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퀄리티미엄을 향하여
정령이지만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존재, 엘프.
엘프들은 갓 돋아난 새싹과 같은 녹음의 머리칼과 눈을 가진다.
그들은 먼 옛날, 자연에서 비롯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리에 복종하는 대가로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엘프들은 진실을 꿰뚫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거짓말과 위선, 속임수는 엘프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농담하는 법조차 모른다. 그렇기에 환영마법 또한 엘프에게 통하지 않았다.
시험관에 갇힌 엘프, 로엘르는 생체실험장에 들어온 여섯 명의 인간을 바로 꿰뚫어 보았다.
‘강한 인간이, 다섯 명.’
다섯 명 모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자연의 완벽한 균형에서 오는 엘프의 아름다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수려함이었다. 로엘르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평범한 인간과 다르다.
‘아니, 인간이 맞는 걸까.’
그들은 도무지 인간처럼 쉽게 깨지고 흩어질 존재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치 드래곤처럼,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그런 자들의 선택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까지 뒤집어버린다.
그들이 생체실험장을 쓸어버리는 동안, 한 여자가 로엘르의 앞까지 왔다. 로엘르는 유리시험관 같은 원통형 구조물 안에 갇혀 있었다. 그 안은 정체불명의 노르스름한 점액질로 차 있어서, 로엘르는 3년 내내 이 유동액 안에 둥둥 떠 있었다.
그 탓에 여자는 고개가 꺾이도록 로엘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로엘르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곱실거리는 머리에 두 개의 둥그스름한 뿔이 달려 있다.
수인족이다.
핥으면 꿀맛이 날 것 같은 진한 노란색 눈망울이 맑고 순수하다.
‘이상한 일이야.’
로엘르는 수인족을 이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몰래 퀄리티미엄을 빠져나와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노예로 끌려가는 수인족을 한 둘 보곤 했다.
그런데 그녀에게선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아주 익숙한 느낌이었다. 퀄리티미엄에 돌아가지 못한 3년 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이 로엘르를 지배했다.
뿌리. 정신.
그것이 한꺼번에 뭉뚱그려진 채 로엘르의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충만감에 정신마저 아득해질 만큼.
이 지독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엘프의 절대적인 지주가 지니고 있는 분위기다. 그런데 그걸 수인족 여인이 풍기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도저히 착각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이건…….
‘신목님……?’
엘프를 낳는 나무, 신목의 느낌이니까.
로엘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점액질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직 살아남은 야수들이 몇 있어. 야수의 피랑 엘프의 피를 섞어서 실험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래서 야수를 얌전하게 만드는 네 능력이 필요했던 모양이야.”
키가 크고 짐승에 가까운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말했다. 그의 눈은 시험관에 갇혀 있는 로엘르를 의미심장하게 살피고 있었다. 여인에게 해가 될 존재인지 판단하는 눈이다.
쨍한 주황색 눈알이 물어뜯어버릴까 말까 고민하듯이 로엘르의 목덜미 언저리를 더듬거리다가 스르르 굴러갔다.
로엘르는 깨달았다. 그는 조절하고 있었다. 필히 눈앞에 있는 저 여인에게 나쁘게 보일 행동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할릭, 이 사람 엘프 맞지?”
신목의 여인이 유리관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살아있어.”
여인이 작고 앙증맞은 입술을 짓씹는다.
고통스러운가. 이곳에 3년간 붙잡혀 있었을, 불쌍한 생명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는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녀는 신목의 여인이다. 고통 받는 엘프뿐만 아니라, 야수들의 감정까지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로엘르가 여인을 빤히 쳐다보자 할릭이라 불린 남자가 고민했다. 그는 로엘르와, 로엘르를 구속하고 있는 시험관의 약품에 여인을 노출시켜도 되는지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인의 맑은 눈이 로엘르의 얼굴을 살핀다.
‘나를 계속 봐줘요.’
로엘르가 저도 모르게 애원했다.
3년 내내 죽은 듯이 살았다. 원하지 않는 구역질나는 실험의 재료가 되어, 엘프의 피를 감당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구경해왔다. 그런 건 더 이상 싫었다. 그저 여인의 품에 안겨 잠들고 싶었다.
여인이 꼭 로엘르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눈을 깜박였다. 로엘르뿐만 아니라, 이곳에 잡힌 채 길게 울부짖고 있는 모든 야수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같은 야수여도 눈을 마주해야 교감이 가능하거늘, 여인은 떨어져있어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역시 신목님이 맞아.’
로엘르는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부정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엘프네요.”
푸른 남자가 말했다.
일행 중에서 가장 엘프에 가깝게 생긴 남자였다. 호리호리하고 아름다우며, 청정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가 길고 하얀 손가락을 뻗어 시험관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런 울림도 전해지지 않지만 그의 투명한 물빛 눈망울은 바다만큼 시리고 냉정하게 시험관의 구조를 분석하고 있다.
“두 팔과 목에 연결된 호스에서 피가 주기적으로 나오고 있어요. 깨끗한 엘프의 피가 필요할 테니, 아마 점액질에 독이 들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어서 꺼내줘. 괴로워 보여.”
두 남자가 꺼림칙한 시선을 교환했다. 눈앞에 있는 엘프의 존재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부하지 못한다. 그들은 여인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꿰뚫어보는 자 로엘르는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할릭이 누군가를 부른다. 시험관을 깨끗하게 잘라줄 남자가 필요해서다. 불려온 자는 찬란한 백금발에 호수빛 눈을 가진 성기사였다.
‘아니, 성기사가 아닌가?’
로엘르는 인간의 직업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성기사가 존재한다면 필히 저자 같은 분위기여야 할 것이다. 그는 태양 같은 빛을 심장에 품고 있었다.
그가 롱소드를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시험관 윗부분을 깨끗하게 날려버렸다. 다시는 열어보지 않을 작정으로 만든 구조물이었다. 뚜껑이 있을 리 없어서 로엘르를 꺼내려면 이렇게 해야 했다.
점액질이 유리관을 타고 줄줄 샜다. 할릭이 자그마한 여인의 몸을 안아서 뒤로 한참 물러섰다.
“놔봐. 내가 확인해 볼게.”
여인이 성마르게 소리치며 점액질에 가까이 다가갔다.
“조심해야 해.”
그들은 여인의 남편들인 모양이다. 혹시라도 다칠세라 전전긍긍하면서도, 여인을 힘으로 어쩌진 못하고 있다. 특히 덩치 큰 남자는 제 품에 그녀를 영원히 가둬놓고픈 충동과 싸우고 있었다. 어떻게 길들였는지 신기할 뿐이다.
여인이 검지에 점액질을 묻히더니 겁도 없이 혀끝으로 맛을 봤다. 남편들이 뒤에서 기함을 하는데 신경도 안 쓰고 있다.
“이거 살균제와 소독제, 마취제가 다량 섞여있긴 하지만, 히포그리프의 알에서 나오는 점액질인 것 같아. 영양이 굉장히 풍부해서 약물에도 자주 사용되거든. 이 안에서 숨은 어떻게 쉰 거지?”
엘프는 전부 알에서 태어난다. 생체실험장의 연구원들이 허투루 있지는 않았다. 히포그리프의 알을 이용해 인공적인 시험관 알을 만들어 그 안에 엘프를 가둔 것이다.
점액질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여인이 옆에 구비되어 있는 사다리를 후다닥 올라갔다. 시험관 위쪽의 구멍을 통해서 용액을 보충해야 할 때 사용하던 사다리다.
그녀가 사다리에 매달려서 용액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로엘르의 옷자락이 조금씩 스쳤다.
“제 말 들리죠? 위로 조금만 움직여 보세요. 그렇게 강한 마취제가 아니에요. 손을 뻗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예요!”
로엘르는 기꺼이 그녀의 말에 복종했다. 여인이 로엘르의 손을 잡았다. 미끄러울 텐데 대단한 힘으로 붙들더니 위로 쑥 끌어올린다.
사다리가 기우뚱 기울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푸른 머리의 남자가 마법을 사용했다. 둘은 공중에 둥둥 뜬 채 바닥으로 내려왔다. 드디어 여인에게 닿았다.
‘좋아. 좋아요……. 신목님……. 날 구하러 와주셨어…….’
로엘르는 여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매달렸다. 그녀가 조금 당황한 듯 손을 어정쩡하게 들어올렸다. 상관 않고 목덜미에 머리를 부비고, 향기를 맡고, 그 작은 품에 어떻게든 파고들고자 꿈틀거렸다.
로엘르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아주 신중하게. 그녀는 엘프에 대해 전혀 모를 테니까, 최대한 인간에게 맞는 단어로.
이 기쁨과, 반가움과, 고마움을 전해줄 수 있는 말로.
‘엘프에게 신목은…….’
인간으로 치면…….
“엄마.”
로엘르는 유일하게 아는 인간의 언어로 간절하게 불렀다.
***
“엑, 에엑?”
‘얘가 미쳤나 봐! 누구보고 엄마래!’
나는 고개를 휙휙 돌려 사방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용사들이 알사탕처럼 커진 눈으로 날 보고 있다.
‘환장하겠네!’
“아, 아니야! 오해하지 마! 얘, 얘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인데.”
“엄마아…….”
워낙 예뻐서 인식을 못 하고 있었는데, 엘프는 성인처럼 보였지만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10대 중후반쯤 되어 보였던 것이다. 끔찍한 일을 오래 겪어서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리거나 했나 보다.
‘근데 여자야, 남자야? 알 수가 없네.’
나는 어색한 손길로 엘프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야수들은 어떻게 할까? 풀어주면 숲으로 도망치다가 만나는 인간이란 인간은 모두 찢어발길 것 같은데.”
“부탁을 참 길게도 하네요, 할릭.”
스노아가 손을 휙 움직였다. 우리에 갇혀 있던, 아니 정확히는 내게 오고 싶어 열망 어린 눈을 했던 야수들이 모두 숲으로 텔레포트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야수들이 날 원한다니. 하지만 정말로 그랬다. 심지어 야수뿐만 아니라 엘프도 날 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생각이란 자각이 있는데도 묘한 확신이 들었다. 내 마음 언저리에서, 그건 한낱 망상이 아니라고 지속적으로 진실을 알려주는 울림이 있었다.
나는 아직 그 느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시험관에서 나오자마자 내게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엘프를 보니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쩌면 용사들에게 물든 나머지, 나도 범상치 않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걸지도?’
나는 픽 웃으며 생각했다.
“오래 기다렸지?”
그때, 아다르와 아르모어가 돌아왔다. 그들이 다시 등장하면 피비린내가 진동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멀끔한 인상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별로 안 걸렸네요?”
엘프와 내게 묻어 있던 점액질을 마법으로 없애주던 스노아가 의아하게 물었다.
“아르모어의 정령이 좀 도와줬어.”
“고문을 도와줬다고요? 정령이 응답하지 않았을 텐데요.”
“아니아니, 고문 말고. 단편적이긴 하지만 기억을 좀 뽑아줬지. 정백이 더 이상 응답하지 않아서 많이 불충분하긴 하지만. 근데…….”
아다르가 엘프를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별로 쓸모는 없을 것 같네. 엘프 본인을 찾았으니 게임 끝난 거 아니야? 퀄리티미엄이 어딘지 쟤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그게…….”
나는 난감한 눈으로 매달려 있는 엘프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수십 번도 떨어져보라고 얘기했지만, 엘프는 달라붙어 있기만 했다. 당연히 퀄리티미엄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정신건강이 나빠진 건지, 아니면 말을 못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입을 다물고만 있어.”
“곤란하네.”
“그리고 내 느낌인데, 얘한테 물어봤자 대답 안 해줄 것 같아. 퀄리티미엄은 엘프들의 주거지로 들어가는 입구잖아. 그렇게 중요한 걸 막 알려줄 리가 없어.”
“흠…….”
“그래서 귀족에게선 뭘 얻었나요?”
스노아가 화제를 돌렸다. 아다르가 품에서 하얀 종이를 꺼냈다.
“건물에 숨겨져 있던 지도를 찾았어. 더불어 아주 흥미로운 것도 하나 찾아냈지.”
아다르가 품에서 뭔가를 더 꺼내들었다. 만년필이었다.
‘어? 저거…….’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만년필이었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비싸 보였던 금으로 된 만년필. 몸통엔 눈알 모양의 보석 세공이 들어가 있다.
저런 특이한 모양의 만년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한 사람이다. 투기대회에서 경합이 끝나자마자 내게 오크가 아니냐며 닦달했던 여자.
“이걸로 이 실험장이 주최측과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지.”
“지도는 이곳의 지도인가요?”
“아니, 다른 곳이야. 이렇게 넓고 큰 지도는 흉가랑 안 어울려. 처음 보는 사람이 들어가면 길을 잃기 십상인 복도는 방어하기에 유리하도록 교묘하게 설계됐는데 이런 건 귀족만 써. 마을에선 딱 하나뿐이지.”
아다르가 씩 웃었다.
“디나이트 남작저.”
“마을에서 소문이 자자한, 그 선한 귀족?”
할릭이 말하자, 아다르가 콧방귀를 뀌었다.
“선한 귀족이 세상에 어딨어?”
“디나이트 남작저는 주최측이다. 페어리블러드를 제공하고 실험을 진행한 자는 따로 있으니, 그를 문책하는 것이 퀄리티미엄의 단서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아르모어가 첨언하자, 아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근데 아쉽게도 그쪽 지도는 꼴랑 지하시설 하나만 그려져 있어. 이 마을에서 엄청 멀더라.”
“좌표가 어떻게 되죠?”
“네가 직접 봐.”
아다르가 스노아에게 지도를 넘겨주었다. 차분한 눈으로 지도를 살펴보던 스노아가 문득 고개를 들고 우리의 얼굴을 확인했다.
“우선 외모를 한 번 더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어쨌든 귀족의 저택에 무단 침입하는 거니까요.”
스노아가 입 안으로 주문을 몇 번 외우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가죠.”
‘응?’
나는 귀를 의심하고 소리쳤다.
“지금? 지금 바로 간다고?”
소리치기 무섭게 텔레포트 되었다.
‘귀족 저택이라며? 이렇게 막 쳐들어간다고?’
나는 어이가 가출한 나머지 입을 벌리고 스노아를 바라보았다. 너희들이야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지만 아직 일반인 심리를 가지고 있는 내겐 모든 것이 황당하게 느껴졌다.
‘앞 동네로 산책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수도의 감옥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규모의 수용시설에 서 있었다.
단순히 사람을 붙잡아 두는 용도만은 아니었다. 이끼 낀 돌벽에 각종 흉측한 도구가 걸려 있었다. 고문용이었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모양인지, 살 썩은 내가 섞인 끔찍한 악취가 났다. 코를 틀어쥐고 주위를 살폈다. 한둘 있기 마련인 보초병이 없었다. 대신 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철창 안에 갇혀 있었다.
나는 그들의 텅 빈 눈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안색이 하나같이 시퍼렇게 질려 있고, 입술은 얼어 죽은 생선처럼 반쯤 벌어진 채 바짝 말라 있었다.
‘상태가 심상치 않은데.’
그들을 자세히 살피는데 할릭이 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철창 안에 갇혀 있는 사람과 번갈아가며 확인했다.
“얘들아, 저 녀석 검투사가 찾는 동생이랑 닮지 않았냐?”
할릭이 가리키는 손끝에는, 머리카락 한두 뭉치만 남은 민머리의 남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건강하고 근육질인 형과 달리 뺨이 푹 들어가 있고 눈에 생기가 없는 남자였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따지면 형일 검투사보다 적어도 열 살은 나이가 더 많아 보였다. 그럼에도 검투사가 내어준 초상화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하는 점이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이라든가, 코 옆에 있는 커다란 점이라든가.
“상태가 저래서야, 살려서 데리고 가봤자 좋은 꼴은 못 보겠는데.”
아다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의뢰인은 동생을 찾아달라고 했으니, 상태가 어떻든 간에 데려가는 수밖에.”
할릭이 냉정하게 말했다.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총 세 명이었는데, 각각 독방에 갇혀 있었고 이곳에 오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을 쌕쌕 몰아쉬고 있었다.
“투기대회에서 우승한 사람들이 여기 수용되어 있는 것 같아요.”
스노아가 말했다.
“동생을 찾으면 데려다 달라고 했던 곳이 있으니, 일단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그곳으로 텔레포트 시킬게요.”
‘대마법사가 있으니까 구출도 쉽네.’
마음 같아선 어떤 증상을 앓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적진 한가운데였다. 그들은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진찰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뒤챘다. 이놈의 엘프는 언제까지 달라붙어있을 생각인 걸까. 내가 불편해 한다는 걸 알았는지, 엘프가 이번엔 허리를 감싸왔다. 은은하게 풀 향기가 났다. 꼭 나무에서 나는 냄새 같았는데, 엘프의 체향인 듯했다. 그게 이곳의 악취를 적당히 가려주어서 나는 구겨졌던 얼굴을 조금 폈다.
지하 감옥은 탈출구가 계단 위에 있는 문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문 바깥에만 보초병이 서 있었다.
“거기 누구냐!”
줄기차게 졸다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보초병이 버럭 고함을 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곤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우리를 살폈다.
지하 감옥은 귀족의 저택 중에서도 비밀 장소에 속했다. 그런 곳을 지키는 자들이니 기본적인 정보는 숙지하고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엘프를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사실 스노아를 제외한 용사들은 할 게 없는 싸움이었다.
“슬립.”
스노아가 뒤에서 마법을 사용해 그들을 잠재웠다.
“저택의 구조가 모두 나와 있다면 편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쭉 돌아봐야겠어요. 귀찮은데 말이죠.”
‘귀찮은 게 문제가 아니지 않니.’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저택을 돌아다니면 지금 같은 싸움이 계속 벌어질 텐데?”
“계속 재우면 되죠.”
손쉽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혹시 모를 위험이 불안한 건 여기서 나뿐인가 보다.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빨리 알아본 다음 돌아가자.”
“심심하면 저택 구경이라도 해봐, 카카나.”
할릭이 태평하게 말했다.
“이렇게 으리으리한 건 흔하게 구경 못 한다, 너?”
거의 관광객이다. 알았다고 대답해주기도 지쳤다. 나는 대충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정말로 무작정, 저택의 복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엘프를 대동한 여섯 명의 사람들이 당당하게 저택을 활보하는데도 아무도 막지 못했다. 우리들 근처에 시체처럼 보이는 잠든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기 때문이다.
“문양을 보니 자작이 확실하네요.”
복도에 걸린 가문의 휘장을 확인한 스노아가 여유롭게 설명했다.
발칵 뒤집힌 저택 대부분의 인력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접근하지 못하는 건 똑같았다. 개중에는 마법사까지 있었지만, 스노아의 마법 방해로 한 번도 마법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지나친 무력의 차이는 어떨 땐 허무한 법이다. 우리는 수다를 떨면서 돌아다니다가, 기어코 자작의 침실을 찾아냈다. 문을 열자마자 부들부들 떨고 있던 자작이 소리를 질렀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오는 것이냐!”
귀족은 어쩜 이렇게 다 똑같은지 모르겠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탓에 피부가 번들거려서, 꼭 갓 잡아 올린 붕어처럼 보이는 자였다. 그는 왼손에 작은 단검을 꼭 쥔 채 안쓰럽게 떨고 있었다. 혼자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든지 왼손으로 의자를 쥐고 있다.
하긴 나라도 공 들여 매수한 암살자들을 순식간에 해치운 무뢰한들이 이곳까지 당당하게 걸어서 도착하면 조금 무서울 것 같았다. 심지어 호위 기사조차 몸을 떨고 있었다.
하얗게 뜬 얼굴로 용사들을 바라보던 기사들이 선뜻 공격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자작이 펄쩍펄쩍 뛰면서 분노를 표출했다.
“뭘 하고 있는 게냐, 이 무능한 것들아! 당장 저 녀석들을 제압해 내 눈앞에서 치우지 못할까!”
‘기사들도 안 됐네.’
앞뒤로 지옥이니 1분1초가 고통일 터다.
자작의 호통에도 용사들을 건드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우리가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10분 전부터 아무도 달려들지 못했던 것처럼.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거지.’
어쨌든 기사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사람이었다.
경험의 차이는 있겠지만 저마다 싸움을 경험하고, 죽음의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쟁에 나가 명예를 쌓도록 세뇌교육을 받는 자가 기사다. 그들은 죽음을 예견해도 주군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진군해야 했다.
그러나 베테랑 기사든, 하찮은 기사든, 모두 천재지변을 코앞에 두고 몸이 굳어버린 사슴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스노아가 몸이 굳어버리게 하는 별개의 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자길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스노아가 고개를 숙이곤 나를 향해 웃었다.
‘아무리 봐도 다른 마법을 쓰고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이놈드으으을!”
자작은 제 머릿속에 축적되어 있던 단어를 모두 소진하고 만 백치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리 호통을 쳐도, 가족과 돈으로 협박을 해도, 제가 거느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귀족의 얼굴이 고혈압으로 쓰러질 것처럼 위험천만하게 붉어졌다. 자작이 저렇게 날뛸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가 약하기 때문에.
‘아무리 겉멋으로 배운 검술이어도, 기사들은 느낄 수 있겠지.’
제가 상대하고 있는 자가, 과연 건드려도 되는 자인지 아니면 넘봐선 안 될 자들인지.
숨 막히는 고요가 현장에 내려앉자 눈치 없는 자작도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게 틀림없었다. 그가 손수건으로 입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넙데데한 자기 얼굴을 닦아내더니, 새우 눈처럼 작고 까만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목을 가다듬으며 태도를 바꾸었다.
“너, 너희들이 원하는 게 뭐냐. 페, 페, 페어리블러드냐? 응? 그 엘프의 피 가지곤 바로 완벽한 물약을 만들 수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력이 필요할 텐데?”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꼭 저같이 더럽고 비열하다.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아다르가 앞으로 나서서 능숙하게 협박을 시작했다.
“일단 지하감옥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말해줘야겠는데.”
물론 자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다르가 제 회유에 넘어올 것처럼 보이지 않자 기다렸다는 듯이 돌변해서 악을 썼다.
“주제도 모르고 요구를 해오는구나, 천한 것! 이래서 평민이랑은 말을 섞으면 안 되는 것이야. 여봐라! 마지막 기회다. 이번에도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너희 모두의 가족들을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자작과 마찬가지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기사들이 고통스럽게 이를 악물었다. 주군 한 명 잘못 만나서 저게 무슨 개고생인지. 보고 있는 내 속이 다 쓰릴 지경이다.
아무리 자작이라도 저택 내에 있는 기사들 수는 투기장에 있던 검투사들의 수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전부 몰려들어도 당할 용사들이 아니지만, 이곳은 전장을 방불케 하는 시체더미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장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상황파악 못 하고 나대는 게 기사들 때문인 거 맞지?”
아다르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기사를 전부 죽여 버리면 좀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으려나?”
“무, 무무, 무슨…….”
“그녀가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아다르.”
귀족의 더듬거리는 의문을 무시한 첼러스가 중재에 나섰다.
“하긴 기사들이 무슨 죄냐.”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뭔갈 하긴 해야 해. 저런 놈들은 눈으로 보여줘야 입을 열어. 멍청해서 상황 파악도 잘 못 한다고.”
첼러스가 곤란하게 미간을 좁히고만 있자, 그의 미온적인 태도에 답답함을 느낀 아다르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스노아가 나섰다.
“그러니까, 자작이 믿는 구석을 전부 없애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마법사를 뒤에 두고 뭘 그렇게 고민하시는지.”
나는 질겁하며 스노아를 올려다보았다.
“어, 어떻게 하려고? 여기 있는 사람 전부 죽여 버리게?”
마법이면 피가 튀기지 않게 죽일 수야 있겠지만, 그러면 뭐가 다른가 싶다. 그러나 스노아가 나를 바라보며 특유의 우아하고 고고한 어투로 대꾸했다.
“저는 그렇게 야만적이지 않답니다, 카카나. 그저 저 자작에게 얼마나 불리한 상황인지를 보여주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
“굳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보지 않아도 돼요. 아무리 바보여도 이 저택에서 자작을 제외한 모든 인원을 재워버리면 실감이 조금 나겠죠.”
“응?”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모든 사람을 재운다는 게 말이야 쉽지 여긴 귀족의 저택이다. 요즘 세상이 돈으로 신분까지 사고팔아 귀족 프라이드가 말이 아니라지만, 자작은 자작이었다.
화려함과 부의 과시만이 귀족을 귀족답게 만들어주는 사회에서 귀족들의 저택은 정말이지 무식하게 컸다. 그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용인들과 기사를 생각하면 저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인지 길거리 꼬맹이도 안다.
그런데 말한 사람이 스노아다. 일단 가능은 한가 보다고 납득한 뒤에, 부차적인 문제를 따져보기로 했다.
“그래도 되는 거야? 그 정도 규모의 마법을 써버리면…….”
폭력이 들어가지 않았을 뿐이지 무식한 짓은 똑같지 않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억지로 짓눌렀다.
그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대륙에서 흔할 리 없었다. 용사 중 한 명이라는 걸 제국이 눈치챌 것이다.
“제국이 걱정되나요?”
정곡을 찔렸다. 사실 내 모든 불안과 걱정의 핵심은 언제나 제국이었다. 용사들이 아무리 강해도 상대가 워낙 거물이니 쫄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제국이 알면 뭐 어때요?”
“응?”
“여기는 검투사들의 마을과 한참 떨어진 대도시 근처예요. 만약 저희가 여기에 볼 일이 있었다면 좀 귀찮았을지 몰라요.”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스노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는 일이 끝나자마자 마을로 돌아갈 테고, 씨스아이는 텔레포트 흔적을 지워줄 테니 제국은 이 근처를 뒤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스노아가 처음으로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아다르의 비웃음이 피비린내 난다면 스노아의 웃음은 업신여기는 감정의 결정체였다.
“그냥 좀 오래 머무를 것 같은 곳에서만 조심하면 돼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알았어.”
“그럼, 시작해볼까요?”
스노아가 자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운 눈망울을 마주친 자작이,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흠칫 몸을 떨었다.
“슬립.”
스노아가 단순명료한 마법주문을 읊었다.
아무런 징조 없이 상대가 잠들었던 여태의 슬립과 달리, 이번엔 화려하고 커다란 마법진이 그의 발밑에 장판처럼 깔렸다.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마법진이 천천히 문양을 그리며 원을 그리다가 신기루처럼 흩날리며 공중으로 분해되었다.
그러자 마나를 전혀 다룰 줄 모르는 기사들부터 하나둘씩 자리에 쓰러지더니, 이윽고 자작의 방에 있는 모든 호위 기사들이 쓰러졌다.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었을 암살자들까지 천장에서 한두 명씩 툭툭 떨어지며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살충제를 맞은 벌레 시체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여서 소름이 돋았다.
자작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론 충분히 보지 못했다고 판단한 건지, 아예 몸을 돌려가며 동서남북을 두루 살피고 있었다. 넋이 나가서 적에게 등을 보이면 안 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그가 제정신이 아닌 얼굴로 품에서 전신용 수정구슬을 꺼냈다.
“이, 인원을 더 보내라! 내 침실로 호위를 보내!”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저택 전체가 잠에 빠져든 것처럼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자작이 크게 뜨여 흰자가 대부분인 눈을 우리에게 고정시켰다. 그러다 이윽고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오랜만에 마법을 써서 그런가, 머리가 좀 아프네요.”
스노아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얘기했다.
‘오랜만이라니, 너 그 전에도 많이 썼잖아.’
그러나 곧 스노아에게 그 정도는 마법 축에도 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곤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상식 밖의 인간들이었다.
“고마워, 스노아. 드디어 전의를 상실했나 봐.”
아다르가 자작에게 걸어가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허억!”
자작이 엉덩방아를 찧은 채 뒤로 마구 물러나며 품을 뒤지려 했다. 거기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아다르가 바로 그를 저지했다.
“마법스크롤이네. 이래서 귀족 새끼들은 끝까지 방심하면 안 된다니까. 돈으로 목숨까지 살 수 있는 양반들이란 말이지.”
아다르가 귀족의 손에 들려 있던 마법스크롤을 빼앗았다. 그도 모자라 자작더러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그는 모멸감을 느끼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지만, 결국 속옷 바지만 남기고 전부 탈의했다. 저택의 모든 인원을 잠재우는 괴물을 코앞에 둔다면 귀족이라도 자존심이고 뭐고 저렇게 되는 게 정상이었다.
어차피 성정이 비열한 귀족에겐 자존심 따윈 금방 팔아버릴 수 있는 종류였겠지만 말이다.
“자, 이번엔 말로 할 때 얘기해. 알겠지? 지하감옥에 있던 사람들은 뭐지?”
“투, 투투, 투기대회의 우승자로…….”
“내가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자작님. 걔네가 왜 거기 있냐고.”
자작이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방음 마법을 걸어줄까요?”
스노아가 친절하게 제안해왔다. 아다르의 험한 말로부터 내 귀를 보호해주고 싶은 눈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눈감고 귀 닫는다고 현실이 바뀌는 게 아니다. 이게 현실이다. 더럽고 추잡하지만, 이게 내가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저 추한 남자가 내가 사는 곳을 지배하는 지배계층이었다.
“그, 그 녀석들은 실험에 쓰이는 자들이다.”
“자들이다?”
“자, 자들입니다.”
귀족이 아다르의 소름끼치는 눈을 보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계속해.”
“에, 엘프의 피는 수명을 늘려주는 효험을 가지고 있지만 중독과 환각성분이 있어서 많이 불안정했습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야수의 피가 엘프 피의 효험을 해치지 않고 중화시켜준다는 결과가 나왔죠.”
자작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부,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효험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적당한 비율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페, 페어리블러드를 복용하고 경과를 지켜보려면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아다르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래서 디나이트 남작이랑 짝짜꿍해서 검투대회의 우승자를 여기로 빼돌렸다? 오래 버틸 수 있으니까?”
“그, 그렇습니다.”
“야아, 귀족 새끼들 돈 버는 데 머리 굴리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힌다니까, 진짜.”
아다르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네 말을 듣고도 계속 의아했거든? 디나이트 남작은 뭐 때문에 네놈이랑 손을 잡았을까 하고?”
“…….”
“근데 생각해보니 투기대회잖아? 광기에 물들어서 흥미진진한 경기를 보여줄수록 사람들이 꼬이는?”
“아하.”
뭘 깨달았는지 내 옆에 서 있던 할릭마저 감탄을 내뱉었다. 아다르가 경멸이 담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아주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어. 소꿉친구인 팀도 결승전에만 서면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라고 말이야.”
“사, 살려주십시오!”
“너희, 마지막 만찬에서 우승팀에게 페어리블러드를 먹인 거지?”
정곡을 찔린 자작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서로를 잔인하게 도륙할 수 있도록. 그게 주최측인 디나이트 남작이 내걸었던 조건인 거야. 그거야말로 관중들이 원하는 광기니까.”
“저, 저는…….”
“너는 실험할 인간도 얻고 페어리블러드의 효과도 보고. 아니냐?”
너무 잔인한 이야기였다.
나는 제 피가 어떻게 쓰였는지 알게 된 엘프의 심정이 걱정되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엘프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초록색 눈망울이 보드랍게 휘어졌다. 나와 함께 있어 그저 기쁘다는 얼굴이었다.
제 피가 어떻게 쓰이든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는 걸 눈만 봐도 알겠다.
‘하긴, 제국 말을 모를 수도 있으니까. 근데 얜 대체 내가 뭐가 좋아서 이러는 걸까.’
“됐다. 네가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라는 건 충분히 알겠으니, 저 엘프를 어디서 찾았는지 말해.”
“그, 그건…….”
“여기서 입을 다문다?”
아다르가 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바닥을 짚고 있는 자작의 손등을 검날로 긁어냈다. 피부가 베이진 않았지만 섬뜩하기 그지없는 감각에 자작이 혹여 다칠까 전신을 긴장시켰다. 그는 거의 껍데기 속으로 숨은 거북이같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저, 저도 모릅니다! 우, 우연히 숲에서!”
“그 말을 믿으라고?”
“정말입니다!”
“굳이 지금 네 말을 믿어줄 필요는 없지. 나는 고통을 믿는 편이거든. 네가 아무리 괴로워도 같은 말을 반복한다면 그게 정말 네 진심인 거겠지. 그치?”
아다르가 가볍게 위협을 가했다.
다행히 자작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아다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최악의 수단을 사용하려고 하는 순간 꼬리를 내리며 소리쳤다.
“신의 눈물 근처에서 차, 찾았습니다!”
나는 미간을 설핏 좁혔다.
용사들도 신의 눈물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는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자작의 말을 바로 알아들은 사람은 오직 아다르뿐이었다. 그에겐 한 번 본 지도는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기똥찬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그 근처에서 물에 젖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몬스터 사냥꾼이 발견했는데 제, 제가 거금 주고 샀습니다.”
“엘프는 바로 받았나? 아니면 몇 시간 만에?”
“하, 한 시간 만에 받았습니다.”
“엘프는 어떤 상태였지?”
“물에 젖어있는 것 말고는 멀쩡했습니다.”
침음을 삼킨 아다르가 용사들에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렇다는데?”
“신의 눈물이면 노란색이랑 분홍색 꽃이 피어있던 호수 말하는 거야?”
간신히 기억해낸 할릭이 물었다.
“응. 거기.”
“이상한 건 못 느꼈었는데?”
“엘프를 데리고 가면 뭔가 달라지겠지.”
아다르가 스노아에게 눈짓했다.
“이 녀석 기억 없애는 건 불가능하겠지? 너무 많은 걸 들었잖아.”
“그런 짓을 했다간 제가 흑마법사가 되고 말 거예요, 아다르.”
“으음, 아르모어는?”
“기억은 엿보는 것까지 허락된다. 약탈은 안 돼.”
아다르의 눈이 이번엔 날 향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못 만들 것도 없었지만, 어느 특정 기억만 쏙 골라서 없애는 물약은 지금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대.”
아다르가 자작을 향해 얘기하자, 그가 다리에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눈물이 철철 쏟아지는 얼굴에서 자기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기색은 비치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지 못하고 아다르에게 거래를 시도했다.
“제,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시오! 내 휘하에 아주 많은 노예들이 있소! 마음에 드는 녀석을 고르면 그놈을 주지!”
아다르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귀족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아, 아니지! 희귀한 걸 바라나? 그러면 내 수인족이라도 사서 당신에게 바치겠소! 토끼는 어떻소! 순한 걸 원한다면 양 수인족도…….”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용사들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아다르의 눈이 시커멓게 침잠되자마자 스노아가 나와 엘프를 여관의 방으로 텔레포트 시켰다.
비루하게 애걸하는 울음소리, 뒤이어 들리던 처참한 비명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자 늦은 밤의 고요가 엘프와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밝은 달이 어둠에 잠긴 세상을 쓰레기가 쌓인 뒷골목까지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자작의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우리는 나흘 후 아침이 밝자마자 숲으로 향했다. 바로 신의 눈물로 갔으면 좋았겠지만, 해결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상품으로 걸린 페어리블러드를 훔쳐 없애버렸고 오랜 기간 복용한 탓에 몸도 정신도 쇠약해진 우승자들에게 약을 지어서 먹여주었다.
쇠약해진 몸은 침술로 그럭저럭 복구해주었지만, 망가져버린 정신은 돌아오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의뢰를 맡겼던 검투사는 맨땅에 큰절을 올리며 감사하다고 수십 번이나 복창했다.
신의 눈물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아다르 덕분에 정밀한 좌표를 확인하고, 텔레포트로 이동했다.
나는 아름다운 광경에 입을 벌리고 호수를 구경했다. 2킬로미터쯤 되는 거대한 호수가 상록수들이 빼곡하게 솟아있는 가운데에 깊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호수 주변에 무성하게 피어난 꽃이 포근한 분위기를 더했다. 나는 호수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물이 맑아서 안에서 흔들리는 수중식물의 파란 이파리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엄청 깊나 보네.”
호수 가운데로 갈수록 검은색의 구렁텅이만 보였다.
“호수에 가까이 가봐.”
할릭이 말했다.
“왜?”
“엘프가 너한테만 꼭 붙어 있잖아. 이 근처에서 발견했다니까, 그 엘프가 최대한 돌아다녀야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나는 어쩔 수 없이 호수로 천천히 걸어갔다.
내 허리에 팔을 감은 엘프가 꼭 붙은 채 쫓아왔다.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호수에 빠질 정도로 가까이 갔지만, 어떤 일도 생기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엘프를 데리고 호수의 둘레를 따라 걸어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답답하네. 그 엘프 여전히 아무런 말도 안 해?”
아다르가 툴툴거렸다.
“걔가 말을 할 줄 알았으면 진작 다 해결됐을 텐데.”
“처음에 말을 하긴 했지.”
할릭이 거들었다.
“엄마라고 했지만.”
“말을 할 줄 아는 거면 역시 정신이 이상해진 건가?”
아다르와 할릭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첼러스가 뒤늦게 이야기했다.
“아니면, 알고 있는 단어가 엄마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드래곤의 결계는 기록으로 찾기 힘들 정도로 오래되었지 않습니까.”
그가 엘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안에서 독자적인 문명을 발달시켰을 엘프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겁니다. 퀄리티미엄 내부가 어떨지 우린 전혀 알지 못하니까요.”
그때, 멍한 얼굴로 날 쳐다보던 엘프가 첼러스의 말에 반응해서 고개를 돌렸다. 나 외의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고개를 돌리는 건 처음이었다.
“퀄리티미엄을 아는 눈친데?”
그러나 엘프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내 품에 고개를 파묻어버렸다.
나는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엘프의 연한 새싹 잎 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얘기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얜 입구를 알려주지 않을 거야.”
용사들이 날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방금 그녀의 마음을 읽은 사람처럼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황한 심장소리가 빨라지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뺨을 감싸주고는 걱정하는 듯이 이마를 맞댄다.
그게 엘프가 마음을 전하는 방식인 것 같았다.
“카카나. 전에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린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죠?”
결국 올 게 왔다.
고개를 끄덕이자, 스노아가 말을 이었다.
“덕분에 엘프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 수 있으셨던 건가요?”
“비슷해.”
“엘프는 자연의 기운과 몹시 흡사해서 아무리 저희라도 기척을 쉽게 잡아낼 수 없어요. 그래서 카카나의 행보가 특이한 거구요. 우연히 엘프를 찾아낸 건 아니란 말씀이시죠?”
“맞아.”
이번엔 첼러스가 질문했다.
“혹시 야수들의 소리도 들립니까? 비명이 들린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빠져 있던 스노아가 제 생각을 늘어놓았다.
“엘프와 야수들이 카카나를 따르는 이유엔 비슷한 원인이 있을 것 같네요. 카카나는 마나를 다루는 법을 배우기 싫다고 하셨지만, 원인을 알려면 배워야 할 수도 있어요. 통제되지 않은 능력은 재앙이나 다름없거든요.”
시무룩하게 스노아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 기시감이 날 덮쳤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홱 돌렸다. 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내게 붙어있는 엘프와 비슷한 기운이 머물고 있었다. 내 의식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느낌.
확실하다.
나는 가타부타 덧붙일 것도 없이 그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허리를 감고 있는 엘프의 손을 뜯어내야 했지만, 독하게 마음먹고 떨쳐냈다.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음먹고 뛰는 수인족은 굉장히 빠르다. 그러나 멀리 도망치는 기척은 훨씬 더 빨랐다. 이상하게 저게 또 한 명의 엘프일 거라는 느낌이 나를 지배했다.
‘제발 멈춰라!’
해치지 않을 거라고 소리쳐봤자 못 알아들을 게 뻔하다.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뒤를 쫓는데, 그 기척이 별안간 속도를 늦추더니 자리에 멈춰 섰다. 더 도망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도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엘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시선을 던졌다.
엘프는 몸을 숨기는 능력이 탁월한 건지, 무성한 수풀만 보일 뿐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갑자기 왜 뛰어? 뭐가 있어?”
“너희 뒤로 가봐!”
나는 신경질적으로 마구 손을 휘저었다.
그새 내 뒤를 쫓아온 엘프가 또 허리에 매달린다. 엘프는 상관없다. 문제는 인간이다.
용사들을 향해 눈깔을 부라리니 그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나는 더 물러서란 의미로 세차게 손을 흔들었다.
용사들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엘프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들었다.
‘말이 통해야 협상이든 뭐든 할 텐데.’
그때, 내 허리에 줄곧 매달려 있던 엘프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라넷?”
이름인지, 아니면 특별한 엘프의 언어인지 알 수는 없지만 효과가 있었다.
이파리가 무성한 측백나무에서 검은 인영이 툭 떨어졌다. 가슴께까지 진녹색 머리카락을 기른 엘프였다. 엘프가 경계심이 어린 눈빛으로 나와 내게 달라붙어 있는 어린 엘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로엘르, 루느스 에.”
엘프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러자 내게 붙어있던 어린 엘프가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냐며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어질 지경이 될 즈음, 새로이 나타난 엘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자지러지게 놀랐다.
“악!”
“…….”
“아, 아니, 미안해요. 갑자기 제국 말을 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몬스터라도 만난 사람처럼 놀라버리다니, 민망해졌다.
나는 놀란 새가슴을 진정시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국 말을 할 수 있는 엘프를 만난 건 천운이다. 신중하게 말해야 했다. 바보같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저, 저는 카카나 페아입니다.”
“왜 모습을 숨기고 있습니까.”
환영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걸 단번에 들켰다. 내 당황한 얼굴을 본 엘프가 설명을 덧붙였다.
“엘프들은 진실을 꿰뚫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엘프는 어차피 인간에게 배타적인 종족이었다. 당연히 제국과 연이 있을 리 없고, 그렇다면 숨길 것도 없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제국에게 쫓기고 있어요.”
“그들과 적입니까.”
“그래요.”
“저는 로엘르를 찾아 주기적으로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엘프의 서늘한 눈길이 나를 향했다.
“로엘르는 왜 당신과 함께 있습니까.”
나는 잠시 엘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프의 청록색 눈망울이 책망하는 듯 날카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 있는 엘프의 이름이 로엘르입니다.”
“아, 그렇구나. 미안해요. 말이 통하지 않아서…….”
엘프는 대답하지 않고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며 억지로 입을 뗐다.
“실험장에 갇혀 있어서 구해줬어요.”
“거짓말은 아니군요.”
그제야 극도로 긴장되어 있던 엘프의 눈에 힘이 조금 빠졌다. 엘프가 로엘르의 몸을 한 차례 훑더니, 크게 다친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부드러워진 어투로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우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처, 천만에요.”
엘프가 로엘르를 바라보았다.
“로엘르, 디일로.”
로엘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게 바짝 매달렸다. 엘프의 얼굴이 엄해졌다.
“디일로!”
그럼에도 내게 매달린 채 떨어지지 않는다.
엘프는 로엘르의 행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도 로엘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엘프의 황당한 심정이 백번 이해되었다.
“혹시 로엘르에게 무슨 짓을 했습니까?”
“전혀요!”
두 손까지 내저어가며 부정했다. 엘프는 아리송한 얼굴로 로엘르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쪽으로 다가갈 테니, 움직이지 마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에게 일정거리 이상 다가온 엘프가 갑자기 자리에서 우뚝 멈춰서는 게 아닌가. 나는 의아해져서 엘프를 쳐다보았다. 청록색 눈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을 구경하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꺼풀을 깜박이지도 않았다.
제국 말을 하는 엘프를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던 나만큼이나 엘프가 놀란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데, 엘프가 돌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근거리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엘프가 아주 신중하게 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엘프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다 이러나.’
당황스러운 심정을 꾹 누르고 가만히 있었다. 엘프가 아주 이상한 사람을 보듯이 날 바라보았다.
“당신은 수인족입니다. 맞습니까?”
“그래요.”
“양 수인족입니까?”
“맞아요. 무슨 문제 있어요?”
정령이 사람의 모습을 빌린 것 같은, 자연에서 따온 짙푸른 청록색 눈망울이 나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로엘르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군요. 로엘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엘프입니다. 당신에게 매달려 있는 건 당연합니다.”
“왜, 왜죠?”
“당신에게서 신목의 느낌이 납니다. 냄새도, 느낌도 완전히 똑같습니다.”
나는 엘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엘프가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신목이 무척 중요한 거라는 감이 왔다. 엘프가 마침내 결정했다는 듯 얘기했다.
“당신을 퀄리티미엄에 데려가야겠습니다.”
‘예?’
엘프가 갑자기 내 손목을 휘어잡았다.
“으앗!”
동시에 뒤에서 강한 바람이 불었다.
앞으로 넘어지려는 내 몸을 단단한 팔이 휘감아 고정시킨다. 눈가를 찌르는 잔머리를 도로 뒤로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새파랗게 빛나는 검날이 엘프의 목을 조준하고 있었다. 첼러스가 뒤에서 나를 꼭 끌어안은 채 검을 겨눈 것이다.
용사들이 순식간에 나와 로엘르를 에워쌌다. 포위된 엘프가 천천히 눈을 굴려 용사들을 한 명씩 살폈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설명하십시오.”
첼러스가 철퇴와 같은 음성으로 싸늘하게 일갈했다.
엘프는 내게 일행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실력자인 줄은 몰랐던 기색이다. 엘프가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첼러스의 말을 무시한 채 내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믿는 사람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엘프에게 해가 되는 존재입니까?”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퀄리티미엄에 가야 합니다.”
가도 됩니까, 도 아니고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 아니고 가야 합니다, 라니.
나는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목적지가 그곳이니 간다면 나야 좋지만 퀄리티미엄 방문이 의무인 것처럼 묘사해서 왠지 불안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당신은 모든 엘프들의 보고이자 정신이며 뿌리인 신목과 닿아있습니다. 엘프 수장님께 당신을 보이는 것이 지금 제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엘프가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로엘르가 당신을 이곳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다하였으니, 저는 그저 섭리에 순종할 뿐입니다.”
반 이상은 못 알아듣겠다. 그가 그의 말을 했으므로 나도 나의 말을 하기로 했다.
“그냥 당신을 따라갈 순 없어요.”
“어떻게 하면 제 부름에 응하시겠습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
나를 보호하듯 에워싸고 있는 용사들을 죽 둘러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이 사람들이랑 같이 가게 해주세요. 이들을 막는다면 저도 가지 않을 거예요.”
“당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극진히 대접하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예상대로 엘프는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여기서 얌전히 물러설 순 없었다. 나는 강한 어조로 못을 박았다.
“그런 거랑 상관없어요. 전 이 사람들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엘프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날 그냥 포기할지, 아니면 용사와의 동행을 감수하고서라도 데리고 갈지 고민하는 듯했다.
마침내 결정한 듯, 별안간 느지막한 대답이 떨어졌다.
“신목을 품으신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엘프가 아직도 제 목을 겨누고 있는 첼러스의 롱소드를 겁도 없이 손으로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 또한 대자연의 섭리겠지요.”
엘프가 신의 눈물이 있는 호수로 걸음을 옮겼다.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나는 용사들과 시선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첼러스가 검을 거두고 앞장서서 엘프의 뒤를 따랐다.
로엘르가 내게 꼭 달라붙어 있었던 점이 용사들을 안심시킨 것 같았다. 엘프가 갑자기 로엘르를 뜯어낸 뒤 날 죽이려 들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에게 깍듯하게 행동하고 있고.’
“그러고 보니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호수로 걸음을 옮기던 엘프가 눈을 굴려 날 바라보았다. 대답하지 않기에, 내가 예상했던 이름을 말해보았다.
“혹시 라넷인가요?”
엘프가 도로 고개를 돌리더니, 잠깐의 공백을 두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퀄리티미엄으론 어떻게 가죠?”
그러나 라넷은 엉뚱한 대답을 했다.
“마법을 사용해선 안 됩니다.”
그리곤 갑자기 호수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설마 여기로 들어가란 건 아니겠지.’
내 간절한 소망을 박살내듯, 로엘르가 라넷을 따라 호수로 풍덩 빠졌다. 그리곤 수면에 둥둥 뜬 채 날 바라보았다. 어서 자기를 따라 들어오라는 듯이.
너무 깊어 속이 시커멓게 비치는 호수였다. 둥둥 뜬 모습이 물귀신처럼 보일 법한데도, 로엘르가 자연과 닮은 외모를 지니고 있어 꼭 연못에 뜬 연꽃잎처럼 보였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살금살금 걸어서 발끝을 호수에 담가보았다. 이제 초여름이라지만 깊은 숲 그늘에 항시 가려져 있는 호수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부르르 떨며 물이 허리께에 잠길 때까지 걸어 들어가다가, 로엘르가 잠수하자 따라 고개를 물속에 박았다.
깊은 물속에서 라넷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스노아의 마법으로 공기방울을 형성할 수 없으니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행히 라넷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쫓아오는 걸 보자마자 헤엄쳐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들어갔을 무렵, 반딧불이처럼 작고 노란 불빛이 깜박거리며 우리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신기하게 생긴 생물이었다. 해파리처럼 생겼으나 촉수가 돋아 있지 않고 빛을 발하는 갓 밑에 나뭇잎 모양의 지느러미가 달려 있었다. 엘프의 서식지 근처에만 사는 수중생물 같았다.
‘숨 막혀…….’
버거워서 얼굴을 찡그리자, 라넷이 유리로 된 항아리 모양의 도구를 들고 왔다. 항아리 입구에 독특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마도구인가?’
그가 그것에 마나를 주입하더니, 내 얼굴에 밀봉하듯 씌워주었다.
그러자 안쪽에 공기가 차오르며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못 쉬었던 숨을 필사적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 라넷이 나머지 용사들에게도 항아리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친절하게 얼굴에 씌워주진 않았다.
그는 쌩 소리가 날 정도로 매정하게 몸을 돌려 제 갈 길을 향했을 뿐이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할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는 더 깊은 곳으로 헤엄쳤다.
호수는 깊어질수록 좁아지는 깔때기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얼마나 헤엄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둠을 밝혀주는 호수의 반딧불이가 벽면을 비추고 있었다.
라넷이 굵은 나무뿌리 근처로 헤엄쳐서 그곳에 이마를 맞댔다. 그러자 한 차례 보랏빛으로 반짝인 나무뿌리가 꿈틀거리며 빈틈을 만들었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사이로 환한 빛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라넷이 뿌리의 틈바구니로 헤엄쳐 들어갔다. 로엘르가 뒤를 따랐다. 나는 그들을 따라 눈 뜨기도 버거운 물속으로 헤엄쳤다. 그랬는데 돌연 바깥으로 머리가 빠져나왔다.
“엥?”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노르스름한 빛이 쏟아지는 작은 연못 위로 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항아리 모양의 마도구를 벗고 눈을 깜빡였다.
“신기한 곳이네요.”
스노아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통형의 길쭉한 벽이 연못을 감싸고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그게 나무통의 빈 속껍질이라는 걸 깨달았다. 연못이 통째로 나무통 속에 있었다. 그 위로 짙푸른 하늘이 동그란 모양으로 보였다.
단언컨대 우리가 들어왔던 호수는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장소다.
“라넷.”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출구로 보이는 곳에 한 늙은 엘프가 서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처럼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엘프는 모두 초록색 머리가 아닌 건가?’
의아하게 생각하며 얼굴을 확인했다.
늙은 엘프의 얼굴에 나이테 같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라넷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로엘르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없을 것 같은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늙은 엘프가 천천히 몸을 돌려 입구를 나갔다. 연못 바깥으로 나온 라넷이 내가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며 말했다.
“수장님입니다. 따라오십시오.”
나는 용사들의 도움을 받아 연못을 빠져나온 뒤 라넷을 뒤따라갔다.
나무통으로 가려진 연못 바깥세상은 더욱 비현실적이었다. 나무가 말도 못 하게 컸다. 한 그루 한 그루가 성채만 한 굵기를 가지고 있었고, 굉장히 높아서 기둥을 따라 시선을 올리면 고산의 깎아지른 절벽을 올려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하늘은 나무의 거대한 이파리에 거의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햇빛은 이상하게 여기까지 잘 도달했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뭇잎이 투명하네?”
할릭이 감탄하며 얘기했다.
“그러게. 꼭 크리스털 같다…….”
나뭇잎이 크리스털처럼 반짝일 뿐만 아니라 속이 투명했다. 그래서 햇빛이 이파리 색으로 물들어 땅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생소한 풍경뿐이었다.
‘나무 안에 들어가서 사는 건가?’
흥미롭게 생각하며 엘프들의 거주구역을 관찰했다.
나무에 창문과 문이 달려 있었다. 어떤 열매는 2층짜리 주택만큼 컸는데, 마찬가지로 창문이 달려 있었다. 군데군데 나뭇잎으로 미끄럼틀처럼 만들어놓은 시설이 보였다.
‘나까지 요정이 된 것 같네.’
자연 그대로를 이용하여 만든 시설들, 그리고 거대한 식물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엘프가 정령처럼 작아 보였다. 그 가운데에 이방인으로 방문한 용사들과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입니다.”
라넷이 보라색 빛무리가 신비롭게 내려와 있는 나무로 향하며 말했다.
‘그런데 다른 엘프들은 한 명도 안 보이네.’
이방인의 기운을 느끼고 모두 집 안으로 숨어버린 것 같았다.
라넷이 계단을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라넷은 잠시 후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인간의 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독특한 점이라면, 창문과 벽 그리고 군데군데 바닥까지 넝쿨식물이 손을 뻗고 있었다.
곳곳에 식물이 많이 보이긴 했지만 생활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있는 가구라고는, 벽에 딱 붙어 서 있는 나무의자 하나뿐이었다. 그마저 식물에 전부 감싸여 있어서 수장은 꼭 풀밭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장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묵직한 흑록색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라넷은 수장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로엘르를 어디서 어떤 경위로 되찾았는지, 우리는 어쩌다 만나게 되었는지, 나를 퀄리티미엄에 왜 데리고 왔는지. 그렇다고 수장이 라넷에게 궁금한 점을 묻는 것도 아니었다.
수장은 그저 자연의 일부처럼 풀이 엉킨 나무의자에 앉아서 내 영혼을 들여다보듯 묵직한 시선을 유지할 뿐이었다. 움직이는 것은 눈꺼풀뿐이어서, 꼭 바람에 이따금씩 이파리만 흔들리는 고목나무를 보는 기분이었다.
‘언제까지 가만히 서 있어야 되는 거지.’
좀이 쑤실 즈음, 수장이 입을 열었다.
“리헬론입니다.”
나무가 무성한 숲을 한여름의 바람이 지나치는 듯, 사그락거리고 찬찬한 음성이었다. 사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카나 페아입니다. 카카나라고 부르시면 돼요.”
리헬론이 숨을 들이켰다. 열 손가락 끝까지 청량한 공기가 충만해지도록 깊고 느린 호흡이었다.
“당신은, 감히 제가 판단할 수 없는 분이군요.”
“네?”
“라넷.”
리헬론이 날 똑바로 바라보며 라넷을 불렀다.
“아레, 롤리미아.”
꼼짝도 않고 서 있던 라넷이 즉시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카카나 님이 이곳에 계시는 동안 모든 샤릴레가 제국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라. 제국의 언어를 모르는 자들은 고요한 밤이 되어야 한다.”
“예.”
“모시거라.”
라넷이 그제야 숙였던 허리를 펴며 문을 열어주었다. 이만 나가보라는 뜻인 것 같았다.
리헬론은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용사들을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
“어떻게 자는 게 좋으려나.”
할릭이 난감한 어조로 말했다.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엘프들은 성별이 없었다. 인간과 닮은 점은 겉 생김새가 다인 듯했다. 그래서 그런가, 인간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우리에게 성별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방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까진 모르는 듯했다.
‘숫자만 알고 덧셈 뺄셈을 할 줄 모르는 것 같네.’
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방을 따로 달라고 할까? 네가 부탁하면 들어줄 것 같은데.”
아다르가 제안했다.
“아니, 싫어. 절대 싫어.”
나는 고개를 붕붕 저으며 거듭 선을 그었다.
엘프 수장을 만난 후로 만나는 엘프들마다 이상할 정도로 깍듯하게 대해서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먹을 건 또 얼마나 진수성찬으로 차려주는지, 그들이 만들어준 음식의 반도 먹지 못했다.
엘프들이 극진하게 대접하는 손님은 나뿐이었다. 용사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긴 했지만 그건 단순히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행위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인데 부탁까지 해 더 부담스러워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자자.”
“그렇게 쉽게 말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할릭이 넌지시 얘기했다.
선명한 주황색 눈망울이 내 얼굴을 은근하게 훑는다. 그 시선에서 어렴풋한 경고가 읽혔다. 그러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뭘 어쩌겠는가. 엘프의 집은 ‘방’이란 개념이 없어서 따로 자려면 집 여섯 채를 달라고 해야 했다.
아무리 나를 극진히 모시겠다고 했지만 그 정도까지 요구하기엔 내 낯짝이 버티질 못한다.
이곳은 완전히 밀폐된 환상의 공간 속이다. 공기의 흐름도, 생태계도 바깥세계와 다른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
‘실제로 여긴 별로 안 더워. 쭉 봄인 것처럼.’
엘프가 우리에게 적응하는 것보다 우리가 이곳에 적응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한 게 생길 때마다 엘프들을 설득할 순 없잖아.”
그 점을 용사들도 고려하고 있는지, 소리 내어 이견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뭐, 카카나가 그 정도로 우리를 신뢰하게 되었단 거지.”
아다르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같이 자도 아무 상관 없을 정도로. 그렇지?”
같이 잔다는 말에 강조점을 둔 아다르가 눈가를 찡긋거렸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지.
“넌 믿는대도 불만이야?”
짜증을 내자 스노아가 화제를 돌렸다.
“온통 처음 보는 것들뿐이라 제법 흥미롭네요.”
“그러게, 나무 기둥 속을 파서 집 지을 생각을 하다니.”
할릭이 맞장구쳤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는 나무 기둥 속에 들어와 있다. 성이나 저택으로 치면 3층 정도 되는 높이다.
조만간 태어날 어린 엘프를 위해 미리 만들어 둔 거주지라고 하는데, 몇 명을 생각해두고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넓다.
넓은 건 좋다. 용사들이 보통 덩치가 아니니까. 그런데 공간 사이 경계가 하나도 없었다.
거실, 부엌, 침실, 전부 구분되어 있지 않다. 이건 아주 큰 문제였다. 왜냐하면 욕실조차 구분 지어주는 벽이 없으니까!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볼일 보는 곳까지 개방되어있는 줄 알고 기겁했다. 그러나 다행히 화장실은 거주구역 바깥에 따로 설비되어 있었다.
“같이 자는 것보다 씻는 게 더 큰 문제 같습니다만.”
첼러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모두의 시선이 욕실로 굴러갔다. 물이 튀지 않도록 샤워커튼만 달랑 부착되어 있는 욕실이다. 심지어 샤워커튼을 뭐로 만들었는지, 이곳의 이파리처럼 속이 투명해서 다 비친다. 정말 ‘물만’ 막게 되어 있다.
‘곤란하네, 진짜.’
엘프들은 속이거나 숨기는 걸 너무 싫어하는 나머지, 모든 걸 극단적으로 공개하는 건가?
나는 엘프들의 몸을 떠올렸다.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체형이긴 했다.
‘게다가 성별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적응하기 힘든 문화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한 명이 씻는 동안 다른 사람은 밖에 나가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첼러스가 점잖게 방법을 제시했다.
“층마다 나무기둥을 감싼 발코니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리면 될 겁니다.”
결국 우리는 한 사람이 씻는 동안 다섯 사람이 집 밖에 나가 있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씻는 문제를 해결하자 동침은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용사들도 나눠 누울 수 없는 통짜이불을 보고 포기했다. 나뭇잎을 엮어 만든 베개 여섯 개가 일렬로 쪼르륵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여기서 다 같이 누워 취침하라는 뜻의 이부자리다.
나는 고민하길 그만두고 이불을 들추었다. 말이 이불이지 거대한 식물 주머니처럼 생겼다. 윗부분은 트여 있고 나머지는 모두 막혀 있는 신기한 침구다.
‘초록색 벙어리장갑처럼 생겼네.’
겉면에 거대한 이파리처럼 잎맥이 울퉁불퉁 올라와 있었다. 손바닥으로 쓸어보니 식물 특유의 차갑고 매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입구를 쥐고 안을 들춰보았다. 보드랍고 폭신한 유황색 털이 빽빽하게 자라있었다.
‘여기에 자생하는 거대식물을 그대로 활용한 건가.’
신기해서 냉큼 몸을 우겨넣고 봤다. 털이 제법 까슬까슬해서, 목이나 겨드랑이가 간지러웠다. 그러나 놀라울 만큼 따뜻하고 아늑했다.
“가운데에 눕는 거야?”
아다르가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린 채 물었다. 어쩌다 보니 한가운데에 눕긴 했다.
‘어디 눕든 상관없지 않나?’
“왼쪽에 누우나 오른쪽에 누우나 붙어 자는 건 똑같잖아.”
게다가 침구가 얼마나 큰지 킹사이즈 침대 세 개 정도는 된다. 이 정도면 여섯 명이 누워도 넉넉하다.
“너희도 들어와. 마지막에 들어오는 사람이 불 끄고.”
첼러스, 스노아랑 함께 잤던 경험 덕분인지 이젠 같이 자는 게 제법 익숙해졌다.
옆자리를 양손으로 팡팡 두드리며 얘기하자, 아다르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한마디 하려 했으나, 아르모어를 제외한 다섯 남자의 얼굴이 모두 좋아 보이지 않아서 말이 쏙 들어갔다.
‘누가 보면 나랑 같이 자는 게 지옥인 줄 알겠네.’
눈썹을 일그러트리는데 태연한 표정의 아르모어가 내 왼쪽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첼러스가 바로 내 오른쪽 자리를 차지했다.
“와, 갑자기 자리 잡기 있어?”
아다르가 아르모어 옆에 잽싸게 몸을 밀어 넣으며 투덜거렸다.
“으, 느낌 이상해.”
아다르가 부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나는 의아해져서 물었다.
“왜? 제법 괜찮지 않아? 아늑하고.”
“끈끈이주걱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잖아. 다음 날 눈을 떴는데 팔다리가 소화되고 없는 거 아니야?”
그 얘기를 듣자 덩달아 소름이 돋고 말았다.
“넌 상상을 해도 꼭…….”
“왜? 무서워졌어?”
아다르가 두 팔을 벌리며 능글거렸다.
“안아줄 테니 품속에서 잘래?”
그러다 스노아에게 머리를 한 대 맞았다.
아다르가 뒤통수를 문지르며 불만스럽게 눈을 치떴다. 내가 쌤통이라며 낄낄거리는 사이, 모두 자리를 잡고 할릭만 남았다. 그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스노아 옆자리로 정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좋은 자린 다 뺏겨버렸네.”
“좀 참아. 넌 덩치가 커서 구석에서 자주는 게 예의야.”
아다르가 하품을 하며 얘기했다.
할릭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숨을 삼키다가 방을 밝히고 있는 조명 식물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나무에 기생하는 식물이었다. 긴 줄기에 사람 머리만 한 구슬이 달려 있었다.
그 구슬을 손으로 치면 불빛이 켜지거나 꺼지곤 했다. 문득 라넷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간혹 치지 않았는데 불이 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식물이 잠을 자는 것이니, 두어 번 톡톡 쳐서 깨워주세요.]
덧붙여 너무 세게 치면 삐져서 어둠을 밝혀주지 않으니까 주의하란 말도 했었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혼자 킥킥 웃었다. 사방이 기괴하고 이상한 것투성인데 기분이 유쾌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내가 모르는 세상에 이런 곳이 더 있겠지?’
나는 방글방글 웃으며 생각했다.
‘드워프도 있을까?’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그런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여행은 고통의 연속일 거라 확신했었다. 새로움이란 내게 목에 들이밀어진 칼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언제나 살아남을 수 있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몸으로 부딪쳐 새로운 것을 익히고 알아내는 행위는 살아남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안전한 것이 최고라 여겼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돌연 생각을 끊어냈다.
‘다시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에.’
이마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주제 넘는 꿈은 꾸지 말자.’
그러면 나만 더 비참해지니까.
스르르 눈을 감았다. 어둠 위에 더 짙은 어둠이 덧칠되었다. 숨 막히는 암흑 속으로 잠깐 동안 품었던 간지러운 마음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마음에서 고개를 돌려,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아쉬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지금도 고통 받고 있을 친구들에게 이건 기만이었다.
짙은 피로가 잠드는 것을 도와주었다.
나는 금방 수마에 잡아먹혔다.
***
할릭이 달빛이 쏟아지는 창가 근처에 섰다. 뒤편엔 거대한 식물주머니 속에서 요정처럼 잠든 카카나가 누워 있었다.
그는 달이 둥글게 뜬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올빼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숲이 살아 숨 쉬는 소리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카카나의 저택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안온함이었다.
“여기 말이야.”
할릭이 조용히 운을 떼었다.
그러자 각자 편한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용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소파나 바닥, 혹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거나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낯빛이 잠기운 하나 없이 말끔했다. 카카나가 잠에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부자리를 나왔던 탓이다.
그녀의 곁에서 아무렇지 않게 잠드는 용사는 없다. 과거엔 가능했을지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카카나를 만나고 그들은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함께 자면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할지도 몰랐다. 용사들은 그 점을 특히 유의하고 있었다.
“여기 카카나가 지내기에 안전한 곳으로 보이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엘프의 숲.
퀄리티미엄은 용사들이 안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다. 조건이 이토록 합치하는 장소는 아마 또 찾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진정한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다르가 검지를 잭나이프의 칼등에 천천히 미끄러트렸다. 그의 눈이 과거를 떠올리는 듯 흐릿하게 검어졌다.
“카카나를 놓을 생각이야?”
무심한 어조로 물은 아다르가 도르륵 눈을 굴렸다.
“싱겁기 짝이 없네. 너치곤.”
“뾰족한 수라도 있어?”
할릭이 낮게 되물었다.
동요 없는 얼굴이 흉포한 송곳니를 숨기고 가만히 아다르를 들여다봤다. 그 난폭한 시선 안에서 할릭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제 충동을 짓누르기 위해 얼마나 빡빡한 고삐를 채우고 있는지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다르가 쯧, 혀를 찼다.
“숨어 살지 않도록 해결해줄 테니, 속 얘기를 해달라고 빌기라도 할 거야?”
제가 말해놓고도 웃기는지, 할릭이 픽 웃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도 카카나는 속을 드러내지 않을 거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고. 쓸데없는 데에 단호한 성격이니까.”
“맞아.”
아다르가 새근새근 자고 있는 카카나의 여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련하게 떨면서, 안 그런 척하지.”
스노아의 투명한 물빛 눈이 아다르를 흘끗 살폈다.
“가끔은 일부러 그러나 싶기도 해. 내 속 터지라고.”
“그녀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어요.”
“오, 이성적인 마법사님께서도 드디어 육감이라는 게 발달하나 봐?”
아다르가 과장하며 놀라자, 스노아가 매끈한 미간에 얇은 주름을 잡았다.
“바보 같은 소리. 그동안 카카나가 보여준 행동만 분석해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카카나를 이대로 혼자 둘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첼러스가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입을 열었다. 무엇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방패처럼 딱딱하고 묵직한 목소리였다. 아다르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
“지독한 놈이 달라붙었어. 보통 괴롭힌 게 아니야. 몸이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어. 등 뒤에 그림자가 지는 것도 싫어해.”
특히 아다르는 그것을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강박적으로 얼굴을 확인하는 습관, 어둡고 좁은 곳에 숨어서 제 취약함을 숨기려는 습관, 고통을 미련할 정도로 참으려는 습관까지. 지난 학대의 흔적이 참혹할 정도로 그녀의 몸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그걸 뻔히 아는데,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라고?’
아다르는 살기가 도사린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렇게 할 순 없지. 절대, 그렇게 두진 않을 거야.”
이윽고 침묵이 도래했다.
카카나와 헤어지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침묵이었다. 다들 시선을 교환할 뿐,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아르모어가 말을 잃은 용사들을 빙 둘러보다가, 고개를 내려 카카나를 바라보았다. 그녀 근처에 앉아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많이 피곤했는지, 쉽게 잠에서 깨곤 하던 그녀가 세상모르게 잠들어있었다.
용사들이 저를 놓지 못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단 사실도 모르고.
‘그리 탐이 나면 힘으로 제압하면 될 것을.’
그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아르모어가 무정히 생각했다.
그래도 한때 용사였던 자들이라, 그들은 야만적인 방법으로까지 카카나를 옆에 두려고 하지 않고 있었다. 아르모어 또한 용사였으나 그보단 방관자에 더 가깝기에 내놓을 수 있는 감상이었다.
‘허나 그 또한 나중에 가선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아르모어는 인간을 잘 믿지 않았다. 모든 인간을 나쁘게 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가능성을 봤다.
사람은 변한다.
용사들 중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아르모어는 그 점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또 얼마나 타락하기 쉬우며, 때로는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용사들은 회색지대의 인간이다. 한때는 빛이었으나, 지금은 아니게 되어버린.
그러나 어둠 또한 아니었다. 그들은 무한한 힘을 가진 채, 빛을 고를지 어둠을 고를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러니 ‘아직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회색지대의 인간이었다.
그런 그들이 만약 선택을 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조차 모르겠군.’
다만 확실한 건, 그 선택에 카카나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거란 점이다.
‘자아를 잃지 않은 것만으로 제법 괜찮은 시작이니, 그 끝을 기대해도 되겠지.’
아르모어는 답지 않게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사실이 그랬기 때문이다.
용사들은 그런 짓을 당했음에도 정신이 붕괴되지 않았다. 망가진 제국 최강의 살육병기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기적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고, 아르모어는 생각했다.
용사들이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혀 나락으로 끌려들어가지 않는 건 순전히 그녀 덕분이었다. 제가 용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오직 당사자인 카카나만 몰랐다.
아르모어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카카나를 힘으로 강제하지 않는 다른 이유가 생각나서였다.
‘그녀에게 미움 받을 짓은 하고 싶지 않은가.’
둔하고, 서투르고, 요령도 없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기준만큼은 흔들림이 없는 여인. 다 죽고 스러진 잿더미 속에서 기어코 새로운 욕망을 피워낸 여인. 용사들은 한사코 멀어지려고만 하는 카카나 곁에서, 그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물며 저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되어준 여인이다.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
만약 그녀가 이미 행복하고, 제 행복을 지키기 위해 벽을 세웠다면 용사들은 망설임 없이 물러서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아니지 않은가.
아르모어가 그녀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를 검지로 조심스럽게 치워주며 눈을 내리떴다.
‘그대를 괴롭히는 악인이라…….’
그의 진득한 핏빛 눈망울에 잔인한 광기가 맴돌았다.
‘가만히 두고 보기 힘든 일이군.’
그리고 아르모어에게도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용사들보다 오랜 삶을 살아온 그의 마음에, 최초로 불씨를 피워낸 여인이라면 더더욱.
“대놓고 물어보려고 했었지. 전에는.”
할릭이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근데 관뒀어.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거랑 뭐가 다른가 싶어서.”
“혼자 꽤 이것저것 생각했었나 봐?”
아다르가 묻자, 할릭이 콧방귀를 뀌었다.
“넌 아니냐?”
“…….”
“카카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마찬가지야.”
“그녀가 자유로워지면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아다르가 짓궂은 질문을 했다. 할릭은 물론 천연덕스럽게 빠져나갔다.
“그건 내가 카카나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지.”
문득, 할릭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새삼 황당하네.”
“뭐가.”
“그러게. 뭘까, 지금 이 상황.”
할릭이 같은 자리에 있는 용사들을 한 명씩 마주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뮤나스에서 생활할 때부터 쭉 이어져온 용사들의 은근한 대치가 이 자리를 빌려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나만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말뜻을 알아들은 아다르가 작게 쪼개 웃었다. 첼러스가 돌연 매우 피곤해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할릭이 말을 이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 여기에 첫사랑인 사람만 두 명이거든? 너랑, 너.”
할릭이 아다르와 스노아를 차례로 가리켰다. 부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
기가 찬 웃음을 흘린 할릭이 입가를 만지작거리더니, 돌연 씨익 미소 지었다. 아다르가 짓궂은 짓을 할 때와 유사한 표정이었다.
“어쩌냐.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던데.”
“늙다리 주제에.”
아다르가 빈정거렸다.
“늙다니? 초월자가 된 순간부터 나이고 시간이고 의미를 잃어버렸는데, 말은 잘하네. 너야말로 카카나가 첫사랑인 주제에 사랑은 아냐는 둥 인생 대선배처럼 굴었잖아.”
할릭이 대응했다.
질 아다르가 아니다. 그는 불리한 점은 교묘하게 피해가며 말을 이었다.
“같은 취급 마시지? 감옥에 갇히기 전엔 그래도 파릇파릇한 20대였다고. 너희들 중에서 내가 유일한 20대였지.”
아다르가 20대를 강조하며 차별점을 두려 애썼다.
“갓 초월자에 접어든 싱싱한 나랑, 썩을 대로 썩은 너랑 같아?”
“초월자가 되면 어차피 가장 젊고 강한 시절로 몸이 회귀하는데, 그딴 게 뭔 상관이야?”
할릭이 같잖아 하며 받아쳤다.
“하긴, 너 같은 애새끼는 원숙미라는 걸 모를 나이긴 해.”
“그만하십시오.”
첼러스가 깊은 숨을 삼키며 말했다. 바로 반박하려던 아다르가 뒤척이는 카카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첼러스가 말을 이었다.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초월자의 감정은, 사소한 감정이라도 일반인과 다릅니다.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저는 여기서 그녀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버거울 겁니다. 초월자의 사랑이란 그렇지요.”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할릭이 찡그린 눈으로 첼러스를 바라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존재를 향한 사랑입니다. 이해를 바랄 수 없으며, 그렇기에 요구할 수도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
아다르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늘어트렸다. 그리곤 다리를 꼬며 턱을 치켜들었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첼러스의 서늘한 호수빛 눈망울이 아다르를 향했다. 아다르가 아랑곳 않고 말했다.
“꼭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야 돼? 난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살아있음을 느끼는데.”
“으응.”
카카나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꼬대를 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조용해지자, 몸을 몇 번 뒤척인 카카나가 다시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아다르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입을 열었다. 혹시 그녀가 불편할까,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수준으로 조용히.
“그냥 행복하게 해주고, 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으면 되잖아.”
“…….”
“나 질린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겠지만. 쟤가 싫다는데 어쩌겠어.”
아다르가 웃는 건지 인상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같이 좋을 수도 있잖아. 성별, 외양, 종족을 뛰어넘어서 날 사랑해달라는, 그런 거창한 것까진 안 바라. 그건 초월자만 할 수 있는 거잖아.”
“…….”
“난 쟤가 내 몸만 좋아하더라도 기쁠 것 같아.”
졸지에 아다르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대단한 낭만가 납셨다며 할릭이 빈정거렸지만, 그뿐이다. 아무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다. 무슨 마음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너무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다시 고요한 공기가 그들을 에워쌌다.
“내가 싫다고 하면.”
정적을 가른 아다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때는 멀리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카카나의 삶이 행복하면 그만이니까.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황홀할 거야. 이거야말로 짜증 날 정도로 초월자스러운 생각이지만.”
그리고 정말 유감이라는 듯이 말을 끝맺었다.
“결론은, 찰나의 시간을 함께하는 게 뭐 어떠냐는 거야. 시도는 해볼 수 있잖아. 영생은 길어.”
아다르가 같은 말을 읊조렸다.
“너무 길지.”
“…….”
“그러니까 내가 보고 사는 불꽃이 꺼지면, 나도 같이 꺼져버리면 그만인 거야. 내 경우엔 인위적인 노력이 좀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영생의 삶이란 허무하고 덧없는 삶이다. 그런 그들을 움직일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은 감정이었다. 제국을 향한 분노와 증오. 그리고 한 존재를 소중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
그런데 그 존재마저 잃고 만다면, 지루할 정도로 길고 긴 인생에 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모든 것은 스러지고 또 없어지는 것을, 홀로 영원하여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었다.
초월자들은 영원을 살지만, 결국 영원하지 못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때문이다.
아르모어 또한 이 의문을 마음에 품고 오랫동안 고민을 해왔다. 물론 답은 찾지 못했다. 그저 계속 고통 받을 뿐이다.
‘…….’
눈을 감은 아르모어의 번뇌 속에서, 과거의 기억이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피와 시체, 검은 연기 속에서 두드러지게 파란 남자가 떠오른다. 스노아 칼리시스에 대한 기억이다.
그가 대지에 내리꽂은 대규모 마법으로 일대의 생명이 단번에 증발했다. 그는 그 장면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
또 같은 표정의 남자가 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적군들을 쉬지 않고 움직이며 상대하는 남자. 그 성스러운 몸과 칼에 온통 피를 뒤집어쓰고, 남자가 숨을 몰아쉰다. 제가 손쉽게 구현해 낸 지옥도에 우뚝 서서, 텅 빈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첼러스 밀라다스다.
그때 할릭이 아르모어 근처로 걸어온다.
“있잖아, 아르모어.”
손엔 펄떡거리는 마물의 심장이 들려 있다. 그걸 맨손으로 터트린 할릭이 감정이 죽은 눈으로 묻는다.
“이 전쟁 언제까지 해야 할까?”
“지루한가?”
“자극적일 줄 알았는데 별로네.”
할릭이 제 손에 남아 있는, 내장의 찌꺼기를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그래서 기분이 더러워.”
그가 으깨서 죽여 놓은 마물과 적군의 시체를 멀거니 바라본다. 할릭 또한 스노아, 첼러스와 같은 얼굴이다.
그건, 짙은 허무와 공허의 얼굴이다.
여태 애써 외면해 왔더라도, 전장에 나오면 그 감정을 피할 길이 없어진다. 그들의 손짓 한 번에 생명의 빛이 꺼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인간도, 하등한 짐승도, 식물도, 모두 같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러면 죽지 않는 본인이 얼마나 이질적인지도, 심장이 아리도록 잘 느껴진다.
‘전쟁이 끝나면 이 유구한 삶도 마침내 끝나는 것인가.’
아르모어는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내내 그게 궁금했다. 이제 스스로를 죽여도 되는 건지. 지루한 삶을 이제 그만 끝내도 되는 건지.
그가 그때까지 살아있었던 이유는 ‘어떤 존재’가 그에게 했던 말이 지울 수 없는 흉터처럼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죽어선 안 된다, 아르모어. 큰 일이 남아있다.]
그는 위대한 존재가 말하는 ‘큰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오직 그 호기심 하나로 지금껏 살아왔다. 네 명의 용사들이 태어나 성장하고, 마침내 초월자로 각성하기까지 긴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렇다면, 그 차원전쟁은 ‘큰 일’인가?
‘아니.’
아르모어는 고개를 저었다.
‘이토록 하찮은 일이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더 남아있다.’
그래, 아주 큰 일이. 그는 그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아르모어.”
기억이 훌쩍 흘러, 더 과거로 넘어간다.
아르모어는 자기에게 말을 걸었던 위대한 존재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그 존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까마득하게 오래된 일인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시기는 가물가물하다. 막 백 살이 되었던 때인가.
동양 땅을 떠나 낯선 대륙으로 발을 디디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 건 확실하다. 그는 이곳에서 저와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를 만났다.
위대한 존재.
“그대는 이번에 탄생한 첫 초월자로군. 그렇다면 또다시, 격동의 시대가 오는가.”
“격동의 시대?”
“그렇다, 인간이여.”
드래곤로드.
전신이 은빛 비늘로 덮여 있는, 드래곤들의 수장. 활화산의 끓어오르는 마그마를 따스한 온돌 삼아 누워있던, 산처럼 거대한 존재.
인간은 지독한 유황 냄새와 열기 탓에 숨 쉬기도 힘든 곳에서 드래곤로드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입은 다물려 있었지만, 목소리는 거대한 동굴을 통째로 울리며 지나는 바람소리처럼 웅장하고 압도적인 형태로 아르모어에게 쏟아졌다.
“격동의 시대엔 언제나 수호자가 나타났다. 그대들은 초월자라 부르는 자들이지.”
아르모어는 그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상한 말을 하는군. 어찌하여 인간이 수호자란 말인가?”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의외의 말이 아닌가. 이 땅의 주인이 ‘인간’임을, 드래곤로드 그대가 말한 것인가?”
은빛 드래곤이 깊은 숨을 내쉬며 인정했다.
“그렇다. 그러니 지켜낼 권리도 의무도, 인간들에게 있지.”
“무엇으로부터 지켜낸단 말인가?”
드래곤로드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커다란 눈알로 아르모어를 들여다보며 이렇게 얘기했을 뿐이다.
“아주 긴 삶이 될 것이다, 아르모어. 그대는 너무 일찍 깨어났어.”
“…….”
“지루하고, 지루하고, 고독한 삶이 될 것이다. 수없이 끝내고 싶은 인생일 것이며, 눈 감는 순간을 영원히 고대하는 목숨이 될 것이다.”
저주와도 같은 말이었으나,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르모어는 붉은 눈으로 드래곤과 시선을 마주했다. 마그마의 뻘건 빛이 반사되어, 존재 자체로 거대한 불꽃처럼 보이는 드래곤이 아르모어에게 충고했다.
“그대를 유지시켜 줄 단 한 가지의 감정을 찾고, 지켜라. 그래야만 세월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초월자의 본능이기도 하지.”
“어째서 버텨야 한단 말인가?”
“큰 일이 남아있다.”
다시 잠에 들려는 듯, 드래곤로드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기다려라. 때가 올 때까지. 그 순간이 오면 마침내, 허무한 삶에서 초월자로서의 모든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현실로 돌아온 아르모어가 눈을 떴다.
몸을 돌린 카카나가 어느새 아르모어의 허벅지 근처에 이마를 맞대고 잠들어 있었다. 아르모어는 그녀의 눈썹을 검지 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제 안에 자리 잡으려 하는 단 하나의 감정을 음미하며.
‘이제야, 모든 것이 끝나려고 하는가.’
때가 다가오고 있다.
아르모어는 비로소 ‘큰 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다. 긴 세월을 살아왔기에 느낄 수 있는 예민한 촉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대가 눈을 감으면, 나도 잠들 수 있게 되는 건가.’
혹은 반대로, 마침내 눈을 뜨고 삶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그건 직접 가봐야 알 것이다. 여태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