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
우리는 아누비르 본부에 잠시 묵게 되었다. 이곳이 여관보다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블라와 용병왕 노레스의 얼굴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무사귀환한 우리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폭시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숲 깊은 곳에 풀어주었다. 내가 어디로 향하든 주인을 추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한 선택이었다.
나는 늦은 밤이 되면 숲 근처로 가 폭시에게 내 마나를 먹이곤 했다. 호각으로 부를 수 있으니 걱정이 없었다.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스노아는 박살이 난 내 환영마법 반지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바드가 손쉽게 망가트렸단 얘길 듣고 제법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우선 이 반지를 착용해 주세요.”
스노아가 내게 은반지를 건네며 말했다.
“이게 뭔데?”
“같은 환영마법 반지를 끼고 있지 않으면 우리들의 외양이 다르게 보이잖아요?”
“아, 맞아. 불편해.”
용사들이 다른 사람 얼굴로 보여서, 갑자기 나를 부를 때면 식겁하곤 했다. 보통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그게 요즘 제일 큰 스트레스였지.’
“이건 그 부분만 해결해주는 반지예요. 끼면 저희의 얼굴이 제대로 보일 거예요.”
“오, 그렇구나. 고마워.”
“물론, 환영마법 기능은 없어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면 후드가 벗겨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편안하게 보낸 탓에 후드를 쓰는 걸 깜박해서 특히 주의하고 있었다. 습관이 무섭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반지는 전보다 훨씬 단단하게 만들 생각이에요.”
스노아가 투지가 들끓는 눈으로 말했다.
“보호 마법도 많이 달아놓고요.”
“팔면 집 두 채는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농담이었는데 스노아가 진지하게 내 말을 받았다.
“그보다 귀하게 만들 거예요. 기대해주세요.”
“으, 응.”
나는 기가 질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겠는걸.’
나는 웬만하면 방 밖으로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무기를 찾고 완전체가 된 용사들은 본격적으로 마족을 알아보는 작업에 착수했다. 정보 면에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길드에서 약물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용사들을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들이 내 방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퀄리티미엄에 있을 때보다 자주 보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하루에 한 번씩은 반드시 들렀다. 나로선 곤란한 일이었다.
‘얼굴 보기 껄끄러운데…….’
함께 여행하겠다고 마음은 먹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강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모르는 척하겠다고 마음을 먹긴 했지만, 행동이 따라가질 못하니 말짱 도루묵이었다.
나는 그들이 평소에 내게 했던 것들, 이를테면 머리에 붙은 약초를 떼어주려는 행동만 보여도 당황했다. 이런 상태로 함께 여행하는 건 무리였다.
“아아, 젠장. 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거지?”
“뭐 놀랄 일이라도 있나 봐?”
“그건 아닌데 계속 숙맥처럼……. 끄아아악!”
나는 문틀에 기대어 서 있는 아다르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놀라 자지러지는 나를 보고 아다르가 오른쪽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너무 놀라는 거 아니야? 누가 보면 내가 괴물인 줄 알겠어.”
“예의는 밥 말아 먹었니? 노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나는 가슴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지경인 심장을 두 손으로 짓누르며 소리를 질렀다. 아다르가 신경질적으로 탕탕, 문을 쳤다.
“누가 보면 내가 노크도 안 한 줄 알겠네! 내가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알아?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노크했다고!”
“그, 그랬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나는 스르르 시선을 피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냥, 약초 때문에…….”
아다르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우선 요리부터 배달해주었다. 음식이 식을까 봐 그러는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책상 위에 펼쳐놓은 약초와 양피지를 치웠다. 아다르가 요리를 쟁반째로 올려주었다.
“매번 만들어주지 않아도 된다니까.”
나는 민망하게 우물거리며 수저를 들었다. 아다르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요리를 턱짓했다.
“내 몇 안 되는 낙이야.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아누비르엔 유능한 요리사가 있는데도, 아다르는 매번 요리를 만들어 가져다바쳤다. 내가 용사들을 문전박대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항상 명분을 들고 내 방을 찾았다. 꼭 내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준비한 사람들 같았다.
‘과한 생각이겠지?’
용사들은 퀄리티미엄을 방문하기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내게 마음을 들켰단 걸 모르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최근엔 그 생각이 조금 달라지려고 했다. 너무 미미해서 거의 못 알아차릴 뻔했지만, 전보다 집요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내 기분 탓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다.
음식을 다 먹었을 때쯤, 아다르가 근처로 걸어오며 말했다.
“무슨 고민을 하길래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었던 거야?”
묻지 않기에 포기한 줄 알았더니,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다.
‘곤란하네.’
나는 야채볶음의 찌꺼기를 깨작거리며 눈을 굴렸다. 당연히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으므로, 내 단골 핑계거리인 약초를 다시금 대화로 끌어왔다.
“말했잖아. 약초…….”
“평정심이니 숙맥이니 이상한 소릴 했으면서, 또 약초 핑계를 대시겠다?”
아다르가 여분의 의자를 내 앞으로 끌어와 앉으며 말했다. 본격적으로 캐물을 기세다. 나는 철벽을 쳤다.
“내 고민을 너한테 털어놔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만, 걱정이 되니까 하는 소리잖아.”
아다르가 의외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소처럼 내가 그를 타박하고 아다르가 얄밉게 대꾸하는 식의 전개를 기대했던 나는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잠시간 조용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다르의 눈이 유독 검은 탓에 날 지켜보는 시선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진심을 부딪쳐오면 나는 모르는 척할 방도가 없어지고 만다.
‘뭐라고 얘기하면 좋지?’
적당한 말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애꿎은 아다르의 입술을 구경했다. 그러다 서서히 시선을 내려 목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불 앞에서 요리했을 그의 몸이 희미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어서, 목덜미도 땀으로 은근하게 젖어 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그의 목울대도 아래에서 위로 꿀꺽, 움직였다. 왜인지 야하게 느껴져서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별로 심각한 일 아니니까.”
“너 말이야.”
“응?”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아다르가 검지로 내 광대뼈 근처를 툭 쓸면서 말했다.
“요즘 이상하게 뺨이 자주 붉어져. 잘 익은 복숭아처럼.”
잿빛 머리카락 사이로 시꺼멓게 빛나는 눈이 곧장 내 얼굴로 향했다. 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다르가 내 피부에 맺힌 땀 한 방울을 검지로 훔쳐가며 살짝 웃었다.
“여름이어서 그런가?”
“…….”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매미 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방 안을 뒤흔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패닉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원래대로 되돌아오는 방법이 오리무중이었다. 그래서 그냥 망연히 서 있었다.
아다르가 날 바라보는 상태로 입을 열었다.
“웬일이야?”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는데, 뒤늦게 방문이 열렸다. 아르모어가 서 있었다.
나를 압도하던 검은 시선이 아르모어에게 굴러갔다. 그제야 숨이 놓였다. 나는 입술을 핥으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별 거 아닌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기운이 쭉 빠졌다.
“카카나와 할 얘기가 있다.”
아르모어가 내 상태를 곁눈질로 살피며 말했다.
“어떤?”
“아레사 나이제르의 마법이 사라지지 않았나.”
“아, 사랑의 오작교?”
“그것을 대신할 보호정백술을 걸고자 한다.”
아르모어가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했다.
“이만 나가주었으면 좋겠군.”
“마침 그러려고 했어.”
아다르가 시원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전에. 카카나, 시원한 디저트를 만들어줄까?”
아다르가 바깥으로 나가다 말고 물었다. 시원한 음식은 무척 먹고 싶었지만, 아다르와 둘이서 대면하는 게 겁이 났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별로 안 더워.”
거짓말이 티 나지 않도록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대꾸했다. 아다르가 별 의심 없이 방을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침대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불편해 죽겠다.’
용사들이 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제일 편한 사람은 오직 아르모어뿐이었다. 표정이 적은 만큼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날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엘프들은 용사 전부라고 했지만, 착각한 걸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헛된 희망을 품으며 입을 열었다.
“의외네요.”
“무엇이?”
“저는 스노아가 사랑의 오작교랑 비슷한 걸 다시 걸어줄 줄 알았거든요.”
아르모어가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오며 설명했다.
“마법은 한계가 분명하니,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편이 낫다.”
나는 흐느적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채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한계를 말하는 거예요?”
“뮤나스에서 사용하던 펜던트를 기억하나?”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곧 뭘 말하는 건지 알아챘다. 커닝을 하기 위해 만들었다가, 나중엔 날 보호하는 용으로 사용했던 스노아의 마도구였다.
“보호마법이 발동되는 조건은 물리적인 충격이었다. 문제점은 그대도 알고 있겠지?”
“공격하기 전에 뺏어버리면 그만이라는 거요?”
“잘 알고 있군. 알렉 브래든이 그렇게 했었지.”
잊고 있던 이름을 육성으로 들으니 기분이 확 불쾌해졌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인간이야.’
나는 찜찜하게 생각하며 얼굴을 구겼다. 문득 아르모어가 근처로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나로 묶은 그의 생머리가 이불 위에 먹물처럼 퍼졌다. 그는 여름이 되고 나서부터 머리를 묶고 다녔다.
“물리적인 충격을 주지 않고 그대를 협박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지.”
“그렇긴 하네요.”
“그러니 예민하게 위험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회의적으로 물었다.
“그런 게 있긴 한가요?”
“물론 있지. 그대의 마음이다.”
아르모어가 잔잔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눈썹을 슥 들어 올리며 내 가슴팍을 찔렀다. 아르모어가 입꼬리를 당겨 미미하게 웃더니, 오른손을 폈다. 그러자 손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동심원이 생겼다.
나는 마나의 수면 위로 서서히 올라오는 여의주를 놀란 눈으로 구경했다. 볼 때마다 신기한 물건이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수정구슬처럼 생겼지만 색이 달랐다. 아르모어의 여의주는 보라색과 남청색이 오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래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황혼 너머의 밤하늘에 짙은 보랏빛 팬지꽃이 강을 이루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 보면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아르모어가 여의주를 내게 건네며 얘기했다.
“여의주가 마음에 드나?”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유리처럼 차가울 거라는 생각과 달리 적당히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딱 아르모어의 체온쯤 되는 것 같았다.
‘몸 안에 보관하고 있어서 그런 건가?’
나는 여의주의 표면을 검지로 조심스레 쓸어보며 넋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쁘잖아요. 이게 무기라니 믿기지가 않아요.”
“왜지?”
“금방 깨질 것 같잖아요.”
아르모어가 입을 가리고 후후, 웃었다.
“그대는 내가 여의주를 던져서 싸우리라 생각하는 건가?”
“아닌가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다. 그 정도로 깨지진 않으나, 던지는 용도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요?”
“정백들과 나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다.”
“아르모어는 여의주가 없어도 정백들을 부릴 수 있잖아요.”
“스노아도 스태프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순 있다.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군.”
참으로 심오한 세계다. 나는 아르모어의 부름에 응하지 않곤 했던 정백들을 떠올렸다. 정령술사와 다르게 그는 계약을 맺지 않는다고 했다.
‘여의주가 있으면 무조건 복종하게 되는 건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데, 아르모어가 여의주를 공중으로 붕 띄우며 말했다.
“지금은 곤란한 표정을 짓지 않는군.”
“네……. 네?”
멍하니 대답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르모어가 날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말라붙은 피처럼 어두운 눈으로 날 쳐다보곤 했으므로 꽤 익숙한 시선이었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곤란한 표정이라뇨?”
“아다르와 함께 있을 때 도망치고 싶은 얼굴을 하지 않았나.”
나는 심각하게 고민한 뒤 물었다.
“티 났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게 무언의 긍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르모어가 알았으면 아다르도 알았을 텐데 왜 지적하지 않았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편한가?”
의중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곧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정했다. 아르모어에겐 숨겨봤자 소용없었다. 그는 엘프들의 수장과 비슷했다. 굳이 진실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없더라도, 오래된 혜안이 풍기는 기운이 진실을 토하게끔 만들었다.
“네, 편해요.”
그가 눈꺼풀을 감았다 뜨며 나른한 숨을 토했다. 언뜻 한숨처럼 느껴지는 호흡이었다.
‘내가 실수를 했나?’
내 눈치는 재앙 수준이라고 아다르가 곧잘 빈정대곤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던 탓에 눈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성도 부족했다.
‘실수했나 보다.’
반쯤 확신하며 급히 내가 했던 말을 곱씹어보는데, 아르모어가 고개를 숙였다. 처음엔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몸이 가까워지는 것 같은……?’
가까운 거리가 의식되자마자 자동으로 상체가 뒤로 꺾였다. 그렇게 가깝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그런데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뒤로 피하다 못해 넘어갈 지경이 되자, 아르모어가 내 팔뚝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러다 뒤로 넘어가겠군. 왜 그렇게 놀라지?”
그의 붉은 눈이 스르르 굴러 내 표정을 살폈다. 아마 질겁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뒤늦게 표정관리를 하려 했지만 한참은 늦은 시점이었다.
“아, 그. 요즘 좀 예민한가 봐요.”
“발정기는 지났을 텐데.”
“신경이 곤두섰달까. 하하…….”
억지웃음을 터트리며 시선을 피했다. 아르모어가 무덤덤한 어조로 얘기했다.
“자리가 불편해 몸을 옮기려고 했을 뿐이다.”
“그, 그렇군요.”
“내가 편하다고 말한 것치곤 경계심이 대단하군.”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괜히 허공에 떠 있는 여의주를 흘끗거리다가 적당한 화제가 떠올라 말을 꺼냈다.
“여의주가 있으면 전과 뭐가 달라지는 거예요? 여전히 무기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요.”
“제대로 된 어령술을 쓸 수 있게 된다.”
아르모어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눈을 하자 아르모어가 설명을 이었다.
“정신계열의 정백은 불, 물, 바람, 땅의 정령처럼 정해진 형태가 없다. 마나처럼 세상에 흩어져 있지.”
“나비가 아닌가요?”
“내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게 나비여서 그 모양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군요.”
아르모어가 여의주의 겉면을 검지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설명을 이었다.
“형태가 없는 정신계열의 정백들은 내 말에 깃들어 소환된다.”
어렴풋이 감은 잡혔다. 아르모어는 정백을 부릴 때 반드시 사자성어를 이용했다. 호접지몽이나, 고고지성 같은 것들. 나는 그것이 정령술사나 마법사들의 주문과 비슷한 거라 이해하고 있었다.
“여의주가 있으면, 사자성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정백을 부릴 수 있다.”
“그러면 필요할 때 정백들을 마음껏 부릴 수 있겠네요!”
“여의주가 없을 때보단 나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그대, 혹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교훈이 담긴 책을 읽다 보면 꼭 한 번씩은 언급되는 문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모어가 담백한 어조로 예시를 들었다.
“바보야, 라는 말을 들으면 어떨 것 같나?”
콜리나가 내게 바보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것 같아요. 유치하잖아요.”
“너는 살인자다, 라는 말엔?”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에는 힘이 있다. 단어에 따라, 담긴 마음에 따라, 어조에 따라, 수많은 형태가 있지. 정백들은 내 말에 깃든다.”
“정백이 깃들 수 있도록, 무게 있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건가요?”
“그렇다. 때에 따라 적절한 말을 사용한다는 건 퍽 어려운 일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급변하는 전투 시에는 사용하기 힘들겠네요.”
“내 역량에 따라 갈리게 되겠지.”
“그러면 좋은 무기는 아니잖아요. 예쁘기만 하고.”
“물론 또 다른 힘이 있다.”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되물었다.
“뭔데요?”
“날씨를 바꿀 수 있다.”
‘잠깐만요.’
대화가 한 단계 넘어왔을 뿐인데 갑자기 스케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닌가. 나는 놀라움의 탄성을 내질렀다.
“말도 안 돼요!”
“용 수인족은 동양에서도 신비한 종족으로 치부되어 동화에만 등장한다. 이곳의 드래곤처럼 희귀한 존재이니, 참고하면 좋을 것 같군.”
“그, 그럼 용 수인족은 모두 날씨를 부릴 수 있는 거예요?”
“여의주의 주인만 가능하다.”
“그렇구나…….”
그래도 말도 안 되는 능력인 건 변함이 없었다. 내 망연한 얼굴을 본 아르모어가 후후, 하고 웃었다.
“여의주가 있으면 내가 부릴 수 있는 유일한 물질계열 정백을 소환할 수 있다.”
“물질계열이요?”
“채찍이다. 전기가 통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나는 그가 제자리에 서서 주위의 모든 적들을 전기채찍으로 쓸어버리는 장면을 떠올렸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여의주에 관한 궁금증은 모두 풀렸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되게 친절하게 알려주네.’
워낙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대충 얘기해주고 끝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아르모어가 내 약지에 짧게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그대가 궁금한 것은, 뭐든 일러주겠다.”
“가, 감사합니다.”
“이제 보호정백술을 걸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이자, 여의주가 아르모어의 얼굴 근처로 날아왔다. 그가 눈을 반쯤 감은 채 말을 읊조렸다.
“연이 닿아, 서로의 약지에 붉은 끈이 매였다. 어찌 보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여의주가 그의 말에 반응하듯 은은한 빛을 뿜었다. 매개체의 역할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지, 전보다 날개가 두 배 이상은 큰 화려한 나비가 소환되었다.
“붉은 끈은 감정이 얽히고 말았음을 의미하니, 내 약지에 그 조각이 이르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구나.”
“…….”
“그녀의 공포를 일러 주거라.”
붉은색 끈으로 변한 나비가 내 약지에 휘휘 감기더니, 그대로 쭉 뻗어가 아르모어의 약지에도 감겼다. 그리곤 피부에 흡수되듯 사라졌다.
아르모어가 줄곧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아주며 얘기했다.
“끝났다.”
“제가 공포를 느끼면 아르모어가 알 수 있도록 한 건가요?”
“그렇다. 물론, 내 공포도 그대가 느낄 수 있지.”
‘위험을 예민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이 뜻이었구나.’
나는 약지를 내려다보다가 퍼뜩 놀라 항변했다.
“그러면 너무 불편하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지?”
“넘어질 때도 아르모어가 느끼면 어떡하죠?”
그러자 아르모어가 눈을 휘어 웃기 시작했다. 순진한 소리라도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 정도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행이네요.”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가 여의주를 흡수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 문앞에 선 아르모어가 문득 허리를 숙여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쪽 소리도 나지 않는, 그저 입술을 뺨에 눌렀을 뿐인 건조한 입맞춤이었다. 물론 내 혼을 완전히 빼놓기엔 충분한 스킨십이었다.
“끄악!”
전혀 로맨틱하지 못한 비명을 지르자 아르모어가 또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더니 내 멍청한 얼굴에 아랑곳 않고 만족스러운 어조로 얘기했다.
“이제 항상 이어져 있게 되었군.”
제 할 말을 마친 아르모어가 유유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서 있다가 별안간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입맞춤 당했던 뺨을 움켜쥔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귀에서 증기를 뿜어내고 있진 않은지 의심되었다. 얼굴이 너무 뜨거워서 태양이 내 이마에라도 뜬 기분이었다.
‘내, 내가 남자를 너무 오랫동안 안 만났나?’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잠깐 즐길 수 있는 남자를 찾아봐야 하나?’
이건 너무 심했다. 단순히 그들이 부담스럽거나 대하기 곤란한 수준이 아니었다. 손가락만 스쳐도 온몸의 감각이 바늘처럼 뾰족해졌다.
‘뽀뽀가 뭐 별거라고 이렇게 당황하느냔 말이야.’
뺨 키스로 인사를 하는 지역도 있었다. 나 또한 이블라나 엘프에게 감사의 의미로 뺨 키스를 해준 적이 많았다. 이건 명백한 이상 징후였다.
‘욕구불만인가 보다.’
발정기 억제제를 개발하고 시간이 한참 흘렀다.
남자를 못 만난 지 족히 몇 년은 되었단 소리다. 여태 성욕을 해결하지 못해서 곤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달리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확신이 생겼다. 나는 시뻘게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욕구불만이 문제구나!’
그러면 해결하면 된다. 간단한 문제였다.
‘어떻게 해소하지? 홍등가는 별론데.’
홍등가는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제국은 성에 상당히 개방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내 기분이 찝찝했기 때문이다.
최선은 적당한 남자를 골라서 제안하는 거였다. 돈은 충분히 있었고,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한 호신용품은 마법스크롤 가게에 들러서 사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용사들이다. 그들의 삼엄한 감시 아래에서 남자를 골라 여관으로 향하고 싶진 않았다. 몰래 빠져나가야 했다. 다행히 나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있었다.
‘이블라가 있었지! 같이 가자고 하자. 욕구불만을 해결하면 나도 평소처럼 돌아올 거야!’
의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나는 바로 계획에 착수했다.
남자와 한바탕 뒹굴기 위해선 반드시 폴리모프 약물이 필요했다. 지금은 환영마법 반지도 없으므로 그냥 나갔다간 바로 수인족인 걸 들킨다. 그럴 수는 없었다.
‘몇 시간짜리로 만들지?’
뿔을 없애주는 폴리모프 약물은 생각보다 쉽고 간단한 편이었다. 당연히 지속 시간을 늘리는 것도 쉬웠다.
‘넉넉잡아 24시간으로 하자!’
나는 헤벌쭉 웃었다.
‘내일 당장 가는 거야!’
“히히.”
나는 희희낙락하게 웃으며 약재를 책상 위에 우르르 쏟았다.
***
이블라는 제 방에 들어오자마자 당당하게 소리치는 카카나의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나 욕구불만이야!”
자랑스러운 발견이라도 되는 양 허리에 손까지 올리고 있다. 이블라는 일단 그녀를 진정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맥주 마실래?”
“있어?”
그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블라가 마도구 호출기를 누르자 아누비르의 사용인이 그녀의 방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내 맥주와 땅콩을 가져다주었다. 투숙 중인 명예급 용병 이상부터 누릴 수 있는 특혜였다.
“욕구불만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카카나가 땅콩 두어 개를 으드득 씹어 먹으며 대꾸했다.
“말 그대로야. 그래서 그런데, 오늘 나랑 같이 밖에 안 나갈래?”
“응?”
“해소를 하고 싶은데, 용사를 달고 나갈 순 없잖아.”
이블라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너무 위험하지 않아?”
카카나가 좀 귀여운가. 저런 깜찍한 여자애가 하룻밤 즐기자고 달려들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걱정되는데…….’
눈썹을 구긴 이블라가 카카나의 행색을 은근하게 훑었다. 여름용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엔 꽃과 구슬 장식이 달린 핀까지 꽂았다. 옅은 주황색 립밤을 바른 입술이 싱그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엘프들이 꾸미는 법이라도 가르쳤나?’
아니면 스스로 재미가 붙은 건지, 카카나는 최근 꾸미는 데 제법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귀여운데 예뻐지기까지 하니 더 걱정이 되었다. 좀처럼 밖에 내놓고 싶지 않게 된 것이다.
여동생이 애인을 만든다며 집 밖으로 나설 때도 이렇게까지 불안하진 않았었다.
“내가 안 가면?”
이블라가 난감한 어조로 물었다.
“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카카나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혼자라도 갈 기세네.’
같이 갈지언정, 카카나를 혼자 보낼 순 없었다. 일단 함께 움직여주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블라는 푹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호위가 필요한 거야? 아니면 같이 즐기자고?”
“호위. 그, 여러 명이서 하는 건 좀 부끄러워서…….”
성에 개방적인 제국 사람들은 꽤 다양한 방식으로 성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카카나는 그런 것들까진 면역이 없었다. 새로운 경험을 달가워하는 성격이 아닌 것이다. 웬만하면 익숙한 방식으로 하고 싶었다.
‘얌전한 남자가 좋겠어.’
발정기 억제제를 개발하기 전엔 거기에만 매달리느라 뿔을 없애는 폴리모프 약물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돈을 지불한 후, 가만히 있어달라고 요청했다. 모자라도 벗겨지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홍등가를 방문하지 않을 땐 그런 성향의 남성을 찾았다.
그녀는 후에 폴리모프 약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얌전한 남자만 찾는 건 똑같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사전에 얘기된 것과 다르게 남성이 적극적으로 행동하려고 하면 호신용품을 사용하고 달아났다.
‘그러고 보니, 용사들은 주로 먼저 다가오는 편이네.’
침대에서도 적극적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낯선 방식인 건 분명했다.
‘그래서 더 당황했던 건가? 익숙하지 않아서?’
카카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그럼 이번엔 적극적인 남자를 찾아봐야겠다.’
목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용사들이 무슨 행동을 해도 카카나는 자기가 침착하고 어른스럽게 대응할 수 있기를 바랐다. 욕구불만도 해소하고, 상대의 적극적인 행동에도 익숙해지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제 새로운 경험을 시도해볼 심리적 여유가 있었다.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카카나가 별안간 마법가방을 뒤지며 말했다.
“호위 의뢰를 맡길 돈은 챙겨왔어!”
그러더니 화폐주머니를 통째로 내밀었다. 거절하면 불편해할 게 뻔했으므로 이블라는 순순히 돈을 받았다. 꽤 두둑하게 들어 있었다.
“뿔은 어떻게 할 거야?”
“약물을 만들어뒀어. 24시간 유지되고. 그거면 뿔을 없앨 수 있어.”
“침대에서 문제가 생기면 어쩔 거야?”
이블라가 잔에 담긴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켜며 말했다.
“수인족이 힘이 세긴 하지만, 제압하기 힘들 수도 있어.”
“마법스크롤 상점에서 호신용품을 살 생각이야. 걱정 안 해도 돼.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발정기를 해결했었거든.”
그거면 괜찮겠다고 여기던 이블라의 머릿속에 갑자기 용사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카카나에게 관심이 있었다. 이블라처럼 단순히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달랐다.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던 그들의 무시무시한 눈빛까지 더불어 생각났다.
갑자기 뒷목으로 한기가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이블라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들키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은데.’
특히 상대 남자 쪽이.
땅콩을 우적우적 씹은 이블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카나랑, 상대 남자까지 호위해야 하는 건가.’
피곤한 일에 휘말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놓았던 검집을 허리에 찬 후, 붉은 머리를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올렸다.
‘각오하고 있어야겠다.’
의뢰를 승낙했음을 깨달은 카카나가 날아갈 듯이 기뻐하며 얘기했다.
“그럼 일단 마법스크롤부터 사러 가자!”
이블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기도 전에 용사와 마주쳤다. 스노아였다.
‘시작이 좋지 않은걸.’
이블라가 질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자, 스노아가 우아하고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디 가시는 거죠?”
‘말에서 한기가 느껴지는군.’
분명 웃고 있는데 기분 탓인가,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있었다. 물론 카카나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말은, 이 위기가 이블라의 임기응변에 달려 있단 뜻이다.
그녀는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쇼핑.”
“저도 같이 가죠.”
스노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아냐, 스노아. 이건 여자들끼리만 하는 쇼핑이야!”
카카나가 신난 얼굴로 말했다. 표정이 너무 들떠 있었다. 이블라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끼어들 생각 하지 마!”
스노아의 웃는 눈이 고스란히 이블라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티 나지 않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곤 카카나의 어깨를 품으로 끌어오며 말했다.
“속옷을 사려고 하는데 그래도 따라올 심산인가?”
“밤에 말인가요?”
“낮이든 밤이든,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
“내가 호위 임무를 맡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맞아, 스노아. 아르모어가 보호정백술까지 걸어줬어. 위험해지면 바로 알 수 있어.”
이렇게까지 말하면 더 요청하기 힘들 것이다. 스노아가 보드라운 미소를 유지한 채 길을 터주었다.
“그렇군요. 즐거운 쇼핑 하고 오세요.”
‘봐주는군.’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벌써부터 피곤한 기분이었다.
용사들은 카카나의 모든 것을 감시할 능력이 있었지만, 그녀의 사생활은 최대한 보호해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말을 엿들었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스노아의 기색이 이상하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카카나가 어색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안절부절못하며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어 안달 난 얼굴이었다. 이블라는 더없이 난감해지고 말았다. 경계가 불분명한, 스노아의 물빛 눈망울이 이블라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경고인가.’
이러다가는 저마저 어색한 미소를 짓고 말 것 같아서 그녀는 황급히 아누비르를 벗어났다. 등허리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게 진짜 잘하는 짓일까?”
거리로 빠져나오고 한참 후에 이블라가 물었다. 카카나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성생활은 개인의 자유잖아. 당연하지!”
“하지만 위험하잖아. 남들 다 보는 앞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밀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아?”
카카나가 꺄르르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아넘긴다.
“이블라도 용사 닮아가? 왜 이렇게 걱정이 늘었어?”
본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자각이 없다. 이블라는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나도 탐탁지 않은데, 흑심을 품고 있는 용사들이 사실을 알게 되면 볼만하겠어.’
그때가 되면 은근슬쩍 발을 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이블라라도 그건 막아줄 수 없었다.
“라이트닝쇼크랑 홀드, 슬립 종류로 두어 개 샀어.”
마법스크롤 가게에서 나온 카카나가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그들은 성인용품도 함께 판매하는 밤술집으로 향했다. 목적이 분명한 술집이기 때문에 밤상대를 찾는 데는 이곳이 제격이었다.
이블라는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자신 못지않게 카카나에게 꽂히는 시선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귀엽게 생겼다. 그렇다고 성격까지 유약하거나 부드러운 건 절대 아니었으나, 우선 인기 많을 외양이었다.
이블라는 거의 반사적으로 불쾌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엄마처럼 굴지 말자.’
마음먹기 무섭게, 남자 한 명이 자연스레 접근해 왔다.
“제가 술을…….”
아마 술을 사줄 테니 같이 놀자고 말할 요량인 듯했다. 그러나 남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카카나가 대뜸 그의 손을 잡아챘기 때문이다.
“저에게 관심 있어요?”
“네?”
“관심 있냐고요.”
잡아먹을 것처럼 물어보니 남자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카나가 콧김을 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가죠!”
밤술집의 건물은 위층이 전부 여관이었다. 데스크로 걸어가자 남자가 얼이 빠진 채 질질 끌려갔다. 똑같이 황당해진 이블라가 카카나의 손목을 잡아챘다.
“벌써 고른 거야?”
“응?”
“대화도 안 해보고?”
카카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무슨 대화를 해? 어차피 그거 하려고 오는 곳인데.”
‘당차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블라가 마른세수를 하자 카카나가 남자를 향해 방긋 웃었다.
“이 남자 얼굴이 마음에 들거든.”
카카나가 남자를 향해 방긋 웃었다. 그러자 놀란 토끼처럼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가 사르르 녹는다. 사랑스럽게 생긴 여인이 저를 향해 웃어주니 놀랄 땐 언제고 사족을 못 쓰고 있었다.
“이상한 놈인지 아닌지는 간을 봐야 할 거 아니야.”
이블라가 어떻게든 카카나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그녀가 자기 마법가방을 툭툭 친다. 마법스크롤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 같다. 이블라가 거세게 한숨을 쉬며 손목을 놓아주었다.
***
마음이 급해서 무작정 끌고 오긴 했지만, 남자가 적극적인 성향인지 아닌지 물어보긴 해야 했다. 나는 여관비를 지불하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대놓고 물었다.
“성향이 어떻게 되세요?”
“예?”
“리드하는 걸 좋아해요? 아니면 당하는 쪽?”
남자가 날 멀거니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더니 곧 푸핫, 하고 웃었다.
“이렇게 물어보는 분은 처음이네요.”
“빨리요.”
“어느 쪽을 원하시는데요?”
남자가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둘 다 가능하거든요.”
“리드해주세요.”
“기꺼이.”
남자가 갑작스레 입을 맞췄다. 샤워하고 일을 치를 줄 알았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벽에 막혔다.
‘뭐, 뭔가…….’
“윽, 읍…….”
뜨거운 혀가 입술을 핥았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나는 헉, 숨을 들이켜며 남자의 어깨를 밀어냈다. 감촉을 견디기 힘들었다.
“자, 잠깐만요.”
‘왜 불쾌하지? 기분 좋을 줄 알았는데.’
욕구불만을 해소할 생각뿐이었던 머릿속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과거에도 이랬던가, 떠올려보았다. 발정기 때만 남자를 찾았으므로 별 생각 없이 관계를 맺었었다. 생각해 보니 맨 정신에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내가 통제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관계였다.
‘리, 리드 당하는 게 별로인 건가? 용사들이 다가올 땐 이러지 않았는데…….’
“왜 그러세요?”
“자, 잠깐 샤워부터…….”
“전 이대로가 좋은데.”
남자가 내 머리에 코를 묻었다.
“당신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거든요.”
무리다. 나는 남자를 밀어내고 소매로 입술을 닦았다.
“죄송한데, 지금 기분이 아닌 것 같아요.”
남자의 안색이 변했다.
“예? 바로 하자고 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마음이 변했어요. 미안해요.”
남자가 조용히 날 쳐다보더니 별안간 하,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식으로 사람 놀리는 게 취미신가 봐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그러쥐었다.
‘나 왜 이러냐, 진짜.’
한숨만 나왔다. 우울하게 자책을 이어가다가 결국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블라는 바에 앉아 독주를 마시고 있었다. 근처로 가서 앉으니 그녀의 눈매가 대번에 매서워졌다.
“왜 벌써 와? 상대가 이상한 짓 했어?”
“아니, 그냥…….”
“그냥?”
“내가 내키지 않는다고 했어.”
이블라의 고개가 의뭉스럽게 기울었다.
“얼굴은 괜찮은데 몸이 별로였어?”
나는 이블라의 술잔을 뺏어 마시며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키스를 했는데 기분이 별로길래.”
이블라가 내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안주를 내밀었다. 나는 과일 몇 개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왔다. 기대가 컸던 탓에 실망도 컸다.
‘역시 익숙하지 않은 방식은 불쾌한가 보네. 용사들과 달리 남자는 낯선 사람이니까 더한 걸 수도.’
그거 말고는 마땅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거 욕구불만이라도 해소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 이대로는 못 돌아가. 멍청이처럼 용사들이 말을 걸 때마다 놀랄 작정이야?’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전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경험상, 리드당하는 걸 편하게 생각하는 남자는 특징이 있었다. 구석진 곳에 콕 박혀 있거나, 긴장한 티가 나는 표정을 짓곤 했다.
마침 적당한 먹잇감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곳을 처음 와보는지, 앳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자리도 분위기만 살피려는 사람처럼 구석에 잡고 앉아서 중앙을 구경하고 있다.
“어디 가?”
이블라가 내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사냥.”
나는 짧게 대답한 후 그를 향해 힘차게 걸어갔다.
술을 마시는 둥 마는 둥 홀짝거리던 남자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는 순한 인상이 도움이 되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주근깨가 있는, 농민의 아들 같은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핥았다.
“이런 데 처음 오시나 봐요.”
나는 사뭇 친근하게 물었다.
“아, 네…….”
“몇 살이에요?”
“예?”
“미성년자는 아니죠?”
그가 두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올해 딱 성인이 되어서 형들이 데려왔는데, 잘 몰라서…….”
‘완전 딱인데?’
지금 내게 필요한 남자였다. 나는 손목을 잡아 그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생각보다 내 힘이 세서 놀랐는지, 남자가 놀란 토끼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좀 귀엽네.’
“그럼 나랑 같이 갈래요?”
“저, 전 잘 못할 거예요.”
남자가 너무 붉어져서 터지기 일보 직전인 얼굴로 얘기했다. 창피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 달래듯이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괜찮아요. 제가 가르쳐줄게요. 당신이 원한다면요.”
“…….”
남자가 굉장히 불안한 얼굴로 뒤를 흘끗거렸다.
‘왜 이렇게 긴장했지? 이런 데가 처음이어서 그런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별일 아닐 거라 치부하며 열심히 호감을 샀다.
“친절하게 해줄게요. 어때요?”
“저는…….”
남자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데, 갑자기 묵직하고 낮은 음성이 바위덩어리처럼 귓가로 떨어졌다.
“아아, 완전 원하지.”
크고 단단한 손이 내 어깨를 턱 잡았다. 순간 짐승에게 뒷덜미라도 물린 줄 알았다. 나는 너무 놀라서 짧게 비명을 질렀다.
“으악!”
어깨를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갔다. 세게 쥔 것도 아닌데 몸이 바람에 흩날리는 종잇장처럼 휘릭 돌려세워졌다. 나는 휘청거리다 크고 딱딱한 가슴근육에 이마를 부딪쳤다.
파르르 떨며 어떻게든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어둑한 조명을 반사하는, 형형한 주황색 눈망울이 보였다. 불꽃처럼 고요히 타오르는 눈이 남자를 보다가 내게로 굴러왔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넋을 놨다.
사슴을 사냥하다가 호랑이를 마주친 느낌이었다. 심장이 떨리고 허리 아래쪽으로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나는 어때.”
할릭이 들끓는 저음으로 말했다.
“하, 할…….”
“훨씬 기분 좋게 해줄 수 있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할릭의 타깃이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아, 내가 예의를 지키지 않았네. 당신 의견도 물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렇지?”
그가 거대한 몸을 남자에게로 돌리며 불량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컴컴한 조명과 왼뺨에 난 흉터가 할릭의 인상을 한층 더 난폭하게 만들었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나?”
“히, 히익…….”
남자가 겁에 질리다 못해 기절할 듯한 낯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할릭이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날 내려다봤다.
“저 앤 바라지 않는 것 같은데, 이만 나갈까?”
“하아, 젠장…….”
이블라가 골치 아프단 얼굴로 다가왔다.
그녀는 우선 할릭에게 구속되듯이 안겨 있는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출구를 향해 턱짓했다. 할릭이 순순히 걸음을 돌려 나갔다. 이쪽을 향해 있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할릭의 꽉 짜인 근육을 발견하고 싸그리 떨어져나갔다.
바깥으로 나오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아직 열대야가 찾아오지 않은 밤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나는 찬바람을 맞으며 죄지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이블라가 근처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와 내 입에 물려주었다.
기호식품인 데다 상당히 고가여서 평소라면 거절했겠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아먹으며 벤치에 앉았다. 새큼한 체리 맛이 났다.
“우리 뒤를 밟기라도 한 거야?”
이블라가 성질을 내며 할릭을 몰아세웠다. 할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이마를 짚고 있더니 손을 내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나는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빨아먹으며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마침내, 할릭이 말문을 텄다. 이블라의 질문을 깡그리 무시한 채였다. 그녀가 발끈한 표정을 지었지만 선뜻 타박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오롯이 나만 바라보는 할릭의 꿋꿋한 태도에서 끼어들 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눈치 볼 게 뭐가 있어? 남자랑 즐기는 게 잘못이야?’
아니, 잘못이 아니다!
나는 거칠게 콧김을 뿜었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다. 아이스크림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바짝 쳐올린 다음, 당당하게 얘기했다.
“욕구불만인 것 같아서 밤술집으로 놀러 간 것뿐이야!”
“아아, 그랬구나.”
할릭이 순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나이에, 능력도 되는데 뭐가 문제야? 건강하게 신체적 욕구를 해소하는 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고. 안 그래? 책임지지 못할 일만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신 헬리스도 자유로운 사랑엔 육체적인 사랑도 포함되어 있는 거라고 하셨어.”
나는 성서의 내용까지 끌어오며 열변을 토했다.
“최근 욕구불만 때문에 힘들었거든. 그러니까 나는 잘못한 게 없어!”
“그럼, 카카나는 잘못이 없어.”
할릭이 해바라기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내 말에 동의했다.
“잘못은 남자가 했지.”
“그래!”
나는 잠깐 침묵했다가 뒤늦게 되물었다.
“뭐라고?”
“몰랐구나? 건장한 남자 둘이 근처에 숨어서 아주 불타는 눈으로 널 보고 있던데.”
할릭이 웃는 눈으로 말했다. 아깐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의 웃는 얼굴이 사신처럼 보였다. 나는 흠칫 놀라서 허리를 뒤로 물렸다.
“으응?”
“너희가 방으로 들어가면 파티를 즐길 생각이었나 봐. 물론 네 동의를 구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새파랗게 질린 채 굳어버렸다. 이블라도 몰랐던 사실이었는지,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렇지?”
할릭이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느리고 또박또박한 어조로 얘기했다. 큰일 날 뻔했다는 말에 특히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
나는 대답도 못 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불안한 얼굴로 대답을 피하던 남자가 이제야 이해되었다. 형이라는 작자들이 아주 몹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뭐 하러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어.”
할릭이 내 등 뒤의 벤치를 손으로 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순식간에 갇혀버렸다. 굉장한 위압감이 들어서 반사적으로 마른입술을 핥았다.
“말했으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우드드득―
‘이, 이게 무슨 소리야.’
할릭이 잡은 벤치에서 나무합판 뜯어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나는 차마 그쪽으론 시선도 돌리지 못하고 하하, 기계적으로 웃었다.
“그런 놈들보다 내가 훨씬 안전하잖아. 그렇지?”
“…….”
“욕구불만 때문에 그렇게 괴로웠으면 말을 하지.”
할릭이 내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나는 기겁을 하고 물었다.
“어, 어디 가게?”
“너 봉사해주러.”
할릭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너무 순수한 얼굴이어서 순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할릭을 설득했다.
“자, 자잠, 잠까안! 난 괜찮아!”
“무슨 소리야?”
“욕구불만 해소됐어.”
“에이, 무슨 소리야. 하지도 못했는데.”
할릭이 들은 척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정색하고 되물었다.
“설마 그 밤술집이 2차였어?”
“딸꾹.”
돌연 딸꾹질이 터졌다.
그의 얼굴에 남아 있던 일말의 미소마저 스스스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절대 아니란 의미를 담아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잘못 말하면 밤술집의 남자들을 전부 죽여 버릴 기세였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자, 할릭이 그제야 표정을 풀며 말했다.
“뭐야, 놀랐잖아. 자, 그럼 가자.”
“너, 너는.”
나는 반쯤 영혼을 털린 채 악을 썼다.
“넌 내 스타일 아니야!”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우릴 지켜보던 이블라의 얼굴이 돌연 새하얘졌다. 환상적인 타이밍으로 일대의 새들이 위로 푸드득 날아올랐다.
나는 내가 잘못 말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주위의 기온이 차갑게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 뜻이 아니라. 오늘은 야, 얌전한 남자가 끌렸단 소리였어.”
“나는 이만 가볼게.”
갑자기 이블라가 대화에 끼어들며 퇴장을 알렸다.
‘이블라 너마저!’
내 간절한 눈을 본 이블라가 입 모양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자기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떴다. 할릭과 나만 남은 자리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결국 나는 모든 진심을 끌어 모아 털어놓았다.
“미, 미안해. 네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거 허언이었어. 너는 너만의 매, 매, 매력이 있어. 진짜야.”
할릭이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봤다.
“내가 매력이 있다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갑자기 나타나서 다, 다, 당황스러운 말을 하니까 놀라서 그런 거야.”
“…….”
“나는 욕구불만이라 치지만, 너는 밤술집에 대체 왜 갔던 거야?”
약간의 원망을 담아 질문하자, 할릭이 나를 다시 벤치에 앉혀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사차 나온 가게에 우연히 너희가 있었을 뿐이야.”
“정말?”
“정말.”
할릭이 경계 풀라는 듯 순박하게 웃었다. 농민의 아들이 아닐까 유추했던 그 남자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웃음이었다. 나는 금수 같던 사내와 눈앞의 사내가 동일 인물이 맞는지 눈을 의심하며 입을 열었다.
“조사는 무슨 말이야?”
“아까 그 가게에서 수상한 술을 팔고 있거든. 유통경로가 마족이랑 맞닿아 있는 것 같아서 정보를 모으고 있었어.”
‘진짜 우연히 만난 거였다니. 내 운은 어떻게 돼먹은 거지.’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크림 녹는다.”
할릭이 지적했다.
“헉!”
그러고 보니 아이스크림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체리 아이스크림의 붉은 물이 손을 따라 팔뚝으로 질질 흐르고 있었다.
나는 지금 하얀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여기서 더 얼룩이 지면 곤란했다.
“어떡해!”
허둥지둥 팔을 앞으로 뻗자, 할릭이 내 손을 제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
“뭐 하려고?”
손수건을 챙겨왔나 싶어 반색했으나 아니었다. 그가 대뜸 손목 아래까지 흐른 아이스크림 녹은 물에 살짝 입술을 댔다.
“헉!”
내가 놀라 뒤집어지든 말든, 옷에 떨어지기 일보직전인 물을 빨아들여 맛을 본 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다. 이거 체리 맛이지? 맛있네.”
“지금 맛있다는 말이 나와?”
솜털이 거꾸로 솟는 기분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손목에 힘을 줘봤으나 할릭의 무력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그가 녹아서 뚝뚝 흐르는 아이스크림 아래쪽을 몇 번 베어 물었다. 혼자 태평하기 그지없다.
“먹고 싶으면 말을 해. 하나 사줄 테니까!”
“또 녹기 전에 얼른 먹어.”
할릭이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할릭!”
“천천히 먹고 싶어? 그래도 돼.”
주황색 눈망울이 날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면 내가 또 도와주면 되니까.”
저건 진심이다.
나는 골이 띵하게 울리도록 아이스크림을 입 안에 욱여넣었다. 찬 기운을 훅훅 불어내며 막대를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찌나 차가운지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도 입 안이 얼얼해서 마법가방에 챙겨왔던 물로 입가심을 했다.
“잘 먹네.”
“야!”
“응. 듣고 있어.”
“너 미쳤어?”
나는 할릭이 입을 댔던 부분까지 물을 부으며 소리를 질렀다. 더럽다고 생각되진 않았지만, 그 부분만 체온이 차갑게 식어서 기분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할릭이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응.”
“그런데 왜 미친 사람처럼…….”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정정했다.
“응이라고?”
“응.”
“너 미쳤냐니깐?”
“그럼 정상이겠어?”
할릭이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으로 손과 팔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손수건이 있었잖아?’
나는 휘둥그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할릭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이 남의 살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어. 평범하다고 하긴 힘들지.”
너무 평이하게 얘기해서 나는 무슨 남 얘기라도 하는 줄 알았다. 어이가 없어서 눈을 끔뻑였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넌 왜 그러는 건데?”
물기를 닦아주던 할릭의 손이 멈칫 굳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널 좋아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정직하게 얘기했다.
“…….”
뒤도 안 돌아보고 올곧게 돌진하는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말이 창처럼 가슴에 훅 꽂힌 느낌이었다. 감히 그 진심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는 할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아누비르로 돌아가자. 시간이 많이 늦었어.”
나는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았지만, 가까스로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누비르 본부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져 유수해진 하늘이 별바다가 되어 있었다. 나는 환한 달빛 아래를 잠자코 걸었다. 할릭이 말문을 열었다.
“너는 어떤데?”
“…….”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할릭이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는 이미 아누비르의 사유지에 들어와 있었다. 용병들은 본부에 들어가거나 임무를 나가고 없었다. 가게의 불빛마저 사라지자 사방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할릭의 얼굴만은 잘 비추고 있었다. 짤막한 황토색 머리카락이 구릿빛 피부와 대조되어 사막의 모래처럼 보였다. 대답을 피할 수 없으리란 감이 왔다.
최대한 솔직하게 얘기했다. 진실로 부딪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순 없으니까.
“잘 모르겠어.”
솔직한 얘기라는 게 고작 이거였다. 할 수 있는 대답이 모르겠단 말밖에 없어서 화가 났다.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할릭이 그러지 말라는 듯 엄지로 입술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다행이네, 싫은 건 아니어서.”
“…….”
“싫으면 앞으로 못 하니까, 좀 걱정했거든.”
그가 눈가를 휘며 털털하게 웃었다. 문득, 비슷한 말을 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퀄리티미엄에서 스노아가 나를 위로해주러 들어왔을 때였다.
그때 스노아도 저런 식으로 얘기했었다. 싫으면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모르면 알아 가면 되지.”
할릭이 다시 내 손을 그러쥐었다. 커다란 손아귀에 내 작은 손이 폭 감싸였다. 그의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항상 네 곁에 있을 테니까. 그러니 천천히 간을 보면 되는 거야.”
“어떻게 그래?”
“왜 안 돼?”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우물거렸다.
“네가 상처받잖아.”
“상처 안 받는데?”
할릭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간 보고 아니면 버려도 돼.”
“무슨 말을…….”
“네가 간을 봐주는 것만으로 난 좋으니까.”
할릭이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도망치지나 마.”
‘또 난폭한 얼굴.’
나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이틀 후, 황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십중팔구는 마족에 관한 용무였다.
우리는 아누비르 본부에 있는 전신방으로 이동했다. 이곳엔 시중에 나와 있는 전신용 수정구슬 중 가장 비싸다고 알려진 물건이 있었다. 이토스 피니아스에게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까지 맡은 참이었다.
우리는 가장 큰 수정구슬이 놓인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안내를 맡은 사용인이 조용히 방을 나갔다.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노아가 방의 불을 끄고 구슬에 전신을 연결했다. 나는 수정구슬 위로 신기루처럼 형성되는 황녀의 몸에 감탄을 내뱉었다. 속이 유령처럼 비치고 크기가 한참은 작았지만, 황녀의 모습이 구슬 위에 제대로 뜨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황녀가 둥그렇게 앉아 있는 용사들의 얼굴을 한 명씩 확인하더니, 상냥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정보는?”
아다르가 모든 인사치레를 잘라먹고 물었다. 황녀가 노련하게 말을 받았다.
「얻었어요.」
황녀와 용사들은 그동안 사람 행세를 하고 다니는 마족을 찾아내는 작업을 했다.
마족은 육체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니 냄새를 맡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황녀는 마족이 임의로 육체를 바꾸는 건 확실하지만 무슨 원리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검은 연기를 자유자재로 다뤘던 바드와 알렉 브래든이 달랐던 걸 생각하면 차이점이 있는 건 분명했다.
마족의 힘에 따라 다른 건지, 아니면 수단방법이 다를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 탓에 누가 마족인지 알아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황녀와 용사들은 그나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마족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이 천족과 마족이 서로에게 건 저주 탓에 중간계에서 활개를 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했으므로, 저주의 내용부터 알아보기로 의견을 모은 상황이었다. 나는 손을 들며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황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저를 공격했던 마족인 바드도 본모습이 아닌 건가요?”
「그래요.」
황녀가 답했다.
「그가 취하고 있던 몸은 어린 남자아이예요. 피부병이 심해서 가문에서 거의 버려진 아이였죠.」
‘그래서 그렇게 악취가 났었구나.’
냄새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해서 콧잔등이 찡그려졌다.
“그럼 바드는 죽지 않은 건가요?”
「확신할 순 없어요.」
황녀가 고개를 저었다.
「마족이 인간의 몸에 어떤 식으로 깃들어 있는지 알지 못하니까요.」
“저는 바드에게 얼굴을 들켰어요. 아직 현상수배 되지 않은 이유는 그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바드라 추정되는 인물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어요.」
“그렇군요.”
「일부러 몸을 숨겼을 수도 있고요.」
황녀가 예상치 못한 답변을 했다.
「바드는 용사들과 함께 있다는 여인에게 특히 관심을 가졌어요. 다른 마족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죠.」
“그렇군요.”
「아시는 게 있나요?」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답했다.
“재밋거리를 뺏기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긴 했었어요.”
용사들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벽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수정구슬이 서로 부딪히며 덜덜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 안색이 창백해지자 금방 수그러들긴 했지만, 분노한 표정은 어찌하지 못했다.
황녀가 용사들을 슥 둘러보다가, 어딘가에서 양피지를 꺼내 읽었다. 구슬이 그녀와 닿는 물건도 비춰주는 모양이었다.
「바드는 황실을 집어삼킨 마족 중에서도 성격이 특이한 편이에요.」
그녀가 양피지를 넘기며 말했다.
「아무스라는 남자가 그를 통제하는 유일한 인물이죠.」
“너는 어째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
할릭이 테이블을 검지로 두드리다 말고 물었다.
“황실엔 많은 실력자들이 있어. 이미 마족 소굴이 됐다면, 네가 멀쩡하다는 게 제일 수상한데.”
「제겐 아바마마가 어렸을 적에 주신 귀한 유물이 있어요.」
그녀가 목걸이 끈을 잡아당겨 펜던트를 보여주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옥이나 돌처럼 보였다.
「천족의 물건이에요.」
“황제는 마족에게 먹히지 않은 건가?”
「아직은요. 하지만, 거의 먹혀가고 있어요.」
“…….”
할릭이 침묵하자, 첼러스가 다른 질문을 했다.
“확실히 알고 있는 마족의 수는 몇이나 됩니까?”
황녀가 이마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더니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다섯 명 정도일까요? 육체를 계속 옮겨 다니니 확실한 숫자는 아니에요.」
“얻었다는 정보는 무엇입니까?”
「물론, 마족에 관한 거랍니다.」
황녀가 양피지를 내려놓고 죽 말을 이었다. 머릿속으로 정리한 정보 중 핵심만 골라내는 듯한 말투였다.
「7월 10일 새벽 2시 포프란 폐가에서 스라일리 경매가 열려요. 수많은 귀족들이 참가하죠.」
“그중 마족이 있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마족의 손이 뻗치지 않은 고위 귀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그것도 암흑사회에 가담하는 귀족은요.」
문득 뮤나스에서 귀족들이 풍기는 느낌이 이상하다고 했던 용사들의 말이 떠올랐다.
‘전부 이유가 있었네.’
새삼 우리의 적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이 되어서 자연스레 몸이 긴장되었다. 황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카카나 페아 씨가 가야 하는 거예요. 드래곤에게 진실을 비추는 거울을 받았다고 하셨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들이 불만 섞인 기색을 내비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거울은 나만 사용할 수 있었다.
「불법경매이기 때문에 초대장을 받은 사람만 참가할 수 있어요. 물론, 구해놨답니다. 한 장밖에 얻지 못했지만요.」
황녀가 손에 들린 고급스러운 은색 초대장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스라일리는 시즌마다 다른 콘셉트의 경매를 열어요. 이번 콘셉트는 부부예요.」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부부요?”
「인기가 벌써 하늘을 찌르고 있답니다. 어떤 물건이 오고갈지는 예상이 되시죠?」
헷갈리긴 했지만 감이 잡혀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듣지 않아도 부부관계를 다채롭게 해주는 물건이나 사람을 판매하는 곳일 거란 예상이 갔다.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황녀가 싱긋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일단 초대장이 있으면 경매장에선 익명성을 보장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콘셉트가 부부이니, 반드시 부부의 형태로 참가해야 할 거예요.」
‘부부라니. 용사들이랑 짝지어서 부부인 척 경매에 참가하란 말이야?’
제국은 동성애를 허용하지 않았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사랑과 증오의 신 헬리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랑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이성애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부부 또한 여성과 남성의 구성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용사들은 나 빼고 전부 남자다. 벌써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아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초대장과 함께 스라일리 경매장에 관한 정보를 패밀리어로 보낼게요. 평범한 경매장이 아니니, 사전에 숙지해둬야 하는 게 있을 거예요.」
“평범한 경매장이 아니라고요?”
「놀이장이에요. 경매도 할 수 있는.」
“부부 콘셉트의 경매장에서 대체 무슨 놀이를…….”
나는 질문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황녀가 패닉에 빠진 내 얼굴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곧 용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만 전신을 끊을게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시길.」
“잠……!”
다다나의 안부를 물으려고 했는데 전신이 끊겨버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기회는 앞으로 많이 있다고 생각하며 화를 다스렸다.
‘다다나가 죽었다고 믿었을 때보단 나은 상황이야.’
스스로를 위로하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동생을 찾아가기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었지만,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히니 심정이 착잡했다.
‘부부라니.’
한참 뒤, 우리는 아누비르의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아직 내 환영마법 반지가 완성되지 않은 탓에 용사들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할 때면 이토스가 특별히 다이닝룸을 내어주곤 했다.
나는 요리사가 신선한 야채를 엄선하여 만들어준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자. 내가 부인이 되고 첼러스랑 아다르가 내 남편이 되는 거야.”
순간 아다르가 물을 뿜었다. 진짜 있는 힘을 다해 내 온몸에다가 뿜었다. 얼이 나가서 그를 쳐다봤다. 제가 생각해도 민망한지 아다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젠장, 무슨 짓이야?”
할릭이 낮게 욕을 중얼거리며 내 얼굴과 목을 손수건으로 닦아주기 시작했다. 나는 새된 목소리로 아다르에게 일갈했다.
“너 미쳤어?”
“아, 큽. 크흠, 미안. 너무 놀라서.”
“아무리 더워도 이런 식의 물세례는 싫거든?”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아다르가 민망해하다가 돌연 적반하장으로 대들었다.
“아, 그러게 왜 말도 안 되는 소릴 해!”
“내가 뭘 어쨌다고?”
나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럼 여기서 뭘 어떻게 할 건데? 네가 거울 뚜껑을 힘으로 열기라도 할 거야?”
“그래! 그러고 말지!”
나는 끌끌끌 혀를 찼다.
“제정신이 아니구만.”
“제정신이 아닌 건 너도 마찬가지야. 진짜 거기에 갈 거야? 노예도 파는 경매장인데?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거길 가.”
나는 심드렁하게 턱을 괴었다. 아다르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친다.
그러자 동의하듯 용사들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거울을 해제해보자, 첼러스의 검기로 뚜껑만 도려내보자, 별 참신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나는 인내심 있게 그 소릴 듣고 있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힘껏 포크를 내려놓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성 수인족의 힘은 우람한 남성의 힘과 맞먹었다.
탕―!
테이블에 검이 꽂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심각하게 해결방법을 찾던 용사들이 깜짝 놀라 날 바라봤다.
“다들, 조용히 좀, 먹지?”
한계치에 다다른 내 분노를 느낀 용사들이 다행히도 입을 닥쳐주었다.
나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멈추었던 식사를 재개했다. 용사들은 내 눈치를 보며 음식을 먹으면서도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날 떨어트려놓고 가겠단 의지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상황은 황녀가 보낸 편지를 용사들이 전부 읽고 난 후로 더욱 심각해졌다. 스라일리 경매가 귀족들에게 어떤 놀이장인지, 무슨 물건들이 오고가는지 자세히 적힌 편지였다.
놀이, 좋지. 문제는 그 놀이가 지나치게 불건전하다는 점이었다.
현재 제국에는 불법 인신매매단이 판을 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어린아이가 납치되었으며, 제국의 상비군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흑사회의 몸뚱이는 불어날 대로 불어나 수도에선 상인들이 그들 손을 거치지 않고선 장사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흑사회의 간부들과 단골손님들이 참석하는 파티였다. 위험할뿐더러, 인신매매를 담당하는 간부들이 참여해서 온갖 더러운 유흥거리가 만연했다.
그냥 가서 구경만 하고 오는 게 아니다. 우리는 파티의 완벽한 일원이 되어 연기를 해야 했다. 당연히 용사들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분하지만, 나도 퍽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지 않으면 그 역할을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어차피 선택권 따위 없잖아.’
으르렁거리는 용사들 사이에 끼어서 괜히 정신만 사나울 뿐이었다. 심지어 용사들끼리도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 타협안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양 인형에 카카나를 담아서 데리고 가는 건 어때? 고고지성인가? 그 정령술을 이용해서 말이야. 그럼 몸은 안전할 거 아니야.”
“인형의 몸으로 거울을 사용할 수 있을까? 이블라를 고용하지 못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잖아. 거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카카나뿐이어서.”
아다르와 할릭이 말을 주고받자, 아르모어가 고개를 저었다.
“인형이 다쳐도 카카나의 정신에 타격이 가니, 고려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럼 기각.”
“카카나를 다치게 할 순 없지.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그런 방법이 있긴 해?”
용사들이 다시금 그 안건에 대해서 열을 올릴 기미를 보이자, 결국 나는 나서서 그들을 내 방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소리쳤다.
“난 갈 거야. 인형이 되지도 않을 거고, 남장을 하지도 않을 거고, 거울을 해제하도록 넘겨주지도 않을 거니까 전부 닥쳐!”
아다르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짜 가서 연기를 하겠다는 거야?”
나는 최대한 달래는 어조로 아다르를 설득했다.
“말이 놀이지 참여하는 건 자유라잖아. 물건을 적당히 사고 방에 틀어박히면 돼!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진짜 거기서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다르가 기가 막힌단 얼굴로 물었다. 그는 그게 절대 불가능하리라 믿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 중 어둠의 세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다르였다. 그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아다르가 절절 들끓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인간들이 너를 가만히 내버려둘 것 같아? 같이 놀자고 하면 어쩔 거야?”
“거절하면 되지.”
“거절도 한두 번이야. 스라일리 경매는 처음부터 유흥을 즐길 목적으로 가는 곳이라고. 동떨어진 행동을 하면 반드시 눈에 띄게 되어 있어.”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용사들 중에서 가장 반대 의견이 강했던 아다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진짜 할 수 있을까.’
속으로 생각하며 막막함을 억누르는 사이, 스노아가 입을 열었다.
“도박이든 뭐든, 스라일리에 참여한 귀족들과 어울려 놀아야 한다는 게 가장 문제인 건가요?”
아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놀이의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참여’를 해야 해.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거야. 감당할 수 있겠어?”
나도 모르게 으으, 신음하며 진저리를 쳤다. 아다르가 그것 보라며 코웃음을 친다. 습관적으로 미간을 문지르던 스노아가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더니 이윽고 털어놓았다.
“그러면 함께 유흥을 즐길 부부가 있으면 해결되는 일 아닌가요?”
“무슨 소리야?”
“참여하고 있다는 티만 내면 되는 거잖아요.”
“그럴 부부가 없다는 게 문제지.”
아다르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지적했다. 스노아가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카카나, 첼러스, 아다르 이렇게 세 명. 그리고 저, 할릭, 아르모어가 가면 되죠.”
아다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국은 동성 부부는 허용 안 되는 거 알잖아. 한 명은 여자여야…….”
아다르가 제 눈을 의심하는 얼굴로 스노아를 바라보았다.
“설마 너?”
“제가 여장하면 되죠.”
스노아가 정말 싫다는 듯이 얘기했다. 아다르는 순간 혹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실망한 눈을 했다.
“하지만 초대장은 하나뿐이야.”
“제가 구하면 돼요.”
“무슨 수로.”
스노아가 제 품에서 작은 은패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마탑의 마법사임을 인증하는 패였다. 나무패, 동패, 은패, 금패 순이었으므로 은패면 상당히 귀중한 사람을 뜻했다. 마탑의 돈을 끌어다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든 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필요하면 현자와 마탑주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초대장을 사면 되죠.”
“누구한테?”
“뒷세계에서 가장 잘 통하는 건 돈이잖아요. 황녀처럼 황실에서 감시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정보길드를 이용하겠다?”
“정보길드에 압박을 넣어서 제가 샀다는 걸 발설하지 못하게 입막음할 수도 있어요. 마탑은 힘이 무척 세거든요.”
“상상을 초월하긴 해.”
아다르가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그도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안심거리가 생긴 것이다.
“뭐야. 그러면 확정인 거야?”
할릭이 불퉁하게 말했다. 아다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첼러스랑 네가 카카나 남편이 되는 거 말이야. 나도 괜찮잖아.”
“꿈도 꾸지 말아요, 할릭.”
스노아가 냉정한 얼굴로 그를 뜯어말렸다.
“당신은 용병으로 살아왔어요. 남편 연기를 잘할 자신 있어요?”
“…….”
“첼러스는 귀족의 느낌을 살릴 수 있고, 아다르는 뒷세계를 잘 알아요. 그들과 함께하는 게 안전해요. 당신은 제가 통제하는 게 안전하구요.”
시무룩해진 할릭이 어깨를 늘어트리며 조용해졌다. 어찌나 서글픈 눈을 하는지 위로해주고 싶을 정도다.
침묵이 흐르자, 나는 논쟁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깨닫고 안도했다.
“뭘 안심하고 그래?”
그런데 아다르가 귀신같이 알아채고 내 태도를 지적했다.
“잠깐 안도하는 것도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그가 즉각 대답했다. 눈빛이 무시무시했다. 그가 귀족나리의 고명아들에게 붙은 성격 빡빡한 개인교사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다다음주가 경매일이니 연습할 시간도 부족해.”
“뭐, 뭘 연습해……?”
“뭘 연습하냐니.”
아다르가 기막혀하며 물었다.
“너 거기서 끈적한 부부 연기 할 수 있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애정행각을 벌이고, 돈 많은 귀족 연기 할 수 있냐고.”
절대 무리였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아다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엄포를 놓았다.
“그러니까 내일부터 특훈이야.”
“그런!”
“그럼 지금 당장 나한테 키스해볼래? 뽀뽀라도 좋아.”
네 명의 시선이 아다르와 내게 날아와 꽂혔다. 그것만으로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스라일리 경매는 불건전한 놀이를 목표로 가는 곳이기 때문에,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줄 알아야 했다. 결국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같이 눈물을 머금은 사람이 있었다. 스노아였다.
“졸지에 남편 둘을 둔 부인이 되었네요…….”
그가 끔찍하다는 듯이 마른세수를 했다. 진심으로 불쌍하게 느껴졌다.
연기를 잘하니까 미꾸라지처럼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겠지만, 앞일은 알 수 없는 법 아니겠는가.
“하아…….”
스노아가 고개를 숙인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건 할릭도 마찬가지였다. 아르모어는 이 상황 자체가 웃긴지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스노아와 할릭에게 눈물이 담긴 애도를 보냈다.
***
“가기 싫다…….”
나는 침대에 대자로 뻗은 채 칭얼거렸다.
눈을 뜨자마자 오늘이 특훈하는 날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심지어 그 특훈을 이 주나 해야 했다.
나는 선반 위에 얹어 두었던 거울을 끌어왔다. 거울에 매달려 있던 체인이 차르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코앞으로 들고 와 굳건하게 닫힌 돔 형태의 뚜껑을 구경했다. 단추를 누르자 뚜껑이 열리며 거울이 드러났다.
‘이게 다른 사람 손에 열리기만 했어도…….’
나는 혹시나 싶어 단추에서 손을 떼고 속으로 10초를 세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자동으로 뚜껑이 닫혔다.
‘어쩔 수 없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어떤 연습을 할지는 대강 예상이 되었다.
‘아마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는 것부터 시도하지 않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양치를 했다.
‘어차피 곤란하던 참이었으니, 평정심을 유지하는 연습이라고 여기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나는 굵게 땋은 머리카락을 귀족처럼 돌돌 말아 올린 뒤 차분한 디자인의 옷을 입었다. 그리고 접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첼러스와 아다르는 이미 와 있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긴장이 되었다. 뭘 할지 알고 있어서 몸이 미리 굳는 기분이었다. 아다르가 뻣뻣한 기계처럼 움직이는 날 보고 한숨을 쉬었다.
“갈 길이 멀다.”
“시끄러워. 어제 많이 걸어서 근육통이 생긴 것뿐이야.”
“예, 예, 알겠으니 이리 와서 앉으세요.”
나는 입을 삐죽이며 그가 안내한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아다르가 내 왼쪽에, 그리고 첼러스가 오른쪽에 앉는 게 아닌가. 당연히 맞은편에 앉을 줄 알았던 나는 바로 당황했다.
‘왜, 왠지 갇힌 기분인데.’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꼬챙이처럼 허리를 세웠다. 아다르가 고개를 저으며 지적했다.
“편하게 있어야지.”
“그, 그럼 좀 떨어져 봐.”
“남남처럼?”
아다르의 얼굴이 엄격해졌다.
“우린 이제 부부야, 카카나. 힘 풀어.”
나는 억지로 몸에서 힘을 뺐다. 몸이 모래사장에 밀려온 죽은 물고기처럼 생기 없이 늘어졌다. 아다르가 차마 쓴소리는 하지 못하고 성질을 억누르듯 이마를 짚었다.
“후우……. 일단 설명부터 할게.”
고개를 끄덕였다.
“첼러스는 너한테 기본적인 몸가짐을 가르칠 거야.”
“귀족들의?”
“응. 경매장에 오는 사람들이 전부 귀족인 건 아니지만, 대부분 거부들이니까. 그들의 문화를 익힐 필요가 있어.”
아다르가 테이블에 놓인 찻잔에 홍차를 따르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네 연기가 그럴싸한지 봐줄 거야. 일단 그렇게 긴장한 상태로는 아무것도 안 돼.”
아다르가 홍차를 내밀었다. 나는 얌전히 차를 받아 마시며 향을 음미했다. 얼그레이인 듯했다. 따스한 물이 배 속에 퍼지자 조금쯤 긴장이 풀어졌다.
“시간이 이 주밖에 없어서 훈련을 빡빡하게 할 거야.”
“며, 몇 시간 하는데?”
“정해진 시간은 없어. 다만 하루에 반드시 채워야 하는 목표치가 있지.”
그 말은, 그 목표를 채우지 않으면 쉬지 못한다는 뜻이 아닌가. 나는 기가 질려서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가볍게 잡았어. 벌써부터 질린 얼굴 하지 마.”
“뭔데?”
“우리랑 같이 있거나, 가벼운 스킨십을 할 때 굳지 않기.”
‘전혀 가볍지 않은데요.’
나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게 불가능하면 경매장에 가서 부부 연기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내가 울상을 하고 쳐다보자, 아다르가 최대한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너 안 잡아먹어. 걱정 말고 해봐.”
눈매가 워낙 더러워서 사나워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억지로 기운을 내보았다. 아다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우선, 손부터 잡을까?”
다소 차갑고 단단한 손이 내 손을 덮었다. 그러자 오른쪽에 앉은 첼러스도 내 손을 가져갔다. 차마 그들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양옆에서 날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멀리서 보면 우스운 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비군에 연행되는 사람도 이렇게 뻣뻣하진 않았다.
“안 되겠어!”
나는 빽 소리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붉어진 얼굴로 첼러스와 아다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 명도 아니고 남편이 두 명이나 되니 더 부담스러웠다. 두 명의 남편을 가진 부인은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는 찬물 들이켜듯 반쯤 식은 차를 식도에 들이부었다.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요구했다.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마.”
“뭐?”
“내가 리드할 테니까. 그게 편해.”
용사들이랑 있을 때 더 긴장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할지 예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태껏 그랬다. 나도 모르는 사이 빈틈을 파고들어 머리와 심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누군가 내게 파고드는 걸 허용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호락호락하게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용사들은 예외였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내 빈틈을 훅 파고 들어와서 정신을 홀라당 빼놓았다.
“연기할 부부의 설정부터 짜자는 거야?”
아다르가 내 말을 그럴싸하게 바꾸어 물었다. 나는 냉큼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적극적인 남편들이 낫지 않겠어? 안 그러면 네가 연기할 부분이 늘어날 텐데.”
“아니, 이게 나아. 너희는 먼저 날 건드리지 마. 부인에게 꽉 잡혀 사는 남편인 거지.”
내가 생각해도 기똥찬 아이디어다. 순수하게 날 위한 계산이었지만 아다르는 다르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제국의 결혼 문화에 대해 언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귀족들은 권력을 과시하거나 놀이를 즐기려고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 여럿과 결혼하기도 하니까.”
“부인 한 명에 남편이 두 명이면, 부인의 힘이 더 강하겠군요.”
첼러스가 맞장구쳤다. 아다르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얘기했다.
“너와 성격이 비슷한 인물을 연기하는 게 낫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다가 느지막하게 제안했다.
“제멋대로에 싸가지 없는 성격은 어때?”
나는 방긋 웃었다.
“싸우자는 거니?”
아다르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그런 데 가서 착하고 고분고분한 성격을 연기할 거야? 할 수 있겠어?”
“…….”
나는 진지하게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좋게 말해도 착하다고 말할 순 없는 성격이다.
‘내가 좀 드센 부분이 있긴 해…….’
애써 인정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관리했다. 평생 남들과 어울릴 일은 없겠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죽음의 숲에서 지내는 동안 성격이 꽤 제멋대로 변했다. 억눌리고 착취당한 과거를 보상받으려는 듯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막말을 했다.
다른 사람 눈에 싸가지 없게 비치는 건 당연했다. 남 눈치 안 보고 듣기 싫은 소리를 찍찍 내뱉는데 누가 좋아하겠는가. 콜리나도 내 얼굴만 보면 전신을 파르르 떨어댔다.
“제멋대로에 싸가지 없는 부인. 좋아. 그거라면 자신 있을 것 같아.”
‘연기할 필요가 없네.’
나는 반쯤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 거야?”
아다르는 이제 거의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한 번씩 쪼갤 때마다 신경줄이 팍팍 가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좀 닥치지?”
“그 느낌 좋다. 거기 가서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돼. 쉽지?”
‘저걸 진짜.’
나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억누르며 후우, 심호흡했다. 아다르가 상세한 설정을 얘기했다.
“성격이 괴팍해서 다른 사람들이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인 거야. 남편들은 거의 너의 밤시중을 드는 사람인 거지.”
그런 사람이 나라고 상상하자 절로 밥맛이 떨어졌다.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인성이 쓰레기가 된 기분이네…….”
하하, 영혼 없이 웃자 아다르가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면 남편들한테 예쁨 받는 부인이 될래?”
“아니.”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공주님 취급 받는 게 몸에 밴 부인을 연기하는 편이 훨씬 어려웠다. 갑자기 속이 니글거리는 것 같아서 차를 따라 마셨다.
“그러면 귀족이 아닌, 상단주가 되는 건 어떻습니까.”
첼러스가 제안했다. 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상단주?”
“적당히 우아한 흉내만 내면 되니 귀족을 연기하는 것보단 쉬울 겁니다.”
“그럼 나야 편하고 좋지.”
“좋아.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해보자!”
아다르가 짝,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 지금?”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털던 나는 금세 겁먹은 얼굴을 했다. 아다르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 그냥 재수 없는 애를 상상해봐. 근처에 많이 있었잖아?”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긴 했다. 나는 콜리나 살라소나를 생각하며 우웩,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 사람이 됐다고 생각해.”
상당히 어렵게 느껴졌지만 그저 막막하기만 했던 초반보다는 나았다.
“준비됐으면 우리한테 키스해 봐.”
‘처음부터 허들이 너무 높은 거 아닙니까!’
나는 영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꼭 그것까지 해야 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거지.”
“스노아는 연습 안 하잖아.”
아다르가 픽 웃었다.
“걘 지금 당장 경매장에 들어가서 키스하라고 해도 할릭의 멱살을 잡아와서 키스할 놈이야.”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타고난 연기자거든.”
나는 알렉 브래든 앞에서 내게 키스했던 스노아를 떠올렸다.
‘그때도 불량한 학생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했지.’
결국 다 내가 못나서 연습하는 거다. 투덜댈 시간에 노력이라도 하자고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구의 입술부터 공략해야 할지 마음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고 나자, 마음이 첼러스에게로 기울었다. 아다르는 눈이 무서웠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키스해도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뽀뽀할 때 눈도 안 감을 것 같아.’
내가 주춤거리며 걸어가자, 아다르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긴장한 것처럼 보여. 그곳에 오는 부인들은 키스가 인사일 텐데 이상하잖아. 인형한테 뽀뽀한다고 생각해 봐.”
나는 마른입술을 핥다가, 첼러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무리해서 당당하게 움직이기보단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었다. 그리고 얌전히 앉아 있는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고, 섬세한 햇살 같은 속눈썹이 올올이 보이는 거리까지 좁혀졌다. 문득 그가 눈을 들었다. 녹음의 빛깔이 신비롭게 감도는, 선한 하늘색 눈이 보였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까지 완벽한 천사의 외양이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나는 입을 가리고 뒤로 확 물러섰다.
“이, 이건 첼러스가 너무 잘생긴 게 문제야!”
아다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선수를 치곤 씩씩거렸다. 설상가상 얼굴이 뜨거워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창피했지만 얼굴을 가리다가 들키면 더 쪽팔릴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리드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그들이 다가오나 내가 다가가나 평정심을 잃는 건 똑같았다.
‘그래, 다 얼굴 때문이었어!’
그간 잠자리를 함께했던 남자들은 그럭저럭 훈훈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용사들처럼 독보적인 미남은 없었다.
나는 반짝이는 것을 모으는 까마귀처럼 예쁜 것에 관심이 많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얼굴을 가려 봐. 어차피 경매장 내부에선 가면을 써야 한다며.”
내가 손부채질을 하며 얘기하자, 아다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소품가방을 뒤졌다. 다행히 미리 챙겨온 가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눈과 코는 가리고 하관은 드러나는 무도회용 가면이었다. 깃과 반짝이로 장식되어 있었다.
첼러스가 그중 하나를 들어 얼굴에 썼다. 그는 하관마저 미남이었지만 화려한 가면이 얼굴을 가려주니 한결 나았다.
‘생판 모르는 남자라고 생각하자.’
스스로를 세뇌하며 첼러스의 가면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눈구멍도 막혀 있었다. 안쪽에선 바깥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천으로 가려진 듯했다. 호수빛 눈망울과 시선이 마주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밤술집에서 적당히 고른 남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억하고 있는 남자들은 몇 없었지만, 그나마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훈훈한 얼굴 몇 개가 있었다. 그들을 상상해서 첼러스의 가면 위에 덧씌웠다. 그리고 그 남자라고 생각했다. 놀랍도록 마음이 진정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꺾어서, 옅은 분홍빛이 도는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짓눌렀다. 첼러스가 뜨거운 숨을 뱉으며 내 허리에 손을 올리려 했다. 그의 굵은 손목을 꽉 그러쥐고 밑으로 내렸다. 조금이라도 허락하면 금세 평정심을 잃을 것 같았다.
특히 용사들은 짐승 같은 면이 있어서 순식간에 역전해버릴 것이다. 그러면 감당할 수 없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울어버릴지도 몰랐다.
“움직이지 마.”
나는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꾹 억누르며, 낮고 딱딱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그러자 첼러스의 목울대가 아래에서 위로 크게 움직였다. 달콤한 음식을 코앞에 두고 군침을 삼키는 것처럼.
발정기 외엔 없다시피 한 성욕이 갑자기 치솟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허벅지를 꽉 붙이고 황급히 허리를 세웠다.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촉촉하게 젖은 눈을 옆으로 굴렸다. 아다르의 눈이 날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목을 가다듬은 뒤 물었다.
“왜 그래?”
아다르가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날 더 이상 못 보겠다는 표정이다. 혹시 실수한 게 있나 싶어서 초조하게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완벽했어.”
아다르가 꽉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별안간 헛웃음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연습해야 하는 건 카카나가 아니라 우리인 것 같은데?”
“그런 것 같군요.”
첼러스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내가 너무 서툴렀어?”
혹시 내 뽀뽀가 서투른 탓에 답답해서 저러나 싶었다. 멀뚱한 눈을 하자 아다르가 아랫입술을 핥으며 한탄했다.
“저렇게 눈치 없는 것도 능력이다.”
“그러면 직접 말해주든가!”
신경질을 내자 아다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로 걸어왔다. 그리고 다과상에 놓인 쿠키 중 하나를 입에 물고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뭘 원하는 건가 싶어서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그가 손에 들린 가면을 올려 자기 얼굴을 가렸다.
‘임기응변을 보는 건가?’
미리 얘기된 상황은 아니지만 대강 감이 왔다. 나는 아다르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까치발을 들었다. 그런데 허리를 숙여 키를 맞춰주진 못할망정 피하듯이 고개를 드는 게 아닌가.
그의 날카로운 턱을 원망 어린 눈으로 쳐다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힘으로 잡아당기며 고개를 비틀었다. 목을 콱 물어버리자 그의 몸이 움칠 떨렸다.
빈틈을 노려서 더 밑으로 잡아당긴 후 입에 물려 있는 쿠키를 베어 물었다. 버터와 코코아 향이 물씬 풍겼다.
“초콜릿 맛이 나네. 달다.”
쿠키를 우물우물 씹으며 얘기하자, 별안간 아다르가 남은 쿠키를 입 안으로 삼키며 가면을 벗었다. 눈가가 기묘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혹시 아팠나?’
“미안. 내가 너무 세게 물었어?”
걱정이 되어서 목에 손을 가져다대자, 그가 황급히 내 손을 잡아채며 입술을 짓씹었다. 퍽 고통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다르?”
“아냐, 괜찮아.”
그가 고개를 저으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이 정도면 이 주 안에 어떻게든 되겠네.”
“오, 진짜? 별 거 아니네.”
나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관자놀이를 지압하던 아다르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얕보지 마. 거기랑 여기는 분위기가 달라.”
“알았어.”
“경매장에서 서로 다른 말을 하면 곤란해지니, 내일은 더 자세한 설정을 짜는 게 좋겠습니다.”
첼러스가 첨언했다.
“본인이 연기할 인물은 구체적일수록 좋으니까요.”
아다르와 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