있겠어? 많이 지쳐 보이는데.”

할릭이 걱정이 밴 눈으로 날 훑었다. 그러다 크고 딱딱한 손으로 내 턱 근처에 맺힌 땀을 훔쳐갔다.

“해가 지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나는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뭇잎을 스쳐온 시원한 바람이 솨아아, 소리를 내며 살결 위로 미끄러졌다. 나는 두터운 양갈래 머리를 위로 들어 올리며 그 밑의 땀을 식혔다.

“밤이 되면 야생 짐승이 더 많이 나오지만, 네가 있으니까 괜찮겠지.”

무심코 한 말에 할릭이 해바라기처럼 웃었다.

“뿌듯한걸.”

“뭐가?”

“내게 의지해주고 있잖아.”

나는 이게 뭐 별거인가 싶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지하는 게 기분 좋은 일이야?”

“당연하지. 예전엔 마음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잖아.”

할릭이 내 손의 흙을 탁탁 털어주면서 말을 이었다. 땀 때문에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인내심 있게 문질러서 털어내 줬다.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는 탓에 그저 내 손의 감촉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의지한다는 건, 안심하고 자기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상대를 신뢰한다는 거니까.”

“…….”

“아주 큰 변화지.”

나는 그에게 들려 있는 내 손을 슬그머니 가져오며 변명했다.

“너희를 신뢰하지 않아서 그랬던 건 아니야.”

할릭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하는 법을 몰라서 그랬을 거야.”

나를 위하는 상냥한 목소리가 어루만지듯 귓바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벅찬 감정으로 활짝 핀 얼굴이 가까이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가 내 양갈래 머리를 대신 잡아서 위로 들어주었다. 나는 뻐근해진 왼팔을 밑으로 내리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깊은 숲과 어울리는 거친 인상에서 짐승이 지닌 특유의 순수함이 엿보였다.

“그러니까 기쁜 거야. 너를 향한 엄격한 채찍이, 조금이나마 사라지게 되었단 뜻이니까.”

주황색으로 물든 햇빛이 그의 척박해 보이는 모래색 머리 위로 따스하게 흘렀다. 그 광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요즘의 여름더위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한, 파이어오팔의 눈동자가 정직한 기쁨을 담고서 타오르고 있었다.

할릭은 거칠고 난폭한 분위기가 몸에 배어 있다. 언제고 그것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토록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단순히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이제야 할릭이라는 사람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건지…….

‘내가 나에게 너무 가혹했나?’

나는 잠잠히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제멋대로인 사람이라고 여겼다. 므리나에게 붙잡혀 있을 때의 삶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막무가내로 행동할 때가 많은 탓이었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아랫입술에 힘을 주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울음기를 짓누르는 긴장된 목구멍이 싸르르 아파왔다.

눈가를 일그러트리고서 어떻게든 촉촉해진 눈가를 말리려는데, 할릭이 갑자기 물었다.

“키스해도 돼?”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아…….”

코앞까지 다가온 할릭의 그림자에 놀라 허리를 물렸다. 뒤통수가 나무기둥에 콩,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키스하고 싶어. 지금.”

‘뜨거워…….’

시선도, 말도, 심지어 햇볕을 막는 그의 그림자까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입술이 다가왔다.

입술을 비집는 열기를 버겁게 안으로 들였다. 이토록 거친 키스는 오랜만이었다.

땀이 옅게 밴 할릭의 굵은 팔뚝을 쥐고서 숨을 헐떡거렸다. 코로 가쁜 숨을 뱉다가,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더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키스는 질릴 만큼 해봤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선 기분이 들었다. 미간을 좁힌 채 나를 탐색하는 할릭의 움직임에서 갈급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성욕을 해치우려는 짐승의 움직임이 아니다. 소중하게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 눈앞의 존재가 누군지 계속 확인하려는 시선, 나를 느끼려고 집중한 미간.

속에서부터 꽉 차오르는, 키스 이후에도 그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발정기를 해결하기 위한 이제까지의 키스에선 당연히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사랑이다.

나를 향한 할릭의 뜨거운 사랑.

그는 좋아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말이 아닌 행위로, 직접적인 접촉으로, 내 피부에 하나씩 새겨 넣고 있었다.

사랑을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 스킨십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게 어떤 건지 이제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컥 흘러내렸다.

“싫었어?”

할릭이 입술을 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그냥?”

“고마워서.”

뜨끈하게 열기가 오른 입술을 이로 꾹꾹 짓씹다가, 마저 얘기했다.

“날 사랑해줘서 고마워.”

그러자 할릭이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짚고 허리를 숙였다. 눈높이가 같아지자, 오롯이 나를 바라보는 주황색 시선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아니, 나야말로 고마워.”

“살려줘서?”

고개를 저은 그가 아주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치료해줬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나진 못했을 거야.”

“왜?”

“우리의 영혼은 소멸하기 직전이었으니까.”

그가 내 눈물자국을 엄지로 조심스럽게 쓸어 닦아주었다.

“너는 신이야.”

제국의 영웅이, 전설 속의 용사가, 그리고 영원을 사는 초월자가 내게 신이라고 한다. 그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할릭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내 손등을 제 입가로 가져가며 부드럽게 키스했다. 할릭이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만의, 사랑스러운 신.”

평안이 깃든 그의 눈빛이 스르르 굴러 내 눈망울에 머물렀다. 오래도록.

나는 그와 시선을 교환하며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

“또 왔군.”

나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아르모어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내 머리를 흘끗 쳐다보는 듯하다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머리는 양호해 보이는데.”

“그게, 혹시 마나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실 수 있나 싶어서…….”

아르모어가 의아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백짓장처럼 새하얀 그의 뺨 위로 검은 모발이 차르르륵 흩어졌다.

“첼러스가 그대를 가르치지 않았나.”

“첼러스랑 스노아랑 뭘 하는 건지 방에서 잘 안 나오더라고요. 둘이 할 말이 많은가 봐요.”

아르모어의 검붉은 눈이 잠시간 가늘어졌다.

“그렇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시선이 허공에 고정된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시간만 뺏을 순 없어서, 얼른 요구사항을 털어놓았다.

“제 마나가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잖아요.”

그가 내게 눈을 굴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속성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요. 아르모어도 마나의 속성을 알기 위해 쓰셨던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랬지.”

“또, 마나의 움직임을 더 잘 느끼고 싶은데 혼자서는 감이 잡히지 않아요.”

아르모어가 문틀에 어깨를 기대었던 자세를 바로 잡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슨하게 엉켰다.

그가 가타부타 설명 없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라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나는 얌전히 손을 잡힌 채 그의 뒤를 따랐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검은 폭포수 같은 모발에서 희미하게 체취가 묻어나왔다. 풍성한 장미향과 옅게 섞인 과일향이 달큰하게 콧방울에 감겼다.

‘조만간 발정기가 시작되겠구나.’

워낙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던 탓에 날짜감각도 흐릿해졌다. 고체 제형으로 만들어두었던 발정기 억제제가 몇 개나 되나 속으로 생각하던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춘 아르모어의 등에 코를 찧었다.

그가 고개를 뒤로 돌려 내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쪽팔리다.

“그, 죄송해요. 딴생각을 하느라…….”

“그러니 자주 넘어지는 것이다.”

아르모어가 점잖게 타박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우리는 비브로스의 별장 뒷마당에 나와 있었다. 햇빛을 막아주는 파라솔과 야외 나무테이블, 그리고 나뭇잎이 쌓인 의자가 몇 개 놓여있었다.

아르모어가 파라솔 바깥으로 나와 있던 의자 하나를 골라 손을 대보더니, 손수건을 꺼내 바닥에 깔아주었다. 그리고 파라솔 안으로 끌어온 뒤, 나를 거기에 앉혔다. 뜨겁게 달아오른 의자가 제법 화끈거렸다.

‘너무 뜨거울까 봐 손수건을 깔아준 건가?’

정말 아르모어다운 배려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근처에 아무도 없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양옆으로 휙휙 돌렸다. 한적한 뒷마당에 나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뭔가 싶어졌으나, 곧 아르모어의 성격을 생각하며 무슨 의도였을지 맞혀보았다.

‘기다리라는 거겠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푹 끓인 면발처럼 퍼져 있는데, 이내 수풀 너머에서 아르모어가 천천히 걸어왔다. 한 손에 산 토끼를 포획한 채였다.

나무 같은 뿔을 머리에 달고서 무표정하게 토끼 귀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지려 했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앉아 있다가, 아르모어가 근처로 걸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 토끼예요?”

“속성은 마나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능이다.”

아르모어가 곧장 설명을 시작했다. 매번 겪어도 익숙해지기 힘든 화법이었다. 그래도 함께한 시간이 꽤 되어서 크게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무테이블 위에 토끼를 올려놓았다.

“마나가 가지고 있는 기능이기에, 마법적 처치 없이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아르모어가 토끼에게 죽지 않을 만큼의 마나를 흘렸다. 전류에 감전된 토끼가 부르르 떨더니 이내 몸을 축 늘어트리며 기절했다.

나는 조금 기가 질려서 아르모어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렇지도 않은 무감한 붉은색 눈을 보자 괜히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럴 때 보면 감정이 없는 사람 같단 말이야.’

“토끼에 마나를 흘려보거라.”

“네?”

“신수에게 마나를 공급했던 경험이 있으니, 어렵지 않을 거다.”

나는 몸을 딱딱하게 긴장시킨 채 토끼를 내려다보았다. 채식만 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양 수인족이어서 그런지, 동물을 먹이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죄 없는 동물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아르모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소량만 흘려도 된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토끼의 따뜻한 등 부분을 검지로 콕 찔렀다. 그리고 마나를 운용해, 얼마 없는 내 마나를 검지 끝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이 이상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폭시는 이 정도만 해도 알아서 내 마나를 흡수해 갔기에, 직접적으로 분출해본 적이 없는 탓이다.

아르모어가 내 팔뚝에 스윽 손등을 댔다. 내가 마나를 어떻게 운용하고 있는지 파악하더니 곧 설명을 이었다.

“검지에 몰아넣느라 마나를 붙들고 있군.”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해요?”

“풀어줘야 한다.”

“그러면 제 몸으로 돌아올 텐데…….”

“등을 민다고 상상하면 편하다.”

아르모어가 방문을 두드리듯이 내 피부를 가볍게 툭, 쳤다.

“물건이 아닌 생물의 몸으로 마나를 흘리는 건 쉽다. 모든 생명체는 창조에너지를 흡수하려 하기 때문이지.”

“마나는 자기를 다룰 수 있는 마나 자각자에게 흡수되려는 경향이 강하잖아요.”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되물었다.

“그러면 토끼가 아니라, 제게 있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네 마나의 주인은 너다, 카카나.”

아르모어가 눈꺼풀을 깜박이며 내 검지 끝, 마나가 몰려 있는 곳으로 서늘한 시선을 두었다.

“명령에 복종하는 게 당연해.”

“…….”

“네가 주인임을 잊지 마라. 감히 널 휘두르게 두어선 안 돼.”

그 말을 하는 아르모어를 보는데 이상하게, 백성을 대하는 모습도 저랬을까 궁금해졌다. 아주 오래전에도 꼭 저렇게 고압적으로 명령하는 왕이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모어의 설명대로 마나를 강하게 민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검지 끝으로 내 마나가 화악 빠져나가 토끼에게 달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보다 더 쉬워서 성공해놓고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성공했, 끄악!”

갑자기 정신이 든 토끼가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방심하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서 뒤로 성큼 물러섰다.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지만, 도망치려는 토끼의 귀를 잡아 붙든 아르모어가 몸으로 내 등을 받쳐주었다. 나는 두 손으로 쿵쾅거리는 가슴팍을 짓누르며 쌩쌩해진 토끼를 바라봤다.

나도 꼭 저렇게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타, 타이밍이 예술이네요. 하필이면 마나를 주입할 때 깨어나다니.”

마른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리는데, 아르모어가 토끼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르모어?”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아서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데, 그가 인형처럼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이르군.”

“네?”

“내 마나를 충분히 흘려두었다. 지금 깨어날 리 없어.”

“그러면…….”

아르모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날카로운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게 있나?”

“뭘 하시려고요?”

내가 여태 별의별 걸 다 보면서 살아왔다지만, 눈앞에서 불쌍한 토끼를 무참히 도륙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피 냄새를 맡으면 비위가 상하기도 하고.’

꺼림칙한 얼굴로 토끼를 쳐다보니, 아르모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으며 타일렀다.

“생채기를 조금 내려고 하는 것이니, 걱정 안 해도 된다.”

나는 마법가방에 들어 있던 소형 단검을 꺼내 그에게 들려주었다. 아르모어가 다시 전류를 흘려 토끼를 기절시키더니, 가죽에 살짝 상처를 냈다.

“다시 마나를 흘려봐라.”

설명 좀 해달라고 닦달하고 싶어졌지만, 애써 참으며 토끼에게 다시 마나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다시 번뜩 깨어난 토끼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내 마나는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건가?’

황당한 속성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아르모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곤란하군.”

“왜요?”

“상처가 아물지 않았느냐.”

그가 생채기를 내었던 토끼의 털을 젖혀서 가죽 부분을 보여주었다. 피가 엉겨 있는 탓에 잘 보이지 않아서, 손으로 만져 상처를 확인해보았다. 겁에 질린 토끼가 얌전히 있어줘서 그나마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상처가 말끔하게 나아 있었다.

“설마 제 마나가 회복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도, 아르모어의 마나에 감전된 토끼의 몸이 회복되어서 그런 걸 수 있었다. 굉장히 유용한 마나인 듯싶어서 활짝 웃었다가 아르모어의 표정을 보고 입매를 굳혔다. 그가 굉장히 불행한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토끼를 보고 있었던 탓이다.

“회복 속성이 있는 마나면 좋은 거 아니에요?”

“글쎄.”

아르모어가 비릿하게 웃었다.

“신전에서 그대의 능력을 신의 선물이라 칭하며 납치감금한 뒤,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 정도는 쉽게 예상이 가는군.”

무감각한 어조로 주욱 읊으니 두피까지 소름이 끼쳤다. 내가 기겁해서 팔뚝을 손으로 문지르고 있자, 아르모어가 말을 이었다.

“성녀라 하면 우매한 자들은 알아서 넘어올 테니 말이다.”

“아직 제 마나가 어디까지 치료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잖아요. 엘프 정도일지도 몰라요.”

얘기하고 보니 이상했다.

‘엘프들처럼 나도 치유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고?’

몹시 수상한 냄새가 났다. 나는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추리해보았다.

‘그래서 교감이 가능했던 건가? 기운을 느낀다거나, 의지를 알아차리는 것도 내 마나 때문인 걸 수 있으니까.’

아르모어가 생각에 잠긴 날 기다려주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는 상관이 없다, 카카나. 속임수는 아주 작은 계기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

“엘프들은 그들만의 안전한 세계와 서식지가 있지. 그러나 그대는 아니지 않느냐.”

아르모어가 토끼를 놓아주었다. 나는 검은 수풀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토끼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숲으로 가는 게 좋겠다.”

아르모어가 다시 내게 손을 얽으며 제안했다.

“마나의 속성을 자세히 알아보는 게 나을 것 같구나.”

그는 다양한 동물을 잡아왔다.

내가 신경 쓰는 걸 알았는지, 대부분 처음부터 몸이 안 좋은 동물들이었다. 차례로 마나를 흘려본 결과, 엘프가 가진 치유의 힘과 내가 가진 치유의 힘이 엇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아르모어와 함께 별장으로 돌아왔다.

“단순히 치유의 힘만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으니, 앞으로 주의를 기울여 그대의 마나를 관찰해야 한다.”

‘아르모어의 말이 맞아.’

나는 현관으로 들어서며 생각했다.

‘용사들과 만나기 전에도 야수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잖아. 그땐 교감 같은 거 못 했어.’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탓인지 나를 공격한 야수들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애교를 피우거나, 말을 걸려는 것처럼 다가온 적도 없었다.

‘교감이 나중에 생긴 능력이라는 의미야.’

그러면 더더욱 마나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스노아가 뮤나스에서 마나의 속성이 생긴 것 같다고 얘기해주었기 때문이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르모어.”

“치유의 힘이 있다는 건 나중에 스노아에게 말해두거라.”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감사하게도 아르모어가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그대의 마나를 알아보는 것 같으니.”

“하긴, 제 마나를 흡수해갔었죠.”

아르모어가 대답하는 대신 나를 들여다보다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마나의 움직임을 잘 느끼고 싶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거지?”

“아.”

‘그것도 가르쳐달라고 했었지.’

사실 치유연금물약을 만드는 데엔 속성보다 마나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했다.

“치유연금물약은 약물에 마법사들의 마법을 녹여내는 거거든요.”

나는 생각해두었던 내용을 차근차근 풀었다.

“주로 마나석을 이용해서 치료사가 녹여요.”

“그런데?”

“마법이 약물에 어떻게 스며드는 건지 느끼고 싶어서요.”

나는 난감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약물마다 마법을 녹여내는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그래도 실패할 때가 있어요. 치료사는 마나를 못 느끼니까요.”

“마법을 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면, 마나를 잘 느끼게 되더라도 제약이 많을 텐데.”

“네? 왜요?”

“마나를 느끼기 위해선 접촉해야 하지 않나. 그대는 초월자가 아니니.”

접촉!

“헉…….”

충격적인 소식에 머리가 멍해졌다. 여태까지 마나를 느끼기 위한 조건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마법이 전부 빠져나올 때까지 마나석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하나?’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약물에 완전히 잠겨야 마법이 흘러나오도록 설계되어 있어. 마나를 느끼려면 끓는 약물에 손을 넣어야 한다는 소린데…….’

“카카나.”

‘손 대신 다른 물건을 매개체로 사용할 순 없을까? 예를 들어 막대라든가.’

“카카나.”

‘약물에 막대를 담가놓고 저으면서 느끼면 되니까. 안성맞춤일 것 같은데…….’

아르모어가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물속에 있다가 갑자기 육지로 끌어올려진 사람처럼, 생각에 먹먹하게 잠겨 있던 정신이 맑게 깨었다.

파르륵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아르모어가 제 품에 나를 안은 채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그가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살피더니 이마에 촉, 입술을 내리눌렀다.

“몇 번을 불러도 알아차리지 못하니, 못 말리겠군.”

“죄송해요.”

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수그렸다. 내 부탁 때문에 엉덩이 무거운 양반이 숲까지 왔는데, 미안하다 못해 민망했다.

“그대라면, 어떻게든 해결법을 찾을 수 있을 터다.”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약초와 관련된 일이니, 그대가 포기하는 일은 없겠지.”

“…….”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을 뿐, 그대는 반드시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아낼 거다.”

그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날 내려다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아닌가?”

감정 없이 말라붙어 있던 아르모어의 피딱지 같은 눈에 생기가 깃든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열기가 훅 끼쳐 올라왔다.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섰다. 아르모어가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의 눈빛이 농염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칭찬이 설레서 이러는 건지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뜨거워진 귀를 만지작거리며 심호흡을 했다. 심장박동 소리가 요란해서 정신이 사나웠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리면 도움이 되겠지.”

아르모어가 내 명치 아래 부분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제2자각에 들어서면 마나가 모인다고 알려져 있는 부분, 단전이었다.

“그대의 마나수용량을 정확히 아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군.”

“제가 담을 수 있는 마나의 양이요?”

“그것을 포함해서, 그대의 몸 안에 마나가 어느 정도 있는지 알아보는 거다.”

아르모어가 나를 방으로 데려다주며 설명했다. 나는 그가 몸을 돌리자마자 손부채질을 하며 열기를 식혔다. 한 번 오른 열감이 도통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나를 운용해서 신체의 특정 부위로 옮기는 것. 지금 그대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다. 맞나?”

“네.”

“몸의 마나량을 알기 위해선 전신의 마나를 한 번에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문 앞에 선 아르모어가 내게 다가오더니, 머리나 옷자락에 붙은 이파리를 떼어주었다. 거의 무의식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습관적인 움직임이었다.

“배우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릴 테니, 당분간 주기적으로 내 방을 찾거라.”

나는 허둥지둥 머리를 털어내며 문을 열었다.

“그럴게요.”

슬며시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아르모어가 자신의 방이 있는 방향으로 멀리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간 곳마다 진한 장미향이 발자국처럼 남아 내 콧잔등을 간질였다.

눈을 감고 진득한 체취를 들이켜다가 퍼뜩 놀라 문을 닫았다.

‘미쳤나 봐!’

그의 체향을 음미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자 몹시 부끄러워졌다. 나는 내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

며칠이 지났다.

독감처럼 유난히 지독했던 내 발정기가 지나가고 마침내 아르모어의 발정기 기간이 찾아왔다. 나는 치유연금물약 실습을 마친 후 아르모어의 방을 찾아갔다.

이번엔 바보같이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간 호되게 당하고 드디어 나도 학습이란 걸 한 것이다. 발정기는 아니지만, 지금쯤 아르모어는 전조증상으로 고통 받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르모어가 허락하는 소리가 안 들렸다.

“아르모어?”

나는 문을 한 번 더 두드렸다가, 그래도 반응이 없자 문에 귀를 갖다대어보았다.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뭐지? 방에 없는 건가?’

“아르모어. 약을 가지고 왔어요.”

‘이후부턴 바빠져서 찾아오기 힘든데, 곤란하네…….’

나는 더 기다렸다가 결국 문을 살짝 비집어 열었다.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리고 문틈으로 머리만 쑥 들이밀어 보았다. 아무도 안 보여서 문을 활짝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본격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으로 인해 방 내부가 진한 장미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발정기가 끝났음에도 괜히 몸이 긴장되는 것 같아서 뚜벅뚜벅 걸어가 창문부터 열었다.

냉기 마도구에서 나오는 찬 기운이 다 빠져나가겠지만, 제정신으로 한방에 같이 있으려면 여름바람의 힘이라도 빌려야 했다.

나는 아르모어가 애용하는 티 테이블 위에 약을 놓고 돌아가려다가, 뒤늦게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멈칫 굳었다. 아르모어가 푹 파묻혀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가 거의 나지 않아서 여태 있는 줄도 몰랐다.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황급히 입을 틀어막아서 비명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보통은 잠에서 금방 깨는데, 곧 발정기라 몸이 더 안 좋은가 보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려다 문득 노파심이 들었다.

‘어디가 안 좋은 거면 어쩌지?’

발정기의 수인족은 여러모로 취약해진다. 평소보다 기력이 없어 더 고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고민하기보다 확인하고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섰다.

‘인형을 눕혀놓은 것 같네.’

움직임이 거의 없어서 언뜻 보면 사람처럼 안 보일 지경이다.

나는 그의 안색을 이모저모 살펴보다가, 평소보다 훨씬 창백한 것 같아 열을 재보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런데 이마에 손이 닿으려는 순간, 아르모어가 눈을 떴다.

나는 눈 뜬 시체라도 본 사람처럼 소스라쳤다. 농담 안 하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흐읍!”

얼마나 놀랐는지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아르모어가 멍하니 나를 응시했다. 아직 잠이 덜 깬 눈이다.

“몸이 안 좋아 보여서 열이 나는지 확인해보는 중이었어요.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너무 죽은 듯이 자고 있어서. 안색도 창백하고…….”

그가 물어보지도 않은 것을 줄줄 늘어놓으며 진땀을 뻘뻘 흘렸다. 하필이면 시기도 발정기랑 겹쳐 있어서 더 눈치가 보였다.

‘몰래 열을 재지 말고 그냥 깨워서 물어볼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아르모어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아직도 멍하니 눈꺼풀을 깜박이고만 있었다. 아르모어가 이토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건 처음 본다.

“아르모어?”

반 장난삼아 그의 코앞에 손을 흔들어보려는데 아르모어가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응?”

기다란 팔이 몸을 타고 올라오는 뱀처럼 내 목에 감기더니, 곧이어 뜨겁고 축축한 무언가가 입술에 달라붙었다.

“읏.”

쪽, 촉…….

아르모어가 달콤한 과육을 작게 오므린 입술로 빨아들였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전신을 지배하는 오싹한 감각에 꼼짝도 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하…….”

그런데 뜨거운 날숨을 토한 아르모어가 내 허리를 힘주어 끌어당기는 게 아닌가. 별로 의식하지 않은 행동 같았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허리가 확 꺾였다. 용사들이 평소에 나를 위해 신경 써서 힘을 조절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으며 억, 소리를 냈다.

‘포옹하려는 건가? 아니, 지금 제정신이긴 한가?’

나는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아르모어의 어깨를 툭툭 쳐볼 작정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르모어가 맨정신에 이런 행동을 하리라 생각되지 않았던 탓이다.

정신을 차리게 만들 작정이었는데, 갑자기 몸이 들렸다. 위로 들썩한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두 발바닥이 땅과 작별인사를 했다.

“으앗!”

어린아이의 옆구리에 낀 봉제인형처럼 번쩍 들려 올라갔다.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을 쳤지만 내 미약한 힘은 아르모어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몸을 위로 휙 끌어올렸다. 덕분에 나는 그의 단단하고 큰 몸 위에서 슬라이딩하듯 위로 질질 끌려갔다.

“헉!”

얼굴이 코앞인 데다 중심을 못 잡아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에 엎어질 것 같았다. 급한 대로 두 손을 뻗어 침대를 짚었다. 안타깝게도 이쪽이 덮치는 자세에 더 가까웠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패닉에 빠져서 어버버거리고 있는데, 그가 다시 목에 팔을 감았다. 키스의 전조였다. 아르모어가 상체를 들어서 내 목에 매달렸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연인 사이에서나 벌어질 법한 민망한 자세에, 이번엔 혀까지 파고들어왔다. 힛, 놀란 숨을 들이켜자 고개를 비틀며 더 깊이 파고들었다. 모순적이게도 한 손은 내 등을 위로하듯 쓸고 있었다.

“읍, 흑…….”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민감한 곳을 농염하게 문질러대니 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발정기 때 다른 사람과 키스를 해도 이 정도로 기분이 좋진 않았던 것 같다.

할릭의 키스가 뜨겁고 거칠다면, 아르모어의 키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능란했다. 예사롭지 않은 손놀림으로 내 머리를 땋았을 때처럼…….

손에 자꾸 힘이 풀려서 엎어지려고 하자, 아르모어가 내 어깨를 밀어 자세를 반전시켰다. 물 흐르듯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내 몸 위로 아르모어의 그림자가 지자마자 머릿속에 새빨간 경보가 울렸다. 이 이상은 진짜 안 된다. 상대가 아르모어라면, 정말 순식간에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고 빽, 소리쳤다.

“아르모어!”

그러자 아르모어가 거짓말처럼 우뚝 멈추었다.

그가 탁하게 허물어진 붉은 눈으로 헥헥, 숨을 몰아쉬는 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그의 표정을 신중하게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이 자못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내 표정을 오랫동안 뜯어보던 아르모어가 그제야 바싹 마른 입술을 열었다.

“카카나?”

손에 닿지 않는 아득한 거리의 사람을 부르듯, 현실감각을 잃은 음성이었다. 대강 감이 왔다. 여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곤, 아직도 화끈거리는 것 같은 입술을 소매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네, 아르모어. 저 카카나예요.”

그가 눈을 스르르 굴려 주위를 살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듯.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옆에 쓰러져 있던 나도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가 반성하는 투로 말했다.

“미안하다.”

“잠을 못 잤어요?”

나는 아르모어가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처럼 눈을 감고 소파나 흔들의자에 자주 앉아 있었는데, 말을 걸어보면 그냥 눈만 감고 있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서 뭐 하냐고 물어보면 소리를 듣고 있다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창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라거나, 용사들과 나의 대화 소리 같은 것들.

심지어 퀄리티미엄에서 바로 옆에 잠들었을 때조차, 아르모어는 눈을 감고 있을 뿐 말을 걸면 항상 대답해주었다. 그래서 잠귀가 밝은 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게 아니라 불면증이었던 건가?’

그에겐 항상 피로한 기운이 있었으므로, 그럴 수도 있었다.

“불면증이 있어요?”

아르모어가 나를 흘낏 바라보며 대꾸했다.

“심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있긴 있다는 얘기였다.

‘용 수인족의 마지막 후예이자 왕이라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다는 뜻이겠지.’

불면증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심리적인 원인이 대부분이었다.

걱정이 되었지만, 더 묻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말을 줄였다. 나는 오지랖을 떨려는 마음을 애써 접으면서 얘기했다.

“여태 잠이 부족한 것처럼 행동한 적이 없어서, 몰랐어요.”

“습관이 되어 조금만 자도 괜찮다.”

“그러면 오늘은요?”

아르모어의 붉은 눈이 내게 스르르 굴러왔다. 얘기할지 말지 고민하는 입술이 몇 초간 다물려 있었으나 별안간 부드러이 열렸다.

“최근에는 특히, 잠을 이루지 못했지.”

“약을 지어드릴까요?”

“그럴 것 없다. 발정기가 지나면 진정될 테니.”

나는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발정기가 되면 잠도 잘 못 주무셨어요? 억제제를 먹어도요?”

“최근 마나를 배우기 위해 그대가 자주 내 방을 찾지 않았나.”

아르모어가 얕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게 꼭 한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방 곳곳에, 그대의 체취가 묻어 있다.”

아르모어가 내 땋은 머리 한 갈래를 들어 코를 묻었다. 새하얀 피부에 머리처럼 검은 속눈썹이 부채처럼 펼쳐졌다. 저 위에 하얀 먼지 한 톨이라도 떨어졌다간 바로 티가 날 것 같다.

“화, 환기를 해도 안 될까요?”

정말이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브로스에게 따로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서 마나를 다루는 연습을 했을 텐데, 낭패였다.

“그대의 체취는, 일말의 흔적이어도 의식되면 지울 수가 없다. 환기를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죄, 죄송해요.”

‘내 체취가 그렇게 지독한가.’

나는 시무룩하게 생각하며 괜히 팔에 코를 묻어보았다. 열심히 킁킁거려보지만, 내 체취라 그런지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르모어가 웃음기가 밴 눈으로 날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나쁘지 않아.”

아르모어가 내 머리카락을 놓고 뒤로 물러나며 낮게 읊조렸다.

“내게 그대의 화인이 새겨졌다면 좋았을 것을.”

거리는 벌어졌는데, 내 구석구석을 살피는 붉은 시선은 되레 짙어진 느낌이 들었다.

코앞에서 서로의 숨결을 주고받고 있는 것처럼, 긴장으로 호흡 소리가 작아졌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눈만 도륵도륵 굴렸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아르모어가 말을 이었다.

“그리하면, 부정하고 싶어지는 순간까지 그대를 잊지 못해 함께하게 될 테지.”

“…….”

“내 백성들이, 여전히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듯.”

여태 한 순간도 내보이지 않던 아르모어의 깊은 속내를, 지금 잠깐 훔쳐본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말투는 여전히 무정했다. 표정 또한 덤덤했다. 그 모습이 되레 마음 한구석을 시큰하게 쥐어짰다. 나는 속에서 올라오려는 정체불명의 감정을 꿀꺽 삼켜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편지를 쓰는 날이 아니면, 나는 평소엔 억지로라도 친구와 므리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내게 소중하지만 그렇기에 날카로운 통증을 자아냈다. 억지로 상자 속에 봉인해놓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잘못해서 기억의 뚜껑을 열었다간, 사방팔방으로 튀어 올라 내 남은 에너지를 남기지 않고 갉아먹었다.

그래서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아니 아예 상자에 관심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아르모어는 반대로, 언제나 자신의 어두운 기억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면 너무 슬픈 삶이잖아요.”

상상만으로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목 졸린 음성으로 신음하니 아르모어가 설핏 웃었다.

“허면, 슬프지 않은 삶을 어찌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겠느냐.”

침대에서 벗어난 아르모어가 유리잔에 물을 따르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내게 남은 인간의 흔적을 향유하는 것만이, 나를 유지해주는 뿌리이거늘.”

그는 도대체, 얼마나 오랜 삶을 홀로 견뎌온 걸까? 지금까지 살아있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하고 어떤 것을 품어왔을까?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이었다.

“아르모어는 절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요?”

유리잔을 들던 아르모어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화인이 새겨지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깨에 반쯤 걸쳐 있던 머리카락이 밑으로 주르륵 떨어졌다. 그의 권태로운 움직임이 왠지 고독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잃을 테니까, 그래서 무슨 흔적이든 아르모어에게 남겼으면 하는 거예요?”

물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아르모어가 아무 말 없이 조용해졌다.

‘너무 주제넘은 질문이었을까.’

그러나 반드시 묻고 싶었다.

다행히 아르모어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 같지 않게 생소하고 낯선 목소리였다.

한없이 무겁고…….

“그대를 잃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을 해보았지.”

또 슬픈.

“이번에야말로 버틸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잘 버텨 왔잖아요.”

바로 떨어지는 내 대답에 아르모어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언제나처럼 흐릿한 미소였다.

“마음이 없기에 강했던 것이지.”

불그스름한 눈이 문득, 드물게 생기를 머금고 내 꿀색 눈망울에 머물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상 죽어 있는 것만 같던 아르모어의 눈에 빛이 감돌고 있었다.

“헌데 그대가, 내 마지막 마음이 되어준 모양이다.”

마치, 붉고 싱그러운 장미가 피어 있는 것처럼.

다리 위에 얹어 놓았던 두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사그락사그락, 옷 부대끼는 소리를 내며 조용히 다가온 아르모어가 내 뺨으로 손을 뻗었다. 따스한 손끝이 피부의 솜털을 스치며 조심스레 온기를 나눠주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음에 사랑이 싹텄으니, 비로소 살아 있게 된 것이지.”

아르모어가 잠잠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대가 없으면, 죽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허리를 숙인 아르모어의 입술이 내 숨결을 빨아들이며 키스해왔다.

“카카나, 나의 어린 마음아.”

건조하고 뜨거운 입맞춤인데, 왜인지 눈물에 젖은 것처럼 축축하고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

“거참. 비브로스 너도 어지간하다, 정말.”

비브로스의 유일한 친구, 연금술사 아그리마가 콧방귀를 뀌며 손을 내저었다.

“치료사 협회의 그 깐깐한 노인네들 눈을 어떻게 뒤집어 놓는다고 그리 난리야? 응?”

“왜 안 돼? 충분히 가능하지!”

비브로스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물론 아그리마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 글쎄 네가 얘기하는 건 말로만 있는 절차라니까 그러네!”

그녀가 끌끌 혀를 차며 비브로스를 나무랐다.

“치유연금물약을 개발해서 시험 칠 기회를 얻어내?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뭐야?”

“너 그 절차가 왜 생겼는지 정말 몰라?”

눈빛으로 살인낼 기세인 비브로스의 시선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아그리마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며 얘기했다.

“여기저기서 왜 시험을 칠 기회도 내주지 않느냐, 개인의 능력은 상관 않고 출신 대학만 따지니 학벌주의다 뭐다 말이 많아서 그 노인네들이 마지못해 만든 거잖아.”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서도 하겠다고? 너 정말 미쳤니?”

‘어쩌다 얘기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더라.’

비브로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생각했다.

그는 이른 아침, 마탑보다 서쪽에 위치한 아그리마의 개인 거처를 방문했다. 아그리마에게 조만간 카카나와 함께 실습을 해달라고 부탁해두었던 터라 그에 관한 조율이 필요해서였다. 또 미리 맡겨 놓았던 복종 포션의 분석표도 받아와야 했다.

그래서 아그리마와 함께 가벼운 아침식사를 하며 다음 주 중에 실습을 시작하는 게 어떠냐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제는 식후 티타임에서 생겼다. 비브로스의 심한 제자 자랑이 이어지다가 카카나에게 정식 학위가 없다는 얘기까지 나온 것이다.

아그리마는 기함을 했고, 비브로스는 치유연금물약을 개발하여 자격을 취득하겠다고 호기롭게 밝혔지만 이미 그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학위도 없는 애송이가 치유연금물약을 개발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니?”

아그리마는 대놓고 비웃으며 비브로스의 정신 상태를 걱정했다. 그녀는 비브로스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자신이 본 것만 믿는 고집불통에 세상을 보는 시각도 퍽 비관적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제 친구가 저와 똑 닮았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비브로스는 지치지도 않고 열을 올렸다.

“왜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어? 우리 카니는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아이라니까, 글쎄!”

“비브로스, 너는 하나가 마음에 들면 나머지를 생각할 마음조차 갖지 않는 게 문제야.”

아그리마가 자신이 정리한 복종 포션의 분석표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며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딴 데 가서 얘기해 봐. 믿어주는 사람이 있나. 믿을 만한 얘기를 해야 듣는 시늉이라도 해주지. 이건 뭐, 계속 헛소리만 해대니.”

“헛소리라니!”

“새로운 치유연금물약을 개발했다고 쳐. 그 다음은? 치료사들이 제시하는 물약을 즉석에서 한 번에 만들어 내야 하잖아.”

분석표를 탁탁 정리해서 문서봉투에 담은 아그리마가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밀랍 인장을 찍으면서 말을 이었다.

“뻔한 치유연금물약도 종종 실패해. 마나가 워낙 유동적이기 때문이고, 약물도 아무리 정량을 맞춘다 한들 제조한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이지.”

“…….”

“그런데 한 번에 만들어라?”

아그리마가 콧방귀를 뀌며 문서봉투를 비브로스에게 건네주었다.

“학벌주의 소리 듣기 싫어서 다른 절차를 제안하긴 했지만, 허튼 꿈 꾸지 말고 학위 없으면 생각조차 말라는 소리잖아. 근데 왜 멍청이처럼 달려들고 있냔 말이야.”

“그래서, 마음이 바뀌었어?”

비브로스가 불퉁하게 묻자, 아그리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내가 도와줄 수습치료사가 학위도 없는 줄 몰랐지.”

“…….”

“알았다면 안 도와줬을 거야. 어차피 가망도 없는데 왜 도와줘?”

“직접 보고 얘기해. 데리고 올 테니까.”

“으, 귀찮아. 그냥 다른 연금술사 알아봐.”

다크서클이 짙게 진 아그리마의 눈 밑을 살펴보던 비브로스가 문득, 인상을 찡그린 채 소파에 등을 묻었다.

“너 요즘도 캐내고 있냐?”

헤이즐넛 향이 깊게 밴 커피를 속에 쏟아 붓던 아그리마가 컵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제 막 도착한 빈 마나석의 품질을 확인하며 대꾸했다.

“갑자기 왜?”

“네 얼굴이 점점 초췌해지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잖아.”

“내 얼굴은 원래 이랬어.”

“아그리마.”

복종 포션의 분석표를 품에 안고 자리에 일어선 비브로스의 시선이 문득 오래된 벽지로 향해 머물렀다. 누렇게 바랜 벽지 가운데 아그리마의 집무책상 뒤편만 사각형으로 깨끗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그리마의 가족 초상화가 그려진 액자가 걸려 있던 자리였다.

“가끔은 모르는 게 나은 일도 있는 거야. 특히, 구린내가 나는 비밀이라면…….”

비브로스가 아그리마의 집무실 문을 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또한 자기가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아그리마가 들을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이미 수차례 말려봤으나 실패했다. 그래도 그는 틈만 나면 아그리마를 말리곤 했다. 그의 예민한 촉이 계속 불길한 경고를 보내왔던 탓이다.

“그러다 비명횡사한다.”

비브로스가 문을 닫고 나갔다.

그가 나가기 무섭게 아그리마가 마른세수를 했따. 그녀의 눈이 초상화가 걸려 있던 자리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

***

‘죽고 싶다…….’

나는 침대에 엎어진 채, 그냥 유체이탈을 해서 영혼이 건물 바깥으로 날아가 버리길 기도하며 생각했다.

‘제기랄.’

나는 눈물이 찔끔 나온 얼굴을 옆으로 살짝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모어의 새카만 머리가 이불에 파묻혀 있었다.

‘아아, 시이이이X.’

꿈이길 바란 내가 어리석었다. 심지어 꿈도 더 이상 못 한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나는 하도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문지르며 몸을 움직였다가, 허리에서 말도 못 할 통증이 올라오자 바짝 굳었다.

‘아, 가지가지 하네, 진짜…….’

더 나올 눈물도 없는 것 같은데 뻑뻑한 눈알에 금세 습기가 찼다. 낑낑대면서 몸을 돌린 뒤 조심스럽게 윗몸을 일으켰다.

“허억, 시X…….”

농담 아니고, 몸 상태가 한 사흘은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하도 오랜만에 한 데다가, 발정기인 아르모어를 상대하느라 너무 시달린 듯했다. 아랫배가 알싸하게 아파오는 것도 모자라 아랫도리가 심히 쓰라렸다.

나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퉁퉁 부은 입술을 짓씹었다. 단언컨대 내가 수인족이 아니었다면 어젯밤 복상사로 죽었을 것이다. 발정기 억제제를 건네주기 위해 아침에 아르모어의 방을 찾았으니, 하루 온종일 틀어박혀서 기어코 잠까지 여기서 잔 게 아닌가.

나는 우연히 시야에 들어오는 나무 의자를 가만히 노려보며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의자로 내 머리를 어떻게 내려쳐야 기억이 사라질지.

내 허리를 들어 올리던 팔뚝, 한계에 치달았는데도 집요하게 괴롭히던 움직임, 도망가지 못하도록 퇴로를 막던 손길…….

모든 게 너무 생생했다. 이제 아르모어의 얼굴만 보면 어젯밤이 생각날 것 같았다.

그때, 이불이 스윽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흡사 몬스터라도 발견한 초식동물처럼 겁에 질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르모어가 잠기운이 그득한 눈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위대하신 초월자님답게 전신이 아스러진 사람처럼 낑낑대는 나와 다르게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의 붉은 눈이 내 허옇게 질린 얼굴을 훑었다. 그 시선을 느끼자 또 다른 위협이 내 숨통을 콱 졸랐다.

‘서, 설마 또 하는 건 아니겠지?’

아르모어는 나와 키스를 하는 도중 발정기가 시작되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작이었는데, 이성 수인족의 페로몬을 계속 맡은 상태에서 농도 짙은 스킨십을 나눈 탓이었다.

활짝 개방된 남성 수인족의 페로몬이 폭포처럼 쏟아지자, 나는 반쯤 체념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이리 될 줄 알고 있음에도 시작한 키스였다. 발정기를 맞이하는 수인족 두 명이 여행을 함께 하는 이상 언제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문제는 아르모어가 초월자라는 거였지.’

그는 도무지 지칠 줄을 몰랐다.

심지어 발정기 중인 수인족인 탓에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죽을 것 같아서 쉬고 싶어도, 그의 페로몬이 내 몸의 흥분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그러다 보면 엉엉 울면서 그에게 매달려 있기 일쑤였다.

나 또한 수인족이다.

여태 관계를 맺으면 상대방이 힘들어하며 나가떨어졌지, 내가 이렇게 녹초가 되지는 않았었다. 아니 이번 경우는 녹초란 말도 부족하다. 나는 거의 넝마가 되어서 나가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기절하기 직전이 되었을 때쯤, 아르모어가 간신히 정신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나는 미안해하는 그의 눈빛을 끝으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직도 아랫도리에 이물감이 느껴지네.’

“카카나.”

“더 이상은 못 해요. 안 돼요.”

그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목이 어찌나 부어 있는지 거의 바람소리밖에 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의지를 전달해야 했다.

진짜 무리였다. 더 이상 하면 바보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 같은 경험이었어.’

일순 공포심까지 느껴져서 몸을 부르르 떠는데, 아르모어가 내 뺨에 입을 맞추며 얘기했다.

“걱정하지 마라. 어젯밤 억제제를 복용했으니.”

“억제제요?”

“중간에 깨서 복용했다.”

나는 기겁했다.

‘그렇게 해대고도 풀어지지 않아서 중간에 깨어났다고?’

도대체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체력에 한계가 없다는 건 이런 거구나. 초월자 무섭다.’

다시는 아르모어와 발정기를 함께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두 다리를 침대 밑으로 내렸다.

“허으으으…….”

할 게 산더미인데, 죽을 것 같다.

“괜찮은가?”

“으윽, 제 마법가방 좀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아르모어가 수면용 가운을 몸에 두르더니, 마법가방을 들고 와 내게 내밀어주었다. 나는 가방을 뒤지다 말고 문득 깨달았다.

‘몸이 보송보송하네?’

“제 몸 씻겨줬어요?”

“그래. 그대로는 불편할 듯하여.”

나는 내가 어제 어떤 꼬라지로 정신을 잃었는지 떠올려내고는 곧 납득했다.

아르모어는 여성의 몸에서 흥분을 끌어내는 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페로몬의 힘까지 더해져 온몸의 물이란 물은 전부 쥐어짜낸 수준이었기 때문에, 씻지 않았다면 눈뜨자마자 굉장히 불쾌했을 것이다.

“고마워요, 아르모어.”

나는 도움이 되는 약물을 이것저것 찾아 복용했다. 5분 정도 기다리면 약효가 돌아 편히 움직일 수 있을 듯했다.

‘음, 이 수많은 키스마크들은 어떻게 하지.’

연고를 바르면 자국을 없앨 순 있겠지만, 그러면 또 한 시간 정도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괜히 아르모어가 원망스러워져서 고개를 들었다가, 곧 철없는 원망을 넣어두었다. 벌어진 가운 틈으로 그의 흰 피부에도 붉은 울혈 자국이 있었던 것이다.

‘나도 짐승처럼 해댔구나.’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깊이 반성했다.

‘발정기여도 언제나 이성은 붙잡고 했었는데…….’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으며 엉망이 된 머리를 풀었다. 아르모어가 당연하다는 듯이 근처로 와 머리를 다시 땋는 작업을 도와주었다.

‘아르모어가 깨어나면 대화를 나눠도 어색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편안하네.’

물론 부끄러운 기억이 불쑥불쑥 떠올라서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어지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나는 나른하게 하품하며 머리를 빗었다.

‘함께 사고 친 사람이 아르모어여서 다행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고 침착해서 나까지 그의 분위기에 전염되는 느낌이었다.

“빨리 돌아가 봐야 하는 모양이군.”

아르모어가 물었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빠진 잔머리가 없는지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어떤 물약을 개발할지 구상할 생각이었거든요.”

“바쁘군.”

툭, 떨어지는 어조에서 어딘가 서운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르모어였기에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아르모어가 노곤한 얼굴로 내 머리의 향을 맡고 있고 있었다.

‘역시 착각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법가방을 챙겼다. 억제제도 먹었다 하니 더 신경 쓸 것은 없었고, 아르모어의 방에 더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내 방에서 조제법이나 만들어 봐야겠다.’

울혈 자국을 지우며 시간을 보내면 딱일 듯했다. 옷에 가려지지 않는 부위에 제법 많은 키스마크가 있었지만, 약초 생각을 하면 시간이 빠르게 흐를 터였다.

나는 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등으로 가지런히 늘어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나아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모어에겐 뭐라고 답을 해줘야 하지?’

추상적인 표현이긴 했지만, 그는 분명 내게 고백을 했다. 그런데 고백이 바로 정사로 이어진 터라 제대로 된 답을 해주지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그를 흘낏 올려다보다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얘기해주었다.

“아르모어, 저 다른 용사들에게도 고백을 받았어요.”

그가 내게로 눈을 굴렸다. 계속 얘기해보라는 뜻인 것 같아서,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서로 알아가 보기로 했어요. 제게 사랑은 아직 이르고, 감당하기 버거운 부분이 있어서요.”

“그렇군.”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르모어의 고백에도 비슷한 대답일 것 같아요.”

“…….”

“괜찮을까요?”

그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곧 가까이 걸어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춰주었다.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가 다정하게 속삭이며 방문을 열었다.

“그러니 그대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야.”

그가 내 방이 있는 방향으로 눈짓했다.

“약물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

나는 활짝 웃으며 방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뒤돌아 아르모어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아르모어.”

“그래.”

나는 흐릿하게 웃는 아르모어를 등지고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몸은 어느새 본래 컨디션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서 연고부터 발라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마침 내 방 근처로 걸어오던 첼러스와 마주쳤다.

“첼……. 헉!”

나는 뒤늦게 키스마크를 떠올리고 급하게 목덜미부터 가렸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미 팔뚝이며 종아리며 울혈 자국이 안 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날 발견하고 기쁜 듯이 눈가를 휘던 첼러스의 푸른 호수빛 눈동자가 문득 내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지금은 아주 이른 아침이었다.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이른 아침에, 키스마크를 달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가고 있다?

성인이라면 누가 봐도 뭘 하고 들어오는 길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첼러스가 먼발치에 우두커니 서서 더 이상 접근하지 않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까 이 숨 막히는 정적 좀 깨줬으면…….’

내 간절한 소망이 그의 마음에 닿았는지, 첼러스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카카나.”

“조, 조조조, 좋은 아침.”

‘왜 이렇게 말을 더듬어!’

나는 주책인 주둥아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다가 첼러스의 집요한 시선을 느끼고 어색하게 웃었다.

“이 시간에 뭐 하고 있었어?”

눈물겨운 노력을 쏟아 부으며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려고 애썼다. 첼러스가 평소처럼 깔끔한 어조로 대답했다.

“가볍게 검술 수련을 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성실하네!”

정적.

“음, 그럼, 방으로 돌아가는 길인 거야?”

“그렇습니다.”

다시 정적.

나는 진땀을 주룩주룩 쏟으며 몸을 옆으로 틀어주었다.

“내가 눈치 없이 길을 막고 있었나 보다. 하하! 얼른 들어가 봐!”

그러나 첼러스는 자리에 붙박여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시마다 하나씩 있는, 기사 석상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첼러스?”

내가 눈치를 살피며 묻는 순간, 그가 걸음을 떼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박동 수를 높여갔다.

너무 긴장해서 내 심장소리 때문에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그가 근처에서 멈춰 섰다.

“아파 보이는군요.”

“어, 어엉?”

“몸 이곳저곳에 멍이 생기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내 팔과 쇄골 근처에 밀도 있게 퍼져 있는 울혈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도저히 멍이 생길 수 없는 부위에 집요하게 퍼져 있었으므로, 당연히 그도 멍이라 생각하고 그리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스르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괜찮아. 곧 연고를 바를 거거든. 그러면 금방 없어질 거야.”

“도와드리겠습니다.”

“괘, 괜찮…….”

첼러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서글픈 눈을 마주하자 거절하기 어려워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말을 정정했다.

“그래주면 고맙지.”

그가 먼저 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맞닥뜨린 사람이 첼러스여서 그나마 다행인가.’

아다르였다면 한동안 장난 아니게 시달렸을 것 같긴 했다.

나는 찌그러진 얼굴을 어떻게든 펴보려고 기를 썼다. 방에 들어가면 어떤 대화가 오가게 될지 걱정이 앞섰다.

차가운 금속재질로 된 연고통의 뚜껑을 열고 화장대에 놓은 뒤, 그 앞에 놓인 사각 스툴에 앉았다. 가까이 다가온 첼러스가 연고통을 살피며 물었다.

“환부에 바르면 되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그는 묵묵히 연고만 발랐다. 캐묻는 일도, 의미심장한 시선도 없었다.

나는 팔뚝에 연고를 펴 바르며 눈을 위로 굴렸다. 그는 시종일관 울혈 자국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찮은 건가?’

생각하다가 움찔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수련으로 다듬어진 그의 딱딱한 굳은살이 쇄골의 여린 살결을 스칠 때마다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몸의 긴장을 내려놓으려고 신경 쓰며 손에 연고를 더 떠왔다.

‘표정이 한결같아서 알 수가 없네.’

울혈 자국이 피멍에 가깝도록 짙은 것엔 간혹 미간을 좁히곤 했지만, 용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나름대로 선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몰래 시름을 덜었다.

“오늘은 계속 방에 있을 계획이십니까?”

드러난 부위에 연고를 다 바르자, 첼러스가 평소와 같은 어조로 물었다. 우울감이 비치는 것 같던 호수색 눈망울이 본래의 선하고 밝은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후엔 연구실로 가봐야 해. 그 전까지는 방에서 책을 읽고.”

“제가 함께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그가 정중하게 요청했다.

“카카나와 함께 책을 읽고 싶습니다.”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요청이었다. 다만 민망한 상황을 들키고 난 후여서 신경이 쓰일 뿐이다.

‘안 될 건 없지.’

일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그의 시선에서 채 감추지 못한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거절하면 꿈에 나올지도 몰랐다. 심지어 그 꿈속에서조차 침묵을 유지하고 날 쳐다보기만 할 것 같았다. 깨진 유리창을 연상시키는, 상처받은 눈을 하고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싫었다.

나는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가라앉은 미소를 지은 첼러스가 잠시 뒤 읽고 싶은 책을 챙겨서 방으로 돌아왔다.

마음 상했을 그가 어떤 식으로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연한 태도였다.

독서가 시작되자 조용한 방에 책장 넘기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나는 책을 읽는 척하면서 그의 눈치를 조금씩 살폈다.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괜히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안 좋았다.

‘이래서 다중결혼은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름 티 내지 않는다고 여겼으나 첼러스의 예민한 감각에는 내 허술한 시도가 전부 잡힌 모양이었다. 결국 그가 입을 열었다.

“제 눈치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몰래 쳐다보던 행위를 그만두고 시무룩하게 눈썹을 늘어트렸다.

“하지만 상처받은 표정이었잖아.”

“괜찮습니다.”

“나는 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첼러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상처 준 거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하기 싫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크게 홉뜬 눈을 두어 차례 깜박이던 첼러스가 곧 눈가를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어여쁘게 웃었다. 기쁜 기색이었다.

사소한 관심을 받은 기쁨이 자기를 아프게 한 슬픔보다 더 크다니,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뭐라고.

하지만 사랑은 원래 그런 면이 있다고 이블라가 얘기해준 적이 있었다. 나로선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너는 너무 머리로 접근하려고 해.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거야, 카카나.]

그녀의 충고를 곱씹어보는 사이 첼러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문을 텄다.

“선택받지 못했단 사실에 심란했을 뿐입니다.”

그의 시선이 내 목덜미 근처로 떨어졌다가, 이내 눈꺼풀 안으로 숨어들었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건 카카나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저는 카카나의 선택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는 타인보다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한 사람이었다.

“카카나가 대신 책임져 줄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저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나도 잘 알았다. 언제나 진실하고, 그렇기에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사람.

“그렇구나.”

그래서 나 또한 그의 생각을 존중하게 된다. 그게 첼러스가 관계를 쌓는 방식이었다.

그가 다시 시선을 내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담담한 얼굴이어서 나도 마음을 정리하고 읽던 책에 정신을 집중했다. 가끔씩 그와 읽고 있는 책에 대해 이야기도 두런두런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얼어붙어 있던 공기가 완전히 풀어졌다.

‘대화할 상대가 있으니까 생각이 더 잘 정리되는구나.’

책에 푹 빠져 읽고 있는데, 첼러스가 다음에도 함께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왔다. 바라는 바였기에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그 책은 왜 읽고 계시는 겁니까?”

그가 불현듯 호기심이 인 얼굴로 물었다.

“여기 있는 것들 중 제일 재밌어 보이는 걸 만들어보려고.”

애정이 담긴 손짓으로 책의 페이지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첼러스가 흐릿한 눈을 하더니, 내가 들고 있는 책의 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물어보았다.

“지금 읽고 계신 책 말입니까?”

“응.”

“환상물약사전이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맞아.”

그가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이 잘못된 건 아닌지 잠시 검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이해하기 힘들단 어투로 질문을 이었다.

“환상물약사전은 환상 속 물약을 적어놓은, 재밋거리용 책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자의 의도가 그거긴 해.”

나는 책에 시선을 붙박으며 수긍했다.

“어린이들에게 동화책처럼 읽어주기도 한다더라.”

“그런데 만드시겠다고요?”

“응. 하나씩 만들어보려고 최근에 샀어.”

첼러스가 내가 읽고 있는 책 페이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 방울을 마시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저승의 물약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적혀 있는 페이지였다.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약 그림을 구경했다. 상상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연구하다 보면 가능성이 보이는 약물이 반드시 하나쯤은 있을 거야. 완벽히 구현할 수는 없어도 흉내 낼 수는 있지 않을까?”

첼러스가 기대에 부푼 내 표정을 보더니 작게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모험가 같은 얼굴이군요.”

“요즘 이것저것 재밌는 생각을 많이 하거든.”

나는 눈여겨본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워 넣으며 얘기했다.

“환상물약사전엔 다양한 약물이 나와. 노래를 잘하게 해주는 약이라든가, 피부 톤을 바꿔주는 약 같은 거. 그래서 보고 있으면 나도 아이디어가 퐁퐁 샘솟는 기분이야.”

연금물약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그런데 현실에선 그걸 오직 치유의 목적으로만 사용한다니 아쉽게 느껴졌다.

물론 현재의 기술로는 치유연금물약을 만드는 것만으로 벅찼다. 미용이나 재밋거리용 약물을 만들기엔 기술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독특한 연금물약을 만들어 파는 세상이 되려면, 치유연금물약이 상용되는 수준까지 기술이 발전해야 했다.

‘치료사가 목적이니까, 일단 치유연금물약 위주로 살펴보자.’

나는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환상물약사전의 목차로 돌아가 페이지를 확인했다. 페어리블러드를 포함하여, 다양하고 흥미로운 환상 속 약물이 주르륵 소개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눈이 가는 물약이 하나 있었다.

‘찾았다. 리커버리 약물.’

리커버리는 환자에게 깃든 모든 저주, 상처를 회복시키고 건강을 되찾아준다는 궁극의 치유마법이었다.

기록된 바가 거의 없어 동화책에서도 언급이 적은 천족이 사용했던 마법이라고, 환상물약사전에 나와 있었다. 그 리커버리를 실현시키는 약물이 리커버리 약물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고위 품급의 성직자라 하더라도 리커버리 같은 신성마법은 없었다.

환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모든 손상을 회복시킨다는 건 신의 권능을 끌어다 쓰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만든 연고형의 만병통치약도 얕은 타박상이나 찰과상만 치유해주는 게 고작이었다.

‘한 종류의 약물을 복용해서 모든 걸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해. 만들더라도 다른 기능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나는 리커버리 약물을 무지개 색으로 묘사한 책의 그림을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다.

리커버리는 치료가 불가능할 거라고 모두가 고개를 저었던 환자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을 때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강력한 치유약물을 칭하는 데 리커버리가 그만큼 와 닿는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리커버리 약물에서 ‘만능’이라는 부분보다 ‘제일 강력한’ 치유물약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오래돼서 복구할 기회조차 놓쳐버렸거나, 치료사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외상을 치료하는 약물이라면 리커버리란 이름이 붙을 만하지 않을까?’

스라일리 경매장에서 만났던 늑대 수인족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그녀의 발뒤꿈치엔 거대한 가위로 뎅겅 자른 것처럼 잔인한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힘줄을 잘라 걸을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렇게 오래된 흉터는 아무리 좋은 치유연금물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런 흉터까지 치료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약물을 만들어보자.’

나는 환상물약사전을 덮고 작은 수첩을 꺼내와 필요한 약재들을 적어보았다. 전부 희귀한 것들뿐이지만, 대부분은 비브로스가 구해줄 수 있었고 구하지 못하는 것이라도 스노아의 텔레포트를 이용해 직접 채취하러 갈 수 있었다.

‘사용되는 마법은 역시 힐이겠지?’

연금술사와의 실습은 다음 주에 잡혀있었다.

“연금술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 좋을 텐데, 곤란하네.”

“왜 그러십니까?”

“첼러스. 요즘 비브로스가 계속 저기압인 것 같지 않아?”

그가 지난 기억을 떠올려보듯 눈을 굴리더니, 동의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워낙 변덕스러운 분이라 그러려니 하고 있었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 내 실습을 도와주기로 한 연금술사의 집에 다녀온 후부터 계속 그 상태였거든.”

‘일정을 조율할 겸 복종 포션의 분석표도 받아오겠다고 하더니, 무슨 듣기 싫은 소리라도 들었나?’

나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연금술사랑 말다툼이 있었나 봐. 이런 상황에서 실습을 앞당겨달라고 할 수도 없고.”

“급히 뵈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유연금물약을 개발하려고 하는데, 마나석은 연금술사가 빠삭하잖아.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했지.”

“그렇군요.”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었다. 우선 책이나 마나석 목록을 뒤져보면서 가장 적합한 걸 스스로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 분야에선 초짜라 아는 게 없지만 기초부터 차근차근 짚어가면서 해결하면 도움이 될 터다. 나는 수첩에 생각해두어야 할 것들을 정리하며 따져보았다.

‘치유연금물약에 사용되는 마법들은 효능에 따라 갈려. 부기를 가라앉히는 약물엔 강도를 조절한 빙결마법이 사용돼.’

나는 마나석의 마법 목록을 꺼내와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내가 만들고 싶은 물약은 리커버리니까, 회복 위주의 마나석을 살펴보면…….’

목록을 손으로 죽 훑은 후 사용될 만한 마법들을 수첩에 베껴 썼다.

약한 치유마법인 큐어, 큐어보다 강한 치유마법인 힐, 정화마법인 퓨리피케이션, 질병을 약화시키는 위큰 디지즈…….

나는 정신없이 옮겨 적던 펜을 우뚝 멈추었다. 난이도 별표가 다섯 개나 붙어있는 마법이 눈에 들어왔던 탓이다.

“와, 이게 뭐람?”

“별이 다섯 개가 붙어 있군요.”

내가 하는 양을 흥미롭게 관찰하던 첼러스가 옆에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주 어려운 마법인가 봅니다.”

“맞아. 강력한 마법일수록 별이 붙는데, 그런 마법은 약물에 녹여내기 엄청 까다롭거든.”

나는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끝맺었다.

“별 다섯 개짜리 마법은 쳐다보지도 말라고 비브로스가 경고했었어. 효율적인 조제법을 밝혀내도 터지기 일쑤일 거라고.”

하지만, 그만큼 아주 강력한 치유 마법이라는 뜻이다.

내가 만들 약물은 리커버리였다. 그저 그런 회복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나는 별 다섯 개짜리 마법을 눈여겨보았다. 마법에 대한 설명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사제에게 직접 치유를 받고 있는 환자가 그려져 있었다.

마법 이름은 레스토레이션이었다.

신체의 회복능력을 활성화시켜 치유를 돕는 큐어 혹은 힐과 달리 상처를 입기 전으로 복원하는 아주 어려운 마법이었다. 설명에도 ‘고위 품급의 성직자 중에서도 소수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라고 나와 있었다.

“레스토레이션 마법을 직접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황족 정도겠군요.”

첼러스가 첨언했다.

“그 정도야?”

“신성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사제는 무척 드뭅니다.”

내가 읽는 책을 보기 위해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있었던 첼러스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설명을 이었다.

“그런데 치유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성직자 중에서도 고위 품급이라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러네.”

나는 심각해진 얼굴을 했다.

“그중에서도 소수라면, 세상에. 쓸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두 명 정도는 되려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떠오른 걱정은 이거였다.

‘약물에 녹여내려면 장난 아니겠는데?’

사람에게 직접 레스토레이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사제뿐이다. 사제가 아닌 치료사나 연금술사가 레스토레이션을 이용하려면 반드시 약물을 활용해야 했다. 근데 이걸 약물에 녹여내는 게 가능은 할지 의심스러웠다. 되니까 마나석이 있는 거겠지만.

‘어려운 길이 되겠구만…….’

내가 이마를 톡톡 두드리고 있자, 첼러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레스토레이션을 사용해야 하는 겁니까?”

“그게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할지 걱정이 앞서네.”

침울하게 중얼거리자 덩달아 시름에 잠긴 첼러스가 고민하는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하얀 이마에 정갈하게 내려와 있던 보송보송한 백금발이 사르르 흩어졌다. 빛이 나는 외모를 보고 있으니 답답했던 속에 잠시나마나 빛이 깃드는 느낌이 들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외모는 흔치 않을 거야.’

나는 나른한 숨을 토하며 그의 얼굴을 구경했다. 첼러스가 앞으로 몸을 기울여 내가 적어놓은 수첩을 확인했다.

“리커버리 약물을 만드시려는 겁니까?”

“응.”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알고 있네?”

퍽 의외여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아는 환상 속 약물일 줄 알았는데.”

첼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유명한 물건입니다. 사람들 입에도 근거 없는 소문으로 자주 오르내리곤 합니다.”

“그렇구나.”

“제가 기사 훈련을 받았을 무렵에도 자주 화제에 올랐었습니다.”

“왜?”

“기사들은 다칠 일이 많으니까요.”

그가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며 흐릿한 어조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전장에 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생기는 건 순식간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검을 놓아야 하는 기사들에겐 그야말로 꿈의 물건이었지요.”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칠해진 환상물약사전을 내려다보던 첼러스가 점잖게 미소 지었다.

“만들어진다면 많은 이들의 희망이 되겠군요.”

첼러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호숫가에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는 한 줄기 햇살처럼, 곧고 우직한 시선이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셨군요.”

“아, 아직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는 건 아니야.”

나는 두 손을 휘휘 저으며 발을 뒤로 뺐다.

“방금도 만들고 싶은데, 막히는 부분이 있다고 했잖아.”

“누군가는 시도하기 전부터 포기하곤 합니다. 카카나와 다르게 말입니다.”

첼러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리며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의 신념을 존경합니다.”

“내 신념?”

나는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그런 단어는 첼러스에게나 어울릴 법했다. 내 가치관을 다듬어보기 시작한 것도 비브로스를 만난 이후부터이니, 당연히 나만의 갈고 닦인 신념 따위 있을 리 없었다.

“리커버리 약물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으로 들이치는 햇빛을 등지고 앉은 첼러스가 책을 덮으며 물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질문을 받고 조금 당황했다.

‘갑자기 물어보니까 생각이 안 나네.’

무의식적으로 흐르는 생각의 흐름들을 억지로 되짚어 보며 고민했다. 그러자 걸을 수 없게 된 늑대 수인족이 퍼뜩 떠올랐다.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치료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

타도라와 닮은 데다 늑대 수인족이라는 점까지 합해져서 눈에 계속 밟히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마탑으로 보낸 후 계속 신경이 쓰였다.

비브로스의 별장으로 들어오고 난 후에도 타도라가 고스란히 컸다면 딱 그런 모습일 것 같다며 혼자 상상을 부풀리곤 했다.

‘그럴 리 없겠지? 타도라는 그때 친구들이랑 멀리 도망쳤으니까…….’

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쓸데없는 추측들을 잘라냈다. 이런 생각은 한 번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 같아서, 깊이 잠기고 나면 벗어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었다.

나는 상념을 지워내고 대답했다.

“다리 힘줄이 잘려서 걷지 못하게 된 늑대 수인족, 기억해?”

“스라일리 경매장에서 자살을 시도했던 여인 말씀이십니까?”

나는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때문이었던 것 같아. 걷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그게 시작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치료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첼러스가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계속 어려운 것만 물어보네.’

나는 턱을 괸 채 눈을 나른히 뜨고, 천천히 기억 속을 헤엄쳤다. 방 깊은 곳까지 길게 들어오는 햇살과 찬란한 백금발, 낮은 소음을 내며 작동하는 냉기 마도구들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긴장되어있던 어깨에 힘을 빼고 얘기했다.

“불편해서.”

“불편.”

“응. 사람들을 치료할 때 제약이 생기니까.”

“복종 포션의 해독제를 만들려고 하신 이유도 비슷하겠군요.”

첼러스가 나와 깊이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을,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

첼러스의 말이 맞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한 질문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조금씩 감이 잡히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 나를 움직이도록 만들고 있는지 짚어주고 있었다.

내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첼러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리커버리 약물을 만드는 것도, 치료사가 되려는 것도, 복종 포션의 해독제를 만들려고 하는 것도, 모두 일관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첼러스가 눈에 사랑을 담고서 내가 부정했던 나의 신념을 소중히 화제에 올렸다.

“그게 신념입니다. 카카나의 태도를 결정하는,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생각과 믿음 말입니다.”

“…….”

“그토록 분명한 신념은 오랜만에 보아서, 처음엔 조금 신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 눈이 갔습니다. 카카나에게.”

나는 두어 차례 눈을 끔뻑이다가, 그가 읽고 있었던 책으로 시선을 두었다.

“초월자가 되어서, 아니 초월자가 되기 이전에도 카카나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첼러스가 담담하게 고백했다.

“제국에게 배신당해 긴 삶을 흘려보낸 후 만난 사람이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황궁 사람들을 모두 죽였을 겁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첼러스가 눈을 내리깔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인간적인 마음은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으니까요.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권 찬탈을 위한 피바람이 불어도, 아무런 감흥 없이 지켜보았겠지요.”

“…….”

“제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신념조차 모두 잊은 채 말입니다.”

왜인지, 그 말을 듣자 아르모어가 떠올랐다. 용사들 중 가장 잔혹하며, 언제나 무덤덤한 표정의 아르모어. 용사들조차 그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용 수인족의 마지막 후예이자 옛 왕.

나는 탁, 소리와 함께 잡념에서 깨어났다. 첼러스가 부러 소리 내어 두터운 하드커버 책을 상에 내려놓은 탓이었다.

“요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아까랑 똑같이 조곤조곤 말을 하고 있을 뿐인데, 왜인지 긴장이 되었다. 나는 마른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뭔데?”

“저는 질투가 많은 사람이더군요.”

그것은 나도 차차 깨닫고 있는 바였다. 스라일리 경매장에서 은근슬쩍 내비쳤던 첼러스의 독점욕은 평소엔 어찌 눌러놓고 살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강했다.

“성격이 조금 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엔 안 그랬어?”

“무언가를 이토록 원해본 경험이 없으니, 변한 건지 아니면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정중하게 물었다.

“제가 그쪽으로 다가가도 괜찮겠습니까?”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야릇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거절하기도 뭣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첼러스가 내게 가까이 걸어왔다. 그리고 허리를 숙였다. 깨끗한 비누 향과 함께 얼굴이 확 가까워졌다.

바짝 긴장하며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자, 뺨과 입술로 상냥한 입맞춤이 쏟아졌다. 사랑스러워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소중하게 보듬는 느낌의 입맞춤이었다.

나는 뽀뽀세례가 끝난 후 벌게진 얼굴로 눈을 떴다. 근거리에서 첼러스가 나를 향해 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은 제게 집중해주시는군요.”

“지금은?”

“아까는 대화 도중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중간에 아르모어를 생각했음을 떠올렸다.

‘초월자들의 눈썰미들은 대체 다 어떻게 되어먹은 거야?’

나는 황당해져서 눈을 끔뻑였다.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인사들이니 그럴 수야 있지만, 딴생각하는 것까지 족족 잡아내니 조금 무서워졌다.

‘들킬까 봐 용사들 앞에선 나쁜 생각도 못 하겠다.’

나는 약간 붉어진 볼을 슥 쓸면서 그의 어깨를 밀었다. 첼러스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미안해. 내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는 게 습관이 되어버려서.”

“괜찮습니다.”

“근데 궁금한 게 있어.”

첼러스가 얘기하라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질투가 많은데 어떻게 참고 있는 거야?”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다. 첼러스는 좀체 허투루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말 하나하나에 무게가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참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스라일리 경매장에서처럼 가끔 그 일면을 보여줄 때마다 놀라워서 불쑥 치솟는 호기심을 참기 힘들었다.

“다섯 명에게 구애를 받고 있는, 현 상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제 감정보다 카카나가 편하고 행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 잘 참을 수 있습니다.”

첼러스가 내 손을 입가로 가져가더니 손등키스를 하며 대꾸했다. 대사와 행동까지 헌신 그 자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과분한 사람인 것 같은데.’

나는 심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좋다고 이렇게까지 사랑해주는 걸까.’

“카카나의 웃는 얼굴을 보면 어두운 감정은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그의 밝은 호수빛 시선이 나를 적시려는 따스한 봄비처럼 내게 촉촉하게 쏟아졌다.

“저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제게 집중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대화 상대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이미 일반적인 관계에서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앞으로 주의할게.”

“그래주신다니 기쁩니다.”

첼러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일부러 거리를 벌리는 듯했다.

“제가 시간을 너무 빼앗은 것 같군요.”

첼러스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잠시 미뤄두었던 치유연금물약 관련 자료들을 훑어보았다. 커다란 책상이 첼러스의 자리였던 부분을 제외하고 온통 내 서류들로 엉망이었다.

그것을 정리하기 위해 팔을 뻗자, 첼러스가 자신의 책을 챙겨들고 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집중하실 수 있게,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아…….”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려다가, 뒤늦게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같이 있어서 뭐 하려고.’

그리고 적당히 인사치레를 하며 그를 배웅했다.

“오늘 대화 상대가 되어줘서 고마워.”

첼러스가 소리 없이 웃으며 대답을 대신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 어려워…….’

그냥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이렇게 벅차면서 사랑은 무슨. 연인이 아니라 친구 사이였어도 다섯 명과 함께 생활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서적들을 정리했다. 비브로스에게 물을 것들을 미리 적어두어야 했다. 이럴 때만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점이 도움이 되었다. 2순위로 밀려난 생각들은 모두 지워주기 때문이다.

나는 책상에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고 앉아 열심히 필기를 시작했다.

시간은 금방 흘러 오후가 되었다. 나는 부푼 마음을 안고 비브로스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는 벌써 약물을 제조하고 있었다. 나는 수첩을 꺼내, 가마솥의 약물들을 휘젓고 있는 비브로스에게 궁금했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교수님, 레스토레이션 마나석을…….”

“안 돼.”

그리고 뭘 얘기해보기도 전에 까였다.

“저 아직 질문 끝나지도 않았어요!”

나는 기가 차서 소리쳤다.

“안 들어봐도 돼. 레스토레이션은 안 된다, 카카나.”

“하지만…….”

“이제 치유연금물약 하나둘 만드는 애송이가 꿈도 크네.”

비브로스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푸욱, 한숨을 쉬었다.

“카카나. 레스토레이션이 얼마나 복잡한 마법인지는 알고 얘기하는 거니?”

그가 가마솥 안의 끈적한 약물을 막대로 휘휘 저으며 혀를 찼다.

“별 다섯 개짜리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잖아. 뭐 얼마나 대단한 물약을 만들려고 레스토레이션을 넘봐?”

막대가 가마솥에 빠지지 않도록 잘 기대어 놓은 비브로스가 휘적휘적 작업대로 걸어가더니, 미리 따라 놓았던 냉커피를 쭈욱 들이켰다. 그의 눈 밑 다크서클이 광대뼈 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런 건 교수님 기분 좋을 때 물어봐야 되는데…….’

나는 곤란하게 얼굴을 구기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뺨은 푹 들어가고 입술은 허옇게 말라붙어서 갈라져 있었다.

‘잠 못 이루는 고민거리라도 있나?’

비브로스의 성정은 말도 못 하게 예민했다. 조금이라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으면 잠을 자지 못했다. 성격도 고약해서 수면제를 먹지 않으며 끝까지 제 고민거리와 씨름했다.

나는 한껏 날카로워졌을 그의 기분을 살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커버리 약물을 만들려고…….”

“푸읍!”

불행히도, 비브로스가 마시려던 검은 커피를 가마솥 방향으로 힘차게 뿜었다. 펑, 소리를 낸 가마솥에서 연보라색 연기가 뭉게뭉게 올라왔다. 한눈에 봐도 약물을 거하게 말아먹은 대형 사고였으나, 비브로스는 제 약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뭐를 만들어? 리커버리 약물? 그 말도 안 되는 환상 물약 말이냐?”

“저어, 교수님?”

“그걸 만들 생각을 하다니!”

그가 박수치며 감탄했다.

“물론 가능성이 있으니까 네가 찔러본 거겠지? 그렇군, 그래서 레스토레이션을 건드려보려고 했던 거야!”

“교수님? 가마솥에서 이상한 거품 같은 게…….”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너라면 그 마나석을 약물에 녹여내기가 얼마나 까다로울지 충분히 알고 있을 게 아니냐.”

비브로스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얘기를 꺼낸 게 이상했어. 다른 좋은 마법들이 충분히 있는데…….”

내 신경이 자꾸 가마솥으로 쏠리자, 그가 귀찮다는 듯이 혀를 차며 빗자루를 들고 왔다. 그리고 밀도 높은 하얀 크림 거품 같은 것이 계속 올라오는 가마솥 근처의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솔에 거품이 엉겨 붙든 말든 상관 않고 쓸어서 구석으로 밀어 넣는다. 비브로스가 정체불명의 거품과 액체로 엉망이 된 빗자루를 대충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눈을 빛냈다.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마법의 부족한 부분은 약물로 보완하는 게 일반적이다. 더 강력한 마법을 때려 넣는 게 아니라.”

“불안정하기 때문에요?”

“바로 그거지.”

비브로스가 테이블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어려운 마법일수록 마법식이 복잡하기 때문이야. 일단 여기 앉아라.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나는 냉큼 그가 가리킨 자리에 가서 앉았다. 비브로스가 속사포같이 말을 이었다.

“마법식이 복잡하면 아주 조금만 틀어져도 약물이 엉망진창이 된다. 그런 마법은 마나석에 넣는 것도 고역이고, 물약에 풀어내는 것도 고역이야.”

“그럼 별 다섯 개짜리 마나석을 사용해야 할 때는 어떻게 해요?”

“사용할 일이 거의 없지만, 사용한다면 약재부터 아주 까다롭게 골라야 해.”

비브로스가 연구실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약재들로 시선을 돌리며 얘기했다.

“우선 그 마법과 상충하는 놈들이 있어선 안 돼.”

‘상충?’

마법이 잘못 녹아 나와서 약물이 망가졌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상충한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모든 생명엔 마나가 깃들어 있어. 그리고 약재들은 대부분 한때 살아있었던 생명체야.”

“식물이니까요?”

“그래. 마나의 잔여물이 남아있지. 그게 마법과 상충하면 터져버리고 말아.”

비브로스가 설명을 하다 말고 미간을 구겼다.

“얘기를 하기 전에,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자. 네가 만들려고 하는 약물이 정확히 뭐야? 정말 만병통치약이라도 만들 생각인 거냐?”

비브로스에게도 리커버리 약물은 퍽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만들겠다는 사람이 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에요.”

“치료사 협회 놈들을 뒤집어 놓는 건 좋지만, 너무 눈에 띄면 좋지 않을 수도 있어서 말이다.”

그의 생각이 이곳과 멀리 떨어진 과거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러면 안 좋은 일에 휘말려 객사할 위험도 늘어날 테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가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아무래도 방금까지 나눴던 이야기가 여태 그를 심란하게 했던 무언가와 맞닿은 주제였나 보다.

괴로운 생각이 머릿속을 침투해 들어온 사람처럼 그가 미간을 구긴 채 말을 이었다.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거니까 말이다.”

비브로스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찝찝한 생각을 털어내듯이 대화를 재개했다.

“미안하다. 그럼, 네가 만들려는 약물은 어떤 효능을 가지고 있는 거냐.”

“외상을 치료하는 가장 강력한 치유연금물약은 그레이트힐 물약이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그런 종류의 약물들은 전부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어요.”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던 비브로스가 단숨에 핵심을 짚었다.

“골든타임을 말하는 거냐?”

“네. 치유연금물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을 놓쳐버리면, 아무리 약물을 복용해도 소용없게 되잖아요.”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선언했다.

“저는 골든타임에 상관없는 약물을 만들고 싶어요.”

“예를 들면?”

“몇 년 전에 입은 외상이어도, 나을 수 있게 하는 약물이요.”

비브로스가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내상이나 저주, 감염, 질병 같은 건 해당이 안 되는 거냐?”

“네, 오직 외상이요.”

비브로스가 걱정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첨언했다.

“레스토레이션 마법이 강력한 회복 마법이긴 하지만, 몇 년 전 상처까지 씻은 듯이 없애주진 못한다.”

“물론 알고 있어요. 제가 만들 약물을 강화해주기만 한다면 상관없어요.”

“생각해둔 약재들이라도 있는 눈치구나.”

“네.”

나는 생각해두었던 약재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헤헤 웃었다.

“연금술사랑 실습을 하고 나면 바로 만들어보려고요.”

“그래?”

비브로스가 무테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얘기했다.

“그럼 지금 가보자꾸나.”

잠깐 바깥바람 좀 쐬자는 말투다.

“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추켜올렸다. 비브로스가 어서 일어나지 않고 뭐 하냐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싶어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연금술사님이랑 싸운 거 아니셨어요?”

그래서 실습 일정을 앞당기고 싶어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비브로스랑 함께 할 수 있는 연습들은 끝낸 지 오래였기에, 여태 소소한 치유연금물약을 만들어보며 시간을 때웠었다.

‘이렇게 쉽게 가자는 말이 나올 줄 알았으면 찔러나 볼걸.’

나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물론 대판 싸웠지.”

비브로스가 여상한 어투로 대답하다가 돌연 열불이 솟구쳤는지, 갑자기 버럭 소리를 높이며 씩씩거렸다.

“글쎄 걔가 너를 무시하지 않냐!”

“그런 것 때문에 싸우셨어요?”

“그런 것 때문이라니? 이건 아주 큰 문제야!”

그가 볼 살을 파르르 떨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학위도 없는 애송이가 금패 치료사를 따는 건 꿈같은 얘기라며 얼마나 깎아내리던지…….”

‘그 연금술사라는 분은 엄청 현실적인 성격이신가 보네.’

나도 한때는 현실적인 성격이었던 비브로스를 바라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저렇게 변하셨는지 착잡했다.

내가 듣기에는 다 옳은 말이었지만, 그는 제 친구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는지 열심히 떠들며 울분을 터트렸다.

“네가 대단한 애라는 걸 아무리 설명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라니까?”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는 성격인 게 아닐까요?”

“걔는 그런 꽉 막힌 성격이어서 안 되는 거야!”

‘교수님도 그런 성격이잖아요…….’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었다. 뭐라 뭐라 이어지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괴었다.

“사이가 어색해지셨다면 불쑥 찾아갔다가 또 싸우는 거 아니에요?”

나는 하루빨리 실습을 하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며 바른 소리를 했다.

“조금 더 시간을 두었다 가도 괜찮아요. 화해하셔야 하잖아요.”

“무슨 소리냐. 나는 걔한테 어서 너를 보여주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됐다, 됐어.’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치마를 탁탁 털었다.

“좋아요. 가요.”

고개를 끄덕인 비브로스가 텔레포트 스크롤을 찾기 위해 선반을 뒤지기 시작했다. 잘된 일이었다. 어차피 물어볼 것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약물에 마법을 담는 과정이나 복종 포션에 대한 것 말이다.

‘복종 포션의 분석표를 받긴 했지만 그건 결국 마법의 영역이니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어.’

비브로스랑 연금술사가 함께 있을 때 물어보고 해답을 알아보는 게 최적의 방법이었다.

비브로스가 마법스크롤 두 장을 챙기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 장을 내밀며 충고했다.

“걔가 자기랑 살자고 꼬셔도 넘어가면 안 된다. 알겠지?”

“에이, 제가 왜 그러겠어요?”

“혹시 모르잖냐. 여기보다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겠다면서 널 꼬실지?”

나는 통 이해되지 않는단 얼굴로 물었다.

“뭐가 아쉬워서요?”

비브로스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네가 그 정도로 매력적인 인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마법스크롤을 찢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텔레포트의 느낌이 지나고 나자, 누가 봐도 접객실인 내부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손님에게 상품으로 보일 집처럼, 주인의 특색이 없고 밋밋한 방이었다. 집주인이 비브로스처럼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가구도 단조로운 것이 비슷한 디자인으로 대량 구매한 느낌이 났다.

곧 비브로스까지 접객실에 도착했다. 그가 익숙하게 걸음을 떼기에 따라 움직이려는 찰나,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분노에 찬 여인이 들어왔다.

“비브로스 이 자식…….”

검은 머리와 노란 눈을 가진, 까칠한 고양이 같은 인상의 여인이었다. 연금술사답게 어둡고 차분한 계열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왠지 어디서 본 얼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탓인가?’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며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얼굴들을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딱히 매치되는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뭐지.’

“내가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녀가 성질을 내며 문을 쾅, 닫았다. 유리조각처럼 신경질적인 모습에서 처음 비브로스를 만났을 때가 겹쳐 보였다.

그녀가 환영마법이 작동 중인 내 모습을 위아래로 재수 없게 훑더니, 비브로스와 아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뭐 얼마나 현장에서 굴러먹은 놈인가 했더니, 완전 애잖아?”

심지어 대사도 거의 똑같았다.

‘저 정도면 천생연분인데.’

비브로스도 내심 그녀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괜히 찔린 사람처럼 그녀의 말을 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아그리마. 내 제자 앞에서 그게 무슨 막말이야?”

“막말 듣기 싫었으면 다른 연금술사를 찾아갔어야지.”

그녀가 지지 않고 콧대를 세웠다. 비브로스가 피곤하다는 듯이 마른세수를 했다.

“치유연금물약에 쓰이는 마나석은 네가 제일 잘 만드니까 여기로 온 거 아냐.”

“…….”

“카카나에게 아무나 붙일 순 없어.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부탁한 거라고.”

“그렇게 말해도 안 되는 건 안 돼.”

아그리마가 내게로 눈을 흘기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너 저 콩알만 한 애가 치유연금물약을 새로 만드는 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

비브로스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는 좌불안석이 돼서 불안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괜히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껴서 고통 받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 입 안이 마르고 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 끌어내진 않았다. 다들 제 분야에만 몰두하는 괴짜에 철부지였지만 우선은 어른이었다. 간신히 신경을 죽이고 어떻게 하면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지 잠깐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별안간 그녀가 짜증스럽게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나는 비브로스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아무런 인테리어 소품도 없는, 한산하고 텅 빈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성격은 저래도, 나쁜 녀석은 아니야.”

비브로스가 아까보다 10년은 늙어 보이는 얼굴로 얘기했다.

“고집이 세지만 그만큼 신중해서 그런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어떤 연금술사를 소개해주든 상관없었다. 나는 비브로스가 길거리 고양이를 선생이랍시고 데려와도 감사해야 하는 처지였다. 때문에 내 눈치를 볼 이유는 조금도 없었지만, 그는 아그리마의 칼 같은 거부에 내가 상처받았을까 봐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괜찮아요. 나쁘게 생각도 안 하고요.”

“그러냐.”

“저를 믿을 만한 근거가 아무것도 없잖아요. 저렇게 나오는 게 당연해요.”

나는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게다가 교수님이랑 성격이 너무 똑같아서 조금 웃기기까지 한걸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 인성 파탄 난 녀석이랑 내가 뭐가 닮았다고.”

제 얼굴에 침 뱉는 말인 줄도 모르는 비브로스가 주먹을 떨어대며 부정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그리마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마나석이나 마법스크롤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연구실은 아닌 것 같았다.

대신 열람 테이블과 소규모 책장들이 따닥따닥 붙어 서있었다. 아그리마가 열람 테이블 중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구겨진 얼굴로 나를 살폈다.

수인족은 수명이 긴 탓일까, 일반 인간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특성이 있었다. 아무래도 본판이 반영이 되었는지 환영마법을 쓰고 나서도 제법 풋풋한 얼굴로 변한 듯했다.

“저렇게 어린애가 뭘…….”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 아그리마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자리에 앉아라.”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하는 양을 묘한 눈으로 관찰하던 아그리마가 이제야 자기소개를 했다.

“내 이름은 아그리마 트리시다.”

“저는 카니 페트리예요.”

뮤나스에서 사용했던 성을 그대로 쓸 순 없는 노릇이라, 가명을 살짝 비틀어서 소개했다.

‘이름은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으니 괜찮겠지. 가명이 이것저것 늘어나면 복잡하기도 하고.’

아그리마가 습관적으로 두 손끝을 맞대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학생.”

“네?”

“연금술사랑 만나서 하는 실습이 어떤 건지 알고 있나?”

나는 비브로스에게 이전에 들었던 내용을 똑같이 읊었다.

“마법진을 이용해 치유연금물약 만드는 걸 연습해요.”

“그래. 마법진을 이용해서 물약을 만드는 건 마나석이나 포션을 이용하는 경우보다 훨씬 어려워. 이유는?”

거기까진 비브로스에게 듣지 못했다. 연금술사에게 듣는 게 더 정확하다고 말을 줄였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그리마가 진지한 얼굴로 답변해주었다.

“그건 순발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야.”

“순발력이요?”

“위기대처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아그리마가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마나석 하나를 꺼냈다. 보아하니 마나나 마법이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빈 마나석인 듯했다.

저걸 왜 주머니에 넣고 다니나 의아했지만, 곧 비브로스와 나도 약물을 챙겨 다닌다는 걸 깨닫고 납득했다.

“마나석은 원래 마나가 담기는 돌이지, 마법을 담는 돌이 아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 담을 수 있는 마법은 한정되어있고, 담는 방법도 까다롭고 어려워.”

그녀가 연금술사를 의미하는 로브의 장식용 배지를 내려다보며 얘기했다.

“연금술사란 직업이 따로 있는 것도 이 때문이지. 쉬웠으면 마법사와 분리되지 않았을 거야.”

“그렇군요.”

“마법진은 마나석에 담지 못하는 마법을 물약에 담아내야 할 때 사용한다.”

“마나석에 담지 못하는 마법인 만큼 더 어렵겠군요.”

아그리마가 한쪽 눈썹을 스윽 들어올렸다.

“말귀를 잘 알아먹는구나.”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긍정적인 말이 나오자, 비브로스가 옆에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팔불출 같아서 그의 발등을 콱 짓밟아버리고 싶어졌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가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이제 와 새삼스레 성질 낼 일도 아니었다.

아그리마가 어지간히 하라는 듯이 비브로스를 바라보다가, 아예 내게 고개를 고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큐어 데프니스, 큐어 커스 같은 마법들은 마나석에 못 담아내. 그러면 마법진을 사용해야 하는데, 마법진은 아주 유동적이야.”

“이유가 뭔가요?”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마나의 배열을 맞춘 다음, 마나로 진을 그리기 때문이지.”

아그리마가 상상만으로 피곤해졌는지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도구를 이용해 마나량을 재서 정밀하게 조각하듯 만드는 마나석과는 달라.”

그녀가 내 근처에 있는 깃펜을 턱짓했다.

“열 사람에게 깃펜을 쥐여 주고, 동그라미를 그려보라고 지시했다 가정해보자.”

나는 다 함께 둘러앉아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사람들을 상상해보았다.

“당연히 컴퍼스 같은 건 없어. 오직 본인의 역량에 따라 그려야 해.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모양과 크기가 천차만별인 원이 나오겠네요.”

“바로 그거야. 너는 그 점을 고려해서 마법진이 약물에 녹아드는 도중 약재를 추가하거나 빼야 해. 정말이지 토 나오고 진절머리 나는 작업이지.”

‘재미있겠는데?’

[7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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