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마탑의 신입 마법사
한 바탕 놀았던 탓인지 아이디어가 금방 떠올랐다.
‘귀를 열게 만드는 약을 만들자.’
어떤 종류를 만들까 고민이 되었다. 이왕이면 스노아가 직접 설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나의 직접적인 개입은 원치 않았다.
‘약물 처방만으로 해결이 될까?’
회의감이 들었지만, 일단 해보기로 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작업에 착수했다. 필요한 약재들은 비브로스의 연구실에 대부분 있었다.
바삭하게 마른 꿈결초를 유봉으로 빻아 가루를 낸 뒤, 훈증하여 다른 약재들과 섞고 18시간 숙성시켰다. 1분이라도 덜 숙성시키거나 더 숙성시키면 효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시간을 아주 잘 재야 했다.
나는 새벽마다 기숙사를 기어 나와서 비브로스의 연구실을 몰래 이용했다.
예민한 이블라가 계속 깨려 했으므로, 깊은 잠을 유도하는 순한 향초도 피웠다. 물론 비브로스는 이제 내가 약물 만드는 것을 제한하지 않았다. 좀도둑처럼 발소리를 죽여 가며 늦은 밤에 약물을 만들지 않아도 된단 뜻이었다.
그러나 내가 만들 약물이 얼마나 만들기 어려운 약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소생약은 위험한 수준이었던 것 같은데, 이것도 파문을 일으킬 정도일까 걱정이 되었다.
‘여기서 더 주목 받는 건 사양이야.’
혼자서 조용히 지내는 게 최고였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대단하다며 칭송받는 건 되레 작업에 방해가 되고 귀찮았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시간만 꼽아 사용했더니, 자연스레 잠이 부족해지게 되었다.
내 짙어지는 다크서클을 본 비브로스가 눈썹을 산 모양으로 일그러트리곤 했지만, 친구들 때문에 고통 받느라 그런가 보다고 납득했는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꿈결초 숙성을 끝낸 뒤에는 흡혈 몬스터의 일종인 흡망귀의 이빨이 필요했다. 희귀한 재료였으나 비브로스의 연구실엔 없는 것이 없었다. 찾아보니 다섯 개 정도 있었다.
문제는 내게 필요한 것이 그냥 이빨이 아니란 점이다.
원하는 약물을 만들려면 살아있는 흡망귀를 잡아다가 필요한 곳에 사용한 후 바로 뽑은 기억주머니가 필요했다.
‘흡망귀를 구하러 가기엔 너무 늦었는데…….’
스노아는 이미 아레사를 강제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정신을 건드릴 수 없는 마법적 금기와 뮤나스라는 장소에 걸려 있는 제약 때문에 골치가 아픈 모양이었지만, 그라면 근시일 내에 해결 방법을 찾을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래서 나는 내가 흡망귀가 되기로 했다.
“으…….”
나는 유리컵에 담긴 약물을 보며 이마를 책상에 박았다.
“왜 저렇게 혐오스럽게 생긴 거야.”
모르고 마신다면 삼킬 수 있겠지만, 만든 사람이 나니 생각만 해도 토가 쏠렸다.
흡망귀의 침과 눈알, 내장, 머리를 통째로 갈아 넣고 끓인 액체에 적어도 50가지가 넘는 약초가 들어간 약물이었다. 감초를 닥치는 대로 넣어서 단맛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뛰어넘는 역한 냄새가 났다.
약물 주제에 제형도 죽처럼 걸쭉해서 벌써부터 식도의 융털이 위로 솟는 느낌이었다. 헛구역질을 하면서 팔뚝에 오돌토돌 솟은 닭살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가라앉혔다.
“이게 진짜 최선인가.”
나는 절망하며 약물을 보았다.
“약물을 마시면 스노아의 피를 빨러 가야할 텐데…….”
흡망귀로 변한 나를 보고 스노아가 기절이나 하진 않을지 걱정되었다. 약물 색은 흡망귀의 내장과 쏙 빼닮은 보랏빛이었다. 심지어 내장을 완전히 다져버리면 안 돼서, 컵 바닥에 덩어리 몇몇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걸 씹어서 삼킬 생각을 하니 눈물까지 나려 했다.
부르르 떨며 유리컵을 손에 쥐었다. 급하게 만들어서 효능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많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게 생각하며, 내가 만든 혐오스러운 약물을 입가에 댔다.
‘한 번에!’
그리고 쭈욱 들이켰다.
아니, 사실은 두 번에 나눠 마셨다. 반쯤 마셨을 때 테이블에 준비해둔 각종 달콤한 디저트를 입 안에 쑤셔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생리적인 눈물이 뚝뚝 흘렀다.
상큼한 오렌지로 입 안을 세척한 후, 기운이 없어 보이던 스노아를 상상하며 힘내어 나머지 반 컵도 들이켰다. 농담이 아니라, 지렁이가 드글거리는 진흙을 씹어 삼키는 느낌이었다.
“우욱!”
견디지 못한 위장이 춤을 추며 약물을 밀어 올리려 했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참았다.
‘삼켜! 다 삼키라고!’
무슨 수로 먹었는데 토할 수는 없다.
본능대로 게워낼 준비를 하는 중인 위장과 식도에 주스를 들이부었다. 그러고도 역류하는 느낌이 들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별 상상을 다 했다.
자꾸 흡망귀의 내장이 생각나서 갓 구운 빵을 구체적으로 떠올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속살과 빵 냄새, 겉에 발린 윤기 나는 기름. 미리 준비해두었던 조각케이크를 코앞에 들고 와서 냄새를 미친 듯이 흡입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간신히 진정될 기미를 보였다.
“으, 욱…….”
속이 진정되자 이번엔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약물을 흡수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잇몸과 혓바닥이 타는 것 같아서 입을 벌리고 숨을 쉬었다. 침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으나, 입을 다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눈도 뜨거워지면서 뽑히는 느낌이 들길래 눈꺼풀을 억지로 닫고 버텼다.
고통이 심해지니 비위가 상해 토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속은 별안간 잊혔다. 몸이 변형을 일으키는 데는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증세가 진정되자, 나는 소매로 침 범벅인 입을 닦아내고 허리를 일으켰다. 세상이 핑 돌아서 넘어지지 않도록 테이블을 잡은 뒤 어지럼증이 가실 때까지 기다렸다.
옷이 땀에 젖어 피부에 자꾸 달라붙었다. 짜증을 내며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손거울을 들었다.
“오오오!”
지쳤던 사실도 잊고 거울에 코를 박았다.
어두운 노란색이었던 내 눈이 아르모어처럼 붉어져 있었다. 가로로 길었던 동공은 맹금류처럼 세로로 길쭉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입이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안을 확인했다. 길고 날카로워진 송곳니가 보였다.
외형은 내가 바란 대로 완벽하게 바뀌었는데, 정말로 흡망귀처럼 작용을 할지 걱정이 되었다.
작용할지 안 할지는 해봐야 알 것이다.
‘일단 스노아를 물러 가자!’
나는 흡망귀의 기억주머니를 구슬 형태로 만든 알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더러운 몰골로 찾아갔다간 꽃처럼 섬세한 스노아가 싫어할 수도 있으니 샤워까지 했다.
완연히 봄을 맞이한 날씨가 무척 포근해져서, 헐렁한 원피스에 로브만 두른 뒤 마법가방을 뒤졌다. 스노아의 기숙사 방으로 갈 수 있는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었다.
‘계속 목이 마르네.’
나는 종이를 찢으려다 말고 잠깐 물을 마셨다. 물배가 차서 위 속이 출렁거릴 지경인데도 목이 말랐다.
‘왜 이러지? 단 걸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하긴, 디저트를 많이 욱여넣긴 했다.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목을 틀어쥐었다. 기분 탓인지 목구멍이 뜨거운 느낌이었다. 호흡은 여전히 가빴다.
‘아니면 부작용인가?’
내가 마신 약은 일시적으로 흡망귀가 될 수 있는 폴리모프 약물이었다. 완전히 변형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으므로 능력만 따올 수 있도록 제조했다.
마법사와 협업했다면 연금술을 통해 더 나은 폴리모프 포션이 완성되었겠지만 연구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잘못 만들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순조롭게 폴리모프 되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변이 과정에서부터 이미 문제가 드러나야 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원인을 차근차근 짚어보았다. 흡망귀는 피를 마셔서 상대의 기억을 빨아들이는 몬스터다. 기억주머니라는 특이한 기관이 있어서 그곳에 기억을 저장했다.
흡망귀가 기억을 빨아들인다고 해서 피해자가 기억을 잃는 건 아니다. 다만 타인의 기억과 섞여서 희생자는 정신이 파괴되곤 했다.
‘나한테 그런 능력까진 없으니까 문제없지만.’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다시 물을 마셔보았다. 계속 목이 마르고 목이 뜨거웠지만, 흡망귀로 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이라 생각하며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뭐, 괜찮겠지!’
나는 스노아의 기숙사에서 눈을 뜨자마자 소리쳤다.
“스노아! 목 좀 내놔 봐!”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스노아가 화들짝 놀라며 날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룸메이트인 첼러스가 보이지 않았다.
“첼러스는?”
“수련을 하러 갔어요. 근데 여긴 왜…….”
“일단 옷 좀 벗어줄래?”
나는 그에게 조급하게 다가가며 말했다.
“약 효과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몰라서. 미안!”
사과하며 그가 입고 있는 제복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스노아는 나의 맹렬한 기세에 한 번 놀라고, 스스럼없이 옷을 벗기려는 행동에 두 번 놀란 얼굴이었다. 그가 다급하게 내 손을 잡아 세웠다. 그러나 위에 달린 단추가 많이 풀려버려서 스노아의 눈송이처럼 하얗고 매끈한 목선이 거의 다 드러나 있었다.
‘사슴 목이라는 말은 이런 데에 쓰이는 게 아닐까.’
감탄하며 코를 킁킁거렸다. 기분 탓인지 스노아의 맨살에서 무척 향기롭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게 느껴졌다.
위기감을 느낀 스노아가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그와 나 사이에 의자 하나만큼의 거리가 벌어졌다. 그게 참을 수 없이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스노아가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놀랄 때 내뱉는 욕이 혀끝까지 밀려나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무척 많은 얼굴이었다.
“카카나, 눈이 왜 그렇죠?”
맹금류처럼 새빨갛게 번뜩이는 내 눈을 유심히 쳐다보며 스노아가 물었다.
“아, 이거? 약을 먹어서…….”
“약이요?”
그가 제 귀를 의심하는 낯을 했다.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공중에 씨스아이를 소환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쯤 되자 내 행동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아무 설명 없이 달려든 것 같았다.
감히 스노아가 스태프까지 소환하게 만들다니, 보통 놀라게 한 게 아니었다. 그에게 해명하려고 입을 연 순간, 스노아가 한 손을 들어 날 막았다.
“일단 진정하고 무슨 약을 먹었는지 말씀해주세요.”
나는 그제야 그가 질겁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아, 이상한 약 아니라 내가 만든 약물 먹은 거야! 폴리모프 종류!”
그럼에도 그는 수상하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조금 전처럼 극도의 경계심이 서려있진 않았다.
그가 긴장이 조금 사그라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하아, 놀랐어요.”
“미안.”
“그래서, 무엇으로 변하신 건가요?”
“흡망귀.”
스노아가 눈을 몇 차례 끔뻑였다.
“흡혈귀요?”
“아니, 아니, 흡망귀. 피를 통해서 기억 빨아들이는 몬스터 있잖아. 그러니까 지금 반쯤 몬스터 상태인 셈이지.”
스노아가 한참 뒤에 내 말을 정정하여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본인 몸으로 인체실험을 하셨다 그 말씀이신가요?”
“왜 그렇게 돼?”
“몬스터로 폴리모프 할 수 있단 사실은 처음 아는데요.”
“그래? 하긴 나도 될 줄은 몰랐어. 한번 해본 거지.”
스노아가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게 바로 실험이에요…….”
“됐고, 이리 와봐.”
나는 그의 착잡한 얼굴을 무시하며 손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는 아직까진 순순히 나를 따르고 있었다. 스노아를 침대에 앉히고, 급하게 옷깃을 젖혀 코를 박았다.
머릿속이 짜릿하게 자극되는 느낌이 들었다. 군침이 돌아서 침을 여러 차례 삼켜야 했다. 마음은 급한데, 누군가를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어떤 자세를 잡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보다가 영 불편해서, 그의 어깨를 밀어 넘어뜨렸다. 스노아가 아연해진 눈으로 날 보더니,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가 수상한 무언가를 탐색하듯 내 상태를 끝없이 위아래로 살폈다.
뭔가 이상한 점을 찾는 듯한 행동이었으나, 묘하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의 목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고양이처럼 잽싸게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가 입을 크게 벌렸다.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다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이성의 끈을 살짝 놓아주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송곳니가 알아서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돌연 입 안이 무언가로 막혔다. 나는 당황해서 턱을 움직였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내 입에 재갈처럼 물린 것을 더듬더듬 만져보았다. 몬스터해안가에서 스노아가 내 허리에 둘러주었던 비눗방울과 비슷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한테 마법 쓴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코로 그의 뺨을 콕콕 찔렀다. 얌전히 누워있던 스노아가 갑자기 자세를 반전시켜 나를 침대에 찍어 눌렀다. 그의 목덜미가 멀어지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으브읍!”
“홀드.”
발버둥을 치며 옷을 벗기려 들자, 그가 다시 한번 마법을 썼다. 손발이 침대에 말뚝이 박힌 듯 고정되었다.
“카카나, 이게 몇 개지요?”
그가 검지와 중지를 펴 내 눈앞에 흔들면서 물었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인상을 팍 쓰고 노려보자, 그가 내 입에 물려 있던 재갈 비슷한 마법을 해제해 주었다. 입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악을 쓰며 몸을 들썩였다.
“거의 물 수 있었는데!”
“…….”
내 분한 얼굴을 보던 스노아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검지와 중지를 흔들었다. 아다르에게 나쁜 물이라도 들었나.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걸 내가 모르겠는가.
화가 나서 빽 소리쳤다.
“두 개잖아! 뭐 하는 거야!”
“제 목은 왜 물려고 하는 건가요?”
“몰라서 물어? 피를 마시려고 그러는 거잖아!”
나는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발을 굴렸다. 흥분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게 목적인 건가요?”
“그래!”
“피를 마시는 거요?”
다시 ‘그래!’라고 소리치려 숨을 들이켰다가 돌덩어리처럼 굳었다. 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가자, 그가 내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아까부터 조심스럽게 기색을 살피는 행동을 하더니 이게 이유였던 모양이다.
나는 충격을 받아서 숨 쉬는 것마저 잊고 있다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무, 물이 마시고 싶어. 나 물 좀 줘.”
목이 말라서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물을 마시면 분명히 나아질 것이다.
희망적으로 생각하며 부탁하자, 스노아가 마법으로 공중에 물방울을 형성했다. 그리고 내 입가로 천천히 이동시켰다.
누워서 물을 마시는 건 힘들 줄 알았는데, 마법으로 도와주어서 그런지 의외로 꿀꺽꿀꺽 잘 넘어갔다. 뜨겁게 달궈진 쇠막대기에 물을 부은 것처럼, 속이 뜨거운 김으로 꽉 찼다.
더운 숨을 뱉으며 이를 악물었다. 뭐가 고통스러운지 모르게, 괴로웠다.
“갈증이 좀 해소되었나요?”
스노아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흡망귀가 되셨다 했죠?”
“서, 설마…….”
“그 설마가 맞는 것 같은데요, 카카나. 피를 마셔야 해소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본능적으로 제 목 쳐다보고 있고요.”
“어떡해!”
나는 경악했다. 그 와중에도 갈증이 충족되지 않아 입술이 말랐다.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뛴 느낌이었다. 침도 끈적끈적해지는 것 같았다.
‘약물은 신중하게 만들기로 했으면서 또 이런 실수를!’
나는 비브로스 교수님께 면목이 없어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람은 원래 잘 바뀌지 않는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대형 사고였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담아 코를 킁킁거렸다. 아까는 왜 인식을 하지 못했나 의아할 정도로 풍성한 향이 났다. 부드러운 육질의 냄새, 비리고 진한 피의 냄새. 고기를 먹지 않는 내가 최초로 느끼는 육식을 향한 강렬한 욕망.
‘맛있는 냄새라니…….’
환장하겠다.
스노아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내 이마를 쓸어주었다. 그의 손에서 따스하고 습한 피 냄새가 풍겼다. 입을 벌려 그것을 물고 싶은 충동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했다. 잔뜩 흥분한 탓에 숨마저 거칠어졌다.
“흡망귀가 되는 약은 왜 복용한 건가요?”
“네 기억을 빨아들이려고.”
나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근데 흡망귀의 흡혈욕구를 생각 못 했어. 생각해보니 피를 통해서 기억을 흡수하는 거잖아. 어떡해.”
“제 기억은 왜요?”
“기억을 담은 물약을 만들려고 했거든.”
무엇을 짐작한 건지, 스노아가 말없이 날 응시했다.
“그걸 아레사 나이제르가 복용하게 만들려고 했어. 그러면 네 기억이 그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잖아. 오해도 풀 수 있어.”
한참을 침묵하던 스노아가 느지막하게 물었다.
“왜 절 돕나요?”
“너희 친한 거 아니야? 싫은 척해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던데.”
“…….”
“극적으로 상봉했는데 이렇게 헤어지면 좀 그렇잖아.”
“하하.”
스노아가 이마를 짚으며 웃었다. 힘이 없는 웃음이었다. 잠깐 터져 나오고 공기 중으로 금방 흩어지며 사라지는.
“카카나의 약을 마셔도, 아레사는 아마 절 미워할 거예요.”
“왜?”
“그는 이미 소중한 걸 잃어버렸거든요.”
“그게 스노아 탓인 거야?”
스노아가 고민하는 듯 침묵을 지키다가, 느지막하게 대답했다.
“아레사와 헤어지기 전에, 그가 가족이 저주에 걸렸다며 제게 도와달라고 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전 저주에 걸린다고 바로 죽는 건 아니라고 되레 아레사를 나무랐죠. 더 급한 용무를 해결해야 한다면서요.”
“더 급한 용무라니?”
“그날, 차원전쟁이 터졌거든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레사의 가족은 제 발을 묶어놓기 위한 적국의 계략이었어요.”
스노아가 침잠한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전쟁을 해결하고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제국의 음모에 당해버렸고, 아레사는 영원히 가족을 잃고 말았죠.”
“스노아는 이성적인 사람이잖아.”
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던 거 아니야? 제국이 배신만 하지 않았더라면 잘 해결됐을 테니까. 그리고 아레사는 심통이 잔뜩 나 보이지만, 마냥 스노아를 원망하는 것 같지 않았어.”
“…….”
“네 말대로 이상한 성격이라며. 단순히 화풀이를 하고 싶은 걸지도 몰라. 살아있었으면서 왜 진작 자기한테 안 왔냐고 말이야.”
나는 별 거 아니란 투로 얘기했다.
“그러니까 내가 도와준다고.”
스노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의아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스노아 특유의 청정한 물빛 눈이 평소보다 깊고 묵직했다. 물에 빠지듯이 풍덩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 눈이었다.
“왜 그렇게 봐?”
“카카나는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가, 갑자기 무슨.”
나는 칭찬에 익숙하지 않았다. 목을 움츠리며 당황하자 스노아가 옅게 웃었다.
“말을 돌리는 거라면…….”
“그런 거 아니에요.”
후우, 숨을 내쉰 스노아가 불현듯 제 목깃을 옆으로 젖혔다. 밝은 조명에 비친 매끈한 피부를 보자마자 핥아먹고 싶어 안달이 났다.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뭐람.’
고통스럽게 생각하며 갈증을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억지로 시선을 뜯어내 애꿎은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스노아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짙은 혈향이 점점 강해졌다. 저 달콤한 꿀이 혀에 한 방울이라도 떨어졌다간 참지 못할 거다.
스노아가 말라 비틀어져 죽을 때까지 빨아 마실 것 같았다. 흡혈 종류의 몬스터들이 게걸스럽게 사람을 먹어치우듯이.
비쩍 말라 죽은 스노아를 상상하자 뒷목이 서늘해졌다. 나는 고통을 야기하는 지독한 갈증을 참기 위해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아슬아슬한 선까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냥 제 피를 마셔요, 카카나.”
숨이 많이 섞인, 낮고 퇴폐적인 음성이었다.
“걱정하지 말고.”
“하지만, 못 참을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의 피를 탐하고 싶은 마음과 그런 스스로를 경멸하는 이성이 머릿속에서 첨예하게 부딪쳤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로워하자, 스노아가 여느 때처럼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다 싶으면, 제가 마법으로 막을 수 있어요.”
“세게 물 것 같아. 아플 거야.”
“그 정도 아픔은 참을 수 있어요.”
스노아가 엄지로 내 입술을 훑으면서 말했다. 순간 손가락을 먹어치울 뻔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입술이 절 탐하는 거라면요.”
스노아가 나른하게 말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간신히 주머니에 들어있던 기억주머니를 떠올렸다. 그가 큰마음 먹고 흡혈을 허락해주었는데 기억을 담지 못하면 낭패였다.
내 손발은 포박되어 있었으므로, 스노아에게 주머니에 있는 구슬을 꺼내 입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순순히 도와주었다.
나는 입 안에서 구슬을 돌돌 굴려 혀 밑에 밀어 넣었다. 이제 스노아의 피가 내게 들어오면 이 구슬에 흡수되면서 기억이 저장될 것이다.
“준비되었나요?”
스노아가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그가 내 머리를 자기 목덜미에 당겨 묻었다. 가냘프게 이어지고 있던 이성이 뚝 끊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물었다.
후각을 가득 채우는 짙고 끈적한 냄새가 확 터졌다. 송곳니가 피부를 부드럽게 뚫고 들어갔다. 뜨겁고 진한 액체가 울컥 뿜어져 나온다.
그것이 한 방울도 흐르지 않도록 꿀꺽꿀꺽 삼켜냈다. 내가 모르는 기억, 장면들이 채 인식할 수도 없는 속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그 숱한 기억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기억을 본능적으로 고를 수 있었다.
차원전쟁이 끝나고 있었던 일, 그리고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정신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설계된 것처럼, 스노아의 기억이 스치듯 나를 지나쳐 기억주머니로 흡수되었다. 원하는 기억은 얻었다. 이제 입을 떼고 그를 놓아주어야 했다.
그러나 내 송곳니는 여전히 그의 목에 박힌 채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마시고 싶었다.
피로 얼룩진 그의 하얀 피부를 핥고, 상처를 헤집어 피를 더 내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달콤한 과육으로 온몸을 적시고 싶었다.
“하아…….”
스노아가 뜨거운 숨을 내쉬며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저도 계속 이렇게 있고 싶지만, 더 이상은 안 돼요.”
슬립 마법을 쓴 것 같았다. 지독한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리다 마침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결론적으로 기억물약은 도움이 되었다. 스노아와 아레사의 관계에만.
“제국 놈들을 지옥에 보내버려야 해요!”
아레사 나이제르가 길길이 날뛰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가 발광하는 건 이제 익숙해서 나는 턱을 괴고 아레사를 구경했다.
“그런 놈들이 편히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스승님? 그 무능한 치들은 몸에 마나가 없으니까 눈물이라도 뽑아내야 한다고요!”
“아레사.”
“똥오줌 다 지릴 때까지 말이에요! 그런 다음 팬티를 벗겨서 머리에 뒤집어씌운 후 수도 거리를 배회하게 만들어야 해요!”
“진정해”
“빌어처먹을 개새끼들!”
스노아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아레사가 험한 소리를 했다.
“어쩐지 저한테 씨스아이 줄 때부터 느낌이 싸했다니까요? 그라나스 들라주아 그랑루이 황제, 그 구렁이 같은 놈! 기억나세요?”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콧대 세우고 하사니 뭐니 지랄할 때부터 알아봤어요. 속 시커멓기 짝이 없었다고요! 스승님이 돌아가시면 씨스아이는 당연히 제 건데, 하사해주겠다고 선심 쓰듯 말했을 때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안 그래요?”
아레사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당당하게 소리쳤다.
“세상에 저보다 스승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럼 유품도 당연히 내 거죠! 그래요, 안 그래요!”
‘말이 좀 이상한데.’
하지만 저 혼란스러운 대화에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 두 다리를 흔들면서 둘의 만담을 멀거니 구경했다. 가까이서 보면 골치가 아프지만 멀리서 보니 나름 희극처럼 보이고 재밌었다.
“아레사.”
스노아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는 얼굴로 이름을 불렀다. 물론 물의 현자는 듣지 않았다.
“내가 뭣 땜에 할아버지 흉내를 내며 비위를 맞춰줬는데, 감히 뒤통수를 치다니 배짱도 좋다 이거예요! 곧 죽을 노인네처럼 연기하길 잘했지 뭐예요? 귀신 분장하고 침실에 들어가서 심장을 콱 쥐어짜버리겠어요!”
스노아가 결국 스태프의 보석이 박힌 부분으로 아레사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아주 능숙하고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분명 이런 식으로 그를 훈육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닐 거다.
‘근데 왜 본모습이 13살인 거지. 설마 나이를 안 먹나? 초월자도 아니고…….’
의아하게 여기는데 입술을 삐죽 내밀던 아레사가 불현듯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정신 아닌 현자의 관심을 받게 되니 영 불길했다. 나는 책상에서 슬쩍 내려와 발을 뒤로 물리다가, 아레사가 코앞으로 텔레포트하자 비명을 질렀다.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 했지요, 아가씨?”
“카, 카카…….”
“맞다, 카카나 페아였지요.”
아레사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고갯짓을 따라 나풀나풀 흩날렸다. 물 계열의 마법을 쓰는 사람들은 외모도 그와 닮게 변하는 건가.
새삼 신기하게 생각하며 괜히 헛기침을 했다. 세상에는 다양하게 미친 자들이 존재한다는 걸 뮤나스에 와서 많이 배우고 있었다.
“스승님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그러나 아레사 나이제르는 의외로 예의바르고 귀족적인 느낌으로 감사인사를 건넸다.
“아가씨 덕분에 스승님이 여기까지 오실 수 있었어요. 다 보았어요. 기억물약도, 아가씨가 만들었다고 하셨죠?”
“그, 네.”
“참으로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 인재네요. 이 할애비는 너무 고마워서 아가씨를 손주처럼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13살의 꼬마가 홀홀홀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아레사 나이제르는 모습과 정반대되는 말투를 사용하는 취미라도 있는 것일까.
할아버지 모습일 때는 온갖 애교를 부리더니, 지금은 어린아이 모습으로 나이 지긋한 노인처럼 허허롭게 웃고 있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대충 웃으면서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아레사가 내 손을 꼭 잡으며 잠시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흐음, 그렇군요. 그럼 이 할애비가 선물을 줘야지요.”
그가 내 손을 잡은 채 눈을 감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마법주문을 한참 동안 중얼거렸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몰라서 약간 겁먹은 채로 기다렸다. 주문이 끝나고, 내 손등에 푸른 물방울 모양의 문양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름 하여 사랑의 오작교!”
아레사가 내가 윙크를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랑의, 뭐요?’
뭔가 귀여우면서도 늙은 느낌의 이름이다. 아레사가 발랄하게 뒤를 돌며 스노아를 가리켰다.
“스승님과 오작교를 놔드렸어요. 아가씨에게 물리적 충격이 가해지면 스승님께 바로 신호가 가도록 말이죠. 물론 마도구도 하고 있지만?”
아레사가 내 목에 걸려있는 펜던트를 검지로 잡으며 싱긋 웃었다.
“망가질 수도 있고, 줄이 끊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저엉말 실망이네요, 스승님. 씨스아이도 되찾으셨으면서 아직도 이런 마법을 아가씨께 안 걸어두신 거예요?”
아레사의 깐족거림에 스노아의 이마에 힘줄이 돋는 게 보였다. 나는 아레사가 더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서둘러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아레사가 손뼉을 짝 치며 얘기했다.
“자, 그럼 마탑으로 가볼까요?”
‘네?’
아레사가 기겁하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놀란 건 스노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도망이라도 갈세라 방실방실 웃은 아레사가 스노아의 손을 꽉 맞잡았다.
“자, 대충 폴리모프를 하고?”
내 손을 잡은 아레사의 손이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노인으로 쭈그러들었다.
그는 처음 보았던 물의 현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뒤, 스노아의 외모도 유심하게 살폈다.
“흠, 생각할수록 기똥차단 말이죠? 어찌 이리 감쪽같이 환영마법이 구동되고 있는지? 아무튼 다른 얼굴로 바꿔 보세요, 스승님. 뮤나스에 팔린 얼굴을 들고 마탑에 가봤자 좋을 게 없잖아요?”
스노아가 한숨을 쉬며 내 손과 자기 손에 껴있는 마법반지를 검지로 두드렸다.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저장된 외모의 정보를 변경한 것 같았다. 같은 반지를 끼고 있으면 어떤 환영이 씌워지는지 보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워졌다.
만족스럽게 웃은 아레사가 지체 없이 마탑으로 텔레포트 했다.
물론 다시 학교로 텔레포트 할 스노아를 생각한 아레사는 정성스럽게 협박을 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도망치면 저 사고 칠 겁니다? 저의 끈질김, 아시죠? 평생 귀찮아집니다?”
장소가 마탑이었기에 더욱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아레사를 제자로 맞고 별의별 꼴을 다 봤을 스노아가 이마에 참을 인을 새기며 심호흡했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 뭔가를 보여주거나 전해주고 싶어서 마탑에 데려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레사는 내 상상을 초월하는 짓을 했다. 그건 스노아의 예상 범위도 뛰어넘는 짓이었다.
너무 놀란 스노아가 침을 잘못 삼켜서 기침을 해댔기 때문이다.
예의 근엄한 현자 흉내를 낸 아레사는 여러 마법사들이 돌아다니는 홀 가운데에 서서 이렇게 외쳤다.
“마법사의 자질이 뛰어난 자를 발견했소!”
내 눈은 튀어나올 기세로 홉뜨였고 스노아는 눈을 감았다. 그냥 감은 게 아니라, 눈알을 위로 까뒤집고 싶지만 흰자를 보이는 게 흉측하니 눈꺼풀을 닫아주는 수준이었다.
현기증을 느낀 내가 귀를 의심하며 딱딱하게 굳어 서 있는 동안, 아레사가 지옥의 주둥아리를 다시 나불대기 시작했다.
“마탑주가 어디로 가셨는지 아는 분 있소이까? 마탑주님께 꼭 이 아이를 소개해드리고 싶네만!”
“드디어 미친 게요?”
나는 놀라서 입을 막았다.
마음의 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사람이 한 소리였다.
나는 창피해서 푹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들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용기 있는 마법사 한 명이 나서고 있었다.
늙수그레한 관중들 가운데 유일하게 조금 젊어 보이는 남자였지만, 여기는 마탑 내부다. 마나를 깨달은 자들의 수명은 일반인과 다르므로, 겉모습만으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어쩌면 흰 턱수염을 배까지 기른 저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레사는 왜 굳이 할아버지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드는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 기울일 무렵, 노란 머리의 마법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미치려거든 곱게 미치시오, 곱게. 내가 누누이 말했잖소?”
그가 마뜩잖은 눈으로 스노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끌끌끌 혀를 찼다.
“본인 아들내미 같은 자를 데려와 놓고 마법사의 자질이니 뭐니, 부끄럽지도 않소? 아무리 현자여도 법도가 있는 법이오. 마탑에 정식절차를 밟지 않고 제멋대로 데려와 마탑주님을 찾다니,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구먼그려.”
“베딜락, 왜 갑자기 와서 심통이오?”
“하도 이상한 소리를 나불대니 하는 소리가 아니오. 마탑주님이 보고 싶다고 뵐 수 있는 분인 줄 아시오?”
“이 아이는 다음 대 마탑주의 그릇을 타고났소. 그 정도로 걸출하단 말이오.”
무슨 의도로 일을 이렇게 키운단 말인가.
나는 간이 콩알만 하게 쪼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연구하느라 바빠 타인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마법사들이 아레사의 강력한 주장에 호기심을 갖고 새 떼처럼 모이기 시작했다.
다들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탓에 첩첩산중 한가운데 떨궈진 기분이었다. 나는 걱정이 돼서 스노아를 봤다. 그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이미 기절한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른입술을 핥았다.
쓴소리를 뱉던 베딜락이 입술을 삐죽이며 스노아를 훑더니, 그럼에도 놓지 못한 의심의 끈을 아레사에게 흔들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소?”
“내가 심심해서 이러고 있는 줄 아시오? 실없는 소리를 할 거면 저리 가시오.”
“마탑주님이 계신 곳은 내가 알고 있소. 말씀은 드려보겠소만…….”
베딜락이 턱을 위로 세우며 잘난 척을 했다.
“그 전에 내 직접 저 아이의 자질을 보아야겠소.”
“나도! 나도 구경 가게 해주시오!”
그러자 구경하고 있던 다른 마법사들까지 손을 흔들어재끼며 구경하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처음엔 귀찮게 됐다는 표정을 짓던 베딜락이 이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씩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좋습니다! 관심 있는 사람은 다 함께 가십시다!”
두 팔 벌려 환영한 베딜락이 아레사를 돌아보며 얄밉게 한마디 툭 던졌다.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으려면 뱉은 말은 꼭 진실이어야 할 겁니다, 아레사.”
“허헛! 걱정이 남아도는 모양이오, 베딜락!”
아레사의 여유로운 모습에 새침하게 눈을 흘긴 베딜락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 뒤를 아레사와 우리가, 그리고 우리 뒤를 수많은 마법사들이 따랐다.
텔레파시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기라도 하는지, 걸음을 뗄 때마다 뒤에 쫓아오는 인원이 불어났다. 나는 목에 걸려있는 펜던트를 쥐고 스노아에게 말을 걸었다.
「스노아, 어떻게 해?」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죽일까요?」
스노아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날 보며 얘기했다.
‘아, 아니 아레사를 어떻게 하자는 게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하냐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비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스노아는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나마 믿을 만한 점은, 아레사가 스노아에게 해를 끼치려 할 위인은 아니라는 거다. 어차피 당장은 아레사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다.
우리는 마탑 내부에 설치된 워프게이트를 타고 다른 층으로 이동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창밖으로 파란 하늘과 구름이 보였다. 베딜락도 스노아의 실력이 궁금하긴 한지, 다소 급한 발놀림으로 걷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거대한 여닫이문 앞에 멈춰 섰다.
드넓은 대강당의 입구처럼 보였는데, 양쪽에 달린 문짝이 하도 커서 힘으로 밀 수 없다는 건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베딜락이 마도구로 보이는 물건에 마나를 채워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적어도 수만 명 이상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공간이 드러났다.
마탑 외부에 있는 구조물을 문을 매개체로 하여 억지로 이어놓은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건물 내부라곤 생각이 되지 않을 만큼 넓었다.
강당은 원형 극장의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그란 단상이 가운데에 있었고, 층마다 빽빽하게 놓인 관중석이 단상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미 소식을 들은 많은 마법사들이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예 작정하고 먹을 것과 음료를 들고 와서 어서 의식이 벌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소문은 방금 돌았을 텐데 다들 텔레포트를 쓸 수 있는 마법사라 그런지 신속했다.
‘이런 부담스러운 곳에서 실력을 인증해야 한다니…….’
나는 스노아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안색이 좋지 않았다. 공포나 불안보다는 아레사를 향한 고요한 분노로 차갑게 식은 얼굴이었다.
용사들은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화가 나면 무섭다. 이런 식으로 대담하게 행동하는 아레사가 일순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저기 봐, 물의 현자야…….”
“땅의 현자 베딜락 울라오스도 있어.”
“진짜? 물의 현자? 항상 숨어 다녀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민감한 수인족의 귀에 마법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레사 나이제르의 실체를 보고 환상이 조금 깨져서 그렇지 그도 탑에 열 명밖에 없다는 현자 중 한 명이었다.
항상 용사들이랑 같이 다녀서 점점 일반인의 감각을 잊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레사의 도움으로 단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람석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무대에는 베딜락과 아레사, 그리고 스노아가 올라갔다.
“물의 현자는 원래 저런 쭈그렁 할아버지가 아니잖아. 실제 모습을 보고 싶다.”
그때, 뒤에 앉아 있던 마법사들이 흥미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본래 모습으로 마법을 사용하면 더욱 신비하고 경이롭게 느껴진다는데. 워낙 어린 모습이잖아.”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와, 진짜?”
“몰랐어? 하긴 마탑에 이제 막 들어왔으면 모를 만하겠다. 이거 공공연한 비밀인데, 14살이 되자마자 제3자각 수준에 이르렀대.”
‘13살인 줄 알았는데 그게 14살의 모습이었구나.’
아무튼, 마법에 까막눈인 내게도 바로 제3자각에 이르렀단 말은 대단하게 들렸다. 마법사면 오죽할까.
듣고 있던 사람이 헛숨을 들이켜는 게 들렸다.
“그런데 자기도 스승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사용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나 봐. 굉장하지 않냐? 저런 게 재능이지.”
“바로 제3자각에 이르고도 그걸 몰랐다고?”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지? 다들 연구하고 싶은데 상대가 물의 현자여서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거야. 암묵적인 비밀에 부친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러나 듣는 사람은 통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근데 굳이 할아버지일 필요가 있어? 그냥 땅의 현자님 정도의 나이대로 폴리모프하면 되잖아.”
“사실인지는 모르겠는데, 위엄 있게 보이고 싶다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어. 나는 그 말 안 믿어. 물의 현자님이 그런 실없는 소릴 하실 리가 없잖아.”
나는 준비된 물을 마시다 말고 내뿜었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말은 진실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레사 나이제르의 성격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가는 이유였다.
“장난 아니다. 나도 본 모습 보고 싶어…….”
‘아니, 안 보는 게 좋을걸. 환상이 다 깨져버리고 말 거야.’
특히 그의 요상한 말투는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되었다. 일부러 말꼬리를 늘이면서 사람 화나게 만드는 말투였다.
연기를 즐기는 건지 할아버지 모습일 때는 뒤에 앉은 마법사들의 말대로 ‘위엄 있는’ 말투를 사용하지만 말이다. 은신하는 것을 좋아하는 마법사라고 하기엔, 은근히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어쩌면 스노아를 찾으려고 그동안 몸을 숨기고 다녔는지도 모르지.’
그때, 베딜락이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마법을 걸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웅성웅성 시끄러웠던 강당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갑작스럽게 증명식을 열었는데도 관심을 가져주신 마법사님들께 신 헬리스의 가호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물의 현자가 데려온 한 어린 마법사의 자질을 시험토록 하겠습니다. 그는 이 청년이 다음 대 마탑주가 될 거라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파격적인 발언에 조용해졌던 강당이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내 뒤에 앉은 두 명의 마법사도 난리가 났다.
뭐 얼마나 대단한 자이기에 저렇게 수선을 떠는 거냐며 몹시 궁금해하고 있었다.
“우선, 물의 현자가 주장하는 바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딱 한 마디만 하겠소.”
아레사가 근엄하게 얘기했다.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최고조로 이른 긴장 탓에 목이 뻣뻣해졌다.
“이 아이는 제3자각의 7서클이요.”
쿠궁.
꼭 그런 소리가 귀에서 울린 것 같았다. 나는 잠시간 현실을 부정했다.
마법사가 한데 모인 이런 엄청난 자리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폭탄 발언을 했을 리 없다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러나…….
“야,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7서클이라고 했거든?”
“맞아…….”
뒤에 앉은 마법사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희망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악.”
나는 반쯤 터져 나온 비명을 주워 담아 손으로 틀어막았다. 스노아가 현기증을 느낀 듯 비틀거렸다.
나는 부들부들 떨다가 허리를 숙이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도저히 관중석의 반응이나 무대 위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마나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만큼, 넓은 범위의 제1,2,3,4자각 외에도 더 세부적인 기준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몸에 수용된 마나의 수준을 가리키는 ‘서클’이란 단위였는데, 최고가 10서클이었다.
현자가 8서클 이상이고, 마탑주는 10서클이다. 물론 초월자는 서클이라는 개념이 필요 없었고.
그런데 평범한 청소년으로 위장하고 있는 스노아를 7서클이라고 소개했다. 그 정도면 현자에 거의 도달한 수준이었다.
‘이, 이건 수습 못 해.’
쭉 솟아나온 식은땀으로 손바닥이 축축하다. 사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무슨 얘기를 할 때마다 떠들썩하게 웅성거리던 마법사들이 이번엔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안간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직 볼 용기가 나지 않는 건 여전했지만,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져서 억지로 손가락을 벌려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로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베딜락이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은 소리였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도 아무도 웃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려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들은 석상처럼 굳어서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힘이 풀린 탓에 그들이 떨어트린 간식이나 음료수로 바닥이 난장판이었다.
“허이고, 참. 나이를 먹더니 이제 무릎에 힘주기도 힘든 것이오?”
여유로운 사람은 오직 물의 현자 아레사 나이제르뿐이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 베딜락을 자리에 일으켜 세워주었다.
“자, 증명식을 거쳐야 하니 스태프가 있어야겠지?”
아레사가 자기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베딜락을 무시하며 공중에 스태프를 소환했다.
“그, 그거 씨스아이 아니오?”
베딜락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뭐 어때서 그런가. 이 젊은 인재는 충분히 씨스아이를 사용해 볼 자격이 있어. 내 다음 후예로 점찍은 아이이니 말일세.”
아레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베딜락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펜던트를 쥐고 스노아에게 텔레파시로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레사가 씨스아이 너한테 줬잖아. 근데 어떻게 소환한 거지?」
「돌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씨스아이가 아직 아레사를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해요.」
스노아가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차게 식은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든 말든 아랑곳 않은 아레사가 스노아의 손에 친히 스태프를 들려주었다.
“베딜락. 어서 증명식을 거행하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요?”
“7, 7서클 이상의 마법사만 할 수 있는 3중첩 마, 마법을 해보게.”
“들었지, 스노우? 당장 해보거라.”
즉석에서 대충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는 성의 없는 가명을 부르며 아레사가 재촉했다.
스태프를 쥔 스노아가 아레사를 빤히 쳐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나는 둘이 텔레파시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직감했다. 잠시 후 스노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한결 편한 표정이었다.
스노아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3중첩 마법을 증명했다. 공중에 파이어볼, 라이트닝볼, 아이스볼을 동시에 띄운 것이다.
마법사는 생활마법이 아닌 이상 한 번에 한 종류의 마법만 사용하는 게 최선이었으므로, 마탑에 있는 사람들은 저것이 얼마나 깔끔하고 대단한 일인지를 알았다.
3중첩 마법 외에도 무언가에 단단히 놀란 기색이었다.
“바, 방금 3중첩 마법을 주문 없이 한 거야?”
“그러면 캐스팅 시간이 길어야 정상인데, 이렇게 빨리 하다니!”
“마법서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처럼 완벽한 주문이야. 저 형태가 보여? 하나만 시전하려고 해도 저렇게 정석으로 소환하려면 진이 빠지는데.”
아레사가 의기양양하게 베딜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3중첩 마법을 시전하라니, 증명식은 그거면 된 거요? 각오하라더니 별거 없구려!”
“…….”
“하긴, 7서클 이상은 마탑주님이 직접 그 능력을 확인하셔야 할 테니 더 할 필요도 없겠지.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마탑주님을 뵈어야겠구먼. 그렇지 않은가?”
베딜락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스노아를 바라보다가, 허둥지둥 증명식을 끝냈다.
“아레사 나이제르의 새로운 제자는 7서클 이상임이 밝혀졌소! 증명식이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 봐도 좋소이다!”
그러나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수백 쌍의 눈과 무거운 침묵을 버티지 못한 스노아가 제일 먼저 무대에서 내려갔다. 나는 펜던트를 쥐고 물었다.
「스노아, 괜찮아?」
「아니요.」
그가 단숨에 대답했다.
「머리가 몹시 아프네요.」
「무대에 올라갔어도 그냥 텔레포트로 도망가지 그랬어. 아레사는 기절시켜서 일단 끌고 가면 되잖아.」
「마탑주가 용사들의 나머지 무기들이 어디 있는지 행방을 알고 있대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진짜? 아레사가 그래?」
「네. 용사들과 관련해서는 이미 제국에 의심을 품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레사와 예전부터 용사들의 행방을 찾으면서 합을 맞추었던 모양이에요.」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손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나중에 찾아가면 되잖아. 7서클이라니, 스노우와 스노아가 동일인물이 아닐까 의심하고 제국이 마나를 확인하겠다고 하면 어떡해? 바로 들킬 거야.」
「마탑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구역이에요.」
스노아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정당한 이유와 절차를 밟지 않으면 만날 수도, 어떤 요구도 할 수 없어요. 현상수배지에 나온 노예가 마탑에 나타난 7서클 신동이라고 우기진 못하겠죠. 후에 추적자나 감시하는 사람이 붙을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저희에겐 소용없는 짓이고요.」
「하지만, 이런 눈에 띄는 방법 말고도 마탑주를 만날 수 있는 계기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스노아가 잠깐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뒤늦게 얘기했다.
「돈 있고 명예 있고 지위 있으면 편하지 않겠냐 하더군요. 마탑에 등록되면 만사 해결이라고.」
「누가?」
「아레사가요.」
그게 무슨 단순무식한 생각이냐고 물으려다가, 언제 온 건지 내 앞에 서 있는 아레사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혼자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실까? 아, 텔레파시를 하고 있었나?”
아레사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주 재미있는 얘기였나 봐요?”
“하, 하하…….”
“걱정 안 해도 돼요, 아가씨.”
아레사가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는 뜨끔해서 그를 곁눈질로 살폈다.
아레사는 멀리 서 있는 베딜락과 스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탑은 다른 나라가 인재를 뺏어갈까 봐 혈안인 노인네들이 가득한 곳이에요. 걸출한 인재가 나타날수록 꽁꽁 숨기는 버릇이 있어요. 7서클이면 말할 것도 없죠.”
“그, 그래도 어떻게든 말이 돌 텐데요. 모든 나라에 소문이 돌고, 다들 스노아를 탐낼 거예요. 사람들이 현자에게 관심을 가지듯이요.”
아레사가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으음. 아니죠, 아가씨. 관심이 집중될수록 마탑주는 스승님을 숨기기 편해져요.”
“왜요?”
“마탑 출신 7서클이 코빼기도 안 보이면 다들 마탑주를 주시하지 시장바닥을 찾아보진 않을 테니까요.”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내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아레사를 올려다보는 동안, 불안한 눈으로 날 살피던 베딜락이 결국 못 참고 질문했다.
“그 아가씨는 또 뭔가? 설마 그 아가씨도…….”
“스노우의 연인이오.”
아레사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제가요?’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도 처음 아는 사실인데요!’
어떻게 된 게 사람이 입만 열면 폭탄발언이었다. 스노아와 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자기를 쳐다보는데도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침이 기도로 넘어갔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기침을 하든 말든, 아레사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스노우가 좀 많이 불안정하오. 자네도 알다시피 뛰어난 능력을 타고난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일에 시달릴 일이 많다네. 연인이 없으면 공황발작을 일으켜 아까 같은 단순한 마법도 사용하지 못했을 게야. 그렇지 않느냐, 스노우.”
스노아가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네.”
심지어 내 눈이 이상한 건지 스노아는 이 상황극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가 보란 듯이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크, 크흠! 마음대로 하게!”
베딜락이 민망한 듯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그냥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스노아에게 손을 맡겨버렸다.
우리는 마탑 꼭대기 층으로 갈 수 있는 워프게이트로 걸어갔다. 휴대용 전신수정구슬을 들고 구석에서 뭐라 얘기를 나누는 것 같던 베딜락이 구겨진 얼굴로 다가왔다.
“마탑주님이 허락하셨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레사 자네가 물의 현자고 저 아이가 7서클이어서 가능한 일이네! 이런 식으로 마탑주님을 또 찾아뵈면 내가 아주 곤란해!”
“고맙네, 베딜락.”
아레사가 베딜락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는 새침하게 고개를 팩 돌리더니, 아레사에게 특이하게 생긴 은빛 열쇠를 던져주곤 텔레포트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아레사가 껄껄 웃으며 워프게이트의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베딜락 저 치는 보면 볼수록 참 귀엽단 말이야!”
열쇠가 마치 흡수되듯이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분수대가 있는 식물정원 가운데에 있었다.
누군가 사다리 위에서 덩굴식물의 죽은 이파리들을 잘라내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이 비싸 보이는 가위로 이파리를 자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인자해 보이는 인상의 할머니였다.
사다리에서 내려온 그녀가 검지를 휙 휘두르자, 아레사의 폴리모프가 풀렸다.
“오랜만인구나, 나이제르.”
“요즘 몸은 좀 어때요?”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지.”
그녀가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아레사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가져다댔다.
그녀가 나이 들어 구부러지고 작아진 몸을 움직여 스노아 앞에 섰다. 그리곤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신입 마법사님.”
그녀가 아레사와 비슷한 장난기가 묻어나는, 하지만 한층 차분한 말장난을 했다.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린 스노아가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처음 뵙습니다, 올리넨 아비스 님.”
“전대 마탑주님께선 당신을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며 죽기 전까지 후회하셨지요.”
올리넨이 마법으로 테이블과 의자를 소환하자, 멀리 서 있던 시종이 홍차와 다과를 내왔다.
우리는 둥그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이런 대단한 자리에 내가 끼어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대마법사랑, 현자랑, 마탑주라니.’
체할 것 같아서 과자는 손대지 않고 애꿎은 홍차를 들이켰다.
“그 뜻을 이어받을 생각은 없었으나, 차원전쟁 이후 제국의 동향이 수상한지라 이렇게 되었답니다.”
“…….”
“영웅들의 무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올리넨이 홍차를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정확히 어떤 종류인 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무기의 위치는, 네, 알고 있답니다.”
그녀가 인자하고 평안한 낯으로 폭탄 발언을 했다.
“드래곤 레어에 있어요.”
내 운명은 대체 어디로 굴러가고 있는 걸까.
나는 해탈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
우리는 며칠간 짐을 꾸리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학교를 떠나기 하루 전날, 뮤나스는 내가 떠나는 게 아쉬웠는지 선물을 하나 줬다. 바로 제12동 별관인 약재창고에 갇혀 나가지 못하게 하는 선물이었다.
“가지가지 하네.”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뮤나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레사 나이제르를 찾기 위해 불길한 문을 넘었을 때도, 그 안에서 이상한 책과 씨름을 했을 때도 이 빌어먹을 장소는 날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런데 이젠 날 가두기까지 한다.
이가 갈렸다.
‘설마 누가 밖에서 일부러 잠근 건가?’
나는 비브로스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말을 전해준 사람은 비브로스가 아니라 웬 모르는 약제조학과 2학년생이었다.
그녀는 조금 초조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비브로스를 독대하고 난 학생 중에 안색이 멀쩡한 학생은 손에 꼽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심한 독설이라도 들었나 보다고 가볍게 넘겼다.
‘만약 정말로 일부러 잠근 거라면, 대체 누가? 콜리나도, 소렉트도 없는데?’
콜리나 살라소나와 소렉트 지퍼는 학교를 자퇴했다. 걔네들 말고도 날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이 지긋지긋한 학교를 내일이면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좀 위로가 되었다.
나는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창문이 있긴 했지만 너무 높아서 올라가기 꺼려졌다. 문은 단단한 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어중간한 막대를 들고 때려봤자 내 손만 아플 터다.
“아, 몰라.”
나는 몸에 힘을 빼고 벽에 등을 기댔다. 만사가 귀찮았다.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으면 비브로스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뭐.’
항상 찰싹 붙어있었으니,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그가 알아서 날 찾을 것이다.
목에 걸린 마도구로 용사들을 부를 수 있었지만, 이게 뭐라고 그들까지 부르나 싶었다. 이리 와서 문 좀 열어달라고 하랴? 그들은 나의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한숨을 쉬며 어떻게 시간을 죽이나 고민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문이 잠긴 지 채 20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비브로스가 벌써 사람을 보낼 리 없었으므로, 나는 놀란 눈으로 문밖을 살폈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얼굴을 발견하고 온몸을 경직시켰다.
‘아, 시X.’
자동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 남자애였다. 도서관에서 만났던, 저주 인형을 닮은…….
‘알렉 브래든.’
역사학과 학생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면서 우연히 이름도 들었었다. 혹시 모르니 기억해 두자고 메모해두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까마득하게 존재를 잊고 있었다.
알렉이 10년 만에 재회한 소꿉친구를 바라보듯, 날 집요하게 쳐다보며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발을 물리려 했으나 등 뒤가 벽이었다. 남학생이 안으로 다 들어오자 문이 닫히고 걸쇠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굳어서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약재창고가 갑자기 추워진 것 같았다. 몸이 바르르 떨리고 손발이 차가워졌다.
나는 말을 듣지 않는 팔을 움직여 마도구를 사용하려고 했다. 하필이면 도청 기능을 꺼놓고 있던 참이라, 스노아가 내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펜던트를 옷 밖으로 꺼내기 무섭게 알렉이 지척으로 뛰어왔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아차차.”
그가 품에서 작은 폴딩 나이프를 꺼내 내 목을 가볍게 짓누르며 말했다.
“그러면 곤란하지.”
피부에 닿는 차가운 검날에 머리칼이 쭈뼛 섰다.
“손들어. 반항하면 재미없어.”
나는 얌전히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검날의 힘이 약한 탓인지, 펜던트에 내장된 방어마법이 발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힘 조절을 하고 있는 건가?’
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는 듯했다. 알렉이 옷 바깥으로 꺼내진 목걸이의 펜던트를 잡아 강제로 뜯어버렸다. 그리고 제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너지? 카니 페테라스. 그때 귀족 행세를 했던 애.”
“무슨 말인지…….”
“내가 바보로 보여?”
그가 칼로 목을 강하게 압박하며 속삭였다. 날이 따끔하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아까와는 명백하게 다른 강도였다.
그가 흘러나오는 핏물을 빤히 쳐다보며 입술을 핥았다. 그게 기괴하게도 피를 마시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느낌이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분명 지금도 환영마법을 쓰고 있겠지? 응? 그런데 이상하게 전혀 마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없었단 말이야.”
알렉이 흥미롭게 중얼거렸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너랑 같이 있던 놈도 수상해. 그래, 날 똑바로 노려보던 그놈.”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알렉이 증오가 느껴지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럴 수가 없거든. 뭐, 그래도 이렇게 흥미로운 인간은 오랜만이니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나?”
“무,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끝까지 모르는 척 잡아떼려고 하자 알렉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예의 소름끼치는 눈을 했다.
동그랗게 뜨인 눈이 이번에도 깜박이지 않은 채 날 빤히 들여다봤다. 사람의 탈을 쓴 무언가처럼 보여서 오금이 저렸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응? 그때 상쇄반응이 일어났잖아? 내가 정말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알렉이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그때와 같은 빛이 번쩍 터졌다. 이번엔 훨씬 크게 터져서 어둑한 지하창고 일부분이 순간적으로 밝아질 정도였다.
나는 통증을 억누르며 손을 움츠렸다. 알렉도 아프긴 마찬가지였을 텐데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고만 있었다.
“짜릿한데! 역시 너는 특별한 애야! 그렇고말고. 아니, 아니지. 어쩌면 진짜가 들어있을 수도 있는 건가?”
그가 하는 말의 반 이상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며 주위에 무기로 쓸 만한 게 있는지 찾았다. 창고 구석에 바닥을 쓸려고 가져다둔 빗자루가 눈에 띄었다.
혼자서 끊임없이 뭐라 중얼거리는 알렉을 흘끗 살피다가, 어느 순간 그곳으로 뛰어가 빗자루를 손에 쥐었다.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목에 칼자국이 났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나는 가까스로 빗자루를 손에 넣었다. 알렉이 눈을 커다랗게 홉뜬 채 나를 봤다. 그는 웃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져 보였다.
나는 질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의 입술은 보통 인간 수준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자, 잘못 봤나?’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눈을 깜박이는데, 알렉이 내게 뛰어왔다.
끔찍하게 무서워서 반사적으로 손에 든 빗자루를 휘둘렀다. 굵은 나무막대가 퍽, 하고 알렉의 머리를 가격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알렉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바닥으로 핏방울이 튀었다. 그의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였다. 귀족의 몸에 상처를 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저 미친놈에게서 빨리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재미없어. 재미없다고…….”
알렉이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환각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의 동그랗게 뜨인 눈에서 이상한 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물?’
그러나 그것은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공기 중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검은 연기였다.
‘대체 여기서 얼마나 더 미친 광경을 봐야 하는 거야!’
나는 기가 질려서 숨을 참았다.
겁에 질린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남자애의 눈알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가 꾸물거리며 사방으로 퍼졌다. 뭔가를 찾는 듯이.
그러다 어느 순간 새까맣게 뭉치며 내게 화살처럼 쏘아졌다.
알렉은 빗자루로 칠 수 있기라도 하지, 연기는 속수무책이었다. 그것이 내 얼굴을 둘둘 휘감았다. 천이 아닌데도 숨이 막혔다.
“헉…….”
괴로워하며 비틀거리다가 손에 들린 빗자루를 놓쳤다.
고밀도로 뭉친 사기가 얼굴을 촘촘하게 감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바닥에 쓰러지자 알렉이 내 몸 위에 올라탔다.
그 부분만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가 정신 나간 웃음을 흘리며 내 옷을 젖히려 들었다.
“그래, 진짜면 증표가 있겠지. 그걸 찾으면 돼!”
“저리, 꺼, 져……!”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싶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의 팔목을 틀어쥐었다. 알렉이 희열에 찬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이젠 느껴지는군! 확실히 환영마법에 씌어있어! 접촉이 조건인가 보지? 대단해! 이 반지, 이걸 빼면 네 본 모습을 볼 수 있는 건가? 응?”
더 두고 볼 수 없어서 가까이 다가온 그의 뺨을 손톱으로 할퀴어 버렸다. 알렉이 손을 높이 치켜들어 내 뺨을 내려쳤다. 고개가 홱 돌아가며 골이 울렸다. 입술이 터졌는지 비린 피 맛이 났다.
나는 가파르게 숨을 집어삼키며 얼굴을 감싸고 있는 연기를 치우려 시도했다. 그러나 손이 통과되기만 할 뿐 연기가 목을 조이며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머릿속이 점점 새하얘졌다.
아무래도 여기서 죽게 될 것 같아 마지막으로 알렉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연기에 숨이 막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놈에게 똑같이 따귀 정도는 날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있는 힘을 다해 알렉의 뺨을 날렸다.
짜악―!
수인족이 낼 수 있는 최고의 힘으로 때리자, 파괴적인 소리가 났다. 아마 건장한 남자 정도의 힘이었을 것이다.
따귀 한 방에 기절시킬 수도 있겠다고 한 줄기 희망을 품는데, 내게 뺨을 맞은 알렉이 공중으로 붕 뜨며 날아갔다.
‘응?’
내가 아무리 세게 때렸다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당황해서 날아가는 알렉을 바라보는 사이 머리 위에서 익숙한 음성이 울렸다.
“아이스 블레이드.”
스노아였다.
알렉을 저 멀리까지 무참하게 날린 그가 칼날 모양으로 형성된 두 개의 얼음을 쏘았다. 알렉이 치명적인 공격에 당하자 검은 연기가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컥, 허억!”
허겁지겁 숨을 삼키며 모자란 산소를 채웠다. 몽롱했던 머릿속이 맑게 깨어나며 통증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목 근처를 어루만졌다가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 몸을 웅크렸다.
“카카나.”
근처로 다가온 스노아가 내 목의 상처를 확인하고 얼굴을 구겼다.
“에어밴드.”
그가 마법으로 상처를 감싸 지혈을 해주었다.
나는 띵하게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상체를 일으켰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내 뺨에 번진 눈물을 닦아준 스노아가, 무거운 침묵을 지킨 채 몸을 일으켰다. 알렉은 내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대자로 뻗어있었다. 바닥에 피가 흥건해서 눈을 크게 떴다가, 그의 손에 꽂혀 있는 얼음 칼날을 보고 질겁했다.
“스노아! 쟤 귀족이야!”
뒷감당이 걱정되어서 비명을 질렀더니, 스노아가 단호하고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헬파이어.”
스노아의 손끝에 시꺼먼 불꽃이 형성되었다. 시전자가 해제할 때까지 영원히 불탄다고 하는 지옥의 불꽃이었다.
‘미쳤나 봐!’
나는 스노아의 손에 매달렸다.
예쁜 얼굴이 무표정해지니 손대면 얼어버릴 것처럼 차가운 분위기가 흘렀다. 그를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인 것 같아서, 우선 아무 말이나 털어 놓았다.
“왜 저러는지 이유는 알고 죽여야지! 이상한 소리를 했단 말이야!”
“이상한 소리요?”
“그래! 그러니까 일단 다른 애들도…….”
“이미 도착했어요.”
그와 동시에 콰앙, 소리를 내며 창고의 문짝이 날아갔다. 나는 휙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뒤로 돌렸다. 환한 햇살이 창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누군가 안으로 뛰어왔다. 발걸음 소리가 무겁고 둔탁했다.
‘할릭인가?’
“카카나!”
역시 할릭이 맞다.
‘언제 발걸음 소리까지 외웠지.’
상황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할릭이 내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나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을 떨고 있었다.
검은 연기는 사라졌는데도 공기 중을 떠도는 무언가가 숨을 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사기가 사람의 공포심을 자극해서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듯이.
내가 과호흡 증상을 보이자, 할릭이 안절부절못하며 등을 쓸어내렸다. 뒤이어 나타난 첼러스가 곧바로 내 상태를 확인하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카카나, 숨을 너무 빨리 쉬고 있습니다.”
아다르까지 도착했다. 그가 급한 대로 재킷을 벗어 내 입과 코를 가렸다.
“천천히 내쉬어야 합니다. 네, 그렇게요. 천천히 내쉬세요.”
그의 지도를 따라 한참 동안 호흡 관리를 하자 조금씩 진정되었다. 내 떨림이 간신히 잦아들었을 무렵엔, 아르모어와 이블라까지 창고에 도착했다.
“기운이 혼탁하군.”
아르모어가 스르르 눈을 굴려 창고 안을 살폈다.
“익숙한 기운이다. 정백들이 소환되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저자 때문이었나.”
“맞아, 차원균열지대에서 느꼈던 기운이야.”
할릭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저 남자애한테서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알렉을 확인했다. 기절한 것처럼 보이는 알렉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꾸물꾸물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건 마물이 내뱉는 사기의 진화 형태야. 근데 왜 저 새끼가 내뿜고 있는 거야?”
아다르가 흥분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아직도 헬파이어를 손에 띄우고 있었던 스노아가 마지못해 마법을 해제하고 알렉에게 다가갔다. 검은 연기가 공격하려는 듯 스노아에게 달려들었으나 투명한 막에 부딪혀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스노아가 알렉의 옷깃을 젖혀 무언가를 찾는 듯하더니, 쇄골 부위를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정신지배를 받은 흔적이 있어요.”
“정신지배?”
“카카나, 그가 했던 말 중에 혹시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그렇게 물어도 알렉이 한 말의 대부분은 헛소리였다. 많은 이야기 중 무엇을 털어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나마 기억에 남아있는 대사를 간추려서 얘기했다.
“내가 환영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 그리고 몸에서 이상한 증표 같은 걸 찾으려고 했는데.”
“증표?”
내 목의 상처를 자세히 살피던 할릭이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미친놈인 거 아닐까.”
스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사용한 정신지배가 수준급이에요. 원거리에서 이 정도로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은 저주마법에 능통한 흑마법사밖에 없어요.”
“하지만 뮤나스에 심복을 심어 놓을 만한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레사 나이제르가 목적일까요?”
첼러스가 미간을 문지르며 말을 받았다. 아다르가 찝찝하게 구겨진 얼굴로 얘기했다.
“구울 때부터 이상하게 흑마법사와 엮이는 일이 많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이면 좋겠지만…….”
“흑마법사는 마나 추적을 했다가 역으로 저주에 당할 확률이 높아요. 상급 사제의 축복으로만 저주를 풀 수 있기 때문에 섣불리 파고들 순 없을 것 같아요.”
뭐라도 좋으니까 이 징글맞은 학교에서 어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할릭이 나를 안은 채 비브로스의 연구실로 데려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알렉 브래든은 정신조종의 표식이 사라진 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병동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손에 상처 난 것 때문에 나중에 귀찮아지는 거 아니야?’
그러나 나는 곧 상념에서 깨어났다. 비브로스가 내 처참한 몰골을 보고 기절할 듯이 놀랐기 때문이다.
“무례를 용서하니 어쩌니, 용사 행세는 있는 대로 내놓고 카카나 한 명을 못 지켜서 애를 이 꼴로 만들어?”
화가 잔뜩 난 그가 약물로 내 상처를 치료해주며 잔소리를 해댔다. 진실을 알게 된 후로 용사들을 어려워했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는 독설이었다.
“이래서 안심하고 애를 당신들한테 맡길 수 있겠냐고!”
“저 괜찮아요, 교수님.”
“넌 조용히 하고 저기 가서 누워.”
비브로스가 연구실 구석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소파에 가 누웠다.
나는 이틀간 비브로스의 지극한 간호를 받으며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되는지,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반강제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숨어 살 거라는 내 말에 미련이 남은 모양이었다. 잊을 만하면 치료사 얘기를 꺼내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제안했다.
‘어차피 숨어 살게 될 텐데 치료사는 무슨’
내가 뜻을 굽힐 것 같지 않자 마침내 비브로스도 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가끔씩 놀러 와서 얼굴을 비치라며 시원섭섭한 소리를 했다.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그럼에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렉 브래든은 학교를 자퇴했다.
상처가 심각한 탓에 그의 부모님이 소동을 벌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아무도 그의 자퇴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꼭 처음부터 학교에 없었다는 듯, 신기루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그 점을 몹시 수상하게 여겼지만, 뮤나스를 떠날 때가 되자 곧 그마저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히고 말았다.
우리는 다음 날 새벽이 되자마자 뮤나스 정문에 모여 길을 떠났다.
전설 속 엘프와 드래곤의 숲, 퀄리티미엄을 찾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