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Chapter 1. 필연적인 동행 (5/43)

Chapter 1. 필연적인 동행

어마어마한 바람, 아니 마나의 흐름이 모든 걸 쓸어가는 해일처럼 우리를 덮쳤다. 첼러스의 녹슨 검에 아주 얇은 종이가 한 겹 덧씌워지듯 짙푸른 검기가 생겼다. 한정된 마나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검기의 최선이었다.

콰앙―!

마나폭풍이 첼러스의 검기에 부딪히자 흉포한 굉음을 내며 갈라졌다. 마치 검에 반으로 갈린 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의 옷과 금발이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사정은 나도 마찬가지여서, 기다랗게 땋은 머리가 두피를 쥐어뜯을 기세로 뒤로 날렸다.

“끄으으읍!”

어찌나 바람이 센지 두 발이 바닥에서 들릴락 말락 했다. 죽을힘을 다해 첼러스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데도 손이 점점 밀려났다. 힘을 너무 줘서 눈물이 난다. 그래도 속수무책이었다. 기어코 손이 풀리려고 했다.

“나, 날……!”

날아가겠어!

질끈 눈을 감은 순간, 첼러스가 어금니를 까득 물고 검을 쥐고 있던 한 손을 풀었다.

그리고 허리에 감겨 있는 내 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굉장한 악력이다. 그의 손가락 다섯 개가 그대로 피부를 뚫고 근육에 박힐 것 같았다.

통증이 심해서 눈물이 비죽 흘렀으나 방도가 없다.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억지로 참았다. 지옥 같은 마나폭풍은 무려 수 분간 계속되었다. 저놈의 용사들이 대체 몸에 얼마만큼의 마나를 보유하고 있었던 건지 징글징글했다.

비로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왔을 때, 나는 무릎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경련을 일으키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주위를 확인했다. 첼러스와 내가 있는 장소를 제외한 땅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가 밑을 확인했다. 낭떠러지나 다름없는 절벽이 나타났다. 눈을 의심하며 가파른 경사를 확인했다.

이 일대가 싹 쓸리고 첼러스와 내가 있는 자리만 마치 다 먹고 남은 사과 심지처럼 남아 있었다.

첼러스가 바짝 달궈진 쇠처럼 하얀 김이 올라오는 검을 허리에 차며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

“팔을 보고 싶습니다.”

첼러스가 무거운 어투로 요청했다.

“최소한의 힘으로 조절했습니다만, 그래도 카카나에겐 강한 힘이라 마음에 걸립니다.”

이윽고 첼러스가 팔을 조심스럽게 받치고 소매를 걷었다. 검푸르게 멍이 들다 못해 부어있는 팔뚝이 드러나자, 선한 눈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세게 잡아서…….”

“네가 세게 안 잡았으면 날아갔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신경 쓰지 말고,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나 생각해봐. 그냥 내려가면 다칠 것 같은데.”

“제가 안고 뛰어내리겠습니다.”

첼러스가 묵묵히 나를 안아 올렸다. 안 그래도 높은데 안기기까지 하니 밑이 더 까마득하게 멀어 보였다. 높은 곳은 쥐약이다.

눈을 감고 어깨에 이마를 박았다. 첼러스가 내 몸을 흔들리지 않게 고쳐 안았다.

“뛰겠습니다.”

새삼 그의 인성이 아다르와 비교되어 느껴졌다. 걘 이런 말도 없이 창문에 몸부터 던지고 봤는데.

마음의 준비가 되었단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안착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상에 도달했다는 안도감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쫙 끼쳤다.

그의 품에서 내려오며 식은땀으로 축축한 뒷목을 닦아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은 더 이상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르르 몸을 털어내며 크로스백을 뒤졌다. 작은 전구 모양으로 생긴 유리병 두 개를 꺼내 하나는 그에게 건넸다. 어젯밤에 이미 설명을 들어 알고 있는 첼러스가 준비에 들어갔다.

우리는 공터 곳곳을 누비며 약물을 뿌린 후, 네 명의 용사들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할릭이 스트레칭을 하며 말을 건넸다.

“아직 제국군이 오지 않았는데, 준비할 거면 지금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이름이 보이지 않는 뱀이었던가? 몸에 뿌려야 한다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가 경피성 해독 부착제를 드러나지 않는 피부에 붙였다. 용사들이 부착제를 제대로 붙였나 꼼꼼하게 확인한 뒤, 가방에서 병아리색 분무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꼼꼼하게 뿌렸다.

완벽하다. 이제 제국군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독에 당해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적어도 다섯 시간 동안 부착제 떨어트리면 안 돼. 다들 주의…….”

“카카나!”

갑자기 아다르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눈이 등 뒤로 향해 있었다.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소름끼치게 빛나는 화살이 눈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날이 바짝 선 화살 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화살의 살대가 아직도 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공격을 맨손으로 낚아챈 손이 있었다. 첼러스다.

그가 아귀힘으로 화살대를 간단히 부러뜨리며 뒤를 돌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전장을 지배하는 지옥귀처럼 은근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제국군이 왔습니다.”

나는 황급히 벗겨져있던 모자를 눌러썼다. 공터 끄트머리에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갑주가 보였다. 언제 텔레포트를 한 건지 병사들이 대열을 맞춰 서 있었다. 거리가 꽤 되는데도 규모가 크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은 고민하고 텔레포트 할 줄 알았는데.’

몇몇은 외곽에 남아있는 독초 크라티 때문에 어수선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마비증세가 나타나고 있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들의 겁먹은 표정을 보고 깨달은 게 있어 이를 악물었다.

‘제국이 확인용으로 버렸군.’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저 많은 인원을.’

그들이 우리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기선을 제압하려는 함성이 죽음에 놓인 병사들의 마지막 비명처럼 끔찍하게 터져 나왔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공터의 양옆을 확인했다. 메마른 나무와 어둠만 있을 뿐 변화를 알리는 기색이 없다.

‘언제 오냐.’

초조하게 두 손을 맞잡는데, 할릭이 제 커다란 품으로 날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앞을 첼러스와 아다르가 막아섰다. 제국군은 벌써 공터의 3분의 1 지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빨리 와라……!’

그때, 아무것도 없는 숲의 검은 그늘 밑으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단숨에 허리를 숙였다.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어서!”

“왜 그래?”

“죽고 싶지 않으면 내 말대로 해!”

할릭이 얼떨떨한 기색으로 몸을 웅크렸다. 나머지 용사들도 자세를 낮췄다. 웅크린 머리 위로 기다란 촉수가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나는 저 징그러운 몰골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에 회의감을 느끼며, 몸을 틀어쥐고 있는 할릭의 팔뚝을 툭툭 두드렸다. 그가 불안한지 쉽게 힘을 풀지 않았다.

“풀어.”

손에 힘을 주자, 할릭이 마지못해 떨어져나갔다.

몸을 숙인 채 엉금엉금 공터의 외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물형 촉수 몬스터, 프라스디르의 촉수에 몸이 뚫린 제국군이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다.

“검붉은 빛을 띤 프라스디르는 처음 봅니다.”

말미잘처럼 생긴 몬스터를 기어코 고개를 돌려 살펴보기까지 한 첼러스가 신기해하며 말했다.

“죽음의 숲 몬스터들은 환경에 맞게 진화를 거듭해서 다 독을 가지고 있어. 저 촉수에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일걸.”

나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손톱으로 긁어내며 대답해 주었다.

프라스디르는 속도가 매우 빨라 고위험등급으로 매겨지는 몬스터였다. 독에 특화된 프라스디르 개체 한 마리만 적어도 다섯 명이 달라붙어 상대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달려온 프라스디르만 스무 마리가 넘는다.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첼러스와 곳곳을 돌아다니며 페로몬을 흠뻑 뿌려두었으므로 확실했다.

게다가 프라스디르의 촉수는 아무리 잘라도 금방 재생되는 걸로 유명했다. 거기에 독까지 있다면?

‘불 보듯 뻔하지.’

제국군이 고전하는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크라티 때문에 손발의 마비증상으로 싸우기가 쉽지 않을 터다.

마법사들이 가세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십중팔구는 전멸이었다.

“그런데 프라스디르가 왜 우리는 공격하지 않는 겁니까.”

“몸에 뿌린 약 때문에.”

“독 말입니까?”

“응. 죽음의 숲에 서식하고 있는 프라스디르는 자기들이 모르는 독에 엄청 예민하거든. 절대 건들지 않을 거야.”

땅이 울릴 정도로 흉포하게 달려드는 프라스디르를 바라본 첼러스가 한쪽 눈썹을 슥 들어올렸다.

“설마 아까 땅에 뿌린 약이 암컷 프라스디르의 페로몬이었습니까?”

“아니?”

나는 질색한 얼굴로 첼러스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무슨 참혹한 소릴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짓을 했다간 프라스디르가 제국군이 암컷인 줄 알고…….

나는 서둘러 생각을 끊어냈다.

“죽이면 죽였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해?”

“우웩.”

그새 상상한 아다르가 입을 가리고 헛구역질을 했다.

“너는 프라스디르가 제국군을 그렇고 그렇게 하는 걸 보고 싶니?”

“그렇진 않습니다만, 그러면…….”

“천적 수컷의 페로몬을 뿌렸어. 근처에 프라스디르 산란지가 있거든. 아마 새끼를 보호하려고 가장 강한 개체들이 싸우러 나왔을 거야.”

“굉장하군요…….”

“애초에 천적의 페로몬은 왜 가지고 있는 거죠?”

스노아가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내가 너희 보호할 수 있다 그랬잖아.”

“물론 마법방벽이 깨져서 마나폭풍에 날아갈 뻔하고 화살에 머리통이 뚫릴 뻔했지만 말이지.”

아다르가 옆에서 빈정거렸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머리를 손으로 후려갈겼다.

“하여튼 얄미운 말만 골라 하지.”

아다르가 빙글거리며 웃었다. 나는 그의 등짝을 한 대 더 때려준 다음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벌써 공터의 외곽까지 빠져나왔다. 망설임 없이 생각해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북쪽으로 쭉 직진하면 내가 아는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처럼 숲에 뿌리를 박고 거주하지 않는 이상 발견하기 힘든 동굴이었다.

길을 막고 있는 상록수의 가지를 걷어내며 숲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문득 횡으로 넓은 시야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잡혔다. 프라스디르와 제국군이 엉망으로 얽혀있는 방향이었다.

보지 않아도 어떤 참상이 벌어지고 있을지 예상이 돼서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무시하고 등을 내보이기엔 반짝이는 빛이 불길한 유령처럼 신경을 좀먹고 있었다.

결국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굴렸다. 얼핏 봤는데도 온통 핏빛이다.

눈을 감고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 격전지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팔다리에 촉수가 감겨 병사의 몸이 육포처럼 찢기고 있는 것이 생생하게 보였다. 아무리 비위가 강한 나라지만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빨리 확인하고 가자.’

초조감이 바짝 따라붙었다. 진땀이 배어나오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빛을 찾아 샅샅이 살폈다.

‘어디서 반짝인 거지?’

장기가 널브러진 곳을 눈으로 뒤적이며 찾다가 수상한 곳을 발견했다. 네 명의 마법사들이었다. 비누 거품처럼 얇은 막이 반짝이는 걸 보니 방어마법을 펼친 모양이었다. 그들 뒤에 한 무리의 궁병이 일렬로 서 있었다. 방어마법과 달빛을 받은 궁병의 화살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거세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 궁병들 뒤로 한 늙은 마법사가 마법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궁병……!”

소리치기 무섭게 첼러스가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전혀 동요가 없는 얼굴로 검자루를 쥐었다.

“안 돼, 첼러스!”

돌덩어리처럼 힘이 들어간 그의 손을 막으며 소리쳤다. 첼러스가 서늘한 하늘색 눈을 밑으로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한 번 더 무리해서 마나를 사용하면 돌이킬 수 없어! 마나가 정기랑 섞여 버릴 거야!”

정기는 생명에너지다. 성질이 불안정한 창조에너지, 즉 마나를 생명에너지로 전환시켜 통합하는 건 상관이 없지만 날것 그대로 섞이면 치명적이었다. 독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첼러스는 마나혈이 엉켜 있어 통제할 힘도 방법도 잃은 상태다. 한 번 섞이면 걷잡을 수 없었다.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하지만!”

“저 정도 수의 화살을 모두 쳐내려면 마나를 사용해야 합니다.”

첼러스가 바늘도 들어갈 것 같지 않는 단단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말릴 틈이 없다. 그의 검에 짙푸른 검기가 씌었다. 나는 밤하늘을 가르는 수십 개의 화살을 올려보다가, 첼러스의 얼굴을 확인했다. 작게 기침한 그의 입술을 비집고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앞이 뿌예졌다.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마나를 빨리 방출하면 돼. 적어도 30분 이내에.’

첼러스가 크게 검을 휘둘렀다. 대부분의 공격이 검풍에 밀려 날아갔다.

“큽.”

미간을 약하게 찡그린 첼러스가 입 안으로 기침을 삼켰다. 그러나 채 막지 못한 핏물이 그의 턱으로 한 움큼 흘러내렸다.

“숲으로 들어가자. 어서!”

나는 비틀거리는 그의 손을 있는 힘껏 당기며 뛰었다. 모습을 숨기면 공격도 힘들어질 거다. 그들이 활을 준비하고 조준하는 동안 최대한 깊이 들어가야 했다.

“북쪽 방향으로 뛰어! 거기에 동굴이 있어!”

할릭이 제자리에서 크게 도약했다.

나는 빠르게 달리다가도 고개를 돌려 나머지 인원이 제대로 따라오고 있나 확인했다. 간혹 화살 몇 대가 날아들었으나, 그마저 아다르나 할릭이 전부 쳐내었다.

첼러스의 안색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 입술은 보랏빛으로 죽었다. 정기가 먹혀가는 증상이었다. 다음은 감각기관의 이상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첼러스!”

그가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날 바라보았다.

“30분이 되기 전에 내가 준 마나방출제를 먹어야 해!”

“하지만…….”

“안 그러면 죽어! 몸뚱이에 일단 숨이 붙어 있어야 날 더 지키든 말든 할 거 아니야!”

거의 쇳소리에 가까운 소리로 고함을 지르니 첼러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혈안이 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화살이 하나 더 날아오고 있었다. 아니 화살이 아니었다. 단검이다.

‘검이라고?’

눈을 크게 뜨자 그제야 제대로 된 윤곽이 보였다.

‘암살자!’

제국군에 섞여 있던 자가 분명했다. 동료도 팽개치고 임무를 완수하러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나는 그가 노리는 사람을 확인했다. 달리기가 가장 느린 스노아였다.

‘제기랄!’

감각이 둔해진 첼러스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할릭은 제일 앞장서서 달리고 있었고, 아다르도 나만 보고 있지 뒤를 보고 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본 사람은 인간보다 신체기능이 우월한 수인족 아르모어였는데 스노아와 거리가 멀었다.

“스노아!”

나는 있는 힘껏 손을 뻗었으나 이미 늦었다.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스노아의 어깨에 검이 틀어박혔다. 암살자라면 응당 목이나 심장을 노리는 것이 정석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어깨에 검을 박고 쓰러졌다.

그리고 곧 숨이 끊어졌다. 용사들의 몸에 뿌려둔 독을 들이켠 결과였다.

차가운 겨울 땅에 뜨거운 핏방울이 후드득 튀었다. 스노아와 암살자가 동시에 자리에 쓰러졌다. 검에 찔린 건 내가 치료하면 된다. 독이 있더라도 웬만한 건 내가 바로 해독해줄 수 있었다.

‘얼마나 놀랐을까.’

스노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에게 뛰어가는 순간, 뜬금없이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반사적으로 발을 앞으로 움직이려 했으나 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눈을 끔뻑였다. 몸이 차가운 겨울 땅에 철푸덕 쓰러졌다. 한기가 전신으로 퍼진다.

무슨 일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무언가에 발이 걸렸나?’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고 뛰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상하게 등이 뜨뜻했다.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는 손을 뒤로 돌려 감각이 이상한 곳을 더듬었다. 미끌미끌한 액체가 느껴졌다.

그것을 손가락에 묻혀 눈앞으로 들고 왔다. 손가락 끝만 더듬은 줄 알았는데, 손바닥 전체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선홍색 액체가 느릿하게 손목으로 흘러내렸다.

피다.

‘피?’

“카카나!”

아다르가 기겁하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풍경이 순식간에 두 개로 갈라져 보였다. 내가 누워 있는 건지, 아니면 옆으로 기울고 있는 건지조차 알 수가 없다.

줄곧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코로 불꽃을 삼키는 것처럼, 폐와 내장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뜨거운 것이 부글거리며 식도를 타고 기어 올라와 입 바깥으로 왈칵 터졌다.

“으욱!”

검게 죽은 핏덩어리가 뭉클뭉클 흘러내렸다. 그제야 등에서 불타는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주위가 온통 시끄럽다. 입에 고인 핏물을 뱉어내며 눈을 굴렸다.

스노아가 앞쪽에 있었다. 안색을 확인했다. 자상에서 피가 흘러 창백해진 것 말고 별다른 증상이 없다. 독에 당하진 않았나 보다.

‘지혈 정도는 용사들도 할 수 있겠지. 내가 기절해도…….’

왈칵, 피가 다시 한번 쏟아진다.

할릭이 눈에 띄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를 품에 안았다. 스노아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내게 비틀비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물빛 눈이 물처럼 울렁거리고 있다.

괜찮다고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가지 않는다. 스노아가 아랫입술을 잠시 짓씹었다.

“매직애로우에 포이즌을 건 2중첩 마법에 당했어요.”

그렇구나. 아까 보았던 그 늙은 마법사가 공격을 한 모양이다. 그제야 내 몸 상태가 이해되었다.

등에 화살을 맞고, 독에 중독된 것이다.

숨을 쉬기 힘들었다. 손발의 감각이 둔하고 배 속이 화끈거리는 통증을 호소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끔찍하도록 익숙한.

“직급이 높은 황실 마법사가 있었던 모양인데, 처음부터 카카나를 노린 것 같아요.”

‘황실 마법사?’

이상한 일이었다. 황실 마법사를 죽음의 숲에 확인용으로 내버리다니? 수습마법사나 견습기사들, 오합지졸이 진입해야 정상이다. 죽음이 예정된, 그저 확인을 위한 진군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확인 작업을 거치지 않고 귀한 인력을 이런 식으로 죽음의 숲에 보낼 리 없다.

“웁.”

다시 피가 뭉클거리며 흘러나왔다. 할릭이 내 입가를 커다란 손으로 닦아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거의 숨도 쉬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고개를 들고 스노아를 채근했다.

“어떻게 해야 돼.”

할릭의 얼굴이 꼭 한바탕 도륙을 끝내고 돌아온 학살자 같다.

문득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의 거칠고 포악한 기백에 겁에 질렸던 일도 뇌리를 스쳤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법으로 건 포이즌은 사제의 신성마법으로 해독해야 해요.”

“포이즌에 중독되면 보통 얼마나 버텨?”

아다르가 초조하게 질문했다. 스노아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을 졸린 사람 같은 음성이다.

“두 시간.”

아니, 아니다. 나는 모든 독에 내성이 있다. 또 마법으로 건 포이즌도 약초를 달여 만든 해독제로 풀 수 있다. 2시간보다 오래 버틸 자신 또한 있다.

설명을 해주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뒤적거렸다. 손가락 끝에 마나방출제가 걸린다.

그것을 돌돌 굴려 꺼내자, 의도를 알아챈 첼러스가 곧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근처에 와 약을 받아 든다. 그가 입을 몇 번 벙긋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입에 고인 핏물을 뱉어내고 첼러스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감각이 이상해서 가능할지 알 수 없었지만, 시도라도 해야 했다.

‘지금 맥을 제대로 짚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 죽일 순 없어. 그럴 순 없어…….’

아다르가 거의 으르렁거리듯이 뇌까렸다.

“지금 이 상황에, 넌…….”

통증 때문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기운을 끌어 모았다. 내 환자다. 내가 치료할 환자.

숨을 멈추고 손가락 두 개로 맥을 짚었다. 확실하게 느꼈다. 25분, 아니 적어도 20분. 그 안에 마나방출제를 먹어야 했다. 정기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아르모어가 다가왔다. 그가 내 입가의 핏물을 바라보다 나와 눈을 맞췄다. 그의 붉은 눈이 거의 검은색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아, 르모어…….”

여기서 가장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은 아르모어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안심하고 해야 할 것들을 읊기 시작했다.

“첼, 러스, 20분, 후에…….”

“먹이겠다.”

눈앞이 어물거렸다. 나는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기절하기 전에 할 말은 다 해야 했다. 그래야 마나가 없어서 최약체가 된 용사들이 몸을 피할 것이 아닌가.

내가 지켜야 한다.

동굴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용사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끌려면…….

[그래, 카카나. 네가 지켜야지.]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지긋지긋한 목소리에 미간이 절로 찡그려진다.

피거품이 부글거려서 말을 하기가 힘들다. 짜증이 나서 피를 뱉어낸 다음 있는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우량, 세이피지아…….”

그리고 끝내 정신을 잃어버렸다.

***

마법방벽을 펼친 채 벌써 두 시간도 넘게 버티고 있다.

“헉, 허억……. 젠장, 제기랄!”

“알란스 님!”

쥐를 닮은 노인, 황실마법사 알란스가 갖은 욕을 씨불이며 주위를 확인했다. 마법사들의 공격에 타 죽은 프라스디르의 사체에서 보라색 독가스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들여보내주십시오, 알란스 님! 알란스 님!”

마법방벽 밖으로 밀려난 병사 다섯이 벽에 달라붙어 들여보내 달라며 애걸했다. 방벽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크기를 줄여야 했고, 그 탓에 많은 병사들이 쫓겨난 것이다.

당연히 알란스는 방벽을 거둘 생각이 없었다. 제 몫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 쓸모없는 병사들을 위해 목숨을 걸 순 없었다.

결국 보호받지 못한 병사가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들이 쓰러진 자리 밑에 적어도 다섯이 넘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이 드넓은 공터에 병사 시체가 조각조각 분해되어 엉망으로 퍼져 있다. 알란스의 호위병 브룩센도 진작 몸이 뜯겨 죽었다. 지옥이었다.

알란스가 파르르 떨며 표독스럽게 눈을 굴렸다.

‘놈들은 대체 어디로 숨은 거지?’

이대로면 몬스터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한낱 노예가 아닙니까. 죽음의 숲 근처에 파견된 황실마법사만 다섯 명이 넘습니다.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일전에 브룩센이 불안에 떨며 했던 말이 머리에 감돌았다. 그의 말을 주의 기울여 들었어야 했다. 빛의 기둥이 있는 곳으로 텔레포트를 하라기에 사제들을 대거 대동하고 들어갔더니 이 사달이라니.

사제도 이제 다 죽고 없다. 끊임없이 독을 정화하느라 기력이 다해 빌빌거리다가 기어코 프라스디르에게 붙잡혀 찢겨 죽고 말았다.

남은 것은 수습마법사 넷, 황실마법사 알란스, 병사 스물, 이렇게 스물다섯 명이었다. 백 명이 넘었던 인원이 순식간에 스물다섯으로 줄었다.

프라스디르는 영역을 침입하지 않는 이상 먼저 공격하지 않는 몬스터다. 주위에 알이 없으니 이곳이 산란지는 아니다. 함정에 걸린 게 분명했다.

“괘씸한…….”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신분 상승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더욱 노기가 치밀었다.

욕을 씨불인 알란스가 신경질적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실에서 보내온 패밀리어가 수상했다. 체구가 가장 작은 녀석에게 공격마법을 시전하면 작위를 내려준다기에 그렇게 했더니, 거짓말처럼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요구한 마법도 이상했다.

‘포이즌을 씌운 매직애로우라니?’

알란스는 기가 찼다.

‘죽이고 싶으면 즉살마법을 사용하면 되는데, 왜 굳이 이 마법을 사용하라고 한 거지?’

“아, 알란스 님. 어떻게 할까요?”

마법을 유지하고 있던 수습마법사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텔레포트 해야지!”

알란스가 호통을 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하, 하지만 마나가 없습니다. 이만한 인원을 동시에…….”

“마나석! 마나석을 챙겨왔잖느냐!”

“두 시간 가까이 방어마법을 유지하느라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텔레포트 할 양 밖에…….”

수습마법사의 보고를 들은 알란스가 망설임 없이 마법방벽에서 손을 떼어냈다. 한 사람분의 마나가 사라지자 마법을 유지하던 나머지 수습마법사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 알란스 님. 이대로면 방벽이…….”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어라. 내 해결책을 내어 올 테니.”

“예? 그게 무슨…….”

알란스가 짐 더미를 거칠게 헤집으며 두 덩어리의 마나석을 양손에 욕심껏 쥐어 들었다. 그가 마나석을 주머니에 챙겨 넣자, 고개만 돌려 뒤를 확인하던 수습마법사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공포에 질린 눈이었다.

“그, 그 마나석으로 어찌하실 작정입니까?”

“쯧쯧, 어린 것들이 머리가 그리 굳어서야 쓰겠느냐? 내 텔레포트 하여 마법사를 더 데리고 오겠느니라.”

“그, 그 말이 참말이십니까?”

번들거리는 눈으로 마나석을 진득하게 훑어보던 알란스가 입가에 미소를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말실수한 것을 깨달은 수습마법사가 황급히 사죄하였으나, 알란스는 이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자네, 어디 소속이라 했지?”

알란스가 가느다란 눈을 비열하게 내리뜨며 숨을 몰아쉬었다. 수습마법사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쥐를 닮은 주둥이를 움찔거린 알란스가 수습마법사의 목에 걸려 있던 증표를 쥐어뜯듯이 낚아채 확인했다.

“하! 고작 노블란 소속이 감히 내 말에 토를 달다니!”

알란스가 노발대발하며 수습마법사의 뺨을 내려쳤다. 방어마법이 흔들리자 나머지 수습마법사들이 어금니를 악물고 버티려 안간힘을 썼다. 텔레포트하여 이곳을 벗어날 작정인 알란스는 물론 그들의 사정 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자네, 마음이 급하니 지금 위아래도 없는 겐가?”

“죄, 죄송합니다.”

“내 이 일은 톡톡히 기억하고 있겠…….”

“알란스 님!”

그때 다른 수습마법사가 기겁을 하며 알란스를 불렀다. 자신의 말이 끊기는 것을 참지 못하는 알란스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수습마법사의 멱살을 틀어쥐고 훈계를 할 기세였다.

그러나 정작 알란스의 분노를 산 수습마법사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위, 위에…….”

“대체 뭐가 있, 헉.”

유난히 달이 밝은 날이었다. 어둠이 새까맣게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사위가 달빛으로 훤하게 밝은, 그런 밤.

그리고 그 하늘에 웬 사람이 한 명 떠 있었다.

얼핏 봤을 때는 하늘에 찍힌 파란색 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물에 풀어지는 잉크처럼, 천천히 나부끼며 하늘의 일부분을 물들이고 있었다.

알란스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제야 정체가 인식되었다. 머리카락이었다. 눈이 아플 만큼 새파란.

‘그것’이 제국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색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투명한 물빛 눈망울이 보였다. 바다에서 방금 솟아오른 인어처럼, 얼굴이 창백하게 젖어있다. 싸늘하게 뜨인 눈이 깜박이지조차 않는다.

명백하게 분노한 표정에 마법사들의 몸이 경직되었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스르륵 굴러간 눈이 알란스를 들여다봤다. 시선이 마주친 알란스가 숨을 멈췄다.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듯, 마주 보기조차 힘든 기운이 무감정한 눈에 깊이 스며들어있다.

신의 조화를 상징하는 대자연은 본디 자비로우나, 한 번 분노하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린다.

해일처럼, 홍수처럼.

그리고, ‘저것’처럼.

“헉…….”

무릎에 힘이 풀린 알란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중압감이 일대를 짓눌렀다. 모습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밑으로 하강하여 날고 있는 그것, 아니 스노아 칼리시스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뒤로 동시에 세 개의 마법진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나타났다.

‘3중첩 마법……!’

현자만 쓸 수 있다는, 3개의 마법을 중첩하여 동시에 발동하는 마법. 그것을 눈 깜박할 사이에 시전했다. 질겁한 알란스가 서둘러 마나석을 움켜쥐고 텔레포트하려고 하는 순간, 그의 입이 붙어버렸다.

침묵 마법이다. 3중첩 마법에 플라잉, 그리고 침묵 마법까지 쓴 것이다.

스노아가 그를 섬뜩하게 굽어보며 입을 열었다. 바람소리만큼 작은 음성이었으나 알란스는 똑똑히 알아들었다.

“너구나.”

“사, 살려…….”

스노아가 검지를 가볍게 까닥였다. 그러자 서서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발버둥 쳐봐.”

제국군이 있는 곳 일대가 새까만 그림자에 잠겼다.

“내 마음에 들 때까지.”

알란스가 졸도하기 일보 직전인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노아 칼리시스의 뒤로 죽음의 숲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거대한 해일이 일고 있었다. 저것이 진정 사람의 손으로 창조된 마법이란 말인가. 드래곤이 강림하지 않고서야 가능할 수가 없는 규모였다.

먹구름이 모여들었다.

우르르, 하늘이 진노하듯 천둥이 쳤다.

스노아가 검지로 알란스를 가리켰다. 물보라가 허리를 굽히듯이 몰아닥쳤다.

***

“4층에 대체 뭐가 있기에 저렇게 꼭 지키고 섰답니까? 아침밤낮으로 잠도 안 자고 계단을 지키고 섰던데, 무서워서 지나갈 수가 있어야지요.”

“거 못 들었소? 듣자하니 아가씨 한 명이 잠에 들어서는, 깨어나질 않고 있다 하더이다. 길드장과 친분이 있어 극진한 보호를 받고 있다 하던데. 사제님이 본부에 들를 때마다 분위기가 어찌나 살벌한지…….”

대도시 로울리에 위치한 용병 길드, 아누비르 본부에는 최근 괴상한 소문이 돌았다. 본부에 아주 귀중한 손님이 왔는데 중태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손님의 정체에 대한 소문은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길드장의 숨겨진 자식이라 했고, 또 누구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제국의 황녀라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우연히 손님의 머리카락을 봤는데 황녀의 은발처럼 하얀 빛이 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입방아를 찧어대는 용병들은 대부분 아누비르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이야기는 멀리 돌지 못하고 본부나 용병단 내에서만 맴돌았다.

아누비르에 소속된 명예급 용병, 이블라 로젠칼은 다른 용병들이 멋대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해가 중천이었으나 시간 따져가며 술을 마시기엔 속이 좋지 못했다. 특히 근 한 달간처럼 시도 때도 없이 짜증이 솟구치는 시기에는 몸 구석구석 술기운이 뻗쳤으면 하는 욕구를 누르기 힘들었다.

금세 한 컵을 비운 이블라가 말린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루한 교대 시간이었다.

그녀는 의자를 신경질적으로 밀어 넣고 식당을 벗어났다. 의뢰를 맡기는 손님들로 길드 접수대가 미어터지고 있었다. 근처에 승강기가 있었지만 타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주구장창 감시 임무만 맡았더니 관절 마디가 녹슨 기분이었다.

이블라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3층까지 올라가자 복도가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그녀의 동료 게라스가 반대편 계단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막고 있었다.

“수고.”

그녀가 어깨를 툭 치며 4층으로 올라가자 게라스가 징징거렸다.

“누님, 이 일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너무 공감이 돼서 이블라는 하마터면 그를 끌어안을 뻔했다.

“좀 참아.”

“그러는 누님도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요.”

“너도 교대 시간에 한잔해.”

“어떻게 좀 안 됩니까?”

게라스가 간절하게 매달렸다.

“벌써 한 달입니다. 보수가 짭짤해도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고요.”

“난 좋은 줄 알아? 길드장 명령이니 참고 해. 별수 있나.”

이블라도 마음 같아선 뛰쳐나가고 싶다. 그게 안 되니 이러고 있는 것 아닌가.

그녀는 한숨을 쉬며 방에 누워 있는 여자를 떠올렸다. 사제가 주기적으로 방문해 기력 회복 마법을 걸어주고 가는 정체불명의 여자.

‘도대체 정체가 뭘까.’

이블라는 약 한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 그녀는 베샤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의뢰게시판을 확인하려면 아누비르 베샤 지부로 향해야 했다. 늦은 새벽이어서 그런지 시장바닥처럼 시끄럽던 1층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오직 경비를 서는 길드원만이 접수대에 앉아 고개를 흔들며 졸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두 남자가 등장한 건 이블라가 막 의뢰게시판 앞에 섰을 때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건이었다. 남자가 문을 어찌나 거칠게 열었는지, 경첩이 나가떨어지는 걸로 모자라 거의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이블라의 붉은 눈이 경악으로 벌어지는 동안, 한참 졸던 길드원은 너무 놀라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넘어가버렸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문짝이 완전히 으스러져서 그녀의 발끝까지 밀려왔다. 이블라는 덩치 큰 남자와 상대적으로 늘씬한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둘 다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맨손으로 문을 부쉈다 이거지.’

그것도 용병단 건물의 출입구를.

이블라는 검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충고했다.

“잊은 것 같은데 여기 용병 길드야. 함부로 굴면 목이 떨어지는 곳이라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이블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웬 작은 덩어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이블라는 처음에 그게 뭔지 몰랐지만,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정체를 알아챘다. 모포와 로브로 꽁꽁 감싸여 있는 덩어리에서 하얀 손이 툭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앙증맞고 야무진 손에 검붉은 피딱지가 얼룩져 있었다. 사람이었다. 아마도 위독한.

남자와 여자는 아주 각별한 사이처럼 보였다. 그는 품에 안은 여자에게 충격이 갈까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걸음걸이나 고개를 움직이는 것까지 함부로 하는 법이 없었다. 방금 문을 부수고 들어온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여자에게 충격을 주지 않고 문을 부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마나.’

이블라는 몸을 긴장시켰다.

“사제.”

옆에 서 있던 늘씬한 남자가 그르렁거리는 음성으로 읊조렸다.

“뭐요?”

그를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던 이블라가 한 번에 못 알아듣고 되물었다. 남자가 다시 낮은 어조로 명령했다.

“사제를 불러, 은밀하게.”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로브를 써 얼굴이 어떤지 확인이 불가능했고, 은밀하게 불러달란 요구도 몹시 의뭉스러웠다. 그래서 이블라는 그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여기는 치료원이 아니라 용병 길드야.”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덩치 큰 남자가 품에 안긴 여자를 조용히 바라보더니, 이불처럼 넓은 로브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용병패였다. 환한 금패에 파란색 수술이 달린 패.

‘파란색 수술?’

파란색 수술이 달린 용병패는 그녀가 아는 한 하나뿐이었다.

이블라는 혹시나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나 다를까, 금패의 앞면에 크라켄이 양각되어 있었다.

최근 용병들을 뜨겁게 달군 화제의 물건, 신화급 용병패다.

용병왕이 찾고 있단 걸 모를 리 없는데 이렇게 대놓고 보여주는 걸 보면 정말로 다급한 모양이었다.

‘근데, 그새 주인이 바뀌었나?’

이블라가 봤던 용병패의 주인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덩치도 훨씬 컸다.

‘그때는 오히려 저 정도 체구의…….’

이블라가 늘씬한 남자를 바라보며 의문을 제기했다.

“혹시 당신 저번에 그…….”

그때였다.

돌연 짐승의 앞발 같은 손이 쐐액 날아와 이블라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덩치 큰 남자의 짓이었다. 손이 얼마나 큰지 숨이 턱 막혔다.

품 안의 여자를 진작 동료에게 넘긴 덩치 큰 남자가 한 손으로 그녀를 가볍게 들어 벽에 찍어버렸다. 머리가 띵하게 울리자 자동으로 힘이 빠졌다. 간신히 꺼내 든 날선 단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누님을 놔줘!”

챙강,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다른 길드원이 황급히 무기를 들었다.

“미안한데.”

남자가 고개를 숙여 이블라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내가 좀 급하거든?”

짙게 음영이 져 있어 남자의 얼굴이 거의 들여다보이지 않았으나, 하나만큼은 똑똑히 보였다. 작은 불꽃처럼 일렁이는, 선명하고 형형한 주황색 눈.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탈색되어 백지가 되어버린 것 같은 경험이었다.

공포에 잠식된 몸이 남자의 눈길 한 번에 졸도할 듯이 덜덜 떨렸다. 전율이 흘러 눈을 깜박일 수조차 없었다.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포식자를 코앞에 둔 것 같다.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 같은, 오금이 저린 위기감이 그녀의 정수리를 강하게 짓눌렀다.

“전설급이나 신화급 용병패의 주인이 나타나면 용병 길드에겐 이득일 텐데. 아닌가?”

“크, 윽…….”

남자는 저번의 그자와 달리 용병의 문화를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이블라가 괴롭게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파리처럼 앵앵대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죽이고 싶어지니까.”

명예급 용병, 이블라 로젠칼은 정신을 잃어버리기 직전에 풀려났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블라 로젠칼이 겁을 집어먹고 말을 잃다니.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쪽팔린 기억이었다.

‘바로 신전을 찾아가지 않은 걸 보면 뒤가 구린 놈은 확실해.’

범죄자거나 제국의 눈 밖에 난 자들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 신전이다. 신분검사를 철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종교는 이미 높으신 분들의 체스말이 된 지 오래인 것이다.

이블라가 미간을 찡그리며 정체불명의 여자가 누워 있는 방문을 열었다. 동시에 경비를 서고 있던 남자가 방에서 뛰쳐나왔다. 이블라는 저도 모르게 무기로 손을 가져다 댔다.

“무슨 일이야?”

“깨, 깨깨, 깨어났어요……!”

“뭐?”

“깨어났다고요! 그 여자요! 우, 움직였어요! 확실히 봤어요!”

이블라가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침대 캐노피 너머로, 작은 그림자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깨어났다. 진짜로.

“마, 말도 안 돼요. 사제님이 분명 가망이 없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매번 기력 회복 마법만 걸어주고 돌아가셨잖아요. 제, 제 눈이 이상한 걸까요?”

“으, 씨발 머리야.”

그때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흐릿하게 대화를 갈랐다. 금방이라도 기침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음성이었다. 걸걸하기가 보통이 아니다.

이블라와 남자가 입을 다물고 동시에 침대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

한 달 전.

“카카나!”

마지막까지 용사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그녀가 끝내 정신을 잃었던, 그날.

“젠장!”

아다르가 쌍욕을 씨불이며 거친 숨을 삼켰다. 할릭은 진작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얼어 있었다.

그가 어금니를 악물며 카카나를 품에 가까이 끌어당겼다. 한 번도 춥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던 죽음의 숲이 스산하고 음침하게 느껴졌다. 품에 안긴 작은 몸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첼러스가 거의 석고상처럼 하얘진 얼굴로 카카나의 피 묻은 입가를 닦아주었다. 엄지에 닿는 입술이 사체의 살코기처럼 뭉클거렸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계속 쳐다보면 깨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처럼.

“카카나?”

스노아가 카카나를 불렀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할릭이 문득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급속도로 떨어지는 그녀의 체온을 재고 있던 아르모어가 할릭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할릭이 마나정착제를 꺼내들자마자 강한 힘으로 그의 손을 막았다.

할릭이 눈만 위로 들어 아르모어를 쳐다보았다. 눈꺼풀에 반만 걸쳐 있는 주황색 눈이 피에 물든 마검처럼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녀의 뜻을 잊을 셈이냐, 할릭.”

아르모어가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이채를 띤 검붉은 눈망울이 어둠 속에서 기이하게 번뜩였다.

“그녀를 모욕하지 마라.”

아르모어가 가방에서 붕대를 꺼내 카카나의 등에 난 상처를 단단히 동여매 지혈했다. 그리고 두꺼운 모포로 몸을 둘둘 감은 뒤, 품에 소중히 안아 올렸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

“제기랄…….”

할릭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두 손을 주먹 쥐었다. 충격을 받은 머리가 목에서 떨어질 듯 무거웠으나,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아직 제국군이 지척에 있었고, 늙은 마법사가 공격하기 전에 거리를 벌려야 했다.

가장 먼저 이성을 차린 사람은 첼러스와 아다르였다.

첼러스는 강건하고 굳센 신의로 말미암아,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부러지지 않는 검과 같은 마음이 여전히 곧고 날카롭게 서 있었다. 카카나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실은 죽음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아다르가 냉정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첼러스가 보랏빛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동안, 아다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카카나가 말한 우량 세이피지아를 찾기 위해서였다. 숲 곳곳에 남아있는 그녀의 강인한 의지가 그들을 어디론가 인도하고 있었다.

“우량 세이피지아를 따라 걷는 게 좋겠어.”

스노아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할릭이 쓰러져 있는 암살자의 품을 뒤져 무기를 확인했다.

“암살자는 시선 끌기용이었군.”

지니고 있는 무기가 지나치게 단출했다. 아다르가 무섭게 가라앉은 눈으로 암살자를 바라보았다. 암살자의 단독 행동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지 않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배후가 더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목표는 스노아가 아닌 카카나였다.

암살자는 스노아의 애꿎은 어깨를 찔렀고, 시선이 끌렸을 때 그녀가 마법에 당했다. 확실했다.

그들은 침묵을 지키며 우량 세이피지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약 15분가량 걷자, 거대한 바위가 있는 지대가 나타났다.

“약을 마셔라, 첼러스.”

아르모어가 첼러스를 독촉했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날 만큼 강하게 주먹을 쥐고 있던 첼러스가 억지로 마나방출제를 들어 마셨다. 나머지 네 명이 바위 뒤에 숨어 그의 마나폭풍을 피했다.

일대가 전부 쓸려나갔으나, 한 명의 마나폭풍인지라 바위까지 날려 보내진 못했다.

그들은 빛을 보고 제국군이 또다시 텔레포트 할 것을 대비하여 우량 세이피지아를 따라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곧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바위절벽이 나타난 것이다. 촉수처럼 생긴 갈색 덩굴이 빽빽하게 자라 절벽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절벽 주변에 우량 세이피지아 하나가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섯 용사들의 절대적인 지표였다.

“바람 소리가 들린다.”

아르모어가 절벽에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그곳의 덩굴을 옆으로 뜯어내자, 자그마한 입구가 나타났다. 시선을 주고받은 용사들이 계속 직진하여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르모어가 손을 놓자 굵은 덩굴 가지가 다시 빽빽하게 자라 입구를 가렸다.

동굴엔 생필품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지혈제도 다섯 용사들의 체구에 맞는 분량으로 양분되어 각각 이름이 붙은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곳곳엔 밤눈이 어두운 인간을 위한 램프가 놓여 있었다. 수인족 아르모어가 램프에 불을 붙이고 푹신한 이불더미가 놓여있는 곳에 카카나를 눕혔다.

투박한 선반 위에 쌓여있는 약물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아다르가, 미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네 것이 없잖아.”

정작, 지혈제가 가장 필요한 카카나의 것이 없다. 원래부터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여자였다. 하지만 이 정도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모여 앉은 용사들이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용사들의 체질을 고려하여 특별히 제작된 지혈제를 카카나에게 사용할 순 없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연고와 붕대만을 사용하여 카카나의 상처를 처치했다.

그 과정에서 카카나가 필기용으로 자주 사용하던 누런 종이가 발견되었다. 아다르가 그것을 들고 와 읽었다.

“내가 곁에 없을 경우, 마나정착제는 아래 조건을 충족했을 때 복용할 것.”

아다르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녀가 대체 어디까지 생각해둔 건지, 그리고 얼마만큼의 용기를 가지고 행동한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가 침통하게 이어 말했다

“한 시간이 지난 후 몸에서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때가 적당함. 진맥을 하지 않아 정확하진 않지만 최소한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

“이런 상황을 대비해놓고 있었군.”

아르모어가 말했다. 그가 얕은 숨을 쉬는 카카나를 내려다보았다. 첼러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들은 카카나의 말을 따랐다. 가방에 들어있는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마나의 잔여물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때 마나정착제를 복용했다.

마나 흡수는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이어졌다.

본래 마나혈을 새로이 뚫고 몸에 정착시키는 데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그러나 용사들은 그 시간을 온전히 소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죽기 살기로 마나를 운용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카카나를 살릴 수 있는 시간이.

가장 먼저 마나를 정비한 사람은 마나에 가장 정통한 자, 마법사 스노아였다.

그는 카카나의 상태를 살핀 후 이렇게 말했다.

“할릭, 카카나를 안아요.”

그리고 할릭이 카카나를 안자마자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아다르와 함께 대도시 베샤로 보내버렸다. 그곳이 죽음의 숲에서 그나마 가까운 대도시였기 때문이다. 신전으로 쳐들어가 사제를 불렀다간 소동이 일어 시간이 더 지체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나마 빠른 길은 용병을 시키는 것이다.

신화급 용병패라면, 그리고 할릭이라면 빠르게 해결할 수도 있었다. 남은 이들의 사명은 명백했다.

스노아는 프라스디르와 고전 중인 제국군에게로, 그리고 나머지 둘은 죽음의 숲을 에워싸고 있는 제국군에게로 향했다. 모든 것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그러나.

“가망이 없습니다. 포이즌이 몸을 완전히 잠식했어요. 이 사람 혹시 무슨 일을 하죠? 과로 때문에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어요.”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떻게 버티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상태면 아무리 신성마법을 퍼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의 환자는 대부분 영원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거나, 목숨을 잃습니다.”

제국에, 인간에, 세상에 환멸감을 느끼는 그들에게 순수한 배려와 염려를 베풀어준 이조차 지키질 못하는데.

그녀를 고통에 빠트린 마법사를 죽이고, 죽음의 숲을 에워싼 제국군을 전멸시키고, 반항하는 용병 길드를 전복시켜 힘을 증명하고, 사제를 24시간 붙여놔도, 그녀가 살지 못한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제가 물러나고도, 그들은 침대에 누운 카카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할릭이 두 손을 주먹 쥐며 중얼거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깨어나지 않는 그녀를 보며, 용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생명의 은인을 구하지 못했다. 은혜를 갚지 못했다. 단순히 그리 여겼던가.

아니다.

“아직, 그 무엇도 끝나지 않았다고.”

그들은 흘러넘치는 분노와 증오를, 썩어 문드러지는 슬픔과 비탄을, 독배를 들이켜듯 빨아들이고 눈을 떴다. 그들의 마지막 빛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고 그것은 황녀 오로라 그랑루이가 그토록 바랐던 결과였다.

***

살아생전 이렇게 머리가 아파본 적은 ‘탈출’ 이후 처음이다.

가늘게 뜬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새하얀 이불보만 보일 뿐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약은 그곳에 들어있었다. 언제까지 이 고통을 견뎌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흐윽.”

밑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무거운 팔을 들어 간신히 이마에 얹었다. 차갑게 식은 손등에 뜨거운 살가죽이 느껴졌다. 열이 오르고 있었다. 죽음을 향해 치닫던 몸이 삶을 향해 전력으로 방향을 틀면서 오는 후유증이었다. 나는 그 시기를 제법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내 몸에 잔류해 있는 모든 독들을 불태워 없애기까지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거면 쭉 기절해있지 왜 깨서는.’

통증이 최악이니 다시 잠에 드는 건 글러먹었다. 오래 누워 있었던 탓에 골을 조금만 흔들어도 온 세상이 물병에 든 얼음마냥 덜그럭거렸다.

“카카나……?”

그때, 쉬어서 바람소리밖에 나지 않는 음성이 내 이름을 불렀다. 찡그리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목소리에서 혈육의 임종을 지켜본 후의, 꽉 찬 슬픔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름이 돋아났다. 눈을 왼쪽으로 굴리자 스노아가 보였다. 나는 잠깐 당황했다.

‘언제 왔지?’

게다가 살이 빠진 건지 어쩐 건지 안 그래도 뼈밖에 없는 턱이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사정은 다른 용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할릭은 건강한 구릿빛 피부가 말라붙은 진흙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얼떨떨한 심정으로 스노아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시들어가는 백합처럼 하얀 목을 아래로 뚝 떨어트린 채, 물빛 눈망울을 가련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투명한 눈 색 때문인지 꼭 눈물이 고인 것처럼 보였다.

“너희, 쿨럭, 큽. 몸은, 괜찮아?”

내가 없을 때 마나정착제를 복용했을 것이다. 아마 별 문제는 없겠지만 걱정이 되었다.

“그건, 저희가 물어야 할 말이죠.”

스노아가 아프게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 이렇게 청승들이야.”

관두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려는데, 그 손을 뜨겁고 거친 손이 맞잡았다. 동글동글 뭉친 근육이 느껴지는, 단단하고 바위 같은 손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할릭, 울지 마.”

“한 달.”

아다르가 내 뜨거운 이마를 손으로 식혀주며 말했다. 나는 스노아가 먹여주는 물을 마시다 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다르의 검은 눈에 노골적인 어둠의 기운이 스멀거리고 있었다.

“네가 쓰러진 후로 한 달이 지났어.”

“…….”

“사제가 다시는 못 일어날 거라고 했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내가 그럴 리 없잖아.”

잠자코 듣던 아다르가 몇 차례 눈을 깜박이더니, 곧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그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한다.

“그래, 네가 그럴 리 없지.”

그 대답이 가슴을 쥐어짜는 것 같아서, 나는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다 애써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근데 내 가방 어디 있어? 지금 두통 때문에 죽을 것 같아.”

아르모어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에 가방을 쥐여 주며 말했다.

“그대, 다시는 아프지 않는 것이 좋겠다.”

평평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아르모어가, 나머지 용사들을 눈으로 흘깃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용사라 부르기엔 퍽 나약한 자들이다. 그대가 없으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존재들이지.”

그가 내 이마의 잔머리를 쓸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러니 부디 조심해다오. 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지 모르니.”

“살고 볼 일이네요, 아르모어가 농담도 다 하다니.”

가볍게 받아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제가 죽는다고 세상이 뭐 어떻게 되겠어요.”

아르모어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그래, 그리 생각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지. 몸은 괜찮은 건가.”

“사제가 힘 좀 썼나 봐요. 꼼짝 못할 정도는 아니네요.”

멀거니 대답하며 가방 안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두통과 어지럼증에 효과가 좋은 약병을 꺼냈다. 그러나 그것을 마시기 위해 코앞으로 들고 오자마자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나는 끽하면 사레에 들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약이 물에 가까운 제형이어서 누워 마시는 데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상체를 일으켜 꿀꺽꿀꺽 마시기엔 두통과 어지럼증이 심했다.

‘그게 가능했으면 애초에 이 약이 필요가 없지.’

복잡한 심정으로 약병의 미끈한 자태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아다르가 성큼 다가왔다.

“몸 일으켜줄까?”

쉽게 응, 이라는 대답이 안 나왔다. 몸을 일으켰을 때 밀려올 어지러움이 벌써부터 괴로웠기 때문이다. 한순간의 강렬한 고통과 옅지만 지속적인 고통을 저울에 올려보고 신중하게 고민했다.

‘인생 한 방이지.’

억지웃음을 지으며 아다르를 바라보았다. 승낙의 의미를 알아들은 그가 내 등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거 잠깐 들렸다고 바짝 예민해진 대가리가 아우성을 쳤다. 어금니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아다르의 팔에 가볍게 힘이 들어가며 상체가 들렸다.

세상이 위아래로 크게 꿀렁, 했다.

눈을 감고 있는데 시야가 어떻게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어쨌든 미친 듯이 회전했다. 손을 움직여 약병의 뚜껑을 따고 입에 넣기는커녕 어지럼을 견디느라 꼼짝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다시 눕기엔 이 짓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에 끝내자, 한 번에!’

독기에 찬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질끈 감았다.

‘오, 오만했다. 이건 아니야.’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어지럼이 아니다. 어금니를 악물고 견디는 게 고작이었다. 항복 선언을 하며 그냥 눕혀달라고 하려는데, 아다르가 내 손에 들린 약병을 뺏어갔다.

뭐 하는 건가 싶어 억지로 실눈을 떴다. 그가 약을 제 입에 탈탈 털어 넣고 있었다. 정신이 아뜩한 와중에도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걸 왜 네가 마셔?’

아다르가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은 얼굴이 지척에 다가온 순간, 내 까슬한 입술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상황파악을 못 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아무래도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괜찮다. 내 턱을 젖힌 아다르가, 귓불을 은밀하게 더듬어 강제로 입을 열게 만들었으니까.

“무, 으븝.”

달콤한 약물이 입으로 흘러들어왔다.

쓴 걸 극도로 싫어하는 탓에 달달한 맛이 나는 걸 죄다 때려 넣었더니 약에서 혀가 아릴 정도로 단 맛이 났다. 놀라서 뱉어낼 뻔했으나, 아다르가 입술을 꾹 짓눌렀다.

“으.”

약이 턱으로 몇 방울 흘러내렸으나 나머지는 안전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가 입술을 떼며 내 안색을 살폈다. 작게 켈록거리며 놀란 심정을 대변했다.

입으로 줄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하지, 하여튼 이 새끼는 창문으로 뛰어내릴 때부터 사전 통보란 게 없다.

약을 마시고 몇 분간 호흡을 가다듬자 어지럼이 서서히 좋아질 기미를 보였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아다르를 노려보았다. 그가 반달 검처럼 가로로 길쭉한 눈을 얄궂게 접어 웃더니, 내 턱으로 흐른 약물을 뜨뜻한 혀로 슥 핥아 먹었다.

등으로 닭살이 으스스 돋아났다.

“너, 너……!”

고함을 빽 내지르려는 순간, 아다르가 뒤로 홱 끌려갔다.

할릭이 웃는 얼굴로 골치 아픈 길고양이를 포획하듯 아다르의 뒷덜미, 아니 로브를 강한 힘으로 틀어쥐고 있었다. 그가 아다르를 질질 끌며 뒤로 한참 물러섰다.

첼러스가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서둘러 등을 받쳐줬다.

“너, 너는 한 달이나 세수 안 한 얼굴을 핥고 싶어?”

기가 막힌 심정으로 타박하니, 손수건으로 더러운 것 닦아내듯 내 입가를 닦아주던 스노아가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제가 매일 청결 마법을 썼거든요. 지금 깨끗한 상태예요, 카카나.”

“청결 마법?”

나는 신문물을 접한 원시인처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런 게 있어?”

세상에, 맙소사. 이걸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머리를 감기 위해 온갖 난리를 피웠던 지난 나날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스노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마나도 회복되었으니, 이제 매일 해드릴게요.”

나는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고 금세 시무룩해졌다.

“우리 곧 헤어지는데 뭘.”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보면서 다리에 힘을 줬다. 사제가 주기적으로 다녀간 덕분에 근육이 많이 빠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움직여졌다. 끙, 소리를 내며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렸다. 침대에 앉아있는데도 상체를 지탱하기 힘들었다. 뼈에 붙은 살덩어리가 힘없이 물렁거리는 게 나한테도 느껴질 정도다.

무거운 추를 매달아 놓은 양 몸이 축축 처졌다.

‘오늘부터 재활운동 시작해야겠다.’

제국은 나를 먼저 노리지 않았는가.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용사들과 하루빨리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주목받는 건 사양이야. 다시 숨어 살아야 해.’

이제 그들은 천하제일무적이니까 나 따위 없어도 제국을 전복한 뒤 알아서 은혜를 갚든 할 거다.

“여기 여관이지? 식당이 있을 테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 헤어지기 전에 같이 밥 먹고 싶다며.”

“아니요.”

스노아가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부정했다. 단호하기가 무 자르듯 딱딱해서 말싸움을 끊어내는 사람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조금 굳어서 그를 쳐다봤다. 스노아가 흔들림이 없는 눈으로 날 봤다. 하늘과 바다가 맞물린 것처럼 그의 얇은 입술이 수평선을 그리며 다물려 있었다. 눈썹도 인상을 쓰듯 눈두덩 가까이에 내려와 있다. 꼭 밀랍처럼 결연한 얼굴이었다.

어떤 감정적 호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은, 각오로 한 치의 흠도 없이 응고된 것 같은 얼굴.

“뭐, 뭐가 아니라는 거야?”

약간 기가 죽어서 어물어물 말을 더듬었다. 나는 내가 뭐라고 했던가, 차분히 곱씹으면서 대체 어떤 점이 스노아를 이토록 견고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보았다.

“헤어질 수 없어요, 카카나.”

“응?”

“제국이 왜 당신을 노렸는지 알아냈어요.”

나는 팔짱을 끼고 그를 올려다봤다.

“저희가 살아있다는 건 다른 존재의 개입을 의미해요. 이를 제국이 모를 리 없고요.”

“그건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이었어.”

“카카나를 공격했던 황실마법사의 말을 들어보니, 패밀리어가 왔다더군요.”

스노아가 간병인용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얘기했다.

“용사를 살린 원흉이 당신이라고 추정한 모양이에요.”

“그럴 거면 보다 치명적인 마법으로 날 확실히 죽이지, 왜 여지를 남겨?”

나는 날카롭게 허점을 찔렀다.

“포이즌을 건 매직애로우 한 발은 너무 애매하지 않아? 상황이 안 좋긴 했지만, 살 가능성이 있잖아. 차라리 불 계열의 파이어애로우 여러 발이 확실했을 텐데?”

스노아가 입을 다물었다.

옆에 있던 첼러스가 시선을 던지자, 스노아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빴던 나는 그들의 의미심장한 신호를 무심코 넘겨버렸다.

“정신이 없었던 거겠죠. 프라스디르의 공격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으니까요.”

별로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어차피 별로 중요한 사안도 아니었다.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대화를 끝내기 위해 말을 이었다.

“일단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제국이 날 노리고 있고, 위험하니까 이대로 헤어질 순 없다는 거잖아.”

“네.”

“그게 뭐?”

“…….”

“아까 말했듯이 그 정도는 예상하고 너희 도와준 거야. 번복은 없어.”

이런 일일수록 망설임 없이 말해야 한다. 질질 끌면 용사들의 걱정만 긁어모으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노아가 내 어깨를 짓눌러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다섯 명의 용사들이 빈틈이 없이 붙어 서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스노아가 무릎 위에 놓인 내 손을 족쇄같이 휘감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싫어.”

뇌를 거치지 않고 거절 의사가 터졌다. 대화가 이 지경까지 치닫자, 스노아도 날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

동행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치고 어투가 너무 침착했다. 나는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스노아의 차가운 외모를 샅샅이 훑었다.

무슨 속셈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정말 말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툭 질문했다.

“설마 너희 강제로라도 날 지키겠다,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스노아가 봄바람에 사르르 녹는 흰 눈처럼,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들켰나요?”

저희가 그렇게까지 타락한 사람인 줄 아느냐는 대답을 예상하고 미리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나는 흠칫 굳었다.

“방금 뭐라고?”

“카카나의 말이 맞다고 했어요.”

스노아가 대답했다. 절로 입이 벌어졌다. 나는 놀란 눈으로 나머지 용사들을 살폈다. 모두 견고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꼭 다른 사람 같았다. 마치 이게 본래 모습이었다는 것처럼.

내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스노아가 내 머리를 보드랍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몹시 다정하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미안해요.”

어조가 침울했다. 진심으로 이런 방식을 바라지 않았던 눈치여서 더 알 수가 없어졌다. 충격으로 이성의 고삐를 살짝 놓친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데, 왜 너희들이 나서?”

내뱉는 즉시 실수를 깨달았으나 숨겨뒀던 진심은 이미 용사들의 귀로 달아난 지 오래였다. 이판사판이다. 나는 쩡 얼어붙은 공기를 무시하고 하고 싶었던 말을 주욱 읊었다.

“내 목숨을 내가 어떻게 하든 너희가 무슨 상관이야? 알아서 감수하고 떠나겠다는데, 왜 나서서 이러냔 말이야.”

“방금,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셨나요?”

스노아가 차가운 어조로 끼어들었다. 나는 옆에 서 있던 첼러스의 손을 잡아 끌어왔다. 석상처럼 미동도 없던 무게감이 순순히 내 손을 따르며 끌려왔다. 스노아는 이상한 구석으로 각성한 것 같으니까 첼러스라도 꼬여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첼러스, 너도 내 의견에 동의하지? 당사자 의견과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지키겠다니 그건 그냥 민폐잖아. 오지랖이라고. 그렇지?”

“카카나.”

첼러스의 깊은 눈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단단한 표정과 나직한 목소리에서 희미한 노기가 느껴졌다.

‘기분 탓인가. 저번에도 이런 첼러스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카카나 씨는, 소중한 사람이 죽어도 상관없다며 위험한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굉장히 당황했지만 애써 그렇지 않은 척했다.

“누, 누가 들으면 너희한테 내가 괴, 굉장히 소중한 사람인 줄 알겠네.”

“어휴, 저 바보.”

아다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탄했다. 돌연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쉰 할릭이 첼러스를 밀어내며 말했다.

“너 진짜 바보야?”

“뭐?”

“네가 우리에게 이미 소중해졌다고, 내가 말했었잖아. 벌써 까먹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할릭이 아다르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를 솜이불로 꽁꽁 감싸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뭐 하고 있는 건가 지켜보다가 뒤늦게 몸을 꿈틀거렸다.

늦었다. 솜이불에 단단히 갇혔다.

“뭐, 뭐야? 이거 안 풀어?”

“됐어. 이렇게 자각이 없고 무신경한 애랑 무슨 대화를 하냐.”

“할릭, 너무 솔직합니다.”

할릭이 첼러스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우린 그냥 오지랖이 넓은 야만인이고 짐승이다, 됐냐? 넌 안전한 곳을 발견할 때까지 우리한테 얌전히 모셔지는 거야. 물론 거부권은 없어. 도망치는 것도, 벗어나는 것도 안 돼.”

“무슨……!”

바로 반박하려다가 어두운 기운이 넘실거리는 주황색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분위기가 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특히 지금처럼 제국이 널 노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시점에선, 더더욱 안 돼. 알겠어?”

할릭이 짐승의 것처럼 사나워진 어조로 못을 박았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죽을 게 뻔한데 도대체 누가 그냥 보내겠냐고, 엉? 그래, 안 그래?”

“…….”

“카카나, 네 친구를 생각해 봐. 친구가 자의로 지옥에 걸어 들어가면, 너 안 말릴 거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거봐! 너도 그럴 거잖아. 아무튼 안전한 곳을 찾아도 너에게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뭐라고?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알아.”

나는 다시 기가 죽어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우리 강한 거 알지? 도망치는 건 꿈도 꾸지 말고 남은 세월을 어떻게 지루하지 않게 보낼지나 생각해.”

아다르가 비스듬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뭐, 가끔은 할릭의 솔직하고 막무가내인 방식이 도움이 될 때도 있는 법이지.”

할릭이 거의 번데기 수준으로 포장된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더니 침대 헤드보드에 등을 기댈 수 있도록 내려놓았다. 몸이 갑자기 움직이자 정신이 아뜩해져서 눈을 감았다.

“괜찮아? 어지러워?”

할릭이 걱정하며 물었다. 나는 그의 파이어 오팔처럼 뚜렷한 주황색 눈을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한데 혹시 이중인격이니?”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

할릭이 이불을 편하게 풀어주며 웃었다.

“우리랑 하루빨리 헤어지고 싶었던 것 같은데, 안됐네.”

아다르가 눈썹을 산 모양으로 그러모으며 과장된 어조로 탄식했다. 간절하게, 진짜 딱 한 대만 싸대기를 갈길 수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이를 벅벅 갈다 말고 눈앞이 핑 돌아서 몸을 늘어뜨렸다. 한숨 돌리고 나니 흥분된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는 머리를 차분하게 식히고 생각을 해보았다.

‘얘들은 날 놓아줄 생각이 없다 이거지.’

혼자 여행길에 올랐다가 비명횡사할 거라는 건 용사들이 거듭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되는대로 살다가 살아지면 살고, 죽어지면 죽을 작정이었다.

‘이런 순간이 오기를 줄곧 고대했으니까.’

이어 붙이기 급급한, 비루한 목숨이었다. 전전긍긍 겁에 질려 사는 게 지겨웠다. 악몽에 시달리는 것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도, 약초에 매달려 생각과 감정을 없애려 시도하는 것도.

그들이 날 놓아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내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항상 곁에 있어 익숙해졌지만 그들은 전설이나 동화 속에나 나오는 용사들이지 않은가. 다 죽어가는 생명 살려놨더니 이런 식으로 구는 게 용서되지 않았지만, 그래야 하지만, 기이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되리란 걸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것처럼 마음이 차분하다 못해 안온했다.

‘너무 편해서 이상하네.’

이러면 꼭, 내가 바랐던 상황 같지 않은가.

약초를 연구하거나 할릭에게 안겨 잠들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나는 멍하니 질문했다.

“나를 안전한 곳까지 모셔놓겠다고……?”

나는 스스로 말해놓고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이것 말고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 있었다.

“스노아, 너 디카나 산의 지하시설에서 어떻게 탈출한 거야?”

스노아가 불현듯 배를 찔린 사람처럼 헛숨을 삼켰다.

“너한테 약을 주긴 했지만 마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잖아. 내 기억이 맞다면 넌 양손이 결박되어 있었어. 맞아?”

“네,”

“배후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여태 안 물어봤어. 너희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거든. 한 패일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디카타 산맥에 있을 수 없는 양도 의심스러웠지만, 이 문제는 우선 함구했다.

“어떻게 약을 마시고 도망쳤는지 알려줘. 우리 집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동행에 관한 논의는 이다음이야.”

스노아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불쾌한 것을 떠올린 얼굴이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일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시원하게 대답했다.

“황녀가 도와줬어요.”

정말이지 뜬금없는 등장이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스노아를 올려다보았다.

‘황녀? 황녀라고?’

갑자기?

놀란 심정을 막을 길이 없다.

“황녀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저를 도와주고 떠났어요. 그녀도 지하시설에 몰래 온 것 같더군요. 카카나의 집 좌표도 그녀가 주었고요.”

“황녀가 그런 걸 주면서 아무 말도 안 했어?”

“저희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닌지라, 그때는 황녀의 말을 따랐죠.”

스노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황녀가 우리 집 좌표를 어떻게 알아?”

“알 수 없는 일이죠.”

나는 골치가 아파 머리를 쥐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물인 자가 엮였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혹시 약물을 밀수출했던 게 걸렸나?’

국내에 풀면 꼬리가 밟힐 것 같아 중개업자를 수십 명 거쳐 해외에 소량만 수출했었다. 돈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소문이 퍼졌겠지만, 결국 그게 문제가 된 것 같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면 황녀가 내 존재에 대해 알아챌 방법이 도무지 없었다. 우리 집 좌표를 알아내는 건 더더욱.

약물을 밀수출했던 것과 상관없이, 날 용사와 엮은 건 몹시 의문이 남는 일이었지만 이건 차후 알아봐야 할 일인 것 같았다.

양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 여자는 아니라니까 안심이 되네.’

어깨의 힘을 내려놓으며 길게 숨을 쉬었다.

나는 용사들의 시선을 느끼며 눈을 떴다.

“황녀에 대한 건 앞으로 알아보면 되겠지.”

“그러면 저희와 동행하시는 건가요?”

스노아가 희망 어린 어조로 물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뭔가요?”

“내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해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해.”

죽더라도 밝혀지면 안 된다.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마침 만들어 놓은 마도구가 있어요.”

스노아가 내게 은반지를 건네며 속삭였다.

“당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건 저희도 바라지 않는 일이니까요, 카카나.”

겉보기엔 단순한 반지였지만 안쪽에 무언가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포지 링인가?’

스노아가 주었으니 시문은 아니고 마법주문인 것 같았다. 그것을 손바닥에 굴려보다가,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일순 차가운 물이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온 피부를 스치며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부르르 떨며 쭈뼛 선 머리카락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스노아가 반지를 끼운 내 손가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주일 전에 완성시킨 거예요. 환영마법이 걸려있어요. 같은 반지를 착용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겐 우리의 외양이 다르게 보이죠. 눈이나 코 모양이 다르거나 하는 식으로요. 우리도 이제 착용할 거예요.”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은 눈치채지 않아? 이 정도로는…….”

“아니요.”

스노아가 친절한 대마법사의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눈치챌 수 없도록 만들었답니다.”

대답이 아주 간단명료했다. 마법에 문외한인 나조차 저게 그리 쉽게 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안다. 옅게 땀이 스며 나온 손가락으로 반지를 문질렀다.

갑자기 새끼손가락에 집 한 채라도 매달아놓은 기분이었다.

“대신, 피부끼리 접촉하면 안 돼요. 그러면 마나에 조예가 있는 사람에겐 들키게 될 거예요.”

“알았어.”

“이 정도면 안심이 되실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하신 대마법사님께서 만들어준 마도구가 있는데, 뭐가 두렵겠나 싶다.

식사를 받으러 나갔던 첼러스가 마침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이렇게 된 거 극진한 보살핌을 받자고 결심한 나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첼러스가 떠주는 미음을 받아먹었다.

한낱 민간인인 내가 뭘 어떻게 하겠나. 그들이 다섯 살짜리 어린애처럼 떼를 쓰며 함께 있고 싶다는데. 해탈한 상태로 미음을 우물거렸다.

‘인생 참 알 수가 없네.’

어서 헤어지자고 시도한 게 되레 용사들을 더 달라붙도록 만들어버리다니…….

“근데 여기 좋은 여관인가 봐? 방도 크고, 이불 상태도 좋고…….”

“여관이 아닙니다, 카카나. 로울리에 있는 아누비르 본부입니다.”

첼러스가 숟가락으로 뜬 미음을 후후 불어주다 말고 대답했다.

“용병 길드 말하는 거야?”

“길드장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숟가락을 내밀었다. 그것을 입술로 앙 물어 삼켰다. 첼러스가 아기 새처럼 주는 족족 받아먹는 날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길드장이 왜 도와줘?”

“대화를 좀 나눴지.”

할릭이 빙글거리며 대답했다.

“대화.”

첼러스가 할릭의 말을 따라 말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갑자기 불길해졌다.

“내가 신화급 용병패의 주인이라는 걸 좀처럼 인정을 안 하더라고. 그래서 증명을 해줬지.”

“그거 외의 문제는? 저번에 보였을 땐 용병들이 우릴 거의 잡아먹을 기세였거든.”

“아, 그러고 보니.”

뭔가가 생각난 듯 할릭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기 머물면서 알게 된 건데, 현재 용병왕이 신화급 용병패의 주인을 찾고 있다더라?”

“큽.”

먹고 있던 미음을 조금 뱉어냈다. 첼러스가 등을 쓸어줬다.

“걱정 마. 길드장이랑 잘 얘기했으니까. 하하!”

할릭이 순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렇게 웃고 있지만, 그는 한때 용병들을 호령했던 최초의 용병왕이었다. 어떤 얘기든 간에 범상치 않은 절차를 밟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생각하길 포기하고 입을 벌렸다. 첼러스가 다 식은 미음을 입에 넣어주었다.

***

보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계절은 벌써 초봄에 접어들어서 날씨가 꽤 따뜻해졌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숲은 약동을 시작하여 연둣빛 새싹 옷을 입기 시작했고, 얼마 전엔 봄비도 내렸다.

얼음으로 빚은 것처럼 날카롭던 바람이 적당히 녹아 물결처럼 이마를 적시며 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작열하는 태양이 머리 높이 솟아있는 숲에 들어와 있었다.

“할릭?”

“응?”

“산책이라며.”

“그럼, 산책이지. 오늘 날씨 좋지 않냐?”

나는 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소매로 훔쳤다. 워낙 숲을 좋아하는 성미라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 나쁘진 않아!

문제는 내가 아직 환자라는 점이지!

고생스러웠던 지난 나날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켰다. 첼러스의 지도 아래 얼마나 구르고 굴렀던가. 그가 손을 잡아주긴 했지만, 복도를 수십 번 왕복하고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간신히 도시를 구경할 수 있게 된 사람을 데리고, 숲에 왔다. 누가? 저 멍청한 곰, 할릭 갈로프사가.

숨을 헐떡이며 무릎을 짚었다. 땀이 비질비질 흘렀다. 여기 드러누워서 딱 두 시간만 자고 싶었다.

“조금만 참아, 카카나. 거의 다 왔어.”

“아까도 그랬잖아!”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진짜야. 소리 안 들려?”

“무슨 소리?”

힘을 다 소진하고 흘러내리려 하는 얼굴 근육을 애써 긴장시켰다. 귀를 기울이니 확실히 어떤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처음엔 쇠붙이들을 길게 마찰시키는 소리처럼 들렸으나, 거기에 사람의 비명소리가 더해지자 무슨 소린지 정확히 감이 왔다.

싸움터였다.

“너 미쳤어?”

진심 이백 퍼센트인 내 얼굴을 확인한 할릭이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나를 번쩍 안아들며 얘기했다.

“한계구나?”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할릭이 아야야, 아픈 척하며 날 달래려했다.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러면 기꺼이 안아서 데려다줬을 텐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날 싸움터에 왜 데려와!”

“막상 가면 재밌을 거야. 이제 달릴 거니까 목 꼭 붙잡자. 옳지.”

할릭의 근육이 풍선처럼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이 녀석, 단숨에 도약할 셈이다.

“그, 그만둬, 미친놈아.”

‘도대체 싸움터에 날 왜 데려가려는 거야아아악!’

내적 비명을 지르는 사이, 몇 번의 도약만으로 싸움터에 도착한 할릭이 날 밑동만 남은 나무에 앉혀주었다. 방금 그의 발돋움 두 번으로 거의 200미터를 날아왔으므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볍게 헛구역질을 하며 황급히 가방을 뒤적이는데, 할릭이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멀리 내다보는 시늉을 했다.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살피는 꼴이 자연경관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처럼 여유가 흘러넘쳤다.

“으흠으흠, 그래. 왜 고전하고 있나 했더니 자이언트 리자드맨이었네.”

“너 설마 날 몬스터 토벌 중인 곳으로 데려온 거니?”

“본부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나는 할릭이 내게 뭐라고 하며 바깥나들이를 제안했는지 떠올렸다.

[카카나! 우리 산책 가자!]

우라질 놈…….

“리자드맨이 가죽이 두꺼워서 그렇지, 속살은 맛있어.”

할릭이 입술을 사악 핥으며 얘기했다. 말로만 듣던, 사람의 탈을 쓴 금수를 맨눈으로 목격한 기분이다.

양 수인인 탓에 채식을 선호하는 난 할릭의 발언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가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는 손에 두꺼운 붉은색 가죽 장갑을 꼈다. 참고로 말하지만 할릭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주먹으로 싸웠다.

그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 중앙으로 튕겨 나갔다. 대부분의 용병들은 이미 열세에 몰려 도망치고 있거나, 중경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모습들이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어서 눈을 감고 생수를 들이켰다.

이런 걸 구경하랍시고 데려온 거라면 할릭도 정말 악취미였다.

할릭은 다양한 방식으로 리자드맨을 도륙하고 있었다. 리자드맨 목 졸라 죽이기, 뺨 때려 죽이기, 꿀밤 먹여 죽이기……. 그의 힘이 너무 강한 탓이겠지만, 내 눈엔 거의 그렇게 보였다.

그가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리자드맨들이 쿵 소리를 내며 줄줄이 쓰러졌다. 살기 위해 울부짖던 용병들은 어느새 마왕이라도 목도한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려서 할릭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게 뭐지?”

그들은 심지어 할릭을 인간이라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웃음이 터져서 혼자 깔깔깔 웃는데, 리자드맨과 용병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곳 뒤편에 작은 방울꽃이 보였다. 가지가 많이 갈라지는 줄기를 가지고 있었다. 높이는 10센티미터에서 15센티미터쯤 되어 보였고, 이파리는 넓은 난형이었다.

꽃잎이 하얗고 끝이 뾰족하다. 나는 혹시나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나 다를까, 파란색 암술대가 밖으로 길게 빠져나와 있었다.

“약초다!”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냥 약초가 아니다. 1년 내내 부지런히 숲을 쏘다녀도 한 번 볼까 말까 한 희귀한 꽃이었다.

눈이 이미 뒤집힌 상태였으므로 무조건 앞으로 돌진하고 보는 소처럼 달음박질 쳤다. 오늘 하루는 더 이상 걷지 못할 거라는 나의 예상을 박살내는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리자드맨에게서 도망치던 용병 하나가 날 보며 헛숨을 들이켰다.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어서 왜 꼴아보냐는 의미를 담아 쳐다보자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내 혈안에 기가 질린 기색이었다.

콧김을 흥, 뿜고 리자드맨과 사람이 없는 곳만 골라 자리를 옮기는데 누군가 팔뚝을 휙 잡아챘다.

“여기서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용병이 이러는 건 드문 일인데, 아무튼 정의감에 휩싸인 용병이었다. 나는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고 최대한 기분 나쁘고 재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놔 주세요.”

“민간인이죠? 몬스터가 안 보이십니까?”

“알고 들어온 거니까 놓으라고요.”

팔을 있는 힘껏 흔들며 그의 손아귀를 털어내려는데, 용병이 더 힘을 주고 놓지 않았다. 이놈은 대체 뭐 하는 새끼냐는 생각이 대번에 뇌리를 장악했다.

“당장 대피…….”

“저기요!”

거하게 뿜어져 나가는 내 사자후에 남자가 너무 놀라 어깨를 위로 휙 치켜 올렸다. 곧 민망한 듯 머쓱하게 끌어내렸지만 이미 내게 다 보인 후다.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아 거의 바닥에 팽개치듯이 뜯어낸 후 고개를 좌우로 파르르 떨어대며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그러는 당신은 지금 저한테 뭘 하고 계신 거예요!”

“예, 예?”

“당신 눈엔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저 딱한 꽃이 안 보여요?”

미친 자를 마주한 남자의 얼굴에 서서히 공포의 감정이 깃들었다.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소리 지르는 걸 멈출 생각이 없었으므로, 이번엔 역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 내 코앞으로 끌고 왔다. 내 희번덕이는 눈을 단거리에서 마주한 남자가 숨을 멈추고 얼음이 되었다. 보랏빛으로 질린 얼굴이 당장이라도 졸도할 안색이었다.

“민간인을 구해야 한다는 당신의 그 하찮은 의무감을 자위하느라 감히 내 성스러운 의식을 막지 말아요.”

“죄, 죄송합니다!”

나는 그를 밀쳐내고는 약초가 있는 곳으로 팩 고개를 돌렸다. 이미 바닥난 체력에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으나 상관없다. 내 당장 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것을 손에 쥐고 말리라!

근데 영 자리가 좋지 않아서, 리자드맨과 용병의 발길에 꽃이 자꾸 차이고 있었다.

“안 돼!”

저 냄새나는 발들이 자꾸 약초를!

‘저러다 밟히겠어!’

나는 세상 서글프고 원통한 음성으로 커다랗게 부르짖으며 두 손을 뻗었다.

“그 발 저리 안 치워?!”

용병들이 할릭을 쳐다보던 눈을 휙 돌려 날 바라보았다. 굉장히 무섭고 불길한 것을 목격한 눈들이었다. 두 쪽으로 갈라지는 대나무처럼 날 피해 좌아악 갈라서는 용병 무리를 헤치며 뛰었다.

문제는 리자드맨이었다. 중상을 입은 리자드맨이 절뚝거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핏발 선 눈으로 리자드맨을 노려보며 가방에 있는 온갖 약물을 던지고 뿌려댔다. 대부분 상처를 통해 침투하여 조직을 궤멸시키는 독이었다.

키이이익!

리자드맨이 고통스러워하며 아무렇게나 칼을 휘둘렀다. 나는 겁도 없이 허리를 숙여 밑으로 피했다. 조만간 내 생화학무기에 당한 리자드맨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두 팔 안에 꽃이 들어올 수 있도록 온몸을 내던졌다.

앞으로 주욱 미끄러지며 옷에 리자드맨의 피와 풀물이 들었으나 눈에 뵈지도 않았다. 나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품에 들어온 꽃을 내려다보았다. 무사하다.

코를 훌쩍이며 흙을 조심스럽게 파내기 시작했다.

“무서웠지? 걱정 마……. 언니가 데려가 줄게…….”

옆에 서 있던 용병이 질겁하며 나와 거리를 벌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약초의 소중한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흙덩이를 털어냈다.

“좋은 곳에 널 써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렴. 세상에, 뿌리 상태가 이렇게 좋다니. 이건 상등품이야. 심지어 방금 채집한 거라고…….”

감격에 젖어 약초를 가방에 넣으려는 순간,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흡,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들었다. 광분해서 가시 박힌 곤봉을 휘두르는 리자드맨이 보였다.

찰나의 순간이라 아무런 대응도 못 하고 다가오는 무기를 쳐다보는데 리자드맨이 위로 부웅 떴다.

우두둑―

사람보다 두 배는 굵은 목뼈를 쉽게 부러트린 할릭이 고깃덩어리를 휙 치웠다.

리자드맨의 긴 주둥이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가죽 장갑에 튀었으나, 할릭이 몇 번 털어내자 티도 나지 않았다. 그가 장갑의 색을 빨강으로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은 순간이다.

“뭐야? 예쁘게 생겼네?”

할릭이 방울 모양의 꽃을 보고 감탄했다.

“그치? 생긴 게 예뻐서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더라니까.”

나는 금세 헤벌쭉해져서 종알종알 떠들었다.

“이 파란색 암술이 얼마나 귀한 재료인지 몰라. 잘 말려서 뿌리랑 같이 빻아두면 오래오래 쓸 수 있어. 할릭, 이 녀석! 이리 와봐!”

이 기특한 녀석! 예쁜 녀석!

할릭이 허리를 숙여주었다. 나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등을 팡팡 두드려줬다. 제아무리 낯짝 두꺼운 할릭이라지만 갑자기 끌어안을 줄은 몰랐는지 표정이 바보처럼 어벙해졌다.

“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왜?”

“갑자기 허물없이 대하잖아. 보통 이런 식으로 끌어안지는 않아.”

“그래?”

‘그곳’에서는 친구들과 이런 식으로 온기를 나누는 게 당연했었다. 서로의 체온만이 위안이었으니까.

나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지냈던 과거를 들킨 것 같아서 약간 움츠러들었지만, 약초를 생각하자 곧 마음이 가벼워졌다.

“날 여기로 데리고 오다니! 잘했어! 엄청 잘했어!”

숲에 왜 데려온 거냐며 화를 내던 때는 이미 다 잊혔다. 그저 행복해서 실실거렸다. 그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앞으로도 자주 데리고 다녀줘야겠네.”

“그럼 물론이지! 당연하고말고!”

우린 수많은 리자드맨의 시체와, 엉덩방아를 찧은 채 넋이 나가 우릴 쳐다보고 있는 용병들을 뒤로한 채 희희낙락하며 본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첼러스한테 혼났다.

“그녀를 데리고 리자드맨의 서식지로 향하다니, 제정신입니까.”

할릭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내가 앓아누웠기 때문이다. 딱히 할릭의 잘못이라기보단 한 번은 꼭 치러야 할 과정 같은 것이었지만 그게 할릭의 죄책감을 위로해주진 못했다.

나는 일주일간 사경을 헤맸다.

간혹 정신이 들어 눈을 뜰 때마다 침울한 얼굴로 이마의 수건을 갈아주는 할릭이 보였다. 오래되어서 먼지 냄새가 날 것 같은, 빛바랜 기억들을 꿈으로 죽 훑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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