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은둔자
지형을 이용해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는 맹금류처럼 보행이 소리 없이 날렵했다. 나는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다르가 나를 들쳐 메고 뛰기 시작했다.
“으!”
몸이 덜컹 들리니 나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다르가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속도가 무시무시해서 그가 나를 잘못 놓쳤다간 길거리에 스무 바퀴 정도 구른 다음 벽에 머리를 찧고 사망할 것 같았다.
“왜 그래?”
“추적자가 붙었어.”
강한 바람이 등을 세게 긁는 것처럼 불어왔다. 몸이 파도처럼 위아래로 거세게 덜렁거려서 숨을 흡, 흡, 들이켰다. 아다르가 다른 손으로 등을 눌러 내 몸을 제 가슴팍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가 사람이 많은 광장 방향으로 몸을 틀려다가, 갑자기 다리에 제동을 걸었다. 속도를 이기지 못한 몸이 2미터쯤 쭉 밀리며 아다르의 두 허벅지에 돌덩어리처럼 힘이 들어갔다.
타다닥!
가까스로 멈춰 선 발 끄트머리에 다섯 개의 검날이 순서대로 꽂혔다.
“더럽게 많네.”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린 아다르가 날아오는 암기들을 피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막다른 길을 마주하고 혀를 차며 뒤를 돌았다.
대낮인데도 밤처럼 음산하고 어둑한 골목이었다. 아다르가 멈추자마자 검은 복면의 사내들이 마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순식간에 우리를 에워쌌다.
“모자를 벗어라.”
복면의 사내 중 한 명이 명령했다.
“얌전히 명에 따르면 살려줄 수도 있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으니, 얼굴을 내보여라.”
이상한 말이었다.
누군가로 의심을 받아 쫓겼다 하더라도, 베샤에 로브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차고 널렸다.
‘왜 하필 우리를 쫓은 거지?’
죽음의 숲과 한참 떨어진 베샤에서 난데없이 암살자들에게 쫓긴 현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건 목숨을 부지한 이후에 차차 알아볼 일이었다.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내 얼굴을 잠시 살핀 아다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꽉 잡아.”
“응?”
그와 동시에 아다르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아니, 튕겨 나갔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그가 쇄도하는 화살처럼 벽을 타고 올라가서, 손을 한 차례 흔들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 그의 손에는 내가 주었던 잭나이프가 날이 시퍼렇게 선 채 들려 있었다.
날아드는 수십 개의 검날을 가볍게 허리를 꺾어 피한 아다르가―심지어 그것들은 내 로브의 끝자락도 베지 못했다― 가장 앞에 있는 남자에게 돌진했다.
너무 빨라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아다르가 두 번째 사람에게 걸음을 떼었을 때 이전의 남자는 무릎이 푹 꺾여 쓰러지고 있었다.
어이가 없게도 나를 안느라 한 손으로만 싸우고 있는 아다르를, 열 명의 암살자가 당해내질 못했다. 그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암기를 던져도 아다르는 그것을 모조리 날아오는 도중에 손으로 잡아버리거나 잭나이프로 튕겨냈다.
‘저게 가능해?’
암살자들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그들이 주춤하자, 그 찰나의 시간을 귀신같이 포착한 아다르가 눈을 빛냈다. 그가 잡아챘던 무기를 도로 되돌려 날려 보냈다. 암살자가 던졌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속도와 힘으로.
그의 손에 들린 다섯 개의 무기가 각각 다른 장소에 서 있는 암살자에게 정확히 날아가서 명중하는 것을 봤을 땐 도저히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 죽이는 데 특화된 몸이구나.’
암살자가 입에 거품을 물고 픽픽 쓰러졌다.
5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암살자들을 모두 땅바닥에 드러눕게 만든 아다르가,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안부 인사를 건네듯이 가벼운 어조였으나, 희미하게 걱정을 띤 눈빛이었다.
“괜찮아.”
나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대답했다.
“일단.”
나를 땅에 내려 준 아다르가 유일하게 의식이 있는 암살자에게로 걸음을 옮기며 운을 뗐다.
“얘 자결하기 전에 해결부터 보자.”
그리고 암살자가 입을 다물기 전에 손가락을 쑤셔 넣어 작은 알갱이 하나를 꺼냈다. 독이 들어 있는 구슬이었다.
“자, 우리를 왜 쫓았는지 말해 보실까?”
암살자의 눈까지 철저하게 가린 아다르가 심문을 시작했다. 턱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암살자의 얼굴이 거의 납작한 붕어 수준으로 찌그러졌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해. 우리 바빠.”
“마, 말 할 수, 읍, 다…….”
“너 얼마 전에 치료받았지?”
아다르가 다른 손으로 남자의 왼쪽 팔뚝을 살짝 움켜쥐며 얘기했다.
“아직 다 아물지 않은 것 같은데, 세게 쥐기라도 하면 상처가 터지겠네.”
아다르가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으며 손에 힘을 줬다. 암살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게 너희들한테 익숙한 방식이잖아, 아니야? 그래서 눈높이 맞춰 주겠다는데 왜.”
“너, 넌 누구냐……!”
“질문은 내가 해.”
아다르가 암살자의 팔뚝을 세게 그러쥐었다. 극렬한 통증을 느낀 암살자의 목과 이마에 대번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아다르가 흘끗 내 눈치를 살피다 다시 고개를 숙이며 으르렁거렸다.
“나도 험해지고 싶지 않아. 뒤에 비위 약한 친구도 있고. 그래서 처음부터 네 소중한 알 두 개를 건들진 않았잖아.”
암살자가 히익, 숨을 들이켰다.
“내 마지막 자비야. 편하게 죽고 싶으면 대답해. 우리를 왜 쫓아왔지?”
나는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아다르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그가 아, 소리를 내며 억울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겁을 주는 의도니까 물론 험악한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방법이 있는데 야만인 같은 짓을 뜬 눈으로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자백제 먹이자. 나한테 하나 있어.”
“자백제라고?”
아다르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놀라는 거 보니 귀한 건 아나 보네?”
“너 자백제도 만들어?”
“이 쉬운 걸 누가 못 만들어? 재료가 귀해서 그렇지.”
아다르가 돌연 입을 다물고 날 올려다봤다.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답답해 보이는 표정을 무시하며 발버둥 치는 암살자의 입에 회색 자백제를 세 방울 떨어트렸다. 그가 삼키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자, 아다르가 손날로 그의 목울대를 망설임 없이 쳐올렸다.
“컥!”
암살자가 죽을 듯이 몸을 꿈틀대다가 자기도 모르게 자백제를 꿀떡 삼켰다. 내 황당하단 얼굴을 본 아다르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이게 빨라.”
“대체 누가 악당인 건지…….”
나는 작게 웅얼거리며 암살자의 상태를 살폈다. 그가 서서히 발버둥을 멈추며 몸을 나른하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효과가 빨랐다.
제대로 흡수가 됐나 확인하기 위해 그의 숨에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희미하게 달콤한 냄새가 났다. 1분에서 2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냄새가 완전히 사라졌다.
됐다.
나는 냉큼 말을 걸었다.
“왜 우리를 쫓아왔지?”
암살자가 한참 후에 멍한 어조로 대답했다.
“명령을, 받았다.”
“무슨 명령?”
“대도시, 약초상, 희귀한 약초, 대량, 구매하는 손님, 쫓아라.”
아다르와 내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내가 습관적으로 생각에 빠지자, 아다르가 대신 그에게 질문했다.
“언제 그 명이 떨어졌지?”
“어젯밤 9시.”
그 시각이라면, 죽음의 숲에서 탈출하고 막 베샤에 도착했을 때다.
‘희귀한 약초를 대량으로 구매하는 손님을 쫓아라?’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명령인가.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절대 가정하고 싶지 않았던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리고 덜컥 숨을 멈췄다. 어젯밤 보초병들의 감시를 피해 인어의 눈물을 사용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그럴 리가 없어. 그 정도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거잖아…….’
그래, 그것만으로 알아챌 리가 없다. 분명히 그랬지만 등이 싸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아다르가 창백하게 질린 내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고 심문을 계속했다.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뭐지?”
“여성, 양 수인족, 이면, 잡아 오라는, 명.”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다르도 거기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직감한 듯, 내 발치를 흘끔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누가 시켰지?”
“모른다. 돈만 받고, 일한다.”
아다르가 이를 갈았다.
“말단이라 아는 게 없네.”
나는 거친 손놀림으로 아다르의 옷을 확 움켜쥔 뒤 잡아끌었다. 내 얼굴을 그제야 확인한 아다르가 미간을 찡그렸다.
“카카나?”
“어, 어서. 어서 마차를, 타, 타고 집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내가 큰 대로변으로 가다 말고 휘청거리자 암살자의 뒤처리를 하던 아다르가 황급히 다가와 나를 안아 올렸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빠, 빨리. 집…….”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떨렸다. 아다르가 나를 품에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일단 숨부터 제대로 쉬자. 집은 걱정 말고.”
아다르가 덩달아 초조해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런데도 내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가 차가워진 내 손을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빠르게 돌아갈 방법을 알아. 오늘이면 가.”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그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스스로 똑바로 서고 싶었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내 입을 바라본 아다르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내려주었다.
***
‘위태로워.’
아다르는 스스로 똑바로 서려는 카카나를 고요한 눈으로 응시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어쩌다 튄 하얀색 페인트처럼 거뭇한 돌벽을 흐르듯 짚고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형태를 잃어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피부색도 창백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그녀의 굽은 등과 손가락을 보면 괜찮냐고 물어볼 것이다. 카카나는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전신을 떨고 있었다.
아다르는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그어놓은 선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려 하면 더없이 완고해지는 인물이었다.
나는 괜찮으니 더 아는 체하지 말라고, 냉정하고 단호하게.
그녀는 누구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수상한 장소에 수상한 집을 짓고, 그곳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걸 가장 편하게 생각했다.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땐 약초 연구에 빠져들었다. 누군가 다가가려 하면 자신의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어떤 순간에도 짐이 되지 않으려 했으며, 사적인 주제가 나오면 절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에 장난을 치고 가볍게 말을 걸지만, 정말 딱 그만큼의 무게감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했다.
자기가 곤란해지는 것보다 치료사의 의무와 역할에 더 집착하면서, 그 호의를 굳이 숨기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대부분의 순간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특징들은 되레 그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자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천재 약제사.
그게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그녀는 알까.
아다르는 거세게 숨을 몰아쉬는 카카나의 머리 옆으로 손을 짚었다.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웠을 때 그녀의 등에 뻣뻣하게 긴장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몸에 밴 경계.’
아다르의 검은 눈이 기이한 이채를 머금고 카카나의 동태를 살폈다. 아래로 내리깔린 속눈썹의 그림자가 그의 눈을 더욱 새까맣게 물들였다.
‘겁먹은 등.’
무슨 사연일까.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건드릴 수가 없다. 파고들면 도망간다. 그렇다고 관심을 거둘 수도 없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미련하게 혼자 버틸 인간이다. 손도 끝끝내 내밀지 않을 것이다.
카카나 페아는, 그래, 최적의 순간에 기회를 노려 잡아채지 않으면 모든 일을 그르치고 말 유형이다.
이르게 행동하면 그어놓은 선을 왜 넘었냐 화를 낼 테고 그렇게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느리게 행동하면 신기루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영원히 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아다르는 진한 눈매를 약간 찡그렸다.
“카카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화를 잘라낸다.
“기다려.”
‘진짜, 내 성격에 안 맞는데.’
목을 긁으며 올라오는 모종의 충동을 억누른 아다르가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이런 건 첼러스 그 녀석한테나 맞지.’
스스로 이겨낼 때까지 뒤에서 지켜보는 짓 같은 건.
아다르는 잠시 그녀를 도울 궁리를 하다가, 한 가지 꼼수를 생각해냈다. 그는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했다.
“카카나, 내 손 잡을래?”
“갑자기 왜 친절한 척이야?”
카카나가 냉소적으로 얘기했다. 오늘 시장을 도는 내내 손을 잡고 걸었으면서 저런 반응이었다. 물론 아다르는 그녀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
“너 지금 갓 태어난 새끼 양 같아.”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안색이 파리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아서, 아다르는 그녀 몰래 등으로 손을 뻗었다. 그들의 희망이고 기적이었다. 이런 더러운 바닥에 넘어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카카나는 예상대로 초점이 약간 엇나간 부분에서 발끈했다.
“난 성인이야.”
아다르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며 말고.”
그는 뭐라 구시렁거리는 그녀의 기색을 살피면서 슬쩍 손을 잡았다. 카카나가 거부하기 위해 입을 열기 전에 아다르가 냉큼 선수를 쳤다.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냥하고 다정하게.
“넘어질 것 같아서 걱정돼. 다칠까 봐.”
허점을 푹 찌르면서.
이런 게 단연코 그가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독한 말을 쏘아붙일 준비를 하고 있던 카카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당황한 기색으로 입을 빠끔거리다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어물거렸다.
모자 밑으로 흘끗 보이는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와주게 해 줘. 응?”
이런 대사는 평소에 안 그러던 사람이 해야 효과가 좋은 법이다. 아다르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자기 손을 잡은 아다르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가 정말 걱정이 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던 탓이다.
‘음, 성공.’
아다르가 사르르 웃었다.
‘더 부끄러워하는 얼굴도 보고 싶네. 그러면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려나?’
그가 약간 글러 먹은 생각을 하는 사이, 얼굴을 지배한 뜨거운 기운을 누르는 데 성공한 카카나가 작은 소리로 투덜댔다.
“난 네 그 웃는 얼굴이 제일 싫어.”
“난 좋은데.”
아다르와 카카나가 천천히 빈민 지역을 벗어났다. 갓길을 따라 한참을 걷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로변이 나타났다.
“그래서, 오늘 안에 갈 수 있다는 방법이 뭔데?”
“나한테 마법 스크롤이 있어.”
그녀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스노아가 혹시 모른다고 만들어 준 게 하나 있거든. 좌표가 집 거실로 찍혀 있어서 찢기만 하면 바로 집에 갈 수 있어.”
카카나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가, 이내 강렬한 의문에 휩싸였다.
“마나를 못 쓸 텐데 마법 스크롤을 어떻게 만들었지?”
“그게 문제야.”
아다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마나 없이 마법진만 그려진 스크롤이거든.”
“뭐?”
“마법진에 마나를 입히는 건 마법사만 할 수 있다고, 스노아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마법사를 찾아가라던데.”
“그러면 있으나 마나잖아. 마법사가 흔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찾으란 거야?”
그녀가 손을 들어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다르가 빤히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자신이 불안 증세를 보인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한 얼굴이었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게 확실하군.’
아다르는 카카나와 비슷한 증세를 보이곤 했던 과거의 먹잇감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머릿속 한구석에 스치듯 ‘감히’라는 단어가 떠오르다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어서, 그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잭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습관적으로 얼굴에 감정을 지워낸 아다르가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마법사는 내가 찾으면 돼.”
“네가 무슨 수로? 성공한다 해도 오늘 안에 가는 건 무리잖아.”
아다르가 카카나의 머리를 위로하듯 쓰다듬었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엔 갈 수 있어. 장담해. 마법사는 생각보다 많거든. 특히 큰돈이 오가는 뒷세계엔.”
그가 입안으로 소리를 삼키며 큭큭 웃었다. 카카나는 농담이 아니라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져서 뒤로 조금 물러섰다.
“무, 무슨 짓을 하려고?”
“거기까지는 몰라도 돼. 문제는 내가 마법사를 찾는 동안 널 어떻게 보호하느냐야. 추적자가 붙을 게 뻔하니까, 용병을 고용하는 게 좋겠어.”
아다르가 주머니를 뒤지더니 묵직한 것을 꺼내 들었다. 카카나도 몇 번 본 적이 있어 아는 물건이었다.
용병패다.
아다르가 왜 그걸 가지고 있는지 둘째 치더라도, 생긴 모양이 심상치가 않았다.
‘용병패가 원래 저런 모양인가?’
통용되는 평범한 용병패와 달라도 많이 다른 패였다.
우선 두께가 확연히 더 두꺼웠고, 실용성을 노린 물건이라기엔 귀족의 브로치처럼 무늬가 화려했다. 색깔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쯤 흘낏거릴 정도로 고급스러운 금색이었다―혹은 진짜 금일지도 몰랐다―.
패에는 문어보다 다리 수가 많고 이목구비를 전부 갖춘 괴상한 바다생물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가장자리에 장인이 새겼을 것이 틀림없는 파도 무늬가 섬세하게 얽혀 있었다.
용병길드의 인장이 각인되어 있으니 용병패는 확실한데, 영 장식품 같은 외양이다. 카카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할릭이 빌려줬어.”
“용병패가 원래 이렇게 화려했던가?”
“할릭은 실력 좋은 용병이었으니까. 전설급 용병패 아닐까.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 우선 용병길드 찾아보자.”
사실 아다르는 이미 점찍어 놓은 곳이 있었다. 카카나와 번화가를 돌아보면서 다른 곳과 확연하게 마나의 농도가 짙은 곳을 몇 군데 지나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마나의 밀도가 높은 곳을 상기했다. 복잡한 골목길을 앞마당 삼아 움직이던 습관이 남아 있어서 다행히 위치가 어디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끌었다. 카카나가 그의 뒤를 따랐다.
***
아다르는 ‘아누비르 용병단―베샤 지부―’라고 쓰여 있는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내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 아다르가 망설임 없이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수문이라도 개방된 듯, 쩌렁쩌렁한 소음이 파도처럼 귀를 덮쳤다.
베샤의 대로변에서 느낄 수 있는 웅성거리는 느낌과는 질적으로 다른 소음이었다.
나는 소리로 된 주먹에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얼굴을 구기고 사위를 살폈다. 우락부락한 용병들이 대낮부터 술잔을 부딪치며 와, 하고 웃고 있었다. 구석에서 무기를 손질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싸우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소금기가 자글거리는 냄새와 특유의 쇠 비린내, 그리고 희미한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완연한 겨울인데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의뢰?”
계산대에 앉아 반쯤 졸고 있던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아다르가 뒤에 서 있던 나를 옆으로 끌어왔다.
“이 애를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보호해 줄 용병을 찾고 있는데.”
“특별히 찾는 용병은?”
“저기서 싸우고 있는 여자 중에 붉은 머리.”
아다르가 한창 쌈박질 중인―정확히는 상대를 일방적으로 패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성을 가리켰다. 험상궂은 사내가 픽, 코웃음을 치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눈이 높아도 너무 높으시네.”
그가 걸걸한 목소리로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이블라는 안 되겠수, 형씨. 쟤는 돈 아무리 줘도 구미가 당기는 일 아니면 안 해. 그녀는 명예급 용병이오. 두 분은…….”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참고로 아다르는 아직까지 예의 그 거적때기 같은 로브를 둘러쓰고 있었다.
“눈 씻고 찾아도 그녀의 흥미를 당길 구석은 없어 뵈는구려. 1인 호위만큼 지루한 것도 없다오. 보아하니 아주 촌에서 오신 모양인데…….”
용병이 비웃음을 참으려는 듯이 잠깐 말끝을 흐렸다.
“용병에는 급이 있소. 소문급, 칭송급, 명예급, 전설급, 신화급 이렇게 다섯 개가 있지. 전설급은 제국에서 몇 안 되고, 신화급은 사실상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급인데…….”
“됐고, 나는 그녀가 해야 마음이 놓이겠는데.”
“글쎄, 이블라는…….”
“아니.”
아다르가 짜증 서린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로 하겠어.”
“손님…….”
험상궂은 사내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어찌나 거구인지 고개를 바짝 추켜올려야 했다.
나는 럼주통도 으깰 수 있을 것 같은 사내의 통나무만 한 팔뚝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내가 경고하듯이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모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마치 태산이 앞에서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저는 분명, 안 된다고 했는뎁쇼?”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든다고 했어.”
“여기서 이러시면 많이 곤란하오. 여기가 용병들 소굴이라는 걸 잊은 게요?”
반쯤은 협박이 섞인 경고였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이었다. 아다르에게 협박이라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꼴이다.
“되도록 안 보이는 게 좋을 거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아다르가 곤란한 투로 혼잣말을 했다.
“어쩔 수 없지.”
그가 아까 보여주었던 할릭의 화려한 용병패를 꺼내들었다. 푸른색 수술이 흔들리며 드러나고, 그 밑에서 여기저기 긁힌 흔적이 있는 황금패가 나타났다.
변변찮은 것을 지켜보듯 하던 사내가 파란색 수술에 관심을 보이더니, 곧 용병패를 확인하고 안색을 허옇게 굳혔다.
그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는 사람처럼 눈꺼풀을 깜박이다가, 다음에는 두 손으로 눈을 비비기까지 했다. 사내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용병패를 몇 초간 멍하니 응시하더니, 어느 순간 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숨도 쉬지 못하고 꺽꺽거렸다.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닌데.”
아다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곧 덮쳐올 무언가를 감지한 사람처럼 불길한 목소리였다.
사내가 이상증세를 보이자, 건물 내부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시에 조용해졌다. 하도 시끄러워서 이곳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수십 쌍의 시선이 등에 와 박히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오금이 저리고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근처에 선 사람은 아다르와 사내뿐인데도, 목에 칼날이 들이 밀어진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아다르가 로브를 펼쳐 감싸듯 나를 자기 품으로 끌어들였다. 그에게 바짝 붙어 서자 신기하게도 날카롭게 갈린 살기가 미치지 못했다. 피부를 찌르듯 뻗쳐오던 한기가 아다르의 체온에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잠깐 사이에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크, 크, 크라켄……!”
연신 꺽꺽대던 사내가 마침내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는 거의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갈 지경에 도달해 있었다. ‘크라켄’이라는 소리를 들은 주위가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크라켄이라고? 신화 속 바다 괴물?”
“크라켄이면 오래전에 토벌되었다고 들었는데.”
“근데 용병패 보고 말하지 않았어?”
“저게 용병패라고? 크라켄이 그려진 용병패는 처음 듣는 소린데…….”
아다르가 입안으로 작게 ‘할릭, 이 망할 놈’이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아다르가 음산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습관적인 미소였으나, 어딘가 싸한 기운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
“오늘 왜 이렇게 귀가 가렵냐.”
과거의 용병왕, 할릭 갈로프사가 약지로 귀를 후벼파며 툴툴거렸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서적을 차분히 읽고 있던 스노아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할릭은 이제 손바닥으로 귓바퀴를 팡팡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가려우면 귀이개 써.”
“썼는데도 이러네. 뭔가 으슬으슬한 게,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그가 왼뺨에 난 흉터를 긁적이다 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부는 거무죽죽한 숲의 풍경이 보였다.
“둘한테 뭔 일이라도 생겼나?”
“잘 돌아오겠지. 아다르도 있고.”
“그렇지? 하긴 뭐, 그걸 줬으니 뭔 일 생기더라도 잘 넘어가겠지.”
“그거?”
미간을 좁힌 스노아가 약간 불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응, 내 용병패.”
탁.
와장창.
스노아는 들고 있던 책을, 첼러스는 들고 있던 낡은 단검을 떨어트렸다. 요란한 소리에 할릭이 휘둥그렇게 뜨인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왜들 그래?”
“큭큭큭…….”
오직 소파에 눕듯이 앉아 있던 아르모어만이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새빨간 핏빛 눈으로 할릭을 나른하게 쳐다보았다.
“둘이 돌아올 때가 기대되는군.”
몹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할릭의 얼굴이 순식간에 해쓱해졌다.
“왜, 왜 그러는데, 아르모어? 나 무슨 사고라도 쳤어?”
“그대는 생각이 단순해서 탈이다.”
“네가 가진 용병패는 두 개잖아. 평범한 그거, 물론 전설급이 평범하진 않지만, 아무튼 그거 빌려줬다는 얘기지?”
스노아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간절하게 되물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 그의 안색은 이제 물에 빠져 죽은 주검처럼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
“아니……. 도움이 되려면 크라켄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아서…….”
심상찮은 분위기를 읽은 할릭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현기증을 느낀 첼러스가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좌절한 스노아의 언성이 대번에 높아졌다.
“그건 트리포아 왕국에서 특별히 제조해 준 거야! 제정신이야? 그런 걸 아무 생각 없이 보여줬다간!”
“용병길드가 뒤집힐 겁니다.”
첼러스가 폐부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깊은 한숨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만약 이 시대까지 신화급 용병이 더 배출되지 않았다면 사태는 더욱 커질 겁니다. 물론 못 알아볼 용병도 있겠으나, 알아볼 용병이 한 명이라도 있을 확률이 큽니다.”
“그, 그럼 어떻게 되는데?”
“누가 봐도 용병이 아닌 자들이 신화급 용병패를 들고 나타났으니, 누군가는 뒤를 캐려고 하겠죠. 물론 아다르는 뒤를 밟힐 사람이 아닙니다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아다르는 약삭빠른 놈이잖아. 골치 아플 물건이었으면 사용하지도 않았을 거야.”
할릭이 마지막 희망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르모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의 기대를 박살 냈다.
“상대가 안 좋았군. 아다르는 용병패를 사용할 거다.”
“왜?”
할릭이 절망하며 물었다.
“트리포아에서 특별한 신화급 용병패를 제조해 준 건, 당시에도 아는 사람만 알던 사실이 아니었나. 소문이 퍼져도 용병이 아닌 이상 국경을 넘진 않았겠지. 아다르는 음지에서 암살을 도맡아 하던 인물이다. 성격도 무심해서, 아마 네 용병패 같은 건 관심을 두지 않았을 거다.”
그의 말대로, 아다르는 자기가 흥미를 느끼는 일들 외에는 섭섭할 정도로 관심이 없고 무정한 인간이었다.
“우리들이야 차원전쟁에서 너랑 함께 일하며 알음알음 알게 된 것이 있으나, 아다르는 암흑세계에서 끝까지 혼자 움직이던 인물이었잖나.”
할릭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큰일 났다…….”
***
언뜻 들린, 아다르의 죽여버리겠다는 싸늘한 중얼거림에 화들짝 놀랐다.
“왜 그러는데?”
아다르가 저기 좀 보라는 듯 턱짓으로 계산대를 가리켰다. 사내가 거의 무릎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방금 현신한 신 앞에 선 사제처럼 경건하고 엄숙해져서,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용병패를 받치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사위를 살폈다. 어느새 우리 주변으로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서 웅성거리며 용병패를 구경하고 있었다.
누구는 그 용병패가 가짜는 아닌지 확인하고 있었다. 들어보니 용병패는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져서, 근처에 다른 용병패가 있으면 희미하게 발광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누군가 자기의 용병패를 가까이 들이대자, 할릭의 금빛 용병패에 희미하게 푸른빛이 감돌았다. 다들 크라켄이 그려진 용병패는 처음 보아서 어리둥절한 기색이었지만, 몇몇은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귀찮아질 거라는 아다르의 말이 본능적으로 이해되었다.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입안이 말라붙었다.
“이, 이걸 어떻게…….”
사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사이 붉은 머리의 용병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다르가 지목했던 용병이었다.
그녀가 사나운 기세로 용병패를 휙 가져가더니 모양을 살폈다. 그리곤 가히 불이 타오른다 해도 무방할 새빨간 장밋빛 눈으로 우리를 홱 쏘아보았다.
“너희가 실종된 신화급 용병패를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시, 신화급? 그게 진짜 존재한단 말이야?”
“나도! 나도 좀 보자!”
용병들이 우악스러운 기세로 아우성치자 붉은 머리 여인, 이블라가 눈알을 험악하게 부라렸다.
“상황 파악 좀 해, 새끼들아. 딱 봐도 용병이 아닌 자들이 신화급 용병패를 들고 왔는데, 이게 애들 장난인 줄 알아?”
그녀가 묘한 눈으로 패에 양각된 바다괴물을 훑어보았다.
“이걸 실제로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린 답해 줄 의향이 없어.”
“유감이네. 나는 답을 들어야겠거든.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용병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고.”
이블라가 허리춤에 달려 있던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대자, 서로를 쳐다보던 용병들이 같은 뜻을 품고 허리를 숙였다. 당장이라도 우리를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 것처럼 보였지만, 만만한 상대라고 여겼는지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에 손을 집어넣고 적절한 시기를 쟀다. 여차하면 사용할 약물들이 많았다.
그때 우리를 포위한 사람들을 천천히 훑던 아다르가 쯧, 혀를 찼다. 그와 동시에 장내에 팽배해 있는 긴장감을 찢으며 날카로운 단발성의 소음이 퍽, 하고 터졌다.
나는 처음에 그 소리의 정체가 뭔지 알지 못했다. 용병들이 낸 소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석고상처럼 굳은 채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블라 또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그녀가 꿀꺽 침을 삼키더니, 오른손으로 자신의 뺨을 살짝 훑었다. 언제 다친 건지 그녀의 뺨에 일직선으로 베인 상처에 붉은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 피가 그녀의 손길을 따라 길게 뭉그러졌다.
나는 그제야 그녀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벽에 아다르의 유일한 무기, 잭나이프가 지이잉 떨리는 소리를 내며 박혀 있었다.
“마음대로 해.”
어느새 이블라에게서 용병패를 회수한 아다르가 굳어버린 용병들을 헤치고 벽으로 가며 말했다. 목에 칼이라도 겨누어진 사람들처럼, 새파랗게 질린 용병들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사정은 이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손에 묻은 자기 피를 넋이 나간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공격을 포착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다르가 잭나이프를 뽑았다. 나무로 된 두꺼운 건물 벽의 파편이 부스러지며 작은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에서 뼛속까지 시린 겨울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대신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내 친구를 보호해 줘야겠어.”
“…….”
“날 협박하려는 생각도, 뒤를 밟을 생각도.”
아다르가 잭나이프에 묻어 있는 이블라의 핏물을 로브에 닦아냈다.
“당연히.”
그리고 그녀로부터 다섯 걸음 떨어진 지점까지 걸어가 멈춰 섰다.
“하지 않는 게 좋을 거고. 나는 정식으로 돈을 내고 용병을 고용하러 왔어. 평범한 손님이라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나?”
풋내기 용병 하나가 억지로 몸을 돌려 달려들려고 하자, 이블라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알아들었다. 네 말에 따르지.”
“난 똑똑한 사람이 좋더라.”
아다르가 가벼운 어조로 못을 박았다.
“내일 아침까지야. 친구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는 걸 추천하지.”
그리고 그 말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바람처럼.
유일하게 정신을 차린 이블라가 얼어 있는 용병들을 두드리며 전투태세를 와해시켰다. 나는 길드 소속 용병이 짧게 머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은 투숙용 방을 안내받았다.
“여기서 지내면 된다. 식사는 내가 가져다주지.”
딱딱한 어조로 설명한 이블라가 나를 노려보다가 문을 닫아 주었다.
완전히 혼자가 되자 비로소 한숨이 터졌다. 최악의 몸 상태로 많은 일을 겪은 탓에 근육이 흐물흐물했다. 침대에 엎어져서 불안과 긴장으로 쿵쿵대는 심장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자니, 의식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한계였다.
나는 시커먼 벼랑 밑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눈이 감겼다. 침대에 몸이 빨려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빛 한 점 없는 어둠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완벽한 발정기 직전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앞이 흐려서 눈꺼풀을 깜박였더니,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발열증상을 보이는 피부가 몹시 뜨거워서, 눈물이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상체를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심한 감기몸살을 앓았을 때처럼 정확히 콕 집어 말할 수 없이 온몸이 아팠다.
피부를 스치는 이불의 감촉이 선명해서 칼에 베이는 느낌을 자아냈다. 걸치고 있는 로브도, 옷도, 심지어 뺨을 스치는 머리카락마저 통증으로 느껴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행위조차 곤욕이었다.
이 고통을 잠재우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발정기의 목표는 뚜렷하다. 이 빌어먹을 생물학적 작용은 정해진 기간 동안 원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지 주인을 극도의 스트레스와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그건 수인족을 사람이 아닌 천한 신분으로 규정짓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약…….’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면서 생각하다, 여기가 집이 아니라는 것까지 떠올랐다. 다행히 발정기를 억제하는 약도 가방에 챙겨왔다. 그게 책상 위에 있어서 움직여야 하는 게 문제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소곤거리는 환청이 또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언니!]
절규하는 비명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서 왕왕거렸다. 어금니를 악물고, 바들바들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가에 비쳐들고 있었다. 그 아래에 가방이 놓인 책상이 보였다.
그때, 창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하늘하늘한 커튼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겨울바람이 수십 개의 바늘처럼 얼굴을 후려치고 지나갔다.
눈물이 줄기줄기 떨어진다.
“카카나?”
눈앞이 뿌옇게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달콤한 포도주 향이 났다. 알싸한 향기가 마취제처럼 콧속으로 스며든다.
나는 새카만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아다르…….”
그리고 의식을 잃어버렸다.
***
아무리 사람이 잠들었다지만 이상할 정도로 기척이 없다.
분명 일어난 것처럼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는데, 지금은 고요하다. 숨소리 하나 없이.
뒤늦게 이블라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황급히 방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이 텅 빈 방이 그녀를 반겼다.
“젠장!”
이블라가 침대에 덩그러니 놓인 화폐주머니를 할퀴듯 낚아챘다.
***
그달에, 베샤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베샤 치안유지군의 오랜 골칫덩어리였던 암흑조직 ‘소토라’가 하루 만에 궤멸했다는 소문이었다.
수색대가 조사한 결과 그들은 모두 급소를 찔려 단번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오직 소토라의 유일한 흑마법사의 시신에서만 몇 가지 고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스토라의 모든 불법문서는 치안유지군의 성문 앞에, 그리고 화폐는 베샤의 빈민지역 일부에서 고루 발견되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암울한 시대를 버티고 있는 자들의 간절한 희망과 소망이 당장 오늘을 살게 해줄 꿈으로 탈바꿈했던 탓이다.
사람들은 오래전 흑사회만 골라 가혹하게 처벌했던 것으로 유명한, 그래서 종종 연극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던 조직 ‘여명’이 새로운 세대를 이어받아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며 떠들어댔다.
그리고 그 바람은 고스란히 음유시인의 노래가 되어 타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유명한 용병길드 아누비르의 길드장은 직접 베샤 지부를 방문하기까지 했다. 소토라의 문제는 둘째 치고, 정체 모를 자가 신화급 용병패 크라켄을 들고 나타났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이야기는 아누비르 길드장과 친분이 있었던 현 용병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용병왕이 신화급 용병패와 그 주인을 상처 없이 데려오는 자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마나전보를 띄웠다.
덕분에 제국의 모든 용병길드가 신화급 용병패에 대한 정보를 입수, 혈안이 되어 찾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
‘망했다, 미친.’
나는 정신이 들자마자 걸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으윽…….”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어떻게든 통증을 이겨 보려고 했다. 거대한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온몸이 으깨질 듯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정신을 붙들고 있느니 속 편하게 기절하는 게 낫겠단 생각이 머릿속을 꽉 쥐어짰다.
“아, 르으…….”
아다르를 부르고 싶은데 혀가 꼬인다. 나는 거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워서 뒤집히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텔레포트 때문인가?’
덕분에 집까지 단숨에 날아오긴 했는데 이러다 죽게 생겼다. 다섯 명의 남자들을 본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발정기 때 텔레포트를 해본 경험이 없었다. 제정신이 박힌 수인족이라면 아무도 그런 모험을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인족은 발정기 때 마나에 민감해진다.
발정기가 체내에 축적된 마나와 수인족 특유의 체질이 결합되어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국민들이 짐승이니, 하등한 동물이니 제멋대로 떠들어 재끼지만 수인족의 발정기는 동물의 발정기와 원리가 달랐다.
이는 수인족의 특징에 변태처럼 숨을 헐떡이는 몇몇 과학자들이 벌써 여러 차례 입증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수인족은 모두 발정기가 되면 마나를 기피했다.
마나로 만들어진 물건, 마나를 사용하는 사람, 마법, 마법진…….
그런데 나는 마법 스크롤을 찢어서 집으로 왔다.
‘씨X.’
욕을 안 할 수가 없다.
베샤에서 그 먼 거리를 껑충 뛰어 이곳, 죽음의 숲 한가운데로 날 데려다 놓느라고 대량의 마나가 수고해 주었다. 그들은 마치 생선을 싱싱한 상태로 배달하기 위해 밀봉작업에 들어가듯, 나를 빈틈없이 둘러쌌다.
발정기의 수인족인 나는 아주 고맙게도 전신으로 충만한 마나를 느끼며 이곳까지 배달되었다.
다행인 점은 텔레포트하는 순간 잠깐 기절했다는 사실이다. 견딜 수 없었겠지. 그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내 몸이 아주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먼 것 같았다.
아니, 이 일로 장님이 되었다고 믿고 싶진 않았으므로 시력을 ‘일시적으로’ 잃었다고 해보자. 머릿속은 스튜에 푸딩과 케이크를 넣은 것처럼 곤죽이 되어버렸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숨은 곧 저승으로 갈 준비를 하는 반송장의 그것처럼, 꼴딱꼴딱 넘어가고 있었다.
패닉에 빠져 이대로 죽는 걸까 생각하고 있는데, 죽을힘을 다해 발악한 결과 말을 듣지 않던 손가락 끝이 개미 다리만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명만 들리던 귀에도 누군가의 음성이 웅웅대듯 흘러들고 있었다. 물이 잔뜩 들어간 것처럼 알아먹을 수 없는 소리였으나,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누군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거니까.
‘침착하자.’
시야도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운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몸이 허용량 이상의 마나를 만나서 일시적으로 마비증상을 보였던 것 같다. 이제 와 깨달아봤자 별 도움이 안 되는 생각이다.
“흐윽…….”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유증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복식호흡을 하며 정신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파도에 몸을 맡긴 것처럼 뇌 속이 출렁거렸다. 설상가상 다섯 명이나 되는 남정네들의 체취가 공격적으로 후각을 파고드니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뭐가 어떤 향기인지 구별도 가지 않았다. 과도한 향수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머리가 띵하니 저렸다. 그게 거북하지는 않았지만, 무서울 정도로 날 취하게 만들었다.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면 이런 기분일까. 목이 마르고, 애가 탔다. 아랫배를 꽉 쥐어짜는 것 같다.
“카카나……!”
“……무슨…….”
“발정기…….”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누가 나를 어떻게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이 끔찍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윽, 흐윽…… 흐읍…….”
내 입에서 소리 낼 기력도 없는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신을 차리려 노력해도, 눈물이 계속 차서 세상이 부옇게 보였다. 눈물이 미지근한 빗물처럼 주구장창 쏟아졌다.
그때, 누군가 손을 뻗어 내 목을 받쳐 들었다. 힘이 빠져나간 내 몸이 반사적으로 파드득 떨렸다. 모종의 향기가 훅 끼쳐왔다.
마치 손을 대면 비단 천처럼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질 것 같은, 아주 진하고 고급스러운 향기였다. 장미향, 혹은 농익은 과일 향을 닮은 것도 같다.
그 풍성한 향기에 정신이 순간적으로 아찔해지는 순간, 누군가의 입술이 닿았다.
“으.”
짜릿한 전율이 허리까지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자극이 지나쳐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위로하듯, 느릿한 손길이 허리를 쓸었다. 뜨거운 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단내가 섞인 풍성한 장미향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농밀한 움직임이 늪에 빠진 내 몸을 수면 위로 건져 올렸다. 무서운 속도로 부푸는 흥분을 따라 의식이 각성되었다.
여러 번 눈꺼풀을 깜박여 초점을 맞추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나른하게 뜨인, 그러나 유난히 짙어 보이는 핏빛 눈망울이 보였다.
아르모어가 기다란 속눈썹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내 입술을 가볍게 훑고 있었다. 과육에서 흘러나온 단물을 빨아들이는 사람처럼, 아주 맛있다는 듯이.
“정신이 드나?”
그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러나 평소보다 한참은 낮은 억양으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목덜미나 두피가 괜히 짜릿해질 정도로 야릇한 음성이었다.
‘아르모어는 수인족이었지…….’
내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을 사람이다.
나는 연신 경련을 일으키는 몸을 무시하고, 눈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내 의도를 알아챈 아르모어가 가방을 끌어와 덮개를 열고 그 안에 손을 넣어 주었다.
발정기 억제제를 쥐고 꺼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도저히 그것을 들어 마실 힘이 나지 않았다.
아르모어가 내 손에서 약병을 가져갔다. 그가 억제제를 기울여 약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그것을 질금질금 마시고 있자니 속이 터져서 얼굴을 팍 찌푸렸다. 아르모어가 살풋 웃었다.
“못 말리겠군.”
그가 자기 입에 약을 털어 넣고 내게 입을 맞추었다. 한 번에 많은 양의 약물이 흘러들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전부 받아 마시고 긴 숨을 내쉬었다. 빠져나가는 호흡과 함께 안정을 찾은 의식도 빠져나갔다. 나는 다시 기절해버렸다.
***
발정기 억제제의 부작용으로 나는 하루를 꼬박 앓았다.
도저히 음식을 삼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아다르가 미지근하게 데운 물을 주기적으로 먹이고 갔다. 사경을 헤매면서 간혹 정신이 들 때마다 다른 색깔의 머리통이 내 침대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뻣뻣한 황토색 머리카락이라든지, 눈이 시린 레몬빛 금발이라든지, 손에 닿으면 피부가 파랗게 얼어붙을 것 같은 바닷빛 머리카락이라든지.
정신이 없어서 미간을 구기면 잿빛 머리가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종종 검은 머리도 나타났다.
나는 다음 날 저녁 무렵에 정신을 차렸다.
깨자마자 생각난 건 해독약이었다. 죽으나 사나 시종일관 약 생각밖에 없는 내 구제할 길이 없는 뇌구조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으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더 급했다.
집에 거주 중인 다섯 명의 남자들은 마나 말고도 다른 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골로 가기 전에 살려 놔야 했다.
이렇게 아픈데도 쉴 수 없는 내 처지에 뺨이 파르르 떨렸다. 약 제조는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인생이 조금쯤은 피곤하게 느껴졌다.
두 쪽으로 쪼개지려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방을 나섰다. 차가운 공기가 뼛속까지 스몄다.
“카카나 씨?”
턱을 덜덜 떨며 밍크 담요가 어디 있는지 찾는데, 기겁한 음성이 들렸다.
“아직 나오면 안 돼요.”
스노아였다.
“나가야 돼. 안 그럼 너희들 죽어.”
자기 처지를 꿈에도 모르는 소릴 듣고 있자니 나만 마음이 급한 것 같아 짜증이 치밀었다. 물론 그들의 몸 상태를 나 말고 누가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겠느냐만, 기분의 문제였다.
스노아는 내 음산한 목소리에 놀란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옥에서 갓 기어 올라온 악귀를 떠오르게 만드는 내 얼굴에 기가 죽은 모양이었다. 저 섬세하고 유리 같은 남자를 기겁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일말의 죄책감이 느껴졌다.
“해독약을 빨리 만들어야 해.”
나는 성질을 최대한 죽이며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목이 쉬어서 거의 쇳소리밖에 나지 않았으나, 스노아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걱정하는 낯을 했다.
“몸이 아직 힘들 텐데요.”
물론 힘들다.
지금 내 몸뚱어리로 말할 것 같으면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체에 빙의한 수준으로 말을 듣지 않았다. 입술은 밀랍을 묻혀 굳힌 것처럼 빡빡했고, 골이 흔들려서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몸통에는 두 다리 대신 부지깽이가 꽂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고장 난 기계처럼 덜그럭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꼴이 우스울 텐데 스노아는 웃지도 않고 길고 유려한 손가락을 뻗어 끈적하게 묻어나는 내 식은땀을 닦아 주고 있었다.
그의 손길에서 문득 청아한 향기가 느껴졌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후각에 집중했다. 정신이 맑아질 수밖에 없는, 순수하고 깨끗한 스노아의 체취다.
이렇게 내 취향인 체취는 난생처음 맡아본다. 하마터면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늘어질 뻔했다.
나는 스노아의 부축을 받는 척하면서 그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향기가 풍성하게 퍼졌다. 눈앞에 친환경적으로 설립된 요정의 마을이 펼쳐지는 것 같다.
‘미쳤다…….’
“너무 좋아. 환상적이야…….”
“예?”
짙푸른 잔디밭에 대자로 뻗어 있는 것처럼, 긴장이 이완되는 깨끗한 향기. 박하가 살짝 섞인 정화수나 함박눈을 연상시키는 순수한 향.
세상에 이런 체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니.
“카카나……?”
“감동이야…….”
“카카나 씨, 정신 차리세요.”
스노아가 조금 겁먹은 기색으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자세가 언제 이렇게 바뀌었지.’
나는 어느새 그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떨어져야 하나?’
싫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러고 온종일 있고 싶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코를 박고 나른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쓰레기 같은 몸뚱어리를 벗어버리고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투정 부렸다.
“향이 진짜 좋아.”
그의 투명한 물빛 눈망울이 마구잡이로 흔들리며 흐리멍덩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당황하든 말든 그의 아리따운 외모를 구경했다.생기기도 어쩜 이렇게 차분하고 고운지 눈도 정화되는 기분이다.
신은 분명 얼굴 보고 재능을 내려줬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집에 있는 용사들이 전부 이렇게 잘생겼을 리 없다. 그중에서도 스노아는 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사람이었다.
속눈썹 하나하나가 장인이 핀셋으로 정갈하게 붙인 것처럼 섬세했다. 입술도, 코도, 심지어 팔다리도, 낭창하고 적당히 남성적인 선이 살아 있다. 아마 누군가가 나보고 누가 제일 예쁘장하냐고 물어보면, 나는 망설임 없이 스노아가 최고라 대답할 거다.
“제게서 향이 나나요?”
스노아가 제 코에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그가 움직이니 향이 더 풍겨서, 나는 스노아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발정기의 여파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인족은 발정기가 되면 체취를 맡을 수 있거든.”
“억제제를 복용했는데도요?”
“복용 안 했으면 벌써 덮쳤…….”
‘미쳤나 봐!’
“아, 아니. 큼. 흠! 내 말은, 이렇게 얌전히 끌어안고만 있진 않았을 거라고.”
“제 향기가 그렇게 좋은가요?”
“완전.”
스노아가 동그래진 눈으로 날 보다가, 어느 순간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유용하네요.”
어딘가 께름칙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나는 변태처럼 향기를 들이켜기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몸에 온몸을 비비적대고 싶었다. 실낱같은 이성이 그것만은 막아 주고 있었다.
“제 체취가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지만, 일단은 쉬는 게 어떨까요? 몸이 너무 뜨거워요. 열이 이렇게 심한데…….”
“걱정되면 나 약 만드는 동안 안아 주면 안…….”
나는 말을 하다 말고 혀를 짓씹었다.
“……못 들은 걸로 해 줘.”
“아뇨. 도와드릴게요.”
스노아가 차가운 눈망울을 상냥하게 휘어 웃었다.
“그러니 우선 식사부터 해요.”
그가 내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이끌었다. 1층에 가까워질수록 맛있는 음식 냄새와, 다른 체취들이 희미하게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스노아에게 거의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있어서 그런지, 청아한 향기까지 뚫고 들어오진 못했다.
식탁에 음식을 놓고 있던 아다르가 내 헤벌쭉한 얼굴을 보며 대놓고 왜 저러냔 표정을 지었다. 참 한결같은 인간이다.
“뭐야. 둘이 언제 친해졌어?”
할릭이 하품하며 말을 걸었다. 나는 콧잔등을 움찔거렸다. 이국적인 향이 났다.
왠지 속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냉큼 스노아의 옷자락에 코를 박았다. 여기서 몸이 더 뜨거워지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할릭은 따뜻한 나무 향 같은 게 날 줄 알았는데…….’
나무는 개뿔, 도수 높은 술처럼 불도 붙을 강렬한 체취가 풍겼다. 할릭이나 아다르 같은 유형의 사람이 발정기 때 가장 멀리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술과 비슷한 체취는 발정기의 수인족을 반쯤 미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 번 들이켰을 뿐인데 벌써 배 속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이 멱살 잡혀서 끌려나가는 느낌이네.’
나는 부르르 떨면서 열심히 스노아의 체취를 들이켰다. 내 이마의 열을 잰 할릭이 쨍한 주황색 눈을 일그러트렸다.
“열이 심한데, 너무 일찍 나온 거 아니야? 더 쉬어.”
“해독약을 빨리 만들어야 하는 모양이에요. 제가 도와주기로 했어요.”
스노아가 대신 대답했다.
“어떻게?”
“제 향기가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그래? 그럼 나도 도와줄까?”
할릭이 천진하게 외치며 날 끌어안으려 했다. 저 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체취가 제 덩치만큼이나 무식하고 거칠다는 걸 꿈에도 모르나 보다.
나는 하얗게 질려서 코를 움켜쥐고 뒤로 사사삭 물러났다.
‘저리 꺼져!’
외치고 싶은 것을 혼신의 힘을 다해 참고 소파 뒤로 몸을 숨겼다. 이 정도면 많이 물러섰다 싶은 거리인데도, 희미하게 아지랑이 같은 향기가 느껴졌다. 나는 왠지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아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할릭, 움직이지 마라.”
결국 아르모어가 할릭에게 한마디 했다.
“그녀에게 너무 독한 향인 것 같으니,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게 좋겠다.”
“그래? 사람마다 다르구나…….”
할릭이 어쩐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아르모어는 그에게 더 이상 친절히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침묵이 맴돌자,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노아에게 손짓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청아한 향이 잔류해 있던 할릭의 체취를 정화하듯 없애버렸다.
살 것 같다.
“내 연구실로 가자. 식사도 거기서 할래.”
내일까지는 몸을 사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다섯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데만 전념했다.
약을 만들어 먹이고, 침을 놓아 주고, 모두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다음 날 먹일 약을 만들고, 연구를 조금 하다 잠드는 삶을 반복하고 나니 어느 순간 욕심이 생겼다.
원래대로라면 그들의 꼬인 마나혈을 다시 길들이기 위해 약물 복용은 1년간, 침 치료는 2년에서 3년간 지속해야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간이 너무 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원대한 계획과 꿈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하루 빨리 치료한 다음 집에서 쫓아내는 것에 집중되었다.
물론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건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좋았다.
나무를 패러 가지 않아도 되고, 가끔 몬스터가 기승을 부려도 첼러스나 할릭이 대신 처리해 주었다. 아다르는 매끼니 식사를 차려 주고 스노아는 집 안 청소를 해 줄 뿐만 아니라 아르모어는 식물을 다루는 데 재능이 있어서 내가 바쁜 날이면 약초 관리를 대신 해 줬다.
그 편한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해버린 나머지 그들이 없어지면 고생 꽤나 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아무리 편해도 혼자였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잊은 건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하다가 내 정체가 세상에 들통 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고민을 거듭한 결과 치료 기간을 단축할 방법은 떠올렸지만 그걸 실현하는 과정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머리를 쥐어짜다가, 불현듯 두피를 당기는 느낌에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아야.”
“이런, 아프십니까?”
첼러스가 드물게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죄송합니다. 검만 쥐어온 손이라, 이런 일에 능숙하지 못합니다.”
나는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냐, 아냐. 머리 말리느라 팔 빠지는 줄 알았는데 도와줘서 오히려 고맙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오늘은 머리를 감는 날이었다.
머리를 말린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더니, 내 비명 같은 짜증에 놀란 첼러스가 방문을 두드리기에 냉큼 도와달라 매달렸다.
첼러스는 거대한 솜뭉텅이를 물에 넣고 빤 것 같은 내 머리카락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지만, 묵묵하게 수건을 건네받고 도와주었다. 팔이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나는 그의 도움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근데 머리가 신기할 정도로 마르지 않는군요. 평소에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두피까지 말리고 나면 빗는 것도 해야 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냐, 괜찮아. 너 말고 사람은 많은데, 뭐.”
나는 다음 희생양을 생각하며 흐흐, 하고 웃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날 빤히 바라보던 첼러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선하게 웃은 그가 손을 뻗어 거의 다 마른 내 머리카락을 맨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느릿한 손길이었다. 순례자가 성지의 흙바닥을 조심스레 쓸어보는 것처럼.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방 깊숙이 들어온 햇살이 첼러스의 화려한 금발 위로 눈이 부시게 산란하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봐?”
잘생긴 미남의 정석을 보여주는 첼러스의 미모가 근거리에서 빛을 뿜자 아무리 나라도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어린이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맑은 하늘색 눈으로 날 들여다보던 첼러스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웃는 모습이 예쁩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갑자기 실없는 소리냐며 구시렁거리자, 첼러스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주 드문 웃음소리였다.
그는 담백한 음성과 금욕적인 분위기를 가지고서 간혹 저런 말을 하곤 했다. 아다르가 지껄였다면 무시했을 텐데, 첼러스는 말 하나하나가 진중해서 그러기 힘들었다.
나는 뜨끈하게 열이 오른 얼굴을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빗살이 듬성듬성 있는 것부터 촘촘한 것까지 모든 종류의 빗이 들어 있는 보관함을 들고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도 돼, 첼러스. 머리 말려줘서 고마워.”
“빗는 건 도와드리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스노아랑 아다르한테 부탁하려고.”
“그렇습니까.”
첼러스가 약간 기운이 없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그래?”
“아닙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유순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멀어지는 첼러스의 뒷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곤 2층으로 내려가 스노아의 방으로 갔다.
중간에 아다르를 만나서 덤으로 그까지 질질 끌고 방문 앞에 섰다.
똑똑.
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문고리가 돌아가며 물빛 눈을 가진 스노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카카나 씨?”
팝콘처럼 부풀어 있는 내 머리를 확인한 스노아가 할 말이 없어진 얼굴을 했다.
“나 머리 빗는 것 좀 도와줘.”
“난 볼일이 있어서…….”
상황을 날래게 파악한 아다르가 얌체처럼 몸을 돌려 도망가려는 걸 멱살 잡고 죽 끌어왔다. 도끼눈을 하고 매섭게 쏘아보자 그가 반쯤 감긴 눈을 도르륵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어딜 가려고?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준댔으면서?”
“그 말을 한 건 내가 아니라 할릭이야.”
“날 위해서라면 노예처럼 따라준다더니!”
“말을 심하게 왜곡해서 알아들은 것 같은데…….”
“그래서 도와주겠다는 거야, 안 도와주겠다는 거야?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걸.”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고 막무가내로 패악을 부리자 아다르가 두 손 두 발 다 든 얼굴을 했다. 그가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내 집착 어린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그리고 무섭게 부푼 내 구름 같은 머리카락을 착잡하게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도와주면 되잖아.”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아다르가 문득 실실 쪼개며 내 볼을 잡고 쭉 늘였다. 그에 대한 화답으로 정강이를 발로 차 주었다. 우리는 정확히 스노아가 ‘친남매 같네요.’라고 웃으며 얘기하기 전까지 끈질기게 투닥거렸다.
‘친남매라니, 그런 소름 끼치는 소리를…….’
그렇지 않으냔 눈으로 아다르를 올려다보았다. 아다르가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까만 눈을 홉뜨고 있었다. 조금 놀란 사람처럼.
‘왜 저러지?’
“들어와요.”
스노아가 문을 열며 안내했다.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내 방을 제외하고 전신 거울이 있는 방은 스노아의 방이 유일했다. 우리는 거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바닥에 깔린 짙은 갈색 에스닉 패턴 카펫이 햇볕에 달아올라 뜨끈뜨끈했다. 나는 옆머리를 잘게 나눠서 아래부터 차근차근 빗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손놀림이 워낙 섬세하고 부드럽다 보니 졸음이 쏟아졌다. 약초 연구를 하느라고 잠을 별로 자지 못한 여파 같았다.
“나한테 기대서 좀 잘래?”
줄기차게 꾸벅대는 나를 보다 못한 아다르가 제안했다. 그가 팔을 벌리며 제품을 드러냈다. 삐져나오려는 침을 스읍, 빨아들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
“뭐 어때. 자는 동안 머리 다 풀어주겠다는데. 어제 잠 설쳤지?”
“설친 게 아니라 연구하느라고…….”
“알았고.”
아다르가 내 시커먼 눈 밑을 보더니 칼같이 말을 잘랐다.
“좀 자는 게 좋겠다. 할릭 불러올게.”
“엥? 할릭?”
“생각해보니 나보단 할릭이 나을 것 같아서. 걔가 커다란 의자로는 안성맞춤이잖아.”
그의 말을 들은 난 이렇게 생각했다.
‘저 녀석의 인성은 어떻게 돼먹은 걸까.’
질린 얼굴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럼 그냥 의자에 앉아서 자면 되는 거 아냐?”
“넘어지면 어쩌려고.”
“흔들의자 있잖아. 그건 안 넘어져.”
“흔들의자는 발이 달리지 않았지만 할릭은 발이 달렸잖아.”
나는 그의 사고방식에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기다려 봐. 할릭도 좋아할걸.”
그가 소악마처럼 키들거리며 복도로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할릭을 데리고 돌아왔다. 바닥에 앉은 채 할릭을 올려다보았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덩치가 더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따스한 살가죽으로 뒤덮인 바위골렘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가 흉악한 왼뺨의 흉터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감탄했다.
“와, 카카나! 머리 구름 같네!”
나는 그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걸 겨우 인정했다.
“여기 앉아.”
아다르가 전신거울 앞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할릭이 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쩍 벌린 양팔을 보니 곤충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파리지옥이 떠올랐다. 굵직한 팔에 내 몸이 으스러져도 놀랄 일이 아닐 것 같다.
영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누적된 피로로 눈가가 파들파들 떨리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쉬어 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냥 안겼다간 온몸이 결릴 것 같은데.’
할릭의 몸은 근육이 옹골차게 뭉쳐 있어서 보기만 해도 딱딱해 보였다. 나는 스노아의 침대로 가서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할릭의 품에 이불을 고르게 펴서 푹신한 자리를 만든 다음, 허벅지에 안착해 가슴팍에 뺨을 기댔다.
그 광경을 아다르가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음, 딱 좋아.’
생각보다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할릭은 체온까지 높아서 발열기능이 있는 푹신한 소파에 파묻힌 기분이었다.
“기분이 묘한데.”
할릭이 내 자그마한 체구를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끝내 거절할 줄 알았더니.”
그 꼴을 잠자코 보던 아다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다르의 웃음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어쩐지 이들이 오고부터 잠꾸러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잠드는 것은 확실히 나답지 않은 일이다.
“이상해…….”
나는 가벼운 선잠에 빠졌다가 3시간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누구 솜씨인지, 정신을 차렸을 땐 단정히 정리된 머리카락이 양 갈래로 단단히 땋여 있었다.
붉은색 구슬 장식이 달린 머리끈을 손바닥에 굴려보았다. 아다르가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추천했던 머리끈이었다.
불현듯 내가 아직 안겨있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며 고개를 들자, 형광빛이 도는 주황색 눈망울이 보였다. 할릭이 방싯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조심스럽게 내 이마를 쓸었다.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저렇게 큰 몸으로 어떻게 이리도 섬세하게 움직이는지 의문이었다.
“잘 잤어?”
“으응……. 고마워. 깨우지.”
“달콤하게 자길래.”
나는 비몽사몽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옷을 약하게 끌어당겼다. 오늘 반드시 하려고 했던 계획이 있었다. 할릭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더니 내가 끌어당기는 대로 움직였다.
나는 그의 손가락 두 개를 꼭 잡고 첼러스, 아르모어, 아다르의 방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들을 모두 대동한 채 거실로 내려갔다. 스노아는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가 읽던 책을 내려놓고 날 의아하게 바라봤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무슨 일인지 궁금한 기색이었다.
아르모어만 빼고.
그는 예상한 일이었다는 듯이 초연한 얼굴이었다. 하긴, 아르모어는 시종일관 저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긴 했다.
나는 뻑뻑한 눈을 문대며 일렬로 선 남자들을 고루 살폈다.
“무슨 일인가요?”
스노아가 물었다.
“잠깐, 볼 게 있어서.”
나는 침통에서 시침을 꺼내 그들의 몸을 차례로 확인했다. 치료 초기엔 몸을 꿈틀거리며 불편해하던 용사들도 이젠 익숙해졌는지 얌전했다. 허리며 허벅지 같은 곳을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이 만지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나감응재질로 만들어진 침이 연신 몸을 떨며 마나의 존재를 알렸다.
‘역시, 몇 번을 확인해도 최소 3년이야.’
나는 암울하게 생각하며 한숨을 삼켰다.
심지어 그들은 숨만 쉬어도 체내에 마나가 흡수되는 괴물들이 아닌가. 안 그래도 엉킨 마나혈이 굵직하기까지 했다. 그것을 소거하고 새로운 혈을 뚫고 길을 들인다? 나는 생각을 정정했다. 좋게 봐서 3년이지 운 없으면 5년도 갈 일이다.
‘5년.’
나는 새삼 내가 생각한 치료기간에 충격을 받고 입을 벌렸다.
‘5년이라니.’
3년에서 2년 더 늘었을 뿐인데 체감되는 정도가 다르다. 5년이면 지능이 떨어지는 애완동물도 주인의 기색으로 감정을 알아채는 시간이었다.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막연하게 빨리 치료하고 내보내면 된다고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조금, 곤란한데…….’
아무리 그들에게 치료의 대가로 여러 가지를 받기로 했다지만, 5년을 한 집에서 동고동락하는 건 얘기가 달랐다. 용사들이 건네게 될 마도구나 진귀한 약초도 직접 만나지 않고 받을 생각이었다. 나는 혼자 숨어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날’ 마음먹은 이후로 한 번도 깨뜨려 본 적이 없는 맹세였다.
오랜 기간 나를 속박해온 암묵적인 구속이자, 기꺼이 따르겠노라 악에 받쳐 피로 새겨 넣었던 다짐이었다. 이제 와 깨고 싶은 생각도, 오기를 부릴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5년간 있는 정 없는 정 불려가며 그들과 함께할 처지라니…….
‘여기서 더 정이 들면 안 돼.’
이미 용사들은 내게 목숨을 빚지면서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도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죽을 만큼 아파본 적이 있기에 알았다. 나를 살려줄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지는지.
일부분을 제외하고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도 없는, 그나마 타인도 친구도 아닌 사이일 때 헤어져야 했다.
별안간 포근했던 할릭의 품이 떠올랐다. 거의 반사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애써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자, 여러분.”
더 정이 가기 전에 연을 끊어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떻게든 그들을 올해 안에 쫓아내야 한다는 강박감이 등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여러분 몸에 있는 마나가 어느 정도나 될까요.”
그러려면 이것부터 해결해야 한다. 난제를 돌파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그들의 마나수용량은 어느 정도나 될 것인가?’
마나수용량은 체내에 얼마나 많은 양의 마나를 보유할 수 있는지를 뜻하는 용어였다. 그 양은 타고난 재능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몸에 있는 마나?”
아다르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해본 적 없는데.”
나는 미간을 좁혔다.
“마나수용량은 예민한 사항 아니야? 생각해본 적이 없다니?”
“그런 건 초짜들이나 신경 쓰지.”
아다르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우린 제4자각을 넘어섰어. 마나수용량은 하등 관계가 없다고.”
이모저모 생각해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 설명이었다. 나는 아다르가 말한 제4자각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르모어도 첫 만남 때 제국의 음모에 당한 용사 이야기를 해주며 제4자각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제4자각이 정확히 뭔데?”
“제가 설명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첼러스가 말을 받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에 눈을 뜬 자들은 모두 네 단계를 거칩니다.”
“제1자각, 제2자각, 이런 거 말하는 거야?”
“맞습니다. 자각이라는 호칭이 붙는 이유는 모든 단계가 ‘깨달음’의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마나혈을 다루는 침술을 익히려면 마나의 기본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사항이었다.
“내게 필요한 건 구체적인 정보야. 의학 서적엔 마나혈과 흐름에 관한 것만 중점적으로 서술되어 있거든.”
나는 스승님의 지도 아래 내 몸을 실험체 삼아 실력을 쌓아 올렸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실습할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내 몸과 스승님의 몸이 유일한 실습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침술은 동양의 것이라 책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용사들의 치료가 마나와 복잡하게 얽히면서 악수가 되고 말았다. 한가하게 책을 읽으며 공부할 여건도 당연히 되지 않았으므로, 실전 위주로 익힌 침술은 금방 한계를 드러냈다.
“제가 말씀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스노아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어디부터 설명해 드려야 할지…….”
스노아가 단어를 골라내듯 신중하게 생각을 잇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마나의 성질에 대해선 아시나요?”
“창조 성질 말하는 거야?”
“맞아요. 모든 마나는 ‘창조하고자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일종의 창조에너지라고 할 수 있죠.”
나는 소파로 걸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길어질 기미를 보이자 모두 나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마나는 몸에 축적해서 사용하잖아요?”
스노아가 자신의 명치 부근을 툭툭 치면서 설명했다.
“하지만 제4자각자들은 몸에 마나를 가두는 게 아니라 마나에 몸을 실을 수 있게 돼요. 그래서 초월자라 불리죠.”
‘저게 무슨 소리람?’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우선 더 들어보기로 하고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었다.
“마나수용량이 상관없는 이유가 그거예요. 몸에 많은 양의 마나를 억지로 가둬놓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럼 그때그때 끌어다 쓴다는 거야?”
얼떨떨하게 생각하는데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초월자는 마나라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인 셈이죠.”
“마나가 바다라면, 제3자각은 바다의 일부분을 담을 수 있는 물그릇이고 초월자는 물고기다?”
“맞아요.”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들에게 마나수용량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까진 이해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치료방법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마나를 다룰 줄 모르니, 스노아가 쉽게 설명해준다 하더라도 수박 겉 핥기일 게 뻔해.’
망설인 끝에 가장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냥 용사들이 판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체내에 있는 마나를 일시적으로 방출시켜도 상관없는 거야?”
“얼마나요?”
“전부.”
“전부 방출이요?”
스노아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돌연 아르모어가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을 시발점으로 불길한 기운이 뒷골을 타고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심상치 않은 질문을 했다는 직감이 든 탓이었다.
할릭이 휘파람을 불며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가져다 댔다. 무슨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는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매우 웃긴 얘기를 들은 사람 같은 얼굴이다.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카카나.”
“왜?”
“초월자는 마나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스노아가 난감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세요. 창조되길 바라는 마나에게, 초월자만큼 완벽한 파트너는 없잖아요.”
“그렇긴 하네.”
“마나는 초월자에게 집결되는 경향이 강해요.”
나는 심각하게 미간을 좁혔다.
“집결된다고? 물고기 한 마리당 거대한 어항이 생성된다는 얘기야?”
스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쓰면 채워지고, 쓰면 채워지는 어항이죠. 근데 그게 깨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
‘망했네.’
나는 다리를 품에 끌어안고 무릎에 이마를 처박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건 왜 물어보는 건지 궁금하군, 카카나.”
다 웃었는지 아르모어가 눈가를 닦아내며 물었다. 나는 음울하게 대답했다.
“치료가 너무 오래 걸려서 생각을 해봤어요. 제 말을 이해하려면, 여러분의 치료기간이 긴 이유를 알아야 해요. 왜인 줄 알아요?”
“모르겠군.”
“마나가 너무 많아서 그래요.”
나는 간단하게 줄여 말했다.
“일반인의 마나혈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생겼어요. 하지만 여러분은 바다처럼 넓고 깊은 강물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게 문제가 되나?”
“당연하죠. 그걸 막고 다른 길을 뚫어야 하니까요!”
‘3년은 무슨.’
나는 픽 코웃음을 쳤다.
“제가 만든 온갖 약 먹어가면서 치료해도 5년은 걸릴걸요.”
“마나를 방출한다면?”
“텅 빈 마나혈을 막기는 쉬워요. 그래서 물어본 거고요.”
나는 우울하게 대답하다가 마지막 희망을 담아 되물었다.
“그래서 마나를 방출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데요? 해결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마나는 정기가 아니어서 전부 방출해도 생명에 지장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 방법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르모어가 새빨간 핏빛 눈망울을 가늘게 휘며 고민하는 낯을 했다.
“유례가 없어 쉬이 상상하기는 어려우나, 거대한 빛의 기둥이 생길 것으로 예상되는군. 모든 제국민이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빛의 기둥……?’
답도 없을 광경이 그림 그려지듯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욕지거리가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아르모어의 고귀한 얼굴을 바라보며 참았다.
‘우리 여기 있다고 홍보할 일 있나.’
일그러진 얼굴을 어떻게든 관리하며 질문을 덧붙였다.
“그것 말고는 없어요?”
“더는 모르겠군. 마나석은 마나초과로 돌이 터지면서 파편에 다치는 경우가 있긴 하다.”
“고용량의 에너지가 한 번에 방출되는 거예요.”
스노아가 심각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대용량의 마나 흐름만으로도 위력이 상당할 거예요. 마나를 방출하는 순간 근방의 나무와 식물들이 모두 뿌리 뽑혀 날아가는 건 기본이고요.”
“그러니까, 거센 바람이 불 거다?”
“거센 바람은 불충분한 표현이에요.”
스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불이 없는 대규모 폭발이라고 하는 게 정확해요.”
‘불이 없는 폭발이라.’
예전에 사두었던 마법스크롤이 하나 있었다. 방어계열이어서 그걸 사용하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쭙잖은 마법으론 턱도 없을 테지만, 이 마법스크롤은 최고급 5성짜리다.
불이나 전기 같은 성질 변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순수한 마나덩어리라면 막을 수 있다. 영 불안하면 스노아에게 마법스크롤의 성능을 분석해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일이고.
문제는 빛이었다.
제국이 찾는 수배자들이 여기 있다고 온 세상에 알릴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좀 아니었다. 물론 용사들이 죽음의 숲에 숨어 있다는 건 제국도 안다. 잡을 수 있었다면 진작 잡으러 왔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건 위험부담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독초가 서식 중인지 알 수 없을 숲에 인력을 아낌없이 퍼붓는 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거나 마찬가지다. 수색작업이 불가능하니 잡으러 올 수도 없다. 수색대의 숨을 붙여놓을 만한 해독약을 보급하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제국 입장에선 속이 터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빛의 기둥이, 그것도 여태 잠잠했던 죽음의 숲에 갑자기 나타난다면?
약제사와 치료사를 대동한 제국군이 그곳에 텔레포트할 가능성이 컸다. 넓디넓은 숲에서 특정 위치가 점 찍혔는데, 제국이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더 생각할 것도 없다.
용사가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린다. 무방비 상태에서 제국군에게 노출되면 얻어맞고 끌려가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물론 나는 그 자리에서 사살당할 테고.
‘하지만 죽음의 숲은 내 앞마당이야.’
5년이면 제국도 언제 준비를 갖추고 쳐들어올지 모른다. 어차피 시기를 앞당겨야 하는 거라면, 지금 빠르게 치고 들어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나는 비장한 얼굴로 선언했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다음 주에 결판을 짓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