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다가오는 어둠
아르모어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내 눈 깜박임 하나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이 하루 만에 굉장히 수척해져 있었다.
‘내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
나는 눈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나 때문에 힘들었겠다.’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첼러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속은 많이 나아졌어. 몸 걱정 안 해도 돼. 굳이 뭔가를 해주지 않아도…….”
“카카나.”
첼러스가 오른손을 들어 옹송그린 내 주먹을 따스하게 감쌌다.
“그 여자를,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는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짓눌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첼러스의 눈빛이 무거웠다.
‘그 여자라고?’
혼란스러워졌지만, 곧 진정되었다.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한 건가.’
정황으로 미루어 내 트라우마의 원인이 ‘그 여자’라는 걸 용사들이 모두 알게 된 것 같았다. 심지어 첼러스와 아다르는 내가 실험 당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내가 자는 사이에 므리나가 살해당하지 않은 게 신기했다.
‘내 선택을 존중해주고 싶어서 참은 건가?’
아다르는 자기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게 나더러 도와달라고 했다. 내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녀의 목을 가져다드릴까요?”
첼러스가 선하고, 올곧은 눈으로 물었다. 그와 말의 내용이 매치가 되지 않아서 이해하는 데 한참 걸렸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나는 약간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첼러스가 나 때문에 변하게 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첼러스가 낮게 되물었다. 나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느지막하게 설명했다.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 너희는 모두 용사들이고 그런 말은…….”
“카카나, 저희는 용사가 아닙니다.”
첼러스가 몹시 진중해서, 그 진심을 의심할 수 없는 음성으로 못을 박았다. 나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너희가 아니면, 누가 용사란 말이야?”
그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하다가, 이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저희가 용사인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기엔 많은 것을 잃었고, 또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서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용사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첼러스가 조심스럽게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제가 맞닥뜨린 새로운 세상에 막 태어난 생명체처럼, 무구하고 맹목적인 눈이었다. 그 눈빛이 나를 향하자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용사라 불리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멍하니 되물었다.
“날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다고?”
“제 말이 농담 같으십니까?”
“…….”
“농담이 아니니 여쭤보는 겁니다. 그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그의 호수빛 눈망울이 처음으로 시리게 느껴졌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과 무조건적인 충성심의 이면을 처음으로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제국에게 배신당해 18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감금당하고, 고문당하며 축적된 어둠이다. 사라질 일도, 잊힐 일도 아닐 것이다. 그것을 여태까지 못 본 척한 건 나였다.
나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곤,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용사들은 끈질기게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우물거리며 물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므리나 이소리하를 떠올리면, 도망가거나 숨을 생각부터 했다.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니…….’
당연히 사라지길 바란다. 내 눈앞에서 영원히 없어지기를, 아니 과거의 모든 일이 없던 일로 되기를 바랐다.
나는 비겁한 겁쟁이다. 도망친 후로 숨어 살기에 급급했다. 므리나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갇혀 있는 친구를 구출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녀는 사방팔방에 거미줄을 쳐놓은 독거미였다. 거미줄의 어느 부분에 친구들이 걸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작정 죽이는 건 안 돼.’
친구를 생각하자, 그 생각부터 났다.
“아직은 안 돼.”
“아직은?”
아다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가시를 곤두세운 그의 날카로운 기운이 여기까지 끼쳤다.
“그 여자에게 붙잡힌 친구들이 있어.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싶어. 친구들에게 해를 끼칠 만한, 어떤 가능성도 남겨두고 싶지 않아.”
“정보부터 모아라?”
여기서 또 말문이 막혔다.
‘정보라고?’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차근차근 풀어나가려면 정보부터 모아야 한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내게 찾아온 다섯 명의 사람들이 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조차, 부탁하지 않았다. 도움을 청한다는 선택지를 억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므리나의 저택에 있는 친구들이 아직 살아있을지, 아니면 죽었을지, 도망간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영원히 모르고 싶었다.
그저 믿고 싶었다. 어디선가 다들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아니면 그 여자의 밑에서 어떻게든 살 방법을 모색하고, 자기만의 길을 찾았을 거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실은 친구들이 모두 죽어버렸다면? 도망갔던 친구들이 그 여자에게 붙잡힌 지 오래라면?
그러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문을 당했을 때보다 더한 고통이 내 몸으로 깃들어, 영혼 깊숙한 곳부터 산산이 부숴버릴 것 같았다. 친구들이 있기에 버텨온 내 삶 같은 건 순식간에 무너져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안다. 진실을 마주 볼 용기가 없어서 외면하는 게 얼마나 미련하고 바보 같은 짓인지를.
하지만 도저히 극복할 수가 없었다. 이런 내가 밉고 싫은데도 무서움을 쫓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영원히 숨어 살 생각이었다. 이 죄책감과 평생을 싸우면서.
‘만약, 만에 하나라도 멀쩡히 살아있는 게 나뿐이라면…….’
감당하지 못하리라. 죽어버리고 말리라.
나는 겁쟁이다. 그러나 차라리 그게 나았다. 친구들에게 종종 편지를 쓰면서, 잘 지낼 거라고 굳게 믿는 게 훨씬 나았다.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될 바엔 영원한 겁쟁이로 남는 게…….
“카카나?”
내 상태가 이상해진 걸 깨달은 첼러스가, 손을 따스하게 감싸며 이름을 불렀다.
“나, 나는…….”
진실을 확인하기엔 너무 큰 어둠이다.
“억지로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그때, 근처로 걸어온 아르모어가 식은땀이 흥건한 내 이마를 손으로 쓸어주며 말했다.
“그대의 과거와 관련된 일이니, 그대가 결정해야 할 일이다.”
“…….”
“그러니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아르모어가 눈가를 살포시 휘며 웃었다.
“조급할 것 없다.”
“아르모어…….”
“쓰러지지 않도록, 도와주마.”
그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내 눈꼬리를 검지로 슥 훑어주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주저앉지 않도록 강제할 수도 있겠지. 그러니 그대가 못할 것은 없어.”
“……고마워요.”
“우리가 어떻게 하길 바라느냐?”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기다려요.”
창백한 입술에 힘을 주고 얘기하자, 아다르의 살기가 순종하듯 누그러들었다. 다른 용사들의 살기도 검집에 들어간 칼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았던 아까와 두드러지게 다른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말에 따라 용사들이 아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기꺼이.”
첼러스가 내 손등에 정중히 입을 맞추며 눈을 감았다.
***
빅웨입스를 과다복용하는 바람에 내가 기절했다는 소문이 스라일리 경매장을 한 바퀴 휩쓸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하루 동안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쉴 수 있었다. 요양이라는 핑계로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하루뿐이지만, 용사들은 위험하고 불건전한 유흥장에 내가 노출되지 않아 안도한 모양이었다. 기운이 없는 나를 틈틈이 살피더니, 이것저것 재밋거리를 들고 왔다.
“이게 뭐야?”
“젠가라는 거야.”
아다르가 테이블 위에 장난감을 올려놓으며 설명했다.
“직육면체 나무블록을 하나씩 빼면 되는 게임인데, 기둥이 쓰러지지 않게 해야 해.”
“쓰러지면 지는 거야?”
“그렇지.”
“재밌겠네.”
“해볼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노아 일행은 그들의 방으로 돌아간 지 오래여서, 여기엔 이제 첼러스와 아다르밖에 없었다.
‘다 같이 하면 더 재밌었을 텐데.’
아쉽게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다.
우리는 둥글게 둘러앉아 나무블록을 하나씩 빼기 시작했다. 나는 제법 무거운 주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고 게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악!”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첼러스와 아다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들이 얄밉게 웃는 꼴을 보고 있으니 더 열이 뻗쳐서 혼자 씩씩거렸다.
이 게임을 용사랑 한다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금방 깨달았어야 했는데, 다 어리석은 내 탓이었다.
“이런 게 어디 있어! 이걸 어떻게 빼라는 거야!”
나는 구멍이 숭숭 뚫린 채 기이할 정도로 균형을 유지하는 기둥을 노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에서 숨 한 번 쉬었다고 와르르 무너졌다. 이 게임을 벌써 다섯 번은 했는데, 모두 내가 졌다.
수인족의 균형감각이 아무리 좋다지만 용사들을 이길 순 없었다. 그들은 나무블록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쏙쏙 뽑아내는 것도 모자라, 거의 기행에 가까운 수준으로 기둥에 구멍을 내었다.
“딴 거 해!”
“뭐 할까?”
분노로 파르르 떨며 선포하자, 아다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게임을 오래 하지 못하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날 일부러 열 받게 하려고 가져온 거야, 뭐야!’
아다르는 내가 빽 소리 지르는 모습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기운 차려서 다행이다.”
나는 기가 막혀서 되물었다.
“넌 이게 기운 차린 걸로 보여?”
“조용한 것보단 차라리 화내는 게 좋아.”
하여튼 이상한 놈이었다. 분해서 나무블록을 틀에 와르르 쏟아 부었다.
“주사위 게임 해.”
얘들이랑 내가 함께 즐기려면 순전히 운에 맡기는 주사위 게임밖에 없다. 나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걸리면 내가 정한 대로 벌칙을 받는 거야.”
내가 쓰고 있는 벌칙 목록을 한 차례 쭉 훑어보던 아다르가 갑자기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그러면 상은 우리가 정하게 해줘.”
“좋아.”
나는 고민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실수였다.
벌칙의 내용은 다양했다. 둘 중 한 명의 어깨 주물러주기, 칭찬해주기, 한 가지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기, 심부름 해주기…….
반대로 상의 내용은 단순했다. 자기 마음대로 벌칙 대상자 1회 변경하기.
아다르가 어깨를 주물러주는 벌칙을 받게 되었다면, 상을 받은 첼러스가 후에 그 벌칙을 나에게 옮길 수 있는 식이었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쌓여가는 내 벌칙 목록을 보며 생각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다르에게 솔직하게 대답하기 3회.
첼러스에게 솔직하게 대답하기 2회.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가지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기’ 벌칙을 나에게 몰아주고 있었다.
“이런 게 어디 있어!”
나는 참다 참다 버티지 못하고 항의했다. 흥분한 탓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무효야!”
“에헤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끝까지 책임져야지.”
아다르가 정색하고 얘기했다.
“왜 나한테 이 벌칙만 몰아주느냔 말이야!”
“대신 어깨 주물러주기나 심부름 같은 벌칙은 첼러스한테 전부 옮겨줬잖아. 첼러스도 나한테 전부 옮겨주고.”
그의 말대로, 아다르와 첼러스의 벌칙 목록은 아주 화려했다. 둘 다 나를 지목하는 바람에 대상은 ‘나’로 동일했지만, 어깨 주물러주고 심부름 해주고 얼굴을 씻겨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벌칙을 만들 땐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고민해보니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그림이 아닌데.’
아다르가 첼러스의 얼굴을 씻겨주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연출을 원하면서 벌칙목록을 짰었다.
‘대상을 지정할 수 있도록 만들지 말았어야 했어.’
깊이 후회하며 머리를 그러쥐었다. 술집에서 구경만 해봤지, 누군가와 직접 주사위 게임을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르는 분야를 서투르게 건드렸다가 사기 당한 기분이었다.
“우리 조율을 해보자. 솔직히 이건 너무 많잖아.”
나는 반쯤 애원하는 목소리로 서두를 뗐다.
“내 벌칙목록을 좀 다채롭게 바꿔보자. 응?”
“아니, 절대 싫…….”
똑똑―
아다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려던 찰나,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찾아올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스노아 일행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더 이상 우리 방을 찾아오지 않겠다고 했었다. 경매 전 파티장이나, 경매 후 향락의 밤에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었다.
‘누구지?’
향락의 밤이 아닌 오전이나 오후에는 방에 손님이 올 일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음에도, 자연스럽게 므리나 이소리하가 생각났다. 나는 하얗게 질려서 의자에 앉았다.
‘역시, 내가 너무 수상하게 굴었나?’
아다르와 첼러스가 표정이 변해서 날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 있다가 갑자기 토를 해버렸으니, 내가 기억에 남았을지도 몰라.’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찔한 두려움이 뒷골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어렸을 때부터 오랜 기간 축적된 공포와 트라우마였다. 한순간이라도 완벽하게 벗어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면 아르모어가 내 공포를 느낄 텐데.’
보호정백술로 내 공포를 느낄 수 있게 된 아르모어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걱정스레 눈을 굴리자, 스노아가 만들어준 반지를 통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첼러스가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다르가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찾아온 손님을 당장 죽여 놓을 기세였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문 너머에서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손님이 오셨는데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아다르와 첼러스가 가면을 썼다. 낮에는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민무늬 가면을 따로 챙겨온 참이었다. 나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면을 썼다.
아다르가 냉정하고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녁이 될 때까지 모든 시중과 손님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예, 그렇습니다만…….”
“저리 비키거라.”
그때,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손님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움츠러들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므리나가 아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린데.’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야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챘다. 이곳에 오자마자 함께 유흥을 즐기지 않겠냐며, 첼러스에게 눈독을 들이던 여자였다. 남편을 제 하인 부리듯 했던 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육감적인 몸매의 여인이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방으로 쳐들어오는 건 귀족의 문화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에, 가면을 쓴 아다르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큰 남자면 되는 건가요?”
여인이 다짜고짜 내게 물었다.
그녀 또한 편안한 드레스차림에 민무늬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어딘지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머리를 깔끔하게 묶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갈색 머리카락이 거의 산발이 되어 있었다. 나는 미간을 구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왜 저러는 거지?’
“이렇게 함부로 방에 들어오다니요. 나가주세요, 부인. 두 번은 참지 않겠어요.”
“오늘부터 경매장에서 노예를 팔아요.”
나는 와그작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뭐라고요?”
“하나를 살 생각이에요. 큰 남자로 말이에요. 그러면 파트너 교환을 해줄 건가요?”
뭔가 이상한 게 아니라, 확실히 이상했다. 발음이 묘하게 어눌하고, 어조는 지나치게 흥분되어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가면을 써서 안 보이는 거지, 지금 동공 열려있는 거 아니야?’
무슨 약을 했기에 저 지경이 됐나 안쓰러워졌다.
‘몸에 안 좋으니 하지 말라는 건 다 이유가 있는데, 쯧쯧.’
나는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가까이 있다간 봉변당할 것 같았다.
“지금 저를 피한 건가요?”
그럼 완전히 미쳐 보이는데 안 피하게 생겼는가? 나는 생각하는 그대로를 내뱉었다.
“그쪽 지금 제정신 아닌 것처럼 보여요.”
“뭐요?”
“본인의 천박한 행동을 돌아보세요. 어느 귀족이 부인처럼 행동하죠?”
“천박?”
발작 버튼이 눌린 것처럼, 여자가 침을 튀기며 되물었다. 위험을 감지한 첼러스가 내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인이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썼다.
“저는 천박하지 않아요!”
“그럼 그에 어울리는 행동을…….”
“전 이제 남작이라고요!”
그녀가 내 말을 끊어내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난 에르메타 틸리어스 남작이에요! 고귀한 피가 되었단 말이에요!”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자기 신분을 노출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정도가 너무 심했다. 에르메타가 내 경악한 눈에도 아랑곳 않고 핏대를 세웠다.
“감히, 감히 날 무시할 순 없어요! 아무도 날 깔볼 수 없다고요!”
에르메타가 감정이 너무 북받친 나머지 숨을 헐떡거리며 신음했다. 가면 밑으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천박하지 않아. 이제 난…….”
에르메타가 제 머리를 움켜쥔 채 고통스럽게 뭐라 중얼거렸다. 듣기 싫다는 듯 중간에 고개를 가로젓기까지 한다. 누군가 옆에서 그녀의 귀에 대고 끔찍한 소리를 계속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다.
‘진짜 어디가 아픈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자, 첼러스가 내 팔을 잡았다. 올려다보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위험합니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짓씹었다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부인, 왜 그러는 건가요?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보세요.”
“난, 나는, 평민 따위가…….”
넋이 나가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리던 에르메타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공기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마나석을 코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다.
“부인.”
아까보다 훨씬 두려워진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에르메타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길고, 아주 진득한 숨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입술에 미소가 걸려있다. 좀 전엔 그렇게 혼란스러워 보였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에르메타가 말을 이었다.
“제가 실례를 저질렀네요.”
그러더니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우리에게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황당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관중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연극의 주인공처럼 겉멋을 한껏 부리며 인사한 에르메타가, 고운 음성으로 설명했다.
“제가 너무 욕심이 났나 봐요. 부인의 남편들이 워낙 멋져서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탐이 나는 남편이라는 건, 부인도 인정하시지요?”
에르메타의 고개가 첼러스와 아다르에게 돌아갔다.
“특히…….”
그녀가 느릿느릿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내 말을 들으려는 눈치가 아니었으므로, 그냥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었다.
“힘이, 세잖아요.”
‘힘?’
미간을 찡그릴 찰나, 에르메타가 마저 얘기했다.
“부인의 남편들이라면, 못할 것이 없어 보일 정도여서요.”
별안간 가슴으로 싸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딱딱하게 굳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면으로 가려져 있음에도,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물론, 밤일을 말한 거예요.”
에르메타가 싱긋 웃으며 사과를 건넸다.
“오늘 저지른 실례는 부디 용서해주시길. 많이 놀라셨을 것 같네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놀란 정도가 아니라, 뒷목을 쳐서 기절을 시켜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할 수준이었다.
“제가 잠시 정신이 없었던 것 같으니, 부디…….”
침착하게 말을 잇는 것 같던 에르메타가 돌연 입술을 깨물며 굳었다.
“또 왜 그러시죠?”
나는 바짝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은 것 같네요.”
얼굴이 창백해진 에르메타가 다소 급하게 문으로 걸어갔다.
“이만 실례할게요.”
그리고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얼이 나가서 같은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난데없이 방 안으로 폭풍이 들이친 기분이었다.
“뭐지?”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었지?”
아다르가 수상쩍게 여기며 얘기했다.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도 그렇게 생각했어?”
“응.”
“첼러스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이던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약을 잘못해서 저렇게 된 사람을 한두 번 본 적이 있어. 이렇게 심한 건 처음 보지만. 평소에 열등감이 컸었나 봐.”
‘저게 단순히 그 문제라고?’
약 중엔 사람을 돌변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었다. 그 부작용이야 나도 잘 알고 있는 사항이지만, 어쩐지 기분이 찝찝했다.
나는 첼러스를 탐욕스럽게 훑던 에르메타의 손길을 떠올렸다. 욕심이 많고 자존심 강한 성격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이성을 잃었으니 어떻게 나와도 기괴하게 보이는 건 당연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가.’
고민하고 있자니, 아다르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 여잔 내가 계속 예의주시할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안 그래도 신경 쓸 일 많잖아.”
아다르의 말대로 내일부턴 다시 경매와 향락의 밤에 참여해야 한다. 오늘까지 문제없이 버티는 데 많은 주의를 쏟았다. 한순간의 실수로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나는 에르메타가 빠져나간 문을 일그러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
쥐 죽은 듯이 지내자고 마음먹어서일까, 이날 후로 삼 일간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괜히 껄떡대는 귀족들도 싸그리 사라졌다. 스노아 일행과 우리가 찰떡처럼 붙어 함께한다는 소문이 돈 탓이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세상에, 저 남편들 몸 좀 봐요.”
“저 근육이 다 진짜일까요? 정말 아름답네요.”
“키도 어쩜 저렇게 훤칠한지…….”
“제가 들었는데, 목소리가 달콤하기 그지없더라고요. 저 정도면 타고난 거 아니겠어요? 호호호.”
귀족들은 이제 스노아 일행과 우리 일행을 그림의 떡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 유흥을 즐기려면 부인 측인 나와 스노아를 꼬여내야 하는데, 남편 역할을 맡은 용사들이 하나같이 우월하다 보니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키, 근육, 체형, 뼈대까지 육체적인 매력으로 그들을 이길 남자가 전무했다. 그나마 용사들과 비빌 수 있는 남자는 에르메타의 남편들뿐이었다.
“저 부인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럴 때면 수인족의 귀가 밝은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부인들이 수군대는 말을 듣고 있으면 민망하면서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어 편했기 때문이다.
‘달라붙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연신 부채질을 하며 경매 대기실을 흘끗 살폈다. 몇 분 전에 입장한 부부를 끝으로, 더 이상 아무도 입장하지 않고 있었다.
‘에르메타는 왜 계속 안 보이는 거지.’
이상한 모습을 보인 후로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벌써 삼 일째다.
에르메타는 육감적인 몸매와 파격적인 드레스로 이미 여기서 소문이 자자했다. 때문에 약의 부작용으로 죽은 게 아니냐는 흉흉한 얘기가 나돌았다. 우리 방에 들이닥치기 전 다른 귀족들에게도 이상한 행동들을 종종 보였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진짜 약을 잘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고 애써 결론을 내린, 닷새째 밤이었다. 드디어 에르메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멀쩡하네?’
등장을 해도 중독자 같은 행색으로 비실비실 기어들어올 줄 알았는데 겉보기엔 말끔했다. 심지어 소문이 돌기 전보다 더 우아해진 느낌이었다.
가슴골을 지나치게 드러냈던 데콜타주 네크라인은 적당히 올라갔고, 걸음걸이도 여유로웠다.
“어머? 약에 한번 혼나더니 아주 새사람이 된 모양이죠?”
근처에 서 있던 부인이 호호, 웃으면서 비꼬았다.
“그 부인이 맞나요? 드레스 취향이 너무 얌전한데요.”
“하지만 가면의 모양과 색을 보니 동일 인물이 맞는데요?”
나는 내 얼굴로 따갑게 꽂히는 에르메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부채질을 했다. 이곳 분위기에 닷새나 절어 있었더니 귀족인 척 우아하게 여유 부리는 게 퍽 익숙해졌다.
“온다.”
그때, 나를 끌어안은 채 쉬고 있던 아다르가 허리를 곤두세우며 속삭였다.
나는 다른 남편들을 탐색하는 척하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르메타의 남편 중 한 명이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스노아와 내 남편들을 못 먹는 감 정도로 여기던 부인들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렸다. 아주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게 몹시 피곤한 일이 생길 거라는 예고나 다름없었다.
“안녕하세요, 부인.”
남자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키가 제법 큰 남자였다. 머리는 에르메타와 같은 갈색이었지만, 본래 그의 색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뭐죠?”
나는 내가 연기하는 부인의 성격에 맞게, 싸가지 없는 어투로 물었다.
“요 며칠, 한 부부와 시간을 보내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지겹지 않으십니까?”
나는 구겨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나를 유혹하려는 것 같은데, 에르메타가 나서지 않고 그가 주도적으로 행동하니 영 이상했다.
‘명령을 받은 건가?’
나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아니, 전혀요. 여전히 즐거워요.”
“저는 더 즐겁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가 키스하려는 사람처럼 얼굴을 들이밀며, 밀어를 속삭였다.
“저는 어떠신가요?”
나는 당황해서 그를 밀치려다가, 우연히 남자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보고 있는 에르메타를 발견했다. 그녀의 입이 웃고 있었다.
조명을 받아 번들거리는 노란 금잔화색 립스틱이 여기까지 똑똑히 보였다. 왜인지 굉장히 불길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나는 밀치려던 손을 내려놓고 남자를 자세히 살폈다. 기색이 이상했다.
‘숨 쉬는 게 왜 이러지?’
마치 가슴 통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불안정하고 거칠었다. 의자의 팔걸이를 잡고 있는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조명이 어두워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사람의 감각기관은 눈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방해하지 마.”
아다르가 나서서 그를 처리하려는 것 같기에, 선수를 쳤다. 아다르의 의아한 시선이 느껴졌다. 본래 성격 같아선 남자를 들쳐 메서 집어던지고도 남는 작자였으나,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첼러스도 아다르도, 어금니를 악문 채 내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제법 흥미로운 얘기네요.”
내가 관심을 보이자, 남자의 창백했던 안색에 그제야 혈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해 볼 게 있어요. 그러니 똑바로 서 보겠어요?”
“…….”
“저는 취향이 꽤 까다롭거든요.”
남자가 순순히 자리에 섰다. 나는 부채를 접어 남자의 왼쪽 갈비뼈를 톡톡 두드렸다. 그의 몸이 참지 못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역시 금이 갔네.’
나는 그의 팔과 종아리, 허벅지를 차례로 확인했다. 도대체 그의 몸 중에서 성한 부분이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손에 장갑을 낀 채로 남자의 목덜미를 쓸어보았다. 면장갑 겉에 끈끈한 식은땀이 묻어나왔다. 나는 서늘해진 눈으로 에르메타를 주시했다. 그녀는 느긋하게 술을 마시며, 아주 즐거운 것을 구경하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첼러스가 즉시 반응했다.
“여보.”
나는 그의 만류를 무시하고 남자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아다르와 첼러스의 손이 강하게 주먹 쥐어졌다. 그때 에르메타가 자리에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왔다.
“제 남편이 마음에 드시나요?”
그녀가 고고한 어투로 물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그래요.”
“부인의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남자가 또 있었다니, 놀랍네요.”
“…….”
“물론, 함께하셔도 좋아요.”
에르메타가 순순히 승낙하며 고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입매를 애써 풀며 얘기했다.
“그래주시는 건가요? 안타깝게도 제 남편들은 부인과 함께하길 원하지 않는 눈친데요.”
“괜찮아요. 부인의 남편들에겐 관심이 없답니다.”
첼러스에게 그렇게 집착하던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말이었다. 에르메타가 용사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제 남편과 유흥을 즐기고 나면 저랑 둘이서 같이 차나 한잔해요.”
“차요?”
“네. 부인이랑 친구가 되고 싶거든요.”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그러나 에르메타까지 껴서 이런 일 저런 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제안이었다.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메타가 남편을 제 곁으로 끌어당기며 마무리 인사를 했다.
“그럼, 경매가 끝나고 뵈어요.”
아다르와 첼러스는 경매장의 특등석인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기함을 했다. 모든 대화가 끝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준 것만으로 감지덕지였으므로 나는 그들의 분노를 일단 고스란히 들었다.
“너 제정신이야? 어쩌려고 그래!”
“너무 위험합니다, 카카나.”
“그 여자가 네게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
말이 속사포로 쏟아지니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나는 대충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준비되어있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승낙했겠는가. 첼러스와 아다르도 그제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모양이었다. 돌연 조용해지더니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첼러스가 제일 먼저 이유를 물었다.
“왜 허락하셨습니까?”
“미끼야.”
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얘기했다.
“에르메타의 남편 말이야. 내가 거절했으면 심하게 학대받은 다음에, 내일 나한테 또 접근했을 거야.”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짓누르며 눈가를 지압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보통 얻어맞은 게 아니야. 잠깐 확인했을 뿐인데 몸이 엉망진창이더라니까?”
“그래서 허락했단 말씀이십니까? 모르는 남자를 위해?”
“그럼 무시하리? 눈앞에 환자가 있는데?”
첼러스가 조용해졌다.
“어떻게 그래.”
나는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그런 사람을 무시할 수 있는 인간이었으면 너희들 치료할 일도 없었어. 죽든 말든 모르는 인간인데, 뭐. 아니야?”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미안, 감정이 격해져서.”
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잠시 숨을 골랐다. 고개를 숙이자 뻣뻣하게 굳어있던 어깨와 뒷목이 싸르르 아파왔다.
“학대받는 사람을 보면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
첼러스와 아다르가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침울해진 상태로, 뜨거운 열기 속에서 경쟁이 한창인 경매장을 내려다보았다. 이곳과 딴 세상인 것 같았다. 저 수많은 사람들 중에 부당한 관계를 맺은 이들이 한둘이 아닐 거라 생각하니 속이 갑갑해졌다.
경매장에선 한창 노예가 거래되고 있었다. 억지로 거울을 들어 밑을 확인했다. 마족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사람이 거래되는 장면은 되도록 보고 싶지 않았다.
‘내일이면 수인족들도 거래된다는데, 그걸 어떻게 참지?’
턱을 괸 채 경매장을 바라보고 있던 아다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상해.”
“뭐가?”
“미끼라는 건, 상대방이 물 법해야 미끼인 거 아니야?”
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지? 그게 왜?”
“네가 그 남잘 도울 거란 걸 어떻게 알고 미끼로 보내?”
생각할수록 이상한지 아다르가 자세를 고쳐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혹여 내게 해라도 갈까 눈빛이 형형해져 있었다.
“경매장 대기실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환자인지 아닌지 분간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곳이야. 네가 아니고서야 그 남자가 아프단 걸 누가 알아봐? 티를 내는 편도 아니던데.”
생각해보니 그랬다.
나는 덩달아 심각해져서 미간을 좁혔다. 옆에 앉아있던 첼러스가 두 손을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카카나의 성격과 직업을 아는 사람이 아닌 한 그런 미끼를 보낼 가능성은 희박하군요.”
“내 말이 그 말이야.”
“뭐지? 미끼가 아닌데 내가 지레짐작하고 물어버린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그런 바보천치가 또 없을 정도로 멍청한 행동이었다.
나는 아찔해져서 이마를 짚었다가 에르메타의 표정을 기억해내곤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한번 찔러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남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여유로웠다.
“이상하네. 의미심장하게 날 보고 있어서 분명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는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녀의 태도가 평범하지 않았던 건 오해의 여지가 없는 듯합니다.”
첼러스가 거들었다.
“아니면 다른 믿을 만한 미끼가 따로 있었던 걸 수도 있어. 이러나저러나 그 여자를 가까이하는 건 위험하단 소리야.”
속이 타는지, 아다르가 찬물을 한 차례 들이켠 다음 막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남자랑 어떻게 할 작정이야?”
“사실 깊게 생각은 안 했어.”
나는 막무가내로 행동했던 것을 반성하며 쭈그러든 목소리로 토로했다.
“그냥 치료해주고 돌려보낼 작정이었지.”
“에르메타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환자랑 같이 노는 취미는 없다고 하면 되지. 치료는 약을 주거나 발라주는 정도로만 할 생각이었거든.”
“네가 직접 치료해줄 생각이었지?”
나는 뜨끔해서 눈치를 살폈다. 아다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귀족들이 퍽도 그러겠다. 의심을 살 게 뻔해.”
“가지고 있던 거 나눠줬을 뿐이라고 둘러대면 되잖아.”
아다르가 한숨을 내쉰 사이, 혼자 골몰하던 첼러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카카나. 그녀는 후에 둘이서 차를 마시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저희와 떨어지게 됩니다.”
“맞아. 그게 제일 문제야. 고립된 장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쩌려고? 물론 네가 위험해지게 둘 우리가 아니지만 더 이상 여기에 잠입해있지 못할 거야.”
“왜?”
“너에게 해를 끼친 여자를 우리가 곱게 살려 보내겠어?”
그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귀족들은 이런 데서 벌어지는 소란에 아주 민감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걸.”
“저도 걱정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최근 그녀의 행동을 생각하면 무엇 하나 의심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습니다.”
그렇게 얘기해도 뭘 어쩌겠는가.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오늘의 경매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경매가 끝나면 에르메타의 남편과 만나기로 했으니 시간이 없었다.
첼러스와 아다르는 마음 같아선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은 눈치였지만 간신히 참고 있었다.
“에르메타가 무슨 짓 하려고 하면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나는 무기를 되찾은 용사들의 무력을 떠올렸다.
“힘은 충분하니까.”
마침 경매가 끝났다.
나는 용사들의 걱정을 두 어깨에 한가득 짊어진 채 방을 나섰다. 뒷마당의 입구에서 에르메타와 그녀의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첼러스의 굵직한 허리에 손을 감은 채 그쪽으로 걸어갔다.
“괜찮겠어요, 부인?”
날 발견한 에르메타가 남편을 넘겨주다 말고 여우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남편분이 질투를 많이 하는 것 같은데요.”
첼러스의 입은 나와 단둘이 있을 때가 아닌 이상 시종일관 일자로 다물려있다. 그의 불편한 심기를 무슨 수로 알아차리고 신경을 긁는 소리를 해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쌀쌀맞게 말을 끊어냈다.
“부인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그리고 그녀의 아픈 남편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첼러스와 아다르의 시선이 남자와 꽉 맞물려 있는 내 손을 집요하게 살폈다. 장갑을 끼고 있었음에도, 나와 닿은 남자의 손을 모조리 도려내고 싶은 것처럼 강렬한 시선이었다.
“부인이 감당하실 수만 있다면야, 물론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요.”
에르메타가 얄밉게 대꾸했다. 부채로 입을 가리고 입을 터는 게 아주 수준급이었다.
‘원래 저렇게 고단수였나?’
나는 속이 터져서 어금니를 악물었다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분하지만, 에르메타의 말대로 뒷수습이 살짝 걱정이 되긴 했다. 기분 탓인지 이번 사건이 무탈하게 일단락되더라도 용사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남자를 처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낙원’이라 쓰인 천막을 찾아 들어갔다. 가는 길에 혹 므리나 이소리하를 만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셋이서 함께 들어가는 겁니까.”
그때 얌전히 내 뒤를 따르던 남자가 희게 질린 입술로 물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천막을 젖혀 안으로 들어갔다. 편안한 침대와 다과가 놓인 테이블, 술과 각종 물건이 진열된 진열장이 보였다.
“일단, 거추장스러운 외투는 벗는 게 어때요?”
나는 턱을 치켜들며 거만하게 얘기했다. 그가 순순히 외투를 벗었다.
“윗옷 단추 풀어요.”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목 아래까지 채웠던 윗옷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나는 부채로 그의 셔츠를 살짝 젖혀보았다. 예상대로 푸르고 붉은 멍으로 알록달록 물들어 있었다.
나는 심각해진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난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 다…….”
“닥치고 가만히 있어요.”
심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몸이 나쁜 상태일 줄은 몰랐다.
내가 당장이라도 그의 몸을 치료할 것처럼 굴자, 아다르가 내게 걸어와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남자의 몸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나도 모르게 아다르의 몸을 밀어낼 뻔했다.
다행히 아다르의 팔뚝이 구렁이처럼 기어와 등허리를 꽉 조였다. 꼼짝도 할 수 없어졌다. 나는 뒤늦게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아다르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저런 형편없는 남자의 몸이 좋은 거요?”
입은 웃고 있지만, 음산한 목소리에서 ‘설마 네가 직접 치료하려는 거냐.’는 경고가 느껴졌다. 나는 곁눈질로 남자를 살폈다. 다른 사람 손에 맡기기엔 상태가 너무 심각했다. 전신을 구타당한 건 물론이고 눈을 보니 독성이 있는 약물의 중독증상까지 겹쳐 있었다.
‘그런데 왜 맞고만 있었지? 약점을 잡혀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
“여보.”
내가 계속 그에게 정신이 팔려있으니, 아다르가 내 턱을 잡아 강제로 고개를 돌리게끔 만들었다.
“나를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아…….”
나는 여러 차례 눈을 끔벅이다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대답했다.
“누구 마음대로 날 방해하라고 했지?”
“…….”
“몸 상태를 보니 함께 유흥을 즐기는 건 무리야. 그러니 괜한 질투 하지 말고 저리 비켜.”
나는 허리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아다르의 손을 풀어낸 다음,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리고 남자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그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몸에 왜 그렇게 멍이 많죠? 곤란하게 됐네요.”
“거, 겉보기엔 이렇지만 멀쩡합니다.”
남자가 필사적으로 날 회유했다.
“아니, 됐어요.”
나는 그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남자의 입술이 방금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절망으로 어그러질 찰나, 말을 이었다.
“윗옷 벗어 봐요.”
“……예?”
“약.”
첼러스를 향해 손을 내밀며 명령하자, 그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연고통을 꺼냈다. 그냥 연고처럼 보이지만, 내가 휴대하기 편하게 만들어놓은 간이 만병통치약이었다. 가벼운 외상은 이 연고로 해결할 수 있었다.
‘상태가 심각해서 연고만으론 역부족이지만 그래도 전보단 나을 거야.’
연고통을 받고 남자를 의자에 앉히자, 갑자기 첼러스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응?”
“직접 치료하는 겁니까?”
첼러스가 연고통을 들고 있는 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얘기했다. 첼러스까지 나서서 방해하자 더 난감해졌다.
“그렇게 저 남자가 걱정되십니까? 직접 치료해주고 싶을 만큼?”
“사, 상태가 많이 안 좋잖아.”
“이런 궂은일은 제게 시키십시오.”
첼러스가 내 손을 자기 입가로 가져가더니 진득하게 입술을 짓누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손끝이 다른 남자의 털끝에라도 닿는 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갑자기 무슨…….”
“이게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 또한 압니다.”
그가 한 차례 숨을 몰아쉬다가, 느지막하게 얘기했다.
“그러나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까지 인내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저를 혼내실 겁니까?”
분명히 부부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인데, 첼러스의 말이 진심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멍하니 첼러스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니, 저건 진심이야.’
가면으로 가려져 있는데도 그의 호수빛 눈망울이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첼러스와 아다르가 남자를 향해 지속적으로 뾰족한 기운을 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첼러스의 집요한 시선을 받고 있자니, 고백을 받았던 상황도 덩달아 떠올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당신이 원해 이곳으로 왔으나, 하루하루가 힘이 듭니다.”
첼러스가 처연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부디, 저를 슬프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그에게 연고통을 돌려주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번엔 나도 고집 못 부리겠다.’
아주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 덧붙였다.
“이번만 봐주는 거야.”
첼러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그렇게 치료가 시작되었다. 단순히 연고를 바를 뿐인데 효과가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는지, 남자가 얼떨떨하게 자기 몸을 살폈다.
나는 피골이 상접하기 일보 직전인 그의 몸을 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벨을 울렸다. 천막 안에 벨이 구비되어 있어 종을 울리기만 하면 사용인이 방문해 필요한 것을 가져다줄 수 있게 되어있었다.
‘얼마나 혹사했기에 몸이 저렇게 말랐지. 근육만 있고.’
나는 여러 종류의 음식을 시켰다.
그리고 치료가 끝난 남자를 테이블로 끌어와 식사를 시작했다. 아다르와 첼러스는 그와 함께 식사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았으나, 내가 구두 굽으로 발을 짓누르자 억지로 포크를 들었다.
남자는 이게 무슨 일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악마 같은 에르메타 밑에서 학대당하며 살다가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상대 부부에게 치료받는 것도 모자라 식사까지 대접받은 상황이었다.
“배가 고파서요. 음식이 마음에 안 들어요?”
내가 뻔뻔하게 물어보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뭐 해요? 들지 않고.”
그가 자기 앞으로 온 음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두 부드럽고 소화가 잘 되는 메뉴였다. 따뜻한 스튜를 한 숟가락 떠먹은 남자가 입술에 힘을 주더니, 별안간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부인은, 겉보기와 다르게 무척 따스한 분이시군요.”
첼러스와 아다르의 포크질이 우뚝 멈추었다.
‘내가 따뜻하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대답할 가치도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과일을 씹었다. 달짝지근한 맛이 났다.
“그건 당신이 절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부인의 남편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다르랑 첼러스가 저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참 겁도 없는 남자였다. 에르메타에게 당한 게 있으니 이 정도는 무섭지도 않다 이건가.
‘단순히 상황 판단력이 좋은지도 모르겠네.’
나는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용사들은 내 허락 없이 함부로 행동할 수 없으니까.’
“누가 보면 제 세 번째 남편이라도 되고 싶어 하는 줄 알겠어요.”
귀족들이 던질 만한, 제법 괜찮은 농이었다고 생각하며 자화자찬하는데 남자가 폭탄 발언을 했다.
“그러면 안 됩니까?”
분위기가 쩡 얼어붙었다.
‘야, 그건 아니지!’
농을 농으로 받아치는 것까진 괜찮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는 법 아니겠는가. 심지어 첼러스는 아까 내게 당신의 유일한 남편이 되고 싶다느니 어쩌느니 유려한 말을 해댔다.
그런데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당사자를 코앞에 두고 저런 대담한 말을 하다니 상상 이상이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라고 저런 폭탄을 던져.’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를 살피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아다르의 손에 쥐어진 포크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나는 남자가 스튜를 떠먹으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을 노려 아다르의 포크를 홱 빼앗았다. 그리고 치마폭 밑에 대충 숨기며 진땀을 훔쳤다.
‘미쳤나 봐!’
“농이 지나치시네요.”
헛소리 작작하라는 의미로 쐐기를 박은 거였는데, 남자가 갑자기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진지한 얼굴을 했다.
‘아, 제발.’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눈치 없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부디 저를 거두어주십시오, 부인.”
당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애원할 기세라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아다르와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고 뼈 빠지게 연습했지만, 이런 상황은 연습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다르는 그간의 연습으로 내 임기응변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매일매일 극상의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제발…….”
‘나야말로 제발이다. 부탁이니까 그만 말해!’
안 그래도 곤란해 죽겠는데 자꾸 분노를 재촉하는 말을 해댄다. 이러다 용사들의 화가 부글거리다 못해 활화산이 될 기세였다.
‘어쩌지?’
나는 패닉에 빠져서 멍하니 눈만 끔뻑거렸다.
“지금의 남편들보다 더 잘해드릴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기어코 남자가 결정타를 날렸다.
드르륵―
아다르가 의자를 주욱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일 났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아다르가 머리끝까지 화났다는 게 느껴졌다.
“극상의 기쁨.”
아다르가 남자의 말을 냉소적으로 따라 읊조렸다.
“어이가 없군.”
그러더니 내게 뚜벅뚜벅 걸어오는 게 아닌가.
‘왜 나한테 걸어와……?’
이 사태를 어떻게 넘기려는 건지 몰라서 어버버, 하고 있는데 아다르가 나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얼굴이 가까워진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몸을 뒤로 물리려 하자, 갑자기 몸이 의자째 뒤로 밀려났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서, 당겨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입술이 부딪혔다.
“읍!”
첼러스가 나를 중간에 가로챈 것이다.
“하!”
눈 뜨고 코 베인 아다르가 기가 차서 웃었으나, 그쪽으로 쓸 정신이 남아나질 않았다. 심하게 놀라서 몸이 파르륵 떨렸다.
“읏.”
버거워하며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의 단단하고 굵은 팔뚝이 내 허리를 도망치지 못하도록 조였다.
입 안이 휘저어지는 느낌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첼러스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키스였다. 망설임 없이 후벼 파고,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빨아 당기고, 내 몸을 으스러트릴 듯이 끌어안았다. 마치 여태 참아왔던 갈증을 한 번에 채우려는 것처럼.
그런데 뒤통수를 받쳐주고 있는 손은 제가 첼러스라는 걸 증명하듯, 정중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주먹이 옹송그려지다가도, 몽글몽글 풀어졌다.
‘기분 좋아.’
나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바, 방금 내가 뭐라고 생각한 거야?’
첼러스가 뜨거운 혀를 내어 발갛게 부은 내 입술을 몇 차례 핥았다. 나는 혼란에 빠진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학, 하악.”
생리적으로 맺혀있던 눈물이 가면 밑으로 주륵, 흐른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자, 이번엔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아다르였다.
그가 나의 물먹은 호흡을 함빡 빨아들이며 키스했다.
첼러스의 입술이 부드럽고 따뜻했다면, 아다르의 입술은 거칠고 뜨거웠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나를 알고 있다는 듯, 퍽 상냥한 키스가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혼란스러웠던 머릿속마저 텅 비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힘이 하나도 없는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아다르가 순순히 물러났다.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말이 안 나왔다.
에르메타의 남편은 넋이 나가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쥐구멍에 들어가서 죽고 싶어졌다.
“보다시피, 아내는 우리를 감당하는 것만으로 힘겨워하고 있어서 말이야.”
발갛게 달아올라 할딱이는 나를 몸으로 가려 보지 못하도록 막은 아다르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은 접어두는 게 좋아.”
“이곳은 색다른 유흥을 즐기러 왔습니다.”
첼러스가 내 이마에 촉, 뽀뽀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선을 넘는 언행은 삼가십시오.”
이렇게까지 보여주자 남자는 아예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위협적이고 적나라한 방식으로, 다른 남자를 경계하는 남편들은 상대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곳을 찾아오는 부부들이 그럴 리 없지.’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사과하자, 첼러스와 아다르가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엉망이 되어버린 식사자리에서 나머지 스튜를 꾸역꾸역 떠먹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야채를 더 먹었다간 진짜 체할 것 같아서 술을 몇 잔 기울였다. 남자는 식사를 마치고 천막에서 나갈 때쯤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치료를 해주셨으니, 보답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나는 보답이고 뭐고 남자가 얼른 첼러스와 아다르 눈 밖으로 꺼져주길 바랐으므로, 턱을 오만하게 치켜들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런 거 안 받아도 충분히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의미가 담긴 몸짓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단호했다.
“제가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무슨 뜻이지?”
의미심장한 기운을 느낀 아다르가 곧장 캐물었다.
“최근 아내의 동태가 수상합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어요.”
“약을 먹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첼러스가 점잖게 반박했다. 그런데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성격이 달라졌어요. 저는 아내와 5년을 함께했습니다. 그 정도는 알아챌 수 있습니다.”
나는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팔뚝을 손으로 문대고 있자니, 남자가 곁눈질로 첼러스와 아다르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저를 이토록 심하게 구타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에르메타와 단둘이 있는 것은 위험하니, 차를 마시는 약속은 취소하십시오.”
남자가 말을 끝맺었다.
“부인께선 저와 유흥을 즐기지 못하셨으니, 아내와 차를 마셔야 한다는 약속을 지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일부러 유혹을 받아들인 이유가 없어지잖아.’
그의 실책으로 만남이 무산되면 이 남자는 다시 학대를 받을 것이다. 에르메타가 이상하게 변한 이후로 구타가 심해졌다고 하니 더 확실했다.
‘그러면 당신이 또 학대당하지 않느냐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상처를 발견하여 연고를 발라주는 것까지야 이해할 수 있는 범위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다 아니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돕겠다는 건 이상한 행동이다. 내가 연기하고 있는 귀족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의심받기 딱 좋았다.
‘에르메타의 성격이 다른 사람처럼 변한 거라면, 확인해볼 게 있어.’
나는 거울이 들어있는 반지를 한 손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저 또한 그녀에게 관심이 있으니,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만.”
나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명령조로 읊조렸다.
“내가 알아서 해요.”
“……알겠습니다.”
그가 도움이 되지 못해 분한 듯 고개를 숙이다가, 내게 작은 종이쪽지를 건넸다.
“저희의 방 호수입니다. 향락의 밤이 끝나면 찾아오십시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자꾸 미련이 남는 사람처럼 뒤를 흘끗거렸지만 결국 천막 바깥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첼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굳건한 태도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르메타가 들여 줄 리 없어.”
“그녀는 제게 관심을 보였다가 갑자기 돌변했습니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걸 빌미로 압박할 수 있을 겁니다.”
퍽 여유로워진 에르메타를 생각하면 용사들의 계획대로 말려들지 의문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시도라도 해봐야 했다.
우리는 향락의 밤이 끝날 기미를 보이자 뒷마당에서 빠져나와 에르메타의 방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다르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뒤를 밟기로 했다.
놀랍게도 에르메타는 방 밖에 나와 있었다. 우리가 오기를 기다린 눈치였다. 편안한 잠옷차림에, 심지어 가면도 쓰고 있지 않았다.
‘역시 이상해.’
그녀가 날 보호하듯 옆에 꼭 붙어선 첼러스를 다홍색 눈으로 지긋이 바라보았다. 얼굴은 상냥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되레 더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참 동안 첼러스를 바라보았다. 기괴할 정도로 눈을 깜박이지 않는다는 걸 내가 금방 알아차리고 위화감을 느낄 정도였다.
‘역시 저건…….’
“혼자 오신 게 아니네요?”
에르메타가 물었다.
나는 연습한 대로 애써 입술에 미소를 띠었다. 알렉 브래든이 떠오르는 얼굴이어서 전신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럭저럭 입꼬리를 위로 당겨 올렸다. 뺨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제 남편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요. 몇 번이나 부탁하셨고요. 오늘 정말 만족해서, 저도 데리고 와봤답니다. 다 같이 차라도 한잔하면 좋지 않겠어요?”
“저는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었는데, 깜빡하셨나 봐요.”
에르메타가 사뭇 의아한 어조로 거절했다. 나는 얄밉고 싸가지 없는 귀족의 영혼이 내 몸에 깃들어 있다는 상상을 하면서 열심히 입을 놀렸다. 아다르의 대꾸에 열 받았던 경험을 필사적으로 떠올리자 간신히 해낼 수 있었다.
“저번에 제 방까지 막무가내로 들어와서 요구하셨잖아요. 그렇게 원하셨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뀌실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후에 미안한 마음까지 들지 뭐예요.”
“…….”
“기분 상하게 해드린 것은 사과를 드릴게요. 그러니 너무 그렇게 세차게 거절하지 마셔요. 꼭 토라져서 그러시는 것 같잖아요.”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니면, 이젠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
“이상하네요. 요즘 수상한 소문이 돌던데, 심경에 변화가 생긴 이유라도 있으신지?”
딱 여기까지가 아다르와 천막에서 연습한 부분이었다.
이 이상 대화를 주고받게 되면 첼러스가 작정하고 에르메타를 유혹하며, 갑자기 돌변한 이유가 무엇인지 캐묻기로 말을 맞춘 참이었다.
다행히 에르메타는 한 발 물러서기로 결정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매에 능숙한 미소를 띠더니 방문을 열며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저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고 계시다니, 감동이네요.”
“호호, 뭘요.”
부채로 입을 가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귀족들은 사교파티에서 매번 이런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신경전을 벌인다는데, 나라면 단명했을 것 같았다.
“들어오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에르메타의 남편 두 명이 가면을 쓴 채 방구석에 서있었는데, 하도 존재감이 없어서 석상인 줄 알았다. 아니면 에르메타의 방을 지키는 호위기사 정도.
“유흥은 즐거우셨나요?”
에르메타가 한결 여유로워진 기색으로 물었다. 그 정도는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덕분에 무척 즐거웠어요.”
“참 예쁜 반지를 끼고 계시네요.”
“네?”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손을 밑으로 내렸다.
이 반지는 스노아가 다양한 마법을 걸어둔 마도구였다. 이렇게 숨길 필요 없었는데, 괜히 가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훔쳐갈 것처럼 굴었나 봐요.”
“아뇨, 그건 아닌데…….”
한 번 당황하니까 머릿속이 새하얘지려고 했다. 두 주먹을 꼭 옹송그리며 말을 얼버무리자, 에르메타가 능숙하게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굉장히 튼튼해 보이는 반지여서요.”
“…….”
“그런데 아까부터 되게 조용하시네요, 부인. 누가 보면 제가 잡아먹으려는 건 줄 알겠어요.”
나는 얼음처럼 굳어서 이런 말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결국 첼러스가 나섰다.
“부인은 아무런 반지도 끼지 않으셨군요.”
에르메타가 새삼 자신의 늘씬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불편하잖아요, 그런 거.”
“그렇습니까.”
“이런 데까지 와서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겠어요? 두 분은 좀 다른 것 같지만 말이에요.”
입을 가리며 웃은 에르메타가 나를 위아래로 야릇하게 훑는다.
“그렇게 애틋하신 분들이 이런 데에 오셨다니 정말 의외네요.”
등허리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여유를 잃었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차를 들이켰다. 여기에 뭔가를 탔을까 의심이 되었으나 다행히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세상엔 다양한 취미를 가진 부부가 많습니다.”
첼러스가 나 대신 응수에 나섰다.
“저희에 대해 궁금한 게 참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많아요. 아주 많지요. 너무 지루하거든요. 정말이지…….”
그녀의 다홍색 눈이 내게로 스르르 굴러와 머물렀다.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는 요즘이거든요.”
“그래서 이곳을 찾은 겁니까?”
“맞아요.”
돌연 에르메타가 남편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와, 휴디.”
우리에게 왔었던 남편의 이름이었다. 에르메타는 이제 본인을 비롯한 남편의 신상까지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 보냈다 하셨지요? 그러면 조금 더 즐기는 건 어떤가요?”
“무슨…….”
“심심하잖아요.”
에르메타가 말릴 새도 없이 남자의 멱살을 잡아 밑으로 끌어내렸다.
“꿇어 봐, 개처럼.”
그가 자연스럽게 저자세를 취하며 네 다리로 바닥을 짚었다. 그녀가 휴디의 등에 발을 올리며 명령했다.
“휴디, 기어 봐. 응? 재롱 좀 떨어보라고.”
그녀가 보란 듯이 뾰족한 구두 굽으로 휴디의 등을 쿡쿡 찔렀다. 유난히 아파보이는 곳만 찾아서 악질적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고통스러운 나머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신음을 참았다. 이성이 차가운 분노에 놀라 달아날 기미를 보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호흡을 골랐다. 그녀는 지금 나를 도발하기 위해 휴디를 제물로 삼고 있었다. 허옇게 질린 채 휴디를 바라보는 날 에르메타가 즐겁다는 듯이 구경했다.
그걸 보자 확신이 섰다.
그녀는 에르메타가 아니다. 뭔가가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우릴 우롱하고 있었다.
이 이상은 방관할 수 없었다. 마족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이곳으로 왔지만,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누군가가 희생당하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에르메타를 막을 힘과, 휴디를 치료할 능력이 우리에겐 있지 않은가.
‘경매장이 엉망진창이 된다 하더라도, 방법은 또 찾으면 되는 거잖아.’
마족의 손을 거치지 않은 귀족은 없다. 황녀는 분명히 그렇게 얘기했다. 단서를 찾으려 들면 반드시 어디선가 방법을 또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일이 복잡하게 꼬이는 게 싫다고 행동하지 않는 건 그저 게으름일 뿐이야.’
나는 까드득,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그만둬요.”
내 무시무시한 명령조에 제일 깜짝 놀란 건 휴디였다. 그가 기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옆에 서있던 첼러스는 움찔 몸을 떨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목청이 사자후처럼 컸기 때문에, 사용인들이 들이닥칠 것을 염려하여 이후부터는 목소리를 애써 뇌까리며 말을 이었다.
“보고 있기 굉장히 불쾌하네요. 계속 그렇게 행동하신다면 이만 돌아가겠어요.”
“왜요, 재미있잖아요.”
에르메타가 죄책감이 전혀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걸 불쾌하게 생각하시다니, 유별나시네요. 귀족들이라면 무릇, 한 번쯤 이런 식으로 노예들을 가지고 놀지 않나요?”
에르메타가 가증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휴디의 옆구리를 꾹 짓눌렀다. 그가 컥컥거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가슴에 천불이 일어났다. 나는 더 이상 참지 않고 휴디에게 뛰어가, 그가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목과 허리를 받쳐주었다.
그가 꼴딱꼴딱 넘어가는 숨을 몰아쉬며 진땀을 흘렸다. 그 고통을 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지, 너무 잘 안다.
“이 사람은 당신의 남편이 아닌가요?”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렇게 학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제게 휴디는 그저 장식품일 뿐이에요.”
에르메타가 멈추지 않고 잔인한 말을 쏟아냈다.
“좀 오랫동안 예뻐해 줄 마음이 생긴 장식품인 거죠. 돈만 있으면 아름답고 깨끗한 것들을 마음껏 살 수 있는 세상이에요. 제가 뭐 하러 한 사람에게 애정을 쏟아야 하죠?”
바로 그 사람이 눈앞에서 듣고 있는데도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다.
나는 구역질이 나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내 폭발하는 노기를 에르메타도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가 난생처음 보는 것을 구경하듯 눈을 깜빡이다가,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양 중얼거렸다.
“정말 화가 나셨군요.”
“뭐라고요?”
“스스럼없이, 고민도 없이 뛰어들어서 그 남잘 끌어안았잖아요.”
그녀가 막 세상에 태어나 모르는 것이 많은 어린아이처럼 질문을 이었다.
“왜죠?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요?”
“제정신이 아니군요. 전 이만 가보겠어요.”
“어디 가세요, 부인.”
에르메타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습관적으로 핥으면서 말했다.
“이제 슬슬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완전히 미친X 아니야?’
한마디 쏘아붙여 주려고 몸을 돌리자, 첼러스가 황급히 내 팔을 끌어당겼다. 일단 내가 없어져야 에르메타가 휴디를 괴롭히는 짓을 그만둘 것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그냥 다 뒤집어버리자고 얘기하려는 찰나, 에르메타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부부 아니잖아요.”
그녀가 쇳소리 나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첼러스가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나는 얼음처럼 굳어서 움직이기는커녕 말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에르메타가 긴장한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흥미가 동한 얼굴을 했다.
“그대로 나가버리면, 저도 그 ‘소문’이라는 데 동참을 해볼까요? 제가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돈다면서요. 당하고만 있으면 재미없잖아요.”
“이상한 소릴 하는군요.”
첼러스가 따가운 살얼음이 느껴지는 어조로 얘기했다.
“이곳은 부부만 입장할 수 있는 경매장입니다.”
“부부로 위장한 사람이 올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저희가 왜 그런단 말입니까?”
에르메타가 잠시 아무런 말 없이 첼러스를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눈은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아직 그녀에게 거울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마족 아니면 그 엇비슷한 것이 그녀의 몸을 점령하고 있음을 반쯤 확신했다.
의미심장한 침묵을 유지하던 에르메타가 돌연 아주 즐거운 듯이 눈가를 휘었다.
“그래요? 그럼 증명할 수 있어요?”
그녀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더니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제게 둘이 부부 사이라는 걸 보일 수 있냐고요.”
“부인의 망상에 장단 맞춰 줄 필요는 없습니다. 소문을 내시려거든 내시지요. 사람들이 부인의 말을 믿을지 궁금하군요.”
냉정하게 대화를 끊어낸 첼러스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아 방 바깥으로 끌어냈다.
“휴디는 어쩌고 그냥 가시나요, 부인.”
에르메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으나 첼러스가 무시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정신없이 걸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내내 멍청하게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중간에 아다르가 합류해서 첼러스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지만 그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에르메타 틸리어스 남작이 아닙니다.”
“마족이란 거야?”
“모릅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거울로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돌연 자리에 멈춰 섰다. 빠르게 걷고 있던 첼러스와 아다르가 내 걸음에 맞춰 멈추었다.
“왜 그래? 얼굴이 너무 창백한데, 속이 안 좋아?”
아다르가 바로 내 걱정을 하며 등을 쓸어내렸다.
“얘들아.”
금방이라도 쌍욕을 퍼부을 것 같은 내 목소리에 아다르가 손을 멈추었다. 예상컨대, 내 눈은 아마 지금 반쯤 흰자를 드러내고 있지 않을까.
어금니를 악문 채 되물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어?”
“우리가 왜 도망쳐야 돼?”
머릿속이 분노로 온통 시뻘겠다. 나는 거친 숨을 들이쉬며 빙글 몸을 돌렸다. 에르메타의 방이 있는 방향이었다.
“쟤가 뭐라고? 마족이면 잡아 족치면 되고, 마족이 아니어도 잡아 족치면 되는 거 아니야?”
신중하고 인내심 강한 첼러스가 미간을 그러모으며 대꾸했다.
“마족이 아니지만 마족과 연이 닿아 있는 인물일 경우,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내 알 바야?”
나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못해먹겠어.”
“예?”
“부부인 척하면서 저런 구역질나는 걸 보고도 가만히 참아야 하는 거, 못해먹겠다고! 스라일리 경매고 뭐고 지긋지긋해! 이런 더러운 곳에 하루도 더 있기 싫어!”
나는 회까닥 돈 얼굴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애써 아닌 척하고 있지만 첼러스가 흠칫 놀란 거 다 봤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 끝물이라서 어차피 간부들이랑 윗선까지 다 온 상황 아니야?”
나는 주렁주렁 달려있는 머리장식을 바닥에 패대기치며 선포했다.
“뒤집어엎자.”
불타는 눈길이 복도 끝, 에르메타의 방으로 향했다.
“우리들의 파티는 지금부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