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검투사들의 마을 (12/43)

Chapter 4. 검투사들의 마을

“아직도 이블라가 신경 쓰여?”

설탕 옷을 입힌 과일꼬치를 먹고 있는데, 아다르가 은근슬쩍 옆에 앉으며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뭐. 많이 시무룩해 보였잖아.”

헤어지기 전 눈에 띄게 침울해져서 말도 하지 않던 이블라가 눈에 아른거렸다.

몇 달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동고동락하면서 나도 꽤 정이 들었던 터라 이따금씩 그녀가 보고 싶었다.

길이 겹치는 동안이라도 함께하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운치 없게 마을에 텔레포트로 왔다. 며칠은 달려야 하는 거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블라와 나를 갈라놓고 만 것이다. 허무한 이별이었다.

“퀄리티미엄은 여기에 있는 거 맞아?”

나는 딸기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마을처럼 보이는데.”

마침 우락부락한 남자가 근처를 지나갔다. 수풀에 숨은 벌레 등껍질처럼 작은 눈이 덥수룩한 앞머리 사이에서 사납게 굴러다니는 남자였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겁을 먹고 그를 피했다. 남자가 제 우람한 근육에 지문을 남기는 순간 부딪힌 작자를 목 졸라 죽일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마을에 태반이었다. 나는 말을 정정할 필요를 느꼈다.

“음, 전쟁 나도 끄떡없을 마을이긴 하네.”

“있긴 있어.”

“퀄리티미엄?”

“응.”

아다르가 스노아의 돈으로―정확히는 마탑의 돈으로― 산 막대사탕의 포장지를 벗기며 말했다. 제법 흥미로운 주제였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마을을 거대한 마나가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야.”

아다르가 사탕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마탑주 말대로 근처에 드래곤 레어라도 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규모지. 입구를 찾는 게 문제긴 한데.”

“안 믿기네.”

“뭐가.”

“드래곤이랑 엘프가 진짜 있다는 게.”

드래곤이랑 엘프는 동화로만 접했다. 인간의 탐욕을 피해 비밀의 숲으로 도망쳐 숨었다는 게 내가 아는 엘프의 전부였다. 그마저 서점에서 한두 권 후루룩 넘겨 읽은 것이 끝이다.

높으신 분들의 사정까지야 모르지만, 일반인에게 드래곤과 엘프는 전설 속 이야기에 불과했다. 마탑주가 하는 말을 직접 들었음에도 도통 실감이 되지 않았다.

용사들을 만난 것부터 범상치 않은 시작이었으니, 어쩌면 이 정도 스케일은 당연한지도 몰랐다.

“스노아는 아무 말 없어?”

‘퀄리티미엄의 입구쯤은 손가락 한 번 까닥이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나 아다르는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드래곤이잖아.”

“스노아인데도?”

아다르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드래곤은 절대적 존재고 복종해야 할 신이야. 적어도 엘프한테는.”

“그렇게 강하단 말이야?”

스노아가 고전하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상상이 되지 않았다.

“드래곤은 인간과 달리 날 때부터 강한 육체와 마나량을 보유하고 있어. 싸웠다간 산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

“브레스 같은 공격 때문에?”

“그렇지. 경험은 스노아가 더 적으니까 밀릴지도?”

아다르가 유쾌하게 키들거렸다.

“결계를 뚫는 것도 힘들까?”

“워낙 오래된 결계잖아. 스노아가 해제하려면 드래곤이 공들인 시간만큼은 걸릴 거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쉬운 게 없네.”

“어쩔 수 없지, 뭐.”

아다르가 사탕을 우적우적 씹어 먹다 말고 눈썹을 구겼다.

“쟨 또 왜 저렇게 신났어.”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할릭이 손에 종이 여러 장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내가 재밌는 걸 발견했지.”

그가 씩 웃으며 들고 있던 종잇장을 나눠주었다. 나는 과일꼬치를 입에 문 채 종이를 가까이 들고 읽어보았다.

《 제17회 투기대회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투기대회?’

제목만 봤을 뿐인데 벌써 질린다.

“이게 뭐야?”

내 짜증스러운 질문에 할릭이 옆에 앉으며 검지로 종이를 툭 쳤다.

“그렇게 질색하지 말고 읽어봐. 이 마을에 오래 있고 싶진 않잖아. 그치?”

하여튼 능청스러운 인간이었다.

‘웃는 건 순박하면서.’

불만스럽게 구시렁거리고 있으니 할릭이 아예 종이를 가져가서 읽어주기 시작했다. 갸륵한 정성이었다.

“이번 상품은 무려 수명을 늘려준다는 물약, 페어리블러드입니다.”

‘뭐? 무슨 약?’

내가 아는 그 페어리블러드가 맞는지 의심이 되었다. 나는 비뚤어진 자세를 바로하고 할릭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투기대회를 재패한 단 한 명의 사람만이 페어리블러드를 손에 넣을 수 있으며, 우승자는 디나이트 남작님의 후원을 받아 기사수업을 받고 정식 기사로 임명될 기회를 드립니다. 15세 이상의 모든 제국민이 참여할 수 있으니 많은…….”

“잠깐만.”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페어리블러드에 대한 정보는 그게 끝이야?”

“끝.”

“진짜 있다고?”

“알아?”

“알지. 엘프 피로 만든 물약이잖아.”

그림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재미삼아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환상물약사전에서 본 적 있어. ‘환상’물약사전 말이야.”

조바심이 나 할릭에게서 홍보물을 빼앗았다. 직접 읽어보고 싶었다. 기대와 달리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대회의 규칙만 주구장창 적혀있네.’

1년에 한 번만 열리는 이 대회는 상시 운영되는 노예들의 투기대회와 달리 축제의 성격이 강했다. 때문에 노예를 제외한 검투사들과 모험가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

옛날이라면 사기라고 여겼겠지만…….

‘우리도 엘프와 드래곤을 찾고 있잖아.’

퀄리티미엄의 입구 근처에 있는 마을이다. 엘프 피로 만든 물약이 아예 없으리란 법도 없다.

“네가 궁금해할 줄 알고, 얘기를 좀 들어왔지.”

할릭이 센스 있게 말문을 텄다.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말해 봐.”

“페어리블러드가 처음 등장한 건 3년 전이래.”

“그럼 복용한 사람이 있겠네?”

“그렇지. 검투사에게 거금 주고 페어리블러드를 사서 복용한 귀족이 있었나 봐.”

“그래서?”

“진짜 효과를 봤다는 소문이 있어. 불치병이 싹 나았다나 뭐라나.”

아다르가 입에 물고 있던 막대를 위아래로 불량하게 흔들며 중얼거렸다.

“구린내 난다.”

“그렇긴 해.”

할릭이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귀족이 제발 팔아주십쇼, 하면서 검투사한테 돈 주고 페어리블러드를 사겠어?”

아다르가 빈정댔다.

“내가 귀족이었으면 암살자 고용해서 검투사 죽이고 뺏었어. 너무 꽃밭 같은 얘기잖아.”

“우승자가 상품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면 디나이트 남작이 도와준다더라고.”

할릭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다르가 눈썹을 구겼다.

“도와준다니?”

“부당하게 뺏기거나 하지 않도록 호위해준대. 선한 귀족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할릭이 흐릿한 어조로 첨언했다. 물론 아다르는 대놓고 쪼갰다.

“선한 귀족이라니. 차라리 나더러 성기사라 하지 그러냐.”

“네가 생각하기에도 인위적인 냄새가 나지?”

“엄청.”

아다르가 문득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러면 상품 제공자 뒤를 캐는 건 어때? 엘프랑 관련이 있으니 일석이조 아냐? 숲이 넓어서 안 그래도 퀄리티미엄 입구 찾기가 사막에서 바늘 찾긴데.”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걸.”

할릭이 곁눈질로 오른편을 가리켰다. 귀족을 태운 마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달콤한 냄새 맡고 꼬인 벌레가 한둘이 아냐. 그런데 3년이나 발각되지 않은 거야. 그쪽도 신경 써서 감추고 있다고.”

아다르가 미간에 슬며시 주름을 잡았다. 이 대화에 싫증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러면 굳이 대회에 페어리블러드를 내놓은 이유가 뭐야?”

“상품 제공자와 주최측 사이에 뭔가 있다든가? 주최측도 베일에 싸여있거든.”

할릭이 툭 뱉었다. 아다르가 습관적으로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좀 재밌는데?”

“그러니까 일단 참여해보자는 거지.”

할릭이 홍보물을 흔들었다. 그의 본래 목적이 뭔지 분명해졌다.

용병들은 계산적이고 용의주도하다더니 그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할릭치곤 꽤 여우 같은 짓이다.

“확실한 정보가 없을 땐 부딪쳐서 알아내는 게 최고잖아.”

할릭이 파이어 오팔 같은 눈망울을 싱그럽게 반짝이며 채근했다.

‘하긴, 그동안 따분했겠지. 세상 곳곳을 누비며 모험하던 사람이잖아.’

특히 할릭은 용병이었다. 전설, 혹은 신화급 용병은 특정 길드에 가입할 수 없다. 그러니 더욱 자유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때 아닌 감옥살이에, 학교생활에 답답했을 거야.’

그는 가뭄에 단비처럼 등장한 이 자극적이고 위험천만한 투기대회에서 마음껏 힘을 발산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아다르가 네 마음대로 하라는 양 손을 흔들었다.

‘첼러스랑 나머지 두 사람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할릭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투기대회는 새가슴인 내가 오르기엔 너무 높은 벽이었다. 제국이 주관하는 대규모 투기장은 아니어서 황제까지 행차하진 않는다. 그래도 많은 귀족이 구경하러 오는 대회였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물론 천하무적 용사들은 나와 달리 태평했다. 그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단서를 얻을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카카나, 신청서 다 썼어?”

나는 한숨을 쉬며 참가신청서를 할릭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희희낙락하며 접수원에게 종이를 넘겼다. 끝이다.

근처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도대체 왜애.”

절규하자 할릭이 옆에서 속없는 소리를 했다.

“참가하면 생각보다 재미있을 거야.”

성질이 뻗쳐서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려버렸다. 웬만하면 할릭을 치진 않는데 흥분해서 실수했다.

‘으악, 내 손가락!’

아니나 다를까, 손이 부러질 것 같다.

화끈거리는 주먹을 다른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할릭이 포대기로 감싸듯 내 주먹을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아쥐며 멋쩍게 웃었다.

“운도 없지. 하필이면 팀전이라서 인원이 부족할 건 뭐람. 카카나 네 덕분에 참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시작하자마자 살해당할 거야.”

나는 금세 우울해져서 거의 울먹이듯이 중얼거렸다.

“걱정 마. 우리가 네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테니까.”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스노아가 말을 받았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방식이에요. 보통 투기대회는 처음부터 일대일인 경우가 많잖아요. 5인 팀전이라니.”

이 중에서 유일하게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은 아르모어였다. 빠지는 한 명이 나일 순 없었기 때문이다.

[개방된 마을에 혼자 있겠다고? 차라리 우리랑 투기대회에 나가는 게 안전할걸.]

단호하게 충고하던 아다르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마을은 특히 빈민들이 많다. 시가지 뒤편은 전부 판자촌이었다. 투기대회가 하루 이틀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검투사가 바글거리는 마을에서 혼자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것도 수인족이.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팀을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최후의 한 명을 가리는 방식이라…….”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리던 아다르가 돌연 팽, 콧방귀를 뀌었다.

“주최측 성격이 너무 나쁜데. 최후에 적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아군이랑 싸우게 만들다니.”

“잔인한 방식엔 이유가 있는 법이죠.”

스노아가 서늘한 표정으로 맞장구쳤다.

“기권이 가능하다잖아. 잔인하다기보다 오히려 자비로운 거 아니야? 서로 말 맞춰서 네 명이 기권하면 한 명이 자동 우승이잖아.”

할릭이 의욕적으로 반박했다.

“믿을 만한 동료면 손해 없이 돈을 나눠 가질 수도 있는 거지.”

“광기를 파는 투기대회랑은 안 어울리네.”

아다르가 마지못해 인정하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더 궁금한 거지!”

할릭은 그 어느 때보다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흥미로워 견딜 수가 없나 보다.

‘관두자.’

나는 반쯤 체념하며 말했다.

“이렇게 된 거 단서라도 잡자.”

결승전에 오르는 우승팀은 마지막 시합 전에 주최측에게 은밀한 초대를 받는다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었다. 믿을 건 그거밖에 없다.

나는 한숨을 쉬며 용사들을 타박했다.

“나이 먹으면 보통 조심스러워진다는데, 어째 너희들은 더 팔팔해지는 것 같다. 누가 늙은이라 생각하겠어.”

“늙은이는 아니지.”

할릭이 전채 요리를 포크로 깨작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수명이 늘고 난 후로 시간의 흐름에 무뎌진 느낌이거든. 드래곤들은 100년씩 잔다며? 나도 곧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스노아가 주스 잔을 내게 밀었다.

“우선 먹는 게 좋겠어요. 달콤한 걸 먹으면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나는 순순히 메뉴판을 훑었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니 잡념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래. 용사도 사람인데, 조금만 참자.’

간만에 놀겠다는 거다. 그 기회마저 빼앗는다면 가혹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제국에게 붙잡힌 후로 180년 만인 거잖아. 단서도 얻을 수 있고.’

물론 위험천만한 투기대회를 ‘놀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은 용사들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며 스스로 위로하는 사이,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다. 레몬 향이 톡 쏘는 샐러드를 씹으며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그런데 페어리블러드는 어디서 구하고 있는 거지?’

만약 진짜 엘프 피로 만든 거라면 끔찍한 일이 아닌가. 피로 만들어진 약물이 드문 건 아니지만, 재료가 그냥 인간도 아니고 ‘엘프’다. 정중하게 부탁하고 피를 구했을 리 없다. 가시 돋친 짐승 우리 같은 곳에 가둬놓고 죽지 않을 만큼만 피를 뽑는 방식이 오히려 현실적일 것이다.

별안간 입맛이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여기 무기 차고 있는 사람들은 다 검투사들인가.’

나는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전문 양성소에서 철저하게 훈련 받은 것처럼 보이는 검투사와, 겁에 질린 신참 검투사 몇몇이 보였다. 평범한 민간인은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다.

나라면 이런 마을에서 진작 도망쳤을 것이다. 패싸움에 잘못 휘말렸다간 개죽음당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간만에 몸 좀 풀겠네. 생각해보니 투기대회도 처음이야.”

할릭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구운 꿩 다리 고기를 뜯어먹었다. 그의 곰 같은 손에 다리 살이 통째로 들리더니 금방 뼈만 남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걱정이 싹 사라졌다.

“이보쇼.”

그때,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검투사 일행이 말을 걸었다. 상대를 깜짝 놀래주려는 듯 불량하고 험한 어투였다. 나는 안 들리는 척 열심히 양배추를 아싹거렸다.

‘좋은 의도로 말을 걸었을 리 없지.’

용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의 부름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비아냥거림이 돌아왔다.

“씹는데?”

“체면 구기네.”

그들이 쉰 음성으로 킥킥 웃었다.

“블랑고 이름 다 죽었어. 무시도 당하고.”

“그러게 멋모르는 애새끼들은 왜 건드리려 그래. 딱 봐도 새내기 모험가구만.”

“푸흡!”

주스를 들이켜다 말고 나도 모르게 뿜었다.

‘새내기 모험가라고? 용사들이?’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왼손으로 턱 밑을 받쳤다. 주스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아다르가 휴지로 친절하게 닦아주었다.

“투기대회 맛 좀 보고 싶다는데 왜. 간만에 몸을 푸시겠다잖아? 옘병. 전문 검투사들이 지들 X인 줄 아는 거지. 아니냐?”

물 묻힌 손수건으로 옷에 튄 얼룩을 닦는데, 남자가 음식점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떠들었다. 별 의미 없고, 그냥 크게 소란 한번 피워보겠다는 엄포 정도로 들렸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식사 중이던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식기를 놓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소음이 잦아들자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다.

그들은 익숙하게 의자까지 틀고 맥주를 들이켤 뿐이다. 대놓고 구경하겠다는 태도다.

‘이런 일이 흔한가 보네.’

방울토마토가 목구멍에 걸린 느낌이다.

못 마셨던 주스를 다시 들이켜며 눈치를 살폈다. 용사들이 식기를 놓고 있었다. 음식은 아직 남았지만, 입맛이 떨어져 더 먹고 싶은 눈치가 아니다.

그들이 고개를 들어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를 올려다봤다. 다섯 쌍의 눈이 유리구슬처럼 무기질적으로 번들거렸다.

‘화났나?’

나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용사들은 마음만 먹으면 마을을 통째로 없애버릴 수도 있었다. 벌레가 자꾸 귓가에서 앵앵대면 죽이고 싶어지는 법이다.

‘멍청아, 제발 좀 꺼져라.’

이 시비의 끝을 알고 있는 나는 어깨를 슬그머니 웅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가 다시 지옥의 주둥이를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오래 살기 싫은 모양이었다.

“내가 꽤 친절한 놈이어서 말이야. 사회초년생들한텐 비정하게 돌아가는 세상물정을 꼼꼼하게 알려주는 편이거든.”

사회초년생?

‘지랄하고 자빠졌네.’

남자가 내 생각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테이블에 단검을 사납게 처박았다. 나무 테이블이 쿵, 울리며 진동하자 가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고막을 긁었다. 하필이면 내 근처에 있는 유리잔이었다. 유리조각에 내가 다칠 뻔하자 용사들의 눈빛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누구냐, 투기대회에 나가는 게. 너냐? 너? 아니면 이년만 빼놓고 다 같이 우르르 나가나?”

남자가 내 뺨을 손가락으로 툭 치려는 순간.

“앗.”

의자에 앉은 채로 할릭에게 드르륵 끌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나는 할릭의 반사 신경에 놀라고, 한 손으로 날 의자째 끌어버린 힘에 두 번 놀랐다. 콩닥거리는 가슴께를 붙잡고 눈을 굴렸다. 털이 부숭부숭 난 남자의 손가락이 허공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거리마저 다 계산된 움직임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팔뚝으로 소름이 내달렸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게 이런 건가.’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밑을 살폈다. 의자를 꽉 쥐고 있는 할릭의 손이 보였다. 핏줄이 돋아난 손 밑으로 우그러진 나무 부스럼이 스스스 떨어지고 있었다. 열 받았다는 징조다.

“괜찮아?”

할릭이 부드럽고 다정한 눈으로 물었다. 핏줄이 우락부락 돋아난 손과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남자는 할릭의 손에 잡힌 나무 의자가 부서지는 꼴마저 못 봤다. 제 처지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꿈에도 모른 채 기고만장해서 휘유, 휘파람이나 불고 앉았다.

“니 이거냐?”

그가 새끼손가락을 까딱이며 줄기차게 신경을 긁었다.

“얼굴 한번 만지려 했다고 엄청 까칠하게 구는구만. 앙?”

그러자 음식점에서 웃음이 왁자하게 터졌다. 어서 시작하라며 부추기는 검투사까지 나왔다.

‘하늘로 꺼지든 밑으로 꺼지든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다…….’

생각한 순간, 할릭이 일어섰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해탈한 미소를 지었다.

‘망했네.’

“거참.”

할릭이 내 의자를 주욱 끌어 첼러스 근처에 끌어다 놨다. 봉제인형이라도 옮기듯 가뿐한 움직임이다. 되레 내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첼러스가 어깨를 받쳐 넘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교육을 거칠게 하시네요, 형님?”

할릭이 남자의 멱살을 잡아 코앞으로 끌어오며 으르렁거렸다.

블랑고 이름이 죽었다느니 어쨌다느니 입을 턴 걸 보면 남자도 투기대회에서 꽤 구른 인사인 것 같은데 꼼짝도 하지 못했다.

“뭐 해, 블랑고! 겁먹었냐!”

구경하던 검투사가 불을 지폈다.

“네놈이 감히!”

발끈한 블랑고가 소매에 숨기고 있던 검을 은밀히 꺼내 옆구리를 노렸다. 가만히 당하고 있을 할릭이 아니다. 블랑고를 빤히 쳐다본 채 남자의 손을 가볍게 저지했다.

‘쟨 옆구리에도 눈이 달렸나 보네.’

감탄하는데, 블랑고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기 시작했다.

“으, 아아악!”

나는 의자도 맨손으로 부수는 할릭의 괴력을 떠올렸다.

“하, 할릭!”

‘평생 손 못 쓰게 만드는 거 아냐?’

자리에서 어정쩡하게 일어서자, 스노아가 내 어깨를 잡아 도로 자리에 앉혔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다.

‘그러게 용사는 왜 건드려서.’

나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블랑고의 얼굴을 보다말고 마른세수를 했다.

“대단한 검투사신 것 같은데, 오늘 컨디션이 안 좋으신가 보네.”

할릭이 걸걸하게 조롱하며 남자를 마룻바닥에 처박았다.

“야, 뭐 하냐. 블랑고.”

가게의 분위기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해져 있었다. 구경하던 검투사가 정색하고 지적하자, 고꾸라진 블랑고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이익!”

그가 이판사판으로 할릭에게 달려들었다.

쇠공 같은 주먹이 공중을 가르자, 할릭이 고개를 꺾어 가볍게 피했다. 몸의 균형이 쉽게 무너지자 당황한 블랑고가 비틀거리며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 하나도 닿지 않았다.

‘이쯤 되면 좀 알아야 되는 거 아니야?’

블랑고는 제 주먹에 왜 타격감이 오지 않는지 몰라 멍청한 눈이나 하고 있었다. 할릭이 자비 없이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들어서, 바닥에 메다꽂았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큰 소리가 났다.

검투사의 무게 탓도 있지만 메다꽂은 할릭의 힘이 범상치 않은 탓이다. 하필이면 내가 앉은 테이블 근처라 식기까지 달그락거리며 떨렸다.

블랑고가 완전히 뻗었다.

나는 블랑고 주위로 부러진 나무판자가 우지끈 솟아난 바닥을 질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저건 어떻게 배상하나…….”

스노아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으, 끄으으으!”

블랑고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눈썹을 구기고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떻게 메다꽂은 건지 뼈라도 부러진 사람처럼 사족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멀리 앉은 검투사들이 상황파악을 못 하고 블랑고를 조롱했다.

“어이, 블랑고. 몸살 났으면 좀 사려라. 병든 닭처럼 꼴사납게 그게 뭐냐? 검투사들 망신 다 시키고 말이야.”

검투사는 매일매일 살인적인 훈련량을 소화했다. 밀쳐졌다고 넘어지고, 던져졌다고 정신을 못 차릴 부류가 아니었다. 악바리로 일어나서 제가 죽기 전에 적을 죽여야 살아남는 직업이었다.

그러나 블랑고는 자줏빛으로 변한 아랫입술을 윗니로 쿡 찍어 삼키고, 조용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할릭이 역광을 받아 검어진 눈으로 블랑고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제게 쏘아지는 무거운 살기를 느끼고 나서야, 그는 안 것이다.

제 깜냥으로 덤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살기 위해 죽일 것이 아니라, 죽은 척이라도 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할릭…….”

구경하는 것도 진이 빠졌다.

나는 제발 이쯤 하자는 의미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할릭이 나를 흘끗 보더니 얌전히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바닥이 조금 꺼진 것 말고 다른 피해는 없는 것 같았다. 그제야 간신히 몸을 일으킨 블랑고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야, 블랑고. 어디 가. 야, 야!”

블랑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줄행랑을 쳤다. 거의 기어가는 자세였다.

통증 때문에 얼굴이 허옇게 질렸는데도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일행이 고개를 기울이며 계산을 대신 마쳤다. 그리곤 아직도 제 분수를 모르고 할릭을 툭툭 치고 지나갔다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이쯤에서 끝난 건 블랑고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 거니까.”

나는 기가 막혀서 놈들을 바라보다가 흠칫 놀랐다. 할릭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치고 있었던 것이다.

“할릭? 착하지?”

나는 그의 뒷목을 잡고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이 이상 시선이 쏠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내 분노가 담긴 미소를 본 할릭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참을게.”

나는 칭찬의 뜻으로 그의 등을 탕탕 두드려주었다. 섭섭한 표정을 지을 땐 언제고 금세 순한 미소를 짓는다.

이런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 생각하면서 속으로 블랑고 놈들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구경하던 검투사들이 자기들 이름에 먹칠한다며 혀를 쯧쯧 차더니 몸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릴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투기대회에 나가도 괜찮은 걸까.’

심정이 복잡해졌다.

“미안해. 놀랐지?”

겸사겸사 내 의자도 드르륵 끌어 원래 위치로 돌려놓은 할릭이 뒤늦은 사과를 했다. 엄연히 말하면 할릭 잘못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저게 뭐라고.”

나는 진땀이 밴 손바닥을 은근슬쩍 옷에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할릭이 눈가를 곱게 접으며 웃었다. 나는 샐러드를 깨작거리며 한마디 충고했다.

“앞으론 잘난 척하지 마. 검투사가 시비 걸잖아.”

“알았어.”

“근데 괜찮겠어? 나 데리고 투기대회 나가는 거.”

나는 돌연 마음이 불편해져서 물었다.

“아까도 검투사가 나부터 걸고 넘어졌잖아.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자유전투 방식이어서 걱정할 거 없어.”

할릭이 태평하게 말했다.

“두 명씩 짝지어야 한다느니, 귀찮은 조건이 없잖아. 막말로 나 혼자 싸우고 너희 네 명은 뒤에서 구경해도 돼.”

나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참가신청서도 내버린 마당이다. 사서 걱정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음식에 집중했다. 우유와 달걀을 섞은 소스에 볶은 야채를 넣고 끓인 수프였다. 한 입 떠먹으니 고소한 맛이 났다.

대충 식사를 끝내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용사들은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대회를 즐길 수 있을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나를 사용하면 승부가 너무 빨리 날 것 같은데. 지나치게 눈에 띄고.”

할릭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왕 놀 거리가 생겼으니 더 진득하게 즐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이게 아이들의 인형 놀이가 아니라 실제 검이 날아다니는 투기대회라는 걸 상기시켜야 했다.

“그럼 힘만 사용하자.”

아다르가 신나서 말을 받았다.

“그럼 전 어쩌라고요?”

스노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반박했다.

“뒤에서 책이라도 읽든지.”

‘투기대회에서……?’

저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어서 쳐다보는데, 스노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나는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을수록 무시하는 게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턱을 괴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6월이네.’

날씨가 후텁지근해져서 뒷목에 습기가 찼다. 눈발이 날리는 한겨울에 용사들을 만났는데 시간이 참 빨랐다.

‘이번 여름은 어떻게 버티지. 집에 박혀 있을 수도 없고.’

나는 더위에 약했다. 열사병에 걸리지 않도록 따로 약을 제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슬슬 발정기 시기 아닌가?”

아다르가 첼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저에게 묻습니까? 아르모어에게 묻는 것이 빠를 텐데요.”

첼러스가 은근슬쩍 발을 뺐다. 그러자 아다르가 음흉하게 웃는다.

“왜 모르는 척하고 그래? 며칠 전부터 걱정했잖아. 억제제만 먹으면 네 소중한 아가씨가 아프니까.”

첼러스의 미간에 슬며시 주름이 잡혔다.

“아다르는 아닌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무의미한 공방전을 구경하던 나는 문득 물었다.

“뭐라고?”

아다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너 곧 발정기 아니야?”

“그거 말고. 방금 누가 아프다고 하지 않았어?”

몽롱했던 정신이 맑게 깨었다. 나는 느물느물 퍼져 있던 허리를 세웠다. 얼음물을 마신 것처럼 속이 서늘해졌다.

내 심각한 표정에 용사들이 서로를 쳐다본다.

“그러니까, 이제 네가 발정기여서 아프잖아.”

“아니 나 말고, 너희 중에 방금 아프다고 호소한 사람이 있냐고.”

아다르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우리가 아플 일이 뭐 있어? 계속 졸린 눈을 하더니 꿈이라도 꿨어?”

“아니, 분명히…….”

나는 말하다 말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또 들렸어. 뭐지? 무슨 소리지?’

이번엔 용사들이 한 소리가 아님을 나도 알아챘다. 불시에 등허리를 찔린 사람처럼 파르륵 놀라며 주위를 살폈다. 죽을 듯이 울어대는 옆집의 아기 울음소리를 우연히 들은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그제야 ‘그게’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짐승이 우짖는 것에 가까운 소리다. 그러나 이상하게 나는 그 울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고 있었다.

‘꼭, 내가 구해주길 바라는 것처럼…….’

“무슨 일 있어?”

눈치는 귀신같은 아다르가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몸에 소름이 돋으며 피부가 단단해졌다.

“아냐, 아무것도…….”

‘환청인가? 이명?’

그렇다고 하기엔 의식이 또렷했다.

무시해보려 노력하지만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은 애달픈 비명이 점점 극심해졌다. 나는 초조하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당장 달려가야 될 것 같다.

‘어디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카카나?”

뒤에서 할릭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가게를 나섰다.

한층 맹렬해진 햇빛이 눈가를 쪼며 어디를 가느냐고 채근한했다. 나도 모른다.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왠지 이쪽 방향인 것 같은데.’

걸음을 빨리해서 건물 뒤편으로 갔다.

어둑한 골목에 들어서자 햇볕에 달궈졌던 피부에 차가운 공기가 달라붙었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통 근처에 웅크리고 있을 뿐, 사람은 없었다. 소리는 어느 순간 뚝 끊겨있다.

‘이상하다. 역시 착각인가?’

검투사들과 신경전을 벌인 후 예민해져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야옹―

고양이가 날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서 종아리 부근에 몸을 비볐다. 사람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언제 노려봤냐는 듯이 살갑게 굴었다. 머리를 만져주자 기분이 좋은 소리를 낸다.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탓에 고양이도 수상하게 보였다.

‘분명 도망갈 것처럼 굴었었는데…….’

내 손길을 한참 동안 즐기던 고양이가 불현듯 눈을 홉뜨고 내 뒤를 노려보았다. 누가 왔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아다르가 팔짱을 낀 채 벽에 몸을 기대고 있다.

“고양이?”

아다르가 어둑한 골목을 살피며 물었다.

“여기 사는 애인가 봐.”

“사나워 보이는데.”

“그러게. 나한텐 안 그러는데.”

아다르와 날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대조적이다.

아다르가 미간을 모았다. 그는 고양이 따위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저 눈을 속이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다. 나는 아무렇게나 말뿐인 핑계를 댔다.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벌레가 있더라. 놀라서 나와 버렸어.”

“그것 때문에 여기로 왔다고?”

“응.”

“믿으라고 한 소리 맞지?”

아다르가 얼굴을 찡그렸다.

“거짓말을 할 거면 노력이라도 하지 그래.”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양이의 턱 부근을 긁어주었다. 아다르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별일은 아닌 거지?”

“응.”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니 더 묻진 않을게.”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는 저만치 도망가서 숨은 지 오래다. 쓰레기통 뒤편에 몸을 숨기고 얼굴만 내밀어 우릴 보고 있다.

나는 아다르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도 미련이 남아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다급한 소리였는데. 그게 진짜 착각이었을까?’

고양이는 여전히 목을 쭉 빼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크고 푸른 눈이 맹목적인 무언가를 담은 채 아롱아롱 빛났다.

나는 고개를 돌려 태양이 작열하는 대로변으로 빠져나왔다. 용사들은 입구에 어수선하게 서 있었다. 손을 흔들어 별일 아님을 어필했다.

“벌레를 봐서 그랬어.”

내 황당한 핑계에 다들 의심 섞인 눈초리를 보냈지만, 아랑곳 않고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다행히 그들은 내가 그어놓은 선을 더 넘어오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투기대회의 시작은 이 주 후였다.

시간이 늦어서 우리는 퀄리티미엄을 찾는 걸 그만두고 장기 투숙할 여관을 골라잡았다. 내 방을 가운데에, 그리고 용사들의 방을 왼쪽, 오른쪽에 고루 잡았다.

개인실에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소리를 들은 후로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창틀에 턱을 괴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가슴이 왜 이렇게 답답하지.’

자꾸 이상한 일이 생기는 것 같았다.

베일에 싸여있는 은밀한 무언가가 드러나지 않는 지하수로를 통해 밀려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콕 집어낼 수 없는 불온한 기운이 날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한숨과 함께 시작된 상념이 비브로스와 이블라에게로 향했다.

그러다 최초의 불온함인 알렉 브래든으로 옮겨갔다.

[역시 너는 특별한 애야! 그렇고말고. 아니, 아니지. 어쩌면 진짜가 들어있을 수도 있는 건가?]

그의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건 곧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로 돌아와 머물렀다.

또 수상한 소리가 들리나 싶어 축 처진 양의 귀를 양손 집게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애초부터 바깥에서 귀로 흘러드는 소리가 아니었다.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였다.

‘내가 미쳐가는 걸까?’

설사 그렇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작 미치지 않은 게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주섬주섬 편지지를 챙겼다.

‘여행하느라, 오랫동안 편지를 못 썼어.’

죽음의 숲에 있을 때는 꼬박꼬박 친구들에게 보낼 편지를 썼었다. 물론 진짜 보낼 순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그들이 살아있음을 믿고 싶었다.

마법가방에 넣어두었던 붉은색 밀랍인장으로 편지를 봉하다 픽 웃음을 터트렸다. 친구들의 말이 떠올랐던 탓이다.

[탈출에 성공해서 숨어살게 되면, 우리만 알아볼 수 있는 인장을 만들자!]

[그걸 뭐 하러 만들어?]

[귀족들이 문서나 편지에 가문의 인장을 밀랍으로 찍잖아. 우리도 그렇게 하는 거야!]

[멋있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아니 살아남은 친구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편지를 마법가방에 보관하고 침대에 꾸물꾸물 기어들어갔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베개에 머리가 닿은 지 불과 몇 분 만에 까무룩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

정신이 들었을 때, 어떤 상황인지 퍼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내가 뭘 하고 있었지.’

“언니, 노예들은 성이 없는데 왜 우리는 성이 있어?”

동생이 연한 개나리색 눈망울을 끔뻑이며 물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한여름의 더위에 머리숱이 빽빽한 정수리에서 열기가 부글거리고 있었다.

덥고, 습하고, 어지럽고,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아, 그래. 약을 만들고 있었지.’

모질게 채찍질 당한 수인족 친구들을 위해.

소량씩 감춰 두었던 약초를 한꺼번에 유발에 넣고 빻았다. 미리 꿍쳐두지 않았다면 주인님에게 들켰을 거다.

‘설마 깨서 이곳에 오시진 않겠지.’

여태 한 번도 그런 적 없지만 불안했다. 등에 남은 상처가 아직도 화끈거렸다. 몰래 친구들을 치료하고 있단 걸 들키면 이번에야말로 날 죽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모르는 척할 순 없어.’

잠이 부족해 머리가 몽롱한, 야심한 새벽. 그저 기계적으로 빻고, 물을 넣고, 끓였다.

‘내가 지켜야 돼. 친구들은 내가…….’

무력하게 눈물이나 흘리면서 주저앉아 있을 순 없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나는 독기 서린 눈을 뻑뻑하게 깜박였다.

동생은 옆에서 자꾸 귀찮게 굴었다.

“아, 언니이. 알려줘어.”

동생은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나를 자주 곤란에 빠트리곤 했다.

“네 방으로 돌아가. 너까지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싫어.”

“자꾸 떼쓸래? 언니 힘들어.”

목에 모래가 굴러다니는 것 같다. 입 안이 다 헐었다. 오랫동안 편한 숙면을 취하지 못한 탓이다. 편하게 누워 쉬고 싶었다.

그러나 눕더라도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눈을 감으려면, 친구들도 모두 편해진 밤이 되어야 했다. 독하게 입술을 사리물고, 핏발 선 눈으로 실린더의 눈금을 확인했다.

“알려주면 방으로 돌아갈게.”

동생이 강수를 둔다. 성 따위가 뭐라고 이렇게 궁금해하는 건지.

“우리는 원래 노예가 아니었잖아.”

결국 알려주고 만다.

“그리고 수인족들은 모두 성이 있어.”

“정말? 그럼 부모님은 노예가 아니었어?”

‘그런데 동생이 이 장소를 알았던가?’

여기는 몸을 숨겨서 약을 만들 수 있는, 나만의 은밀한 장소였다. 의문을 품은 내 의지와 다르게 입이 멋대로 움직이며 수긍한다.

“그럼, 당연하지.”

“뭐 하는 분들이었어?”

“기억이 잘 안 나.”

“에이, 모르면서 뭐가 대단해.”

“아니야, 어렸을 때 존경한 기억이 있는걸.”

“하긴.”

동생이 작은 손으로 내 뺨을 그러쥐었다. 나는 약물을 섞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너무 어렸을 때 일이지?”

돌연, 견딜 수 없는 위화감이 나를 꼼짝도 못하게 움켜쥐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눈앞이 핑 돌아 들고 있던 유리관을 놓쳤다.

“아……!”

아까운 약물이 바닥으로 스며들며 치마 앞부분을 조금씩 물들였다. 동생이 낯선 미소를 짓고 있다. 이렇게 어른스럽고 차분하게 웃는 아이가 아니다.

소리 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도 특별함까지 잊어버리면 안 돼. 알렉 브래든을 만나 상쇄반응이 일어났잖아. 그렇지?”

동생이 달래듯 말한다.

‘알렉 브래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그 사람은…… 갈색 머리의…….’

머리가 깨질 것 같다.

“흐윽.”

머리를 쥐고 흐느껴보지만, 동생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씨앗이 개화할 정도로 맑고 순수한 영혼인 거야. 그러니까 얼른 눈을 떠.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누군가에게 등을 밀리듯이 깨어났다. 나는 번뜩 눈을 떴다.

“허억!”

거칠게 숨을 집어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눈을 깜박였다. 땀이 후드득 떨어진다. 온몸이 땀범벅이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쳤다. 우연히 창밖으로 시선이 향했다. 해가 중천에 떠있고, 공기가 눅눅하다.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여긴 여관이었다. 나는 어제 검투사들이 많은 마을에 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마를 짚고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씨X, 뭐지?”

험한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젠장, 제기랄…….”

욕을 거칠게 씨불이며 이불을 걷었다.

피부에 시원한 공기가 닿자 정신이 들었다. 침대 옆 선반에 올려두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머리를 틀어쥐고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을 곱씹었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다.

‘보통 꿈이 아니야.’

좀처럼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몸이 의지를 떠나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샤, 샤워부터 하자. 그리고…….”

말끝을 흐리며 비틀비틀 욕실로 들어갔다.

냉수마찰을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땀으로 끈적끈적해진 잠옷을 마법가방에 쑤셔 넣고, 바람이 잘 통하는 얇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몸이 보송보송해지니 뇌가 뒤늦게 기지개를 켰다. 침대에 걸터앉아 허벅지에 팔꿈치를 댔다. 그리고 이마를 짚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카카나? 안에 있어?”

그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할릭이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대꾸했다.

“어, 왜?”

“계속 안 나오길래. 별일 없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일어날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나는 최대한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곧 나갈게.”

“알았어.”

문 근처를 서성이던 기척이 사라졌다.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 전신 거울이 있었다. 앞으로 가서 내 몸을 유심히 살폈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나, 분홍빛 홍조 같은 것을.

바뀐 부분은 없다.

갑자기 알렉 브래든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진짜면 증표가 있겠지. 그걸 찾으면 돼!]

다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내 몸에, 무슨 변화가 생기고 있는 거지?’

알렉 브래든도, 이 마을에서 들었던 정체불명의 소리도, 꿈도, 이제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미친 듯이 옷을 벗었다. 속옷까지 완전히 탈의하고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팔을 들어 겨드랑이를 확인하고, 가슴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뒤를 돌아 등의 일부분을 확인했다. 그것도 모자라 발가락 사이를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증표는커녕 점 하나 없다.

‘병증이 있나?’

혹시나 싶어 눈꺼풀을 뒤집어 안쪽 혈관을 확인했다. 수상한 건 어디에도 없다.

돌연 기운이 빠져 서 있기도 힘들어졌다. 알몸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멍을 때렸다. 한숨을 쉬며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쳐다봤다.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계속 안 나가면 걱정된다고 쳐들어올지도.’

용사들은 충분히 그럴 작자들이다.

나는 속옷부터 주워서 하나둘씩 꿰어 입었다. 거울을 마주보고 퀭한 얼굴에 촉촉한 화장수를 찾아 발랐다. 그럭저럭 봐줄 만한 얼굴이 되었다.

‘그냥 개꿈일 거야. 예민하게 굴지 말자.’

문을 열고 나가니 복도에 아다르가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안에서 뭘 하길래 그렇게 부산스러워?”

그는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시끌벅적한 1층 식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인상을 쓰고 침묵하자 아다르가 몸을 돌렸다. 검은 눈이 내 안색부터 살폈다.

“얼굴이 왜 그래? 잠 못 잤어?”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 별로야.”

그의 딱딱한 복근을 툭 치면서 계단으로 향했다. 아다르가 여유롭게 뒤를 쫓아와 손목을 잡았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다른 손으로 창백하게 식은 내 뺨을 쓸었다.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바닥이 서늘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복잡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내 얌전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무슨 일이 있다고 여긴 아다르가 심각한 눈으로 허리를 숙였다.

“발정기? 얼굴이 말이 아니야, 너.”

“그건 다음 주.”

“방에서 더 쉬든가.”

“곧 여름이잖아. 나는 더위를 많이 타거든. 그래서 그래.”

아다르가 내 얇은 옷차림을 살폈다.

“지금도 더워?”

“조금. 못 견딜 정돈 아니야.”

“시원한 거 만들어줄게.”

내 손을 소중하게 그러쥔 아다르가 계단으로 에스코트했다.

‘한눈팔면 데굴데굴 굴러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는 걸 보면 그런 것도 같다.

멀리서 첼러스가 걸어왔다. 그가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아다르를 본다.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는 침묵 가운데 테이블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이미 모두가 자리에 앉아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야채 메뉴는 여기에 있어요, 카카나.”

메뉴판을 꺼내준 첼러스가 친절하게 손가락으로 가리켜주기까지 했다. 스노아가 얼음물을 슬그머니 내 쪽으로 밀었다.

“열 있는 거 아냐?”

할릭은 대놓고 내 이마의 열을 재고 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불안과 공포로 까맣게 타들어가던 속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이렇게 단순한 인간이 되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얼굴이 풀어지자 그제야 용사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몄다. 나는 그들이 챙겨주는 과일과 야채를 열심히 씹어 삼켰다.

내게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든, 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다르는 약속을 지켰다.

일주일이 지나 발정기가 시작되자, 어디서 부엌을 빌린 건지 나에게 차가운 요리를 만들어 바쳤다.

용사들은 퀄리티미엄을 찾으러 꾸준히 여관을 나섰다.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정보가 없어.”

할릭은 지도를 내게 직접 보여주기까지 하며 한탄했다.

“보여? 여기가 마을이야.”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손가락이 작은 점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우리가 뒤져야 하는 숲.”

그가 지도 전부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해석해 보았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투기대회뿐이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몸이 얼른 나아야 도와주기라도 할 텐데.’

아직 발정기가 끝나지 않았다. 때문에 한 명씩 호위 겸 간호로 내 옆에 붙어 있었다. 오늘은 아다르가 당번이었다.

‘차가운 요리만 먹으면 배탈 난다고 하더니, 오늘 메뉴는 스튜네.’

군말 않고 건더기를 오물오물 씹었다. 아다르가 능숙하게 입가를 닦아준다. 그는 용사 중에서 제일 제멋대로인 성격을 가진 주제에 이상하게 돌보는 걸 잘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처럼 생겨가지고…….”

“나?”

아다르가 스튜를 후후 불어 식히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는 게 아주 황당한 소릴 들었단 얼굴이다.

“그래, 너.”

“내 얼굴이 뭐 어때서?”

“아무리 좋게 봐도 네 외모가 상냥한 편은 아니잖아? 첼러스를 봐.”

“넌 꼭 첼러스랑 날 비교하더라.”

아다르가 불만스럽게 뒤끝 있는 말을 했다.

“첼러스가 그렇게 좋냐?”

“너희 둘이 제일 극명하게 이미지가 갈리니까 하는 소리지.”

나는 잠시 적당한 말을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빛과 어둠 정도로.”

“진짜 너무하네.”

그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얼굴로 툴툴거렸다. 나는 식은 스튜를 받아먹으며 아다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부담스러운지 그의 사나운 회색 눈썹이 위로 슥 올라갔다.

“왜 자꾸. 뭐.”

“쳐다보는 것도 안 돼?”

“골골 앓더니 살아나자마자 기가 폈어, 아주.”

아다르가 생글 웃었다.

“뭐, 나는 이편이 좋지만.”

“그렇게 웃으면 주변에서 재수 없다고 안 해?”

“잘생겼다곤 하던데.”

아다르가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뻔뻔하지.’

순수하게 감탄하며 그를 위아래로 살폈다. 쭉 뻗은 기럭지에 하얀 피부, 좀 더럽긴 하지만 나름 야성적인 매력이 있는 눈매까지.

심지어 전신이 근육질이다. 어쩐지 진 기분이 든다.

‘어디 빠지는 데가 없긴 하네.’

재수 없어.

전투적으로 건더기를 씹어 삼킨 후 말했다.

“착각할까 봐 말해주는데, 너 잘생겨서 쳐다본 거 아니야.”

“흐음?”

“다른 애들보다 간호하는 게 익숙해 보여서 그런 거지. 제일 안 그럴 것처럼 생겨서 조신하게 행동하니까 신기하잖아? 거울을 봐. 네가 누굴 돌봐줄 상인지. 목을 따는 거면 몰라도.”

아다르도 그 말엔 반박할 수 없었는지 조용해졌다. 그가 거의 남지 않은 스튜를 삭삭 긁어서 먹여주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동생이 아팠었어. 꽤 오래전 얘기긴 하지만, 그때 돌봐줬던 버릇이 남았나 보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털어놓듯, 허심탄회한 어조로.

나는 퍽 놀랐다.

“동생이 있었어? 전혀 몰랐네.”

“날 닮아서 귀여운 녀석이었지.”

‘널 닮아서 귀엽다고?’

아다르가 킬킬거리며 말을 이었다.

“놀리면 울지 않으려고 부들부들 떠는 게 얼마나 귀여웠는데.”

‘아다르의 애정은 괴롭히고 싶은 마음과 비례하는 건가.’

나는 퍽 소름끼치는 생각을 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더불어 구제불능이란 뜻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주었다. 그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몸이 약하지만 않았어도 여기저기 데리고 쏘다녔을 거야.”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한참 전 얘기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알면 징그러워할걸.”

어쩐지 흐릿한 어조다. 나는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상기해내곤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약한 몸인데 제국의 음모에 휘말려서 죽었지. 별로 좋은 추억거린 아니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에게 애틋한 관계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용사들도 사람인데.

‘그러고 보니 우리가 남매 같다고 스노아가 말한 적이 있었지.’

죽음의 숲에 있는 내 저택에서 있었던 일일 것이다.

꽤 한참 전 일인데 생생하게 생각나는 게 조금 신기했다. 내 기억은 잊고 싶은 것이 대부분이라, 작위적으로 흐리멍덩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용사들과의 기억은 잊고 싶지 않은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잘 모르겠다. 아다르가 불쑥 말했다.

“넌 내 동생이랑 닮았어.”

나는 물을 마시다 말고 눈을 치떴다.

“그래서 신경을 많이 썼지. 처음엔.”

‘처음엔?’

눈가를 구기며 반문했다.

“넌 지금도 나한테 신경 많이 쓰잖아.”

그가 허를 찔린 듯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린다.

“가차 없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널 보면 네 동생이 나랑 닮은 구석은 조금도 없을 것 같은데.”

“성격이 닮았어. 기대는 건 죽어도 싫어하고 황소고집이어서 도통 속 얘기도 안 하고…….”

“너 그냥 내 욕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아다르가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쟁반을 근처 선반으로 옮겼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마간 시선이 마주쳤다.

햇빛이 가득 비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밤하늘 같다고만 생각했던 검은 눈이 흑요석처럼 보였다. 단면이 세공한 보석처럼 까맣게 반질반질 빛나고 있다. 편하게 내려온 회색 머리카락에 가려진 탓에, 짙은 눈매가 조금쯤 순하게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사방이 지나치게 고요해서 내 심장소리가 잘 들렸다. 평소보다 조금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입 안이 말라서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했나.’

아다르와 둘이 있는데 그럴 일이 뭐가 있나 싶지만 몸은 사정이 다른가 보다. 나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아다르가 그걸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얼른 혀를 감추었다. 왜인지 민망했다.

아다르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내 땋은 머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나도 참 궁금해.”

그가 혼잣말을 했다.

시선은 여전히 내 입술 근처에 고정되어 있었다. 더운 숨이 가볍게 벌어진 그의 붉은 입술 사이를 천천히 지나다녔다.

눈을 감고 등을 침대 헤드보드에 기댔다. 아다르와 나의 가까운 거리가 갑자기 의식되었던 탓이다.

“그동안 나한테 친밀하게 대했던 거.”

나는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전부 내가 동생이랑 닮아서 그런 거였어?”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궁금해서 물은 거였는데 탓하는 말투가 나갔다. 내가 물어놓고 조금 당황했다.

나는 일부러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래서 아다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조용한 공간에 아다르와 나의 숨소리가 어지러이 섞였다. 발정기 억제제의 달달한 냄새와 초여름의 땀 냄새가 훈훈한 공기 사이를 매끄러운 뱀처럼 은밀하게 지나다녔다.

분위기는 한층 더 긴장감이 맴돌았다. 생침을 삼키자 꿀꺽,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그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그게 왜 궁금했을까?”

아다르가 물었다. 낮은 목소리에 기묘한 열기가 들끓고 있었다.

페로몬이라도 맡은 듯 심장박동이 거세졌다. 그의 무게감이 근처로 다가왔다. 딱딱하고 굵직한 손가락이 내 뺨에 난 솜털을 간지럽히듯 스친다. 목을 웅크리며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지척에 있던 아다르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콧잔등이 스칠 것 같은 거리다.

왜 이렇게 가까이 왔냐고 한 소리 해야 하는데, 도통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나를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었다. 속마저 시커먼, 아다르의 완벽한 어둠이 머리 위로 드리우는 밤처럼 나를 지배했다.

“뭔데. 뭐. 왜.”

딱딱하게 굳은 혀를 이로 한 번 짓씹고 간신히 말을 꺼냈다. 아다르가 사나운 눈으로 날 살피더니, 허스키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네게 잘 대해준 게, 모두 내 여동생을 닮았기 때문이다?”

어조에 위험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다. 빨리 부정해야 한다.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을 덧붙였다.

“내가 언제 단정 지었어? 그런 거냐고 물어본 거지.”

“답해줘?”

“어?”

“답해줬으면 좋겠냐고.”

고민하다가 느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다르가 한쪽 입꼬릴 위로 당기며 방만하게 웃었다.

“전혀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야. 어떤 점에서 어떻게 다른지까지 세세하게 알려줄까? 원해?”

이번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씩 웃은 아다르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내 머리를 툭 쓰다듬더니 선반에 올려두었던 쟁반을 챙겨 들고 방을 나갔다.

나는 그가 나간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곳의 투기대회는 유명했다.

덕분에 많은 귀족들이 관중석을 채웠다. 평소에도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이 바글거렸던 마을이 대회가 가까워지자 이제는 미어터질 기세로 떠들썩해졌다.

내 신경이 최고조로 곤두섰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용사들은 간만에 즐길 거리가 생긴 것에 신났다.

“유명해져서 그런지, 강한 사람이 꽤 모였다는데?”

할릭은 신이 나서 투기대회에 관한 정보를 퍼 날랐다.

“아무리 강해봤자 뭐 얼마나 강하다고?”

나는 회의적이었다.

‘과연 용사들이 투기대회에서 신나게 놀 수 있을까?’

어림도 없지. 나는 팽 콧방귀를 뀌었다.

“쉽게 나가떨어지진 않을 거 아니야!”

할릭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해맑은 얼굴을 했다.

“버텨주기만 해도 좋아!”

그거면 차라리 세계 최강의 금속질인 미스릴로 만든 허수아비를 치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어쨌든, 할릭뿐만 아니라 모두 신나 있었다. 스노아는 조금 귀찮은 낯이었지만, 첼러스마저 기대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는 단정한 분위기를 흐트러트리는 법이 없었지만, 롱소드를 손질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투기대회에서는 개인이 소지하고 있는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데도 그랬다.

‘항상 혼자 수련했으니까 달가운 건 당연한 건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 코가 석 잔데 지금 누굴 걱정하냐.’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지나 궁리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첫 번째 경합이 벌어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사실 퀄리티미엄이고 뭐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마을 규모의 투기장치곤 대기실이 넓네.”

할릭이 휘파람을 불며 주위를 살폈다. 나는 멀미하는 사람처럼 파랗게 질린 얼굴로 섰다. 우락부락한 사람들이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모여 있었던 탓이다. 주위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대기실까지 들어온 거지.’

그냥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였다.

오늘이 대회 날이라며 할릭이 아침부터 소리를 질렀는데, 아마 그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용사들에게 이리저리 질질 끌려 다니다가 여기까지 왔다.

용사들이 감싸듯 내 주위에 섰다. 덕분에 다른 검투사들과 부딪힐 일은 없었지만, 찌르는 듯한 시선 때문에 속이 더부룩했다.

“괜찮아?”

할릭이 걱정하는 눈으로 물었다. 그의 말이 ‘저놈들의 눈알을 다 뽑아줄까?’ 정도로 들렸다.

나는 최선을 다해 고개를 저었다.

“이리로 와 봐. 여기 있어.”

그가 큰 몸으로 나를 최대한 감싸며 얘기했다.

“좀 낫지?”

“이러면 내가 너희들 약점이라는 게 다 들통 나잖아.”

나는 새하얗게 마른 입술로 걱정을 늘어놓았다.

“우리가 다칠까 봐 그래?”

할릭이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뭔 개소리야?’

나는 꿈도 꾸지 말라는 듯 얼굴을 구겼다.

“내가 너희들 걱정을 왜 해?”

“그럼?”

“내가 목표가 될 거 아니야.”

상상만으로도 짜증이 나서 지끈거리는 골을 부여잡았다. 첼러스가 대기실에 준비되어 있던 물통을 들고 왔다. 쇠로 만들어져서 무거운지, 내게 직접 먹여주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야금야금 물을 받아마셨다. 첼러스가 턱에 흐르는 물을 손으로 대충 훔쳐 주며 얘기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처리하겠습니다.”

막겠다, 도 아니고 처리하겠단다. 조금 과격하긴 하지만 안심이 되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실이 이 정도로 과포화 상태가 된 건 첫 번째 경합의 방식 때문이었다. 열 팀만 남을 때까지 전투를 계속해서 사람 수를 쳐내는 대결이었다.

나는 내 손목에 감긴 붉은색 끈을 내려다보았다. 각 팀마다 색이 다른 끈을 감고 있었다. 팀 전원의 끈이 끊어지거나 잘리면 탈락이었다.

나는 이 애물단지를 배부 받을 때 어떤 안내를 받았는지 떠올렸다.

《 천을 자르는 방법은 자유입니다. 손목을 잘라도 되고, 협박을 해도 되며, 상대를 죽여도 됩니다! 》

‘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살다 살다 투기대회에 참여하게 되다니, 내 인생은 대체 얼마나 더 파란만장해질 참인 걸까.

거칠고 흉포한 검투사들 사이에서 자그맣고 물렁물렁한 나는 단연코 눈에 띄었다. 관심을 받는 건 스노아도 마찬가지지만, 체구까지 작은 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검투사들 중 대부분은 이미 나를 먹잇감으로 찍었다.

눈만 봐도 안다.

‘마법가방을 들고 올 수 있었으면 나도 약물로 어떻게든 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들지만 뭘 어떻게 하겠는가.

대회 진행을 돕는 관리자가 우리를 이끌었다. 투기장으로 향하는 길은 넓고 긴 통로로 되어 있었다. 벽과 바닥에 있는 거치대에 무기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고문실 같네.’

검투사들이 손에 맞는 무기를 신중하게 고르는 동안, 용사들은 제일 가까운 데에 있는 무기를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나는 멀뚱히 서 있었다.

‘그래도 뭐든 잡아야 하지 않을까.’

망설이다가 방패 앞으로 갔다. 맨손으로 대회장에 올라가면 민망하니 구색이라도 맞추자는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더럽게 무거웠다. 나는 조금 낑낑대며 방패를 들었다.

‘내가 수인족이 아니었으면 들지도 못했을 뻔했어.’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스노아가 방패를 검지로 두어 차례 두드렸다. 무게가 베개 수준으로 가벼워졌다. 경량화 마법이었다.

감동해서 고개를 들자 스노아가 날 향해 찡긋 윙크했다.

능력 있고, 예쁘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니 천사처럼 보였다. 나는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방패를 팔뚝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10초 후 대회장으로 입장합니다! 사람이 많으니 여기서 꼴사납게 밟혀 죽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천장 모서리에 달려 있는 마도구에서 안내자가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내가 우왕좌왕하는 동안, 할릭이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우앗!”

“카카나는 작으니까. 발에 차이게 할 순 없지.”

“그렇게 작진 않거든!”

놀리는 할릭의 머리칼을 쥐어뜯을 생각으로 움켜쥔 동시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5, 4, 3.

내 죽음까지 앞으로 몇 초 남았는지 알려주는 것 같다. 나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2, 1!

빛이 들어오는 통로의 끄트머리에서 철창이 위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북쪽 방향이다.

와아아아아아―!!

검투사들이 귀가 떨어져 나가는 함성을 내지르며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원형경기장에 있는 네 군데의 구멍에서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소리가 울리는 동굴 같은 통로를 벗어나자 눈이 부시도록 쨍한 햇빛과 경기장이 드러났다.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너무 커서 머리가 왱왱거렸다. 나는 어지러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게 다 사람이라고?’

투기장은 마탑의 강당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너무 넓어서 거리 감각이 이상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관중석을 빽빽하게 채운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인구수에 압도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땅을 보고 있는 게 나았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원형경기장에 모인 듯한 광경은 한 번 본 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당장 싸우고 싶어 안달인 할릭의 어깨를 퍽퍽 쳤다.

“내려줘! 당장!”

“어? 난 괜찮은데.”

나는 그의 목을 두 손으로 틀어쥐고 짤짤 흔들었다.

“내가 안 괜찮아, 내가! 날 들고 싸우기만 해봐! 죽여버릴 테니까!”

“괜찮겠어? 사람이 너무 많은데…….”

“아, 빨리!”

“안 넘어지게 조심해야 돼.”

할릭이 안절부절못하며 날 땅에 내려주었다. 얘는 투기장까지 와서 대체 뭔 소릴 하고 있는 건가. 넘어지지 말라니, 여기가 여관이면 말을 안 한다.

“가 봐. 카카나는 우리가 보고 있을게.”

아다르가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베테랑 검투사들은 여유 있게 싸우고 있는 반면, 신참 검투사들은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었다. 모두의 먹잇감이 되기 때문이다.그리고 그건 내 미래이기도 했다.

할릭이 그렇게 되기 전에 달려드는 검투사들 무리로 몸을 던졌다.

“이야아아아!”

그와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 검투사가 달려들었다. 가시가 박힌 무시무시한 쇠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표정이 얼마나 험악한지 내 끈을 노리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저 방망이로 내 대가리를 터트리려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 놀라서 찢어져라 욕지거리를 했다.

“아악, 씨X!”

첼러스가 그림자처럼 앞으로 나서서 남자의 가슴팍을 베었다. 분명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갑옷과 그 안의 살까지 단번에 베어냈다. 종이 잘라내듯이.

“허억!”

남자가 질겁한 채 마지막 숨을 들이켠다.

그리고 내게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무너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끝난 것이다. 내가 선 땅 근처까지 핏물이 떨어졌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첼러스가 검을 털어내며 뒤를 돌았다. 핏방울 하나가 그의 새하얀 뺨에도 튀어 있었다. 그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등으로 슥 문질러 닦아냈다.

“괜찮으십니까?”

평소처럼 순하고 성스러운 얼굴이다. 그렇기에 잔인한 검과 핏물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나는 입술을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를 내려다보는 첼러스의 차분한 눈이 인간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용사들은 40년간 이어지던 전쟁을 종결시킨 사람이야.’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전쟁 한복판을 누빈 살수들. 그게 용사들의 기원이다. 어떻게 여태 인지하지 못했을까.

다리에 힘이 풀려서 휘청거렸다.

“이런, 카카나.”

첼러스가 급히 내 팔을 부축해주었다. 그가 덜덜 떨리는 내 몸을 느끼더니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곤 곧장 들고 있던 검을 등 뒤로 숨겼다.

“죄송합니다.”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얼굴로 말했다.

“검투사들은 끈질기기에, 확실히 베어놓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어 그랬습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또 온다.”

이미 다섯 명 정도 때려눕힌 아다르가 첼러스 등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첼러스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으나, 하는 수 없이 검을 들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검을 내지르는 사람의 목을 쳐 기절시킨 후, 롱소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다정했던 호수빛 눈망울이 싸늘하게 식었다.

롱소드가 검투사의 손목으로 짓쳐 들어가는 순간, 스노아가 내 눈을 가렸다. 촤악, 피가 튀기는 소음 사이로 스노아의 청명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사람이 너무 많네요. 검투사들이 블랑고가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칼을 갈았나 봐요.”

“뭐, 뭐라고?”

되묻는 순간, 내 몸이 위로 휙 날아올라갔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내가 진짜 하늘을 날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오줌을 지려버릴 뻔해서 허벅지를 재빨리 그러모았다. 세상이 핑글핑글 돌았다. 토할 것 같아서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소리가 더 잘 들렸다.

아래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끔찍한 비명소리가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살려줘!”

“아악, 아아악, 잘못했어! 제발!”

“괴, 괴물……. 아아악!”

별로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왜 아직도 떠 있는 거지? 젠장, 얼마나 높이 던진 거야!’

나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와아아아― 비명을 지르는 관광객들과, 내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과, 날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검투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땅이 한참은 먼 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숨을 멈췄다.

“흐, 흐으으으…….”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축축해진 눈망울에서 미지근한 눈물이 방울방울 흩날렸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몸이 밑으로 쑥 꺼지자,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카카나!”

누군가 날 받았다. 나는 여전히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카카나, 괜찮아요?”

스노아였다.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이런.”

스노아가 나를 안은 채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잡아라!”

수십 명의 발자국 소리가 우리의 뒤를 쫓는 것이 들렸다. 나는 멈추고 있던 숨을 간신히 몰아쉬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어금니를 악문 채 물었다.

“날 던진 놈이 누구야?”

“카카나, 괜찮아요?”

“됐고. 이름.”

스노아가 방패로 검을 막으며 대답했다.

“아다르예요.”

나는 스노아의 품에서 냉큼 내려왔다.

“카카나!”

나는 그의 부름을 무시하고 주위를 살폈다. 근처에 있는 아다르가 포착되었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가, 자기에게 뛰어오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야!”

아다르가 내 등 뒤에 선 검투사에게 검날을 날리며 뛰어왔다.

“너 미쳤…….”

“야, 이 개XX야!”

거리가 가까워지자마자 그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힘을 다해 흔들었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짰으니 아마 꽤 아플 것이다.

아다르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내어주다가, 다섯 명의 검투사가 우리를 에워싸자 입 안으로 욕을 씨불였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죽일 기세로 흔들었다.

“으악, 내 머리!”

아다르가 머리채를 잡힌 와중 제게 달려드는 검투사 한 명의 목을 단검으로 관통시켜 죽였다. 남자가 꾸륵거리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철푸덕 쓰러졌다.

촤악―

피가 솟구쳤으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공중에 던져진 순간 내 정신은 이미 한 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눈에 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 감히 날 던져?!”

“그럼 어떡해! 포위돼서 다진 양고기가 되기 직전이었는데!”

아다르가 다른 손으로 내 허리를 끌어안은 다음,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며 말했다.

“죽어, 죽어어엇!”

“으악, 나중에 죽어줄게, 나중에!”

그가 들고 있던 단검을 대충 바닥에 버렸다. 그리곤 피가 흥건한 손바닥을 바지에 열심히 문질러 닦았다. 나는 여전히 그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있었다.

“카카나, 제발! 착하지?”

“닥쳐!”

“미안, 응? 잠깐만 힘 좀 쓸게?”

그가 피를 닦은 손으로 내 두 손을 포박했다. 지랄발광을 하며 어떻게든 풀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되레 날 구속하느라 아다르의 손아귀에 힘만 더 들어갈 뿐이었다.

그가 최소한의 힘만 쓰려고 애쓰며 날 설득했다. 내가 다칠까 봐 쩔쩔매는 얼굴이었다.

“가만히 있어! 너 이러다 손목에 멍든단 말이야!”

“상관없어!”

그때 낫처럼 생긴 무기가 아다르의 목으로 짓쳐들어왔다. 자리에 주저앉아 공격을 피한 아다르가 야차처럼 돌변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 씨X.”

짜증이 있는 대로 난 얼굴이다.

“이 날파리들이 진짜!”

그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창 하나를 아무렇게나 집어 들었다. 그리곤 있는 힘을 다해 후방으로 던졌다.

쐐액!

화살처럼 날아간 창이 검투사 세 명의 힘줄을 동시에 관통해 고꾸라지게 만들었다. 아무리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지만 그 장면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다르가 나를 꼼짝 못하게 포박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열 명이 넘는 검투사가 우릴 추적하고 있었다.

그가 전속력으로 뛰었다.

“첼러스!”

아다르가 이름을 부르며 나를 휙 던졌다. 그렇게 머리채를 쥐어 잡히고 또 날 던진 것이다.

“끄아아악!”

그나마 높이가 낮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다르는 나름대로 신경 써서 던졌겠지만, 인형마냥 던져진 내가 기특하게 여겨줄 사항은 아니었다.

첼러스가 나를 품에 안정적으로 받아 들었다.

“손목이 왜 이렇습니까?”

그가 시퍼렇게 멍이 올라오고 있는 내 손목을 보고 인상부터 찡그렸다.

“아다르 짓이야.”

나는 망설임 없이 일러바쳤다. 첼러스가 진득한 한숨을 내쉬며 나를 제대로 고쳐 안았다.

“대회가 끝나면 그와 대화를 해보겠습니다.”

조용히 잘못을 따지는 첼러스는 장난 아니게 무섭다. 고소하게 생각하며 흥분했던 마음을 좀 진정시키는데, 할릭이 걸어왔다. 지루한 얼굴이었다.

“야, 너희들이 전부 날뛰니까 너무 빨리 끝나고 있잖아.”

첼러스가 한 손으로 날 안은 채 검투사와 검을 몇 번 주고받다가, 단숨에 베어내며 몸을 돌렸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습니까?”

“애들 좀 불러봐.”

고개를 끄덕인 첼러스가 죽은 검투사의 몸에서 쇠구슬을 꺼내 아다르에게 던졌다. 본능적으로 구슬을 막은 아다르가 의아한 얼굴로 이쪽을 본다. 할릭이 손짓했다.

스노아는 이미 귀찮은 검투사들을 피해 첼러스 근처로 와 있었다. 용사들이 일방적으로 살육을 해대니, 검투사들은 이제 쉽게 덤비지 못하고 있었다.

한자리에 모인 용사들이 틈을 타 진지하게 의논을 시작했다.

“우리 한 명한테 몰아주기 하자.”

할릭이 제안했다.

“어떻게?”

“가위바위보를 해서 한 명은 싸우고, 세 명은 구석에서 카카나랑 놀기.”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할릭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매우 진지한 얼굴로 이 중대한 사안에 임하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다른 용사들의 얼굴도 살폈다. 다들 턱까지 만져가며 고민하고 있다.

“좋아, 져놓고 나중에 딴소리 하면 안 된다.”

“빨리 하자. 팀끼리 연합해서 달려들 생각인 것 같은데.”

할릭이 보라색 팀과 분홍색 팀을 턱짓하며 말했다.

“가위바위!”

아다르가 지체하는 법 없이 신호탄을 던졌다. 모두가 투기대회가 시작된 후로 가장 전력을 다해서 손을 내밀었다.

“보!”

“끄하하하학!”

우승자는 아다르였다.

“으악, 안 돼!”

할릭이 머리를 움켜쥐며 절망했다.

“꼭 이런 건 제안한 사람이 진다니까!”

세상이 무너진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여전히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만 벌리고 있었다. 아다르는 혼자 신나서 우릴 둘러싼 검투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아, 카카나. 책 읽을래요?”

스노아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제안했다.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었다.

“어엉?”

멍청하게 되묻자 그가 주머니를 뒤적이며 대답했다.

“제가 책을 가져왔어요, 카카나.”

“책. 책이라고?”

나는 그제야 말을 알아듣고 얼굴을 구겼다.

“심심하니까 책이나 읽어요.”

“여기서?”

“바닥에 깔 천도 가져왔답니다.”

그걸 챙겨온 것은 둘째 치고, 대체 어디에 챙겨왔단 말인가?

그의 허리춤에는 우아하고 섬세한 몸과 도통 어울리지 않는 보여주기 식인 검이 달려있었고, 하늘하늘한 천 옷은 마냥 판판했다. 그의 낭창한 몸에 두꺼운 책이나 천 무더기를 숨겨놓을 만한 공간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스노아는 꿋꿋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입구가 터지지 않고서야 꺼낼 수 없는 두꺼운 하드커버 책을 주머니에서 뽑아냈다.

‘내가 뭘 본 거지.’

눈이 침침한가 싶어서 눈두덩을 비볐다. 스노아가 내 손을 가져가더니 약초학 책을 들려준다.

“마법가방과 같은 원리예요.”

“이런 거 들고 와도 되는 거야?”

“그럼요. 들고 오면 안 되는 건 ‘무기’뿐이었잖아요? 책은 정말 얌전한 편이죠.”

달콤한 디저트를 곁들여 차를 마시는 귀부인처럼 부드럽게 대꾸한 스노아가 바닥에 천을 깔았다. 그리고 정말로 그곳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손수건으로 뺨과 손의 피를 대충 닦아낸 첼러스마저 검을 내려놓은 채 바닥에 앉았다. 할릭은 이미 맨바닥에 앉아 있었다.

엉겁결에 같이 앉긴 했지만,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가 싶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주위는 여전히 지옥이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광기에 물든 관중들은 더 자극적이고 잔인한 장면을 보여 달라 아우성이었다.

검투사들은 시뻘게진 눈으로 적의 몸을 난도질해 끈을 빼앗기 바빴다. 그 가운데에, 스노아가 소풍 나온 사람처럼 천을 깔고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스, 스노아. 이건 좀…….”

“왜요?”

“위험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날벌레 잡듯이 검투사를 상대하고 있는 아다르를 바라보았다. 아까처럼 무식하게 달려드는 게 아니라 팀끼리 띄엄띄엄 공격해오는 지라, 아다르가 혼자 상대하기엔 되레 편해보였다. 대련이라도 해주는 것 같다.

피범벅인 첼러스와 할릭은 일광욕 하는 것처럼 나른하게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고개가 자연스럽게 저어졌다.

“그런데 왜요. 할 것이 없으니 책을 읽을 뿐인데요.”

“상황이 좀, 많이 거시기하지 않아?”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이나요?”

스노아가 물었다. 아니라고 부정을 못 하겠다. 검투사들이 싸우는 것마저 잊고 귀신이라도 본 듯한 낯으로 우릴 구경하고 있지 않은가.

“책을 읽으면 신경 쓰이지 않을 거예요.”

“왜?”

“카카나가 흥미로워할 법한 책을 가져왔거든요.”

나는 기함했다.

“야, 누가 들으면 내가 책벌레인 줄 알겠다.”

“아닌가요?”

스노아가 태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당당한 질문에 기가 눌린 나는 새삼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약초 만질 때를 제외하곤 항상 책을 읽긴 하네.’

끄응, 소릴 내며 뺨을 긁적였다.

“맞죠?”

“흐, 흥미로운 것도 상황이 받쳐줘야 느낄 만한 거지 투기장에 이런 허접한…….”

나는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평범한 약초학 책이 아니네?’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사용하고 남은 약초 찌꺼기들, 혹은 활용도가 낮아 버려지기 일쑤인 부위들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용법이 나와 미묘하게 달랐다.

“재미있죠?”

“그러네.”

나는 내가 책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대답했다.

“이런 곳에선 못 읽는다면서요.”

스노아가 짓궂게 말을 걸었다.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아.”

나는 눈을 몇 차례 깜박였다.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잖아.”

“그렇군요. 역시 카카나는 저랑 비슷할 줄 알았어요.”

“이제 말 시키지 말아 봐.”

스노아가 쿡쿡 웃었다. 나는 무시하고 책에 집중했다.

이제 대부분의 검투사들이 아다르에게 달려들기는커녕 도망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앉아있는 장소 근처만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나는 금세 무아지경이 되어서 책을 읽었다.

반 정도 읽었을 무렵, 스노아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왜?”

나는 물에 적셨다가 얼려서 사용하는 하딜라이카 약초를 저자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어서 초조하게 물었다.

“거의 끝나가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려다가, 스노아에게 막혔다.

“보지 않는 게 좋을걸요.”

“벌써 끝나간다고?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빨리 가서 다행이네요.”

나는 도로 책에 코를 박았다. 어찌 됐든 끝나진 않았다는 거 아닌가.

“끝나면 말해줘.”

잠시 후, 아다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곳으로 걸어왔다.

“대단하다, 대단해.”

책을 읽겠다고 선언한 스노아를 괴물 취급한 과거의 나와 비슷한 어투였다. 그러나 이제 그런 건 내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한 줄이라도 더 읽으려고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일어나. 거의 끝나가서 정리해야 돼.”

결국 아다르가 내 팔뚝을 잡아 일으켜서, 제 쪽으로 끌고 왔다. 자리가 비자 스노아가 천을 탁탁 털어 접는다.

“이런 데서 책이 읽혀?”

아다르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말 시키지 마.”

중요한 순간이다. 저자의 주장과 내 주장 중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일까 판단해야 했다.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첨예하게 부딪쳤다.

“야, 카카나. 우리 이제 들어가야 돼.”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기실로 향하는 입구가 어딘지도 모른 채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아다르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그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아서 길을 이끌었다.

“카카나, 앞에 무기.”

나는 넘어지기 일보 직전에 바닥에 널브러진 무기를 피해갔다.

“방패도 이리 주십시오.”

첼러스가 내 팔뚝에 걸려 있던 방패를 빼갔다.

대기실에 도착하자, 앉아있는 동안 용사들이 내 손목에 묶여있는 끈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연행되듯이 여관으로 돌아왔다.

아다르의 인내심은 결국 밥상머리 앞에서 무너졌다.

“그만!”

아다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책을 뺏어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분노가 이글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고 흠칫 굳었다.

‘저, 저 얼굴은…….’

약초 연구를 하느라 시도 때도 없이 밥을 굶었던 초창기의 나에게 자주 짓곤 하던 얼굴이다. 이미 호되게 당한 전적이 있다. 여기서 물러서는 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낫다.

애달픈 눈으로 책을 바라보다가, 억지로 포크를 들었다. 암울한 심정이 되니 음식이 맛없게 보인다.

“얼른 먹어.”

그가 닦달하는 부모님처럼 물 컵을 근처에 놔주며 채근했다. 포크로 음식을 쿡 찔렀다. 얇게 편 밀가루 반죽에 야채와 바질, 파르메산 치즈를 넣고 찐 음식이었다.

한 입 떠서 우물거리자,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입맛이 조금쯤 돌아올 기미를 보였다.

“너는 적당히 하는 법을 몰라서 탈이야.”

아다르가 잔소리를 했다.

“밥은 챙겨 먹어야 될 거 아니야. 건강할 때 몸 챙겨야 한다는 걸 몰라서 그래?”

“알았어요, 엄마.”

툴툴거리자, 아다르가 고개를 들었다.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다. 나는 뜨끔해서 눈을 깔았다. 그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속을 달래며 말했다.

“엄마?”

“미, 미안. 워낙 가족 같아서…….”

“그럼 남편이라고 부르지 왜?”

생각도 못 한 말에 그만 사레가 들렸다. 괴롭게 기침하니, 첼러스가 아다르의 뒷목을 잡아 강제로 의자에 앉혔다.

“너 일부러 세게 쥐었지?”

아다르가 뒷목을 주무르며 신경질을 냈다. 첼러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꼿꼿하게 음식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얼른 먹고 방으로 튀어야겠다.’

나는 전투적으로 남은 야채들을 입에 쓸어 담았다. 열심히 삼키고 물까지 한 모금 마신 후에 손을 내밀었다.

“책 돌려줘.”

삭삭 긁어먹은 내 접시를 확인한 아다르가 책을 돌려주었다.

“다음번에도 이러면…….”

히히 웃으며 책을 품에 가져오려는 순간, 아다르의 말이 멀어졌다.

“응?”

고개를 기울이며 한쪽 귀에 손을 가져간 순간,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이 작살처럼 귓구멍에 쏘아 박혔다.

“으윽!”

고통스러운 신음을 참기 힘들었다. 발작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당탕―

뒷무릎에 차인 나무 의자가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다섯 명의 용사들이 동시에 날 올려다보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별일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소리를 견디기 힘들었다. 귀를 틀어막고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식기로 유리그릇을 긁는 소리 같았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 용사들이 내 곁으로 와 뭐라고 말을 걸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끄으으으!”

어금니를 악물고 소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삶의 마지막 비명을 쥐어짜내는 필사적인 비명은 한참 후에 죽음을 맞이하듯 뚝 끊겼다.

“헉, 허억…….”

나는 식은땀이 흥건해진 얼굴로 바닥을 짚었다. 무릎에 힘이 풀렸다. 비명의 여파가 머릿속에서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기겁한 첼러스가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너희는 못 들었어?”

벌게진 얼굴로 물었다. 다들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다.

가게에 있던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다들 나를 흘낏거리고 있다. 그러나 눈에 서린 감정은 호기심뿐이다. 나처럼 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겠다는 얼굴은 없었다.

‘그렇게 큰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는데.’

아르모어가 이마에 맺힌 내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군.”

“그, 그냥…….”

나는 하얗게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훑으며 말했다.

“갑자기 이명이 들려서, 조금 놀랐어요.”

“…….”

나를 지탱해주고 있던 첼러스의 손을 떼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쓰러져있던 의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테이블 가에 엎어진 채 떨어져 있는 책을 품에 안았다.

“나 먼저 올라가 볼…….”

“가긴 어딜 가.”

아다르가 내 팔뚝을 잡아끌며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인상이 사나운 탓에 날 잡아먹을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그게 걱정하는 표정임을 알았다.

“이번엔 못 놔줘. 기절할 것처럼 괴로워했는데 어떻게 못 본 척해?”

저렇게 단호하게 나오는 아다르의 고집은 꺾기 힘들었다.

우리는 결국 아르모어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방은 복도 끄트머리에 있었다. 좋은 방을 골라잡은 덕분에 일곱 명이 들어가도 자리가 넉넉했다.

“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아다르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가게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뛰어 나갔었잖아. 벌레를 보고 놀랐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아예 없을 일은 아니잖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반박하자, 아다르가 눈썹을 슥 들어올렸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잠자코 듣고 있던 할릭이 드물게 단호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벌레는 고사하고 먼지 한 톨이라도 네 발밑을 지나갔다면, 우리가 보지 못했을 리 없거든.”

“그게 무슨…….”

너희들이 신이냐고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투기대회에서 그들이 무신처럼 날아다녔던 모습이 떠올랐던 탓이다.

나는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할릭이 별안간 내 왼쪽 귓바퀴 근처로 손을 뻗었다. 그리곤 검지와 엄지로 무언가를 잡아 내 눈앞에 들어 보여주었다. 너무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벌레의 날개를 그가 커다란 손가락으로 잡고 있었다.

할릭이 발버둥 치는 벌레를 도로 놔주었다. 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선 긋지 마.”

할릭이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거주할 안전한 장소를 찾는 데 오히려 비밀이 방해가 될 수도 있어. 그게 특히 네 신변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서로 돕는 게 제일 빠른 길이야. 알지?”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개방된 장소에서 대놓고 패닉에 빠진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약한 모습을 우리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거 알아.”

“…….”

“하지만 우리가 네 사정을 모르면, 후에 아무런 대처도 해주지 못할 수 있어. 그것만은 피하고 싶어.”

“알았어.”

“보통 일이 아닌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포위망을 좁혀오듯 벌어지는 괴상한 일들을 계속 숨길 순 없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한 차례 큰 숨을 들이마신 다음, 꽁꽁 숨겨두었던 고민거리를 꺼내놓았다.

“사실 이 마을에 와서 이상한 소리를 들어.”

생각했던 것보다 속 얘길 털어놓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되레 얘기하고 나니 가슴에 얹혀 있던 큰 바위 하나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술술술 이야기를 풀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야. 꼭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아. 짐승이 짖는 거랑 비슷한데, 이상하게 난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어.”

“예를 들면?”

“도와달라고 해.”

“…….”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진 않거든? 그냥 혼자 울고 절규하는 걸 우연히 내가 들은 기분이야. 아까는 견디기 힘들 만큼 비명소리가 끔찍했어. 걔는 죽었을 거야. 알 수 있어.”

말로 설명하고 보니 미쳐가는 사람이 하는 얘기 같았다. 용사들이 심각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괜히 마음이 찔렸다.

“그런 일을 당하면 무서울 것 같아요.”

스노아가 말했다.

“놀랐겠어요, 카카나.”

나는 대답 대신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알게 되어 다행이에요. 갑자기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잖아요.”

“스노아의 말이 맞습니다. 몸에 다른 변화가 생기진 않았습니까?”

첼러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군요.”

그가 진심으로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불안했던 마음에 따뜻한 피가 번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두 손을 맞잡으며 눈을 몇 차례 끔뻑거렸다.

“꼭 마나 같네.”

할릭이 문득 말했다. 스노아가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아니 그렇잖아. 어느 날 갑자기 평소와 다른 것들을 느끼기 시작하는 게 말이야.”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는지, 스노아가 진지하게 그의 말을 경청했다.

“카카나의 경우는 더 특정적이고 구체적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 비슷한 걸 겪었잖아? 무언가가 몸 안으로 들어오고 때로는 울리는 걸 말이야.”

“그러네요.”

“마나는 형체가 없어.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지. 카카나가 그런 느낌을 받는 게 허무맹랑한 일은 아니란 거야.”

“카카나가 듣는 소리가 마나 때문이라는 말씀이시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용사들이 일순간 눈빛을 교환했다.

“마나라…….”

아다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무척 의미심장하게 느껴져서 눈살을 찌푸리는데,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스노아가 문득 얘기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어요. 카카나의 마나는 일반인과 달라요.”

“무슨 소리입니까?”

검지로 미간을 꾹꾹 짓누르던 첼러스가 즉각 되물었다.

“성격이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요, 속성이 있어요. 아르모어의 마나나, 사제들의 신성 마나처럼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알렉 브래든을 기억하죠? 이상한 기운을 두르고 있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름이 언급되자 퍼뜩 놀랐다. 나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키며 용사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마나가 마물과 비슷해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카카나와 그가 우연히 스친 적이 있는데, 그때 상쇄반응이 일어났어요.”

‘상쇄반응.’

[그래도 특별함까지 잊어버리면 안 돼. 알렉 브래든을 만나 상쇄반응이 일어났잖아, 그렇지?]

꿈속에서 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서 이마를 짚었다.

“왜 그래?”

아다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가 손으로 내 등을 천천히 쓸어주자, 두통이 점점 사그라졌다.

창백하게 질린 채 숨을 몰아쉬는 날 아다르가 유심히 살피는 동안, 용사들이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이유를 알아내려고 카카나의 체내 마나를 훑은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속성이 달랐다는 말입니까?”

“그래요.”

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소리는 카카나의 마나가 일으키는 현상일 가능성이 높겠네. 아르모어의 마나는 전류를 일으키고, 신성 마나는 치유를 일으키듯이.”

용사들은 아주 큰 요소를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야. 나 마나 사용할 줄 몰라.”

용사들은 잠시 침묵했지만, 곧 스노아가 말을 받아주었다.

“속성이 있다면 마나를 지니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능해요, 카카나. 마나 수련을 하면 제대로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설마 나한테 마나 가르치려는 건 아니지?”

“해보실래요? 의외로 금방…….”

“싫어.”

나는 스노아의 말을 잘라내며 정말 싫다는 의미로 몸을 한차례 떨어주기까지 했다.

“시간 낭비하기 싫어.”

마나를 다루는 건 극소수의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다. 아마 마법사만큼 재능을 따지는 직업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리고 네 말에 따르면 이상한 점이 있어. 내 마나가 특이한 녀석이었으면 진작 이런 현상이 있었어야지. 난 마을에 오기 전까진 안 이랬단 말이야.”

“원인은 많아요.”

스노아가 차분하게 설명을 이었다.

“마나에 속성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발동 조건이 있을 수도 있죠. 물론 마나 때문이 아닐 수도 있고요. 수상한 소리를 몇 번 들으셨나요?”

“두 번.”

“그러면 더 지켜볼 필요가 있겠네요.”

스노아가 위로하듯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같은 증상이 생기면 바로 알려주세요. 제가 알아볼게요.”

그러나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몸이 점점 나빠지는 건지 어쩐 건지, 소리가 들리는 횟수는 늘어나는데 저번처럼 강렬하지 않은 탓이었다.

나는 원래부터 환청을 듣곤 했던 사람이다. 집중해서 들을라치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소리를 환청 취급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새로운 소리’로 인식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투기대회의 대진표가 짜이면서 소리의 존재감은 거의 잊혀버렸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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