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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향락의 부부들 (20/43)

Chapter 4. 향락의 부부들

“많이 컸구나, 폭시!”

일주일이 지났을 때쯤, 카카나는 폭시에게 마나를 먹이기 위해 숲 근처로 향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마나를 먹이면 되기에 일정을 맞춰서 찾아왔더니, 폭시가 어리광을 피웠다. 자주 찾아오지 않아서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풍성해진 은빛 갈기를 긁어주며 폭시를 달랬다. 기껏해야 팔뚝만 했던 몸집이 이제는 거의 두 배로 자라 있었다.

‘이렇게 계속 크면 어쩌지.’

안 그래도 털이 은색인 데다 외양이 독특하게 생겨서 폭시는 사냥꾼의 타깃이 되기 쉬워 보였다. 카카나가 걱정스레 쳐다보자 폭시가 혀로 뺨을 핥으며 위로해주었다.

“폭시, 일주일 후면 먼 곳으로 텔레포트 할 것 같아. 쫓아올 수 있겠어?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숲에서 이동해야 해.”

뀨우!

폭시가 카카나의 불안을 느낀 것처럼 자신 있게 울었다.

“친구들이랑 헤어져야 할 수도 있어.”

폭시는 그동안 숲에서 야수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친구랑 헤어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카카나가 걱정을 해주자, 폭시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 같아서 카카나도 그제야 마음이 놓인 얼굴을 했다.

그녀가 폭시의 이마에 나 있는 뿔에 찔리지 않게 조심해서 머리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몸 안의 마나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첼러스가 내 마나의 성격은 솜털처럼 퐁신퐁신한 느낌이라 했었지.’

머릿속으로 가벼운 솜뭉치를 상상하자, 마나가 그녀의 의지를 따라 쉽게 움직여주었다. 그녀가 손으로 마나를 옮긴 뒤, 폭시의 이마에 있는 보석 부분에 검지를 댔다. 그리고 구름을 밀어내는 상상을 하며 마나를 바깥으로 분출시켰다.

마나를 신체 일부분에 집중시키는 것이 한계였던 처음과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폭시가 식사를 위해 마나를 유도했던 경험이 도움이 된 덕분이었다.

지금은 유도하지 않아도 그녀의 의지로 마나를 움직일 수 있었다. 적당량을 먹이고 손을 떼자, 폭시가 애달프게 울면서 카카나의 무릎에 몸을 비볐다.

“더 이상 안 돼, 폭시. 라넷이 이 정도여야 한댔어.”

폭시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별안간 카카나의 옷깃을 물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어서 카카나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더 놀자는 것 같은데.’

오늘 치 연습을 끝내고 바로 왔던 터라 호위로 첼러스가 따라붙은 참이었다.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휴식을 취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계속 쳐다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첼러스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미안, 첼러스. 폭시가 나랑 산책하고 싶은가 봐.”

그녀가 망설이며 부탁했다.

“혹시 나랑 숲으로 들어가 줄 수 있어? 좀 깊이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습니다.”

첼러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카카나가 기쁜 듯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카카나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꾸미는 재미를 알아버린 카카나는 요즘 계속 예뻐지기만 했다. 이블라에게 이것저것 물어 화장수에 대해 알아보는가 하면, 간혹 작고 반짝이는 장신구를 구매해왔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연한 색조의 립스틱을 바르는 데도 재미를 붙였다.

깜찍한 오렌지 색 립스틱을 바르더니, 최근엔 자기랑 안 어울린다며 사랑스러운 복숭아 색 계열로 바꿨다. 훨씬 화사해 보인다나 뭐라나.

첼러스는 무엇을 바르든 어여쁘다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오늘은 과감한 꽃 장식을 머리에 달고 있었다. 수술이 작은 큐빅으로 되어 있어 연신 반짝거리는 장식이었다.

한결같은 취향이라 생각하며 저도 모르는 사이 희미하게 미소 짓던 첼러스가 별안간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야수가 모이고 있었다. 그녀가 야수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폭시는 그녀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며 간헐적으로 울고 있었다.

“안녕. 넌 처음 보는 애구나. 폭시, 새로 사귄 친구야?”

뀨우!

“그렇구나. 외로워하는 것 같더니 잘됐네. 앞으로도 친구 많이 만들어.”

그리고 몹시 신기하게도 그녀는 폭시, 그리고 야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군.’

그녀는 아예 햇빛이 잘 드는 풀밭에 앉아서, 야수들과 본격적인 수다를 떨었다. 많은 야수들이 그녀의 발아래 복종하고, 사랑이 담뿍 담긴 눈으로 그녀를 우러러봤다. 꺄르르 터지는 웃음이 옥구슬 굴러가듯 청량하다.

첼러스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문득 그녀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적당히 도톰해서, 깨물고 싶은 충동이 드는.

날뛰는 생각을 통제하기 위해 시선을 내려 보지만, 어느 곳이고 그를 자극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가느다란 목선은 붉은 꽃을 피워내고 싶을 만큼 하얬다. 약초를 다루느라 굳은살이 박인 손은 경건히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낭창한 허리선, 부드럽고 하얗게 보글거리는 머리카락, 반달로 휘어 웃고 있는 꿀색 눈망울.

‘미치겠군.’

그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씹었다.

다행히 아직까진 잘 참고 있었다. 그는 제3자의 눈이 되어 스스로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데 능숙했다. 음험하고 끈적하게 움틀거리는 욕망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너무 지나쳐서 그녀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러면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휘둘리기 직전이었다. 어쭙잖은 부부 연기를 시작한 후부터 매일이 위기였다.

“첼러스!”

카카나는 그런 제 시커먼 속을 전혀 몰랐다. 보라. 옆에 오라며 해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지 않은가. 그는 뜨거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리 와 봐! 이 친구가 최근에 새끼를 낳았대!”

첼러스가 배를 보이고 뒤집어진 새끼 야수 다섯 마리를 바라보았다. 타이거캐츠였다. 성격이 특히 포악하기로 유명한 야수.

그런데 처음 본 카카나에게 복종의 의미로 배를 뒤집고 사랑을 달라며 갖은 아양을 피우고 있었다. 용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첼러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여기 있겠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응?”

조르르 뛰어온 그녀가 첼러스의 손을 잡아당겨 그늘에서 빼냈다. 양지로 나오자 공기가 확 달아올랐다. 강렬한 햇빛 탓인지, 아니면 그녀가 눈이 부셔서인지 눈을 바로 뜨기가 힘들었다.

첼러스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걸었다. 카카나가 어미 타이거캐츠에게 새끼를 만져도 되는지 양해를 구했다. 그러더니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첼러스의 눈앞에 보여줬다.

“너무 귀엽지!”

첼러스의 묵직한 시선이 카카나의 얼굴로 떨어졌다. 기대로 반짝이는 눈이다. 머리처럼 곱슬거려서 위로 바짝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 사랑스러웠다.

“귀엽군요.”

첼러스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치? 이 분홍색 발바닥 좀 봐. 아아악! 너무 귀여워!”

카카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타이거캐츠에게 뺨을 비볐다. 그러자 안겨 있던 새끼 야수가 혀를 내밀어 카카나의 땀을 핥았다. 그제야 그녀가 땀범벅인 게 눈에 들어왔다.

카카나는 더위에 약할 뿐만 아니라 땀도 많이 흘렸다. 뺨으로, 그리고 목으로 흐르는 땀방울을 보자마자 머릿속이 마비되었다. 그는 칼자루를 쥐고 있던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핏줄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그러쥐고, 폭발하는 생각들을 황급히 마음속 상자에 우겨넣었다.

“물 줄까?”

마른 입술을 자꾸 핥았더니 목이 말라서라고 생각했는지, 카카나가 물병을 내밀었다. 그는 잠자코 그것을 받아 마셨다.

스노아가 마법을 걸어준 물병이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게 식도를 긁으며 넘어가자 조금쯤 정신이 들었다.

“첼러스? 몸이 안 좋아? 안색이…….”

“아닙니다.”

“많이 덥지? 얼른 돌아가는 게 좋겠다.”

카카나가 새끼를 어미에게 돌려주고 숲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첼러스의 안색이 창백해서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급하게 움직인 탓에 그녀의 머리에 달려 있던 꽃장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첼러스가 그것을 주워들었다. 흙을 털어내고 걸음을 재촉하는 카카나의 손에 핀을 들려주었다.

“앗!”

그녀가 놀란 얼굴로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떨어진 줄 몰랐던 모양이다.

“그렇게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표정이 굳어 있는걸. 열사병에 걸렸나? 첼러스, 허리 좀 숙여 봐.”

그가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자, 카카나가 손을 들어 이마의 열을 쟀다. 거리가 가까워진 탓에 땀에 젖은 그녀의 목이 근거리에서 보였다. 첼러스가 허리를 폈다.

“이상하네, 열은 없는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핀 주워줘서 고마워.”

카카나가 제 머리에 핀을 꽂으며 말했다. 그런데 거울을 보지 않고 꽂은 탓인지, 이상하게 꽂힌 것도 모자라 머리가 엉켜버렸다.

카카나가 눈치를 살피듯 첼러스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자연히 말이 딱딱하게 나갔다.

‘화났나?’

헛다리를 짚은 카카나가 첼러스의 얼굴을 살폈다. 유순한 미소를 지어주곤 했던 얼굴이 완벽한 무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첼러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

“그, 첼러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닙니다.”

“하지만 아까부터 계속…….”

“카카나가 너무 예뻐서 그럽니다.”

제가 말해놓고 놀란 것처럼 첼러스가 입을 다물었다.

카카나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녀는 첼러스와 눈을 마주한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곧 억지 미소를 지었다.

“하하, 내가 오늘 좀 열심히 꾸미긴 했지.”

그녀가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 애쓰며 말했다. 첼러스는 그녀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않은 채 고요히 섰다.

“예쁜 거 단다고 내가 예뻐지는 건 아니지만, 자기만족이니까.”

어색한 공기가 불편해서 기를 쓰고 말을 이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결국 그녀도 조용해졌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여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주제에 퍽 단호한 음성이었다. 카카나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첼러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쁜 건 카카나입니다. 장신구는 중요치 않습니다.”

“무, 무슨 소리야. 그럴 리 없잖아.”

그녀가 생각도 하지 않고 첼러스의 말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누비르로 가자. 애들이 걱정하겠다.”

카카나가 몸을 돌려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카나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망설이는 것처럼 입술을 짓씹다가, 마침내 결심이 선 듯 단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 얼굴이 굳어 있어서 걱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카카나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첼러스가 멈추지 않고 주욱 말을 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기가 힘들어 그랬습니다. 만지고 싶고, 예뻐해 주고 싶어서요.”

“…….”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카카나. 의심하지 마십시오.”

카카나가 넋이 나간 채 그를 바라보았다.

첼러스가 말끔하게 입을 닫고선, 카카나를 지나쳐 숲 바깥으로 안내했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녀가 뒤늦게 첼러스를 쫓아갔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그를 불렀다.

“첼러스.”

무시하고 계속 나아갈 것 같던 그의 잰걸음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추었다.

“부르셨습니까?”

뒤를 돌아본 첼러스가 온화하게 물었다.

엘프들은 용사들이 감정을 숨기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발견할 때면, 그들이 정말 숨기고 싶어 하는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나는 뭘 어쩌고 싶은 거지?’

카카나는 혼란에 빠졌다.

첼러스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이름을 불렀으니 뭘 묻긴 해야 할 텐데, 머릿속만 복잡하고 특정한 질문이 떠오르지 않았다. 속이 답답했다.

“아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첼러스의 시선을 끊어냈다.

“아누비르로 돌아가자.”

그녀는 거의 뛰듯이 움직여서 첼러스를 추월했다. 그리고 앞만 보고 걸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첼러스가 얘기하기 전까진.

더위 탓에 가쁘게 호흡하던 그녀가 숨을 멈췄다. 카카나가 근근이 햇살이 쏟아지는, 울창한 숲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무 근처에 앉아서 털을 정리하던 폭시가 머리를 들더니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리곤 그녀의 곁으로 뛰어와 허벅지에 몸을 비볐다.

첼러스가 말을 이었다.

“제 행동 탓에 혼란스러우시다는 걸 압니다.”

“…….”

“마음을 정하고, 똑바로 행동했어야 합니다. 제 어리석음이 당신을 헷갈리게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첼러스가 그녀의 앞으로 걸어와 손을 잡았다. 긴장했는지, 카카나의 손이 조금 차가워져 있었다.

그가 작은 손등에 의식을 치르는 성직자처럼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 숲으로 향해 있던 꿀색 눈망울이 그제야 첼러스에게 향했다. 그가 카카나의 시선을 음미하며 입을 열었다.

“저를 경계하십시오, 카카나.”

선명하게 빛나는 눈이 그녀의 눈을 곧게 응시했다.

“저는 이제, 포기할까 합니다.”

그녀가 마른입술을 핥더니, 쉰 목소리로 물었다.

“뭐를?”

“마음을 숨기고, 당신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이는 것을.”

그가 카카나의 손을 놓고 깨끗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내리던 햇빛이 첼러스의 금발에 부딪히며 환하게 산란했다.

“사랑합니다, 카카나.”

그가 유순하게 웃는다. 카카나는 첼러스의 풀어진 미소를 아주 오랜만에 봤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니 제 눈치 보지 마시고, 마음껏 행동하십시오.”

“…….”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오늘은 경매장으로 향하는 날이었다. 저녁까진 시간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농땡이 피울 때가 아니었다. 섬세하게 짜 놓았던 인물의 관계도와 성격을 정독하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나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퀄리티미엄에서 계획했던 내 다짐을 되새겨 보았다. 계획은 분명히 ‘모르는 척 시치미 떼기’였다. 그들이 내게 고백을 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척 거리를 두면, 각자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지금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철석같이 믿었다.

정말이지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굳이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한쪽의 마음이 무거워지면 관계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할릭이랑, 첼러스인가…….’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참을 혼자서 몸부림치다가 쌕쌕 거친 숨을 몰아쉬며 늘어졌다. 그리곤 이마에 손을 올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똑딱이는 시계의 초침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3시간 동안 가만히 누워 있기만 했는데 잠이 안 들고 정신이 또렷했다. 한참 동안 이러고 있었더니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아다르가 꼬박꼬박 먹인 탓에 내 배는 시계처럼 정확해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다르가 음식을 들고 내 방을 찾아올 것이다.

똑똑―

생각하기 무섭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 땀 때문에 옷이 달라붙었다. 짜증스럽게 손부채질을 하며 문을 열었다.

“와우.”

아다르가 악귀처럼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꾸해줄 기운도 없어서 터덜터덜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시큰둥하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의 눈빛에 걱정이 어렸다.

“요즘 왜 그래?”

“뭐가.”

“일주일 내내 이 상태잖아.”

그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너 지금 눈 밑 시커먼 거 알아? 오늘 경매장으로 가는 날인데 괜찮겠어?”

“안 괜찮으면 어쩔 거야. 무조건 가야 되는데.”

나는 체념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다르가 만들어 온 수프를 숟가락으로 떠서 삼켰다. 입맛이 없을 줄 알았는데 거짓말처럼 군침이 돌았다. 역시 아다르의 요리는 사람의 마음까지 치유해주는 힘이 있었다.

“그러지 말고 말해 봐. 들어줄게.”

“네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 말해 보기 전까진 모르는 거지.”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아다르는 조금도 쫄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얘도 나 좋아하지?’

맨날 괴롭히기만 해서 인식을 못 하고 있었는데, 아다르도 날 좋아하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이런 고민을 어떻게 털어놓는단 말인가. 그것도 두 명에게 고백을 받았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단 고민을.

‘아무리 아다르가 편하다지만 그건 아니야. 놀리는 것도 아니고.’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리며 물을 마셨다. 심정이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말해 보라니까?”

아다르가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나는 돌연 분노가 치솟는 걸 느끼며 빽 소리 질렀다. 이렇게 성질부리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네가 못 도와주는 거라고 했잖아!”

사람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말을 하곤 한다. 나는 거칠게 물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슬쩍 눈치를 살폈다. 아다르는 한쪽 눈썹을 위로 들어 올린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소심하게 사과를 건넸다. 아다르가 푹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그런 상태로 경매장에 어떻게 가려고 그래. 도와줄 수 있는지 없는지는 들어보고 내가 결정할게. 말해 봐.”

나는 괜히 그릇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아무리 너라도 이번엔 안 될걸. 사람 마음을 돌려놓기라도 할 거야, 어쩔 거야.”

“마음?”

실수했다.

“그냥 내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좀 꺼!”

얼버무리며 수프를 삼켰다. 불량하게 껄렁거리던 자세를 바로 한 아다르가 진지한 얼굴을 했다.

‘완전 망했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숟가락으로 애꿎은 수프를 휘저었다.

“자세히 얘기해 봐.”

“네가 들어서 좋을 거 하나 없는 얘기야.”

“내 걱정은 그만두고.”

감이 좋은 아다르가 자신의 예리한 촉을 곤두세웠다.

“혹시 첼러스랑 관련된 거야?”

수프를 잘못 삼켜서 입 밖으로 주르륵 흘렀다. 옷에 흐르지 않도록 턱을 앞으로 내밀자 그가 황급히 휴지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빼앗듯 내 손으로 가져와서 거칠게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맞구만?”

나는 감추기를 포기했다.

“어떻게 알았어?”

“네 연기가 아무리 늘었어도 내 눈은 못 속여.”

그가 다른 곳에 더 튀진 않았는지 내 옷자락을 꼼꼼하게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첼러스 대하는 걸 껄끄러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

“둘이 싸웠어? 무슨 문젠지 간단하게라도 말해 봐. 오늘이 경매 시작일인 건 알지?”

나도 안다. 그래서 더 환장하겠다.

“사고 나기 전에 빨리 말해.”

이렇게까지 포위망을 좁혀오니 이젠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가장 잘하는 걸 하기로 했다.

입 다물고 있기.

‘내 속이 아무리 답답해도 그걸 털어놓는 건 아닌 것 같아.’

나는 내가 속 얘길 하는 걸 꺼려해서 그런지, 남의 속 얘기도 웬만하면 감추려는 경향이 있었다. 나라면 내가 누굴 좋아한다는 얘긴 아무도 몰랐으면 할 것 같았다. 첼러스는 어떨지 모르지만 조심하는 게 좋았다. 경솔하게 말했다가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다르가 나의 굳은 결심을 무참히 박살내는 질문을 했다.

“설마 걔가 고백했냐?”

나는 경악해서 아다르를 쳐다보았다.

“아, 씨X.”

그가 드물게 걸쭉한 욕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하는 게 굉장한 낭패라도 본 기색이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나는 완전히 무너진 얼굴로 물었다. 그간 갈고닦은 포커페이스가 처참하게 깨졌다. 이렇게 훅 들어오는 질문에 끄떡 없이 버티기엔 아직 짬이 부족했다.

아다르가 거센 한숨을 쉬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뭐?”

“후우, 그래. 어떻게 된 건진 일단 알겠고. 넌 뭐라고 대답했는데.”

나는 시선을 내리며 우물쭈물 얘기했다.

“딱히, 아무 말도.”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아다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별안간 민망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단 말이야.”

“좋다, 싫다. 그 정돈 얘기했을 거 아니야.”

“당황스럽고 내 마음도 모르겠어서…….”

아다르가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었던 거구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내 마음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거냐고 묻고 싶어졌다.

나는 누구를 이성적으로 사랑하거나, 사랑받아 본 경험은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정도 그 여자의 집에서 수인족 친구들이랑 쌓은 것 말고는 용사들이 최초인데, 사랑이라니.’

성인이 된 후로 많은 걸 경험하고 있었다. 우정, 사랑, 모험…….

내 인생에 얼굴을 내밀 거면 좀 차근차근 오지, 한꺼번에 몰려와서 소화를 못 시키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괴로운 나머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첼러스가 대답을 종용하기라도 했어?”

아다르가 영 내키지 않는단 얼굴로 물었다. 마지못해 상담해주겠다는 느낌이 강했다. 아마 내 지친 얼굴이 마음에 걸린 것이리라.

“그건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야. 즐겨.”

아다르가 쓴 약을 삼키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이해하기 힘들단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즐기라고?”

“어, 즐겨. 걔가 사귀어 달래? 자기를 사랑해 달래?”

오히려 경계하라고 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봐. 아니잖아. 그냥 널 좋아하고 있다고 밝혔을 뿐이잖아.”

“…….”

“부담스러우면 밀어내면 돼. 기분이 나쁘지 않으면 즐기면 되는 거고. 온전히 네 선택에 달린 건데 뭐가 어렵다고 끙끙거리고 있어?”

아다르가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표정이 멍청이처럼 보였는지 그가 친절하게 눈높이 교육을 해주었다.

“첼러스를 약초라고 생각해 봐. 널 좋아한다는 특징이 하나 늘어났어. 그러면 첼러스가 다른 약초로 변한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다르가 방문을 열면서 물었다.

“약초의 새로운 특징이 발견되면 넌 어떻게 해왔는데?”

“관찰해…….”

그렇구나. 아다르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한참 동안 닫힌 문을 보고 있었다.

‘관찰?’

미간을 문지르며 한참을 생각했다. 아다르의 말대로, 그들은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당장 내가 뭘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지켜보기만 해도 된다고?’

그러자 마음이 조금쯤 편안해졌다. 나는 팔로 눈가를 가린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피곤했다.

***

밤이 되자 비가 내릴 것처럼 날씨가 꿉꿉해졌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완성된 스노아의 환영마법 반지를 착용하고 거울을 봤다. 이제 경매장으로 출발해야 하는지라 귀족들이 입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풍성한 레이스와 보석이 짙은 푸른색 원단 위에 파도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디자인은 관능적인 매력을 강조하고 있었다. 어깨와 가슴 윗부분을 살짝 드러내는 데콜타주 네크라인이 시선을 끌었다. 리본 모양의 레이스가 작은 가슴 위로 풍성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머리는 돌돌 말아 뒤통수에 고정시킨 뒤 붉은색 꽃 장식으로 마무리 지었다. 구두는 굽이 높았다. 다행히 수인족의 균형 감각이 나쁘지 않고, 첼러스가 도와준 탓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나는 파란색 무도회 가면이 제대로 고정됐나 한번 흔들어본 후,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이블라가 복도에 대기하고 있었다.

“옷이 너무 야한 거 아니야?”

그녀가 내 옷을 보자마자 한 소리 했다.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왜 이래, 이블라. 나는 원래 섹시했다고.”

“물론 그렇지. 숨겨진 매력이랄까. 워낙 귀여우니까.”

농담 삼아 한 얘기였는데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대답한다. 나는 어색해져서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녀가 따가운 눈으로 내 훤히 드러난 목과 어깨를 노려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포기한 듯한 얼굴이었다.

“나 뿔 안 보이지?”

나는 불안한 얼굴로 뿔을 더듬었다.

스노아의 환영마법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가는 곳이 노예도 사고파는 곳이다 보니 불안이 치솟았다. 이블라가 고개를 저었다.

“안 보여. 평범한 사람 같아.”

“다행이다. 이제 어디로 가면 돼?”

“텔레포트 할 수 있는 방은 따로 있어.”

이블라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용사들은?”

“이미 다 모였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복도의 복잡한 모서리를 여러 번 돌고 나자 문이 나타났다. 이블라가 문을 열어 안으로 안내해주었다. 나는 대기 중인 용사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뮤나스의 제복 차림을 봤을 때 귀티가 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본격적인 파티복을 입은 걸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금과 은으로 된 화려한 자수 장식 웨이스트코트와 단추가 많이 달린 코트가 그들의 몸을 멋들어지게 감싸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크라바트가 눈에 띄었다.

나는 육성으로 감탄하며 용사들을 한 명 한 명 살폈다. 크라바트 앞부분에 장식된 보석 핀 장식이 용사들마다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노레스가 돈 좀 썼네.’

휘파람을 불고 있는데 문득 방구석으로 시선이 갔다. 왠지 어두운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입을 틀어막아 와락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자제했다. 스노아가 순수한 흰색 드레스를 입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환영마법으론 체형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폴리모프 마법을 사용한 채였다.

“스, 크흠, 큼! 스노아?”

“드레스가 잘 어울리네요, 카카나.”

고개를 든 스노아가 사르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와, 미쳤다.’

백합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 눈엔 은발로 보인다지만, 내 눈엔 스노아의 푸른 머리카락이 제대로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화려한 은발보다 더 청초하게 보였다. 하얀 드레스와 환상적으로 어우러져서 곧 땅으로 떨어질 가련한 꽃 한 송이 같았다.

나는 쿵쾅대고 난리인 심장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괜찮겠어? 두 시간에 한 번씩 폴리모프 마법 계속 걸어줘야 한다며.”

폴리모프는 환영마법과 다르게 지속시간에 제한이 있었다. 내가 만든 폴리모프 약물을 복용하면 지속시간을 늘릴 수 있었지만, 몰래 약물을 먹는 게 힘들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일단 비상약으로만 두어 개 챙긴 참이었다.

스노아가 문제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옷이……. 불편하진 않아요?”

“이 정도야 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근처 도시로 텔레포트 한 다음 마차를 빌리는 거야?”

“네. 맨몸으로 도착하면 의심을 살 테니까요.”

스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이동해 볼까요?”

나머지 용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대도시 로울리에서 한참은 떨어진 무역도시, 그란디아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

“어머, 저 남자 마음에 드는데?”

스라일리 경매가 열리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여인, 에르메타가 눈을 빛내며 속삭였다.

그녀는 본래 상단주의 고명딸로 귀족이 아니었으나 최근 뒷돈을 이용해 신분을 샀다. 남작을 차지하게 된 그녀의 눈이 높아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재력을 이용해 마음에 드는 남자들은 닥치는 대로 끌고 와 강제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작이 되고 보니 모두 눈에 차지 않았다. 그녀는 귀족 티가 나는 남편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소문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콧대 높은 귀족 남자들은 에르메타에게 몸을 팔지 않으려고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귀족들은 대부분 신분을 팔고 없어 에르메타만 난감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생각난 곳이 스라일리 경매장이었다. 다양한 물건과 인간을 파는 것은 물론이고, 이번 콘셉트는 ‘부부’였다. 남편을 여럿 둔 부인들이 비슷한 신분의 남편을 사고팔 듯이 서로 교환하는 건 뒷세계에서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녀에겐 신분 높은 남편이 없었지만, 부족한 부분은 돈으로 채울 생각이었다. 이런 데에 와서 즐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부인이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어떻게 생각해, 휴디? 응?”

그녀는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자를 벌써 점찍어 두었다. 새파란 드레스를 입은 아담한 체구의 부인과 함께였다.

뛰어난 눈썰미로 사업을 성공시킨 에르메타는 남자가 누구보다 귀족적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부인을 배려하는 손길 하나하나에 애정이 배어 있었다. 에르메타는 상상만으로 황홀해져서 길게 콧소리를 내었다.

“남편을 새로 들이실 생각인가요?”

그녀의 남편 중 한 명인 휴디가 음울한 어조로 물었다. 에르메타는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응. 너나 다른 애들은 너무 싼 티 나잖아. 이제 남작이니까 어울리는 남편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녀가 마차의 창문에 고개를 바짝 들이밀며 점찍은 남자를 구경했다. 익명이어서 그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환영마법을 이용했다. 깔끔하게 올백으로 넘긴 저 머리가 본래는 어떤 색일지 궁금했다.

“금발일까? 그러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에르메타가 후후, 소리를 내며 웃었다.

***

“나 잘하고 있어?”

나는 우아하게 걸으려고 애쓰며 첼러스를 재촉했다. 그가 내 허리를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잘하고 있습니다.”

“쉿. 이제 들어간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켠 뒤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 그리고 경매장 입구에 서 있는 늙은 남자에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그 또한 무도회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확인되지 않았다.

초대장이 진짜인지 마도구로 확인한 남자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내부는 끔찍하게 어두웠다.

나는 걸음을 옮겨 진득하고 기분 나쁜 암흑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엔 귀족의 거대한 저택 같았다. 일부러 어두운 조명을 설치한 듯, 침침한 벽 램프가 붉은 비단 롤 카펫을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냉기를 뿜는 마도구가 곳곳에 보였다.

‘어쩐지 공기가 서늘하더라니…….’

딱 가을 날씨 정도 되는 기온이었다. 안 그래도 드레스 때문에 더워 죽는 줄 알았으니 나야 좋았지만, 정말 다른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긴장되었다.

복도 끝자락엔 사용인으로 보이는 남성 두 명이 서 있었다.

“다른 짐은 없으십니까?”

사용인이 정중하게 물었다.

“마법가방을 챙겨왔으니 신경 쓸 것 없어요.”

나는 싸가지 없게 대답했다. 다행히 먹혀들었는지 그들이 군말 않고 팔찌를 건네주었다. 열쇠 대신 쓰이는 마도구였다.

이곳에서 일주일은 썩어야 했으므로 초대된 부부들은 모두 방을 배정받았다. 경매장에서 물건을 사고, 눈 맞은 부부들이랑 즐기기도 하면서 광란의 일주일을 보내는 것이다.

속이 조금 울렁거리려고 했다. 나는 눈을 감고 홱 고개를 돌렸다. 어서 문이나 열라는 신호로 알아들은 사용인들이 버튼형 마도구를 눌렀다. 그러자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벌어지려는 턱을 간신히 다물며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던 폐가의 외관과 달리, 이곳은 갓 지은 성처럼 화려하고 웅장했다.

천장에 붉은색 벨벳 커튼이 장식처럼 달려 있었고, 샹들리에엔 수많은 크리스털이 분수처럼 쏟아질 듯 매달려 있었다. 경매장이라기보단 어둡고 은밀한 파티장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불그스름한 불빛이 원색적이어서 눈이 아팠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입매를 가다듬었다.

‘나는 귀족이다. 나는 귀족이다.’

스스로 세뇌하며 우아하게 주위를 살폈다. 술과 안주로 된 음식이 긴 테이블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곳에 벌써 사람들이 모여 즐기고 있었다. 어느 부부는 심지어 술을 입에 머금고 키스하고 있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아다르가 내 뺨에 키스를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진정해.”

“윽…….”

“너무 긴장했어.”

막상 이곳에 들어오면 다를지도 모른다더니, 정말 그랬다. 이상한 향초를 피우고 있는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만 돌리면 사람들은 정신 나간 인간처럼 키스를 해댔다.

‘짐승 우리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야.’

숨이 막혀서 도망치고 싶었다. 붉고 어두운 조명 때문에 내 흰 살결마저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턱을 조금 들어 명령했다.

“앉고 싶어.”

고압적이고 싸가지 없는 말투를 연기하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첼러스가 즉각 반응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경매는 2시간 후에 열리니, 싫어도 이곳에서 2시간은 버텨야 했다.

얼마 후 스노아 일행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리 얼굴을 가렸다지만 스노아의 압도적인 미모를 가면 쪼가리 따위가 전부 가릴 순 없었다. 그에게서 아름다운 분위기가 흘렀다.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내게 들러붙어 있던 시선도 그쪽으로 향하는 것 같아서 이제야 숨통이 트였다. 나는 진정하기 위해 술을 마실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테이블이 근처에 있어서 손을 뻗는데, 아다르가 자연스럽게 그 손을 가져와서 입을 맞추었다.

‘뭐 하는 거야?’

나는 대놓고 물을 뻔하다가 간신히 규칙을 떠올렸다.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땐 그의 크라바트를 쥐어 끌어당길 것.

나는 약속대로 그의 크라바트를 멱살 쥐듯이 잡은 후 끌어당겼다. 아다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미 심장은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지만, 눈물 나는 연습 덕분에 이성만은 뚜렷했다.

나는 그의 귓가에 입을 맞추는 척 물었다.

“왜 그래?”

“여기 술이 평범한 술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가 밀어를 속삭이는 사람처럼 내 귀를 이로 살짝 씹었다. 발끝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짜릿한 감각이 흘렀다.

있는 힘을 다해 울 것처럼 일그러지는 입술을 관리한 후,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부채를 펼쳤다. 그리고 입과 목 근처를 가리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평범한 술이 아니라고?’

나는 긴가민가한 눈으로 술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불그스름한 탓에 본래 색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겉으로 보는 것만으론 판별할 수 없겠지?’

그래도 부부에게 좋은 무언가가 들어갔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나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긴장을 풀어주는 찻잎이라든가, 초야의 고통을 줄여주는 크림 등의 물품을 판매하는 진열대가 보였다.

향초를 진하게 피워놓은 탓인지, 설상가상 머리까지 아프다.

‘약초 만지고 싶다…….’

간절하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근처로 누군가 걸어왔다. 나는 힘을 빼고 있었던 허리를 바로 꼿꼿하게 세우며 눈을 들었다.

‘와, 몸매 장난 아니다.’

그리고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허리가 어찌나 가는지, 볼륨감이 있는 몸만 눈에 들어왔다.

여자도 자신의 육체적인 매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데콜타주 네크라인이 유난히 밑으로 내려와 있어서 그녀의 관능적인 매력을 강조하고 있었다.

“남편이 두 분이신가 봐요.”

남편이 많으면 부인이, 그리고 부인이 많으면 남편이 강한 권력을 가진 부부가 많았다. 여자가 자연스럽게 남자들을 무시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아다르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차라리 침묵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성격과 잘 어울려서 문제가 없다나 뭐라나.

“저도 데려온 남편이 두 명인데, 우연이네요.”

내 무시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여자가 끈적하게 웃으며 첼러스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첼러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 불쾌해하고 있을 게 뻔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고 물었다.

“원하는 게 뭐죠?”

기분이 언짢아지니 싸가지 없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여자가 날 빤히 바라보는 듯하더니, 부채로 입을 가리며 얘기했다.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이분의 어깨가 참 늠름해서요.”

‘놀고 있네.’

나는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접시에 놓인 과일 중 하나를 입으로 가져왔다. 입이 얼얼할 정도로 달았다.

‘무슨 과일이지? 맛이 좀 묘한 것 같은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녀가 지껄이는 헛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경매가 끝난 후에, 저희와 함께 하실래요?”

그녀가 손을 뻗자, 뒤에 서 있던 남편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복종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나는 남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다르와 비슷한 체구에,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제법 근육질이었지만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나는 어떨 때 사람이 저렇게 되는지 잘 알았다.

‘남편이 아니라 노예처럼 부리고 있나 보네.’

나는 그를 위아래로 슥 훑었다. 걸음걸이도 그렇고, 서 있는 자세도 미묘하게 어정쩡했다. 오른쪽 다리에 상처를 입은 듯했다.

‘학대까지 하나?’

정말 가지가지 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가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경멸하는 기색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제 남편이에요.”

여자가 남편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어때, 당신? 당신도 좋지? 계속 나랑 놀면 질리잖아. 그렇지?”

남자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날 바라보았다.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말을 잘랐다.

“미안한데, 제 취향이 아니네요.”

그러자 처음으로 여자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그럴 만했다. 그녀가 데리고 있는 남편은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나는 과일을 하나 더 집어 먹으려고 손을 뻗었다. 이미 다섯 개 정도 먹은 참이었다. 그런데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아다르가 갑자기 내 손에 들린 과일을 제 입으로 가져가는 게 아닌가.

황당해졌다.

‘왜 뺏어 먹어?’

그러자 아다르가 티 나지 않게 내 구두를 발로 툭툭 쳤다. 어쩐지 분노가 느껴지는 발길질이었다.

‘설마 이것도 뭐가 들어갔나?’

이 정도면 바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뭐가 들었을지 예상이 가지 않아서 굳어 있는데, 여자가 뾰족한 음성으로 물었다.

“취향이 아니라니 유감이네요. 그러면 부인은 어떤 남자를 원하세요?”

나는 망설임 없이 스노아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다른 곳을 구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용사들이 우리 쪽을 무척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빨리 꺼졌으면 좋겠다.’

이런 식의 대화는 더 이상 나누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물건처럼 품평하면서 취향이니 어쩌니, 장난감 고르듯이 말해야 한다는 게 역겨웠다. 연기를 하는 와중에도 혐오감 탓에 구역질이 나려 했다.

나는 부채로 하관을 가렸다. 아다르와 혹독한 연습을 하지 않았다면 바로 티가 났으리라.

여자가 짐짓 놀라는 척하며 물었다.

“어머, 무식하게 우람한 남자를 좋아하시나 보네요?”

고단수의 물 먹이기 화법을 시전 중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나보네.’

귀족들은 거절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무례하게 얘기했으니 더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떨어졌으면 하는 마음을 꾹꾹 담아 대꾸했다.

“네. 큰 게 좋아서요. 저런 남자를 원했어요.”

나는 할릭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그러자 스노아 일행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가 반응을 보이길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어두컴컴하고 불건전한 장소에서 스노아 혼자 세상의 모든 순결과 청초함을 그러모은 채 걸어왔다. 스노아는 사실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를 보고 있자 더럽혀진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몰래 나지막한 숨을 내쉬며 지척까지 온 스노아를 올려다보았다.

“저희를 가리키시는 것 같기에, 와봤어요.”

어느새 음성변조까지 해서, 스노아의 매끈한 입술에서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독보적인 우아함에 여자도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멍하니 스노아를 바라보자, 할릭이 앞으로 나섰다.

“저를 가리키셨지요, 부인.”

할릭이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래요.”

나는 여봐란 듯이 할릭을 끌어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할릭의 전신이 돌덩어리처럼 굳었다. 스노아가 보이지 않게 그의 옆구리를 강하게 꼬집었다. 덕분에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할릭과 나를 번갈아가며 표독스럽게 쳐다보던 여자가 흥, 소리를 내며 유유히 멀어져 갔다. 나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 다행히 접근하는 부부가 없었다. 스노아 일행과 우리가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완전히 지쳐서 퍼져버릴 때쯤, 갑자기 단상 위의 불이 탁 켜지며 여인이 나타났다.

“내빈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스라일리 경매를 거행하겠습니다. 경매장으로 입장하여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불이 꺼졌다.

부부들이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오른편에 활짝 열린 문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도 이동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갑자기 무릎에 힘이 풀렸다. 첼러스가 황급히 허리를 감아 지탱해주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그가 남편 흉내를 내며 물었다.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곤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경매장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내 몸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티를 내지 않고 있었지만 배 속이 뜨겁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우리는 미리 배정받은 자리로 향했다. 황녀가 구해온 초대장이 무척 귀한 것인 모양이었다. 경매장 중에서도 제일 높은 자리인 데다 룸 형식이었다. 유리로 된 창문이 있어서 경매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첼러스가 좌석을 자세하게 살폈다. 오른쪽 팔걸이에 버튼이 달려 있었다.

“이걸 누르면 사용인이 방문하여 따로 설명을 듣고 경매를 진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특등석의 경매 시스템 따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밀폐된 장소에 들어오자마자 거의 기어가듯이 소파로 향해 주저앉았다. 세상이 핑글핑글 돌아가고 있었다.

도청장치가 없는지 방 곳곳을 살핀 아다르가 다급한 발놀림으로 다가왔다.

“미쳤지, 아주?”

“난 바보야.”

나는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자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다섯 개나 먹은 과일이 원인인 것 같았다.

“지금 너무 어지러워.”

“안 어지러운 게 이상하지.”

아다르가 마른세수를 했다.

“러브 포션에 푹 절인 과일을 미쳤다고 누가 다섯 개나 먹어!”

“러, 러브, 뭐라고?”

나는 경악해서 상체를 일으켰다가 다시 쓰러졌다. 아다르가 술병이 들어 있는 바구니에서 얼음 몇 개를 꺼내더니 손수건에 감싸서 내 목에 대주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웠으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러브 포션이 뭡니까?”

첼러스가 얼음주머니를 받아 대신 열기를 식혀주며 물었다.

“사람을 멍청하게 해주는 약.”

아다르가 간단하게 얘기했다. 나는 멍하니 의문을 제기했다.

“몸이 뜨거워지긴 했지만 정신은 또렷한데?”

“이미 다섯 개를 먹었는데 멀쩡하게 돌아다닌다는 것부터가 이상해.”

“아아.”

나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나한테 내성이 있는 종류인가 보네.”

첼러스와 아다르의 고개가 내게로 홱 돌아왔지만,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경매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걱정 없다. 금방 괜찮아질 거야.”

“내성이 있다고?”

“그 여잔 내가 완전히 약에 쩐 사람이라고 생각했겠네.”

문득 상황이 우습게 느껴져서 혼자 낄낄 웃었다.

“자기가 지켜보는 도중에 다섯 개나 해치운 거잖아? 나라면 다시는 안 건드려.”

“지금 농담이 나와?”

아다르가 구겨진 얼굴로 타박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실눈을 떴다. 이미 경매가 시작되고 있었다.

약물, 희귀한 실로 짠 침구, 정력에 좋다는 음식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 하나쯤 구매해야겠지만 아직은 그럴듯한 게 보이지 않았다.

‘이왕이면 작은 걸로 사자. 안 그래도 짐덩어리인데 크면 처분하기도 곤란하니까.’

여유롭게 계산해보고 있는데 첼러스가 근처로 와서 앉으며 물었다.

“내성이 있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전에 실험을 좀 당해서…….”

열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지껄였다가 합, 입을 다물었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야!’

갑자기 등허리로 소름이 내달렸다.

끼기긱, 소리가 날 것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첼러스와 아다르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잠깐 고민해봤지만, 내가 수습할 수 있는 말실수가 아니었다. 첼러스와 아다르의 눈에 살기가 깃들고 있었다.

‘대충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걸론 끝나지 않겠는데.’

부르르 떨리는 허리에 팽팽한 긴장을 담고서 뭐라 둘러댈지 고민했다. ‘실험’에 관해 한 번 얘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내 안에 잠겨 있는 악몽이 얼마나 많은지 스스로도 가늠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걸 입으로 쏟아내며 묘사하는 순간, 과거의 족쇄에 다시 붙들리고 말 것 같았다.

그 두려움을 어렴풋이 느낀 사람처럼, 아다르가 인상을 찡그린 채 소파에 등을 묻었다.

“실험.”

그리곤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보듯,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경매장의 불그스름한 조명이 아다르의 검은 눈자위에 핏빛을 흩뿌렸다. 그 탓에 마주 보기만 해도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스르르 눈을 굴렸다.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괜히 간담이 서늘하고 오금이 저렸다. 눈썹을 매만지던 첼러스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응?”

끓기 직전의 물처럼 뜨겁고 잠잠한 목소리였다. 방심하고 만졌다간 데어버릴 것 같은 열기가 끼쳐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뒤 되물었다.

“내 몸이 괜찮냐고?”

땅바닥에 고정되어있던 호수빛 눈망울이 불시에 위로 굴러왔다.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가는 나에 대한 모든 기억들을 곱씹어보는 사람처럼 흐릿한 눈이었다. 나는 그와 한동안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렇습니다.”

첼러스가 대답했다.

“괜찮아. 별 거 아닌 실험이었어.”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대답하실 줄 알았습니다.”

“…….”

“포이즌을 건 매직애로우에 당하셨을 때, 당신은 기적적으로 깨어났습니다.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제 말이 맞습니까?”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단 말이야?’

죽음의 숲을 빠져나올 당시 일이니, 벌써 반년 전 일이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첼러스의 미간에 거친 주름이 잡혔다.

“그렇다면 별 거 아닌 실험일 리 없습니다. 포이즌마저 견디는 몸이라면, 대체 이전까지 얼마나 수많은 독에 노출되었단 뜻입니까.”

나는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시선을 피했다. 첼러스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의 괜찮다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카카나.”

저음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꾹꾹 눌러 담은 분노가 새어나왔다. 대화를 줄곧 듣고만 있던 아다르도 눈이 뒤집힌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첼러스만큼 인내심이 좋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손을 받쳐주고 있던 의자 팔걸이가 아다르의 손에 우지끈 소리를 내며 박살났다.

“야, 너 뭐 해!”

나는 기겁을 하고 아다르를 뜯어말렸다. 단순히 배상을 해주는 것만으로 문제가 일단락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아다르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처럼 살기가 넘실거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용사들을 진정시킬 방법을 생각해보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다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말문을 텄다.

“이제 그만둬, 카카나.”

“뭘?”

“다.”

얼굴에 웃음기가 조금도 없다.

‘저렇게 살 떨리는 모습엔 면역이 없는데…….’

그들과 오랜 기간 함께했지만, 대부분 따스하거나 장난기 섞인 모습만 보아왔다. 이토록 살벌한 분위기는 손꼽혔기에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며 치맛자락을 내려다보았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파생된, 악인을 향한 그들의 격렬한 분노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다 그만둬. 네가 여태껏 생존하기 위해 택했던 모든 방식들.”

아다르가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천천히 걸어왔다. 눈으로 그의 발걸음을 셀 수 있을 정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데도, 놀라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가 내 의자 팔걸이를 두 손으로 짚으며 허리를 숙였다. 흑표범처럼 날렵한 몸이 나를 덮치는 착각이 일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너도 내 취향 알지?”

“…….”

“그렇게 자꾸 숨기려 들면서 혼자 끙끙대면 어떤 충동이 드는 줄 알아?”

상냥하게 질문하는 어투가 제법 가벼웠지만,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얄미운 소리를 할 때마다 반달처럼 사르르 휘던 성격 나쁜 눈웃음도 엄정하게 굳어있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전부 부숴버리고 싶어져.”

아다르가 한 치의 틈도 두지 않고 대답했다.

“네가 숨기려 들던 밑바닥을 기어코 엉엉 울며 보일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히고 싶어진다고. 알겠어?”

“…….”

“너한테 큰 건 바라지 않아.”

아다르가 짧게 자른 손톱으로 내 가면의 끄트머리를 스윽, 긁었다. 그게 꼭 벗겨내고 싶은 것처럼 느껴졌다.

“남한테 기대는 법을 모르는 성격이니까. 하지만 언젠가, 네 마음에 조금이라도 어두운 충동이 깃든다면.”

그 충동을 간절히 바라는 얼굴로, 아다르가 절절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설사 쌀 한 톨만큼 작은 감정이더라도, 만약, 누군가를 죽여서 해방되고 싶다면.”

형형한 검은색 눈이 나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말해.”

“…….”

“내가 너의 어둠이 되어줄게.”

새까만 눈이 깜박이지도 않은 채 날 보고 있다. 그 시선에 단단히 엉켜버렸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며 치맛자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잔인하게 죽이고 싶다면, 내가 아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줄게. 죽이지 않고 평생 나락에서 괴롭길 바란다면, 숨을 붙여서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 줄게.”

아다르가 지나친 분노로 차게 식은 손을 들어, 내 뺨을 쓸었다.

“그러니까 말해 줘. 내가, 기어코 널 울려서 진심을 듣고 싶어지기 전에.”

“아다르, 나는…….”

“카카나.”

아다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게 도와줘.”

그는 세상을 뒤집어놓을 수 있는 용사다. 그런데 일그러진 눈이, 무참히 짓씹은 입술이 이상토록 연약하게 보였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검은 수렁에 온몸을 내던지고 말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저런 얼굴을 보려고 숨긴 게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두 어깨에 짊어진 짐들을 조금이라도 덜길 바랐다.

“알았어.”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약속할게.”

그제야 아다르의 눈에 일말의 안식이 깃들었다. 첼러스 또한 여태 참고 있던 숨을 간신히 들이쉬었다. 그 모습이 내겐 이상하게 비쳤다.

‘나를 사랑해서 그러는 건가?’

나는 남녀 간의 사랑이 어떤 건지 잘 몰랐다. 그러기엔 경험이 너무 없었다. 하지만 이런 형태는 평범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많은 예술이 사랑을 다룬 탓에, 간접체험은 숱하게 해봤다. 연극이나 소설 속의 연인들은 뜨거운 밀어를 속삭이다가도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돌아서곤 했다. 그 상처를 곱씹으며 성숙해지고, 더 나은 사랑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찾아갔다.

그런데 용사들은 다른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려서, 마음마저 한 번 정한 곳에 영영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는 한 사람의 여인이 아니라, 그들을 존재하도록 도와주는 세상 같았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마지막 세상.

‘원래 사랑이란 게 다 이런가?’

한참을 생각해보지만, 경험이 없으니 알 수가 없었다. 문득 경매장에 오기 전 아다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약초의 새로운 특징이 발견되면 넌 어떻게 해왔는데?]

‘역시 관찰해보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어둡게 음영이 진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는 아다르와 첼러스를 흘낏 살폈다. 천년만년 고민해봤자 남의 속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거 내 마음에라도 주의를 기울여야겠어.’

그래야 뭐라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답답하게 생각하며 한창 경매가 진행 중인 유리창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1층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다 내려다보이는 구조였다. 그 풍경을 한참 동안 구경하다가 불현듯 우리의 본래 목적이 떠올랐다.

한가하게 사랑타령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반지로 손을 가져갔다. 내가 입은 드레스엔 물건을 넣을 만한 주머니가 없어서, 스노아가 반지에 마법을 걸어주었었다.

거울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반지를 톡톡 건드리자, 손끝에 체인이 둘둘 감긴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을 움켜쥐듯 손을 오므린 뒤 주욱 끌어당겼다. 그러자 반지에서 거울이 빠져나왔다.

나는 거울의 단추를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첼러스가 묻기에, 손가락으로 아래층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여기면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을 비출 수 있지 않을까?”

“그렇군요.”

그가 조금쯤 잠겨있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첼러스는 아직도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그러려면 조명이 반사되지 않도록 해야 해.”

피곤하게 눈두덩을 문지르던 아다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얘기했다.

“위에서 빛이 번쩍거리면 궁금한 사람이 괜히 올려다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겠네.”

“내가 각도를 맞춰볼 테니까, 네가 아래층을 비춰봐.”

“어떻게 하게?”

아다르가 내 뒤에 서더니 껴안으려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 지레 놀라서 어깨며 허리를 경직시켰으나, 아다르가 아랑곳 않고 거울을 잡은 내 손을 겹쳐 잡았다. 그러자 꼭 그가 거울을 쥐고 있는 것처럼 되었다.

“뚜껑이 닫히지 않도록 단추를 계속 누르고 있어.”

“알았어.”

아다르가 건물에 배치된 조명의 위치를 하나씩 확인하더니, 적당한 장소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교묘히 각도를 틀어 아래층을 비추었다.

나는 한 사람이라도 놓치는 일이 없도록 거울을 샅샅이 살폈다. 무도회 가면을 쓴 사람만 잔뜩 보일 뿐, 특별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크게 실망했다가 별안간 의문을 느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황녀가 마족의 손이 뻗치지 않은 고위귀족은 거의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그런데 왜 수상한 사람이 한 명도 없지?”

옆에 서있던 첼러스가 아래층으로 서늘한 시선을 두며 대꾸했다.

“모습을 바꾼 마족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뜻 아니야?”

“마족이 인간에게 손을 뻗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돈과 권력으로 홀릴 수도 있고, 마법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마족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무조건 거울에 비치는 건 아니란 뜻이야?”

“그렇습니다.”

그가 내 손에 들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본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모습을 감춘 마족은 비춰주지만, 마족이 귀족에게 행사하는 영향력까지 비추진 못할 겁니다.”

나는 기운이 빠져서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럼 이 경매장엔 심복만 수두룩하고 정작 마족은 없다는 거잖아.”

“아직 판단하기엔 일러. 경매 첫째 날이잖아.”

아다르가 내 손을 놓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예열단계야. 뒷세계 간부들이나 지배인처럼 높은 위치에 선 놈들은 하이라이트 때 모습을 비추지. 언제쯤일지 대강 감이 와.”

“그때가 언제인데?”

나는 기대로 눈을 빛내며 물었다.

“경매 끝물. 일주일 동안 이어지니까 4일이나 5일쯤 모습을 비추겠지.”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 후를 예상했건만,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한다니 말만 들었을 뿐인데 벌써 지쳤다. 나는 망연해져서 소파에 돌아가 늘어졌다.

‘그러면 부부 연기를 길게 해야 한단 소린데, 그때까지 큰 문제 없이 버틸 수 있을까.’

걱정만 내리 한 탓에 목이 탔다.

나는 찬물을 더 들이켠 후 경매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단상에 새로운 경매물품이 베일에 가려진 채 올라오고 있었다.

‘뭐라도 하나 사야 하는데…….’

심란한 마음으로 경매물품을 지켜보던 나는 이어지는 경매사의 말에 눈썹을 슬쩍 치켜 올렸다.

“이번에 선보일 물건은 바로 이 녀석입니다! 최고의 쾌락을 선사한다는 이파리, 빅웨입스입니다! 먹으면 온몸에서 초콜릿 향과 맛이 난다고 하죠!”

‘빅웨입스?’

나는 턱을 천천히 쓸며 생각에 잠겼다.

‘나쁘지 않네. 심심풀이로 약물도 만들 수 있고.’

나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용인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모은 돈과 스노아가 쥐여 준 마탑의 돈이 상당해서 수중엔 금전이 넘치도록 있었다. 나는 최대한 우아하고 조용한 귀족 흉내를 내며 길게 이어지는 사용인의 설명을 지루하게 들었다.

그리고 경매 가격이 끝을 향해 치달아 올라갈 때까지 기다렸다. 금화가 50닢이 넘어갈 때쯤, 화끈하게 제시했다.

“금화 200닢.”

이 정도면 시골의 작은 별장 한 채는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옆에 서 있던 사용인이 놀라 순간적으로 몸을 경직시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턱을 치켜들자, 심기가 불편해진 줄 알았는지 급하게 마도구로 말을 전했다.

“0, 0번 그, 그, 금화 200닢.”

그러자 즉시 경매사에게서 반응이 왔다. 입을 떡 벌린 경매사가 어버버거리다가,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하고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금화 200닢 최고가 나왔습니다! 금화 210닢 여쭤봅니다! 금화 210닢 없으십니까!”

날이 갈수록 더 희귀한 제품이 나오고 닷새부터는 사람이 거래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첫날부터 큰돈을 쓰는 귀족들이 별로 없었다.

내가 금화 200닢을 부르긴 했지만, 누가 이파리 따위에 금화 210닢을 걸겠는가.

‘이 정도면 경매에 눈이 먼 갑부 이미지도 확실히 만들어졌겠지.’

나는 팔짱을 낀 채 경매를 지켜보았다. 아무도 번호판을 들지 않았다.

경매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상 뒤편에 서 있던 사용인들이 빅웨입스가 담겨 있는 유리케이스에 흰 천을 덮어씌웠다.

“빅웨입스 금화 200닢에 낙찰되었습니다!”

“낙찰되면 빅웨입스는 어디로 가져가지?”

나는 부러 표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사용인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꾸했다.

“방으로 가져다드립니다.”

“여기로 가져와.”

“알겠습니다.”

사용인이 허리를 숙이며 바깥으로 나갔다. 아다르가 의아하게 물었다.

“빅웨입스는 왜?”

아까까지만 해도 저기압이더니, 다행히 지금은 마음을 어떻게든 추슬렀나 보다. 나는 테이블에 차려진 온갖 술과 과일, 디저트를 살펴보며 대꾸했다.

“여기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잖아.”

아다르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찰나, 사용인이 빅웨입스를 들고 나타났다. 보석함처럼 고급스러운 붉은색 상자에 빅웨입스가 보관되어 있었다. 테이블로 턱짓하자, 그가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약물을 만들 생각을 하자 기분이 붕붕 뜨기 시작했다. 나는 희희낙락해져서 상자를 열고 이파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제 막 따온 것처럼 싱싱할 뿐만 아니라, 상자를 열자마자 달큼한 초콜릿 향이 풍겼다.

“왜 여기로 가져오라고 했어?”

방 안이 보이지 않도록 유리창에 커튼부터 친 아다르가 상당히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뭘 만들려고?”

누가 보면 내가 폭발물이라도 만드는 줄 알겠다. 나는 그의 불안한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고 혼잣말을 했다.

“이 정도로 강한 초콜릿 냄새면 우리가 먹었단 걸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알겠지?”

아다르가 제 귀를 의심하는 낯을 했다.

“먹는다고? 쾌락을 선사한다는 빅웨입스를, 여기서?”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뉘앙스를 못 알아들은 척하며 유리잔에 찬물을 따랐다.

“경매가 끝나면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잖아. 우리도 참여하는 척해야 하는데, 빅웨입스 하나면 만사가 해결될 거야.”

“척하면 되지 그걸 왜 먹어?”

“이왕이면 상대를 속이기 쉬운 상태가 좋잖아.”

이럴 때를 대비해서 아공간 마법이 걸린 첼러스의 주머니에 이것저것 넣어 놨었다. 빅웨입스를 활용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부족한 약재는 하나도 없었다.

그의 주머니에 매달려서 여러 가지 약물이 들어있는 약병과 조제도구들을 꺼냈다. 아다르가 질색한 얼굴로 타박했다.

“첼러스 주머니에다 대체 뭘 넣어놓은 거야?”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조제도구에 흠집이 생기진 않았나, 꼼꼼하게 확인하며 툴툴거렸다.

“스노아가 반지엔 거울을 넣을 수 있는 아공간을 만드는 게 한계라고 했단 말이야. 이미 마법이 잔뜩 걸려있어서 안 된다나 어쩐다나.”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아다르가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얘기하기에, 나는 조금 기가 죽어서 변명했다.

“필요한 물건들을 좀 넣어놨을 뿐이야.”

“저게 조금이라고?”

아다르의 눈이 벌써 테이블을 가득 채운 조제도구들을 흘기며 말했다. 내가 하는 양을 줄곧 가만히 지켜보던 첼러스가 문득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분위기가 싸하게 식은 후로 처음 짓는 미소였다.

“기분이 좀 나아졌나보네?”

나는 그의 기분이 풀어진 게 기뻐서 반색하며 물었다.

“그럼 자기 주머니에서 약저울이 나오고 있는데, 그 꼴을 보면 안 웃기겠냐?”

아다르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설명했다.

‘이게 웃겨?’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색한 분위기가 풀렸으니 됐다. 나는 만족스럽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조제도구들을 쓱 둘러봤다. 방은 이미 반쯤 약조제실로 변해있었다.

“너희들은 바깥에 사람이 접근하면 말해줘. 이거 다 숨겨야 하니까.”

“뭘 하려는 건지 설명부터…….”

“쫑알쫑알 그만 떠들고 이리 와 봐.”

대뜸 아다르의 팔을 잡아끌었다.

“뭐, 웁!”

찬물에 담가놓았던 빅웨입스 이파리 한 장을 탈탈 턴 뒤, 통째로 아다르의 입에 욱여넣었다. 그가 기겁을 하고 뱉어내려 하기에 발등을 질끈 밟아주었다.

“씹어 삼켜.”

“미쳤어?!”

욕을 하면서도 씹어 삼킨 아다르가 시뻘게진 얼굴로 항의했다. 그의 눈이 자기가 방금 삼킨 게 ‘최고의 쾌락을 선사하는’ 약초인 걸 잊었냐고 묻고 있었다.

“날 짐승으로 만들 셈이야?”

“걱정하지 마. 그렇게 보이도록만 할 셈이니까.”

“하…….”

그가 폐부에서부터 치밀어 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이해하겠단 욕심을 애써 내려놓으려는 기색이었다.

“어때? 반응이 와?”

“뭐가……. 야!”

멍하니 되묻던 아다르가 돌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그의 허리 아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탓이었다. 그가 황급히 손으로 가리며 어이가 승천한 표정을 지었다.

“어딜 보는 거야!”

“아, 미안. 생리적 반응을 확인한다는 게 그만…….”

“내가 무슨 실험체인 줄 알아?!”

“진짜 미안.”

나는 멋쩍어져서 시선을 돌렸다.

“관찰이 습관이 되다 보니.”

“하…….”

그가 또 한숨을 쉰다. 오늘 나 때문에 몇 번째 한숨을 쉬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뻔뻔한 나라도 조금 미안해져서 사과의 뜻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아다르가 손으로 입가를 쓸며 작게 중얼거렸다.

“귀여우면 다인가, 진짜…….”

“응?”

“됐어.”

아다르가 토라진 아이처럼 몸을 돌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빅웨입스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그럼 몸 상태는 아직 괜찮은 거지?”

“어.”

“흠, 약이 잘 듣지 않는 몸인가 보네.”

나는 빅웨입스 이파리를 한 장 더 꺼내 아다르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가 군말 없이 씹어 삼켰다. 순순히 따르는 대신 뒷일은 전부 네가 알아서 하라는 얼굴이다.

나는 아다르의 약발이 오르는 동안 약저울에 서로 다른 두 가지 약재를 1.32그램씩 덜어냈다. 그리고 찬물에 약재가루를 타고 약병의 뚜껑을 땄다. 혹시나 싶어 만들어 두었던 약물이 있었다.

약재가루를 탄 물에 내가 만든 약물을 두 방울 떨어트린 후 뒤를 돌았다. 아다르가 아랫입술을 꽉 짓씹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흘낏 보아도 빅웨입스 때문에 곤란에 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방금 만들어낸 약물을 그에게 내밀었다.

“마셔.”

유리잔을 받아든 아다르가 망설임 없이 약물을 들이켰다. 희미하게 몸을 떨던 그가 서서히 진정될 기미를 보였다. 나는 만족스럽게 손뼉을 쳤다.

“완벽해!”

아다르가 얼떨떨하게 제 얼굴을 더듬더니, 거울 앞으로 가서 섰다. 무도회 가면 때문에 전부 보이진 않지만, 드러나 있는 얼굴 부분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목덜미와 귀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숨까지 거칠게 몰아쉬고 있어서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것을 복용한 사람처럼 보였다.

‘진하게 풍기는 초콜릿 냄새는 덤이고!’

“나한테 뭘 먹인 거야?”

“얼굴 붉어지고, 체온 올라가고, 숨도 가빠지게 만드는 약.”

나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무리가 가지 않도록 다른 약재도 섞었으니까 걱정 마. 2시간 후면 정상으로 돌아갈 거야.”

“빅웨입스를 먹었는데 이렇게 된다고?”

“쾌락은 없지?”

아다르가 멈칫 굳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효능만 없앴어.”

“……그게 가능하다고?”

“가지고 있는 약재가 제한적이어서 비율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지만,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고.”

“…….”

“게다가 입에서 계속 초콜릿 맛이 나면 좋지 않아? 온몸에서 초콜릿 맛이 나잖아.”

첼러스와 아다르가 완전히 할 말을 잃은 채 날 바라보았다. 나는 헉, 숨을 들이켜며 되물었다.

“설마 너희 초콜릿 싫어해?”

“그건 아닙니다만.”

첼러스가 제 생각을 믿기 힘들다는 듯이 질문을 이었다.

“그러니까, 초콜릿 맛이 나서 빅웨입스를 이용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응. 달달하니 좋잖아. 스트레스 풀고, 지루함도 달래고 딱 좋다고 생각했지.”

“…….”

“빅웨입스 먹었다고 만천하에 알릴 수도 있잖아. 일석이조!”

“후자는 부차적인 이유인 거야?”

아다르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나는 말간 눈을 두어 번 끔뻑이며 되물었다.

“그러면 안 돼?”

“됐다, 됐어.”

아다르가 깔끔하게 물러섰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나머지 약물도 제조하기 시작했다. 첼러스 차례였다.

빅웨입스는 총 열 장이 들어있었는데, 첼러스는 한 장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다섯 장을 먹고 나머진 첼러스의 주머니에 보관했다. 그리고 약물을 복용한 뒤, 생리적 반응이 안정적으로 나타나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 없이 준비가 끝났다.

“이리 와봐.”

나는 허리를 숙인 아다르와 첼러스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물론 내 머리도 헝클어트렸다.

“이렇게 하면 더 엉망으로 보일 거야.”

거친 호흡에 붉어진 얼굴,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까지 완벽한 삼위일체가 되었다.

‘좋았어. 이 정도면 누가 봐도 한바탕 뒹군 것처럼 보이겠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경매가 끝나가고 있는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제발 접근하는 부부가 없기를!’

간절히 기원해보지만, 계속되는 불안감이 입술을 마르게 했다.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된다고 생각하자 좀처럼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졌다.

‘후우, 진정하자.’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누가 봐도 미친X처럼 보여. 걱정할 거 하나 없어.’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아다르가 내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의 숨결에서 끔찍하게 단 초콜릿 냄새가 풍겼다. 그런데 같은 걸 복용해서 그런지 계속 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에 박치기할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아랫입술을 핥았다.

“연습했던 대로만 하면 돼.”

아다르가 긴장한 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첼러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올 게 왔다.’

나는 바짝 긴장하며 돌덩이처럼 몸을 굳혔다.

“일단 하나만 만들까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다르가 뒤에서 내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안아주었다. 첼러스의 뜨거운 입술과 거친 숨이 목덜미 쪽으로 쏟아졌다. 그가 내 허리에 팔을 감고 입을 묻었다.

피부에 눌어붙은 초콜릿을 긁어내듯 집요하게 갉작대던 축축한 입술이, 별안간 아프게 피부를 빨아들였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져서 미간을 찡그렸다. 첼러스가 고개를 들어 내 목덜미의 울혈자국을 확인했다.

“제대로, 만들어졌습니다.”

그가 내게서 억지로 떨어지며 얘기했다.

“키스마크.”

목소리가 방금 잠에서 깬 사람처럼 잠겨 있었다. 나는 그가 빨아들인 부분을 황급히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 때문에 얼굴이 진작 빨개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푹 익은 토마토처럼 붉은 얼굴을 최대한 수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나가는 게 좋겠어.”

아다르가 딱딱한 어조로 야릇한 분위기를 끊어냈다. 첼러스가 키스마크를 남기기로 정했을 때부터 굳어 있더니, 아직도 화난 얼굴이었다.

우리는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서로 적당히 엉겨 붙은 채였다.

사용인들의 안내를 받아 경매 대기실과 다른 곳으로 이어진 복도를 걸었다. 그러자 넓은 뒷마당으로 빠져나왔다.

포프란 폐가는 뒤편에 산을 두고 있었다. 건물을 통하지 않는 이상 뒷마당으로 올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 데다, 근처에 인가도 없어서 은밀한 무언가를 즐기기엔 제격이었다. 넓은 뒷마당에 가지각색의 커다란 천막이 열을 지어 세워져 있었다.

본격적인 향락의 밤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둘러보는 척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에 사용인이 서 있었다. 우린 질펀하게 뒹굴고 막 침대에서 빠져나온 몰골로 사용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대뜸 명령했다.

“적당한 천막으로 안내해.”

그가 우리의 상태를 잠깐 살피는 듯하더니, 찰떡같이 알아듣고 질문했다.

“장소를 원하십니까?”

“그래.”

“다양한 콘셉트의 천막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평범한 침실로. 정신 사나운 건 딱 질색이니 깔끔한 곳으로 안내하는 게 좋을 거야. 아, 침대와 소파도 있는 곳이 좋겠어.”

“가구 외에 아무런 물품도 구비되어 있지 않은 장소를 원하십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천막은 다양한 고객층을 대비하여 여러 가지 콘셉트를 가지고 있었다.

도박장, 마약굴, 술, 창가, 서커스부터 단순한 휴게실과 침실까지 없는 게 없었다. 침실마저 주제에 따라 천차만별로 꾸며놓았다. 우리가 원하는 건 ‘평범한 침실’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장소만 대여해주는 천막이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골치 아플 뻔했어.’

나는 속으로 깊게 안도하며 눈을 굴렸다. 어서 천막으로 들어가 쉬고 싶었다.

사용인이 걸음을 떼었다.

‘얼굴을 비치고, 적당히 즐기는 척한 다음, 방으로 돌아간다.’

나는 미리 세워놓았던 계획을 되새기며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살짝 벌어진 천막의 틈으로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향락을 즐기는 귀족들이 보였다.

기겁한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돌렸다.

‘상류 문화가 타락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안 그래도 구역질이 나는데, 자꾸 끈적끈적한 시선이 느껴져서 더 불쾌해졌다.

사람들은 우리랑 함께하면 극락을 볼 수 있으리라 여기는 듯했다. 강렬한 초콜릿 냄새 때문인지, 호시탐탐 눈을 빛내며 언제 말을 건넬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다 다른 사람들과 엮일까 봐 똥줄이 타들어갈 찰나, 새하얀 드레스의 여인이 근처로 걸어왔다.

“어머, 또 뵙네요?”

스노아 일행이었다.

나는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함께 천막으로 향하면 근처에서 왱왱대는 괜한 날파리들도 적당히 떨어져나갈 터다.

“반가워요.”

나는 부채로 얼굴의 열기를 식히며 얘기했다. 술을 한 사발은 들이켠 것 같은 내 행색에 스노아가 입매를 굳혔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으며 말을 이었다.

“섭섭하네요, 부인. 저희를 바로 찾으실 줄 알았는데요.”

스노아가 우아하게 손을 뻗자, 할릭이 그 손을 잡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아아, 그래요. 마침 생각나던 참이었답니다.”

나는 다가온 할릭의 손을 잡아끌며 싱긋 웃었다.

“도박장으로 가볼까요?”

스노아가 향락을 즐기러 온 부인 흉내를 내며 물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조금 피곤해서요. 마침 조용한 장소를 안내해 달라 했는데, 함께 가실래요?”

“좋아요.”

스노아가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승낙했다. 나는 우리의 재회를 기다려주고 있는 사용인에게 거만하게 턱짓했다.

“어서 안내해. 제일 가까운 곳을 알려주는 게 좋을 거야.”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사용인이 빠르게 발을 놀렸다.

우리는 유난히 거대한 천막 앞에 섰다. 안내팻말에 ‘낙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낙원이 뭐였더라.’

나는 황녀가 보냈던 편지를 떠올렸다. 이곳에서 사용되는 은어에 대한 설명도 편지에 함께 쓰여 있던 탓이다.

낙원이면 부부끼리 편히 쉴 수 있도록 대부분의 시설을 갖춰놓은 천막을 뜻했다.

‘정신 사나운 건 싫다고 했으니, 이상한 게 있진 않을 테고.’

여기면 괜찮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다르가 사용인에게 명령했다.

“수고했다. 이만 가보도록.”

사용인이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우리는 예의상 스노아 일행을 먼저 낙원으로 안내했다. 아르모어까지 천막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아다르가 걸음을 뗐다.

나도 그와 발을 맞추어 뒤를 따르려던 찰나, 어떤 대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고막에 벼락처럼 꽂히는 목소리라 자동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저는 노예를 사러 왔어요. 요즘은 노예 경매가 참 드물잖아요.”

부인 두 명이 근처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바쁜 일정을 제쳐두고 이곳에 왔답니다.”

“어머, 노예가 많이 필요하신가 봐요.”

“네. 유용하게 사용할 곳이 있답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높고 카랑카랑한 음색이 지나치게 귀를 파고들었다. 순간 환청인 줄 알았다.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첼러스도 대화를 들은 것처럼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손바닥과 등허리로 식은땀이 쭉 솟아났다.

“특히, 수인족 노예가 필요해서요. 수인족은 은근히 구하기가 어렵거든요. 꽁꽁 숨어 있잖아요. 어찌나 곤란한지.”

“사용할 곳이 많은가 봐요.”

“네. 무척이나.”

머리까지 뜨겁게 차올라 있던 핏물이 밑 빠진 독처럼 발밑으로 쏴아, 빠져나갔다. 내 죽은피로 이루어진 소용돌이에 서서히 휘말리는 착각이 일었다.

나는 턱을 덜덜 떨었다. 땅을 디딘 발의 감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내 영혼이 새하얗게 식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여기서 희귀한 수인족을 그렇게 많이 판다죠?”

약 때문에 안 그래도 빨리 뛰는 심장이 아프도록 속도를 올렸다. 호흡이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경련을 일으켰다.

“왜 그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아다르가 내 허리를 옭아매며 물었다.

나는 그의 부름을 듣지도 못한 채 두 부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머리카락은 염색을 했는지 둘 다 평범한 갈색이었다. 그러나 그중 하나는 도저히 못 알아볼 수 없는 몸이었다.

저 체구, 스타일, 피부, 목소리, 말투…….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

“어머, 이게 무슨 냄새죠?”

그녀가 불시에 고개를 돌렸다. 무도회 가면으로 가려진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나는 살기 위해 숨을 멈추었다. 내 입술이 보랏빛으로 질리기 시작하자 허리를 감은 아다르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의 검은 눈이 코앞에 선 여인에게 똑바로 날아가 꽂혔다.

“음, 달콤한 초콜릿 냄새.”

여자가 새빨간 입술에 미소를 걸며 다가왔다.

“금화 200닢의 주인이신가 봐요?”

묻는 목소리가 앙칼지다. 발톱을 세운 고양이처럼 날카로워서 누가 보면 화가 난 줄 알겠지만, 원래 말투가 그런 여자였다. 나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위에서 신물이 울컥 올라왔다. 안간힘을 다해 마른침을 삼켜보지만, 땅이 흔들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얼굴가죽이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대답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짓씹었다가, 결국 거하게 속을 게워냈다.

“어머!”

여자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와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어서 안달 난 움직임이었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처럼 껄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쉬기가 어렵고, 갑자기 허벅지와 등에 난 오래된 흉터들이 끔찍한 통증을 자아내며 화끈거렸다.

다시 속이 뒤집혔다. 나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속을 게워냈다.

“죄송하오. 아내가 약을 너무 많이 한 모양이오.”

첼러스가 내 앞을 가리고 서며 대신 사과를 전했다.

“적당히 좀 하시지……. 쯧.”

노골적으로 경멸을 드러낸 여자가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서둘러 떨어지고 싶다는 듯 멀리 걸어갔다.

아다르가 즉시 나를 품에 안아 올렸다. 첼러스가 급하게 천막을 젖히며 우리를 안으로 인도했다.

***

“무슨 일이에요?”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던 스노아가 급하게 방음마법을 펼치며 물었다.

“아르모어가 갑자기 뛰쳐나가려고 했어요. 막느라 얼마나 진을 뺐는지.”

아르모어는 카카나의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상태였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창백해진 채 고요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검붉은 눈이 말라붙은 피딱지처럼 어둑하게 물들어 있었다.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카카나.”

침대에 카카나를 앉혀준 아다르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스노아는 청결마법으로 카카나의 입가와 옷에 묻은 토사물을 닦아주었다. 할릭이 카카나의 열을 쟀다. 몸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아까부터 안색이 이상해 보였어요.”

스노아가 격해진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윽박질렀다.

“대체 뭘 먹인 거죠? 환각작용이 있는 걸 잘못 먹은 건가요?”

첼러스가 마른세수를 하며 설명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카카나가 만든 약물을 복용했으니까요.”

“카카나가 만들었다고요?”

“약을 한 것처럼 보이게 할 뿐, 해롭지 않은 것이라 했습니다. 약물 때문이 아닙니다.”

그사이, 카카나가 다시 속을 게워냈다.

안색이 거의 흙빛이 된 할릭이 초조하게 카카나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녀는 토를 하면서도 전신을 떨고 있었다. 단순히 몸이 아파서 떠는 것이 아니었다. 아주 끔찍한 거라도 본 사람처럼 까무러치고 있었다.

할릭은 비슷한 증상을 보였던 사람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부모가 살해되는 장면을 코앞에서 목격한 어린아이도 꼭 이렇게 토하면서 몸을 떨었었다. 제 영혼을 강타한 충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으, 으, 흐으으…….”

껄떡이며 숨을 쉬던 카카나가 몸을 웅크리고 기묘한 신음을 흘렸다. 울음을 참는 건지, 아니면 극심한 고통을 참는 건지 알 수 없는 신음이었다.

끄윽, 끄윽, 울음을 삼킨 카카나가 보호하듯 제 머리를 끌어안았다.

“카카나? 괜찮…….”

“자, 잘, 잘못했어요.”

그녀가 할릭의 말을 잘라내며 중얼거렸다.

“잘못, 했…….”

얼굴을 야차처럼 일그러트린 아르모어가 카카나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달랑 들어 올려 품에 안고 어르기 시작했다. 얼음처럼 굳어있던 용사들이 눈으로 아르모어의 움직임을 좇았다.

어떤 사건이 터져도 침착함을 유지하던 아르모어의 평정심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검붉은 눈이 악마도 태워 없애는 지옥 불처럼 작열했다. 안색은 카카나에 대한 걱정으로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가 카카나의 등을 쓸어주며 거칠게 갈라지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카카나. 괜찮다. 지켜주겠다.”

“으, 으윽…….”

“진정하거라. 응? 숨을 쉬어라. 천천히…….”

용사들이 그 장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르모어의 어깨에 이마를 박고 수차례 문지른 탓에, 카카나의 가면이 벗겨졌다. 가면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 위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용사들이 멍하게 풀어진 카카나의 꿀색 눈망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용사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여자.”

시퍼렇게 뜬 눈에 그 모든 장면을 꾸역꾸역 담은 아다르가 들끓는 저음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새까만 눈에 분노가 타올랐다.

“여자를 본 뒤, 카카나의 행동이 변했어.”

그가 즉시 몸을 돌렸다. 천막을 나가 당장이라도 여자의 숨통을 끊어놓을 기세였다.

그런데 공처럼 몸을 말고 있던 카카나가 갑자기 발버둥 치며 아르모어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아다르에게 뛰어갔다.

“카카나!”

위태롭게 걸음을 놀리던 카카나가 결국 발이 꼬여 자리에 넘어졌다. 세게 고꾸라진 탓에 우당탕, 소리가 났다.

얼음처럼 꼼짝없이 굳어 있던 용사들이 기겁을 하고 카카나에게 뛰어갔다. 두꺼운 러그가 깔려 있어 다행히 피가 나진 않았지만, 두 손바닥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아랑곳 않고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아다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채 늘어졌다.

“아, 안 돼, 안 돼…….”

“카카나, 이게 무슨…….”

아다르가 무릎을 굽혀 안색을 살피려 하자, 그녀가 손을 뻗어 아다르의 목덜미를 안았다. 그리고 숨기려는 것처럼 그의 얼굴을 품으로 끌어왔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으, 윽, 으으…….”

뜨거운 눈물이 아다르의 뺨과 이마로 투두둑 떨어진다. 고문을 참는 것처럼 온몸이 경직되어 있다.

“한 번만, 한 번만…….”

아다르는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카카나는 지금 이곳에 없었다. 제가 아는 악몽 속에서, 누군가를 지키고 있었다. 심각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갑자기 현실감각을 잃고, 과거의 그 장소로 떨어져버리는 것.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입은 용서해달란 말을 수차례 속삭였다.

아다르와 첼러스는 악몽을 꾸는 카카나의 비명을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어둡고 좁은 곳에 들어가 숨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녀를 달래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카카나의 발작을 본 적이 없는 용사들에겐 당연히 충격이 배가 되었다.

“사, 살려…….”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짓씹던 카카나의 몸이 어느 순간 힘없이 축 늘어졌다.

“카카나?”

아다르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카카나를 불렀다.

“진정해라.”

근처로 걸어온 아르모어가 늘어진 카카나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기절한 것이다. 지금은 이편이 낫다.”

멀거니 서 있던 할릭이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아파서,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주먹을 말아 쥔 첼러스의 두 손에 푸른 핏줄이 굵게 불거졌다.

“이게 무슨 일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있으면 얘기해 봐요.”

스노아가 시커멓게 허물어진 눈을 들었다. 어금니를 악문 아다르가 첼러스와 모종의 시선을 교환했다.

결국 카카나의 악몽, 흉터, 고소공포증, 그리고 실험에 이르기까지 무겁고 끔찍한 대화가 이어졌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화였다.

***

“아무리 생각해도 느낌이 비슷하단 말이야.”

“무엇이?”

므리나 이소리하는 목욕시중을 받다 말고 손을 흔들었다.

이곳의 하인들은 모두 장님이었다. 은밀히 이루어지는 경매인 만큼, 하인들이 귀족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자리를 비키라는 손짓을 못 본 하인이 시중을 계속하자, 그녀가 결국 소리 내어 명령했다.

“이만 나가 봐.”

허리를 숙인 하인들이 자리를 비켰다. 므리나가 근처에 앉은 첫 번째 남편, 오스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더러운 여자 있잖아. 빅웨입스 먹고 토한.”

“그녀와 비슷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군?”

“이런 델 올 수 있을 리 없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들지?”

므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상념에 잠겼다. 그녀가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 카카나 페아에 대한 상념이었다.

므리나는 걸핏하면 모든 사고가 벌어졌던 그날 밤의 일을 떠올리곤 했다. 돈과 명예에 집착하는 그녀 인생에서 최악으로 꼽히는 오점이자 실수였기 때문이다. 카카나와 실험체 대다수가 절벽으로 떨어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쓸 만했던 다다나까지 뱃가죽이 뚫려 죽었다.

‘살아있다는 걸 알고 대부분의 실험체는 도로 회수했지만, 카카나 그 멍청한 아이는 여전히 친구들이 도망 중이라고 생각하겠지?’

절벽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처음엔 모두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괘씸한 것이 목숨이 붙어서 도주한 게 아니겠는가. 그것도 추적을 피하기 위해 모든 흔적을 지우면서 말이다.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나서 눈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그들은 므리나의 갖은 악행을 알고 있었다. 알려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카카나, 그 아이도 므리나가 자신을 추적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은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저를 우선으로 추적할 걸 알기에, 다른 수인족 친구들과 찢어져서 혼자 도망쳤다.

영악한 아이였다. 무엇을 위한 실험인지도 모르면서, 므리나에게 제가 아주 중요한 실험체라는 걸 눈치껏 알고 있었다.

‘하여튼 실험을 당할 때부터 지독했어…….’

므리나가 과거의 카카나를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어찌나 독한지 친구들을 대신해 세 사람분의 실험을 혼자 견뎌내곤 했다.

‘뭐, 결국 그 애만 못 찾고 나머진 전부 찾았지만.’

므리나가 고약한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재밌어서 웃나? 내 아름다운 아내.”

오스딘이 미끄러지는 어조로 묻자, 그녀가 깔깔 웃으며 얘기했다.

“카카나, 그 애 말이야. 친구들이 모두 잡혀버렸단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또 그 양 수인족을 생각하는 중이었군?”

픽 웃으며 대꾸하던 오스딘이 문득 미간을 좁혔다.

“아까 느낌이 비슷하다고 한 게, 카카나 페아를 말한 거였어?”

므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스딘이 대놓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렇게 생각했다가 허탕 친 적이 많았잖아, 므리나. 이제 그만 신경 쓰는 게 어때?”

“내 유일한 성공작이잖아.”

므리나가 다소 뾰족하게 대꾸했다.

“그 애 이후론 성공해본 적이 없어서 마스터 얼굴을 뵐 낯이 없어. 걔 같은 아이가 또 나올지 의문이야.”

“걱정 마.”

오스딘이 므리나의 입술 아래에 있는 작은 점에 입을 맞추며 위로했다.

“여기서 새로운 수인족을 많이 사가면 돼. 그러면 그 양 수인족 같은 녀석이 한 명 더 탄생할 수도 있어.”

“카카나, 그 아이라면 지금쯤 다른 약물들도 많이 만들었겠지?”

오스딘의 말을 조금도 듣지 않은 므리나가 손톱을 깨물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내 손에 들어오면 천천히 확인해볼 텐데. 앙큼한 녀석.”

카카나 페아는 약초학의 귀재였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건 마음만 먹으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생존 여부를 숨기기 위해 지금까지 눈에 띄는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 수상할 정도로 강한 수면제를 빼면 말이지.’

“오스딘.”

“응?”

“죽음의 숲으로 파견된 기사들이 수면제를 맞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보고가 올라왔을 때, 기억 나?”

므리나는 깨진 유리구슬 조각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던 약물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인어의 눈물이란 이름의 수면제 말이야.”

인상을 내내 찡그리던 오스딘이 ‘인어의 눈물’을 듣고 나서야 생각이 났는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추웠을 때 말이지?”

“응.”

“당연히 기억나지. 카카나가 만든 수면제 같다고 했잖아.”

므리나는 황실 소속 치료사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당시 잠든 기사들을 진찰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므리나가 아는 한,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카카나 한 명뿐이었다. 용사를 쫓아 죽음의 숲으로 향한 기사들이, 카카나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수면제를 맞고 잠들었다?

퍽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만일 죽음의 숲에 카카나가 숨어있고, 그녀가 용사들을 치료하는 중이라면? 그래서 기사를 잠재우고 용사와 함께 마을로 나온 거라면?

‘용사를 치료하려면 희귀한 약초가 많이 필요했을 거야. 그래서 약초방 근처에 암살자를 풀어놓았던 건데…….’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나. 되레 암살자가 당해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지 않았나. 므리나는 그 점을 아직까지 수상쩍게 여기고 있었다.

황실 치료사들은 용사들이 치료될 리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용사들은 아직까지 붙잡히지 않은 채, 잘만 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군가 치료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제국에 카카나 말고, 용사들을 치료해줄 수 있는 귀재가 과연 또 있을까?’

므리나가 회의적인 투로 입을 열었다.

“카카나 그 아이, 용사들과 붙어먹은 게 아닐까?”

이건 전부터 수없이 이야기가 오가던 주제였다. 오스딘이 질린 눈으로 므리나를 바라보았지만,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하고 웃어 보였다. 카카나를 향한 므리나 이소리하의 집착은 그녀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다.

오스딘이 지친 심정을 숨기며 대답했다.

“그건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대화를 끝냈잖아.”

“암살자들을 처리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고 했어.”

언제나 그랬듯, 므리나는 오스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자문자답을 하며 도톰한 아랫입술을 질끈 씹고 있다.

오스딘이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상대가 용사였기에 그런 식으로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던 거야. 내가 그 암살자들 고용한다고 돈을 얼마나 썼는지 알아?”

“실력 좋은 놈들만 쓰겠다고 했으니까.”

오스딘이 피로한 듯 뜨끈한 목욕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므리나가 다소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카카나가 정말 용사와 함께 있는 거라면, 지금 도시나 마을에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뜻이잖아.”

“그럴 리 없어, 여보. 진정해.”

오스딘이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친구를 죽이느니 차라리 자기를 죽이라고 얘기했던 아이라며. 잊었어?”

그가 므리나의 귓불에 야릇하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설사 용사들과 얽혔다 하더라도 그런 애가 바깥을 돌아다닐 용기가 있을 리 없어. 어디 숨어서 쥐 죽은 듯이 지내고 있겠지.”

“그럴까?”

“당신이 여태껏 그 애를 잡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잖아. 꽁꽁 숨어있어서.”

므리나가 찝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

제국을 이 잡듯이 뒤져본 결과, 카카나가 숨어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몇 군데로 추려졌다. 그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 죽음의 숲이었다.

마음 같아선 숲으로 들어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므리나의 실력으로는 죽음의 숲을 뒤져볼 수 없었다. 죽음의 숲은 금기의 땅이었다. 그 누구도 그곳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어떤 약초가 있는지, 그리고 어떤 몬스터와 생물이 서식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들어가면 반드시 목숨을 잃었고, 살아 돌아와도 수일 내에 목숨을 잃기 때문이었다. 괜히 죽음의 숲이란 이름이 붙은 게 아니었다.

‘다다나, 그 애만 살아있었다면…….’

카카나의 동생 아니랄까 봐, 다다나는 어느 정도 크고 나서부터 유일하게 카카나와 비등한 실력을 보였던 애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그녀의 해독제를 이용해 죽음의 숲을 탐방했을 수도 있었다.

‘쓸모가 참 많았을 텐데.’

므리나 이소리하는 카카나가 남긴 약물조제법을 이용해 유명해졌고, 황실 치료사가 됐다. 당연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실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황실에서도 므리나의 뛰어난 실력은 다 과거의 영광이라며 비웃는 말이 돌았다.

그녀는 미래를 바라보며 그 갖은 모욕과 수모를 감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실험만 계속하면 되는 거야. 마스터가 약조하신 세상을 생각해 봐.”

오스딘이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우린 선택받은 사람들이야.”

‘선택받았다’는 소리를 듣자, 그제야 므리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아왔다. 그녀가 고개를 꺾으며 오스딘의 입술에 깊숙이 키스했다.

찝찝한 생각을 어떻게든 털어버리고자 하는 몸짓이었다.

***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잠시간 눈을 깜박였다.

깊고, 드넓은 숲이 보였다. 줄줄 흐르는 땀과 모래먼지가 엉켜 온몸이 꺼끌거리고 불쾌했다. 나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늑대 수인족, 타도라가 우는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카카나, 이건 네 거잖아…….”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우리는 도망치는 중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에 들린 낡은 누더기 가방을 바라보았다. 음식과 약물이 들어있는 내 가방이었다.

나는 입에 고인 피가래를 뱉어내며 타도라의 뒤편을 살폈다. 호레이, 나브리아, 틸라, 스칼리……. 그간 열심히 간호한 덕분에 다들 안색이 많이 좋아져 있었다. 호레이는 다리를 절었지만, 응급처치를 잘한 덕분에 걸을 수는 있었다.

나는 동굴 밖으로 친구들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도망쳐.”

“카카나…….”

“가. 뒤처리는 내가 할게.”

타도라가 돌아서려는 내 팔을 간절하게 붙들었다.

나는 애써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땟국이 잘잘 흐르는 뺨이 짠 눈물로 더 엉망이 되어 있었다.

“같이 가자. 응? 우리 힘을 합쳐서, 저택에 붙잡힌 친구들도 같이 구…….”

“걔네들은 잊어.”

나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무감정한 어조로 일갈했다. 내 냉정한 말에 깜짝 놀란 타도라가 두어 번 딸꾹질을 하더니, 억지로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카나…….”

“구해도 내가 구해. 그러니까 너희는 가.”

어떻게든 떼어내려는 어조를 그녀도 느꼈을 것이다.

타도라가 고집스럽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므리나를 향해 간혹 보여주곤 하던, 독하고 굳센 얼굴이었다.

그녀가 내 손을 꽉 붙들었다. 말다툼을 하는 동안, 내가 도망이라도 갈까 겁난다는 듯이.

“왜 계속 네가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해?”

슬프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른 얼굴이다.

“왜 매번 혼자 짊어져? 우리가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천치야? 그렇게 못미덥니?”

마음속에 꽁꽁 뭉쳐있던 슬픔과 두려움이, 돌연 분노가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그녀의 팔을 확 쳐내며 악을 썼다.

“그래!”

타도라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강인한 눈이, 결국엔 와르르 무너지며 눈물을 쏟았다. 나는 간호하느라 헐고 피가 나는 손을 안 보이도록 말아서 주먹을 쥔 다음, 독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 너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있으면 말해 봐!”

타도라가 충격으로 멍해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를 똑똑히 노려보며 아픈 말을 줄줄 읊었다.

“돕는다 해도 나한텐 다 짐이고 방해야. 알면서 왜 그래? 왜 자꾸 날 힘들게 하냔 말이야!”

“…….”

“나는 므리나 밑에서 여러 약물을 만들어 보기라도 했지, 너흰 뭘 할 수 있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떼쓰지 마!”

상처 되는 말을 하는 건 쉬웠다. 므리나 이소리하가 사용하는 말투를 조금만 떠올려도 금방 흉내 낼 수 있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너희들 얼굴 보는 거 지긋지긋해. 나는 언제까지 너흴 책임져야 해?”

“카카나, 미안해. 네가 우리를 위해 여태 애써준 거 알아. 그러니까…….”

타도라가 히끅거리며 필사적으로 날 붙들었다.

‘그러지 마.’

나는 아랫입술을 꽉 짓씹었다.

‘그냥 가, 타도라…….’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가,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나한테 미안하면 가.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너희 얼굴만 봐도 악몽 같으니까.”

뒤에 서 있던 수인족 친구들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고약하게 말을 이었다. 끝을 맺어야만 했다.

“그게 너희가 날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

“므리나한테 붙잡히지 마.”

끄윽, 끄윽, 팔뚝으로 눈가를 가린 타도라가 숨넘어가는 울음소리를 냈다. 눈가가 뜨거워져서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으름장을 놓았다.

“가.”

훌쩍이던 타도라가 한참을 더 울더니 마침내 친구들을 이끌고 길을 떠났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의 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쯤, 간호의 흔적을 말끔하게 치워 없앴다.

발목을 삐는 바람에 절뚝이며 걸을 때마다 통증이 올라왔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나는 친구들이 갔던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묵묵히.

‘시간을 벌어야 해. 므리나는, 나부터 쫓을 테니까…….’

“숨어…….”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뺨과 목, 눈가가 축축했다. 멍하니 눈꺼풀을 깜박였다. 어둡고 깜깜했다.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이곳이 옷장 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누군가 뒤에서 나를 껴안고 있단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허리에 감긴 굵은 팔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할릭?”

“일어났어?”

나는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수건으로 눈물과 땀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주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힘이 없어서 그에게 늘어진 채 되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일단 나갈까?”

기운이 없어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할릭이 내 허리를 받쳐준 채 옷장 문을 열었다.

아주 큰 옷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옷장이 놓인 방은 더 컸다. 붉은색 계열로 화려하게 치장된 방에 용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스노아를 보고 나서야, 우리가 경매장에 왔었단 사실을 기억해냈다.

“여긴?”

“우리가 배정받은 방이야.”

아다르가 근처로 걸어오며 말했다.

“나 어떻게 된 거야?”

머리가 징징 울려서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물었다.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아다르가 허스키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천막에서 두어 시간 있다가 방으로 돌아왔어.”

“천막에 두어 시간 있었다고?”

“…….”

“난 왜…….”

“기억이 안 나?”

아다르가 내 뺨을 다정하게 쓸어주며 말을 이었다.

“너 기절했었잖아.”

나는 멍하니 아다르의 검은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므리나 이소리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호흡이 멎자, 아다르가 즉시 허리를 굽히며 내 안색을 살펴보았다.

“카카나?”

“아.”

나는 여러 차례 눈꺼풀을 끔뻑이며 마른입술을 핥았다.

“응.”

“괜찮은 거야?”

아다르의 말투, 시선, 몸짓 하나하나가 극도로 곤두서있었다.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쓸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내가. 음…… 기절했었구나.”

나는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질문했다.

“옷은 누가 갈아입혀 준 거야?”

“스노아가. 눈을 감고 마법을 이용했다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뒤에 있던 할릭이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아다르가 날 안아서 옮겨주려고 하기에,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일어났다. 용사들이 그 모습을 어금니를 꽉 악문 채 바라봤다. 애써 못 본 척하며, 애꿎은 방을 더 둘러보았다. 여러 가지 물품이 구비되어 있는 선반을 구경하고 있으니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천막에 들어가긴 했었나 보네.’

천막 내부의 모습이 희미한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머리가 욱신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섯 명 정도는 거뜬히 누울 수 있으리만치 큰 침대였다. 번뜩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 잘, 잘못했어요.]

‘큰일 났네.’

용사들 앞에서 무슨 추태를 보인 건지. 더 이상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착잡해진 마음을 추스르며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되짚어보았다. 그러자 애써 부인하고 있던 한 존재가 선명하게 생각났다.

므리나 이소리하.

‘도망가야 해.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이마를 짚었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왜 므리나를 고려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수십 명의 수인족을 죽이면서 실험을 했던 여자다. 실험체로 반드시 수인족을 사용했기 때문에, 수인족을 판다는 노예 경매장은 반드시 방문했다. 흡사 고문에 가까운 실험이어서 하루에 한 명씩은 반드시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살 만해졌구나, 카카나 페아. 므리나 이소리하를 잊고 있었다니…….’

잊어버린 내가 믿기지 않았다.

얼굴이 창백해지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내 안색이 나빠지자, 첼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따뜻한 꿀물을 건넸다. 그것을 군말 없이 받아마셨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박동에 맞춰 머리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냐, 정신 차려. 므리나는 내 정체를 몰라. 이건 어차피 각오했던 거잖아.’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해주겠다고, 용사들이 약속했어.’

그것만이, 지금 이 순간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기둥이었다.

지푸라기 부여잡듯, 그 생각만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며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지 않으면 단 1초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카카나.”

코앞에 쭈그리고 앉은 첼러스가 내 손에 들린 찻잔을 선반으로 옮긴 뒤, 신중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응?”

나는 뒤늦게 상념에서 벗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첼러스뿐만 아니라 방의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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