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괴짜 마법사들
“아이고.”
나는 삭신이 쑤시는 몸을 두드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악몽초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열이 떨어진 이후로는 잠도 깊게 자기 힘들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폈다. 옆 침대에 잠에 빠져 있는 이블라가 보였다.
달빛이 방 가운데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 장면을 멍하니 보다가 문득 콜리나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 재수 없는 계집애 요즘 안 보이네…….’
안 보이면 나야 좋지만 어쩐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혹시나 싶어 용사들과 비브로스를 추궁해봤지만 다들 오리발을 내밀고 얘기해주지 않으려 했다.
‘죽이기야 했겠어.’
어찌 됐든 날 귀찮게 하는 애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나는 미련을 싹 털어버리기로 작정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블라는 밤낮없이 날 간호한 탓에 지금은 기절하듯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벽을 짚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컵에 따라놓은 물을 마시고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3시다. 이대로 다시 누워봤자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잠깐 산책을 하다 돌아오기로 마음먹었다.
잠옷에 대충 두툼한 망토를 두르고 방을 나섰다.
‘용사들은 잘 조사하고 있긴 한가. 벌써 한 학기의 반이나 와버렸는데.’
많이 부드러워진 봄바람이 따스하게 불었다. 복도를 걸어 여학생 기숙사를 벗어났다.
근처에 잘 만들어진 인조 정원과 분수대가 있었다. 그곳까지 쭉 걸어갔다. 꾸준하게 걷자 손발에 피가 돌았다. 느글거리던 속도 조금 가라앉았다. 분수대의 물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벌레울음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문득 어지러워져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밑으로 떨어지는 분수대의 물소리가 꼭 계곡물 흐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땅에 똑바로 서 있을 다리가 허공에서 천천히 흔들리는 착각이 일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부유하듯이, 흔들흔들…….
‘내가 벼랑에 매달려 있는 것도 봤을까?’
그들은 잠깐이지만 내 악몽 속에 들어왔다고 했다.
나는 다양한 악몽을 꾸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제일 많이 꿨다. 용사들이 그 장면을 봤을지 궁금했다. 아니면 다른 끔찍한 장면을 봤을지도 모른다.
친구들의…….
나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없앴다.
무릎에 힘이 풀려서, 눈을 뜨고 근처의 벤치를 손으로 짚었다. 이대로 쓰러져서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괜히 나왔나.’
기어가듯 벤치에 가 앉았다. 앉아있는데도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허벅지를 움켜쥐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해봤자 뭐 해…….’
푹 한숨을 내쉬는데,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식은땀에 젖은 눈꺼풀을 번쩍 떴다. 달빛 아래서 독보적으로 찬연하게 빛나는 백금발이 보였다.
고개를 들었다. 하얀 피부가 시선을 끌었다. 묵직하고 고결한 분위기의 얼굴이 날 굽어보고 있다. 내 영혼까지 들여다볼 듯한 성스러운 호수빛 눈이 선명했다.
‘첼러스?’
그의 걱정하는 낯을 보자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에 생침을 삼키며 숨을 골랐다.
“첼러스.”
꽉 잠긴 음성이 갈라지며 나간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벤치에 등을 기댔다. 몸이 무거웠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잠시 수련을 할까 하여 왔습니다.”
“수련? 이 시간에?”
“마침 학교 조사가 끝난 참이었습니다. 조만간 실행에 옮길 듯합니다.”
진행이 되고 있긴 했구나. 나는 멀거니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근데 왜 여기서 수련해? 수련장이 낫지 않아?”
“이곳은 조경목이 있어 몸을 숨기며 수련하기에 좋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온 첼러스가 오른손을 뻗어 내 어깨 너머의 벤치 등받이를 움켜쥐었다. 그의 깨끗한 얼굴이 코가 부딪힐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나는 조금 놀라서 벤치에 깊숙이 등을 묻었다. 은은하게 켜져 있는 인조정원의 램프 빛이 그의 넉넉한 덩치에 가려졌다.
덕분에 나는 첼러스의 그림자에 먹힌 것 같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카카나.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아니.”
벼랑을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지레 놀라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멀쩡한데.”
첼러스가 고요히 날 들여다본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첼러스가 다른 손으로 내 뺨을 감싸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가 속절없이 흔들리는 내 눈을 똑바로 지켜보며 말했다.
“또 거짓말을 하는군요.”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내 목덜미를 스쳤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그의 엄지가 촉촉한 눈가를 쓸자 느릿하게 눈을 떴다.
숲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옥색 호수를 떠오르게 만드는 눈이 보였다. 머리카락만큼이나 화려하게 반짝이는 풍성한 금빛 속눈썹이 그가 눈꺼풀을 깜박일 때마다 길게 나풀거렸다. 그것이 꼭 호수에 비친 햇빛처럼 따사롭게 느껴졌다.
첼러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저는 당신이 항상 걱정됩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강하니까.”
“맞습니다. 카카나는 강합니다.”
첼러스가 눈이 순간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는 의아하게 여기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왜인지 자꾸만 입이 말랐다.
“자주 아파도, 음모에 당해도, 부정한 감정에 휩쓸려도, 카카나는 변함없이 강할 겁니다. 쓰러져도, 아니 어쩌면 죽기 직전이 되어서도 강할지 모릅니다.”
첼러스의 얼굴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근거리에서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물러날 기미 없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우릴 보았더라면 아마 단순히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 절 애태웁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얼굴이 아주 미미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나만 느낄 수 있는, 그러나 거부할 기회는 주지 않는 극도로 조심스럽고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습한 언어가, 그리고 강건한 시선이 날 서서히 옭아맸다. 벗어날 수 없게끔.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귀에서 뛰는 듯 크게 들려왔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절 애태우고 맙니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체, 첼러스.”
끊어질 듯 숨을 들이켜며 이름을 부르자 마침내 그가 멈추었다.
벌레울음 소리가 커졌다. 여름이 다가오는 밤의, 미지근한 바람을 느끼며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등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한없이 고요하고, 잠잠한 공기가 날 감싸 안았다.
첼러스가 풍기는 단단한 분위기가 마치 방패처럼 나를 감싸서, 긴장이 강제로 풀리는 느낌이었다.
“당신은 언제쯤, 마음을 열어줄까요.”
첼러스가 무겁게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눈은 어느새 다시 밝은 색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햇빛이 비치는 호수처럼.
나는 우물거리다가, 아랫입술을 이로 짓누르며 시선을 돌렸다. 왜인지 첼러스와 계속 눈을 맞추고 있기 힘들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내 몸 상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가?’
아마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았다. 회복이 다 되지 않았는데 무리해서 산책을 하는 바람에…….
“뺨이 뜨겁습니다.”
첼러스가 서늘한 손등으로 내 뺨을 누르며 열기를 식혀주었다.
‘열?’
나는 당황해서, 허둥지둥 뺨에 닿은 첼러스의 손을 잡았다. 머리로는 기숙사에 들어가면 해열제를 먹고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머리와 달리, 심장은 이제 목젖에서 쾅쾅 울리고 있었다.
마치 가슴 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돌연 첼러스의 찬찬한 머리카락이 내 이마를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간지러운 숨결이 입가 근처에 느껴져서 목을 움츠렸다. 그가 이마를 맞댄 채 낮게 중얼거렸다.
“열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가 고개를 떼며 말했다. 마치 내 생각을 들여다본 것 같은 말이었다.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가 내 붉어진 뺨과 귀를 어루만지다가, 나직하게 얘기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압니다. 무엇이든.”
아주 느린 음성이었다.
“저는 인내심이 강합니다.”
그가 기분 좋은 냄새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이는 것처럼 숨을 삼켰다. 벤치의 등받이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고 있는지, 첼러스의 팔뚝에 근육이 온통 불거져 있었다.
그러나 내 볼을 감싸고 있는 손은 더없이 부드럽고 온화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며 다리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주먹 쥐었다. 피가 너무 빨리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자 꿀꺽, 목울대 움직이는 소리가 크게 났다. 가까이에 있는 첼러스도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작게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린 첼러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들이켰다.
“기숙사에 들어가 보는 게 좋겠습니다, 카카나. 새벽바람이 찹니다.”
“너 오늘 이상해.”
나는 약간 심통 난 어조로 투덜댔다.
“그렇습니까?”
“낯설어.”
“그럼, 카카나가 더 이상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제가 더욱 노력해야겠군요.”
‘말이 그렇게 되나?’
묘한 표정을 짓는데, 별안간 첼러스의 팔이 내 몸을 안정적으로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희미하게 눈을 휘어 웃은 그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카카나의 몸은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제가 기숙사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내, 내가 무슨 공주님인 줄 알아? 나도 두 발 달려 있어!”
“카카나는 제게 공주님보다 훨씬 고귀한 존재입니다.”
첼러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저리 대답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어째 최근 들어 이런 일이 잦은 것 같았다.
‘공주님보다 고귀하다니…….’
닭살 돋는 말을 진중하고 담백하게 하는 것도 재주다.
아니, 단순히 이리 여길 것이 아니었다. 방금 첼러스가 한 말은 느끼하다 못해 위험한 발언이었다. 저런 말을 아무데나 남발했다간 제국 상비군한테 끌려가기 십상이었다.
첼러스가 끌려갈 린 없지만, 말에서 진심이 느껴지니 농담 말라며 가볍게 듣고 넘기기 껄끄럽지 않은가.
“어색해 마시고 절 마음껏 이용하십시오.”
첼러스가 뒤늦게 첨언했다. 나는 한숨을 삼켰다.
고집 부려 봤자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걸 눈썰미 좋게 알아채고 돕게 해달라고 부탁할 사람이다. 걸어가다 넘어지면 아마 다음 날 소식을 들은 용사들이 수선을 떨지도 몰랐다. 그 장면이 그림 그려지듯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착잡하게 생각하는 사이 기숙사에 도착했다. 첼러스가 입구 근처에 날 내려 주었다.
“고마워.”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을 휘저었다. 지켜보고 서 있지 말고 어서 돌아가란 의미였다.
첼러스는 별로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몸을 돌려 돌아갔다. 그의 멀어지는 등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기숙사 건물에 들어섰다. 그리고 거의 반쯤 잠에 든 채 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갔다.
쌀쌀한 날씨에 식어있던 몸을 포근한 공기가 에워싸자 근육이 녹진하게 풀어졌다. 나는 망토를 입은 채 침대에 엎어졌다. 악몽초에 시달린 이후로 처음 맞는 안온한 수면이었다.
***
감기 걸렸을 거라는 내 생각과 달리, 다음 날 아침 나는 멀쩡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
뺨에 열기도 없었고, 바짝 마르던 입술도 촉촉했으며, 심장은 낮고 규칙적으로 뛰었다.
‘그땐 왜 그렇게 심장이 뛰었을까?’
정말이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의문을 남겨둔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다시 일주일이 지나갔다.
나는 건강을 되찾았다. 회복엔 이블라의 지극한 간호와 매 끼니마다 음식을 차려온 아다르의 정성이 크게 한몫했다.
기분 탓인지 아다르는 악몽초 사건 이후 내게 맛있는 걸 먹이는 데 더 집착하는 것 같았다. 초식 수인족이 먹을 수 있는 온갖 호화롭고 맛있는 음식은 죄다 만들어 바칠 기세였다.
그의 음식은 맛있어서 나쁠 건 없었지만, 불타오르는 아다르의 시선을 받고 있노라면 왜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용사들에게 이유를 물어봤지만 다들 너는 더 먹어야 한다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아무렴 어떠랴.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용사들의 학교 조사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이른 새벽, 사람이 잘 오지 않는 폐관 건물의 자물쇠를 몰래 따고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의 성과를 검토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수립하기 위함이었다.
“슬슬 얘기해볼까?”
할릭이 말문을 텄다.
“차원전쟁이랑 물의 현자 위치 말하는 거지?”
나는 확인차 물었다.
“그렇지.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그럼 너부터 얘기해볼래? 말 꺼낸 김에.”
고개를 끄덕인 할릭이 자세를 바로 했다.
“사실 너희랑 같이 다니면서 학교 구조를 파악한 거 말고는, 이렇다 할 소득이 없어. 뮤나스에 있는 평민들에게 용사들에 대해 물어보긴 했거든? 근데 대답이 뻔하더라.”
그가 유감이라는 듯이 말했다.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는 정도? 그리고 웃기는 사실을 들었는데, 우리 차원의 균열에 빨려 들어간 걸로 되어 있던데?”
첼러스가 문득 깨달은 어조로 맞장구쳤다.
“그러고 보니 귀족들도 그랬습니다. 용사들은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고, 차원의 균열에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더군요. 혹시 기록에도 그렇게 남아있습니까?”
“네.”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필자마다 표현이 다르긴 하지만, 공식문서에 기록되어있는 이야기는 모두 같은 맥락을 따르고 있어요.”
스노아가 책의 구절을 그대로 읊듯이, 이야기를 이었다.
“사랑과 증오의 신 헬리스는 부정한 나라를 증오하여 처벌을 결정하셨다. 그녀의 가호 아래 등장한 다섯 명의 집행자는 태어나서부터 품고 있던 그들의 사명을 결국 이루었으며, 그들의 승리를 치하한 헬리스 신이 숭고한 죽음으로써 그들을 도로 거두어 가셨다.”
“숭고한 죽음.”
아다르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꺼먼 눈을 흘긋 살핀 스노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헬리스의 자손 그라나스 들라주아 그랑루이 황제는 차원의 균열 근처에서 용사들의 증거품을 발견하여 그것을 후예에게 하사했다. 그리고 영원히 간수할 것을 명하셨다.”
“후예?”
할릭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이자, 스노아가 대꾸했다.
“용사들의 제자를 말해요. 책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제 경우에는 아레사 나이제르인 것 같구요.”
나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깜짝 놀랄 사실을 깨닫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물의 현자가 스노아 제자였어?”
“네.”
“말도 안 돼…….”
용사들이랑 같이 다니다 보면 현실감을 잊게 되는 것 같다. 물의 현자가 제자라니.
그는 현자 중에서 제일 오래 살아 나이가 20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는 양반이었다. 새삼 내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된 존재들인지 실감되었다.
내가 패닉에 빠져있는 사이 스노아가 용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용사에 관한 기억을 잃어버리는 이유도 기록되어 있었어요. 교수전용 열람코너에 보관된 고서에 쓰여 있더군요.”
“그래? 뭐라고 쓰여 있디?”
할릭이 반색하며 물었다.
“차원의 균열에 빨려 들어간 탓이라고 설명되어 있었어요.”
“엥?”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기에 이곳에 남은 존재가 지워진 거라고요. 연구 결과라면서 당당하게 써 놓았던데요.”
“진짜 가지가지 하네.”
듣다 못한 아다르가 짜증을 냈다.
“지들도 그렇게 핑계 대놓고 민망해서 절판한 거 아니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문제죠. 오래된 내용이어서, 이제 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새로 사실을 밝히려는 사람도 없고.”
스노아가 한숨을 쉬었다.
“제가 알아낸 건 이 정도예요. 아다르는 더 알아낸 것이 있나요?”
“별 거 아닌데.”
“그래도 말해보세요.”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권력 있는 교수들은 현자의 위치를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며칠 지켜봤는데, 그들도 모르는 눈치더라. 어디에 숨었는지 모르겠다며 귀신 아니냐는 농담을 주고받던데. 그 정도 나이는 되지 않았냐면서 말장난이나 하고 있더라고.”
“그건 안 좋은 소식이군요. 뮤나스에 있다는 정보 자체가 거짓일 수도 있어요.”
아다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아레사 나이제르는 뮤나스에 정식으로 방문절차를 밟았어. 너희도 알겠지만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 엄청 많잖아.”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관된 건물을 포함해서 지하의 비밀통로까지 백 군데가 넘어. 싹 뒤지면 그중 한 곳에는 있겠지.”
“뮤나스에서 실종되어 죽은 평민들이 꽤 있는 것 같던데. 그거랑 연관이 있을까?”
할릭이 말했다.
“평민들 대부분이 겁에 질려 있어. 제정신인 귀족이 드물다고 하더라. 그건 어디든 마찬가지 아니냐고 했는데, 이젠 도를 넘었다는 반응이더라고. 여긴 원래 뮤나스, 그 미치광이 마법사 양반의 저택이었잖아. 흔적이 학교 곳곳에 남아 있어서 괴담도 꽤 많고.”
“귀족이 이상하다는 건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첼러스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묘한 기운을 두르고 있더군요. 그렇지 않은 귀족이 더 많긴 합니다만.”
“차원균열지대에서 마물을 상대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지.”
아르모어가 과거를 회상하는 투로 얘기했다.
나는 스노아가 도서관에서 만난 그 남학생을 언급할 줄 알았지만, 이상하게 그는 침묵을 택했다. 고민하듯 이마를 문지르던 스노아가 입을 열었다.
“만약 아레사가 여기 있는 게 확실하다면, 짐작 가는 곳이 한 군데 있어요. 그는 마법사고, 뮤나스의 모태가 된 저택의 본래 주인도 마법사니 갈 만한 곳은 정해져있거든요.”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갈 만한 곳?”
“아레사는 이곳의 ‘무언가’를 연구하러 왔다고 했었잖아요? 아무래도 대형 마나석인 것 같아서요. 지하에 매장되어 있다더군요.”
스노아가 나머지 용사들을 바라보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다르와 함께 그동안 알아낸 비밀통로를 정리해둘 테니, 사흘 후 자정에 직접 탐색해보는 게 좋겠어요. 그때는 휴일이라 학교에 사람이 별로 없을 거예요.”
‘꼭 모험하는 것 같네.’
나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과 교수들은 계속 예의주시해주세요. 쓸 만한 정보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첼러스, 아르모어, 아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도로 자물쇠를 잠그고 폐관 건물에서 빠져나와 흩어졌다.
사흘 후가 되자 다 함께 약속대로 도서관에 모였다.
비밀통로로 진입하는 입구는 놀랍게도 도서관에 있는 교수전용 열람코너였다. 그곳에 안 좋은 추억이 있었던 나는 웬만하면 함께 가지 않으려 했지만, 기숙사에 있어도 왠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없는 새 다치기라고 하면 곤란하지.’
그들은 나를 제국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날 지켜주기도 전에 어디 다쳐서 오면 곤란했다.
그러나 용사들은 내 설명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을 했다. 아다르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은근하게 말을 걸었다.
“우리가 그렇게 걱정됐어?”
나는 토하는 시늉을 하며 타박했다.
“웃기고 있네. 내 설명 못 들었어? 너희가 죽으면 귀찮아져서 미리 예방하는 것뿐이라니까.”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이블라가 내 대답을 듣고는 입을 틀어막는 게 아닌가.
‘내가 너무 무정하게 말했나.’
조금 기가 죽어서 쳐다보니, 그녀의 붉은 눈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시선이 강렬해서 내 얼굴이 닳아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귀여워서 못 참겠지?”
아다르가 키들거리면서 이블라에게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민망해져서 그의 정강이를 발로 차버렸다. 아다르가 여유롭게 공격을 피했다. 그에게 욕지거리를 뱉으려는 순간, 열람코너에 숨겨져 있던 문을 자세히 살핀 스노아가 입을 열었다.
“자물쇠에 복잡한 봉인 마법이 걸려있군요.”
스노아는 우릴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아다르랑 내가 허구한 날 투닥거리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이곳에 몰래 잠입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봉인마법이 걸린 문은 투박하고 음침한 이끼 색이었다. 화려하고 이지적인 분위기로 꾸며놓은 도서관과 판이하게 다른 디자인이었다. 줄곧 거대한 진열장 뒤에 숨겨져 있었던 터라 먼지도 뽀얗게 쌓여 있었다.
나는 주렁주렁 달린 자물쇠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들였다간 지옥으로 직행할 것 같은 불길한 문이었다.
“언락.”
스노아가 그 많은 자물쇠들을 손가락을 조금 휘두르는 것으로 척척 해제했다.
‘복잡한 봉인 마법이라며…….’
그렇게 쉽게 해제해버릴 거면 그런 말은 왜 했나 싶었다.
아다르가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비브로스를 통해 어렵게 입수했다던 지도였다.
“이 문은 괴짜 마법사 뮤나스의 비밀공간에 무작위로 이어져 있다고 해. 동시에 입장하면 같은 장소로 떨어진다는데, 일곱 명이 함께 문으로 진입하는 건 무리니까 지금 짝을 짓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다르가 이블라를 지목하며 말했다.
“우선, 이블라는 나랑.”
“내가 왜?”
이블라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저항했다. 아다르가 픽 웃으며 빈정거린다.
“그럼 네가 카카나랑 단둘이 저길 통과하게? 어떤 공간이 펼쳐질지,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몰라. 지켜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어?”
이블라가 대답하지 못하고 분하게 입술을 사리물자, 아르모어가 말했다.
“나는 혼자가 편하다.”
“그러면 내가 카카나랑 함께 갈게.”
할릭이 얘기했다.
스노아가 첼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제 파트너는 자동으로 첼러스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첼러스가 문으로 걸어갔다.
먼지가 앉은 것을 털어내고 문고리를 돌리자, 경첩이 맞물리며 녹슬고 오래된 소리가 났다. 문 안은 아무것도 안 보였다. 무저갱 같은 암흑이 짙게 깔려 있었다.
아르모어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걸음에 망설임이 없어서 되레 내가 더 놀랐다. 말릴 새도 없이 그의 모습이 어둠에 삼켜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를 쫓아 아다르와 이블라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은 스노아와 첼러스였다.
할릭과 나는 마지막으로 불길한 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 없었다. 유사시에 날 보호할 수 있도록, 할릭이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심호흡을 한 다음, 나란히 검은 공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뮤나스는 단언컨대 나를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끄아아아아악!”
검은 무저갱은 정말로 구렁텅이를 나타낸 것이었는지, 문턱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마자 몸이 훅 꺼진 것이다.
할릭과 나는 하염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상식적으로 건물 아래에 이렇게 깊은 굴이 있을 리 없을 텐데도, 우리는 5분 이상 추락하기만 했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내가 계속 처절한 비명을 지르자, 할릭이 잡고 있던 손을 당겨 나를 제 품에 안았다. 아무리 크고 단단한 것이 내 온몸을 보호해준다 하더라도 내장이 위로 쏠리는 느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 떨어지다간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나는 할릭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수인족 기준으로 다 큰 성인이 된지 꽤 됐는데 속옷에 지려버리는 경험을 하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는 종착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마 이블라와 함께 왔다면 제일 먼저 죽지 않았을까 싶었다. 밑엔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었다.
할릭이 마나로 다리를 강화하여 착지하지 않았다면 온몸이 바스러져 죽었을 것이다.
‘벌써 기숙사에 돌아가고 싶다…….’
나는 기진맥진하며 자리에 섰다. 다리에 힘이 돌아오지 않았다. 할릭에게 몸을 기대며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는 거대한 왕성 홀 같은 곳에 들어와 있었는데, 조명이 없어 어두컴컴했다. 대신 호박색 불빛 하나가 홀 가운데를 비추고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곳엔 값비싸 보이는 하얀색 암석을 깎아 만든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 낡은 책이 한 권 놓여있었다. 드래곤 레어에 있을 법한, 두껍고 오래된 책이었다. 하드커버가 낡아서 결이 일어나있었다.
그러나 책을 받치고 있는 독서대는 갓 만든 것처럼 광이 나고 먼지 한 톨 없이 반질반질했다.
「아, 짜증 나네. 웬 호수 같은 곳에 떨어졌어.」
아다르가 텔레파시로 짜증 내는 소리가 들렸다. 스노아가 개량해준 마도구의 힘이었다.
‘호수라니, 그러면 우리는 양호한 편인 건가.’
나는 진저리를 치며 독서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카카나? 그쪽은 어떤가요? 여기는 키메라가 있어서 조금 귀찮아진 상태예요.」
스노아가 말했다.
‘키메라라고?’
상상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이 정도면 여길 개조할 생각을 한 학교 설립자도 제정신 아닌 거 아니야? 천재라더니, 천재들은 다 괴짠가?’
나는 나도 뮤나스에서 이미 천재 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은 채 생각했다.
계속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간 스노아가 더 걱정할 것 같아서, 나는 목에 걸려있는 펜던트를 손에 쥐었다.
「우린 괜찮아, 스노아. 웬 이상한 방으로 떨어졌는데, 책 한 권밖에 없어.」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평범한 곳이 오히려 방심하게 되어 위험해지기 쉽습니다.」
첼러스가 얘기했다.
나도 동의하는 바였기 때문에 책에 일정거리 이상 다가가지 않고 방을 살폈다. 뭐 하는 방인지 출입구도 없었다. 우리가 떨어진 구멍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나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할릭이 말했다.
“벽을 뚫어버리자.”
아침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다.
「방 전체에 뮤나스의 흔적이 남아있어요. 공간이 뒤틀려 있으니, 벽을 억지로 뚫는 방식으로 탈출하는 건 자제하세요.」
그러나 할릭의 계획은 이어지는 스노아의 말에 허무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공간 미아가 될 수 있어요. 마법사들이 텔레포트를 잘못해서 미지의 공간에 영원히 갇혀버리기도 한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죠?」
할릭이 거세게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네. 저 책을 살펴봐야겠는데?”
“괜찮을까?”
“혹시 모르니까, 이리 와서 안겨.”
나는 괜한 패기를 부리지 않고 할릭의 품에 안겼다.
아직 방을 하나밖에 구경하지 못했지만 뮤나스의 괴상하고 별세계인 취향을 뼈저리게 느낀 참이었다. 그는 초월자에 근접했을 정도의 대마법사였으니 몸을 사리는 게 현명했다.
할릭이 나를 편하게 고쳐 안으며 책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여긴 것과 달리,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펼쳐져 있는 책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보는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다른 나라의 언어라고 하기엔 난생처음 보는 모양이어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할릭이 얘기했다.
“이거 마법서 같은데? 스노아가 이런 문자를 사용한 걸 본 적이 있어.”
“이게 다 마법 주문이란 말이야?”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할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지로 손을 가져다댔다. 기겁하며 그의 팔뚝을 잡아챘다.
“무슨 마법 주문인 줄 알고 함부로 만져!”
“하지만 뭐라도 안 하면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해. 네가 만지는 것보단 내가 만지는 게 안전하잖아.”
불만 어린 얼굴로 손을 치우자, 할릭이 예정대로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동시에 거센 빛이 확 터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무, 무슨 일이야?”
다행히 공격마법은 아닌지 몸이 아프거나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다만 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렸다.
‘엥?’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뺨을 때리고 있었다.
소금기가 자글거리는 비린내가 후각을 마비시켰다. 나는 멍하니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바다가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전경에 바다가 펼쳐진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잠깐.’
“뭐야! 뭐야?”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목이 부러져라 왼쪽 오른쪽을 살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바닷가다.
쏴아아아아―
심지어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쫄딱 젖었다. 빗방울이 고인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그걸 고스란히 들어 스스로 뺨을 때렸다.
“미쳤나? 미친 거니?”
그러나 찰싹찰싹 때려도 아프기만 할 뿐 이곳은 현실이었다.
나는 난감하게 서서,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었는지 생각했다. 이모저모 뜯어봐도 건물 안처럼은 안 보였고 하늘에선 지독하게 생생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두터운 구름을 보건대 꼭 장마철처럼 보였다.
빗방울도 봄비라기엔 걷잡을 수 없이 굵어져서, 이젠 아예 바가지로 쏟아 붓듯이 내리고 있었다. 이상한 곳에 강제 텔레포트 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비가 내리는 계절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우선 할릭이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목에 걸려 있던 마도구를 쥐려고 했다. 그러다 뒤늦게 땅이 묘하게 멀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에 스노아가 만들어준 마도구도 걸려 있지 않았다.
뒤늦게 내 몸을 확인했다. 나는 수인족이 아닌 인간이 되어있었다. 한 손에 정체불명의 활까지 들려있다.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 태어나서부터 괴물이라 불린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때 좁은 공간에서 목소리가 울리듯, 세상 전체가 쟁쟁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리려 했으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왜 안 움직이지?’
「무인으로 타고난 소년에겐 유일한 약점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하나뿐인 가족, 어머니였습니다.」
하늘에서 계속 목소리가 울렸다. 신이 인간을 향해 말을 걸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서 어버버거리는데, 내 발이 갑자기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줄에 걸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조종당하듯 어디론가 열심히 걸어갈 뿐이었다.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동화책을 읽어주듯 평화로운 어조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년의 힘을 탐내는 자들은, 그의 어머니를 납치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어디선가 투닥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목은 움직일 수 있네?’
초조하게 입술을 핥으며 눈을 굴렸다. 언덕 위에 웬 낡은 오두막집이 하나 있었다. 조종당하는 다리가 열심히 뛰어 오두막집의 문을 발로 차 열었다. 경첩이 우지끈 부서지며 안에 숨어있던 겁먹은 여인이 드러났다.
마른 모래 색 머리카락을 가진 고운 인상의 여인이었다. 그녀를 퍽 밀쳐 넘어트린 괴한이 서로 낄낄거리며 저열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나는 들고 있던 활로 그들의 머리를 박살내고 싶었으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유로운 건 목 위뿐인 듯했다. 그들이 여인의 손을 묶으며 내게 기세등등한 어조로 말했다.
“두목! 이거 월척입니다. 이년만 남작님께 갖다 바치면 우리도 돈 방석에 앉을 수 있어요!”
‘내가 보스였어?!’
기분이 더러워져서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제기랄! 이게 뭐야!”
“하하하! 걱정 마세요, 보스! 아지트에 술을 왕창 사놨으니까!”
괴한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뚱딴지같은 소리를 해댔다.
이쯤 되자 나는 이곳이 뮤나스의 마법 공간 안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여길 빠져나가야 하나 막막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갑자기 오두막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애가 뛰어 들어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의 아들이 오두막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미치겠네.”
아들이 내뱉은 말은 다소 상황과 동떨어진 대사였다. 나는 눈살을 찡그리며 남자애를 바라보았다. 왠지 낯익은 얼굴이었다.
훨씬 어리고, 인상도 무척 험악했지만…….
‘설마?’
나는 눈꺼풀을 여러 차례 깜박였다.
남자애가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나와 오랫동안 시선을 맞추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눈이 기어코 맛이 간 게 아니라면 저 앤 분명히 할릭이었다. 확실했다.
그것도 막 청소년기에 접어든 것처럼 어린 얼굴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가 맞나 싶게 분위기가 달랐다.
반항적이고, 어둡고, 몹시 사나운 인상이었다.
“너 설마 할릭이야?”
“카카나……?”
어린 할릭이 절규에 가까운 표정을 짓기 무섭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소년은 능숙하게 괴한들을 제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끔찍한 소리를 들은 양 눈을 질끈 감았다.
“야단났다.”
그러나 말과 다르게 할릭의 손은 잔인한 손속으로 괴한들의 숨통을 끊어놓고 있었다. 야단났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나는 퍼뜩 깨달았다. 우리는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조종당하고 있다. 그리고 괴한의 두목은 나다. 할릭의 다음 먹잇감은 나란 소리다.
마법 공간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기엔, 피부에 떨어지던 빗방울의 생생한 감각이 남아있었다. 우습게 여기고 그냥 몸을 맡겼다간 할릭 손에 죽게 생겼다.
“노, 농담이지?”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피해, 카카나!”
할릭이 주먹을 내지르며 소리 질렀다.
다행히 두목은 괴한들과 다르게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놈인지, 할릭의 공격을 피했다. 우리는 서로를 간절하게 쳐다보며 빠르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의지를 벗어난 몸은 한바탕 붙기 위한 탐색전을 벌이고 있었다.
“할릭, 이거 혹시 네 과거야? 실제로 있었던 일?”
그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다음에 어떻게 돼? 두목 죽어?”
“죽어.”
할릭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는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아아악! 어떻게 해!”
그러나 다른 방법을 찾기도 전에 할릭이 내게 달려들었다. 두목은 당황한 건지, 허리춤에 꽂혀 있던 단검을 뽑아들지도 못했다. 할릭의 돌덩어리 같은 몸이 내게 돌진했다.
쾅, 하고 부딪히자 두개골이 종처럼 흔들렸다.
“윽!”
숨을 참으며 눈을 감자 우당탕, 하고 쓰러진 몸이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두목이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할릭이 두목의 몸 위에 올라타며 잽싸게 막는다. 이윽고 두 손이 머리 위로 포박되었다.
힘이 어찌나 센지 손목이 끊어질 것 같다. 할릭과 부딪힌 배와 바닥에 쓸린 등허리가 지독하게 화끈거렸다.
할릭이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카카나, 괜찮아? 아파?”
“컥, 허윽, 당연히 아프지!”
“젠장할…….”
“걱정할 시간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좀 해봐!”
“차라리 키메라면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데, 이건.”
할릭이 내게 얼굴을 들이민 채로 참혹하게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가까이 있나 했더니 과거에 근거리에서 두목을 노려봤던 것 같았다. 할릭의 얼굴이 키스라도 할 것처럼 다가와 있었다.
어른 할릭보다 인상이 험악한 탓에 유난히 짐승의 느낌이 강했다. 심지어 송곳니도 길어서 내 목덜미를 물어뜯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이 없어. 이제 너 죽는단 말이야.”
“뭐, 뭐라고?”
나는 충격을 받고 되물었다.
“이다음에 바로?”
“이 자세로 대화를 나누긴 했는데,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았어. 대화가 끝나자마자 네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뽑아서…….”
“그, 그만! 설명 안 해도 돼!”
예견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할릭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았다.
‘여기서 죽는 건가? 할릭 손에?’
악취미여도 너무 악취미인 거 아닌가. 이 정도면 괴짜 마법사의 저택이 아니라 흑마법사의 저택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건 정신을 파고들어 전개한 마법이 아닌가.
뮤나스는 특이한 연구가 너무 하고 싶은 나머지 이미 반쯤은 금기를 범한 거나 다름없었다. 단검을 쥔 할릭이 내 옆구리에 차가운 칼날을 들이밀며 몸을 더욱 숙였다.
아무래도 두목에게 귓속말을 할 게 있었던 모양이다.
‘지옥에 가서도 영원히 고통 받으라는 저주를 퍼부었을까.’
할릭의 입김이 귓가 언저리에 느껴지는 순간, 그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엑? 할릭?”
그리고 내가 어떻게 더 말을 할 새도 없이, 그가 있는 힘껏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어린 할릭의 힘으로 한 짓이 아니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무인 체질로 태어난 아이라지만, 마나를 감지 않은 이상 이마로 바닥을 깰 순 없기 때문이다.
충격을 버티지 못한 나무 바닥이 뒤틀리며 일제히 일어서는 게 등으로 느껴졌다. 그러자 세상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물에 기름이 섞인 듯, 오두막의 천장이 일그러져 보였다.
현기증이 일어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어두컴컴한 천장이 보였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아까 그 책이 놓여있던 방이었다.
“헉,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상황을 파악했다. 나는 바닥에 누워있고, 할릭이 내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도 거센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할릭이 고개를 들어 내 얼굴 이곳저곳을 살폈다. 크게 다친 곳이 발견되지 않자, 폐부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옆으로 비키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많이 긴장했던 모양이다.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몸을 일으켰다가 손목이 욱신거려 신음했다. 고개를 숙여 아픈 부위를 확인했다. 빨갛게 부푼 손목에 서서히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역시, 마법공간에서 얻은 상처는 현실에도 반영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여기에 환영이 덧씌워지고 우리는 단지 현혹된 것뿐일지도.’
“카카나?”
내 신음을 들은 할릭이 몸을 일으켰다. 급히 손목을 등 뒤로 숨겼지만 늦었다. 팔뚝을 잡아 막은 할릭이 고요히 멍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곧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오두막집과 아프고 고운 어머니, 그리고 무던히 갈고 닦은 공격성이 그의 환경이 어떤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살아남아야만 하는 아이들은 자연히 거칠어진다. 과거에 그가 그렇게 행동한 건 할릭의 탓이 아니었다. 이건 사고였다.
“뮤나스 잘못이지. 저런 책은 왜 만들어서…….”
그를 위로하듯 작게 웅얼거리니 할릭이 고개를 들었다. 뭔가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그의 손에 얼른 약을 들려주었다.
“약 좀 발라줘.”
“너무 그러지 마.”
할릭이 연고의 뚜껑을 열면서 뜬금없는 소릴 했다.
“뭐가?”
연고를 손으로 뜬 그가 말없니 내 손목에 얇게 펴 발라주었다. 아랫입술을 핥는 게 꼭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다 이해해주지 말라고.”
“왜?”
“그렇게 다 받아주면, 멋대로 행동해도 되는지 고민하게 되니까.”
“멋대로 행동하는 게 뭐 어때서?”
“그래?”
할릭이 진하고 환한, 채도 높은 주황색 눈을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왜인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내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자, 그가 거즈를 덧대주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긴팔 옷이라 연고가 묻지 않게 신경 써준 것 같았다.
‘게다가 소매를 젖히고 다니면 용사들이 왜 그러냐 물을 테고.’
그럴 경우 할릭 때문에 생긴 상처라는 걸 설명해야 한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 같은 놈한테 그런 말 하면 금방 진심이라고 믿어버려. 돌진하는 게 주특기거든.”
할릭이 옷소매를 밑으로 내려주며 말했다.
“그러면 장담하는데 너 엄청 곤란해질 거야. 다 됐다.”
“고, 고마워.”
“많이 아파?”
“이 정도 멍은 금방 나아.”
나는 부러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멍은 신경 쓰지 말고,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나 생각해보자. 문은 여전히 없는 것 같거든?”
내 불길한 생각이 맞는다면, 이 방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책에 있었다.
그러나 책을 보는 것만으론 출구가 생기지 않았다. 뭔가를 해야 했다. 그런데 책을 만지면 마법에 걸려 조종당하기 바쁘니 무슨 수로 출구를 만들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법뿐이야.’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할릭, 그냥 스노아를 여기로 부르는 게 나을 것 같…….”
그러나 날 엿 먹일 수 있는 최상의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던 목소리가 다시 등장했다.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니? 그러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깜박였다가, 풍경이 뒤틀리기 시작하자 이를 갈았다. 이제 당황스럽다 못해 열이 솟구쳤다.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지 않아? 응, 뮤나스?’
네가 영혼이 되어 날 보고 있다면 대답해봐, 이 개X끼야.
“읍, 흐읍!”
입안이 헤집어졌다.
화들짝 놀란 가슴과 달리, 몸은 예상했다는 듯이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빈틈이 생길 때마다 죽을 듯이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저번의 어린 할릭보다는 나이가 좀 있는, 이제 막 성인이 된 것 같은 할릭이 내 몸 위에 올라와 있었다.
나는 여러 차례 눈을 끔벅였다. 풍성하고 조금쯤 곱실거리는 모래 색 속눈썹이 보였다. 어머니와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의외로 닮은 구석이 있었다. 굵직한 눈썹은 집중하고 있는 듯 조금 구겨져 있었다.
왼뺨에 짐승의 발톱자국이 아직 없는 걸로 봐선 이번에도 꽤 과거의 기억인 모양이었다.
그가 눈을 떴다. 그리고 심하게 충격을 받은 듯 입술을 오므렸다.
‘나 지금 할릭이랑 키스하고 있는 거 맞지?’
할릭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려는 듯, 목에 핏대가 섰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이번엔 목도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정열적으로 여인의 몸을 탐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나는 질겁했다.
‘뭐야? 아깐 동화풍이었잖아! 야화 아니었잖아!’
“으브으읍!”
‘뭐가 더 재미있는 이야기란 거야, 제기랄!’
언젠가 괴짜 마법사 뮤나스의 숨겨진 방에 대해 폭로하겠다고 다짐하며 어떻게든 고개를 돌리려고 해봤다. 소용없다.
그때 절규를 알아들은 것처럼 할릭이 조금 떨어졌다. 내 손이 자동으로 움직여 번들거리고 뜨거운 입술에 손등을 댔다.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카, 카카나. 이건…….”
가감 없이 키스했던 주제에 할릭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말문을 텄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가 경직했다. 내 답도 없는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주황색 직모로 탈바꿈해 있었다.
이제 보니 손도 달랐다. 오랫동안 검을 잡은 손처럼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혀있고 컸다. 내 작은 손을 모두 감쌀 것만 같은, 이블라와 비슷한 손이었다.
‘이번엔 또 누구로 바뀐 거야.’
정말 별일을 다 겪는 것 같다.
기가 차서 숨만 몰아쉬고 있는데, 할릭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거칠고 난폭한 키스가 이어졌다. 몸집이 큰 그가 포박하듯이 짓누르고 입을 맞추니 점점 버거워졌다.
할릭은 여태까지 최선을 다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입을 벌리고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이냐고 물으려 했는데, 내 혀도 말을 듣지 않고 키스에 응하기 시작했다.
‘설마 이제 혀까지 조종당하는 거야?’
「오랜만에 만난 둘은 정신없이 서로를 탐했다. 욕망을 참지 못한 그가 거칠게 몰아붙이자, 결국 참지 못한 여인이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내 입이 이야기대로 할릭의 입술을 깨물었다. 몸을 뒤로 물린 할릭이 날 지긋이 내려다본다. 상의는 탈의한 채였다.
땀이 조금 배어나온 근육질의 몸이 사냥 후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있는 금수처럼 천천히 약동하고 있었다.
주황색 눈이 나처럼 혼란에 잠겨 있었다. 그의 입이 멋대로 움직이며 말했다.
“갑자기 뭐야, 비케이.”
그가 약간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렸을 때 성격이 난장판이었다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험악한 얼굴과 위협적인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성격까지 포악하니 잠깐 짜증을 낸 것만으로 기가 팍 죽었다. 내가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 건지 짐승을 상대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비케이란 여성도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본능적으로 겁을 집어먹은 몸이 바짝 긴장하자, 그가 다시 내 목 근처에 입을 가져다대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혹시 무는 건가 싶어서 긴장했지만 아니었다. 그가 질척하게 피부를 핥았다.
“이제 와 새삼 내가 무서워? 이런 점이 매력이라더니?”
장난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능청스럽다. 날 주시하는 할릭의 눈은 이제 거의 지진이 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나도 지진이 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입은 할릭의 농담이 재미지다는 듯 웃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번엔 눈알 말고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목숨이 위협당하는 상황보단 나았지만 말 그대로 불행 중 다행일 뿐이다.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 안간힘을 쓰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발견했다. 척 봐도 이상한 물건을.
‘레버?’
다행히 근거리에 있었다.
여기는 여관인 것 같았는데, 욕실 문 근처에 책이 놓인 독서대와 비슷한 디자인의 레버가 달려 있었다. 대강 훑어봐도 여관의 물건은 아니다. 디자인이 너무 생뚱맞게 고급스러워 이질감이 들었다.
한눈에 봐도 뮤나스의 작품이었다.
레버의 쓰임새야 많긴 했지만, 완벽한 밀실이었던 공간을 떠올리자면 매우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저걸 당기면 벽이 움직이며 문이 생길 것 같지 않은가.
문도 없고 특수한 장치도 없었던 공간이기에 더더욱.
‘저걸 어떻게 당기지.’
상스러운 욕 백만 가지가 뇌리를 스쳤다. 내 상상 속에서 뮤나스는 이미 이백만 번째 죽음을 맞고 있었다.
“오늘따라 급하네, 할릭.”
내 입이 멋대로 움직이며 요염한 대사를 날렸다.
“내가 천천히 즐기는 성격이 아니니까.”
그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런 남자가 어떻게 맑고 해바라기 같은 남자가 될 수 있었던 건지 미스터리였다.
“느긋하게 하자. 오늘은 천천히 즐기고 싶어.”
“급하다며 날 여기까지 끌어와 놓고 농담도 잘하는군. 새로운 취향이 생겼나 보지?”
나는 무념무상의 상태에 접어들었다.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이, 이 이야기도 언젠가 끝날 터다. 머리를 비우고 얌전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상황을 살피며 계속 생각하다간 정신이 나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할릭이 내 쇄골을 갉작대자마자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3인칭 시점도 아니고 1인칭이다. 날 만지는 사람을 코앞에 두고 무념무상이 가능할 리 없었다.
나는 발정기 억제제를 개발하기 전에는 급할 때마다 돈으로 사람을 사서 욕구를 풀었기 때문에, 상대는 대부분 내 말에 고분고분 움직이기만 했다. 이런 식으로 적극적으로 날 탐하고자 하는 사람은 상대해본 적이 없다.
할릭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너무 자극적이어서 머릿속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그녀를 어루만졌습니다.」
그때, 할릭이 우뚝 멈추었다. 나는 뭔가 일이 다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그녀를 어루만졌습니다.」
「그는 멈추지 않…….」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은 반복하던 목소리가 서서히 흐려졌다.
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가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키자, 할릭이 내 몸에 이불을 둘러주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한참을 뛴 사람처럼 급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 땀을 흘린 건지 훤히 드러난 가슴팍에 물기가 번드르르했다.
그가 손으로 이마와 눈가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어린 할릭이 아니다. 왼뺨에 짐승의 발톱자국이 있는, 어른 할릭의 모습이었다.
나는 황급히 내 머리카락을 쥐어보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주황색 머리였다. 할릭만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먹어치웠어.”
“응?”
“마나 말이야.”
할릭이 침대에 털썩 드러누우며 말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뮤나스의 마나를 흡수했어. 혹시나 싶어서 시도해봤는데 먹히네.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는 정말로 지친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불로 몸을 꼼꼼하게 감싼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다시 그 빌어먹을 책이 우리를 이상한 공간으로 옮겨놓을지 몰랐다. 기회가 생겼을 때 잡아야 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레버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몸무게를 실어 레버에 매달리듯이 밑으로 내렸다.
몸이 어딘가로 훅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아까 그 공간이었다.
“흐아아아…….”
살았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번쩍 눈을 뜬 할릭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독서대에 있는 책을 확인했다. 활짝 펴져 있던 고서가 단단히 닫혀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근데 비케이가 누구야, 할릭.”
할릭이 갑자기 등을 찔린 사람처럼 퍼뜩 놀라며 침묵했다.
의아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현실을 거부하는 것처럼 흐릿해져 있었다. 나는 헉, 숨을 삼켰다.
‘미쳤나 봐. 그런 걸 왜 물어봐.’
후회를 삼키며 그를 마주보았다. 할릭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곤 몇 초간 입을 뻐끔거리다가, 매우 흔들리는 눈으로 날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항상 그렇게 거친 건 아니야. 생긴 건 짐승이어도 하는 짓은 얼마나 신사인데.”
“으, 응?”
“비케이도 용병이었어. 나랑 같이 일을 다니던 녀석인데, 서로 잘 맞아서 가끔씩 했을 뿐이야. 당연히 상대에 따라 달라. 그땐 성격이, 뭐, 좀 제멋대로였고…….”
할릭이 얘기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지금 뭔 소릴 하고 있담. 그냥 잊어줘.”
“미, 미안해. 괜한 걸 물어서…….”
아무래도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릭이 고개를 푹 숙이다 말고 나를 보았다. 그가 희미한 빛이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내가 안 싫어?”
“네가 왜 싫어?”
“내 성격 개차반이던 시절을 다 봐버렸잖아.”
“지금은 아니잖아.”
나는 단순하게 대답했다.
할릭이 멀거니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러면 된 거지. 그리고 네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어딜 봐도 불청객은 난데. 악인은 당연히 뮤나스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네가 좋아. 정직해서.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몸에 붙은 먼지를 시원하게 털고 일어나는데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할릭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할릭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팍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좋아?”
“응, 좋은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그가 문득 웃었다. 어쩐지 기운이 빠진 웃음소리였다. 할릭이 큰 손으로 내 머리를 묵직하게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래, 고맙다.”
「야아, 할릭. 우린 모두 만났어. 왜 안 오는 거야?」
그때, 텔레파시로 아다르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묘한 분위기에 젖어 시선을 교환하던 나는 정신을 차렸다.
「책이 있는 방이면 어딘지 대강 알겠는데, 아직까지 안 나오고 뭐 해? 길 알려줄 테니까 빨리 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발 출구가 생겼길 바라는 마음에 주먹까지 불끈 쥐었다. 다행히 효험이 있었는지 벽이었던 곳에 동굴처럼 출입구가 뻥 뚫려있는 곳이 보였다. 안도의 숨이 빠져나왔다.
저 빌어 처먹을 책장을 다시는 넘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동의 눈물까지 나오려 했다.
우리는 출구로 걸어갔다. 문짝은 따로 달려있지 않았다. 문턱을 넘자, 책을 비추고 있던 조명이 탁 꺼지며 통로의 벽 램프에 자동으로 불이 붙었다.
바실리스크의 몸속에 들어온 것처럼 긴 통로가 끝없이 이어졌다. 램프가 드문드문 어둠을 밝히고 있는 습한 복도였다.
고성의 분위기를 강조하듯 모서리가 마모된 돌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벽을 이루고 있었다. 군데군데 이끼가 껴 있어서 더욱 음침하게 보였다.
「우리 나왔어, 아다르. 어느 쪽으로 가면 돼? 갈림길이야.」
할릭이 텔레파시로 물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아다르가 대답했다.
「오른쪽으로 와.」
우리는 그가 가르쳐주는 대로 모서리를 돌았다.
간혹 오래된 돌 틈새로 지네가 머리를 내밀어서, 최대한 복도 가운데로 걸으려 노력했다.
발자국 소리가 텅텅 울린다. 불길한 기운이 가득해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우리는 계속 걸어 드넓은 공동이 있는 곳으로 빠져나왔다. 그곳엔 나머지 용사들과 이블라가 이미 모여 있었다. 그들은 오래된 유적지처럼 무너진 돌 구조물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다르가 할릭을 발견하자마자 성질을 냈다.
“야. 제일 별 볼 일 없는 방에 떨어져놓곤 왜 이제 와? 책을 정독하기라도 했냐?”
그 말에 가장 열이 받은 사람은 나였다.
모르고 하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이대로 고분고분 넘어가기엔 당한 게 많았다. 나는 주위에 있던 돌을 주워 아다르에게 집어던졌다. 그가 고개를 휙 꺾어 피하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그 무구한 눈을 보고 있자니 갑작스레 기운이 쭉 빠졌다. 너무 굴러서 그런가,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힘에 부쳤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다르가 물었다.
“근데 너 목은 왜 그래?”
아, 소리를 내며 뒤늦게 목을 가려보지만 늦었다. 아다르가 가리지 못하도록 내 팔을 잡아 고정시켰다. 그의 입이 일자로 다물려 있었다.
할릭이 손으로 눈가를 가린다. 아까 할릭이 물고 빨았던 부분이었다. 아마 키스마크가 왕창 생겼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핑계거리를 만들어냈다.
“그 책 평범한 게 아니어서 어쩌다 보니 부딪혔어.”
“이런 곳을 부딪혔다고?”
아다르가 눈썰미 있게 지적했다. 검고 어두운 눈이 할릭에게로 향했다.
“설마 너냐?”
금방이라도 싸움이 터질 듯 공기가 팽팽해졌다. 할릭도 계속되는 공방전에 짜증이 난 듯 송곳니를 드러내며 아다르를 노려보았다.
이러다 둘이 싸울 것 같아서 두 손으로 아다르의 눈을 가려버렸다. 까꿍 놀이를 하듯이.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거 놔, 카카나.”
아다르가 경고했다.
“싸우지 마. 할릭이 원해서 이런 거 아니니까.”
“그러면 더 화나지. 널 지키지 못한 거잖아. 파트너가 됐으면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멀거니 아다르의 과거를 상상해보았다.
조직 ‘여명’을 이끄는 암흑 조직의 리더라고 했었다. 어둠에 속한 사람이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과거를 지나와야만 했을까.
아다르는 지금도 예민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세월과 경험의 힘으로 조절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그게 조절이 되지 않는, 위험천만한 어린 시절의 아다르와 내가 만났더라면…….
“할릭이 아니라 너였다면 난 백 퍼센트 죽었을걸.”
아마 10초도 안 돼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얘기했다. 아다르가 멈칫 굳었다. 그가 내 손을 내리고 뒤돌아 날 올려다보았다. 더러운 눈매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확신해?”
“확신해.”
내 흔들림 없는 눈을 본 아다르의 성질이 그제야 좀 누그러지는 기미를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어 하는 눈치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때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한 아르모어가 무심히 얘기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스노아가 비밀통로에 접어든 이후로 마나 변동을 느꼈다고 했으니, 아레사 나이제르가 자리를 옮기기 전에 그곳을 확인하는 것이 좋겠군. 카카나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그만둬라, 아다르.”
역시 아르모어다. 내가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아르모어가 내 손을 슥 가져가더니, 손등에 미끈한 입술을 문댔다.
“고생이 많았나 보군. 지금은 괜찮나?”
웃음기가 희미하게 배어있는 눈이 내 새빨개진 얼굴을 살폈다. 발가락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모어가 이런 식으로 선뜻 스킨십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발정기에 접어든 그의 짙은 체취를 맡은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손을 품으로 가져왔다.
“그, 네, 괜찮아요.”
뒤늦게 고개를 돌리니 아다르와 할릭, 이블라가 입을 쩍 벌린 채 나와 아르모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카카나의 매력은 마성인가 봐.”
이블라가 50대 아저씨같이 굵직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무슨 소리냐며 이블라의 발언에 반박할 줄 알았던 용사들이 묘하게 조용해졌다.
“어서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첼러스가 내 손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아르모어가 입술도장을 찍었던 손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아르모어에게서 멀어져 첼러스의 옆자리에 섰다.
할릭과 아다르가 어째서인지 이번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첼러스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안내할게.”
푹 한숨을 내쉰 아다르가 앞장서며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슬쩍해온 지도로 지하통로를 확인한 아다르는 개미굴을 그려놓은 것 같은 지도를 보고도 방향을 잘 잡아 안내해주었다.
우리는 마침내 낡고 커다란 문에 도착했다.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특이한 재질의 돌로 만든 여닫이문은 도서관 정문만큼이나 거대했다.
손잡이가 없어 어떻게 열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기에 물의 현자가 있는 건가.’
나는 문에 가까이 다가가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문짝에 괴상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스노아가 낮게 감탄하며 말했다.
“마나변동을 왜 느낄 수 없나 했더니, 씨스아이에 사용된 유물과 비슷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군요. 근거리에 있지 않았다면 아마 저라도 마나를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그냥 밀어선 열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첼러스가 한 손으로 문을 꾹 눌러보며 말했다. 힘을 강하게 준 탓에 그의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돋아있었다.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은 마도구인 것 같아요. 마법진에 순서대로 마나를 채워야 구동하도록 되어있어요.”
울퉁불퉁한 석문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보던 스노아가 눈을 감고 입으로 뭐라 작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그가 말을 이을수록, 석문에 음각되어 있는 복잡한 마법진에 빛이 돌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얽힌 기다란 홈에 파란 물이 들어차듯 마나가 유입되었다.
그것이 선을 따라 돌고 돌더니 마침내 마법진의 마지막 별 무늬까지 가득 채웠다. 문이 우르르 진동하며 열릴 기미를 보였다. 오래되었음을 반증하듯 문틀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그 두께와 크기만큼이나 느리게 움직이는 문을 바라보다, 천천히 안이 드러나자 눈을 가늘게 떴다.
문 안은 지하통로처럼 오래된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램프가 따로 설치되어있지 않은데도 환하게 밝았다. 무언가가 공간을 푸르게 비추고 있었다. 마나와 비슷한 색상이었다.
쿠궁,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낸 문이 마침내 전부 열렸다. 스노아가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문턱을 넘어서 오른쪽으로 모서리를 돌아야 넓은 공간이 나오는 구조였다.
앞장선 용사들을 따라 방향을 꺾자 경이로운 장면이 시야를 압도했다.
투박한 책상과 의자, 그리고 침대가 덩그러니 놓인 동굴 같은 곳이었다. 이것만 보면 별 볼 일 없는 곳이 맞았다. 그러나 그 뒤에 눈이 현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결정이 허공에 부유한 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것은 마름모꼴의 푸른 결정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파란색의 불투명한 보석처럼 여겨졌다.
‘부유하는 보석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심지어 푸른 결정은 크기마저 범상치 않았다. 바실리스크의 머리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저렇게 크니 방 안이 환하게 밝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보석의 신비로운 빛을 가득 받으며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무겁고 고급스러운 벨벳 소재의 파란색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머리는 하얗게 새었으며, 눈은 로브와 꼭 어울리는 어두운 남색이었다.
깊고 이성적인 눈과 차가운 인상이 그의 세월을 보여주는 주름과 어우러져 현명하고 신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가 푸르고 신비롭게 빛나는 정체불명의 결정을 뒤에 두고 우릴 쳐다보고 있으니 굉장한 위압감이 들었다.
누군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물의 현자, 아레사 나이제르였다.
스노아가 아레사 앞에 섰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레사는 거의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었다.
오직 그가 쥐고 있는 키보다 큰 스태프의 보석만이 아레사의 감정을 반영하듯 오색으로 혼란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레사가 노인 특유의 낮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스노아 칼리시스란 이름이었지. 드디어 기억났군. 드디어…….”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용사들의 이름은 세상에서 잊혔을 텐데?’
심지어 할릭의 오랜 친구인 노이트라마저 졸지에 할릭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물의 현자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스노아를 보자 ‘기억해낸’ 것 같았다.
그의 짙은 남색 눈이 깜박이지도 않고 스노아를 바라보며, 희열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을 감정을 띤 채 파르르 떨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스승님…….”
고개를 푹 숙이고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아레사 나이제르가, 돌연 고개를 홱 쳐들고 얼굴을 활짝 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반전에 용사들 모두가 눈을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로지 스노아만이 피곤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수염을 저렇게 기른 사람도 애처럼 웃을 수 있구나, 깨달으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스승님!”
‘귀가 막혔나. 이상하게 들리네.’
깜찍하고 발랄한 음성이 스노아를 불렀다. 나는 조용히 새끼손가락을 들어 귓구멍을 후볐다. 요즘 귀 청소를 너무 안 했나 보다. 몹시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기분 탓일 거야.’
내가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동안, 아레사가 스태프로 바닥을 한 번 짚었다. 그러자 스태프를 중심으로 돌이 떨어진 호수면처럼 파란색 동심원이 생겼다.
그 뚜렷한 마나의 떨림이 내 발목을 스치자 피부에 얼음이 맞닿은 느낌이 들었다. 부르르 떨며 손으로 어깨를 감싸는데, 다시 믿고 싶지 않은 애교 낙낙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다.
“보고 싶었어요! 왜 이제야 오신 거죠? 당연히 각오는 하셨을 거예요. 그렇죠?”
그가 허공에 물로 이루어진 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스노아의 뺨을 내려쳤다.
‘응?’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 아니 갑자기?’
촤아아악―!
졸지에 물로 싸대기를 맞은 스노아가 쫄딱 젖은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 일련의 몸짓이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기듯 느리고 피곤하게 느껴졌다.
스노아는 진작 이 상황을 예상한 듯 무덤덤한 반응이었지만 어쩐지 지긋지긋한 기색으로 아레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말라가는 황태처럼 짜게 식었다.
다른 용사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눈에선 이미 영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레사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그냥 보고 듣기를 포기한 얼굴이었다.
아레사가 스태프를 왼쪽으로 가볍게 휘둘러 무언가를 소환했다.
눈처럼 하얀 나무 막대기에 희끄무레한 구름 느낌의 문양이 있는 스태프였다. 끄트머리에 박혀있는 파란색 보석은 특히 독특했다. 표면이 꼭 생선 비늘처럼 결이 있고 울퉁불퉁했다.
그것이 천천히 날아가 스노아 앞에 똑바로 세워진 채 둥둥 떴다. 바다에서 담아올 수 있는 모든 색상을 섞어놓은 오색 보석이 기묘하게 반짝거렸다.
“제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씨스아이예요, 스승님! 너무 기뻐요! 늦게 오셨으니, 그만큼 제 사랑을 감당하셔야 해요! 그 정도는 당연히 예상하셨을 거예요. 전 믿어요. 정말 기대되네요!”
아레사가 환하게 웃으며 스태프를 높이 치켜들었다. 등허리로 오싹한 한기가 끼쳤다. 여러 번 느껴보니 이젠 확실히 알겠다.
이건 내 본능이 보내는 위험신호다.
옆에 서 있던 첼러스가 내 허리를 팔뚝으로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아레사 나이제르의 스태프에서 가히 폭포라고 칭할 만한 물이 콸콸 쏟아졌다.
콰앙!
열려있던 등 뒤의 돌문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물은 끝없이 쏟아져 나와 방을 순식간에 채우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이 속도면 허리까지 올라오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스태프에서 나오는 물살이 어찌나 센지 벽에 부딪힌 물이 파도처럼 부서지며 머리와 어깨를 적셨다.
“으아!”
중심을 잡고 서 있기가 힘들어졌다. 쓸려갈 것 같아서 첼러스의 옷자락을 잡고 버텼다. 그가 팔뚝에 단단히 힘을 주며 난감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스노아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꼭 액자 속 그림처럼 미동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물 수면에서 홀로 평안하게 떠 있는 아레사 나이제르에게로 향했다.
“드디어 절 봐주시네요!”
아레사가 스노아에게 부웅 날아갔다. 그리고 그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할아버지가 이상한 말투를 쓰며 스노아에게 애교를 부리니 매치가 되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얼굴을 첼러스의 어깨에 박아버리고 싶었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일단 참아보기로 했다.
“마나의 기둥을 보고, 스승님이 살아계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구경꾼들은 이미 신경도 쓰지 않는 상태인 아레사가 신나서 떠들었다.
“필히 절 찾아오시리라 생각했지요. 씨스아이를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찾아오지 않으시면 직접 찾아가려 했어요. 여기에 매장된 대형 마나석은 마나량이 방대하잖아요.”
아레사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 이용하면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했지요! 현자만 사용할 수 있는 특등급이지만, 문제없어요! 제가 현자니까요! 어떤가요? 대단하지 않나요? 제가 현자가 됐다고요!”
“아레사.”
스노아가 거의 토하기 일보 직전인 음성으로 말했다.
“일단, 폴리모프를 풀자.”
제발. 간절하고 작은 목소리가 스노아의 말끝에 따라붙었다.
“아.”
아레사가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뒤로 물러났다.
그가 스태프로 제 머리를 톡톡 치자, 위에서부터 폴리모프 마법이 풀리며 본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놀라서 헛숨을 들이켰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였던 아레사 나이제르가, 많아봐야 13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으로 바뀐 것이다.
이지적이고 중후해 보였던 남색 눈은 장난기가 드글드글해졌고, 새하얬던 머리는 연한 파스텔톤의 하늘색으로 변했다. 그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며 두 팔을 벌려 보였다.
본래 입고 있던 옷은 몹시 커져서 그는 이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됐나요?”
“내가 미안하다, 아레사. 그러니 용서…….”
믿기지 않게도 스노아가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레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제멋대로인 용사들의 뺨을 천만 번 정도 갈겨줄 수 있는 마이페이스로 활짝 웃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예요, 스승님. 저는 화 안 났어요. 그냥 기뻐서 이러는 거라고요. 알면서!”
그가 스태프를 휘두르자, 방에 물이 차오르는 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읍, 후아!”
갑작스레 수심이 깊어져 정수리까지 전부 잠겼다가, 헤엄쳐서 고개만 빼고 간신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아레사의 스태프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너무 거셌다.
형체 없는 갈퀴손처럼 몸을 낚아챈 물살이 거친 포말을 일으키며 나를 심연으로 끄집어 내렸다. 정신없이 휩쓸리다가 벽에 어깨를 가볍게 쿵 찧고 나서야 멈췄다.
그것도 첼러스가 손으로 막아줘서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멍이 들었을 뻔했다.
나는 울퉁불퉁한 돌벽을 아무렇게나 손으로 쥐고 위로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가서 수면 바깥으로 고개를 뺐다.
“하악!”
튀어나온 벽 부분을 꼭 잡고 고개를 뒤로 최대한 꺾었다. 차오르는 물이 내 귀를, 뺨을 천천히 집어삼켰다. 거의 없다시피 한 공간에 입을 내밀고 최대한 공기를 폐부에 쑤셔 넣었다.
그러다 마침내 입과 코까지 물에 잠겨버렸다.
이제 고개를 내밀고 숨을 쉴 수 있는 공간 따윈 없다. 물을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지만, 탈출구 없는 곳에 갇혔다고 생각하자 막힌 숨이 질식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벌렸다. 공기 방울이 보글보글 일어났다.
실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언제 헤엄쳐 온 건지, 저 사나운 물살을 뚫고 내 허리를 꼭 껴안은 첼러스의 금발이 하늘하늘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스노아를 찾아 고개를 숙였다.
아레사의 공격을 받았는지, 항상 꽁지머리를 하고 있었던 스노아의 머리가 자유롭게 풀려 있었다. 거대한 마나석이 내뿜는 푸른빛으로 물든 물 속, 스노아의 새파란 머리가 몽환적으로 일렁거렸다.
그리고 아레사가 그 광경을 황홀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관계인 건 확실해 보이네.’
어떻게 돼먹은 사제관계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깊은 의구심을 느끼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물을 잔뜩 먹을 것 같았다. 숨 참는 데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다.
스노아가 고개를 돌렸다. 물빛 눈망울이 날 발견했다. 그 순간 얼굴 주위로 공기방울이 형성되었다.
허억, 세차게 숨을 몰아쉬었다. 첼러스도 공기방울이 생기자마자 괴로운 얼굴로 숨을 쉬고 있었다. 스노아의 마법이었다.
전신을 공기방울로 감싼 아레사가 그제야 우리를 바라보더니, 스태프를 왼쪽으로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둑이 터진 저수지처럼 빠르게 줄어드는 물이 아레사의 스태프로 감쪽같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바닥에 엎어져서 작게 콜록거렸다.
몸이 쫄딱 젖어 추위가 느껴졌다. 덜덜 떨자 근처로 다가온 스노아가 손을 한 번 휘저었다. 물이 증발하며 금세 보송보송해졌다.
마법사 둘이 싸우고 있으니 아주 정신이 없다.
“그만해, 아레사.”
“사랑하는 스승님께서 교복까지 입고 은밀하게 행동하시다니 뭔가 일이 잘못된 모양이네요? 그걸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죠. 우리 스승님은 화려한 삶을 사셔야 하는걸요. 제가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드릴게요!”
스노아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아레사가 방긋 웃으며 외쳤다.
“저랑 함께 다 부숴버려요!”
그때 견디다 못한 스노아가 스태프로 아레사의 머리를 갈겨버렸다. 그만하라는 의미로 때린 수준이 아니었다. 있는 힘을 다해 쳤다.
뭔가가 깨지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리자 아레사가 바닥으로 휙 고꾸라졌다.
“스, 승…….”
“슬립.”
아레사가 기절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자 스노아가 확인사살용 마법마저 시전했다.
잠에 빠진 아레사가 드르렁 코를 골았따. 스노아가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석상처럼 오랫동안 굳어 있었다.
혹시 저 자세로 잠든 게 아닌가 의심이 갈 무렵, 그가 느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죽일까.”
단언컨대, 내가 들었던 그 어떤 쌍욕보다도 음산한 욕지거리였다.
***
아레사 나이제르의 시간은 계속 멈춰 있었다.
스노아에 의해.
그도 그럴 것이 정신만 차렸다 하면 대마법사의 귀환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한다느니 어쨌느니 난리를 피워서 기절시키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레사가 평소 은둔하기를 좋아하는 현자로 잘 알려져 있어서, 한참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급한 대로 특등급 마나석이 있는 방에 계속 재워두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여행을 떠나야 하는 몸이었다. 아레사를 주구장창 잠만 재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대화를 나눠서 지금은 숨어야 하는 처지임을 설명해야 하는데, 그 꼬맹이는―나보다 오래 산 물의 현자를 이렇게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통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물의 현자가 혹시 머리에 이상이 있는 자냐고 물었다. 그의 행동과 말투를 고려해 보건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화내고 있는 거예요.”
스노아의 얼굴은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초연했다.
“제가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걸 알아서 일부러 저러는 거거든요. 예전부터 이상한 놈이었어요.”
“그러니까 제정신인 상태에서, 괴롭히기 위해 작정하고 저러는 거라고?”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럼 상황이 더 나쁜 거잖아.’
산 넘어 산이었다.
***
“네가 약초를 코앞에 두고 멍을 때리다니 별일이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비브로스가 준비되어 있던 약망태기를 비틀어 짠 진액을 유발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끓고 있는 약탕기에 두 방울 떨어트렸다.
나는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수준으로 해체된 약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비브로스가 무테안경을 벗어 제 앞주머니에 꽂으며 팔짱을 꼈다.
나는 망설임 끝에 토로했다.
“친구들 둘이 싸운 것 같아요. 좀, 묘하긴 하지만.”
“네가 그런다고 약초를 손질하는 도중에 정신이 팔릴 인간이냐? 단순히 말다툼한 수준이 아닌 거지?”
‘점집을 차리셔도 되겠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네. 상황이 조금 곤란하게 됐어요.”
“혹시 다른 의견이 필요하면 무슨 상황인지 나한테 말해봐.”
“그래도 돼요?”
“네가 원한다면.”
비브로스가 습관적으로 시가에 불을 붙이려다가, 눈을 굴려 날 보고는 도로 보관함에 집어넣었다. 나는 손에 들린 손질용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고 미간을 좁혔다.
이 기묘한 상황을 뭐라고 해야 좋을지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친구 둘이 음, 서로에게 감정이 상한 지 오래됐는데 꼭 화해해야만 하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한쪽이 너무 화가 나서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해요. 억지로 듣게 할 수도 없어요. 화난 쪽이 친구를 보기만 하면…….”
뭐라고 해야 하지.
나는 유심히 단어를 골라보았다. 마땅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포기하고 느끼는 그대로 얘기했다.
“지랄발광을 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어요.”
“한 친구가 잘못한 거냐?”
“아뇨, 그런 것 같진 않았어요.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비브로스가 머그컵에 진한 커피를 따르다 말고 픽 웃었다.
“오래된 사이면 오해가 없는 게 더 이상하겠지. 그래서? 그게 끝?”
“그냥 그런 상황인 거죠.”
“네가 보기엔 어떤데? 둘이 다시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모르겠어요.”
나는 두 동강이 난 이파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서로 싫어하진 않아요. 특히 화난 친구는, 방식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아무튼 친구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흐음…….”
비브로스가 턱을 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 친구도 화해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네가 다리라도 놔주게?”
아예 연구실 소파에 앉은 비브로스가 근처에 구비되어 있던 쿠키 하나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가 내 입에도 별 모양의 쿠키 하나를 넣어주었다.
혀끝에서 달짝지근한 맛이 퍼졌다.
“카카나, 내가 여태 살면서 느낀 게 있는데 남 일에 끼어드는 것만큼 골치 아픈 일이 없다.”
“…….”
“사이 나쁜 두 명 사이에 끼는 게 보통 스트레스 받는 일이 아니야. 네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둘은 널 들들 볶을지도 몰라.”
비브로스가 상상만으로 피곤한 낯을 했다.
“잘못하면 둘 다한테 원망을 살 수도 있지. 넌 당사자가 아니니 괜한 말을 해서 피해를 입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하고.”
맞는 말이다.
기운이 빠져서 고개를 숙이자, 곁눈질로 날 살피던 비브로스가 이어 말했다.
“엄청 화가 났다는 친구랑 너도 일면식이 있는 사이냐?”
“아니요.”
“네가 보기엔 걔도 화해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거지?”
“제가 보기엔 그랬어요.”
“정 두고 보지 못하겠으면 네가 대신 말을 꺼내보든지.”
의외의 말이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비브로스가 이번엔 귀여운 구름 모양의 쿠키를 내 입에 물려주었다. 그걸 두 손으로 잡고 귀퉁이를 조금씩 떼어 먹었다. 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너랑 아는 사이가 아니라며. 그러니 싫은 기색은 비쳐도 초면에 다짜고짜 화부터 내진 않을 거 아니냐. 물론 코앞에서 쫓아낼지도 모르지만.”
“교수님이라면 끝까지 참견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요.”
“인간관계에 정답이 어디 있겠어.”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책임질 일이 여러 개로 늘어날 뿐이지. 그러니 끼어들려거든, 책임에 대한 각오는 하고 있는 게 좋아. 아니면 처음부터 끼어들지 말고. 지네들끼리 해결 보게 내버려둬.”
나는 아레사 나이제르와 스노아 칼리시스가 화해를 이루어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생각해보았다.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번엔 스노아 칼리시스가 강압적인 방법으로 아레사에게 마법을 걸어놓은 다음, 아무런 얘기 없이 훌쩍 떠나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이쪽이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였다.
‘씨스아이를 되찾았으니, 상상도 못할 마법을 사용할지도.’
나는 스노아와 아레사의 대화를 되새겨보았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사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가까워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마음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리라.
“만약 각오가 서면 최선을 다해봐라, 카카나.”
이제 내 본명을 아는 비브로스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얘기했다.
“어떤 멍청한 관계는 외부에서 서로 묶어줘야만 붙기도 하더라고. 보통은 세월이 그렇게 만들지. 단절이 길어질수록 닿고 싶어도 닿지 않는 거야.”
“…….”
“그러니 그 거리와 공백을 알고 있는 제삼자가 개입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비브로스 샥스치고는 상당히 친절한 말이다.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 얘기했다.
“감사해요.”
“뭘. 내가 감사하지. 나한테 이런 거나 배우지 뭘 배우겠냐, 네가. 다 할 줄 아는데.”
비브로스가 어딘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내가 알려준 제조법대로 만든 길몽약이 효과를 보인 후로 계속 저 상태였다. 그는 까마득한 산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날 바라보곤 했다.
물론 그렇다고 덜 귀찮아진 건 아니다. 비브로스는 틈만 나면 내게 달라붙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주로 약물 배합에 대한 얘기였다. 마지못해서 내가 사용했던 배합법을 이야기해주면, 그는 그것을 메모하며 감탄하곤 했다.
‘도움이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나는 고민을 거듭하며 약물의 온도를 높였다. 차근차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
스노아의 기분이 계속 안 좋아 보이자, 나는 용사들과 함께 잠시 따뜻한 남쪽지방으로 놀러 가기로 입을 맞추었다. 내일까지가 주말이었으므로 하루 안에 다녀오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들에겐 마법이 있었다.
좌표만 있다면 세상에 가지 못할 곳이 없었다.
할릭은 용병왕 노레스를 통해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바닷가의 좌표를 구해왔다. 그리고 스노아가 좌표를 읽었다.
준비는 그게 끝이었다.
그들은 텔레포트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남쪽 지방의 바닷가로 이동했다. 용사들은 지체하지 않고 바닷가로 뛰어들었다.
물론 스노아는 해안가에 앉아서 편하게 책이나 읽을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할릭이 그를 가만 내버려둘 리 없었다.
“에이, 왜 그래, 스노아.”
“꺼지세요.”
“같이 놀자, 엉?”
“쉴드.”
할릭이 달려들자, 스노아가 마법을 펼쳤다. 방어마법에 주먹이 부딪히며 천둥과도 같은 굉음을 냈다 할릭과 스노아 주변의 모래사장이 위로 솟구치며 산을 이뤘다.
마침 바위 뒤에 숨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온 나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이마를 짚었다.
‘좀 평범하게 놀 순 없니, 얘들아…….’
할릭은 스노아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연하지만 스노아 또한 물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다른 용사들은 둘을 포기하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뒤에서 천둥소리 내는 사람들을 두고 맘 편히 놀 순 없을 것 같아서 스노아에게 다가갔다.
“그러지 말고 같이 놀자, 스노아.”
“그래! 들었지, 스노아? 바다에 놀러 와서까지 빼는 사람은 인기 없다고!”
“인기 따위는 관심 없어요.”
스노아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최근 아레사한테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지, 완전히 저기압이어서 할릭을 마법으로 얼려 죽일 기세였다. 나는 황급히 스노아의 손을 끌어왔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날 내려다봤다.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
뭐라고 부탁해야 하나 더 고민할 필요 없이, 스노아가 1초 만에 대답했다.
“그러죠.”
“너 너무 쉽게 승낙하는 거 아니냐?”
스노아의 온도차에 비위가 상한 할릭이 그를 툭 치며 말했다.
“설마 당신의 부탁과 카카나의 부탁이 같은 무게일 거라 여긴 건가요? 가당치도 않은 생각인데요.”
스노아가 생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왜인지 그의 예쁘장한 얼굴이 악마처럼 사악하게 느껴졌다.
‘이러다 또 싸우는 거 아니야?’
말릴 요량으로 할릭에게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가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이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렇긴 하지!”
‘왜 납득하는 거야!’
할릭이 갑자기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가 이런 식으로 행동할 때 좋은 꼴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불안을 느낀 심장이 새가슴처럼 빠르게 콩닥거렸다.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할릭이 바닷가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럼 우리 먼저 가 있자!”
그가 순박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디로?’
묻기도 전에 할릭이 자리에서 도약했다.
나는 그의 뜀박질이 메뚜기에 비할 바가 아니란 걸 이미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눈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모래사장을 벗어나 새파란 바다로 접근해, 그 너머의 수평선으로 끝없이 날아갔다.
‘미친! 어디까지 날아가는 거야!’
그의 몸에 와락 매달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한참을 날아가는 것 같았던 몸이 이윽고 해양 한가운데에 풍덩 빠졌다. 짠물이 입 안으로 훅 밀려들어왔다.
웨엑, 뱉어내며 바다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리가 땅에 닿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깊은 수심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할릭, 이 미친놈아! 날 당장 해안가로 데려다 놔!”
“마음껏 수영하기엔 여기가 좋지 않아?”
“안 좋아! 안 좋다고!”
왁왁 소리를 지르고 있으려니, 계속 가라앉는 듯하던 몸이 불현듯 위로 둥둥 떠올랐다. 웬 비눗방울 같은 것이 커다란 반지처럼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표면을 만져보았다.
손가락이 안으로 쑥 들어간다. 그러나 터지진 않았다.
“정말 한심하군요.”
어느새 머리 위로 날아온 스노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괜찮나요, 카카나?”
“응. 이거 스노아가 한 거야?”
“네. 급하게 만들어봤는데, 어떤가요?”
“완전 좋아! 안정적이고!”
허리에 착 달라붙어 있어서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해도 일정 높이 이상 뜰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나는 안심하고 마음껏 수영했다.
따스한 기온과 햇빛이 반짝이는 바닷물, 시원한 물에 그간 쌓여있던 스트레스와 피로가 녹아나가는 기분이었다.
헤실헤실 웃으며 할릭에게 물을 뿌렸다. 그도 즐겁게 웃으며 손으로 파도를 일으켰다.
파도.
나는 고개를 위로 젖혔다.
‘잠깐만.’
“으아아악!”
다행히 스노아가 쉴드를 쳐줘서 살았다. 할릭은 적당히 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분명했다. 일반인에게 물대포를 만들어 던지면 어쩌잔 말인가.
“헉, 허억…….”
놀라서 한참을 헉헉거리다가 방향을 틀었다. 저 치와 놀다간 제명에 못 살겠다 싶어서 해안가로 헤엄칠 요량이었다.
아르모어가 근처 모래사장에 앉아 나른하게 바닷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저 근처면 편하게 쉴 수 있겠다고 확신하며 그를 향해 헤엄쳤다. 그런데 열심히 발장구치는 내 종아리를 무언가가 콱 틀어쥐었다. 처음엔 용사들 중 한 명이 장난을 치는 줄 알았으나, 모두들 내 시야에 있었다.
내 발밑에 있는 게 아니라.
오싹, 소름이 돋는 순간 몸이 바닷속으로 끌려들어갔다. 황급히 아래를 살폈다. 차갑고 징그러운 감촉의 손이 내 다리를 틀어쥐고 있었다. 사람 손 모양이었지만 물갈퀴가 달려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빨갛게 빛나는 눈을 보고 기절할 듯이 놀라 발버둥 쳤다. 해양몬스터 샤크맨이었다.
다행히 내게 헤엄쳐온 할릭이 샤크맨의 팔을 잡고 부러트려 금방 풀려날 수 있었다. 나는 허리에 감긴 비눗방울에 의지해 위로 빠르게 헤엄쳐 올라갔다.
“푸하!”
“무슨 일입니까?”
근처로 다가온 첼러스가 날 발견하고 물었다.
“여기 몬스터가 있어!”
“아, 샤크맨을 만났나 보군요.”
그가 내 얼굴의 물기를 닦아주며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다. 나는 어떻게 저리 침착할 수 있는 건지 잠시 고민했다.
“바닷가에 샤크맨이 나오는 게 흔해?”
“아니요, 흔하진 않습니다만 이곳은 몬스터해안이니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나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몬스터해안?”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
그의 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번엔 이 일대의 물이 갑자기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나는 단숨에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해양몬스터 드래곤터틀이 나타난 것이다. 환상적인 타이밍이었다.
이쯤 되자 몬스터해안이란 단어를 강제로 이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없는 바닷가라 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어쩐지 너무 휑하다 싶었다.
드래곤터틀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마치 산 하나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땅을 짚었다.
아니, 정정한다.
땅이 아니라 드래곤터틀의 등껍질을 짚었다. 얼마나 큰지 뮤나스의 검술학부 수련장만 했다. 그 무시무시한 등장에 물살에 멀리 밀려간 아다르가 재미있다며 낄낄거렸다. 할릭도 신이 나서 드래곤터틀의 꼬리에 매달렸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람을 찢어 죽이고, 화가 나면 브레스로 못 녹이는 것이 없다는 거대 몬스터를 놀이기구 삼는 꼴을 보고 있자니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노아가 여전히 떠 있었다.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스노아가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마법으로 나를 띄워주었다.
“저 바보들이랑 함께 노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스노아가 내 몸의 물기를 날려주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동의하는 마음을 진하게 담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범상치 않게 놀 거라 예상은 했다. 그러나 몬스터를 동반자 삼아 저런 식으로 놀 줄은 몰랐다.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들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날아 아르모어 근처에 착지했다. 첼러스와 이블라도 마침 근처에 와있었다. 반면 할릭과 아다르는 해가 지도록 바다에서 올라오는 몬스터들이랑 진탕 뒹굴었다.
진탕이라는 말이 그렇게 좋은 단어는 아니었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놀이였다. 우리는 그 기이한 광경을 구경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저들과 함께 껴서 논다면 말이 달라지지만, 이런 식으로 구경거리 삼는 건 꽤 나쁘지 않았다. 나는 간혹 오오, 감탄도 해가며 즐거운 식사를 이었다.
참고로 그들은 놀면서 잡아온 몬스터 몇 마리로 뒤늦은 끼니까지 뚝딱 해치웠다. 일석이조라며 웃는 얼굴이 해양몬스터보다 더 괴물처럼 보였다.
‘다시는 쟤네들이랑 놀지 말아야지.’
굳게 다짐하며 디저트를 우물거렸다.
다음 날, 당연하지만 몬스터와 오붓한 물놀이를 즐긴 나는 근육통이 생겨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공연히 침대에 누워 아레사 나이제르에 대해 생각했다.
마침 스노아가 이번 주 안에 뮤나스를 떠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선언한 탓이었다.
‘아레사 나이제르가 억지로라도 말을 들어야 할 텐데.’
처음엔 아르모어에게 부탁을 하려고 했다.
그는 정신계열 정령을 다스릴 수 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으리라 본 것이다. 그러나 정백이 말썽을 부려 무산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최근 정백들이 이상하게 뮤나스 내부에선 소환에 응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내가 나서야 했다. 약물로 어떻게든 해보리라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