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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전설의 시작 (4/43)

Chapter 4. 전설의 시작

용사들이 날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결판을 짓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다. 나는 그들이 날 어떻게 보든 상관 않고 혼잣말을 했다.

“제국한테 찍혔으니까 나도 주거지를 옮겨야 해. 치료가 끝나면 새로운 거처를 알아보면 될 테니까…….”

아다르가 얼굴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잠깐, 카카나. 그게 무슨 소리야?”

언뜻 신경질까지 배어있는 목소리라 어리둥절해져서 그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냐니. 마나 방출하자는 소리지.”

“그나마 남은 마나까지 전부 방출하면 우리는 무방비해져. 그러면 너는 누가 지켜?”

“당연한 걸 왜 물어? 당연히 나지.”

나는 코웃음을 쳤다.

“너희도 당연히 내가 지킬 거고.”

장내에 적막이 맴돌았다. 나는 싸한 분위기를 느끼고 눈을 빠르게 좌우로 굴렸다. 다들 굳은 얼굴로 날 응시하고 있다.

“왜들 그래?”

기색이 심상치 않다. 겁을 먹고 입을 열자, 첼러스가 돌연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촉감이 꺼슬한 손으로 내 팔을 잡아챘다.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첼러스가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숲속 호수처럼 웅숭깊은 눈망울이 가느스름하게 뜨인 눈꺼풀 사이로 선명하게 빛났다. 그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 나를 고요히 응시하자, 저절로 긴장되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그럴 수 없습니다.”

“뭐?”

팔을 빼려고 힘을 줬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위 사이에 손이 끼인 것 같다.

첼러스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 때문에 놓으라고 반항하기도 쉽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돌리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그럴 수 없다니?”

“계획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내가 좀 비실비실하게 생겼지만 두 시간 동안 버틸 능력은 돼. 그리고 5년이면 제국도 준비를 끝내고 숲에 들어올 수 있어.”

“제국이 준비를 하는 만큼 저희도 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첼러스가 지지 않고 반박했다.

“제국군은 비열합니다. 당시 최강이라 불렸던 자들도 한 번의 실수로 몰락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적을 당장 다음 주에 홀로 상대하시겠다는 겁니까?”

팔을 잡고 있던 첼러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힘 조절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벌써 피가 안 통했다.

나는 이걸 계획을 강제로 이행하면 사지를 포박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그래, 카카나. 너무 위험해.”

옆에 앉아 있던 할릭마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굳이 말로 하진 않았지만 아다르, 스노아, 아르모어의 얼굴에서도 결사반대의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아득해진 기분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심정은 이해한다. 잘못해서 다 같이 죽느니 5년을 버리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거겠지. 그러나 나도 생각이 있었다.

죽음의 숲에는 몇 년간 칩거해본 경험이 있지 않는 이상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독초들이 많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빠삭했다. 제국에 알려진 독초 목록도 죄다 꿰고 있었다.

그들이 모를 만한 독초는 지금 당장 백 가지도 댈 수 있고, 시간만 주어진다면 알려지지 않은 극약도 오십 가지는 만들어 낼 수 있다. 나보다 능력이 좋은 약사라 하더라도 ‘알려지지 않은 독’엔 대응하지 못한다. 격전지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내가 노리는 건 그거였다.

“마나폭발은 마법스크롤로 막을 수 있어. 쳐들어온 제국군도 해결할 방법이 있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근데 왜 들어보지도 않고 정색부터 해?”

“카카나, 저희는…….”

“내가 너희를 치료하기 전에 제국군이 준비를 마치고 쳐들어오면, 그건 안 위험할 것 같아?”

“우리가 마나를 방출하면 가장 위험해지는 건 그대다.”

아르모어가 진중하게 첨언했다.

‘내가 위험해진다고?’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이 터졌다. 내 삶이 망가진 순간부터 난 항상 위험한 삶을 살아왔다. 이제 와 새로운 것도 없는 사실을 용사들이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상관없어요.”

“허면.”

아르모어의 섬뜩한 핏빛 눈망울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대의 안전이 상관없을 만큼 중요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군. 안 그런가?”

“네?”

“굳이 서두르는 이유가 뭔지,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소리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르모어가 날 지긋이 들여다보았다. 왜인지 모르게 그의 화법에 말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저었따.

“그렇지 않아요.”

부정했지만, 아다르가 당황하지 않고 질문했다.

“제국이 준비되기 전에 선수를 치기 위해. 정말로 그 이유 하나뿐인가?”

내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자, 첼러스가 불안한 눈빛을 했다. 나는 주먹을 쥐고 소리쳤다.

“당연하죠!”

“아니면.”

한결같이 차분한 아르모어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선에 꿰뚫린 듯, 입이 다물렸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마지막 질문이 심장을 훅 후비고 들어왔다. 나는 완전히 말을 잃었다.

내 안 깊숙한 곳에 오랫동안 묵혀 뒀던 무언가가 시커멓게 부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혀에 쓴맛이 느껴져서, 억지로 침을 삼켰다. 가시라도 삼킨 것처럼 목울대가 뻑뻑했다.

줄곧 웅크리고 있던 불안이 아르모어의 질문에 자극을 받아서 빛 한 점 없는 악으로 새카맣게 터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들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니 저런 질문을 할 수도 있었다.

‘내가 자초한 거야.’

그들이 내 사정을 알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선을 그었다. 돌아설 때 미련이 없기를, 깔끔하게 헤어질 수 있는 관계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껏 잘 지켜지고 있었다.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서. 마음도 주지 않고. 가볍게, 생각 없이, 그늘 속 벌레처럼.

그랬는데.

[가여운 카카나. 친구들을 살리고 싶니? 어쩜, 너는 지켜야 할 사람이 그리도 많니?]

결국, 환청이 머릿속을 들쑤시고 들어왔다. 나는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안 돼. 생각하지 마.’

그러나 쏟아져 들어오는 옛 기억들을 막을 수가 없다. 저들 탓이었다. 그들이 계속 날 망치고 있었다. 내게 정을 주고, 소중히 여겨주고, 안전을 걱정해주면서, 계속 날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내 안을 들여다보기 위한, 직접적인 질문을 하는 단계까지.

나는 이제 할릭에게 안겨 잠을 자고, 아다르에게 음식을 받아먹고, 그들이 내 머리를 만지며 대신 땋아줘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져버렸다. 그 짧은 시간 내에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길든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뒤늦게 그 위화감을 생각하며 태도를 차갑게 식혀도 소용없었다. 용사들은 그것마저 포용해버렸다.

그런데 5년이었다. 3년도 걱정이 되는데, 5년이나 함께 있어야 했다.

[잘 들으렴, 귀여운 카카나. 영원히 여기에 처박혀서, 그대로 썩어야 한단다. 다시는 기어 나오면 안 돼. 알겠니?]

숨이 서서히 가팔라졌다. 나는 두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도톰한 입술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카랑카랑한 웃음소리가 귀를 꿰뚫는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데…….’

그러나 진정이 되지 않았다. 곧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 돼. 정신 차려.’

이건 부작용이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무서워할 필요도, 몸을 떨 필요도 없다. 환청일 뿐이다. 그녀는 여기 없었다. 그런데도 떨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은, 목소리는, 그리고 ‘장면’들은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머릿속을 쑤시고 들어온다. 도저히 막을 수 없다. 항상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리고 만다.

있지도 않은 목소리를 들으며 비명을 지르고, 있지도 않은 환영을 보며 옷장으로 기어 들어가 숨는다.

‘괜찮은 척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이상을 눈치챈 스노아가 가까이 다가와 손을 뻗었다.

“건들지 마!”

날카롭게 쳐내며 눈을 치떴다. 눈물이 조금 고였는지, 시야가 울렁거렸다.

[누구에게도 널 보이지 않아야 한단다. 그래야 친구들을 지킬 수 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용사들을 차례로 살폈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내게 정이라도 들었는지, 신경질적으로 밀쳐내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마나를 방출하면 가장 위험해지는 건 그대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좋아. 알았어.”

나는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차피 헤어질 사이다. 흥분한 탓에 목소리가 이상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날 믿지 않는데 아무리 떠들어봤자 내 입만 아프지. 나는 당하지 않을 자신 있어. 자신이 있으니까 굳이 시간을 당기는 거고.”

“하지만 그러다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상관없다고 했잖아!”

날 걱정하는 얼굴들에 버럭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나에게 토를 달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그러니까 얌전히 따라. 다음 주에 계획을 이행할 거야. 그렇게 알고……악!”

일은 갑자기 벌어졌다.

첼러스가 성큼 다가오더니, 과감하게 팔을 뻗어 날 번쩍 안아 올렸다. 평소 그리 조심스럽던 사람은 누구였나 싶을 정도로 거친 손길이었다. 나는 기겁하며 그의 가슴팍에 파묻혔다.

콩닥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눈을 끔뻑이고 있으니, 그가 내 다리를 안정적으로 받치며 선언했다.

“잠시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오겠습니다.”

무지막지하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저음에 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자, 할릭이 안쓰러운 표정을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퍼뜩 인식이 안 되었다.

그러다 조만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나는 다급하게 할릭을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금방 내려드리겠습니다.”

첼러스가 바늘 하나 안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을 잘랐다. 나는 애처롭게 할릭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쳐다보지만 말고 어떻게 좀 해봐!’

“자, 자, 잠깐…….”

“너 화나면 무서워지니까 적당히 해.”

아다르가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그러자 첼러스가 평소와 같은, 유순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정체 모를 위기감에 몸이 떨렸다.

아다르처럼 웃으면서 살기를 뿌리는 성격이 아닌데도 첼러스에게서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내려달라 패악질을 부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황망하게 눈만 끔뻑였다.

당당하게 요구하면 착실하게 따라줄 그이지만, 이번만큼은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지척에 서 있는 스노아가 보였다.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알아챘는지, 스노아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때마침 첼러스가 걸음을 떼는 바람에 미수로 그치고 말았다. 대놓고 움직인 탓에 눈치를 밥 말아먹은 나조차 첼러스가 피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스노아의 파란색 눈썹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첼러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첼러스가 완고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스노아가 한숨을 쉬며 나를 보았다.

“첼러스는 제 사람에게 상냥하니 너무 걱정 말아요, 카카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도 방금 얘 목소리 들었잖아. 날 잡아먹을 기세란 말이야!’

멀어지는 스노아를 애처롭게 쳐다보는데 문득 첼러스가 물었다.

“제 방으로 갈까요, 당신 방으로 갈까요.”

깍듯하게 격식을 차린 말투가 바로 귓가에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내, 내 방으로…….”

첼러스가 나를 제대로 고쳐 안으며 계단을 올랐다. 방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장이 터질 기세로 쿵쾅거렸다.

단둘이서 무슨 대화를 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땅으로 꺼지든 하늘로 치솟든 도망치고 싶다.

혼란을 느끼다 돌연 억울한 심정이 치밀었다. 그냥 자신 있으니 믿고 따라오라고 한 것뿐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재수 없게 말한 것 같긴 하지만, 지켜주겠다면 편하게 보호받으면 될 일이지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일인가.

화까지 낼 일이냔 말이다.

‘아니면 다른 것 때문에 화가 난 건가? 너무 오랫동안 혼자 지내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내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첼러스가 방문을 열었다.

그가 바닥에 내려주자마자 침대로 조르르 도망쳤다. 그리고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혀 놓았던 양 인형 근처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마음이 조금쯤 진정되었다.

첼러스가 의자를 들고 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와 마주 보고 있으니 심장이 터지려 했다.

나는 그의 턱 부근을 노려보며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고집스러워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라도 내 완고한 뜻이 전해질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카카나, 저희의 안전보다 당신의 안전이 더욱 중요합니다. 아까처럼 말씀하시면 누구도 납득하지 못합니다.”

“난 너흴 납득시킬 생각 없어. 그냥 빨리 치료하고 보내버리면 끝이야.”

“카카나.”

첼러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움찔 고개를 뒤로 빼자, 그가 내 턱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강제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금발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첨예하게 벼려진 하늘색 눈망울이 나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닐 것처럼.

“왜 스스로를 상처 입히시는 겁니까?”

선득한 감각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눈을 콱 감아버리자, 첼러스가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습한 숨이 지척으로 쏟아졌다.

“일부러 차갑게 행동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 그런 적 없어.”

“거짓말입니다.”

그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선한 얼굴을 코앞에서 마주 보니 엄중한 분위기가 머리를 짓눌렀다.

첼러스 밀라다스는 태산 같은 사람이다. 첫인상도 그랬고, 여태 한 번도 가벼운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가 두르고 있는 묵직한 공기가, 손길이, 시선이, 그만의 신념을 가지고 내게로 향할 때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지니게 될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지금 내게 기울고 있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하면 벌 받습니다.”

“누구한테?”

“누구든 될 수 있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말씀해보시겠습니까?”

“뭘.”

“왜 그렇게 떠시는지, 그리고 왜 서두르는지.”

“아까 말했잖아. 제국이 쳐들어오기 전에…….”

“카카나는 거짓말에 서투릅니다.”

나는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으며 입을 우물거렸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침묵을 택하고 고개를 숙였다.

첼러스가 고개를 숙인 날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 한층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카카나.”

심장이 극도로 빠르게 뛰었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그의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긴장을 끌어당겼다.

‘더 들으면 안 돼. 후회할 거야.’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첼러스의 선하고 맑은 눈이 보이지 않는 족쇄처럼 날 결박하고 있었다.

그가 상냥한 사람이기데 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무심했다면…….

“누군가.”

차라리 내게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가 금방 도망치고 마는 예민한 동물을 다루듯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다.

“당신을 위협하고 있습니까?”

숨을 멈추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나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얼굴 가죽이 차가워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이 자리에서 졸도하고 싶었다. 이 순간을 얼렁뚱땅 넘겨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충격으로 굳었을지언정 정신만은 얼음 호수에 몸을 담근 듯 또렷했다. 첼러스 또한 태산처럼 미동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무슨 수로 안 거지?’

한 마디도 한 적 없었다. 내 얘기는. 그것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두 손에 힘을 주었다가, 너무 티 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첼러스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표정 변화가 없다. 의례적으로 유순한 미소를 짓곤 하던 그인데.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초조하게 씹었다.

첼러스의 선명한 시선에서 시퍼렇게 일렁이는 불꽃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아.’

그리고 깨달았다. 그의 분노가 어디서 왔는지를.

용사들은 눈치가 좋다. 그것은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혜안이었다. 가장 원초적인 본능의 힘이며, 범인과 다르게 고삐도 그들 손에 쥐어져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짐승 같은 직감과 본능.

‘위협받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구나.’

필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허리로 소름이 내달렸다.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라도 말했다간 모든 걸 들켜버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첼러스가 말했다. 차마 뭘 알겠다는 건지 물을 수가 없다.

그가 내 주먹 쥔 손 위로 크고 뜨거운 손을 올렸다. 피부로 따스한 체온이 스며든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내쳐버리려고 했다.

첼러스가 힘을 꾹 주고 누르지만 않았다면 평소의 그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팔꿈치만 움찔거리고 끝났다.

그가 제 손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내 자그마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부끄럼이 많습니다.”

“…….”

“덕분에 요령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굳은살이 붙은 단단한 엄지가 내 손등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여전히 힘을 주고 있어 뿌리칠 수가 없었다.

민망함으로 얼굴에 열이 오를 즈음, 그가 문득 손을 치우고 말했다.

“두 시간 동안 제국을 상대하겠다는 카카나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자연스럽게 화제가 전환되었다.

“의지가 확고하신 것 같으니 타협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제가 당신을 도왔으면 합니다.”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 되물었다.

“뭐?”

“제가 카카나를 돕길 원합니다.”

“어떻게?”

“시간차를 두는 겁니다.”

첼러스가 온순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대로 돌아온 멀끔한 낯이었다.

“제가 소량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상태에서 스노아, 할릭, 아다르, 아르모어가 먼저 마나를 방출하는 겁니다.”

“너는?”

“그들이 정상으로 되돌아오면 제가 이어서 마나 방출을 하는 거죠.”

“…….”

“제가 맞게 이해했다면 카카나 씨는 치료를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편이 훨씬 안전할 겁니다. 두 시간 걸릴 일이 네 시간으로 늘어나겠지만 하루 안엔 끝낼 수 있습니다.”

나는 고민에 잠겼다.

어차피 그들이 내 과거에서 구린내를 맡든 말든 헤어지면 끝이었다. 하루 빨리 헤어지면 된다. 그거면 되었다. 그리고 가끔 원조만 받으면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면 되는 것이다. 여태 그렇게 살아왔듯이.

‘첼러스의 말이 맞아. 이편이 더 안전해. 하루 안에 끝낼 수도 있고.’

제국이 어떻게 침입해오든, 그 터가 죽음의 숲이라면 우리에게 무조건 유리했다. 첼러스 한 사람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괜찮은 의견이긴 한데 그럴 거면 그냥 아다르가 날 호위하는 게 낫지 않아?”

“그는 암살자입니다. 마을에 몰래 숨어 들어갈 때는 그가 유리하지만, 호위엔 제가 더 적합합니다. 저는 기사니까요.”

“그렇구나.”

“아다르의 마나 운용을 보았습니다만, 네 개의 마나혈을 뚫은 것이라 하더군요. 맞습니까?”

설마 그것보다 많이 뚫어달라는 건 아니겠지.

“맞아.”

“여덟 개의 마나혈을 뚫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머리를 짚었다.

“그러면 검기를 만들 수 있는 최소량의 마나가 수급될 수 있을 겁니다. 아다르도 검기는 다룰 수 있습니다만 주 기술이 암살이어서 적을 다수 상대하는 덴 제가 더 유리합니다.”

여덟 자리면 네 자리의 두 배다.

한 군데라도 잘못됐다간…….

“안 돼. 절대 안 돼.”

“많이 위험합니까?”

“말이라고 해? 잘못 터지면 정기랑 섞여. 정기는 생명에너지야. 마나 같은 불안정한 에너지랑 섞이면 큰일 나.”

“방법이 아예 없겠습니까?”

“나랑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지 않는 이상…….”

첼러스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예?’

나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좋습니다.”

“…….”

“카카나는요?”

첼러스가 다정하게 웃으며 시선을 맞췄다. 내 이름을 발음하는 목소리가 퍽 달콤하게 녹으며 귀로 흘러들었다.

두 허벅지에 힘을 주고 그를 바라보았다.

“부탁합니다.”

첫 만남부터 그랬듯이, 나는 이들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이미 반쯤은 잡혀버렸는지도.’

나는 체념하듯 두 눈을 감아버렸다.

***

이른 아침, 눈두덩을 간질이는 햇빛을 피해 빙글 몸을 돌렸다.

눈꺼풀을 비추는 밝기로 보아 일어날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지만 도무지 잠이 달아나질 않았다. 칭얼거리며 이불을 끌어안자, 묵직하고 기다란 것이 허리를 낚아채 깊숙이 끌어당겼다. 겨울 아침의 서늘한 공기와 대비되는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온기에 파고들었다.

“으응…….”

따뜻해서 기분이 좋다. 잘 빨아서 널어놓은 이불 냄새 말고도 계속 맡고 싶은 향기가 났다. 그것에 뺨을 비비며 생긋 미소 지었다. 감촉이 촉촉하고 보들보들한 게 꼭 누군가의 피부처럼…….

‘피부?’

번쩍 눈을 떴다.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손을 들어 눈두덩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눈부신 미모의 남자가 성스러운 금발을 헝클어트린 채 잠들어 있었다.

입을 벌리고 그를 구경했다. 새하얀 피부와 오뚝한 코, 살짝 벌어진 입술이 명화에 나오는 그림처럼 수려한 남자였다.

‘처, 천사?’

아무리 봐도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그의 반짝반짝 빛이 나는 황금색 속눈썹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단추가 두어 개 풀려 있는 잠옷 상의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방금까지 얼굴을 처박고 있었던 널따란 품이었다. 설상가상 그의 굵고 무거운 팔뚝까지 내 허리에 얹혀 있다.

나는 그제야 천사의 정체를 알아채고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아으허으악!”

첼러스였다.

그와 동침한 지 벌써 삼 일은 됐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된 모양이다. 나는 나의 멍청한 결심을 다시금 후회하며 아프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때는 일주일 전, 첼러스의 마나혈 여덟 자리를 뚫어줬을 때였다.

웬만하면 미루고 싶었는데, 그의 마나를 안정시키는 약물의 효능을 확인해야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마나혈을 여덟 개나 뚫어준 게 잘한 짓인가, 강렬한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이 주간 준비도 철저하게 했고, 비상약도 만들어 두었지만 그래도 불안이 가시질 않아 진정제도 밥 먹듯이 먹었다. 물론 별로 효과는 없었다.

설상가상 첼러스가 새벽마다 고열에 시달리는 바람에 불안이 극에 치달았다. 결국 잘 때도 함께 자야 한다며 그를 내 방까지 끌고 들어왔다. 다음 날 아침 그가 시체로 발견된다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첼러스는 분명 바닥에서 자려고 했다. 거기에 초를 친 건 나였다.

당시 불안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한 침대에서 자야 한다고, 이것만은 양보 못 한다고 악을 썼다. 고지식한 첼러스가 거부할 거라 예상하고 처음부터 세게 나간 거였다.

근데 그는 예의상 거절하는 것도 없이 냉큼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얼떨떨한 나와 태연한 첼러스의 기이한 동침이 시작되었다.

여관에서 아다르와 동침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았으니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생각해보니 당시에 나는 거의 기절했지 서서히 잠들지 않았다. 게다가 아다르는 내가 잠들기 전까지 옆에 눕지 않았다. 물론 내가 먼저 잠들었기 때문에 후에 그가 옆에 누웠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첼러스와 한 침대에 눕자마자 실수를 깨달았는데, 되돌리기엔 너무 깊은 밤중이었다. 그렇게 첫날은 첼러스가 신경이 쓰여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제 와 바닥에서 자라고 하면 속 좁은 사람처럼 보일까 봐 말도 못 꺼냈다.

‘어차피 이 짓도 얼마 안 남았어.’

마나를 방출하기로 결정한 지 한 달이 지났으니, 조금만 참으면 됐다.

‘사실, 이미 적응한 것 같지만…….’

아닌 게 아니라, 요 며칠은 제법 잠을 잘 잤다. 문제는 아침에 일어나 제정신이 아닐 때 그를 보고 질겁한다는 것뿐이었다.

“카카나?”

첼러스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침이라서 목이 잠겼다기에는 지나치게 갈라지는 음성이었다.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 습관적으로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아니나 다를까, 미열이 있었다.

침대 아래에 내려놓았던 침통을 열어 참침을 꺼냈다. 침 끝이 화살 모양으로 생겨, 피부를 얕게 찌를 때 사용하는 침이었다.

“첼러스, 상의 좀 걷어봐.”

첼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걷었다.

나는 그의 울퉁불퉁한 복근을 한 차례 쓸어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문제가 되는 마나웅덩이에 침을 조준하고 짧게 찔렀다가 빼냈다. 찌른 부위로 불안정한 마나의 영향을 받은 시커먼 피가 흘러나왔다.

그것을 깨끗한 거즈로 닦아내고 다른 곳은 괜찮은지 확인했다. 첼러스는 검사였기 때문에 양어깨와 팔뚝에 가장 많은 마나혈이 몰려 있었다. 그의 옷 안으로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어깨 부근을 만져보았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보이면 아예 벗으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깨를 만지느라 허리를 구부린 나와 바로 코앞에 있는 첼러스의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묘한 눈이었다. 맑은 하늘색 홍채가 눈물에 젖어 촉촉했다. 하품이라도 했을까. 그런 것 같았다. 눈물이 가득 고여서 금방이라도 흐르려 했다. 눈썹은 약간 찡그려져 있었다. 방금 일어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나는 숨을 죽였다. 첼러스의 양 뺨이 희미한 열감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상의를 걷어 올린 남자가 내 밑에서 촉촉하고 일렁이는 눈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심지어 미열 때문에 근육으로 뭉친 상체가 조금 분홍빛이다.

나는 옷 안에 집어넣었던 손을 슬그머니 빼내었다.

“음…….”

그 과정에서 피부가 미세하게 긁혔는지, 첼러스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허스키한 음성에 긁힐 만큼, 아주 낮은 신음이었다.

얼굴이 푹 익은 토마토처럼 삽시간에 새빨개졌다. 첼러스가 뒤늦게 내 얼굴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그러더니 곧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치명타다.

“내, 내가…….”

나는 최선을 다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이미 심하게 말을 더듬어버렸지만― 타박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랬지!”

“제가 뭔가 잘못했습니까?”

첼러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억울한 기색이었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어떻게든 이 열기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변태 카카나. 죽어라, 그냥!’

창피해서 못 살겠다. 이게 대체 몇 번째인가.

침대 위의 첼러스는 작정한 사람처럼 관능적으로 행동했다. 아니, 아니다. 그는 유혹하지 않았다. 내가 멋대로 구는 거다.

‘눈을 뽑아버릴 수도 없고!’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그리고 아직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아 편안한 상태일 때, 첼러스는 유일하게 풀어진 행동을 보였다.

나른한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댄다든가, 딱딱한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진득한 시선으로 날 쳐다본다든가.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은 내 오감을 지나치게 자극했다. 평소의 금욕적인 모습이랑 대조적이어서 더 충격이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첼러스의 뒤통수를 후려쳐 기절시키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카카나, 얼굴이 빨갛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경고했다!”

“제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까?”

“뭐, 무슨, 이상한, 그런! 말도 안 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혀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는 바람에 더 민망해졌다. 다시 손에 얼굴을 파묻어버리자, 첼러스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제 미모가 아직 죽지 않은 모양입니다.”

진짜 환장하겠네.

“설마 진심으로 하는 소리 아니지?”

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 미모로 누군갈 죽일 정도인데 무슨 소린가.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첼러스의 위로를 들으니 더 부끄러워졌다. 얼굴에 열이 몰려서 이젠 두피에 땀이 날 지경이다. 나는 양 인형에 얼굴을 파묻고 잠시 열기를 식혔다.

“평소엔 금욕적이면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너.”

“예?”

첼러스가 내 품에 안겨있는 인형을 빼내다 말고 반문했다. 뚱딴지같은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단단히 놀란 눈이었다.

“저는 금욕적이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전면 부인할 줄 몰랐다. 나는 약간 당황해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무리 봐도 금욕적인데?”

“제 신념에 맞게 행동할 뿐입니다. 금욕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게 그거 아니야?”

“저는 사랑은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말씀드리자면, 일종의 신념일 수 있겠지요. 만일 제게 연인이 있고, 그 연인이 카카나처럼 저를 금욕적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면.”

첼러스의 목소리가 느지막하게 낮아졌다.

“많이, 놀랄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이불로 그의 얼굴을 가려버렸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모종의 위기감 때문에 가팔라진 숨을 다듬었다. 심장이 귀에서 뛰기라도 하듯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카카나?”

“진료에 방해되니까 얼굴 가리고 누워.”

“알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이불에 파묻힌 첼러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흐르지도 않는 이마의 땀을 소매로 문지르며 마지막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 시시덕거리며 놀고 있는 사이에도 첼러스의 열은 오르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첼러스의 몸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뒷목을 잡아당기자 그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맥을 짚어본 후, 살펴보지 못했던 어깨와 팔뚝 곳곳을 확인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마나를 꽉 잡고 있느라 전신이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힘이 들어간 상완삼두근을 눌러보았다. 근육이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건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였다. 아직 정기에 마나가 섞인 것 같진 않지만, 그다지 먼 이야기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무리해서 여덟 개의 마나 흐름을 만들어냈으니 당연해.’

한숨을 쉬며 참침을 침통에 보관한 뒤, 미열과 기력 쇠약에 도움이 되는 약을 꺼냈다. 첼러스는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그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내게 부드러이 웃었다. 평소랑 똑같아 보이는 모습이다. 꼿꼿하게 편 등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아픔을 참고 있다는 걸 안다. 약해진 모습을 감추려는 짐승이 떠올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랫입술을 씹으며 그의 목덜미에 손등을 가져다댔다. 열이 계속 오르고 있었다.

“약 먹어야 해. 물 줄 테니까 기다려.”

책상에 올려두었던 유리컵에 물을 따르고 그에게 가져갔다. 첼러스가 얌전히 컵을 건네받아 의심 없이 삼켰다.

“매번 감사합니다.”

나는 그가 약을 다 먹기 무섭게 일갈을 시작했다.

“어젯밤부터 열이 있었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깨로 흘러내리는 내 잠옷을 당겨주던 첼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저 순진무구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마나 이상으로 생긴 열은 이렇게 단기간에 오르지 않아. 꽤 오랫동안 미열이 났던 거야. 왜 말하지 않았어?”

“주신 약의 효능이 좋은 것 같아 더 기다리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왜 네가 판단해? 네가 치료사야?”

첼러스가 난감하게 눈을 깜박였다. 나는 결국 폭발했다.

“할릭이나 너나 이 집 용사들은 왜 이렇게 무딘 거야?”

빈민가 골목대장들이나 쓸 법한 억양을 구사하며 본격적으로 성을 내기 시작했다.

“첼러스, 우리가 괜히 같이 자는 줄 알아? 아프면 말을 하란 말이야. 티를 내면 내가 말을 안 해. 네가 무슨 밀림의 짐승이야? 아픈 거 티를 안 내게?”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지. 어휴, 질책의 의미가 담긴 눈빛을 쏘아 보내며 그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일단 씻고 나와.”

***

[네가 무슨 밀림의 짐승이야? 아픈 거 티를 안 내게?]

카카나는 첼러스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 말에 제일 해당사항이 큰 사람은 그녀였다. 카카나는 아픈 곳이 있으면 어떻게든 숨기려 했고, 슬픔도 절망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때가 있었다. 바로 깊은 잠에 빠졌을 때였다. 그건 첼러스가 그녀를 깨우지 못했던 진짜 이유기도 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그녀는 근 삼 일간 계속 악몽을 꾸었다. 그리고 대부분 살려달라고 빌거나, 차라리 자기를 고문하라며 절규 섞인 비명을 질렀다.

첼러스는 처음 그녀의 울음을 듣고 잠에서 깨었을 때, 식은땀에 푹 젖은 채 눈을 떴다. 그녀의 부르짖음이 기억 속 전쟁과 아비규환을 생생히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마치 시체의 산 위에서 눈을 뜬 것처럼 전신이 선뜩하고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한 서린 울음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지독하고 잔혹한 과거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너무 놀라서 숨죽여 우는 카카나를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잘 돌봐 줘.]

동침을 시작하기 하루 전날, 아다르가 그를 따로 부른 적이 있었다. 단순히 저 한 마디를 했을 뿐인 만남이었다.

그는 당시에 아다르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지금 와서는 과연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부탁이었는지 의문이 드는 말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간혹 그녀가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깨어나 옷장으로 숨으면 잠을 자는 척했다. 그리고 새벽 어스름이 깔릴 때쯤 그녀가 침대로 돌아와 잠들 때 구부정한 어깨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무엇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카카나가 그은 선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초월자는 영원을 산다. 제국은 손에 굴러 떨어진 유용한 마나 광산을 영원히 착취할 예정이었고, 그걸 카카나가 구해낸 거다. 그녀는 자신이 해낸 구원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초월자가 아닌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 심리적 거리의 차이가 문제였다.

이미 용사들에게 카카나는 자신보다 애틋한 존재가 되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먼 존재로 규정짓고 한사코 밀어내려 했다. 그녀가 얼마나 괴롭고 비참한지, 얼마나 학대 받았는지 쉽게 눈치챌 수 있음에도 그녀가 거부해서 용사들은 무력했다.

그녀가 가여워서, 그럼에도 힘을 내주는 것이 고마워서, 지켜주고 싶어서……. 첼러스 밀라다스의 잠잠한 감정은 그런 절차를 밟아 서서히 분노로 끓어올랐다.

본래 그는 감정 없이 만물을 관찰하는 데 능숙했다. 거대하고 묵직한 존재감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서, 항상 같은 자리에서 굽어보았다. 이렇게까지 눈앞이 검게 암전되는 분노는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면서 가장 먼저 익힌 것도 엄중함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카카나 앞에서는 그 태도를 고수하기 힘들었다.

제국을 향한 차가운 증오를, 과거를 향한 고요한 절망을, 그리고 한 약사를 향한 강렬한 존경을 이미 피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 그랬다.

오랜 감금 생활 속에서 과거의 자신이 오만했음을 깨달은 첼러스는, 뒤늦게 밀려들어오는 파다한 감정들을 안간힘을 다해 흡수했다. 감정이 없는 신의 섭리처럼, 절대적인 정의 행세를 했던 과거에서 탈피한 길이었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받아들였기에 비로소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분노, 증오, 슬픔, 그리움, 사랑…….

그렇게 ‘사람’이 된 첼러스가 가장 먼저 남다른 감정을 품게 된 이가 카카나였다.

[누군가, 당신을 위협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소중한 이가 지옥에 빠져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그들을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끄집어낸 존재는 응당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받아야했다.

첼러스는 끓어오르는 노기를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난폭한 감정을 다루는 건 쉬웠다. 뱉어낼 자 또한 뚜렷했다.

카카나 페아를 부당한 방법으로 아프게 한 자.

‘누가?’

그는 새파란 날붙이를 높이 쳐들고 단죄를 감행하던 심판자다. 힘과 신념 모두 기사의 정상에 올라선 자. 당연히 이 사항을 그냥 보아 넘길 생각은 없다.

‘생각을 해봐야겠군.’

카카나가 씻고 있는 욕실을 지긋이 바라보던 첼러스가 정갈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 할릭, 아다르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 있었다. 첼러스는 상념에서 벗어나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3층 난간에 등을 기대고 있는 것을 보니 한참 기다린 티가 났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나와?”

아다르가 알은체를 했다. 첼러스의 깊은 호수빛 눈망울이 아다르를 향해 굴러갔다.

“저는 대부분 이런 얼굴입니다.”

“흠…….”

콧소리를 낸 아다르가 곁눈질로 그를 살피다 말고 어깨를 으쓱였다.

“뭐, 카카나랑 붙어 지내면 심란해지는 게 당연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이다. 첼러스가 미미하게 눈가를 찡그렸다.

“무슨 뜻입니까.”

“위태롭잖아. 하는 짓이.”

아다르가 말을 얼버무리며 팔짱을 꼈다. 어차피 캐물어봤자 입을 열 남자가 아니다. 첼러스는 깔끔하게 관심을 거두고 할릭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할릭은 왜 아침마다 여기서 기다리시는 겁니까.”

할릭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눈을 굴렸다.

“좀 걱정되잖냐.”

심히 찝찝한 대답에 첼러스가 고요히 할릭을 응시했다. 그는 용사 일행에서 아르모어 다음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그러나 할릭은 그와 대등하게 능청스러운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할릭이 천연덕스럽게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물론 네가 나쁜 짓은 하지 않겠지만 잠결에 실수할 수도 있는 거고…….”

첼러스의 말간 얼굴이 이번엔 완전히 구겨졌다. 그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불쾌합니다.”

“너도 카카나가 내 방에 찾아왔을 때 복도에 서 있었잖아.”

“불쾌합니다.”

“네 행동이 좀 뻣뻣하면 내가 말을 안 해. 카카나가 오해하기 딱 좋잖아? 아마 널 고자라고 생각할걸?”

이미 반쯤 그런 취급을 당한 전적이 있다.

카카나는 아직도 그가 금욕적이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간혹 야릇한 눈으로 그를 훑어보곤 했다. 첼러스가 입을 다물고 침묵하자, 할릭이 거보란 듯이 언성을 높였다.

“카카나가 아주 단단히 착각한 거야! 네가 얼마나 거리낌 없는 행동파인지 그 토끼 같은 녀석도 좀 알 필요가 있지 않겠어?”

할릭의 의기양양한 말에 첼러스의 웃는 얼굴에 핏대가 솟았다.

“할릭 갈로프사. 입을 다무는 게 좋겠습니다.”

첼러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디선가 우드득,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둘은 대화에만―대부분 할릭의 일방적인 떠벌림이었지만― 집중하고 있었다. 혀를 끌끌 차며 치열한 공방을 구경하던 아다르가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가 움찔 놀랐다.

“어어, 야…….”

“당신의 무례한 언행은 저를 지치게 만듭니다.”

“야, 애들아. 잠깐 싸우는 거 멈추고…….”

“나는 안 지치는 줄 알아?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하는 짓은 얼마나 발칙한지 내가 저 콩알만 한 토끼 녀석에게도 말해줘야겠다 이거야.”

“아니, 그만하고 내 말 좀…….”

“말조심하십시오, 할릭. 카카나는 토끼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토끼나 양이나 귀여운 건 똑같아. 둘이 며칠 붙어 지냈다고 수인족 다 됐다, 아주?”

“설마 질투하시는 겁니까?”

할릭이 콧김을 뿜으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렇다, 어쩔래! 저 녀석을 지금 너만 독차지하고 있잖냐!”

‘뭘 당당하게 인정하고 있는 거야!’

아다르가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가, 카카나를 발견하곤 아예 눈을 가려버렸다. 샤워 후 뽀송뽀송한 미소를 짓고 있던 카카나가 돌연 문고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수건이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맙소사!”

카카나의 비명소리에 할릭와 첼러스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양 갈래 머리를 흔들며 후다닥 달려온 카카나가 울상이 되어 문고리를 내려다보았다. 쇠로 만든 문고리가 손가락 모양대로 우그러져있다.

첼러스가 그제야 문고리를 확인하고 조용해졌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잠시 까먹은 자의 말로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고가의 저택은 문고리 하나에도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첼러스가 찌그러트린 문고리도 마찬가지였다.

제 돈으로 처음 마련한 집이라 애정이 깊었던 카카나가 문고리를 차마 만지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할릭이 첼러스 열 받게 했어.”

눈치를 살피던 아다르가 간략하게 상황 설명을 덧붙였다. 카카나의 이글거리는 눈이 야멸치게 돌아간다.

“할릭! 넌 왜 사람을 화나게 하고 난리야!”

“아니, 난 그저…….”

“첼러스! 이런 쓰잘데기없는 데다 마나를 사용해? 제정신이야?”

“면목이 없습니다.”

씩씩거리는 카카나의 손을 잡아끈 아다르가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쟤들은 버려두고 밥 먹으러 가자, 카카나.”

성격이 두 개라도 되는 양 달콤한 어조다. 옆에 짜져 있던 할릭이 혀를 내밀며 웩, 하는 시늉을 했다. 아다르가 할릭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걷어차며 얼굴로는 온화하게 카카나를 향했다.

“화 풀고. 응?”

분이 풀리지 않은 눈으로 문고리를 쳐다보던 카카나가 푹 한숨을 쉬었다.

“어쩌겠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닐 텐데.”

물론 문고리가 아니라 약초가 망가졌다면 지옥을 맛보여 줬겠지만, 카카나는 약초가 아닌 사항에 한해선 제법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쯧쯧 혀를 차며 주머니에서 꼼꼼하게 접힌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러더니 금세 문고리를 잊고는, 종이에 얼굴을 묻은 채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벨리토스는 빻고 객초는 탕약으로 만든 다음…….”

걸어가는 내내 끊임없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게, 아무래도 뭔가를 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부분 따라 말하기도 힘든 길고 복잡한 약초의 이름이었다.

아다르가 말썽쟁이 아들을 둔 아빠처럼 지친 눈으로 뒤를 살폈다. 풀이 죽은 할릭이 터덜터덜 따라오고 있었다.

‘쟨 카카나가 그렇게 좋을까.’

아다르가 종이에 코를 박고 생각하느라 바쁜 카카나를 살폈다. 약초 배합에 무아지경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괜히 몽글몽글해졌다. 어쩜 이런 인간이 존재할 수 있나 신기했다. 관심은 약초밖에 없고, 어렸을 때부터 여기에 격리되어 살아온 것처럼 속세에 물들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단순하고 순수했다.

이중적인 모습에 지칠 대로 지친 용사들에겐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의 검은 눈이 문득 팔랑거리는 카카나의 원피스로 떨어졌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넉넉한 품이 아슬아슬하게 벌어지며 안이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확인해보니 단추가 무방비하게 풀어져 있다. 그녀보다 키가 훨씬 큰 용사들에겐 그 틈이 더 잘 들여다보였다.

이미 할릭과 첼러스는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때 카카나가 바닥에 떨어트린 종이를 주우려고 허리를 굽혔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아다르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야, 안에 보여.”

심각한 표정으로 글자를 읽던 카카나가 영혼 없이 손을 흔들었다.

“말 시키지 마.”

“속옷 보인다고.”

그녀가 얼굴을 팍 찡그렸다.

“어쩌라고.”

아다르가 벙찐 표정을 짓자 할릭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식탁 앞 의자에 앉았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첼러스가 급기야 허리를 숙여 단추를 직접 잠가줬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누가 보면 그녀의 하인이라고 착각할 만한 모습이다. 그녀는 여전히 관심이 없었다. 아마 첼러스가 제 옷을 풀어헤쳐도 상관하지 않았을 거다.

대관절 본인을 제외한 다섯이 이성이라는 걸 인식은 하고 있는 것인가. 발정기도 있는 수인족이 어찌 저럴 수 있나 이해를 할 수가 없는 아다르가 얼굴을 괴상하게 찡긋거렸다.

“카카나, 연애해본 적 없지?”

“아다르. 무례합니다.”

첼러스가 타박했다. 카카나가 콧방귀를 뀌며 종이를 팔랑거렸다.

“그런 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지. 심심하니까.”

“연애를 심심해서 한다고?”

식탁에 식기를 놓다 말고 아다르가 귀를 의심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카카나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나 마찬가지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니까. 속도 헛헛하니 좀 채우고 말이야. 하지만 난 약초만 있으면 충분하거든. 연애는 필요 없어.”

“필요?”

“자꾸 꼬투리 잡을래? 밥맛 떨어지게.”

“사랑이란 개념은 알아?”

“날 바보로 아나. 난 그 누구보다 약초를 사랑해.”

그녀가 자신 있게 턱을 치켜들었다.

“물론 그러시겠지.”

아다르가 비아냥댔다. 카카나는 저놈이 또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구시렁대며 야채를 씹어 삼켰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는지 수란을 터트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상큼한 말투였다.

오늘 날씨가 참 좋아! 하고 소리치듯이.

“오늘 바실리스크 보러 갈 거야!”

“푸헙.”

스노아가 물을 마시다 말고 켈록거렸다. 아르모어가 예상한 사람처럼 스노아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나머지 용사들은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카카나의 상큼하고 가벼운 어투와 어울리는 바실리스크의 그림이 머릿속에 도통 떠오르지 않은 탓이다. 그만큼 희귀하고 위험해 뜬소문만 파다한 몬스터였다.

바실리스크를 잡으러 간 토벌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은 숱하게 시장바닥을 나돌았다. 그런데 그녀가 바실리스크를 보러 간단다. 태연하게 입에 음식을 욱여넣으면서.

‘180년 만에 몬스터 이름이 바뀌기라도 했나?’

한참을 기침하던 스노아가 좀비처럼 괴로워하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바실리스크요?”

“응, 바실리스크!”

카카나가 베이크드빈을 열심히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릭, 아다르, 첼러스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콩을 입에 양껏 욱여넣은 저 날다람쥐 같은 여자가 지금 바실리스크를 보고 오겠다고 한 게 맞는지 두 귀를 의심하는 얼굴들이었다. 그녀가 열심히 콩을 씹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커다란 꿀색 눈망울이 천진난만하게 끔뻑거린다.

“제국 상대할 때 바실리스크의 독이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제가 아는 그 바실리스크가 맞겠지요?”

“네가 아는 바실리스크가 뭔데?”

스노아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눈이 마주치면 돌이 되고 숨만 내쉬어도 그 일대의 모든 식물들이 썩는다고 알려진 괴물 뱀이요.”

“실상은 좀 다르지만, 잘 알고 있네.”

카카나가 접시에 남은 음식들을 삭삭 긁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은 고사하고 점심, 저녁도 거르기 일쑤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식탐이다.

“바실리스크가 좀 희귀한 몬스터긴 해. 나도 죽음의 숲에 들어와서 처음 봤어.”

아다르가 질린 눈을 했다.

“좀 희귀? 바실리스크의 부산물은 암시장에 고가로 경매되는 상품이었어. 그게 좀 희귀라니…….”

“잠깐만요.”

스노아가 충격으로 새파래진 입술을 달싹였다.

“그 말씀은, 직접 본 적이 있으시다는 건가요? 어떻게.”

어떻게 살아계신 거죠?

뒷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그가 입을 다물자 카카나가 이번엔 ‘예뻐서 꺾어온 꽃이야!’ 소리치듯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 내가 길들였어.”

“푸합, 팝, 켁!”

이번엔 할릭이 음식을 씹다 말고 기침을 했다. 사레가 제대로 들리는 바람에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기침을 하고 있다. 결국 아르모어가 옆에서 등을 두드려주기 시작했다.

할릭이 기침을 멈추자 이윽고 장내가 고요해졌다.

“후후…….”

아르모어가 살얼음판인 분위기 가운데 홀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덕분에 카카나는 자신의 말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르모어가 즐거워하는 대목은 대부분 괴벽스럽기 때문이었다.

***

“내가 뭐 어쨌다고 난리람.”

나는 신경질적으로 나뭇가지를 젖히며 투덜거렸다.

“사람이 독이 좀 탐나면 야생 몬스터를 길들일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바실리스크가 얼마나 희귀한 몬스턴데. 안 그래?”

친구에게 동의를 구하듯 나무에게 쏘아붙였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해독 연구를 할 때도 도움이 되고, 약초랑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알 수 있고 쓸모가 무궁무진하단 말이야. 그거 좀 길들였다고 길길이 날뛰면서 위험하니 어쩌니 입에 거품을 물고 그냥, 어휴, 누가 보면 내가 바실리스크로 뱀술을 담갔다고 한 줄 알겠네…….”

구시렁구시렁 혼잣말을 길게 잇자 아다르가 불쑥 뒤에서 나타났다.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어?”

“으악!”

“기척 좀 내고 다니랬지!”

열불이 뻗쳐서 첼러스를 향해 성질을 부렸다.

“그러게 내가 얘 놓고 오쟀잖아!”

약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길을 찾고 있던 첼러스가 내 역정에도 차분하게 대꾸했다.

“저 혼자보다는 아다르도 있는 게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나는 마나도 약소하게나마 사용할 수 있잖아. 불안정한 첼러스 놈보다는 낫다고.”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방에서 생수통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켠 후 울분을 터트렸다. 마음 같아선 물을 저 얄미운 웬수덩어리의 얼굴에 뿌려주고 싶었다.

“애초에 바실리스크는 나 혼자 상대해도 되거든?”

홱 고개를 돌리고 첼러스의 손에 들려있는 약도를 낚아챘다. 검은색 펜으로 대충 갈겨 그린 내 약도가 코앞을 가리키고 있었다. 앞으로 쭉 직진하기만 하면 바실리스크의 동굴이 나온다.

‘이걸 찾지 못해서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단 말이야?’

나는 첼러스의 눈을 의심하며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약도는 맞는 거야? 그냥 낙서 같은데…….”

아다르가 그새를 못 참고 입을 털었다. 나는 아다르의 발등을 콱 짓밟으며 말했다.

“그런 말 할 거면 집에 가.”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나는 재수 없는 눈으로 아다르를 몇 번 째려본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우량 세이피지아를 따라 한참을 걷자 어디선가 차고 습한 공기가 불었다. 코를 쳐들고 냄새를 맡다가 그 방향으로 걸음을 돌려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석회암 동굴이 나타났다. 근처의 식물이 전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면 바실리스크의 둥지가 확실했다.

가방에서 기름 램프를 꺼내 불을 밝혔다. 따스한 호박색 불빛이 동굴 안으로 길게 늘어졌다. 램프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챙겨왔던 약을 첼러스와 아다르에게 먹였다. 바실리스크가 내뿜는 독가스를 마시고 죽지 않으려면 미리 그렇게 해야 했다.

“바실리스크 눈 봐도 안 죽으니까 일단 마음 놔.”

“석화의 눈은 잘못된 정보입니까?”

“그렇지. 정확히는 눈이 아니라 독 때문에 그런 거거든.”

나도 약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실리스크의 숨을 한 모금만 들이켜도 몸이 굳어 죽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퍼진 거야. 너희는 내가 준 약을 먹어서 괜찮아. 이빨에 물리지만 않으면.”

나는 의미심장하게 덧붙인 후 동굴로 턱짓했다.

“가자.”

동굴은 몹시 컸지만 깊이는 그렇게 깊지 않았다. 3킬로미터 정도 걸으면 바실리스크의 소굴에 거의 다다를 수 있었다.

동굴에 거주하는 수비형 몬스터―몬스터대백과의 분류에 따른 세 가지 군 중 하나로, 먼저 공격하지 않는 몬스터군―를 구경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석순이 많아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램프를 들이미는 곳마다 피부색이 창백하고 팔다리가 긴 몬스터들이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대부분 몸집이 작고 독에 강한 개체들이었는데, 큰 놈들은 이미 바실리스크의 먹이가 되고 없는 것 같았다.

‘피 냄새.’

눈을 감고 코를 킁킁대자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났다. 바실리스크는 겨울잠을 자지 않는 대신 주기적으로 엄청난 양의 식사를 했다. 최근 거하게 식사를 즐긴 흔적이 있었다.

‘먹이를 갖고 놀면서 먹은 것 같은데?’

하여간 악취미였다. 놈에게 가까워질수록 아다르와 첼러스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의 후각에 피비린내가 맡아질 거리까지 다가갔다는 증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램프의 붉은 빛 끄트머리가 하얗게 미끄러지는 비늘 끝자락을 더듬었다. 동굴 벽인 줄 알았으나 미세하게 약동하고 있었다. 바실리스크의 몸이다.

나는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극독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걸!’

아다르가 부러질 듯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입을 벌렸다. 직경 80미터에 다다르는 동굴의 반을 차지할 만큼 거대한 몸체에 기가 질린 기색이었다.

‘더 자랐네?’

놈을 처음 봤을 땐 이 정도 크기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새끼 때여서 그런 것 같았다.

‘몸도 커졌으니 독도 많이 얻을 수 있겠다.’

행복한 상상을 하자 절로 웃음이 났다.

다행히 놈이 잠을 자고 있는지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깔려 죽는 것은 사양이었으므로 잽싸게 발을 놀렸다. 거의 벽이나 다름없는 몸을 쭉 따라 걸었다. 비늘의 결로 앞이랑 뒤 중 어디가 머리 쪽인지 알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발소리의 울림이 커졌다. 탁 트인 공간까지 나온 것 같아 램프를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빽빽한 종유석이 보였다. 뾰족한 원추형 광물질이 으스스한 형태로 늘어서 있으니 꼭 대형 몬스터의 이빨 같았다.

바실리스크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나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공동은 대형 저택인 우리 집이 거뜬히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컸다. 바실리스크는 바위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뿌듯하게 미소 지으며 지체하지 않고 고함을 내질렀다.

“실실아!”

바실리스크가 번쩍 눈을 떴다. 오래된 돌벽 같은 눈꺼풀이 위아래로 벌어지자 거의 내 몸만 한 눈이 나타났다.

사방으로 빠르게 움직이던 눈깔이 내게 정확히 고정되었다. 뾰족한 동공이 가로로 홀쭉하게 가늘어져 있다. 바실리스크가 혀를 날름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 냄새를 알아차린 거다.

쉬이이이익―!

바실리스크가 흥분한 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이자 동굴이 무너질 듯 우르르 흔들렸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소리였다. 공격적이고 사나운 몬스터라는 소문과 다르게 바실리스크가 도망치려는 것처럼 벽에 찰싹 몸을 붙였다.

‘내가 그렇게 끔찍한가.’

섭섭하게 생각하며 준비물을 꺼내는 동안, 아다르가 품에 숨긴 잭나이프로 손을 가져갔다. 겁에 질린 바실리스크가 첼러스와 아다르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내뿜었다.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초록색 분비액이 마치 안개처럼 자욱하게 뿜어졌다.

“내 친구들이야, 실실아. 얌전히 굴지 않으면…….”

나는 가방에서 분무기를 꺼내 바실리스크에게 들이밀었다.

그러자 불에 지져지는 뱀처럼 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대가리를 뒤로 물린다. 첼러스와 아다르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둘 다 눈이 휘둥그렇게 뜨여 있었다.

나는 분무기 두 개를 더 꺼내 그들 손에 하나씩 쥐여주었다.

“반항할 때마다 뿌리려는 시늉을 해봐. 찍 소리도 못 낼걸.”

“저거 지금 겁먹은 거 맞지……?”

아다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미미하게 황금빛이 도는 바실리스크의 갈색 비늘과 지느러미가 달린 등을 훑었다. 배 부분은 갑각류처럼 두껍고 단단한 껍질이 붙어 있었다.

“그, 바실리스크가?”

바실리스크가 그의 몸통만 한 혀를 날름거리며 쉭쉭거렸다. 몸은 여전히 나에게서 최대한 떨어지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검도 먹히지 않을 것처럼 생겼군요.”

첼러스가 감탄했다.

“이걸. 길들였어.”

아다르가 넋이 나간 채 중얼거리는 사이, 첼러스가 조용히 내 곁에 와 섰다. 비상시를 대비해 지켜주기라도 할 생각인 것 같았다. 굳은 결의를 보이는 표정과 달리 입술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그럴 만하지.’

처음 바실리스크를 봤을 땐 나도 놀라 자지러지는 줄 알았으므로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바실리스크를 어떻게 길들였습니까?”

첼러스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건네준 분무기를 톡 치며 대답했다.

“독으로.”

“바실리스크를…… 독으로 말입니까?”

기분 탓인가, 첼러스의 눈이 아득하게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응. 바실리스크는 지능이 높거든. 고통을 주거나 겁을 먹게 만들면 길들일 수 있어. 가끔 먹이도 주고. 당근과 채찍, 알지?”

첼러스가 침묵했지만 상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냥 공격부터 하고 보는 멍청한 몬스터였으면 아마 나도 죽고 바실리스크도 죽었을 거야.”

“위험한 행동을 하셨군요.”

“그다지? 1년에 걸쳐서 단단히 준비하고 조우했어. 독이 너무 매력적이잖아! 포기할 수야 없지!”

나는 으하하 웃으며 가방에서 거대한 유리병을 꺼냈다.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큰 병이었다. 평범한 유리병은 녹아버려서 특별히 강화마법이 걸린 걸로 들고 왔다. 무거웠지만 한동안 실실이를 볼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이왕이면 많이 담아두고 싶었다.

“자, 실실아. 아 해보자, 아.”

쉬이익!

바실리스크가 공격하려는 듯이 대가리를 높게 쳐올렸다. 나는 조용히 유리병을 내려놓고 분무기를 치켜들었다. 자동으로 음산한 목소리가 튀어나간다.

“야.”

연신 쉭쉭거리던 바실리스크가 바로 잠잠해졌다.

“편하게 하자, 우리. 안 그래도 너 컸을 거 생각해서 그때보다 찐하게 만들어 왔거든. 원해?”

나는 살기를 담아 중얼거렸다.

“해봐. 어? 해보라고.”

바실리스의 노란 눈이 독을 향한 집착과 광기로 번들거리는 내 얼굴을 보고 홀쭉하게 가늘어졌다. 나는 위협의 의미로 분무기를 흔들었다.

한 번 분사하는 것만으로 온몸에 불타는 고통을, 예민한 후각과 혀엔 지져지는 고통을 선사할 수 있는 액체가 위험천만하게 찰랑거렸다. 죽지 못하도록 절묘하게 중독 기간을 늘린 걸작이다.

‘어디 개길 수 있으면 개겨보시지.’

물론 바실리스크는 개기지 않았다. 턱을 땅에 내려놓은 바실리스크가 얌전히 아가리를 벌렸다. 초록색 침이 뚝뚝 흐르는 송곳니에 유리병을 대기 위해 아다르를 가까이 불러왔다. 한 손에 분무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채취하기엔 병이 너무 무거웠다.

“분무기 대고 있어. 얘가 나 먹지 못하게.”

“내가 대신 채취할…….”

“안 돼!”

나는 표독스럽게 그를 노려보며 유리병을 품에 껴안았다. 아다르가 환장하겠단 어조로 소리쳤다.

“안 훔쳐가!”

어림없는 소리다. 어디서 수작질이란 말인가. 이건 무려 ‘바실리스크’의 독이란 말이다.

“그걸 어떻게 알아? 솔직히 이 매력적인 독을 보고 홀려서 안 훔쳐갈 작자가 어디 있어?”

아다르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나는 내가 확실히 아는데, 독에 홀려서 바실리스크 아가리로 몸을 들이미는 작자는 너 말고 이 세상에 없어.”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은 아다르가 단호하게 말을 잘라내며 유리병을 낚아챘다. 나는 툴툴거리며 그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탐욕스럽게 쳐다보았다. 첼러스가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이다.

휘영청 뜬 달이 지상을 비추고, 반짝이는 별빛이 바닷가에 자글거리는 모래알처럼 빽빽하게 뿌려진 깊고 어두운 밤.

“바실리스크라……. 참, 똑똑하기도 하지.”

황녀, 오로라 그랑루이가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빛 한 점 들지 않는 하늘의 어딘가를 주시하듯, 멍하니 위로 향했다. 여러모로 그날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강건한 염원이 섞여 용솟음치던 그 밤이.

오로라가 나지막이 숨을 토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은사 같은 속눈썹이 하얀 피부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녀의 전속 치료사 다니가 코까지 내려오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옆으로 와 섰다.

오로라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녀가 결정을 내린 거로구나. 그렇지? 다니.”

잠잠하던 겨울바람이 갑자기 그들을 집어삼킬 기세로 불어왔다. 오로라가 거센 바람을 만끽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귀여운 양 아가씨, 카카나 페아 말이야.”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이 마구잡이로 나부낀다. 오로라는 자신의 청초한 보랏빛 눈망울과 꼭 어울리는 얇은 잠옷 바람으로 테라스에 서 있었다. 마치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녀가 우아한 몸짓으로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패밀리어가 죽음의 숲의 독에 죽어 많은 것은 확인하지 못했어요. 제가 실력이 부족해서…….”

“그만.”

황녀가 다니의 분한 어조를 끊어냈다.

“너는 충분히 잘해내고 있단다. 자책하지 말렴.”

“황녀님 덕분이에요.”

오로라가 다니의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그래서, 더 얻은 정보는 없니?”

“그녀는 용사와 함께하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아요.”

“그렇구나.”

오로라가 테라스의 난간에 손을 얹으며 몸을 돌렸다. 고운 피부가 난간에 쌓인 눈송이처럼 하얗다.

“성가신 선택을 했네. 곤란하게 되었어…….”

그녀가 테라스 밑에 있는 얼어붙은 호수를 내려다보며 입매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피떡이 되어 밭은 숨만 몰아쉬던 한 남자가 떠오른 탓이다. 신비한 물빛 눈을 반항적으로 치뜨며 그녀를 올려다보던 남자. 맑고 청량한 기운의 대마법사.

스노아 칼리시스.

“그녀는 반드시 용사들과 함께해야 해.”

오로라가 긴 속눈썹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읊조렸다.

“그녀는 겁이 많으면서도 아주 강한 영혼을 지녔지. 우리 뜻대로 호락호락하게 움직여 줄 것 같지 않구나.”

“어떻게 할까요?”

“선택지가 없단다, 다니. 안타깝게도.”

오로라가 풍경소리처럼 딸랑거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가 강인하게 나오면, 용사들을 자극해야 하지 않겠니?”

“용사들을요?”

“그들은 오랜 기간 감금과 고문을 당해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단다. 조금만, 그래, 조금만 밀면…….”

그녀가 검지로 허공을 톡 쳤다.

“그들은 카카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어. 다니, 사람이란 그렇단다. 힘도, 돈도, 명예도, 절망을 맛본 마음 앞에선 힘을 쓰지 못하지.”

황녀의 입술에 잠시 미소가 사라졌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침잠한 눈을 테라스 아래로 내리깔던 황녀가 별안간 그림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본래의 마음을 숨기는 듯한 미소다.

“그러니 한 번 더 절망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거야. 그들은 어둠에 빠지게 되겠지. 하지만 휘둘리지는 않을 거란다.”

“그럼요?”

“어둠을 흡수하게 될 거야.”

와인 잔을 쥔 황녀의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싫니? 다니.”

“아뇨, 전혀요.”

다니가 황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황녀님은 제 전부인걸요. 그리고 우리에겐 용사가 필요해요. 어둠은 어둠으로 물리쳐야 하고요. 그저 그뿐인 일이에요.”

황녀의 입술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맞아. 그렇게 되면, 그들은 결코 그녀를 놓지 못할 거야.”

“…….”

“반드시 지키려고 할 테지. 그러니 조금만.”

황녀가 미간을 진득하게 문지르며 말했다.

“조금만, 자극하면 될 거란다.”

다니가 한참을 침묵했다. 오로라는 재촉하지 않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다니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휘소에 말을 전할까요?”

“아니, 은밀하게 움직이는 게 좋겠구나. 주둔지에 마침 탐욕스러운 자가 한 명 있단다.”

황녀가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고상하게 뇌까렸다. 진한 보랏빛 눈망울이 사느랗게 휘며 곡선을 그린다.

“황실마법사 알란스. 그에게 패밀리어를 보내렴.”

***

“좋았어!”

가마솥 안의 검은 액체를 들여다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바실리스크의 독을 개량하여 만든 독극물이 끈적한 거품을 터트리며 끓고 있었다. 그것을 강화된 유리 막대로 열심히 저으며 농도의 변화를 살폈다.

끓기 전에 만드레이크의 뿌리 여덟 덩이와 효과를 돋워주는 비명풀 이파리 열 잎을 넣어주었다.

바실리스크의 독 77.62밀리리터, 돌풀뿌리의 껍질 15.3그램, 진흙탕 10밀리리터를 넣고 되게 달이면…….

“됐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선반의 유리접시로 손을 뻗었다. 집게손으로 유백색 워터리블루 가루를 살짝 집어 가마솥에 솔솔솔 뿌려주었다. 그러자 검은색으로 부글거리던 약물이 가운데부터 서서히 맑아지더니 이내 투명한 물처럼 변했다.

이 독을 보이지 않는 뱀이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무색, 무미, 무취의 맹독.

‘효과도 끝내주지!’

헤벌쭉 웃으며 가마솥의 불을 끄고 열을 식혔다. 그 다음 농도를 확인하며 하트가 그려진 병아리색 분무기에 조심스럽게 옮겨 담았다. 이제 이걸 몸에 뿌리기만 하면 된다.

나는 잊지 않고 경피성 해독 부착제 열 장을 챙겼다. 물론 나는 이미 부착 중이었고, 용사들도 독을 분사하기 전에 부착제를 붙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독극물에 20미터 이상 근접한 순간부터 사경을 헤매게 되리라.

마침 아르모어의 발정기도 억제제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겼겠다, 남은 것은 결전의 날뿐이었다.

“카카나, 말한 대로 약초 캐왔는데 이거 어디다 놓을까?”

그때, 할릭이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색하며 고개를 드는데, 그의 널따란 어깨가 근처에 있던 약롱을 거세게 들이받았다. 나는 당연히 할릭이 어깨를 부여잡고 아파할 줄 알았다. 그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약롱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할릭은 아파하지도 않았다.

거대한 목재 약롱도 할릭의 골렘 같은 몸집은 감당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어!”

쓰러질 것 같아서 급하게 걸음을 뗀 순간, 할릭이 손을 뻗어 약롱을 고정시켰다.

그와 동시에 약롱 위에 쌓여있던 수백 통의 편지봉투가 그의 머리로 쏟아졌다. 편지봉투를 본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무턱대고 뒷걸음질 치다가 책상에 부딪혔다.

그 과정에서 밑으로 추락한 약초 손질용 칼이 펑퍼짐한 원피스를 쫘악 찢으며 바닥에 꽂혔다.

“…….”

“…….”

이 모든 게 단 5초도 안 되는 시간에 벌어졌다.

밀랍인장이 하나하나 찍혀 있는 정성스러운 편지를 내려다보던 할릭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카카나. 괜찮아? 다쳤어?”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허벅지 안쪽…….”

할릭이 손을 뻗어 의자를 끌어당겼다. 나는 의자에 앉아 원피스를 확인했다. 칼에 날이 얼마나 잘 서 있었는지 옷이 너덜너덜했다.

천 자락을 치우며 무릎 위쪽 허벅지를 확인했다. 미세하게 베인 피부에 핏물이 봉긋 솟고 있었다. 할릭이 크게 당황하더니 거즈를 찾아서 들고 왔다. 나는 말없이 근처에 있던 지혈제를 상처에 뿌렸다.

“미안, 나 때문에.”

할릭이 반성하며 말했다.

“편지 정리하는 거 도와줄게.”

“아냐, 괜찮아. 내가 정리할 거야. 그게 좋아.”

어떻게든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괜히 찔린 사람처럼 쓸데없는 소릴 했다.

“친구들 거야. 저거.”

정말 쓸데없는 소리다.

‘말하지 말 걸.’

바로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할릭이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봤다. 내 밑에 덩치 큰 남자가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내 허벅지만 주구장창 내려다보았다.

“친구들이 너에게 보낸 거야?”

“아니, 내가 보내려고.”

“왜 안 보냈어?”

“못 보낸 거야.”

“왜?”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거든.”

나는 입을 다물었다가, 뒤늦게 한 마디 덧붙였다.

“지금은.”

할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리곤 조용해졌다.

불현듯 이 상황이 몹시 불편해졌다. 무슨 말이든 해서 화제를 바꾸고 싶은데 아까부터 머릿속이 백지였다.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 있는 사이 할릭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흉터가 나있는 내 허벅지 바깥쪽을 더듬었다.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신음했다.

“읏.”

할릭이 고개를 들어 날 봤다. 눈빛이 진지했다. 차분한 할릭은 몹시 드문 일이라, 원피스를 밑으로 잡아당기며 흉터를 가렸다. 왠지 들킨 것 같았다. 이게 채찍의 흔적이라는 걸.

“내, 내 다리가 예쁘긴 하지.”

뇌의 명령을 기다리는 걸 포기한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나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미친 듯이 눈을 굴렸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내 노력은 눈에 뵈지도 않는지, 할릭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고 거대한 그림자가 내 전신을 삼킨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씹으며 소리를 죽였다.

할릭이 왼손으로 의자의 등 받침을 고정시키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그의 품에 완전히 갇힌 모양이 되었다.

“카카나.”

그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문득 굵은 손가락이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아주 조금 밀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흠칫 몸을 떨자, 그가 조심스럽게 허벅지 바깥쪽의 흉터를 덧그리며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뭐야?”

“이건…….”

“아파?”

“아냐, 전혀. 하나도 안 아파. 아주 오래된 거라.”

“오래 됐다고? 넌 나이도 어리잖아.”

실제로 성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더 위쪽의 상처까지 발견했다. 아래에 있는 것보다 훨씬 굵은 흉터였다.

“얼마나 어렸을 때 이런 곤욕을 치른 거야?”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떨기만 하다가, 간신히 그의 손을 잡아채며 고개를 숙였다.

“이, 이건 몬스터한테 당한 거야! 약초 캐러 산행을 많이 다녔더니, 그래서…….”

“그래서, 안 보이는 곳에만 이렇게?”

할릭이 낮은 음성으로 묻는다. 눈빛에 살기가 배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화난 할릭은 처음 봤다.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손을 밀어냈다. 할릭이 곧장 물러났다.

“카카나. 치료가 끝나면 우리랑 진짜 헤어질 거야? 보호해준다고 해도?”

나는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릭이 주먹을 움켜쥐는 것이 얼핏 보였다.

“네 의견은 알겠어. 하지만 아마 떼를 쓸지도 몰라. 너는 우리에게 이미 너무 소중해졌거든. 아마 이해하기 힘들 테지만.”

할릭이 바닥에 떨어져있던 약초를 주워서 책상에 올려두었다.

“약초는 여기에 둘게.”

그리고 그렇게 뒤돌아 나가버렸다.

***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첼러스와 나는 일어나자마자 준비를 시작했다.

거실엔 이미 나머지 남자들이 소파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내가 사준 옷을 입고 차를 홀짝이는 용사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눈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우리랑 진짜 헤어질 거야?]

기분이 가라앉았다.

“출발하자.”

용사의 치료를 끝내고 주거지를 옮길 예정이었으므로, 집도 치워야 했다.

나는 회수용 특수마법스크롤을 꺼냈다. 스크롤을 찢자 저택이 나무 합판 뜯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축소되었다. 주먹만 한 크기로 작아진 저택이 내가 찢은 스크롤을 통과해 두루마리에 그림 형태로 흡수되었다.

그것을 둘둘 말아 붉은색 끈으로 묶고 가방에 넣었다. 집이 있던 자리가 풀 한 포기 없이 휑했다.

‘여기도 이제 안녕이네.’

빈 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번엔 독초가 아니라 약초가 많이 자생하는 곳으로 가볼까?’

멀거니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결전지로 뽑은 자리까지 거리가 제법 멀어서 걸어가는 내내 자꾸 상념이 들었다.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다행히 눈이 녹고 날씨도 풀려 생각만큼 춥지 않았다.

숨소리, 겨울초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을씨년스러운 바람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중간엔 잠깐 멈춰 아다르가 준비해둔 도시락을 먹었다.

공터까지는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근처에 신경독을 가진 독초가 군집으로 번식해 있는 곳을 발견해 빙 돌아가야 했다. 첼러스가 계속 살기를 흩뿌리고 있는 탓인지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허옇게 흩어지는 다섯 사람의 입김을 살피며, 이대로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혹시라도 나타났다가는 불안정한 힘을 가진 첼러스가 마나를 사용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공터에 도착했을 즈음엔 석양이 붉은 수채화 물감처럼 투명하게 번지고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해독제를 꺼냈다.

공터엔 한 종류의 풀이 빽빽하게 자라 있었는데, 그 이름도 유명한 독초 크라티였다.

크라티는 손발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독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죽음의 숲의 크라티는 독성이 세 배는 더 강하다는 점이다.

‘여기로 제국군이 텔레포트하면 피곤해질걸.’

나는 비장하게 생각하며 용사들에게 약을 나눠주었다. 크라티 때문에 미리 복용하고 진입해야 했다.

우리는 공터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 엉킨 마나와 관련된 두 종류의 약물을 그들에게 차례로 건넸다.

주황색 약은 마나방출제, 그리고 초록색 약은 마나정착제였다.

“주황색 약은 신호하면 마셔. 전신이 조이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정상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독이라 그런 거니까.”

“뭐?”

아다르가 되묻는 걸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마나가 방출되고 혈이 막히는 데 한 시간은 걸리니까 참고해.”

“이런 약은 생체 연구를 거쳐야 할 텐데, 카카나가 그런 연구를 하는 건 본 적이 없군요.”

스노아는 학문과 관련되면 쓸데없이 예리해졌다.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많은 것을 생략한 대답을 골라냈다.

“경험이 많으니까.”

또 질문이 나올세라 초록색 물약을 흔들며 급하게 설명을 이었다.

“이건 마나정착제. 마나방출제의 해독약인 셈이지. 이걸 마시면 마나가 다시 흡수될 거야. 그러면 너희가 요령껏 마나를 움직여서 마나혈을 새로 뚫어야 해. 원하는 길로.”

“헤어지기 전에 밥이라도 같이 먹자.”

줄곧 생각에 잠겨있던 할릭이 뒤늦게 부탁했다.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헤어지기 전이라.’

나도 물어볼 것이 있긴 했다.

그들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판단이 되면, 꼭 묻고자 했던 것.

“그래, 그러자.”

할릭이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잠깐 사이에 해가 저물어 어둑해진 하늘을 확인했다.

“그럼 준비는 모두 끝난 것 같네. 시작할까?”

나와 첼러스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5성급 방어마법스크롤을 찢었다.

불투명한 마법방벽이 첼러스와 내 주위를 동그랗게 감쌌다. 아다르가 마나방출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를 시작으로 나머지 인원들도 약을 삼켰다.

첼러스가 마음의 준비를 하듯, 우리 집 지하창고에서 주워온 녹슨 검에 손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명이 서 있는 자리에서 마나방출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심장한 미풍이 한차례 불어왔다.

일대의 모든 새들이 동시에 하늘로 날아오르며 멀리 도망쳤다. 바짝 긴장하며 그들을 지켜보는 순간, 주위의 모든 소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바람 소리, 풀 소리, 벌레 소리……. 귀를 메우고 있던 갖은 백색소음이 마치 진공 상태에 들어간 것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첼러스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딱하게 힘이 들어간 뒷목을 주무르며 방벽을 확인했다. 마법방벽이 돌이 떨어진 호수면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데.’

폭풍전야의 고요가 숨통을 틀어막을 때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우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넘어지지 않도록 첼러스의 옷자락을 그러쥔 찰나, 세상이 하얗게 터졌다. 정말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온 시야가 하얀 빛 무리로 조각조각 깨지며 터져나갔다.

백색으로 점멸한 세상이, 한 차례 물결치듯 꿀렁거리며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팔로 얼굴을 가렸다. 무시무시한 빛이 위로 쭉 솟아오르고 있었다.

눈을 최대한 가늘게 뜨고 정면을 확인했다. 아르모어가 말한 빛의 기둥이 어둠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파란색을 띤 거대한 빛기둥이었다. 단면이 깨끗하게 일직선으로 뻗어 올라 있었다.

그것이 멈출 기세 없이 솟아올라 기어코 하늘을 가리고 있던 구름마저 꿰뚫었다. 정말이지 끝도 없는 길이였다. 과연, 모든 제국민들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르모어의 말이 옳았다. 이렇게 밝고, 크고, 긴 빛의 기둥은 웬만한 곳에서는 모두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쳐들어올 제국군에 대비해 몸을 긴장시켰다.

***

“……!”

물의 현자, 아레사 나이제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반사적으로 스태프를 들고 창문을 열어 젖혔다. 어둠이 새까맣게 내린 하늘에 가느다란 빛줄기가 바늘처럼 위로 솟아 있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스태프를 놓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빛줄기를 바라보는 그의 주름진 눈매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여자가 거의 넘어질 기세로 집무실에 들어왔다.

“혀, 혀, 현자님!”

인상이 날카로운 여자가 반쯤 흘러내린 외안경을 도로 밀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레사 나이제르가 넋이 나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자님도 보, 보셨습니까?”

여전히 흥분상태인 여자가 아레사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쏟아냈다.

“이런 괴현상은 처음 봅니다. 믿어지십니까? 저건 마나입니다. 저렇게 고밀도로 응집된 마나는 처음……. 현자님?”

이상을 알아챈 여자가 아레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여자가 옆에서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꽉 맞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다.

심각성을 깨달은 여자가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현자님. 괜찮으세요?”

아레사 나이제르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마나 기둥을 바라보았다. 그가 먼 과거의 환영을 보고 있는 듯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스승님.”

여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되물었다.

“현자님의 스승님이요?”

아레사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리다가 기어코 자리에 쓰러졌다.

“현자님, 괜찮으세요? 현자님. 현자님!”

어렸을 적, 과도한 훈련으로 인한 마나고갈 이후로 처음 하는 기절이었다.

***

끝없이 위로 치솟던 빛의 기둥이 서서히 가늘어지면서 실금이 되어 사라졌다.

사방이 순식간에 시커메진다. 암순응이 덜 된 탓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한 빛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소음은 자취를 감추어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소리도 없으니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오직 손에 쥔 첼러스의 옷자락만이 선명하게 의식되었다. 그것을 위로 삼으며 발걸음을 그에게 옮긴 순간, 지옥 같은 폭발이 현장을 덮쳤다.

콰아아아―!

여태 잠잠했던 귀에 고막을 터트릴 것 같은 폭발음이 때려 박혔다.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네 명의 용사들이 서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도저히 바람이라고 볼 수 없는 폭풍이 거칠게 휘몰아쳤따.

공기가 희박해진 것처럼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폐가 짓눌리는 기분이다.

좌우로 눈을 굴리자 허공이 무언가로 꽉 들어찬 것처럼 흐리게 보였다. 수천수백 겹의 아지랑이가 공기를 채우고 있는 것 같다. 간신히 숨을 들이켜고, 평소보다 두 배는 무거워진 머리를 들어올렸다.

저 멀리 용사들이 서 있던 공터가 보였다. 그곳은 이미 땅이 6미터쯤 밑으로 푹 꺼졌다. 머리채를 쥐어뜯기는 것처럼 나부끼는 나무들이 들썩이며 뿌리를 보였다. 이미 공중은 흙덩어리가 붙어있는 식물이 날아다녀 엉망이다.

나는 무서우리만치 출렁이는 마법방어벽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았다.

콰앙!

마나폭풍이 한 번 더 강하게 밀려오며 방벽을 후려쳤다. 출렁이던 방벽 우측 상단에 금이 갔다. 그 부분을 기점으로 새하얀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야말로 기겁했다.

“첼러스!”

“스노아에게 집결되어 있던 마나가 흩어지면서 직격타를 맞은 것 같습니다.”

첼러스가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인간은 아무렇지도 않나?’

나는 희미한 존경심을 느끼며 그에게 바짝 붙었다. 몸을 일으켜야 하는데 누가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건 예상했던 거잖아!”

“제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 많은 양의 마나들이 저에게 흡수되려고 달려드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첼러스가 힘이 들어간 몸을 움직여 내 앞에 섰다. 그가 앞에 서니 굳건한 장벽이 세워진 것처럼 든든했다.

“제 허리를 끌어안으십시오, 카카나. 힘을 풀어선 안 됩니다.”

내 머리 가누기조차 힘든데 무슨 수로 끌어안으라는 건가.

그러나 첼러스도 최악인 몸을 이끌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이 정도도 해내지 못하면 내 자존심이 기를 못 편다.

어금니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그의 옷을 잡아챘다. 그리고 암벽등반을 하듯이 기어 올라갔다. 희박한 숨을 허겁지겁 들이마시며 간신히 허리를 끌어안는 데까지 성공하자, 첼러스가 검을 검집째로 뽑아 땅에 쑤셔 박았다.

동시에 방어벽이 와장창 깨져나갔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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