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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사립학교 뮤나스 (7/43)

Chapter 3. 사립학교 뮤나스

불행하게도 나는 진짜 사립학교 뮤나스의 입학 수속을 밟게 되었다. 교수가 용사에게 집결된 농도 짙은 마나를 느끼면 곤란해지는 거 아니냐고 반대했으나 소용없었다. 슬프게도 대기 중 마나의 농도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물고기’에 해당하는 초월자뿐이라는 것 같았다.

4년 중 한 학기만 다니는 거라고 용사들이 애걸복걸한 끝에 나는 학교에 반 강제로 입학지원서를 내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을 상대할 생각에 벌써부터 짜증이 치미는데, 뮤나스의 입학수속은 심지어 복잡하기까지 했다.

우선 신분증명서와 같은 온갖 귀찮고 복잡한 행정관련 서류를 준비해야 했다. 서류를 제출하면 총 3번의 자격시험을 거쳐야 했다.

첫 번째 시험은 입학지원자의 기본을 보는 시험이었다. 역사와 산수 같은 과목들을 제대로 읽고, 말하고, 쓰고, 풀 수 있는지 시험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여기서 가난한 평민들 반절 이상은 나가떨어졌다.

두 번째 시험은 선택한 학과와 관련한 시험이었다. 나는 약제조를 선택했고 할릭, 첼러스, 이블라는 검술을 선택했다. 스노아와 아르모어는 마법을, 그리고 아다르는 요리를 골랐다.

요리라니!

“한 번쯤 진지하게 배워보고 싶었어.”

요리에 대한 아다르의 애정은 내 생각보다 깊고 심오했다. 아무튼, 2차 시험까지 합격하고 나면 대망의 마지막 시험이 학생을 기다린다. 바로 ‘입학금 마련’이다.

뮤나스의 입학금은 평민 학생이 자신의 고혈을 쥐어짜도 해결을 보지 못할 만큼 비쌌다. 장학금을 꼬박꼬박 받거나 부유한 상인의 자식이거나 귀족을 뒷배로 두지 않는 이상 지불할 수 없다고 봐야 했다.

상황이 이러니 평민은 입학하더라도 뮤나스에서 1년 이상 버티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학교가 실력주의 방침을 표방하더라도 사방에 귀족만 깔려 있으니 억지로 버틴다 한들 멸시와 차별이 그들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거기에 감당하기 힘든 입학금까지, 기어오르기엔 여러모로 높은 산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뮤나스를 꿈에 그리는 이유는, 제국에서 그나마 신분상승이 쉽고 미래가 보장된 길이기 때문이었다. 뮤나스의 입학지원자 수는 지금도 계속 오르는 추세였다.

나와 용사들의 신분증명서와 입학금 문제는 현 용병왕인 노레스 케디프와 그를 소중히 여기는 아누비르의 길드장 이토스 피니아스가 해결해주었다.

문제는 첫 번째 시험이었다.

제국이 가르치는 역사는 왜곡된 것이 많았다. 높으신 분들이 진실을 알고 있는 용사들의 답안지를 봤다간 기절할지도 몰랐다.

또한 이블라가 글에 밝지 못했다. 그녀는 여학생 기숙사에서도 날 호위할 사람이 필요해서 고용되었는데, 뮤나스가 요구하는 수준의 문장을 어려워했다.

당연한 일이다. 용병 의뢰서에 적힌 글과 학문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뮤나스의 문장은 질적으로 달랐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도구예요. 걸리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착용한 후 입실해주세요.”

베꼈다.

우리에겐 대마법사인 스노아 칼리시스가 있었다. 뮤나스의 허접한 마나감지기로는 스노아가 만든 마도구를 잡아낼 수 없었다. 우리는 마도구 펜던트가 장착된 목걸이를 하고 시험장에 들어가서, 스노아가 텔레파시로 알려주는 답을 적기만 하면 되었다.

지하 감옥에서 탈출한 이후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책을 읽은 스노아는 우리들 중 가장 현대지식에 밝았다. 아니, 뮤나스에 있는 그 누구보다 밝을지도 모른다. 총명하고 재능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마법사 중에서도 스노아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우리는 스노아가 알려준 대로, 적당히 틀린 답안을 작성하고 시험장을 벗어났다. 덕분에 평균 성적으로 1차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2차 시험 또한 문제가 없었다.

검술부는 실기를 봤고, 이블라와 용사들은 이미 해당 학과에서 학생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아다르 또한 오랜 세월을 살면서 홀로 만들어본 요리 경험이 탄탄했다.

문제는 나다.

스승님이 기본적인 약학을 가르쳐주긴 했지만 그것마저 은밀하게 행해진 교육이었다. 나는 정식으로 무언가를 해본 이력이 없었다. 설상가상 여태 숨어 지냈던 탓에 경험도 부족했다. 이런 상태로 뮤나스의 유능한 입학지원자들을 제치고 합격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었다.

1차 시험만큼 걱정할 일인데도, 이상하게 용사들은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반응이었다. 어떻게 당사자인 나보다 더 자신할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기들은 합격했다 이거지.’

냉소적으로 생각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걱정돼서 미치겠네.’

불안에 덜덜 떠는 와중에도 시험은 착실하게 진행되어 감독관이 시험장으로 입실했다. 그들의 깐깐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초조하게 발을 떨었다.

“시험은 간단합니다. 문제지의 약초를 보고 이름과 학명을 쓰세요. 총 100문제이며, 시간제한은 90분입니다. 그럼 시작!”

그러나 감독관의 지시를 들은 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게 무슨 소리지?’

나는 감독관이 했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역시 말이 안 된다.

‘무슨 어린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름을 적는 게 입학시험이라고?’

학명이야 계속 다루다 보면 당연히 외워지는 거고, 이름은 말할 것도 없다. 쉬워도 너무 쉬운 게 아닌가.

물론 문제지에 그려진 그림이 지나치게 쫌생이 같은 구석이 있긴 했다. 이파리의 끄트머리나 줄기만 그려놓는 식이었다. 솜털 수준인 뿌리 하나만 그려놓고 이름을 알아맞히라는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각 약초의 특징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부위여서 상관이 없었다. 전부 다 그리나 부분만 그리나 특징이 뚜렷한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설마 전부 그리기가 귀찮아서 일부분만 그린 건가?’

나는 꽤 합리적인 추리를 하며 술술 이름을 적었다.

‘하긴 100개나 되는 약초를 일일이 그리려면 손이 아프긴 하겠지.’

20분 썼더니 벌써 다 끝났다. 약초 이름과 학명만 쓰면 되는 시험이라 시간도 별로 안 들었다.

나는 멍하니 답안지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단단히 들었다.

‘어떤 함정 같은 게 있는 거 아닐까. 이게 정식 시험일 리 없어.’

나는 시험 제출자의 심리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분명 문제는 이렇게 내놓고 심오한 뜻을 숨겨놓은 다음, 그걸 알아챈 학생만 합격 처리를 해주도록 만들었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그림에서 약초의 특징 외에 다른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만 이런가 싶어 주위를 살폈더니, 다른 사람들은 이마를 짚은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나처럼 어리둥절하거나 여유로워 보이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간절한 소망을 담아 다른 사람들을 더 꼼꼼하게 살펴보지만 역시 없다. 하얗게 질리거나, 파랗게 질리거나, 화가 난 것처럼 붉으락푸르락하거나 셋 중 하나다. 곳곳에서 한숨소리가 터졌다.

시험장을 내려다보는 감독관이 희열에 찬 변태 같은 미소를 지을 정도로 학생들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역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보다.’

안 그래도 불안한데 초조함까지 얹어지니 과도한 긴장으로 배가 아팠다. 이대로 퇴장할 순 없었다. 쓸데없는 거라도 써야 했다.

숨 막히는 압박감을 느끼며 다시 펜을 들었다.

‘뭔지 모르겠으니까 일단 효능이라도 써놓을까?’

그게 좋을 것 같았다.

시간도 어느새 30분밖에 남지 않았고 100가지 약초의 효능을 모두 쓰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대충 단어 한두 개 정도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 효능을 갈겨쓰는 도중, 갑자기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있어 봐. 그냥 떨어져도 되는 거 아니야?’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용사들이 붙어있어야 된다고 고집을 부려서 그렇지 나는 그냥 볼일 끝날 때까지 근처에 숨어 지내도 되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거짓말처럼 아픈 배가 나아졌다.

나는 급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새삼 답안지를 살폈다. 이름과 학명, 그리고 뭐라도 써본다고 쓴 심심한 효능을 보고 있으니 이 정도면 떨어지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안지를 다 지워버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왜 성실히 임하지 않았냐고 추궁할 용사들에게 둘러댈 핑계가 필요했다. 최선을 다한 흔적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나머지 약초들엔 효능을 쓰지 않는 것으로 타협했다.

시험에서 탈락할 생각을 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시원하게 답안지를 제출하고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뮤나스를 빠져나갔다.

***

“교, 교교, 교수님……!”

문이 벌컥 열리며 조교 카트산이 연구실로 뛰어 들어왔다.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가 교수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자, 소파 쪽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또 뭐야…….”

삼 일 밤을 꼬박 새운 목소리가 걸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헐레벌떡 뛰어온 카트산이 소파에 드러누워 있는 웬 누더기 같은 사람을 보고 헉, 숨을 삼켰다. 시체처럼 엎어져 있던 남자, 비브로스 샥스가 꾸덕한 액체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꺼슬한 입술에 병자 같은 안색, 그리고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이 비브로스가 두르고 있는 으스스한 기운과 합쳐지자 끔찍한 좀비 몬스터를 방불케 했다. 카트산은 조금 겁이 났지만 이 중대한 사안은 반드시 전달해야 했다.

비브로스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카트산을 노려보았다.

“뭐.”

조교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는 표정이다. 카트산이 귀신을 본 얼굴로 간신히 입을 뗐다.

“이, 이번 입학 시, 시험 말인데요.”

“이번에도 너무 어렵다고 난동이냐?”

비브로스가 검지와 엄지로 눈가를 지압했다. 눈알이 터질 것처럼 안으로 쑥 들어간다. 끔찍한 장면을 본 카트산의 입꼬리가 파들거렸다.

“누누이 말했지. 일일이 상대하지 말고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 버리라고.”

비브로스가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어조로 말을 잘랐다.

“알아들었으면 가.”

그가 쓰러지듯 소파에 드러누웠다. 카트산이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마, 마마, 만점자가 나타났어요!”

그때, 너무 건조하다 못해 모래가 굴러떨어질 것 같은 비브로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시뻘건 눈이다.

카트산이 메두사와 눈이라도 마주친 사람처럼 흠칫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비브로스가 비틀비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새하얀 백발이 거미의 실타래처럼 기분 나쁘게 흘러내렸다.

그가 군데군데 약물이 묻어 엉켜 있는 백발을 뒤로 천천히 넘겼다. 그리고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카트산이 겁에 질려 거의 찢어질 기세로 움켜쥐고 있던 답안지를 뒤늦게 펴내며 내밀었다.

구겨진 답안지를 받은 비브로스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답을 쭉 훑었다.

약초의 이름과 학명뿐만 아니라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효능까지 초중반에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정갈하고 또박또박 쓴 필체에서조차 답에 대한 응시생의 확신과 여유가 느껴졌다.

이는 단언컨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브로스의 약제조 시험은 뮤나스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했다. 차별이 팽배한 뮤나스에서 귀족들에게도 똑같이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비브로스 샥스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 실력을 중요시하는 자였다.

수많은 귀족들이 그의 수중에 돈을 쥐여 주고 성적을 사보려 했지만 넘어갈 비브로스가 아니었다. 그는 약초와 약제조에 미친 괴짜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흑마법사의 아들이어서 모르는 독약이 없다는 둥 한 학기에 한 번씩 꼭 괴상한 루머가 나돌았다.

약제조는 뮤나스에서 가장 귀족의 수가 적은 학과였다. 그런 그가 낸 시험 문제를 다 맞혔다? 4학년 졸업시험도 아니고 1학년 입학시험을 치르는 풋내기가?

한껏 힘이 들어가 있던 비브로스의 어깨가 불현듯 축 처졌다. 그가 답안지를 카트산에게 집어던졌다.

카트산이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종이를 간신히 잡아챘다.

“보고 베꼈어. 불태워버려.”

“네, 넷? 하지만 뮤나스의 입학시험은 부정행위 못 해요, 교수님. 아시잖아요. 마법사님들도 감독관으로 계시고…….”

“아, 베꼈다니까. 그럼 넌 이게 진짜 학생 실력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것도 입학생이?”

할 말이 없어진 카트산이 입을 다물었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비브로스가 낸 시험에 쓰인 약초들은 약초사전에 게시된 것들도 있었지만, 상급약초학이나 고대기록문서에만 등장하는 약초들도 있었다.

그래도 사전에 있는 약초를 ‘모두’ 달달 외웠다면 60점은 맞는다. 카트산이 알기로 작년에 입학한 학생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는 76점이었다.

그런데 100점이다. 이름과 학명 둘 다 맞혀야 1점이었으니, 100개나 되는 희귀한 약초의 이름과 학명을 일부분의 그림만 보고 전부 썼다는 말이 된다. 비브로스가 최근에 밝혀져 아직 연구 중인 약초까지 섞었는데도 100점이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부정행위라 단정 지을 만했다. 이건 학생이 풀 수 없는 문제였다. 애초에 성질 더럽고 지랄맞은 비브로스가 제발 입학하지 말라고 빌면서 만든 시험문제기 때문이다.

비브로스가 학과장으로 부임하고 있는 약제조학과에 입학하기 위해선, 약초사전에 나온 약초 문제를 모두 합한 점수인 60점 이상을 맞아야 했다.

“하지만 교수님, 그냥 탈락시킬 순 없어요. 60점을 넘었잖아요. 정당한 사유를 학교 측에 제출해야…….”

“그럼 데려와.”

비브로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네?”

카트산이 멍하게 되물었다.

“나한테 데려오라고. 이 시험을 쳤다는, 그 입학생.”

비브로스가 가슴팍의 붙임주머니에 걸려있던 작은 사각형의 무테안경을 꺼내 쓰며 말했다.

“내가 직접 면접을 보고 결정할 테니까.”

***

이상하게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개처럼 자꾸 안절부절못한다. 나는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할릭, 대체 왜 그래?”

“시, 시험은 잘 봤어?”

역시 뮤나스에 입학하기엔 내 실력이 너무 평범해서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약초와 관련된 효능을 써놓긴 했지만, 너무 쉬워서 함정에 빠진 게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사실 너무 쉬워서 좀 더 쓰긴 했는데…….”

“더 썼다고?”

할릭이 기겁을 하자, 옆에서 초콜릿 무스 디저트를 먹고 있던 아다르가 티스푼을 흔들면서 끼어들었다.

“관둬, 할릭. 차라리 얘가 알고 스스로 조심하는 게 더 안전해.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믿지 못할 게 뻔하니까 그냥 학교에서 체감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잖아.”

“그러다 저번처럼!”

할릭이 큰 소리로 받아치려다가 애써 뒷말을 삼키곤,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는 상대가 노레스여서 다행이었던 거잖아.”

포크로 그릇을 톡톡 치며 뭔가를 생각하던 아다르가 날 봤다.

“카카나. 마도구 하고 있지?”

나는 옷 안에 있던 마도구 목걸이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이거?”

1차 시험을 위해 만든 마도구를 개량한 목걸이였다.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스노아가 들을 수 있었고, 펜던트를 손에 쥐고 있으면 내가 스노아한테 말도 걸 수 있었다. 공격마법이나 일정 강도 이상의 물리적 충격을 막아주는 방어마법 또한 내장되어 있었다.

아다르가 말했다.

“물론 카카나가 원할 때 켜고 끌 수 있게 설계되었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땐 켜놓기로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아니다 싶으면 스노아가 텔레파시로 말릴 거고.”

“뭘 말린다는 거야? 위험한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준 거라며.”

“응, 그 소리야.”

의뭉스러운 대답이었지만, 물어보면 어차피 네가 너무 대단해서 보호하려고 하는 거라느니 개소리를 지껄일 게 뻔했으므로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당최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혼자 생활한 이후로 실력이 늘긴 했겠지만, 내가 늘어봤자 얼마나 늘었겠는가. 툭하면 쓸모없는 년이라고 욕을 먹었었다. 부족한 실력 때문에 하루걸러 한 번 꼴로 밤을 새웠다. 그마저 실적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친구를 곤란에 빠트리거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매를 맞곤 했었다.

나는 수플레를 떠먹으며 창밖을 살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세상이 핏빛으로 물드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시야가 어두워지자 입에 문 수플레의 단맛이 더 잘 느껴졌다.

‘어차피 탈락할 테니 나랑 연이 없는 학교야. 신경 쓰지 말자.’

마음을 평온하게 다스리며 수플레를 한 번 더 떠먹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알림음이 울렸다. 응시료를 지불하면 뮤나스에서 배급해주는 전신용 수정구에서 나는 소리였다.

황급히 발신자를 확인했다. 뮤나스 입학처다.

‘결과를 벌써 발표할 리는 없는데?’

고개를 기울이며 마나전신을 연결했다.

「안녕하십니까.」

연결하기 무섭게 깐깐한 목소리가 인사를 건넸다. 배급용 전신수정구여서 그런지 영상은 나오지 않고 목소리만 나왔다.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 오전 9시경 뮤나스의 약제조학과 입학시험을 치르신, 카니 페테라스 님 맞으십니까?」

“네, 맞는데요.”

「반갑습니다. 뮤나스 입학처의 제토라 미나라스라고 합니다.」

수정구 속의 여성이 기계처럼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카니 페테라스 님의 2차 입학시험과 관련하여 부정행위가 의심되는 바, 약제조학과 교수의 전원동의와 입학처장의 허가로 특별 면접 일정이 잡혔음을 알려드립니다.」

“엥?”

내 멍청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은 여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면접관은 약제조학과의 학과장이신 비브로스 샥스 님입니다. 내일 오후 3시까지 뮤나스 정문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특별 면접에 불응할 시 자동 탈락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할 말만 하고 뚝 끊어버렸다.

나는 수플레를 먹다 말고 사레가 들려서 콜록거렸다. 치즈케이크의 귀퉁이를 떼어 맛을 보고 있던 첼러스가 놀라서 내 등을 두드렸다.

‘부정행위?’

처음엔 스노아가 도와줬던 1차 시험의 부정행위가 들킨 줄 알았다. 그러나 2차 입학시험이라고 했다. 그 말도 안 되게 쉬웠던, 약초의 이름과 학명을 나열했을 뿐인 시험.

‘베낄 게 뭐가 있다고 부정행위를 해? 아니면 역시 내 실력이 너무 부족해서 확인해보려고 그러는 건가?’

내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사들은 이상한 소리만 해댔다. 네가 시험을 너무 잘 봐서 그런 것 같으니, 가서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오라느니 어쩌느니.

지금 상황에 농담이 나오냐고 타박해봐도 뜻 모를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내 걱정은 면접약속이 잡혀있는 다음 날 오후 3시가 될 때까지 수그러들 기미를 안 보였다.

어차피 탈락을 꾀하고 있었으니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었다. 다만 모르는 인간이랑 단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고 생각하자 체할 것 같았다.

나는 야채샐러드를 먹는 둥 마는 둥 깨작이다가 뮤나스의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정문엔 이미 안내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카니 페테라스 씨가 맞느냐고 묻더니, 지체하는 법 없이 연구실로 안내했다.

‘땅으로 꺼지고 싶다…….’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비브로스 샥스의 연구실은 워프게이트를 타고 약제조학과 건물로 넘어가야 있었다. 제국에서 유명한 학교답게 마도기술이 최신식이었다.

‘워프게이트라니.’

근데 별로 신기하지가 않았다. 그저 도망가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아다르가 내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상기했다. 스노아 또한 마도구를 통해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이곳입니다. 그럼.”

안내인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물러섰다.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시간을 죽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손바닥에 배어나온 땀을 치마에 문질러 닦고 문을 똑똑 두드렸다.

내가 문을 두드린 건지 내 심장을 두드린 건지, 심장박동 소리가 쾅쾅 울렸다. 꿀꺽 생침을 삼키며 답이 오기를 기다렸다. 등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들어오세요.”

연구실에서 희미하게 소리가 새어나왔다. 중년의 음성이었다.

심호흡을 한 다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씁쓸하고 촉촉한 약초 냄새가 났다. 놀라울 정도로 나를 안정시키는 냄새였다.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굴렸다. 사방에 찬장이 있었고 그 찬장에 약초를 담가놓은 유리병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특별 면접을 보러 왔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그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했다.

심지어 옆에 있는 진열장에 다가가서 코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들이밀기까지 했다. 정신을 차린 건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을 때였다. 쭈뼛거리며 몸을 바로 했다.

‘약초만 보면 눈 돌아가는 습관 고쳐야 되는데.’

불가능한 바람을 중얼거리며 뒤를 돌았다. 어깨쯤에서 거미줄처럼 얄팍하고 가볍게 살랑거리는 백발이 보였다. 흰 머리는 꽤 드문 색이어서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짙은 녹색 눈이 보였다.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외양이었다. 다크서클이 심해서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눈 밑에 작은 눈물점이 있었다. 체구는 큰 편에 속했다. 그러나 몹시 마른 데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어서 왜소해 보였다.

그가 입고 있는 연구용 실험가운에 비브로스 샥스라는 이름이 금실로 수 놓여 있었다. 나는 그를 멍청하게 올려다보았다. 비브로스 또한 날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한참 동안 서로를 탐색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비브로스였다.

“뭐야. 완전히 애새끼잖아.”

오만하게 쪼갠 비브로스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의자로 돌아갔다. 그리곤 푹 퍼지듯 앉아버렸다.

나는 방금 내가 뭐라고 불렸는지 곱씹고 있었다.

그와 내가 아무리 갑을관계라지만, 상식적으로 초면인 사람을 코앞에 두고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잘못 들었나 보다고 납득하려 했는데, 비브로스의 얄브스름한 눈이 한심한 것을 쳐다보듯 내 모습을 위아래로 성의 없이 훑었다.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저 시선이 어떨 때 나오는지 잘 알았다. 아르모어가 제국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짓곤 하던 표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가소로워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뭐 얼마나 굴러먹었기에 빠삭한가 했더니, 저 코딱지만 한 게 만점이라고. 하!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듣자듣자 하니까 말이 너무 심했다.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노려보자, 비브로스가 굵은 시가를 입에 꼬나물며 기가 차다는 듯이 날 흘겨봤다.

“꼴에 성질은 있어서 노려보는 거냐?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안 그래? 얀마. 아무리 뮤나스에 입학하고 싶어도 그렇지 커닝이 뭐냐, 커닝이.”

기분이 더러워져서 얼굴이 구겨졌다. 나는 최대한 성질을 억누르며 항변했다.

“커닝이라니, 전…….”

“한심하게. 쪽팔려서 합격해도 고개를 들고 다니겠냐?”

“아니요, 전…….”

“내가 저런 맹한 녀석 면접을 보겠다고 이 시간에, 어휴. 기대한 내가 등신이지. 시간 낭비니 그만 나가.”

그러나 결국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왔다. 나는 목소리를 착 깔고 말했다. 마음 같아선 뿔로 그의 갈비뼈를 받아버리고 싶었다.

“저기요.”

독한 시가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이던 비브로스가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저기요? 방금 나한테 ‘저기요’라고 했나?”

“네.”

“이놈 보게.”

“저 커닝 안 했어요. 그거 확인하려고 부르셨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나가라고요?”

“그렇게 주장할 거였으면 적당히 틀렸어야지, 적당히!”

비브로스가 거의 분노에 가까운 신경질을 내며 책상 위에 놓여있던 내 답안지를 흔들었다.

“그 정도 짬도 없는 거냐?”

그가 그것을 다시 팽개쳤다.

꼭 내가 던져진 것 같아서 기분이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해졌다. 내 분노한 얼굴은 전혀 상관 않은 채, 비브로스가 언뜻 증오까지 내비치는 말투로 일갈했다.

“내가 너 같은 놈을 한두 번 상대해본 게 아니야. 뮤나스에 억지로 몸이 묶인 지 벌써 10년째라고, 알아? 잔말 말고 어떻게 부정행위를 한 건지 말해. 눈속임 하나만큼은 인정해줄 테니까.”

머리끝까지 열이 뻗쳤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당장이라도 그의 백발을 움켜쥐고 전부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비브로스는 내가 툭 치면 기절할 것처럼 안색이 나빴다.

나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흥분하면 진다. 말싸움을 할 땐, 끝까지 냉정을 유지하는 쪽이 이기는 거라고 스노아가 얘기해준 적이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저 짜증 나는 양반이랑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그를 덮쳐버릴 것 같았다.

그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짜증을 억누르듯 시가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뮤나스에서 10년 동안 헛세월을 보내신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그 정도 수준의 시험문제를 내놓고 부정행위를 의심하다니 자존심 상하지도 않으세요?”

비브로스가 아무 말 없이 후우, 연기를 뱉었다.

얼굴에 노기를 띠고 노발대발할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그는 조용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아까와 궤가 다른, 예상치 못한 차분함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말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스렸다.

나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입술에 걸고,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건방지고 재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차피 탈락을 각오했던 시험,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었다.

그가 날 떨어트려도 좋으니 이대로 억울하게 욕을 먹고 물러설 순 없었다.

“고작 손톱만 한 그림 몇 개 그려놓고 이름을 대는 시험인데, 부정행위? 염치는 교수님이 챙기셔야죠.”

「카카나, 진정해요.」

스노아가 텔레파시로 날 말렸다. 무시했다.

그가 재떨이에 굵은 시가를 비벼 껐다. 그리곤 자리에서 스윽 일어났다.

‘너무 열 받은 나머지 한 대 치기라도 하려는 건가.’

겁먹고 발을 뒤로 물릴 뻔했다. 마지막 자존심을 쥐어짜서 발바닥을 자리에 붙박았다.

비브로스는 내게 오지 않았다. 작은 사각형의 무테안경을 쓰고 날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흐리멍덩했던 아까와 달리 짙은 녹색 눈이 선명해 보였다. 왜인지 본격적인 대화는 이제부터 시작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시험이 너무 쉬웠다? 부정행위가 필요 없을 만큼?”

“그래요. 제 답안지는 확인하셨겠죠? 제가 효능을 왜 써놓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문제가 이렇게 쉬울 리 없다고 생각해서 써놓은 거잖아요.”

“흐응?”

“제국에서 제일가는 사립학교라길래 뭐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이렇게 수준 낮은 걸 입학시험으로 내놓고 다 맞았으니 부정행위라니. 기가 막힌 건 저예요. 아시겠어요?”

나는 바득바득 이를 갈며 몇 마디 더 덧붙였다.

“전후사정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매도하다니, 뮤나스가 아무리 실력을 중요시하는 학교라지만…….”

돈을 먹이지 않고서야 당신 같은 사람을 교수로 채용했을 것 같지 않은데요.

나는 혀끝까지 튀어나온 뒷말을 간신히 삼켰다. 아무리 때려치울 학교라 해도 뒷일 생각 안 하고 막말을 퍼붓기엔 걱정되는 구석이 있었다.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비브로스가 문득 오른쪽 입매를 비틀었다. 드디어 상 위에 있는 재떨이로 내 머리를 빠갤 작정인가 보다 생각하고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그는 허리를 뒤로 젖히며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어재꼈다.

‘왜, 왜 저래?’

저 인간이 드디어 미쳤나 싶은 생각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는 내가 얼이 나가 쳐다보는 내내 폭소를 멈추지 못해 괴로워했다. 심지어 안경을 도로 벗어 상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기까지 했다.

“아, 이거 진짜 웃기는 녀석이네.”

비브로스가 즐거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기로, 제게 쏟아지는 모독을 ‘재미’라고 칭하는 사람은 정신병자밖에 없었다. 위험한 작자라는 생각에 발을 뒤로 물리니, 비브로스가 그 꼴을 보고 또 몇 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믿고 싶어지잖아. 어? 그 말도 안 되는 시험문제를 고작 ‘입학생’이 다 맞혔다고 말이야.”

흥분되게.

그가 마지막 말을 숨기듯 속삭이며 얇은 입술을 핥았다. 먹잇감을 한입에 삼켜버리려는 뱀처럼 보였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나는 흠칫 놀랐다.

‘동공이 열린 것처럼 보이는데.’

문을 박차고 벗어나고 싶은 심정에 휩싸였다. 용사들도 가끔 미친 구석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 남자처럼 대놓고 광인은 아니었다.

‘지, 진정하자.’

아다르가 안 보이는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위급하면 펜던트를 쥐고 스노아를 부르면 된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욕구와 기대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던 비브로스가 돌연 말라서 뼈밖에 안 남은 손을 흔들었다.

“이리 와봐라.”

요단강 너머에서 손짓하는 망령 같다. 그 섬뜩한 모습에 자동으로 입술이 떨렸다.

“제, 제제, 제가 왜요?”

“그렇게 독설을 퍼부어 놓고 이제 와서 뒤로 빼려는 거냐? 맹랑한 꼬마야.”

그가 기분 좋게 들숨날숨을 반복하며 미소 지었다. 숨을 들이켜며 뒤로 더 물러섰다. 등에 문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내 기분을 좋게 해준 대가로 진짜 면접을 치러주마, 어떠냐?”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자 내쫓으려 들 땐 언제고 회유하기 시작한다.

“네가 정말 본 실력으로 시험을 치렀다는 판단이 들면, 내가 정식으로 허리 숙여 사과하지.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아?”

“안 당기는데요. 이런 미친 학교, 나는 조금도…….”

“여기 있는 약초에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교수가 날래게 꿀단지를 눈앞에 흔들었다. 저건 감언이설이다. 안다. 알지만…….

“실력이 입증되면 내 조수로 써주지. 너처럼 성질 더러운 녀석은 내가 특히 좋아하는 부류야.”

정말로, 비브로스가 뒷말을 덧붙이며 눈을 반짝였다.

“솔직하잖아! 조수가 되면 내 개인소유의 희귀한 약초까지 마음껏 만지고 연구할 수 있게 해줄…….”

나는 허리를 똑바로 폈다.

“그래서 전 어떤 걸 하면 되죠?”

비브로스의 왼쪽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프흐흐흐…….”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으려 했다. 그런 얼굴로 웃음덩어리를 삼켜낼 거면 차라리 터트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기괴한 얼굴이었다.

그의 안색이 언데드같이 끔찍하다 보니 더 소름이 끼쳤다.

“자아, 이리 와 봐라. 이게 뭐지?”

그가 연구자료를 들춰 그림이 그려진 종이 몇 장을 뽑아왔다. 그리고 내 면상에 가까이 들이대며 물었다.

‘이렇게 가까이 들이밀면 어떻게 보라는 거야.’

콧잔등을 철썩철썩 때리는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밑으로 잡아당겼다. 그제야 그림이 제대로 보였다.

다섯 종류의 식물 그림이었는데, 언뜻 보기엔 다 똑같아 보였다. 나는 그림을 대충 훑자마자 대답했다.

“쌍둥이 식물이네요.”

“크, 으흐흐, 흐하하학…….”

비브로스가 다시 허리를 숙이고 신음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하고 이어 말했다.

“어떤 서적에도 이름이 나와 있지 않길래 임시로 쌍둥이 식물이라 부르고 있어요. 비슷하게 생겼지만 특징이 다르죠. 효능도 비슷한 듯 다르구요.”

“크흐어억, 허허헉…….”

“첫 번째 애는 두 번째 애보다 더 사랑스럽다고 할까? 이파리가 훨씬 부드러운 곡선형이고…….”

“크큭, 크르픕…….”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차갑게 식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말이 자꾸 끊기잖아요.”

“아니, 아학, 됐어. 후우, 헉, 그만해. 그만하고 이걸 좀 보지.”

그가 이번엔 열쇠로 잠겨 있던 책상 서랍을 열고 거기서 고급 종이를 꺼냈다. 역시 약초가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처음 보는 식물이어서,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종이에 얼굴을 갖다 박았다.

“이게 뭐죠? 글루속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글루독의 열매가 달려 있네요.”

나는 약초의 이파리와 줄기 모양을 자세하게 살폈다.

“이 구조면……. 생존에 특화되어 있네요. 혹시 돌연변이인가요? 효능을 모두 가지고 있고요? 글루속과 글루독이 멸종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이런 식물이 발견됐다는 건 굉장히 의미심장한…….”

“됐다, 됐어! 충분해!”

그가 갑자기 정색하고 내 두 어깨를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딸꾹질을 했다. 환영마법을 들킨 줄 알고 기겁했으나, 그의 두 손은 다행히 내 옷 위에 안착해 있었다.

잔뜩 긴장한 나를 먹어버리고 싶다는 듯이 쳐다본 비브로스가 두 손을 파르르 떨었다. 어찌나 힘을 주고 있는지 어깨가 부서질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봤어. 완전히 잘못 봤단 말이야. 사람 눈이란 게 믿을 게 못 되는데 또 현혹되다니.”

“예?”

“네 말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옳다고! 교수 자격이 없는 건 나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녀석이 존재하더라도, 나만은 알아봤어야 했어!”

“저, 저기…….”

“넌 보통이 아니야. 어쩌면 나보다 더 괴물일지도 몰라. 그래! 괴물! 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 응?”

“모르…….”

“이 세상에 약초 관련해서 너 같은 괴물은 더 없을 거란 소리야!”

‘말을 끊어먹을 거면 왜 물어보는 거야?’

나는 난감한 얼굴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

“일단 진정 좀 하세요. 네?”

그러나 비브로스는 이미 내 말이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그가 흥분한 얼굴로 말을 쏟아냈다.

“약초 최고 권력자가 모여 연구하고 있는 걸 잠깐 구경한 것만으로 그 정도의 통찰력을 보이다니, 믿을 수가 없군! 쌍둥이 식물? 그래, 그것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그건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카니 페테라스! 말해봐라!”

“그건…….”

그러나 비브로스는 딱히 대답을 원하고 물어본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또 혼잣말을 줄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가만있어봐. 효능은 무슨 수로 비교한 거지? 너 같은 애송이가 벌써 그런 세밀한 연구가 가능하단 말이냐?”

“어렵지 않아요. 기본수칙만 잘 지키면…….”

“그건 연금술과 맞닿아 있는 영역이야!”

‘그냥 대답을 하지 말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그걸 이렇게 어린 나이에! 믿기지가 않는군! 넌 마법연구를 하고 있는 놈들 가운데에 떨어트려놔도 예쁨 받을 놈이다! 아니, 아니지.”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너를 그 고리타분한 녀석들에게 넘길 순 없지. 그렇지 않나? 응?”

“…….”

“기대된다. 아주 기대가 돼. 네가 내 밑에서 자라면 어떤 약을 제조할까? 응? 죽은 사람을 살리기라도 하려나?”

‘그건 이미 한 번 해봤는데.’

「소생약은 언급하지 마세요, 카카나.」

생각하기 무섭게 스노아가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지금 비브로스는 내가 개소리를 왈왈 대도 거품을 물고 달려들 것처럼 굴고 있었다.

비브로스의 입술에서 통제를 잃은 웃음이 질질 흘러나왔다.

“자네 말이 다 맞아. 10년을 헛살았어. 그 아까운 시간들을 고스란히 쓰레기통에 처박았단 말이야! 당연히 너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비브로스가 시뻘건 눈으로 날 훑어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왜 널 지금에서야 만난 거지? 너랑 일분일초도 떨어져있고 싶지 않군. 그래! 자리를 만들어줄 테니 아예 뮤나스에 들어와서 사는 건 어떻…….”

도저히 못 견디겠다. 이 남잔 미친 자였다.

“그러니까 제가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건 인정하시는 거죠?!”

비브로스의 연구실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물었다. 살면서 비명을 지를 때를 제외하곤 이렇게 큰 소리를 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연구만 계속했을 심약한 비브로스는 당연히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가 넋이 나간 것처럼 날 바라보았다. 눈이 튀어나올 기세로 커져있었다.

“뭐, 뭐라고?”

나는 한층 차분해진 어조로 또박또박 물었다.

“제가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시는 거죠?”

비브로스의 눈가에 다시 광기가 돌았다.

“당연하지! 너는 절대…….”

“그럼 면접이 끝난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손을 확 패대기쳤다. 빙글 몸을 돌렸다. 문이 보였다. 문고리에 달려들었다.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안 돼! 거기 서!”

비브로스의 안타까운 비명을 뒤로하고 전속력으로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죽기 살기로 뛰었다.

타다닥!

그런데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겁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서라!”

‘미친 거 아니야?!’

비브로스가 광기가 번들대는 눈으로 날 쫓아오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야말로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잡히면 비브로스의 연구실에 박제되어 전시될 것 같았다.

나는 뮤나스의 정문과 이어져 있는 워프게이트를 발견하자마자 올라탄 뒤 정문으로 왔다. 그리고 다시 달렸다.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비브로스가 쫓아오고 있을 것 같았다.

턱까지 내려온 다크서클과 붉게 충혈된 눈알이 악몽처럼 날 잡아먹을 기세로 추격해오는 느낌이 들었다. 허리가 오싹하게 징징거리고 꼬리뼈가 당겼다.

뭔가가 날 잡아챌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몸이 위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아아아악!”

졸도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비명을 질렀다. 아다르가 다급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카카나! 나야, 아다르야! 아다르 아로아! 진정해. 진정!”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고개를 들었다. 남성적인 얼굴선과 진하고 사나운 눈, 회색 머리카락이 눈에 박혔다.

익숙한 외양을 확인하자마자 아다르를 껴안았다. 고목나무에 들러붙은 매미 꼴로 다리까지 그의 허리에 있는 힘을 다해 감아버렸다. 자기에게 전해지는 심장 소리를 들은 아다르가 내 등을 쓸어주며 탄식했다.

“맙소사,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숭한 자세의 우릴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아다르에게서 손가락 한 마디만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내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진정시켜주던 아다르가 피할 곳을 찾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인적이 없는 곳까지 왔다. 그가 날 안은 채 벤치에 앉았다.

“그 녀석이 너한테 무슨 짓 했어?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서 개입하지 않았는데. 돌아갈까? 돌아가서 죽여줘?”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말을 쏟아내는 아다르는 처음이다. 그도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설명할 여력이 없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머지 마도구도 어서 개량해야겠네요. 상황전달이 안 되니 답답하군요.」

스노아가 텔레파시로 얘기했다.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아다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탈한 정신이 돌아올 기미를 안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그때, 뒤에서 첼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로하는 건 자기보다 첼러스가 잘한다고 판단한 아다르가 나를 그에게 넘겼다. 첼러스가 나를 훅 끌어올려 자기 품에 안았다.

인형도 아니고 여기 안겼다 저기 안겼다 하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두 발로 서 있을 자신 또한 없었다. 다 포기하고 영혼이 빠져나간 동물가죽처럼 매가리 없이 흐느적거렸다.

“면접장에서 기겁을 하고 뛰어 나오길래 달래고 있던 중이야.”

첼러스의 입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걸 알아내려고 진정시키고 있었다고. 넌 여기 웬일이야.”

“검이 제 마나를 견디지 못해 이가 나갔습니다.”

“또?”

“예. 그래서 하나 사러 거리로 나왔습니다만.”

첼러스가 다정하게 내 등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카카나? 저를 보십시오.”

전력질주의 후유증이 이제 좀 진정이 되고 있는 참이어서, 나는 기운 없이 눈을 들었다. 첼러스의 선하고 맑은 호수빛 눈망울이 나를 담았다. 그러자 정신이 조금 깼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첼러스가 나를 안고 아다르의 옆에 앉았다.

나는 특별 면접을 보러 가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아다르가 어느 순간부터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는 것이 아닌가. 어느 대목이 그를 즐겁고 유쾌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입씨름을 하는 대신 첼러스의 목덜미에 이마를 박았다. 지금은 기운을 비축하고 싶었다. 첼러스가 내 흐트러진 잔머리를 정돈해주었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뭘 놀라고 그래? 너랑 똑같은 자식을 만났는데.”

아다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발언을 했다. 그에게 들은 짓궂은 말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이번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아다르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숱이 풍성해서 회색 머리가 한 움큼 잡히는 게 꽤 나쁘지 않았다. 땜빵을 내주겠단 의지로 짤짤 흔들자, 아다르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아파!”

“뭐? 나랑 똑같아? 그 미친놈이 나랑 뭐가 똑같다는 거야! 다시 말해봐!”

“머리 진짜 뽑혀! 뽑힌다고!”

나는 실컷 흔들어재낀 후에야 아다르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아다르가 투덜거리며 욱신거리는 두피를 문질렀다.

한참을 씩씩거리고 있는데, 마침 공원으로 산책 온 상단 사람들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우릴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봐. 혹시 남편이 두 명인가?”

“여자가 어려 보이는데, 애인이겠지. 한쪽은 친구일 수도 있잖아?”

“친구는 무슨. 둘 다 예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잖아. 여자랑 결혼하려고 경쟁하는 거면 모를까…….”

나는 화들짝 놀라 첼러스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제야 무슨 꼴로 안겨있었는지 인식되었던 탓이다. 민망함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손부채질을 하며 시선을 땅에 박았다.

제국은 일처다부,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나라였다.

대부분 고위 귀족들의 소유물 개념이었지만, 실제로 다중연애를 하고 모두와 결혼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사랑과 증오의 신 헬리스를 섬기면서 정착된 법이라고 하는데, 이는 성에 특히 개방적인 제국의 문화와 어우러져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부인이나 남편을 많이 둔 사람을 보면 다들 부러워하지 문란하다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번에 여러 사람이랑 사랑을 나누다니, 나로선 힘들고 못 할 짓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지만.

나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용사는 맷집뿐만 아니라 얼굴도 철면피인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나를 호위하듯 걷고 있는 두 사람이 괜히 신경 쓰여 거리를 벌리며 걸었다.

그러나 애초에 걸음을 맞춰주며 걷고 있던 두 사람이 발을 조금 빨리하는 것만으로 쉬이 따라잡히고 말았다.

멀어지면 따라잡고 멀어지면 따라잡고. 무한반복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아다르가 내 오른편에 나란히 서며 빙긋 웃는다. 왼쪽을 바라보니 화려한 미모의 첼러스가 다정한 눈으로 날 보고 있다.

“왜 그러십니까?”

첼러스가 물었다.

“아니야.”

나는 그냥 깔끔하게 체념했다.

***

일주일 후, 우리는 뮤나스에서 발급해준 합격고지서와 마도책자를 받았다.

다행히 모두 합격이었으며―나는 비브로스 샥스를 떠올리며 하얗게 질렸다― 별 어려움 없이 교재와 제복도 구매를 끝마쳤다.

뮤나스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제복을 입는 학교였다. 가슴팍에 달고 있는 브로치의 색깔로 평민과 귀족을 구별할 수 있었다.

사실, 브로치가 없어도 귀족과 평민을 구별할 수 있었다. 제복의 원단만으로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제국의 귀족들은 옷차림으로 우월한 혈통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었다. 평민이 단순하고 실용적인 기성복을 입는다면, 귀족들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풍성한 옷을 입었다. 자수와 레이스가 빽빽한 드레스라거나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커프스가 그 예였다.

오죽하면 귀족은 자체발광하기 때문에 200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겠는가.

그래도 신분을 구별 짓는 브로치가 없었다면 항의가 거셌을 것이다. 제복의 원단으로는 귀족의 특별함을 과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뮤나스는 제도상으론 평민도 다닐 수 있지만 실상은 귀족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비위를 맞춰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재수 없는 귀족들 밭으로 평민 신분인 우리가 발을 들이고 있었다.

‘아, 진짜 가기 싫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뮤나스 안이다.

나는 죽상을 하며 워프게이트에 올라섰다. 기숙사로 가기 위해서였다.

평민 기숙사는 귀족의 것처럼 크고 으리으리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호화로웠다. 바닥은 부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곳곳에 값비싼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철을 꼬아 만든 고풍스럽고 뾰족한 창틀과 70미터에 이르는 두 개의 높다란 탑이 눈에 띄었다. 건물 가운데엔 장미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다. 기숙사 입구까지 걸어가는 길은 공원처럼 잘 다듬어져 있었다.

이블라와 나는 분수대를 지나서 마치 수호하듯 늘어선 기사의 조각상을 구경했다. 뮤나스에 다니는 평민 학생 중 대부분이 부유한 상단주의 자식들이었으므로 학교에서 신경을 꽤나 쓴 것 같았다.

‘돈지랄이란 이런 거구나…….’

나는 감탄하며 짐을 풀었다.

귀족들은 1인실을 사용했지만 평민들은 2인 혹은 3인실을 사용했다. 나는 노레스가 거금을 꽂아준 덕분에 이블라와 2인실 방을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별로 없는 짐을 대충 푼 다음 바로 기숙사를 나섰다.

공부하려고 뮤나스에 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자연스레 대강당에서 개최하는 오리엔테이션을 빠졌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용사와 모이기로 한 장소로 가는 길에 비브로스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응당 그렇게 했으리라.

“카니 페테라스! 내 귀여운 제자! 여기에 있었군!”

나는 거의 발작을 일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내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본 이블라가 사나운 눈으로 비브로스를 쳐다보았다. 그가 거리낌 없이 근거리로 다가오자, 그녀가 내 손을 잡아 자기 등 뒤로 숨겼다.

이블라는 키가 17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늘씬한 미인이었다. 그녀가 앞에 서 있으니 적어도 비브로스의 몸 일부분은 가려져서 안 보였다. 자존심이 상할 만큼 안심이 되었다.

“오오, 자네는 카니의 친구인가? 카니와 똑같은 검은 머리군!”

이블라 또한 스노아의 마도구를 착용하고 있는 참이었다. 환영마법이 똑같은 검은 머리로 적용된 모양이었다.

“누구십니까.”

이블라가 첼러스를 방불케 하는 낮고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너 같은 녀석한테 왜 내 소개를 해야 하냐고 묻고 싶지만, 뭐 그래. 카니의 친구니까.”

비브로스가 아주 달콤한 과일의 이름을 발음하듯이 내 가명을 말했다. 소름이 돋아 몸이 부르르 떨린다.

“비브로스 샥스다. 약제조학과 교수고. 카니, 이리 와.”

비브로스가 손짓했다. 나는 비브로스를 피해 이블라의 등에 달라붙었다. 포니테일로 높게 올려 묶은 그녀의 새빨간 머리카락이 내 볼 언저리를 간질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여긴 대강당과 정반대방향인데. 보아하니 오리엔테이션을 빠질 생각이었나 보지?”

“이, 이건…….”

“아아, 당연하지. 시간 낭비야. 손실이고말고. 넌 오리엔테이션을 들을 필요 없다.”

비브로스가 방긋 웃었다. 무해하게 웃고 있지만 날 보는 눈빛은 여전히 심상치 않았다.

“넌 1학년 수업도 들을 필요 없어. 무조건 내 옆에 찰싹 붙어 있으라고. 알겠어?”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려는 찰나, 비브로스가 말뚝을 박았다.

“그래야 약초 구경 마음껏 하지, 안 그래?”

“당연하죠, 교수님. 알아주시다니 기쁘네요.”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비브로스의 왼쪽 눈가가 또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얇고 창백한 입술이 웃음을 참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지만, 나와 처음 대면했을 때처럼 대놓고 웃어재끼진 않았다.

“그 태도, 좋아. 아주 마음에 들어. 자, 갈까?”

“다녀올게, 이블라!”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이는 이블라의 얼굴에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비브로스를 쫄래쫄래 뒤따라갔다.

그는 원래 말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성격임이 분명했다. 3학년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106동의 공동 연구실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목적지를 말해준 이후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걸어가는 내내 많은 수의 학생들을 마주쳤다.

전부 귀족이어서 시비를 거는 놈이 한 명쯤은 있겠거니 싶었는데, 그들은 비브로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가기 바빴다.

나는 새삼 비브로스의 외양을 구경했다. 그는 따지고 보면 미중년이었다. 근데 워낙 뱀처럼 생겼고 두 눈은 푹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걸음걸이도 구부정해서 계속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빴다.

나는 기겁하는 학생들을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광인이 학교에 버젓이 근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도 미스터리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꾸준히 걸어 공동연구실에 다다랐다.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비브로스가 문을 발로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강렬한 등장에 대기하고 있던 학생이 바짝 긴장하는 게 보였다.

“떠들고 있는 걸 보니 여유 만만이군! 오늘은 자신 있나 보지? 그렇게 알고 약물배합에 실패하는 놈들은 1점씩 깎겠다.”

내게 관심을 보이던 학생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신경도 안 쓴 비브로스가 악랄하게 말을 이었다.

“멍청하게 뭐 하는 거지? 책 펴라. 156페이지 27번째 줄. ‘갈라프스의 수액은’부터 시작하는 문장이다.”

비브로스가 술술 말하며 단상으로 걸어갔다.

연구실엔 10명 정도의 학생이 서 있었다. 평민이 가장 많은 학과답게 평민과 귀족의 수가 딱 반반이었다.

평민의 브로치는 무조건 검은색이었으므로 한눈에 구별이 가능했다.

“수면제를 만들어라. 책에 쓰인 대로 만들어. 설마 보고 만드는데 멍청하게 실패하진 않겠지?”

신경질적으로 명령한 비브로스가 날 보더니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에 있던 한 귀족 학생이 제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아, 카니? 이리 와 보련?”

‘제발 그 말투 좀 그만둬줬으면.’

속으로 생각하며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가 교수석 위에 널브러진 여러 가지 약초 중 몇 개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내게 내밀면서 말했다.

“이것들 손질해볼래?”

나는 뚱한 얼굴로 약초를 받았다. 그렇게 흔해빠진 약초는 아니었지만 비브로스와 붙어 있는 것에 비해 기대에 못 미치는 대가였다.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본 비브로스가 허리를 숙여 속삭였다.

“내 연구실에 가면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구경조차 해보지 못할 약초들이 많아. 어때, 기대되지?”

나는 얌전히 약초를 받아 도마 위에 내려놓았다. 비브로스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내가 하는 양을 구경했다.

붉고 동그란 열매가 달려있는 약초, 적폭초였다.

적폭초는 우리 집에도 몇 개 있었지만 이렇게 큰 열매를 다뤄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나는 열매를 신중하게 살폈다. 무턱대고 칼로 쑤셨다간 열매가 터져서 온몸에 붉은 물을 뒤집어쓰기 십상인 열매다.

열매를 만지작거리며 결을 찾았다. 왼쪽 대각선 아래로 결이 나 있었다. 결을 따라 칼을 미끄러뜨리듯 껍질을 벗기고 과육의 단면에 생채기를 냈다. 준비되어 있던 사발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과즙을 받아낸 후,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자 열매를 반으로 갈랐다.

석류를 닮은 새빨간 속이 드러난다. 그것을 약삽으로 파내는데, 비브로스가 옆에서 육성으로 감탄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 이거지! 적폭초는 이렇게 손질하는 거지! 당연히 알고 있었군, 맙소사! 그래, 너라면 알고 있을 줄 알았어!”

고작 약초 손질 하나에 왜 이렇게 오두방정을 떠는 건지 모르겠다.

떨떠름하게 남은 부위를 다듬어서 접시에 올려놓는데, 비브로스가 호기심이 많은 갓난애처럼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이건 왜 보관하는 거지? 응? 대부분 적폭초의 곁가지나 줄기는 버리는데?”

“이걸 왜 버려요.”

나는 정말 몰라서 묻나 의심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적폭초의 줄기는 물에 들어가면 흡수한 것을 배출하잖아요.”

“그런데?”

“약물을 약따르개로 조금씩 풀면서 다른 약과 혼탕해야 할 경우, 약물을 먹인 적폭초 줄기를 넣어놓으면 편해요. 그러면 알아서 서서히 풀어지니까요. 적폭초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약을 만드는 경우에 한하지만.”

“천재적이군!”

비브로스가 큰 소리로 떠들었다.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찼는지 수면제를 만들던 학생들이 약초를 손질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비브로스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조카가 너무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고모부처럼 두 손을 맞비볐다. 그리곤 신난 얼굴로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 쪼그만 머리에서 그런 발상은 대체 어떻게 나오는 거지? 응?”

시킬 것이 또 생각났는지 약함을 신나게 뒤지던 비브로스가 갑자기 허리를 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욕을 중얼거리며 주머니에서 전신용 수정구를 꺼냈다.

“제기랄, 이 새끼들은 내가 없으면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지?”

그가 수정구의 전신을 연결했다.

“또 뭐야?”

「비, 비브로스 님. 다시 이렇게 연락드리게 되어 죄송…….」

“용건이나 말해!”

「현장실습을 나갔던 검술부 학생 중 한 명이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어떤 독에 당한 건지 알 수가 없…….」

비브로스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금방 갈 테니 숨이 넘어가지 않게 잘 보살피고 있어.”

「가, 감사합니다.」

비브로스가 절망적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금방 다녀오마. 저 멍청한 애들은 보나 마나 수면제를 만들지 못할 테니 좀 도와주고. 알겠지?”

그리고 제 할 말만 씨불인 다음 바람처럼 공동연구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단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멍하니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3학년들을, 갓 입학한 나더러 도와주라고?’

제정신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책에 있는 제조법이라면 기본 중에 기본이다. 그게 뭐 대수라고 입학생이 나서서 도와준단 말인가.

그러나 학생들이 만들고 있는 약의 상태를 보고 생각을 정정해야 했다. 색깔이 심상치가 않았다. 손질하고 남은 약초들도 불쌍할 정도로 너저분하게 조각나 있었다.

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3학년 아니었나? 왜 이렇게 못해?’

그때, 깜찍한 노란색 머리를 가지고 있는 여학생이 자기가 만들다 만 약물을 들고 다가왔다. 나는 뭔가 질문하려는 줄 알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약물을 내 머리 위에 올리더니 고스란히 부어버렸다.

‘응?’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람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면 빠르게 대응을 하지 못한다. 내가 그랬다.

나는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검은 물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일부러 만든 것처럼 악질적인 색이었다.

위축된 평민 학생 몇몇이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살폈다. 높으신 귀족 나부랭이들은 저들끼리 뭐라 속삭이며 차갑게 키들거리고 있었다.

“어머, 미안. 실수했네.”

내게 실패작을 들이부은 여학생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시선을 맞추자 여학생이 약간 당황하며 미간을 구겼다.

여태 자기를 이렇게 똑바로 쳐다보는 평민은 상대해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너 눈이 안 보이니?”

나는 진심으로 물었다.

“뭐, 뭐?”

여학생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실수라며. 나를 똑바로 보고 걸어와서 머리 위에 약을 들이부었는데 실수라길래 황당해서 그러지.”

“뭐라는 거야, 이 평민이?”

그녀가 필사적으로 여유로운 척하며 얘기했다.

아르모어가 보여주는 여유와 비교되어, 그녀의 수준 낮은 위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 말투 진짜 웃긴다. 뭐라는 거야, 이 평민이?”

말투를 똑같이 따라하자 여학생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비커가 부들부들 떨리든 말든 차갑고 빈정거리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속으로 아다르를 상상하니 생각보다 쉬웠다.

“그런 말투 실제로 쓰는 사람 처음 봤어. 재수 없는 귀족 말투. 진짜 오글거린다. 미안한데 안 창피해?”

“너, 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러나 불행히도 여학생의 이어지는 말에 난 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평민 학생들이 기겁하며 나를 바라보았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같잖아서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

어차피 내가 사람들이랑 섞여 살 것도 아니니 두려울 게 없었다. 이렇게 어리고 멍청한 귀족의 도발엔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어쭙잖게 나쁜 짓거릴 하는 게 귀엽게 보이기까지 했다.

진정한 악의와 괴롭힘 속에서 몇 년을 버틴 경력이 있는 나는 코웃음을 쳤다.

“이거 프랑베프리 약초를 너무 많이 넣어서 색깔이 검어진 거야. 보니까 30그램은 넣은 것 같은데. 맞아?”

내가 얼굴에 흘러내린 약물을 검지로 훑으며 말하자, 여자애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방금 내 말 못 들었어? 나대지 말고…….”

“비브로스 교수님한테 그런 약을 보여줄 생각이야? 곧 돌아오실 텐데?”

여자애의 입이 딱 다물렸다.

“맞아, 아니야. 빨리 대답해.”

땋은 머리를 쥐어짜며 심드렁하게 묻자, 여학생이 썩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네가 뭘 어쩔 건데?”

나는 칭찬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수면효과를 강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런 것 같은데, 한꺼번에 때려 넣으니까 당연히 약이 망가지지.”

“네가 뭘 안다고 감히 내게!”

무시하고 쭉 말을 이었다.

“물 100밀리리터를 기준으로 프랑베프리 10그램을 5분에 한 번씩 넣어봐. 그러면 총 세 번은 더 넣을 수 있어. 보통 수면제보다 강하게 만들어질 거야.”

“그 정도는 나도 한두 번 만들다 보면 알 수 있어!”

그녀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악을 썼다.

나는 혼자 희극이라도 찍고 있는 듯한 여학생을 쌩하니 지나쳐서 우릴 구경하느라 바쁜 학생들의 약물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좋으나 싫으나 비브로스가 봐주고 있으라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귀족들은 차갑고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날 보았지만, 무심한 태도를 고수하며 약물을 지적했다. 몇몇은 정말 돌이킬 수 없을 정도여서 직접 물을 때려 붓고 손질되어 있는 약초 가운데 적당한 것을 집어서 휙휙 뿌렸다.

“내 약에 감히 뭐 하는 짓이야!”

자신의 귀중한 약물에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하는 줄 아는지, 귀족이 귀를 새빨갛게 물들이며 자존심을 세웠다. 그러나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검은 물에 손을 대긴 싫은 모양이었다. 차마 건들진 못하고 멀리서 몸을 떨었다.

철없는 귀족들은 아무래도 비위마저 약한 모양이었다.

가만두지 않겠다는 둥, 반드시 찾아가서 복수하겠다는 둥 했지만 그것도 곧 약물이 아름다운 수면제의 빛깔을 띠자 조용해졌다.

다음 타자부터는 내가 약물에 어떤 것을 넣어도 조용히 있었다. 심지어 메모하는 학생까지 있었다.

그들은 내가 손으로 대강 약초를 집어서 양념 치듯 넣고 있는데도 수면제가 만들어지자 믿기지 않는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르지 마요.”

약초를 손질하는 한 평민 학생의 도마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그렇게 말고, 이렇게.”

“이렇게?”

“아니요. 이렇게.”

“이, 이렇게 하란 뜻이니?”

“아니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하라고요, 이…….”

튀어나오려는 욕을 혀를 깨물어서 간신히 참은 찰나에 다행히 비브로스가 돌아왔다. 아까보다 족히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제 안 도와줘도 되겠지.’

나는 피곤한 얼굴로 단상에 돌아갔다. 손질하는 법을 교정해준 평민 학생이 아주 바보는 아닌지 그럭저럭 약초를 다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의외로 뿌듯해졌다.

잘하고 있나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더러운 인상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비브로스가 날 발견하고 다가왔다.

내 꼴을 본 확인한 그가 눈썹을 구긴다.

“몰골이 왜 그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비브로스가 가늘어진 눈으로 연구실을 휘이 둘러보았다. 내게 약물을 들이부었던 여학생이 당황하며 눈을 굴렸다.

알 만했다. 그동안 평민들은 괴롭힘을 당해도 보복이 두려워 교수님께 말씀을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교수들은 출신이 어디든 간에 지금은 모두 작위를 받은 귀족이다. 도리어 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약제조학과의 교수는 비브로스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건 나와 상관이 없다. 여학생도 분명 내가 신분에 연연하지 않는 걸 느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여학생을 가리켰다.

“쟤가 저한테 약을 들이붓던데요.”

“호오?”

“근데 이런 약 뒤집어쓴다고 피부가 닳는 것도 아니고. 너무 엉망으로 만들어서 독극물 역할도 못 해요, 이 약은.”

내 소소한 감상을 들은 비브로스가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냐? 누구라고 했지?”

“저기, 저 노란 머리 여자요.”

“콜리나 살라소나 학생이군. 알겠으니 일단 가서 좀 씻어라. 풀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구나.”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공동연구실을 벗어났다.

여학생이 날 죽일 듯이 노려보았으나, 그 역시 우스워서 비웃음을 지어주곤 문을 닫아버렸다.

***

콜리나는 약제조학과의 톱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실패한 약물도 조금 만들다 보면 금방 감을 잡았다.

집안도 유서 깊은 살라소나 백작 가문이었으며, 사랑스러운 노란색 머리와 귀여운 외모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녀는 평소엔 의외로 제법 친절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건 우월감에 빠져 베푸는 자비였으며, 누구라도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 하면 대번에 포악해졌다.

콜리나는 특히 권력 있는 자에게 사랑 받으려는 욕심이 강했다. 그래서 질투가 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괴롭혔다.

이중적으로 꼬리를 살랑거리니 피해자가 호소해도 다들 신분이 높고 똑똑한 콜리나의 편을 들었다. 그녀의 사랑스럽고, 평소엔 착한 행실 때문이었다.

똑똑하다며 집안에서 떠받들어지는 콜리나에겐 최근 고민거리가 있었다. 약제조학과의 학과장인 비브로스 샥스 교수의 마음을 빼앗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교수들은 모두 콜리나 살라소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경계하거나 선을 긋던 교수도, 그녀가 예쁜 짓만 하니 결국 마음을 열었다. 그런데 가장 권력이 높은 비브로스는 어떻게 해도 시큰둥한 반응만 보였다.

귀한 것을 선물해도 고스란히 되돌려 보내기 일쑤였고, 그녀가 그 학년은 해낼 수 없는 대단한 약물을 만들어 와도 ‘봐줄 만하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콜리나는 살면서 그런 식의 냉대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영애였다.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의지가 들끓었다. 세상이 쉽고 재미없었던 콜리나에게 비브로스는 알맞은 자극제 같았다. 그녀의 노력으로 비브로스가 결국 실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짜릿할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알 수 없는 평민이, 갑자기 비브로스에게 찰싹 달라붙어 3학년 연구실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것이 아닌가.

머리도 푸석푸석한 검은색에다 생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밋밋하고 특징이 없는 여자였다. 체구는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녀에 비해 왜소했고, 무엇보다 평민이었다.

평민!

그 핏줄부터가 하찮은, 지배받아야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멍청한 족속들. 타고나기를 싸구려로 만들어진 인간.

콜리나의 생각을 증명하듯 약제조학과에 있는 평민들은 대부분 귀족들보다 덜떨어진 성적을 보여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과 평민은 어렸을 때부터 받는 교육의 질이 달랐다. 그러나 철없는 귀족 콜리나는 자기가 어떤 혜택을 받고 있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살라소나 학생.”

비브로스가 연구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콜리나를 불렀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교수님?”

“유치한 짓 하지 말도록. 알겠나?”

콜리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네?”

“이렇게 자꾸 신경 거슬리게 만들면 나 피곤해.”

그렇게 말하는 비브로스는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 그 짜증 나는 평민 학생이 제 할 일을 하러 사라지고 혼자가 되자 얼굴 한가득 피어있던 생기는 모두 어디 가고 더 늙어 보였다.

크게 하품을 하던 그가 지겹단 눈으로 콜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 받아보는 낯선 눈빛이 주는 민망함에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모르고 치마를 움켜쥐었다.

“그 아이를 특별히 봐주니까 질투가 나서 그러는 거 아니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나는 네가 어떤 학생인지 알고 있다, 콜리나. 내가 널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그 때문이야.”

그가 책상에 턱을 괴며 말했다. 콜리나는 비브로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당황한 표정만 지었다.

“평민을 괴롭히는 짓은 그만둬라.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잊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콜리나의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저, 저는 전혀 그럴 의도가…….”

“그 정도도 못 알아듣는 학생이 아니니까, 콜리나 살라소나는. 그렇지?”

콜리나가 차마 아무 말 못 하고 가만히 있자, 비브로스가 얼굴을 싹 굳히고 못을 박았다.

“날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내 성격 잘 알거라 생각한다. 이만 나가 봐.”

“교수님.”

“나가라는 말 안 들리나?”

아랫입술을 짓씹은 콜리나가 뒤를 돌아 연구실을 나갔다. 초봄의 냉기가 남은 복도는 아직 추웠다. 콜리나는 싸늘한 공간 가운데 덩그러니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녀가 입술을 비틀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야.”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부릅뜬 두 눈에 잔인한 호기심과 투지가 들끓고 있었다.

***

나는 기숙사에서 몸을 씻고 용사들과 만나기로 했던 본관 뒤편으로 향했다. 머리에 정화수를 뿌리긴 했지만, 검은색 물까지 빼는 것은 무리여서 그냥 나와 버렸다. 머리를 감았다간 더욱 뒷감당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람들 눈엔 내 머리가 검은색으로 보여서 티가 나지 않았는지, 뜨거운 시선을 받을 거란 생각과 달리 편하게 현관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검술 수업을 끝낸 이블라가 여학생 기숙사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이동했다.

용사들은 이미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새삼 용사들에게서 우월한 자태가 줄줄 흘렀다.

특히 귀족적인 인상이 강했던 첼러스, 스노아, 아르모어는 꼭 맞춤정장을 입은 것처럼 맵시가 살아있었다.

‘아르모어는 머리를 묶었네.’

하긴 그렇게 긴 머리는 너무 눈에 띌 것이다.

대신 그는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오른쪽 어깨 위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 모습이 무척 잘 어울렸다.

“카카나? 머리가 왜 그러십니까?”

첼러스가 내 머리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 이미 이블라에게 같은 질문을 받았기에 이번에도 태연하게 둘러댔다.

“희귀한 약초가 있어서 달리다가 복도에 약물 들고 서 있던 사람이랑 부딪혔어.”

“그렇습니까.”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지난 내 행실 때문인지 김이 빠질 정도로 쉬운 납득이었다.

“제가 청결 마법을 걸어드릴게요.”

“고마워, 스노아. 근데 여긴 왜 모이라고 한 거야?”

스노아가 마법을 시전하며 대답했다.

“220년 전 발발했던 차원전쟁에 관한 정보와 아레사 나이제르의 소재지에 대한 의논이 필요해서요.”

스노아가 뮤나스의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기는 원래 마법사가 남긴 저택을 개조한 곳이거든요.”

“어? 그래?”

“네. 나이제르는 마법사이니, 마나의 흔적을 추적해보려고 했는데 특수한 장치가 되어있나 봐요. 느낄 수가 없더군요.”

나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차원전쟁은 왜? 너희랑 연관이 깊어서 그래?”

“전쟁에 참여한 이후에 제국의 음모에 당했으니까요. 용사들에 관한 정보가 어떤 식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차원전쟁이면 나도 아는 바가 있었다. 차원균열지대를 놓고 소즈, 트리포아, 시오라스 이렇게 삼국의 연합군과 제국이 40년간 벌인 전쟁이었다.

승기를 거머쥔 제국이 마침내 그 땅을 손에 넣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차원균열지대는 사기랑 이상생태 때문에 오랜 기간 금단의 땅이었던 곳 아니야? 왜 거길 두고 전쟁이 벌어진 거야?”

내 질문에 첼러스가 설명해주었다.

“보물사냥꾼들이 드나들면서 자원과 유적이 풍부한 곳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국보급으로 취급되는 고대유적이 다수 발견되자 모든 나라가 탐내기 시작했죠. 지금은 비밀의 땅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첼러스가 문득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카카나는 억지로 뮤나스에 입학하게 되지 않으셨습니까. 이 일은 저희들끼리 알아보아도 됩니다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기숙사에 있으면 뭐 해, 심심하기나 하지.”

“그러면 스노아를 따라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는 도서관에서 공식 기록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괜찮네. 약초 관련된 책도 보고.”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역할 분담은 끝난 것 같군요.”

“이만 흩어질까요?”

스노아가 제안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뮤나스의 도서관은 왕립학교만큼 유서 깊고 오래된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돔 형식으로 둥글게 휘어있는 천장에는 지혜의 신과 그녀를 따르는 천사가 양각되어 있었다.

삼나무 원목으로 만든 육중한 책장과 빗살무늬가 있는 고풍스러운 바닥, 복도마다 깔려 있는 짙은 남색 롤 카펫이 지식의 보고임을 강조하듯 고요하고 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천장까지 빽빽하게 꽂힌 책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숨을 들이켜면 오래된 잉크와 종이 냄새가 났다. 조용한 공간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특히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헤실헤실 웃으며 약초 코너를 돌았다. 처음 보는 책이 많았지만 웬만한 건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갔다.

시중에선 쉽게 구할 수 없는 도서를 한두 권 뽑고 목차를 살피다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여기서 제일 희귀한 책은 뭘까.’

갑자기 영문 모를 활자가 빼곡하게 적힌 책을 품에 안아보고 싶어졌다. 그러면 한 달은 내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고서를 찾아 도서관 곳곳을 누볐다. 그러다 철제 울타리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곳을 발견했다. 학생이 다룰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거나, 가치가 몹시 귀중하여 함부로 대여할 수 없는 책들이 진열된 곳이었다.

학생은 교수에게 권한을 허락받은 사람만 입장할 수 있다는 안내팻말이 달려 있었다.

나는 비브로스에게 부탁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그 뱀 같은 작자가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더 이상 부담스러운 관계가 되는 건 사양이었으므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망을 보는 사람이 안 보였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다르 같은 생각을 하며 코너에 다가섰다. 입구가 있긴 했지만 문이 달려 있지 않아서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손을 뻗어보았다. 그러자 앞으로 쭉 나아가던 손이 투명한 막에 부딪혔다. 결계다. 자세히 보니 입구 근처에 마도구로 보이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

나는 낙담하지 않았다. 마도구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마침 근처에 있었고.

서서 책을 읽고 있는 이블라의 손을 휙 잡아채서 스노아에게 다가갔다.

“카카나?”

스노아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소매를 잡고 질질 끌어왔다. 그리고 별다른 설명 없이 입구에 부착되어 있는 마도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금세 상황을 파악한 스노아가 습관적으로 웃으며 날 바라봤다.

‘알아들었으면 이거 좀 어떻게 해봐.’

눈으로 얘기하며 턱짓했다. 그러자 스노아가 마도구를 통해 텔레파시로 이야기했다.

「정말 못 말리는 분이시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스노아가 한숨을 쉰다.

「그래도 중요한 정보는 이곳에서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들어가 보는 게 좋겠어요. 같이 들어갈까요?」

‘그러면 나야 좋지.’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스노아가 내 손을 잡았다. 매끄럽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건조하고 거친 할릭이나 첼러스의 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스노아가 입구에 부착된 마도구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겉으론 바뀐 티가 나지 않았으나 손을 뻗으니 결계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풀린 것이다.

‘검지로 두드린다고 풀리다니?’

나는 약간 질린 투로 생각했다.

“이블라 씨, 여기서 망을 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지.”

이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책장이 빼곡하게 선 교수전용 열람코너로 들어섰다.

“으응, 알렉…….”

그리고 맹세컨대 벽으로 가려진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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