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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기억하고 있는 자들 (6/43)

Chapter 2. 기억하고 있는 자들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몸에 완전히 회복된 걸 느낄 수 있었다.

때는 깊은 밤중이었다. 건물 전체가 숨을 죽인 것처럼 조용했다. 아마 모두가 잠들었을 새벽 3시나 4시쯤 되는 것 같았다.

침대의 캐노피를 걷고 몸을 일으켰다. 열과 땀 때문에 이불 안이 꿉꿉했다. 선반으로 걸어가 적당한 약을 찾아 삼켰다. 몸은 무거웠지만 묘하게 개운했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면 완벽하겠단 생각이 들었으나 재수 없으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두꺼운 모피 외투를 걸쳤다. 복도의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혹시나 싶어 구급함과 같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맸다. 방문을 열자 반딧불이의 뒤꽁무니만큼 작은 노란색 불빛이 간간이 밝혀져 있는 복도가 드러났다. 건물로 새어 들어온 찬바람이 스산하게 얼굴을 스쳤다. 열이 나고 부어있는 콧속이 상쾌하게 뚫리는 기분이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한 바퀴만 돌고 방에 돌아올 작정이었다.

‘이게 무슨 냄새지?’

복도를 반쯤 걸어갔을 때, 어디선가 진한 장미향이 났다. 한껏 농익은 과일 향 같기도 했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숨만 쉬어도 향기가 맡아졌다.

허공에 나풀거리는 비단을 손으로 잡아채듯, 선명하고 매끄러운 냄새가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콧잔등을 간질였다.

한참 동안 음미하고 나서야 나는 그 향기의 출처가 누군가의 방 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 내가 손으로 짚고 있는, 이 문 안이었다.

“어? 이 향…….”

심장이 서서히 박동 수를 높여갔다. 이상하게 복도가 아까보다 추웠다. 나는 모피 외투를 단단히 여미다 말고 생각을 정정했다. 복도가 추운 게 아니라 내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나빠진 것 같진 않았다. 불편한 구석도 없었다.

오히려…….

‘잠깐.’

내가 알기로 이 방은, 아르모어의 방이다.

그리고 꽃밭에 온 것 같은, 이 풍성하고 진한 장미향은 한 번 맡아본 적이 있는 향기였다. 내가 발정기 때 맡았던 아르모어의 체취였다.

나는 지금 발정기가 아니다.

그런데 수인족 여성을 홀릴 정도로 진한 체취가 난다는 건 단 한 가지 경우만을 암시했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갈증이 일었다.

황급히 손가락을 접으며 날짜를 세어보았다. 본부에서 최초로 눈을 떴을 때로부터 보름,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나면…….

‘맙소사!’

경악하며 문을 두드렸다. 아르모어의 발정기가 확실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바람에 날짜 감각이 사라진 게 원인이었다.

심지어 내 가방 안에 있는 약물들은 이름표 없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어서, 아르모어가 자력으로 억제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미리 하나 줬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다.

계산에 따르면 오늘이 발정기를 맞고 사흘째가 되는 날 새벽이었다. 그의 고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결국 허락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순간 눈앞이 까맣게 암전되었다. 갑작스러운 남성 수인족의 페로몬에 몸이 단단히 놀란 것이다.

심장이 쾅, 내려 찍히듯이 떠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이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농후한 장미향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들었다.

‘향수병 속에 빠진 것 같아.’

체취의 입자가 뇌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읏…….”

무작정 들어오고 본 게 약간 후회되었다.

페로몬을 직격으로 맞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아르모어의 방은 이틀간 체취가 고여 있어서 정도가 너무 심했다. 손발에 저릿저릿 전류가 흐르고 배 속이 뜨거워졌다.

거친 호흡을 삼키며 눈을 떴다. 쿠션에 등을 기댄 채 비스듬하게 누워있던 아르모어가 날 발견하고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그의 얼굴에 저토록 뚜렷한 표정이 떠오르는 건 처음이다.

고통스러울 텐데 그는 신음 한 번 흘리는 법이 없었다. 표정도 금세 평소의 초연한 얼굴로 풀어졌다. 그러나 명백하게 더 긴장되어 보였다.

그가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관찰했다. 어둠에 잠긴 붉은 눈이 핏방울처럼 묘하게 점성이 있어 보였다.

“아르모어.”

나는 이름을 부르다 말고 흡, 숨을 들이켜며 창문으로 걸어갔다. 굳게 잠긴 걸쇠를 당겨 창문을 열자 뭉쳐있던 향기와 페로몬이 밤하늘로 천천히 풀어졌다. 그제야 정상적인 호흡이 가능해졌다.

나는 가방에서 억제제를 꺼내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르모어와 나 사이에 있는 다섯 걸음의 거리가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그대.”

아르모어가 말했다.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은, 숨이 한껏 섞인 저음이었다.

“나가는 게 좋겠군.”

“하, 하지만 발정기가 시작되고 사흘이나 지났잖아요. 지금 못 움직이는 거죠?”

“…….”

“제가 약을 놓고 가더라도 무슨 수로 마시려고요.”

사흘째 되는 발정기엔 성욕을 풀 수 있는 이성 수인족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거의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남은 나흘 동안 계속 고통스러운 것보단 한번 시도해보는 게…….”

“그대는.”

아르모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저 말라붙은 입술을 훑었을 뿐인데도, 하얀 입술을 스치는 붉은 혀가 오싹할 만큼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숨이 가빠졌다.

“스스로를 너무 돌보지 않는군.”

나는 다시금 부유하려는 정신을 콱 붙들었다. 나까지 정신을 잃으면 아르모어랑 대판 엉키는 거다. 상관이야 없지만, 앞으로 함께 여행해야 할 사이라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그를 볼 때 간혹 생각나곤 할 것 같아서.

“발정 중인 수인남성과 한 방에 있는 것이다. 자각을 가져야 한다, 카카나.”

그가 이름을 불러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왠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우물쭈물 대답했다.

“아, 아르모어는 잘 참을 수 있잖아요.”

“한계다. 다가오면 장담할 수 없어.”

“제, 제가 방법을 생각해볼게요.”

아르모어가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선 용사들 중 한 명을 깨워서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발정기인 수인족에게 동성 인간을 데려오는 것은 대단한 무례였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은연중에 수인족의 생리현상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제국의 문화가 뼛속까지 스민 결과였다.

아르모어 또한 자신의 상태를 보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가장 약하고, 본능적인 상태다.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건 당연했다.

나는 마음먹고 그에게 다가갔다. 아르모어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이는 것이 여기서도 보였다. 긴장으로 뒷목이 뻣뻣해졌다. 유리병을 쥔 손에 땀이 나서 미끌거린다.

혹시나 싶어 억제제를 두 개나 들고 있었더니 떨어트릴 것 같았다. 옷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으며 침대에 한쪽 무릎을 올렸다. 아르모어의 붉은 눈이 내 움직임의 궤적을 집요하게 쫓아왔다.

조심스럽게 그의 상태를 살폈다. 약병의 뚜껑을 따고 완전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바짝 붙어 약병을 그의 입술에 들이대는 순간, 아르모어가 마치 쓰러지듯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모래에 먼지가 일어나듯 장미향이 퍼졌다.

“아르모어?”

아르모어가 말없이 깊은 숨을 들이쉬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무게가 서서히 뒤로 쏠렸다. 지탱하기 힘들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쓰러질 것 같다.

“아, 아르모어……!”

결국 뒤로 넘어갔다. 손에 들려 있던 약물이 엉망으로 쏟아졌다. 뺨과 목덜미가 불그스름한 액체로 젖었다.

인상을 찡그리는데, 아르모어가 그르르거리는 신음을 흘리며 내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살결 냄새를 빨아들이듯 깊숙이 숨을 들이켠다. 팔뚝에 닭살이 돋아났다.

“향기…….”

아르모어가 자녹하게 사분거렸다.

“핥고 싶은, 우유 냄새가 나는군…….”

‘세상에 맙소사 어머니 아버지!’

나는 내 귀를 부정하며 다급해져서 소리쳤다.

“저, 저, 정, 정신 차려요! 야, 약만 먹으면 편해질 수 있어요!”

아르모어의 붉은 눈이 스르르 굴러와 나를 봤다. 동공이 열려 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상태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하필이면 약이 액체여서 골치가 아프다. 대체 어떻게 먹여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 손에 들고 있던 다른 억제제의 뚜껑을 땄다.

‘몸이 나으면 기필코 고체 제형의 약을 만들고 말 테다.’

굳게 다짐하는 순간, 목에 습한 입김이 느껴졌다.

“끄앗, 까아악! 안돼안돼안돼안돼!”

나는 흡사 까마귀에 가까운, 전혀 섹시하지 못한 비명을 지르며 바르작거렸다. 아르모어가 내 목을 질근질근 짓씹고 있었다. 장미향 페로몬 때문에 강제로 예민해진 몸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죽을 맛이었다.

그때 퍼뜩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전혀 좋지도 바람직하도 않은 발상이었지만 이거 말고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르모어의 손이 능숙하고 농염하게 내 옷을 벗기고 있었으므로 시간이 없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고 내 목과 쇄골에 약을 모두 뿌려버렸다.

‘자. 지금부터 나는 목이 없다. 난 목과 쇄골이 없는 사람이다. 어깨에 머리가 바로 붙어있다!’

다른 생각을 하며 목과 쇄골을 오가는 미끄럽고, 간혹 아픈 느낌을 철저히 무시했다. 억제제의 양은 본래 소량이므로 피부에 묻은 것만 빨아먹어도 효과가 있을 터다.

어떻게든 손에 힘을 주고 버텼다. 몸이 제멋대로 퍼덕거리거나 비틀리거나 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천장만 죽어라 노려보았다.

어느 순간 아르모어가 멈췄다.

내가 목에 남은 붉은 자국들을 어떻게 감춰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으니 되레 긴장이 최고조로 이르렀다. 전신에 힘이 들어가 돌덩어리처럼 굳었다.

거친 숨만 들이쉬던 아르모어가 돌연 스르르 쓰러졌다.

나는 백 미터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헉헉거리며 몇 분간 꼼짝도 하지 않다가 아르모어의 이마에 손을 올려보았다. 발정기억제제의 부작용 중 하나인 발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효과를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흐어어어어.”

몸에 힘을 풀고 뻗어버렸다. 나는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잠들기 직전 내 방으로 옮겨갔다.

한바탕 격정적인 꿈을 꾼 기분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할릭이 멍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잠에서 막 깬 나는 비몽사몽한 눈으로 아침 인사를 건네려다, 그의 손 하나가 내 목 근처에 와있다는 것을 알고 숨을 흡 들이켰다.

목도리로 둘둘 감아두었던 목이 휑했다.

‘설마.’

손을 들어 더듬어보니 목도리가 어깨까지 풀어져 있다. 그제야 할릭의 멍청한 얼굴이 이해되었다. 저건 충격 받은 낯이다.

“왜, 왜 마, 마마, 마음대로 목도리를……!”

“목이 왜 이래?”

할릭의 두텁고 거친 손끝이 깃털처럼 목을 스쳤다. 어깨가 흠칫 움츠러든다.

“이거, 키스마크 맞지? 내가 알기로 넌 어제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

웃지 않으면 굉장히 사나워 보이는 할릭의 얼굴이 서서히 비틀렸다.

“설마 누가…….”

목소리에 폭발 직전의 격분이 담기는 것 같아서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런 거 아니야! 이건 사정이 있어서…….”

“무슨 사정.”

“아르모어한테 억제제 먹이다가 조금 일이 꼬이는 바람에.”

“아르모어?”

“발정기 사흘째더라구.”

시커멓게 가라앉은 할릭의 눈이 나를 지긋이 살폈다. 괜히 입술이 마른다. 마른침을 삼키며 어떻게든 말을 이었다.

“다행히 억제제를 잘 먹여서, 지금은 자고 있을 거야.”

그런데도 할릭의 굳은 얼굴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

그가 내 목 근처의 키스마크를 엄지로 진득하게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외엔?”

그가 은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본능적으로 대답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딱히? 바로 잠들어 버렸거든.”

그제야 그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할릭이 내 목에 묵묵히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침묵이 이토록 두렵게 느껴지는 건 첼러스 이후로 처음이다.

“말하지 그랬어. 도와줬을 텐데.”

“아르모어가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돌아가라 그랬는데 네가 말 안 들었지?”

나는 어떻게 알았냐는 눈을 했다. 할릭이 낮게 혀를 찼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별일 없었다니까 됐어.”

됐다고 하기엔 화나 보이는데.

나는 말을 아꼈다. 할릭은 사제를 불러야겠다며 방을 나가버렸다.

방으로 돌아온 사람은 사제와 첼러스, 그리고 아다르였다. 나는 문 뒤쪽을 살피며 물었다.

“할릭은?”

“바람 좀 쐬겠다며 나갔어.”

아다르가 대답했다.

“할릭한테 할 말 있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길드 본부에 머무르면서 날 돌봐줬던 사제가 다가와 신성마법을 걸어주었다. 이제 몸에 남은 독도 없고, 사제가 거는 마법은 아무 효험도 없었지만 용사들은 이상하리만치 사제를 불러대며 신전에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사제의 신성마법이 거의 끝나갈 때쯤, 문이 열리며 이블라가 들어왔다. 그녀가 포니테일로 높게 올려 묶은 붉은색 웨이브 머리를 찰랑거리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길드장님이 찾으신다.”

“어디로 가면 돼?”

“다이닝 룸.”

그녀가 나를 주시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제가 허리를 숙이며 뒤로 슬슬 물러났다. 첼러스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사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제님.”

짐짓 친절하고 예의 바른 미소를 지은 첼러스가 깍듯하게 얘기했다.

“사제님 덕분에 그녀가 완전히 기운을 차린 듯하니, 내일은 신전으로 돌아가 보셔도 될 듯합니다.”

“그, 그렇습니까?”

크게 반색하던 사제가 뒤늦게 표정관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사제가 복도로 나갔다. 어쩐지 도망치는 듯한 뒷걸음질이었다.

***

‘내일이면 드디어 대사제님께……!’

사제는 흥분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썼다. 신전으로 돌아갈 날만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가. 저런 있을 수 없는 체질을 가진 여성은 당장 보고하고 연구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신체였다. 그녀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몸을 가지고 있었다. 신분이 귀족도 아닌 것 같으니 신전에 뻗어있는 여러 검은 손들을 거치면 납치해도 큰 탈은 피할 수 있을 터였다.

‘포이즌을 스스로 정화하는 것도 모자라 내 보잘것없는 신성마법을 흡수하다니…….’

그녀는 사제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제의 변형된 마나를 흡수할 수가 있단 말인가? 사제들은 신전에서만 계승되는 특별한 마나사용법을 10년에 걸쳐 배우고,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이 마나를 사용할 수 있었다.

사제들의 마나는 하얀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신성마나라 불린다. 일반적인 푸른색 마나와는 섞이지 않았다. 그녀는 일반인이니 푸른 마나를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흡수된 것이다!

‘이건 대단한 발견이야.’

사제가 초조하게 생각했다.

‘아예 마나를 사용할 줄 모르는 민간인처럼 보이던데, 어떻게 가능한 거지? 동양의 생김새였어. 혹시 까먹을지도 모르니 적어놔야겠군…….’

사제는 제가 본 얼굴이 스노아의 마도구가 펼쳐낸 환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마냥 좋아서 낄낄거렸다.

‘아누비르에 결계가 쳐져있지만 않았더라도 바로 알렸을 텐데…….’

그가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아누비르 길드 본부는 보안 문제 때문에 수정구를 통해 전신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바깥과 연락하려면 따로 마련되어 있는 전신방을 이용해야 했는데, 경계가 삼엄할뿐더러 원로급 길드원만 사용할 수 있었다.

급한 용무가 있다며 부탁도 해보았지만, 어째서인지 길드장은 딱 잘라 거절했다.

사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짐을 꾸렸다. 이제 애를 태우는 일도 끝났다. 의뢰는 완수했고, 그를 붙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누비르의 땅을 벗어나자마자 개인 수정구를 꺼내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는 혹시나 싶어 수정구를 검지 끝으로 톡톡 쳐보았으나, 역시 먹통이었다. 한 차례 숨을 삼킨 그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대사제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신께 귀의하여 수양을 쌓고, 그에 따라 계급이 나뉘던 옛날의 신전이 아니다. 타락한 신전은 만들어진 실적과 뒷돈이 숱하게 오고갔다. 제국의 눈에 든다면 신전 내 직급이 높지 못하더라도 황제에게 작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사제는 꿈에 부푼 생각을 품고 문을 열었다.

“으악!”

그리고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남자의 가슴팍에 부딪혀 뒤로 꼴사납게 넘어졌다.

사제가 시뻘게진 얼굴로 화를 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사제를 굽어봤다. 사제는 그를 알았다. 여자의 동료 중 한 명이었다.

볼 때마다 이상하게 흑표범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냥도 기척 없이 해낼 것 같은 으스스한 남자.

“안녕?”

아다르가 사제의 목덜미에 잭나이프를 깊숙이 쑤셔넣으며 상큼하게 인사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사제가 순식간에 절명했다.

***

다이닝룸은 귀족의 저택처럼 호화스럽진 않았지만, 널따랗고 깔끔했다.

원목과 유리로 된 가구는 아늑하고 고급스러웠으며, 한쪽엔 도수 높은 술이 진열장에 놓여 있었다. 나는 테이블이 꽉 차도록 놓인 접시를 보며 감탄했다. 비싸 보이는 음식이 즐비해 있는 것을 보니 절로 침이 고였다.

음식을 찬찬히 훑어 끄트머리까지 시선을 던졌다. 거의 방의 끝과 끝을 이어놓은 수준인 긴 테이블 너머에 길드장이 해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주름진 이마가 중후하게 밑으로 처져 있고, 굵은 눈썹 사이엔 굴곡진 삶을 반영하듯 깊은 고랑이 패어 있었다. 명도 높은 회갈색 눈이 신중하고 현명해 보인다.

흉터와 근육이 빼곡한 걸 빼면 언뜻 학자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그런 자가 나쁜 안색으로 서 있으니 건강이 걱정되었다.

길드장이 각이 잡힌 예를 취했다. 너무 깍듯해서 나는 우리가 무슨 귀족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이, 이제야 뵙는군요. 이토스 피니아스라고 합니다.”

심지어 말까지 더듬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겁먹었지?’

길드를 얼마나 뒤집어 놨으면 길드장이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내 질책 어린 시선을 받은 할릭이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피했다.

하기야 용병 길드의 마스터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용사들의 강인함이 까마득하다는 것을 진작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카니입니다.”

가명을 생각해본 적 없어서 급히 지어내 대답했다. 뒤에서 아다르가 킥킥거렸다.

“우, 우선 자리에 앉으실까요?”

마침 다리가 심하게 후들거리고 있었으므로, 길드장 이토스의 제안에 나는 냉큼 의자에 앉았다. 나머지 용사들도 적절한 자리로 가 앉았다.

우리는 잠시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음식을 먹었다. 이토스의 이야기는 대부분 첼러스가 받아줬다.

“그런데요.”

샐러드 소스가 묻은 입가를 냅킨으로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이토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현 용병왕이 신화급 용병패의 주인을 찾고 있다면서요?”

직설적인 화법에 이토스가 사레들렸는지 거세게 콜록거렸다. 나는 그의 기침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왜 보고하지 않으셨어요? 솔직히 우릴 왜 도와주는지 모르겠어요. 수상하잖아요.”

‘협박당했으면 지금 말해요.’

마음의 소리가 담긴 딱한 눈으로 이토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엾게도 할릭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정작 공포의 대상은 입에 음식을 우겨넣기 바빴지만 말이다.

뻔뻔하게 음식이 맛있다는 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할릭을 보고 있으니 대신 사과라도 하고 싶어졌다.

이토스가 뻣뻣하게 굳은 목구멍에 침을 밀어 넣으며 말문을 텄다.

“그는 신화급 용병패의 주인이니까요.”

“그게 이유가 되나요?”

“그럼요. 전설급, 그리고 신화급 용병패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특정 길드에 소속될 수 없거든요. 그러니 많은 길드들이 극진히 모시는 거죠.”

이토스가 입가를 냅킨으로 톡톡 두드리며 조심스레 얘기했다.

“그들을 포섭하면 높은 포상금의 의뢰는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죠.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들어주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랍니다.”

“신화급 용병패의 주인이라는 건 믿고요?”

스테이크를 썰던 이토스가 손을 삐끗했다. 듣기 싫은 소리가 죽 긁힌다. 마치 건드리면 안 될 기억의 뚜껑을 연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증명식을 당당하게 통과했어요.”

“증명식이 뭐죠?”

“용병패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고, 해당 용병패를 소지한 자가 주인이라 주장하는 경우 열리는 대회예요.”

이토스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가 신화급 용병패에 관한 사실은 숨기라고 명령, 아니 부탁하셨기 때문에, 큼, 크흠!”

“천천히 말씀하셔도 돼요.”

“실례합니다.”

그가 척박하게 마른 입속에 물을 들이부었다.

“큼, 흠. 아누비르에서 가장 강한 자들을 불러 증명식을 진행했습니다.”

“신화급 용병패의 증명식이란 걸 그들에게도 밝혔나요?”

“아뇨. 워낙 소란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이니까요. 그 점은 함구했습니다. 결과는, 완패였고요.”

입맛이 완전히 떨어졌는지, 이토스가 식기를 아예 내려놓았다.

“현 용병왕에게 받은 지령이 있는데도 신화급 용병패에 관한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건, 할리프 님이 위험을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쫓기는 몸이라 휘말릴 수 있다 하시더군요.”

‘할리프 님?’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세우고 있으려니, 할릭이 손을 흔들었다. 그의 가명인 모양이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본명과 비슷해서 가명을 만든 의미가 있나 싶었다.

나는 환영마법이 걸린 마도구를 떠올리며 애써 신경을 가라앉혔다.

“현 용병왕은 제 자식이나 다름없는 놈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이토스의 얼굴이 문득 따스하게 풀어졌다.

“오늘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약속을 슬슬 이행시켜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서입니다.”

“아아, 그거?”

할릭이 밥을 먹다 말고 맞장구쳤다. 이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를 불러주는 대신, 골치를 겪고 있는 의뢰를 무상으로 해결해주겠다 하셨죠.”

이토스가 손을 내밀자, 뒤에 서 있던 사용인이 두루마리를 넘겼다. 그가 끈을 풀고 종이를 펼쳤다. 오래된 건물의 구조도처럼 생긴 종이였다.

“여러분께, 지하묘지의 청소를 맡기고 싶습니다.”

할릭이 픽 웃으며 포크에 꽂힌 고기를 흔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먼지 털고 바닥을 쓰는 청소가 아닐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이토스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사적으로 노련해 보이려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사설은 그만하고, 그래서 뭘 청소하는 거지?”

“구울입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맛이 뚝 떨어져 식기를 내려놓았다.

마침 배가 부른 참이긴 했지만, 구울 얘기를 식사자리에서 하다니 길드장도 용사들에게 어지간히 맺힌 게 많은 모양이었다.

구울은 공격형 몬스터 중에서 고위험등급에 해당하는 놈이었다. 사람 장기를 주식으로 하며 특히 시체를 좋아했다. 회복이 불가능한 단위로 갈아버리거나 태워버려야 비로소 죽는 징글징글한 몬스터였다.

더 끔찍한 것은 구울이 장기를 먹어치운 사람의 시체도 구울이 된다는 점이다.

“글라나 산맥 분지에 카타스라고 하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 이교도들을 처형한 후 매장하는 지하묘지가 있습니다만…….”

“그런데?”

이토스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흑마법의 저주에 당한 이교도 시체가 구울로 변한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왔다더군요. 개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고, 마을의 실력자들이 지하묘지의 입구를 폐쇄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뚫릴 모양입니다.”

“그런 건 보통 상비군이 나서서 처리하지 않나?”

“그것이,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답니다.”

이야기를 듣던 첼러스의 미간이 살풋 일그러졌다.

“분지에 있는 마을은 카타스뿐이고, 구울은 먹을 것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니 몇 달간 마을을 버리라고 했다더군요.”

“참 편리한 사고를 가졌네. 평민들이 따로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내 말에 이토스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첼러스가 심각한 얼굴로 질문했다.

“따로 거처를 마련해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네, 그래요. 놀랍게도요.”

“흑마법이 얽혔으면 신전이 나서야 하는 걸로 압니다만.”

“제국이 몇 달간 꺼져있으라 했다잖냐.”

비소를 터트린 아다르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뭘 바라냐? 제국이나 신전이나 똑같은 시국인데.”

첼러스가 갑자기 피곤해진 사람처럼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이토스가 용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최소한의 피해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더 희생을 낼 수 없다는 주장이었죠. 제국군을 보냈다가 구울이 되면 골치 아파지니까요.”

구울의 번식은 재해급이었으므로 적어도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실력자가 나서서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폭군이 다스리고 있는 제국은 카타스 마을에 그런 귀한 인력을 쓸 생각이 없다.

정말이지 몰인정한 안배였다.

“카타스엔 가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돈을 모아 의뢰를 해온 참입니다만, 저희에게도 워낙 위험한 임무고 의뢰비가 부족하여 곤란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어쩌겠어. 용병이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자선단체는 더더욱 아닐 텐데?”

할릭이 냉정하게 말했다.

“돈만 좇아도 이상하지 않을 양반이 왜 관여하려는 건지 모르겠네.”

“카타스가 고향인 아누비르 소속 용병들이 있어서요.”

“따뜻한 길드장이시구만.”

이토스가 피식 웃었다.

“전부 가족이에요. 적어도 제게는요.”

“…….”

“괜찮으시겠습니까? 위험한 일입니다.”

이토스의 무겁고 으스스한 어조에 할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뿐한 얼굴이었다.

“도와주지 뭐.”

그리고 나는 그때 할릭을 말리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

우리는 일주일 후 카타스로 출발했다.

마을은 지하에 묘지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을 전체가 묘지 같았다. 카타스에 가까워질수록 세상이 자꾸 보라색으로 보이기에 내 눈이 이상한가 했더니, 실제로 보랏빛 안개가 사방에 껴있는 거였다.

구울이 내뿜는 사기(邪氣)였다.

마을 사람들은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거나 혼자 끊임없이 뭐라 중얼거렸다. 동물이나 벌레는 마을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조용했고, 일말의 역동성도 없었으며, 생기가 말라붙어 이미 죽은 장소라는 인상이 강했다.

나는 마을의 입구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오한에 떨었다. 간혹 환각도 봤다. 피투성이로 웃는 사람이라든가, 높은 절벽이라든가.

내가 싫어하는 것만 쏙쏙 골라 보여주는 환영이라니, 마을 사람들이 정신이상자처럼 행동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마 저렇게 넋을 놓고 다니는 게 최선일지도 몰랐다.

사기는 연구된 게 거의 없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강한 자에게 덤비지 않는다. 햇빛이 비치는 곳에 그림자가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구체적으로 제시된 기준은 없으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마나에 정통한 자, 즉 제2자각 이상인 사람에게는 얼씬도 않는다고 했다. 그 뜻은 대부분의 일반인에게 들러붙는단 이야기였다. 사기는 약하고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에겐 특히 헤어진 인연처럼 구질구질하게 군다는데, 이는 곧 내가 앞으로 많이 괴로워질 거라는 의미였다.

“하아…….”

아마 이 마을에서 가장 먹음직스러운 표적은 내가 아닐까.

힘없는 서민 가운데 내 과거가 가장 불행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나라면 이곳에서 하루도 못 버텼다. 마을사람들은 구울이 발생한 후 벌써 보름이나 이곳에서 버티고 있었다.

인생사 살기 만만치 않다는 건 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용사들을 보고 있자면 삶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한 번쯤 고려해보지 않을 수 없다.

환청에 환시에 악몽에…….

이제 괴롭힘을 당하는 건 신물이 난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계속 이상한 게 보이시나 봐요?”

옆에 서서 걷던 남자가 물었다. 이블라도 함께였다.

이번 구울 소탕에 함께 파견된 아누비르 소속의 용병이었다. 길드장은 할릭 혼자만으로 구울을 토벌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눈치던데, 왜 이들까지 파견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감시일까.’

아무튼 남자는 왼쪽 귀에 링 모양의 검은색 귀걸이를 세 개나 하고 있었다. 그뿐이랴, 입과 턱만 드러난 가면까지 쓰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웬 미친놈인가 싶었다. 그만큼 차림이 특이했다.

듣자하니 눈 주변에 화상을 입어 얼굴을 드러낼 수 없단다. 별로 마음에 드는 인간은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행색이 영 수상하단 말이야…….’

화상을 가린 가면이라기엔 너무 화려했다. 심지어 금색 반짝이까지 뿌려져 있지 않은가.

‘진짜 무도회용 가면 아니야?’

“아, 네.”

별로 상대해주고 싶지 않았다. 짧게 응대하며 대화를 잘랐다. 남자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이름이 노레스라고 했던가. 눈치는 어따 갖다 팔아먹었는지 내 떨떠름한 대답에도 기쁘게 말을 받아쳤다.

“사기가 계속 영향을 줄 때는 강한 사람이랑 신체적 접촉을 하면 도움이 돼요.”

“처음 듣는 얘긴데요.”

“제가 이런 몬스터들을 자주 상대해봤거든요. 사기 때문에 골치 썩을 일이 많아서 이것저것 시도해봤는데, 정말 효과가 있었어요. 시도해보는 게 어때요?”

나쁠 건 없지.

마침 난 사기의 조롱을 받고 있는 참이었다. 검은 손이 등줄기를 훑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었다. 저승사자의 손처럼 차갑고 불길한 감촉이었다. 사기가 불러온 착각이란 걸 알아도 절로 소름이 돋았다.

그래, 이 정도면 사람은 모든 시도를 해보게 마련이다. 용사들 중 누구의 손을 잡아볼까 고민하는데 노레스가 바짝 다가온다.

“제 손 잡을래요?”

그가 활달한 10대 청소년처럼 말했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 손을 제가 왜 잡아요?”

“뭐 어때요.”

말에 담긴 건 순수한 호의뿐이라 과민반응하기도 뭐하다. 나는 쓴소리를 하는 대신 옆으로 조금 피해 걸었다. 사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으니, 노레스도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신체접촉을 했다간 내게 환영마법이 씌어 있다는 걸 들킬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가 나를 졸졸 쫓아왔다.

‘아니 대체 뭔데?’

“동료 있으니까, 동료 손 잡으면 돼요.”

최선을 다해 그를 피하며 말했다.

“아까부터 저를 노려보고 있던 저 사람들 말인가요?”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용사들이 아닌 척 앞을 봤다. 시치미 떼는 게 수준급이지만, 노레스랑 내가 찰싹 달라붙어 걷는 게 신경이 쓰여 못 견디겠다는 기색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동료들이 강한가 봐요.”

노레스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카타스 마을의 촌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블라를 쳐다보다 말고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면의 그림자에 잠긴 분홍색 눈이 보였다. 석양의 붉은 물이 들어 지금은 진해 보이지만, 대낮에 보면 아주 연한 색일 것 같은 분홍색이다.

“그쪽보다는 강해요.”

대화를 듣다 못한 아다르가 내 손을 잡아챘다.

식은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을 그의 거친 손아귀가 덮듯이 잡아채는 순간, 혈류를 타고 뜨거운 물이 유입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등줄기를 훑던 기분 나쁜 감촉부터, 악취를 풍기는 정체불명의 숨결까지 보란 듯이 사라졌다.

그제야 내 몸이 얼음처럼 긴장되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겨울에 외투 없이 밖에 서 있다가 돌연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근 기분이었다. 아다르가 쯧 혀를 찼다. 진작 잡을 걸, 내 눈치를 보느라 먼저 나서지 못한 게 후회되는 눈치다.

“정말 효과가 있네요.”

“그렇죠.”

노레스가 기세등등하게 대답했다. 그 사이 이블라가 무리로 돌아왔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진입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데. 마을 여관을 제공해줄 수 있대. 구울을 토벌하다가 해가 지면 성가셔지니까.”

아누비르의 용병 두 명과, 용사 다섯 명은 고민에 빠졌다. 사기는 밤이 되면 더 짙어졌다. 게다가 용사들은 나를 데리고 다녀야 했다. 여기서 데리고 다닌다는 건,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게 두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을에 날 혼자 두기엔 이곳이 사기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던 탓이다. 사기에 먹힌 인간은 이성을 놓고 몬스터처럼 행동했다. 그들이 지하묘지에 가 있는 동안 마을이 광란에 빠지면 나는 다치거나 죽을 확률이 높았다.

하필 길드장이 비전투인원인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의 협조 약속을 꼼꼼하게 다 받아놓은 탓에 한 명만 마을에 남을 수도 없었다.

역시 용병 둘은 감시 목적으로 보낸 게 분명했다.

첼러스가 가장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내일 출발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데서 하룻밤을 자야 한다니.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해가 지자마자 망설임 없이 스노아를 찾아갔다.

“같이 자도 돼?”

어떻게든 숙면을 취하고 힘을 비축하기 위함이었다. 같이 자기엔 다섯 용사들 중에서 스노아가 가장 나았다. 중성적인 각선과 인형 같은 이목구비는 그를 이성이나 사람이 아닌, 그저 신이 빚은 예술품처럼 느껴지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있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내게 딱이었다. 그런데 스노아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녀랑 같이 자는 건 어때요, 카카나?”

“그녀?”

“이블라 말이에요. 같은 여성이니까, 저와 함께 자는 것보다 나을 거예요.”

나는 질색했다.

“이블라랑 손잡고 자란 말이야?”

나는 손까지 흔들어대며 농담 말라는 투로 웃었다. 신뢰할 수 없는 자와 동침할 정도로, 나는 인간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랑 어떻게 그래.”

“저는 아니고요?”

나는 약간 민망해져서 어물거렸다.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 어쨌든 네가 남자인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뒤늦게 생각나서 말을 덧붙였다.

“너는 괜찮아?”

스노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들어와요.”

나는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청결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뜨거운 물로 몸을 풀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씻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나와 다르게 고상한 취향이었다.

나는 그가 욕실에서 몸을 씻는 동안 의자에 앉아 액체 제형의 발정기억제제를 어떻게 하면 고체 제형으로 바꿀 수 있을지 고민했다. 끔찍한 사기가 다시 얼굴을 내민 건 그때쯤이었다.

완연한 밤이 되기까지 아다르가 계속 손을 잡아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기의 존재를 살짝 잊고 있던 참이었다.

[왜…….]

처음엔 스노아가 나를 부른 줄 알았다. 그래서 욕실을 향해 ‘응?’ 하고 대답까지 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으니 아니었다. 마치 구멍이 뚫린 목에서 바람 소리가 빠지듯, 섬뜩하고 원한 서린 목소리였다.

나는 그 환청이 무엇을 발음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들었다.

[왜 우리를 버렸어?]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익숙한 음성이었다. 아마 타도라일 것이다. 강단 있고 힘이 있는 말투. 그녀는 늑대 수인족이었다.

[카카나!]

증오가 불타오르는 음성이 내 이름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듯이 찢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뛰어갔다.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안에 뭉쳐 있던 하얀 김이 시야를 가렸다. 그가 샤워를 하고 있고, 알몸일지 모른다는 걱정은 내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다행히 그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마침 머리를 말리던 중이었는지, 파란 머리 위에 수건을 얹고 있었다.

스노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그를 와락 껴안았다.

습하고 축축한 공기와 따스한 온기, 스노아의 청량한 기운이 가슴께까지 한 번에 퍼졌다. 꺄아아악, 환청이 햇빛을 본 흡혈귀처럼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거렸다.

스노아는 제 허리를 부러트릴 기세로 안고 있는 내 처절한 매달림에서 무언가를 짐작한 모양이었다. 위로하듯 등을 두드려주더니, 어느 순간 나를 품에 안아 올렸다.

“엄마야!”

나도 모르게 꽥 소리 질렀다가 민망해져서 딴소릴 했다.

“히, 힘세네?”

그가 옥구슬이 굴러가는 미성으로, 아하하 웃었다.

“마법을 수련하려면 기초 체력이 있어야 하거든요.”

“웬만한 성인 남성들보다 강한 것 같은데.”

나를 침대에 내려준 스노아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초월자들의 신체는 일반인과 다르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힘까지 세지는 줄은 몰랐어.”

“초월자에 대해 알려진 건 거의 없죠.”

스노아가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물었다.

“무슨 환각을 봤기에 아직도 그렇게 떨어요?”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노아가 머리에 얹어두었던 수건을 잡아끌어 의자에 걸쳐놓았다. 항상 꽁지머리를 하고 있던 파란색 머리카락이 양 뺨으로 커튼처럼 내려와 있는 게 보였다. 몇 올은 하얀 뺨에 붙어 있었다.

그것이 기묘한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우울한 내 얼굴을 살피더니 허리를 숙였다.

“만져 볼래요?”

“응?”

그가 머리를 내밀었다. 곱슬기가 있는지, 머리가 약간 물결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덜 말라서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났다. 넋이 나간 채 그의 뺨으로 손을 내렸다가, 입술을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아름다운 작품을 향유하는 인간 특유의 본능으로.

스노아가 내 손을 잡아 밑으로 내렸다. 날 보는 물빛 눈이 선연했다. 그는 내가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자주 짓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곤란한 얼굴.

“왜 저랑 같이 자려고 하세요? 첼러스랑 아다르가 더 편하지 않나요?”

“스노아는 안심이 되니까.”

“왜요?”

대답이 금방 안 나왔다. 스노아의 청순한 얼굴이 인내심 있게 나를 굽어보았다.

“널 닮은 친구가 있어.”

무심코 말했다. 거의 자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나는 즉시 눈을 내리깔았다. 요즘 들어 입이 내 의지를 떠나 제멋대로 떠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친구였나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나 싶던 스노아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나는 여전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처럼 유약하게 생겼어.”

“제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요?”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거지.”

나는 계속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너랑 걔는 물 같은 느낌이야. 검처럼 딱딱한 첼러스랑은 전혀 다르지.”

“…….”

“상황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애였어.”

스노아도 그랬다.

부드럽게 달래기도 하고, 태도를 180도 바꾸어서 나를 강제로 지키려 하기도 하며, 가장 무서운 모습으로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계략적인 사람.

“그러면 저를 더 못 믿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항상 바뀌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잖아요.”

“그래도 안심이 돼.”

“왜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물은 순수하잖아.”

스노아가 사느랗게 웃었다.

그 웃음이 심해처럼 차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꼭 키스할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스노아의 파란색 머리카락이 잉크처럼 내 이마로 흘러내렸다.

내 손목을 움켜쥔 스노아가, 여전히 청순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하얀 피부 위에 내려앉은 속눈썹이 새파랗다.

“물은 금방 오염되기도 해요, 카카나.”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긴 하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스노아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카카나의 말처럼 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왜?”

“저는 카카나가 좋으니까요.”

스노아가 웃었다.

“미움 받고 싶지 않거든요.”

“…….”

“그러면 그 친구랑은 아직 연락을 하고 있나요?”

나는 그를 흘끗 살피다가, 사기가 짙게 깔린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죽었어.”

오래전의 일이다.

어렸을 적 일인데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친구의 숭고한 죽음 때문이리라.

나는 방 불을 끄고 스노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손을 풀고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

구울 토벌 시간은 오후 1시로 잡혔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지하묘지로 출발했다.

사기는 묘지로 다가갈수록 짙어졌다. 아다르와 손을 잡고 있는데도 오한이 들고 숨이 막혔다. 농도 짙은 사기가 떼거리로 몰려와서 매사에 불만이 많은 한량처럼 머리를 한 대씩 때리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금방 겁에 질렸다. 무서운 걸 원체 못 버티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저게 뭐야.’

가장 큰 원인은 지하묘지의 입구에서 지네같이 기어 나오는 징그러운 보랏빛 안개 때문이었다. 사기였다.

짙어지다 못해 마치 희끄무레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걸 맨눈으로 보고 있자니 뒷골이 선득해졌다.

‘저기로 들어간다고?’

때마침 보초병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으윽, 시체 썩은 내.’

“묘지에 매장된 시체는 몇 구나 됩니까.”

이블라가 물었다.

“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이 말이었다.

우리는 구울처럼 안색이 나쁜 보초병을 지나쳐 지하묘지의 계단으로 내려섰다. 입구를 지나 끝없는 계단을 내려갈수록, 곳곳을 비추는 램프의 불빛이 흐려졌다. 사기가 그만큼 앞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욱…….”

어지럽고 토할 것 같고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사기에 질려 얼음장처럼 싸늘해진 내 팔뚝을 연신 주물러주던 아다르가 걱정하며 허리를 숙였다.

“왜 그래? 속이 안 좋아?”

그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얼굴이 약 오를 정도로 정상이었다. 아무리 사기급 무력을 가졌다지만 그들은 사기에 정녕 생리적 거북함조차 없단 말인가.

‘어떻게 얼굴색 하나 안 변하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블라 또한 안색이 좋지 않았는데, 제2자각 단계인 사람도 이 정도로 짙은 사기는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말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니 할릭이 다가왔다. 그가 훌러덩 윗옷을 벗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의 훌륭한 가슴근육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하얗게 부풀어있는 오래된 흉터가 보였다. 구릿빛 피부에 거칠었을 것이 분명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옷은 왜 벗고 난리야?”

아다르가 내 등을 쓸어주다 말고 질색했다.

“접촉이 사기를 막아준다며. 접촉 부위가 늘어나면 낫지 않을까?”

할릭이 윗옷을 둘둘 말아 허리춤에 대충 꽂아 넣으며 말했다.

“어쩌려고?”

“카카나를 안아보게.”

할릭이 나를 향해 손을 벌렸다.

“카카나, 이리 와.”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 정도로 견디기 힘든 기운이었다.

할릭이 팔을 길게 뻗어 내 허리에 감았다. 꼭 두꺼운 고리 같은 것이 허리에 걸려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힘이 없던 다리가 크게 휘청거렸다. 내가 넘어질 것처럼 보이자 할릭이 얼른 날 안았다. 힘 조절에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눈치였다.

“옷은 왜 벗고 난리야?”

아다르가 불만스럽게 할릭을 쪼아댔다.

“맨살끼리 맞대는 게 제일 좋아요.”

노레스가 끼어들었다.

“옷 두 겹보단 한 겹의 간격이 그나마 낫지 않겠어요?”

아다르는 노레스의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지만, 내게 도움이 된다니 우선 침묵을 택했다. 할릭이 조심스럽게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기분이 어때? 괜찮아?”

기대했던 것과 달리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할릭이 금세 사나워진 눈으로 노레스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효과가 없잖아.”

“사기들이 기세등등해져서 그래요. 유난히 짙잖아요, 여기가.”

노레스가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 다른 방법이 있긴 한데…….”

“뭔데.”

“서로의 타액을 먹는다거나.”

그러자 아다르가 사납게 욕을 지껄이며 노레스의 멱살을 틀어 올렸다. 거의 눈빛으로 죽여 버릴 기세였다. 노레스가 질린 얼굴로 항변했다.

“그냥 하는 소리 아니에요. 진짜 효과가 있다니까요?”

“대체 무슨 원리인 거죠?”

스노아가 관자놀이를 지압하며 물었다. 노레스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몰라요. 우연히 알게 된 거라. 제 추측인데, 사기는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을 피하잖아요? 마나를 감별해서 피하는 거 아닐까요?”

“그래서 타액이나 피가 도움이 된다고 하신 거군요.”

“그래요. 타액이나 피엔 그 사람의 마나가 소량 섞여 있잖아요. 그걸 먹으면 사기가 구별을 못 하는 거죠.”

“그럼 피.”

아다르가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

“피를 먹이자.”

“우욱…….”

더 이상 못 버티겠다.

내가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할릭의 어깨를 탕탕 내려치자, 그가 나를 황급히 바닥에 내려주었다. 우웩, 속을 게워내며 헐떡거렸다. 아침부터 입맛이 없어 끼니를 걸렀더니 멀건 위액만 나왔다.

설상가상 할릭이랑 떨어져서 한기가 심해졌다. 덜덜 떨며 경련을 일으키자, 할릭이 안절부절못했다.

“많이 힘들어? 당장 나갈까?”

대답할 기운도 없어서 계속 헐떡거리기만 했다.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창백하게 질린 채 벽을 짚고 호흡을 골랐다.

“빨리 피를 먹이자.”

아다르가 옆에서 쩔쩔매며 얘기했다.

“그럼 나아진다잖아.”

나는 스노아가 건네준 물로 입 안을 헹구며 고개를 흔들었다.

“피는 안 돼.”

“왜?”

“토해.”

상태가 안 좋은데 피까지 먹었다간 고스란히 게워낼 자신이 있었다. 나는 양 수인족이다. 고기도 누린내 때문에 질색한다. 피를 삼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남는 방법은 하나뿐이란 소리다.

“흐으으…….”

사기가 머리로 들러붙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려서 주저앉으려는 순간, 할릭이 나를 단숨에 안아 올렸다.

“윽, 읍!”

곧장 뜨거운 혀가 안으로 뭉클, 비집고 들어왔다.

“야!”

아다르가 옆에서 기겁을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할릭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내 상태가 나아지는지 두 눈으로 집요하게 살펴보며 그야말로 거침없이 키스했다.

다급해서 그런가, 움직임이 포악하다. 따라가기 너무 벅찼다.

“으, 읏! 흡…….”

나는 숨 쉴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연신 헐떡거렸다. 그의 어깨를 꼭 그러쥐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할릭이 흠칫 몸을 굳히더니 황급히 입술을 뗐다.

“학! 하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타액 범벅인 입술을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주위가 조용해져 있었다. 벌게진 얼굴로 확인하자 용사들이 넋이 빠져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팍 숙인 순간, 놀라운 속도로 몸 상태가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배 속에서부터 따스한 온기가 퍼졌다. 겨울 호수에 빠진 몸을 이끌고 난롯가 근처에 앉은 기분이었다.

뻗쳐오는 할릭의 불기운이 댕댕하게 얼어있는 살결을 녹였다. 나는 웅크리고 있던 어깨에 힘을 뺐다. 그리고 할릭의 굵직한 목덜미에 팔을 두르며 늘어졌다.

“효과 완전 좋다.”

나른하게 중얼거리니, 마른침을 꿀꺽 삼킨 할릭이 그제야 내 등을 소중하게 보듬었다.

“다행이네.”

“미친.”

아다르가 이마를 짚으며 욕을 중얼거렸다.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시뻘게진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에 띄게 좋아진 내 안색을 살피더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시 내려가 볼까?”

할릭이 애써 주의를 돌리며 으쌰, 기합을 넣었다.

“해결하고 있을 테니 한숨 자고 있어.”

할릭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나는 공연히 고개를 저었다. 몸이 나아져도 호흡이 불편한 건 여전했다. 이 상태론 잠에 들 수 없었다. 대기가 전체적으로 꿉꿉하고 눅눅했다. 시체를 뜨거운 가마솥에 넣고 오랫동안 끓인 것 같았다.

우리는 정체된 썩은 물을 헤엄쳐 가듯 사기를 헤치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지하묘지는 길이 모두 똑같이 생겼고 동시에 복잡했다.

그나마 아다르가 이런 길에 익숙했다. 그가 앞장서서 우리를 이끌었다.

세 번째인가, 다시 갈림길을 맞닥뜨렸을 때 멀리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르르르.

구울이 내는 소리였다.

나는 보초병의 말을 떠올렸다. 최근에 죽어 구울이 될 확률이 높은 시체는 D열 복도, D1부터 D10에 이르는 열 개의 방에 쌓여있다고 했다. 아다르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게 아니라면 이 근처가 구울의 발생지였다.

‘저건가?’

모서리를 돌자 자욱하게 깔려 있는 보라색 안개 너머로 시계추처럼 천천히 흔들리는 인영이 보였다. 멀리서 보는데도 치아와 손톱발톱이 범상치 않게 길었다.

할릭이 아다르에게 잭나이프를 빌렸다. 그리고 날카롭게 선 은색 날로 제 손목을 가볍게 그었다. 나는 얘가 지금 뭘 하는 건가 잠시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알아서 오겠지.”

심지어 그는 손을 털어서 핏방울을 멀리 튀겨내기까지 했다.

“설렁설렁 하자고.”

반응은 바로 왔다.

물살에 쓸려가는 시체들처럼 휘청거리며 서 있던 구울들이, 갑자기 가래가 들끓는 소리를 내며 우리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계속 보고 있기엔 내 담력이 좋지 않았으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스르릉.

첼러스가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시장에서 대충 사 왔다던 롱소드였다. 싸구려임이 분명한데도 첼러스가 다루자 마치 명검처럼 좋은 소리가 났다.

구울의 그르렁거림이 근처까지 접근했다.

키이이익!

할릭이 왼손을 휘둘렀다. 단단한 주먹이 무언가를 짓뭉개는 것이 나한테까지 전해졌다. 꽝, 하고 귀를 후려치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눈으로 보진 않았지만 구울의 머리뼈를 완전히 박살낸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떴다. 첼러스가 앞장서 있었다. 그가 칼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구울들이 반 토막으로 잘려나갔다. 첼러스의 손에 들린 게 도끼고 구울들이 나무가 아닌데도 말이다.

“슬슬 구울들 유인해서 C-5번 광장으로 가요.”

스노아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사람처럼 평화롭게 지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거기서 마법으로 한 번에 태워버리죠.”

“그래. 수가 많아서 일일이 갈아버리는 것도 일이다.”

할릭이 맞장구쳤다.

‘근데 너희 힘 안 숨겨도 되는 거니?’

노레스와 이블라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용사들을 보고 있었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들을 의식하고 있는 건 나뿐인 듯했다.

노레스가 입 밖으로 흐르기 직전인 침을 옷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꼭 대륙에 단 한 명뿐이었다던 소드마스터 같네요.”

동의를 구하듯 우렁찬 목소리였다. 첼러스와 할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레 놀라서 흠칫한 사람은 나였다. 뒤늦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노레스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고개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반대편으로 돌렸다.

‘사고는 용사들이 치는데 왜 고통은 내가 받는 거야.’

다시 눈만 굴려 노레스를 바라보았다. 관심이 떨어진 건지 그는 첼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구울을 우르르 몰아서 C-5번 광장에 몰아넣은 뒤, 불 계열의 마법스크롤을 찢어 사태를 말끔하게 일단락 지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불 계열의 마법으로 쓸어버리면 좋았겠지만, 그러면 마나의 흔적이 남을 위험이 있단다. 아무튼 제국이 문제였다.

이제 남은 것은 근원 구울, 저주를 받아 변한 최초의 구울 하나뿐이었다.

“이놈은 왜 살려두라고 한 거야?”

아다르가 구울의 사지를 포박하며 물었다.

“해볼 게 있어서.”

나는 할릭의 품에서 내려와 구울의 입에 약을 몇 방울 떨어트렸다. 구울이 염산이라도 맞은 양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형체가 꿀렁꿀렁 뒤틀리다가, 길었던 손톱이 도로 줄어들며 본래의 시체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블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미간을 좁힌 노레스가 분홍색 눈으로 날 의미심장하게 응시했다. 둘 다 놀란 반응이었다.

‘놀랄 것까진 없는 것 같은데.’

“효과가 있네.”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며 증상을 메모한 뒤 가방에서 약병을 또 하나 꺼냈다. 바닥에 깔린 갈색 잔여물들이 모두 섞이도록 흔든 다음, 시체의 입에 두 방울 떨어트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체의 가슴팍이 불현듯 부풀어 오르며 숨을 쉬기 시작했다.

문득 공기가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평소라면 아무리 눈치를 밥 말아 먹은 나여도 주위의 상황을 살폈을 텐데, 이번엔 나도 놀라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진짜 살아나네?”

시험 삼아 만들어봤는데 먹힐 줄은 몰랐다. 4년 전, 죽음의 숲에서 발견한 복사꽃의 성분을 마법사가 만든 마법 포션과 섞어 만든 약이었다. 이름 하여 소생약.

복사꽃은 다른 식물로 모습을 바꾸며 성체로 자라는 특이한 녀석이었다. 온 책을 뒤져도 정보가 없기에, 내가 최초의 발견자인 것 같아 복사꽃이라고 이름도 붙여주었다. 몬스터로 치면 도플갱어 같은 놈이었다.

복사꽃의 복사해낼 수 있는 능력을 회복 포션과 배합하여, 죽은 조직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든 엉성한 약이었다.

‘그런데 효험이 있네. 한번 해본 건데…….’

나는 감탄하며 시체의 숨이 꺼지기 전에 얼른 질문했다.

“이름이 뭐야?”

“칼……리스…….”

시체가 악취를 풍기며 답했다.

“칼리스. 너에게 저주 마법을 쓴 사람이 누구니?”

“그, 어…… 어어…….”

너무 복잡한가.

“저주 마법.”

간단하게 줄여 물었다.

“바, 드…….”

“바드? 그게 범인이야?”

그러나 더 알아내기 전에 시체의 숨이 꺼져버리고 말았다. 호흡을 다섯 번도 못 한 것 같은데 지속시간이 너무 짧았다.

“에이.”

아쉽게 탄식하며 종이에 글자를 끄적였다.

쓸모없음.

“완성품이 아니어서 그런가 봐. 시간이 일주일밖에 없어서 대충 만들었더니 영 기대에 못 미치네. 그래도 효험이 있었다는 거에 의미를 둬야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하나는 건졌다. 바드. 사람 이름이겠지? 한번 알아볼……. 꽥!”

싱글거리며 말을 잇는데 돌연 할릭이 내 허리를 낚아챘다. 굉장한 힘으로 끌려가서 순간 배가 터지는 줄 알았다. 목 졸린 소리를 내며 끌려간 동시에 노레스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내가 있던 자리였다.

***

‘이럴 수가.’

영생과 부활.

인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영원한 주제, 죽음.

죽은 자를 살리고자 했던 시도는 수많은 금서와 피의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악질적인 인체실험을 수없이 반복하고도 손에 넣지 못했던 절대적인 신의 영역이 죽음이다. 그건 여태껏 쌓인 수천 년 피의 역사가 반증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기적이 벌어졌다.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한 존재에 의해서.

시간이 ‘고작 일주일밖에’ 없어 제대로 된 약을 만들지 못했다고 말하는, 자신의 힘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한 사람의 손에서 벌어진 기적이었다. 이게 대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노레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구울을 시체로 되돌리기까지 했다.

그녀가 사용했던 정체불명의 약만 있다면 기존의 복잡하기 그지없는 구울 토벌 방식은 사라져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만큼 희대의 발명이었다. 잘만 응용한다면 그 사용처가 무궁무진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조차 감흥이 없었다. 반응도 고작해야 ‘효과가 있네?’였을 뿐이다. 한번 만들어봤는데 의외로 작용했다는 듯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일주일 사이에 만든 약으로 아무렇지 않게 구울을 시체로 되돌리고 숨을 불어넣고 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여자가, 제국 안에 존재한다는 걸 누군가 알게 된다면…….

노레스는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신이 하사한 자신의 재능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 웃음이었다.

용병 노레스는 그녀의 약을 두 개 구경한 것만으로, 저 재능이 얼마나 많은 사건들을 불러들일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작은 몸에 세상의 모든 악질적인 의지가 들러붙는 듯한 환영이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의 말갛게 웃는 얼굴이 곧 바스러질 만큼 위태로워 보여서, 노레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보호해야 할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의 동료라고 불리는, 저 남자들로부터도.

그러나 노레스의 손이 그녀의 몸에 채 닿기도 전에, 어떤 무시무시한 기백이 노레스를 밀어내며 그녀를 품에 가뒀다. 노레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동료였던 다섯 명의 남자가 순식간에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이 수적으로 무조건 유리한 상황인데도 여유가 없는 움직이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흘러넘치는 신의 권능을.

***

“으앗, 왓!”

깜짝 놀라서 할릭의 팔을 움켜쥐었다. 강하게 당겨진 바람에 배와 갈비뼈가 싸르르 아팠다.

‘부, 부러진 거 아니야?’

할릭이 잠깐 거칠게 했을 뿐인데 숨쉬기도 힘들었다. 갈비뼈는 의외로 잘 부러지는 부위여서 계단만 굴러도 골절되기 쉬웠다. 황급히 더듬어보았으나 다행히 골절은 아닌 것 같았다.

눈을 찡그리고 발을 동동거리니 할릭이 느린 숨을 토하며 힘을 풀었다. 그제야 두 다리가 땅에 닿았다.

“으…….”

허리를 웅크리자 할릭이 내 머리에 뺨을 비볐다. 미안, 하고 귓가에 떨어지는 목소리가 절절하게 잠겨 있었다. 날 껴안은 거대한 몸으로부터 얕은 떨림이 느껴졌다.

“할릭? 왜 그래?”

기미가 심상치 않아서 성질내려던 것마저 잊고 할릭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손바닥을 찌르는 짧은 황토색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구울을 잡을 때까지만 해도 보송했던 머리카락이 땀으로 조금 젖어 있었다.

끈끈한 게 꼭 식은땀 같아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 어깨에 고개를 박은 할릭의 이마가 언뜻 촉촉해 보였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너를 다시…… 잃는 줄…….”

뭐라 중얼거리던 할릭이 말끝을 흐렸다. 소리가 입 안에서만 웅웅대니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왜 그러냐고 되물으려는데, 그가 나를 제대로 고쳐 안았다. 그리고 노레스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응시한 채 뒤로 물러섰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삼키며 용사와 노레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살폈다. 용사들이 뿜어내는 극도의 경계심 때문에 피부가 감전된 것처럼 저릿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할까.”

들끓는 목소리가 할릭의 배 속에서부터 그르릉거리며 나왔다. 어깨를 감싼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구울 토벌은 끝났고, 아까까지만 해도 평소와 같았다. 용사들과 노레스의 사이가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공기를 찢어발기는, 이 흉포한 기 싸움은 갑자기 왜 시작되었단 말인가?

“이곳에서 처리하는 게 좋겠군요.”

스노아가 냉정한 음성을 씹어 뱉었다. 감정이 빠져나간 얼굴이 무표정했다.

“싸움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는데.”

노레스가 위기감으로 어그러진 입을 하며 검을 뽑았다. 등에 매달려있던 거대한 장검, 바스타드소드였다. 어지간히 좋은 칼인지 램프의 불빛을 반사하는 검날이 반지르르했다.

이블라 또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의 불 같은 시선이 내 얼굴을 훑다가 떨어졌다.

“범상치 않은 녀석이겠거니 했지만,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군.”

그러더니 짧게 감상평을 남겼다.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나한테 한 소리야?’

얼빵하게 질문이나 할 때가 아닌 건 알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너희 갑자기 왜 싸우는 거야?”

노레스가 돌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웃었다.

“여태 자각이 없다니, 그녀를 독차지할 셈인 거냐, 너희?”

이건 또 무슨 소리고?

“동료인 건 맞아?”

“그건 뭐 하러 묻나.”

아르모어가 천천히 손을 뻗으며 말했다.

“어차피 듣지 못할 대답일진대.”

아르모어의 손끝에서 전기 같은 마법이 생성되는 동시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나’를 두고 벌어지는 전투인 건 확실해 보였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었다.

“으아, 아얏.”

노레스가 할릭에게 곧장 달려드는 바람에, 할릭이 날 던지듯이 첼러스에게 넘겼다. 근육 없이 물렁물렁한 몸이 돌 같은 몸에 부딪혔으니 당연히 깨지는 건 내 쪽이었다. 살이 욱신거려서 몸을 콩벌레처럼 웅크렸다.

그 와중에 지하묘지의 벽 한 군데가 붕괴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다 같이 깔려 죽는 건 아니겠지?’

날벼락이 따로 없다.

“많이 아프십니까?”

첼러스가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쓸며 묻다가, 황급히 고쳐 안고 자리를 벗어났다. 노레스의 올가미 같은 손이 내 양갈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끄악! 갑자기 왜 이러냐고, 진짜!”

‘단체로 약이라도 한 거야, 뭐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첼러스가 황급히 로브의 모자로 내 머리를 감싸듯 짓눌렀다. C-5번 광장을 벗어나기 위해 출구로 달음박질치자, 쾅! 하고 한 차례 굉음이 울렸다.

빙글빙글 날아온 노레스의 바스타드소드가 경고하듯 출구 바닥에 꽂힌 것이다.

첼러스가 걸음을 늦추며 뒤를 돌았다. 노레스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야, 장난 아니네. 1분은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5초도 못 버티잖아?”

노레스가 두 손을 들고 있었다. 얼굴이 드래곤이라도 본 양 사색이 되어 있었다.

“생각할수록 정체가 궁금해지는 양반들이구만.”

제압당한 건 이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노레스와 달리 침착한 구석이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다르가 잭나이프로 노레스의 목을 긁었다.

“그래. 한참은 이르지, 애송아.”

자조하듯 웃어버린 노레스가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스노아가 바로 마법을 시전하려는 순간.

“기로그!”

“허억!”

노레스가 소리 질렀고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용사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제일 빠르게 알아챈 사람은 아다르였다. 내가 채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리고 있자 아다르가 대신 스노아를 막았다.

“기다려 봐.”

감격으로 말문이 막힌 목구멍에 생침을 쑤셔 넣으며 어떻게든 음성을 뽑아내려고 애썼다.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뛰고 있었다. 입 밖으로 흐르려는 침을 소매로 닦으면서, 귀를 의심하게 만든 이름을 조심히 입에 올렸다.

“기, 기기, 기로그? 방금 기로그라고 했어?”

“그래요, 아가씨. 약초 하면 사족을 못 쓴다는 소식을 주워들어서 말이죠. 역시 챙겨두길 잘했네요.”

“어떻게?”

과도한 흥분 때문에 말이 지나치게 함축되어 나갔다. 다행히 노레스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리자드맨의 토벌전에서 들은 게 있거든요. 약초 캐려고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었다면서요?”

“그, 그건 어떻게?”

“목격한 용병이 아주 진저리를 치면서 얘기해주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싶어 사놨죠. 어엄청 비싸긴 했지만.”

기로그라면 적어도 집 한 채 값은 들어갔을 것이다. 만년설이 있는 북부지방의 높은 산 절벽에서나 피는 녀석이었다. 발견하기도, 따기도 쉽지 않았다. 돈이야 나도 없는 편은 아니지만, 그동안 매물이 없어서 사질 못했다. 그는 용병이었으니 내가 모르는 루트로 구매했을 수도 있었다.

가슴이 설렘으로 부풀었다. 내 떨리는 눈을 본 노레스가 비죽 웃었다. 과거의 자신을 향한 승리의 미소였다.

좋아 죽겠는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나와 달리, 할릭이 살의가 펄펄 날리는 금수의 눈으로 노레스를 노려보았다.

“목적이 뭐지?”

“일단 내 말을 좀 들어주겠어?”

“후우…….”

할릭이 성질머리를 짓누르듯 느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진정한 줄 알았다.

콰앙!

무지막지한 주먹이 노레스가 등을 기대고 있는 벽을 쳤다. 마치 철공이 부딪힌 것 같은 소리가 났다. C-5번 광장 전체가 아파 몸서리를 치듯 진동했다.

우르르 떨린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졌고, 그의 무식한 주먹을 견디기 버거웠던 벽은 움푹 패어 버렸다. 이러다 구울의 시체와 함께 지하묘지에 매장되는 건 먼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더 들을 가치도 없는 것 같은데.”

아다르가 질 나쁜 악당처럼 노레스의 뺨을 검날로 툭툭 치며 말했다. 공포 소설에 등장하는 사상 최악의 범죄자 보스 같은 모양새였다.

“불온한 싹은 여기서 잘라버리면 그만이야.”

“그건 안 돼!”

나는 두 손을 꽉 맞잡고 소리 질렀다.

“이, 이야기라도 들어보자. 무, 무슨 생각이신지 말이야.”

절대 약초 기로그를 영접하고자 하는 사심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었다. 억울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나쁜 의도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안 하고 즉살처분이라니.

‘애초에 왜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고…….’

그런 건 두고 볼 수 없다.

용사들과 내가 정말 동료라면, 동료로서 그들이 나쁜 길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도 내게 있었다. 비루하게 중얼대며 눈치를 살피자, 노레스가 여봐란 듯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아가씨는 말이 통하는구만!”

나와 노레스를 번갈아 쳐다보던 아다르가 불만스럽게 얼굴을 움찔댔다. 나는 간절하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아다르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그래, 들어나 보자.”

반쯤 체념한 목소리였다.

“아누비르 소속의 용병이면 이미 소문이 쫙 돌았을 텐데, 실력도 있는 놈이 왜 승산도 없는 싸움을 시작했는지.”

“내 요구는 간단해.”

노레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답했다.

“당신들, 그러니까 여기 있는 다섯 명의 남자들이 환영마법을 잠깐 푸는 거지.”

‘환영마법을 쓰고 있다는 걸 안다고?’

어떻게? 생각하기 무섭게 스노아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상하네요. 분명 눈치챌 수 없도록 만들었는데 말이에요.”

그의 청순한 물빛 눈을 바라본 노레스가 질린 얼굴을 했다.

“이블라가 말해줬어.”

노레스가 검지로 할릭을 가리켰다.

“저, ‘할리프’라는 사람이 아누비르 베샤 지부에 왔을 땐 저런 외양이 아니었다고. 눈이 아주 밝은 주황색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봐도 갈색이잖아.”

할릭이 픽 웃으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기로그라는 약초 하나 가지고 뻗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럼 이건 어때. 할리프, 당신만이라도 환영마법을 없애는 거지.”

“왜 하필 난데?”

노레스가 침묵하다, 나직하게 말했다.

“가장 용병 같으니까.”

의문점이 많은 대답이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인내심도 바닥을 쳐버렸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손에 쥘 수 있는 약초가 코앞에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다.

아까는 경황이 없는 나머지 이성적인 판단이 잠깐 흐려졌지만, 이렇게 애를 태운다면 말이 달랐다. 나는 약초에 한해서 기다리는 법 따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백제 먹이자.”

이러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깨끗하게 알아낼 수 있다. 나는 어서 기로그를 손에 넣고 싶은 탐욕스러운 욕구를 애써 포장하며 말했다.

“그러면 시간 낭비할 필요 없잖아.”

“당신 자백제도 만들어요?”

노레스가 더 놀라기도 힘들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내가 어설프게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

이블라가 마침내 끼어들었다.

“그냥 말해. 어차피 자백제 먹고 다 불게 생겼구만.”

노레스는 도망칠 곳도, 시간을 벌 수단도 없었다. 혀를 끌끌 차며 자백제를 꺼내는 순간, 노레스가 발악하듯 입술을 뗐다.

“최초의 용병왕을 찾고 있어요!”

거기에 이블라가 한마디 얹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진실임을 알고 있는 나는 크게 놀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자백제를 떨어트렸을 정도였다.

유리병이 떨어지자, 챙강 하고 깨지는 소리가 생경하게 울렸다. 석고상처럼 굳어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유일하게 여유로운 아르모어가 운을 떼었다.

“이상한 일이로군. 죽은 자는 왜 찾지.”

노레스의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가 사나운 눈으로 아르모어를 노려보았다.

“죽었을 리가 없어. 맨손으로도 크라켄을 때려잡는 사람이라 그랬어.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릭이 갑자기 혼란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왜요?”

노레스가 초조하게 마른입술을 핥았다.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

“그러고 보니, 너. 가면은 왜 쓰고 있는 거지? 이제 와 화상이니 뭐니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똑바로 말해.”

픽 웃은 노레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얼굴이 팔린 사람이어서요. 여러분들이 현 용병왕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으면, 진작 가면을 벗고 왔을 텐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노레스가 가면을 벗었다.

“헉!”

가면에 숨겨져 있던 얼굴이 드러나자 할릭이 헛숨을 들이켰다. 노레스의 손에 들려 있던 우스꽝스러운 무도회 가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할릭이 가면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노레스의 얼굴 곳곳을 뜯어봤다.

“케, 케디프? 너 설마 노이레스 케디프냐?”

그의 경악한 소리를 들은 노레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을 알아요?”

“너, 그걸 말이라고……!”

노레스가 돌연 할릭의 손을 잡았다. 접촉을 하면 스노아의 환영마법이 풀린다.

그러나 할릭은 피하지 않았다. 얼이 나간 얼굴로 노레스의 이목구비를 뜯어볼 뿐이었다. 노레스가 할릭의 외양을 눈에 똑똑히 주워 담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당신, 노이트라 케디프의 친구 맞죠? 전설 속 그 영웅.”

할릭이 덜덜 떨리는 눈을 힘겹게 깜박거렸다.

***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내 주먹만 했던 노이레스가 아들을 낳았다니!”

할릭이 으하하,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나는 지독하기로 소문난 독주를 들이켜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할릭과 노레스가 인사불성이 되어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어느새 호칭도 정리한 모양인지, 노레스가 형이라면서 할릭을 혈육처럼 따르고 있었다.

‘기로그도 손에 넣었겠다, 저들끼리 지지든 볶든 이제 상관없긴 하지만…….’

죽이려고 했던 던 언제고 보기 남사스러울 정도로 부비고 있으니 황당했다. 이제 와 적당히 하라고 말리기엔 둘 다 너무 취한 상태라, 그냥 내가 고개를 돌리기로 했다. 옆자리에 앉은 이블라도 진작 만취해 헤드뱅잉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건 것이 영 위태로워 보였다.

만취한 사람이 다 그렇듯이 불시에 토라도 할까 봐 은근슬쩍 물러서는데, 이블라가 갑자기 다가와 뺨을 잡아챘다.

“으, 응?”

이블라는 노레스의 소꿉친구였다. 이미 사정을 다 아는지라 그녀에게도 본래 모습을 보였더니, 그 후로 이상토록 내게 달라붙으려 했다. 테이블에 앉을 때도 옆자리에 앉고, 지금도 보라. 붕어 수준으로 찌그러진 내 얼굴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너.”

이블라가 낮은 음성으로 불렀다.

“응?”

“귀여워…….”

“……응?”

“귀엽게 생겼어…….”

‘완전히 정신을 놓으셨군.’

나는 술주정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경쓰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지금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잠깐 이것 좀 놓고…….”

그런데 힘이 어찌나 센지 밀리지도 않는다.

“하는 짓도 귀엽고, 생긴 것도 귀엽고, 다 귀여워…….”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얼굴을 헤벌쭉하게 푼 이블라가 솜 인형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언굴이 이블라의 가슴에 파묻혀서 숨이 안 쉬어졌다. 설상가상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한다. 이러다 그지 같은 곱슬머리가 보풀처럼 일어날 것 같아 바동거렸다.

“이블라, 진정하고 이것 좀…….”

“많이 취했네.”

그때, 이블라를 거의 거머리 떼어내듯이 뜯어낸 아다르가 능청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를 막으려던 이블라가 힘에서 밀리자 눈에 띄게 토라지며 푸르르, 한숨을 쉬었다.

‘목이 탄다, 목이 타.’

나는 잔에 남아있던 독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이런 혼돈의 술자리 따위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머리가 엉망이 됐네.”

아다르가 악동처럼 웃었다. 불길함을 느끼고 도망치려는 순간, 그가 귀신같이 알아채고 뒤통수를 움켜잡았다.

“그러면 더 엉망으로 만들어야지!”

“아악! 야!”

그가 내 뒤통수를 마구 문지르며 행복하게 웃었다. 이놈도 영 정상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미친놈아!”

내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사악하게 낄낄거린 아다르가 이젠 내 머리를 바짝 당겼다. 이마가 그의 가슴팍에 꽁, 부딪혔다. 엎어질까 두려워 급한 대로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아다르의 두꺼운 다리 근육을 꼬집듯이 움켜쥐며 음산하게 경고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싫은데? 이렇게 재밌는 걸 왜?”

그가 행복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내 머리에 뺨을 비볐다. 이블라의 흔적을 지워내듯이.

술에 강한 사람은 이게 문제다. 다들 제정신이 아닌데 홀로 멀쩡해서 온갖 고통을 받는다.

이놈을 어떻게 조질까 고민하는 와중, 머리카락이 속수무책으로 엉키는 게 느껴졌다. 술 취한 사람에게 화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이 없지만 결국 이마에 핏대가 섰다.

“미친 새끼야!”

그의 중요한 부위로 손을 뻗었다. 지금이라면 뜯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헉!”

아다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중요한 부위 근처까지 도달한 내 손을 도로 허벅지에 찍어 눌렀다.

“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냐?”

“아니긴 뭐가? 정신 차리게 하려면 이게 빠르지. 봐. 술 다 깼지?”

화가 잔뜩 나서 으름장을 놓자, 아다르가 정색할 땐 언제고 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웃음은 내 이성에 꽂혀 있던 안전핀을 기어코 뽑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머리통을 있는 힘껏 그의 턱에 박아버렸다. 웃느라 정신이 없던 아다르가 고스란히 당했다. 아다르가 컥컥거리길래 더 아프라고 등짝을 두드려 팼다. 그의 발까지 밟아 준 후에야 성질이 좀 풀려서 콧김을 뿜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다르가 죽어가는 소릴 냈다.

“진짜 가차 없네…….”

“더 패줄까?”

“아니.”

더 때릴까 두려웠는지 아다르가 내 주먹을 잡고 밑으로 쑥 내렸다. 온 힘을 다해 버텨보지만 힘 차이가 압도적이다. 우라질 놈.

“미안, 미안해.”

가자미눈으로 그를 흘겨보며 손을 털었다. 열 받으니 술이 더 마시고 싶어졌다.

“네 반응이 재밌어서 그래.”

아다르가 검고 진한 눈매를 야릇하게 휘어 웃으며 말했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이 불현듯 농밀하게 느껴진다.

옆구리가 오싹한 느낌이어서 머리카락을 뺏어 품에 안았다. 그가 키득거리며 제 입술을 삭 핥았다. 시선이 내게 똑바로 고정되어 있으니 저 붉은 혀가 꼭 내 얼굴을 핥는 것 같다.

“귀엽잖아. 괴롭혀서 울리고 싶을 만큼.”

아다르가 중얼거린 동시에 하얀 손이 그의 머리통을 콱 틀어쥐었다. 귀를 의심하던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첼러스다.

“아다르, 방금 소리 내서 말했습니다.”

아다르의 회색 머리칼을 파고든 손에 푸른 핏줄이 돋아 있다. 아다르가 명랑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질질 끌려갔다.

“아, 내가 소리 내서 말했어? 진짜 취했나 보네.”

“예, 그런 것 같군요.”

“조심할 테니까 머리 놔주면 안 될까, 첼러스?”

“…….”

“지금 내 머리 부서지고 있는 것 같은데. 진짜 부서지고 있는데.”

첼러스의 손이 그제야 물러났다.

“위험했다.”

휴우, 안도하며 머리를 매만지던 아다르가 문득 연거푸 들이켜는 날 살폈다.

“술 잘 마시네. 할릭이랑 비등한 것 같은데.”

“비등?”

나는 픽, 콧방귀를 뀌었다.

“취해서 노레스한테 들러붙고 있는 저 모습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비등한 게 아니라 내가 월등히 더 잘 마시는 거야.”

아다르가 웃느라 정신이 없는 할릭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할릭 옆에 나뒹구는 저 오크통이 다 누구 입으로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해? 저 정도면 비등한 거지.”

나는 무념무상의 상태로 열심히 땅콩을 씹었다.

“정말 무식하게도 마시네요.”

스노아가 한심하단 얼굴로 달콤한 맛이 나는 과일주스를 마셨다. 첼러스 또한 정신이 흐려지는 기분이 불쾌하다며 술은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이 중에서 이블라 다음으로 취한 사람이 할릭이었다. 그는 여전히 행복한 회상에 잠겨서 연신 떠들어댔다.

“노이레스랑 똑같이 생겨서 놀랐어. 설마 이름까지 비슷하게 지었을 줄이야! 노이레스의 아들 노레스라니!”

그가 큰 소리로 말하는 동안 결국 이블라가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정신을 잃었다. 노레스가 따라주는 술을 족족 받아 마시더니 결국 저렇게 된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니까, 노레스가 네 친한 친구 아들의 아들이다?”

내가 말해 놓고도 이게 뭔 막장인가 싶다.

‘생긴 건 둘 다 젊은 청년처럼 보이는데. 초월자가 아무리 억겁의 세월을 산다지만…….’

나는 얼굴을 구기며 입맛을 다셨다. 왠지 입안이 썼다.

“그래. 나이 사십을 넘어서 가진 애였어. 어찌나 쪼그마했는지, 포대기에 싸인 모습이 영락없는 조약돌이었는데. 근데 걔가 다 커서, 노레스를 낳았다는 거 아니야? 기가 막히네!”

‘조약돌이요?’

나는 할릭의 솥뚜껑만 한 손을 바라보았다.

“그 아들이 용병왕의 자릴 꿰찰 정도로 강해져서 수명이 길어졌다 이거지! 정말 살고 볼 일이야, 생각도 못 했어! 마나도 제3자각 단계라잖아!”

할릭이 노레스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노레스의 입꼬리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든 말든 아다르는 냉한 반응이었다.

“근데 할릭은 왜 찾고 있었던 거야?”

“아버지가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할아버지의 유언이었대요.”

나는 또 헷갈려서 생각을 정리했다.

‘노이트라가 나이 40에 낳은 늦둥이 아들이 노이레스. 그리고 노이레스의 아들이 용병왕 노레스.’

거참,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러고 보니 노이레스는? 설마 살아있나?”

할릭이 희미한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 묻자, 노레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4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도 마나 제2자각자셔서 150세까지는 사셨는데, 그 이상은 무리였나 봐요.”

“그러냐…….”

아다르가 술을 들이켜는 할릭을 흘끗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우리가 방심했어. 이토스 피니아스가 괜히 아누비르의 길드장이 아니란 소리지.”

그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노레스랑 만날 수 있도록 은밀하게 만남을 주선한 꼴이잖아. 능구렁이 같은 영감.”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우리는 노레스가 신화급 용병패의 주인을 찾는 현 용병왕일 줄 꿈에도 몰랐다.

“생각해볼 것이 많아요. 노레스,”

줄곧 생각에 잠겨있던 스노아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물었다.

“아버님의 기억에 이상이 생기셨다고 했는데, 용사들과 관련이 있다는 건 무슨 뜻이죠?”

노레스가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굳은 얼굴을 했다.

“아버지는 원래 할릭, 그러니까 용병왕의 외양을 분명히 기억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억이 안 난다고 하시더라고요. 꼭 지워진 것처럼요.”

“노이레스가 날 본 게 10살 때쯤이었을 텐데, 당연히 까먹었겠지.”

할릭이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대꾸했다. 노레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기엔 할아버지도 똑같은 증상을 겪으셨어요.”

“노이트라가?”

그건 좀 이상했다. 노이트라는 할릭의 오랜 친구기 때문이다.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네. 이상하게 여긴 할아버지께서 용사들의 기록을 찾아보았는데 전부 타버리거나 지워져 있었다고 하더군요.”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노레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용사들이 실종되고 10년 후까지의 기록만 싹 사라졌대요. 그 이후의 기록들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이 없으니 용사들의 정보가 두루뭉술해졌죠.”

“말만 들어선 존재마법을 건든 것처럼 보이는데요.”

스노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슨 수로 그랬을까요? 존재마법은 금기된 고대의 마법이에요.”

“고대의 마법이요?”

노레스가 놀라서 되물었다. 스노아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제국이 우리의 흔적을 지우는 데 애를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마법을 사용했을 줄은…….”

“대단한 마법인가요?”

“드래곤이 아니고서야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기록은 그렇다 치고, 구체적으로 어떤 기억이 없어졌다는 거죠?”

“할아버지의 기억 중에서요?”

“네.”

노레스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용사들이 자기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를 제외한 모든 기억이요. 이름, 얼굴, 전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건가요? 내게 무척 소중한 친구이자 용사가 있었는데, 누구인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맞아요. 그래서 음모에 당했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할릭이 나직하게 신음했다. 빈 술병으로 손장난을 치던 아다르가 비딱하게 말을 받았다.

“어쩐지. 우리 얼굴을 현상수배지에 그려서 세상 곳곳에 뿌려놨는데 이상할 정도로 잠잠하다 싶었어.”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잠잠한 게 어때서? 아주 오래전 일이잖아.”

“내가 이끌던 조직인 여명도 수명이 길어진 녀석들이 제법 있었거든. 제국이 살려뒀을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나는 용사들의 안색을 흘끗 살피다가 나무 접시에 담긴 땅콩을 이리저리 굴리며 물었다.

“그래서 너흰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황제를 죽일 거야? 너희는 그럴 수 있잖아.”

“그러고 싶지만,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 피해를 입는 건 죄 없는 백성들이야.”

아다르가 내놓은 대답이 너무 용사다워서,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정작 영웅이라 할 만한 대답을 내놓은 아다르는 별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제국을 틀어쥐고 있는 인물들이 갑자기 여럿 죽게 되면 높은 확률로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강국에게 이만한 기회는 또 없으니까요.”

스노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식민지배를 받는 속국들도 고된 착취와 차별로 불만이 한계까지 쌓여있는 상태예요.”

“결국 피해를 보는 건 백성들이란 소리야. 귀족들이 나서서 전쟁에 참여할 것 같아?”

아다르가 픽 웃었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더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어. 우리가 하는 행동은 그만큼의 책임과 대가가 따르니까.”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섣불리 움직이기엔 의뭉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제국이 무슨 수로 존재마법을 사용했는지, 차원전쟁이 끝나자마자 어떻게 다른 나라들을 빠르게 집어삼킬 수 있었는지,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는데도 제국이 가진 무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수상하긴 했다. 나는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힘만 믿고 달려들었다간 역으로 당할 테니까요. 그런 바보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군요.”

머리가 아프다. 복잡한 주제임은 분명하지만, 용사들이 힘을 되찾은 이상 너무 걱정할 필요 또한 없었다. 어차피 은신처를 찾으면 용사들과 떨어져 지내게 될 테니 이쯤에서 대강 흘려듣기로 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술을 홀짝이자 내 상태를 살피던 첼러스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래서 카카나가 처음 했던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저희는 무기를 찾으러 가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기?”

“예. 스노아와 저, 아르모어, 그리고 할릭은 본래 사용하던 무기가 있었습니다.”

“할릭도?”

“네, 건틀릿이 있습니다.”

첼러스가 스노아를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가장 빨리 찾아야 하는 건 스노아의 스태프입니다. 그의 스태프는 마나의 흔적을 지울 수 있어 최상급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제국의 추적을 피할 수 있습니다.”

아예 엎드려 자고 있는 이블라의 몸에 담요를 둘러주던 노레스가 멀거니 고개를 들었다.

“혹시 그 스태프 이름이 씨스아이인가요?”

스노아가 눈을 크게 뜨며 노레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시죠?”

“워낙 유명한 스태프잖아요. 들은 기억이 있어요.”

스노아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결연한 얼굴에서 스태프를 향한 의지가 느껴져서, 나도 덩달아 노레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원전쟁이 끝나고 어떤 현자가 제국으로부터 하사받았다고 들었는데…….”

노레스가 먼 과거의 기억을 더듬듯 시선을 위로 올리며 한참을 생각했다.

“아, 기억났어요. 물의 현자 아레사 나이제르요.”

스노아의 물빛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나 기쁨이 묻어나올 것 같던 얼굴은 곧 식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의아해져서 눈을 깜박였다. 스노아의 냉정한 표정이 흐릿하게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세히 알고 있네?”

할릭이 묻자 노레스가 히히 웃었다.

“최근 그럴 만한 일이 터졌거든요! 글쎄 아레사 나이제르가 학교에 연구하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서 공표를 했지 뭐예요?”

“연구?”

“듣자하니 학교 지하에 뭔가 대단한 게 있다는 것 같더라고요.”

노레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 행선지는 절대 밝히지 않는 양반인데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실력 있다는 마법사들이 모두 발칵 뒤집혀서 한동안 엄청 시끄러웠어요.”

나는 방울토마토를 오물오물 씹으며 물었다.

“무슨 학교인데요?”

“사립학교 뮤나스요.”

노레스가 활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마침 입학 시즌이네요.”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갑자기 등허리가 싸해졌다.

나는 불길함을 느끼고 마시던 독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노레스가 기어코 우려하던 폭탄을 터트리며 해맑게 웃었다.

“여러분들 외모도 어려 보이겠다, 한번 지원해보는 게 어때요?”

‘뭔 개소리야?’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내가 질겁한 것을 꿈에도 모르는 노레스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의 입술을 주먹으로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뮤나스는 실력파만 취급하는 특이한 방침을 가지고 있어서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거든요. 귀족들도 뮤나스 출신은 은근 대우해주고요.”

“흠…….”

꽤 솔깃한 이야기인 듯, 스노아가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만큼 핵심인력과 알짜배기 정보가 모이는 곳이란 뜻이죠. 스태프 찾으면서 다른 정보도 얻을 수 있어요. 어때요, 구미가 당기지 않아요?”

나는 황급히 용사들의 표정을 확인했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들은 노레스의 말에 모두 동한 것 같았다.

“아아아.”

나는 절망하며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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