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Chapter 1. 빙산의 일각 (9/43)

Chapter 1. 빙산의 일각

콜리나는 몹시 당황했지만 혀를 짓씹으며 어떻게든 표정을 관리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실수해 우스운 꼴이 될 수는 없었다.

“무슨 소리니? 그럼 저 여자애가 다른 독에 중독되기라도 했다는 거야? 이곳의 독초는 이미 조사가 끝났어. 그런 독은 없단 말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진실은 이 척박한 돌산까지 독을 정성들여 들고 왔을 사람만 알고 있겠지.”

카카나가 다시 그녀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못을 박았다.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선명한 비소를 그렸다. 콜리나가 아랫입술을 꾹 짓씹었다가 지지 않고 반문했다.

“그러면 증거를 대봐. 다른 독에 중독됐다는 걸 신입생인 네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건지.”

“그래서 지금 증명하려고 약을 만들고 있는 거잖아.”

“너는 신입생이야, 카니 페테라스.”

“그리고 교수님의 조수이기도 하지.”

콜리나와 카카나가 기 싸움을 시작하자 동조한 귀족들이 카카나와 콜리나를 둘러쌌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콜리나의 편이었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토록 건방진 평민은 처음 보는군!”

누군가 저 뒤에서 소리쳤다. 그러자 귀족들이 하나둘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닌다고 너희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싸구려 피를 이은 평민이 그러면 그렇지. 코볼트나 다를 게 없어. 사람인 양 무리생활을 할 뿐이지 우리가 보기엔 엉성하고 질 낮기 그지없다니까.”

아무리 평민이라도 이만큼 심한 모욕을 당하면 한마디 하게 마련인데, 카카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다만 까맣고 공허한 구멍처럼 콜리나에게 향해있을 뿐이었다.

콜리나는 돌연 전에 없던 수치심을 느끼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자연히 높게 치솟은 어투가 튀어나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가서 환자를 치료해, 카니 페테라스. 이 이상은 봐주지 않겠어!”

“그럼 네가 치료하든가. 네가 저 환자를 맡으면 나도 얌전히 앉아서 하던 일 계속 할게.”

예상치 못한 답변에 콜리나의 입술이 보랏빛으로 질렸다. 그녀의 안색을 확인하지 못한 귀족들이 좋다며 끼어들었다.

“거 괜찮은 생각이군! 저런 멍청한 평민보다 살라소나 영애, 그대가 치료하는 게 낫지 않겠소?”

“단순한 타박상인 듯한데, 영애라면 바로 조치할 수 있겠군.”

콜리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버렸다. 그녀가 망부석처럼 굳어서 움직이질 않자 귀족들이 의아한 듯 눈을 치떴다.

“그, 그런 식으로 네 할 일을 또 나한테 떠넘기는 거니?”

콜리나가 황급히 말을 얼버무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카카나가 픽 비웃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내 팔 놔. 치료제 만들어야 돼.”

‘정말로 치료제를 만들려고 한 거였어!’

거의 졸도하기 직전이 된 콜리나가 두려움에 떨며 악을 썼다.

“교수님의 허락 없이 새로운 약을 만들 순 없어! 네가 지금까지 교수님께 오냐오냐 다 허락받았다지만, 같은 약제조학과 선배로서 이 일은 가만히 지켜볼 수 없는 일이야!”

그녀가 애써 진정하려고 노력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단념하고 자리에 앉아. 이건 경고야.”

카카나는 이런 식의 대화로는 결론을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그녀는 제 손을 잡고 있던 콜리나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아닌 게 아니라, 옷 너머로 손톱자국이 남을 만큼 세게 쥐고 있어서 그렇게 떨쳐내야 했다.

“아!”

콜리나가 과장되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카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소리치는 얼굴이 끝까지 상황을 호전시키고자 노력하는 거룩한 희생자처럼 아름답고 선한 빛을 유지하고 있다. 카카나는 이제 감탄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깜짝발열풀에 중독된 것 같다는 건 추측뿐이다.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곤란하다고 해서 모르는 척 넘어갈 순 없다. 일을 대충 처리하다가 잘못되면 여학생은 밤 내내 고열에 시달리게 된다.

독 자체는 순하다. 하루면 독기가 빠질 정도로. 그러나 그렇다고 하룻밤의 고통이 약해지는 게 아니었다. 끝이 있는 고문도 고문이다.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대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자신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서야 한다. 그게 약제사고 치료사였다.

콜리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카카나가 드문 귀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납득하긴 어렵지만 그녀는 콜리나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교수도 모르는 사실까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깜짝발열풀의 증상이라든가.

‘그럴 리 없잖아…….’

그러나 참을 수 없는 불안함이 목구멍을 꽉 짓누르고 있었다. 패닉에 빠진 콜리나의 머리에 돌연 소렉트의 말이 떠올랐다.

[검술부의 이블, 체스, 할리프란 놈들은 요술적인 힘을 쓰는 녀석들입니다. 불길하고 음침한 놈들이죠. 그런 놈들의 친구인 카니 페테라스가 어떤 패를 또 숨기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소렉트치고는 매우 주도면밀한 생각이었다.

그는 머리가 나빴지만 직감만큼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는 이 계획에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본능은 좋지 않은 수임을 미리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콜리나는 그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니요?”

“깜짝발열풀에 관한 사실이 탄로 나고 역으로 콜리나 영애가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고 치는 겁니다. 발열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카니 페테라스가 깜짝발열풀의 존재를 눈치챘다고 말입니다.”

“그럴 일은 없어요!”

“만일의 경우에 말입니다.”

소렉트는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풀은 다른 약초를 섭취하지 않는 이상 하루 안에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하셨지요? 그러면 카니 페테라스를 하루 재워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콜리나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재우다니요?”

“깜짝발열풀을 알아차렸다면, 증상이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교수에게 일러바칠 수도 있어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었다. 콜리나의 창백해진 얼굴을 본 소렉트가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혹은 교수가 눈치챌 수도 있지요. 그러니 카니 페테라스는 하루 재우고, 매수된 여학생은 교수님께 불려가지 못하도록 하는 겁니다. 독이 빠지기까지, 딱 하루 동안. 그러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어요.”

둘은 뒷수습까지 계획을 세워놓았다.

콜리나가 카니를 재운다. 소렉트가 여학생이 교수와 맞닥뜨리지 못하도록 만든다. 비브로스가 치료사 막사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심하게 다친 소렉트 일당 몇몇이 시간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콜리나는 기운을 차렸다.

그녀가 다시 한번 카카나를 말리려고 손을 뻗었을 때, 그보다 더욱 거칠고 명백한 공격 의사를 담은 손길이 카카나의 팔뚝을 확 잡아 뺐다.

카카나가 헉, 숨을 들이켰다. 어깨에서 덜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만큼 강한 힘이었다.

카카나는 통증을 느끼며 들고 있던 약을 놓쳤다. 유리병에 담긴 약병이 깨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 정도 웅성거림과 소음이라면 지나가던 교수 한 명쯤은 막사 안을 들여다볼 법한데 이상토록 조용했다.

그녀는 짜증을 억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이 이상 무례한 행동은 용서하지 않겠다.”

소렉트의 일당 중 한 명이 근엄한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카카나는 그에게 말을 쏘아붙이려고 했다. 어깨가 빠지도록 팔뚝을 강하게 잡은 것을 비롯해, 약병을 깨트린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답을 할 수 없었다. 지독한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 잠이 올 리는 만무했고, 느낌이 이상했다.

약을 먹은 것 같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의자를 짚고, 빠르게 눈을 좌우로 굴렸다. 불현듯 바닥에 깨져있는 약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리로 시선을 돌렸다. 드러난 발목에 약이 묻어 있었다.

분명 약병이 깨졌을 땐 젖은 느낌이 없었다. 누가 일부러 약을 흘리지 않는 이상…….

카카나는 콜리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뭔가를 숨기듯이 두 손을 뒤로 향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때, 익숙한 음성이 카카나를 일깨웠다.

그녀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환한 백금발이 보였다. 첼러스는 급하게 뛰어온 모양인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아아악!”

카카나의 팔을 쥐고 있던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첼러스가 그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남자애가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다가, 뼈가 부러질 것 같은 악력에 손을 놓고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통증을 견디기 버거운 모양이었다. 얼굴이 딸기처럼 우스운 몰골로 새빨개졌다.

뒤에 서 있던 할릭이 남학생의 입을 으깨듯이 틀어막았다.

“너는 아가리를 쳐 다무는 게 좋겠다. 그지? 무례한 입은 아예 없는 게 낫겠지?”

할릭이 특유의 해바라기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턱이 빠질 것 같은 통증에 남학생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발버둥 쳤다.

“으읍!”

우르르 몰려와 구경하고 있던 귀족들이 기겁하며 발을 뒤로 물렸다.

평소라면 바로 무엄하다느니 가만두지 않겠다느니 귀족타령을 했을 텐데, 지금은 할릭의 살기에 정신이 쏙 빠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너희들, 어쩌, 려고…….”

말을 하기 힘들어 띄엄띄엄 얘기했다. 할릭이 황급히 카카나의 몸을 받쳐주며 대꾸했다.

“노레스랑 이토스가 알아서 뒤처리 해줄 거야. 뭣하면 우리가 직접 나서도 되고.”

‘여기서 더 무슨 짓을 하려고…….’

더 묻고 싶은데 눈꺼풀이 자꾸 잠긴다. 할릭이 불안하게 카카나의 안색을 살폈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저 귀족이 무슨 짓 했어?”

“그냥, 졸린 거야. 걱정…….”

뒷말은 이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윽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비브로스는 사건이 있고 나서 한참 후에야 막사로 돌아왔다. 쓰러진 카카나를 대신해 환자를 치료해주던 콜리나가 마지막 치료를 끝낼 무렵이었다.

매수해두었던 여학생은 처방을 하는 척하면서 그냥 돌려보냈다. 그녀에게 다른 약물을 먹일 순 없는 탓이다.

“무슨 일이냐.”

비브로스가 침상에 누워있는 카카나를 보며 말했다.

콜리나가 댓바람에 달려와 눈썹을 안타깝다는 듯이 구기고 준비된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카니가 갑자기 다른 약을 만들려고 했어요. 위험하니 그만두라고 했는데…….”

“그게 아닐 텐데. 신입생 주제에 뭐 하는 거냐고 이유도 묻지 않고 강제했겠지.”

카카나의 곁에 서 있던 이블라가 싸늘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콜리나가 대번에 눈을 부라렸다.

‘이래서 내보내려고 했던 건데!’

현장에 있던 평민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이블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 있어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갖은 이유를 대고 징계를 받을 거라 협박했는데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저리 버티고 서서는 결국 중요한 순간까지 초를 치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납게 노려본다 해도 내보냈어야 했다. 이블라의 흉포한 기세에 겁먹어 한 번 말린 이후로 말도 꺼내지 못한 게 한이었다.

설상가상 비브로스는 검술학부 학생이 이곳에 남아있는 걸 봤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콜리나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경고했다.

“외부인은 조용히 하세요.”

이블라는 대답 대신 픽, 쪼개 웃었다. 카니 페테라스가 자주 짓곤 하던 표정이었다.

“아무튼, 제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러다 카니가 들고 있던 약병 몇 개가 바닥에 떨어진 거고요.”

비브로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콜리나를 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약물 중에 수면제가 섞여있었던 것 같아요. 통증이 심한 환자를 바로 재울 때 쓰는 강력한 외용약이요.”

정확히 말하면 그냥 수면제는 아니었다. 중간에 깨어날까 걱정이 되어 콜리나가 더 손을 봤다. 수면제에 악몽초를 섞은 것이다.

비율을 굉장히 신경 써서 만들었으므로, 조금 기분 나쁜 꿈을 꾸긴 할 테지만 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보통 수면제보다 깊은 잠에 빠져서 귓구멍에 대고 소리를 질러도 깨지 않는 약재였다.

“카니가 다른 약을 만들려고 했다?”

비브로스가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콜리나는 진땀이 배어나온 손바닥을 치맛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카니가 약을 만들려고 하기 직전에 봤던 학생이 누구냐.”

그녀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그러나 금세 웃는 얼굴을 만들어내곤 둘러대었다.

“정신이 없어서 자세히 보진 못했어요.”

“얼굴을 보면 구분해낼 수 있겠나?”

“확실하진 않은데, 그래도 괜찮으세요?”

“그럼 당시에 있던 다른 학생을 찾아봐야겠군.”

비브로스가 당장이라도 막사를 나갈 것처럼 걸음을 돌리자, 콜리나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만나기 힘드실 거예요.”

비브로스가 묘한 낯으로 뒤를 돌았다.

“무슨 말이냐?”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귀환한다는 것 같더라고요. 검술부 교수님께 텔레포트 스크롤 사용 허가를 받을 거라고 했어요.”

“자세히 알고 있네.”

“바, 바로 뒤 순서였던 검술부 친구가 알려줬어요.”

“그래?”

비브로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로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뮤나스로 돌아가고 하루 이틀은 더 지나야 여학생을 만날 수 있다. 그러면 깜짝발열풀은 모두 빠져나간 후다. 콜리나와 소렉트의 계획대로였다.

마음처럼 카니를 망신시킬 순 없었지만, 오늘 있었던 실랑이로 충분히 안 좋은 인식이 박혔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소득이 있었다.

비브로스는 잠을 자고 있는 카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로서도 그녀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하기 힘든 눈치였다. 콜리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상황은 시간이 지나자 다시 반전되었다. 하루가 꼬박 지났는데도 카카나가 깨어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악몽초가 의식을 잠식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인, 검붉은 가시줄기 반점이 피부로 올라오면서 한 차례 파문이 일었다. 이는 대단한 문제였으므로, 교수진들은 모두 발칵 뒤집혀버렸다.

토벌 실습에 참여한 학생들도 내내 시끌벅적했다.

“평민 여자애가 깨어나지 않고 있대. 악몽초를 복용한 것 같다던데.”

“세상에, 얼마나 힘들까. 지금도 끔찍한 꿈을 꾸고 있는 거잖아…….”

콜리나는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막사 안에 혼자 쭈그려 앉아 있어도 아까 들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지독하게 맴돌았다.

“하루 내내 그랬으니 정신이 붕괴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거야.”

“교수들이 전부 그 여자애한테 매달리고 있대.”

“긴급회의까지 열었다던데…….”

콜리나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가시줄기 반점을 보았으니 약초학 교수들이 수면외용약에 악몽초가 섞였다는 건 진작 알아챘다. 콜리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둑이 터지고, 넘쳐흐르는 물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콸콸 쏟아지는 장면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 외에는…….

‘왜? 왜 2차 증상까지 나타나는 거지? 왜 깨어나지 않는 거야!’

콜리나가 머리를 거칠게 쥐어뜯었다.

그녀는 신경 써서 수면제를 만들었다. 이번에 악몽초를 처음 써보긴 했지만, 사용법이 간단해서 잘못 넣었을 리 없었다. 깊은 잠에 빠질 정도만, 제조법에 따라 딱 정량을 추가했다. 그 무엇도 임의로 추가하거나 빼지 않았다.

책에서 2차 증상은 분명히 과하게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되어있었다.

‘그런데 왜…….’

토벌 실습에서 사용될 수면제들은 모두 3학년이 제조했다. 콜리나 또한 3학년이었다. 약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 그 화살이 콜리나에게 돌아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뒷수습까지 철저하게 계획을 짜놓았는데, 수면제 제조에 자신 있는 콜리나의 오만에 걸려 결국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악몽초의 존재를 안 비브로스는 크게 분노했다. 지켜보는 콜리나의 심장이 철렁 떨어질 만큼 맹렬한 노기였다.

뮤나스에 돌아가면 약물을 거꾸로 추적해 올라갈 것이고, 일주일도 안 돼서 범인을 색출해낼 것이다. 콜리나가 단독으로 수면제를 만들었단 사실을 3학년생들이 알고 있었다.

‘제기랄, 나를 일부러 엿 먹이려고 일어나지 않는 거야!’

제정신이 아닌 콜리나는 그 생각을 굳게 믿었다.

그래서 깊은 밤 카카나가 잠들어 있는 막사로 갔다. 그러나 고용된 정식 기사들이 입구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쉽게 흐트러지는 학생들과 다르게 주위를 경계하는 얼굴이 긴장되어 있었다. 밤이 깊어지길 기다려도 소용없을 것이 뻔했다.

악몽초의 2차 증상이 일어난 사람과 피부 접촉을 하면 만진 사람도 독에 중독된다. 마나와 관련된 독초여서 쉽게 전염되기 때문이다. 삼엄한 경비는 당연했다.

신성사제가 접촉하면 환영마법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 카카나의 입장에선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젠장!’

콜리나는 기사의 눈을 피해 그곳을 벗어나려다가, 갑자기 어깨를 잡혀 뒤로 돌려졌다. 헉, 숨을 집어삼켰다. 까맣고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콜리나는 혼비백산하여 눈을 여러 차례 깜박였다. 사람이었다.

이블, 체스, 할리프.

마법부 학생 두 명과 요리학부 학생까지 있었다. 그들이 카니의 친구들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평범한 학생이 두를 수 없는 묵직한 공기가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로?”

할리프가 음산하게 물었다. 얼굴에 살기가 배어있었다. 검술부 학생들도 줄행랑치게 만드는 기백이 콜리나의 목을 콱 틀어쥐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대답하지 못한 콜리나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자, 체스가 할리프의 손을 잡았다. 쳇, 혀를 찬 그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곳에 오지 마십시오.”

체스가 콜리나에게 경고했다.

“저희는 더 이상 당신을 봐주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콜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체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음박질 쳤기 때문이다. 멀리,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치려고.

그러다 나무뿌리에 다리가 걸려 거하게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흙바닥에 뻗은 채 낮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으스스한 이틀째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뮤나스에 도착하자, 카카나는 하얀 면 이불에 둘둘 싸여 병동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사흘 후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문은 순식간에 뮤나스를 점령했다.

학생들은 모이기 무섭게 천재 평민과 그녀를 질투한 꼴사나운 귀족에 대해 떠들었다. 그녀를 참혹한 악몽의 늪으로 밀어 넣은 사람이 약제조학과의 천사이자 톱이었던 콜리나 살라소나라는 사실은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들마저 충격에 빠트렸다.

“젠장할.”

비브로스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침음을 삼켰다. 그의 맞은편 침상에 카카나가 누워있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검붉은 가시줄기 문양으로 엉망이었다.

팔과 목까지 뻗어 올라온 악몽초의 상징이 이젠 얼굴 근처까지 넘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고통스럽거나 괴롭게 찡그러져 있지 않았다. 다만 살아있는 사람 특유의 기운이 없었다. 호흡이 얕은 탓에 가슴팍도 거의 미동이 없다. 머리카락은 전날 흐트러져 있던 모양 그대로 퍼져 있었다. 그녀의 몸시계가 멈춰버린 것이다.

그 탓에 인형 혹은 나무 조각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였다. 상체를 일으키면 뻣뻣한 몸 하체까지 비스듬하게 들릴 것 같았다.

비브로스는 카카나에게 힘든 과거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직접 말해주길 바랐다.

그녀는 어리다. 어른에게 기대도 된다. 조금쯤은 응석을 부려도 된다. 그런데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영원한 나락으로 숨어버렸다.

‘수면외용약에 들어간 악몽초는 소량이었어.’

비브로스가 검지와 엄지로 눈두덩을 꾹 누르며 생각했다.

‘잠을 재우려는 의도야. 틀림없어. 해치려고 했으면 이렇게 어설프게 사용하지 않았지. 웃길 정도로 제조법에 나와 있는 그대로의 정량을 사용했어.’

콜리나 살라소나의 죄가 정상참작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녀는 죄의 무게에 맞는 징계를 받았다. 뒷수습은 약초학 교수들의 몫이었다.

‘그런데도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야.’

그녀에게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 소량의 악몽초조차 치명적일 만큼, 벗어날 수 없는 늪이 마음 안에 있어서.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소량의 악몽초가 끌어들인 꿈은 미미하다. 다만 열쇠 역할을 하는 것이 문제다. 괴물이 잠들어 있는 상자를 열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카카나는 그것에 붙들렸다.

1분1초를 버티기 어려운 고문을 당하고 있다. 정신 고문은 때로 육체적인 고문보다 사람을 더 쉽게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비브로스 교수.”

중년에 접어든 회색 머리의 마법사가 근처에 와 섰다. 주위엔 다른 약초학 교수 두 명이 더 서 있었다. 그들은 잠들어 있는 카카나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일이 참 복잡하게 되었소. 악몽초가 집어삼킨 사람을 도로 꿈에서 꺼내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오.”

“누군가 그녀의 악몽으로 들어가 데리고 나오지 않는 이상 힘들 겁니다.”

다른 교수가 곤란한 낯으로 말했다.

“그렇겠지. 2차 증상이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악몽에 들어가더라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거요.”

“그녀가 평민이라는 게 다행인 거 아니겠소?”

뚱뚱한 개구리를 닮은 약초학 교수가 기름이 번들거리는 뺨을 씰룩이며 말했다.

“그만하시오, 마이트 교수. 뮤나스에 정식으로 돈을 지불하고 들어온 학생이오.”

다른 교수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잘랐다.

“아무리 평민이어도 그만큼 재력 있는 자가 뒤를 지키고 섰단 말이오. 게다가 그녀의 재능은 뮤나스에서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 아니오? 어떤 파문이 일지 불 보듯 뻔하오.”

“나는 협조하지 않겠단 말은 한 적이 없어요, 글라투스. 전력을 다해 도우리다. 다만 깨울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여 한 소리 아니겠습니까?”

비브로스가 진하게 한숨을 쉬자 다들 조용해졌다. 상심에 빠진 그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우선 그녀의 피를 충분히 채취해 두었으니 공동연구실로 갑시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더 위험해지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교수들이 우르르 복도로 나섰다.

병동 근처는 이미 구경하러 온 학생들로 바글거렸다. 여러 교수가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카니 페테라스는 뮤나스 최고의 화젯거리였으므로 그녀 주변엔 언제나 사람이 들끓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점이 용사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카카나 근처에 사람이 비지 않으니 손쓸 틈이 없었던 탓이다.

“오늘 밤이 기회야.”

아다르가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용사들에게 정보를 전했다. 카카나를 밤새 걱정한 그의 입술이 초조함으로 바짝 말라 있었다.

“이제야 자리가 비었어. 경비병이 병실 입구를 지키고 있으니까, 새벽에 창문으로 들어가자.”

할릭이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신체접촉을 하면 카카나의 악몽으로 들어갈 수 있긴 해. 근데 그 전에 각자의 악몽부터 이겨내야 되잖아.”

그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용사들을 한 명씩 마주보았다.

“악몽초에게 우리는 새로운 먹잇감이야. 그걸 하루 안에 이기고 카카나의 악몽에 진입할 수 있겠어?”

“처음부터 카카나의 의식으로 들어가면 돼요. 그러면 시달릴 필요도 없어요.”

스노아가 답했다.

“아르모어는 정신계열 정령술에 능통하잖아요. 용 수인족의 특징이죠.”

“동양에서도 정령을 부려?”

“우리는 정령을 정백이라고 부른다.”

아르모어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정령과 비슷한 원리이니 편한 이름으로 부르면 되는 일이지.”

“그럼 망설일 게 없네.”

아다르가 초조하게 끼어들었다.

“오늘 바로 가자.”

그들은 이블라에게 계획을 설명한 후, 밤이 되길 기다렸다.

그녀는 병실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아르모어를 흔들어 의식을 깨우는 역할을 맡기로 결정되었다. 그들은 생활마법에 가까운 스노아의 플라잉 마법을 통해 창문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다행히 1인실이어서 병실엔 카카나만 있었다. 그들은 침대에 설치되어 있는 커튼을 쳤다. 누군가 들어왔을 경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준비되셨습니까?”

첼러스가 모두를 향해 나직하게 물었다. 용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해도 될 듯합니다, 아르모어.”

대기하고 있던 아르모어가 붉은 눈을 내리뜬 채, 오른쪽 손바닥을 하늘로 향했다.

“호접지몽(胡蝶之夢).”

기이한 울림을 담은 목소리가 공기를 잘게 진동시켰다.

고급원단으로 만들어진 커튼이 바르르 물결을 일으켰다. 동시에 아르모어의 손바닥 위에 작은 구체가 형성되었다. 형태를 갖추며 서서히 붉은색으로 물든 구체가 이내 작은 나비의 모습을 취했다.

아르모어가 천천히 날갯짓하는 나비를 향해 무심히 명했다.

“흩어지거라.”

나비가 여섯 마리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포르르 날아올라 각각 용사들과 카카나의 머리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하나 되거라.”

나비가 아래서부터 형태를 잃으며 그들의 몸에 스며들었다.

용사들은 자리에 선 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불그스름한 나비 한 마리가 은은한 빛을 뿜으며 그들을 어디론가 인도했다.

그러다 빛이 쏟아지는 작은 구멍을 향해 훅 빨려 들어갔다.

***

눈을 떴을 땐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이상한 저택 안이었다.

“여기가 어디…….”

인형처럼 조그마한 인영을 발견한 아다르가 헛숨을 들이켰다. 아주 여린 소녀였다. 이제 10살이나 됐을까. 물기가 촉촉하게 밴 꿀빛 눈망울이 크고 동그랬다.

깡똥하게 잘려있는 뽀얀 살구색 머리카락은 너저분하게 풀린 채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에 파묻히듯 자리 잡은 몸은 앙상하게 말라 있다.

아이가 가녀린 몸을 하고서 아다르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작아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고 있다. 살이 없어 그런지 눈이 더 커 보였다.

아다르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얗고 말랑한 소녀의 피부에 새파란 도장이 찍히듯 멍이 들어있었다. 보기 안타까울 만큼 팔다리가 가늘었다.

어린 카카나다.

‘얼마나 굶긴 거야.’

아다르가 주먹을 그러쥐며 생각했다.

그는 열심히 요리해 카카나를 포동포동하게 살찌워 놓았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보기 좋은지 만족한 기억도 선연하다. 그래서 어린 카카나의 영양 상태가 가슴이 미어지도록 참혹하게 보였다.

“누구세요?”

어린 카카나가 맑은 눈을 끔뻑이다가 물었다. 제 몰골을 자각하지 못하는 무구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눈가가 시큰거렸다.

아다르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끈끈하고 무거운 감정 덩어리가 목구멍에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은 아르모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카카나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낮고 차분한 어조로 질문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카카나.”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친구들을 치료하고 있어요.”

카카나가 바닥에 일렬로 누워 있는 열댓 명의 아이들을 가리켰다. 용사들의 시선이 그제야 피 냄새가 진동하는 근원지로 향했다.

“…….”

그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누워있는 어린아이들이 전부 시체였기 때문이다.

팔다리가 두 동강 난 시체도 있었고, 배가 뚫린 시체도 있었다. 전부 수인족이었다.

카카나는 치료라고 했다. 그래서 용사들은 시체를 유심하게 살폈다. 그러나 혈색과 호흡이 없는 게 확실했다.

카카나가 죽은 친구들에게로 쪼르르 뛰어가 치료를 재개했다. 약물을 만들고, 상처에 발라주고, 붕대로 감고, 거즈를 덧대고, 손가락이 문드러지도록 약재를 빻았다.

할릭이 카카나를 바라보다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더는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야.”

그가 지옥에서 갓 기어 올라온 악귀 같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입술을 거의 벌리지 않은 탓에 목소리가 음울하게 웅웅거렸다.

“이거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니겠지?”

“악몽초는 악몽을 꾸게 만드는 독이에요.”

스노아가 떨리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꿈이 비현실적이듯이,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그녀가 저희를 경계하지 않는 이유도, 시체를 돌보는 이유도 이곳이 비논리적인 허상의 공간이기 때문이고요. 저게 모두 진실은 아니겠지만…….”

숨겨진 상처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거예요.

스노아는 뒷말을 삼켰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할릭의 근육이 터질 것처럼 팽창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들은 친구를 치료하고 있는 카카나를 무슨 수로 악몽에서 깨게 만들어야 하는지 망연해지고 말았다.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첼러스가 억눌린 음성으로 물었다.

석상처럼 새하얀 그의 얼굴은 이제 아예 핏기가 빠져 있었다. 고민에 잠긴 스노아가 미간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악몽초를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예요. 뛰어난 길몽약을 만들어 먹이거나, 누군가가 그녀의 꿈속에 들어가서 해결하는 것. 원리는 같아요. 기분을 좋게 만드는 거죠.”

할릭이 픽 웃었다. 허탈하고 차가운 웃음이었다.

“너는 저 애의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겠냐?”

그가 친구들의 시체를 치료하고 있는 카카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스노아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마법이나 정령으로 현혹하는 건?”

아다르가 이를 갈며 물었다. 스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못 해요. 여기는 현실이 아니니까요. 정령은 모르겠지만…….”

“이곳에선 호접지몽만 부릴 수 있다.”

아르모어가 손바닥을 위로 향해 펴며 말했다. 그러자 다시 검붉은 나비가 나타났다.

“카카나의 의식이 우리를 외부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주고 있지.”

스노아가 불현듯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역으로 가능할까요?”

아르모어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의미지?”

“저희가 카카나의 의식으로 들어왔듯이, 그녀를 우리의 의식으로 초대하는 거예요. 이런 장소에선 어떻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수 없잖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다.”

아르모어가 나비를 허공에 띄웠다.

“악몽초가 카카나를 붙잡고 있어 제약이 있겠으나, 시전자의 의식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느냐, 호접지몽.”

나비가 동의하듯이 날개를 팔랑이며 아르모어의 검지 위에 앉았다.

“할릭, 카카나의 주의를 끌어다오.”

고개를 끄덕인 할릭이 어린 카카나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깨끗하게 빤 면으로 친구의 지저분한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애기야.”

할릭이 카카나 근처에 쭈그리고 앉으며 말을 걸었다.

그녀는 할릭이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아는 사람처럼, 거절하듯 대답도 않고 친구의 얼굴을 닦아주기만 했다. 결국 할릭이 카카나를 제 품에 안았다. 아이가 놀라며 할릭을 올려다본다. 눈가에 눈물이 흥건했다.

할릭이 아이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주며 속삭였다.

“여기서 나가자.”

그와 동시에 아르모어가 명했다.

“흩어지거라.”

여섯 마리로 분할된 나비가 용사들과 카카나의 어깨 위에 안착했다.

“내게 이르거라.”

그리고 세상이 암전되었다.

“가르거라.”

아르모어는 익숙한 장소에 발이 닿자마자 명했다. 카카나가 제 의식에 도로 끌려들어가지 못하게 막기 위함이었다.

용사들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카카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어린 모습이었다.

“여기는…….”

스노아가 눈을 크게 뜨며 말끝을 흐렸다.

“죽음의 숲에 있었던 카카나의 저택이다. 이곳이 가장 편하지 않을까 하여.”

그러나 아르모어의 말이 무색하도록 카카나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소녀의 표정에서 울음기를 읽은 할릭이 서둘러 등을 토닥여주려는 순간.

“흐어어엉.”

결국 터졌다.

소녀가 악을 쓰며 울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듣는 사람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혼비백산한 용사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카카나는 고개를 하늘로 젖힌 채 굵은 눈물을 뺨으로 주룩주룩 흘렸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그녀를 안고 있던 할릭이었다.

“어구구구, 애기야, 왜 그래? 응?”

“흐아아아앙.”

“착하지, 착하지이, 뚝. 뚜욱,”

“흐어어어엉.”

“아구, 예쁘다. 아구, 예쁘지이이.”

할릭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적으로 회유해보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카카나가 주먹 쥔 솜방망이로 할릭의 가슴팍을 탕탕 때리며 더 서럽게 울었다.

할릭이 소녀를 들썩들썩 흔들면서 어떻게든 웃음을 끌어내려고 애썼다. 보기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할릭은 아예 그녀를 거실 소파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웃긴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유도했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소녀는 할릭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울었다.

“누, 누구 애 잘 돌보는 사람 없어?”

할릭이 다급하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이 없다.

스노아가 은근슬쩍 아다르의 등을 떠밀면서 말했다.

“어린 여동생을 돌본 이력이 있지 않나요? 어떻게든 해보세요.”

“왜 나한테 시켜!”

아다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카카나를 살폈다. 검지로 콕 찌르면 죽을 것처럼 작고 여리다. 건드리기도 무서운데 저 애를 무슨 수로 달랜단 말인가.

“나도 괴롭혀서 울리기만 해봤지 달래본 적은 별로 없단 말이야!”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네요.”

스노아가 싸늘하게 식은 채 중얼거리자 아다르가 발끈했다.

“그럼 네가 해보든가!”

그때 첼러스가 묘수를 냈다.

“약초를 줘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거 좋다!”

짝 손뼉을 친 아다르가 카카나의 연구실에 들어가 귀해 보이는 약초를 잔뜩 쥐고 돌아왔다. 그리곤 카카나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약초를 흔들었다.

잔뜩 긴장한 용사들이 카카나의 반응을 살폈다.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약초를 좇는다.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고양이처럼 집요한 시선이었다. 아직 눈물을 흘리고 있긴 했지만 울음은 많이 잦아들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아다르가 희망적으로 입을 열었다.

“자, 눈물을 그치면 오빠가 약초를 줄…….”

할릭이 아다르의 머리를 때렸다.

“애한테 거래를 제안하고 앉았냐!”

그가 약초를 빼앗아서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작은 고사리 손가락을 하나씩 조심히 펴서 땀으로 촉촉해진 손바닥에 약초 줄기 두어 개를 쥐여 주었다. 너무 많아서 남은 양은 무릎에 얹어줬다.

아이가 땡그란 눈으로 약초를 살핀다.

아르모어가 옆에 앉아 손수건으로 아이의 흘러나온 콧물을 닦아주었다. 첼러스는 딸꾹질을 하는 아이에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아이는 물을 받아먹고, 얼굴이 말끔해지는 사이에도 약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거 제가 가져도 되는 거예요?”

아이가 히끅거리며 물었다. 또 울음을 터트릴라, 할릭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너 다 가져.”

“감사합니다.”

아이가 소파에서 내려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단호하게 얘기했다.

“그럼 전 가볼게요.”

“어, 어?”

할릭이 당황하며 손을 뻗었으나, 아이는 그 손을 홱 피해 현관문으로 조르르 달려갔다. 첼러스가 황급히 앞을 막아섰다. 아이가 방향을 틀어 첼러스를 피하려고 했다.

결국 그가 아이의 작은 몸을 잡고 품에 안아 올렸다.

“후으으으.”

카카나의 얼굴이 다시 울먹울먹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첼러스가 눈물이 묻은 아이의 눈가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며 달랬다.

“귀여운 아가씨. 울지 마세요. 그러면 제 마음이 너무 아파요.”

“으, 웃.”

“예쁜 눈이 부르트고 말잖아요. 그렇죠?”

그러자 놀랍게도 어린 카카나가 어떻게든 울음을 참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첼러스의 천사 같은 얼굴은 우는 아이마저 진정시킬 정도로 선한 아우라가 있었다.

입을 떡 벌린 할릭이 어깨를 늘어트리며 거실 선반에 놓인 손거울을 들었다. 그리곤 제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다른 용사들은 할릭을 못 본 척하며 카카나와 첼러스의 대화에 집중했다.

“착한 아이네요.”

첼러스가 머리를 토닥이며 칭찬했다. 카카나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줄래요? 그래야 아가씨 뜻대로 해드릴 수 있답니다.”

“치, 친구들한테…….”

“네.”

“친구들한테 가고 싶어요. 야, 약을 만들어서, 이걸로…….”

아이가 줄곧 쥐고 있던 약초를 시무룩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돌봐줘야 해요.”

“그렇군요.”

첼러스는 대답을 하면서도 카카나에게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어금니를 악물었다. 친구들은 이미 죽어서 돌볼 필요가 없음을, 잔인하지 않은 말로 전달할 방도가 없었던 탓이다.

첼러스의 곤란한 표정을 본 카카나가 이를 꾹 악물고 그의 어깨를 밀었다.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첼러스가 팔뚝에 단단히 힘을 줬다.

“내려주세요.”

소녀가 또박또박 요구했다.

첼러스가 곤란에 빠져 다음 말을 생각하는 동안, 지켜보던 스노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가 특유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자, 아이가 넋이 나가 스노아를 바라봤다. 예쁘고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카카나는 어렸을 때도 취향이 같았나 보다. 스노아가 작정하고 고운 미소를 짓자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카카나의 머리를 귀 뒤에 꽂아주며 얘기했다.

“친구들은 유능한 치료사 선생님이 봐주시기로 했어요.”

아리따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지어내자 어린 카카나로선 그 진의를 가려낼 재간이 없었다. 카카나가 순수하게 좋아했다.

“저, 정말요?”

“그래요. 그러니 아가씨는 여기서 한껏 예쁨 받으면 되는 거예요.”

소녀가 저도 모르게 스노아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그처럼 채도 높은 파란 머리는 처음 봤다.

그녀가 눈물방울이 맺힌 긴 속눈썹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신기하다는 듯이 머리를 문질러보았다. 잡으면 물처럼 형태를 잃을 줄 알았는데, 파란 머리카락은 여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꼭 바닷물로 짠 실 같다고, 어린 카카나가 생각했다.

“인어공주님이에요?”

소녀가 맑은 눈으로 물었다.

아다르가 뒤에서 터지려는 웃음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스노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소녀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인어왕자님이랍니다.”

“와, 왕자님이요? 남자예요?”

“왜요? 예쁜 왕자님은 싫은가요?”

스노아가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카카나의 작은 손을 움켜쥐며 서운하다는 듯이 물었다. 카카나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아, 아니요. 좋아요.”

“다행이에요. 제가 아가씨 마음에 들어서.”

“저를 좋아하는 어른은 오랜만에 봐요.”

“…….”

“그러면 친구들이랑 다시 놀 수 있는 거예요?”

아이가 발그레 웃으며 물었다. 도무지 지금의 까칠하고 경계심 많은 카카나라고 생각이 되지 않는 밝음이었다.

용사들은 카카나가 어린 시절에도 꽤 신경질적인 성격일 거라 예상했다. 예민한 성정을 타고난 아이가 둔하고 느긋한 성인으로 자라기 어렵듯이, 카카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 있는 어린 카카나는 잘 웃고, 무방비하고, 순했다. 어벙한 구석이 걱정이 될 정도로 무구했다.

많은 풍파가 둥그런 성격을 지금처럼 뾰족하게 갈고 깎아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이 따랐을지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다시 놀 수 있어요.”

느지막하게 떨어진 스노아의 대답에 카카나의 얼굴이 활짝 폈다.

햇빛이 비친 어두운 노란색 눈에 별가루가 떨어진 듯 반짝반짝 빛이 돌고, 방싯 올라온 눈 밑 살이 부풀어 오르는 빵처럼 꿀색 눈망울을 덮는다.

앙증맞은 치아가 전부 드러나도록 웃은 카카나가 스노아를 와락 껴안았다. 아이에게선 그다지 좋은 냄새라고 할 수 없는 지린내가 났다. 엉망으로 떡지고 엉킨 머리카락에서는 씁쓸한 냄새와 쿰쿰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어린아이 특유의 살 냄새가 있었다. 끝없이 차오르는 싱그러운 활기의 냄새. 맛있는 것은 전부 먹여주고, 가지고 싶은 것은 전부 쥐여 주고픈 사랑스러운 냄새였다.

아다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눈물이 말라붙은 카카나의 뺨을 닦아주었다. 살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볼이 생크림이 밀려나듯 몰랑몰랑했다.

‘시, 심장에 안 좋아.’

아다르가 가슴을 움켜쥐며 뒤로 물러났다.

첼러스가 미소가 번진 눈으로 카카나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녀는 지금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만, 악몽에서 깰 기미는 보이지 않는 군요.”

“설마 여기가 악몽이 아니어서 그런 거 아니야?”

할릭이 넌덜머리를 내며 말했다. 미간을 좁힌 스노아가 카카나를 번쩍 안아 제 허벅지 위에 앉히며 한숨을 삼켰다.

“그러네요. 그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인데…….”

“좀 더 즐겁게 해볼까?”

할릭이 마지막 희망을 담아 얘기하더니, 카카나를 향해 손짓했다.

“카카나! 이리와 봐, 재밌는 거 하자!”

카카나가 거대한 덩치의 할릭을 올려다보며 약간 겁먹은 눈을 했다.

“뭐 하고 놀아요?”

“하늘을 나는 거야!”

그가 제게 다가온 카카나를 번쩍 들어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녀에게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걸 아는 아다르와 첼러스가 기겁하며 말리려 했지만, 이상하게 카카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할릭이 입으로 부웅, 소리를 내며 거실을 마구 뛰어다녔다. 아이가 겁 없이 양팔을 뻗으며 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꿈속의 카카나여서 그런 건가?’

아다르가 얼떨떨하게 생각하며 미간을 문질렀다.

‘아니면, 아직 높은 곳을 안 무서워하는 것뿐인가?’

만약 후자라면, 그녀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만한 사건이 나중에 또 있다는 뜻이 된다. 대체 트라우마가 몇 개인 건지, 입맛이 써진 아다르와 첼러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한참 후에 할릭이 거실로 돌아왔다. 집이 떠나가라 웃던 카카나는 진이 빠졌는지 할릭의 품에서 도롱도롱 잠이 들어 있었다.

“소용없어. 간지럼도 태워보고 즐거워하는 건 다 해봤는데 안 깨잖아.”

침울해진 할릭이 아이의 몸에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 카카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르모어가 어느 순간 초연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라니?”

“이곳에선 정백을 더 부릴 수 있다.”

할릭이 놀란 눈을 했다.

“왜? 꿈속이어서 안 된다며.”

“그때는 카카나의 의식 속이 아니었나. 지금은 내 의식 속이라 상황이 다르다.”

“뭘 하려고?”

“정서가 안정이 되었으니, 성장할 수도 있겠지.”

아르모어는 설명하는 대신 근처에서 날고 있었던 검붉은 나비를 두 손으로 포개어 가뒀다. 그가 눈을 감으며 두 손을 품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특유의 기이한 울림이 담긴 목소리로 명했다.

“줄탁동기(啐啄同機).”

낮고 느른한 음성이 저택을 가득 채우며 메아리쳤다.

그가 열매를 반으로 쪼개듯 손을 펴자, 나비가 있었던 곳에 검붉은 가루가 드러났다. 아르모어가 그것을 어린 카카나가 있는 곳으로 후우, 불어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가루가 무게 없는 신기루처럼 옮겨가 카카나의 몸을 가볍게 감쌌다. 아이는 여전히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우리를 기억하는 때로, 성장하거라. 카카나.”

아이의 몸 주위를 계속 맴돌던 가루가 그녀를 허공으로 떠올렸다. 그리곤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히 가라앉히며 밀집하기 시작했다.

가루가 뭉치며 얇은 막을 형성하고, 카카나가 곧 신비로운 알껍데기로 전부 감싸이자 아르모어가 명령했다.

“부화하거라.”

와드득―

껍데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졌다. 이윽고 모래처럼 산산이 부서진 껍데기가 검붉은 가루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흩어졌다.

용사들은 껍데기 속의 카카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린 카카나가 그들이 잘 아는 어른 카카나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허공에 둥둥 뜬 채 잠들어 있던 카카나의 발이 거실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눈이 뜨였다.

경계 어린 눈매와 야무진 입술, 힘이 들어가 있는 눈썹, 적당히 살이 붙은 건강한 몸.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듯 조용히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용사들은 괜한 자극이 되지 않도록 가만히 있었다. 예민한 그녀가 조금이라도 빠르게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카카나는 다행히 위험을 감지하진 않았다. 다만,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구기곤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뭐야?”

정말이지 그녀다운 반응이었다.

“내가 왜 여깄어?”

설명할 것이 너무 많았다.

용사들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설상가상 그녀가 어느 시간대의 카카나인지 아르모어만 알고 있었다.

“그대,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이 무엇인가?”

카카나가 교복을 입고 있는 아르모어의 차림을 유심히 살피다가 말했다.

“합동 토벌 실습에서 콜리나랑 대판 싸우고 기절한 거.”

“다행히 성공한 모양이군.”

아르모어가 힘이 풀려 나른해 보이는, 자녹한 눈을 깜박이며 설명을 이었다.

“이곳은 내 의식 속이다.”

“의식, 뭐요?”

카카나가 눈을 와락 찡그렸다. 다른 용사들이라면 흠칫했을 법한, 몹시 신경질적인 얼굴이었다.

아르모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카카나의 황당한 심정을 제쳐두고 평이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는 악몽초에 당해 위독한 상태에 빠져있다. 우리는 그대를 구하기 위에 악몽 속으로 들어와 있는 상황이지.”

***

‘저게 뭔 소리야.’

나는 굉장히 황당해졌지만, 일단 진정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도 그럴 게 상대가 아르모어인 것이다. 험한 말을 쓸 순 없었다. 그래서 그냥 썩은 표정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아르모어는 본래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더 묻는다면 대답은 해주겠지만 불충분할 게 뻔했다.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서 새삼 주위를 살폈다.

내 저택이었다. 죽음의 숲에 있었던, 오랜 기간 나를 품어주었던 소중한 집.

‘우린 분명 뮤나스에 입학했어.’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었다. 짜증이 치솟아서 손으로 이마를 짚자, 할릭이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왜 그래? 머리가 아파?”

아다르가 근처로 걸어오며 허리를 숙였다. 까만 눈이 나를 들여다보더니 걱정하듯 두 눈썹을 산 모양으로 그러모았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계속 악몽을 꿔서 그런가?”

“아르모어, 그녀를 억지로 각성시키는 데 부작용이 있는 것입니까?”

첼러스까지 걱정스러운 어조로 아르모어를 채근했다.

“차가운 물수건을 드릴까요? 이곳은 허상의 세계여서 물수건이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스노아마저 이성적인 얼굴로 해결책을 찾으려 들었다.

‘왜, 왜들 이래?’

용사들이 과보호하는 성향이 좀 있긴 했지만, 이 정돈 아니었다.

나는 기세에 밀려 쓰러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걱정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니 골이 다 흔들렸다.

“다들 진정 좀 해. 머리 한 번 짚었을 뿐이잖아.”

“너는 좀처럼 티를 안 내잖아.”

아다르가 희미하게 노기가 섞인 어투로 타일렀다.

“그러니 우리가 부산을 떨 수밖에 없지.”

나는 정신 사나워서 손을 마구 흔들었다.

“다들 조용히! 조용히 좀 해봐!”

그러자 소란스러웠던 공기가 조금쯤 차분해졌다.

입매를 구기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다섯 쌍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에 담겨있는 오롯한 근심과 애정에 가시를 세웠던 마음이 어쩔 수 없이 누그러졌다.

‘일단 상황파악부터 하자.’

마른세수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르모어의 성의 없는 설명에도 다행히 귀에 박힌 단어가 있었다. 악몽초. 나는 콜리나가 뿌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면외용약을 흡수하고 기절했다. 그리고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그렇다면 2차 증상이 나타났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여긴 우리 집이잖아.’

그게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스노아, 내가 왜 집에 있는 거야? 악몽에 빠져있는 동안에 무슨 일 있었어? 그래서 도로 죽음의 숲에 와서 저택 스크롤을 찢은 거야?”

이성적으로 추론해 낼 수 있는 상황은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러나 스노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곳은 아르모어의 의식 속이에요.”

반사적으로 찡그려지는 미간을 검지로 살살 문질렀다.

‘진정하자. 진정하고 차분하게 다시 묻자.’

역정이 부글거리는 내 혼란을 눈치 좋게 해석한 스노아가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아르모어는 정신계열의 정령을 다룰 수 있어요. 그가 우리를 카카나의 악몽 속으로 데리고 와줬어요.”

나는 새삼스럽게 손을 바라보았다. 현실이 아니라는 게 믿기지 않으리만큼 뚜렷한 감각이었다. 손가락이 여섯 개 달려있지도 않았고, 존재감이 흐릿하지도 않았다.

코에는 저택 특유의 나무 냄새가 났다.

사선으로 들이치는 햇볕의 따스한 느낌, 적당히 선선한 기온까지 모든 게 이토록 선명한데…….

하지만 생각해보면, 꿈속에서의 나는 그게 꿈이라는 걸 항상 눈치채지 못했다.

“날 악몽에서 깨우기 위해, 너희가 내 악몽으로 들어왔다?”

“네.”

“하지만 여긴 악몽 속이 아니야. 그리고 아깐 아르모어의 의식 속이라며.”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카카나의 악몽 속에선 해결책이 없다 판단하고, 아르모어의 꿈으로 데리고 왔어요.”

“이해했어. 정령이니 뭐니, 아무튼 신비한 힘으로 그렇게 했다는 거잖아.”

“네.”

“근데 왜 난 기억이 없어? 혹시 여기로 오기 전에 제정신이 아니었어?”

“방금까지는 어린아이였어요. 아르모어가 정령술로 카카나를 각성시킨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 파악은 끝났다.

악몽초에 대처하는 법은 이미 알고 있다. 여기가 꿈속이라면 길몽약을 만들 순 없으니, 기분이 좋아지면 될 일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간단하게 말했다.

“기다려. 연구실에 다녀올게. 그러면 기분 좋아질 자신 있어.”

나는 망설임 없이 연구실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첼러스가 내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성스러운 하늘색 눈이 안타까운 빛을 띠고 있었다.

“카카나, 이곳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눈썹을 최대한으로 치켜 올렸다.

“무슨 소리야?”

“이미 시도를 해보았습니다만, 꿈에서 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악몽 속에서 기분이 좋아져야만 해결이 되는 거라는 결론을…….”

“대박.”

나도 모르게 펜을 찾다가 이곳에서는 메모를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안타까움에 이마를 짚었다.

“악몽초가 사람의 심층심리와 이렇게까지 얽힌 독이었다니 생각도 못 했어.”

“저, 카카나……?”

“그렇구나. 기분이 좋아진다는 건 단지 표면적인 방법이었던 거야.”

나는 짝, 박수까지 치며 열변을 토했다.

“실제로는 악몽 속에서 희망을 되찾는 게 열쇠일 수도 있겠어. 그래서 환자에게 적합한 길몽약을 만드는 게 까다로웠구나. 난 어떻게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길몽약을 제조할 수 있었지?”

“카카나?”

무아지경으로 중얼거리고 있자니, 아다르가 내 어깨를 강하게 짚으며 소리쳤다.

“너 본래의 꿈으로 돌아가면 지금처럼 못 있어.”

나는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그곳에선 내 다른 정백들을 다스릴 수 없다.”

소파에 눕듯이 기대앉은 아르모어가 설명을 이었다.

“그대는 결국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길몽약을 만들어야지 어쩌겠어요.”

“교수들이 쩔쩔매고 있어. 가능성이 희박한가 봐.”

아다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브로스 교수님도?”

“비브로스도.”

‘길몽약 제조가 생각보다 더 어려운가 보네.’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아르모어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그대를 일부러 성장시킨 것은 이 때문이다. 교수들과 달리, 그대는 뛰어난 길몽약의 제조법을 알고 있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감탄하며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려다가 간신히 자제했다.

“그러네요. 강력한 길몽약을 만드는 게 문제라면 해결할 수 있어요. 제조법을 알려드릴 테니, 기억해서 비브로스에게 전해주실 수 있나요?”

“아니, 그대가 직접 알려주는 게 좋겠군.”

아르모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나는 저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린가 싶어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직접 알려줄 수 있으면 길몽약은 왜 만들어? 그냥 악몽에서 깨어나면 되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도 아르모어는 나른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가 내게 다가와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대었다. 일자로 뚝 떨어지는 검은 직모가 내 뺨을 서늘하게 스쳤다. 나는 무언가를 느끼고 약간 겁에 질렸다.

“무, 뭘 하려고요?”

아르모어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신출귀몰(神出鬼沒).”

그가 기이한 명령어를 내뱉었다. 나는 숨을 참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의식이 어디론가 빨려가는 느낌이 엄습했다. 유체이탈을 하면 딱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비브로스는 시가를 입에 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름을 몰고 올 두터운 구름이 달빛을 가려 사방이 더욱 깜깜한 밤이었다. 비브로스는 약주전자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꾸덕꾸덕한 액체를 바라보다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다른 교수들은 잠을 자러 가고 없었다. 심지어 마이트는 이미 반 이상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개구리처럼 처진 볼과 턱살을 떨면서, 이런 소용없는 일에 매달릴 시간에 다른 이로운 일을 하는 게 낫다며 내내 투덜거렸다.

카니 페테라스의 후원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그에 응당한 배상을 어떻게 지불할지 고민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비브로스는 마음 같아선 마이트에게 차가운 일갈을 날리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의식이 먹히기 직전인 사람에게서 악몽초를 뽑아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최선은 다할 것이다. 희망을 놓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막막한 기분을 지우긴 힘들었다.

비브로스는 시가 연기를 깊게 들이켰다가 내쉬며 연구실 문을 열었다. 속이 출출해 잠깐 요깃거리를 가지러 가기 위함이었다.

‘응?’

그러나 그는 걸음을 우뚝 멈춰야 했다. 복도에 웬 정체불명의 양 인형이 그를 향해 서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양 인형이 왜 있지?’

비브로스의 더러운 눈매가 더욱 찡그려졌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시가를 끼운 비브로스가 연기를 내뱉으며 눈꺼풀을 끔벅였다. 피곤한 나머지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그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고 가슴팍의 앞주머니에서 무테안경을 꺼내 썼다. 양 인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빵실빵실한 흰 털옷에, 동그랗게 말려있는 뿔, 구름 같은 몸에 이쑤시개처럼 꽂혀있는 가느다란 팔다리.

어떻게 서 있는지 의심스러운 디자인임에도, 인형은 꼿꼿하게 네 발로 서 있었다.

반질반질한 검은색 유리구슬 눈알이 정확히 어디를 지켜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브로스는 결국 인형의 옆구리를 잡아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양 인형의 목에 달려있던 방울에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심각한 얼굴로 양 인형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인형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말을 했어?’

비브로스가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응?”

“다행이다! 진짜 제 소리가 들리시나 보네요!”

“으아아아악!”

질겁한 비브로스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인형을 내팽개쳤다.

사뿐하게 바닥에 착지한 인형이 멀쩡한 모습으로 그에게 다시 뛰어왔다. 솜과 천으로 이루어졌을 발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왠지 도도도도, 하고 소리가 날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게 비브로스의 공포심을 더욱 자극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흥분한 그가 연구실로 돌아가 독극물을 잡고 뒤를 돌아선 순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비브로스는 약물을 쥔 손을 파르르 떨면서 상대를 자세히 살폈다. 검술부 여학생이 양 인형을 품에 안은 채 그를 고요히 노려보고 있었다.

비브로스는 그녀를 알았다.

“이블? 너 이블이냐? 카니의 친구인?”

그러나 이블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학생 다섯 명도 서 있었다.

비브로스는 정신이 없었다.

‘뭐지? 꿈인가? 나도 악몽초에 당했나?’

혼비백산한 비브로스를 구경하던 스노아가 아르모어에게 말했다.

“역시 정백으로 그에게 암시나 계시를 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뮤나스에 아군 한 명을 둬서 나쁠 건 없지 않나.”

아르모어가 태평한 어조로 말했다. 인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르모어가 아랑곳하지 않고 양 인형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 비브로스를 믿는가?”

그러자 여태 가만히 있었던 양 인형이 다시 입을 벌렸다.

한 번 본 장면인데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끄악, 비명을 지른 비브로스가 뒤로 사사삭 물러났다. 이곳에서 놀라 심장이 터질 지경인 사람은 오직 그뿐인 듯했다.

“괴짜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양 인형이 말했다.

“그렇다고 하는군.”

아르모어의 대답에 스노아가 진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저 제 느낌일 뿐인데요.”

양 인형이 걱정하는 듯이 말했다. 아르모어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위험한 일이 아니라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 뒷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면 되는 일이다. 지금은 조금 불편해서 그렇지, 그대가 말했듯 우리는 천하무적이지 않나.”

“뭐, 그렇긴 해요.”

스노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불안하면, 내 정백을 그에게 흡수시켜 놓겠다.”

아르모어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며 손을 폈다.

“구밀복검(口蜜腹劍).”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스노아가 의아한 눈으로 아르모어를 보자, 그가 손을 아래로 내리며 느린 날숨을 토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네?”

“정백들이 지금은 나를 따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스노아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정령은 정령술사와 계약 관계로 얽혀있어 명령에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약을 맺지 않는다.”

스노아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아르모어가 답지 않게 조금 더 설명을 보태주었다.

“그저 도움을 청할 뿐이지. 여의주가 있으면 이런 불편함을 덜 수 있지만, 지금은 알다시피 잃어버린 상황이다.”

“그렇군요.”

“너희들!”

비브로스가 고함을 내지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용사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심지어 이블라의 품에 안겨 있던 양 인형마저도.

비브로스 샥스는 저를 무시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다섯 명의 학생들에게 슬슬 비위가 상하고 있었다. 저 인형은 학생들의 못된 장난이자 눈속임이라고 굳게 믿은 차였다. 그의 입꼬리가 분노로 파들파들 떨렸다.

그러나 그가 한 소리 하기 전에 이블라의 품에서 뚝 떨어져 나온 양 인형이 비브로스에게 도도도 뛰어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훠이! 훠어이!”

그가 바퀴벌레를 내쫓듯이 손을 휘저었다. 양 인형은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꿋꿋하게 할 말을 이었다.

“교수님, 저 카니예요.”

비브로스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당장 장난을 그만두지 않으면 너희 전부 징계다.”

비브로스가 연구실 문밖에 서 있는 여섯 명의 학생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교수답게 눈빛이 살인 낼 기세로 번뜩이고 있었다.

“너흰 모두 카니의 친구가 아니냐. 지금 같은 시기에, 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어차피 말로 설명해봤자 믿지 않을 게 뻔했다.

스노아는 모두의 환영마법을 망설임 없이 풀어버렸다. 그것이 어떤 말보다 확실한 대답이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비브로스의 눈이 용사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듯하다가, 곧 함박만 하게 찢어졌다. 그는 숨 쉬는 것마저 잊고 다섯 명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혹은 뒤로, 저렇게 눈을 움직이면 어지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눈을 굴렸다.

“그 얼굴은…….”

그는 뮤나스 약제조학과의 학과장이다. 세상일에 억지로라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인사였다. 얼마 전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현상수배지 또한 당연히 알고 있었다.

비브로스는 눈썰미가 좋았다. 생김새가 조금씩 달랐지만, 다섯 명의 얼굴은 현상수배지에 나와 있는 그림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책장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르 미끄러지는 바람에 입고 있던 하얀 실험복이 우스꽝스럽게 위로 밀렸지만 넋이 빠져 신경 쓰지 못했다. 살짝 벌어진 채 덜덜 떨고 있던 그의 입술이 어느 순간 확 벌어졌다.

비명이 터져 나오기 직전, 첼러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뛰어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비브로스가 화려하게 반짝이는 백금발과 고귀한 인상의 첼러스를 올려다보았다. 아까는 분명 밋밋한 외모였는데, 지금은 황금칠이라도 한 것 같다.

‘이건 악몽이야.’

그가 현실도피를 하는 사이, 첼러스가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던 스노아를 바라보았다.

뜻하는 바를 알아챈 스노아가 방음마법을 시전했다. 마법에 까막눈인 비브로스도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도망칠 기회를 찾아 눈을 굴리자, 할릭이 걸음을 옮겨 출구를 막았다. 그때, 포르르 뛰어오른 양 인형이 비브로스의 허벅지에 올라가며 소리쳤다.

“교수님께 거칠게 하지 마, 너희들!”

첼러스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급하게 사온 것인데도 양 인형이 이상토록 그녀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가 인형의 머리를 검지로 살살 문질러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에 책임을 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비브로스를 의자까지 부축했다.

그는 얼떨떨한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다가, 시야를 방해하는 흰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시가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도 나름 필사적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기 힘들 것 같았다. 그는 매캐한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범죄자들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저 인형은 대체 뭐고.’

그가 출구를 막아선 할릭을 바라보았다.

창문이 있긴 했지만 근처에 첼러스가 있었다. 높이도 높아서 뛰어내린다 해도 좀 더 빠르게 죽음에 이를 뿐이었다.

“혹시 진실의 약을 가지고 계신가요, 교수님?”

스노아가 비브로스의 상념을 끊으며 물었다.

아다르가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르모어에게 부탁을 하는 게 빠르지 않냐는 눈이었다. 그러나 아르모어는 오늘 더 이상 정백을 부릴 수 없는 것처럼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다.

‘마법을 사용할 순 없어.’

스노아가 턱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직접적인 정신개입은 용 수인족의 전유물이다. 마법으로 어설프게 따라했다간 마나가 타락하여 흑마법사가 될 수도 있었다.

‘신빙성을 높이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그건 왜 묻는 거지?”

비브로스가 연기를 뿜으며 물었다.

“나한테 먹이려고? 그래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텐데.”

“아니요, 먹는 건 저예요. 자백제는 제 이성을 흐리게 만드니, 침묵 혹은 진실만 말할 수 있는 약이 좋을 것 같아서요.”

비브로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그걸 먹는다고 상황이 달라지나?”

“제 이야기를 들으면 달라질 거예요. 교수님께선 현상수배지를 보신 것 같으니, 저희의 힘이 교수님을 능가하시리라는 건 이미 아시겠지요. 그러니 부디 이야기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괜한 반항은 하지 마시고요.

스노아는 뒷말을 삼켰다. 비브로스의 입장에선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상대로 순순히 진실의 약을 찾아 꺼냈다. 그러나 의심이 됐는지, 불순물이 섞였나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용사들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비브로스가 확인을 끝낸 약물을 스노아에게 건넸다. 그가 약물을 받아 마셨다.

그렇게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잠깐, 잠깐만, 그만 말해라.”

당연한 일이지만 비브로스는 더 극렬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이마를 짚었다. 그는 다시 한번 용사들의 얼굴을 살폈다. 모두 각자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다.

암살자는 암살자다운 분위기를, 용병은 용병다운 몸을, 기사는 기사다운 눈을. 그의 감각은 저들의 말이 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과부하가 걸린 머리가 그걸 소화해내지 못했다.

마른세수를 하던 비브로스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분된 그의 숨이 잔뜩 거칠어져 있었다.

“더 증거가 없나? 내가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증거 말이다!”

원한다면 못 보여줄 것도 없었다.

첼러스가 뒤로 물러난 뒤 검을 뽑았다. 스르릉,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비브로스가 몸을 긴장시키는 순간 싸구려 롱소드에 푸르고 아름다운 검기가 씌었다.

‘검기?’

비브로스가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눈두덩을 비볐다. 아무리 봐도 검기였다. 일반인의 눈에 보일 정도의 고밀도 마나를 검에 씌운 형태.

‘검기라니!’

눈시울을 위로 치뜬 비브로스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을 거라는 비브로스의 생각을 비웃듯, 할릭이 거들었다.

그는 돌 재질로 만들어진 테이블을 손으로 잡았다. 그러고 힘을 주자, 모서리가 자갈 수준으로 쪼개졌다. 할릭이 멈추지 않고 그것을 한 손으로 슥슥 문질렀다. 자갈이 돌가루가 되어 연구실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비브로스는 이전에 테이블이었던 돌가루를 멍청하게 내려다보았다.

감당하지 못할 장면을 한 번에 두 개나 본 비브로스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양 인형, 아니 카카나가 테이블을 짚고 있는 비브로스의 손을 코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괜찮아요, 교수님?”

비브로스의 멍한 눈이 양 인형에게로 향했다.

“너는 뭐라고 했지? 드래곤?”

아무래도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영혼이 사라진 초록색 눈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듯, 텅 빈 그릇처럼 공허히 카카나를 바라보았다.

안쓰러움을 느낀 카카나가 느리고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아니요, 교수님. 저 카니예요. 카니 페테라스. 아르모어의 도움으로 의식만 인형에 옮겨진 상태예요.”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거냐?”

비브로스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카카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르모어가 어떤 주문을 외웠는데…….”

“고고지성(呱呱之聲).”

아르모어가 대신 답했다.

“아기가 세상에 처음 나와 내는 소리를 뜻하지. 그 인형을 한시적 생명으로 탄생시켰다.”

“그렇대요.”

카카나가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길몽약의 제조법을 알려드리려고 왔어요. 제가 깨어나고 나면 원래 이름도, 나머지도 전부 다 알려드릴게요. 이 상태로는 오래 못 있거든요.”

기력이 빠진 비브로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의문을 품을 기력도 없어 보였다.

카카나가 고마움의 표시로 그의 손을 코로 콕콕 찌르는데, 스노아가 끼어들었다.

“그 전에, 교수님께서 해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스노아가 서류봉투를 꺼내 비브로스가 앉아있는 책상에 종이를 펼쳐놓았다. 익숙한 초상화가 끼어있었다. 콜리나 살라소나와, 소렉트 지퍼다.

“그들이 카니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이건 그 증거들이고요.”

“뭐라고?”

“뭐?”

카카나와 비브로스가 동시에 물었다.

카카나는 언제 이런 걸 모았나 싶어서, 비브로스는 저가 몰랐던 괴롭힘이 또 있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카니!”

여태까지 넋이 빠져있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비브로스가 버럭 고함을 쳤다. 카카나가 슬그머니 몸을 돌려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그가 이마에 핏줄이 돋아난 얼굴로 양 인형의 털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어디 가는 거냐, 응? 우리 아주 긴밀하게 나눠야 할 대화가 있는 것 같구나!”

“저, 전 괜찮…….”

“괜찮다는 말 빼고 모두 말해.”

비브로스가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헛소리여도 괜찮다. 난 오늘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거든.”

비브로스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미 이번 사건으로 분노와 무력감에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갔던 그였다. 비브로스는 지금 부당한 방법으로 저의 애제자를 건드리는 모든 것들을 부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카카나는 아르모어의 정백술이 풀어질 때까지 그 동안의 일들을 비브로스에게 낱낱이 고해야 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비브로스가 칼을 갈았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용의주도한 스노아는 카카나와 비브로스가 몇 시간이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특별한 반지를 제조해 돌아왔다. 만약의 일을 대비하여 비브로스가 용사와 카카나의 정체를 다른 이들에게 발설하지 않도록 만드는 마법반지였다.

비브로스는 그것을 빼앗다시피 가져와, 스노아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착용했다.

***

「쓸모없는 놈!」

소렉트 지퍼는 전신용 수정구슬 너머로 벼락처럼 쏟아지는 호통에 화들짝 놀랐다. 그의 아버지 지퍼 자작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침을 튀기고 있었다.

항상 거만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소렉트는 포악한 아버지 앞에 서자 거짓말처럼 작고 연약해졌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다섯 살짜리 애처럼 몸을 웅크리고만 있자, 눈을 하얗게 뒤집은 지퍼 자작이 입에 거품을 물고 고함을 질렀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는 것이냐! 검술에 재능이 있어 그토록 너를 아꼈건만, 일을 이렇게 망치다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아, 아버지.”

「닥쳐라!」

지퍼 자작의 음성이 높게 치솟다 못해 쇳소리로 갈라졌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그가 뒷목을 잡고 숨을 골랐다. 금방이라도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이었다.

「멍청한 놈! 아무리 상대가 평민이어도 상황을 봐 가며 일을 치러야 할 것 아니야! 그 비브로스 샥스의 애제자를 건드리다니 진정 네놈이 제정신인 것이냐?」

“네, 네? 아버지, 그게 무슨…….”

「이제 와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다!」

지퍼 자작이 주먹으로 상을 내려쳤는지, 그의 얼굴을 비추던 수정구슬이 크게 흔들렸다.

「네가 살라소나 백작가의 여식과 수상한 작당을 한 것이 다 들통 났다!」

소렉트가 헛숨을 들이켰다.

「멍청한 놈! 검술부에 널 감시하는 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게냐? 학생을 매수해 누명을 씌우려 한 것도 모자라, 카니 페테라스를 납치할 계획까지 세우다니!」

기절할 듯이 놀란 소렉트가 목 졸린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 그걸 어떻게……! 분명 잘 숨겨두었는데!”

「네가 사람을 고용한 증거물까지 나온 마당에 무슨 답답한 소릴 하고 있는 것이냐!」

소렉트는 도저히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뛰어난 추적자나 암살자가 아니고서야 그게 가능할 리가 없어요, 아버지! 충분히 조심했다고요! 분명 할리프와 체스, 그 기분 나쁜 녀석들이 음모를 꾸민 게 틀림없…….”

「내 속을 터트리려 작정을 했구나, 이 아둔한 놈아!」

지퍼 자작이 가슴을 퍽퍽 치며 한탄했다. 언성이 높아지다 못해 그의 입은 이제 숫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네가 어디에 뭘 숨겼고 그들이 어떻게 증거물을 획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다 끝나버렸단 말이다!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을 건드렸단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비브로스 샥스가 얼마나 무서운 작자인지 내 누누이 말했잖느냐!」

“아, 아버지…….”

「교수들 속을 썩여도 그놈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내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소렉트…….」

아버지의 말에 다시 항변하려던 소렉트는, 지퍼 자작이 이마를 짚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

소렉트가 멍한 어조로 지퍼를 불렀다.

자작이 돌연 기운이 쇠한 노인처럼 무정하고 차가워진 눈을 들었다. 살이 오른 그의 얼굴 곳곳에 분노와 실망이 섞인 눈물이 엉망으로 번져 있었다.

「비브로스 샥스는 한 번 문 것을 절대 놓지 않는다. 그는 우리 가문을 물기로 결심했고, 이제 다 끝나버렸다.」

“비, 비브로스 샥스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그가 약을 만들면서 끌어 모은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그와 친분을 쌓고 싶어 애를 쓰는 귀족이 산만큼 쌓여 있다.」

자작이 이마를 짚으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사업에 얽혀 있는 샥스의 지인 열 명이 벌써 계약을 파기했다.」

지퍼 자작은 바보 같은 아들에게 더 이상 설명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대화를 끝내버렸다.

「집으로 돌아와라.」

“하, 하지만 아버지. 이제 졸업인데…….”

「샥스의 심기가 더 뒤틀리기 전에 당장 거기서 나오란 말이다! 내일 돌아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렇게 알고 있어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지퍼 자작이 전신의 연결을 팍 끊어버렸다.

소렉트는 얼이 빠져서 까맣게 죽은 수정구를 내려다보았다. 반질반질한 구슬 겉면에 소렉트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비쳐보였다.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바닥에 자빠지고 말았다.

상황이 나빠진 건 소렉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일당들은 모두 학교의 엄중한 징계를 받고 잘 다듬어진 탄탄대로에서 고통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소렉트와 함께 일을 작당한 것으로 드러난 콜리나 살라소나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았다.

“예? 어머니, 그게 무슨…….”

「곱게 큰 줄로만 알았더니, 나는 네가 그런 천박한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콜리나.」

콜리나의 어머니, 살라소나 백작이 난생처음 보는 냉정하고 차가운 어조로 콜리나의 말을 끊었다.

「비브로스 샥스 백작은 네가 한 많은 악행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모아둔 증거들을 내 앞으로 보내뒀더구나.」

콜리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학교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 것이냐. 너는 뮤나스에서 학문을 쌓을 자격이 없다. 집으로 돌아와 기본 교육부터 다시 받아라.」

“그, 그럴 수 없어요, 어머니. 저는…….”

「콜리나.」

살라소나 백작이 웃음기 한 점 없는 얼굴로 말을 끝맺었다.

「더 이상 어미를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콜리나의 말문이 턱 막혔다.

살라소나 백작이 조용히 전신을 끊었다. 콜리나로선 처음 겪는 일방적인 단절이었다.

그녀가 휴대용 수정구슬을 떨어트리자, 뮤나스의 대리석 복도에 부딪힌 구슬이 퍽 소리를 내며 깨졌다. 콜리나의 심장도 같은 모양으로 조각조각 깨져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진작 한계에 몰려 있었다.

학교에 떠도는 무수한 소문들은 그녀의 신경과 정신을 고통스럽게 좀먹었다. 더불어 카니 페테라스가 학생들의 약제조를 도와주었던 선행이 드러나면서, 콜리나를 향한 차가운 시선은 더욱 매몰차졌다.

사랑받는 것, 관심 받는 것, 우대받는 것, 그녀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모두 사라져버리자 그냥 죽고만 싶었다.

타인에게 의지해야만 존속할 수 있었던 자존감은 진작 나락으로 떨어져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있었다. 콜리나는 징계를 받느라 흙으로 엉망이 된 제 꼬질꼬질한 치마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마음도 이와 똑같았다. 화려한 거품이 걷히자 추악하고 오만하게 비틀린 마음만 찌꺼기처럼 남아있었다.

그녀는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아 낮게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 콜리나를 몰래 주시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에 주근깨, 기이할 정도로 깜박이지 않는 눈꺼풀, 매력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여자가 끊이지 않는 의문의 남학생,

알렉 브래든이었다.

“칫.”

그가 짧게 혀를 차며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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