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두 걸음의 성장
“이거 놔! 놓으란 말이다! 감히, 감히 내게!”
“이 맹랑한 놈 좀 보게. 수인족들은 대부분 고분고분하던데 말이야.”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은 사내가 발악하는 수인족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설치나. 응?”
“닥쳐! 닥치란 말이다! 흐으으…….”
표독스럽게 눈을 치뜬 늑대 수인족이 목 안으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톱을 세웠다. 그러자 쯧, 혀를 찬 인신매매업자가 뒤에 서있던 동료에게 손짓했다. 곧 그의 투박하고 더러운 손에 검은 물이 담긴 사발 하나가 들렸다.
불길함을 느낀 수인족이 악을 쓰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를 포박하고 있던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얻어터졌는데 기운도 좋네. 어휴.”
“늑대 수인족이잖아. 짐승이나 다름없으니 당연히 힘이 부족하지. 비켜 봐. 그 정도 가지곤 안 돼.”
근처에 서있던 남자가 나무방망이를 들더니 수인족의 머리를 인정사정없이 후려졌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기절하는 걸로 모자라 뇌진탕을 일으켰을 텐데, 수인족은 아직도 팔다리를 버둥거리고 있다.
“지독하네.”
“지금 빨리 먹이죠.”
고개를 끄덕인 인신매매업자가 시커먼 약사발을 수인족의 입에 퍼부었다.
“아아악, 읍, 욱…….”
“당장 내일이 수인족 경매일인데 그때까지 길들이려면 약을 많이 먹여야 해.”
남자가 약사발을 하나 더 들고 와 입에 꾸역꾸역 흘려 넣었다. 그러자 바닥에 짓눌린 수인족이 경련을 일으켰다. 제압하고 있던 남자가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그, 그래도 될깝쇼? 독한 약인디요. 이, 이러다 죽어버리면 어째요.”
“수인족의 신체능력은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나니, 이 정도는 먹여야 될 거다. 그래야 길들이든 말든 하지. 성질이 이렇게 고약해서야, 원.”
경매일이 다 되어서 잡은 수인족이었다. 이미 잡은 노예들은 약을 조금씩 먹여서 웬만한 성질머리는 전부 눌러놨는데, 마지막에 툭 떨어진 웬 골칫덩어리가 끝까지 속을 썩이고 있었다.
“다른 노예들 상태는?”
“다들 약 때문에 꼼짝도 못 하고 있습니다요. 한 번 먹으면 되돌릴 수 없는 약 아닙니까요.”
남자가 비열하게 키들거렸다.
“해독제도 없으니, 평생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수밖엔 없겠죠.”
“고객에게 서비스로 드릴 약물도 더 챙겨 둬.”
“이 수인족은 어떻게 할깝쇼?”
눈이 하얗게 뒤집힌 채 몸을 부들부들 떠는 수인족을 난감하게 지켜보던 다른 남자가 말을 이었다.
“약을 그렇게 먹였으니 거의 쓸모가 없을 겁니다요. 주, 죽기라도 하면 우리가 변상해야 되는 거 아녀요?”
“쯧. 다리 힘줄을 잘라서 도망갈 수 없는 상태이니, 쓸 만한 곳은 더 있겠지.”
“예에?”
그가 약사발을 대충 바닥에 버린 뒤 낡고 더러운 대검을 등에 맸다.
“노예로 파는 것 말고도 이용할 방법은 많다는 소리야. 길들이는 맛이 있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 하는 말이지, 저렇게 포악하면 팔리지도 않는다.”
“사창가에 팔 생각이십니까?”
“그래.”
그때, 간신히 정신을 차린 수인족의 얼굴이 갑자기 시퍼렇게 질리더니, 입 바깥으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대장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그가 후다닥 달려오며 걸쭉하게 욕지거리를 했다.
“이런 젠장! 재갈을 가져와, 당장!”
그녀의 입 안으로 옷 뭉치를 쑤셔 넣은 남자가 다급하게 명령했다.
“이런 지독한! 혀를 씹어 자결을 하려 하다니!”
그녀의 입에 간신히 재갈을 채우긴 했지만, 피가 너무 많이 나오고 있어서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졌다. 분을 이기지 못한 남자가 수인족의 뺨을 거세게 올려붙였다.
“이런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가 이어서 그녀를 모욕하려던 찰나.
쾅―
갑자기 철문이 박살나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먼지 사이로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인이 얼핏 보였다.
“누구……?”
남자들이 눈을 가늘게 뜨며 침입자를 위아래로 살폈다. 화려한 무도회 가면과 값비싸고 우아한 드레스, 더럽고 천박한 장소와 도통 어울리지 않는 하얀 피부.
컬이 강하게 들어간 것처럼 파도치는 검은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와 있다. 웬 부인이 공작 깃으로 장식된 부채로 입을 가리고 서있었다.
“부인, 여기는 들어오면 안…….”
“이런 미친.”
부인이 눈을 까뒤집은 수인족을 발견하기 무섭게 걸걸한 욕을 내뱉었다.
신분 높은 여인이 거친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는 사내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는 사이, 부인이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온갖 배설물 냄새가 진동해 평민마저 질색할 장소였다. 길들이는 과정에서 노예들이 똥오줌을 지린 탓이다.
그러나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뗐다. 실크와 레이스로 만들어진 드레스자락이 정체불명의 오물로 더러워지는데도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소리가 거침없다.
그녀가 대번에 수인족 근처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헉…….”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부채마저 내버리고 급하게 손짓을 한다. 그러자 입구에 서있던 한 남자가 그녀에게 뛰어갔다.
귀족들의 옷이 아니라 거적때기를 걸치고 있어도 귀태가 날 것 같은 남자다. 다리가 늘씬하게 뻗고, 근육질인 몸이 옷 바깥으로 티를 내고 있었다.
여인이 그의 재킷 주머니를 뒤져 작은 유리병들을 꺼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하게 눈만 끔뻑거리던 남자들은 이내 주머니에서 나오는 유리병 종류가 스무 가지를 넘어가기 시작하자 입을 떡하니 벌렸다. 남자들이 놀라 자빠지든 말든, 그녀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수인족의 입에서 재갈을 풀었다.
어차피 기절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기적적으로 깨어나지 않는 이상 다시 자결을 시도하진 못할 것이다.
여인이 투명한 물이 든 약병으로 손을 세척한 후, 피와 침으로 엉망진창인 수인족의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분홍색 약병 좀 씻어서 줘봐. 정화수는 저거야. 빨리.”
“이거 말씀이십니까?”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여인이 가리킨 약병을 정화수로 세척한 후 건네주었다. 그녀가 분홍색 약물을 조심스럽게 상처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반쯤 잘린 살덩어리가 부드럽게 붙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덕분이었다.
여인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늑대 수인족이네.”
뺨이 퉁퉁 부은 수인족의 얼굴을 여인이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입술이 굳게 다물려 있는 데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별안간 그녀가 고통스럽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숄을 벗어 수인족의 머리를 받쳐준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인신매매업자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부인?”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주먹질한 게 너냐?”
그녀가 물었다.
“그, 그건 갑자기 왜…….”
“대답.”
거짓말이라도 했다간 이 자리에서 혀를 뽑아버릴 듯한 억센 말투다. 마른입술을 핥은 남자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알겠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그리고 대뜸 그의 얼굴을 한 대 칠 동작을 취했다.
‘이거 똥 밟았구만.’
어디 좀 별난 부인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서 화풀이인지, 퍽 난감했다.
남자는 일단 맞는 셈 치고 가만히 있었다. 지체 높은 귀족에게 상처를 냈다간 좋을 꼴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인의 주먹질이 아프면 얼마나 아프겠냐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억!”
물론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작게 옹송그린 여인의 주먹이 턱을 가격하자마자 빡, 하고 범상치 않은 소리가 난 것이다.
“으억!”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도저히 저 작은 몸에서 솟아나온 힘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괴력이었다. 여인이 멈추지 않고 그의 다리 사이를 짓밟았다.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아아아악!”
이성을 잃은 남자가 공격하려고 팔을 버둥거렸다.
“어딜.”
여인이 그러지 못하도록 뾰족한 구두코로 음부를 으깨듯 걷어차 버렸다.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고통일 리 없다. 컥컥거리던 남자가 기어코 혼절했다.
지켜보는 동료들의 낯짝이 사색이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들.”
그녀가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욕을 씨불이더니 늑대 수인족의 다리를 살폈다. 걷지 못하도록 발목 뒷부분이 완전히 잘려 있었다.
“이것도 너희들 짓?”
“부, 부인,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남자들이 여인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으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호, 혹 저 늑대 수인족과 아는 사이십니까?”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다, 곧 불쾌한 어조로 되물었다.
“아는 사이면? 그러면 니들이 어떻게 할 건데?”
“저, 저희는…….”
“한 사람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려놓고, 묻는다는 말이 아는 사이냐고?”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제발 살려주십시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야.”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있던 검은 기운의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얘기했다.
“여긴 나한테 맡기고 먼저 나가있어. 이 수인족은 내가 데리고 갈게.”
여인이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자, 줄곧 곁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여인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셋 중 두 명의 귀족이 사라지자마자 인신매매업자들이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나, 나리.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요. 저, 저희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요. 한 번만 저희 말을 들어주십시오. 전부 설명하겠습니다요!”
검은 남자가 그들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다가, 문득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시체 말을 왜 들어?”
“예?”
검은 남자, 아다르가 품에서 날이 시퍼렇게 빛나는 잭나이프를 꺼냈다.
***
“에르메타는?”
나는 이마를 짚고 앉은 채 물었다. 옆에 서있던 스노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한다.
“똑같은 상태인가 봐요.”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뒤늦게 합류한 할릭이 전후 사정을 물었다.
나는 그에게 설명할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철창에 갇힌 수십 명의 노예들을 보자 머릿속이 더 새하얘졌다. 대신 미리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스노아가 할릭에게 설명해주었다.
“에르메타 틸리어스라는 남작에게 마족이 깃들었을 거라 예상하고 거울을 비춰 보았는데, 검은 그림자가 빠져나갔다고 해요.”
“도망쳤다는 거야?”
“정황상 그런 것 같아요.”
할릭이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래서 그 에르메타란 여잔 어떻게 됐는데.”
“예전으로 돌아왔죠, 뭐.”
스노아의 말대로, 에르메타를 물고 늘어져봤자 이제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노선을 변경해 간부들이 있을 법한 곳은 모조리 뒤져보고 있었다. 에르메타 외에 마족이 깃든 사람이 또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나한테 접근한 것처럼 보였는데, 마족들에게 나에 대한 정보가 넘어간 건가? 어떻게 알고 접근한 거지?’
나는 미간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스노아의 텔레포트를 통해 이동하고 있는 덕분에 아직 눈에 띄는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노예로 붙잡혀 들어온 사람들을 구출하고 있었다.
“왜 그래, 카카나. 표정이 어두운데.”
테이블에 널브러진 약병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할릭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불편하면 방에서 쉬고 있을래?”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기는 노예들을 구금해놓는 지하감옥이었다. 대부분 인간이었고 수인족이 소수 섞여 있었다. 엘프나 드워프 같은 희귀인종이 없는 탓에 노예들의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었다. 전부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구역질이 나서 괜히 쓴 침을 삼켰다.
“화가 나서 그래. 내가 당장 치료해줄 수가 없어서.”
나는 분한 눈으로 노예들을 바라보았다.
모진 과정을 거쳐 이곳에 온 탓에 다들 겁에 질려 있다. 도와주러 온 사람이 있는데도 텅 빈 눈으로 땅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마법사들의 포션에 중독되어 있어. 전에는 이런 걸 본 적이 없는데, 최근에 개발된 것 같아.”
“어떤 건데?”
“복종 포션이라더군요.”
감옥의 보초병에게서 정보를 캐낸 스노아가 참혹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점점 정신을 갉아먹어서, 마지막엔 살아 움직이는 인형처럼 만든대요. 자아를 잃지 않으려면 약물을 주기적으로 먹어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주인에게 절대복종하게 되는 거죠.”
“…….”
“복종하지 않더라도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될 테니, 귀족의 입장에선 아쉬울 게 전혀 없고요.”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포션 중독은 약물만으로 치료하지 못해. 치유연금술을 할 줄 아는 사람만 해독제를 만들 수 있어.”
“치료사?”
“그래.”
나는 치료사가 아니었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포션을 사와서 약물과 혼합하는 것 말고는, 치유연금물약을 조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스노아에게 부탁할 수도 없다. 그는 포션을 만드는 연금술에 까막눈이었다. 연금술사와 협업해서 해독제를 만들어야 했다.
“어쩔 수 없지 뭐.”
나는 별안간 푸욱,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상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어쩔 생각이지?”
팔짱을 낀 채 상황을 관찰하던 아르모어가 느지막하게 질문했다. 나는 꺼내놓은 약물을 첼러스의 주머니에 우르르 쏟아 넣은 다음 대꾸했다.
“제가 치료사가 되면 되죠.”
너무 길어서 거슬렸던 치맛자락을 죽죽 찢고 있는데, 스노아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치료사는 꽤 까다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나요?”
“그렇지. 전문 치료사 밑에서 수련을 하고, 자격이 갖춰지면 시험을 치러야 해.”
“힘들지 않겠어요?”
“괜찮아.”
나는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필요하다면 해야지. 비브로스가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통사정하기도 했고.”
“…….”
“뺀질뺀질한 권력자들이랑 부대껴가면서 배우고 인정받는 과정은 정말 내키지 않지만…….”
나는 이미 죽은 사람처럼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는 노예들을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치유연금술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더 커.”
‘아직 실력이 많이 부족해도 나는 마나를 다룰 수 있어.’
나는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할 수 있는 게 훨씬 많아질 거야.’
“그러니까 우선 텔레포트로 사람들을 옮겨보자. 이 많은 인원을 어디로 데려갈까?”
“아누비르 본부?”
할릭이 고민하는 낯으로 제안했다. 그러자 첼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누비르 본부는 여관이 아닙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수용할 방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전부 미인이잖아.”
아다르가 골치 아프단 표정으로 첨언했다.
“수인족도 섞여있고. 언젠가는 눈에 띌 거야. 가족에게 돌아갈 인원을 추려낸다 하더라도 말이야.”
“이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스노아가 드레스차림인 제 행색을 내려다보며 잠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얘기했다.
“5분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어쩌게?”
“금방 돌아올게요.”
스노아가 오른손에 씨스아이를 소환하더니, 자리에서 사라졌다. 5분 동안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기다렸다.
별안간 스노아가 돌아왔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말하기도 전에 그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어디론가 텔레포트 시켰다. 아다르가 놀라서 물었다.
“어디로 보낸 거야?”
“마탑이요.”
스노아가 가뿐하게 대답했다.
‘마탑이라고? 뛰어난 마법사들과 현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그곳?’
기겁한 내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 건지, 스노아가 평이하게 할 말을 읊었다.
“지낼 만한 적당한 장소를 찾을 때까지 자리를 내어주기로 했어요.”
“누가?”
“마탑주가요.”
아무래도 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마탑주와 협상을 하고 온 것 같았다.
‘누가 들으면 옆집 할머니랑 얘기하고 왔다는 줄 알겠네.’
게다가 드레스 차림이지 않았는가. 사정을 설명하는 데만 10분은 걸릴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해졌다.
“잘됐네.”
“그럼 마지막으로 살펴보려던 곳을 가볼까요? 방금 시전한 텔레포트는 대규모여서, 마족이 눈치채고 도망칠 수도 있거든요.”
“씨스아이가 막아주는 거 아니었어?”
“마법의 흔적을 지워주지만, 시전하는 순간의 마나 이동까지 감춰주진 못해서요.”
스노아가 지도를 확인하더니, 움직이기 편하도록 펑퍼짐한 드레스를 말아 쥐며 얘기했다.
“마족은 초월자처럼 대기 중의 마나를 느낄 수도 있는 노릇이니, 지금 바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노아가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했다. 공기의 냄새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나는 검은 공간 안에 떠있었다.
‘엥?’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온통 어둠뿐이었다.
사물은 고사하고 땅바닥도 보이지 않을 정도면 내 몸도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손발은 잘만 보였다.
‘텔레포트 하다가 내가 기절하기라도 했나?’
꿈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볼을 꼬집으려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한참 고민했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은 한정적인데 말이야. 그렇지?”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어둠 속에서 작은 보라색 불빛처럼 보이는 인영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곳으로 걸어오는 중인 한 남자였다. 초록색 반짝이가 뿌려진 무도회 가면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줄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고 있었다. 보석으로 된 장신구가 아니었다면 광대라고 생각했을 법한 행색이다.
‘행동거지는 귀족 같은데, 되게 특이한 취향이네.’
내 방에 무작정 쳐들어온 에르메타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특유의 광기 어린 분위기가 그들의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방이 어둠뿐이었다.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존재는 마족밖에 없었다.
“그래, 정황상 네가 용사들을 치료한 당찬 여자애겠지? 응?”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남자가 낄낄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이거 영광이네. 드디어 너를 만나다니.”
‘뭐지?’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에르메타를 지배한 마족과 동일 인물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나를 오늘 처음 봤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설마 이곳에 있는 마족이 둘인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거든. 우선 그 시답잖은 환영마법부터 해제해볼까?”
기겁하며 반지를 다른 손으로 가리려는 순간, 내 몸에서 칼날 같은 돌풍이 뿜어져 나갔다. 그것이 남자의 뺨에 길게 상처를 내었다. 스노아가 신경 써서 만들었다고 했으니 반지의 능력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남자의 피부에 물감 같은 검은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검은 피. 굳이 거울로 비춰보지 않아도 마족이 확실했다.
“흐응…….”
남자가 길게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꺾었다.
우둘투둘 돌기가 돋아난 혀가 문어발처럼 길쭉하게 늘어나서 뺨의 핏물을 모조리 핥아먹고 있었다. 소름이 돋아서 솜털이 쭈뼛 섰다. 저건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정도가 아니었다. 인간의 뿌리까지 전부 잃어버리고 만, 괴물이었다.
남자가 바깥으로 길게 뺀 혀를 촉수처럼 움직이며 목을 연신 기이하게 꺾어댔다.
‘으으…….’
나는 속으로 진저리를 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완벽한 반달 모양의 기괴한 미소를 짓던 남자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내 마나가 환장하는 걸 보면, 너 천족 나부랭이가 맞나 보구나? 사제의 마나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어쩐지 용사들이 치료됐을 때부터 수상하다 했어.”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가 긴장한 눈으로 물었다.
“무슨 소리지?”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뭘 물어? 너 천족의 마나를 가지고 있잖아. 증표를 받았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대체 혼자 무슨 추측을 한 건지, 갑자기 히죽 웃은 마족이 내게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혀를 길게 내뺀 끔찍한 몰골이 근거리로 접근하자마자 자동으로 비명이 터졌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꽥 소리쳤다.
“아악! 저리 꺼져!”
내 비명에 남자가 잠깐 멈칫한 틈을 타, 다급하게 반지로 손을 가져갔다.
‘호각, 호각, 호각…….’
그리고 미친 듯이 호각을 생각했다. 여기는 용사들이 빠르게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바드가 만들었던 검은 결계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가장 먼저 생각난 건 폭시였다.
[신수는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손에 잡히는 새끼손가락만 한 호각을 재빨리 입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있는 힘껏 바람을 불었다.
삐이이이―
체구가 작은 새가 있는 힘을 다해 지저귀는 것 같은, 높은 음의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
‘제발!’
마족이 근처에 왔을까 봐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마나 끔찍하게 생겼는지 차라리 눈을 감고 있는 게 나을 정도였다.
‘내게로 와, 폭시!’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외친 동시에, 검은 공간의 위쪽에서 작게 반짝이는 하얀 점 세 개를 발견했다.
처음엔 그게 뭔지 몰라서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러다 가까스로 정체를 깨달았다. 발톱이었다. 그것이 얇은 천 조각을 세로로 찢어내듯, 검은 공간에 기다란 구멍을 내었다.
곧이어 은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털이 검은 공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치 공간을 뛰어넘어 온 것처럼 신비롭고,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폭시!”
폭시가 연한 난초색 눈망울을 새하얗게 빛내며 마족에게 돌진했다. 동시에 용사들이 근처로 텔레포트 했다. 폭시가 찢어놓은 검은 공간은 이미 붕괴되고 있었으므로, 내가 누워있는 장소는 반쯤 평범한 객실로 돌아와 있었다.
“카카나.”
아르모어가 곧장 나를 끌어안으며 안부를 물었다.
“괜찮나?”
“괘, 괜찮…….”
“아아아악!”
폭시에게 몸통을 물린 마족이 발버둥 치며 괴성을 내질렀다.
“어떻게 신수가 중간계에……! 으으윽!”
그가 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꿈에 나올까 무서운 광경에 파르륵 놀라자 아르모어가 제 품에 나를 꽉 끌어안았다. 풍성한 장미향을 맡자 놀란 심장이 다소 수그러들었다.
“역시 천족의 심복이 맞았구나!”
그는 신수의 존재가 금시초문인 듯 검은 피를 울컥 토하면서도 악을 쓰고 있었다.
‘또 천족 타령이네.’
나는 바드를 생각하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천족이란 소리에 용사들이 놀라서 날 바라보다가, 서로 모종의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귀담아 듣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한 말 중에서 더 주의해야 하는 점은 따로 있었다. 바드가 신수와 내 존재를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는 아는 게 너무 없었다. 나는 집착과 광기가 기묘하게 섞여있던 바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나?’
땀이 난 손바닥을 치맛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혼란스러웠다.
“에르메타의 경우랑 많이 달라 보이는데?”
할릭이 사나운 얼굴로 말문을 텄다.
“왜 육체를 버리지 않고 당하고만 있는 거지?”
“신수에게 물려 있어 도망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군.”
여의주를 소환한 아르모어가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추측에 불과하여 여태 말하지 않았으나, 마족은 정신체의 형태로 인간의 몸에 깃들고 있는 듯하다.”
“정신체?”
황녀는 마족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몸을 취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아르모어가 무언가를 알아낸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바드는 숨이 끊어진 육체를 움직여 계속 공격을 퍼부었지. 그래서 사물에 얽힌 사념이나 정신체를 끊어내는 정백술을 사용해 그를 공격했다.”
“참초제근을 말하시는 겁니까?”
첼러스가 용케 아르모어의 주문을 기억해내고 물었다.
“그렇다. 효과가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마족이 인간에게 빙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왠지 어떤 방식으로 빙의하는지 알 것 같은데?”
아다르가 턱을 쓸며 말을 얹었다.
“에르메타가 방에 쳐들어와 이상행동을 보였을 때 혼잣말을 했거든. 마음의 어두운 부분을 파고드는 건가?”
“그러면 마족에게 특히 취약한 사람이 있겠군요.”
첼러스가 맞장구치자, 아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안의 어둠을 다루지 못하는 자는 금방 홀리고 말 거야. 그런 종류의 몬스터도 있으니까.”
아르모어가 죽어가는 육체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낑낑대는 마족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신수의 이빨은 육체를 넘어 영혼까지 꿰뚫을 수 있는 듯하다.”
나는 아르모어에게 안겨있던 몸을 미적미적 일으켜 마족을 내려다보았다. 신수의 이빨이 준 타격 탓인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직 쌩쌩했다. 표정도 통증 때문에 일그러져 있을 뿐, 두려움이나 공포의 감정이 전혀 없었다. 반쯤 바깥으로 빠져나온 그의 혀가 연신 꿈틀거리는 걸 보면 확실했다.
‘폭시의 이빨에 꿰뚫린 채 육신이 죽으면, 깃들어 있던 마족도 죽는 건가?’
궁금한 점이 많았다.
우리가 왜 이 경매장에 머물며 되지도 않는 부부 연기를 했던가. 다 이 순간을 위한 개고생이었다.
사건을 일단락 짓기 위해, 아다르가 앞으로 나섰다.
“자, 묻는 말에 얌전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크으윽, 헛소리하지 마라. 감히 인간 따위가……!”
아다르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폭시를 불렀다.
“폭시.”
그르릉, 낮게 운 폭시가 주둥이에 힘을 준다.
“아악.”
마족이 짐승처럼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대체 뭘 원하는 거냐!”
“마족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서 말이야.”
아다르가 지체 없이 요구했다.
“예를 들면, 신수에게 물린 상태로 심장을 찌르면 네가 어떻게 될까 하는?”
“웃기지 마라!”
“대답을 안 하면 어쩔 수 없지. 직접 해보는 수밖에.”
마족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질색하는 거 보니 곤란한 게 많나 보네?”
마족이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아다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천족과 마족이 평화협정을 맺으며 서로에게 걸었다는 저주가 대체 뭐지?”
입 밖으로 울컥, 검은 피를 토한 마족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의 눈이 어떻게 하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듯 사방팔방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대답.”
아다르가 경고했다. 분함을 억누르듯 크윽, 신음한 마족이 억지로 말문을 텄다.
“마, 말 그대로다. 중간계에서 천족이나 마족의 존재가 감지되면 무조건 대상을 죽이는 필멸 저주다.”
아다르가 당장이라도 찔러 죽일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그러면 넌 뭐야? 감지되면 무조건 죽이는 필멸저주라면서?”
“그, 그건…….”
“그건?”
“기, 기다, 우욱…….”
마족이 다시금 피를 토했다. 얼굴도 아까보다 짙은 보랏빛으로 점점 질려가고 있었다.
‘독에 당한 사람 같은 증상을 보이는데.’
나는 미간을 좁히고 그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기분 탓인지 피를 토하는 정도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신수의 이빨에 독까지 있나?’
폭시에게 직접 물어보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나고 자란 탓에 폭시도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신수의 분비물을 연구할 생각은 안 해봤는데, 아무래도 나중에 알아봐야겠네.’
마족이 간신히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우, 우리가 인간의 몸에 깃들어 있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거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마족이 헐떡거리며 얘기했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을 좀먹어 육체를 차지할 수 있다. 육체를 완전히 빼앗으면 저주 때문에 죽지만, 그 전엔 저주에 감지되지 않아 죽지 않는다.”
“그게 끝?”
아다르가 자비 없이 마족의 목을 틀어쥐었다.
“지금 네가 알고 있는 아주 일부분만 털어놓은 것 같은데, 좋은 말로 할 때 전부 말하지?”
“…….”
“아니면 영원히 이렇게 고통 받든가.”
폭시가 이를 드러내며 거세게 으르렁거리자, 마족이 팔을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우, 우리는 인간의 마나를 흡수해서 생명에너지로 전환시키고 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면 인간으로 잠깐 둔갑할 수 있…….”
쾅―
그때, 새까만 창이 피뢰침에 내리치는 벼락같이 날아와 마족의 가슴을 꿰뚫었다. 바닥에 깊숙이 틀어박힌 창에서 파스스, 검은 연기가 흩날린다.
“아아악!”
기겁한 마족이 어떻게든 창을 빼내려 발버둥 쳤다.
“살려줘! 잘못했어, 잘못…….”
누구에게 용서를 비는 건지, 그가 눈물을 쏟으며 꼼짝도 하지 않는 창을 손에 피가 나도록 틀어쥐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창이 꿀렁거리며 뭔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족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마족이 축 늘어졌다. 저건 단순히 인간의 육체에서 마족의 정신체가 빠져나간 게 아니다. 얼굴에 드리운 공포는 진짜 죽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죽음에 민감한 아다르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가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아다르가 주시하는 허공에 검고 뿌연 연기가 나타나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연기였다.
바드가 나타날 때랑 똑같은 연기 같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사람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고깔모자를 코까지 눌러쓴 남자. 체구는 커졌지만 누구인지는 명백하다.
‘바드……!’
첼러스가 즉시 내 앞을 가리며 검을 뽑았다.
“너무 주절주절 떠드는 거 아니야? 최하급 마족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바드가 거만하게 중얼거리며 창을 비틀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시체에서 검은 피가 꾸덕하게 쏟아졌다. 모자 탓에 입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지만, 그가 분노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드가 화풀이를 끝내고 날 바라보았다. 첼러스가 가리고 서 있어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의 시선과 주의가 나를 향해 있다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카카나, 넌 내 건데 동족들이 계속 캐내려 해서 기분이 영 별로란 말이야.”
바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입도 가볍고 그래서 그냥 죽여 버렸어. 나 잘했지?”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첼러스가 바드를 이루고 있는 검은 연기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태양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성스러운 백금색 검기에 스친 연기가 잿빛으로 파스스 흩어졌다.
집요하게 형태를 꾸려 또 내게 말을 걸 거라는 생각과 달리 그대로 영영 없어져 버렸다. 애초부터 마족의 입을 막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듯했다.
나는 에르메타의 몸을 차지해 내게 접근했던 마족이 바드였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불충분하지만, 저주는 어떤 원리인지 대충 알겠네요.”
스노아가 검지로 제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어떤 원리인데?”
할릭이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나는 지금 시원하게 듣질 못해서 속이 터질 것 같거든.”
“나도 마찬가지.”
아다르가 이를 벅벅 갈며 얘기했다.
“마족의 마나도 씨스아이에 조금 흡수시켜 놨어요. 나중에 저주랑 함께 알아낸 걸 설명해줄게요.”
뭘 알아낸 건지, 스노아가 다소 어두워진 얼굴로 얘기했다.
나는 내 근처로 온 폭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포프란 폐가에서 가장 좋은 방인 듯, 갖은 황금과 사치품이 보였다. 바깥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이 객실에서 무슨 소란이 있었는지 꿈에도 모르는 눈치였다.
“볼일이 끝났으니, 아누비르로 돌아갈까요?”
“벌써?”
나는 얼굴을 야차처럼 찡그리며 물었다. 스노아가 의외란 듯이 날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가장 빨리 벗어나고 싶은 건 카카나 아니었나요?”
“당연히 벗어나고 싶지. 하지만 이대로는 못 돌아가. 엿은 먹이고 가야 될 거 아냐.”
“이곳에 있는 귀족들에게요?”
“응. 해결을 해야 하잖아.”
“어떤 걸요?”
스노아가 물빛 눈망울을 끔뻑이며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잠시 고민하다가, 불만인 부분을 토로했다.
“에르메타의 남편은? 이제 마족은 없으니 전보다 낫겠지만, 계속 학대받을 거야.”
스노아가 고개를 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순 없어요, 카카나. 그에게도 복잡한 사정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모두의 사정을 고려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
“화가 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해요.”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저들끼리 추악한 파티를 즐기며, 하하호호 웃는 귀족들이 역겹고 싫어.”
“…….”
“너희도 알잖아. 여기서 그들이 어떤 유흥을 즐겼는지.”
나는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네 말은 알겠어. 그러면 하다못해, 이런 짓을 저지른 귀족들이 쓴맛이라도 봐야 하는 거 아냐?”
나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스노아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듯하더니, 곧 상냥한 미소를 띠며 스태프를 소환했다.
“사실 귀족들이 어떻게 되든 전 크게 관심이 없지만, 카카나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면. 그래요.”
그가 새하얀 스태프로 땅을 가볍게 찍으며 말을 이었다.
“기를 눌러놓는 것도 좋겠죠.”
“…….”
“생각해두신 건 따로 있나요?”
“있긴 한데, 네가 도와줘야 해.”
스노아가 내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눈가를 휘었다.
“카카나가 원하는 거라면, 기꺼이.”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얘기했다.
“이때를 대비해서, 귀족들을 열심히 눈여겨봤어. 친해진 사람들끼리 알아보기 위해 옷은 다르더라도 무도회 가면만큼은 계속 같은 걸 쓰니까.”
나는 므리나 이소리하의 가면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귀족들 전부를 벌주는 게 아니라, 특정 귀족만 벌주는 건가요?”
“응. 확실한 사람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먼 사람이 피해 보면 안 되잖아. 휴디 같은 사람도 섞여있으니까.”
“그렇군요.”
이어지는 얘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던 스노아가 문득 내 머리를 토닥였다.
“카카나는 정말 마음 씀씀이가 예뻐요.”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저렇게까지 기특하단 표정을 지어야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민망해져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내가 골라낸 사람들만 따끔한 맛을 보여주자.”
“따끔한 맛이라면?”
나는 생각해두고 있던 것을 쭉 얘기해주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할릭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볼만하겠는데?”
“그렇지?”
“한번 해보죠.”
스노아가 한창 향락의 밤이 깊어가고 있는 포프란 폐가의 뒷마당으로 텔레포트 했다. 잘못했다간 내가 휘말릴 수 있으므로, 다른 용사들과 나는 뒷마당이 훤히 내다보이는 방에 따로 이동시켜주었다. 여기선 전면의 유리창으로 마당을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다행히 명단이 있네요. 천막에 어느 귀족이 있는지 무도회 가면으로 표시해 놨어요.」
스노아가 텔레파시로 얘기했다.
「이러면 일이 쉬워지죠.」
내가 말한 무도회 가면을 전부 찾아낸 스노아가, 바람 마법을 시전했다.
뒷마당에 있는 천막 중 몇 개를 골라 천장을 강제로 뜯어내자, 추잡스럽게 놀고 있는 귀족들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모두들 큰 소리에 고개를 들긴 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고개를 위로 바짝 추켜올린 채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 둥둥 떠 있던 스노아가 목에 확성 마법을 걸어 얘기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큰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귀족들이 혼비백산하며 비명을 질렀다.
“꺄, 꺄아아악!”
“처, 천장이 어디로 간 거죠?”
“젠장, 내 옷을 내놔! 당장!”
귀족들이 천막 내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은 스노아가 가면 밑에 드러난 입술을 아리땁게 휘며 웃었다.
“그렇게 좁아터진 곳에서 답답하지 않으세요? 넓은 곳으로 안내해드릴게요.”
그러자 천막 안에 있던 인원 전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
“꺄아아악! 뭐 하는 거예요!”
“이불을 내놔요! 당신 몸만 가리면 다예요?”
“이거 놓으시오!”
이불을 잡아당기며 자기 몸을 가리기에만 급급하던 귀족들이, 돌연 뒤바뀐 풍경에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악!”
벌거벗은 수많은 귀족들이 무역도시 그란디스의 대광장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그중엔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천막 안에서 편히 놀고 있다가 이곳으로 바로 텔레포트 되었기 때문이다. 무도회 가면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다들 얼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맨몸에 민낯으로, 은밀한 취향을 다 드러낸 채 대광장에 뚝 떨어지고 만 것이다.
“아아아악!”
당연히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몸을 가릴 것이 없어 어떤 여인들은 분수대에 뛰어들었으며, 어떤 남자는 지나가던 음식마차 밑으로 비집고 기어들어갔다.
그들을 발견한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무역도시 그란디스는 수많은 사람들이 신문물을 유통시키며 문화를 꽃피우는 대도시였다.
대부분이 망측한 꼴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가리고 피했지만, 몇몇은 은근히 깔깔거리며 귀족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즐겼다. 대놓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당시의 상황을 수첩에 자세하게 기록했다.
후에 ‘불행한 사건’을 기록한 물건을 소지한 자는 즉살 처분한다는 명이 떨어졌지만, 기록물은 암암리에 끝없이 거래되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그들에 관한 소문이 쫙 퍼졌다. 사람들은 타락한 귀족들을 지켜본 사랑과 증오의 신 헬리스가 결국 실체화된 증오를 내보였다며 수군거렸다.
음유시인은 이날의 일을 주제로 ‘증오의 밤’이라는 노래를 지어 사람들의 머릿속에 두고두고 기억되도록 만들었다. 입을 통해, 금서를 통해, 후에는 용사기담이라는 공식 서적에까지 가문의 이름이 올라가 결국 멸문할 때까지 회자되었다.
아직은 훗날의 얘기였다.
***
“뭐라고?!”
“이블라,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나는 식겁하는 이블라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으며 연신 쉬쉬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붉은 장밋빛 머리카락만큼이나 새빨개지고 있었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철렁 내려앉은 심장을 추스르며 맥주를 들이켰다. 시원한 음료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답답했던 속이 조금쯤 뚫렸다.
이블라는 여전히 넋이 나가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눈 뜨고 기절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코앞에 대고 손을 흔들어보았다. 뒤늦게 정신이 든 사람처럼 빠르게 눈을 깜빡인 이블라가 내 손을 잡아 밑으로 내렸다.
“할릭이랑 첼러스가 고백을 했다고?”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다. 누가 들으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리라도 들은 줄 알겠다.
“응, 그렇다니까.”
‘신중하게 말하길 잘했어.’
나는 마그마 색깔을 띠고 있는 이블라의 안색을 흘낏 살피며 진저리를 쳤다.
‘용사들이 전부 날 좋아하고 있단 걸 말했으면 진짜 기절했을지도.’
이블라가 도통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방금 헛소리를 들은 건 아닌가 의심스러운지 몇 번이고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
“둘이 고백을 했다고?”
“응.”
“널 사랑한다고 했단 말이야?”
“맞아.”
“네가 잘못 들은 게 아니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그러니까, 대놓고 너에게 좋아한다, 사랑한다, 얘기하면서 고백했다는 말이지?”
“응, 제대로 이해했네.”
딸아이가 사위를 데려와도 이렇게 현실을 부정하진 않겠다. 나는 찡그린 얼굴로 이블라를 바라보았다.
“그걸 티 냈단 말이야?”
“티를 내다 못해 고백을 했다니까.”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오징어 다리를 씹었다.
유명한 술집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많아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운 곳이었다. 마음껏 속 얘기를 털어놓기에 부담스럽지 않아서 일부러 이 술집을 찾아왔는데, 그러길 잘했다. 이블라의 새된 목소리가 용케 소음에 파묻히고 있었다.
“가만있어봐. 용사들 나이가 몇이지?”
“웬 나이?”
“아니 그렇잖아!”
이블라가 돌연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라렸다. 아무리 나를 향한 시선이 아니라지만 간담이 서늘해져서, 들고 있던 맥주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다들 몇백 살은 될 텐데, 너무하잖아! 이렇게 귀엽고 새파랗게 어린 애를!”
나는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영원을 사는 사람들인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이블라도 참.”
나는 너무 웃어서 눈물이 맺힌 눈가를 검지로 쓸었다.
“초월자가 되면 신체가 가장 젊고 강했을 때로 회귀해서 멈춘다더라.”
나는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켜며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서 시간이 아예 멈춰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나이니 세월이니, 용사들에겐 아무 의미 없어.”
“그럼 넌? 넌 신경 안 쓰여?”
“별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잘생겼잖아.”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날 바라보던 이블라가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럼 지금 용사들은 어느 나이 대인 거야?”
나는 스노아가 뭐라 대답했었나 떠올리려 애쓰다가, 간신히 생각해내곤 대꾸했다.
“20대 초중반이라던데?”
“너는?”
‘몇 살이더라.’
용사와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속세와 떨어져서 산 데다 생일 같은 걸 챙기지 않아서 몇 살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열심히 날짜 계산을 해보았다. 그러자 얼추 나이가 나왔다.
“음, 서른 정도?”
“뭐라고!”
이블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계속 이렇게 악을 쓰면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나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대며 눈썹을 그러모았다.
“이블라, 쉿! 자꾸 왜 그래?”
“미, 미안. 나는 네가 당연히 나보다 어릴 줄 알았는데…….”
“내가 너보다 어린 거 맞아.”
이블라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자기를 가리켰다.
“나 스물세 살인데?”
“수인족은 인간보다 수명이 길고 성장도 더뎌. 150살 정도 사니까, 인간의 기준으로 따지면 내가 너보다 어린 게 맞아.”
나는 눈을 위로 굴리며 열심히 숫자놀음을 해보았다. 술을 먹고 계산하려니 굉장히 고역이었으나, 그간 약재를 계량한다고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금방 답이 나왔다.
“서른 살이니까 인간으로 치면 20대 초반이랑 비슷할걸.”
“그렇구나.”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이블라가 육성으로 감탄하다가, 곧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짚었다.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했는데?”
“할릭에겐 모르겠다고 대답했어.”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착잡해서 자동으로 한숨이 터졌다.
“첼러스에겐 아예 대답을 하지 않았고.”
“싫다고 안 했어?”
이블라가 좋다는 선택지를 처음부터 배제한 채 물었다. 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맥주잔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오래된 컵인지 결이 살짝 일어나 꺼끌거리는 느낌이 났다.
“싫지는 않아.”
불타오르는 듯했던 이블라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고백을 할 때도 성급하게 연인이 되자는 말은 않더라고. 둘 다 내 대답을 천천히 기다려주겠다는 느낌?”
“연인이 되자는 말을 안 했다고?”
이블라가 황당하단 눈을 했다.
“그럼 뭐 하러 고백한 거야?”
“그냥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한 거지. 좋다고.”
나는 아래로 처진 보들보들한 양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관찰하고 있었어. 네 말대로 그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게 싫었다면 오히려 고민을 안 했을 거야.”
나는 픽 웃었다.
“그냥 거절하고 선 그으면 끝이잖아. 근데 그게 아니야.”
내 말을 신중하게 듣던 이블라가 별안간 독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입가를 소매로 닦으며 얘기했다.
“그래서 넌 어쩌고 싶은데? 걔네가 널 보쌈 하는 게 좋다는, 아니, 이게 아니라.”
고조되는 음성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이블라가 또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닌가 보다. 저러다 인사불성이 될까 봐 걱정되지만, 오늘만큼은 나도 정신을 놓고 싶었기에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후우, 걔네들이랑, 그래, 함께하는 게 좋은 거야?”
“함께하고 싶어. 그렇긴 한데……, 그냥 혼란스러워.”
나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이러는 게 우유부단한 행동이라는 거 알아. 하지만 도무지 결정을 못 내리겠어.”
“용사들이 종종 스킨십을 한다며. 그게 싫지 않으면 당연히 좋은 거 아니야?”
“호감일 수 있겠지. 근데 그게 사랑인지 어떻게 알아?”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져서 물었다.
“욕구불만이면, 제국 사람들은 외모가 자기 취향인 이성을 찾아서 헤매잖아.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스킨십을 하면 싫지 않고. 하지만 그게 사랑은 아니잖아.”
“……그렇지.”
“할릭과 첼러스는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어.”
“사랑이라.”
이블라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덩달아 한숨을 쉬었다.
“고백 받아본 적이 없어서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심지어 누군가를 사랑해본 경험도 없단 말이야.”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무작정 술을 들이붓고 봤다. 독주가 아닌 탓에 취기는 오르진 않았다. 그러나 과도하게 긴장된 몸을 풀어주는 덴 꽤 도움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용사들의 외모는 다 내 취향이야.”
“푸읍!”
이블라가 술을 마시다 말고 뿜었다. 나는 조용히 휴지를 건네주었다. 그녀가 입가를 톡톡 두드리며 지진이 난 눈으로 날 봤다.
“다?”
“응. 자기만의 매력이 확실하잖아.”
이블라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마주한 사람처럼 얼굴을 구겼다.
“뭐가 그렇게 좋은데? 솔직하게 털어놔봐. 그래야 조언을 해주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음, 누구부터 얘기하지?”
나는 곤란한 낯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다섯 명이다 보니…….”
“할릭부터 얘기해 봐. 어떤 부분이 좋은데?”
나는 검지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할릭은 날 전율하게 만든다고 해야 하나. 품이 커서, 안기면, 큼, 크흠.”
나는 볼을 붉히며 애써 말을 끝맺었다.
“꽤 좋아.”
“……다른 사람은?”
“아르모어는 권태롭고 느긋한 왕의 느낌이야. 같이 있으면 편하면서도 어렵고, 뭐랄까…….”
나는 적당한 말을 떠올리려 애쓰며 손으로 미간을 꾹꾹 짓눌렀다.
“전신에 성적인 매력을 둘둘 감고 있는 느낌? 섹시해.”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으므로, 나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주 섹시해.”
“그런 분위기가 있긴 해.”
머릿속으로 아르모어를 떠올려보는 듯하던 이블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스노아는 솔직히 말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있긴 해? 상냥하고, 그렇게 예쁜데?”
나는 눈을 황홀하게 내리뜨며 두 손을 맞잡았다.
“인형 같고, 잘 웃어주고, 말투도 부드럽잖아. 반짝반짝해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져.”
“남자들 중에 그렇게 예쁘게 생긴 사람은 나도 본 적이 없어.”
이블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스노아를 싫어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거야.”
“맞아.”
나는 신이 나서 맞장구쳤다.
“그럼, 아다르 아로아는?”
“아다르는 퇴폐적이야.”
나는 그의 새까만 눈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위험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근데 그게 꽤 매력적이야.”
나는 볶은 땅콩 몇 알을 집어와 입 안에서 굴리며 단어를 골랐다.
“눈매도 날카로우니 야성적이고.”
“그 음침한 놈마저 호감이란 말이야?”
“잘생겼잖아.”
이블라가 입을 다물었다가, 툴툴거리며 인정했다.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기긴 했어.”
“아다르, 하면 바로 첼러스가 떠오르지 않아?”
“왜?”
“어둠과 빛 같잖아. 동전의 양면.”
술을 마시던 이블라가 컵을 내려놓고 킥킥거렸다.
‘내 비유가 찰떡이긴 하지.’
나는 신나서 설명을 덧붙였다.
“첼러스는 태양처럼 찬란하잖아. 호수색 눈에 금발이니까 색 조화마저 빛 그 자체라구. 아다르는 말할 것도 없이 밤이고.”
이블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끝맺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용사들은 전부 취향이고 호감이다?”
“응.”
“한 사람도 빠짐없이?”
“네가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나는 목소리를 죽이며 얘기했다.
“오랫동안 여행을 같이 해서 정이 많이 든 걸까?”
“이상한 건 아니지. 다중결혼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평민도 드물긴 하지만 꽤 있고.”
나는 약간 민망해져서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내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야. 경계가 좀 심한 편이거든. 그런데 다들 성격이 좋아서.”
“성격이 좋다고?”
이블라가 아주 못 들을 소릴 들었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나는 의아해져서 되물었다.
“성격 좋지 않아? 배려도 잘 해주고.”
“하…….”
술잔마저 테이블에 내려놓은 이블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방금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싶어서 혼자 곱씹어보았다.
‘이상하게 말한 건 없는데?’
이블라가 생각하기 싫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래, 일단 그렇다고 치자. 이 주젠 넘어가. 그래서?”
“뭐, 그래서 다 호감인 상태란 거지.”
나는 돌연 침울해져서 입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그래서 더 헷갈려. 고백 같은 거 하지 않고 그냥 평소처럼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까?”
이마를 짚고 끙끙거리자 날 지켜보던 이블라도 괴로운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종업원을 불러 술을 더 시켰다.
“하드볼케이노 두 병이요.”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괜찮겠어?”
하드볼케이노는 독주 중에서도 애주가만 마신다는 유명한 술이었다. 나는 그럭저럭 버티겠지만, 이블라는 몇 잔 마시는 것만으로 나가떨어질지도 몰랐다.
“이런 날 마시지 언제 마셔.”
이블라가 호쾌하게 술을 따르며 윙크했다.
“걱정 마. 길거리에 퍼질 정도로 안 마셔. 즐기려고 먹는 건데 뒤처리도 못 해서야 쓰겠어?”
“그럼 괜찮지만…….”
“자자, 걱정 말고 들어.”
이블라가 술을 따라주었다. 체리주스처럼 붉고 투명한 술 색을 보자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안 그래도 답답한 속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거라도 마시고 잠깐 동안은 편해지고 싶었다. 나는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드볼케이노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크으, 죽인다!”
맥주랑 다르게 속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래. 네가 취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이블라가 하드볼케이노를 야금야금 홀짝이며 쿡쿡 웃었다. 심하게 취해버릴까 봐 속도를 조절하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니 더 안심이 되어서, 끝없이 술을 들이부었다. 나는 술에 강했다. 취하고 싶은 하루였으므로, 술병을 끝없이 비웠다.
“이블라, 나 왠지 자제를 못 할 것 같은데.”
얼굴에 열이 오를 기미를 보이자 조금 걱정이 되어서 입을 열었다.
“너무 취하면 어쩌지?”
“오, 드디어 네 취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야?”
그런데 내 걱정과 다르게 이블라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손뼉을 쳤다. 당장이라도 취해 자기 앞에서 뻗어줬으면 좋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느리게 눈꺼풀을 깜박이며 양해를 구했다.
“나 많이 취해도 되는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 네 흐트러진 모습이라니…….”
이블라가 테이블 위의 손을 꽉 주먹 쥐었다. 그리고 굉장히 비장한 눈으로 선포했다.
“언니만 믿고 취해, 카카나.”
나는 안심하고 컵에 다시 술을 따랐다. 술에 떡이 돼서 들어가면 용사들이 뒤집어질 것 같지만, 알게 뭔가.
‘사고만 안 치면 되지.’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다가, 문득 솔직하게 얘기해보라던 엘프들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이 아니니까, 제일 객관적으로 조언해줄 수 있었던 건가?’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 말이야. 호감이지만 사랑까지는 아닌 것 같다고 그냥 용사들한테 털어놓을까? 모르겠다고?”
“그것도 나쁘지 않지.”
이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시간도 비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털어놓는 게 나을 것 같아.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또 없을지도 모르고.”
“왜?”
이블라가 벌겋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물었다. 나는 그새 똑 떨어진 독주를 새로 시키며 대답했다.
“치료사가 될 생각이거든. 조만간 비브로스의 제자로 들어가게 될 거야.”
“정말? 하기로 한 거야?”
“응. 약제사는 제약이 많아서.”
나는 마탑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내가 만든 약물로 포션에 잠식되는 속도를 대폭 줄여놓았으니, 차근차근 치료제를 개발해야했다.
걷지 못하는 늑대 수인족의 상태가 제일 심각했다. 그녀의 발도 치유연금물약으로 해결을 봐야 했다.
“만들어야 하는 약이 있어. 지금이 아니면 끝없이 답을 미룰 것 같아. 바쁘다는 건 좋은 핑곗거리잖아.”
“미루면 뭐 어때서? 걔네가 대답을 재촉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내가 호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아니고 다섯 사람이야, 이블라.”
나는 술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섯 사람에게 모두 비슷하게 호감을 품고 있단 말이야. 이게 과연 사랑일까? 나는 영원히 모를 것 같아.”
“왜? 다섯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지.”
이블라가 시원하게 대꾸했다. 나도 저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사람만으로도 벅찰 것 같아. 품고 있는 호감만으로 이미 휘둘리는 느낌인데, 다섯 사람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푸욱, 한숨이 나온다.
“모르는 척한다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잔에 찰랑거리도록 따른 독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이런 식으로 벌써 두 병이나 해치워버렸다. 아무리 술에 강하다지만 갑자기 많은 양을 들이마시자 머리가 띵했다. 취기가 오르는 건 오랜만이었다.
나는 딸꾹질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도통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아무튼, 이 상태론 안 돼. 마음 한구석에 싸다 만 똥처럼 계속 찝찝하게 남아 있을 거 아니야.”
꼬부라진 혀로 설명하니, 이블라가 집어든 오징어 다리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입맛이 뚝 떨어진 얼굴이다.
“꼭 그런 말로 표현해야겠니?”
“미안해. 근데 이게 내 심정을 표현하는 데 제격이어서…….”
“네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는 확실히 알겠어.”
이블라가 내 독주를 뺏어 마시며 결정을 부추겼다.
“네게 고백한 애들에게 오늘 당장 솔직한 마음을 털어놔버려.”
그녀답게 시원시원한 결론이었다.
“찝찝한 거 싫다며. 그렇게 계속 스트레스 받다간 대머리 된다.”
“진짜 그래버릴까 봐.”
“말로만 얘기하지 말고.”
이블라가 내 손을 잡으며 시선을 맞춰왔다.
“행동하는 거야. 솔직히 마음에 드는 결론은 아니지만, 네가 괴로운 것보단 나으니까.”
“고마워, 이블라.”
“네 표현을 빌리자면 입으로 말을 싸버리는 거지! 변비해소라고 생각해!”
잔뜩 취한 이블라가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나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같이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짧은 시간 동안 독주를 또 한 병 비운 나는 딸꾹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좋았어! 지금 당장 얘기하러 간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잖아! 오늘 해치워버려. 후련해져버리라고!”
“그래! 후련해지는 거야!”
나는 이블라와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하며 술집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아누비르 본부로 걸어갔다. 이블라는 인사불성이 되기 직전임에도 나를 기어코 본부의 대문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이블라의 등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재끼다가 헤헤 웃었다.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벌써 속이 후련한 느낌이었다.
‘그래. 말해버리면 될 걸 왜 지금까지 낑낑대며 고민한 거지?’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돌렸다.
‘일단 털어놓으면 용사들도 알겠다며 물러설지도 모르잖아!’
한참은 잘못된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마음도 퍽 편해지고, 생각도 정리되고, 아누비르 본부도 가까워지자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더 취했다.
“으으, 어지러워.”
딸꾹질을 하며 비틀비틀 걸어가는데 갑자기 까만 벽에 코를 처박았다.
“어억!”
골이 울리자 머릿속이 뭉개진 푸딩처럼 곤죽이 되어버렸다. 도무지 균형을 잡고 있을 방법이 없다. 넘어질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이상하게 엉덩이가 아프지 않았다.
나는 실눈을 뜨고 고개를 숙였다. 검은 벽이 손을 내밀어 등을 받쳐주고 있었다. 호흡을 몰아쉬며 얼떨떨하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뭐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린데.’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피부가 보였다.
‘아다르?’
짙은 회색 머리카락이 검은 눈 근처에 흐트러져 있었다. 시커먼 밤하늘에 으스스하게 번지는 안개처럼.
나는 아다르임을 확신하고 그의 팔에 푹 늘어졌다. 달빛이 비친 얼굴이 신비로우면서도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날 내려다보았다.
“달빛이 참 잘 어울린단 말이야.”
우물우물, 입 안으로 반쯤 되먹는 음성으로 웅얼거리니 한참 후에야 아다르에게서 반응이 왔다.
“뭐?”
“낮에 보면 물에 빠져 죽은 귀신처럼 섬뜩한 느낌인데 말이야.”
딸꾹.
나는 입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침을 스읍, 빨아들이며 아다르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너 말이야, 너어, 재수 없게 잘생기고 말이야.”
야심한 밤이었다. 이 시간에 인적도 없는 본부 대문에서 뭐 하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뭐 해. 어엉?”
“하아…….”
아다르가 길게 숨을 내쉬며 휘청거리는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마아니.”
“방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아예 업힐래?”
“안 돼애!”
나는 대뜸 고개를 쳐들고 소리쳤다.
“할릭이랑 첼러스한테 고백하러 가야 대!”
순간 아다르의 팔에 내 허리를 부러뜨릴 정도로 강한 힘이 실렸으나 당연히 난 눈곱만큼도 깨닫지 못했다.
“뭐라고?”
음산하게 묻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방향을 틀었다. 그저 이 찝찝한 마음의 잔여물을 싸질러야 한다는 일념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성이 희박한 머릿속에 온통 내 속을 털어놔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으으, 뭐야.”
근데 앞으로 나가려던 몸이 튕기듯 뒤로 끌려갔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다르가 어둠 속에서 고요히 서 있었다.
“왜 그래?”
“뭘 한다고? 다시 말해 봐.”
“고백한다니까?”
내 팔뚝을 그러쥔 아다르의 손가락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며 대답했다. 그냥 잡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철로 만든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온 힘을 다하는데 새끼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싫다고 거부하면 용사들은 여태 순순히 굽혀주었기에, 취한 와중에도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나는 꼬부라진 혀로 항의했다.
“이거 놔야 내가 갈 거 아냐!”
“안 돼.”
“뭐야?”
“못 가.”
아다르가 돌연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몸이 위로 붕 뜨자 머리가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띵 울리는 골을 부여잡고 끙끙대다, 간신히 진정되자마자 두 발을 버둥거렸다.
“야, 어디 가! 이거 안 놔?!”
“후우…….”
아다르가 거침없이 발을 놀렸다. 전부 자러 가고 없는 한산한 1층을 지나 계단을 오르더니 망설임 없이 제 방으로 향한다.
“어어……!”
나는 할릭과 첼러스의 방 문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아다르가 그 손마저 모조리 회수해 제 품으로 끌어당기더니, 아예 꼼짝도 하지 못하게 고정시키는 게 아닌가.
‘얘가 미쳤나!’
그가 발로 문을 차 열었다. 그리고 나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너 왜 그래?”
내 신경질을 들은 척도 안 한 아다르가 방문을 잠그고 의자를 문 근처에 끌어와 팔짱을 끼고 앉았다. 내가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아예 작정을 했다. 대놓고 문 앞에 앉아서 끈덕지게 날 노려보았다.
나는 씩씩거리며 문으로 걸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아다르가 다리를 쭉 뻗어 길을 막는다.
“야!”
“술 깨기 전까진 여기서 못 나가. 고백하려거든 적어도 술 깨고 멀쩡한 정신으로 해.”
“너 죽을래?!”
“죽여보든지.”
아다르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날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내가 목소리도 더 크고,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 놀랐다.
그쯤 되어서야 새빨갛게 떡칠되어있는 머릿속에 생각이란 게 깃들 기미를 보였다.
‘내가 뭐 실수했나? 화난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조금 기가 죽어서 물었다.
“대, 대체 왜 그러는데?”
아다르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왜 이러냐고?”
“으응…….”
나는 목을 움츠리고 눈치를 살폈다.
어느 순간 아다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눈높이가 순식간에 위로 훅 솟았다. 고개를 뒤로 꺾으며 그의 날카로운 턱선을 올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선수를 뺏겨서 열 받는데, 뭐?”
아다르가 천천히 걸어왔다.
움찔 놀라며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잡히면 안 될 것 같다는 강력한 생존본능이 내 뒷덜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가 죽을힘을 다해 피하는 날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등이 벽으로 막혔다.
“고백?”
아다르가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물었다.
나는 거의 얇게 편 밀가루 반죽 수준으로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배를 홀쭉하게 집어넣고 숨도 쉬지 않았다. 이런 가련한 노력을 보면 좀 물러나줄 법한데, 그는 비뚜름하게 성격 나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더 밀착시켰다.
아다르가 두 손으로 내 양옆의 벽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잔뜩 취해서 고백을 하러 가시겠다.”
“아, 아다르.”
“그렇겐 못 하지. 내가 왜?”
아다르가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때 짓는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빤히 쳐다보면서 입꼬리만 위로 끌어당기는, 누군가를 잡아먹을 것 같은 미소.
“너무 힘들어 하길래 마지못해 상담은 해줬지만, 이런 것까진 못 봐줘.”
“응?”
“내가 성격이 그렇게 좋은 편은 못 돼서. 알지?”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우선 고개를 끄덕이고 봤다. 그의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던 탓이다.
“술에 잔뜩 취해서, 멍한 눈이나 하고 말이야.”
“내가 언제…….”
그가 보드라운 내 귀에 촉, 뽀뽀하며 속삭였다.
“괴롭히고 싶게.”
허스키한 음성에 등허리가 잘게 떨린 순간, 느닷없이 입술이 부딪혔다.
나는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입술을 살짝 떼고 내 반응을 살피는 듯하던 아다르가 어떤 거부도 없자 다시금 입술을 부딪쳐왔다.
거칠고 뜨거운 살덩어리가 입가에 뭉개지며 틈을 비집어 열었다. 멍청히 눈만 끔뻑이는 날 신중히 들여다보던 아다르가 사랑스럽다는 듯, 눈가를 사르르 휘었다.
그가 내게 키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느지막하게 깨달았다.
“으?”
정수리에서 시작된 소름이 움찔거리며 옆구리 쪽으로 타고 내려왔다. 아다르가 고개를 비틀자 입맞춤이 깊어졌다.
“아, 무, 우읍.”
그의 옷자락을 그러쥐고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미 어지러운 상태인데 호흡까지 흐트러지자 절로 눈물이 났다. 아다르가 버거워하는 내 입을 놓아주고 위로 올라가 눈물을 핥아 먹었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의미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무, 무무, 무무무슨!”
“야.”
아다르가 두 손으로 내 뺨을 붕어입술이 되도록 꽉 짓누르며 허리를 숙였다. 혼란과 의아함이 그득한 내 꿀색 눈망울을 검은 시선이 오랫동안 파헤쳤다.
아다르가 한참 뒤에 조용히 얘기했다.
“걔네 말고, 나한테 고백해.”
“엉?”
“받아줄 테니까.”
“어엉?”
그의 말마따나, 나는 바보처럼 요상한 소리만 반복하고 있었다. 쿡쿡 웃은 아다르가 볼이 눌려서 툭 튀어나온 내 윗입술을 살짝 깨물며 얘기했다.
“널 사랑한다고, 멍청아.”
그리고 웃기게도 나는 고백을 듣자마자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
“으으…….”
천지가 개벽이라도 하고 있는 중인지, 머리가 두 쪽으로 갈라지려고 했다. 깨어나자마자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뭐지?’
그러다 내 이불에서 낯선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묵직한 포도주와 비슷한 냄새였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프고 어지러운데 와인 향까지 나자 니글거리는 속이 뒤집히려고 했다. 나는 이불을 젖히고 습관적으로 선반을 더듬었다. 마법 가방이 놓여 있어야 할 선반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이상한데.’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들자, 탁상시계만 놓인 선반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벽지가 회색이었다.
내 방은 벽지가 아이보리색이다. 그제야 이곳이 내 방이 아니라는 걸 알고 벌떡 윗몸을 일으켰다.
“여기 어디지?!”
“어디긴, 내 방이지.”
“아으어아악!”
나는 심장 부근을 그러쥐고 침대 헤드보드로 사사삭 도망쳤다. 아다르가 옆으로 길게 누운 채 한쪽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었다.
‘내가 왜 아다르 침대에 있지?’
피가 싸악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설마?’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이불을 들춰 몸부터 확인했다. 아다르가 한쪽 눈썹을 휙 치켜 올렸다.
“행동이 몸에 배어 보인다?”
생각할수록 의심스러운지, 아다르가 뾰족해진 어조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럴 리 없잖아.”
나는 제대로 옷이 입혀져 있는 걸 확인하고 안도하며 대꾸했다.
“나는 애초에 술에 취할 일이 극히 드물다고.”
“퍽이나.”
“진짜야.”
“그럼 어젠 어쩌다 그렇게 개떡이 된 거야?”
“개떡이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 정도면 개떡 맞지. 좀 적당히 마실걸…….’
후회해봤자 늦었다. 뭐라고 설명할지 난감해졌다. 대화 내용까지 시시콜콜 다 털어놓을 순 없으므로 그냥 이블라랑 속 얘기를 좀 나누었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번뜩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었으니…….
[할릭이랑 첼러스한테 고백하러 가야 대!]
‘아, 미쳤다.’
그 기억을 기점으로 어제의 일들이 해일처럼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감당이 안 돼서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없애고 싶은 대부분의 기억 중에서도 괄목할 만한 부분이 조명을 비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널 사랑한다고, 멍청아.]
그뿐이랴. 키스까지 했다.
‘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틀어쥐었다.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본 아다르가 쯧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의 테이블에 간단한 요깃거리와 꿀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아침에 일어난 아다르가 미리 준비해놓은 식단이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술을 마시래?”
아다르가 손에 꿀물을 들려주며 말했다.
“좀 마셔. 나아질 거야.”
나는 멍하니 꿀물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할릭과 첼러스에게 속 얘기를 털어놓으려 다짐했었다. 근데 왜 아침이 되니 마음의 짐이 늘어있는가.
미스터리다. 이 정도면 신의 농간이다. 다 꿈이다!
“그래서, 어제 일은 기억나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다가, 컵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다르는 눈썰미가 좋았다. 거짓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다.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꿀물을 들이켰다. 이거라도 마시지 않으면 방바닥에 속을 게울 것 같았다.
“진짜 고백할 거야?”
아다르가 집요하게 물었다.
내가 맨정신으로도 같은 결정을 내릴지 밤새 궁금했던 모양이다. 정말이지 지독한 놈이었다. 나는 우선 그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짚어주었다.
“그 고백, 사랑한다는 의미의 고백이 아니야.”
“그러면?”
“그냥 지금의 내 입장을 말하려고 했던 거야.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호감은 있다고.”
‘하고 많은 말 중에 왜 하필 고백이란 단어를 썼지? 그러니까 오해하지. 아, 진짜.’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아다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런 뜻이었다고?”
“어.”
“뭐, 내가 생각한 건 아니라니 다행이네.”
그가 시원하게 받아넘기며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래도 열 받는 건 마찬가지지만.”
“내가 지금 기억이 희미해서 그런데.”
희미하기는 개뿔, 지금 당장 연필을 쥐면 그림으로도 그릴 수 있을 만큼 또렷했지만, 개미 발톱 정도의 희망을 걸고 물었다.
“혹시 너 어제 나한테 고백했니?”
“기억하네? 바로 기절해서 그건 기억 못 할 줄 알았더니.”
아다르가 슬플 정도로 빠르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했어. 고백.”
그러더니 개구쟁이처럼 웃는 게 아닌가.
“원하면 또 말해줄까? 사랑…….”
“아아아니! 됐어!”
나는 극구 사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다르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얼른 내 방으로 튀어버릴 작정이었다.
“어디 가. 뭐라고 대답은 해주고 가야지.”
그런데 아다르가 날래게 내 손을 잡아채서 돌려세우는 게 아닌가.
할릭과 첼러스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던 탓에, 나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올려다보니 아다르가 어림도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무시할 생각은 아니지?”
“…….”
“나는 천년만년 기다려주겠다, 이런 거 못해.”
나를 볼 때마다 심보 고약한 눈을 하곤 했으면서, 지금은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하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 더 당황스러워졌다. 지진이 난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아다르가 봐주지 않고 몰아세웠다.
“널 사랑한다는 거 농담 아니야.”
“나, 나는…….”
“한 가지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기 3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사위 게임에 져서 이게 네 벌칙이었잖아. 기억하지?”
‘까, 까맣게 잊고 있었어.’
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애꿎은 그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랬더니 무릎을 굽히며 눈높이를 맞추려 든다. 그래서 나도 같이 무릎을 굽혔다. 끈질기게 쫓아왔다. 결국 자리에 무릎을 세워서 주저앉았다.
‘아,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쇠꼬챙이같이 서있을 걸 그랬다. 알처럼 몸을 말고 있는 나를 아다르가 안고 있는 모양새여서 더 난감했다.
“첫 번째 질문, 다른 네 명을 어떻게 생각해? 할릭, 첼러스, 스노아, 아르모어.”
첫 번째 질문부터 너무 막강한 거 아닌가. 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다.
“두 번째 질문, 내 키스는 어땠어?”
나는 두 번째 질문을 듣고 결심했다.
‘그냥 이 상태로 평생 있자.’
대답 안 하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아다르랑 겨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 합리화를 하는 도중, 아다르가 세 번째 질문을 했다.
“세 번째 질문, 나를 어떻게 생각해?”
“…….”
“마지막 질문에 답해주면 앞선 질문 두 개는 없는 걸로 쳐줄게.”
‘처음부터 이걸 노렸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솔깃한 제안이다. 밝은 얼굴로 팩, 고개를 들자 아다르가 얄밉게 말을 이었다.
“……라고 하면 내가 너무 아쉽겠지?”
“…….”
“답도 해주고, 내 부탁 하나 들어주면 없는 걸로 쳐줄게.”
“무슨 부탁을 하려고?”
“걱정하지 마. 이상한 부탁은 안 해.”
그렇게 싱긋 웃는 얼굴로 말하니까 더 신뢰가 안 갔다. 자기 입으로 성격 안 좋다고 시인하는 놈이 어쩌면 저렇게 당당한지 기가 찬다.
들은 척도 하지 않으려다가, 내가 이럴 처지가 아니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답 안 하고 버텨도 아다르는 내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달라붙을 놈이지 않은가.
‘솔직하게 얘기해도 할릭이랑 첼러스한테 말하려고 했던 거랑 똑같잖아.’
나는 진지하게 고민을 거듭했다.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대답이야.’
문제는 부탁이었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다르의 얼굴을 뜯어봤다. 역시 알 수 있는 게 없다. 대답을 유도하려는 것도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그런 쪽으로는 그가 나보다 훨씬 고단수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좋아. 대답할게.”
“나중에 무르면 안 돼.”
‘왠지 불안한데…….’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말끔하게 지우며 대꾸했다.
“알았어.”
“그럼 이제 내 질문에 대답을 해 봐.”
아다르가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해?”
나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대답을 줄줄 읊었다.
“솔직히 말해서, 너에게 호감이 있지만…….”
“사랑까진 아니다?”
아다르가 바로 말을 받았다. 내가 어떻게 대꾸할지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눈만 끔뻑거렸다. 할릭과 첼러스에게 어떤 대답을 할지 말해주긴 했으나 그건 할릭과 첼러스의 얘기였다.
‘똑같은 대답을 하리란 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용사들의 속마음을 모두 꿰차고 있단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면 말을 안 한다. 설마 독심술까지 할 줄 아나 싶어졌지만, 겨우겨우 침착함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
“호감이라도 가지고 있다니 다행이네. 난 그것만으로 좋아. 모르는 건 차차 알아 가면 되는 거잖아.”
아다르가 줄줄이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뭘 해도 좋으니까, 그냥 즐겨.”
“그건…….”
“물론 너는 어떻게 그러겠냐면서 거절할 거야. 이미 알고 있어.”
아다르가 눈웃음을 쳤다.
“하나 말해줄까? 그런 식으로는 네 마음이 어떤지 평생이 지나도 몰라. 부딪쳐봐야 아는 거야.”
“…….”
“수인족은 150년 정도 산다던데, 맞아?”
갑자기 수인족 수명은 왜 묻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를 배우면 수명이 늘긴 하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너는 죽어.”
아다르가 어두운 눈을 하더니 내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네가 죽기 때문에, 내겐 모든 시간들이 찰나일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하게 아파왔다.
초월자는 영원을 산다. 너무 까마득한 이야기라 굉장하다고 여겼을 뿐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할릭이 간 보고 버려도 된다고 얘기할 때도, 막연히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고만 생각했다. 이유는 퍽 상식적이었다. 그런 행동은 상대를 상처 입히니까. 나쁘고 이기적인 행동이니까. 하지만 초월자들에겐 그것보다 다른 게 더 중요할지도 몰랐다.
“지금 이 순간도, 네가 내게 화를 내더라도 1분1초가 너무 아까워.”
아다르가 한 문장도 놓치지 않도록, 느리고 또박또박한 어조로 얘기했다.
나는 슬그머니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저를 제외한 모든 것이 사라지는 세상 속에서 품게 된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그런 의문이 지금에서야 들었다.
‘내가 그동안 나만 생각했구나. 배려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대화를 나누는 순간조차 내 기준에 갇혀서 생각했다. 그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민망함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니까, 망설이지 말고 전력을 다해 나에게 부딪쳐 줘. 망설이고 눈치 보는 시간이 아까우니까.”
아다르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대화든 육탄전이든 상관없어.”
내 손을 가져간 아다르가 주먹 쥐어져 있는 것을 조심스레 풀더니, 제 가슴팍에 갖다 대었다. 쿵쿵, 빠르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내게 관심을 가져. 속을 파헤쳐 봐. 가만히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알아내 봐. 수단방법은 상관없어. 이게 내 부탁이야.”
가슴에 맞닿은 손의 감촉을 느끼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아다르가, 불현듯 눈꺼풀을 들며 날 바라보았다.
“나를 알다보면 너도 알게 될 거야.”
“…….”
“네 마음이 어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