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미래가 건넨 거울
“카카나 님의 말대로, 그게 단순히 호감인지 사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에요.”
여태 조용히 있던 작은 체구의 아이마저 끼어들어 한마디 얹었다.
“그래서 리나스가 카카나 님에게 조언을 했대요. 사귀어보면 알 수 있지 않겠느냐고요.”
“엘프도 과일을 직접 먹어보기 전까진, 자기가 단 것을 좋아하는지 신 것을 좋아하는지 모르거든요.”
그것으로 충분했다. 용사들은 카카나가 집을 따로 배정받은 이유를 깨닫고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패닉에 빠졌을 때 자주 취하는 방식이 있었다. 우선 묻어둔다. 그리고 약초로 신경을 돌린다. 감정을 억누르며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하고, 현실에 안주하려 애쓴다. 그건 여태껏 살아오면서 카카나가 취했던 생존방식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운이 나빴다. 용사들이 그 사실을 모두 알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로선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일 것이다. 엘프는 용사들과 굳이 말을 섞으려 들지 않았다. 카카나가 그만큼 털어놓았다는 것은, 용사들에게 말이 전해지지 않으리라고 은연중에 방심했기 때문이다. 엘프 아이들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건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아이들은 인간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카카나의 운이 나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사건이었다.
우선 용사들은 아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은 이유를 몰랐지만 마냥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무거운 걸음으로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아다르가 그들의 마음에 돌을 던지는 바람에 보이지 않는 파란이 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채 정리되기 전에 마음이 들켜버렸단다.
그것도 회생의 여지 없이, 분명하게.
[그냥 행복하게 해주고, 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으면 되잖아.]
아다르의 말대로 평범한 인간처럼,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고백하고, 차이면 좌절하고, 잘되면 사랑을 나누고.
그러나 그들은 초월자다. 평범한 사람은 좌절 후에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초월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시간의 영향권에서 빗겨난 곳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시간대의 사건들은 그들을 둔중하게 치고 지나갈 뿐, 기억에 남을 만한 자극은 주지 못한다. 반대로 그들을 한 번 자극한 것들은 평생 의미가 퇴색되지 않았다. 언제나, 몇 년이 흘러도, 아니 몇백 년이 흘러도 마음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었다.
새로운 자극이 덧씌워지지 않는 이상,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만으론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분노도, 증오도…… 그리고 사랑도.
카카나가 그들을 거부하면, 그녀를 영원 동안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죽고 나서도 그리움이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받아들여도 문제다. 카카나가 중간에 마음이 바뀌더라도, 사고로 죽더라도, 그들은 변하지 않는다. 막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홀로 영원히 불타오르게 된다.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고문인 감정이었다.
그들은 초월자의 사랑이 그토록 무겁다는 것을 카카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구애하기 시작하면, 숨기기 힘들 것 같았다. 숨길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부탁인데, 너희는 그 신념을 변치 말고 카카나한테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주라.”
문득, 아다르가 비뚜름하게 웃는 얼굴로 선언했다. 모두의 시선이 아다르에게 향했다.
그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경쟁자는 없길 바라거든.”
“어떻게 할 생각인 겁니까.”
첼러스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긴? 전력으로 꼬실 거야.”
“아다르.”
첼러스가 경고했다. 아다르가 도전적인 눈으로 첼러스를 응시했다.
“왜? 내가 억지로 사귀기라도 한대?”
“…….”
“미래가 어떻게 될진 알 수 없는 거 아니야?”
아다르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카카나의 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우리를 받아들이거나 마는 건 카카나의 선택이고 권한이야. 내가 뭐라고 걔의 마음을 예상하고, 미리 사서 걱정하고 포기해야 하는데? 나라면 그게 더 불쾌해.”
첼러스가 입을 다물었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할릭의 주황색 눈이 아다르와 부딪혔다. 할릭이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아다르가 픽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꼬실 건데?”
할릭이 넌지시 질문하며 눈가를 휘었다. 평소에 짓곤 하던, 순박한 눈웃음이다.
‘쟤도 은근히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아다르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생각했다.
‘겉보기엔 단순한데.’
“어떻게 꼬시긴. 일단 도망가지 못하도록, 은근히 접근해야지.”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에게 푹 빠지게 만든 다음 구애하려고.”
“자신감이 넘치시는구만.”
“자신감이 아니야. 각오지.”
아다르가 그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나 꽤 필사적이거든. 그러니까 너희들은 머저리처럼 구경이나 하고 있어. 천년 후에도 그렇게 여유로운 얼굴들인지 보자. 구애할 걸 그랬다고 질질 짜지나 마.”
“왜 그런 말을 하죠?”
스노아가 싸늘하게 물었다.
“저라면 아무 말 없이 은밀하게 행동할 것 같은데요. 당신이 정말 경쟁자가 없길 바란다면요.”
“정말 너답다, 스노아.”
아다르가 방긋 웃는 얼굴로 그를 비꼬았다.
“하지만 생각해봐. 결국 살아남는 건 너희뿐이잖아?”
아다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이다.
“앞으로 영원히 볼 얼굴들이 죽상이어 봐.”
“당신은 어차피 카카나가 죽으면 따라 죽는 거 아니었나요?”
“이거 왜 이래. 끊어질 인연이니 쌩 까라는 거야? 내가 그런 인간이었으면 카카나한테 구애하지도 않아.”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끝나버릴 사랑이잖아. 내겐 영원하겠지만.”
“…….”
“초월자는 초월자만 이해할 수 있어. 영원을 함께할 친구가 해주는, 마지막 조언이라 생각해.”
그렇게 얘기한 아다르가 자리에서 휙 사라져버렸다. 어디로 갔을지는 뻔했다. 용사들이 눈치를 보듯 서로의 얼굴을 흘끗거렸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나도 아다르랑 같은 입장이어서 말이야.”
능청스럽게 얘기한 할릭이 손을 살살 흔들면서 자리를 떴다. 가만히 서서 머리를 굴려보던 스노아가 문득 웃으며 말했다.
“저만 손해를 볼 순 없죠.”
그러자 집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르모어와 첼러스 말고 아무도 없게 되었다. 첼러스가 움켜쥔 주먹을 이마에 맞댄 채 움직이지 않자, 아르모어가 물었다.
“가지 않는 건가?”
“저는 여태 제 신념을 지켜오며 살았습니다.”
첼러스가 침울한 어조로 말문을 텄다.
“그랬지.”
“그런데 이젠 흔들립니다.”
첼러스가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할 뿐입니다.”
그러자 아르모어가 흐릿하게 웃었다.
“그대는 나약해진 게 아니다.”
첼러스의 울렁이는 호수빛 눈망울이 아르모어에게로 굴러갔다. 초록빛이 감도는 하늘색 눈망울이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불꽃의 춤사위를 닮았다. 순수하게 타오르는, 첼러스의 푸른 불꽃을 응시한 아르모어가 나른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저, 처음 경험해보는 것뿐이지.”
“무엇을?”
“갈망을.”
아르모어가 소파에 기댔던 손을 들어 붉은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 누군가를 상상하듯, 탁하게 물든 핏빛 눈이 멀찍한 곳에 시선을 던졌다.
“그대보다 오래 산 인생이니, 조언을 해줄까.”
“…….”
“그건 가둘 수 없는 감정이다, 첼러스. 어리석은 짓 말아라.”
아르모어가 첼러스를 지긋이 들여다보았다.
“그러니 음미하는 게 좋아.”
첼러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엇을 말입니까?”
“드래곤들은 수집욕이 대단하지. 모으고, 레어에 쌓아두고, 음미한다.”
“…….”
“개체마다 집착하는 게 다르지만, 그것을 거스르는 드래곤은 없다. 왜 그런 것 같으냐?”
첼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르모어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읊조렸다.
“그것마저 지우면 죽은 삶이 되기 때문이다. 육체의 죽음만이 죽음이 아니듯.”
아르모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구한 삶의 피로가 저변에 짙게 깔려 있는 한숨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흐려지지 않는 감정. 지금 그대를 사로잡은 감정이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 같으냐?”
“…….”
“그건 그 감정이 그대의 핵심이 된다는 뜻이다.”
아르모어가 첼러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대의 지금과, 미래와, 영원을 사로잡을 감정을 거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주먹 쥔 첼러스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미세하게 인상을 찡그린 아르모어가 눈을 감았다. 어쩐지 후회가 느껴지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대는, 아니 우리는 사람이 아닌 물건에 집착했어야 해.”
“드래곤처럼 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되돌리거나 거부하기엔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물건은 사라지지 않는다. 드래곤들은 먼 조상으로부터, 사라지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법을 미리 배웠을지도 모른다. 퀄리티미엄의 드래곤마저 집착하는 건 결계와 엘프라는 종족이지, 특정 엘프 한 명이 아니다.
그건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핵심 감정을 빼앗긴 채 긴 삶을 이겨낼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 초월자에게 그런 본능 따윈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아르모어가 생각했다.
‘나 또한 이미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으니.’
“그러니, 음미하는 게 좋아.”
아르모어가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뜨며 말했다.
“물론, 쟁취하는 것이 가장 좋고.”
죽어 없어질 생명을 사랑하고 말았다. 끝은 정해져 있다. 선택권은 없다.
첼러스도 마침내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아르모어는 가지 않는 겁니까.”
“그간 피해왔던 사내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놀라지 않겠느냐.”
아르모어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대들에게서 도망치고 나면, 그때 접근해보도록 하지.”
첼러스는 그만 짧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한창 연구에 매진하고 있던 참이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저녁 8시였다. 이 시간에 집을 방문하는 엘프는 없어서 고개를 기울였다. 기분 탓인지 바깥에 사람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네 명의 용사들이 눈에 불을 켠 채 현관에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뭐지?’
갑자기 전신으로 소름이 돋아났다. 혹시 내가 잘못 봤나 싶어 다시 문을 열었다. 착각이 아니다. 다들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다.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였다.
이번엔 할릭이 문을 잡아 닫지 못하게 막기까지 했다.
‘왠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시감을 느끼며 억지웃음을 짓자, 아다르가 불만투성이인 얼굴로 투덜댔다.
“너희들이 이렇게 쉽게 태도를 바꿀 정도로 줏대 없는 놈들인 줄 알았으면, 조언이고 뭐고 하지 않는 건데.”
“왜 그러시죠?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나요?”
스노아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막상 겪으니까 기분이 영 별로네.”
아다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당최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약간 기가 죽어서 물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그렇게…….”
강렬한 눈을 하고.
뒷말은 꿀꺽 삼켰다.
‘최근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고민해보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내가 당황한 걸 알았는지, 스노아가 앞장서서 요청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아, 음……. 지금은 연구 중이라…….”
‘일단 보내자.’
집에 틀어박혀 연구만 한 건 재미 때문이기도 했지만, 용사들을 피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마음이 소란스러워서 태연한 척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내가 거절할 구실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아챈 아다르가 다짜고짜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다르가 씩 웃었다.
“그러지 말고 들어가게 해줘. 너 지금 얼굴 말이 아니야. 잠깐은 쉬는 게 어때?”
“나는…….”
“오늘 몇 시간 동안 연구했어?”
단언컨대 좋지 않은 레퍼토리다.
그는 내가 연구에 빠지면 끼니를 거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5분도 안 되어서 오늘 쫄쫄 굶었단 사실을 들킬 거다. 그러면 잔소리 폭탄을 맞을 가능성이 컸다.
‘아다르는 화나면 집요하지.’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일단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켰다.
용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왔다. 기분 탓인지, 대답하기 싫어서라도 초대할 걸 미리 알고 한 질문 같았다.
‘수상하단 말이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침에 약사 엘프가 놓고 깐 레몬청의 뚜껑을 땄다. 달달하고 새콤한 향기가 나자, 신경이 조금 누그러졌다. 청을 두 숟갈씩 떠서 유리잔에 덜어낸 뒤 찬물을 부었다.
네 개의 잔을 쟁반에 얹고 소파에 앉은 용사들에게 걸어갔다. 그들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집 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방이 구별되어 있지 않아서 눈만 돌리면 실험도구가 훤히 보였다. 즐비한 약초들이 새삼 신기한 듯했다.
나는 용사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생활공간보다 실험실에 가까워 보이긴 하네.’
아다르가 유리잔을 쥐려고 상체를 숙이는 순간,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누가 들어도 이틀은 굶은 것처럼 우렁찬 소리다. 아다르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아, 이런.’
이 무슨 신의 농간인가. 삐그덕거리며 몸을 돌리려다 아다르에게 손목을 잡혔다. 그가 가히 으르렁거린다 해도 무방할 음성으로 물었다.
“너 오늘 끼니 건너뛰었지?”
아,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현관에서 뻗대볼걸.’
“하하, 연구에 집중하다 보니.”
뒤통수를 긁적이며 별것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아다르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역시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인간이 아니다.
“설마 점심도 안 먹었어?”
“아니야, 먹었어.”
“거짓말하지 말지?”
‘네가 무슨 진실을 꿰뚫어보는 엘프니?’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눈을 굴렸다. 마지막 질문만은 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아다르는 꼼꼼한 녀석이었다.
“아침도 안 먹었고?”
나는 결국 ‘뭐 어쩌라고’ 상태가 되었다. 그의 손을 팍 내치면서 팔짱을 끼고 뻔뻔하게 나왔다.
“아, 내가 밥을 먹든 말든 댁이 무슨 상관인데 이래?”
“상관 많지. 영양실조로 비실대는 네 몸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요리를 갖다 바쳤는지 알아?”
그렇게 얘기하면 또 할 말이 없지.
나는 시무룩해져서 팔짱을 풀었다. 아다르가 내 입맛을 돋운다고 메뉴 개발까지 했던 걸 옆에서 지켜봐온 탓이다.
“근데 이렇게 다시 망가뜨리고 있는 걸 보면 속이 터지겠어, 안 터지겠어?”
“안 터져.”
입술을 삐죽이며 청개구리처럼 답했다. 아다르가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물었다.
“내가 마나가 다시 꼬여서 돌아와도 그런 소리 할 수 있어?”
“아, 거참. 그냥 좀 넘어가자.”
“절대 그럴 순 없지.”
피곤한 어조로 중얼거린 아다르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리를 할 요량이었다.
“이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그거 참 유감이네요.”
스노아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얘기했다. 이상하게도 아다르는 그 말에 되레 열이 받은 듯했다.
“너 진짜 음흉해, 알지?”
“심술부리지 말아요, 아다르. 카카나가 오해하겠어요.”
아다르가 기가 차다는 듯 팽,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곧 체념하고 부엌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간단하게 요깃거리 만들어 올 테니까 먹어. 귀찮단 소리 하지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덕으로 향하면서 아다르가 용사들을 한 번씩 째려보았다. 뭐가 그렇게 미운지 시선이 제법 뾰족했다.
“혹시 싸웠어?”
용사들에게 묻자, 할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워낙 천연덕스러운 인간이라 의심이 되었지만, 일단 넘어갔다.
‘내가 캐묻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여긴 갑자기 웬일이야?”
나는 레몬차를 들이켜며 물었다.
“보고 싶어서요.”
“컥!”
목 막힌 소리를 내자 첼러스가 등을 두드려줬다. 하마터면 차가 기도로 넘어갈 뻔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심호흡했다.
‘갑자기 왜 저러지?’
꼭 내가 마시고 있는 과일청 같은 목소리 아닌가. 달달하고, 끈적끈적하게 귓가에 감기는.
나는 지진이 일어난 눈으로 스노아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굴에 대충 면역이 된 내가 잠시 넋이 나갈 정도로 고운 미소였다. 정신이 혼미해진 사람처럼 할릭이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야, 스노아. 반칙이잖아…….”
스노아가 그의 참담한 어조에도 꽃 같은 미소를 유지하며 얘기했다.
“무슨 말씀이실까요?”
첼러스가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얘기했다.
“우선 머리에 붙은 이파리를 떼야 할 것 같습니다, 카카나.”
다분히 내 주의를 돌리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살짝 머리가 아파지려고 했으므로, 나는 기꺼이 그의 주의전환에 동참했다.
“그래? 어디?”
“제가 떼 드리겠습니다.”
첼러스가 머리 이곳저곳에 붙어 있던 약초들을 떼 주기 시작했다. 잎자루에 꺼슬꺼슬한 가시가 돋아 있어 모르는 사이 많이 붙은 모양이었다.
“치료는 잘 되어가고 있어?”
첼러스의 손을 눈으로 끈질기게 쫓던 할릭이 물었다.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약초만으론 안 돼서 침술을 병행해야 하는데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야.”
“예를 들면?”
“일단, 바늘이 안 들어.”
할릭이 눈썹을 구겼다. 나는 검지를 바늘처럼 똑바로 세운 뒤 손등을 찌르는 시늉을 하며 설명했다.
“피부에 안 꽂힌다고. 그렇게 단단한 비늘은 처음 봐.”
“그렇겠네요. 드래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건 검기 정도일 테니까요.”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는 뒤늦게 말뜻을 이해하고 눈을 치켜떴다.
“뭐, 검기?!”
이게 웬 날벼락인가. 그러면 산 넘어 산이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스러워 죽겠는데, 검기라니…….’
아아, 신음하며 머리를 움켜쥐자 스노아가 난감한 낯을 했다.
“이런, 모르셨나요?”
“내가 무슨 수로 알겠어? 너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수인족이었다고!”
나는 뒤늦게 말을 조금 정정했다.
“약초를 잘 다룰 줄 아는 수인족, 큼큼.”
민망하게 눈을 굴리자 스노아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문제는 그것뿐인가요?”
“또 있지. 드래곤은 마나통이 엄청 큰가 봐.”
“상상을 초월하죠.”
“몸 어디에 대든 마나가 있다면서 바늘이 울리더라.”
“그러면 곤란한가요?”
나는 착잡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당연하지. 섬세한 작업이 불가능하잖아. 몸 전체가 마나석 같으니까 어디를 찔러야 할지 감이 안 와.”
‘전에는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듯이 마나혈을 찾을 수 있었는데…….’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이젠 손을 대봐도 깜깜한 암흑뿐이야. 원하는 마나혈을 찾을 수 없으니 침 치료도 못 하고…….”
“약물은 문제가 없나요?”
“응. 제법 순조롭게 해결되는 중이야.”
그간 엘프들이 만든 약이 드래곤에게 먹히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은 재료 중 하나로 정화초를 사용했었다. 정화초가 노폐물이나 오염물을 없애는 데 좋은 약초긴 했다. 그러나 마나형태의 감염엔 아무런 효능이 없었다.
엘프 약사들은 그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적합한 대체 재료를 찾고 있었는데, 최근 꽤 괜찮은 것을 발견했다. 발광박쥐의 날개와 순결한 아쿠아마린이었다.
“순결한 아쿠아마린이 뭔가요?”
이름이 제법 흥미롭게 들렸는지, 스노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눈을 반짝 빛냈다.
“궁금해?”
왠지 할릭이 옆에서 스노아를 말리려는 듯이 입을 열었지만, 그가 더 빨랐다.
“궁금하네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퀄리티미엄에만 있는 보석광물이야. 토양에 섞인 엘프의 마나가 축적된 보석이지. 한번 볼래? 엄청 예쁘거든. 너희도 보면 반하고 말 거야! 분명해!”
나는 뒤로 뛰어가서 바구니에 한가득 들어 있는 아쿠아마린을 들어 보였다. 세공을 하기 전에는 울퉁불퉁한 돌 모양을 한 평범한 아쿠아마린과 달리, 이건 원석부터 물방울 모양이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들어 올리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물방울 모양의 아쿠아마린이 단면마다 반짝이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소중한 약재였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와 뽀뽀를 퍼부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이 간질간질한 마음이 풀렸다.
“약재를 저렇게 사랑해서야, 원.”
할릭이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구니 안의 약재들에도 행복하게 얼굴을 비볐다. 어차피 정화수로 깨끗이 닦은 후 사용하기 때문에, 지금은 이렇게 마음껏 만져도 괜찮았다.
“으흐흐흐흐…….”
내가 거의 어린 노예를 사들이는 변태 귀족만큼 음흉한 웃음소릴 흘리고 있자, 스노아가 할릭에게 말을 걸었다.
“저런 모습도 귀엽지 않나요?”
할릭이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미 아무 대화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바구니를 소중히 자리에 돌려놓은 후 소파로 돌아오며 다다다다 말을 이었다.
“어때? 너무 예쁘지 않아? 난 저렇게 귀여운 약재는 오랜만이야!”
“그러네요, 귀여워요.”
“사랑스럽군요.”
스노아와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시선이 약재가 아니라 내게 향해 있었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미적 감각이 둔감한 용사들마저 인정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역시 퀄리티미엄은 최고야!’
“귀엽네.”
할릭마저 큭큭 웃으며 얘기했다. 나는 참을 수 없으리만치 뿌듯해지고 말았다.
“이뿐만이 아니야. 뛰어난 정화 효과도 가지고 있어. 다루기 워낙 까다로워서 엘프들은 여태 사용을 안 하고 있었대. 어떻게 그럴 수가.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 않아? 응?”
“사용을 안 하다니요?”
“말 그대로야! 자칫 잘못했다간 폭발한다지 뭐야!”
“예……?”
스노아가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했다. 미소 짓고 있던 용사들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그들의 시선이 순결한 아쿠아마린이 담긴 바구니로 스르르 굴러갔다.
할릭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폭발한다니……?”
제발 자기가 잘못 들었으면 하는 어조였다. 나는 ‘응!’ 대답하며 해맑게 웃었다.
“저 작은 원석 하나가 집 한 채도 날려버린다지 뭐야? 세상에, 우리 순결한 아쿠아마린은 터프하기도 하지!”
“…….”
“마나가 아슬아슬하게 찬 마나석 같은 건가 봐. 신기하지?”
“지금은 괜찮은 건가요?”
스노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자장노래를 만들어서 하루 담가두었거든.”
“자장노래는 뭔가요?”
“약물. 순결한 아쿠아마린 진정제.”
“원래 있는 약물인가요?”
나는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아니? 얼마 전에 만들었는데?”
용사들이 잠시 침묵했다. 뒤늦게 스노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엘프들은 여태 사용하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응. 발견한 지 몇십 년은 됐다는데 워낙 까다로운 애여서 건드리기 좀 그랬나 봐.”
“…….”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야기가 더 있어! 뛰어난 정화제를 만들 수 있게 됐는데, 문제가 또 생겼지 뭐야.”
나는 조금쯤 시무룩해졌다.
“이게 엘프의 마나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마족의 마나와 닿으면 금방 소멸해버리는 거 있지?”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땐 언제고 다시 신이 나서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래서 빻은 발광박쥐 날개가 필요해졌단 말씀!”
이 부분부터는 약사 엘프들도 이해하기 어려워서 포기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용사들이 궁금해할 수도 있잖아!’
약초에 관한 주제는 언제 얘기해도 재밌고 신났다. 나는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말을 늘어놓았다.
“발광박쥐 날개는 다른 약재의 효능을 변질시키는 특성이 있어. 그래서 인기가 없지만,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양을 잘 조절하면 유용하게 쓸 수 있거든.”
“그렇군요.”
“그래서 연구를 좀 해봤는데, 다행히 꽤 그럴싸한 효능이 만들어졌지 뭐야.”
나는 선심 쓰듯이 말했다.
“방법이 궁금하면 알려줄까? 엘프들이 너무 어렵다고 학을 떼긴 했지만…….”
“아니요, 괜찮습니다.”
첼러스가 매우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은근히 질척이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용사들은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대로 결론만 설명해주기로 했다.
“순결한 아쿠아마린의 효능을 변질시켜서, 상쇄되지 않도록 바꾸는 데 성공했어. 마족의 병원마나를 없애진 못하지만 포위하듯 한곳으로 몰아낼 수 있게 된 거야.”
남은 것은 적합한 배율을 찾아내는 일뿐이었다. 그러면 드래곤의 몸을 돌아다니는 골칫덩어리들을 한곳으로 긁어모을 수 있었다. 그 다음 침술로 쭉 뽑아버리면 된다.
‘그 침술이 안 돼서 문제지만.’
나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서 관자놀이를 짚었다. 마무리에서 막혀버리니 김이 샜다.
내 표정이 우울해지자, 첼러스가 걱정하는 눈을 했다.
“왜 그러십니까?”
나는 약초에 대해 얘기했을 때와는 판이하게 어두워진 목소리로 문제점을 설명했다. 그러자 빠르게 핵심을 짚어낸 스노아가 달래는 투로 말했다.
“그러면 마나를 배우는 수밖에 없겠네요. 마나혈을 찾아내야 하니까요.”
나는 체념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해두는데, 스노아 넌 대마법사야. 마나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과연 드래곤이 죽기 전에 마나를 배울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카카나는 아닌가요?”
스노아가 구석에서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폭시를 턱으로 가리켰다.
“신수의 계승자가 되셨잖아요?”
“그게 대마법사랑 같아?”
“다르지만, 같을 수도 있죠.”
그가 내 손을 위로하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문득 내 몸을 파고들던 스노아의 차가운 마나가 떠올랐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투명한 물빛 눈망울을 들여다보았다.
“어차피 배우셔야 하니, 이참에 시도해 봐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드래곤의 상태가 급속도로 안 좋아지고 있었다. 엘프들이 말하길, 우리가 퀄리티미엄에 진입했을 무렵에 이미 한계였다고 했다.
‘스노아의 말이 맞아.’
나는 비관하길 관두고 허리를 폈다.
“빨리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편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뭔데?”
스노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카카나의 몸에 마나를 주입했을 때 생각나나요?”
자동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뮤나스에서 네가 했던 거?”
“네.”
스노아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했다.
“그걸 하는 거예요.”
장난으로라도 좋아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거 느낌 이상해서 싫은데……. 뭐가 도움이 되는데?”
“마나에 까막눈인 사람도 불쾌함을 느낄 정도로 직접적이잖아요.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에요.”
이해가 되긴 했다. 지금도 상상하면 그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하기 싫은 건 둘째 치고, 그걸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용사들 앞에서 울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창피한데…….’
약초만 다루고 싶은 게 내 욕심이었고, 하물며 마나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그걸 소름끼치는 작업을 병행하며 배워야 한다니 정말이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겠는가. 나는 어리광 피우길 그만두었다.
“그래, 해보자.”
아다르의 음식이 완성되었다.
그가 테이블에 요리를 세팅해주자, 나는 무념무상으로 입에 야채를 욱여넣었다. 아다르표 샐러드는 고급 레스토랑의 셰프 추천메뉴보다 맛있었다.
“그러면 내일부터 시작할까요?”
나는 열심히 양상추를 씹어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도와드리는 게 좋겠어요?”
나는 스노아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당연히 네가 도와주는 거 아니었어?”
“저도 그게 좋지만, 제 마나는 차갑잖아요.”
“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에요.”
스노아가 할릭을 가리켰다.
“할릭의 마나는 뜨거운 편이에요. 마나의 성격이 달라서 생기는 차이점인데,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알았어.”
나는 주스를 들이켜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이게 궁금해서 굳이 오늘 방문한 거였어?”
“스노아가 말했잖아. 너 보고 싶어서 온 거라고.”
아다르가 내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며 말했다. 나는 반으로 잘린 방울토마토를 질겅질겅 씹으며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용사들에게 둘러싸이는 건 늘 있는 일이다.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도, 이렇듯 소중하게 보살핌을 받는 것도.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낯설었다. 단순히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알게 되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행동으로 마음을 표현했지, 이렇게 직접적인 말로 표현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이젠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것 같은…….’
그렇게 생각하자 얼굴이 뜨끈해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사들이 의아한 낯을 무시하고 그릇을 싱크대에 갖다놓는 척 벌게진 얼굴을 감췄다.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어색하고 긴장되었다.
“실없는 소리 말고 이제 그만 돌아가.”
나는 손수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다행히 용사들은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왔다. 그것마저 이상하게 보였다.
‘예전이라면 더 있겠다고 했을 텐데?’
순순하게 굴자 더 의심이 되었다. 내 불편한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나는 용사들과의 거리가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재보았다. 육체적인 거리는 충분했으나, 심리적인 거리도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용사들이 들어가 보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대답 대신 문을 쾅 닫아버렸다.
***
내가 마나를 다시 느낄 수 있게 되기까지는, 놀랍게도,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첼러스의 도움으로 이룰 수 있는 쾌거였다.
그는 마나를 실처럼 가늘게 뽑아서 내 몸에 주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덕분에 동통과 불쾌감을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 여기엔 햇살처럼 따스한 첼러스의 마나도 도움이 되었다.
스노아는 차갑고, 할릭은 사포처럼 거칠고 뜨거우며, 아다르는 베일 것처럼 날카롭고, 아르모어는 짜릿했으므로 한 줄기 빛과 같은 마나가 아닐 수 없었다.
“마나마다 느낌이 다른 이유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누워 있는 내게 첼러스가 물을 건네며 말했다. 아무리 햇살 같은 마나래도 몸을 비집고 들어오는 건 견디기 힘든 감각이어서 힘을 줬기 때문이다. 오래 버텼던 탓에 진이 빠졌다.
“성격이라니?”
나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물었다. 첼러스가 근처에 와 앉으며 말했다.
“사람도 각자 상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마나도 그렇습니다.”
“마나는 공기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정령처럼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고?”
“카카나의 말대로 본래는 공기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흡수된 후로는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왜?”
“마나가 주인으로 인해 물들기 때문입니다.”
신기한 얘기였다.
날카로운 느낌을 내는 아다르의 마나를 상상하니 그의 말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나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의 온도나 감촉 같은 걸 성격이라고 하는 거야?”
“마나가 제대로 담긴다면, 색도 변합니다. 제대로 된 무기를 가진 초월자의 경우만 색이 발현되지만요.”
“우와. 첼러스는 무슨 색이야? 아니, 말하지 말아 봐!”
무심코 물었다가, 그의 말을 서둘러 막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추리놀이를 하듯이 말해보았다.
“혹시 노란색?”
첼러스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비슷합니다. 제 마나를 본 사람들은 백금색이라 하더군요.”
나는 백금색의 검기를 일으킨 첼러스를 떠올려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금발과 신념으로 무장한 얼굴,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환하게 빛나는 금빛 검기.
‘성기사의 완전체 수준인데? 보고 싶다.’
기회가 생기면 자세히 관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른 궁금한 점을 물었다.
“여태껏 무기가 안 좋아서 검기가 파란색이었던 거구나. 그러면 마나의 기본 색이 파란색인 건가?”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하지만 스노아는 씨스아이를 얻었는데도 파란색이던데? 마법진 같은 거 말이야.”
“그의 마나는 성격이 생긴 후에도 파란색을 유지합니다.”
나는 스노아의 새파랗고 차가운 마나를 떠올렸다. 알 만했다.
“다른 용사들의 마나도 알려드릴까요?”
“아니. 내가 직접 볼래.”
“그러는 편이 더 재미는 있겠군요.”
“속성은 뭐야?”
나는 턱을 톡톡 두드리며 질문했다.
“성격이랑 달라?”
“사제들의 마나는 치유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제들이 그렇지요.”
“아!”
“눈치채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의 성격은 사람마다 다른데, 속성은 아니구나.”
나는 약초에 빗대어 생각해보았다.
“모든 정화초는 잎사귀의 생김새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정화하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잎사귀는 성격이고 정화의 능력은 속성인 거지?”
“그렇습니다.”
마나를 배우는 건 내내 지루한 과정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흥미진진했다.
‘마나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면, 치유연금술을 할 때도 편하겠네.’
무심코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치유연금술은 치료사만 할 수 있었지만, 내겐 비브로스가 있었다. 그는 치료사가 되고 싶으면 언제든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다. 귀찮은 절차를 밟고 시험을 쳐야 하지만, 약물을 보다 폭넓게 만들 수 있다면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다.
‘마법사들의 포션을 섞지 않아도, 괜찮은 약물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의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물론 제1자각과 제2자각의 차이는 몹시 커서, 내가 그 단계에 다다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근처에 좋은 선생님인 용사들이 많았다. 도움을 청하면 반드시 도와줄 것이다.
‘첼러스가 재능도 있다고 했으니까!’
나는 호기롭게 생각하며 결심을 굳혔다.
며칠이 더 흐르자, 드래곤을 치유할 약물이 어렵게 완성되었다. 이제 바늘만 해결하면 끝이었다.
최대의 난관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해결방법은 금방 찾아냈다. 나는 용사들을 대동한 채 다시 드래곤의 레어를 찾았다. 드래곤은 아직 잠들어 있었고, 이제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프들이 드래곤의 입을 벌리고 그 안에 약물을 붓기 시작했다. 입을 벌리도록 유지하는 데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니었으므로, 할릭이 도와주었다.
예상대로 대부분의 약물들이 이빨 사이로 줄줄 샜다. 충분한 약물을 미리 챙겨 와서 다행이었다.
두 사람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들 수 있는 거대한 바구니에서 엘프가 약물 열댓 병을 더 꺼내들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입에 콸콸 쏟았다.
‘저렇게 사용하고도 양이 부족한 거 아니야?’
걱정할 찰나, 다행히 드래곤이 깨어날 기미를 보였다. 의식이 아직 흐릿했지만, 그것만으로 도움이 되었다.
“정신이 드세요? 약물을 삼켜보세요!”
드래곤은 이제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나는 최대한 그의 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악을 썼다.
“드래곤님! 약물을 삼켜주세요!”
그러자 내 의지가 닿은 것처럼, 드래곤이 입 안에 가득한 약물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천만다행이었다.
‘서둘러야 해.’
침 치료를 할 차례였다. 나는 드래곤의 등에 올라가서 손바닥을 대고 눈을 감았다. 첼러스가 내게 했던 것처럼, 마나를 침투시키는 건 하지 못한다. 그러나 마나를 내 손바닥에 있는 힘껏 밀어 넣어서 드래곤과 최대한 가까이 붙이는 건 할 수 있었다.
곧 드래곤의 방대한 마나혈의 지도가 머릿속에 개미굴처럼 떠올랐다. 마나를 다룬다는 자각이 없을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정신을 집중해서, 곰팡이처럼 돌아다니는 검은 마나들을 포착했다. 약효가 돌수록 그것들이 수세에 몰리는 것처럼 꼬리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나는 드래곤의 등뼈를 따라 이동하다가, 꼬리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리고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은 뒤, 마족의 마나가 전부 꼬리에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
“약효가 돌고 있나요?”
옆에 서 있던 엘프가 초조하게 돌아다니며 물었다. 약물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효과가 좋네요.”
“그 말씀은…….”
“벌써 꼬리로 마족의 마나가 몰리고 있어요. 이제 빼내기만 하면 돼요.”
“맙소사.”
엘프 약사들이 입을 막고 날 쳐다보았다. 몇 년간 좌절을 거듭했을 엘프들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카카나 님. 감사합니다…….”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제국식으로 허리를 숙인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엘프들이 훌쩍이며 눈물을 멈추려고 애썼다.
“이제 침 치료를 할 거예요.”
마나혈에 침을 사용하는 의술이 대단한 집중력을 요한다는 것을 이제 엘프들도 안다. 그들이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나는 침통을 열어 장침을 꺼냈다. 침 자리부터 찾아야 했다.
꼬리는 언뜻 봐도 마나혈이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마나를 느끼지 못했더라면 침혈을 찾는 게 불가능할 뻔했다.
눈을 감고 일반 혈맥과 마나혈의 엉킨 모양을 자세하게 살폈다. 인간으로 치면 12경맥 중 하나인 방광경의 흐름과 유사하게 보였다.
‘종족이 다르니, 어떻게 놓아야 할지 모르겠네. 인간의 중려유 혈자리랑 비슷해 보이긴 하는데…….’
침도 문제였다.
가장 긴 장침을 꺼내들었으나 인간용인 탓에 드래곤에겐 턱없이 짧아 보였다. 고민하는 사이 마족의 병원마나가 꼬리에 전부 몰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첼러스.”
“준비되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내 뒤에 자리를 잡은 뒤, 끌어안는 것처럼 오른손을 뻗어 내 손목을 쥐었다. 첼러스의 체취는 화이트머스크 향과 비슷했다. 샤워하고 난 후의 살 냄새 같은 것이 코끝을 스쳤다.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침술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엘프들의 말에 따르면 드래곤에게 꼬리는 무척 중요하다고 했다. 그 말을 반증하듯, 꼬리에 수많은 기혈과 마나혈이 엉켜 있었다.
기혈이 빽빽해지면 마나혈을 더욱 조심히 다뤄야 했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실수하면 안 돼.’
각오를 다진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손목을 잡은 첼러스의 손에서 마나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실낱처럼 가느다랗게 날 파고들던 마나가 아니었다. 검기를 만들기 위해선 많은 양의 마나가 필요했다.
대량의 마나가 거칠게 후벼 파듯이 안으로 쏟아졌다. 첼러스의 마나는 따스한 햇살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혈관을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아팠다. 화끈거리는 통증이 어찌나 선명한지, 내 오른손의 혈관들을 그려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읏…….”
어금니를 악물고 어깨를 움츠렸다.
레어에 오기 전에 일부러 연습까지 했는데도 통증을 견디기 힘들었다. 스노아 때보다 많은 양의 마나였다. 그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눈을 떴다. 내 손에 들린 바늘에 섬세하고 얇은 검기가 씌워지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짓씹고 진정하려고 애썼다.
“괜찮으십니까?”
첼러스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속삭였다. 자세가 자세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뜨거운 입김이 귓바퀴로 미끄러지자 소름이 돋았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첼러스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길이를, 더 늘여줘.”
첼러스가 곧바로 행동하지 않고 망설였다. 검기의 길이를 늘이려면 당연하지만, 마나를 더 많이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거 말곤 방법이 없었다.
그가 마나의 양을 미세하게 늘렸다. 극도로 세심한 작업인지라, 첼러스의 숨이 조금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최소한의 마나로 검기를 만들어내느라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는 소리를 할 순 없었다.
나는 소름끼치는 감각을 어떻게든 무시해보려 노력했다. 생리적인 눈물이 맺히기에 눈꺼풀을 여러 번 깜박여 없앴다. 부옇던 시야가 비교적 선명해졌다. 바늘을 확인하니 딱 내가 원하는 만큼 검기가 늘어나 있었다.
‘침을 놓을 때 손이 떨리면 안 돼.’
타인의 마나가 비집고 들어오면, 내 몸에 잠재되어 있던 마나가 흥분한다고 스노아가 설명했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손이 떨릴 수도 있다고.
다행히 나는 떨지 않고 있었지만 대신 피부가 뜨거워졌다. 첼러스의 마나에 한껏 달궈진 것처럼.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이 없겠어.’
거슬리는 통증을 지우기 위해 옛날부터 자주 애용하던 방법이 있었다.
나는 입 안의 볼살을 콰득 깨물었다. 눈물을 머금으며 비릿하게 퍼지는 핏물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혈맥 사이에 엉키듯 자리 잡은 마나혈을 골라냈다. 전부 이어져 있어서 하나만 뚫으면 된다.
미세한 자극점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자리가 엇나가면 큰일이었다. 손을 움직이자, 내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첼러스의 손이 부드럽게 딸려왔다. 그가 내 동선을 미리 알아채고 움직여준 덕분에 조금의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초월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침을 조준했다. 내 손이 내 손 같지 않았지만 아랫입술을 힘껏 씹어 어떻게든 조절하려 노력했다. 그런 뒤 단숨에 혈자리를 꿰뚫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끄앗!”
바늘을 꽂은 구멍으로 검은 마나가 도망치듯 확 쏘아져 나온 것이다. 그와 동시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생성되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충격을 받은 몸이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첼러스가 받쳐주지 않았다면 뒤구르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빠져나가는 가스처럼 공중으로 한참을 뿜어지던 검은 마나가 이내 완전히 흩어지며 사라졌다. 나는 얼이 나가서 꼬리에 박힌 바늘을 바라보았다.
‘끄, 끝난 건가?’
유난히 고된 치료였다고 생각하며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늘을 빼도 되겠습니까? 제가 빼야 빠질 것 같습니다.”
첼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안 돼.”
마음 같아선 그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빼다가 다른 혈자리 건드리면 골치 아파져.”
“하지만 카카나가 빼려면 다시…….”
첼러스의 시선이 내 오른손으로 향했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말했다.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단호히 얘기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바늘을 잡았다. 나무 기둥을 움켜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첼러스가 다시 마나를 불어넣어 검기가 생기자, 부드럽게 찔러 넣었을 때와 똑같이 바늘이 쑤욱 빠졌다.
나는 바늘을 천으로 돌돌 감아 따로 보관한 뒤, 드래곤의 몸에 손을 대보았다. 혹시나 싶어서였다. 마나혈을 신중하게 느껴보았다. 다행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마족의 저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전히 빠져나갔어.’
“성공이에요!”
내가 활짝 웃으며 얘기하자 엘프들이 서로를 얼싸안으며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거의 우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기분이 끝내주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단전에서부터 벅차오르는 짜릿함은 이 일을 할 때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마법가방에 침통을 보관했다. 아다르가 근처로 다가왔다. 어째서인지 뚱한 얼굴이었다.
“얼굴에 피칠을 해놓고 좋단다.”
그가 내 뺨에 난 상처와 찢어진 입술을 보며 사나운 눈을 했다.
“네가 육식 동물이야? 왜 네 입술을 뜯어먹고 그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입술에서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아야야, 신음하며 얼굴로 손을 올리자 첼러스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아챘다. 가볍게 쥐었을 뿐인데 철로 된 수갑이 채워진 것처럼 단단했다.
“만지면 안 됩니다. 그쪽에 상처가 있습니다.”
“어디?”
“이쪽…….”
첼러스가 내 왼뺨 밑 부분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솜털을 어루만지듯 보드라운 손길이었다. 불현듯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남성분들은 카카나 님을 사랑하고 있잖아요.]
“아.”
얼굴에 마그마가 흐르는 양 열기가 치솟았다. 내 새빨개진 얼굴을 본 첼러스가 사르르 눈가를 휘었다.
“요즘 들어 부끄러움을 많이 타네요, 카카나.”
그의 천사 같은 눈이 오묘한 호수빛으로 반짝거렸다. 단언컨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자극을 받은 게 분명했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 세상의 미모가 아니었다.
“좀 보자. 깊게 베였는지.”
옆에 서 있던 아다르가 갑작스레 내 턱을 잡아 고개를 돌렸다. 위험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흑안이 내 얼굴 위로 핥듯이 굴러다녔다. 미지근하게 흐른 핏줄기를 본 아다르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슬쩍 핥았다.
신성함에 노출되었던 눈이 이번에는 퇴폐적인 유혹에 노출된 느낌이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다행히 겉만 베였나 보네.”
“괘, 괜찮아.”
그를 떼어놓기 위해 대충 둘러댄 후,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르모어에게 도망쳤다. 그의 차분한 분위기에 감화되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아르모어의 정적인 시선이 내 입술로 떨어졌다.
“아플 것 같군.”
“쓰라린 거 말곤 괜찮아요.”
“불편한가?”
“아뇨, 이 정도는…….”
“입술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아르모어가 내 땋은 머리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멍청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들이 불편하냐고 묻고 있는 거다.”
“카카나 님!”
그의 말이 잘 와 닿지 않아서 굳어 있는 사이, 엘프들이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세상에, 예쁜 입술이 이게 뭐예요!”
속상한 얼굴로 타박한 엘프가 돌연 내게 이마를 대었다. 인사할 때 보여주곤 하던 몸짓이었다.
‘왜 갑자기 인사를 하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멀뚱히 눈을 깜박이는데,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빛이 우리 주변으로 생성되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빛이 내 주위를 감도는가 싶더니 피부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입술로 손을 가져갔다. 상처가 사라지고 있었다. 뺨도, 입 안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놀라서 엘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내 어벙한 표정이 웃겼는지, 엘프가 이마를 떼며 꺄르르 웃었다.
“엘프의 마나는 치유의 힘이 있거든요.”
그러자 젖은 수건으로 핏자국을 닦아주던 다른 엘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요. 간단한 외상 말곤 치유하지 못하지만요.”
엘프들의 말을 경청하던 스노아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사제의 신성마나와 비슷한 효능이군요. 그런 속성을 가진 마나가 더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왜?”
“신전은 신에게 선택받은 사제들만 신성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어요.”
스노아가 뭔가 켕기는 부분이 있는 사람처럼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치유는 신성마나가 가진 권력의 원천이자 상징이죠.”
“신전이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거야? 신성마나는 신이 주신 거라면서?”
스노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거예요. 혼란스러운 시대니까요.”
황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실은 마족들의 아지트가 된 지 오래였다. 그런 제국과 결탁한 신전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흠…….”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땅이 우르르 진동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회복 물약을 두 동이는 들이켠 드래곤이 마침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펴자 드래곤의 몸을 뒤덮었던 수많은 기생식물과 이끼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산이 나무와 흙을 털어내고 움직인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허물처럼 벗겨진 오래된 비늘이 땅으로 떨어지자 챙강챙강 소리가 났다. 나는 떨어진 비늘 하나를 주워들었다. 날카로워서 칼 대신 써도 될 것 같았다.
꿀꺽 침을 삼키며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누워 있을 때도 크다고 생각했지만, 일어선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바로 움직여도 되는 건가?’
아무리 회복 물약을 들이켰어도 아픈 몸이었다. 약물뿐만 아니라 영양도 보충해야 했다. 무리하지 말고 누워 있으라고 말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드래곤이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뭐지?”
의아하게 여기며 움직이려고 하자, 첼러스가 내 손목을 잡았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카카나.”
“엥?”
아다르가 방금까지 드래곤이 서 있었던 빈 공간을 가리키며 말을 받았다.
“저기로 갔다간 아마 깔려 죽을걸?”
아다르가 대답 대신 빈 공간을 턱짓했다. 드래곤이 다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미간을 구기고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챘다. 텔레포트를 한 것이다.
나는 드래곤처럼 덩치가 산만 한 존재도 저렇게 가뿐하게 텔레포트를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마나만 충분하다면 무엇도 옮길 수 있는 것이 텔레포트였다.
‘스케일이 다르니까 감을 못 잡겠네.’
우선 드래곤의 상태부터 살폈다.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왠지 피로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드래곤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르르르―
“으아!”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이번엔 균형을 잡고 있기 힘들 정도여서 아르모어가 내 몸을 지탱해 주어야 했다. 나는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되자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운 드래곤에게 달려갔다. 간신히 회복시킨 몸에 무리라도 갔을까 걱정이 된 탓이었다.
“괜찮아요?”
묻고 보니 문득 화가 났다.
‘왜 나한테 묻지도 않고 움직여? 잘못되면 어쩌려고!’
나는 도끼눈을 했다.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어요!”
꽥 소리를 지르자 엘프들이 너무 놀라서 휘청거렸다. 혼내는 것처럼 드래곤에게 윽박을 지르니 기겁한 듯했다.
‘알게 뭐람.’
나에게 치료 받은 존재는 모두 같은 환자였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방금 막 병원마나를 없앴잖아요! 그게 다 나았다는 뜻은 아니란 말이에요! 기절했으면 어쩔 뻔했냐고요!”
드래곤은 자기에게 화를 내는 조그만 생명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날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겁 없이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은 오랜만이구나.”
“죄, 죄송합니다, 드래곤님. 카카나 님은 그저 너무 걱정이 되어서…….”
엘프가 황급히 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드래곤이 그르릉거리며 웃는 소릴 내더니 엘프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라. 화를 낼 생각이 아니었다. 나의 은인이 아니더냐.”
“…….”
“그녀의 말이 맞지. 먼저 물었어야 했다. 어렵게 치료한 몸이 아니냐.”
나는 뾰족한 눈으로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눈꺼풀이 웃는 것처럼 접혀 있었다.
“그렇게 화내지 말거라. 무기를 어서 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성격이 그토록 급한 분이신 줄은 몰랐네요.”
“카카나 님!”
엘프가 그만하라며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처음엔 무서워 하셨으면서, 왜 그렇게 겁 없이 말씀하세요?”
나는 드래곤의 늘어진 날개를 바라보았다.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여기에 오자마자 힘이 풀린 게 분명했다.
드래곤을 쇠약하게 만든 건 마족의 마나다. 그런데 낫자마자 대량의 마나를 소모하여 텔레포트를 시전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했다. 내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자, 드래곤이 말했다.
“자기보다 강한 존재 앞에서 바른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은 흔하지 않지.”
드래곤의 커다란 눈이 용사들에게로 굴러갔다.
“그러니 더욱, 잘 지켜야 할 것이야.”
“그럴 겁니다.”
첼러스가 답했다.
“이제 그대들이 고대하던 무기를 돌려주마.”
드래곤이 허공에 나무 상자를 소환했다. 몸을 웅크리면 내 몸이 쏙 들어갈 정도로 큰 상자였다. 가넷과 에메랄드 등의 보석이 가죽을 덧댄 나무뚜껑에 꽃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저 상자만 갖다 팔아도 평생 놀고먹겠다.’
희귀한 무기가 들어 있는 비싼 보관함이라니, 나라면 손이 떨렸을 것이다. 그러나 할릭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서 바로 뚜껑을 살폈다. 걸쇠는 걸려 있지 않았다. 상자가 소음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안에는 윤기가 매끄럽게 도는 검붉은 색의 천이 덮여 있었다. 할릭이 씩 웃으며 천을 걷었다. 비로소 얌전히 놓인 세 개의 물건이 드러났다.
하나는 검이었다. 검자루는 씨스아이와 같은 하얀색이지만, 검날이 태양빛을 띠고 있었다. 밀라다스 가문의 마지막 후예가 죽고 신전에 맡겨지기로 되어 있었다는 성검, 솔라리소드였다.
‘첼러스의 검이다.’
그가 검을 잡아들자, 첼러스의 마나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날에 황금빛이 너울거렸다. 레어에 작은 태양이 뜬 것 같다.
넋이 나가 구경하는데, 이번엔 할릭이 무기를 집어 들었다. 쇠처럼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진 건틀릿이었다. 드워프의 광산에서만 난다는 미스릴로 주조되었다고 했다. 어떤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아 유일하게 할릭의 힘을 버티는 물건이었다.
그가 검붉은 건틀릿을 착용하여 주먹을 쥐자, 손허리뼈 앞부분에 다섯 개의 가시가 돋아났다. 맨손으로도 바위를 가루로 만드는 할릭이다. 그런데 건틀릿까지 착용하면 어떻게 될지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제 주먹에 마나를 제대로 실을 수 있겠는걸.”
할릭이 기뻐하며 말했다.
‘마나까지 씌운다고?’
가시 달린 건틀릿에, 할릭의 괴력에, 마나라니.
이 정도면 그의 적이 된 사람이 불쌍할 정도였다. 나는 하하, 기계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상자엔 아직 무기가 하나 남아 있었다.
‘여의주다.’
보라색과 파란색이 오묘하게 뒤섞여 있는, 수정구슬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아르모어가 손을 뻗자, 신기하게도 여의주가 스스로 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는 아르모어에게로 스윽 날아가 손에 흡수되었다.
나는 잠시 눈을 멍하니 깜박거렸다.
‘응?’
“어잉?!”
눈이 굴러 떨어질 기세로 커졌다. 내 얼빠진 얼굴을 본 아르모어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놀랄 것 없다. 본래 몸 안에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물건이다.”
“트, 특이하네요…….”
놀란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민망해졌다.
나는 입을 가리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마침 아다르와 관련하여 화제 전환하기 좋은 질문거리가 있었다.
“근데 왜 너만 특별한 무기가 없어?”
지루하게 상황을 방관하던 아다르가 한쪽 눈썹을 슥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별안간 오만방자한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괜히 물었다고 후회하기 무섭게 아다르가 지옥의 주둥아리를 나불거렸다.
“당연하지. 나는 특별한 무기 따위 필요 없거든.”
‘으, 재수 없어.’
아직 다 듣지도 않았는데 벌써 얄미워지려고 했다. 아다르는 끝까지 잘난 척이었다.
“그런 건 자기 힘을 조절할 줄 모르는 애송이들에게나 필요한 거야.”
“그래, 너 잘났다.”
“필요 없다는 말은 진짠데.”
아다르가 킥킥 웃었다.
“암살자는 작은 검날이나 단검 정도로 충분해. 기습이 보통이고, 화려하게 싸울 일이 없으니까.”
“흐음.”
“그리고 특별한 무기가 없긴 왜 없어?”
아다르가 소맷부리에서 잭나이프를 꺼냈다. 내가 선물했던 거다.
“네가 준 게 있잖아. 이걸로 충분해.”
‘기특한 소리도 할 줄 아네.’
나는 팔짱을 끼고 쓴소릴 했다.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애먼 사람들 신경은 왜 긁어?”
“재밌잖아.”
나는 아다르를 흘겨봐준 다음 나머지 용사들을 마저 살폈다.
첼러스는 검을, 할릭은 건틀릿을, 아르모어는 여의주를, 그리고 스노아는 스태프를. 모든 용사들이 비로소 제 힘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야.’
나는 바드를 떠올리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내가 용사들의 발목을 잡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대에게 줄 것이 있다, 카카나.”
드래곤이 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동굴 전체가 내 이름으로 웅웅 울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의아하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앞으로 내보아라.”
내가 앞으로 손을 뻗자, 드래곤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예지의 드래곤이라 불리는 글라모스의 마지막 자손이다. 생각이 제법 잘 들어맞을 때가 있지.”
“…….”
“그러니 이 물건은 그대에게 주도록 하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손 위로 무언가가 소환되었다.
‘거울?’
내 손바닥보다 작은 거울이었다. 손잡이는 달려 있지 않았고, 회중시계처럼 포켓이나 가방에 고정시킬 수 있는 체인이 달려 있었다.
나는 거울을 뒤집어 보았다. 하얀색 광물질로 조각한 천사의 날개가 휘감기듯 뒷면에 장식되어 있었다.
“위에 달려 있는 단추를 눌러 보거라.”
거울 윗부분에 누를 수 있는 단추가 볼록 올라와 있었다.
‘이거 설마 다이아몬드인가?’
나는 눈을 의심하며 단추를 관찰했다. 끄트머리에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속이 투명하고 눈이 부시도록 반짝거리는 걸 보면 다이아몬드가 맞는 것 같았다. 드래곤에겐 별것 아니겠지만, 영 부담스러운 물건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내 마나가 단추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며 거울의 테두리에서 돔 형식의 뚜껑이 튀어나왔다. 톱니바퀴 모양의 뚜껑이다. 그것이 깨지기 쉬운 거울의 앞면을 감싸주었다.
역시 안 되겠다. 이런 건 받을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전…….”
“단추를 눌렀으니, 이미 네 것이 된 물건이다. 가져가거라.”
드래곤이 내 말을 자르며 얘기했다.
“그대들의 적은 마족이지.”
“…….”
“본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드래곤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요긴하게 사용할 날이 올 것이니, 몸에서 떼어놓지 말거라.”
나는 묘한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단추를 눌렀다가 손을 떼니 어느새 뚜껑이 닫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닫히는 건가?’
단추를 다시 눌러보았다. 뚜껑이 젖혀지자, 북슬북슬한 머리의 양 수인족이 거울에 비쳤다. 드래곤이 거울을 의미심장하게 지켜보며 말을 끝맺었다.
“그대들의 시련에, 부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
“허어엉, 카카나 님……! 가지 마세요!”
내가 떠난다는 소식이 퍼지자, 엘프 마을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나는 곤란한 얼굴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로엘르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엘프 아이들은 아예 내 발에 매달려 있었다. 부모라도 떠나보내는 양 울면서 눈물콧물을 짜내니 마음이 영 안 좋았다.
라넷이 뜯어말렸으나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성인 엘프들마저 손수건을 한 장씩 든 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라넷이 결국 포기하고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나는 훌쩍이는 로엘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우니까 기분이 이상하네요.”
“카카나 님은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니까요. 신목에게 선택받은 분이 아니십니까.”
라넷이 내 곁에 서 있는 폭시를 쳐다보며 말했다.
“또 드래곤님을 치유해주신 은인이시니까요. 이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가요?”
“언제라도 다시 퀄리티미엄을 방문하신다면, 기꺼이 모시겠습니다.”
“고마워요.”
라넷이 다른 용사들을 한 차례 둘러본 뒤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이제 정말 떠나시는군요.”
나는 감사 인사의 뜻으로 라넷의 뒤편을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다. 거주구역의 엘프들이 빽빽하게 모여서 우리를 배웅했다. 이렇게 안전한 곳을 내 발로 떠나려니 새삼 입맛이 썼다. 그러나 다다나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도망치지 않기로 했으니까.’
마음먹는다고 갑자기 바뀔 수 없는 게 사람이라지만, 노력해야 했다. 나는 비장하게 마법가방의 끈을 움켜쥐었다.
“들어오실 때와 달리, 나가실 때는 조금만 헤엄치면 바로 바깥세계로 통합니다.”
“다행이네요. 숨을 어떻게 참나 싶었는데.”
작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라넷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마주 대었다. 녹음을 닮은 라넷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래졌다.
“그간 고마웠어요.”
그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엘프 아이들이 너무 울어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힘내세요, 용사님! 잘되길 바랄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바깥 세계와 이어져 있는 연못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다 뒤늦게 이상한 점을 깨닫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용사님? 나한테 하는 말이었는데.’
첼러스나 스노아를 쳐다보는 게 아니라, 분명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얘기했다.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뒤늦게 이유를 알고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었다. 엘프들에겐 신수의 계승자이자 드래곤을 치유해준 ‘내가’ 용사였던 것이다.
‘기분이 이상하네.’
얼떨떨하게 생각하며 꾸준히 헤엄쳤다.
라넷의 말대로, 바깥 세계는 금방이었다. 익숙한 땅에 발을 디디자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 들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한 번 더 꾸고 싶은 그런 꿈.
[힘내세요, 용사님!]
나는 엘프들의 응원을 곱씹다가 이내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