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신수의 계승자
너무 더워서 잠에서 깼다.
“으으응.”
땀을 뻘뻘 흘리며 실눈을 떴다. 무언가가 내 몸을 옥죄고 있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을 이불 바깥으로 꺼냈다. 차가운 잎사귀의 감촉이 열기를 식혀주었다.
나는 불편해서 몸을 자꾸 뒤챘다. 이제 보니 오른쪽에 누워있던 첼러스가 나를 꼭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다.
더운 숨을 몰아쉬며 왼쪽을 바라보았다. 한 폭의 그림처럼 고요히 잠들어있는 아르모어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한 손이 내 배 위에 올라와 있었다.
‘이러니 덥지.’
쪄 죽을 지경이다.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첼러스의 무거운 팔뚝을 낑낑대며 치웠다. 그리고 배 위에 얹어진 아르모어의 팔도 옆으로 툭 밀어 떨어트렸다. 몸을 위로 살살살 꺼내어 이불 밖으로 도망쳤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숨을 몰아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바깥 하늘이 창백한 회색빛으로 밝아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다. 평화로이 노래하는 새소리가 듣기 좋았다.
코끝을 스치는 오롯한 자연의 냄새를 즐겼다. 모든 게 놀라울 만큼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어제 보았던 신기한 풀들이 생각났다.
‘어떤 효능을 가지고 있을까.’
상상할수록 몸을 가만히 두기 힘들어졌다.
나는 옷을 갈아입을 곳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당연히 그런 곳 따위 없다. 어쩔 수 없이 큰 소리로 말문을 텄다.
“너희 깬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말해두지만, 나 이제 옷 갈아입을 거야. 여기 보지 마.”
옆방의 기척도 느낄 수 있는 그들이다. 같은 이불을 덮고 있는데 들추는 걸 용사들이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제일 왼쪽에 누워있었던 아다르가 한쪽 눈을 떴다.
“어떻게 알았대.”
“넌 내가 바보로 보이니?”
“우리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행동하라고 일부러 자는 척해준 거였는데.”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다르의 얼굴을 살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다.
그의 말대로 혼자가 되어본 지 꽤 되었다. 여관에서 내 방을 따로 잡긴 했지만, 용사들의 감시 안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이 침입하진 않는지 줄곧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긴장을 계속 붙들어야 하는 용사들도 피곤했겠지만, 감시받는 나도 피로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날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선 혼자 있어도 돼?”
“퀄리티미엄이잖아.”
아다르가 관대하게 말했다.
자는 척하길 관둔 첼러스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깨어 있었는데도 나한테 달라붙어 있었던 건가?’
왜?
도통 이해할 수 없단 눈으로 쳐다보자 뜻을 알아들은 사람처럼 첼러스가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아다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엘프들은 모두 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호감은 어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다르.”
첼러스가 얌전히 끼어들었다.
“그렇긴 한데, 적당한 말이 안 떠오르네.”
“그들은 카카나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맞다, 그건 복종이다.”
제가 맞장구 쳐놓고 아다르가 납득이 가지 않는 표정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라넷인지 가넷인지 하는 엘프도 카카나에게 대뜸 퀄리티미엄에 가자고 했잖아. 뭐라고 했더라. 신목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했던가?”
“엘프들한테 카카나가 중요한 존재면 더 위험한 거 아니야?”
할릭이 하품을 하며 끼어들었다.
“뭐든 맹목적인 건 위험하잖아. 손바닥 뒤집듯이 바뀔 수도 있다고. 대자연의 섭리니 뭐니 우린 못 알아들을 말을 하면서 카카나를 제물로 바친다든가 하면 어떻게 해.”
과도한 상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헛소린 아니었다.
이단자와 광신도들도 존재하는 세상이 아닌가. 나는 괜히 골수가 싸늘해져서 뒷목을 손바닥으로 훑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기도 했고요.”
스노아가 물결치는 파란색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으며 말했다.
“이미 걸려 있는 마법에는 가타부타 말이 없는 것 같지만요.”
그의 시선이 환영마법이 걸려있는 반지로 향했다.
나는 침음을 삼키며 눈을 굴렸다. 아무래도 나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쪽으로 대화가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둘 순 없지. 이게 얼마만의 기회인데.’
나는 그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라넷이 나한테 해를 끼치지 않고, 극진히 대우한다고 했잖아. 그런 식으로 걱정하면 끝이 없어.”
그러나 금방 설명하길 그만두고 선포했다.
“오늘은 나 혼자 돌아다닐 테니까 감시하거나 따라붙지 마.”
이게 내 스타일이다.
‘언제부터 눈치를 살피고 설득을 했다고.’
나는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올렸다. 게다가 진실을 꿰뚫어보는 엘프가 사람을 역으로 속여먹는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혼자 돌아다녀도 충분히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첼러스가 제안했다.
“바로 깊은 숲에 들어가진 않으실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아.”
“엘프의 거주구역 정도면, 어차피 혼자 움직이셔도 저희의 감각 안입니다. 그러니 엘프들의 행동을 먼저 관찰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나가고 봐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욕실부터 손을 봤다. 마법가방에 들어있던 천과 로브를 펼쳐서 샤워커튼에 겹쳐 씌웠다. 안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진작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어제는 괜한 고생을 했지 싶다.
한 명씩 돌아가며 씻은 후 집을 나섰다. 충분히 높은 곳이었기에 실눈을 한 뒤 발코니와 이어져 있는 거대한 나뭇잎 미끄럼틀을 탔다. 경사가 제법 완만해서 걱정했던 것과 달리 즐거웠다.
나는 아이처럼 꺄르르 웃으며 미끄럼틀을 탔다가 괜히 머쓱해져서 태연한 척했다. 용사들이 웃음기가 머무른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더 민망했다.
시선을 피하며 거주구역을 돌아봤다. 어제와 달리 바깥에 나와 있는 엘프들이 많이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쑥스러움을 타는 얼굴로 숨어서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용사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모두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른 새벽인데, 엘프들은 다 부지런한가.’
나는 애써 시선을 무시하면서 식물들로 관심을 돌렸다. 눈이 닿는 곳마다 별세계였다.
줄기 끝이 달팽이집 모양으로 말려 있는 식물이 보였다. 제일 독특하게 생겨서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돌연 엘프 한 명이 내게 달려오며 소리쳤다.
“엄마!”
나는 처음에 그게 날 부르는 소리인 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익숙한 품새로 내게 매달리는 순간 알아챘다.
“로엘르?”
내게 매달린 로엘르가 행복하게 웃으며 뺨을 마구 비벼댔다. 그러자 근처를 서성이던 엘프들이 용기를 가지고 한두 명씩 다가왔다.
분명 처음엔 어느 정도 경계가 서린 눈이었다. 그런데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른한 얼굴을 하더니, 이제는 존경과 호감이 담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신목의 느낌이 그 정도로 영향력이 센 것이다.
나는 새삼스레 놀라며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느새 포위되어 있었다.
옹기종기 모인 엘프들이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세상에, 정말 황홀한 향기가 나요…….”
“로엘르만 안기다니 불공평해요.”
“맞아요. 전 어젯밤부터 기다렸단 말이에요.”
“정말 수인족이에요? 뿔 만져 봐도 돼요?”
“자, 잠깐…….”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든 말을 끊어내려고 했다. 엘프들이 아랑곳 않고 질문을 이었다.
“카카나 님은 신목이신 거예요?”
“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느낌이 신목이 아니면 뭐니?”
‘그렇게 계속 물어대면 대답을 못 해주잖아.’
나는 일일이 답해주길 포기하고 엘프의 얼굴이나 구경했다. 대부분 10대 중반이나 후반처럼 보이는 외양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아이’를 벗어난 나이겠으나, 어쩐지 그보다 한참은 어린 느낌이 들었다.
엘프는 수인족처럼 평범한 인간과 수명이 다르니 정말 그럴 수도 있다. 라넷도 로엘르더러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표현하기엔 로엘르의 몸집이 제법 큰데도 말이다.
‘어린 아이들이라면, 제국의 말은 어떻게 배우는 거지?’
문득 궁금해졌다.
“제국말을 잘하네.”
넌지시 칭찬을 건네자 아니나 다를까, 엘프들이 신나서 정보를 우수수 쏟아냈다.
“드래곤님이 주신 도구가 있어요!”
“맞아요! 그걸 이용하면 순식간에 말을 배울 수 있어요!”
“그런데 딱 알맞은 시기에 사용해야 해요.”
“아주 어린 엘프들은 사용을 못하거든요!”
의문은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더불어 엘프가 인간의 문화에 왜 그렇게 무지한지도 이해되었다. 마법으로 ‘언어’만 배웠으니 그런 거다.
나는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너희는 마법이 어때? 왠지 싫어할 것 같은데. 마법은 자연적이지 않잖아.”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한 엘프 아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퀄리티미엄을 지키는 것도 드래곤님의 위대한 마법 덕분인걸요! 하지만 쓸모없는 마법을 싫어하는 건 맞아요.”
‘흠, 생각보다 융통성은 있는 모양이네.’
나는 가장 궁극적으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신목이 뭔지 물어도 될까?”
절호의 기회였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는 것 같아 양심에 걸리지만, 그래도 이대로 모르는 채 있을 순 없다. 최대한 상냥한 투로 묻자, 엘프들이 손뼉을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좋아요!”
모두 초록색 계열의 눈과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탓에 한 명 한 명 구별하기 힘들었다.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나뭇잎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이 들어 보이는 엘프는 전부 갈색이던데. 수장도 그렇고.’
설마 초록색이었다가 점점 갈색으로 변하는 건가.
‘잎처럼?’
상상하는 사이, 엘프 아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목은 우리의 보고이자 정신이며, 뿌리예요!”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어, 바보야! 카카나 님, 신목은 우리의 엄마이자 아빠예요.”
“맞아요. 그것도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엄마아빠예요.”
“신목이 없으면 엘프들은 모두 죽고 말 거예요.”
“우리는 이어져 있거든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든 말이어야 할 텐데, 단박에 알아들었다. 나 또한 ‘이어져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기이한 감각에 이끌려 로엘르를 찾아냈던 일, 그리고 라넷의 기척을 알아챘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심지어 어떤 마음인지까지 알아냈었지.’
로엘르가 퀄리티미엄에 대한 정보를 알려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 했을 때도, 나는 그녀의 의지를 알아들었었다. 이곳에 들어온 후로는 다시 느껴본 적이 없었지만.
‘내게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건가?’
문제는 내가 엘프가 아니란 점이다. 엘프 아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도 그들과 ‘이어져 있다’는 뜻이 된다.
‘왜지?’
난 신목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 여의긴 했지만, 부모님이 나무가 아니란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그분들은 제대로 된 양 수인족이었다. 내가 엘프와 이어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무래도 이건 수장이나 라넷에게 물어야 할 듯했다. 아이들에겐 물어봤자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카카나 님, 안겨도 되나요?”
로엘르를 시기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엘프가 간절하게 부탁했다.
“신목님께 어리광피우면 안 된다고 막는 바람에, 최근 안기질 못했어요. 제발요. 네?”
“맞아요, 저도요. 저도 안길래요.”
“로엘르, 넌 아직 어려서 신목님께 안길 수 있잖아. 저리 가!”
제국의 말을 못 알아들을 텐데 로엘르가 내 품에 머리를 들이박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엘프들이 앞 다투어 내게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저 머리 만져주세요!”
“저도 안아주세요!”
“손잡아주세요!”
정말 웃기게도,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투기장에서 만났던 야수들이 생각났다. 내 손길을 한 번이라도 받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배를 까뒤집고, 애교를 부리던 야수들.
“혹시 야수랑도 이어져 있니?”
찔러나 보자는 생각으로 물었는데, 아이들이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수장님이 그러는데, 야수랑 우린 같은 고향을 두고 있어서 그런 거래요.”
‘같은 고향? 그건 무슨 소리지?’
나는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이들도 그 이상은 모르는 듯싶었다. 어떻게든 관심을 받으려는 아이들이 아무 말 없이 조용해져 있었다.
‘아, 모르겠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나는 그냥 멍하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모두들 내 손에 얼굴을 부비며 사족을 못 썼다.
솔직히 말해서 기분이 꽤 괜찮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지라, 엘프들의 신비로운 외모에 껌뻑 넘어갔기 때문이다.
인간과는 궤를 달리하는 하얗고 뽀얀 피부, 곱슬기가 전혀 없는 긴 생머리,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비현실적인 외모까지 내 취향이 아닌 부분이 없었다. 등에 반투명한 날개가 달려있다면, 딱 동화 속 요정일 것 같은 모습이다.
‘어쩌면 이렇게 생겼지.’
보고 있으면 감탄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너희들!”
그때, 라넷이 엄하게 소리치며 뛰어왔다.
“으악, 라넷이다!”
“일어나, 빨리!”
엘프 아이들이 후다닥 몸을 일으키며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라넷은 엘프 중에서 퍽 무서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로엘르, 너 때문에 라넷이 아직도 화가 나 있잖아!”
“그럴 만도 하지. 계속 고생하셨잖아.”
엘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어른들이 그러는데, 어린 엘프를 돌보는 것만큼 귀찮고 성가신 일이 없대.”
“호기심이 많잖아.”
“그래서 로엘르도 퀄리티미엄 밖으로 나갔다가 된통 당했지.”
“라넷이 항상 뿔이 나 있는 이유는, 어린 엘프를 담당하는 직책이어서일 거야.”
빠르게 소곤거리던 엘프 아이들이 지척까지 다가온 라넷을 보더니, 으아악 소리치며 멀리 줄행랑을 쳤다. 물론 로엘르는 라넷이 오든 말든 내 품에 안겨있었다.
라넷이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꼭 쌍둥이 자식을 낳은 인간 부모님 같은 얼굴이었다.
‘피로에 찌들 대로 찌든 얼굴…….’
퍽 친근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워낙 인간 같지 않은 존재감을 가지고 있어서 여태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게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나는 라넷에게 깊은 안쓰러움을 느끼며 미간을 모았다. 엘프 아이들이랑 잠깐 함께했을 뿐인데 이렇게 정신이 없었다. 저 천방지축들을 감당하는 라넷의 신경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라넷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 없는 호리호리한 허리를 푹 꺾어 사과를 건넸다.
“곤란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나는 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귀여워서 저도 좋았어요.”
“어린 엘프들은 신목에 특히 의존적입니다.”
라넷이 다크서클이 희미하게 비치는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그래서 카카나 님께 더 관심이 갔었나 봅니다.”
“그렇군요.”
“엄마라 부르는 것도 그만두도록 잘 교육하겠습니다. 뒤에 계신 남편분들께서 많이 당황하셨을 것 같군요.”
“아, 괜찮아요. 엄마라고 부를 수도 있……. 뭐라구요?”
의례적으로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얼굴을 싹 굳혔다.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당연히 착각이겠지?’
나는 내가 잘못 들었으리라 철석같이 믿으며 방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우아하게 다시 질문했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카카나 님을 엄마라 부르지 못하도록 교육하겠습니다.”
라넷이 충실하게 같은 말을 반복해주었다.
“아니, 그 다음에요. 또 무슨 말 하지 않았었나요?”
라넷이 눈을 굴리다가, 다시 얘기했다.
“뒤에 계신 남편분들께서 당황하셨을 것 같다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니에요!”
나는 빨개진 얼굴로 꽥 소리쳤다. 라넷의 얼굴에 드물게 당황의 빛이 어렸다.
“나, 남편 아니에요. 그냥 동료예요!”
라넷이 그제야 용사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치 수많은 용의자들 중에서 범인 한 명을 가려내려는 것처럼, 신중하고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퀄리티미엄에서 용사들에게 시선을 주는 엘프들은 한 명도 없었기에, 용사들이 조금쯤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남편이 아닙니까?”
라넷이 의아한 눈을 하며 다시금 물었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묘하게 남편이 확실하다는 얼굴이었다.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이렇게 많은 남편을 어떻게 둬요!”
의도치 않게 그들이 전부 남편일 경우가 상상되었다. 그냥 상상만 했을 뿐인데 기가 질렸다. 어차피 그럴 일도 없겠지만, 그건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감당이 되지 않을 일이었다.
제국이 신 헬리스를 섬기게 된 것이 다중결혼의 시초라지만, 지금은 의미가 퇴색한 지 오래다. 귀족들은 조금이라도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자극적이고 문란하게 놀기 위해서 이 제도를 이용했다.
신전이 독립적인 기관으로 권력을 행사했을 때는 그나마 나았었다. 진정한 사랑의 증명을 통해 결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진실한 사랑이 없어도 권력과 돈만 있으면 누구나 다중결혼이 가능했다. 그런 모습만 봐온 터라 예전부터 다중결혼에 대해 환멸감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 명의 이성조차 사랑해본 경험이 없기에 더욱, 여러 사람과 나누는 사랑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굳이 경험해보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남편이라니. 상대는 다섯 명인데.
다섯 명!
심지어 그들 모두 용사들이다. 다섯 명의 용사들에게 유혹을 받고, 넘치는 사랑을 받는 부인을 생각해보았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벌써 학을 뗄 수 있을 것 같다.
‘일주일도 견디지 못하고 복상사로 죽지 않을까?’
얼마나 먼 일처럼 느껴지는지 상상도 잘 안 된다. 범상치 않은 남편을 다섯 명이나 둔 부인의 삶을 내가 무슨 수로 그려보겠는가.
‘알 필요 없지. 그런 건 평생 몰라도 돼.’
어차피 내 일도 아니었다. 나는 홀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숨을 골랐다.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당황했는지 모르겠다.
“제국은 일처다부가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라넷은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다.
“일처다부가 가능하다고 무조건 남편들인 건 아니에요.”
“아, 그러면 이분들 중에 남편이 계신 겁니까?”
“예?”
라넷이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다.
얼이 나가서 침묵을 유지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흠칫 놀랐다. 용사들이 눈으로 파이어볼이라도 쏠 것처럼 강렬하고 이글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왜 저러는 거야?’
기겁을 하며 주춤 물러섰다.
“저분입니까?”
그때 라넷이 첼러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머지 용사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 아니에요!”
갑자기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원인 모를 위기감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거듭 부정하며 손까지 흔들어재꼈다.
“아, 아니에요. 저, 저, 절대 아니에요!”
라넷이 다시 용사들을 바라보았다. 진실을 꿰뚫는다는, 녹음의 눈으로. 그러더니 시선을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본다. 여전히 의아한 기색이다.
“전부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네, 남편 아니에요! 아다르, 첼러스, 아르모어, 스노아, 할릭, 모두 남편이 아닙니다!”
이름까지 불러가며 한 명 한 명 부정하고 있으니, 이번엔 서글픈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나는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용사들이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비 맞은 고양이 같은 얼굴들을 보자 내 심장만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아니 이번엔 또 왜 저러는 건데?’
내 미쳐가는 심정은 눈치채지 못하고 혼자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라넷이 말을 줄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절차가 더 복잡한 모양이군요. 모두 인간 문화에 깊이가 없어 벌어진 일. 사과를 드립니다.”
무슨 절차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납득은 한 것 같아서 고개부터 끄덕이고 보았다.
어차피 엘프와 인간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아뇨, 괜찮아요.”
나는 용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지 알려주세요.”
‘빨리 화제전환을 하자.’
나는 기를 쓰고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수장님도 뵈었으니 용건은 모두 끝난 건가요?”
“아니요.”
라넷이 고개를 저었다.
“카카나 님께선 신목의 땅으로 가시게 될 것 같습니다.”
“신목의 땅?”
“신목이 있는 곳입니다. 엘프만 허락하는 장소기에, 카카나 님께 위험이 생길까 염려되어 먼저 확인 작업을 거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시면 됩니다.”
“거기서 뭘 하는데요?”
나는 약간 불안해져서 물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으므로, 줄곧 넋을 놓고 있는 것 같던 용사들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저 신목님을 만나 뵙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신변에 어떤 해도, 위협도 끼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왜 신목을 만나야 하는 거죠?”
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전 엘프가 아니에요. 자연의 섭리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제가 신목과 비슷한 느낌을 풍긴다는 이유만으로 만나야 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드네요.”
“어떻게 하면 만나주시겠습니까?”
라넷은 다행히 저자세로 나왔다.
“퀄리티미엄은 드래곤이 만든 결계로 보호받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이곳에 드래곤이 있는 거죠?”
라넷은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흰 그 드래곤이 레어에 품고 있는 물건들에 관심이 있어요.”
“드래곤님의 금은보화를 원하십니까?”
라넷이 감정이 조금도 깃들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무적인 질문이었으나 어조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냉기가 감돌았다. 긴장으로 입술이 말라온다. 나는 간신히 여유를 유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흰 본래 저희 것이었던 걸 되찾고 싶어요.”
“드래곤님을 만나는 건 제 소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라넷이 딱딱하게 말했다.
“수장님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되도록 긍정적인 답변이길 바랄게요.”
라넷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고개를 숙였다.
“마을에 울타리가 쳐져 있으니, 그 안에만 머무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그럼, 편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넷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
기다리는 동안 여유롭게 이곳의 생태를 연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나지 않았다. 엘프들이 매일 나와 함께 있지 못해서 안달을 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용사들을 남편이라고 오해한 엘프가 라넷 한 명이 아니란 걸 알게 되면서 상황이 더욱 피곤해졌다.
왜냐하면.
“역시 카카나 님은 인간에게도 인기가 좋으신가 봐요. 다섯 분과 결혼까지 하시고.”
이런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일일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따지고 보면 라넷도 절차니 뭐니 얘기하지 않았었나? 설마 아직 연애 단계라고 생각한 건가?’
뭐니 뭐니 해도 나를 제일 힘들게 하는 건 엘프들의 어쭙잖은 배려였다. 도대체 어디서 인간의 문화를 배워오는 건지, 진짜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했던 탓이다.
예를 들면 이랬다.
“제가 들었는데, 남편이 많으면 부인이 힘들다면서요? 그래서 카카나 님을 위한 자양강장제를 만들어 볼까 해요!”
“컥, 캐액, 캑!”
나는 발작하는 몬스터 수준으로 괴로워하며 기침했다.
오늘은 엘프들이 손수 만들어준 음식으로 잔치가 벌어진 날이었다. 앞서 우걱우걱 먹었던 음식들이 얹힐 것 같았다. 옆에 앉아있던 엘프가 친절하게 등을 두드려주며 말을 받았다.
“나도 들었어. 아무래도 5대1이잖아. 힘에 부칠 수밖에 없지.”
‘맙소사,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물을 들이켰다. 제발 닥쳐줬으면 좋겠다.
“인간 남자들은 다 저렇게 건장한가? 몸도 크고 뼈도 굵던데. 제일 엘프 같은 파란 남편분도 우리보다 키가 크잖아.”
“세상에, 이렇게 작으신 몸으로 얼마나 힘들까.”
뭐. 뭐가 힘든데.
‘대체 어디까지 얘기하려는 거야.’
나는 쿵덕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눈알을 굴렸다. 저들만의 대화에 푹 빠진 엘프들이 내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라넷이 바깥세계에서 구해온 책을 봤어. 인간의 번식에 대해서 말이야.”
범인을 알았다.
‘라넷 이놈아, 무슨 책을 가져온 거니!’
듣기론 이곳에도 도서관이 있다고 했다. 인간과 관련된 책을 모두 확인해 봐야 하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무슨 느낌일까? 여성들은 처음에 통증을 느낀대. 그럴 만도 하지. 세상에, 몸 안에 어떻게…….”
심약한 엘프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가렸다.
“게다가 남성은 사람마다 크기가 다르다며? 보통은 이 정도 크기래.”
엘프가 길쭉한 모양의 야채를 들고 오더니,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념무상의 상태로 야채를 씹었다. 저렇게 순수한 얼굴로 음담패설을 하니까 오히려 전의가 상실되는 느낌이다.
용사들은 진작 식사를 끝내고―아마 풀떼기에 질려서― 자리를 벗어난 참이다. 엘프들이 채식을 하고, 용사들은 육식을 즐겨 다행이었다. 아마 같은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을 것이다.
엘프들은 너무 크다며 서로 충격을 받고 난리가 났다.
“세상에! 남편분들은 모두 몸집이 크시잖아. 그러면…….”
“아니야, 몸집이랑 별개래.”
“정말?”
“어떤가요, 카카나 님?”
“네?”
나는 과일을 삼키다 말고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엘프들이 호기심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보며 말을 이었다.
“남편분들 크기요. 정말 몸집과 별개인가요?”
내 포크에 꽂혀 있던 가지의 조각이 철푸덕, 소리를 내며 그릇으로 떨어졌다. 차마 뭐냐고 물을 수가 없다.
나는 두 손을 재빠르게 휘저었다.
“저, 저는 몰라요!”
기겁을 하니 그제야 느껴지는 바가 있는지 엘프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이거 혹시 민망한 주제였던 거 아니야?”
‘민망한 게 뭔지 알고는 있네.’
나는 홀로 놀라는 시늉을 하며 샐러드를 전투적으로 씹었다. 짭짤한 맛이 났다.
“몸에 대해 얘기하는 게 어때서?”
“인간들은 다른 성별에 대해 말하는 걸 부끄러워한다고 들었던 것 같아.”
“번식하려면 오히려 더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얼씨구.
“네가 잘못 안 거겠지. 이런 대화는 평소에도 분명히 자주 나눌 거야.”
안 되겠다. 아무리 민망해도 이 정도면 계속 못 들은 척하고 있을 수가 없다.
“그, 큼. 이성의 몸에 대한 이야기는 공개된 장소에서 잘 안 나눠요.”
나는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
엘프들이 대놓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에 남은 음식들을 빠르게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끝내고 얼른 자리를 뜰 요량이었다.
“아무튼 활력이 돋는 음식을 만들어드릴게요, 카카나 님.”
주의를 환기시킨 엘프가 화제를 돌린답시고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제발 아니길 빌면서 물었다.
“설마 아까 말씀하신 자양강장제요?”
“네. 매일 밤 힘드시잖아요.”
애써 에둘러 표현하긴 했지만, 의미하는 바가 명백하다.
‘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이 주젠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가.’
문화가 아예 다르니 그 정도도 눈치를 채지 못하나 보다. 몹시 피곤해졌다. 나는 느릿하고 차분해진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남편이 아니거든요.”
그러자 자리에 있던 모든 엘프들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왜들 저렇게 보지.’
점점 더 불길해지는 것 같아서 씹던 야채를 통째로 삼켰다. 잘못하다간 뿜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예상하지 못했네요. 서로 사랑해도 결혼을 하지 않는 건가요?”
나는 엘프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뒤늦게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사랑이라니요?”
“남성분들은 카카나 님을 사랑하고 있잖아요. 카카나 님은 그들만큼 감정이 깊진 않지만, 좋아하고 계시고요.”
“예……?”
“아, 생각해보니 인간 귀족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혼약을 맺기도 한다죠. 그럼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게 맞네요. 사랑하지 않는데 결혼할 수 있으면, 사랑해도 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거잖아요.”
‘아까부터 계속 무슨 말을……?’
내 귀가 이상해졌나?
엘프들이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얼이 나가서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입을 벌렸다.
생각해 보면, 퀄리티미엄의 모든 엘프들은 용사들과 나를 부부사이라 여기고 있었다. 처음에 오해를 받았을 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얄팍하지 않은가. 이성이 함께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넘겨짚었나 보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부부사이라고 오해한 엘프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고민하게 되었다.
당연히 엘프들의 생각을 인간인 내가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용사들이 날 과보호해서 그런가 보다고 치부했다. 그러는 게 내 속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나.’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모든 엘프들이 같은 오해를 확신에 차서 할 리가 없다. 나는 결국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본격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엘프가 고개를 모로 기울인다. 나는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저희가 부부사이라고 생각한 이유요.”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셔서…….”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저희는 진실을 꿰뚫어보니까요.”
‘진실?’
그 단어를 듣자마자 머리가 정지했다.
“사랑하시는 게 확실하니, 부부사이라고 생각했어요.”
엘프는 내가 순간적으로 백지 상태가 됐다는 걸 모르는지, 혼자 말을 잇고 있었다.
“남성분들께서 감정을 숨기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보자마자 알았죠. 라넷 님을 따라 간혹 바깥세계를 다녀오곤 하는데, 인간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감정을 숨기려 하더라고요.”
“맞아요. 일종의 관행처럼 말이에요.”
“엘프들은 숨기려고 하면 오히려 더 잘 볼 수 있게 되니, 사랑하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보인답니다.”
다른 엘프마저 말을 덧붙이며 생긋 웃었다.
귀가 먹먹해졌다. 엘프가 뭐라고 하는지 더 이상 들리질 않았다. 나는 멍하니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카카나 님은 숨기려고 하지 않으셔서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싫어하는 것보단 호감에 가까워서 부부사이라고……. 카카나 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터질 것 같았다.
진짜, 정말로.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나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뒤에서 엘프들이 날 불렀으나 고개를 저으며 무작정 걸었다. 다행히 거부의 의지를 느낀 엘프들이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뛰기 시작했다. 이 무식하게 넓은 숲은 숨을 곳이 많았다. 거주구역을 벗어나지 말라는 라넷의 말을 간신히 떠올리고, 울타리 근처에 멈춰 섰다.
키 낮은 하얀색 나무 막대에 파란색 이파리와 덩굴이 얼기설기 엉켜있는 울타리였다. 울타리 끄트머리를 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은 이제 아예 내 귀에서 뛰어대고 있었다.
쿵쿵, 쿵쿵, 힘차게 피를 뿜는 소리가 온몸을 울렸다. 머릿속이 팽창되어 터질 것 같다. 심지어 오래 뛴 탓에 숨까지 찼다.
“학, 하아…….”
극도로 흥분한, 기절 직전의 상태에서 풀밭을 내려다보았다. 기계적으로 호흡을 반복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머릿속에서 엘프의 말이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남성분들은 카카나 님을 사랑하고 있잖아요……. 감정을 숨기고 계시더라고요……. 카카나 님도…… 좋아하는 게…….
울타리를 쥔 손을 놓고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다 내 얼굴이 굉장히 뜨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며 뺨에 손등을 댔다. 거의 불타오르고 있다. 이 정도면 멀리서 봐도 딸기처럼 보일 수준이다.
근처에 아무도 없었지만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처박았다. 고개를 너무 숙인 나머지 머리에 피가 더 몰렸다. 그러나 이편이 나았다. 핑계라도 댈 수 있으니까.
나는 두 손을 심장에 얹고 진정하려고 애썼다.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나 왜 이러지.’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다. 너무 놀라면 이러는데, 그래서 그런가 보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눈물을 훔치고 새빨개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일단 엘프들은 거짓말을 안 해. 거짓말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다시 머리가 정지했다. 크게 충격 받은 이성이 도통 기능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억지로 머리를 쥐어짜며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쥐었다. 그리고 세 살배기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풀밭에 가상의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자, 카카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큼큼 헛기침을 하며 가다듬어 봤지만 소용이 없다. 포기하고 말을 계속했다.
“엘프들은 거짓말을 안 하지? 왜냐. 진실을 꿰뚫어보는 엘프에게 거짓말은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뜻은 뭐야? 그들이 하는 말이 진실이란 뜻이야. 그렇지? 아까 엘프가 뭐라고 했니? 용사들이 날 사랑하고 있다고 했어.”
나는 하트를 그리며 꼼꼼하게 따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감정을 숨기려고 했기 때문에 들킨 거래. 왜냐하면 엘프들은 진실을 꿰뚫는 눈을 가졌으니까. 그 들킨 감정은 뭐다?”
나는 하트로 향하는 화살표를 그렸다.
“사랑이다.”
나는 끝끝내 결론을 내렸다.
“용사들은 날 사랑하고 있고, 그건 진실이다.”
울타리에 이마를 쿵, 찧었다.
“이런 미친.”
기다려 봐봐. 날 사랑한다고? 응, 날 사랑한대……. 왜? 몰라……. 사랑이 뭐지?
정신이 붕괴되려고 하자 개념부터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입 안에서 굴려보듯, ‘사랑’이란 단어를 혀 위에 굴려보았다.
모르겠다. 전부 제쳐두고 내 기분을 살펴봤다. 정말 놀랍게도, 크게 당황했을 뿐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왜? 용사들이 날 사랑하는 게 좋니?’
몰라.
‘아는 게 뭐니?’
“넌 병X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다. 인정하지?”
나는 스스로를 혼내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나무막대를 쥐었다.
“엘프가 보기에, 나는 용사들에게 호감을 품고 있대. 맞아?”
나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흠, 별로. 나쁘진 않지.”
혼자 얘기했을 뿐인데 얼굴이 달아오른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나쁘지 않다는 건 좋아한다는 거야?”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편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럼 그건 사랑이야?”
나는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답했다.
“몰라.”
하지만 호감인 건 확실하다.
“그래서 싫지 않은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음 주제로 넘어가서, 나무막대로 커다란 나무를 그렸다.
“일단 용사들은 그 자리에 없어서, 엘프들이 무슨 발언을 했는지 몰라. 그렇지? 문제는 나야. 너 무슨 얼굴로 걔네를 볼래?”
‘방금도 상상만 했을 뿐인데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렸잖아.’
미친다. 이런 상태론 못 만난다. 생각이든, 태도든 정리하고 만나야 했다. 안 그러면 내 상태에 예민한 용사들이 몇 마디 캐묻기만 해도 사실이 까발려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일이 커진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도 안 가고, 용사들을 마주 볼 용기도 없어진다.
나는 여행의 매력도 이제야 막 알아채기 시작했다.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는 미지의 행동은 불안만 가중시킬 뿐이다.
‘나는 지금이 좋아.’
적당히 호감이 있고, 서로를 챙겨주는 관계. 하지만 깊지 않아서, 헤어질 순간엔 떠나보낼 수 있는 관계.
나는 사랑 따윈 모른다. 그것처럼 내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막막하기만 했었는데, 이렇게 생각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티 내지 말자.’
나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며 세뇌를 시작했다.
‘아는 척도 하지 말고. 이 일에 대해선 영원히 함구하고 모르는 척하는 거야.’
좋아, 이건 내가 잘하는 분야다.
나는 다리가 저릴 때까지 고민을 거듭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이었지만, 내 태도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것만으로 많이 안정이 되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가 아주 큰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무슨 일 있었어?”
‘눈을 못 마주치겠어!’
시선을 피하자 아다르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뺨이 붉습니다.”
근처에 서 있던 첼러스가 걱정하며 손을 뻗었다. 그의 거칠고 단단한 손가락이 내 뺨에 닿을 찰나, 나도 모르게 움찔 놀라며 눈을 감아버렸다. 누가 봐도 이상한 행동이었다. 용사들의 눈엔 어떻게 비쳤을지 불 보듯 뻔했다.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데?”
할릭이 거들었다.
“무, 무슨 소리야. 그런 적 없어!”
결국 할 수 있는 건 억지 부리는 것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 분야도 내가 제법 일가견이 있는 분야다. 괜히 쿵쿵거리며 욕실이 있는 곳으로 도망갔다.
“씻을 거니까 말 걸지 마!”
그리고 쏟아지는 찬물을 맞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야! 그게 뭐라고! 그냥 모르는 척하면 되는 거잖아!’
그런데 의식이 되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가 없었다. 심장도 계속 빠르게 뛰고 자꾸만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분명 잘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인가. 나는 첼러스가 만졌던 뺨을 손으로 쓸어보면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화상자국처럼 그가 쓸었던 부위가 화끈거렸다.
눈을 감으면 그가 어떤 식으로 피부를 쓸었는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귀가 뜨거워졌다.
‘어떡해.’
괜히 울음까지 난다.
나는 욕실 벽에 한참 동안 이마를 맞댔다. 그러다 머리까지 물에 젖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이런 실수를 하나 싶다.
‘잘됐네. 머리 빗으면서 어떻게 할지 방법을 강구해보자.’
나는 샤워커튼을 젖혀 머리를 내밀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내 매끈한 얼굴을 본 용사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나는 스르르 시선을 피하며 내 가방을 가리켰다.
“누가 가방 좀 줘.”
“왜?”
“머리 감으려고. 얼른.”
나는 아다르가 가방을 넘겨주자마자 서둘러 커튼을 쳤다. 그리고 느릿느릿 씻다가 추워서 몸이 덜덜 떨릴 즈음 되어서야 머리를 수건으로 돌돌 감고 밖으로 나왔다.
“머리를 말려드릴까요?”
첼러스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제안했다.
“아니.”
나는 단호하게 거절한 뒤 거울 앞으로 갔다. 그리고 수건에 봉인되어 있는 젖은 머리를 우르르 쏟아냈다. 천천히 물기를 닦아내는데, 등 뒤로 용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상태가 이상한 건 확실한데 내가 숨기는 눈치니 말을 못 거는 듯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할릭이 물었다.
“바람 쐬면서 머리 말리게.”
나는 간결하게 대답하고 도망치듯 발코니로 나왔다. 그리고 한참 동안 머리를 구겨 쥔 채 끙끙거렸다.
그날 밤은 지독히도 길었다.
***
“잠자리가 불편하십니까?”
라넷이 불현듯 물었다.
나는 뻑뻑한 눈꺼풀을 깜박이며 고개를 들었다. 해가 유난히 눈부신 날이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 괜찮아요.”
‘사실 불편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당연하지만, 간밤에 조금도 자지 못했다. 용사들이 앞 다투어 내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는데, 이젠 그게 의미하는 바가 뭔지 너무 선명하게 보였던 탓이다.
가에 자리를 잡아서 왼쪽만 용사와 맞닿아 있는 상태였는데도 신경이 쓰여서 죽는 줄 알았다. 어찌나 긴장이 되던지, 사지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했었다. 눈을 감으면 내 심장소리부터 들렸다.
상태가 이런데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라넷에겐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
속사정이 생겼음을 눈치챈 라넷이 부드럽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는 어떻게 할지 머리를 굴리다가, 내밀어진 지푸라기를 붙잡아 보기로 했다.
어차피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들킨 마당이다. 조금 더 이상해져도 되겠지 싶었다.
“혹시, 방을 하나 더 주실 수 있나요?”
“지금 계신 방이 불편한가요?”
좋은 핑곗거리가 떠올랐다.
“사실, 남성과 여성은 잠자리를 따로 하거든요.”
방 두 개면 엘프의 입장에서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을 터다. 왜 진작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런.”
라넷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을 주셨더라면 방을 드렸을 텐데요.”
“이미 큰 방을 주셨잖아요. 사실 너무 극진히 대접해주셔서, 말을 건네기 어렵더라고요.”
“오늘 밤에 바로 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대화가 끊기자 숲에 사는 야생동물의 소리와 풀 부대끼는 소리가 커졌다.
우리는 신목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용사들은 따라오지 못했다. 수장의 경고 때문이었다. 엘프와 선택받은 자 외에는 신목의 땅으로 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상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생겨서 그런지, 용사들은 의외로 순순히 납득해줬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엘프 특유의 신뢰감이 크게 한몫한 것이다.
덕분에 잠깐이라도 떨어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램프는 왜 챙기는 거예요?”
나는 라넷이 들고 있는 기름램프를 톡 건드리며 물었다.
“신목이 동굴 안에 있나 보죠?”
“동굴 안에 있는 건 아닙니다만, 아마 가보시면 알 겁니다.”
라넷이 잔잔한 어조로 답했다.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내가 보기엔 다 같은 숲인데, 엘프들은 이리저리 방향을 틀었다. 특별한 길이 있는 것처럼.
‘신목은 중요한 나무잖아. 이중삼중으로 결계를 쳐도 이상하지 않지.’
그렇게 생각하면, 복잡하게 방향을 트는 엘프의 움직임이 납득이 되었다. 숲에 쳐진 결계를 피해가는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안개가 짙어졌다. 불투명한 천이 겹겹이 쌓이듯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농도 짙은 안개 탓에 솜털에 미세한 물방울이 맺혔다. 피로로 뻑뻑했던 목 깊숙한 곳까지 촉촉하게 젖는 느낌이 들었다.
‘수인족의 시력도 소용없을 만큼 짙은 안개라니.’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감이 온다.
라넷이 내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이곳만 벗어나면 한층 걷기 쉬워질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한참을 더 걸었다. 신비로운 숲에서 헤매고 있으니 시간 감각도 이상했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지만, 안개 때문에 해가 보이지 않았다. 들러붙는 면옷이 불쾌하게 느껴질 무렵, 안개가 서서히 옅어졌다. 그러다 돌연 맑게 갠 장소로 빠져나왔다.
나는 옷소매로 촉촉하게 젖은 뺨을 두드리며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고목나무가 열을 지어 서 있었다.
‘나무가 특이하게 생겼네.’
엘프 거주구역에 있는 나무가 탑처럼 말끔하다면, 여기 있는 나무는 번잡했다. 그런데 줄맞춰 세워놓은 것처럼 일렬로 자라 있는 게 이상했다.
수상하고 웅장한 광경을 유심히 관찰하던 나는 불현듯 굉장한 사실을 깨달았다.
‘저거 설마 눈이야?’
주름진 나무껍질 탓에 티가 거의 나지 않았으나 감겨 있는 눈이 나무에 달려 있었다.
‘아니, 나무가 아니야. 저거 나무골렘이잖아!’
그것도 거인처럼 우람한 골렘!
이끼와 기생식물, 잎사귀로 무성하게 덮인 골렘 수십 마리가 쥐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숨을 죽였다. 두렵다 못해 경이로웠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골렘의 틈새를 살폈다. 나무골렘이 손을 맞잡은 채 무언가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 너머는 어둠에 잠겨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예상컨대 신목으로 향하는 드래곤의 마지막 관문인 듯했다. 신목으로 향할 자격이 충분한지 나무골렘들이 심판하는 것이다.
‘엘프들은 신목에서 태어난다고 하니까, 어머니 배 속이나 다름없겠지.’
엘프들은 편안하고 안온해 보였다. 나는 느낄 수 없는 기운이라 조금 궁금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잠들어있는 골렘들의 눈치를 살폈다. 저 사이로 지나갔다간 불시에 눈을 뜨고 나를 짜부라트릴 것 같았다. 온통 엘프뿐이니 이물질인 나는 더 도드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걱정에 걱정을 더하며 주춤주춤 라넷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나무골렘은 내가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데도 움직임이 없었다. 무사히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서 완벽한 암흑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시야를 가렸다. 별안간 옆에서 희미하게 램프 불이 켜졌다. 라넷이 들고 있던 기름램프였다.
나는 어둠에 눈이 적응되자마자 주위를 살폈다. 골렘 너머의 숲일 뿐인데 이상하게 햇빛이 들지 못하고 있었다.
‘동굴은 아닌 것 같은데.’
의아하게 여기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라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하늘이 빽빽한 나뭇가지로 빈틈없이 막혀 있었다.
“저거…….”
“신목의 가지입니다.”
라넷이 설명했다.
“저게 다 신목의 가지라고요?”
라넷이 말없이 앞장섰다.
나는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땅은 흔한 잡초도 없이 촉촉한 흙으로 되어 있었다.
한참을 걷자, 키 낮은 나무기둥이 나타났다. 여태 보아왔던 거대한 나무들과 비교하면 한참은 낮은 높이였다. 그러나 세 번은 꺾어 겹친 것처럼 기둥이 굵었다. 천장을 이룬 빽빽한 나뭇가지들이 그 기둥으로부터 뻗어 나와 있었다.
신성한 땅에 홀로 뿌리를 내린 나무, 신목이었다.
엘프들의 수장 리헬론이 앞장서서 기둥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올라가는 건가 했는데, 기둥에 굵직한 나뭇가지가 드문드문 자라 있었다. 꼭 신목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계단처럼 보였다.
아무리 키 낮은 나무라지만 울타리 없이 올라가려니 아찔해졌다.
‘여기까지 와서 못 올라가겠다고 말할 수도 없고…….’
나는 난감해져서 몸을 긴장시켰다. 엄숙한 분위기인 탓에 넌지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어두컴컴해서 밑이 잘 보이지 않았고, 나뭇가지는 넓적했다. 흔들릴 거란 생각과 달리 튼튼해서 안정적이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며 나뭇가지를 밟고 올라갔다. 돌로 된 층계참이라 스스로를 세뇌하자 꽤 올라갈 만했다.
나무기둥을 두 바퀴 휘어 감듯 올라가자, 나뭇가지로 된 천장이 정수리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라넷이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젖혔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햇빛에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 낮이었던 모양이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얼어 있으니, 라넷이 내 손을 잡았다. 그걸 잡고 위로 쑥 올라갔다. 위에 올라가고도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햇빛이 얼마나 센지 홍채가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여기 나무 위 맞지?’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발로 바닥을 더듬었다. 가지 같지가 않고 또 다른 땅 위에 올라온 느낌이었다.
“이렇게 올라와도 안전한…….”
수차례 눈을 깜박이며 질문하던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멈췄다. 벚꽃이 수북하게 쌓인 언덕이 신화 속 낙원처럼 펼쳐져 있었다.
아니, 벚꽃이 아니었다. 여린 분홍색을 띤 잎사귀였다. 그것이 빽빽하게 자라 땅을 이루고 있었다.
얼마나 조밀하게 엉키며 자랐는지 여기가 나뭇가지 위라는 사실이 실감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분홍색 이파리를 자세하게 살폈다. 동그라미 모양이었다. 내 주먹만 한 잎사귀가 발목을 간질이며 바람에 흩날렸다.
‘이런 모양은 처음 봐.’
원 모양이어서 분홍색 물감이 사방에 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게 뭐지?’
거대한 알이 잎사귀에 반쯤 파묻혀 있는 것이 드문드문 보였다. 크기는 나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으리만치 컸다.
“엘프의 알입니다.”
라넷이 설명했다.
“부화할 때쯤 되면 알에 연결되어 있는 나뭇가지가 마르면서 떨어져 나갑니다.”
‘인간의 탯줄이랑 비슷하네.’
나는 경이로움을 느끼며 알을 쓰다듬었다. 미묘하게 따뜻했다. 놀랍고 신기하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이게 끝인가?’
라넷이 신목을 만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긴 했지만, 어쩐지 싱거웠다. 수상한 의식을 치른다든가, 신목과 교감을 시킨다든가 하는 줄 알았다. 구경만 하고 돌아가면 관광객과 다를 바가 뭐 있나 싶었다.
‘이것만으론 내가 풍기는 신목의 기운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을 텐데. 뭔가 좀 더…….’
“이상하군요.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만, 저만 그렇게 느껴집니까?”
‘그래, 이렇게 이상한 일이 벌어질 줄, 응?’
“흔들린다고요?”
“예.”
“그럴 리가…….”
나는 입을 다물고 몸을 낮췄다. 정말로 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까드득거리는 나뭇가지 소리와 잎사귀들이 스스스 떨리는 소리가 섞여 났다. 나는 바로 겁을 집어먹었다. 언덕처럼 보이지만 여긴 신목의 나뭇가지가 공중에 만들어놓은 땅이다. 흔들리다가 갑자기 구멍이라도 뚫리면 그대로 추락이었다.
사색이 되어서 바닥에 엎어졌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역시, 당신은 선택받은 분이 맞았군요.”
여태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리헬론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리헬론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미끄러뜨렸다. 아무것도 없는 오른편에서, 무언가가 위로 서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처음엔 새로운 엘프의 알이 나타나는 건 줄 알았다. 저런 식으로 나뭇가지 속에 파묻혀 있다가 때가 되면 위로 올라오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생김새가 달랐다.
엘프의 알은 하얀색이다. 새로 솟아 올라온 정체불명의 알은 회색과 보라색이 섞인, 희미한 회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마른 입술을 핥으며 눈을 깜박였다. 타조 알 정도 되는 크기에 화려한 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도통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무늬처럼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털처럼 뾰족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꼭 장인이 손수 빚은 기하학 무늬처럼 보였다.
나는 알에 홀린 듯 시선을 두었다.
“저건 무슨…… 헉!”
말을 꺼내자마자 알이 쩌적, 갈라졌다. 그리고 그 두꺼운 알껍데기 틈으로 짤막한 은색 털이 점액질에 젖은 채 꼼질거리는 게 보였다.
단연코 사람의 형상은 아니었다.
별안간 작은 머리통 하나가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괴생명체와 눈이 마주쳤다. 크고, 투명하고, 보석처럼 겉이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눈이었다. 생긴 건 어찌나 깜찍한지, 일순 경계심마저 내려놓고 구경했을 정도다.
그것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가냘프게 울었다.
뀨?
“허억!”
내가 거세게 헛숨을 삼키며 심장을 움켜쥐자, 웅성거리며 상황을 살피던 엘프들까지 숨을 들이켰다. 리헬론은 눈알이 굴러떨어질 기세로 눈을 크게 치뜨고 있었다.
다른 엘프도 아니고, 나이가 지긋한 수장마저 놀란 얼굴을 하자 그제야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 왜들 그러세요? 저거 위험한 거예요?”
치명적일 정도로 귀엽게 생겨서 위험한 생명체라곤 생각되지 않았지만 우선 묻고 보았다. 다들 혼이 빠져서 대답을 못 했다.
나는 애써 의심을 담은 눈으로 동물을 살폈다.
전체적으로 여우를 닮았다. 그러나 귀가 훨씬 길고 컸으며, 이마 가운데엔 하얀색 보석 같은 것이 나 있었다. 꼬리는 제 몸보다 커서 두 갈래로 나뉜 채 살랑이고 있었다. 풍성하고 구불구불한 은색 갈기가 목에 목도리처럼 감겨 있다.
‘야수처럼 독특하게 생겼네.’
여우인지 너구리인지 분간이 안 되는 앙증맞은 얼굴로 동물이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더니 알을 전부 깨고 나와 내게 아장아장 기어오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크기였다.
‘너무 귀엽다.’
적당히 크고 동그란 오키드 색 눈이 털 속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갓 꽃을 피워낸 야생난초 같은 색상이다.
“그 알은…….”
간신히 진정한 리헬론이 뒤늦게 정체를 알려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동물의 영롱한 은빛 털을 비집고 검은 연기 같은 것이 꾸물꾸물 기어 올라왔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전신으로 소름이 내달렸다.
나도 모르게 동물을 피해 뒤로 물러서자, 위험을 감지한 라넷이 나를 끌어당겨 제 뒤로 숨겼다.
뀨우우우우!
동물이 발작을 하며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동물의 코와 귀, 입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죽이려 하고 있어!’
동시에 간절한 비명이 내 머릿속에서 쟁쟁하게 울렸다. 검투사들의 마을에서 여러 번 경험해 본 소리였다. 도움을 청하는 비명 소리.
누가 내는 소린지는 분명했다. 코앞에서 고통 받고 있는 저 아이의 외침이다. 살려달라고, 자기를 안아달라고.
‘하지만.’
나는 검은 연기를 보며 망설였다. 라넷 또한 날 앞으로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건드렸다간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하고 검은 연기였다.
나는 저 비슷한 것을 전에도 본 기억이 있었다. 알렉 브래든을 휘감고, 졸지엔 내 숨을 틀어막았던 검은 연기와 흡사한 생김새였다.
‘어떡하지?’
갈등하는데, 동물과 시선이 마주쳤다.
밝은 보라색 눈망울이 눈물에 젖어 있었다. 그 눈을 보자,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안기만 하면 해결돼!’
라넷의 손을 내치고 기어가듯 동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작은 몸을 무작정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카카나 님!”
라넷이 기겁을 하며 내게서 동물을 떼어내려고 했다. 나는 아이를 세차게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물러서거라, 라넷.”
리헬론이 중재에 나섰다.
라넷은 나와 리헬론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고통스럽게 헐떡이던 동물이 주둥이를 벌려 내 팔목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윽…….”
내 안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힘이 빠지거나 아프진 않았지만 낯선 느낌이어서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나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동물을 감싸고 있던 검은 연기가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리는 모르겠으나 효험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 검은 연기는 정체가 뭐지? 알렉 브래든의 몸에서 뿜었던 연기도 그렇고……,’
그래도 이젠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이다.”
안심하고 동물을 쓰다듬으려는 찰나,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검은 연기가 뒤집어진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징그러워서 나도 모르게 손을 뒤로 물렸다. 연기에서 끈적끈적한 거품 같은 것이 와락 부풀었다.
동물이 싫어서 버둥거리며 발악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연기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연기가 전부 사라졌다. 그러나 거품은 그대로였다.
동물이 내 품에서 빠져나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점액질이 채 마르지도 않은 털을 곤두세우며 거품을 향해 으르릉거렸다. 날 지키려는 듯이.
리헬론이 손을 들어 명했다.
“카카나 님을 보호해라.”
화살과 검을 챙긴 엘프들이 내 주위를 감쌌다.
꿈틀거리던 거품이 푸쉬이, 소리를 내며 새까만 연기를 허공에 내뿜었다. 연기가 한데 뭉치며 사람의 형태를 취하더니, 곧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사람?’
연기에서 사람이 튀어나온다는 소린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동태를 살폈다. 나타난 남자아이는 검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찌나 푹 눌러쓰고 있는지 눈은 고사하고 코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기이하게 비틀려있는 입술뿐이었다.
아이는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목처럼 드러난 부위는 모두 붕대를 감고 있다. 연기로 된 아이가 고개를 틀었다.
눈이 모자로 가려져 있어서 누굴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왠지 날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발견인데.”
연기에서 나타난 아이가 나지막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감탄했다.
“신수잖아.”
‘신수?’
나는 반사적으로 은빛 동물을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말을 이었다.
“‘저주’가 느껴지길래 추적했더니, 예상외의 것을 발견했어. 과연, 신수를 발견하고 물어뜯었다 이거로군.”
허공에 뜬 검은 연기의 아이가 동물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흥미롭게 턱을 문질렀다.
컹컹!
그렇게 떨던 작은 동물이 기괴한 남자아이 앞에서 기도 죽지 않은 채 짖어댔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목을 쥐어뜯을 기세였다.
“신수의 알을 몰래 엘프 서식지에 숨겨둔 건가. 하여튼 얌체 같은 종족이라니까.”
남자아이가 느릿느릿한 말투로 신랄하게 중얼거렸다.
“고귀한 척 그렇게 콧대를 세우면서 하는 짓은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단 말이야.”
혼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남자아이가 위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엘프 한 명 한 명을 가리키며 우릴 굽어보았다.
“자, 그럼. 신수를 누가 깨웠을까? 엘프들은 당연히 그런 힘까진 없을 테고.”
고깔모자가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는 아이가 주위를 빙 둘러본다. 꼭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아이가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다 나를 향해 정확히 멈춰 섰다. 얇은 입술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인간, 너구나?”
위험하다.
그렇게 판단한 순간, 동물이 도약하며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연기를 잠시 흐트러트릴 뿐이다. 타격을 입지 않은 아이가 제 고깔모자를 습관적으로 눌러썼다.
“이상하다. 인간은 신수를 깨우지 못할 텐데. 저주로 죽어야 할 새끼 신수는 살아있고. 흠…… 아무스에게 말해야 하나. 내 재밋거릴 뺏을 것 같아서 내키지 않는단 말이지.”
그때, 동물이 흐트러트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남자아이의 모습이 흐려졌다. 똘똘 뭉쳐있던 연기가 물에 풀어진 잉크처럼 퍼지다가, 다시 꾸물꾸물 응집했다.
아이가 혀를 찼다.
“결계가 삼엄하네.”
탐욕스럽게 입술을 핥은 아이가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것도 널 지키기 위한 장치일까? 응?”
아이가 시험 삼아 손을 흔들었다. 손의 형상이 움직임을 따라 흐려졌다가 억지로 모양을 다잡았다.
“기척을 거의 숨겼는데, 대단하네. 뭐, 드래곤이니 당연하지만.”
여유롭게 중얼거린 아이의 모습 일부분이 무너지며 허공으로 서서히 흩날렸다. 형태를 유지하는 데 한계가 찾아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날 튕겨내시겠다.”
가소롭다는 듯 비소를 터트린 아이가 돌연 내 코앞으로 나타났다. 워낙 찰나의 시간이라, 그 어떤 엘프도 반응하지 못했다. 날 보호하기 위해 뛰어든 존재는 오직 방금 막 부화한 새끼 동물뿐이었다.
뜨거운 동물의 몸이 품에 안긴 순간, 아이가 내 어깨에 손을 댔다.
‘용사들은 마을에 있는데.’
낭패로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본 아이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렇담 혼자 나갈 수야 없지.”
아이가 음험하게 말을 이었다.
“같이 가자, 아가씨.”
시야가 암전되었다.
“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텔레포트를 어떻게 한 건지, 대차게 넘어지는 바람에 손바닥과 무릎이 까져서 피가 났다. 이를 벅벅 갈며 고개를 들었다. 검은 연기였던 아이가, 이번엔 실체를 가지고 근거리에 서 있었다.
본체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며 눈을 주위로 굴렸다. 깊은 숲이었다. 그러나 퀄리티미엄은 아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와, 바깥세계의 풀들이 즐비했다. 인가로부터 한참은 멀리 떨어진 숲처럼 보였다.
나는 우거진 수풀을 신경질적으로 젖히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가 지나가는 행인에게 시비 거는 양아치처럼 불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성깔 있네, 너.”
“…….”
“이름을 묻기 전엔 내 이름부터 밝혀야겠지?”
아이가 과장되게 허리를 숙이며 내게 인사했다. 파티의 주인공이 관중들에게 첫 인사를 건넬 때처럼 겉멋을 한껏 부린 인사였다.
“반가워. 아가씨. 내 이름은 바드야. 너는?”
아이의 고깔모자가 내게 똑바로 향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으나,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갑자기 수틀려 날 죽일 것 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카카나.”
“카카나? 아아…….”
남자아이가 무언가를 떠올리듯 눈을 굴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카카나 페아구나. 이거 운이 좋네.”
‘성은 알려준 적이 없는데?’
나는 눈썹을 구기며 바드를 응시했다. 그가 킥킥 쉰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긴, 그래. 빌어먹을 신수를 깨울 만한 게 지금 이 상황에서 너 말고 더 없긴 하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 재미없게.”
바드가 허공에 검은 연기로 된 의자를 생성하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연기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보이던 알렉 브래든과는 확연하게 다른 양상이었다. 그는 ‘저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쉽게 질려하는 타입이 아니거든. 재미있는 게 생기면 오래 가지고 놀 수 있도록 신경 쓰는 편이야.”
붕대를 감은 바드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널, 쉽게 망가트리지 않을 거란 소리지. 내 친구들과 다르게 말이야.”
그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천천히 즐기고 싶은데 말이야.”
돌연, 으르렁거리는 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바드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불청객이 많아?”
나는 식은땀이 번진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주위로 눈을 굴렸다. 서너 마리의 야수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해칠 것처럼 으르릉거리는데도, 이상하게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나를 노리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야수의 목표는 바드였다.
“그래, 덕분에 확실해졌네. 평범한 인간이라면 어떻게 야수나 신수를 길들이겠어. 그렇지?”
“…….”
“야수 정도면 엘프도 길들일 수 있겠지만 넌 엘프가 아니잖아.”
바드가 손가락을 탁, 튕기며 턱을 치켜들었다.
“일단 방해되니까 결계부터 치고.”
돔 모양의 결계가 소리 없이 우리를 에워쌌다.
방어마법 스크롤을 사용해본 경험이 있지만, 이런 형식의 결계는 처음 보았다. 결계가 새까매서 밖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둠이 내려앉지 않고 내부가 환했다.
“자, 반항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바드의 검은 연기가 내게로 기어왔다.
“잠깐 확인만 하려는 거야. 확인만.”
동물, 아니 신수가 연기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내게 천천히 기어오던 것과 달리, 날카로운 쇠꼬챙이 모양으로 변한 연기가 신수에게 공격적으로 쏘아졌다.
“안 돼!”
내 간절한 부름을 무시한 연기가 잔인한 올가미처럼 신수의 몸을 틀어쥐어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신수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곳으로 걸어가려 하자, 검은 연기가 난폭하게 신수의 몸을 옥죄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
바드가 속삭였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듯하던 바드가 문득 배부른 사자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넌 내가 좀 거칠게 굴어도 쉽게 죽진 않겠다.”
검은 연기가 내 옷을 파고들며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소름끼치고 불쾌한 감촉이었다. 지네가 내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두 주먹을 쥐고 어떻게든 견뎌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연기가 창칼처럼 뱃가죽을 뚫고 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등줄기에 옷자락이 축축하게 들러붙었다. 내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살피던 검은 연기가 한참 뒤에 물러났다.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바드가 의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너, 증표가 없네?”
‘증표?’
이쯤 되면 나도 많이 참았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에 관한 걸 왜 모르는 인간들이 왈가왈부 떠들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건지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 인생인데도 남에게 휘둘리기만 하고 있었다.
‘증표, 신수, 야수, 알렉 브래든, 바드!’
전부 지긋지긋하다. 나는 얼굴을 사납게 찡그리며 공격적으로 쏘아붙였다.
“목적이 뭐야!”
“이런, 뭐 때문에 화가 났어?”
“왜 내 몸을 조사한 거지? 증표는 도대체 무슨…….”
“뭐긴.”
바드가 내 말을 잘라내며 답했다.
“천족의 증표를 찾으려는 거잖아.”
나는 잠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뒤늦게 다시 물었다.
“뭐라고?”
“어쭙잖은 마법부터 해결할까?”
바드가 손을 휘저었다.
내 손에 끼워져 있던 스노아의 반지가 산산이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황급히 손등을 확인했다. 아레사 나이제르가 만들어준 사랑의 오작교까지 지우개로 지워지듯 사라지고 있었다. 초월자인 대마법사와, 마탑의 현자가 만들어준 마법이 손짓 한 번에…….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게 없으면 용사들에게 내 위치를 알릴 수가 없는데.’
발을 물렸지만, 별안간 결계에 부딪혀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굳어 움직일 생각이 없는 혀를 깨물었다.
“천족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이라도 벌어야 했다.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땅을 기어 다니는 벌레랑 다를 바가 없었다. 바드가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온몸이 터져서 죽을지도 몰랐다.
‘멍청하게 굴지 말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를 하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바드가 두 손을 양방향으로 퍼덕거리며 설명해주었다.
“천족 몰라? 하얀색 날개 달린 애들 있잖아. 조류처럼.”
“그건 신화 속에서나…….”
바드가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지척으로 다가온 바드가 내게 얼굴을 한껏 들이밀었다.
살기가 수백 발의 화살처럼 쏟아졌다. 붕대 너머로 끔찍한 냄새가 풍겨온다. 여태껏 왜 몰랐나 싶은 악취였다. 나는 이 냄새의 정체를 알았다.
‘썩은 내……!’
“너 누구 기다리는 거야?”
등줄기부터 목덜미까지 소름이 주욱 돋아났다. 나는 눈꺼풀도 깜박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용사들이라도 위치를 알아내긴 힘들 거야. 왜인 줄 알아? 걔네가 이런 결계를 경험해본 적이 있을 리 없거든.”
바드가 새까만 결계를 손등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가 숨을 뱉을 때마다 구더기가 들끓는 사체 냄새가 나서 속이 뒤집히려 했다. 어금니를 악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았다. 과도하게 긴장한 탓인지 얼굴가죽이 차갑게 식고 있었다.
“그러니까 귀여운 짓 그만하고 내게…….”
그때, 바드의 바로 뒤편 결계에 구멍이 뚫렸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구멍을 바라보았다. 사제의 신성마나로 똘똘 뭉친 것 같은, 새하얀 빛의 화살이 구멍을 향해 곧장 날아오고 있었다.
검은 결계가 꼭 화살에 들러붙는 것처럼 보였다. 이쪽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따라 쭉 늘어나다 끊어졌기 때문이다.
바드가 뒤늦게 공격을 알아채고 몸을 돌렸으나, 늦었다. 화살이 그의 어깨에 박히며 치이익, 고기 익는 소리를 냈다.
“악!”
바드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그를 밀쳐낸 뒤, 최대한 멀리 뛰어갔다. 그와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었다.
바드와 정반대 지점에 멈춰서 숨을 몰아쉬자, 결계 전체가 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전력으로 두드리는 북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으윽!”
골이 울리고 고막이 터질 것 같아서 귀를 틀어막고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난폭하고 강한 힘이 결계를 주기적으로 공격하다가, 마지막엔 비교도 안 되는 괴력으로 올려쳤다.
콰앙―!
동시에 결계가 유리조각 깨지듯이 조각조각 갈라지며 허공으로 흩날렸다. 나는 식은땀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바드가 우두커니 서서 내 등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카나!”
화끈한 땀 냄새와 거친 숨소리가 나를 다급하게 껴안았다.
나는 허옇게 뜬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지 않으면 울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너무나도 안심이 되고, 익숙한 음성이었다.
진땀을 뚝뚝 흘리는 첼러스가 황급히 나와 눈을 마주했다. 심하게 울렁거리는 호수빛 눈망울에 일말의 안도가 스몄다. 내게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덕분이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나는 눈가를 손등으로 짓누르며 애써 얘기했다.
“없어.”
“죄송합니다.”
첼러스가 꽉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늦지 않았으니까. 근데 너희들은 왜 꼴이…….”
용사들의 몰골이 하나같이 너저분했다. 한바탕 패싸움이라도 하고 온 사람들처럼 흐트러진 데다 얼굴은 파리했다. 단언컨대 용사가 이렇게 땀을 흘리는 건 처음 본다.
“이곳은 퀄리티미엄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입니다.”
첼러스가 내 의아한 얼굴을 보더니 간단하게 설명했다.
“카카나의 기척을 찾을 수 없어서 조금 고생했습니다.”
그때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바드가 씩씩대며 소리쳤다.
“누구야!”
화살에 맞은 부위를 검은 연기로 틀어막은 채였다. 용사들에게 소리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바드는 용사가 아닌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다른 누군갈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곳까지 추적해 와서 바드를 공격할 사람이 용사들 말고 누가 있단 말인가?
‘빛의 화살은 누가 쏜 거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첼러스가 나를 안고 뒤로 한참 물러서자, 용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바드의 머리 위로 스노아가 캐스팅한 에어볼이 생성되었다. 지체 없이 쏘아져 바드의 몸을 공중으로 쳐냈다.
순식간에 멀리까지 날아간 바드가 잇새로 피를 토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피가 검은색이었다.
“크윽!”
침음을 삼킨 바드가 통증을 참을 새도 없이, 할릭이 바드의 몸 뒤에서 나타났다. 커다란 손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머리를 틀어쥐자, 아다르의 잭나이프가 뒤를 이었다. 붕대로 감긴 바드의 목을 중앙부터 뚫고 들어간 검날이 일직선으로 오른쪽을 향해 그어졌다.
구멍 뚫린 물풍선처럼 검은 피가 공중으로 확 솟구쳤다. 저 정도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피와 바드의 몸이 검은 연기로 뭉그러지며 사라졌다. 나를 품에 안은 채 상황을 관전하던 첼러스가 갑자기 전신에 힘을 주며 검을 뻗었다.
쿠웅―!
싸구려 롱소드와 검은색 스태프가 까드드득,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헉!”
어떻게 살아있는지 알 수 없는 바드가 코앞으로 이동해 있었다.
“크윽!”
첼러스가 검기를 일으켰다.
스태프가 치즈 썰리듯 두 동강 나자, 바드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버렸다. 그리고 검은색 결계로 제 몸을 감싼 뒤 순간이동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붙어 섰다.
첼러스의 검기와 부딪힌 결계에서 유령의 비명 같은 소음이 일었다. 반으로 잘린 바드의 목에서 썩은 슬라임처럼 꿀렁거리는 핏덩어리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윽!”
나는 불시에 코가 쑤셔진 사람처럼 인상을 찡그리고 고개를 뺐다. 견딜 수 있는 냄새가 아니었다. 어금니를 악물며 콧방울을 움켜쥔 순간, 바드가 입술을 움직였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바람소리밖에 나지 않는 음성이었지만, 분명히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블러드 익스플로전.”
근처로 텔레포트 한 스노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쉴드!”
다섯 겹의 방어마법이 순식간에 생성되어 첼러스와 나를 알처럼 감쌌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바드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폭발했다.
가히 연쇄폭발이라 칭할 만한 충격이 쉴드를 후려치자, 버티지 못한 쉴드가 우리를 감싼 채 통째로 하늘에 날아올랐다.
“끄, 윽!”
숨쉬기도 힘들어져서 죽어가는 신음을 삼켰다. 첼러스가 두 손을 엑스 자 모양으로 겹치며 내 몸을 감쌌다. 어마어마한 압력이 우릴 짓눌렀다. 그가 들고 있는 검날에 지속적으로 뭔가가 부딪히는 것처럼 팅, 팅 소리가 났다.
“훅!”
숨을 집어삼킨 첼러스가 몸의 순수한 근력을 끌어올려 공중에서 나를 고쳐 안았다. 이 압력에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데, 밑으로 빠지려는 나를 손아귀와 팔뚝 힘만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알통을 감싼 첼러스의 옷이 찢어질 기세로 팽팽하게 늘어났다. 근육에 제대로 힘을 불어넣은 첼러스가 핏줄이 시퍼렇게 돋은 오른손으로 정면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까득, 어금니를 악물더니 거대한 검풍을 날렸다.
평범한 검풍이 아니었다. 푸르스름한 검기가 검날의 모양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앞으로 쏘아졌다.
마나로 된 초승달이 비상하듯 바드를 향해 맹렬히 날아갔다. 그 반작용으로 첼러스의 옷소매가 재봉선을 따라 어깨까지 단숨에 터졌다. 사선으로 날아오는 검풍을 직격으로 맞은 바드의 몸이 공중에서 두 동강 났다. 새파란 하늘에 검은 피가 터졌다.
고깃덩어리가 된 몸을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어떻게든 이어 붙이려고 했다. 저러다 흘러내리는 장기를 주워 담으며 우리에게 달려올 것 같았다.
‘구울도 아니고 뭐지?’
“참초제근(慘草除根).”
한 손에 나비를 띄운 아르모어가 바드의 시체가 있는 곳까지 떠오르며 말했다. 그러나 꿈틀거리는 연기가 날아온 나비를 한입에 삼켜버렸다.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아르모어가 다시 정백을 불렀다.
“참초제근(慘草除根).”
이번엔 정백이 아예 응답하지 않았다.
“번거롭군.”
한숨을 내쉰 아르모어가 시조를 읊조리듯, 평소보다 길고 정성이 담긴 명령을 읊었다.
“검은 혼이 어린 몸에 숨을 얽었다.”
그의 손에 불안정한 붉은 나비가 가까스로 생성되었다.
“풀은 베어도 아무 의미 없으니.”
말이 이어질수록 한 마리, 두 마리, 나비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뿌리를 제하여 화근을 뽑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르모어의 말에 동조하여 형태를 취한 수십 마리의 나비들이, 아니 정백들이 검은 연기를 뒤덮었다. 그러자 무언가가 끊어지듯, 연기가 흩어지며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노아가 첼러스와 나를 땅으로 내려주었다. 시체가 연기로 화하여 허공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끔찍한 몰골을 맨눈으로 보게 되지 않아 다행인 동시에, 이게 도통 무슨 일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용사들도 무거운 침묵을 지킨 채 시체가 떨어졌던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섯 명의 용사들이 한 마음으로 퍼붓는 공격을 오래도 버텼다. 혼자서.
‘사람이 맞긴 한 거야?’
목의 반이 썰리고도 살아 움직였다. 정체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용사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거 심상치 않은데.”
아다르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너희 이런 인간 상대해 본 적 있어?”
“아니.”
할릭이 답했다.
“마물도 이런 재생력을 가지진 못해. 사용하는 마법도, 마나도 처음 보는 것들뿐이야.”
“카카나를 노렸습니다.”
첼러스가 너무 낮아 알아듣기 힘든 저음으로 중얼거렸다.
“죽여야만 제압할 수 있는 인간은 초월자가 된 이후로 처음입니다.”
“관찰한 것만 봐선 꼭 구울 같았어.”
나는 구겨진 얼굴로 말했다.
“냄새도 시체가 부패하는 거랑 비슷한 악취를 풍기고. 하지만 구울은 이성이 있을 리 없으니까…….”
“따로 조종하는 사람이 있었을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마법도 마나도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며.”
혼란스럽게 중얼거리자, 스노아가 냉정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죠.”
싸늘한 물빛 눈망울이 왼쪽에 있는 나무 뒤편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나요? 황녀님.”
***
스노아의 말에 카카나가 놀란 얼굴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무 뒤편에서 호리호리한 체형의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의 여인이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진한 보라색 눈망울과, 언제고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로 대표되는 인물.
황녀, 오로라 그랑루이였다.
그녀는 텔레포트로 이곳까지 당도한 듯했다. 험난한 산중인데도 그녀는 눈이 부시게 새하얀 은백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밤하늘에 수놓인 별빛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다.
스노아는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오로라의 보라색 눈이 상냥하게 스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저 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하 감옥으로 찾아와 대뜸 탈출을 도와주겠다고 얘기했을 때부터 이상했다. 황녀는 그때도 지금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절대 흔들리는 법이 없는, 아르모어의 초연한 여유와 비슷한 미소였다.
황녀는 이제 이십 대 초반이다.
여태껏 혼사를 치르지 않은 이유는 둘째 치더라도, 지나치게 성숙했다. 곱게만 자랐을 그녀가 저토록 굳건하고 강한 태도를 어디서 배워왔단 말인가? 황녀는 스노아 칼리시스가 드물게 예측할 수 없는 인간 중 한 명이었다.
“여전히 예리하시네요, 칼리시스.”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 할까요?”
스노아가 딱딱하게 응수하자, 오로라가 살포시 웃었다. 손으로 만지면 따뜻한 온기가 묻어날 듯 상냥한 미소였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미소에서 왜인지 짙은 피로의 느낌이 풍겼다.
“그럴 필요는 없지요.”
황녀의 뒤에는 키가 작은 사람 한 명과, 사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 한 명이 서있었다.
‘빛의 화살은 저 사제가 쏜 거구나.’
카카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로브를 입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체형으로 보아 여인이었다.
오로라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국은 그대들에게 적이며, 죄인인걸요. 그렇지 않은가요?”
무해한 얼굴, 무해한 말투, 무해한 행동. 오로라 그랑루이는 폭군인 황제의 딸답지 않게 이성적이고 선했다.
용사들의 탈출을 도와준 이유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지배계층 특유의 오만함과 권리 의식이 없었다. 용사들을 도우면서 실제로 그녀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자기를 황제의 자리에 앉혀달라거나, 차원균열지대에 묻혀 있는 유적을 가져와 달라거나 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그럴 만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랬다.
‘황녀는 뭘 바라는 거지?’
스노아는 죽음의 숲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카카나가 포이즌을 중첩한 매직 애로우에 당해 의식을 잃었던 밤. 황녀는 스노아가 생각하건대,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쥐새끼 같은 마법사는 죽기 직전 분명 ‘황실이 패밀리어를 보내 제안했다.’고 토로했다. 황실에서 카카나를 굳이 지목하여 명령할 인물은 황녀 말고 없었다. 그 당시 카카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 황실에서 그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죽지 않게 치명상’만 입히라는 명령은 더더욱 황녀를 의심스럽게 했다.
‘황녀는 카카나가 그 마법으론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 스노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를 도운 것, 카카나의 집 위치를 알고 있었던 것, 그녀가 뛰어난 약제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이곳에 나타난 것까지 온통 의문투성이군.’
스노아는 자기도 모르게 카카나를 가리고 섰다. 그리고 황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로라는 스노아의 도전적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 행동을 이해한다는 듯이.
“왜 그런 명령을 했죠?”
스노아가 물었다. 오로라가 긴 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거죠?”
“죽음의 숲에서 카카나를 공격하도록 지시한 배후는 당신이 아닌가요?”
용사들은 이미 이야기를 나눠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카카나에겐 굳이 알리지 않았다.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등장이나 공격을 필요 이상으로 무서워했다. 불안정한 그녀에게 공포감을 더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배후가 확실히 밝혀지고, 숨을 수 있는 안전한 거처를 찾으면 조심스럽게 말해주려고 했다.
비록 황녀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바람에 일이 꼬여버렸지만 말이다.
당연히 카카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생각보다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공격한 인물이 누군지 비교적 분명해서 그런 듯했다.
황녀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녀의 얼굴에 나무 그림자 말고도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놀랍네요.”
마침내 황녀가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시리라곤 생각지 못했는데요.”
“당신이 제일 유력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스노아가 냉정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사실인 모양이죠?”
목소리가 휘몰아치는 눈보라처럼 차갑다.
황녀는 사나워진 용사들의 기세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언젠간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게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다.
“그래요. 언제까지고 숨길 순 없는 노릇이지요.”
황녀가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 이유도 아시겠지요. 저는 그녀가 용사인 당신들과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어요.”
그녀의 말을 속으로 곱씹은 스노아가 미간을 그러모았다.
‘우리랑 함께하게 만들기 위해 카카나를 공격했다고?’
스노아가 얼굴이 지체 없이 일그러졌다. 그건 다른 용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황녀를 바라보는 카카나의 시선이 해괴망측한 괴물을 쳐다보는 것처럼 변했다.
“도통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시는군요.”
“아니요. 당신은 이미 잘 알고 계세요, 칼리시스.”
황녀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위험에 처한 그녀를 용사들이 버리고 떠날 리 없다는 것을.”
“…….”
“이제 와 말씀드려봤자 변명이겠지만,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다른 확실한 방법이 없었어요.”
스노아는 여전히 그녀의 말을 납득하지 못했다. 대체 뭐가 확실하단 말인가? 카카나를 버릴 리 없는 용사들의 심리?
웃기는 소리다. 황녀와 용사들은 막역지우가 아니었다.
“저희를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비꼬는 말이었으나, 황녀는 사랑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긍정했다.
“그럼요.”
그렇게 대화가 끊겼다.
저 작은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감히 카카나를 해하려 했다는 분노를 잠재우는 것만으로 한계였다.
그래도 하나는 알았다.
‘어떤 목적’을 위해, 황녀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스노아가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복잡해 보이시니, 아무래도 제가 짐을 덜어드려야겠네요.”
황녀가 용케 스노아의 속을 알아채고 말문을 텄다.
“지금이 여러분들에게 고백하기 적당한 상황이거든요.”
황녀가 바드의 시체가 있었던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오랫동안 기회를 기다려 왔어요. 그래서 많은 준비를 해왔답니다.”
오로라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얼굴이 무표정해지자, 되레 그 편이 그녀와 더 잘 어울려 보였다. 이곳이 숲이 아닌 파티 홀이었다면, 저 우수 어린 눈이 퍽 많은 공자들의 마음을 뺏어갈 법 했다.
“훨씬 오랜 삶을 산 용사님껜 말하기 부끄러운 햇수지만, 그래도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준비를 해왔어요.”
“뭘?”
결국 아다르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스토커처럼 카카나의 정보를 캐고 다닌 거? 뜬구름 잡는 소리 하면서 신비로운 척하는 거? 준비했다는 게 혹시 우리 성깔 긁는 연습 말하는 거야?”
신랄하게 비꼬는데도 황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웃었을 뿐이다.
스노아는 황녀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고 머릿속에 저장했다. 그녀는 자기를 보호하려고 할 때 습관적으로 웃는다. 웃는 가면이라도 쓰고 있는 것처럼 평화롭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편안한 웃음과는 구별되는 미소다.
‘황실에서 철없이 자랐을 황녀가, 방어하기 위한 표정을 습관적으로 짓는다?’
스노아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동안, 황녀가 말을 이었다.
“아니요. 저는 도움을 부탁드리기 위해, 그리고 그 후에 벌어질 일들을 대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어요.”
“도움? 누구한테 부탁한다는 거야?”
“그야, 용사님들이죠.”
아다르가 날카롭게 비소를 터트렸다.
“누가 도와준대?”
“그럴 수밖에 없을 텐데요.”
아다르의 새까맣고 어두운 눈동자와, 황녀의 상냥한 보라색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오로라 그랑루이가 바람에 흐트러진 제 은발 머리를 가지런히 모아 오른쪽 어깨 위로 흘려보내며 태연하게 얘기했다.
“사람들은 말해요. 황실은 타락한 지 오래인데, 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냐고요.”
“…….”
“또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죠. 제국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며, 이웃나라들은 왜 제압당해 쇠락해지냐고요.”
첼러스가 언급했던 문제다. 오로라는 지금 제국의 ‘의뭉스러운’ 힘에 대한 고백을 하려 하고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제국이 다른 나라에 저주를 퍼붓는 거 아니냔 괴담이 떠돌기도 했죠. 하지만 아니에요.”
황녀가 선명한 보라색 눈으로 용사들을 한 명씩 마주봤다.
“제일 먼저 무너진 건 제국이에요.”
“그만하지? 정신 나간 소리.”
할릭이 으르렁거렸다. 황녀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국이 용사들의 흔적을 세상에서 지우기 위해 사용했던 존재마법.”
스노아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
“황실은 잡아먹힌 지 오래예요, 용병왕 갈로프사. 그리고 용사님 여러분.”
그녀가 잠시 호흡을 고르듯 깊은 날숨을 토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억겁의 세월과 신화를 뛰어넘은 문제 덩어리가, 지금 이 ‘격동의 시대’에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격동의 시대.
이번엔 아르모어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녀가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고 흔들림 없이 용사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마족이 돌아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