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 Chapter 1. 거대한 환자 (17/43)

Chapter 1. 거대한 환자

나는 이어지는 엘프들의 말을 경청했다. 설명이 끝이 없었다. 보통 성대한 의식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날 하루 치르고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뭔 교육까지 받아.’

이래서야 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의식 같지 않은가. 엘프들은 신수와 계승자를 위해서라도 배움에 겸허히 임해야 한다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약초를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바쁘구만.’

나는 구시렁거리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내용은 의식 이후에 라넷이 전달해주기로 했다. 벌써부터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었다.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엘프들은 느긋할 거란 생각과 달리 성미가 대단히 급했다.

‘그만큼 들뜨는 일이어서 그런가?’

마을 전체가 줄곧 소란스러웠다.

특히 내가 신수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날엔 모든 집의 창문으로 엘프들이 고개를 내밀곤 했다. 퀄리티미엄에 처음 온 날보다 관심이 뜨거웠다.

‘어깨가 무거워진 기분이네.’

신수의 계승자가 엘프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알게 되자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이런 중요한 자리에 있어도 되는 걸까.’

나는 착잡하게 생각하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의식을 치르기에 앞서 꾸미기에 한창인 엘프 여러 명이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들은 거짓말이라곤 모르는 순수한 칭찬을 한 시간 내내 퍼붓고 있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란 걸 알기에 더 부끄러웠다. 엘프가 그새를 못 참고 또 입을 열었다.

“피부가 어쩌면 이렇게 아기처럼 부드럽죠? 양 수인족은 모두 이런가요?”

“뿔이 앙증맞게 말려 있어요. 꾸미는 데 지장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을 했네요. 묘목처럼 귀여워요.”

나는 피곤한 눈을 했다. 의식이고 뭐고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처음엔 금방 끝날 줄 알았다. 엘프들은 모두 날렵하고 움직이기 편한 복장을 입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웬만한 제국 귀족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오직 자연의 재료로만 꾸미려니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성격은 또 얼마나 엄격한지 결코 대충 하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아름다움을 평했다. 과한지, 아니면 너무 수수한지. 비싸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귀족보다 기준이 깐깐했다.

‘내가 꾸며봤자 뭐 얼마나 예뻐진다고.’

나는 회의적으로 생각하며 잠자코 엘프들의 손길을 느꼈다. 내 생각을 바꾸어놓고 말려는 것처럼 전투적인 손길이었다.

“엘프들은 몸을 드러내는 걸 꺼리지 않잖아요.”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렇죠.”

“그러면 의복에 어떤 의미를 두나요? 인간은 신분을 나타내고, 꾸미는 데 의미를 많이 둬요.”

“간단해요.”

엘프가 내게 이것저것 대보며 말했다.

“딱 두 가지 의미가 있죠. 몸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인간과 거의 흡사한 이유였다.

“하지만 다들 간편한 복장이던데요.”

“모르시는구나. 엘프들은 잔치를 좋아해요. 그러니 굳이 평소에 차려입지 않는 거예요.”

“맞아요. 노래하고 춤추는 걸 사랑하죠.”

옆에 있던 엘프도 거들었다.

“화려한 옷은 얼마든지 있답니다.”

“다들 한 해에 하나씩은 지어 입어요.”

“땅에 묻어도 잘 썩는 재질로 신경 써서 만들죠. 바깥세계는 어떨지 모르지만, 퀄리티미엄에선 식물로도 충분히 다양한 원단을 만들 수 있거든요.”

나는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옷걸이를 흘끗 살폈다. 재질이 뻣뻣한 것부터 실크처럼 부드럽게 광택이 도는 것까지 다양했다. 저게 다 식물로 만든 원단이라니 신기했다.

내가 조용해지자, 엘프들이 다시 날 칭찬하는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카카나 님의 눈은 꿀 같아요.”

“어찌나 동그란지 물방울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답니다!”

‘제발 그만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내 답도 없는 머리를 빗느라 낑낑대고 있는 엘프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도 머리를 관리하는 것보단 칭찬을 듣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자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물론 엘프들은 머리를 만질 수 있어 영광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부분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고 보니 청혼은 받으셨나요, 카카나 님?”

나는 침을 삼키다 말고 사레가 들려서 거세게 콜록거렸다.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기침하자 엘프가 의아한 얼굴을 하며 주스를 들이밀었다. 벌컥벌컥 들이켜고 기겁한 눈을 들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다섯 명이잖아요. 그러면 반지도 다섯 개일 텐데,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제국은 청혼할 때 반지를 교환한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거든요.”

간신히 마음의 평화를 얻은 사람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는 얼굴을 젓는 걸로도 모자라 손사래까지 쳤다. 얼마나 놀랐는지 목에서 삑사리가 났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우리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란 말이에요!”

“어머.”

엘프가 진심으로 놀란 눈을 했다.

“연인 사이가 아니셨어요?”

‘덧붙여 저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한 상황도 아니거든요?’

거기까지 말하려다 참았다.

엘프들은 이미 나한테 용사들이 ‘날 사랑하고 있다’며 폭탄 발언을 했다. 그들이 아무리 인간에 대해 무지하다지만, 고백하지도 않은 마음을 밝히는 게 나쁘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그러면 입장이 난처해진다.

나는 안 그래도 불편했다. 여기서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마에 참을 인 자를 새기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시키는 대로 인형처럼 움직였다. 엘프들은 내게 부드러운 재질의 옷을 꼼꼼하게 입히고 다시 의자에 앉혔다.

머리는 손질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엘프가 살굿빛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색의 꽃을 뒤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들이 싫어요?”

제법 조심스러워진 어투였다.

나는 그제야 눈을 떴다. 엘프들이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화난 거라고 오해한 듯했다.

“제 동료들이요?”

나는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물었다.

“네.”

“아뇨, 싫진 않아요.”

엘프들은 호기심이 많았다. 로엘르가 사냥꾼에게 붙잡힌 것도 호기심 때문에 퀄리티미엄을 나갔다가 벌어진 참사라고 했다.

인간을 경계하라는 교육을 받는 탓에 성인이 되면서 점점 조절할 줄 알게 되지만, 나이가 조금만 어려도 티가 났다.

‘엘프들이 무슨 죄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뿐이에요.”

용사랑 연애라니. 나는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여유도 없고요.”

“그 이유뿐인가요?”

“다른 이유도 있죠.”

“예를 들면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나는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어차피 엘프들이 경계하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용사들의 귀에 내 소식이 건너건너 들어갈 일이 없단 뜻이었다.

‘혼자 고민해봤자 머리카락만 빠지지.’

나는 은근슬쩍 진심을 털어놓았다.

“제 감정을 잘 모르겠어요.”

“그럼 사귀어보면 되죠.”

엘프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너무 단순해서 새로운 충격이었다.

나는 커다랗게 홉뜬 눈으로 거울 속 엘프를 바라보았다. 엘프는 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섬세한 손으로 굵게 땋은 머리에 분홍색 꽃을 꽂아주고 있었다.

“그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

“저희는 연애를 안 해서 잘 모르지만, 과일도 먹어보기 전까진 입맛에 맞는지 알 수 없거든요.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조금 움츠러든 음성으로 답했다.

“그들은 과일이 아니잖아요. 상처 입을 거예요.”

“솔직히 얘기하면 되죠.”

엘프가 마치 가상의 상대를 두고 얘기하듯, 연기하는 투로 허공에 대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호감은 품고 있어요. 하지만 이게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확신이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사귀어 봐요. 알아가고 싶어요.”

“간단하네요!”

옆에 있던 어린 엘프가 손뼉 치며 맞장구쳤다.

“주책이군.”

내 입술에 불그스름한 즙을 발라주던 무뚝뚝한 성격의 엘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연기하던 엘프가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그러면 남성분들이 선택할 거 아녜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어렵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프의 말이 옳게 느껴졌다.

“자, 다 되었어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프가 순진무구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울 앞에 서보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신거울 앞으로 갔다. 웬 양 수인족 한 명이 여신의 날개옷 같은 걸 입고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라고?’

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긴 좀 뭐했지만, 꼭 새로 태어난 것처럼 예쁘장했다.

양 갈래로 땋아도 정신없이 뻗쳤던 잔머리가 깔끔하게 눌려 있었다. 무슨 기술을 사용한 건지, 머리를 땋은 방법도 독특했다. 뒤통수부터 땋으며 내려온 머리가 오른쪽 어깨 위로 내려와 가슴팍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는 색색의 꽃으로 장식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의복은 평범한 바지였는데, 외투가 독특했다. 앞부분은 트여있고 뒷부분은 드레스처럼 길게 늘어져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스노아가 입었던 코트랑 비슷하네.’

그러나 내가 입은 게 훨씬 얇고 하늘거려서 날개 같은 느낌을 줬다. 원단만으로 이렇게 다른 느낌을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희미하게 복숭앗빛을 띠는 원단이었다. 내 살구색 머리와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나는 재봉선을 따라 수놓인 자수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넝쿨 모양이네. 엘프들은 섬세한 걸 좋아하나 봐.’

유려하고 찬찬하며 고운 느낌은 내 취향과도 흡사했다. 이런 옷을 입고 꾸민 적은 처음이라 괜히 기분이 들떴다.

‘이래서 사람들이 꾸미고 다니는구나.’

스스로를 꾸미는 재미를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걸. 기분전환에는 제격인 듯했다.

액세서리를 사볼까 생각하는 사이 엘프가 이쪽으로 오라며 안내했다. 걸음을 떼자 상의가 바닥에 끌리는 느낌이 났다. 자연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사뿐사뿐 걸으며 엘프의 등 뒤에 섰다.

이곳은 의식이 진행되는 공터의 천막 안이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게 느껴져서 긴장으로 심장이 쿵덕거렸다.

엘프가 커다란 잎사귀로 막아놓은 입구를 밀어 젖혔다. 주인공의 등장을 눈치챈 소음이 즉시 잦아들었다. 걷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긴장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다.

나는 필사적으로 호흡을 고르며 걸음을 뗐다. 환한 햇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자, 드넓은 잔디밭이 나를 반겼다.

눈을 굴리며 전경을 살폈다. 천막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썰렁했던 공터가 수많은 사람, 아니 엘프로 꽉 차 있었다. 거의 모든 거주구역의 엘프가 한 자리에 모인 것 같은 규모였다.

“카카나 님!”

“너무 예뻐요! 이쪽을 봐주세요!”

“여신님 같아요!”

엘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조금이라도 내 시선을 끌고자 애를 썼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은 뒤, 안내받은 내용을 떠올리며 길을 확인했다. 다행히 파스텔 톤의 꽃잎이 길에 깔려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래서 맨발이어도 된다고 했구나.’

의식을 치르는 동안 신발은 신지 않는 게 관례라고 해서 걱정했었다. 꽃길을 걷는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른쪽 상단에 자리 잡은 엘프들이 하프를 튕기기 시작했다. 맑고 투명한 선율이 공터로 흘러들었다.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었다.

질질 끌리는 상의 때문에 꽃잎이 다 걷힐 거라 생각했는데, 옷이 어찌나 가벼운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꽃잎이 수북하게 깔려 있어 폭신폭신했다.

나는 걷는 내내 좌우를 살폈다. 관중들 중에 야수도 있었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야수들이 순한 양처럼 엘프의 손길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눈만큼은 내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길들인 야수가 아니었다면 날 발견하자마자 달려들었을 것이다. 해치려는 의도가 아니라, 애교를 부리기 위해서.

열심히 눈을 굴린 끝에, 왼편에 일렬로 선 용사들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왠지 민망해져서 황급히 시선을 깔았다. 그들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의식하고 나자 다섯 쌍의 시선이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앞만 주시했다.

꽃길 중간에 이 의식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은빛 생명체가 보였다.

뀨우!

둥지에 지루하게 누워 있던 신수가, 날 발견하자마자 신나서 뛰어왔다.

“저 동물이 말로만 들은 그?”

“신수? 진짜 신수야? 책에서만 봤는데!”

“진짜 예쁘다…….”

엘프들이 감탄하며 신수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데 경외심까지 담기자 감당하기 힘들어지려고 했다.

뀨웅!

자기 좀 예뻐해 달라는 듯, 가냘프게 운 신수가 내 종아리에 머리를 비볐다. 모든 게 용서될 정도로 귀엽다. 불편했던 마음도 사르르 녹아버렸다.

나는 옅게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준 다음, 걸음을 서둘렀다. 얼른 끝내고 집에 들어가서 약초나 연구하고 싶었다.

다행히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 끄트머리에 엘프 수장 리헬론이 서 있었다.

나는 그 뒤로 시선을 던졌다. 신비로운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장소를 이곳을 잡은 것은 저 석상 때문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모양을 자세히 살피니 엘프들에게 의미가 깊을 법했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엘프의 석상이었다. 상황을 미루어 짐작건대 초대 엘프쯤 되는 것 같았다. 귀가 뾰족하고 등에 요정의 날개가 돋아 있었다.

‘고대의 엘프는 날개가 있었나 보네.’

잠자리 날개처럼 타원형으로 생긴 네 장의 날개가 밑으로 얌전히 접혀 있었다.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상의의 뒤판을 길게 늘어트리는 엘프들의 의복 모양이 어디서 왔는지 말이다.

‘날개를 흉내 낸 거였구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수록 재미가 돋아났다.

나는 흥미롭게 생각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리헬론이 코앞에 다가온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그런 뒤 고대 엘프의 석상에 감겨 있는 끈을 풀어 자그마한 뿔을 꺼내들었다. 호각이었다.

인간의 의식과 달리, 엘프들의 의식엔 축사나 개회사 같은 것이 없었다. 아무도, 심지어 리헬론도 내게 호각을 건네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신을 신수의 계승자로 인정한다느니, 그대의 자격을 인정하여 엘프의 보물을 전달한다느니 구구절절한 설명도 없었다. 그저 수장이 호각을 건네고, 내가 그걸 받았다. 그게 끝이었다.

리헬론이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내받긴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서 같이 허리를 굽혔다. 리헬론이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의식이 전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인 모양이었다. 엘프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며 허공으로 색색의 꽃을 뿌렸다. 잔치의 시작이었다.

“옷이 불편하실 테니, 쉴 수 있는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금세 곁으로 다가온 라넷이 의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리헬론과 가까운 자리에 정확히 여섯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귀빈석인지, 근처로 다가오는 엘프들이 없었다.

덕분에 의자에 앉고도 공터가 한눈에 내다보였다. 그제야 숨이 놓였다.

나는 줄곧 뻣뻣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풍류에 몸을 싣는 엘프들을 구경했다. 엘프들의 잔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외모가 수려한 엘프들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산드러지고 자유로운 춤을 추었다. 누군가는 하프 선율에 새로운 음을 더하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노래를 했다.

달큰한 과일주를 손에 한 잔씩 챙긴 용사들이 근처로 걸어왔다. 아다르가 내가 들고 있는 과일주잔에 제 잔을 짠 부딪치며 말을 걸었다.

“기분은 좀 어때?”

“토할 것 같아.”

망설임 없이 떨어지는 내 대답에 그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런 자리는 나랑 안 어울려. 집에 틀어박혀서 약초나 만지고 싶다.”

“안 그래도 네가 약제사라 얘기하니까 엘프 약사들이 눈에 불을 켜더라. 꼭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나 봐.”

“진짜?”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는 희희낙락한 얼굴로 과일주를 들이켰다. 엘프들은 술 같은 거 안 마실 줄 알았는데 내 편견이었나 보다. 꽤 쌉싸름한 맛이 났다.

“그런데 그건 뭐야?”

할릭이 내 목에 걸린 호각을 가리키며 물었다. 뿔이 한 바퀴 휘어져 있는 모양의 호각이었다.

나도 아는 게 없어서 어깨를 으쓱였다. 의식 때 준 걸 보면 보통 물건은 아닌 듯한데 영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때 하나 묻지 않은 하얀색이었고, 약지 정도 되는 크기였다. 힘껏 불면 높은 음으로 지저귀는 새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야수와 신수를 부르는 호각입니다.”

라넷이 몹시 피로한 얼굴로 걸어오며 말했다. 말썽피우는 엘프 아이들을 훈계하더니 진이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야수와 신수요?”

“네. 그 호각을 불면 소리를 들은 야수들이 카카나 님께 달려올 겁니다. 신수는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내 무릎 위에 올라와 잠을 자고 있던 신수가 고개를 들며 뀨, 하고 울었다. 나는 새삼 신기한 기분이 되어 호각과 신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은색 털이 좀 신비롭게 느껴지긴 했지만, 크게 특별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많이 귀여운 야수 같았다.

“신수란 정확히 뭔가요?”

신수의 뿔 언저리를 살살 긁어주며 물었다. 기분이 좋은지 살그머니 눈을 감은 신수가 고롱고롱 소리를 낸다.

“아직 잘 모르겠어서요. 제겐 그냥 야수처럼 보이거든요. 대단한 동물인가요?”

“신수는 신의 짐승입니다.”

라넷이 내게 찰싹 달라붙은 신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

“영험하여 일개 몬스터는 감히 덤비지 못하고, 야수들 또한 신수에게 복종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강하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한 번 정한 주인은 죽을 때까지 수호한다고 하니, 아마 신수를 항상 곁에 두시게 될 겁니다.”

“그것 외에는요?”

“이게 전부입니다.”

라넷이 난감한 투로 말했다.

“고서에 적혀 있는 정보가 전부인지라, 저희도 신수에 대해선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죄송하긴요.”

나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는걸요. 충분해요.”

“더 궁금하신 것이 있습니까?”

“더 물어도 될까요?”

라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왜 신목에게 선택받은 건가요?”

라넷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건 제가 답변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자연의 섭리입니다.”

그렇게 대답할 줄은 대강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엘프랑 야수는 같은 고향을 두고 있어 서로를 느낄 수 있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엘프 아이들이 얘기했나 보군요.”

“네. 줄곧 궁금했어요.”

“엘프에게 구전되는 이야기입니다. 기록된 것이 없기에 정확한 내용은 저희도 모릅니다.”

내가 맥이 빠져서 어깨를 늘어트리자, 스노아가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신수의 계승자에 관해 더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이왕이면 고서에 적힌 내용 그대로요.”

“흐음…….”

라넷이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듯, 눈을 감고 침음을 삼켰다. 그러다 곧 떠올려내고 입을 열었다.

“고서에 적힌 내용은 간단합니다. 언젠가 신수의 계승자가 나타나리라. 신수를 비호하여, 계승자가 무사히 인도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을 엘프들에게 명하노라.”

“명하노라?”

나는 미간을 좁혔다.

“엘프에게 명령할 수 있는 존재는 몇 없지 않나요?”

“고대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현재는 드래곤님과 수장님 정도입니다.”

“드래곤님은 고서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나요?”

“많은 것을 알려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라넷이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지나친 개입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군요.”

나는 더 물어볼 것이 없나 의자 팔걸이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그때, 스노아가 나를 대신해 라넷에게 질문했다.

“인도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신수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길들이는 방법 말인가요?”

“아니요, 신수는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라넷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스스로 주인을 정하고 따릅니다. 여기서 다룬다는 건, 마나를 뜻합니다. 신수는 주인의 마나를 먹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아!”

나는 뭔가를 떠올리고 소리쳤다.

‘그럼 그때?’

신수가 내 팔을 물었을 때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나를 먹고 자란다면 그게 마나일 확률이 높았다.

‘마나를 먹은 후에 검은 기운이 사라졌었지. 그것도 신수의 능력인가?’

엘프들은 검은 기운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고 이전에 밝혔었다. 그래서 바드 같은 마족의 수작질 중 하나일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맞는다면 신수는 마족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아직 어려서 바드가 나타났을 땐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때문에 카카나 님께선 마나 다루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던 나는 별안간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네에?”

얼마나 크게 소리쳤는지 춤추며 노래하던 엘프들 몇몇이 멈춰서 나를 돌아볼 정도였다. 나는 홧홧해진 뺨을 손등으로 짓누르며 진정하려 애썼다. 그리고 엘프들의 시선이 떨어지자마자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속삭였다. 목소리를 죽였을 뿐이지 거의 고함을 지르는 것에 가까운 어투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마나 다루는 걸 배워야 한다니요?”

“신수에게 적당한 양의 마나를 공급해야 하는데, 그것을 조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넷이 침착하게 응수했다.

“그러지 않으면 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하는군요.”

“그게 쉬울 리 없잖아요! 평생을 단련해도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구요!”

“카카나 님은 계승자십니다.”

라넷이 단호하게 말했다.

“다루지 못하실 리 없습니다.”

나보다 확신에 차서 말하니 더 할 말도 없었다.

나는 넋이 나가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다.

‘마나? 마나를 배우라고?’

다시 생각해봐도 말이 안 돼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거였으면 제국이 마법 재능이 있는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눈에 불을 켜지도 않는다. 마탑도 새로운 인재를 애지중지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특별 취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언제나 사람이 부족했다.

물론 황녀 말에 따르면 그 안에서도 계급이 나뉘는 모양이지만, 황궁에서 대접받는 삶이란 평민과 비교가 불가능한 법이다.

그런데 배우란다.

나더러, 마나 다루는 법을.

‘어째 갈수록 태산인 것 같냐.’

한숨을 쉬자 신수가 내 손을 혀로 핥았다.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짐 덩어리를 떠안은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또 사르르 녹으려 했다. 단언컨대 신수의 또 다른 무기는 귀여운 외모임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맥없이 마음이 풀어져버리니 미워하기 힘들었다.

“카카나.”

그때 아다르와 뭐라 얘기를 주고받던 첼러스가 나를 불렀다. 꽤나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의아해져서 쳐다보자, 그가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며 말했다.

“마나는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왜?”

“너 마나 다룰 줄 알거든.”

대답은 아다르가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의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탓이었다. 아다르는 별 모양의 특이한 과일을 한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걸 기다렸다.

나는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미안, 잘못 들어서 그런데 다시…….”

“너 마나 이미 다룰 줄 안다고.”

나는 얼굴을 구기고 그를 쳐다보았다.

“너 벌써 취했니?”

술을 마시지 않는 첼러스와 스노아를 제외하면, 아다르는 용사들 중에서 가장 술에 약했다. 아마 벌써 이성을 잃었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해괴망측한 말을 할 리 없다.

그런데 첼러스가 곤란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카카나.”

“에?”

“놀라실 것 같아서 언제 말씀을…….”

“에에에엑!”

“……드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네들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마나를 다룰 수 있다니? 내가?’

나는 이상한 소리 말라고 윽박지르려다가, 첼러스가 동의했단 사실을 떠올리고 심각해졌다. 아다르라면 질 나쁜 장난을 칠 수도 있지만 첼러스는 아니다. 그가 이런 농담을 할 리가 없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내가 마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나?’

갑자기 마나의 개념에 혼란이 왔다.

‘아닌데. 제대로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아예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져보기로 했다. 제일 쉬운 건 제1자각 단계였으므로, 그것부터 고려해보았다.

‘이렇게 쉽게 배울 수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첫 단계가 쉽다는 건 이미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작조차 되지 않아서 절망한다.

유명한 마법사를 모셔놓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도 마찬가지다. 마나는 재능에 묶여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나는 마나를 다루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마나를 느끼는 수련인 명상조차 해본 적 없고, 어떤 마법적 현상을 겪은 적도 없었다.

‘역시 내가 사용할 줄 알 리가 없어.’

“너희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나는 머리를 그러쥐고 말했다.

“나는 침술 빼고 마나랑 연이 없는 사람이야. 본인이 자각도 못하는데 마나를 다루는 경우가 있긴 해?”

“있지.”

아다르가 턱으로 스노아를 가리켰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스노아를 쳐다보자 그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카카나, 아레사 나이제르를 기억하시나요?”

“물의 현자?”

갑자기 그 엉뚱한 양반은 왜 등장하는 걸까.

얘기가 나왔을 뿐인데 벌써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14살에 바로 제3자각자로 각성했어요. 혹시 알고 계셨나요?”

“마탑에서 마법사들이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나는 대강당에서 이루어졌던 스노아의 증명식을 떠올리며 말했다.

“스승이 발견해주기 전까지 알아채지 못했다고……. 아.”

“그 말대로예요.”

스노아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다루는 거죠. 저는 그런 자들을 무자각자라고 부르고 있어요.”

“나도 무자각자란 거야?”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쐐기를 박힌 기분이라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런 내게 그가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워낙 드문 일이라 정식으로 밝혀진 사람은 아레사뿐이지만, 아마 그런 경우가 제국 어딘가에 반드시 한 명쯤은 더 있을 거예요. 제 눈앞에도 있고요.”

나는 인상을 구기고 스노아의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내가 마나를 써놓고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다?”

“네. 카카나는 제1자각 중에서도 초반 단계예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리송한 눈을 하니 아다르가 자길 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제1자각에서 극초반은,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상태를 말해.”

“난 마나를 느껴본 적이 없어.”

“왜 없어? 침술 놓을 때 잘만 느끼더만.”

순간 골이 띵해졌다.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침을 놓을 때마다 그의 몸에 고여 있는 바다처럼 깊은 마나 웅덩이가 선명하게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그게 마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는 몰랐다.

잠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 있다가, 곧 페이스를 되찾고 고개를 저었다.

“설명했잖아. 그건 침이 마나감응재질로 되어 있어서…….”

“아니, 그뿐만이 아니야. 넌 분명히 마나를 느꼈어.”

아다르가 내 말을 중간에 가로채며 말했다.

“자각을 하지 못했을 뿐이지. 내가 그 정도도 구별 못할 줄 알아?”

아다르가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뭐 하는 건가 싶어서 멀뚱히 쳐다보자,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네 손목을 이렇게 잡은 적이 있잖아. 기억 안 나?”

“으응?”

처음 듣는 얘기어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다르가 맥이 빠진 듯 의자에 주저앉으며 피식 웃었다.

“역시 나만 기억하고 있었구만. 하여튼 무신경하다니까.”

“혼잣말하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봐. 언제 그랬다는 거야?”

“네가 처음으로 나 침 놔줬을 때. 네 침대에서. 이렇게 말하면 기억하냐?”

‘처음으로 침 놔줬을 때?’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인데 기억한단 말인가.

나는 어떻게든 떠올려보려 애썼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시기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약초를 구하러 가기 위해 마을을 내려가기 전 아다르가 최소한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도록 침을 놓아주었었다.

내가 감을 잡지 못하자 아다르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내가 너보고 마나를 다룰 줄 안다고 했잖아. 이렇게 말해도 기억 안 나?”

나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너, 방금 마나를 느꼈잖아.]

[내가? 언제?]

[마나가 제일 많이 체류된 곳을 귀신같이 알고 찌르던데.]

분명히 그런 대화를 나눴다.

‘그게 마나를 다룰 줄 알아서 가능한 거였다고?’

믿기 힘든 사실이어서 넋을 놓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다르가 끌끌 혀를 차며 과일주를 들이켰다. 나는 멍하니 질문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뭐가?”

“내가 마나를 다룰 줄 아는지 모르는지 어떻게 아냐고. 고작 손목 잡는 걸로.”

“마나를 느낀다는 건, 체내에 있는 네 마나의 반응을 느낄 수 있다는 소리야. 마나는 마나로 느낄 수 있거든.”

그건 초월자와 단순한 마나자각자를 구별 짓는 특징이기도 했다. 마나자각자들은 오직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마나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내 몸에 있는 마나를 느끼기 위해서 넌 어떻게 해야 되겠어?”

“신체접촉?”

“그거지.”

아다르가 잘 이해하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체내에 있는 마나를 나에게 최대한 가까이 붙이는 거야. 너는 심장 박동을 느끼는 거라고 말했지만.”

“…….”

“네가 침을 특히 조심해서 놓아야 할 때 습관적으로 상대를 잡더라고. 깨닫지 못했겠지만 그게 바로 마나를 느끼기 위한 준비 동작이야.”

그의 말이 왼쪽 귀로 들어와서 오른쪽 귀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아다르는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지금 얘기하나, 후에 얘기하나 내가 멍해질 거라는 사실엔 변화가 없을 거라 여긴 듯했다.

“혹시나 싶어서 네 손목을 잡아봤지. 마나가 몰려 있더라. 사용했다는 확실한 증거지. 네가 꿈에도 모르는 얼굴이어서 황당했지만.”

제일 황당한 건 나였다. 요 며칠 사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연속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안 되겠다.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납득할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대뜸 아다르의 가슴팍에 두 손을 얹었다. 용사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이고, 아다르가 드물게 질겁한 얼굴을 했지만 깡그리 무시했다.

그리고 손에 무언가가 느껴지는지 집중해보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침이 없어도 그의 마나를 느낄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았다. 그저 긴장한 것처럼 꿈틀거리는 아다르의 딱딱한 가슴근육만 만져질 뿐이었다.

“뭐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잖아.”

“무자각자는 자기가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한 가지 부작용을 겪어.”

할릭이 허허로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뭔데?”

“자연스럽게 쓸 줄 알았던 마나를 갑자기 다룰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스노아가 대꾸했다. 나는 실망해서 물었다.

“왜 그렇게 되는데?”

“의식을 하니까 오히려 다루지 못하는 거죠.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해요.”

“…….”

“이미 제 손처럼 다뤄본 경험 때문에 새로운 방식을 배우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아레사도 고생 많이 했어요.”

“그럼 뭐야. 걱정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더 걱정해야 되는 거잖아.”

“넌 아예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잖아.”

아다르가 한마디 했다.

“일단 가능하다는 것만 알아둬.”

우리의 대화를 여태껏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라넷이 말을 이었다.

“혹시, 여러분들은 모두 마나를 사용할 줄 아시는 겁니까?”

“아, 응.”

“다행입니다.”

라넷이 진심으로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엘프들은 선천적으로 마나를 느낄 수 있으나, 그렇기에 누군가를 가르치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라넷이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남성분들에게 마나 다루는 법을 배우시는 건 어떠십니까?”

나는 눈썹을 구겼다.

사람이 많은 장소에선 비교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지만, 용사들과 있을 때는 아직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둘러싸여서 마나를 배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숨이 막혔다.

고개를 저으며 잘 못 가르쳐도 괜찮으니 엘프를 붙여달라고 하려 했다. 그런데 스노아가 내 다음 대사를 미리 알기라도 한 사람처럼 대답을 가로챘다.

“물론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라넷.”

“엥? 아니 나는…….”

“감사합니다. 필요한 지원은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자, 잠깐.”

“아, 카카나 님.”

“네?”

“저번에 하셨던 질문에 수장님이 답을 주셨습니다.”

“어, 어떤 거요?”

나는 여기서 더 기겁할 자신이 없었다. 잔뜩 긴장한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제, 제가 또 뭔가를 물어봤던가요?”

이번엔 무슨 말이 나올까. 알 수 없어서 겁에 질려 있자니, 라넷이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드래곤님의 레어를 방문해도 되냐 묻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래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리헬론 님께 감사하다는 인사 전해주세요.”

수장은 잔치가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 거처로 떠난 지 오래였다. 그런데 라넷이 고개를 저었다.

“감사 인사는 드래곤님께 하시면 될 듯합니다. 드래곤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니까요.”

라넷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은 이틀 후입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깍듯하게 인사한 라넷이 엘프들의 무리에 섞여 사라졌다. 나는 그가 걸어간 자리를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한 차례 폭풍이 불다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

신수에겐 폭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꼬리가 심히 너구리를 닮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여우와 흡사한 외모를 가진 탓이었다.

드래곤의 레어는 엘프의 거주구역에서 멀었다. 걸어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이동수단이 필요했는데, 말을 상상했던 나는 크게 당황했다. 이동수단이 말이 아니라 야수였던 것이다. 나는 승마를 해본 적이 없었다.

‘말조차 제대로 탈 수 있을지 모르는데 야수라니…….’

혼자서 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처음부터 허들이 너무 높은 거 아닌가. 그나마 야수가 날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친히 높이를 낮춰주기까지 해서 올라타기가 어렵지 않았다. 기다란 꼬리를 가진 곰 외형의 야수에게 올라타자 뜨거운 체온과 꿈틀거리는 등 근육이 느껴졌다.

‘뛰면 몸이 많이 흔들릴 것 같은데.’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털을 꽉 움켜쥐었다.

‘이러면 아프려나?’

걱정이 되어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살폈다. 야수가 다정하게 내 얼굴을 핥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마음 놓고 손에 털을 돌돌 감아쥐었다. 맨발로 뛰는 것도 꽤 피곤한 일이지만 야수의 등에 매달려서 먼 거리를 달리는 것도 만만치 않게 피곤했다.

한참을 달리자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야수마저 내가 기진맥진한 것을 알고 조심히 뛰었다.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를 악물고 버티며 종종 뒤를 돌아보았다. 폭시가 짧은 다리로 용케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가 되어서야 절벽 근처에 멈춰 섰다. 해가 막 떠오를 때 출발한 것을 생각하면 몇 시간은 훌쩍 지난 셈이었다.

야수에서 내리자 연신 엉덩방아를 찧듯 흔들렸던 엉덩이가 얼얼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힘을 주었던 허벅지도 뻐근하게 당겼다.

“이쪽입니다.”

라넷이 절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거기엔 웬 밧줄 하나가 내려와 있었다. 굵은 넝쿨 줄기를 엮어 만든 것으로 보아 엘프의 작품인 듯했다.

나는 밧줄을 따라 고개를 위로 젖혔다. 높이가 끝이 없었다.

절벽, 그리고 밧줄. 갑자기 가슴이 싸해졌다. 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설마 이걸 타고 절벽을 오르자는 건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해줘요.

“맞습니다.”

라넷이 서글플 정도로 빠르게 대답했다.

“절벽 위에 드래곤님의 레어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걸 타고…….”

“사실 전 드래곤님을 뵙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재빠르게 태세전환을 했다. 밧줄 하나에 의지해서 절벽을 오르라니 절대 무리다.

“레어에 볼 일이 있는 사람들은 이 다섯 남자들이에요.”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용사들을 가리켰다.

“저는 올라갈 필요가 없어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하지만 드래곤님께선 카카나 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라넷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청을 하셨던 분은 카카나 님이 아닙니까?”

요청해놓고 너만 쏙 빠지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냐. 그 소리였다.

라넷의 말이 맞다. 올라가서 감사 인사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해서 그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저 윗동네 어딘가에 시커먼 동굴이 보이는 것 같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높은 장소였다.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텔레포트를 사용하면 안 될까요?”

스노아가 물었다.

“그녀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요. 밧줄로 절벽을 오르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마법은 안 됩니다. 저번에 경고를 드렸을 텐데요.”

라넷이 딱딱하게 말했다. 웬만한 요구는 대부분 들어주던 라넷이 이번에는 물러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마법에 배타적이지 않았던 엘프 아이들과는 상반되어 보였던 탓이다.

“혹시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저는 엘프가 마법에 융통성이 있는 줄 알았는데요.”

절벽을 오를 생각을 하니 자동으로 말이 예민하게 나갔다. 라넷이 눈치를 살피듯 절벽 위를 흘끗 살폈다. 그리곤 아주 조심스럽고 조용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이곳은 퀄리티미엄 안입니다. 곳곳에 드래곤님의 기운이 뻗쳐 있어, 혹 다른 이질적인 마법의 기운이 움직이면 드래곤님이 느끼실 수가 있지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드래곤님께선 지금 몸이…….”

그러나 라넷의 말이 채 다 이어지기도 전에 눈앞이 암전되었다. 놀라서 헉 숨을 들이켜기 무섭게 풍경이 바뀌었다.

텔레포트다.

놀란 토끼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공기가 습하고 소리가 울리는 걸 보아 동굴 안인 듯했다.

‘스노아가 텔레포트 한 건가?’

그러나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라넷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급하게 마법을 사용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마법을 사용할 만한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다.

드래곤.

‘여기 설마 레어 안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몸이 긴장되었다.

예민하게 곤두선 피부에 따스한 공기가 느껴졌다. 무슨 이유에선지 기온이 바깥보다 높았다.

앞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청각이나 촉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주기적으로 큰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밀물 썰물처럼, 느릿하고 규칙적인 바람이었다.

‘잠깐. 이거 설마 바람이 아니라…….’

돌연 주위가 환해졌다.

캐스팅된 라이트닝 볼이 작은 태양처럼 떠올라 동굴을 훤히 비추었다. 나는 이끼 낀 초록색 동굴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것이 이끼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유리조각처럼 미끈하고 딱딱한 초록색 비늘이었다.

빛이 미끄러지는 아름다운 비늘을 따라 고개를 위로 한참 들어올렸다. 등에 박쥐를 닮은 날개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몸이 어찌나 큰지 능선처럼 굴곡을 이루는 덩치가 산만 했다.

드래곤이다.

‘드래곤은 원래 이런가?’

비늘 사이사이마다 이끼가 껴 있었다. 중간에 새싹처럼 보이는 식물도 자라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에게 양분이 되어주는 썩은 고목나무도 아니고, 살아있는 드래곤에서 저런 것이 자란다고 생각하니까 이상했다.

드래곤이 폐부 깊숙이 공기를 빨아들이며 숨을 쉬었다. 동굴을 드나들던 바람소리였다. 그 외에는 움직이는 부위가 전혀 없었다. 숨을 쉬지 않았더라면 아마 드래곤 시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드래곤이 눈을 떴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내 몸만 한 동공이 스르륵 움직여 내게 향했다. 맹금류처럼 샛노란 눈이었다.

‘날 왜 저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지.’

조금 부담스러워져서 시선을 피했다. 라넷이 드래곤의 주둥이에 이마를 맞대어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눈꺼풀을 깜박인 드래곤이 라넷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고했다.”

얼마나 울림통이 큰지, 꼭 동굴 전체가 드래곤의 성대가 된 것 같았다. 나는 드래곤의 입을 확인했다. 벌어지지 않은 채였다. 입을 다물고도 말을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마법의 힘인가?’

라넷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려 레어를 벗어났다.

“신수를 품고 있구나.”

문득 드래곤이 내게 말을 걸었다.

폭시를 품에 안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웅크렸다. 그리고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말이 없는 건 용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은 존재 자체만으로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힘이 있었다.

여유로운 사람은 아르모어뿐이었는데, 그는 붉은 눈으로 드래곤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그가 별안간 눈썹을 구기며 말했다.

“몸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군.”

드래곤이 멀찍이 서 있던 아르모어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헛바람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유쾌함을 느낀 게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드래곤은 길게 웃었다. 그리고 간신히 진정한 뒤 얘기했다.

“그래, 나는 죽어가고 있다.”

“평범한 형태는 아닌 듯한데.”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니 그렇지. 나는 저주를 받아 이리 되었다.”

“저주?”

“그 전에, 물을 것이 있다.”

드래곤의 눈이 내게로 굴러왔다. 나는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어서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양 수인족 아이야. 네가 신수의 계승자인 것이냐?”

“그, 그게…….”

“긴장하지 말고, 자세히 말해 보거라.”

드래곤이 할아버지처럼 늙고 피로한 음색으로 말했다. 나는 마른입술을 핥았다가, 애써 긴장을 풀고 설명했다.

“신목에서 갑자기 이 알이 나왔는데, 어쩌다 보니 얘가 절 따라서…….”

“그런 말은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구나.”

드래곤이 내 말을 정정해주었다.

“신수는 영민한 동물이지. 네가 어쩌다 그 자리에 있었기에 따르는 게 아니다. 신목 또한, 우연히 알을 내보낸 것이 아니고.”

“…….”

“네가 왔기 때문에 알을 내보낸 것이다.”

드래곤이 내 품에 안긴 채 고롱고롱 잠들어 있는 신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목에서 이질적인 두 기운이 맞부딪친 건 알고 있다. 신수가 깨어나자마자 너를 따르더냐?”

“네.”

“그렇구나.”

드래곤이 푸욱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 돋아난 이끼들과 부스럼 같은 새싹들이 푸스스 떨어졌다.

드래곤이 노쇠한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건, 무기를 되찾기 위함이겠지.”

“어째서 저희 무기를 가지고 계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첼러스가 정중하게 물었다.

“기록은 제국이 용사들의 후예에게 물려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랬지.”

“허면…….”

“왜일 것 같으냐?”

드래곤이 웃는 듯 눈가를 휘며 말했다. 첼러스가 감을 잡지 못하고 침묵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비딱하게 서 있던 아다르가 끼어들었다.

“훔쳐서?”

“그렇지. 잘 아는구나.”

첼러스의 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그럼, 마족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그냥 구경하고 있으랴?”

드래곤이 쇳소리 나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리하긴 싫구나. 마족이 중간계를 지배하면 이곳에 있는 모든 엘프들이 곤란해져서 말이다.”

다소 험악한 어조로 얘기한 드래곤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라넷이 뒤돌아 나간 동굴의 출구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엘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는 듯한, 아련하고 깊은 눈이었다.

나는 괜히 숙연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개입’이었지.”

“엘프가 왜 곤란해진다는 것입니까? 퀄리티미엄은 바깥 세계와 동떨어진 공간입니다. 굳이 건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엘프와 마족은 상극이다. 물론 드래곤과도 상극이지. 드래곤과 달리 엘프는 연약한 종족이니, 영향을 받지 않을 리 없다.”

“상극이라 하심은…….”

“드래곤과 엘프의 뿌리는 천계에 있다. 마족은 마계의 본토종족이지. 상극끼리 부딪히면 화를 부르는 법이다.”

‘엘프가 천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당장 라넷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그들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생각하자면 천계와 연이 있다는 게 아주 상상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드래곤도 그러리라 짐작한 듯했다. 아주 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태초의 세상엔 천계, 중간계, 마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드래곤과 엘프, 그리고 야수는 중간계에 남은 천계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지.”

‘엘프랑 야수가 같은 고향을 두고 있다는 게 그런 뜻이었구나!’

뜻밖의 장소에서 해답을 얻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할릭이 수긍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마계의 흔적도 있겠군.”

“그렇다. 몬스터와 마물은 마계의 흔적이다. 오롯이 중간계에 속한 존재는 인간 정도일 게야.”

드래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아르모어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인간이란 뜻이군.”

“그렇다, 용 수인족의 마지막 왕이여. 그대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우리처럼 긴 세월을 사는 존재는 흔치 않으니.”

“…….”

“그대가 말한 대로, 중간계의 진정한 소유권은 인간에게 있지.”

“그러면 수인족은요?”

나는 불쑥 물었다. 대부분을 생략한 질문이었지만 다행히 드래곤은 내가 무엇을 묻는 건지 알아들었다.

“수인족은 애매하긴 하나, 천계의 피가 섞인 종족이다.”

나는 드래곤의 말을 듣고 적잖이 안심했다. 천족의 증표니 뭐니, 바드가 떠들었던 말들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었던 탓이다.

‘내가 수인족이기 때문에 바드가 착각한 걸 수도 있어. 엘프나 야수의 의지를 느낄 수 있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무기를 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첼러스가 가지고 있던 롱소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저희는 마족을 상대하게 될 듯합니다. 그러려면 본디 사용했던 무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은 이가 나가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수준이었다. 드래곤이 첼러스의 마나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진 롱소드의 검날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검의 주인인가. 그렇군……. 그대의 마나를 이겨내려면, 적어도 그 검은 되어야겠어.”

“그렇다면…….”

“그대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훔친 물건들이다. 흔쾌히 그리하고 싶으나.”

드래곤이 돌연 불편한 듯 몸을 뒤채며 푸욱, 콧바람을 내쉬었다. 잠깐 움직였을 뿐인데 지진이 인 것처럼 땅이 떨렸다.

“상황이 곤란하게 되었구나.”

“무엇이 곤란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그대들의 무기를 빼오다 마족의 저주에 걸렸다. 용 수인족의 말대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지.”

이어진 말은 담담한 어투와 달리 무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희게 질려서 드래곤의 몸을 확인했다. 저렇게 크고 위대한 존재가, 죽어가고 있었다. 마족의 저주에 의해서.

드래곤은 전설 속에서나 회자되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를 죽일 수 있을 만큼 마족의 저주가 강하다는 건, 초월자들에게도 위협적이란 뜻이었다. 일반 사람이 저주에 당하면 어떻게 될지 벌써부터 아찔해졌다.

“드래곤을 죽일 정도로 강하다.”

할릭이 턱을 문지르며 혼잣말을 했다.

“일이 내 생각보다 심각한데.”

드래곤이 상념에 잠긴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초월자가 아닌 인간은 마족을 상대할 수 없다. 그리고 오직 초월자인 인간만 마족을 상대할 수 있지.”

“상극이면 오히려 더 잘 대항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불과 물은 서로에게 취약하듯이 말이에요.”

“산불에 물방울을 떨어트리면 어떻게 되겠느냐?”

“…….”

“드래곤은 천계의 흔적이다. 흔적이 본토의 종족을 상대할 순 없는 노릇이야. 그러니 중간계의 주인이 땅을 지켜야 한다.”

그 말은 꼭, 중간계를 수호하기 위해 초월자가 배출되었다는 말처럼 들렸다. 용사들도 별반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후후…….”

줄곧 무언가를 생각하던 아르모어가 갑자기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나올 타이밍이 아니었는데 무엇이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현 상황이 꽤 암울하다는 것을 인지한 스노아가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마족이 그렇게 강하다면, 왜 진작 중간계를 정복하지 않았죠?”

“마법사여, 그건 마족과 천족이 휴전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이 답했다.

“마족이 어떤 묘수를 내어 중간계에 다시 출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서로에게 강력한 저주를 건 뒤 본토로 돌아갔다고 알고 있다.”

드래곤의 눈이 잠깐 신수에게로 향했다.

“중간계에 이질적인 존재가 나타나면 저주에 걸리도록 말이다. 그 제약 때문에 아직 마음껏 움직이지 못하는 게야.”

나는 신수의 몸을 뒤덮던 검은 기운과, 그것을 ‘저주’라 지칭했던 바드의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신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

‘내 마나를 먹고 괜찮아졌는데,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건가?’

고민하는 사이 스노아가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그럼 당신이 저주에 걸려 몸이 쇠약해지는 것과, 우리가 무기를 찾지 못하는 건 무슨 상관이죠?”

퍽 냉정한 말이었다. 스노아가 차가운 눈을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그저 레어에 묻혀 있을 무기를 되찾는 것뿐일 텐데요.”

“레어에 묻혀 있지 않기 때문에 문제인 게지.”

“장소를 알려주면 저희가 찾아가겠습니다.”

“찾아갈 수 없다. 내가 만든 아공간에 숨겨두었다. 나만 들어갈 수 있어.”

스노아가 낭패인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의 말이 이어질수록 도대체 무슨 저주가 걸렸다는 건지 궁금해졌다. 텔레포트로 우리를 이곳에 데려왔으니 마법을 아예 못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건 확실히 불가능해 보였다.

“혹시 어떤 저주인지 여쭤도 될까요? 저주보단 질병에 가까워 보여서요.”

“정확히 보았구나, 계승자여. 이 저주는 마계에 떠도는 질병을 마법의 형태로 내 몸에 옮긴 것이다. 알고 있는 것은 증상뿐이야.”

“그것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또렷한 눈으로 드래곤을 바라보며 말했다. 겁에 질려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했던 처음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드래곤이 흥미로운 듯 날 살피다가 천천히 이야기했다.

“체내 마나를 갉아먹고, 다른 이의 마나를 통증으로 느끼며, 몸이 쇠약해지고 있다. 지금은 보다시피 아예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몸을 살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라.”

드래곤이 무심한 어조로 허락했다. 제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더 이상 개의치 않는 어조였다.

‘아마 이렇게 되기 전에 이것저것 많은 시도를 해봤겠지.’

전부 먹히지 않자 체념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드래곤의 커다란 몸을 한 바퀴 둘러보며 겉으로 드러난 증상을 살폈다. 이끼라고 생각했던 것이 피부병처럼 비늘을 덮고 있었다. 새싹처럼 보이는 식물은 처음 보는 종류였는데, 일반적인 식물이 아니었다. 꼭 식물형 몬스터처럼 뿌리를 내리고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드래곤의 비늘은 단단하다던데, 어떻게 뿌리를 내린 거지?’

새싹이 자라난 부위에 코를 박다시피 하고 비늘을 두드려보았다. 강철을 때린 듯 손가락이 아팠다.

더 낱낱이 살피자 새싹 근처의 비늘만 동그랗게 녹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가죽은 안에서 위로 뚫린 것처럼 봉긋 솟아올라 있었다. 보기만 했을 뿐인데 무척 아파 보여서 미간이 구겨졌다.

‘퀄리티미엄에도 엘프 약사들이 있다고 했었지.’

마침 아다르의 말도 떠올랐다. 엘프 약사들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던.

‘이거 때문이었구나.’

이곳의 약초를 잘 알지 못해서 걱정이었는데, 그 부분은 해결된 셈이었다.

나는 투지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법가방을 뒤졌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상증세를 종이에 빠짐없이 휘갈겨 썼다.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저주 이후에 생긴 증상인지 헷갈릴 땐 드래곤에게 물어보았다. 일반 환자를 대한다고 생각하니 말 걸기도 쉬웠다.

‘무기를 되찾지 못하면 어차피 먼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해.’

그런 거라면 최선을 다해 드래곤을 치료해보는 게 나았다. 첼러스의 마나를 이겨내는 검을 찾기가 쉬울 리 없었다. 그뿐인가. 할릭의 주먹질에도 찢어지지 않는 장갑 또한 구해야 했다. 아르모어의 여의주는 말할 것도 없다. 대체 가능한 무기가 어디 있겠는가.

‘이번엔 드워프 마을을 찾아야 할지도.’

걱정스럽게 생각하며 내가 메모한 내용들을 빠짐없이 훑었다.

가장 빠른 길은 이곳 약사와 협력해서 저주를 몰아내는 거였다. 내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자 목이 말랐다.

“만약 당신이 죽으면, 이곳을 둘러싼 결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내가 기록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스노아가 넌지시 질문했다. 순간 축 늘어져 있던 드래곤의 날개에 힘이 들어갔다.

“퀄리티미엄의 결계를 지키는 일은 내가 이전의 드래곤으로부터 이어받은 사명이다.”

드래곤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노년에 접어들었을 정도로 오래 살았음에도, 이처럼 대단한 마법을 더 구경해본 적이 없다.”

“당신이 만든 게 아닌가요?”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새로 만든 게 아니라 이어받은 거라면 대체 얼마나 오래된 결계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니다. 나보다 훨씬 오래된 마법이며 그렇기에 내가 죽어도 결계는 유지될 거다.”

긍지를 느끼는 몸이 파르르 떨자, 이끼가 밑으로 떨어졌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험관을 꺼내 핀셋으로 이끼를 채취해 보관했다. 마음 같아선 새싹도 가져가고 싶지만, 뿌리를 뽑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일단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당신을 이어받을 드래곤은 누구인가요?”

스노아가 물었다.

“퀄리티미엄에 마음을 빼앗긴 드래곤이 되겠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내가 죽으면 금방 생길 거다.”

그는 자신이 지키고 있는 퀄리티미엄을, 이곳에서 엘프가 태어나고 마을을 이루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라넷은 드래곤이 다른 종족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존재라고 했다. 개입하는 순간은 오직 인간으로 폴리모프하여 유희를 즐길 때뿐, 그래서 방관자라 불린다고.

때문에 드래곤이 용사의 무기를 훔쳐왔다고 했을 때 의아했었다. 라넷이 말한 드래곤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알 것 같아.’

그는 마족의 위험성을 감수할 만큼 이곳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후회 없이 긍지만 남은 눈에서 그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갈라진 틈을 비집은 이끼와, 피를 빨아먹는 새싹들을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제가 몸을 봐드릴게요.”

“호오, 아이야. 네가 말이냐?”

드래곤이 허허롭게 웃었다. 노년이라더니, 저렇게 웃으니 정말 할아버지 드래곤 같았다.

“저는 이래 봬도 꽤 유능한 약사거든요. 퀄리티미엄의 약초엔 무지하지만, 엘프들과 협력하면 좋은 약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할 수 있겠느냐? 많은 엘프 아이들이 실패했다.”

“시도라도 해봐야죠.”

“그렇구나.”

드래곤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하루하루, 목표를 향해 불타오르는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허락하마.”

그가 완전히 눈을 감았다. 말을 많이 해서 지친 것 같았다.

“이만 돌아가 보거라.”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엘프의 거주구역에 돌아와 있었다.

절벽을 어떻게 내려갈지 은근히 걱정하고 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용사들을 살폈다. 모두 생각에 깊이 빠진 눈을 하고 있었다. 상대해야 할 마족에 관해 가장 정확한 정보를 얻은 날이니 그럴 만했다.

이제 남은 날은 내가 드래곤을 치유할 약을 개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

***

일주일간 저주에 집요하게 매달린 끝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대강 알아냈다. 저주는 검은색의 마나로 된 기포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폭시의 몸에서 부풀어 올랐던 거품과 비슷한 형태였다.

그것이 작은 벌레처럼 드래곤의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나혈은 물론이고 기혈에도 파고들어 파괴력을 행사했다. 마나기포에 노출된 조직은 고스란히 질병이 되어 몸에 축적되고 있었는데, 어찌나 지독한지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었던 거지?’

이런 걸 몸에 이고 몇십 년이나 버틴 드래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겉으로 드러난 이끼나 기생식물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문제는 오염되고 있는 피와 마나혈이었다.

나는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머리를 싸맸다. ‘정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엘프들도 이미 각종 소염작용을 하는 약초와 정화제를 사용해 봤다고 했다. 당연히 이렇다 할 효과는 보지 못했다. 병이 깊어지는 속도를 미세하게 늦추기만 할 뿐이었다. 그마저 한계에 다다라 지금은 죽어가는 드래곤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정화 마법도 먹히지 않았다고 했고.’

관건은, 마족의 마나기포를 몰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정화제에 달려 있었다. 마나를 다루는 것이니 당연히 침술도 병행해야 했다.

“기혈과 피의 문제는 오염된 마나혈의 부작용 때문이에요.”

내가 깃펜으로 양피지를 톡톡 두드리며 얘기하자, 엘프들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동한 듯했다.

“오염된 마나혈이요?”

“퀄리티미엄에도 침술이란 개념이 없나요?”

“처음 들어봐요.”

‘없는 모양이네.’

나는 자세를 바로하고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드래곤님의 몸에 이끼가 끼고 흡혈식물이 자라는 이유 말이에요. 그건 마나가 오염돼서 나타난 부작용인 것 같아요.”

“마나가 그런 식으로 작용하기도 하나요?”

“그럼요.”

엘프들이 존경하는 눈으로 날 우러러보았다. 선생님께 교육 받는 착한 학생의 모습이다.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마나혈부터 해결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마나혈은 뭔가요?”

“몸속에 피가 흐르는 관을 핏줄이라고 하잖아요. 혈관이라 부르기도 하고요.”

“네.”

“마나가 흐르는 관을 마나혈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자 불안감이 치솟았다. 엘프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 약물을 연구하고 나서부터 내가 조금 특이한 말을 한다 싶으면 그들은 두 손을 맞잡으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곤 했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었다.

“정말 박학다식하시네요! 역시 카카나 님은 대단하세요!”

“신목님께 선택받은 분이시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야.”

약초를 손질하던 엘프들이 하늘은 파랗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입을 맞췄다.

“맞아. 우리가 몇 년은 연구한 것도 며칠 만에 다 파악하셨잖아. 이제 퀄리티미엄의 약초는 대부분 알고 계실걸?”

나는 화제를 바꿀 필요를 느꼈다.

“드래곤님을 다시 찾아뵈어야겠어요.”

침으로 마나혈의 상태를 제대로 살펴보아야 했다.

드래곤이 거론되자 엘프들이 조용해졌다. 엘프에게 드래곤은 하늘과 같은 존재라더니, 태도까지 엄숙해지는 걸로 봐선 사실인 듯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우리는 드래곤을 찾기 위해 거주구역을 벗어났다.

‘침은 사람 말고 놓아본 적이 없는데, 괜찮을까?’

하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죽을 목숨이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았다.

‘시도해보는 데에 의의를 두자.’

그러나 곧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드래곤이 숙면 중이어서 나를 텔레포트 해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스노아가 마법을 사용하면 드래곤이 고통을 느끼므로 마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쩌지. 내가 절벽을 등반하는 건 무린데…….’

난감한 얼굴로 절벽을 올려다보고 있자, 다행히 엘프들이 묘수를 냈다. 나를 주머니식물에 넣어서 넝쿨로 고정시킨 다음, 위에서 끌어올리는 방식이었다.

“갑자기 구멍이 뚫리진 않겠죠?”

나는 두려움에 떨며 물었다. 엘프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저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주머니식물은 굉장히 질겨요, 카카나 님.”

“바위골렘이 밟아도 끄떡없을 겁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는 주머니 식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집에 있는 침구와 비슷한 모양이었으나, 안에 털이 없었다.

나는 엘프들이 미리 챙겨주었던 조명식물 화분을 품으로 끌어와 끝을 건드렸다. 그러자 컴컴한 내부에 따스한 불빛이 번졌다. 그게 퍽 안정감을 가져다주어서 어깨에 힘을 풀었다.

곧이어 식물이 위로 들리는 느낌이 났다.

‘별로 안 무섭네?’

내부가 아늑해서 그런지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양피지를 꺼내 약재 목록을 살폈다. 덕분에 시간이 금방 갔다.

“카카나 님, 이제 나오셔도 돼요!”

바깥에서 엘프들이 소리치는 게 들렸다.

“고마워요.”

주머니에서 설설 기어 나오며 감사 인사부터 건넸다. 나 때문에 괜히 더 고생한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당신은 저희의 희망입니다.”

무뚝뚝한 성격의 엘프가 라넷처럼 깍듯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서 부정하면 그들의 찬양에 가까운 연설을 한 시간은 더 들어야 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드래곤의 거대한 몸체를 살폈다.

‘전반적인 상태를 살피는 데 사지는 비효율적이야. 이왕이면 몸통이 좋겠는데…….’

나는 거의 작은 언덕 수준인 드래곤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저길 올라갈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지만, 한번 등반해보기로 했다.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엘프들은 내게 힘이 되지 못해 안달이었다. 바람의 정령처럼 날래게 몸을 움직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능선을 방불케 하는 드래곤의 허리로 올라갔다.

나는 엘프가 던져준 밧줄을 잡고 드래곤의 몸을 기어 올라갔다. 내가 힘이 세서 다행이었다. 비늘이 어찌나 미끄러운지 팔 힘이 약했더라면 금방 굴러 떨어졌을 것 같았다.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자 간신히 등에 도착했다. 이마의 땀을 훑으며 주위를 살폈다. 엘프 한 명이 드래곤의 몸을 손으로 쓸며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면기가 아닌데도 이렇게 오래 잔다는 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드래곤은 엘프들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수호신이다. 퀄리티미엄이 없었다면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붙잡혀 수인족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엘프가 자연을 사랑하는 평화의 종족이기에 더욱 그랬다.

“해낼 수 있을까요?”

엘프가 녹음의 눈망울에 슬픔을 담고서 물었다. 나는 새싹이 심각하게 돋아 있는 등줄기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해내야죠.”

눈물이 배어나온 눈가를 소매로 문질러 닦은 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묵묵히 마법가방을 벗어 엘프의 손에 맡겼다. 그리고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드래곤의 몸 위를 돌아다녔다.

‘등이 훨씬 심하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뒷덜미로 향했다. 인간의 주요 혈관이 목을 지나가듯, 드래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손을 내밀었다. 엘프가 미리 들고 있던 침통을 내게 건네주었다. 바늘 중에서 가장 크고 기다란 장침을 꺼내들었다. 큰 관절 사지에 든 비병을 치료할 때 쓰이는 침이었다.

처음부터 드래곤의 뼈마디를 바늘로 쑤실 생각은 아니지만, 몸이 워낙 크다 보니 이것도 짧았다.

‘따로 침을 제작해야 하나?’

곤란하게 여기며 목덜미 근처에 바늘을 가져다대었다. 그러자 바늘이 요란하게 울리며 마나의 존재를 알렸다. 세기가 강한 것으로 보아 큰 마나혈이 지나가는 듯했다.

나는 바늘을 쥔 채 오리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참을 움직였는데도 세기에 변함이 없었다.

‘마나혈이 대체 얼마나 굵은 거야?’

머리 부분으로 거의 옮겨가고 나서야 세기에 변화가 생겼다. 그런데 여기도 세기가 강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러면 뭐가 뭔지 구별이 잘 안 되는데, 큰일이네…….’

용사들을 침으로 치료했을 때도 이처럼 어렵진 않았다. 그들은 몸의 크기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마나가 무식하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끊임없이 물이 들어오는 작은 둑 같았다. 그러나 드래곤은 무한한 물을 가둬놓은 댐이었다. 바늘의 울림으로 자리를 찾고 침을 꽂아야 하는 침술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늘은 정확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마나를 느낄 수 있다면?’

그러면 설사 마나감응재질이 아닌 바늘이라 하더라도 더 안전한 침술을 진행할 수 있다.

‘해보자.’

의식적으로 시도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연습해서라도 침술을 병행해야 해.’

눈을 감고 바늘을 쥐지 않은 손을 드래곤의 몸에 대었다. 평소 침술을 진행할 때랑 똑같이. 그리고 바늘의 울림에 집중했다.

어디를 찔러야 할지 감각을 곤두세우면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르곤 했다. 마나가 어떤 모양으로 뻗어 있고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까마득한 암흑만 펼쳐질 뿐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인상을 찡그리고 내가 전에 어떻게 해왔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떠오르기는커녕 생각할수록 혼란만 가중되었다.

꼭 누가 눈을 굴리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한 기분이었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난감하기만 했다.

우선 마나를 느끼는 것은 포기하고 바늘을 비늘에 가져다댔다. 깊숙이 찌를 생각은 없었다. 그저 피부를 긁어서 피를 시험관에 담아갈 생각이었다. 신중하게 위치를 잡은 다음 바늘을 살짝 찔렀다.

아니, 찔렀다고 생각했다. 나는 눈을 멍청하게 껌벅이며 드래곤의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엥?”

“문제가 있나요?”

엘프가 초조해하며 물었다. 나는 보란 듯이 바늘로 비늘을 쳤다. 조금도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바늘을 돌에 찍는 느낌인데?’

바늘을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엔 있는 힘을 다해 바늘을 찔러 넣으려고 노력했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혹시 피 때문에 그러세요?”

엘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헥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드래곤님이 깨어 있을 때 따로 부탁하셔야 해요.”

“네? 왜요?”

“바늘이 아니라, 날이 잘 선 명검을 가져와도 드래곤님의 가죽에 상처를 낼 수가 없거든요.”

나는 탁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짚었다.

‘마나를 느끼고 자시고 할 게 아니었네…….’

명검이 들지 않는다면 바늘의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꽂을 수 없다면 마나를 느낄 수 있어도 말짱 도루묵이었다. 결국 우리는 별 소득 없이 거주구역으로 돌아와야 했다.

***

한편 거주구역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용사들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소식을 들었다. 마족이나 천족의 이야기가 등장했을 때보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문제는 엘프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졌다.

“여러분! 여러분들 모두 카카나 님에게 차였다면서요?”

“맞아요! 그래서 아직 연애도 못 하고 있다면서요?”

“왜요? 카카나 님은 용사님을 싫어하지 않는데, 왜 거절한 거래요?”

아이들은 어른보다 호기심이 왕성했다. 카카나가 집에 틀어박혀 대부분의 시간을 약물연구로 소비하자, 지치지 않고 목표를 용사들로 바꾼 것이다.

어른 엘프들은 모두 각자의 일을 하느라 마을이 한산한 시간대였다. 그간 아이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던 라넷조차 사라지고 안 보였다. 용사들은 당연히 까무러쳤다.

할릭은 너무 놀라서 마시고 있던 과일 주스를 옷에 흘려버릴 정도였다.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나요, 꼬마 친구들?”

스노아가 웃는 얼굴로 심문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얘기했다.

“리나스가 알려줬어요!”

“리나스?”

“우리 마을의 유명한 재봉사예요! 예쁜 옷을 많이 만들어요!”

“계승의식에서 카카나 님의 옷을 골라준 분도 리나스예요!”

발코니에 앉아 상황을 방관하고 있던 아다르가 밑으로 붕 뛰어내렸다. 엘프도 그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진 못하는 터라, 아이들이 와아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아다르가 아이들 근처에 쭈그리고 앉으며 말을 걸었다.

“그 얘기 자세히 좀 해봐, 얘들아. 리나스라는 엘프가 너희에게 뭐라고 하든?”

아다르의 검은 눈이 재밌는 것을 발견한 맹수처럼 음험하게 빛났다. 그 눈빛의 뜻을 알 리가 없는 아이들이 마냥 신나서 주절주절 떠들었다.

“저희에게 직접 말한 건 아니에요!”

“맞아요, 우연히 들었어요! 카카나 님이 아직 미혼이시라고요!”

“리나스 친구들은 모두 깜짝 놀랐죠! 그래서 루니스가 물었어요. 왜 부부가 아니래?”

“그랬더니 아직 연인 사이도 아니라지 뭐예요?”

“카카나 님이 거절했다는 거예요!”

아다르는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고백했는데 카카나가 거절했다고?”

“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용사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이들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당연히 연인 사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면서 놀라더라고요.”

“당연히?”

“그야 여러분들은 카카나 님을 사랑하고 있잖아요!”

아다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도 무지무지무지, 무진장!”

아이가 두 팔을 벌려 거대한 원을 그리면서 말했다.

아다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첼러스의 얼굴은 이미 회색빛으로 죽어갈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가만있어봐. 이거 지금 큰일 난 거 맞지?’

검지로 미간을 문지르던 아다르가 이내 모든 정보를 캐내기로 작정했다. 재미있어서 찔러나 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끝낼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관련직에 종사했던지라, 다행히 그는 아이들이 채 의식하고 있지 않았던 부분까지 삭삭 긁어내는 데 능숙했다.

그는 한참을 질문했다. 아이들이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중간에 재미있는 농까지 섞어가면서.

결과는 이랬다.

엘프들의 말실수로 카카나에게 마음을 들켰다. 한두 명도 아니고, 전원의 마음을. 심지어 폭로한 이가 엘프여서 의심의 여지도 없다.

진실을 꿰뚫는 눈이 이런 식으로 작용할 줄 몰랐던 용사들은 허를 찔렸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벌써 한참 지난 일이고, 카카나는 그 사실을 이미 받아들였다.

‘그래서…….’

할릭은 최근 이상하게 행동했던 카카나를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시선을 피하고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던 모습. 갑자기 몸을 파르르 떨거나, 귀와 볼을 빨갛게 물들이던 모습.

정신이 혼미해진 첼러스가 나무기둥에 등을 기댔다. 상황을 지켜보던 스노아마저 착잡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서, 더 얘기하고 싶은 거 있니?”

간신히 평정심을 찾은 아다르가 마지막 한 방울의 정보까지 쥐어짰다.

간만에 이야깃거리가 생긴 아이들은 그저 신나서 입을 놀렸다. 엘프는 기억력이 뛰어났다. 카카나의 말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던 리나스처럼, 리나스의 말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아이들이 세세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한번은 리나스가 카카나 님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대요.”

“일행이 싫으냐고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할릭이 퍼뜩 머리를 들었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다.

용사들이 집중하며 눈을 빛내자, 아이들이 더 신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는 거예요!”

“이상하지 않아요?”

“리나스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그럼 왜 사귀지 않느냐고 물었대요.”

“그랬더니?”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아다르가 거의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갈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아이들이 뜸들이지 않고 답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했대요.”

“그렇게 말하곤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가, 나중엔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맞아요.”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시에 말했다.

“자기감정을 모르겠다고요!”

“…….”

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용사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아이가 더 얘기할 게 없나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리나스는 여러분의 연애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가능성, 이라고요?”

스노아가 신중하게 물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엘프가 보기에 카카나 님은 여러분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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