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새로운 국면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카카나가 말을 잃고 딱딱하게 얼었다. 용사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황녀가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차원전쟁이 끝난 순간부터, 제국의 황실은 마족에게 조종당하고 있어요.”
조금쯤 여유가 사라진, 그러나 필사적으로 꾸며진 미소를 지으며 오로라가 화제를 돌렸다.
“주제가 너무 무거우니 잠깐 다른 얘기를 할까요?”
그녀가 카카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카카나의 좁은 어깨가 미세하게 더 움츠러들었다.
“인사가 늦었네요, 페아 씨. 오로라 그랑루이랍니다. 사교파티가 아니니, 첫인사는 이 정도로만 할까요?”
경계심이 잔뜩 오른 카카나가 황녀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녀는 제 이름을 황녀에게 말한 적이 없다. 그녀도 황녀가 수상하다는 것을 진작 눈치챘을 터였다.
“페아 씨에게 궁금한 게 있답니다.”
황녀가 잔뜩 가시 돋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물었다.
“계속 숨어 사실 건가요?”
“뭐라고요?”
“이번에도 안전한 거처를 찾으시는 것 같던데요.”
말하지도 않은 사생활까지 언급한다. 인간관계에 아무리 둔하고 서투른 카카나라지만, 황녀가 선을 넘었다는 걸 그녀 또한 알아챘다.
“저기요.”
카카나가 경고의 의미로 대화를 자르려는데, 오로라가 선수를 쳤다.
“바드, 그는 오블라 계급의 황실마법사예요. 오블라는 작위를 받을 기회가 주어지는 중상급 평민 마법사 계급이죠.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직책이지만, 황실은 그를 극진하게 대접하고 있답니다.”
“그 얘긴 갑자기 왜 나오는 거죠?”
“그가 당신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던가요?”
[천족의 증표를 찾으려는 거잖아.]
카카나가 조용히 두 손을 주먹 쥐었다. 황녀도 그가 하는 헛소리들을 들은 게 분명했다.
‘근데 바드는 왜 황녀를 눈치채지 못한 거지?’
황녀의 시선이 카카나의 곁에 꼭 붙어 서 있는 작은 동물에게로 옮겨갔다. 검은 연기에 공격을 받은 이후로 기운이 많이 빠졌지만, 여전히 그녀를 지키고자 빳빳하게 털을 세우고 있는 아름다운 은빛 생명체.
신수.
“당신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 말이에요.”
카카나가 움찔 몸을 떨었으나, 곧 고개를 저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당신, 혹시라도 이전부터 내게 뭔가를 하고 있었던 거라면…….”
“전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황녀가 바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카카나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욘 없잖아? 나한테 특별한 힘이라니 그런 헛소리는…….”
그녀가 애써 부정하자, 황녀가 담담하게 되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요? 그렇다고 하기엔, 이미 많은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나는 조금 불행했을 뿐인, 평범한 사람이야. 여태 그렇게 살아왔고!”
“혹은, 단순히 잠재되어 있었던 걸 수도 있죠. 어쩌면 징조가 있었는데 무시했을 수도 있고요.”
왜 디카타 산에서 만났던, 빌어먹을 ‘양’이 지금 생각나는 걸까.
카카나가 아랫입술을 씹어 물자, 황녀가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조급해 말아요. 뭐든, 천천히 알아 가면 되는 거예요. 제가 그랬듯이 말이죠.”
“당신이 뭐라고 말하든, 난 이 일에 끼어들 생각 없어. 당신 말대로 마족이니 뭐니 어디서 거창한 게 튀어나온 거라면, 더더욱 끼어들 생각 없고.”
“그렇게 겁먹어 있으면 동생이 마음 아파하지 않을까요?”
카카나의 눈이 황녀에게로 향했다.
속이 텅 비어 보이는, 동그랗고 공허한 노란색 눈이 깜박이지도 않은 채 한참 동안 황녀를 응시했다. 그녀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곤, 오로라의 말을 한참 동안 속으로 되새겼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당신, 한 번만 더 내게 동생을 언급했다간…….”
“동생이 보고 싶으시잖아요, 페아 씨.”
“동생은 죽었어!”
“그런가요?”
황녀가 뒤편으로 손을 뻗었다. 줄곧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던, 작은 체구의 로브를 입은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로브의 짙은 고동색 후드 바깥으로 구불거리는 살굿빛 머리카락이 조금 삐져나와 있었다. 카카나의 눈이 충격으로 벌어졌다.
황녀가 아랑곳 않고 로브 차림의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지 않니, 다니? 언니가 겁먹고 숨어만 살면, 너도 마음이 아프잖아.”
로브 속의 여인, 다니가 후드를 벗었다. 용사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다니와 카카나를 번갈아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창백한 노란색 눈망울. 카카나보다 반쯤은 덜 말려 있는 양의 뿔과 만두 모양으로 둘둘 감아 올린 곱슬머리.
놀라울 정도로 똑같으나, 분위기가 정반대 수준으로 상반된 양 수인족이 오로라 곁에 서있었다.
“다다나?”
카카나가 너무 충격 받아 숨도 쉬지 못한 채, 바람소리만 이는 음성으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카카나의 몸이 흔들리자, 스노아가 서둘러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었다. 얼굴은 곧 기절이라도 할 듯 시퍼렇게 질려 있다.
“쉬이, 카카나. 진정해요.”
그러나 카카나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오직 죽은 줄로만 알았던, 제 피붙이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언니.”
다다나가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다. 그토록, 그녀를 괴롭혔던…….
카카나가 다다나에게 한 걸음 움직이려는 찰나, 황녀가 입을 열었다.
“이런. 시간이 되어버렸네요.”
카카나의 날카로운 시선이 황녀에게로 휙 날아가 꽂힌다. 전투라곤 할 줄 모르는 그녀의 진한 꿀색 눈망울에 살기가 흘러넘쳤다.
“당신, 내 동생에게 무슨…….”
“그만둬.”
다다나가 냉정하게 카카나의 말을 끊어냈다.
“황녀님께 계속 무례하게 행동하면, 아무리 언니라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극적으로 상봉한 자매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차갑고, 사무적인 어투였다. 카카나의 눈이 실망과 비참함으로 어그러졌다.
“황녀님은 내 생명의 은인이셔.”
“다다나, 이게 대체 무슨…….”
“언니.”
“…….”
“기다릴게.”
황녀가 다다나의 손을 잡았다. 그들이 어디론가 떠나리라는 것을 직감한 카카나가 악을 쓰며 손을 뻗었다.
“안 돼! 다다나! 기다려, 제발!”
그러나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카카나의 몸이 기어코 풀밭에 쓰러졌다. 그녀는 용사들이 달려들어 일으켜 세워줄 때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일어서는 법을 영영 잊어버린 사람처럼.
***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카카나는 엘프들의 거주구역으로 옮겨져 새로운 방을 배정받았다. 그 기간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용사들이 일부러 말을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대답을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으로 대신했다. 얼굴빛이 창백하게 질린 채 맛 좋은 음식을 가져다줘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다 새로 배정받은 방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마자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그간의 행적을 생각해보건대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태로 일주일을 꽉 채우자 용사들은 거의 미쳐가고 있었다.
“카카나의 여동생을 황녀가 데리고 있었던 게 문제인 거야?”
할릭이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물었다. 걱정하느라 잠을 못 잔 탓에 눈 밑이 다크서클로 시커멨다.
아다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귀신을 본 낯이었잖아. 죽은 줄 알고 있었던 동생이 멀쩡하게 황녀랑 있으니까 놀란 거지.”
“실망한 걸까? 왜 진작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나 하고?”
“그런 걸 수도 있어.”
아다르가 씁쓸하게 수긍했다.
“황녀랑 함께였으면 카카나가 자기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았을 거야. 근데도 말하지 않은 거잖아. 여태까지.”
“동생이 함께 있는 걸 보니, 카카나의 과거에 황녀가 얽혀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줄곧 생각에 잠겨 있던 스노아가 착잡하게 얘기했다.
“그녀는 여태 몰랐던 눈치고요.”
아다르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받았다.
“우리 진짜 카카나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
“…….”
“무슨 사정인지 알면 뭐든 해볼 텐데 없으니 이러고 있는 거잖아. 어쭙잖게 건드렸다가 오히려 더 상처를 줄까 봐.”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았으므로 뭘 물을 수도 없었다. 화장실은 가고 있는 건지, 집 안에서 숨은 쉬고 있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인데, 감당을 하지 못해서 스스로를 고문하고 있었다. 용사들만 애가 탔다.
“그녀가 방을 따로 배정받은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첼러스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조차 모른다는 뜻이다.
네 명의 용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아르모어는 그런 용사들을 묵묵히 관찰하고 있었다. 다들 황녀가 고백했던 마족에 관한 이야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마족과 천족은 조각난 퍼즐처럼 유물에나 한두 번 언급되는 정도였다. 워낙 허무맹랑하고 잊힌 존재라 동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사들은 무심했다. 그 굉장한 이야기가, 카카나의 안위보다 덜 중요하단 의미였다.
용사들은 그녀가 어떻게 하면 기운을 차릴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를 열성적으로 이끌었다.
“안 되겠다. 스노아, 네가 가봐.”
아다르가 제안했다.
“왜 저죠?”
“카카나가 너보고 인어공주님이라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그건 어린 카카나잖아요.”
“단언컨대 걘 취향 안 변했을 거야.”
할릭마저 거들었다.
“자기가 아끼는 약물들은 약병도 예쁘고 섬세한 걸 쓰잖아. 초록색 약물은 에메랄드 모양의 약병에 담아놨더라.”
“예쁜 거에 사족을 못 쓴단 얘기지.”
희망을 발견한 아다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할릭이 씁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면 첼러스랑 스노아한테는 거칠게 군 적 한 번도 없어. 아르모어는 대하기 어렵다고 했었으니, 논외로 치고.”
“그건 당신들이 카카나의 성질을 긁기 때문이잖아요.”
스노아가 할릭과 아다르를 향해 뾰족한 눈을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당신들에게도 상냥했을 거예요.”
“자기가 얼마나 특별취급 받는지 모르는구만.”
할릭이 대들었다.
“걔가 너 보면서 얼마나 자주 방글방글 웃는지 알아? 머리카락도 파랗다면서 괜히 만져보고. 내가 다가가면 흠칫 놀라면서.”
“…….”
“아다르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잖아. 이래도 그런 소리 할래? 진짜 서러워서.”
할 말이 없어진 스노아가 한동안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러면 첼러스에게 부탁해도 되지 않을까요?”
“왜 그렇게 꺼려 해?”
아다르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네가 가는 게 제일 낫다는 거 알잖아. 평소엔 그렇게 효율을 따지면서 왜 그러는 거야?”
스노아가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털어놓았다.
“상냥하게 대하는 데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스노아는 용사들 중 가장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했다. 어울리지 않는 고민이었으나, 용사들은 모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스노아의 겉과 속이 얼마나 다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모두 음침하고 계산적이며, 절대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그렇지 않은 마법사는 단단한 가면을 썼을 뿐이라고 말이다. 기사들이 교활한 마법사더러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스노아는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본인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간 만나왔던 마법사들 또한 비슷한 면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다르는 음험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인위적으로 풍겨 스스로를 보호한다. 그러나 스노아는 그것을 숨기고 상냥한 얼굴을 하면서 계략적으로 행동했다.
부드러운 말투를 고집하는 건 그 편이 사람을 상대하기에 유리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 외의 인간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되레 진심이 되었을 때 서툴러지곤 했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스노아가 감정적으로 바뀌었다는 건, 가장 취약해졌다는 말과 똑같았다. 그는 카카나의 상처를 위로해주는 순간까지 가식적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카카나는 저를 대하는 걸 다소 어려워합니다, 스노아.”
첼러스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노력해도 안 되겠습니까?”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그럼 아는 사람도 있냐?”
아다르가 짜증을 냈다.
“몰라도 시도해보는 거잖아. 그런 게 인간관계 아니야? 혼자 음침한 데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고 살았던 게 이런 데서 티가 나네.”
그가 끌끌끌 혀를 찼다.
스노아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네요.”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웠으나 마땅한 사람이 자기 말곤 없다는 걸 스노아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카카나의 집으로 향할 것처럼 움직이자, 아다르가 곧장 뒤를 쫓았다.
“야, 그냥 가려고 하면 어떡해!”
아다르의 웃는 얼굴을 본 스노아가 눈가를 찡그렸다.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에게 이상한 짓 하려고 하지 말아요, 아다르.”
스노아가 곧장 못을 박았지만, 아다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네가 뽑힌 이유를 잊었어? 카카나의 마음을 동하게 할 정도로 예쁘게 꾸미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스노아가 방긋 웃었다.
“죽고 싶은 건가요?”
아다르도 지지 않고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갈 거면 가든지? 꽁꽁 닫혀버린 카카나의 마음을 여는 건 오로지 네 입에 달렸지만, 난 상관없어.”
그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이기까지 했다.
“내가 가는 것도 아닌데, 뭐.”
분하지만 아다르의 승리다. 스노아가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다르가 그를 이끌고 집을 나섰다. 엘프들은 이미 마을광장에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인 카카나가 위기에 처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달콤한 과일을 따다 주자며 쑥덕대고 있었다.
아다르는 그들 중 가장 화려하게 꾸민 엘프에게 다가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엘프가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게요!”
불타는 눈을 본 스노아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그새 소식을 들은 거주구역의 주민이 용사의 거처 근처로 옹기종기 모였다. 모두 마을에서 꾸미는 데 일가견이 있는 엘프들이었다. 다들 스노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어디를 손봐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놀랍게도 엘프들은 용사의 이름조차 몰랐다. 카카나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퀄리티미엄을 떠나는 순간까지 몰랐을 것이다.
엘프들은 카카나를 달래러 가는 사람이 스노아인 것을 알고는 크게 안심했다.
“다행이네요. 당신은 가장 엘프와 비슷하게 생겼거든요.”
“아름답고, 우아하죠.”
자기를 리나스라고 소개한 엘프가 책을 뒤적이며 말했다. 제국의 복식에 관한 그림책이었다. 제국의 문화에 관심이 부쩍 늘어난 라넷이 최근 구입해온 참이었다.
“너무 꾸미면 카카나 님이 당황하실 수도 있으니까, 자연스러우면서도 예쁘장한 미모가 드러날 수 있게 해야겠어요.”
자고로 ‘꾸민 티가 나지 않으면서 예쁘게’란 말이 제일 어려운 법이다. 용사들의 표정에 걱정이 어리자 엘프가 자신 있게 말했다.
“워낙 곱게 생기셔서 뭘 입든 빛이 나실 거예요.”
“맞아요. 줄곧 로브를 입고 계시던데, 다른 옷을 입는 것만으로 매력이 살걸요?”
저들끼리 몇 마디 주고받은 엘프들이 스노아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예전이었다면 적당히 그늘진 곳에서 옷을 갈아입혔을 테지만, 그동안 엘프들도 인간의 문화를 공부했다. 몸을 드러내는 걸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을 배려한 행동이었다.
용사들은 그루터기에 앉아서 스노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꽤 걸렸다.
엘프의 복식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머리와 눈 색이 초록색인 탓에 대부분 녹색과 황색 계열의 옷을 즐겨 입었다. 아마 스노아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스노아는 파란 머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아다르가 지루하게 하품했다.
약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드디어 스노아가 나타났다. 그를 놀릴 준비를 하고 있던 용사들은 눈을 댕그랗게 떴다.
할릭이 소리 내어 감탄했다.
“야, 너 진짜 엘프 같다.”
스노아는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7부바지에 재질이 하늘하늘한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겉옷으로는 말끔한 진청색 코트를 걸쳤다.
단순한 차림이지만, 얼굴 탓인지 과하지 않고 되레 고귀해 보였다.
“제 모습이 카카나의 마음에 들까요?”
스노아가 염려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녀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가 부족할까 봐 걱정되네요.”
그렇게 말하는 스노아는 물에서 솟아오른 요정처럼 신비롭고 청순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코트가 섬세한 곡선을 그렸기에 더했다. 칼라나 라펠이 달려있지 않았고, 대신 물결무늬 자수가 꼼꼼하게 놓여 있었다. 어떤 실을 사용한 건지, 은사처럼 어슴푸레하게 반짝거려서 시선이 갔다.
코트는 앞판이 가슴팍의 반을 가리며 내려오다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짧아져서, 뒤판을 길게 빼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노아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코트의 뒤판이 꼬리처럼 길게 늘어지며 펄럭거렸다.
머리도 그와 어울리게 풀어져 있었다. 스노아는 대부분 꽁지머리를 하고 다녔는데, 머리를 푼 탓인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파랗게 반짝거리는 웨이브머리가 헤어오일을 발라 찬란하게 빛났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너 지금 완전 카카나 취향이니까.”
할릭이 쓴 약을 삼키는 표정으로 스노아를 위로했다.
“진짜 너무 예뻐요!”
옆에 서 있던 엘프가 짝짝짝, 박수치며 말했다. 스노아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제 예쁜 얼굴을 좋아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고맙게 느껴지네요.”
“카카나가 보면 한동안은 멍하니 쳐다볼 거라는 데 한 표.”
아다르가 거들었다.
그나마 받아줄 것 같은 사람이 스노아여서 꾸민 거였지만, 이렇게 막강한 외모라면 더 희망이 있었다. 아마 정신이 말짱한 사람이어도 잠깐은 충격을 먹고 넋을 놓을 것이다.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용사들은 비장하게 카카나가 있는 집으로 향했다.
스노아의 손에는 엘프 약사들에게서 얻어온 신비한 약초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하나같이 화려한 탓에 꼭 꽃바구니처럼 보였다.
“청혼하러 가는 것 같네요.”
스노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준 그가 마침내 카카나의 집 문 앞에 섰다. 물론 용사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잔뜩 긴장하여 침을 삼키는 순간, 스노아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다. 스노아가 문에 대고 소리쳤다. 수인족은 귀가 밝다.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카카나. 저예요, 스노아. 엘프 약사들이 사용한다는 약초를 구해왔어요.”
놀랍게도, 그럼에도 반응이 없었다.
스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카카나의 집 창문을 바라보았다. 커튼으로 막아놓아서 안의 상황이 보이지 않았다. 틈으로 아무런 빛도 새어나오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불을 끄고 있는 모양이었다.
스노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돌아갈까요?”
“…….”
“바깥세계에서는 절대 구경하지 못할 약초라 하던데요. 엘프와 드래곤의 땅에만 서식하는 약초여서 효능도 굉장히 독특…….”
그때, 문이 열렸다.
의식적으로 미소를 짓고 있던 스노아의 얼굴이 카카나를 보자 굳어졌다. 얼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개도 들지 않고 땅만 보고 있었지만 퉁퉁 부은 눈과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가가 한눈에 보였다. 머리는 어딘가에 한참은 문대고 있었던 사람처럼 엉망진창으로 일어나 있었다.
카카나는 조금도 스노아를 보려 하지 않았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래서야 꾸민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잠깐 방심하는 사이 파고들려 했는데, 계획이 틀어졌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약초 바구니를 달라는 손짓이었다.
할 말을 잃은 스노아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그녀가 나섰다. 약초 바구니를 휙 낚아챈 뒤 망설임 없이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것이다. 스노아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으나 이미 늦었다.
정적이 찾아왔다.
뭐 하고 있냐며 화를 낼 만한 일이었으나 용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어도 카카나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면 할 말을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연, 스노아의 얼굴에 냉정하고 싸늘한 빛이 어렸다. 그는 잠겨 있는 문고리를 마법으로 풀어버렸다. 그리고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라넷이 마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으나, 이미 그런 것 따윈 신경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인 얼굴이었다. 한순간에 스노아의 인내심이 바닥나버린 것이다.
“센데?”
아다르가 휘파람을 불었다.
“스노아가 가서 다행이야. 나라면 아마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거야. 너무 엉망이잖아.”
할릭의 말에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라도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모습에 화가 났을 겁니다.”
용사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스노아를 응원했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마음을 풀 수 있기를, 그리고 조금이라도 그녀가 기운 차리기를 바라면서.
***
카카나의 방은 짙은 어둠이 깔려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엘프들의 집은 통풍이 잘 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카카나가 머물고 있는 집에선 오랫동안 환기를 하지 않은 냄새가 났다. 카카나의 체취와 습하게 물기가 배어 있는 공기, 그리고 희미하게 나는 짠 눈물 냄새.
스노아는 근처에 있던 조명 식물 하나를 건드려 빛을 밝혔다. 노란색 불빛이 방 내부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약초 바구니는 문 근처에 놓여 있었다. 식탁에 먹다 남은 사과 한두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뭘 먹긴 먹은 모양이었다.
스노아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훤히 개방되어 있어서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놓치는 부분 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디에도 카카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뀨우!
그때 그의 발치에서 작은 동물이 울부짖었다. 엘프들에게 ‘신수’라 불렸던 동물이었다. 확실히 평범하지 않은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동물이 애타게 울부짖으며 스노아의 시선을 끌다가, 졸지엔 그의 코트를 물어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했다. 스노아의 물빛 눈망울이 신수의 움직임을 따라 미끄러졌다. 침구가 있는 곳이었다.
용사들과 함께 사용했던 침구보다 훨씬 작은 일인용 침구가 위로 불룩 솟아 있었다.
스노아가 신수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준 뒤, 천천히 침구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트여 있는 입구를 들춰 안을 들여다보았다. 깜깜한 암흑 속에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스노아가 근처에 있던 조명 식물을 하나 더 두드려 빛을 밝혔다. 북슬북슬한 털에 폭 파묻힌 카카나가 몸을 알처럼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카카나.”
스노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반응이 없다. 밖으로 나오기는커녕, 꼼질거리며 더욱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일인용으로 줄어들었다지만 그래도 넉넉한 침구다. 카카나가 몸을 공처럼 웅크리고 파고들자 털 때문에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명백한 거부의사다.
“카카나, 밖으로 나와 보세요.”
“…….”
“계속 그러고 있으면 탈진해요. 물은 마셨어요?”
카카나는 계속 대답이 없다. 안 그래도 아슬아슬한 스노아의 이성이 끊어질 듯 가늘어졌다.
“그렇게 스스로를 고문하면 저희도 계속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알잖아요.”
“…….”
“강제로 해결하길 원하지 않아요. 카카나, 나와 보세요.”
여전히 응답이 없다.
“카카나가 자초한 거예요.”
스노아가 안으로 팔을 뻗었다.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탓에 카카나의 몸이 금방 잡혔다. 뜨거운 온기와 땀 때문에 눅눅해진 옷자락이 느껴졌다. 그는 적당한 부위를 단단히 고쳐 잡았다. 그리고 힘으로 끌어당겼다.
카카나가 안에서 버티려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완연한 무력 차이에 버틴 것이 무색하도록 주르륵 끌려왔다. 그가 이불에 파묻혀 있는 봉제인형을 끌어내듯 카카나를 꺼내고서 얼굴을 확인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역시 얼굴이 엉망이었다. 눈은 짓무르고 입술은 터져서 피딱지가 앉았다. 뺨은 푹 들어가서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었다. 손닿는 곳마다 눈물이 말라붙어 소금기가 뻣뻣하게 느껴졌다.
울면서 온갖 진을 다 뺀 모양이다. 잔머리가 땀과 눈물에 젖어 살에 딱딱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스노아가 카카나를 번쩍 안아들어 소파에 앉혀주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차가운 물에 적셔 와서 얼굴을 닦아주었다. 짓무른 살이 아플까 쓸어내진 못하고 꾹꾹 눌러 소금기와 열기를 없애주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 카카나와 시선 맞추기를 시도했다. 그녀는 여전히 땅을 내려다보고 있다.
스노아가 아예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맞부딪힌다. 카카나가 스노아의 얼굴과 차림새를 빤히 바라보는 듯하다가, 스르르 눈을 굴렸다.
무슨 일이 있었냐느니, 왜 이렇게 망가져서 기를 쓰지 못하고 있냐느니 하는 질문은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것 같았다. 그래서 스노아는 부러 가벼운 투로 말을 꺼냈다.
“저 안 봐줄 거예요?”
시무룩한 시늉을 하자, 카카나의 입술이 옅게 움찔거렸다. 반응이 있다.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이렇게 꾸미고 왔는데.”
그제야 다시 그를 바라본다. 스노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카카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피하지 않는다.
“어때요? 엘프들이 꾸며줬어요.”
“…….”
“장식은 하나도 달리지 않았는데, 디자인이 세련되지 않았나요? 코트를 봤을 때 놀랐어요. 수수한데 눈이 가서.”
카카나가 눈꺼풀을 뻑뻑하게 깜박거렸다. 스노아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져볼래요?”
꿀색 눈망울이 코트 소매의 섬세한 자수로 향했다.
“예쁘죠? 카카나 이런 거 좋아하잖아요. 괜찮으니 만져봐요.”
그녀가 말없이 스노아의 소매를 잡았다. 그것만으로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났다. 그녀에게서 드디어 반응이 오고 있었다.
스노아가 진정하려 애쓰며 숨을 죽였다. 코트를 만지작거리는 카카나의 감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자그마한 손으로 스노아의 진한 청색 코트를 살살 쓸었다. 만지면 하얀 색이 묻어날 것 같은 희멀건 손가락이 울퉁불퉁한 자수 위를 천천히 지나다녔다.
스노아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어때요?”
“……예뻐.”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카카나가 말했다. 목이 땡땡 부어 갈라지고 쉰 음성이다. 스노아는 하마터면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들을 뻔했다.
“머리도 풀어봤어요.”
대화가 끊길 기미를 보이자, 그가 서둘러 덧붙였다. 카카나의 시선이 그의 머리로 향한다. 파도처럼 물결치는 파란 머리카락.
“어떤가요?”
카카나가 한참 후에 대답했다.
“예뻐.”
“코트보다 더요?”
그녀의 시선이 그제야, 스노아의 얼굴을 제대로 살폈다. 스노아가 그토록 바라던 시선이었다.
그녀의 눈에 아름답고 유려한 이목구비, 단순하고 고급지게 받쳐주는 옷차림이 차례로 들어왔다. 카카나가 스노아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노아의 얼굴에 진심이 담긴 미소가 떠올랐다.
“고마워요. 평소에도 이렇게 하고 다닐까요?”
그녀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담담하면서도 솔직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인어 같아.”
“네?”
“인어왕자님.”
그렇게 얘기하는 카카나의 얼굴이 어린 시절의 모습과 놀랍도록 겹쳐 보였다. 하필 똑같이 울고 난 상황이라 더했다.
‘공주님은 피했네.’
스노아가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웃었다. 어린 시절과 같은 생각을 품고 고스란히 얘기하는 카카나가 순수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는 걸까.
“카카나.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벌써 며칠째 밥도 안 먹고 있잖아요.”
“괜찮아.”
카카나가 웅얼거렸다. 물론 어림없는 말이었다. 그걸 자기도 알고 있는지, 카카나가 말을 덧붙였다.
“약으로 관리하고 있어.”
스노아는 그런 약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러나 저건 거짓말이었다. 카카나는 양심에 걸리는 행동을 하면 떳떳하지 못한 티를 냈다. 태도나 행동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속이 엉망이라는 걸 숨기고 싶은 건가.’
어떻게 봐도 힘든 얼굴이면서 끝까지 괜찮은 척한다.
스노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아 있는 카카나를 품으로 끌어와 안았다.
그녀가 놀란 것처럼 어깨를 웅크렸다. 스노아는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팔에 힘을 주었다. 다행히 그녀는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카카나에겐 위로가 필요했다. 그리고 말보단 행동이 진정성이 큰 법이었다.
‘말로는 못 해.’
스노아는 카카나에 버금갈 만큼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오랫동안 그래왔기에 몸에 완전히 배었다. 위로하는 척할 순 있지만, 진심이 담긴 따뜻한 말은 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따스한 포옹은 효험이 있었다. 카카나가 안겨 있다가 서서히 어깨를 떨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 있는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누군가를 안아서 위로해준 적이 없는 스노아는 난감함을 느꼈다. 첼러스라면 어떻게 할지 상상해보지만, 그는 워낙 선천적으로 타고난 면이 있기에 흉내 내기는 어려웠다.
스노아는 먼 기억 속에 있는, 유일한 포옹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와 최대한 비슷하게 카카나의 등을 쓸어주었다.
빌어먹게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었다.
[스노아.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든 달라붙어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마.]
그의 어머니는 창부였다. 당연히 아버지는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창부의 아들이 가진 빼어난 미모는 재앙에 가까웠다. 어머니는 그런 스노아에게 시궁창 바닥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주로 강자에게 빌붙어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스노아는 어머니의 조언을 착실하게 따랐다. 빼어난 미모를 이용해 위급한 상황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악질적인 사람들은 스노아의 미모에 홀려 골수까지 빨아 먹힌 뒤 버려졌다. 화가 나서 뒤쫓으면 스노아는 이미 더 강한 사람에게 달라붙은 지 오래였다. 그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10대 초반이 될 때까지 계속했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이후에 마법 재능이 발현하면서 백팔십도 달라진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가식적이고 계략적인 성격은 습관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인간관계를 기만하는 자신의 방식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자기도 모르게 의도대로 상황을 흘러가게 만드는 계산을 끝마쳐놓고는 했다.
지금처럼.
“저를 봐주세요, 카카나. 착하죠?”
다정하게 얘기하면 카카나는 거부하지 못한다. 스노아는 그 점을 활용했다. 그녀는 강하게 행동하면 강하게 응수했다. 그러니 스노아가 먼저 약한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눈물과 슬픔으로 제정신이 아닌 카카나가 흐릿한 눈을 들었다. 뺨이 줄기줄기 떨어지는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스노아가 그것을 엄지로 보드랍게 훑어주며 웃었다. 눈을 뗄 수 없게끔, 카카나가 제일 좋아하는 얼굴을 만들어내는 건 쉬웠다.
그녀가 울먹임을 삼켜내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스노아가 서글픈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얼굴이 이게 뭐예요. 속상하게.”
“놔줘.”
카카나가 스노아를 밀어내려 했다. 그래봤자 손에 매가리가 없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 돼요.”
스노아가 달래듯이 대답했다.
“어떻게 모르는 척해요. 이렇게 우는데.”
스노아가 다정하고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부탁했다.
“우는 이유라도 알려주면 안 돼요?”
“…….”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덫을 놓는다. 교묘해서 눈치챌 수 없는, 그래서 더 강하게 상대를 속박할 수 있는 덫을.
“걱정이 돼서 그래요.”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스노아가 카카나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는 예쁜 것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이용한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면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선 머리를 좀 묶어줄래요?”
그가 카카나의 손을 가져와 제 머리카락에 대면서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풀었더니 불편해서요.”
주머니에 있던 고무줄까지 꺼내 건네줬다. 카카나가 제 손에서 새파랗게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블루 사파이어처럼 파란 스노아의 머리카락을 좋아했다. 하얀 손이 두피를 쓸어 머리를 한데 그러모았다. 스노아가 눈을 감고 입을 뗐다.
“이러고 있으니까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네요. 어머니는 제 파란 머릴 좋아하셨거든요. 자기를 닮았다면서.”
카카나가 미미하게 호기심 어린 눈을 했다.
스노아가 말을 이었다.
“제 어머니는 창부였어요. 그러다 손님을 잘못 만나서 목을 졸려 돌아가셨죠. 원래는 최대한 가려 받으셨는데…….”
머리를 묶던 손이 움찔 멈춘다.
스노아가 고개를 돌려 카카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에게 들려 있던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며 흰 피부 위로 흐트러졌다. 백사장에 밀려드는 바닷물을 떠오르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절 키우느라 많이 힘들어 하셨거든요. 큰돈이 필요하셨나 봐요.”
“스노아는 나쁘지 않아.”
카카나가 쉰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간 한 마디도 않더니, 제 이야기를 하니 곧장 편을 들어준다.
스노아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스스로는 돌보지 않으면서 남은 신경 쓰는 그녀의 본성이 새삼 신기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가 슬픔에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만 아니었어도…….”
“나쁜 사람은 어머님을 죽인 사람이니까.”
카카나가 어두운 눈으로, 그러나 결코 꺾이지 않을 기상을 담은 채 말했다.
원하던 대답이다. 스노아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네요.”
“…….”
“제 소중한 사람을 해친, 그 사람이 나쁜 거예요.”
카카나가 스노아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난히 그녀의 마음을 파고드는 말이었다. 제가 뱉은 말인데 부메랑처럼 돌아와 머리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쁜 사람은 어머님을 죽인 사람이니까.]
한층 복잡해진 눈을 내리뜨던 그녀가, 천천히 스노아의 머리를 묶어주었다. 그가 고맙다며 몸을 돌려 앉았다. 그리곤 그녀의 허벅지 위로 가볍게 손을 얹었다.
별 의미는 없었다. 곁에 자기가 있음을, 떠나지 않을 것임을 어필하고 싶어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사람처럼, 카카나가 눈에 띄게 놀랐다.
스노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울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녀의 얼굴이 전보다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끄러운 기억이라도 떠올린 사람처럼.
‘그러고 보니 황녀를 만나기 전부터 이랬어.’
스노아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고민에 빠졌다.
카카나는 원래 사소한 스킨십은 신경도 쓰지 않을 정도로 무심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용사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첼러스가 뺨을 만진 날에는 얼굴이 홍당무 수준으로 붉어지기도 했다.
저렇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면서.
“요즘 쑥스러움을 많이 타네요?”
그녀가 우울한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입술을 씹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모양이었다. 몸은 스노아를 의식하듯 파르르 떨고 있었다. 소동물이 비에 쫄딱 젖는다면 저렇게 떨 것 같았다.
그것마저 귀엽게 보이니 큰일이었다.
스노아가 자기도 모르게 윗입술을 핥았다. 그 광경을 무망중에 발견한 카카나가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스노아는 그녀가 경계하지 않도록 보송보송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많이 슬퍼요?”
“…….”
“지금 또 울 것 같은 얼굴이에요.”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젓는다.
“이, 이제 괜찮아.”
“정말인가요?”
스노아가 말간 눈으로 물었다. 카카나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왜 울었는지 얘기해줄 수 있나요?”
“…….”
“들어줄게요, 응?”
카카나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생각대로라면 칼같이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집에서 내쫓아야 옳았다. 그러나 점점 거부하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분위기와 압박감이 형성되었는지는 그녀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스노아에게 안기니 눈물이 났고, 그가 요청하는 쉬운 요구들을 들어주고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스노아는 처음부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며 못을 박아두었었다.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나.’
카카나는 제 기분 탓이겠거니 치부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 아세요?”
스노아가 멈추지 않고 그녀를 회유했다.
“정령술사나 마법사들의 약속엔 힘이 깃들어 있다는 속설이 있어요. 말로 주문을 외우고, 계약을 이행하고, 기적을 행하니까요.”
스노아가 카카나의 손등에 짧게 입맞춤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절 좀 더 믿으셔도 돼요. 카카나.”
어둠을 은은하게 밝히는 조명 식물의 빛무리가 스노아의 눈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물속에서 올려다보는 햇빛처럼 찬란한 눈이었다. 그걸 마주보고 있자, 그라면 정말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카나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다. 그녀도 많이 지쳤다.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조곤조곤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죽은 줄 알았어.”
“동생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왜요? 살아 돌아왔으면, 오히려 기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스노아의 말에 카카나가 울음을 참듯 아랫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스노아가 옹송그려진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러지 말라는 듯. 카카나가 손에 힘을 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뜨거운 감정이 다시금 신물처럼 울컥이며 올라오고 있었다.
“미, 미안해서…….”
어떻게든 참아보려 하지만, 다시 눈물이 터지고 만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었다. 한평생 숨죽이며 살아온 자의 눈물이란 티 나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혼자 있을 때도 이렇게 조용히 울었다.
스노아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눈물을 닦아주다가 그녀의 감정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의 다정한 시선 아래서, 마음껏 울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만 했다.
그녀가 한참을 울고 간신히 진정하자, 스노아가 따스하게 물었다.
“어떤 점이 미안한가요?”
중성적인 미성이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가 헐떡이며 말했다.
“내, 내가 언니인데……. 유일한 가족인데…….”
카카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끅끅 운다. 이번엔 어느 정도 소리 나는 울음이었다.
‘이렇게 서러운 표정을 지을 줄 알면서…….’
그것마저 숨기며 살았다. 버티고, 버티고, 버티는 독한 인생을 홀로 견뎠다.
경계심도, 독기도, 표독스러움도, 전부 그녀가 노력해서 만들어낸 얼굴이었다. 스노아는 ‘만들어낸다’는 게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스노아가 주방에서 유리잔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 가져왔다. 그것을 손에 들려주자, 카카나가 소매로 눈가를 닦다 말고 야금야금 물을 들이켰다. 목이 부어서 한 번에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꼭 이슬을 마시는 것처럼 보였다. 괜히 속이 타는 것 같아서, 스노아가 마른입술을 훑었다.
그녀가 반쯤 마신 물 컵을 입술에서 떼자 스노아가 받아들었다. 오랜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척박했던 그녀의 얼굴이 다소 개운해져 있었다.
그녀가 많이 나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켜주지 못했어.”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참담하게 숙이며 속삭였다. 저 스스로를 지키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작은 몸에 힘을 주고서, 지켜주지 못했다고 말한다.
언니 노릇을 해주지 못했다고. 여린 눈가를 서글프게 내리뜨고서.
스노아가 꽉 막힌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울고 계셨던 건가요?”
그녀가 품고 있는 생각이, 마음이, 너무 영롱하고 고와서 소름이 돋았다. 심성이 예쁘다는 말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소리다. 동생을 향한 원망은 한 톨도 들어있지 않았다.
마음을 살짝 훔쳐봤을 뿐인데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끌어안아 위로해주고 싶었다. 서글픈 말을 하는 입술에 더운 숨을 불어넣고, 하도 울어 멍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저를 잊지 못하도록 마음에 화인을 찍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스노아는 제 시커먼 속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가 기묘한 갈증에 시달리는 사이, 카카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마, 많이 힘들었을 텐데…….”
훌쩍거린 카카나가 빨개진 콧잔등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함께해주지 못했어.”
“…….”
“크게, 다쳤었는데, 치료도 못 해주고 나는 도망쳐버렸어…….”
카카나는 다친 동생을 내버려두고 도망갈 성격이 못됐다. 그런데 도망쳤다 하고 있었다.
스노아가 미간을 찡그리고 물었다.
“카카나가 원해서요?”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저, 절벽으로, 떨어졌어.”
‘절벽.’
스노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카카나가 고소공포증을 가지게 된 원인 언저리를 짚은 것 같았다. 자진해서 뛰어내렸을 리는 없었고 누군가 밀어버린 듯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 원인이라 단정 지을 순 없다. 그러나 트라우마와 엮였다는 걸 확인받은 기분이라 영 입맛이 썼다.
“그게 어떻게 도망친 거예요, 카카나.”
스노아가 그녀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잘못된 믿음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잖아요.”
카카나가 말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말아요, 응? 마음 아프니까.”
“스노아는.”
카카나가 문득 얼굴을 들었다. 눈이 개구리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왜 나한테 잘해줘? 다른 사람한테는 쌀쌀맞으면서.”
“…….”
“그러지 마.”
카카나가 스노아의 발 언저리를 내려다보며 얘기했다.
“그러지 마, 스노아.”
왜인지, 꼭 그의 마음을 다 알고서 하는 말 같았다.
그 때문이었다. 가슴에 뜨거운 지옥불이 번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이유는.
스노아가 깊게 침잠된, 그러나 침착함을 잃지 않는 얼굴을 했다.
“그래서 싫은가요?”
카카나가 움찔 어깨를 좁혔다.
“싫으면 하지 않을게요.”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다. 그저 엉망이 되어버린 머릿속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스노아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카카나가 싫어하면 그러지 않을게요. 하지만, 싫지 않은데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
“카카나는 저에게 무척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다른 사람 대하듯, 차갑게 굴고 싶지 않아요.”
집 안이 조용해졌다.
카카나의 물기 어린 숨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스노아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래서, 속상한 마음에 그러고 계셨던 거예요?”
그녀가 흘끗 눈망울을 굴려 스노아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곤 다시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괜찮아. 곧 기운 차릴 거야.”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포장한 목소리였다.
“나는, 강하니까.”
꼭 자기 자신에게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말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몰아갔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그렇게 만든 장본인을 눈앞에서 갈가리 찢고 싶은 잔혹한 성질머리가 고개를 들었다.
스노아는 그것을 티 내지 않았다. 표정을 갈무리하고, 능숙하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카카나는 어떻게 하고 싶나요?”
그녀가 새빨개진 눈을 들었다. 척척하게 젖어 있는 눈물들을 모두 핥아 없애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가 선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동생을 만나고 싶나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뭘 하고 싶은가요?”
“아, 안아줄 거야.”
그녀가 새삼 부끄러운 사람처럼 시뻘게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스노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방금은 좀 힘들었다.’
슬픈 분위기와 동떨어진 생각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카카나는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초월자의 마음에 점찍힌 존재이기에 더욱 그렇게 보였다. 첼러스라도 방금 카카나를 보았다면 목이 타서 입술을 핥았을 것이다.
스노아가 티 나지 않게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면 저희와 계속 여행하실 건가요?”
카카나가 움칠 굳어 그를 보았다.
“너, 너희들이랑 왜…….”
그녀는 퀄리티미엄에 머물면 어떨까 고민하고 있었다.
바드가 침입하긴 했지만 드래곤의 결계에 금방 튕겨 나가기도 했고, 세상에서 드래곤의 결계만큼 안전한 곳은 찾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노아가 같이 여행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마족이 대륙을 뒤집어 놓으면 곤란해지는 건 저희도 마찬가지이니 우리는 아마 황녀의 부탁을 들어주게 될 거예요.”
“…….”
“마족을 상대하기 위해서요.”
스노아가 설명했다.
“그리고 황녀 곁엔 카카나의 동생이 있죠. 동생이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응.”
“그건 황녀의 곁에서 기다리겠다는 의미였을 거예요.”
그엔 카카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녀는 강인한 신념으로 뭉쳐 있던 다다나의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만 파고드는 아이였다. 이제 와 카카나를 기다린다며 황녀 곁을 떠날 리 없었다.
“만약 동생을 만날 생각이라면, 저희와 함께하는 게 안전해요. 궁엔 마족이 있잖아요.”
그녀가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스노아의 말에 거의 넘어온 것처럼 보였는데, 무언가가 또 발목을 잡는 모양이었다. 그답지 않게 초조한 마음이 일었다. 애써 잡은 양이 올가미를 풀고 줄행랑을 쳐버릴 것 같았다.
그는 여유로운 척 대답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하면 친구들이…….”
혼잣말을 하던 카카나가 입을 다물었다.
스노아는 그녀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음을 깨달았다. 바다에 띄워진 돛단배처럼 정처 없이 흔들리던 눈망울이 호박석처럼 단단해져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스노아가 숨을 죽였다.
“그래, 더 이상 도망쳐선 안 되겠지.”
“…….”
“그래야 할 것 같아.”
스노아는 그녀가 다시는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매듭을 단단하게 묶었다.
“저희랑 같이 여행하시겠단 말인가요?”
“응.”
그녀가 묶인 매듭에 쐐기를 박았다.
“너희랑 같이 여행할래.”
성공이었다.
***
용사들의 무기를 되찾는 건 더 중요해졌다. 상대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전대미문의 ‘마족’이었다. 제아무리 용사여도 한 번 쓰면 망가지는 무기로 싸움을 벌일 순 없었다.
다행히 엘프들은 더 머무르겠다는 날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용사들이 딸려 있긴 했지만, 내가 퀄리티미엄에 있어준다면 더 좋을 게 없단 태도였다.
“계승식을 치러야 해요!”
엘프들은 내가 기운을 차리자마자 의식을 치러야 한다며 난리를 피웠다. 어차피 더 머무를 테니, 서두를 게 없는데도 그랬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잔치를 벌이고 싶어 그러는 듯했다.
“계승식이라뇨?”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신수의 계승자시잖아요. 당연히 합당한 의식을 치르셔야죠!”
듣자하니 엘프들에겐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이 있단다. 그중에 유물급인 고서가 한 권 있었다. 신수에 대한 정보와 의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엘프들은 그 기원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을, 까마득한 옛날부터 신수의 알과 고서를 지켜왔다고 했다. 계승자가 나타나는 날만을 기다리며.
그러다 마침내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고대하던 계승자가 나라니.’
직접 겪고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사실 알을 깨고 나온 건 야수인데, 엘프들이 잠깐 착각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엘프들에게 모욕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허허 웃으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속으로만 생각했다. 실마리가 풀려가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답답했다.
‘여행하면서 알아가야지.’
이제 가만히 기다리는 건 그만두기로 했으니까.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