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만들어진 우연
아다르와 대화를 나누고서 방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몸을 씻었다. 그리고 할릭과 첼러스의 방을 찾아갔다.
그들은 길게 이어지는 내 심경고백을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 내가 불쾌하지 않은 선에서, 천천히 알아 가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가끔 데이트를 하고, 일부러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고, 간혹, 다정한 스킨십을 나누자고.
나는 다른 용사에게도 고백을 받았으며, 비슷한 대답을 했다고 얘기했다. 상관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고 나니 놀라울 만큼 심적 부담이 줄어들었다. 어서 치워 없애야 할 부담스러운 감정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으며, 그들 앞에서 비정상적으로 경직되던 몸도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회피하는 건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구나.’
회피하고 외면하면 당장은 도움이 된다. 눈을 돌리고 있으면 잊고 있는 동안은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 본다고 결코 없어지는 게 아니야.’
외면당한 마음은 기회가 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서 내게 관심을 달라고 호소했다. 괴롭다고, 신경이 쓰인다고, 혹은 아프고 슬프다고.
“므리나 이소리하에 대해서 알아봐야겠어.”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다 말고 그 여자를 떠올렸다. 악몽, 환청, 다양한 형태로 내 인생에 찾아와 똥을 싸지르고 사라지는 인간.
“므리나만큼은 직접 상대해야 해.”
나는 해야 할 일을 목록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내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 보려는 첫 발걸음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가방을 챙기고 본부의 1층으로 내려갔다. 용사들은 이미 한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시키고 있었다.
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말했다.
“오늘 비브로스를 만나러 갈 거야.”
“뮤나스 사립학교는 지금 방학이죠?”
스노아가 부드러이 웃으며 물었다.
“응.”
“시기가 맞아 다행이네요. 학교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니까요.”
“알렉 브래든 때문에 그러는 거지?”
메뉴를 확인하며 묻자,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가 보였던 검은 연기가 마족의 소행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럼 어디에 가기로 했는데?”
아다르가 미리 시켜두었던 샐러드 그릇을 내게 밀어주며 물었다.
“비브로스가 새로운 치유연금물약을 개발할 때마다 틀어박히던 별장이 있대. 여기서 좀 멀더라고.”
“어떻게 가려고?”
“스노아가 도와주기로 했어.”
나는 샐러드에서 특히 좋아하는 야채들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전채요리를 즐기는 동안 나머지 음식들이 도착했다. 식사는 대부분 간단식이 주를 이루었기에 금방 끝났다. 나는 스노아와 함께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방으로 옮겨갔다.
함께 갈 수 없는 게 불만스러운 듯, 배웅하러 온 용사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문득 첼러스에게로 눈이 갔다. 내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유순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은근히 침울해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 얼굴을 보자 어떤 충동이 가슴을 비집고 위로 올라왔다. 평소라면 외면했을 것이다. 여태 그래왔듯이.
그러나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 걸어가서 멱살을 잡고 밑으로 끌어당겼다. 눈을 동그랗게 뜬 첼러스가 놀란 것과 별개로 순종적으로 허리를 숙여주었다.
그의 뺨에 쪽, 짧게 입맞춤을 했다. 피부가 워낙 좋아서 뽀뽀하는 감촉마저 좋았다. 만족하며 미련 없이 떠나려는데, 아다르가 내 걸음을 붙잡았다.
“첼러스만? 이러면 나 너무 질투 나는데.”
아다르가 혀를 내어 제 새빨간 입술을 슥 핥았다.
“그러면 못된 짓 해버린다?”
사고 치겠다고 선포하는 앙큼한 고양이 같다.
“너한텐 지금 별로 해주고 싶지 않은데?”
나는 웃음을 참는 척 도도하게 튕겼다. 그러자 아다르의 얼굴에 크게 실망한 감정이 깃들었다. 나는 킥킥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하지만 해준다고 곤란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까치발을 띄우고 그의 뺨에 뽀뽀를 하려는 순간, 난데없이 풍경이 바뀌었다.
“엥?”
나는 풀내음이 물씬 풍기는 숲속을 두리번거렸다. 깊은 산중이었다. 사람의 흔적은 거의 없고, 오직 울퉁불퉁 나 있는 오솔길만 우리를 어디론가 인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스노아의 존재를 인식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스노아밖에 없었다.
“아직 텔레포트 하라는 말 안 했는데 왜…….”
나는 불만을 얘기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스노아가 작정하고 내 환심을 사려고 할 때 가끔 짓는, 어여쁘다 못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던 탓이다.
내가 넋이 나가서 얼굴을 구경하자 스노아가 천천히 걸어왔다.
“정말 서운해요, 카카나.”
“으, 으응?”
나는 어버버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이상하다. 이렇게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데 왜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물빛 눈망울을 쳐다보았다.
“첼러스, 아다르와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건가요? 할릭도 상당히 기대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데.”
스노아가 다시 한번 웃었다.
“설마 할릭과도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조금 아연해진 기분이 들었지만,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서로 알아 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무조건 들킬 일이었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셋이 나한테 사랑한다고 고백했거든.”
“그래서 사귀기로 하신 건가요?”
‘점점 추워지는 것 같은데.’
8월 초순이었으므로, 날씨는 끝내주게 더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팔뚝에 닭살이 돋고 있었다.
‘그늘이 짙은 숲속이어서 그런가?’
나는 팔뚝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연인 사이는 아니야. 내가 조금 헷갈리는 상황이어서, 그냥 서로 알아 가기로 했어.”
“카카나는 정말 바쁘겠어요.”
스노아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안 그래도 바쁜데, 신경 써야 할 사람이 많아서요.”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아. 오히려 즐거워. 이런 건 해본 적이 없거든.”
“네 사람이나 되는데도요?”
“그래, 솔직히 좀 많긴 한데 그래도…… 뭐라고?”
‘세 사람일 텐데?’
스노아가 쓰다듬어달라는 듯, 내 손을 제 머리로 가져와 문댔다. 나는 홀린 듯이 그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새파란 머리카락이 강줄기처럼 유려했다.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카카나.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정말 모르고 계셨나요?”
이런 식의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나는 허를 찔려서 머리를 쓸어주던 손을 멈칫, 멈추었다. 스노아가 얼어버린 내 손을 가져와 제 뺨에 기댔다. 감고 있는 눈, 유약하게 떨리고 있는 파란 속눈썹, 처연한 목소리. 보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미어져서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해주세요. 모르고 계셨나요?”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알고 있었어. 미안. 내가 무심했어.”
“그러면 위로해주실 수 있나요?”
나는 손등을 간질이는 스노아의 머리카락을 잠자코 느끼다가, 느지막하게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머금은 듯 촉촉한 물빛 눈망울이 나를 간절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위로를 바라?”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카카나가 원하는 방식이면 충분해요.”
다행히 사람을 위로해본 적은 많았다. 어렸을 때의 일이지만.
나는 엉거주춤, 그의 몸을 껴안아서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내 북슬북슬한 머리에 스노아가 얼굴을 묻는 것이 느껴졌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겠죠?”
“…….”
“그래도 좋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소홀해지는 건 싫어요.”
스노아가 자기를 안고 있는 내 팔을 풀어 조금 떨어트렸다.
“저도, 뺨키스 해주세요.”
스노아가 희미하게 열감이 오른 얼굴로 말했다.
그의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보자 덩달아 나까지 얼굴에 확 피가 몰렸다. 희귀한 약초를 발견했을 때처럼 거의 반사적인 신체반응이었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스노아보다 훨씬 빨개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으신가요?”
이렇게 솔직하게 말한 것이 조금 어색한 모양이었다. 살짝 떨리는 어조에 민망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자 백 번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나는 이미 허리를 숙이고 있는 스노아의 뺨에 촉, 키스해주었다. 그제야 슬퍼 보이던 스노아의 얼굴에 희미한 기쁨이 내비쳤다. 그걸 보자 이상하게 심장이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아누비르 본부로 돌아가는 거지?”
그를 배웅하기 위해 손을 흔들려는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아악!”
갑자기 곰의 포효에 가까운 비명이 들려왔다. 일대의 새들을 전부 날려 보내고도 남을 우렁찬 비명이다.
나는 혼비백산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비브로스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스노아를 삿대질하고 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표정이었다.
‘모자는 왜 저런 걸 쓰고 있는 거지?’
그는 흰 머리에 파티 때나 쓸 것 같은 독특한 반짝이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카카나, 바, 방금, 대체, 무슨.”
비브로스는 제 심정을 말로 표현하길 포기하고 이쪽으로 우두두 뛰어왔다.
새삼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짧은 추격전을 벌였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호러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피곤해서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달려오는 비브로스를 보자 자동으로 뒷걸음질 쳐졌다.
비브로스가 도망치려는 내 팔을 홱 잡아 제 품에 가두며 악을 썼다.
“대체 카카나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이 요망한 놈아!”
“비브로스 교수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뺨에 키스를 하다니이이이이!”
비브로스가 당장에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처럼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절규했다.
심지어 키스한 사람은 나지 스노아도 아니었다. 그러나 비브로스에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나를 스노아에게서 어떻게든 떨어트리려 애쓰며 열심히 침을 튀겼다.
“이럴 줄 알았어! 카카나만 여자아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내새끼가 아니냐! 내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단 말이다!”
비브로스가 소매로 내 입술을 거칠게 문질러 닦으며, 딸아이를 빼앗긴 철부지 아빠처럼 눈물을 글썽였다.
“안 된다, 카카나!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
‘무슨 마음의 준비!’
나는 골치가 아파져서 이마를 짚었다.
그때 비브로스가 하는 양을 가만히 관찰하던 스노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사뭇 안타깝다는 듯이 얘기했다.
“저만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셔도 소용없을 텐데요.”
“무슨 소리냐!”
“그야, 다섯 명 중 이미 네 명이나 카카나에게 고백을 했으니까요.”
명백히, 자기만 손해 볼 수 없다는 의도다.
스노아가 털어놓은 천지가 개벽할 진상에 비브로스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 감당 못 한다, 이건.’
저 얼굴을 보자마자 확신했다. 치료사와 관련해 논의하는 건 오후로 미루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단 스노아와 함께 아누비르로 돌아가는 거야. 응. 그게 좋겠어!’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 순간, 스노아가 코앞에서 사라졌다.
갔다. 가버렸다.
‘안 돼! 세 시간 후에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
왜 저렇게 급히 돌아가나 했더니 비브로스가 약병 하나를 손에 든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저 심상치 않은 색깔로 봐선 몸에 닿으면 영 좋지 않을 약물인 것 같았다.
“교수님, 드디어 미치신 거예요?”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그런데 비브로스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빽 대꾸하는 게 아닌가.
“그래! 내가 지금 눈이 안 뒤집히겠냐? 응?”
그가 내 두 어깨를 턱, 잡고 짤짤 흔들었다.
“내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감히 저것들이 꼬리를 치고 있잖아!”
‘맙소사.’
세 시간 동안 이 미친 양반이랑 단둘이서 어떻게 버틸지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쳐냈다. 내 어깨에 딱 붙어 있던 비브로스의 손가락들이 힘없이 풀리며 축 처졌다. 나는 새하얗게 산화되는 중인 교수님을 올려다보았다. 대화고 나발이고 말이 통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어떻게든 타이르는 어투로 운을 떼었다.
“교수님. 일단 진정하시는 게…….”
“다섯 명 중, 네 명…….”
“교수님, 왜 그렇게 질색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성인…….”
“뺨에 뽀뽀……. 카카나가…… 저런 살아있는 유물 같은 놈들에게…….”
넋이 나가 있던 비브로스의 초록색 눈알에 불시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가 가히 불타오른다 해도 무방할 시선을 보내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이 주제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는구나!”
“예?”
“별장으로 안내할 테니, 따라와라!”
비브로스가 기세등등한 눈으로 엄포를 놓더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대로 걸음을 돌려 산을 내려가고 싶은 심정에 휩싸였지만, 애써 추스르고 그의 뒤를 쫓았다.
별장은 굉장히 컸다. 농담이 아니고, 남작의 저택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비브로스는 귀족들 중에서도 이단자 취급을 받는 작자였다. 약초에 미친 사람으로 워낙 유명한 데다 말투도 귀족들 표현에 따르면 ‘저렴한’ 축에 속해서 다들 그를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대놓고 그러진 못했다. 비브로스의 재력에 짓눌려 찍 소리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정도로 의복이고 체면치레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소박한 별장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도 못하게 으리으리했다.
‘와, 저렇게 큰 별장엔 약초방이 몇 개나 있을까?’
나는 군침을 삼키며 눈을 빛냈다. 나와 비슷한 비브로스의 성향상, 별장의 방 대부분에 손님이 아닌 약초가 모셔져 있을 확률이 높았다.
‘작업장이어서 일부러 넓게 지은 게 틀림없어.’
한 걸음 한 걸음이 가시밭길이었는데 갑자기 꽃밭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 비브로스가 날 잡아먹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날 염려해서 대화를 조금 나누겠다고 한 거잖아.’
벌써 기억이 미화되고 있었다. 나는 자기합리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긍정회로를 돌렸다.
‘별장이 위치한 이 산도 통째로 사유지라던데. 약초가 많이 자라나?’
빽빽하게 자란 풀무더기 틈을 살피는 사이, 비브로스가 문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별장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팡, 파팡―
안에서 마도구를 이용해 만든 간이 폭죽이 화려하게 터진 탓이었다.
몬스터를 마주한 초식동물처럼 몸을 굳혔다. 반달 모양으로 열을 지어 선 사용인들이 모두 비브로스와 같은 반짝이 고깔모자를 쓴 채 색색의 응원 수술을 흔들어재끼고 있었다.
“별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짝짝짝짝짝!
시끄러운 박수소리가 터졌다. 나는 내가 무슨 작위 수여식에라도 온 줄 알았다.
“예?”
“부디 머무르시는 동안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연구 활동도 즐겁게 하시길 바라요!”
“행복한 시간 되세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는데, ‘귀여운 제자님 오신 날!’이라는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문구가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었다. 고급스러운 기둥과 가구에도 알록달록한 풍선이 따닥따닥 붙어 있다.
어디서 자꾸 생일 파티에서나 쓰일 법한 음악소리가 들린다 했는데, 구석에서 전축이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알고 있었다. 비브로스 샥스가 제정신이라고 보기 힘든 사람이라는 걸. 첫 만남부터 그의 범상치 않은 포스를 느끼지 않았던가.
‘근데 왜 점점 진화하는 느낌이냐…….’
사용인들 중 한 명이 내게 선물 상자를 건네주었다.
“비브로스 님의 선물이에요!”
상대하는 것마저 피곤하게 느껴져서 일단 받아들긴 했으나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모두 기쁘고 행복한 얼굴이었으면 또 모른다. 비브로스는 아직까지 옆에서 세상의 모든 불행을 끌어안은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사용인들은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그의 역동적인 낯짝에 한참은 익숙해진 사람들처럼, 아랑곳 않고 웃으며 날 환영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이 광경이 퍽 웃겨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장에 오면 환영파티를 열어주려고 했었나 보구나.’
나는 억지로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따라와라.”
비브로스가 음울한 어조로 말하고는 나를 객실로 안내했다.
그의 뒤를 쫓아가는 동안 환영파티가 안겨준 충격은 금방 지워졌다. 저택 전체에 쌉싸름한 약초 냄새가 은근하게 배어 있었다.
‘객실에도 혹시 약초가 있나?’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며 비브로스가 안내한 객실로 따라 들어갔다.
방은 냉기를 뿜는 마도구가 있어서 적당히 선선했다. 너무 더워서 안 그래도 온몸이 땀범벅이었는데 금방 상쾌해졌다.
‘약초는 없네. 약물은 진열장에 몇 개 보이는데.’
“용사들이랑 사귀고 있는 거냐?”
소파에 앉은 비브로스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물었다. 아쉬운 대로 약물의 어여쁜 자태를 구경하던 나는 바로 엊그제 저런 식으로 술을 들이마셨단 사실을 떠올렸다.
‘속이 엄청 착잡한가 보네.’
그런데 고깔모자가 너무 화려해서 어두운 얼굴과 매치가 되지 않았다. 황금색 반짝이를 얼마나 뿌려놓았는지 번쩍번쩍 빛이 나서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대화에 상당히 집중이 안 됐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용사들이 제게 마음을 털어놓은 거예요. 한 명 빼고요.”
비브로스가 아주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눈가를 구겼다.
“용사들은 고백하고 너는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거냐? 그런데 뺨에 뽀뽀를 한 거고?”
“뺨 뽀뽀 정도는 친구끼리도 하잖아요.”
“그들이 널 친구로 보지 않으니 문제인 거 아니냐.”
비브로스가 한숨을 쉬었다.
“계속 얘기해봐라.”
나는 이블라에게 했던 말들을 잘 정리해서 얘기해주었다. 팔짱을 끼고 듣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간혹 마른세수를 했다.
엊그제부터 뜨거운 감자였던 주제를 연달아 이야기하려니 정신적인 소모가 컸다.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던 달달한 쿠키로 부족한 힘을 채워 넣으며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풀리는 건 드문 일이잖아요.”
이 부분부터는 이블라나 용사들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비브로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건 갑자기 무슨 소리냐?”
“제가 연애를 하기엔 처한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거든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용사들이 상관없다고 하니까 당장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있지만…….”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더 조심하고 싶어요. 용사들의 감정을 재밋거리로 여기고 싶지도 않고요.”
“…….”
“그냥, 신중하고 싶다고요.”
“그러냐.”
심각한 얼굴로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비브로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신중하고 싶다는 네 말을 들으니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얘긴데 말이다.”
“네.”
“치료사가 될 때까지 용사들이랑 이 별장에 머무르는 건 어떠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사들이 내게 고백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발작을 했던 사람이라,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탓이다.
“내가 너를 너무 아기처럼 생각한 것 같다.”
비브로스가 반성하는 투로 말했다.
“물론 지금도 분하지만, 네가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부딪쳐보겠다는데 마냥 품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니냐.”
“…….”
“못 본 사이에 생각이 많이 성숙해졌구나, 카카나.”
대견하다는 눈빛이 날아들자 몸 둘 바를 몰라졌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나를 순수하게 자랑스러워하는 시선이 생소했다.
용사들도 그렇고 비브로스도 그렇고, 함께 있으면 매번 새로운 경험을 안겨줬다. 그게 좋으면서도 낯간지러웠다.
“그, 크흠, 감사해요, 교수님. 안 그래도 매일 몇 시간 동안 저만 이곳에 보내는 걸 되게 불안하게 여겼거든요.”
적은 마족이었다.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부분까지 말하면 비브로스가 자지러질 것 같았으므로, 적당히 에둘러 표현했다.
“여기에 세 시간만 혼자 가게 해달라고 설득하는 데도 힘들었어요. 교수님이 저보고 꼭 혼자 와달라고 하셨잖아요.”
“당연하지. 나는 너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걔네들을 왜 불러?”
비브로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이 손을 흔들어 재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지만 말이다. 근데 용사들도 참 어지간한 놈들이구나. 여기서 네가 위험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리 유난을 떨어?”
나는 허허로이 웃으며 쿠키를 집어먹었다. 비브로스가 흠, 침음을 삼키며 혼잣말을 했다.
“뭐, 그런 점은 마음에 드네.”
“크업!”
쿠키를 먹다 말고 사레가 들렸다. 목이 막혀서 미지근하게 식은 홍차를 목구멍에 들이붓는 사이, 비브로스가 상념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내 눈앞에 용사들이랑 함께 있는 게 안심이 될 것 같군. 못된 짓을 하지는 않는지 편하게 감시할 수도 있고…….”
“콜록, 콜록, 뭐라고요?”
“아니다. 남는 방이 많으니, 다 불러서 여기서 지내도록 해라.”
그가 자리에서 쌩하니 일어나 전신용 수정구슬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신이 연결되었다.
“스노아 칼리시스 맞나?”
[네, 맞아요.]
그야말로 속전속결이다.
“오늘 내로 짐 싸들고 별장으로 오는 건 어떤가. 방을 내주도록 하지.”
용사들이 거절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비브로스는 간단하게 용건을 끝내고 소파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차를 홀짝였다. 심지어 용사들은 따로 쌀 짐도 없었다. 있는 것마저 스노아가 아공간에 집어넣고 오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비브로스의 별장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마중 나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여유는 없었다.
비브로스와 나는 오늘 의논하기로 했던 치료사 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러 연구실로 들어왔다. 비브로스가 나무테이블 앞에 앉았다. 나는 그를 따라서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드디어 시작이었다.
“치료사가 되기 위해 혼자 알아둔 것들이 있겠지? 그것부터 읊어보고 궁금한 점을 말해봐라. 알려주마.”
나는 책을 읽으면서 혼자 알아냈던 부분을 떠올려보았다.
치료사는 모두 황실치료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가 적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읽을 수 있는 책도 한두 권 정도가 전부였다.
알고 있는 건 극히 드물었지만, 우선 얘기해보았다.
“치료사는 두 부류로 나뉜다고 알고 있어요. 은패 치료사, 금패 치료사.”
“차이는 알고 있어?”
“은패 치료사는 시험에 통과한 치료사예요. 금패 치료사는 새로운 치유연금물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말하고요.”
“맞다.”
비브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이 대충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는 알고 있어?”
“네.”
“그러면 자격조건은?”
나는 침울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학위가 있어야 해요.”
“맞아. 그게 제일 큰 문제지. 학교를 졸업해야 하는데, 너는 뮤나스마저 중도에 자퇴하지 않았냐.”
비브로스가 두 손을 맞잡고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치료사 협회는 이런 데에 몹시 까다롭다. 학위가 있어도 어느 학교냐에 따라 차별을 하는 양반들이지. 자부심이 넘치거든.”
“그렇군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전에도 학교를 다닌 적이 없냐? 아예 학위가 없는 거야?”
비브로스가 사무적인 어투로 물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반드시 학교를 졸업한 게 아니어도 돼. 교수에게 개인과외를 받고 학교의 승인을 받아서 딴 간이학위만 있어도 시험은 칠 수 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고민했지만, 곧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있긴 해요.”
비브로스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있어?!”
“너무 놀라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자 비브로스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미안하다. 수인족이니 당연히 없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거든. 제국에서 신분이 낮지 않냐.”
그런 것치고 비브로스는 뮤나스에서 내 종족을 알게 되었을 때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약물 외의 요인들은 하등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 도움이 된 듯싶었다. 게다가 함께 있는 사람이 용사들이지 않은가. 내가 수인족이란 사실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학위에는 왜 이렇게 놀라지?’
나는 민망해하는 비브로스를 보며 미간을 그러모았다.
‘나를 가르친 스승이 따로 있었다는 걸 신경 쓰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약학을 가르쳐준 사람과 독설을 한 사람은 다르다고 한 적이 있으니까, 호기심 때문일지도 모르지.’
내 생각을 반증하듯, 비브로스가 곧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했다.
그간 궁금한 게 많았는데 마침 화제에 오르니 이것저것 물으려는 눈치였다. 그래서 널 가르친 사람은 누구냐, 나보다 유능한 사람이냐, 대강 이런 질문일 듯했다.
나는 그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척하며 눈을 굴렸다. 입도 뻥긋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랑 엮여서 좋을 게 없어. 더 이상은…….’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스승님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칠 순 없었다. 나는 조급하게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물론 학교를 다니면서 딴 학위는 아니에요.”
“사정이 복잡했겠구나.”
비브로스가 알 만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종족에 무지한 제국에서, 수인족에게 학위가 있다는 건 비현실적인 일이니까 말이다.”
“맞아요, 교수님. 그 와중에 딴 간이학위예요.”
나는 중요한 부분을 짚어주었다.
“정상적인 경로로 얻었을 리 없다는 소리죠.”
“…….”
“세상에 드러내서 좋을 게 없는 학위거든요.”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키며 되물었다.
“학위를 숨길 순 없는 거죠?”
“그건 불가능해.”
비브로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전 치료사가 될 수 없는 건가요?”
‘정식 은패도 없이 치료행위를 하는 돌팔이가 되고 싶진 않은데.’
간이학위를 가지고 있는 이유도 제자가 자격도 없이 약물을 만드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고 스승님이 못 박았기 때문이다.
우울하게 눈썹을 그러모으자 비브로스가 낙담 말라는 양 말을 덧붙였다.
“아니, 아니다. 괜찮아. 더 어려운 길이긴 하지만 방법이 있어.”
“정말요?”
“치료사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 만한 치유연금물약을 먼저 개발하면 돼.”
비브로스가 진열장으로 걸어가 약병 몇 개를 챙겨오더니, 나무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이 약병을 봐라. 작은 무늬가 들어가 있지?”
“네.”
“이건 치료사 협회에서 인증한 약물이라는 뜻이야. 시중엔 수많은 약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지. 학위가 없는 약제사가 만든 약물까지 합해서.”
비브로스가 동그라미 안에 이파리 모양이 들어가 있는 무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유리병의 볼록한 무늬가 그의 손톱에 걸리면서 우둘투둘한 소리를 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크가 달린 약물과 아닌 약물의 가격은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는 거야. 안전하고 효과가 보장된 약물이기 때문이지.”
“그런 약물을 만들라는 건가요?”
“그래, 만들어서 보내는 거야. 치료사들의 눈을 뒤집히게 만들면, 시험 칠 자격을 얻을 수 있어.”
‘그럼 어떤 치료사가 되는 거지?’
은패 치료사는 협회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금패 치료사는 우선 은패를 획득한 뒤에 새로운 약물을 개발해야 될 수 있다. 근데 내가 시도하려는 건 순서가 반대여서 영 헷갈렸다.
“시험을 통과하면 전 은패 치료사가 되나요?”
“아니, 치료사의 눈을 뒤집히게 만든다는 건 말 그대로야.”
비브로스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새로 개발한 물약은 네게 금패의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다. 그러니 시험만 통과하면 바로 금패 치료사가 될 수 있어.”
비브로스가 책꽂이에 꽂혀있던 책 여러 권을 들고 와 앉으며 비장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금패 치료사가 되었으면 한다.”
‘잘됐네.’
나는 그의 호주머니에서 간혹 찬란하게 빛나곤 했던 금패를 떠올렸다.
‘어차피 내 목표도 금패 치료사였으니까.’
이미 있는 조제법을 활용해 기존의 약물만 만들 줄 아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 원하는 약물을 자유롭게 조제할 수 있길 바랐다. 그게 내가 치료사가 되려는 궁극적인 이유인 데다, 약물 조제의 묘미기 때문이다.
‘만들고 싶은 약물이 수천 가지는 되는 것 같아.’
만들 수 있는 약물의 범위가 넓어진다고 생각하자 기대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 표정을 본 비브로스가 씨익 웃었다. 그리곤 활짝 펼친 두 손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으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우선 치유연금물약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마! 원래는 이론만 배우는 데도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지만…….”
“오래요? 얼마나요?”
“네가 이곳에 죽치고 앉아 공부만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란 거 안다.”
비브로스가 기겁한 내 얼굴을 보더니 안심시키려는 듯 어깨를 툭 치며 말을 끊었다.
“하지만 난 이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어.”
“왜요?”
“보통은 막 학교를 졸업한 애송이들이 치료사 절차를 밟아. 하지만 너는? 비록 정식 학위는 없어도 그럭저럭 잘하는 학생과는 궤를 달리하지 않냐.”
비브로스가 그런 범재들과 너는 비교도 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거의 모든 약물을, 나보다 더 훌륭하게 조제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지.”
“일반 약물은 치유연금물약과 다르잖아요.”
“기초가 탄탄하면 금방 따라올 수 있어. 치유연금술은 응용학문이기 때문이야. 수련 중인 수습치료사들도 발목을 잡히는 건 결국 기초거든.”
비브로스가 두 손을 맞비볐다. 어서 나와 치유연금술을 개발하고 싶은 사람처럼, 아까부터 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넌 그럴 일이 없지. 이건 아주 큰 메리트야.”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건가요?”
“단축하고도 남지. 일주일 동안 이론을 훑어보고 이후부턴 실습 위주의 치유연금술을 속성으로 진행할 거다. 따라올 수 있겠지?”
나는 아랫입술을 씹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에 부푼 비브로스의 눈빛에서 번드르르하게 흐르는 광기가 느껴져 약간 오싹했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금방 신경 밖으로 밀려났다. 비브로스가 건네준 책을 펼쳐보자마자 관심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약초 관련 도서를 읽으면 언제나 그랬듯, 나는 치유연금술의 세계로 순식간에 빨려들어갔다.
***
커다란 손이 내가 읽고 있는 책의 페이지를 덮었다.
미간을 구기고 고개를 들었다. 아다르가 껄렁껄렁한 자세로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슬슬 대화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느냔 눈빛으로 테이블을 턱짓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용사들이 서재의 커다란 열람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스노아가 알아낸 마족의 정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기 때문이었다. 치유연금술에 푹 빠진 내가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으므로, 용사들이 직접 서재로 발걸음을 해준 것이다. 그럼에도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대화가 계속 끊기고 있었다.
“이야기를 빨리 끝내는 게 너에게도 좋잖아.”
아다르가 나를 타일렀다.
“치유연금술에 집중하고 싶지?”
“응.”
아다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책을 잡은 손에 슬쩍 힘을 줬다.
“그러면 이건 내가 잠깐 보관할게. 품에 책을 안고 대화에 집중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순간 발끈했지만, 그의 말이 맞는 터라 머쓱하게 책을 잡은 손을 놓았다.
“마족이랑 관련된 이야기라 너도 주의 깊게 들어야 해.”
“알고 있어. 미안.”
“괜찮아. 네가 약초에 반 미쳐 있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아니까.”
아다르가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며 자리에 앉았다. 심드렁하게 지나치는 얘기치곤 말에서 뼈가 느껴졌다.
나는 눈썹을 휙 치켜 올렸지만, 곧 자업자득이란 생각이 들어서 입매만 잠깐 씰룩이고 말았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스노아가 원목으로 된 열람 테이블에 작은 돌을 얹었다.
‘마나석인가?’
마나를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비싼 값에 판매되는 돌.
대부분 강낭콩 모양을 하고 있고 양 끝에 소용돌이 점박이무늬가 있다. 마나를 담고 있으면 옅게 푸른빛이 돌기 마련인데, 스노아가 놓은 마나석은 은은한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아무런 마나도 깃들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런데 갈색 테이블 위에 검은 빛무리가 그림자처럼 번지고 있는 게 아닌가.
‘설마…….’
검은빛을 띤 마나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마족의 마나를 담은 거야?”
“맞아요.”
스노아가 대답했다.
“씨스아이에 흡수시켜 놓은 걸 마나석으로 옮겨 놓았어요. 양이 적지만, 속성을 알아내는 덴 이 정도면 충분하거든요.”
“마족의 마나도 궁금하긴 한데, 이왕이면 필멸 저주부터 얘기해주는 게 좋다, 난.”
할릭이 두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며 넌지시 제안했다.
“시원찮은 대답을 들었을 때부터 계속 거슬렸거든. 중간에 바드가 난입해서 죽여 버리는 바람에 말이 끊기기도 했고.”
생각만 해도 열이 뻗치는지 할릭이 이를 아드득 갈았다.
“근데 너는 무슨 원리인지 대강 알겠다며.”
“맞아. 시원하게 답을 얻은 사람은 너뿐이잖아.”
팔짱을 끼고 둘을 구경하던 아다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답답해서 목구멍으로 밥도 안 넘어갈 지경이야.”
스노아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입술이 굳게 다물려 있어서 그런지, 얼굴이 전체적으로 딱딱하게 보였다.
‘안 좋은 소식인가?’
나는 마른입술을 핥으며 생각했다.
‘표정이 영 어두운데.’
이성적인 물빛 눈이 검은색 마나석으로 복잡한 시선을 두고 있다. 걱정과 불안이 슬슬 치고 올라올 찰나, 스노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무거운 내용이어서 마지막에 알려드리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어차피 알아야 하는 일이네요.”
한 차례 긴 숨을 내쉰 스노아가 마음을 다잡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카나. 스라일리 경매장에서 만났던 마족의 생김새를 기억하고 있나요?”
물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었던 그의 혀 때문에 아직까지 충격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문어 빨판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긴 것도 모자라 바깥으로 길게 빠져나와 피를 핥아먹기까지 했던 혀가 곧장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어. 마족이 깃들어 있을 뿐이라면, 겉모습은 인간이어야 하는데…….’
스노아가 깍지 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마족은 인간의 육체를 완전히 빼앗게 되면 저주를 피할 수 없다고 했어요.”
나는 턱을 문지르다 말고 퍼뜩 떠오른 생각을 고스란히 내뱉었다.
“빼앗으면 빼앗을수록 그렇게 변하는 건가?”
“지금 상황에선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옆에 앉아있던 아다르가 징그러운 걸 본 사람처럼 혐오감에 젖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방법을 찾고 있겠네. 평생 숨어 지낼 순 없을 거 아니야.”
“맞아요.”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훼하지 않는 이상, 저주를 피하려면 그들은 계속 인간의 몸에 숨어 있거나 완전한 인간이 되어야 해요.”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선택지는 확실히 아니겠네.”
아다르가 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게 가능하면 신의 영역이지. 자기 마음대로 종족을 바꾸는 건데.”
“잠깐 둔갑하는 거라면요?”
스노아의 질문에 아다르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세요, 아다르. 그는 인간의 마나를 흡수해서 생명에너지로 전환시킨다고 했어요.”
“그런데?”
“생명에너지를 이용해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다면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들의 목적은 필멸 저주를 피하는 거예요.”
나는 닭살이 돋은 팔뚝을 손바닥으로 슥슥 쓸면서 생각에 잠겼다.
‘마족의 마나는 검은색이었어. 인간과는 확실히 달라.’
그러면 그들의 생명에너지 또한 인간과 다를 가능성이 높다. 마나와 생명에너지는 끝없이 교류하기 때문이다. 초월자들의 신체에 변화가 생기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축적된 마나는 신체 내부에서 생명에너지로 전환되어 경혈로 스며든다.
‘필멸 저주는 마족의 생명에너지를 감지하는 건가?’
그러면 스노아의 말이 가능성이 있었다.
“그 마족은 인간의 마나를 흡수해서 생명에너지로 바꾼다고 했어. 저주의 눈을 속이려는 거야.”
“정확히 보셨네요, 카카나.”
“하지만 그건 불가능할 텐데.”
스노아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미간을 꾹꾹 짓누르며 얘기했다.
“마족으로 변해버린 몸이라면, 당연히 인간의 생명에너지는 고갈될 거야.”
“그렇죠.”
“그러면 인간의 마나를 계속 흡수해야 필멸 저주를 피할 수 있어.”
“한 번 흡수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거예요.”
왜, 라고 물으려는 순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설마, 한 번 떨어져나간 필멸 저주는 다시 발동되지 않는 거야?”
내 질겁한 얼굴을 본 스노아가 어두워진 안색을 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침울한 표정이었구나.’
나는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골치가 아팠다.
“필멸 저주는 광역 저주예요.”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차가운 주스로 답답한 속을 달랜 스노아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중간계의 모든 공간을 감시하고 있어요. 이렇게 넓은 광역 저주는 개체 하나하나를 꾸준히 추적하는 데 취약해요.”
“그럼 방법은 찾았으니, 지금쯤 실험을 하고 있겠군요.”
첼러스가 흔들리지 않는 기둥처럼 침착하게 물었다.
“인간의 마나로 생명에너지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옆에 앉아 있던 아다르가 혐오감을 띤 얼굴로 걱정을 늘어놓았다.
“야단났네. 필멸 저주를 피할 방법을 알아냈으니 실험에 성공하자마자 중간계로 우르르 몰려올 거 아니야?”
나는 그때까지 멍하니 충격에 빠져 있다가, 뒤늦게 신수를 떠올렸다.
‘그러면 신수도 같은 원리로 필멸 저주를 피한 건가?’
신수는 주인의 마나를 섭취하며 성장한다. 중간계 주민인 내 마나를 먹고 자랐으니, 육체는 천계에서 왔지만 생명에너지는 이미 중간계에 소속되었을 것이다.
“마족이 둔갑하려면 인간의 마나가 많이 필요하겠군.”
급박하게 돌아가는 대화 내용을 잠자코 경청하던 아르모어가 느지막하게 읊조렸다.
“카카나.”
“네?”
나는 신수에 대한 것을 생각하다 말고 놀라서 아르모어를 바라보았다. 그가 덤덤히 말을 이었다.
“이단자로 밝혀져 처형당했다가 구울로 변한 사람들을 기억하나?”
“카타스 마을의 지하묘지를 말하는 건가요?”
“그래.”
“근원 구울이 바드를 언급했던 터라, 기억하고 있어요.”
소생약을 먹고 잠시 살아난 시체는 제게 저주를 건 자가 ‘바드’라고 말했다. 그게 찝찝해서 여태껏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모어가 무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구울로 변한 수가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설마…….”
“마족이 황실을 조종하고 있다면, 이단은 가장 쉽고 빠르게 사람을 쓰고 버릴 수 있는 명분이 된다.”
첼러스가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아르모어의 추측에 한마디 얹었다.
“이단자의 처리는 신전이 도맡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전은 황실과 결탁한 지 오래다. 그 많던 구울들이 모두 마나를 뽑힌 인간의 시체였을 거라고 생각하니 오싹해졌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았으니, 마족의 마나에 대해 얘기해보자.”
할릭이 잠깐 새에 몇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얼굴로 제안했다. 암울한 현실을 애통해해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해결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개를 끄덕인 스노아가 한참 전에 꺼내두었던 마나석을 중앙으로 밀며 얘기했다.
“마족의 마나는 주위의 마나를 흡수해요. 그래서 저희가 납치당한 카카나를 찾지 못했던 거예요.”
아다르가 굉장히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마나가 마나를 흡수한다고?”
“네. 어마무시하게 먹어치워요. 성질도 굉장히 난폭하고요.”
스노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마나석이 은은하게 뿜는 검은 빛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소멸시키고, 파괴하는 위력이 상당해요.”
“못 찾은 이유도 그거 때문이구만? 새로 창조된 기척을 쫓는 게 아니라, 공허하게 뻥 뚫린 부분을 추적해야 했었네.”
할릭이 쯧, 혀를 차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것 외엔?”
“더 알아낸 건 없어요.”
혼자 많은 사실을 알아냈음에도, 스노아가 무안한 사람처럼 눈썹을 늘어트렸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건 여기까지예요.”
나는 다른 용사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스노아를 칭찬했다.
“고생했어, 스노아.”
용사들은 곧 죽어도 서로에게 좋은 소리 따위 안 하니 나라도 해줘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노아가 의외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다가, 곧 따사롭게 미소를 지었다. 기쁜 기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카카나에게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뭔데?”
“마나를 조금 흡수해 가도 괜찮을까요?”
나는 어리둥절하게 내 가슴팍을 찔렀다.
“내 거?”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마족이 이상한 소리도 했고요.”
치유연금술을 공부하느라 여태 잊고 있었던 헛소리들이 떠올랐다.
‘내가 천족의 심복이라면서 이상한 소리를 했었지.’
혼자 고민해봤자 알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잠시 기억 저편으로 밀어두고 있었던 문제였다. 생각하고 있노라면 짜증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노아가 대신 알아봐 준단다.
‘알아두면 나쁠 건 없겠지.’
나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스노아가 씨스아이를 소환해 보석이 박힌 머리 부분을 내 손에 가져다대었다. 그러자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알아내는 게 있으면 알려줘.”
“물론이죠.”
대화가 마무리된 것 같아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다르에게 걸어가 그가 보관 중인 책을 뺏어왔다.
싱숭생숭하고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는 욕망이 나를 근처 소파로 이끌었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읽다 만 부분을 펼쳤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눈앞의 일부터 차근차근, 천천히.
나는 복종 포션의 해독제를 만들려면 어떤 약초를 사용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조제법을 끼적였다.
용사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독서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서재를 나갔다.
***
복종 포션의 해독제를 연구하기 위해 가마솥에 불을 붙이던 다다나가, 문득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을 바라보던 다다나의 눈망울이 자연스럽게 머리에서 거울 테두리로 옮겨갔다. 그곳엔 여러 장의 그림들이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죽음의 숲에 서식하는 독초와 몬스터 그리고…….
희끄무레한 빛이 감도는, 옅은 개나리 색 눈망울이 천천히 깜박였다. 그녀가 독초 옆에 붙어 있는 카카나의 초상화를 떼어와 손에 들었다.
언니가 있는 곳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5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다니, 네 언니가 죽음의 숲에 있는 것 같구나.]
황녀는 그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꽤 낙담했었다. 넓은 죽음의 숲 어디에 카카나가 있는지 알 길이 없는 탓이었다.
용사들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카카나가 유일했다. 반드시 그녀에게로 용사들을 인도해야 했다.
[패밀리어로 죽음의 숲을 알아보려고 해. 그러려면 다니, 네가 도와줘야 한단다.]
[제가 무얼 하면 되나요?]
[내 패밀리어가, 죽음의 숲에서 오래 견딜 수 있도록 약을 만들어주렴.]
그래서 다다나는 약물을 만들었다.
패밀리어가 기어코 카카나의 집을 찾아낼 때까지, 수년에 걸쳐 끊임없이 연구하고 만들고 개량했다. 크게 지치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로지 황녀의 명을 따르는 것만이 다다나에게 주어진 삶의 목표이자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언니의 약병이 가지고 싶니?]
초상화의 끄트머리를 문지르며 날카로움을 느끼던 다다나가 부옇게 떠오르는 기억에 움찔, 손가락을 굽혔다. 기어코 손이 베여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기억을 곱씹었다.
용사들이 마침내 약물을 복용할 수 있게 된, 결전의 날 아침에 오갔던 대화였다. 제 언니가 만든 약물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다다나에게 황녀가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그 말이 미련처럼 다다나의 뇌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언니의 약병을 자주 만졌잖니. 원한다면 약병은 네가 가져도 된단다.]
다다나는 제가 약병을 가지고 싶어 하는 줄 몰랐다. 자주 만졌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아니에요.]
그래서 거절했다.
카카나의 특별한 약병은 보관마법이 걸려 있었다. 오랜 기간이 지나도 약물이 상하지 않는 약병이었다.
평범한 약병이었다면, 용사를 구출해 카카나의 집까지 인도한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리라.
[용사들에게 이 약병을 쥐여 언니에게 보내는 게 더 좋을 거예요.]
[그러니?]
[이 약병을 한눈에 알아볼 거예요.]
약병은 독특한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다다나는 이것이 장인에게 특별 주문한 물건이라는 걸 알아챘다.
어렸을 때부터 제가 만든 약물을 애틋하게 여겼던 카카나다. 다다나는 그게 친구들의 고통을 덜어주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어느새 무감한 얼굴로 돌아온 다다나가 손수건으로 검지를 감싸며 눈을 깜박였다. 하얀 손수건에 붉은 핏물이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언니.”
그녀가 언니를 발음하는 제 생경한 목소리를 들으며 작게 소곤거렸다. 마음을 잃은 눈망울에 희미하게, 그리움이 스쳐지나갔다.
다다나는 초상화를 도로 거울에 붙여 놓고 다시 가마솥으로 신경을 쏟았다. 최근 황녀는 부당한 방법으로 붙잡힌 노예들을 몰래 구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복종 포션의 해독제를 만들어야 했다.
***
“어우, 이걸 언제 지우고 앉았냐.”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연금물약 하나를 거하게 폭발시키는 바람에 찐득한 초록색 약물이 머리에 온통 엉겨 붙어 있었다.
스노아에게 청결 마법을 걸어달라고 하면 간단하지만, 며칠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내 마나로 대체 뭘 알아보고 있는 건지 굉장히 바쁜 기색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청결 마법이 걸린 마법스크롤을 잔뜩 준비해둘걸.’
나는 애써 미련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머리가 많이 길어서 한 번쯤 푼 다음 다시 묶어야 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그리고 머리빗과 수건을 챙겨 아르모어의 방으로 총총 뛰어갔다. 용사들이 머리 관리를 도와주기 시작한 이후부터, 혼자선 머리를 말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예전에는 몇 시간 동안 혼자서 어떻게 해낸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스노아는 바쁘고, 아다르랑 첼러스는 부담스러워.’
스라일리 경매장에서 쌓아두었던 벌칙 때문에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물론 아다르는 청산했고, 첼러스는 얕은 수를 써가며 진심을 억지로 듣는 사람이 아니기에 ‘솔직하게 대답하기’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들에게 쌓인 벌칙이었다.
내게 안마해주기, 심부름해주기, 밥 먹여주기, 책 읽어주기 등으로 최근 퍽 시달린 터라 일주일간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할릭에게 맡겼다간 머리가 다 뜯길지도 모르고 말이다.
‘물론 보기와 다르게 섬세하게 움직이지만…….’
나는 그의 무시무시한 덩치와, 팔뚝의 근육과, 억세 보이는 손가락을 상상했다. 보이는 것에 영향을 크게 받는 동물이 사람이다 보니 압도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남는 사람은 아르모어뿐이었다. 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그것만 적응하면 지금으로선 제일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이었다.
똑똑.
굳게 닫혀있는 문을 두드리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탈탈 털었다. 워낙 느릿느릿 움직이는 양반이라 느긋하게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아르모어가 물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인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걸음을 옮겨 길을 터주었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의미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줄 알았던 나는 다소 당황했다.
‘무슨 속셈으로 왔는지 너무 빤히 보였나?’
나는 민망한 얼굴로 품에 한 아름 안긴 수건과 빗을 내려다보았다.
‘맛있는 거라도 들고 올걸.’
얼굴에 뜨끈뜨끈하게 열이 몰렸으나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거울 앞에 앉았다. 다행히 침대 근처에 전신 거울이 있어서 편하게 머리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노아에게 청결 마법을 부탁하지 않는 건가?”
아르모어가 뻣뻣하게 마른 수건 하나를 앗아가더니, 내 머리를 문질러주며 물었다. 움직임이 하도 자연스러워서 뭐라고 부탁해야 할지 고민했던 게 무색해졌다.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팡팡 두드리며 대꾸했다.
“요즘 바쁜 것 같더라고요. 눈치 보여서 그냥 감아버렸어요.”
“그렇군.”
“귀찮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아르모어.”
내가 눈치를 살피며 묻자 아르모어가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니, 편히 앉아라.”
빈말인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머리 문제를 얼른 해결하고 공부하고 싶었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짜다가 거울에 비친 아르모어를 은근슬쩍 살폈다. 고고하게 생긴 지체 높은 왕이 내 머리를 말려주고 있으니 기분이 꽤 이상야릇했다.
머리가 당기지 않게 조심조심 수건을 움직이던 아르모어가 문득 눈을 굴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도둑질 하다 걸린 사람처럼 흠칫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건 새 수건을 꺼내기 위함이었다는 듯이 축축하게 젖은 수건을 새 걸로 바꿔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모어는 왜 고백을 안 하는 거지?’
나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며 의구심을 품었다.
용사들은 이제 대놓고 친근감을 표시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누가 봐도 평범한 동료 사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르모어도 진작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관계가 진전되는 걸 평온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덕분에 덜 부담스럽긴 하지만, 궁금하네……. 아르모어는 날 안 좋아하는 건가…….’
속을 가늠하기 어려워서 그런지 괜한 호기심이 일었다.
자꾸 흘끗거렸더니 티가 났나 보다. 아르모어가 내 머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아르모어는 간혹 독심술사처럼 굴곤 했다. 너무 놀라서 수건을 떨어트릴 뻔했지만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한 채 눈을 굴렸다.
“궁금했던 게 떠올라서요.”
“물어봐도 된다.”
“별 거 아닌 일이에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아르모어가 젖은 수건을 내려놓고 빳빳한 새 수건을 들더니, 내 머리 끄트머리를 문대며 눈을 들었다. 그와 내 시선이 거울 속에서 맞부딪쳤다. 왠지 시선을 뗄 수 없어서 그를 바라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별 거 아닌 일인가?”
아르모어가 한참 후에 물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단어를 골라내는 동안, 그가 다시 내 머리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싱거운 수긍이었다.
꼭 내 곤란한 얼굴을 즐기는 것처럼, 아르모어의 입꼬리가 느긋하게 위로 당겨 올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이상하게도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모어가 얄밉다니.’
괜히 화풀이할 대상을 찾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가 창피해졌다.
‘별 거 아닌 일이 아니라고, 내가 솔직하게 시인할 때까지 대답을 끌어내주면 좋을 텐데…….’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그를 흘끗 살폈다. 죽이게 섹시한 옆얼굴이 보였다. 고풍스러운 저택의 벨벳 커튼처럼, 어둑하고 우아한 빨간색 눈망울이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저리도 야하게 생겼지?’
나는 불만스럽게 얼어 있던 마음마저 잊고 감탄했다.
‘움직임도 괜히 끈적하고. 꼭 하룻밤 일을 치르고 난 다음 날 아침 같네.’
마침 내 머리도 축축하게 젖어 있겠다, 샤워한 직후 정도? 생각하자마자 손을 들어 내 뺨을 홱 쳐버렸다.
찰싹!
아르모어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민망해져서 주먹을 입에 대고 괜히 큼큼, 헛기침을 했다.
“죄송해요. 졸려서 잠 좀 깨려고 그랬어요.”
“아무리 졸려도 스스로를 괴롭히면 안 된다.”
아르모어가 점잖게 타박했다. 기다란 손가락 끝이 붉게 달아오른 내 뺨의 솜털을 간지럽게 긁으며 턱선까지 미끄러졌다.
“아프지 않나.”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건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볼은 또 왜 이렇게 야릇하게 매만지는 거지? 진짜 한번 같이 뒹굴어보자, 뭐 이런 건가?’
나는 잔뜩 흥분해선, 시뻘게진 얼굴로 혼자 씩씩거렸다.
‘다 아르모어 때문이야!’
촉촉해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자, 아르모어의 입가에 어렴풋하게 웃음기가 배었다. 단순히 나한테 음마가 들어와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아르모어가 요망하게 행동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르모어는 평소에도 이런 식이기 때문이다. 젠장.
대놓고 당신은 날 좋아하지 않는 거냐고 물을 수도 없고 답답해졌다. 아르모어가 내 도끼눈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빗을 꺼내갔다. 본인도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런지 머리를 빗는 손길이 제법 능숙했다.
“아르모어도 머리 빗어요?”
나는 어떻게든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찝찝한 마음을 털어내고 물었다. 그가 살며시 눈웃음을 쳤다.
“당연한 걸 묻는군.”
“머리가 너무 곧아서 빗지 않아도 일직선일 것 같은걸요.”
나는 그의 머리 일부분을 손으로 가져와 구경했다. 차르르륵 떨어트리자, 검은 머리카락이 올올이 떨어지며 폭포를 이뤘다. 환상적인 윤기였다.
“저도 아르모어 같은 머리였으면 좋겠어요. 부러워요.”
“직모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지.”
“진짜요? 단점이 있어요?”
이런 완벽한 머리에도 단점이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나는 어떤 단점이 있을까 상상하며 빗살이 듬성듬성한 빗을 들었다.
‘너무 검어서 염색이 잘 안 되려나?’
그것 말곤 떠오르는 게 없다. 심지어 별로 단점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검은 머리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게 불가능하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네? 왜요?”
“머리가 뜨기 때문이지.”
“저처럼 머리가 부푼다고요?”
“부푸는 게 아니라 뜬다.”
아르모어가 내 말을 정정해주었다.
“머리에 바늘이 빼곡하게 박혀 있는 모양새라고 하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군.”
‘머리가 수정구슬처럼 동그래지는 건가?’
자동으로 그런 머리를 하고 있는 아르모어가 떠올랐다. 웃음이 터질 뻔해서 필사적으로 볼 안쪽 살을 깨물며 참았다. 나는 혼자서 한참을 끅끅대다가 간신히 질문을 이었다.
“밑으로 안 처지는 거예요? 뻣뻣하게 서서요?”
“바늘처럼 서진 않으나, 그런 편이다. 꼴이 아주 우스워지지.”
아르모어가 피곤한 낯으로 대답했다.
“길러서 무겁게 늘어트리거나 묶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니…….”
아르모어는 숱마저 많았다. 그런 머리라면 무척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길게 기르는 거예요?”
“기르는 게 습관이 되어 길어졌지. 원래는 이렇게 길게 기르지 않았다.”
“자르기 귀찮아서 이렇게 된 건가요?”
아르모어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다.
나는 킥킥 웃으며 머리를 빗었다. 지체 높은 왕님이 머리카락 때문에 곤란을 겪었을 걸 생각하니까 동병상련이 느껴지고 웃겼다.
“즐거워 보이는군.”
“즐거워요.”
아르모어가 문득 오른손으로 내 턱을 그러쥐더니, 뒤편으로 부드럽게 틀었다. 의아해져서 눈을 위로 든 순간, 아르모어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까만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양옆으로 쏟아져 좁은 공간 안에 단둘이 들어와 있는 것 같은 효과가 생겼다. 나는 돌처럼 굳었다.
“그대는 이런 식으로 잘 웃지.”
갑자기 바뀐 분위기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르모어가 잔뜩 긴장한 나를 불그스름한 눈으로 훑어보며 윗입술을 핥았다. 나는 그의 알몸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서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저런 식으로 윗입술 언저리를 핥는 건 아르모어의 발정기 전 증상이었다. 그는 성욕으로 가득 찰 때마다, 윗입술을 핥으며 난폭한 정욕을 잠재우려고 했다.
당황한 나머지 무례한 질문을 대뜸, 삑사리가 난 목소리로 하고 말았다.
“아르모어, 발정기예요?”
‘미쳤니?’
이번에도 뺨을 쳐야 하나 싶어졌으나, 불행히도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르모어의 발정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 시기를 아는데도 발정기냐고 묻는 건 성욕을 처리하지 못해 눈이 뒤집히기라도 했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어, 어쩌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르모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크게 감정이 상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르모어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아니다.”
“그런데 왜…….”
“왜일 것 같으냐?”
그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나는 아예 숨을 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르모어만의 진득하고 고압적인 분위기가 내 숨통을 콱 틀어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르모어가 내 표정을 자세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건, 내가 그대를…….”
‘그대를?’
드디어 고백하는 건가 싶어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데 초집중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르모어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폭소하다 못해 내 어깨에 이마를 묻고 쿡쿡 웃기까지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그의 검은 정수리를 응시했다. 지금 내 옆에서 몸을 떨어가며 웃는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아르모어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아니 말을 할 거면 끝까지 하지, 하다 마는 건 뭐야?’
속이 터질 것 같아서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가 내 도끼눈을 발견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위아래로 열심히 들썩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또 웃음이 터진 모양이다.
혼자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신지 나도 함께하고 싶어졌다.
‘내 얼굴이 그렇게 웃긴가?’
빛을 뿜는 아름다운 얼굴들 사이의 양 한 마리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암울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 얼굴을 보고 이렇게 웃어?’
근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오히려 아르모어가 웃음을 터트리자 같이 입가가 씰룩이기까지 했다. 나는 부러 뾰족해진 말로 그를 쿡 찔렀다.
“내가 웃겨요?”
“미안하군.”
아르모어가 빠르게 사과하며 진정을 되찾았다. 언제 그렇게 웃었냐는 듯이 멀끔한 얼굴이었다.
“그대가 어여뻐서.”
“네?”
그가 능숙하게 내 주의를 빼앗아 가는 질문을 했다.
“치유연금술을 공부하러 가봐야 하는 게 아니었나?”
아르모어가 시계를 살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굴렸다가 크게 충격을 받고 입을 벌렸다.
“헉!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도와줄 테니 서두르는 게 좋겠군.”
나는 왜 그렇게 묘한 눈으로 나를 보았는지 캐물으려던 것마저 뒤로 미루고 머리를 빗는 데 집중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었다.
‘엘프들이 증언했으니 나를 좋아하는 건 확실해.’
나는 머리의 마지막 물기들을 수건으로 열심히 흡수시키며 생각했다.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은가 봐.’
다행히 거의 말라서 빗고 땋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내 약초를 관리해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손재주였지만, 머리를 땋는 데도 그는 기막힌 재능을 보였다.
나는 순조롭게 머리를 양갈래로 땋고 빗과 수건을 잔뜩 챙겨 침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방문 앞에 서서 배웅하러 나온 그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단시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아르모어의 덕이 컸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오거라.”
아르모어가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얘기했다.
“알겠어요!”
나는 우렁차게 대답하며 헐레벌떡 방으로 뛰어갔다.
***
한편, 카카나의 마나를 알아보던 스노아가 첼러스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아, 첼러스. 거기에 앉아요.”
스노아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그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책장이 많은 대신 다른 용사들에 비해 꽤 작은 방이었다. 첼러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제가 머무르는 방이랑 분위기가 많이 다르군요.”
“가장 구석에 있는 방이어서 그럴 거예요.”
스노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비브로스의 제1순위 감시대상이 된 것 같거든요.”
“그렇습니까?”
“카카나의 방에서 제일 먼 방이잖아요.”
첼러스가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눈을 홉떴다.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스노아가 한숨을 푹 쉬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 주제는 그만 얘기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어쩐 일로 절 부르셨습니까?”
“카카나의 마나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서요.”
첼러스의 얼굴이 설핏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스노아가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하며 발코니로 시선을 돌렸다. 활짝 열린 창문에 달려 있는 반투명한 레이스 커튼이 뜨거운 여름바람에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하얀 커튼을 보고 있으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사제 말이에요.”
스노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용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제는 단 한 명뿐이었다. 카카나를 치료하기 위해 아누비르 본부로 불러들였던, 그 사제.
“아다르가 처리한 사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첼러스가 확인차 질문했다.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카나는 포이즌을 스스로 정화하고, 사제의 신성마나를 흡수했었죠.”
“맞습니다.”
첼러스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졌다.
“사제의 신성마나는 평범한 성질을 가진 마나와 섞이지 않아요. 그런데 흡수됐단 말이죠. 제가 오늘 당신을 부른 이유도 이것 때문이에요.”
“카카나의 몸에 제 마나를 주입했던 경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요.”
스노아가 만년필을 꺼내 수첩에 필기할 준비를 하며 물었다.
“카카나의 몸이 당신의 마나도 흡수하던가요?”
“아닙니다.”
첼러스가 부정했다. 스노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내용을 몇 자 적었다.
“당신도 그랬군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카카나의 몸은 스노아나 첼러스의 마나는 조금도 흡수하지 않았다. 그녀가 흡수했던 것은 사제의 신성마나뿐이다.
‘신수의 일도 그렇고, 마족이 카카나에게 천족의 심복이라고 얘기한 것도 그렇고 신경 쓰여.’
스노아가 찌그러진 미간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곰곰이 따져보면 마족들은 매번 카카나의 몸에서 증표니 뭐니 수상한 것을 찾으려 들었다.
‘마족이 깃든 알렉 브래든을 만났을 때 상쇄반응이 일어난 것도 수상해.’
“카카나는 천족의 마나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첼러스의 눈이 놀란 기색을 띠고 스노아를 바라보았다. 둘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각자 깊은 고민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위험한 발언이군요.”
첼러스가 뒤늦게 중얼거렸다. 스노아도 자신이 한 말이 어떤 파급을 가져올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방관하기엔, 수상한 정보가 거듭 쌓이고 있었다.
“혹은, 천족과 흡사하다거나…….”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희는 천족에 대해 몰라요. 하지만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를 조합하면 카카나가 천족과 관련되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스노아는 카카나의 마나에 속성이 깃들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알고 있었다.
‘알렉 브래든과 접촉해서 상쇄반응이 일어난 직후.’
곧장 카카나를 끌고 소파에 앉혀서, 마나를 주입해가며 확인했기에 확실한 정보였다. ‘무언가’가, 카카나의 몸 안에서 각성했다. 그리고 마나에 독특한 성질이 깃들었다. 그 성질은 야수, 엘프와 관련이 있었다. 그녀가 그들의 의지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천계의 영물인 신수가 그녀를 주인으로 선택했다. 도저히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다.
‘상쇄반응 후에 성질이 깃들긴 했지만, 전부터 이상한 체질이었던 건 확실해. 사제의 마나를 흡수한 건 성질이 깃들기 이전이니까. 수인족이어서 그런가?’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전에도 수인족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인간과 같은 평범한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카카나의 마나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든, 그녀에게 그리 좋은 소식인 것처럼 들리진 않는군요.”
첼러스가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차차 알아갈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느끼고 있죠?”
스노아가 건조한 목소리로 불쑥 물었다. 그의 시선이 카카나와 여행하면서 겪은 일들을 사건 순서대로 정리해놓은 수첩에 붙박여 있었다.
“우리와 카카나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거요.”
그건 지난 여행의 기억을 관통하는 통찰이자 직감이었다.
첼러스가 침묵했다. 뉘엿뉘엿 저물던 해가 마침내 푸른 숲 천지에 핏빛을 흩뿌렸을 때쯤, 첼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카나가 우연히 지하감옥으로 굴러 떨어졌을 때, 그리고 우연히 적당한 해독약이 있어 건네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런 느낌은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방문으로 몸을 돌리며 읊조렸다.
“그래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
“이 여행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첼러스가 말끝을 흐리며 눈썹을 구겼다. 그의 심란한 마음이 선한 호수빛 눈망울 위에 뿌연 안개처럼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줄인 첼러스가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스노아가 한 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수첩을 덮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
투명한 물빛 눈망울이 발코니 바깥으로 굴러갔다.
“그러네요. 궁금하네요.”
오랫동안 군림하던 태양이 산 능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하늘의 한 귀퉁이가 야금야금 먹히고 있었다.
바야흐로, 칠흑 같은 밤이었다.
***
“교수니임?”
나는 쥐가 겨우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문틈을 만들어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슬그머니 발을 들였다.
야심한 시각이었다. 치유연금술은 마법을 이용하기 때문에 특히 사고가 많았다. 그래서 비브로스는 반드시 자신의 감시 아래 실습을 하도록 하였는데, 당연하게도 내 욕심에 못 미쳤다. 왕성한 호기심과 끝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해소해주기에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회가 적은 탓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내기로 했다. 걸리면 사고 때문이 아니라 비브로스 때문에 반죽음을 당할 수도 있지만 뭐 어떤가. 내게 약물을 만들 자격이 없다고 한 것도 아니고, 위험하니 자제하라고 하셨을 뿐이지 않은가.
나는 콧김을 쉬익 뿜으며 테이블에 약재를 늘어놓았다.
비브로스의 약재 창고에 웬만한 건 다 있었지만, 이것저것 사용하면 들킬지도 몰랐다. 다행히 약초나 약재는 내가 모아놓은 것도 꽤 되었다.
“포션을 미리 여러 개 사놓아서 다행이다.”
나는 붉은색 회복 포션을 들여다보며 두 손을 맞비볐다.
치료사들과 협조하여 만드는 치유연금물약과 달리, 포션은 마법사들이 시중에 돌아다니는 가장 흔한 약물인 기력회복 약물만 이용한 연금물품이었다. 치료사의 확인 작업이 따로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포션이라고 부르며, 치유연금물약과 구분되어 있었다.
나는 별안간 착잡해져서 포션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일반 마법사들도 사제들처럼 치유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에게 바로 치유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사제뿐이다. 그들의 마나에 치유 속성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반 마법사의 치유마법엔 치유의 속성이 없었다. 때문에 사람에게 마법을 사용한들 구색만 갖춘 빈껍데기가 될 뿐,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저주나 공격마법과 달리 생명을 ‘살려내는’ 덴 창조에너지 이상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치유연금물약이었다.
약제사 혹은 치료사가 만든 약물엔 치유와 생명의 샘이 녹아 있다. 그리고 마법사들의 치유마법엔 창조의 힘이 녹아 있다. 이 둘을 합쳐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연금술사와 치료사의 일이었다.
나는 큐어 마법이 담겨 있는 마나석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왕 몰래 연습하러 온 거, 마나석으로 연습해보자.’
나는 약사발에 복종 포션을 조금 부었다. 그리고 내가 실험 삼아 만든 해독제를 부어보았다.
약물의 반응을 보니 좋은 결과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핀셋으로 마나석을 들어 약사발 근처로 걸어왔다. 마나석을 넣은 뒤 가마솥에 옮겨 담고 끓여야 했다.
‘옮기다 터지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그러나 문제는 옮기기도 전에 생겼다. 약사발에 마나석을 담는 순간 새파랗게 스파크가 튄 것이다.
그것을 보자마자 느꼈다. 조졌다는 것을.
펑―!
약물 전체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색깔이 한순간에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탁한 잿빛 연기가 쿨럭쿨럭 기침하듯 위로 솟구쳐 올랐다.
마나석을 놓칠까 약사발에 한껏 집중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던 나는 봉변을 당하고 캑캑거렸다. 매운 연기가 눈과 입으로 들어와 미친 듯이 기침이 나고 눈물이 흘렀다. 얼굴과 머리에 시커먼 검댕이 묻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으퉤퉤퉤퉷!”
나는 마법이 터지면서 입으로 들어온 약물 찌꺼기를 뱉어내며 한참을 콜록거렸다. 혹시나 싶어 물로 입을 헹구어 뱉어냈다. 그리고 원피스 자락을 끌어와 얼굴을 대충 문질러 닦으며 성질을 부렸다.
“아! 답답하네, 진짜!”
굵은 약봉으로 약사발의 밑바닥을 슥슥 긁어보았다. 그러자 밑에 무언가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그것을 빠트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핀셋으로 건져 올렸다. 마법이 빠져나가고 꺼멓게 죽은 마나석이 보였다.
“너무 급하게 넣었나? 천천히 넣었어야 했나?”
나는 그것을 은색 약단지에 넣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모르겠어서 머리를 움켜쥐었다.
‘치유연금물약을 만드는 데 능숙해지는 걸 우선으로 여겼는데, 너무 비효율적인가?’
무엇부터 연습해야 하는지 감이 안 잡혔다. 심지어 비브로스는 약물에 마법을 담는 건 숙련자가 되어서도 운이 따라줘야 하는 일이라며, 실패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조언했었다. 마법사들은 약물에 대해서, 치료사들은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조제법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따르면 대부분 성공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할 때가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약물과 마나석은 전부 사람이 만든다. 그날 쓰인 약재에 따라, 마법사의 마나에 따라, 심지어는 사람의 몸 상태에 따라 다른 마나석와 약물이 만들어졌다. 변인이 너무 많았다.
‘어떻게 하면 실패를 줄일 수 있을까?’
나는 약물에 대해선 빠삭하다. 잘 모르는 건 마나석 쪽이었다. 마나가 언제 어떻게 흘러나오는지 모르니, 그저 매뉴얼대로 휘젓는 게 고작이었다.
‘마나석이라…….’
이마를 짚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손에 묻은 검댕들을 대충 옷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실패한 약물을 처리한 다음, 머리에 붙은 말린 약초 부스러기들을 털어냈다. 아무래도 내일부터 용사들에게 마나 다루는 법을 배워봐야 할 듯싶었다.
‘마나를 다루는 데 능숙하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들겠지. 치유연금물약을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발견할 수도 있고.’
이미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에서 마나까지 수련하려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이라면 전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생이 고생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대되기까지 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았다가, 귀신처럼 서있는 비브로스를 발견하고 기절할 듯이 놀랐다.
“끄아아아아악!”
베개를 품에 안은 채 힘없이 서있던 비브로스가 내 비명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음산한 어조로 물었다.
“놀랐냐?”
대답할 여력도 없어서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두색 천으로 만들어진 실내화를 지익지익 끌며 코앞까지 걸어온 비브로스가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몰래 약물을 만드느라 불을 다 밝히지도 않아서 사방이 컴컴했다. 자다 깬 저기압의 비브로스는 지나치게 좀비를 닮아 있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한 거지?”
나는 차마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비브로스가 엉망이 된 연구실을 한번 슥 둘러보았다. 그 시선이 기어코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마법 빠진 빈 마나석에 가서 머물렀다.
“감시용 구슬에 왜 붉은 빛이 들어왔나 했더니, 마나석을 터트려먹었구만?”
“저, 그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카카나 페아!”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교수님! 용서해주세요, 악!”
흰 머리카락이 거미줄처럼 엉켜서 시야를 가리는데도, 그는 그걸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내 머리통을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가 겁도 없는 녀석이라면서 마구 호통을 쳤다.
“다치면! 어쩌려고! 감히! 마나석을 사용해?”
“죄송해요오오오!”
“얼굴에 검댕은 왜 그렇게 많이 묻었어?”
“이, 이게, 그러니까 교수님, 먼저 제 말을 들어보세요!”
“마나석을 넣으면서 가마솥에 얼굴을 집어넣기라도 했냐? 말해봐라!”
가마솥이 아니라 약사발이었지만, 거의 맞는 말이어서 반박할 말도 없었다. 그가 꼭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처럼 내 실수를 콕콕 집어내며 울분을 터트렸다.
“위험하니 그토록 조심하라고 했건만!”
“끄악!”
“넌 내일 벌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나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의 바지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안 돼요, 교수님! 할 게 많단 말이에요!”
“그러게 누가 이런 사고를 치라고 했어!”
“제발, 교수님!”
“약초 백 포기를 캐 와라!”
나는 허억, 숨을 들이켰다.
지금은 한여름이었다. 이 더운 날, 땡볕에, 숲에 나가서, 약초를 백 포기나 캐오라고?
벌써 정신이 혼미해지려고 했다. 벌거벗고 돌아다니지 않는 이상 기절할지도 몰랐다. 실제로 죽음의 숲에서 한번 기절한 전적이 있는 터라 더 걱정이 되었다.
‘어떡하지?’
나는 혹시나 싶어 비브로스를 올려다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단호한 얼굴이다.
‘트, 틀렸어. 호위로 용사들 중 한 명이 붙을 테니까, 나들이라고 생각해볼까?’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
‘기절한 날 보고 놀란 용사가 기절하는 게 더 현실적이겠다.’
“그건 저보고 그냥 죽으라는 말씀이시잖아요!”
“방금 사고로 넌 충분히 죽을 뻔했어!”
비브로스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어투로 쐐기를 박았다.
“내일 충분히 마실 수 있는 얼음물이나 만들어 둬라.”
나는 눈물을 흘리며 테이블에 엎어졌다. 비브로스는 대부분의 문제는 털털하고 시원하게 넘어가지만, 절대 봐주지 않는 선이 있었다. 그 보이지 않는 선을 내가 방금 넘은 게 분명했다.
“어흐흑…….”
나는 코를 훌쩍이며 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래도 약초를 캐라는 게 어딘가. 힘들고 죽을 것 같겠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알겠어요.”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제야 비브로스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들어가서 자라. 뒤처리는 내가 할 테니.”
“네? 하지만 제가 어지른 건데…….”
“여기에 위험한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거냐?”
비브로스가 내 말을 냉정하게 잘라먹더니, 등을 떠밀었다.
“또 사고 치지 말고 들어가.”
다 내 잘못이었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연구실을 나왔다. 내 뜻대로 연구를 하고 나서 이렇게 후회가 된 적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