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투기대회의 그림자
우리는 첫 번째로 경기를 치르게 되었는데 소문이 화려하게 난 모양이었다. 구경하러 온 귀족이 늘어서 내 신경을 추가로 갉아먹었다. 듣자하니 투기대회는 2차전부터 흥미진진한 탓에, 기간을 맞춰 오는 귀족이 많다는 것 같았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17회 투기대회 2차 경합을 시작하겠습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착실히 흘렀지만 말이다.
신이 난 사회자가 개막을 알리자, 관중석의 뜨거운 함성이 대기실까지 쏟아졌다. 날씨가 몰라보게 더워져서 땀이 송골송골 솟아나고 있었다.
피딱지와 시체를 걷어내고 새 모래를 뿌린 땅에서 열기가 이글거리며 올라왔다. 안 그래도 심란한 내 마음을 아예 짓뭉개려고 작정을 한 건지, 사회자들이 설레발을 치며 용사들의 위용을 늘어놓았다.
“이야, 이번 2차전은 심상치 않습니다. 두 팀 모두 다섯 명 온전하게 2차전에 진출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관중 여러분!”
와아아아아―
관중석에서 힘찬 환호성이 쏟아졌다.
“대기실의 음산한 기운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빨간 팀의 무력은 이미 소문이 좌악 돌았을 정도라고 합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안젤라?”
“그렇습니다! 빨간 팀의 팀원 한 명이 근처의 검투사들을 모조리 도륙하는 바람에 나머지는 할 짓이 없어서 책을 읽었다죠?”
“투기대회에서 책을 읽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관중석의 함성이 길어질수록 머리를 쥐어뜯는 내 손에 힘이 실렸다.
과거를 향한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내가 왜 그랬을까. 잠깐 미쳤던 게 아닐까.
용사들은 여유로웠다. 그들은 헐겁고 낡은 나무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까닥거리거나 하품을 하고 있었다. 대기실의 조명이 그들의 유려한 얼굴 위로 황토빛을 흩뿌리는 게 노곤하게 햇볕을 쬐는 것처럼 보였다.
수심에 잠긴 얼굴은 여기서 나뿐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대기실을 훑었다.
사람들이 많았을 땐 몰랐는데 딱딱하게 말라붙은 벌레 같은 피 얼룩이 군데군데 튀어있었다.
“빨간 팀의 상대는 누구죠, 브랜든?”
“초록 팀입니다! 독보적인 팀워크로 한 명씩 사냥하는 기술이 뛰어났던 팀이죠! 그 집요함 때문에 독니 초록 팀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요, 야수에게도 그들의 사냥술이 먹힐까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안내인을 따라 대기실에서 벗어나 투기장으로 향하는 긴 통로를 걷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봄 티를 벗지 못한 바람이 제법 차가웠지만, 햇볕이 직선으로 쪼이는 대회장은 불판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하, 이번 전장은 야수인가 봅니다, 여러분!”
‘야수라고?’
나는 탁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짚었다.
이곳의 투기대회는 몇 해 전부터 ‘전장’이라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팀끼리 싸움을 벌이는 동안 마법으로 일시적인 미로를 만들기도 했고, 안에 야수나 몬스터들을 풀어놓기도 했다.
야수 전장이면 특히 운이 없는 편에 속했다. 상대 팀의 끈을 잘라내기는커녕 야수에게 공격당해 살아남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초록 팀만 별명을 지어주면 빨간 팀이 아쉬워하지 않겠어요, 브랜든?”
“좋아요, 그럼 빨간 팀은 학자라는 이름을 붙여줄까요? 투기대회에서조차 학문에 정진하는 모험가에게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기를!”
관중석에서 와하하, 웃음을 터졌다.
“자, 그럼 빨간 학자 팀과 초록 독니 팀의 야수 전장! 시작합니다!”
철창이 드르르륵, 떨리며 위로 올라갔다.
동굴처럼 습하고 컴컴한 통로에서 살인적인 햇빛 속으로 걸어가자 눈을 뜨기 힘들었다. 드넓은 대회장의 끄트머리에 초록색 끈을 감은 검투사 다섯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빛이 나는 민머리에, 우락부락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1차 경합에서 용사들이 일방적인 힘 차이를 보여준 탓에 그들은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다.
지루한 탐색전이 이어지자 관중석에서 야유소리가 터졌다.
“우우우우!”
“이딴 식으로 할 거면 빨리 지고 집에나 가라!”
피와 죽음을 보고 싶어 안달 난 괴성이 시끄럽게 관중석을 채웠다.
“관객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우리에겐 야수가 있습니다!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모습을 한번 볼까요?”
사회자가 신나게 떠들어대며 귀에 걸린 마도구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야수를 풀어주십시오!”
와아아아―
야유가 환호소리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닫혀있던 다른 출구의 철창이 위로 드르륵 올라갔다.
으르르르르―
괴물의 목구멍처럼 컴컴한 출구에서 섬뜩한 저주파가 진동을 했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출구를 바라보았다.
야수는 일반 동물처럼 자연의 마나를 가지고 있지만, 몬스터 수준으로 강하고 독특한 외양을 가진 짐승이었다. 성질이 상당히 포악해서 맨몸으로 마주쳤다간 살아남기 힘들었다.
“육식과 야수, 타이거캐츠가 등장합니다! 저것을 잡아들이기 위해 사냥꾼 수십 명이 동원되었다고 하죠!”
사회자가 침을 튀겨가며 바짝 달아오른 열기를 부추겼다.
“무려 몸길이 400센티미터, 이빨 38센티미터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야수입니다! 이런, 배가 많이 고픈 것처럼 보이는데요! 두 팀 모두 전멸하는 건가요!”
사회자의 질 나쁜 농담과 함께, 타이거캐츠가 거친 숨을 뿜었다.
호랑이처럼 노란색 털에 기다란 검은 얼룩이 있는 야수였다. 뾰족한 귀 끝 털이 갈대처럼 위로 꼿꼿하고 나 있었으며, 두 개의 꼬리는 불편한 심기를 반영하듯 고문관의 채찍처럼 연신 바닥을 할퀴고 있었다.
나는 타이거캐츠의 무시무시한 이빨을 보며 몸을 굳혔다.
이번에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긴 확실히 글러먹은 것 같았다. 주둥이 바깥으로 길게 뻗어 나와 있는 이빨에 끈적한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사회자의 말마따나 배가 몹시 고파 보였다.
“우리 여기서 맛있는 한 끼 식사가 되는 거 아니지?”
나는 차게 식어서 물었다.
“저걸로 요리해달라고?”
하품을 하느라 내 말을 제대로 못 들은 아다르가 멍하게 되물었다. 졸린 눈이었다.
“넌 고기 먹으면 배탈 날 텐데.”
‘내가 또 괜한 걱정을 했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고개를 저었다. 용사들이랑 평생 함께해도 저 태평한 사고방식만큼은 못 따라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타이거캐츠가 몸을 움직였다. 첫 번째 먹잇감은 초록 팀의 궁수였다.
고목나무 둥치만큼 굵다란 허벅다리가 무섭게 팽창하며 야수가 도약했다. 야수가 단 세 걸음 만에 궁수가 있는 곳까지 뛰어가서, 초록 팀이 어떻게 해볼 겨를도 없이 앞발을 휘둘렀다.
“아아아악!”
바위 네 개를 박아 넣은 것 같은 검은색 발바닥이 궁수의 몸을 가격했다. 절명한 궁수가 단숨에 관중석 근처까지 날아갔다.
잠시간 침묵에 휩싸여있던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잇따라 터졌다.
“그래, 이거지!”
“더 해보라고, 귀여운 고양이야! 더 해봐!”
오랜 기간 굶주렸을 타이거캐츠는 이상하게도 시체를 먹지 않았다. 광분에 찬 눈에는 오직 인간을 죽이고 싶다는 강한 욕망만 드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떨결에 야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덫에 걸린 초식동물처럼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타이거캐츠가 마치 탐색하듯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를 죽이고 싶었으면 진작 움직였을 텐데, 이상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뜬금없이 고양이가 생각났다. 음식점 뒤에서 만났던, 쓰레기통 근처의 고양이.
그 고양이도 처음엔 경계를 하다가 나중엔 아롱아롱 빛나는 눈으로 날 봤었다. 지금의 타이거캐츠 눈이 딱 그랬다. 나는 무망중에 손을 내밀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이, 이리 온?”
말해놓고 혀를 빼어 물었다.
광기와 햇빛을 넣고 팔팔 끓인 냄비 속 같은 투기장에서 내 정신이 기어코 돌아버린 게 분명했다. 지루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던 용사들마저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봤다.
“이리 온?”
할릭이 경악해서 내 말을 똑같이 따라했다.
“저건 야수야, 카카나.”
“얘 눈엔 저게 진짜 고양이로 보이나보지.”
아다르가 빈정거렸으나,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나운 야수 타이거캐츠가 내 눈에 진짜로 고양이처럼 순하게 보이고 있었다.
‘미쳤나 봐.’
나는 앞으로 내밀었던 민망한 오른손을 허둥지둥 품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침을 뚝뚝 흘리며 날 바라보던 타이거캐츠가, 돌연 눈을 몇 차례 깜박이더니 내게로 곧장 걸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겁하면서 발을 뒤로 물리다가 넘어질 뻔했다. 나는 진땀이 배어나와 끈적거리는 손으로 옆에 선 첼러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달달거리는 무릎에 간신히 힘을 주고 섰다. 벽처럼 굳건한 손이 몸을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진작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용사들이 날 보호하듯 둘러싸며 서자, 타이거캐츠가 두 개의 꼬리를 천천히 흔들면서 우리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용사들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저 날 빤히 바라보면서 주위를 맴돌고 있다.
“빨간 학자 팀!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뭐부터 먹을지 고르고 있는 걸까요!”
저놈의 사회자는 아가리를 제발 닥쳐줬으면 좋겠다.
내 생각에 부응하듯이 야수가 관중석 높은 곳에 있는 사회자를 향해 길게 한번 울부짖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상황을 중계하던 브랜든과 안젤라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기이한 변화를 알아챈 관중석에서도 소리가 사라졌다.
‘기분 탓이겠지?’
억지 미소를 짓는 순간, 타이거캐츠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녀석, 아까부터 좀 묘하지 않아?”
짐승은 짐승을 알아본다고, 할릭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야수가 자리에 앉은 채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애교 많은 고양이를 보고 있는 느낌에 등허리로 식은땀이 흘렀다.
‘난 왜 쟤가 날 마음에 들어하고 있는 것 같지.’
내 착각임이 분명할 텐데,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나는 앞을 가로막은 할릭 뒤에 숨어서,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려 했다.
“그러다 먹힌다?”
할릭이 내 손목을 그러쥐며 말했다.
“만약 그럴 것 같으면 네가 막아줘.”
“뭐 하려고?”
지금 여기서 나를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나였다. 난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그러나 몸은 착실히 타이거캐츠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나도 몰라. 놔봐.”
할릭이 놔주었다. 나는 손을 쭉 내밀었다.
“착하지?”
갸르르릉.
타이거캐츠가 기분 좋은 울음소릴 내며 내 팔뚝을 길게 한 번 핥았다. 나는 할릭 뒤에 숨어 있는 것을 관두고 아예 야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수염을 움찔거린 타이거캐츠가 바위처럼 거대한 머리를 내 온몸에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나는 큰 충격을 받고 얼음이 되었다.
“어떻게 저런!”
충격을 받은 건 관중석도 마찬가지였다.
야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자연에서 나는 순수한 생명체인 것과는 별개로, 본성이 포악하고 억세서 결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고고하고 자존심 드높은 생물이었다. 악취미인 귀족이 관상용으로 우리에 가둬놓고 구경할 만큼 희귀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야수가, 타이거캐츠가, 애완 고양이처럼 지금 내 몸에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혹시 수인족은 동물이랑 친해? 말이 통한다든가?”
나는 헛소리를 하는 할릭의 발등을 콱 짓밟았다. 그가 악,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선다.
“수인족이 같은 짐승인 줄 알아? 죽을래?”
“미, 미안.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 타이거캐츠가 널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알다시피 야수는 절대 사람을 따르지 않, 이런.”
할릭이 돌연 나를 품에 안고 뒤로 물러섰다. 초록 팀의 철그물이 우리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물이 차르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긁자 모래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그들은 지난 시합에서도 이렇게 그물로 상대를 포박한 뒤 심장을 찌르는 식으로 적을 없앴다. 용사들이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나설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순한 양처럼 굴던 타이거캐츠가 갑자기 광폭한 울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야수의 눈은 나를 노리는 초록 팀에게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그에 겁을 먹은 초록 팀이 주춤하자, 다시 싸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젠장, 좀 시원하게 싸워보라고!”
“재밌다 말았네.”
관중석에서 연신 야유가 터져 나왔다.
주최측의 의도와 일이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회자가 화난 얼굴로 마도구에 대고 뭐라 뭐라 소리쳤다. 그러자 다시 한번 투기장의 철창이 올라갔다.
“아, 아무래도 저 야수는 불량품인 것 같군요!”
그가 타이거캐츠를 물건 취급하며 말했다.
“어제 갓 잡아온 진짜 야수 한 마리를 더 투입합니다!”
그제야 싸늘하게 식어있던 관중석에 열기가 다시 돌아올 기미를 보였다.
우리 손목에 매어져 있는 빨간 끈을 호시탐탐 노리던 초록 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들의 겁에 질린 얼굴을 본 관중석이 사회자를 향해 잔인한 요구를 했다.
“이보시오! 재미없는 경기를 보인 대가로 두 팀 모두 야수의 제물로 바치는 게 어떻소?”
“옳소!”
“그렇게 해라! 저놈들을 죽여라!”
사회자의 역할은 관중들의 어두운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었다. 돈이 아깝지 않도록, 최고의 재미를 선사해주는 것.
사회자가 마도구에 대고 열심히 뭐라 떠들어대더니, 별안간 활짝 편 얼굴로 소리쳤다.
“방금 제안해주신 흥미로운 제안을 주최측이 받아들였습니다! 한 마리에 두 마리를 더해 세 마리의 야수가 입장합니다!”
‘그러면 타이거캐츠 네 마리잖아! 미친 거 아니야?!’
와아아아―
그러거나 말거나 관중석은 좋아서 뒤집어지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아직은 야수가 추가로 입장하지 않았다. 초록 팀은 조금이라도 빨리 경기를 끝내야 자기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강제로 전투가 개시되었다.
“엄마야!”
손으로 머리를 보호하며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초록 팀이 눈을 까뒤집고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던 탓이다.
타이거캐츠가 날 보호하듯이 앞으로 뛰었다. 당황한 상태에서 순식간에 궁수를 잃은 경험이 있는 검투사가 무기를 휘둘렀다.
‘지금도 아비규환인데 야수가 세 마리나 더 추가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패닉에 빠졌다.
‘그 야수들도 내게 복종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예리한 칼날이 야수의 목 줄기를 길게 훑으며 상처를 내었다. 타이거캐츠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 틈을 타 검투사 한 명의 검이 내 목덜미로 짓쳐들어왔다. 첼러스의 롱소드가 검투사의 검과 길게 마찰을 일으키며 방향을 틀었다. 살기가 배어있는 차가운 검풍이 뺨을 스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다른 검투사가 틈을 노리고 내게로 뛰었다. 거친 숨을 뿜던 타이거캐츠가 그의 어깨를 물어 멀찍이 날려버렸다. 야수가 날 지키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아아아악!”
아비규환인 투기장에 세 마리의 야수가 추가로 달려 들어왔다. 모두 같은 종인 타이거캐츠였다. 짙게 풍긴 피 냄새는 굶주린 짐승을 흥분시키기에 제격이었다.
야수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할릭의 등 뒤로 피했다. 그런데 용사들만큼이나 속도가 빠른 타이거캐츠의 모습이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응?’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야수들이 모두 초록 팀을 향하고 있었다.
‘뭐야. 네 마리 다?’
야수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초록 팀을 공격했다. 할퀴고, 달려들고, 무시무시한 이빨을 부딪치며 포효했다.
용사들이 기묘한 얼굴로 무기를 바닥으로 늘어뜨렸다. 모래알이 반짝이는 땅바닥에 초록 팀의 뜨거운 피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관중들은 열광했으나, 곧 조용해졌다. 야수가 초록 팀만 사냥했기 때문이다. 경기를 중계해야 하는 사회자가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엄마야!”
초록 팀을 해치운 타이거캐츠들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제 거대한 몸집은 생각도 안 하고 주둥이부터 들이민 탓에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한 마리가 내 몸을 감싸듯 근처에 앉았다. 또 다른 한 마리는 날카로운 발톱에 혹시 내가 다칠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손을 톡톡 치고 있었다.
‘서, 설마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거야?’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있는데, 쨍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사회자의 중계였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납기로 소문난 야수들이 빨간 팀 선수에게 애교를 피우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군요! 사람이 야수를 길들일 수 있단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맞습니다! 심지어 야수와 그녀는 오늘 처음 본 사이가 아닙니까! 정말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녀는 과연 사람이 맞는 걸까요!”
열기와 환호성 대신, 의뭉스럽고 수상한 수군거림이 관중석에 퍼졌다.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몸길이만 내 두 배가 넘는 야수들이 몇만 명이 넘는 관중들 앞에서 내게 애교를 피우고 있었다.
어리둥절하다 못해 무서웠다.
갸르릉.
날 둘러싼 야수들이 칭찬해 달라는 듯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심지어 초록 팀의 무기 중 하나를 전리품처럼 물고 와서 제가 잘했다는 듯이 뻐기는 녀석도 있었다.
한 마리는 내 허벅지만 한 혀를 내밀어서 발목부터 정수리까지 꼼꼼하게 핥았다. 온몸이 축축해져서 짜증이 날 법한데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야수가 털을 부비며 체취를 묻히려 하는 통에 몸이 자꾸 흔들렸다.
‘고양이도 이보단 사납겠네.’
나는 넋이 나간 채로 타이거캐츠의 뾰족한 귀 뒤쪽을 살살 긁어주었다. 야수가 좋다고 자리에 벌러덩 드러눕더니 배를 까뒤집었다. 애교의 절정이다.
“끄, 끝입니다! 승리는 빨간 팀입니다!”
황급히 대회를 수습한 사회자가 서둘러 손짓했다.
그러자 관중석 가까이에 대기하고 있던 사냥꾼들이 독침봉에 들어있는 마취바늘을 쏴서 야수들을 잠재웠다.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채로 연행되다시피 용사들에게 끌려들어갔다.
대기실에는 대회 주최측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깐깐한 얼굴의 여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감히!”
그녀가 날 보자마자 쇠꼬챙이처럼 마른 몸을 파들파들 떨면서 소리를 질렀다.
“감히! 감히 대회를 망치다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녀는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여자를 쳐다보다가 지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왜 저한테 성질이세요? 야수가 절 좋아하는 게 제 탓이에요?”
“뭐요?”
“아니 그렇잖아요! 그럼 제가 대회 도중에 그 야수들을 길들이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뭐예요!”
길들인 게 맞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쪽 잘못인 걸 왜 저한테 덮어씌우냐구요!”
“분명히 사람만 참가 가능하다고 쓰여 있었을 텐데요! 사람만!”
깨진 유리처럼 히스테릭하게 찢어지는 음성으로 강조한 그녀가 내 눈앞에 투기대회 홍보물을 마구 흔들어재꼈다.
깜짝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스노아가 나를 제 뒤로 숨기며 여자에게 차가운 어조로 일갈했다.
“이게 무슨 짓이죠?”
“오크를 데려온 것이 아닙니까!”
그녀는 아득바득 우겼다.
“인간이 숲의 야수를 눈짓 한 번으로 길들일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야수를 강제로 조종할 수 있는 건 몬스터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오크밖에 없어요!”
코도 뾰족, 턱도 뾰족, 입술도 뾰족, 눈도 뾰족한 여자가 그야말로 가시처럼 폭언을 우수수 쏟아냈다. 아닌 걸 알면서도 내가 진짜 오크라도 된 기분이었다.
반박해야 하는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뭐라고 변명하면 좋단 말인가? 오크에게 억지로 조종당하는 것과 조금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야수들은 내게 절대 복종을 했는데!
“불결한 오크를 감히 투기대회에 끌고 와 무기로 사용하다니!”
“그녀는 인간입니다. 오크는 초록색 피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도 잘 알 거라 생각합니다만.”
첼러스가 최대한 정중하게, 그러나 금방이라도 그녀의 심장을 찔러버릴 것 같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를 느낀 여자가 조금 기세를 누그러트렸지만 나를 향한 노골적인 경멸은 숨기지 않았다.
보라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로 한참 동안 씩씩거리니 손에 들고 있던 서류에 몇 가지를 추가로 적었다. 종이를 긁어대는 만년필 소리가 신경질적이었다.
필기구도 어쩜 저렇게 자기랑 꼭 닮은 걸 쓰는지,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몸통에 새빨간 눈알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오크가 무슨 요술을 부리고 있는지 어떻게 알죠? 초록색 피부 따위야 인간의 가죽을 벗겨 뒤집어써서 가리면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겠어요?”
그녀가 턱을 추켜세우며 나를 새침하게 바라보았다.
“다음번에도 의심스러운 일이 생기면 이렇게 간단히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감히 대회를 망친 대가는 톡톡히…….”
“야.”
할릭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다짜고짜 반말을 했다. 예상대로 여자는 발끈해서 할릭을 쳐다보았지만, 곧 덩치에 압도돼서 뒤로 물러섰다.
그렇잖아도 피부가 허여멀갰던 여자의 안색이 중증환자 수준으로 나빠졌다. 할릭의 살기를 맞으면 야수를 코앞에 두고 있는 듯한 공포가 밀려올 터다.
“말이 너무 길어. 일 절만 하지?”
“지, 지켜보고 있겠어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자 표독스럽게 소리친 여자가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대기실을 벗어났다. 아다르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곧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저 여자 혼내줄까?”
말의 내용과 다르게 퍽 다정한 목소리다.
“다시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하도록?”
“너는 용사란 작자가 민간인 상대로 그러고 싶니?”
목에 잔뜩 배어나온 땀을 닦아내며 타박했다. 아다르가 너무 새까매서 아무것도 들여다보이지 않는 눈을 끔벅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아니잖아.”
나는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무슨 소리야?”
“지금 우리에게 지켜야 할 조국 같은 건 없어. 단지 사심으로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쓸모없는 희생을 삼갈 뿐이지.”
“…….”
“검집 없는 검이 되어버렸으니, 어떻게 휘두르든 마음대로란 얘기야.”
잔잔하게 이어지는 아다르의 목소리가 너무 시커메서, 대기실의 기온 전체가 훅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긴장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용사들을 강제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국은 저들 스스로 검집을 부러뜨리고, 고삐를 놓아버렸다. 용사들은 쫓기는 몸이었지만 모순적이게도 그렇기에 자유로웠다.
그들은 세상을 망가트릴 힘을 가졌다. 변덕쟁이로 태어나는 게 인간이니 언제든 그럴 마음을 먹을 수 있다. 단지 ‘용사가 그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유지되는 평화인 것이다.
그게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새삼 실감이 되었다.
“거, 검집은 네가 새로 고르면 되는 거지.”
이런 철학적인 주제에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나름 신중하게 고민해서 대답했다. 아무렇게나 말하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통하는 부분이 있었는지 아다르가 동그란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이내 사르르 웃었다.
“그러네.”
“출출하니, 뭐라도 좀 먹으러 갈까요?”
스노아가 눈치 좋게 화제를 돌렸다.
“근처에 맛 좋기로 유명한 식당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용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경직되어 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
“바드, 이 바퀴벌레 같은 놈!”
“어엉?”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갑자기 쌍욕을 씨불이며 방으로 들어왔다.
술병과 함께 원형 카펫 위에 방탕하게 누워있던 바드가 고개만 까딱 들어올렸다. 그는 코까지 내려오는 긴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도, 그는 마치 제 방에 침입한 사람이 잘 보인다는 듯이 남자의 움직임을 쫓아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왜 다짜고짜 와서 바퀴벌레 타령이야?”
“방구석에 찌그러져서 기어 나올 생각을 안 하니 그러지!”
심통이 잔뜩 난 남자, 아무스가 문득 방을 둘러보고는 질린 투로 얘기했다.
“여기 네 취향대로 꾸민 거지?”
황궁은 현란하다 못해 눈이 찡그려질 정도로 금과 은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빈민가의 뒷골목 수준으로 칙칙하고 어두웠다.
양초를 꽂는 구식 샹들리에는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것을 거미줄도 안 치우고 매달아놓은 것처럼 천장에 음험하게 매달려 있었고, 곳곳에 해골과 검은색 수정구슬이 놓여있었다. 저런 물건은 어디서 구하는 건지 진열장의 유리는 빨간색이었다. 그래서 보관되어 있는 유리병들이 전부 피를 담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정말 피일지도 모른다.
‘바드의 방이니까.’
아무스가 한심하단 눈으로 바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바닥에 늘어져있었다.
“네가 흑마법사라는 걸 그렇게 티 내고 싶었냐?”
“으음, 그런 건 아니었는데.”
바드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아주 느린 말투로 얘기했다.
“심심해서 꾸미다 보니 이렇게 됐어. 방에 들어오는 인간들이 겁에 질리는 걸 보는 게 꽤 재미있었거든.”
아무스가 혐오스러운 것을 치우듯 바닥에 굴러다니는 병을 구두코로 밀었다. 그리고 제 주머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의자에 깔고 그 위에 앉았다.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오해를 일으킬 만한 행동이지만, 바드의 방은 그 정도로 불결하게 느껴졌다.
“여긴 왜 왔어. 그렇게 싫어할 거면서.”
“황제가 요즘 여간 히스테리를 부리는 게 아냐.”
“용사들 때문에?”
“어. 저러다 일찍 죽게 생겼어. 그러면 우리야 좋지만.”
아무스가 입맛을 다시며 투덜댔다.
발목에 감아놓은 붕대 안으로 손을 넣으며 긁적거리던 바드가 약간 보랏빛인 입술에 미소를 띠었다. 그의 피부는 물에 빠져 죽은 주검처럼 푸르스름한 색이었다.
“그거 말고 본론부터 말해. 재밌게 들을 준비 됐으니까. 요즘 너무 지루했거든.”
“카타스 마을의 지하묘지에 네가 만들었던 구울들 있잖아.”
아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서 근원 구울의 기척이 잠깐이지만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했었지? 그 이교도 이름이 뭐였더라. 칼리스였나.”
아무스의 올백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드가 실망이 담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검은 로브에 꽁꽁 숨겨져 있던 앙상한 두 다리가 바깥으로 조금 튀어나왔다. 막 소년기에 접어든 아이처럼 가는 다리였다.
바드가 붕대가 감긴 손가락으로 비뚤어진 모자를 도로 푹 눌러쓰며 말했다.
“대체 언제 적 얘기야? 한참 생각했잖아.”
“얼마 안 됐어. 고작해야 몇 달?”
“그건 이미 용사들이 손본 걸로 끝난 거 아니었어? 겨우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는데 터무니없이 나타나서 남의 장난감을 뺏고 말이야.”
바드가 목에 감긴 붕대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채 긁적이며 말했다.
“그 주제는 왜 다시 꺼내? 기분 잡치게.”
“최근 길러드가 심복을 심었잖아.”
바드가 마침내 한숨을 쉬었다.
“방에만 있어서 그렇게 말하면 못 알아들어. 길러드가 심복을 심었다고?”
“아, 모르는구나. 아레사 나이제르라고 꽤 유명한 마법사가 있는데 알아?”
“그건 알지.”
“얘가 용사들 중 한 명의 애제자거든. 그래서 근처에 심복을 심어놨었어. 용사랑 접촉하지 않을까 하고.”
바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뮤나스에서 있었던 일 얘기하는 거야?”
“응, 거기. 뒤늦게 알았는데, 용사들이 있었던 게 확실한가 봐. 근데 당시엔 생각을 하지 못 했던 거지. 어떤 특이한 여자 때문에.”
“용사보다 중요한 사람이 누가 있다고 생각을 못해?”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거든? 근데 길러드가 아주 요상한 소릴 하더라.”
제일 중요한 대목이었다.
아무스가 의자등받이 위에 두 팔을 얹으며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도통 믿기지 않는 소릴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심복 시체까지 손수 뒤져봤잖냐. 그런데 길러드 말이 진짜인 거 아니겠어? 흥미로운 흔적이 있더라고. 뭐게. 맞혀봐.”
흐음, 침음을 흘린 바드가 손가락으로 턱을 몇 차례 톡톡 두드렸다. 지루함을 달래듯 좌우로 까딱거리던 고깔모자가 어느 순간 딱 멈춘다. 그가 정색하고 손을 내렸다.
아무스는 생침을 삼키며 보라색 물결무늬가 수놓인 고깔모자를 바라보았다. 아마 저 안 어디쯤 있을, 바드의 눈을 쳐다보면서.
아무스는 힌트를 더 주기로 했다.
“잠깐 소생한 것처럼 느껴지는 구울과, 이상한 흔적이 남은 길러드의 심복.”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바드가 회의적으로 얘기했다. 아무스가 신이 난 라벤더 색 눈을 깜박거리면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흥을 주체할 수 없어서 나오는 갈급한 움직임이었다.
“내 생각도 그래. 그럴 리가 없거든? 분명 그럴 리 없는데 흔적이 있었다니까? 굉장하지 않아?”
“상쇄반응?”
“바로 그거지!”
“정말이야?”
“그래! 진짜라니까!”
바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스의 가슴께에나 올 법한 작은 키였다.
그가 어둠이 내려앉은 방 내부를 정신없이 왔다갔다 움직이며 생각을 잇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돼. 용사들이 함정을 파놓은 거겠지.”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함정을 파놔?”
아무스가 픽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시간 감각이 기어코 어떻게 된 거야? 걔네는 꿈에도 모를 거야.”
“하지만 용사들에겐 증표가 없었어.”
바드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게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황실이 지하감옥에 붙잡아놓을 때까지만 해도 그딴 표식은 없었잖아.”
“야, 용사들한테 계속 붙어 다니던 여자애 한 명 있잖아. 벌써 잊어버렸어? 길러드가 말한 특이한 사람도 여자였어. 만약 둘이 동일인물이라면?”
바드가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아무스는 기대에 차서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드가 검은색 수정구슬 앞에 섰다. 그리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유리면 안의 무언가를 유심히 바라보듯 눈을 굴렸다. 한참 후에 바드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 여자애, 인간이라고 했나? 평범한 인간?”
“환영마법을 걸어놔서 진짜 모습은 몰라.”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네.”
바드가 마침내 인정했다.
“그렇지? 내가 이 얘길 해주고 싶어서 한참 전부터 기다렸다니까. 네가 방 밖으로 나오질 않아서 결국 이 누추한 방까지 직접 행차하신 거 아니겠냐.”
아무스가 으스대는 시늉을 하며 얘기했다. 바드는 반응 없이 고요했다. 이미 그의 작은 머리통 안에는 용사들과 함께 지내는 여자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바드는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하면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다. 아무스는 바드의 본성을 알았다.
“환영마법이 걸린 여자. 이거 말고 알아낸 건 없는 거야?”
바드가 위험한 호기심이 넘실거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아무스가 돌연 짜증 난 얼굴을 했다. 생각나는 얄미운 얼굴이 있었던 탓이다.
“이게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한 건진 모르겠는데, 황녀가 계속 방해해.”
전혀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다. 검은 수정구슬에 썩은 고기처럼 희고 거무스름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던 바드가 멈칫 굳었다.
“황녀?”
“응. 귀한 인력을 별 말 같지도 명분을 세워서 빼돌리고 있어.”
“그 멍청하고 철없는 공주님이?”
바드가 조롱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그 여잔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도 없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하는 짓이 이상하게 얄밉단 말이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어.”
바드가 한숨을 쉬며 수정구슬에 천을 씌웠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탓이다.
용사들의 위치를 확보해야 윤곽이라도 잡을 수 있을 텐데, 쥐도 새도 모르게 뮤나스에서 날라버린 후로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럼 죽여 버리든가.”
“안 말리는 거야?”
“내가 널? 말려도 네가 날 말리겠지.”
아무스는 말은 저렇게 하지만 효율과 순서를 고리타분할 정도로 우선시하는 남자다. 바드가 아무 생각 없이 사고를 치면 아무스는 그 사고까지 계산에 넣은 계획을 실행하곤 했다.
“하긴, 이제 와서 황제의 속을 뒤집어 놔봤자 좋을 거 하나 없겠지.”
아무스가 시무룩하게 눈을 끔뻑이며 턱을 괴었다. 바드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얘기했다.
“그럴까? 황제는 이미 제정신 아니잖아.”
“…….”
그의 말을 유심히 곱씹은 아무스가 어렴풋하게 질린 기색을 내비쳤다.
“너 설마 내가 황녀를 죽였으면 해서 그런 소리 하는 거야?”
“방해된다며. 난 빨리 그 여자앨 만나고 싶거든.”
“못 말리겠네. 아무리 간절해도 안 돼.”
아무스가 완강하게 말했다.
“황제가 아무리 반쯤 미쳤어도 제 자식에 대한 애정은 아직 놓지 않았어. 황녀가 갑자기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돼. 여태껏 공 들였는데, 또 오랫동안 기다려야 될 수도 있다고. 그건 싫지?”
바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쭉 기지개를 켰다.
“길러드도 그렇고, 다들 그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서 안달이 났나 봐.”
“달콤한 먹잇감이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그래도 어쩌겠어. 일단은 몸을 사려야지. 무시무시한 용사님이 그녀를 지키고 있으니.”
아무스가 과장되게 겁먹은 시늉을 하며 키득거렸다. 바드도 그의 말에 호응하듯 쇳소리 섞인 웃음을 흘렸다.
***
다른 팀의 시합이 벌어지는 동안, 아르모어의 발정기가 시작될 기미를 보였다.
발정기는 보통 일정한 시기에 시작하지만, 며칠씩 유동적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변화를 아주 면밀하게 관찰해야 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의문스러운 사건들은 잠시 접어두고, 마법가방에서 간이 제조도구들을 꺼내 물량이 떨어져가는 발정기억제제를 제조했다.
물론 용사들은 투기장에서 있었던 ‘야수 사건’이 우연인지 알아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약초를 다루자 애써 관심을 거둬주었다.
대부분의 수인족은 발정기가 다가오면 티가 난다. 눈 깜박임 하나까지 유혹적이도록, 세밀하게 짜인 정욕의 완성체가 되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르모어는 티가 나지 않았다. 시종일관 관능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양반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저게 발정기 때문에 저러는 건지 아닌지 무슨 수로 알겠는가.
나도 그럭저럭 잘 숨기는 편인데 아르모어는 아예 격이 달랐다.
‘억제제 숙성기간이 걱정인데…….’
덕분에 초조한 건 나였다. 약물을 완성하는 시기와 발정기 시기가 맞아떨어질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탓이다.
‘그냥 대놓고 물어보는 게 좋겠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었으므로 아르모어가 혼자 있는 시간을 노렸다. 용사들은 대부분 함께 붙어 있을 때가 많아서 기회는 좀체 나지 않았다. 결국 아르모어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기회가 났다.
곧 저녁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후다닥 그의 방으로 향했다. 마음이 급했던 게 탈이었다. 대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발 그 습관 좀 고치라던 아다르의 잔소리는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생각났다. 초조해지니 또 본래대로 행동하고 만 것이다.
하필이면 아르모어는 막 목욕을 끝낸 참이었다. 욕실에서 나오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왜 이 시간에 목욕을 했지…….’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 전이다.
나는 그가 의자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반쯤 누워 있는 걸 상상했다. 이런, 반 나신의 상태를 상상한 게 아니라.
나는 문에 등을 찰싹 붙인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안녕하세요, 아르모어.”
‘진정 이게 최선이니.’
나는 억지미소를 지었다. 아르모어는 검은색 샤워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허리끈이 금방이라도 풀어질 것처럼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 양옆으로 축 늘어지듯 벌어진 가운 안으로 설원처럼 새하얀 가슴팍이 들여다보였다.
근육이 제법 조밀하게 짜여있어서, 가슴 가운데에 세로로 긴 홈이 파여 있었다. 귀가 빨개지고 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조금 숙였다.
‘으, 쪽팔려. 급하게 찾아온 내 잘못이지.’
문을 열고 도로 나가고 싶은데 발이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나는 건조해져서 따갑게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참고 있었던 호흡을 최대한 소리 없이 내뱉었다. 무작정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도 창피하기는 마찬가지라 고개를 들었다.
아르모어가 나른하게 눈꺼풀을 깜박이며 시선을 맞췄다. 방에 고여 있던 아르모어의 체취와, 그의 체취 때문에 강제로 개방되고 있는 내 체취가 마시멜로를 얹은 코코아처럼 찐득하게 섞이고 있었다.
축축한 붉은색 눈을 보고 있자니 아랫배가 꽉 조이는 느낌이 든다. 슬며시 아랫입술을 짓씹는데, 아르모어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카카나.”
심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왜인지 이른 시간에 목욕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무슨 일이지?”
“아, 그. 발정기가 언제 시작되나 하고…….”
아르모어가 침묵했다. 그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최근 정신이 없어서 발정기억제제를 늦게 만들었거든요. 숙성시키는 기간 때문에, 혹시 시기를 못 맞출까 봐 걱정이 돼서…….”
근처에 선 아르모어가 느릿느릿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쌌다.
그의 얼굴이 커피에 올라가 있는 크림 거품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얇은 입술이 변화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미미하게 휘었지만, 나는 그게 아르모어가 지을 수 있는 최대의 미소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걱정이 되었나?”
나는 눈을 깜박였다.
‘걱정인가?’
내내 초조하긴 했다.
아누비르 용병 길드에서 혼자 발정기를 맞았던 아르모어가 계속 생각났다. 검은 굴 같은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혼자 앓았을 그가 잊을만 하면 생각나서 마음을 괴롭게 했다. 억제제를 개발하기 전의 나도 그랬기에 남 일 같지 않았다.
같은 수인족이기에 몸이 닳고 피가 마르는 느낌을 잘 알았다. 그래서 이번엔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랐다. 적절한 시기에, 알맞은 처방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르모어의 정확한 시기를 미리 알아야만 했다.
“그대의 대담한 행동엔 적응이 되지 않는군.”
아르모어가 뜨거운 날숨을 토하며 말했다.
“대담한 행동이요?”
“그대는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문을 열었지.”
“…….”
“내가 다 벗고 있었으면 어쩔 작정이었지?”
그가 고개를 숙였다.
물이 다 마르지 않은 흑발이 덩어리째 가슴팍으로 쏟아졌다. 자연히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앞섶이 벌어진 가운이 더 흘러내릴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깊숙한 부분에 숨겨져 있던 흰 피부와 복근이 은밀하게 내비쳤다.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라서 눈을 감았다. 아르모어가 달콤한 과일을 보고 입맛을 다시듯, 혀로 윗입술을 쓸어내며 말을 이었다.
“이토록,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마, 마음이 급해서…….”
“저번에도 돌연 문을 열고 들어왔었지. 발정기를 맞은 사내의 방으로.”
그가 거의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내 팔뚝을 쥐었다. 그리고 팔꿈치에서 손바닥까지 건조하고 뜨거운 손가락을 천천히 미끄러트렸다.
“읏.”
질끈 눈을 감으며 어깨를 움츠리자, 그의 손길이 멈추었다.
대신 섬세한 공예품을 올려놓듯, 제 손바닥에 내 손을 얹고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힘을 주어 쥐고 있진 않았다. 그저 내 손을 얹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스르르 끌려갔다.
그의 걸음은 회랑을 거니는 임금처럼 고요하고 여유로웠다. 어깨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샤워가운은 흐트러지다 못해 퇴폐적이기까지 했지만, 거의 흔들림이 없었다. 물을 먹고 무겁게 떨어져 있는 곧은 흑발도 마찬가지였다.
손짓 한 번, 걸음 한 번에 위압적인 고귀함이 녹아있다. 그 야릇한 간극이 입 안을 마르게 했다.
‘아르모어는 용 수인족의 왕이라고 했지.’
지하 감옥에 갇히고 신하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몰락한 왕의 분위기만큼은 확실하다.
‘몰락한 왕이라니.’
나는 지레 찔려서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화를 낼 거야.’
역사의 뒤편으로 영영 사라져버린, 어둑하고 권태로운 왕의 품위가 환영처럼 남아있는 남자.
아르모어가 나를 침대 앞에 세웠다. 나는 멀뚱하게 섰다.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가볍게 눌렀다. 손을 얹은 건지, 아니면 누르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 만큼 미약한 힘이었으나 그의 의지가 선명하게 전해졌다.
나는 순순히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대가 더는 어수룩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내 친히 일러주어야 할까.”
아르모어가 잠잠한 투로 말했다. 나는 멍하니 앉은 채 되물었다.
“네?”
“또 당황하는군.”
“뭐, 뭘 일러줘요?”
“발정기 사내의 위험성이겠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잘 알고 있어요.”
아르모어의 눈가가 살짝 접혔다. 그의 눈이 저렇게 순하게 웃는 건 처음 본다.
“본인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지 못한 얼굴이로군.”
“모르겠는 건 아르모어의 말이에요. 저는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구요.”
“무슨 말을 했지?”
“발정기 수인족의 위험성을 모르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그래, 모르지 않는데도.”
“…….”
“내 방에 들어왔다 이건가.”
그건 마음이 너무 급해서…….
변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 행동이 경솔했다는 걸 반증할 뿐이다.
넌 사람 대하는 게 너무 서투르다고 용사들이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실수를 깨닫는 순간 이렇게 등골이 싸해지는 경험은 여태껏 없었다.
아르모어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귀 뒤편을 간질이는 느낌에 숨을 죽였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발정기의 위험을 아는데, 거리낌 없이 내 방을 찾았다니. 참으로 오해를 부르는 말이 아닌가.”
“윽…….”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그대가 부디 알려주었으면 좋겠군.”
심장이 어찌나 세게 뛰는지, 핏줄이 심장박동에 맞춰 쾅쾅 요동쳤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말을 쥐어짜내었다.
“아, 아르모어는 아직 발정기가 아니잖아요.”
“그대라면 발정기 전 증상에 대해 아리라 여기는데.”
“수인족마다 다르잖아요. 아르모어는 티가 거의 나지 않아서 없는 건가 생각했어요.”
아무리 숨긴다지만, 발정기도 그렇고 발정기 전 증상도 그렇고 숨기는 덴 한계가 있다. 그러나 아르모어는 내 면밀한 관찰로도 어느 과도기에 머물러 있는지 가려낼 수가 없었다.
‘기회다.’
이미 이렇게 된 거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다음 발정기 땐 더 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엎질러진 물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면 다음에 쏟아질 물이라도 예방하는 게 낫다.
“아르모어는 전 증상이 뭐예요?”
아르모어가 침묵했다.
“저는 몸에 힘이 빠지고 무기력해져요. 힘을 비축하려는 듯이 말이에요.”
혹시 민망한가 싶어서 내 얘기도 해보았지만, 아르모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르모어?”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욕정이 생긴다.”
“그건 발정기의 모든 수인족이 그렇잖아요.”
“왕성해진 성욕을 혼자 처리하는 게 귀찮아질 수준까지 날 몰아붙이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르모어가 남 얘기를 하듯이 담백하게 읊었다.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아 갈증을 느낀다. 발정기가 시작될 때쯤엔, 이성의 체액이란 체액은 모조리 마시고 싶어져.”
그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답이 되었나?”
내 안의 모든 단어가 증발해 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굉장한 말을 한 아르모어만 여유로울 뿐이다. 머릿속이 백지가 돼서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음…….”
나는 도륵도륵 눈을 굴렸다. 지뢰를 제대로 밟은 느낌이다.
‘혹시 나 지금 X된 건가?’
사실 아르모어의 시종일관 변함이 없는, 저 나른한 얼굴에 속아 쉽게 여긴 탓도 있었다. 그라면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발정기를 맞은 지 사흘이 되었던 때마저 어느 순간까지는 수인족 여성의 체취를 참아낸 남자가 아닌가.
그런 아르모어라서 믿을 수 있었다. 매사에 초연하고, 초월적인 분위기를 가진 남자여서.
‘그런데 뭐? 욕정을 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저 얼굴 어디에 초조함과 갈급함이 담겨 있단 말인가. 지금도 내게 조곤조곤 말을 걸고 있지 않은가. 성욕은커녕 여성의 벗은 몸을 봐도 무료한 표정을 지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정말이지 속은 기분이다.
그새 손바닥에 엷게 땀이 배어 나왔다. 침대 시트에 문질러 닦으려는데, 아르모어가 내 손목을 그러쥐어 끌어당겼다. 내가 당황해서 숨만 몰아쉬고 있는 사이, 눈을 반쯤 내리뜬 그가 날 똑바로 바라본 채 혀로 손바닥을 쭉 핥아 올렸다.
“히익.”
진심으로 놀라서 손을 확 빼냈다. 다행히 그가 순순히 놓아주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방문을 확인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 보였다. 게다가 아르모어는 이상하게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힘이 있어서, 함부로 움직이는 데도 눈치가 보였다.
“무, 무무, 무슨 짓을…….”
“그대는 내 식욕을 자극한다.”
“시, 식욕이요?”
새빨갛고 붉은 혀가 그의 윗입술 언저리를 천천히 핥으며 지나갔다.
그것이 성욕으로 가득 차면 나오는 아르모어의 습관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입술을 핥는 아르모어를 최근 여러 번 봤다.
두피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그대에게선 몽글거리는, 우유 냄새가 난다.”
“…….”
“땀에도 그 향이 배어있어 궁금해지게 만들지. 과연 내가 생각하는 모든 곳에, 그 향이 배어있을까 하고.”
별안간 그가 고개를 모로 천천히 기울였다.
“식욕이 아니라 다소 포악한 정욕일지도 모르겠군.”
이젠 확신이 든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지막 이성을 그러모으듯, 아르모어가 눈을 천천히 깜박거리고 있었다. 이성이 희박한 발정기의 수인족 남자와 함께 있다는 자각이 들자마자 초조해졌다.
“아, 아, 아르모어. 저는 이제 방으로 도, 도도,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발정기가 고, 곧 시작될 것 같으니까. 약도 준비해야 하고 또…….”
우수수 쏟아지는 내 말을 잠자고 듣던 아르모어가, 길게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되, 된 건가? 물러가는 건가?’
“그대는, 날 너무 곤란하게 만들어.”
“죄송해요…….”
시뻘게진 얼굴로 반성하고 있자, 문득 뜨거운 것이 내 입술을 스윽 훑었다. 나는 망부석이 되어 아르모어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찡그린 채, 굉장한 힘으로 이불보를 그러쥐고 있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뒤로 물러서자, 아르모어도 제 입을 가리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숨이 조금 거칠어졌지만, 여전히 뜨겁게 달아올라 초조한 기색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저 석상처럼 고요할 뿐이다.
‘아르모어의 표정은 이제 믿지 말아야겠다.’
굳게 다짐하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마침 침입자가 왔으니, 다행인 일이다.”
‘침입자?’
다른 용사들을 말하는 걸까.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르모어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허공에 있는 무언가를 홱 잡아채 방 안으로 끌어왔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 들어온 괴한보다, 아르모어의 괴력에 깜짝 놀란 탓이다. 한 손으로 사람을 들어서 안으로 패대기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정도면 할릭 뺨치는 수준 아닌가.’
나는 괴한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생긴 남성이었다.
“이익, 이거 놔!”
괴한이 발버둥을 치자 아르모어의 미간에 설핏 주름이 잡혔다.
“시끄럽군.”
“아아아악!”
남자가 돌연 비명을 지르면서 절규했다.
파지지직!
남자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남자가 감전된 사람처럼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르모어의 마나엔 전류가 흐르지!’
아르모어가 침을 질질 흘리는 남자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물에서 갓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남자가 드문드문 몸을 퍼덕거리며 눈을 뒤집었다.
이래서야 그를 아다르가 발견하지 않은 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그였다면 적어도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가 줬을 텐데, 이건 죽느니만 못했기 때문이다.
문득 스노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을 고르라면, 전 아르모어를 고를 거예요. 그에겐 변명도, 감정적 호소도, 설득도 먹히지 않거든요.]
그 대화가 왜 지금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식은땀이 마구 흘러내렸다. 아르모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얼굴로 손을 들고 있었다.
죽이려고 한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와 괴한의 앞을 막아섰다.
“자, 잠깐만요 아르모어. 무슨 목적으로 침입했는지 알아내야 하잖아요.”
아르모어가 불그스름한 눈으로 날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들었던 손을 밑으로 내렸다.
‘빨리 좀 와라!’
나는 다른 용사들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아르모어와 함께 있는 탓인가, 이 정도 소란에도 아직 방을 찾을 기색이 없다.
“혹시, 속내를 알아낼 수 있는 정령이 없을까요? 자백제가 지금 제 방에 있어서요.”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아르모어는 이 남자를 죽일 거다. 그는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지금은 부르지 못한다.”
“왜요? 정령, 아니 정백들이 응답하지 않나요?”
“악한 목적으로 부르면 거절당하기 쉬워지지.”
아르모어가 느른하게 눈꺼풀을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감정이 깃들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지금 나는 저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방해를 받고 말았으니.”
아르모어가 진정으로 아쉽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마나로 감전시키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불편하기 짝이 없군.”
“그, 그럼 제가 아다르를 부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아르모어가 대답하는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용사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널브러진 괴한을 바라보았다. 아다르는 괴한에게, 첼러스는 내게 곧장 뛰어왔다. 그가 내 몸 구석구석을 눈으로 훑은 뒤 정중하게 물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없어.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저 괴한이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는데.”
“죄송합니다. 다 같이 마을에 무기를 구하러 갔었습니다.”
날붙이의 이가 또 나갔었나 보다.
아다르도 그렇고, 첼러스도 그렇고 허구한 날 무기를 망가트린다. 할릭은 이렇다 할 무기가 없지만, 험하게 써서 붉은색 장갑이 매번 찢어지곤 했다.
“이거 놔!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는 거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가 발악했다. 그러나 아다르가 발로 상체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팔다리만 추하게 바르작거렸다.
“네가 아무 짓도 안 했으면 저 매사에 무관심한 양반이 끌고 들어왔을 리 없지. 그렇지, 아르모어?”
아르모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옷을 갈아입으러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 난 그저 저 여자의 방이 이쪽인가 싶어서…….”
“흐응? 여자가 목적이었다?”
아다르의 얼굴에 섬뜩한 빛이 서리자, 남자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오, 오해하지 마! 이상한 목적으로 찾은 건 아니야. 여자가 그나마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아서 그런 거라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싶으셨을까?”
“너희 투기대회의 우승팀이 여태 어떻게 되었는지 소문도 듣지 못한 거냐?”
“말장난 하지 말지?”
“말장난이 아니다!”
남자가 씩씩거리며 악을 썼다.
“지금 투기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외부인이거나, 멍청한 마을 검투사들뿐이야. 눈치 좋은 놈들은 이미 몇 해 전부터 마을을 떠나고 있다고!”
뜬금없는 말이었다. 무슨 꿍꿍이속으로 저런 말을 하나 싶어서 유심히 살폈지만, 워낙 막무가내여서 별다른 음험한 속내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 무식하면 음모도 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유를 설명해달란 말이야.”
아다르가 괴한의 상체를 밟은 다리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 하면서 호기심이나 키우지 말고.”
“끄, 윽! 투기대회의 우승팀은 전부 머리가 돌아버려!”
남자가 간신히 고통을 참으며 꽥 소리쳤다.
“그래서 다들 꺼리는 거야, 음모가 있을 거라고!”
“고작 그걸로?”
“이상하게 생각한 적 없나? 같은 팀끼리 싸움을 붙여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게 말이다!”
“…….”
“확실히…….”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던 할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 박 터지게 싸울수록 돈이 되는 건 주최측인데, 이상하잖아.”
“주최측은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그렇지!”
남자가 냉큼 대답했다.
“여태 페어리블러드를 노리고 우승한 팀은 아무리 돈독한 사이여도 끝내 광인이 되어 서로를 잔인하게 죽였으니까!”
할릭이 미간을 그러모았다.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야. 우승팀은 정신이 미쳐버린다니까! 아까 말했잖아!”
아다르가 참지 못하고 픽 콧방귀를 뀌었다.
괴한의 핏발 선 눈이 책망하듯 아다르를 노려보았다. 아다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그런 추측성 발언을 하기 위해 목숨 걸고 왔다는 소린 아니겠지? 좀 더 그럴듯하게 얘기해보지 그래.”
“우승팀은 마지막 승부를 겨루기 전에 주최측으로부터 만찬 초대를 받는다는 걸 알고 있나?”
아다르의 눈썹이 슥 올라갔다.
남자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파티만 다녀오면 다들 이상해져. 정말이야!”
얘기가 이쯤까지 이어지자 아다르도 수상한 냄새를 맡았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기회가 왔음을 깨달은 남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서 노련하거나 눈치 빠른 검투사들은 이미 냄새를 맡고 하나둘씩 마을을 빠져나가고 있어.”
“가장 중요한 점. 너는 이 얘길 왜 우리에게 하는 거지? 여자의 방은 왜 찾은 거고?”
남자가 불현듯 바다에 침몰하는 배처럼 무겁고 버거운 숨을 내쉬었다. 진하게 내려와 있는 그의 눈 밑 다크서클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대회를 봤어. 난 너희처럼 강한 놈들을 본 적이 없어. 괴물 수준이었지.”
“…….”
“내겐 작년에 실종된 동생이 있어. 그럴 녀석이 아닌데,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꿉친구를 잔인하게 도륙하고 우승자가 됐다.”
흠, 침음을 삼킨 할릭이 팔짱을 꼈다. 나는 근처 의자에 앉아 남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보았다.
“그리고 페어리블러드를 받은 직후에 사라져버렸어. 감쪽같이!”
남자의 핏발 선 눈에 축축하게 눈물이 맺혔다.
“역대 모든 우승자들이 그랬다! 페어리블러드를 받고 사라졌어!”
“그래서?”
아다르가 다리를 치웠다. 남자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주머니에서 묵직한 돈 주머니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마을엔 의뢰를 맡길 만한 용병길드가 없어. 도와준다는 녀석에게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빚을 갚지 못해서 나는 지금 마을에 묶인 몸이야.”
“…….”
“너희도 부를 쌓고자 이 마을에 왔겠지? 그러면 주최측의 정보를 캐내보는 건 어때? 아주 작은 정보라도 좋아. 제발 부탁이다. 이젠 나도 더 이상 부탁할 곳이 없어.”
할릭이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돈주머니를 주워들어 위로 가볍게 던졌다. 제법 묵직했지만 큰돈은 아니었다. 저 돈이면 용병길드가 있더라도 의뢰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투기대회의 주최측과 연루되었다면, 적의 배후엔 귀족이 있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의뢰 내용은?”
할릭이 능숙한 용병의 얼굴로 물었다.
“동생을 찾아줘.”
남자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종이 두 장을 꺼냈다. 초상화와 지도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빚을 다 갚아. 판자촌에 집을 구해놨어. 동생을 찾으면 그곳으로 데리고 와줘.”
그가 바닥에 바짝 붙어 절을 했다. 덜덜 떨리는 몸에서 동생을 향한 마지막 미련과 희망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할릭이 조용히 돈 주머니를 챙겼다. 승낙의 표시였다.
***
“괜찮으십니까?”
첼러스가 물었다.
심심해서 땅바닥을 신발코로 파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선한 얼굴로 날 걱정스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가?”
“이곳은 유흥가이니, 혹 불쾌하시진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아,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살폈다.
붉은 등이 어지러이 움직이는 가게와 술집, 그리고 도박장이 즐비한 곳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호화롭고 화려한 동시에, 추악하고 지저분한 거리.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이런 데는 익숙해.”
남자가 우리에게 의뢰를 하고 벌써 며칠이 흘렀다.
우리는 다행히 추첨을 통해 부전승하는 팀이 되었다. 덕분에 정보를 알아볼 만한 여유가 생겼다.
알아본 것부터 간단히 말하자면, 남자의 말이 아주 헛소리는 아니었다. 동생이 참가했다던 작년 투기대회 일은 괴담처럼 길바닥을 떠돌고 있었다. 팀원 전부가 마을에서 소문난 소꿉친구였던 탓이다.
양지에선 언제나 그랬듯, 돈에 눈이 먼 우승자의 소행으로 소문이 났다. 그러나 음지 사람들은 그게 주최측이 흘린 소문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불똥이 튈까 쉬쉬하는 분위기긴 했지만 말이다.
‘벌써 나흘째네.’
유흥가는 항상 사람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보니, 정보가 고이기 쉽다는 아다르의 의견을 따라 우리는 해가 질 때마다 이곳을 찾고 있었다. 할릭은 술집에, 스노아는 도박장에, 아르모어는 창가에, 그리고 아다르는 뒷골목에.
나는 첼러스와 함께 거리에 남은 참이었다.
‘오늘은 쓸 만한 정보가 나오면 좋겠다.’
용사들은 이런 곳에 오지 말고 야시장이나 구경 가라고 했지만 나만 쏙 빠져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출출하네.”
“식당으로 갈까요?”
“아니, 간단하게 배 채우고 싶어. 저거 먹을까?”
나는 첼러스의 손을 잡고 음식마차가 죽 늘어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흥가이긴 하지만 야시장처럼 물건이나 음식을 파는 마차가 군데군데 서 있었다.
“야아, 아가씨! 옆에 남편인가? 번듯하니 힘 꽤나 쓰게 생긴 남편이구만!”
특히 맛있어 보이는 과일 꼬치 마차로 걸음을 옮기는데, 상인이 손짓하며 우리를 불렀다. 저렇게 촐랑대는 상인의 마차에서 음식을 먹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여기 있는 음식마차 중에서 그가 파는 과일이 제일 싱싱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닭꼬치도 팔고 있었다. 꿀꺽 군침을 삼켰다. 꼬치에 닭고기만 꽂혀있는 게 아니라 야채도 함께 꽂혀 있었다. 매콤해 보이는 소스가 자르르 윤기를 뽐냈다.
‘먹고 싶다.’
나는 닭꼬치를 쳐다보다 말고 첼러스에게 물었다.
“첼러스는?”
“저는 안 먹…….”
“에헤이, 형씨. 음식은 같이 먹어줘야 더 맛이 나는 걸 모르시나! 자자, 사양 말고 얼른 골라 봐요. 응?”
“아니, 저는 먹지 않겠습니다.”
“거참, 단호한 분이시네.”
상인이 혀를 차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이거 아무한테나 주는 거 아닌데, 형씨한테만 오늘 특별히 쏠게요! 오늘 첫 손님이거든. 기분이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마차 밑에 숨겨진 공간에서 거대한 닭꼬치를 꺼냈다. 세상에 저렇게 큰 닭이 있나 싶은 크기였다. 큼지막하게 잘린 야채도 종류별로 꼼꼼하게 꽂혀 있었다. 나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그 유명한 타조 다리로 만든 꼬치입니다요! 사시면 후회 안 할 겁니다!”
타조 다리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시선은 타조 다리만큼 큼지막하게 자른 야채에 꽂혀 있었다. 첼러스도 있겠다, 평소엔 돈 아까워서 사지 못했던 닭꼬치를 살 절호의 기회였다.
‘왜 닭꼬치 소스는 닭꼬치에만 발라 먹는 건지 몰라!’
이상한 생각을 하며 첼러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거 사서 같이 먹자. 응?’
호소력 짙은 눈으로 한참을 올려다보니, 첼러스가 한숨을 쉬며 꼬치를 받아들었다. 나는 팁을 두둑하게 챙겨서 상인에게 돈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첼러스를 냉큼 벤치로 끌어왔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타조꼬치와 첼러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내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한참 동안 생각하는 듯하더니, 맨 위에 꽂혀 있던 타조다리 고기를 입으로 물어서 뽑았다.
나는 꼬치를 들고 있는 첼러스의 손을 가져와서 꽂혀 있던 야채를 이로 물어서 뽑았다. 환상적인 맛이 났다.
‘끄, 끝내준다.’
숯불에 충분히 구운 대파가 따끈하게 뭉개지며 씹혔다. 야채 요리엔 이런 소스를 사용하는 게 드물어서 처음 겪는 맛이었다. 언젠가 아다르를 졸라 비슷하게 만들어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한참을 씹어 꿀떡 삼킨 뒤 꼬치를 바라보았다. 아직 고기가 남아있었다. 강렬한 시선으로 첼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귀엽습니다, 카카나.”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가 순순히 고기를 뺐다. 그리고 천천히 씹어 삼켰다.
‘얜 무슨 길거리 음식도 이렇게 우아하게 먹냐.’
맛있다고 온갖 콧소리를 다 내며 먹었던 스스로가 추잡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민망함을 느끼며, 첼러스를 따라 조신하게 우물우물 씹었다. 양념에 오랫동안 재워두었는지, 씹자마자 매콤한 국물과 특유의 달달한 즙이 쭉 나왔다.
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겁지겁 먹었다. 입가와 턱에 양념이 엉망으로 묻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홍등가에서 거룩한 인간은 첼러스 한 명만으로 충분하다. 암, 그렇고말고.
‘이렇게 맛있는 줄 알았으면, 고기를 버려도 매일 사 먹는 건데.’
후회하며 야채를 먹는 동안, 첼러스가 손수건으로 내 입가를 닦아주었다.
손수건은 아르모어만 들고 다녔었는데, 어느 순간 용사들이 모두 손수건을 들고 다녔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들은 안 쓰고 내게 묻은 온갖 이물질을 닦아주는 데 사용했다.
나는 그들이 닦아주기 전까진 내가 그렇게 더럽게 하고 다니는 줄 몰랐다. 약물 연구를 하느라 뭐가 묻는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천히 드십시오. 체하겠습니다.”
“고기도 맛있을까?”
“예?”
소스가 맛있으니, 고기도 맛있어 보였다. 내 반짝이는 눈을 본 그가 난감한 낯을 했다.
“버섯처럼 쫄깃한 것도 있다던데, 먹어보고 싶어.”
“카카나,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
나는 첼러스가 말리기도 전에 고기를 물어서 꼬치에서 빼냈다. 처음엔 제법 괜찮았다. 소스의 힘이었다. 그러나 아주 찰나였을 뿐이다.
‘내, 냄새가…….’
동물 특유의 누린내가 났다. 입술과 앞니로 살짝 물고 있는 고기를 뱉지도 못하고 얼어버렸다. 생리적인 거부감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카카나?”
“으…….”
내 어리석은 과오를 후회하는 눈으로 그를 처량하게 올려다보았다. 첼러스가 이번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이 웃기냐고 묻고 싶지만, 입에 재갈 아닌 재갈이 물려 있다.
‘으윽, 소름끼쳐.’
이런 징그러운 음식을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다.
‘어쩌지. 씹지 말고 물이랑 같이 삼켜버릴까? 하지만 너무 큰데…….’
눈을 감고 온갖 방법을 모색하는데, 첼러스가 불현듯 고개를 숙였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거리가 너무 가깝다.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물리자, 첼러스의 손이 퇴로를 막았다. 그가 그렇게 행동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놀라서 파르륵 떠는 나를 그가 능숙하게 끌어안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허리를 옭아맨다. 그것만으로 꼼짝도 할 수 없어졌다.
정갈하게 생긴 입술이 지체하지 않고 내 입에 물려 있던 타조고기를 가져갔다. 너무 놀라서 턱에 힘이 들어갔다. 탁, 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타조고기가 반으로 잘렸다. 덕분에 반은 첼러스의 입으로, 반은 내 혀 위로 굴러 떨어졌다.
첼러스와 입술 뽀뽀 비슷한 것을 했다는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혀 위에서 뒹굴거리는 고깃덩어리에 소름이 올랐다.
농담이 아니고 사람 살덩어리가 입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뱉어버리고 싶은데 첼러스가 쳐다보고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발을 구르자, 첼러스가 또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이번엔 그도 기다렸다. 거절할 말미를 주겠다는 듯이.
행동력이 빠른 그가 말미를 주었다는 건, 그만큼 대담한 행동을 하겠다는 일종의 신호다. 그걸 나도 알았지만 입 안의 고기가 더 문제였다.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첼러스가 허리를 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날 끌어당겼다. 훅 끌려들어가자, 그에게서 다소 무거운 머스크향이 났다.
‘뭐, 뭘 하려는 거지?’
반동으로 고개가 자연스레 뒤로 빠졌다. 첼러스가 내 뒷목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받치며, 고개를 비틀었다.
눈이 크게 뜨인 동시에, 입술이 맞붙었다. 소스의 기름기가 남아있는 입술이 미끄럽게 비벼진다. 질끈 눈을 감는 순간, 뜨거운 무언가가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읍.”
망설임 없이 혀를 깊숙하게 비집어 넣은 그가, 내 혀 위의 고깃덩어리를 싹 회수해갔다. 그리고 예의 멀끔하고 고결한 낯으로 고기를 씹어 삼켰다.
나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입 안에 난폭하게 혀를 쑤셔 넣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깨끗한 얼굴이었다.
별안간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가 기도를 드리는 성직자처럼 금욕적이고 경건한 얼굴로 자기 입술에 묻은―아마 내 입술에서 옮겨갔을― 양념을 혀로 핥아 먹었기 때문이다. 그냥 음식을 먹고 있을 뿐인데 굉장히 배덕한 장면을 본 것 같았다.
그가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내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수건으로 입술에 묻은 양념을 닦아주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겪어보니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무, 무슨!”
“죄송합니다. 불쾌하셨습니까?”
그가 빠르게 사과했다.
“불쾌하진 않았지만! 그치만!”
아주 못된 짓을 한 기분이다.
왠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첼러스와 그런 짓을 했다니 충격이 컸다. 더럽혀선 안 되는 눈밭에 발자국을 찍은 기분이지 않은가.
왜 죄를 지은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게 다 첼러스의 저 선한 눈 때문이었다.
“불공평해.”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내가 첼러스한테 못된 짓을 한 것 같잖아.”
햇살이 반짝이는 것 같은, 첼러스의 호수빛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왜 그렇게 됩니까?”
“너는 뭐랄까, 성지 같단 말이야. 아무도 건드려선 안 되는.”
“함부로 건드리게 두는 성격이 아니긴 합니다.”
나는 눈을 앙칼지게 치떴다.
“그런데 나한텐 왜 그래?”
“카카나라면 괜찮습니다.”
그가 내 손등에 정중하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영애에게 손등키스를 하는, 명예로운 기사의 표본 그대로의 모습이다.
“당신은, 제가 유일하게 허락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조금쯤은 그 특별함을 즐기셔도 됩니다.”
“너, 너너, 너는! 말은 항상 수동적인 것처럼 하면서 행동하는 건…….”
침대에선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말할 뻔했다가, 간신히 집어삼켰다.
‘크, 큰일 날 뻔했다.’
경솔하게 말을 싸지르는 게 내 주특기라지만, 첼러스에게 잠자리를 운운하다니 그건 신성모독이다. 나는 홀로 씩씩거렸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첼러스가 꼬치를 걱정했다.
“음식이 전부 식겠습니다.”
그가 고기를 빼서 먹은 뒤 야채가 남은 꼬치를 내밀었다.
꼬치 따위야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만, 눈앞에 들이미는 걸 거부할 순 없어서 받아먹었다. 그가 열심히 먹는 날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냥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 야채를 입에 문 순간,
“어?”
갑자기 풍경이 바뀌었다.
***
‘운이 좋군.’
의뢰를 받자마자 단둘이 있는 표적을 발견했다. 게다가 둘은 사이좋게 꼬치를 나눠 먹고 있었다.
‘경계심이 저토록 없으니, 이번 일은 쉽겠어.’
그는 바로 강제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범위지정이어서 여자만 빼내 올 순 없었지만, 남자 한 명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글라투스는 저도 스크롤을 찢어 지정 장소로 이동한 뒤, 설설 기어서 벼랑 밑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여자와, 차분한 분위기의 남자가 서 있었다.
‘좋아, 이제……. 헉!’
차근차근 계획을 되짚어보던 글라투스는 기겁을 하고 몸을 뒤로 물렸다. 고개를 내밀자마자 남자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벼랑으로 떨어질 뻔했을 정도다.
‘정수리에 제3의 눈이라도 달린 거야, 뭐야!’
제가 여기 있는 걸 무슨 수로 바로 알았단 말인가.
‘우, 우연이겠지.’
안색이 창백해진 글라투스가 애써 위로해보지만, 남자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호랑이굴에 떨어진 게 저 남자가 아니라 꼭 자기 같았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팔뚝에 솜털이 곤두섰다.
‘아씨, 의뢰 잘못 받은 거 아냐? 돈 좀 벌겠다고 이 마을까지 먼 거리를 달려왔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 물릴 수는 없었다. 고객님이 평민도 아니고 돈 많은 상인도 아니고 무려 귀족이었다.
‘저건 위험해. 빨리 해치워야 돼.’
이 바닥에서 여러 해 굴러본 글라투스의 머릿속에 적색경보가 울렸다. 그가 질린 얼굴로 뒤에 있던 일행에게 다급히 손짓했다.
“빨리 스크롤을 찢어. 빨리!”
글라투스의 채근에 일행이 허둥지둥 스크롤을 찢었다.
허공에 바위를 소환하는 단순한 마법이었다. 그래도 나름 값이 비쌌다. 소환되는 바위가 집채만 했기 때문이다.
표적의 머리 위에 거대한 바위가 소환되자, 일대의 달빛을 모두 가려 검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흔들림이 없는 눈으로 하늘에 소환된 바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점점 강해졌다.
글라투스가 습관적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너무 침착해. 너무 침착하다고…….’
저런 바위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인물은 여태 기사단장 정도밖에 못 봤다.
글라투스가 습관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일단 여자까지 죽게 할 순 없었으므로, 숲에 숨어있는 동료에게 신호를 보냈다. 바위가 떨어지기 전에 여자를 빼내오기 위함이었다.
마침 남자의 시선은 바위에 똑바로 고정되어 있었다. 바위가 완전히 소환되었다. 글라투스는 손에 땀을 쥐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허리춤에 달린 검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글라투스가 얼굴을 구겼다.
‘웬 검? 범위 밖으로 도망치는 게 그나마 가능성이 있을 텐데?’
기절초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여자뿐이다.
바위가 아래로 낙하했다. 도망치기엔 늦었다. 그제야 안심이 된 글라투스가 애써 비아냥거렸다.
“저런 검 한 자루로 대체 뭘 하려는…….”
말이 중간에 끊겼다. 날카로운 굉음이 대지를 일깨운 탓이다.
까가가가각―!
검과 무언가가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글라투스는 놀라서 벼랑 바깥으로 상체를 반 이상 내밀었다. 뒤에 대기하고 있던 일행 또한 충격 받고 입을 벌렸다.
쿠웅―!
정확히 반으로 잘린 바위가 땅으로 떨어졌다. 쪼개진 호두 같은 모양새였다. 남자는 오른손에 롱소드를, 그리고 왼손엔 밧줄을 쥐고 있었다. 글라투스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밧줄? 설마!’
그가 밧줄을 따라 급하게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여자를 따로 빼돌리기로 했던 동료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동료의 밧줄을, 남자가 바위를 반으로 가르는 동시에 잡아챈 것이다.
‘저게 가능해?’
제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한 글라투스가 두 주먹으로 눈두덩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순간, 앞에 무언가가 보였다. 사람의 다리다.
글라투스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코앞에 있었다.
“으아아아악!”
그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글라투스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했다. 그건 뒤에 서 있던 일행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대체……!’
글라투스는 일찍이 기고 난다는 사람을 여럿 듣고, 보고, 만났다. 그러나 두 다리로 벼랑을 한 번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소린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남자가 그걸 해냈다. 당최 이 남자가 사람이 맞긴 한 건지 의심이 들었다.
“자, 잠깐만!”
남자의 검엔 망설임이 없었다. 오로지 단죄와, 냉정함과, 차갑고 고요한 분노만이 있을 뿐이다. 남자가 자비 없이 글라투스의 목을 뎅겅 잘라내려는 찰나.
“으악!”
비명소리가 울렸다. 여자의 음성이었다. 세계가 멸망해도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남자의 검이 기적적으로 멈추었다.
***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텔레포트 되더니 머리 위로 바위가 떨어졌다. 첼러스가 그걸 검으로 갈라냈다. 거기까지 이해하는 데도 한참이 걸렸는데, 이번엔 인질극이었다.
이곳으로 대거 텔레포트 한 괴한들 중 한 명이 내 목에 단도를 들이밀며 엄포를 놓았다.
“멈춰라!”
‘대체 뭔데, 이 상황.’
“검을 거두지 않으면 여자를 죽이겠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첼러스가 벼랑 위에 서서 어떤 남자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저놈부터 노린 걸 보면 그가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이곳에 갑자기 나타난 괴한만 아니었으면 순조로웠을 터다.첼러스가 검을 밑으로 늘어뜨리며 서늘하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투기대회 이후로 첼러스는 특히 내 앞에서 검을 다루는 걸 조심하고 있었다. 깊은 눈망울이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하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역시 투기대회보단 이런 게 훨씬 재미있단 말이야. 일부러 구경하러 오길 잘했어.”
그때, 긴장이 팽팽하게 당겨진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능글거리고 거만한 어조였다.
몹시 탐욕스럽게 생긴 귀족이었다. 얼마나 뚱뚱한지 옷이 그의 몸을 담고 있는 걸 버거워하고 있었다. 잘 씻지도 않는 탓에 머리는 떡이 져 있었다.
“둘이 애틋한 사이인가? 응? 내가 또 이런 사랑 얘기엔 마음이 쉽게 약해져서 말이야.”
남자가 개소리를 지껄이며 다가왔다. 옷에 보석들을 너무 많이 달고 있어서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깐 걸은 게 숨이 찬지 헉헉거린 남자가 나를 야릇한 눈으로 훑었다.
“별 거 없는 계집년 같은데, 야수를 길들인단 말이지.”
“…….”
“에잉, 쯧쯧.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숨기지 그랬느냐. 그러지 않으니 이리 화를 당하는 것이야.”ㄴ
남자가 동그랗게 말린 콧수염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위에서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느냐? 투기대회를 거하게 말아먹었으니, 가만둘 리가 없지. 한 명쯤 객사해도 대회를 진행하는 덴 아무런 문제가 없거든.”
“…….”
“하지만 말이다. 내겐 네 죽음이 너무 아까운 게 아니겠느냐. 네년의 쓸모를 찾아냈거든. 어떠냐?”
귀족이 비열한 눈을 반짝이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 말을 잘 따르면 저 윗분들도 용서해주실 모양인 듯하다. 그러니 얌전히 굴면 네 동료들은 건드리지 않으마.”
나는 대답하지 않고 눈만 굴렸다. 뭐라고 얘길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흘끗 첼러스를 살피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첼러스는 동상처럼 서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자자, 고민할 시간을 오래 줄 순 없다. 날 따라오면 페어리블러드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을 부귀영화를 손에 쥐여주마. 날 따라오겠느냐, 아니면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겠느냐?”
어차피 난 죽을 리 없다. 첼러스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죽을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건 저 멍청한 귀족이었다.
첼러스는 특유의 진득한 인내심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언제 결정을 내릴지 몰랐다. 마음먹은 첼러스는 무섭다. 그는 사신처럼 이곳의 모든 목숨을 순식간에 거둬갈 것이다.
“아뇨, 저는…….”
“으흐음, 아니지, 아니야. 원하고 있지 않느냐. 굳이 그렇게 거절할 필요 없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느냐?”
귀족이 탐욕이 드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눈가를 찡긋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 그는 처음부터 내게 의견을 구할 생각 따위 없었다.
‘똥 밟았네.’
발을 뒤로 물리자, 남자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로브를 입고 있길 다행이었다. 그가 마나를 다룰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었지만, 환영마법을 쓰고 있단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첼러스의 눈이 으스스하게 침잠했다. 이제 무슨 짓을 해도 이 귀족은 살아 돌아갈 수 없었다.
“어허.”
도망치려는 내 기세를 알아챘는지, 귀족이 징그러운 소리를 내며 억지로 나를 잡아끌었다. 그때, 첼러스가 이곳으로 도약해 귀족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텔레포트라도 한 듯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귀족이 경악했으나, 소리는 차마 터져 나오지 못했다. 심하게 놀란 탓이다. 뒤에 서 있던 괴한들이 당장 첼러스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무엄하다!”
그럼에도 첼러스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괴한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얼어붙은 호수면처럼 불투명해진 눈으로 귀족만 쳐다보고 있었다.
“가, 감히……!”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귀족이 화를 내려다 말고 굳었다.
첼러스가 그를 깊숙이 꿰뚫어보고 있었다. 별 볼 일 없이 스러지는 허무한 죽음을, 고통과 고문으로 지새운 영원을 고스란히 맞으며 깎인 예리한 눈빛이다. 한낱 귀족이 감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깐만. 그러니까 이 귀족은, 주최측이랑 연관이 있는 거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다, 당장 이놈을…….”
“따라가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얘기했다. 첼러스가 즉시 내게로 눈을 굴렸지만,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할 터이니,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그, 그런다고 내가…….”
귀족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나와 첼러스를 번갈아 보다가, 별안간 부은 것처럼 보이는 볼 살을 파르르 떨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 이번만 너그러이 넘어가주도록 하겠다.”
‘쫄았으면서 끝까지 허세는.’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관리를 하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분수를 아는 계집년이 네 목숨을 살렸구나!”
끝까지 입만 산 귀족이 또 무슨 짓이라도 당할까 봐 허둥지둥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괴한들에게 반강제로 끌려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며, 턱짓으로 귀족을 가리켰다.
첼러스는 내가 어떤 속셈인지 알아챈 눈치였지만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고요한 눈가가 가볍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도 이게 제일 편한 방법이야. 본진으로 한번에 쳐들어가는 거니까.’
어찌 됐든 상대는 귀족이다. 어떤 수를 더 숨겨놓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내겐 아레사 나이제르가 걸어주었던, 끔찍한 이름이지만 효과만큼은 쏠쏠한 사랑의 오작교가 있었다. 웬만한 것은 방어를 해줄 테고, 또 충격이 오면 스노아가 알아챌 수 있었다.
“처리해.”
마차에 올라서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귀족이 명령했다. 당할 첼러스가 아니었으나 새삼 황당했다.
“분명 용서해주신다고…….”
“시끄럽다! 그 괘씸한 녀석을 살려둘 순 없지. 한 번만 더 토를 달았다간 용서하지 않을 게다. 알겠느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저토록 명을 재촉하고 싶다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뒤쫓아 올 용사들을 상상하며 한심하단 눈빛을 했다. 이런 비슷한 짓을 많은 평민들에게 휘두르고 다녔을 걸 생각하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고급 마차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창문도 모두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서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먼 곳까지 달려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채 30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멈춰 서더니, 호위 기사들이 마차 문을 열고 내 머리 위에 검은 천을 뒤집어 씌웠다. 여기가 어딘지 알지 못하게 할 요량인 것 같았다.
그들에게 질질 끌려 마차에서 내려오고,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듯한 건물 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래된 목조 건물인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귀족과 수하로 보이는 사람들이 수런수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를 질질 끌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기가 습해지고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지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범상치 않네.’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하는데, 별안간 등 뒤가 소란스러워졌다.
“누구냐!”
나를 끌고 내려가던 남자가 사납게 소리치더니, 곧 뭘 봤는지 헛숨을 들이켰다. 그리곤 도망치듯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뭐지? 용사들인가? 벌써 쫓아왔나?’
그들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이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꼬리를 물고 따라붙었다. 설상가상 눈도 안 보인다. 어떻게 저항해볼 수도 없이 죽을 수도 있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은 무척 길었다. 금방이라도 발을 헛디뎌 어둠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것 같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쫓아가는데 어느 순간 나를 붙든 남자가 경련을 일으켰다.
“아아, 컥.”
날카로운 무언가에 등허리가 뚝 끊겨버린 것 같은, 미완성의 비명이 고통스럽게 까무러쳤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망령에게 발목이라도 붙잡힌 모양새로 주욱 미끄러져 떨어졌다.
극한의 공포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꼭 벼랑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으, 끄흐…….”
그러나 굴러떨어지기 직전, 단단한 가슴팍에 머리를 부딪쳤다.
“카카나.”
우직하고 낮은 목소리.
나는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첼러스.”
그의 옷자락을 강하게 틀어쥐며 중얼거렸다.
첼러스가 내 머리에 씌워져 있던 검은 포대기를 벗겨주었다. 답답했던 콧구멍에 차고 시린 공기가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안긴 채 잠시 부르르 떨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오히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쫓아왔냐고 묻고 싶을 만큼 신속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카카나, 괜찮아?”
아다르가 뚱뚱한 귀족 남자의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어오며 물었다. 인정사정없이 잡아끄는 통에 계단을 내려오는 귀족의 퉁퉁한 몸이 고무공처럼 튕기고 있었다.
“너희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나는 마른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슬슬 진정이 되고 있었다.
“여기 여관에서 그다지 안 멀어.”
할릭이 말했다.
“안 멀다고?”
“좀 외진 데라 근처에 건물이 없긴 한데, 버려진 흉가 같은 곳이야.”
아다르가 귀족의 머리를 벽에 처박으며 할릭의 말을 이었다.
“궁금한 게 더 있으면 이 새끼한테 물으면 되지. 안 그래? 입이 달렸으면 말 좀 해보시지?”
캑캑거리며 고통을 호소하던 귀족이 마지막 발악을 했다.
“이런 짓을 하고도 괜찮을 줄 아느냐! 용서하지 않겠다. 내 용서하지 않을…….”
아다르가 귀족의 머리를 다시 한번 벽에 찧었다. 그의 코와 입에서 피가 터지기에, 나는 슬그머니 눈을 돌려버렸다.
‘아까 나랑 같이 있던 사람이 첼러스여서 다행이다.’
만일 아다르였다면 귀족을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있던 괴한도 죽이고, 우두머리도 죽이고, 이 귀족의 꼬리를 물고 쫓아오는 모든 추적자들을 죽여 버릴 인간이다.
어찌 됐건 용사들 중에서 인내심 하나는 첼러스가 제일 좋았다.
“좋은 말로 할 때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말해.”
“나, 난 못 한다. 그, 그, 그런 건…….”
아다르가 한숨을 쉬었다.
“또 빙 돌아가게 하네.”
그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희는 건물 내부 확인해봐. 나는 얘랑 둘이서 긴밀하게 할 말이 있어서.”
“나도 돕겠다.”
의외로 아르모어가 끼어들었다.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겠지.”
“그래, 뭐. 고문관이 두 명이면 손이 네 개이니 고통이 두 배가 될 수도 있지. 그렇지?”
귀족 남자는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이미 겁에 질린 듯했다.
“자, 자네들. 내 말을 들어보게…….”
귀족이 초조하게 말문을 트자, 첼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끌었다. 몸이 돌려지자마자 할릭이 커다란 손으로 내 두 귀를 막아주었다. 그러나 그 너머로 희미하게 비명 소리가 흘러들었다.
우리는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겨, 계단을 끝도 없이 내려갔다. 지하는 무척 깊었다. 간간이 기름 램프가 어둠을 밝혀주었지만, 채 지우지 못한 섬뜩한 분위기가 은연중에 흘렀다.
‘야수를 길들이는 내 능력을 탐냈었지.’
그거랑 이 흉가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더 궁금해졌다.
“이런.”
스노아가 탄식했다.
어두컴컴한 계단 끝에 두 가지의 갈림길이 놓여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석이 서로를 끌어들이듯, 어떤 존재가 내 의식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고개가 자동으로 왼쪽 갈림길을 향해 돌아갔다. 나는 컴컴한 통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여기로 가자.”
“인원을 나눠서 각각 방을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스노아가 제안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이 길이 맞아.”
할릭이 고개를 기울였다.
“마차에서 귀족이 떠벌리기라도 했어?”
“아니.”
“근데 갈림길 끝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감?”
용사들이 침묵했다.
“얼른 가자. 왠지 빨리 가야 될 것 같아.”
왼쪽 갈림길로 들어섰다. 용사들이 내 뒤를 따랐다.
간혹 설치되어 있는 함정이나 눈속임 따위가 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했지만, 그 같은 잔재주는 스노아가 모두 처리해버렸다.
희미하게 내 머릿속에서 깔짝대기만 했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알겠다. 줄곧 날 괴롭히던 비명은 계속 여기서 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 흉가는 내가 머무는 여관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고 했다.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야.’
그르릉거리거나, 아릉아릉 낮게 울부짖는 소리. 문자나 언어처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가 아닌데도 알아들을 수 있다.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어.’
복도 끝에 굳건히 잠겨 있는 문에 다다랐다. 단단한 철문이다. 손잡이는 없었고, 대신 오른쪽에 마도구가 달려 있었다. 자격이 있는 사람만 들어올 수 있도록 조치가 되어 있었다.
마도구면 스노아가 해결할 수 있지만, 이번엔 할릭이 나섰다. 그는 문과 함께 안쪽에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까지 단번에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다칠지도 모르니까, 뒤로 가 있어.”
할릭이 조언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아예 첼러스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만족한 할릭이 지체 없이 문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순간 그의 주먹에 폭풍 같은 바람이 휘감기는 것처럼 보였다.
콰앙!
문이 벽에서 고스란히 뜯겨 나가며 돌가루와 먼지가 세차게 나부꼈다. 그리고 계획대로 근처에 대기 중인 사람들을 깔아뭉개버렸다.
안에서 바삐 무언가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전부 연구원들이었다.
사방이 우리에 갇힌 야수들로 가득했다. 갓 죽은 야수도 있었다. 그러나 죽지 않은 야수들도 대부분 약을 맞고 기를 쓰지 못했다. 줄곧 내 머릿속에 울리던 우짖는 소리가 뭔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야수들이 내는 소리였어.’
나는 가슴이 미어져서 입을 틀어막았다.
아파서 기를 쓰지 못하는데도 내 등장에 야수들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어금니를 악물었다.
‘잔인한 놈들, 생체실험을 하다니.’
주먹을 움켜쥐며 눈을 굴렸다.
마침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환상적인 형태의 인영이 물 같은 액체 속에 둥둥 떠 있었다.
나는 멍청하게 입을 열었다.
“맙소사.”
엘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