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세상 속으로
시간은 후딱 지나, 내가 그들을 맞이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연구실에 틀어박혀 지낸 결과 최상의 배합이라 여겨지는 비율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아직 이론과 가설에 불과해서 실험을 더 해야 했다.
희귀한 약초가 많이 쓰여서 마을을 방문하는 날짜가 코앞으로 당겨졌다. 나는 약초를 사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배합에 구멍은 없는지 꼼꼼하게 노트를 살폈다. 굳이 앞을 보지 않아도 발걸음은 알아서 날 연구실로 안내했다. 습관적으로 걸어가며 약초의 효능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에 부딪혔다.
나는 이마를 문지르며 떨어트린 노트를 주워들었다. 흘낏 눈을 굴리자 검은 옷이 보였다. 누군지 알 것 같아 툴툴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다르가 어쭙잖게 첼러스를 흉내 내는 것 같은, 그러나 그와는 분명히 다른 느낌의 웃는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식사하고 가야지, 카카나.”
그 말을 듣자 울컥한 심정이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아다르와도 말을 놓은 지 오래였다. 나는 대번에 언성을 높였다.
“얼마나 먹일 작정인 거야? 아다르 때문에 살찌게 생겼어!”
“약사가 식사의 중요성을 몰라서야 되겠어?”
“그러니까 약사의 건강을 왜 그쪽이 신경 쓰냐고. 어련히 내가 알아서 할 텐데.”
“아하, 그래서 쓰러졌던 거야?”
나는 단숨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다르는 삼 일 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해독 연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빠져 있었더니, 현기증이 나 그대로 기절한 걸 반나절 후에 첼러스가 발견한 일이 있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걸 가지고, 아다르는 집요하게 우려먹었다.
왜 그것만 먹냐, 편식하지 마라, 이것도 먹어라, 저것도 먹어라.
으으, 인상을 찡그리며 진저리를 치고 있자니 그가 달래는 목소리로 채근했다.
“오늘은 샌드위치 만들었어. 네가 좋아하는 야채들로만 꽉꽉 채워서. 저번보다 빠르게 먹을 수 있어. 진짜야.”
아다르가 내 등을 톡톡 두드리며 부엌으로 유도했다.
나는 분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노릇노릇 구운 식빵과 그 사이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매콤한 소스를 바라보았다. 웃기게도 그걸 보고 있으니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새 아다르의 식단에 길들여진 게 틀림없었다.
고기를 먹으면 배가 곧잘 아파지는 양 수인의 입맛에 맞춰서 얼마나 맛있는 채소 요리를 만드는지 먹을 때마다 혀가 녹는 기분이었다. 나는 억지로 손을 뻗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너무 맛있어서 짜증이 났다.
식탁의 맞은편에 앉은 아다르가 퉁퉁 부어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말했다.
“다람쥐 같아.”
“야.”
빵을 조금 떼어내서 그의 면상에 집어던졌다. 아다르가 고개를 기울여 그것을 피했다. 저놈은 왜 내가 화난 표정을 지을 때마다 저러는지 모르겠다.
“왜 자꾸 놀리는 거야?”
“네 반응이 웃긴 걸 어떡해.”
아다르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그의 뻔뻔한 낯짝을 가자미눈으로 흘겨보다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통보했다.
“내일 마을로 갈 거야.”
흠, 아다르가 두 손으로 턱을 받치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나는 접시에 흘러내린 소스를 빵으로 삭삭 긁어먹으며 말을 이었다.
“식재료도 거의 다 떨어지고 있잖아. 약초도 사야 하고.”
“어디로 가는데?”
“좀 멀리. 희귀한 약초라서 큰 도시로 가야 살 수 있어. 죽음의 숲을 나가면 작은 마을이 있는데 거기서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려고.”
“돈은? 텔레포트 스크롤 두 장은 사야 할 텐데.”
“한 장이면 충분한데 무슨 두 장씩이나 필…….”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다르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 것까지 사려면 두 장은 필요하지.”
“누가 너 데려간대?”
“응.”
그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하필이면 너냐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지만, 아무리 아다르라도 이 말엔 진짜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간신히 혀를 짓씹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아다르는 이 집에서 나랑 제일 많이 투닥거리는 인간이다. 여행 내내 편할 리가 없었다. 따라가려는 연유는 이해를 하지만, 다른 사람이어도 되지 않나?
‘왜 얘야?’
역시 안 된다. 나는 그와 말씨름을 하는 대신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말발로 이길 인간이었으면 이렇게 기겁을 하지도 않았다. 아다르는 말씨름에 강했다. 그 분명한 증거로 시원찮게 먹어 골골 앓기 일쑤인 내가 매일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다.
마침 모두가 거실로 내려오고 있었다. 첼러스에게 가장 시선이 갔지만, 그는 고지식해서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아르모어는 괜히 말을 붙이기 어려운 사람이었고, 부드러운 어투와 달리 냉정한 인상의 스노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고 있는 할릭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할릭! 들어봐, 아다르가 글쎄!”
“같이 가.”
그가 내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대꾸했다. 나는 제일 친한 친구에게 발등이라도 찍힌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뒤늦게 내 표정을 확인한 할릭이 혀를 잘못 씹고 난감한 얼굴을 했다.
“지금쯤이면 죽음의 숲을 제국의 병사들이 쫙 둘러싸고 있을 텐데, 그걸 무슨 수로 비껴가려고 그래? 아다르랑 같이 가는 게 좋아, 카카나.”
“누가 호위가 필요 없대? 다른 사람이랑 갈 거야.”
“마을에 내려가면 분위기가 이전 같지 않을 거야. 신분을 철저하게 검사할 거고. 아다르는 우리 중에 은밀하게 움직이는 걸 제일 잘해. 암살자잖아.”
이렇게 완강하게 거부하는 할릭은 처음이었다. 분명 모르는 새 저들끼리 모종의 작당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선 웬만하면 져주는 할릭마저 내게 이럴 순 없는 것이다.
나는 우거지상을 하고 아다르를 노려보았다. 그가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홍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얘기했다.
“그렇게 미워하지 말라니깐.”
차게 식은 얼굴로 그를 위아래로 훑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할릭의 말이 일리가 있어 고집을 피울 수도 없고, 마냥 속이 쓰렸다.
나는 마을을 방문할 때면 항상 후드가 달린 로브를 이용했다. 흔한 옷이라 딱히 수상해 보이지 않고 뿔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칵 뒤집어진 제국이 이 잡듯이 사람들을 검사하고 있다면, 내 후드도 벗겨질 것이 거의 확실했다.
노예 신분이 아닌 수인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뿔이 달린 머리를 들키는 순간 그 자리에서 포박당하거나, 어찌어찌 도망간다 해도 질 나쁜 납치단에게 붙잡혀서 배불뚝이 귀족에게 성노예로 팔려갈 것이 뻔했다.
나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발정기가 바로 다음 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호르몬과 마나혈을 교란시켜 발정기가 오지 않도록 만드는 약을 오래전에 개발하긴 했지만 열이 나는 부작용이 있었다. 하루는 꼬박 침대에서 앓아야 했다.
‘발정기가 오면 약을 먹어도 안 먹어도 문제야. 서둘러야겠어.’
다음 주에 시작되기 전에 일을 마쳐야 했다. 제국이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다면 움직임에 제한이 생겨서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못마땅한 마음을 억누르며 아다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역시 마나혈을 조금 뚫어주고 가는 게 좋겠지?’
나는 어떤 침을 사용해야 할지 고민하며 말했다.
“일단 당장 내일 마을로 갈 거니까. 아다르 마나부터 어떻게 해보자.”
여유롭게 홍차의 향을 음미하고 있던 아다르가 드물게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덩달아 눈을 크게 떴더니, 그가 마시고 있던 찻잔을 컵받침에 내려놨다.
“마나?”
아다르가 처음 보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이, 낯선 어조로 얘기했다.
“응, 마나.”
역시 시침이 좋겠다.
적절한 바늘의 종류를 고르며 대충 대답하다가, 문득 콧잔등을 스치는 희미한 향기에 번뜩 눈을 떴다. 어디선가 오래 숙성된 포도주와 비슷한 향이 나고 있었다. 알싸하고 그윽한 냄새.
나는 크게 뜬 눈으로 지척에 다가온 아다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거 설마 아다르 체취인가?’
나는 그 몰래 코를 킁킁거렸다가 사색이 되었다. 아다르의 몸에서 체취가 느껴지고 있었다. 계속 맡으면 알큰하게 취할 것 같은.
아무래도 발정기가 다가오고 있는 게 확실한 것 같다. 사람의 체향까지 맡아질 정도면, 다음 주 월요일 중에 시작될 가능성이 높았다.
“내 방으로 올라와! 당장!”
마음이 급해져서 서둘러 몸을 돌린 나는 그러나 이글거리는 4쌍의 눈을 발견하고 흠칫 멈춰 섰다.
“왜, 왜들 그렇게 봐……?”
“그게 무슨 소리야? 마나를 어떻게 하다니? 약 먹기 전에라도, 조금은 회복할 수 있는 거야?”
할릭이 낮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불안에 떠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풀어줄 수 있어.”
할릭의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제야 마나를 향한 그들의 지독한 갈망을 눈치 채고 조금 아연한 기분이 되었다.
“그렇다면 저희도 침을 맞을 수 있습니까?”
첼러스가 목 막힌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 그건 안 돼. 내가 곁에 없잖아. 약 없이 침으로 마나혈을 뚫어놓는 건 위험하거든. 그래서 여태 안 해준 거야. 아다르는,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옆에서 봐줄 수 있으니까.”
“이야, 이거 영광인데.”
아다르가 나머지 남자들을 명백하게 놀리는 어투로 싱글거렸다. 나는 그들을 대신해 아다르의 어깨를 주먹으로 강하게 때렸다. 악, 아다르가 엄살을 부리며 허리를 굽혔다.
“보통 손바닥으로 때리지 않아?”
아다르의 어리벙벙한 말을 무시한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에는 어젯밤 새로 소독해놓은 침통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뚜껑을 열고 침의 상태를 살폈다. 아다르가 방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와.”
값비싼 가죽에 일렬로 꽂혀 있는 침을 들고 고갯짓을 했다.
“침대에 누워.”
“네 침대에?”
아다르가 느릿하게 되물으며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돼?”
“왜?”
뭐가 문제냐는 내 눈빛에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소파도 넓은데, 왜 굳이 여기서 해?”
“소파는 내가 불안해서 안 돼. 뭐가 문젠데?”
“보통 이성을 자기 침대에 눕히진 않잖아. 그런 경우는 재미를 볼 때뿐이지.”
“아아, 걱정이 돼서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너 내 스타일 아니야. 안 덮치니까 안심하고 누워.”
아다르가 갑자기 웃음을 참으며 어깨를 떨었다.
“뭐, 네가 상관없다면야 사양 않고.”
그가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아다르의 회색 머리와 검은 눈이 내 까만 솜이불과 절묘하게 어우러지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데 나보다 이 방 주인 같지.’
나는 살짝 언짢아진 기분으로 가죽을 펼쳐 침을 뽑았다. 시침은 혈맥에 있는 질병을 치료하는 데 쓰이는 바늘이었다.
침 끝이 약간 둥근 것이 특징이고 다른 바늘보다 길이가 조금 짧아 내가 원하는 혈자리를 찌르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도 고민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아다르의 맥을 짚으면서 잠시 생각을 곱씹었다. 사실 그의 단단히 꼬인 마나혈를 푸는 데는 시침보다 봉침이 좋았다. 깊이 찔러 고인 혈들을 풀어주는 데는 무딘 시침보다 날이 바짝 선 봉침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침을 선택한 건, 아다르가 마나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순 없더라도 원활한 기의 운용으로 몸이 전보다 가벼워지는 것을 도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약물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 봉침으로 피를 봤다간 혈맥에 체류되어 있는 마나가 터져서 문제가 악화될 수 있었다. 그러면 정기가 상하는 건 물론이고 혈자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경혈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면 돌이킬 수 없었다.
‘욕심내지 말자. 시침이 나을 거야.’
나는 눈을 감고 아다르의 가슴팍에 왼손을 올렸다. 묵직하고 느릿한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오른손으론 시침의 침자루를 쥐고 그의 몸으로 가까이 가져다댔다. 그러자 마나감응재질로 만들어진 시침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심장에서 뻗어 나온 굵은 마나혈의 줄기와 침의 울림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가장 큰 웅덩이가 있을 만한 곳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쇄골 바로 밑 부분이었다. 굵직한 빗장뼈 밑을 가볍게 쓸자, 마치 뿌리가 내리는 것처럼 내 감각이 혈자리로 뻗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폐호흡의 영향을 받는 자리라 미세한 자극점을 찾는 데 방해가 되었다. 일반 혈맥과 달리 마나혈은 몹시 유동적이어서 작은 움직임에도 자리가 바뀌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고 명령했다.
“잠깐 숨 멈춰 봐.”
아다르가 순순히 호흡을 멈추었다.
그의 몸이 소리를 죽이자, 세차게 흐르는 물줄기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모세혈관 하나하나를 손톱 끝으로 세어보는 사람처럼, 미세하게 자리를 이동하며 침혈을 찾았다.
빽빽하게 뻗어 있는 얇은 마나혈 밑으로 깊은 바다가 펼쳐져 있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깊어 보이는 마나 웅덩이는 난생처음이다.
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호수의 수면을 살짝 건드리는 정도로 시침을 조준하고 톡, 찔러 넣었다. 과하지 않게. 최대한 힘을 주지 않고.
그럼에도 깊숙한 정글에 오솔길을 하나 내는 정도로는, 분명하게.
톡.
시침의 뭉툭한 끄트머리가 마나 웅덩이의 수면을 가볍게 찌르고 들어갔다.
그러자 주머니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물이 새는 것처럼, 뭉쳐 있던 마나혈 중 일부가 시침이 뚫어놓은 길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이제 숨 쉬어.”
아다르가 참고 있던 호흡을 내쉬었다. 나는 그의 안색을 살핀 후 다시 침혈을 찾기 시작했다. 경외기혈을 찾아 찌르는 일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단 한 번도 대충 들어가는 법이 없도록, 위와 같은 과정을 고스란히 거쳐 침술을 진행했다. 이번엔 손바닥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마나를 주로 왼손으로 사용했던 모양이다. 팔꿈치와 팔목에 차례로 큰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그곳을 모두 조금씩 뚫어주었다.
구멍 세 개면 약물 없이 안전하게 뚫을 수 있는 마나혈의 최대치다. 나는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시침을 모두 수거했다.
“끝났어.”
소독 솜으로 시침을 닦으며 얘기하자, 아다르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가 조금 피곤한 기색으로 뇌까렸다.
“이런 치료는 처음이야.”
“그럴 거야. 제국에서 아는 사람 둘밖에 없을걸. 동양의 치료법을 변형한 거거든.”
“그래?”
아다르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본래 허스키한 음성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이번엔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묵직했다. 나는 가죽에 침을 보관하다 말고 심각한 얼굴로 그를 살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아다르가 손을 들더니 멍한 얼굴로 자신의 왼쪽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신기해서.”
나로선 짐작이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는 침묵을 지킨 채 썩 긴 시간 동안 제 왼쪽 손바닥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글쎄.”
아다르의 목소리가 더욱 음산하게 내리깔렸다.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서,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러다 어느 순간 느릿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커먼 눈망울이 의중을 알 수 없는 빛을 띠운 채 날 응시했다.
“그런데 카카나, 마나를 사용할 줄 아네?”
나는 멀뚱하게 눈을 끔뻑이다가 곧 알아듣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나를 사용할 줄 알다니. 나는 마나혈에 침을 놓을 때 말고는 마나의 ‘마’와도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성가시고 위험한 건 탐이 나지도,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기가 차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되물었다.
“뭔 뜬금없는 소리야?”
“너, 방금 마나를 느꼈잖아.”
“내가? 언제?”
“마나가 제일 많이 체류된 곳을 귀신같이 알고 찌르던데.”
“아하.”
아다르가 왜 이런 오해를 했는지 알겠다.
“난 또 뭐라고. 그거 침이 마나감응재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래. 마나가 체류되어 있는 곳을 찾아주거든. 수맥 찾는 데 쓰이는, 그 기역자 모양의 탐사봉 있잖아. 그런 거랑 비슷해.”
“왼손으로는 심장 박동을 느끼고 있었잖아. 그건 뭐야?”
“말 그대로 심장 박동을 느낀 건데?”
“왜?”
아다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항상 가벼운 웃음을 달고 다니는 애의 얼굴에서 갑자기 표정이 사라지니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다르의 얼굴에서 날 선 이성이 느껴졌다.
중대한 사항을 판가름하기 위한 긴장이 일자로 다물린 입술 면면에 스며 있었다.
“아다르, 혹시 침구학에 관심 있어?”
“그러니까, 말 그대로 심장박동을 느낀 거야?”
내 헛다리를 바로 무시한 아다르가 구체적인 질문을 덧붙였다.
“바늘로 찌를 때도, 그냥 마나감응인지 뭔지 하는 침으로 찔렀을 뿐이고?”
“그렇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를 빤히 바라보나 싶던 아다르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듣기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인 한숨이어서,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러고는 고개를 홱 쳐들곤 싱긋 웃는 게 아닌가. 허구한 날 장난을 쳐대더니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건가 싶어 코앞에 손을 흔들어 보려는데, 문득 그가 내 손목을 꾹 짓누르듯 움켜쥐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의 감촉이 까슬하게 피부를 에워쌌다. 옹골차다고 생각은 했지만, 굵직한 뼈마디가 피부로 느껴지니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내 손목을 빈틈없이, 그러나 아프지는 않게 신경 써서 쥐고 있다가 손을 털어내기 직전이 되어서야 놓아주었다.
“방금 뭐한 거야?”
혼자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아다르가 불현듯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재밌다, 너. 어떻게 이것도 자각이 없냐. 아니면 숨기는 건가?”
“뭐가?”
아다르가 돌연 상냥한 눈을 하더니 시선을 맞춰왔다.
나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왜 이렇게 비밀이 많아, 카카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피가 일시에 발끝으로 빠져나갔다.
“궁금해지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응시했다. 아다르가 눈가를 휘어 웃었다. 나는 미소 짓는 흑표범이라도 본 사람처럼 몸을 경직시켰다.
‘진정하자.’
나는 막혔던 숨을 몰래 내쉬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아다르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침대를 벗어났다.
“몸이 가벼워.”
“…….”
“고마워. 네 덕분이야.”
나는 어색하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면 나중에 약초 많이 줘.”
“물론이지.”
“이제 나가.”
턱짓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그는 내가 왜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지 궁금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밖으로 나갔다.
아다르가 방을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진정하자. 아다르는 그 사람과 아무 연관이 없는 사람이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술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환청이 들렸다.
[카카나는 비밀이 많네? 난 그런 거 별론데.]
가느다랗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야살스럽게 뇌리를 파고든다.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도 떠올랐다. 나는 소용이 없을 걸 알면서도 눈을 감고 두 귀를 틀어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방을 가로질렀다. 반투명한 하얀색 레이스 커튼이 쳐진 창가에 한참을 서 있다가 커튼을 치우고 유리창을 젖혔다.
시퍼런 겨울바람이 사나운 기세로 방 안을 쑤시고 들어왔다.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멍하니 죽음의 숲을 내려다보았다. 거친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메마른 겨울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어떤 목소리가 완전히 얼어붙어 떨어져 나갈 때까지.
***
컨디션은 다음 날 아침이 될 때까지 최악의 상태에 머물렀다.
‘큰일이네.’
속은 뜨거운데 몸 껍데기는 얼어버린 고기처럼 차가웠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울렁거림이 가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다 빌어먹을 꿈 때문이다.
‘오늘이 하산하는 날인데…….’
용사들이 내 안색을 보고 온갖 걱정을 사서 할 게 불 보듯 뻔했다. 나는 전날 밤에 미리 준비해둔 두툼한 오트밀 색 목도리를 두르고 펑퍼짐한 원피스 위에 감색 코트를 걸쳤다. 털실로 짠 목도리가 북슬북슬하게 피부를 감싸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나는 퀭한 눈으로 창밖을 확인했다. 해가 쨍하니 떠서 하산하기에 딱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빨간색 마법배낭을 어깨에 메고 거울 앞에서 최종 점검을 했다. 웬 굶어 죽은 양 사체처럼 생긴 여자가 덜렁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몰골 끝내주는데?’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눈 밑은 시커멓고 입술에 색이 없어서 전체적으로 생기가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사고 싶진 않았다. 나는 옅게 색조가 들어가 있는 분홍색 립밤을 입술에 문질렀다. 그러자 조금 정상적으로 보였다.
불시에 목젖을 잡아당기는 토기를 억누르며 옷걸이로 걸어갔다. 어두운 갈색 로브를 어깨에 두른 뒤 방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근처에 아다르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컵을 보자마자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을 싸질렀다.
“싫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다르가 몹시 아쉬워하며 컵을 들이밀었다.
“오늘 일찍 떠나야 한대서 건강주스를 만들었는데.”
나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유리컵에 담긴 초록색의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이거 마시고 가자.”
“싫어.”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마시자마자 토할 자신이 있었다.
안 그래도 위액이 바깥 공기를 쐬고 싶다며 존재감을 호소하고 있는데, 예민한 위장에다가 달팽이 똥 같은 초록색 음료를 들이부었다간 사달이 날 게 안 봐도 뻔했다.
나는 상상만으로 쏠리는 기분이 들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왠지 그의 주스에서 비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근처에서 숨도 쉬기 싫었다.
“너, 오늘 뭔가 안색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다르가 의아한 기색으로 날 자세히 살피는데, 아르모어가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그는 다섯 남자 중에서 말을 걸기가 가장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은 일절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르모어가 당연히 나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갈 줄 알았다. 그런데 소리 없이 걸음을 옮기던 그가 내 옆에 슥 멈춰 서는 게 아닌가.
“……?”
나는 절로 시선이 가는 그의 직모를 흘끗 바라보았다. 새까만 먹 같은 머리였다. 위에서 아래로 똑바로 흐르는, 먹으로 이루어진 폭포 같았다.
아르모어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이마에 갖다 대었다. 담백하고 차분한 행동거지 때문인지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뜨끈한 열기가 이마를 부드럽게 감쌌다. 식지 않는 온기가 내 몸에 상주해 있는 한기를 녹여내는 기분이 들었다.
아르모어가 짙은 핏빛 눈망울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몸이 차군.”
그가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밑으로 내려, 뺨으로 삐져나온 내 잔머리를 귀 뒤에 꽂아주었다.
“어디가 안 좋은 건가?”
“그, 그냥 좀, 자, 잠을 못 자서…….”
‘창피하게 말은 왜 더듬고 난리야.’
나는 혀를 깨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르모어가 내 표정을 자세히 살피더니 불현듯 가늘게 미소 지었다.
“이대로 떠나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으니, 몸을 덥히고 가는 것이 어떤가? 그대의 몸이 제일 중요하니.”
다른 용사가 말했으면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르모어여서 반항할 수가 없다. 정말이지 황제라도 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다. 과거에 용 수인족의 왕이라고 했으니 맞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 그렇게 할게요.”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있겠다.”
아르모어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나를 지나쳐 밑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참고 있던 숨을 놓았다. 아무래도 그와는 평생 말을 놓지 못할 것 같았다. 편하게 말해도 된다 했지만, 저렇게까지 고압적인 분위기의 사람에게 반말하는 건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고압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배려가 몸에 배어있다는 것이 퍽 신기했다. 가타부타 말이 없는데도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자리를 비켜주곤 했기 때문이다.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비슷한 일이 세 번이 넘어가자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나?’
정말 그런 기분이다.
“잠을 못 잤나 봐?”
그건 다른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긴 했지만.
나는 아다르를 향해 파리 내쫓듯이 손을 흔들었다.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이렇게 금방 들켜버릴 줄 알았으면 입술에 색조 들어간 립밤은 왜 찍어 발랐나 싶다.
“아르모어랑 태도가 너무 다른 거 아냐?”
아다르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킥킥거리며 내 뒤를 쫓았다. 나는 목젖이 보이도록 커다랗게 하품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꿀물 타 줄까?”
아다르가 제안했다.
“그거 마시고 가든지. 정말 오늘 가도 괜찮겠어?”
“괜찮든 괜찮지 않든 오늘 가야 해. 제국이 마나 꼬이는 거 말고 다른 독약도 너희에게 먹인 모양인데, 그거 빨리 해독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어. 약초를 구해야 해.”
‘게다가 다음 주는 발정기고.’
나는 터져 나오려는 쌍욕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턱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꿀물은 좋아.”
“알았어.”
아다르가 눈을 접어 웃으며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 거실 벽난로 근처에 있는 흔들의자에 몸을 구겨 앉았다. 두꺼운 옷을 입은 상태에서 불을 쬐고 있으니, 온몸의 혈관들이 이완되며 피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혈액순환이 잘 안 됐던 모양이다.
저린 증세를 보이던 손가락도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감기기 일보 직전인 눈으로 불꽃의 흔들리는 춤사위를 구경했다.
따뜻한 온기, 끝없는 어둠이 펼쳐진 머릿속, 고요한 침묵. 어젯밤 내내 원했던 상태였다. 머릿속을 침투해 들어오던 기억과 목소리와 생각들이 죽은 것처럼 잠잠한 상태.
꾸벅, 고개를 흔들며 잠깐 조는데 매끄러운 하얀색 밍크 담요가 상체로 올라왔다. 나는 정신이 반 이상 빠져나간 눈을 위로 올렸다.
손으로 만지면 파란 물이 묻어나올 것 같은, 청명한 바다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스노아가 투명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나를 살피며 담요를 둘러 주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어. 곧 일어날 거야.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불꽃과 함께 흔들리며 부유하는 의식의 끝을 기어코 놓쳐버리고 말았다.
***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나는 불시에 땅으로 끌어올려진 붕어처럼 파닥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으악!”
하필 흔들의자라 몸이 흔들리는 통에 비명까지 질렀다. 소파에 앉아 카드 쌓기 놀이를 하고 있던 할릭이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바닥에 떨어진 묵직한 밍크 담요를 주워들었다.
“몸은 어때?”
그가 근처로 걸어오며 물었다.
“괜찮아. 지금 몇 시야?”
“1시.”
“아, 1시…….”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말고 딱딱하게 굳었다.
‘오후 1시? 13시? 점심시간이 지났다고?’
“왜, 왜…….”
“응?”
“왜 깨우지 않았어!”
버럭 고함을 지르며 할릭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겼다. 그가 세상 순박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혀주며 웃었다.
“너무 잘 자길래 그랬지. 다행이야. 지금은 괜찮아 보이네.”
“아다르 어딨어! 당장 불러와, 해지기 전에 내려가야 해!”
“알았어, 알았어. 진정해.”
그가 전혀 긴장감이 없는 목소리로 멱살을 쥐고 있는 내 손을 풀어내며 말했다.
“아다르!”
할릭의 우렁찬 부름을 들은 아다르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나는 도끼눈을 하고 그를 노려봤다.
“준비는 다 한 거야?”
“그럭저럭. 너무 걱정하지 마. 난 밤눈이 밝거든.”
아다르의 천하태평한 소리를 듣고 있으니 속이 터졌다. 산에서 위험한 게 어디 어둠과 추위뿐이겠는가. 밤이면 몬스터도 기승을 부린다.
나는 마법배낭을 뒤져서 로브를 꺼냈다. 어젯밤 털 이불을 열심히 수선하여 만든 거적때기 같은 검은색 로브였다. 그것을 건네주니 아다르가 처음 보는 물체를 탐색하듯이 너덜너덜한 로브를 펼쳐 들었다.
“입어.”
“이불을?”
“로브야.”
“이게?”
나는 그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이게?”
제일 험악한 표정을 짓고 눈깔을 부라리자, 아다르가 인성이 파탄 나 보이는 내 얼굴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좋은 말로 할 때 로브를 입으라는 강력한 의사를 담아 로브와 아다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가 마지못해 로브를 어깨에 둘렀다. 만족스럽게 콧김을 뿜으며 다시 마법배낭을 뒤적였다.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법 날이 서 있는 잭나이프를 꺼내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아다르는 이런 점이 편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던지든 척척 받아냈다.
“이건?”
“호신용품이야. 하나쯤은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잭나이프의 손잡이에서 칼을 꺼낸 아다르가 조명에 날을 비춰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나는 배낭의 지퍼를 닫은 뒤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신발장을 뒤지자 간혹 꺼내 쓰곤 했던 합금재질의 아이젠이 보였다. 그걸 신발에 감으면서 아다르에게도 여분의 아이젠을 던져주었다.
겨울이라 눈이 잘 녹지 않아서 미끄러울 수도 있었다. 아이젠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문을 열자 코가 아리도록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들어찼다. 나는 아다르가 준비됐나 확인하려고 뒤를 돌았다가 흠칫 몸을 물렸다.
“조심히 다녀와!”
스노아, 첼러스, 할릭, 아르모어가 옹기종기 모여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할릭은 손까지 살랑살랑 흔들며 인사하고 있었다. 갑자기 목구멍 안이 간지러워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모자를 푹 눌러썼다. 뜨끈뜨끈한 귀가 모자 안으로 깊숙하게 숨었다.
휙 몸을 돌려 걷자, 뒤로 아다르의 발걸음이 따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할 수 있어.’
텔레포트 스크롤은 유명한 대도시의 좌표만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이라, 돌아올 때는 마차를 이용해야 했다. 마을에 도착해서도 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나는 화폐를 두둑이 챙겼나 생각하며 떨기나무의 나뭇가지를 젖혔다. 우량 세이피지아가 듬성듬성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오랫동안 관리해온, 나만의 길.
‘최대한 빨리 치료하고 내보내자.’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던 용사들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부담스러운 작자들과 오래 있으면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특히 혼자 지내기로 마음먹은 나한테는.
‘이러다 코 꿰이는 거 아니야?’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내가 생각해 놓고도 말이 안 돼서 픽 웃고 말았다.
***
호위병 브룩센이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맴돌았다. 단단한 철모 밑으로 드러난 그의 새파란 얼굴이 식은땀에 젖어 기분 나쁘게 번들거렸다.
황실마법사 알란스는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막사를 젖혀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수도에서 파병된 병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숲의 경계를 에워싸고 있었다. 다들 하찮은 일에 파견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수도의 상비군이 도망친 노예를 잡으러 죽음의 숲까지 왔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좋게 꾸며도 멋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알란스가 쯧쯧 혀를 차는데,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던 브룩센이 한차례 마른세수를 하며 근처로 다가왔다. 이곳에서 불안에 떠는 이는 브룩센이 유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알란스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브룩센을 흘끗 살폈다.
“한낱 노예가 아닙니까. 죽음의 숲 근처에 파견된 황실마법사만 다섯 명이 넘습니다.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제가 은밀히 소식을 들어보니, 황성 내부도 소란스럽다 합니다. 이러다 비명횡사하는 거 아닙니까?”
알란스가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브룩센. 호위병으로 꽂아 줬더니 자네가 더 불안해하면 어쩌잔 건가?”
“하지만…….”
“서민 출신 취급이야 아무리 타고난 마나통이 커도 이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진정 몰라서 하는 소린가? 똥 닦아 준 사건이 한두 개도 아니고, 새삼 왜 그러는 겐가.”
“영 불안하여 그럽니다.”
“좀 기다림세. 내 뒷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네. 그 정도 금액이면 팔자가 확 필 거야.”
브룩센은 알란스의 말을 별로 귀 기울여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가 다시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돌기 시작하자, 알란스가 끌끌끌 혀를 찼다.
제법 큰 돈을 찔러주기에 호위병 자리로 꽂아 준 것이었는데 저렇게 심약한 모습을 보이니 영 마뜩잖은 탓이었다.
“물론 숨겨진 것이 있겠지. 노예의 신분이 실은 예사가 아니라든가. 그러나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알란스가 알 만하다는 듯 멸시를 담아 비소를 터트렸다.
“서류를 보니 노예 중 하급마법사가 한 명 있었던 모양일세. 얼음화살로 보초병과 결계 마법사의 심장을 뚫어 죽였더군.”
“마, 마법사 말입니까? 마법사가 어찌 노예 신분으로…….”
“어허, 깊이 생각하지 말게. 때론 모르는 게 약인 법도 있는 게야.”
알란스가 말을 자르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어떻게 이곳까지 도망쳐왔는지는 모르겠네만, 얼음화살은 연습생들이 배우는 기초마법 중에서도 가장 하급에 속하는 마법일세. 크기를 본인 역량대로 정할 수 있으니 마나가 적게 들고 조절이 쉽지. 심장을 모두 꿰뚫어 죽인 건 놀랄 법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겁을 먹을 상대가 아니란 말이네. 알아듣겠는가? 고작 얼음화살이란 말일세! 나참.”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인력을 동원한 것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황실마법사라니요. 귀한 인력을, 그것도 다섯이나…….”
“그만!”
알란스는 고리타분하고 지긋지긋한 이야기를 참고 들어주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가 큰 소리로 엄포를 놓자 브룩센이 입을 다물었다.
“우린 그냥 여기서 하루 이틀 숙박하고 수도로 돌아가면 되는 걸세. 알겠나? 도망친 곳이 죽음의 숲이면 뻔하지 않은가. 평생 그러고 살 바엔 죽음을 택한 게지.”
알란스가 빤질빤질한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안 되겠네. 아무래도 요즘 자네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 같으니 기분전환으로, 어떤가? 내 오늘 마을에서 제법 반반한 처자를 봤는데…….”
“마법사님!”
그때 막사 바깥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접으며 징그럽게 웃던 알란스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웬 소란이냐!”
“그, 그것이.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 넷이 기절한 채 발견되어……. 지휘관님에게 알릴까요?”
“기절?”
알란스가 숱이 거의 없는 희미한 눈썹을 의아하게 치켜들었다.
“예. 어떻게 할까요?”
죽음의 숲 근처이기 때문에 아주 없을 일도 아니었으나, 어쩐지 기분이 싸했다. 알란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바깥으로 향했다.
“어디라고 했지?”
***
“헉, 허억…….”
이렇게 뛰어대다간 제 명에 못 살겠지 싶다. 나는 마을의 좁은 골목길에 주저앉아서 한 손에 물병을 들고 호흡을 골랐다. 너무 숨이 차서 물조차 마시기 버거웠다.
아다르는 멀쩡했다. 심지어 숨도 몰아쉬지 않았다.
‘사람 맞나.’
누구는 눈앞이 하얘지고 있는데. 나는 물을 조금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을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서, 눅눅한 골목에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골목을 장장 30분 동안 누볐는데도 그 흔한 거지 한 명 마주치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음침한 길만 골라서 여태 뛴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40분 전까지만 해도, 아다르와 나는 죽음의 숲 경계 지점에 발이 묶여 있었다.
사정을 자세히 풀자면 이랬다.
“근처에 보초병 넷이 있어.”
아다르가 나무밖에 보이지 않는 숲의 끄트머리를 보며 설명했다.
‘이 거리에서 보인다고?’
나는 뭐가 보이나 싶어서 눈을 같이 부라려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나를 느낄 수 있어서 그런가.’
아다르가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저 넷을 한꺼번에 쳐야 시야에 들지 않고 마을로 갈 수 있겠는데.”
“유명한 암살자였다며. 때려눕히면 되지.”
“내가 몸이 두 개는 아니어서 말이야.”
아다르가 경계지점 가까이에 다가가며 말했다. 나는 나무 뒤에 숨은 채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왼쪽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조를 터는 동안, 오른쪽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조가 호각을 불 거야. 그러면 이곳에 파병된 모든 병사들이 눈치채게 돼. 그러면 끝이야. 나 마나 못 쓰잖아. 네 덕분에 속도나 힘만 조금 나아졌을 뿐이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제는 이것뿐?”
“이것뿐.”
길게 한숨이 나왔다.
‘벌써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쩔 수 없이 배낭에서 두께가 얄팍한 유리구슬 두 개를 꺼냈다. 어여쁜 두 개의 유리구슬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아파왔다.
각각의 유리구슬에 다섯 번쯤 입을 맞춰 주고 품에 안은 채 속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나를 괴상한 얼굴로 바라보던 아다르가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뭐야?”
“특제 수면오일. 이거 봐봐.”
나는 투명한 유리구슬을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유리구슬 속에 반쯤 담긴 투명한 액체가 가볍게 찰랑거렸다. 그것을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흐르는 석양의 붉은빛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액체에 은은한 초록빛이 감돌았다. 나는 그게 인어의 비늘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개발 당시 보석처럼 반짝이는 액체를 보고 홀딱 반해버려서, 자주 찾는 장인에게 전용 유리케이스까지 만들어달라고 한 결과가 바로 이 구슬이었다. 보통 외출 때마다 모든 약을 쓸어 담긴 하지만, 이걸 벌써 소모하게 되다니 속이 쓰렸다.
집에 돌아가면 10개는 더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예쁘지 않아?”
“그러네.”
아다르가 웃음을 참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고개를 홱 쳐들고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그가 진지한 척 다른 질문을 했다.
“강한 수면제야?”
“당연하지! 얘가 얼마나 대단한 아이인데!”
“방금 되게 우울해하지 않았…….”
“유리구슬이 깨지잖아? 그럼 오일이 새어 나오겠지? 그 순간 바로 기절이야. 잠이 들 거라고. 엄청 강력하거든. 이름도 특제 카카나표 인어의 눈물이라고 지었어. 하품하면 눈물 나오잖아. 인어가 하품하면서 나온 눈물인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을 잘 지었단 말이야.”
“대단하네…….”
어째서인지 아다르가 매우 힘들어 보이는 표정으로 박수 쳤다. 나는 그의 칭찬과 환호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결론은, 이걸 그들에게 던지자?”
나는 순식간에 우울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고 있는 보초병들을 향해 시선을 흘끗거린 아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졸려 보이는데 얼른 재워 주자.”
아다르가 왼쪽 손목을 빙글빙글 돌려 스트레칭을 한 후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유리구슬에 뽀뽀 다섯 번을 해주고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숲의 경계 가까이 걸어가 나무 뒤에 선 뒤 거리를 재듯 눈을 가늘게 떴다가 천천히 왼손을 들었다.
방향은 왼쪽이었다.
쐐액―!
마치 최대치로 당겨진 활시위에서 튕겨 나간 화살처럼, 유리구슬이 살벌하게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보초병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정확히 그들의 발밑에서 산산조각 났다.
아다르는 지체하지 않고 오른쪽 보초병들에게도 똑같이 유리구슬을 던졌다. 보초병들은 자기들의 발밑에 무엇이 떨어졌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잠이 든 보초병들을 유유히 지나쳤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보초병들이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로브를 벗기고 신분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다르가 자연스럽게 마을 어귀로 걸음을 돌렸지만, 재수 없게도 한 병사의 눈에 띄는 바람에 지금 이 시각까지 불타오르는 추격전을 벌이고 말았다.
시간을 허비해서 텔레포트 스크롤을 구매하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나는 남색으로 흐릿하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골목의 모서리로 가 인기척을 확인하던 아다르가 내게 잰걸음으로 다가오며 손을 잡아끌었다.
“근처에 여관이 있어. 오늘은 거기서 식사를 하고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대답할 기운도 없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걱정스럽게 내 안색을 살피다가 환한 빛이 쏟아지는 길거리로 안내했다.
갑작스러운 병사들의 출현에 마을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우리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여관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이면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일 가게가 한산했다.
“방 두 개요.”
“큰 거 하나밖에 없어.”
여관 주인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와 방을 같이 쓰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주인에게 값을 지불하고 방 열쇠를 받았다. 여관은 오래된 건물인지 계단을 오를 때마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정된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쳤다. 그제야 한숨이 놓였다.
나는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가자 다리가 욱신거렸다. 종일 험한 산길을 걷고 뛰어댄 탓에 몸을 씻어야 했지만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한방인데 불편하지 않겠어?”
방문 근처에 계속 서 있던 아다르가 로브의 모자를 벗으며 얘기했다. 하긴, 여관에 남녀 둘이라니 상황이 묘하긴 했다.
“안 괜찮으면 어쩌려고. 방이 이거밖에 없다는데.”
“나는 위에서 자도 되는데.”
아다르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뜻을 알아먹고 되물었다.
“지붕?”
“응.”
“한겨울에?”
“견딜 만해.”
“이상한 소리 말고 여기서 자. 왜 사서 고생이야?”
“바닥에서 잘까?”
“왜? 너랑 나랑 그렇고 그런 걸 할 리도 없는데.”
내 말을 들은 아다르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대놓고 비웃을 줄 알았는데 까만 눈을 이리저리 굴려대다가 시선을 피하는 게 아닌가. 나는 왜 저러나 싶어 멀뚱히 바라보다가 그가 당황했다는 걸 눈치채고 삐죽 솟으려는 입꼬리를 황급히 진정시켰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려고 갖은 애를 쓰면서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뭐야? 진짜 그런 거야?”
“아니…….”
아다르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삿대질하며 배를 잡고 폭소하고 싶은 것을 혀를 깨물어 가며 참았다. 지금까지 당한 게 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 순 없다.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고야 말겠다.
“와……. 짐승도 아니고……. 설마 기대한 거야……?”
“카카나, 오해한 모양인데 그런 게 아니라…….”
“실망이다…….”
“나는…….”
“믿었는데.”
어떻게든 해명을 하려던 아다르의 한쪽 눈썹이 돌연 위로 휙 올라갔다. 그의 새까만 눈망울이 내 표정을 살피듯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곤 어느 순간 안절부절못하던 태도를 싹 버리고 짝다리를 짚었다.
허리에 한 손을 올린 모양새가 어이가 털려도 제대로 털린 사람처럼 미세하게 부들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놀리는 걸 들킨 것 같았다. 나는 참던 웃음을 꺄르르 터트리며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했다.
날 그렇게 놀려대더니 꼴좋다. 저 못마땅한 얼굴 좀 보라지!
“날 놀렸다 이거지?”
아다르가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나를 한참 동안 구경하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오싹하게 느껴져서, 나는 찬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재밌었어?”
아다르가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지는 어두컴컴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본능적인 직감이 빨간불을 깜박이며 내게 위험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의 발걸음에 맞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다 침대에 발이 걸려 푹신한 매트리스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당하는 것보다 괴롭히는 게 더 좋거든.”
아다르가 허리를 숙여 내 양옆의 침대를 짚었다. 매트리스가 푹 꺼지며 묵직해졌다. 그의 숨결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굵직한 검은색 눈썹과 길고 억세게 뻗은 속눈썹이 자세하게 보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콧잔등이 서로 부딪힐 거리다. 아다르의 야살스러운 눈매가 반달로 휘어지며 눈웃음을 그렸다.
“나도 장난 좀 쳐 볼까?”
나는 허리를 뒤로 쭉 빼면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배에 힘을 주고 버텨 보려고 했으나 결국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이불에 푹 파묻히고 말았다.
‘원래 이렇게 덩치가 있는 편이었나?’
새삼 쓰러진 상태에서 그를 올려다보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할릭만 덩치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아다르도 제법이었다. 체형이 민첩하게 생겨서 그간 별로 실감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가 금방이라도 도망칠 동물에게 다가서듯, 아주 느릿한 속도로 침대에 올라왔다. 침대에 아다르의 무게까지 더해지면서 침몰하는 배처럼 몸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피부로 느껴지는 강렬한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엷게 배어 나왔다. 아다르의 그림자가 내 얼굴로 까맣게 내려앉자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왠지 이 자세에서 시선이 마주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눈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공교롭게도 헐겁고 낡은 그의 옷자락과, 벌어진 틈으로 움푹 파인 쇄골이 보였다.
팔뚝과 가슴팍에 촘촘하게 붙은 마른 근육이 움직임에 따라 육감적으로 율동하고 있다. 사냥을 게을리하지 않는 표범처럼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몸이다.
‘맙소사.’
당황하며 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다르의 새빨간 입술이 별안간 비뚜름하게 틀어지며 성격 나쁜 미소를 지었다. 날카로운 눈꺼풀에 반쯤 걸려 있는 검은 눈자위와 진한 눈매가 특유의 분위기를 머금고 야릇하게 날 훑는다.
나는 올가미에 걸린 양 그와 오랫동안 시선을 교환했다. 조명마저 그의 뒤통수로 쏟아지고 있어서 음영이 진 얼굴이 지나치게 퇴폐적으로 느껴졌다.
내 얼굴로 아다르의 부드러운 회색 머리카락이 스쳤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내 뺨 근처에서 여름 바람처럼 은밀하게 불어왔다.
“흐읍…….”
숨을 들이켜며 손안에 가득한 옷자락을 단단하게 틀어쥐었다. 아다르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갖다 대었다. 그리곤 마치 부모님의 품에 얼굴을 비비는 어린아이처럼 두어 번 문질렀다.
그게 끝이었다.
그는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 아주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숨 막히도록 폐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나는 멍하니 숨을 들이쉬었다.
아다르의 무게가 옆으로 옮겨가자 뒤늦게 정신이 돌아왔다.
“이……!”
나는 그렁그렁한 눈을 표독스럽게 뜨고 아다르를 돌아보았다. 옆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던 아다르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무릎걸음으로 침대 헤드보드로 걸어가 베개를 쥐고 그를 팼다. 별 소용은 없었다. 베개가 아프면 얼마나 아프다고, 아다르가 그것마저 요리조리 피한 탓이다. 나는 씩씩거리며 베개를 벽에 집어 던졌다.
빨갛게 익은 내 얼굴을 뿌듯하게 관찰하던 아다르가 얄미운 말을 했다.
“그러게 날 왜 놀리고 그래?”
“이, 이……!”
“뭐?”
“넌 그렇게 오래 살아놓고 유치하게 굴고 싶어?”
“우리는 시간이 멈춰 있으니까. 난 앞으로도 평생 이럴걸.”
아다르가 실없이 웃었다.
“그래도 너한텐 착한 편인데.”
“웃기고 있네.”
나는 그의 머리채를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한 지성인이 참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들끓는 활화산처럼 폭발하려던 마음이 잠잠해졌다.
나는 냉철과 이성을 가장한 차가운 눈으로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짐승이랑 무슨 대화를 하겠어.”
그러나 아다르는 내가 건넨 엿을 예쁘게 받아서 달게 빨아먹었다.
“짐승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
허스키한 음성이 귀로 흘러들어왔다. 마치 고막을 간지럽히는 느낌이어서 귀를 홱 틀어막았다. 이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렇게 대화를 계속해서 좋을 거 하나 없었다. 나는 욕실로 후다닥 도망갔다.
“씻을 거야! 훔쳐보기만 해!”
“날 뭐로 보는 거람.”
나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밖에서 아다르가 소리 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문고리를 잡고 선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
아다르는 카카나와 마을에 나와 있는 동안 잠을 자지 않을 작정이었다.
여명의 두목으로 한창 바빴을 때 들인 습관이 있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틈이 날 때마다 선잠을 자두면 그럭저럭 며칠은 밤을 새울 수 있었다.
아다르 아로아는 성격이 나빴다. 물론 카카나도 입만 열면 아다르의 성격은 가관이라는 둥, 어쩜 그렇게 못됐냐는 둥 했지만 그는 단언컨대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성격이 좋지 않은 남자였다. 오히려 그녀에게 그답지 않게 친절한 편이었다.
아다르는 누구에게도 이런 식의 배려를 베풀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위해 식사를 챙기고, 건강을 살피고, 기분을 살피며 행동하는 건 이미 죽고 없어진 동생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카카나를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그는 자유로운 밤이었다. 모든 이의 머리 위에 공평하게 드리우는 어둠이었다.
어둠에 속한 일이 그에겐 천부적으로 맞았다. 그는 사람들의 공포를 손에 쥐고 어린애 장난감처럼 쉽게 쥐락펴락할 줄 알았다. 때문에 질 나쁜 놈들조차 기를 펴지 못하고 그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래, 그랬었다.
아다르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안 그래도 죽이고 싶은 놈들이 많은데, 자꾸 벌집을 건드리네.’
검지로 자신의 팔뚝을 일정하게 두드리던 아다르가 뭔가에 주의를 기울이듯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걸어갔다.
“병사들이군.”
검지로 적갈색 벨벳커튼을 걷어 밖을 살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무장한 병사들이 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뒤에 마차에 탄 민머리의 남자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쥐새끼처럼 생긴 노인이었다.
아다르는 마차에 찍힌 인장이 황실마법사의 인장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가 비정한 웃음을 지으며 병사들을 훑었다. 민가를 차례로 확인하던 병사 두 명이 뭐라 뭐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여관으로 들어왔다.
그는 짧게 혀를 차고 방을 크게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 빈 꽃병 하나와 잉크가 오래되어 딱딱하게 말라붙어 있는 깃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다르는 그 깃펜을 들어 빙글빙글 돌리면서 구조를 자세히 살폈다. 나무 몸통에 깃장식이 달려 있고 펜촉이 꽂혀 있는 형식이었다. 그는 펜에서 깃을 뜯어 버리고 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몸통을 가늘게 깎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무로 된 몸통이 바늘 정도로 가늘어지자, 그는 펜촉이 꽂혀 있는 부분을 부러트려 없애고 깎은 나무를 소매 안으로 숨겼다. 때맞춰 카카나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 개운하다. 살 것 같네.”
그녀가 뽀얗게 웃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꿈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다르는 뜯어진 깃과 깎인 나무 부스러기를 책상 옆으로 떨어트려 치워버리고 빙글 몸을 돌렸다. 그녀가 따끈따끈한 삶은 달걀 같은 얼굴로 올려두었던 땋은 머리를 밑으로 내리고 있었다.
“다 씻었어?”
“응, 이제 아다르 씻어.”
“못 씻을 것 같아.”
“왜?”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카카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 있어?”
아다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사악해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것보다, 내 두 다리의 마나혈도 뚫어줘야 할 것 같은데. 왼손 뚫어 준 것처럼.”
아다르가 제 다리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응.”
“뭐 하러? 더 뚫으면 불안정해질지도 몰라서 안 돼. 세 개가 제일 안전한 개수야.”
“때로는 위험도 감수해야 하지 않겠어?”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그때,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다르가 오늘의 날씨를 읊듯 여상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이런 이유지.”
그리고 문을 열어 병사의 목으로 순식간에 왼손을 움직였다. 지루한 표정의 병사가 방문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다르가 날카로운 나무 바늘을 병사의 목으로 망설임 없이 꽂아 넣었다. 손가락의 미세한 마나가 찌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물컹한 치즈에 파고드는 것처럼 바늘이 쑥 들어갔다. 오랜 암살 생활로 터득한, 아다르만의 암살 스팟이었다.
죽음과 직결된 부위를 정확하게 찌른 후 카카나가 보지 못하도록 나무 바늘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몹시 빨라서 그녀의 눈에는 손을 잠깐 들었다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아다르가 옆으로 비켜서자, 병사가 앞으로 천천히 고꾸라졌다. 그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시체를 손으로 받아 침대 기둥에 기대어 앉혀 놓았다. 실력이 죽지 않은 모양인지, 다행히도 피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도구가 안 좋아 피부가 부풀어 올랐지만, 눈에 띌 만큼은 아니다. 그 이상으로 수상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번 훑어보고 이상이 없음을 파악한 아다르가 태연하게 문을 닫았다.
“죽인 거야?”
카카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다르가 그녀의 표정을 흘끗 살피다가, 병사의 옷깃을 바짝 치켜세우며 대답했다.
“잠깐 기절시킨 거야.”
“거짓말.”
“믿든 믿지 않든, 우린 빨리 이곳을 떠야 해.”
아다르가 매끄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리곤 자신의 두 다리를 다시 툭툭 두드리며 그녀를 재촉했다.
“봤지? 시간을 더 끌면 다른 병사들이 여관으로 쳐들어올 거야. 뚫어줘. 안 그러면 쳐들어오는 사람들 다 죽여야 해.”
“그냥…….”
“평범한 사람들처럼 뛰어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다르가 카카나의 말을 막으며 웃는 얼굴로 얘기했다.
“자, 어서.”
그녀가 결국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배낭에서 침통을 꺼냈다.
***
‘별로 내키지 않는데.’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로브를 뒤집어쓴 뒤, 아다르를 침대가에 앉히고 의자를 끌어왔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시침을 뽑았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침을 놓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환자의 목숨이 위험했지 내 목숨까지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정신 차리자.’
흐트러진 마음은 고스란히 실수로 이어진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침의 감촉에 집중하자 마음이 물속으로 침잠했다. 아무런 자극도 닿지 않는 심연으로.
약간은 서늘하고 오돌토돌한 침자루를 단단히 틀어쥐고 그의 하반신에 가까이 가져다댔다. 다리는 심장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심장박동을 느끼며 탐색하는 건 어렵지만 심장과 떨어져 있는 만큼 즉사는 피할 수 있었다.
아다르의 하반신에는 거대한 마나 웅덩이가 왼쪽과 오른쪽 다리에 각각 하나씩 크게 고여 있었다. 나는 위치를 확인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망했다. 극혈자리야.’
단언컨대 건드리면 안 되는 곳이었다.
극혈이 마나웅덩이와 끝내주게 인접해 있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경혈의 정기가 엉망진창이 되어서 아다르를 반송장으로 만들지도 몰랐다.
마나혈이야 마나 못 쓰면 끝이지만 정기에 문제가 생기면 생명활동에 지장이 생긴다. 그를 좀 날쌔게 움직이게 한다고 이런 위험한 곳을 건드릴 순 없는 것이다.
‘어떡하지.’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다리의 마력을 운용할 수 있으면서도 정기를 해치지 않는 혈자리를 찾아야 했다. 이런 걸 대체 병사가 오기 전에 어떻게 해결하란 말인가.
나는 일단 시침을 다른 곳으로 움직여 보았다. 당연히 극혈과 인접해 있지 않은 마나웅덩이도 있었다. 그런데 너무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정도 깊이면 시침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적어도 대침, 아니면 장침으로 찔러야 했다.
‘안 돼. 그런 긴 바늘을 약초의 도움 없이 사용할 순 없어…….’
침이 들어가면서 근처의 다른 미세한 마나혈들도 모두 건드리게 될 텐데, 그걸 안정시킬 약초가 없다.
‘어쩐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자, 문득 아다르가 문을 노려보며 말을 뇌까렸다.
“들어온다.”
“무슨 소리야.”
나는 그의 다리에 고개를 고정한 채 시선만 흘끗 위로 던지며 물었다.
“병사 한 명이 여관으로 들어왔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나 본데. 서둘러야 해.”
“서두른다고 널 죽일 순 없잖아. 기다려.”
냉엄한 말투로 그의 재촉을 잘라내며 마나혈을 탐색했다. 아다르가 침착하게 대답하는 날 확인하곤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두꺼운 책의 장수를 세어보듯, 섬세한 손놀림으로 마나혈을 찾기 위해 애썼다. 손가락에 땀이 배어 나왔지만, 나선형으로 돌기가 나 있는 침자루 덕에 미끄러지진 않았다.
“계단을 올라오고 있어.”
아무래도 밑은 안 될 것 같다. 작은 마나웅덩이를 찾을 수가 없고, 찾더라도 전부 십사경맥 근처에 있다. 안전한 곳이 필요했다.
‘차라리 위를 뚫어서 아래로 흐르도록 하는 건?’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그 많은 마나혈 중에, 위에서 막힌 게 하나도 없을 리 없다. 나는 손을 그의 배 근처로 올렸다.
“병사가 맨 왼쪽 방을 확인하고 있어.”
찾았다.
나는 그의 장골 근처로 손을 가져다댔다. 아주 작은 마나웅덩이지만, 위치도 그다지 깊지 않고 위를 뚫기만 하면 발끝까지는 깨끗하게 뚫려 있는 혈자리다.
왼쪽 다리, 오른쪽 다리와도 이어져 있다. 완벽하다.
너무 작아서 시침을 조금이라도 잘못 찔렀다간 혈 자체가 터져버리겠지만 다른 곳을 건드리는 것보다 백배는 안전했다. 나는 혹여 위치를 놓칠까 침자리를 노려본 채 명령했다.
“허리띠 풀어.”
“뭐?”
“허리띠.”
잠시 침묵을 지킨 아다르가 순순히 허리띠를 풀었다.
나는 왼손을 뻗어 헐렁해진 바지의 허리춤과 그 안의 속옷으로 추정되는 허리끈까지 한꺼번에 움켜쥐고 밑으로 조금 내렸다. 경악한 아다르가 허리를 뒤로 뺐다. 내가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쓰자 그의 복근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나는 침자루를 쥐지 않은 다른 손가락으로 그의 장골을 더듬었다. 이 근처다. 일대에 굵은 핏줄이 불거져 있어서,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그러려면 혈관의 위치를 다 파악해야 하는데, 내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아다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심지어는 내 손길을 피해 허리를 움직이기까지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계속 그러면 침 못 놔 줘. 가만히 있어.”
“이거 참.”
아다르가 꽉 막힌 목소리로 읊조렸다.
“어려운 걸 시키는구만.”
그가 간신히 몸을 고정시키자, 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그의 장골을 더듬었다. 정확한 부위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눈썹을 찌푸리며 우선 그의 피부를 소독솜으로 닦아내고 시침을 근처로 조준했다.
빽빽하게 겹쳐 있는 수천 개의 거미줄 가운데서 단 하나를 찌르는 거다. 어중간하게 겉만 긁어서도 안 되고, 끊어질 정도로 찔러서도 안 된다.
“병사가 바로 옆방까지 왔어.”
“조용.”
가장 정확한 부위의 피부로 시침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원하는 마나혈에 가까워지자 미세한 조종을 위해 호흡을 멈추었다. 그리고 거의 움직이지 않는 수준으로, 실에 일어나 있는 미세한 섬유조직을 손톱 끝으로 건드리듯이 아주 얕게 침을 움직였다.
그것이 성공적으로 마나혈의 반을 뚫자, 망설임 없이 침을 뽑았다.
10분 정도 기다리는 게 정석이지만, 약초가 없어서 이 정도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다르는 일반인과 달라서 아마 이 정도면 발에 마나를 실어 뛰는 데엔 충분할 것이다.
그때,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지금 당장……!”
병사가 소리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아다르가 두 손으로 허리춤을 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뭡니까!”
아다르가 온갖 호들갑을 떨며 소리를 치기에 왜 그러나 싶어 올려다보니, 병사가 몹시 당황한 어투로 말을 더듬었다.
“아, 아이고, 이게, 제, 제가 중요한 순간에…….”
허겁지겁 허리춤을 묶고 있는 아다르를 병사가 민망한 낯으로 쳐다봤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아다르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병사 몰래 찡긋 윙크했다.
배 속에 능구렁이가 적어도 100마리는 똬리를 틀고 있을 법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허리끈 묶을 시간은 벌었으니, 그의 임기응변은 꽤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병사가 침대기둥에 기절한 것처럼 앉아 있는 동료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이미 모든 짐을 챙기고 창가로 이동해 있었다.
병사가 검을 뽑으며 엄포를 놓았다.
“당장 멈춰라!”
아다르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가 내 허벅지를 받쳐 달랑 들어올렸다. 그리고 병사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며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응?’
창밖으로?
‘잠깐.’
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깜깜한 겨울의 밤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잠깐잠깐잠깐잠깐.’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공중에 붕 떠오른 그가 민들레 홀씨처럼 소리 없이 반대편 건물의 지붕 위로 안착했다. 나는 단언컨대 그가 말한 탈출법이라는 게 이런 방식이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스릴을 즐기지 않는 성격이다.
“끄아아, 압!”
비명을 지르려 하자 아다르가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저들에게 마법사가 있어. 위치를 들키면 곤란해.”
뒤를 확인하던 아다르가 내 얼굴을 발견하고 뒤늦게 놀란 얼굴을 했다. 예상컨대 내 눈은 크게 뜨여 있고 그 안에 굵은 눈물이 반 정도 차 있을 거다. 왜냐하면 지금 세상이 뿌옇게 보이고 있으니까.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악을 썼다.
“끄으으읍!”
아다르는 말이라고 볼 수 없는 내 의사표현을 빠르게 알아들었다.
“높은 곳을 무서워했구나. 미안.”
급기야 헛구역질까지 났다. 나는 가련하게 숨을 헐떡이며 그의 어깨에 이마를 처박았다.
‘망할.’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에 눈물이 나오려 했다.
아다르가 어쩐지 좌불안석인 태도로 움직이지 못하다가, 근처가 소란스러워지자 어쩔 수 없이 몸을 다시 움직였다. 그가 발을 한 번 박찰 때마다 몸이 위로 부웅 떠올랐다가, 모든 내장이 목젖까지 밀리며 밑으로 부웅 낙하했다.
오금이 저려서 허벅지를 꼭 붙이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나는 이미 그의 어깨를 부러트릴 기세로 움켜쥐고 있었다.
“쉬이, 카카나. 괜찮아.”
아다르가 마치 갓난아기를 보살피듯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다가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땅을 박찼다. 나는 끝이 없는 하늘에 시선을 두려고 애쓰며 으르렁거렸다.
“닥쳐. 난 애새끼가 아니야.”
“알고 있어. 조금만 참아 봐.”
“흐으으으.”
흘러나온 눈물을 그의 어깨에 비벼 없애며 길게 신음했다. 괜한 서러움이 눈물이 되어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내 두 다리가 어서 땅에 붙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의 어깨를 이로 꾹 짓씹었다. 물론 제정신으로 한 행위는 아니다. 두 손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아다르를 움켜쥐고 있어야 했으므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막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을 뿐이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그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늘, 등증, 은즌흔, 그세, 데려다, 나.”
“널 당장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으라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아다르의 큰 손이 내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었다. 날 고려해서인지 처음에 비해 도약의 높이도 많이 낮아졌다. 미안한 일이지만 별로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다르는 한참을 더 뛰고 나서야 어떤 키 낮은 건물의 뒤편으로 착지했다. 그가 경련을 일으키듯 떨고 있는 나를 천천히 땅에 내려놓았다. 손으로 벽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속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구토감을 다스리며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거칠게 뒤로 젖혔다. 찬 공기를 만난 입김이 허옇게 얼어붙으며 빠져나갔다.
해가 떨어지고 완연한 밤이 되자 피부에 얼음을 대고 있는 것처럼 공기가 차가웠다. 냉수를 들이켜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이 서서히 맑아졌다.
나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뺨에 퍼진 눈물자국을 지웠다.
“괜찮아?”
혹시라도 내가 쓰러질질까 양손을 어정쩡하게 들고 있던 아다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차끈한 입술을 한 차례 훑고 고개를 들었다.
아다르가 잿빛 머리카락 밑으로 반쯤 가려진 눈을 분명하게 뜬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은 그의 하얀 피부가 푸르스름하게 빛나 보였다.
가볍게 걸치고 있는 새카만 면옷과 붉은 입술, 맹수를 연상시키는 한랭한 인상이 불현듯 어둠과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얼굴을 꼼꼼하게 뜯어보고 있자니 줄곧 걱정이 되었던 것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잔뜩 경직된 어깨를 한차례 털어내며 물었다.
“병사에게 얼굴을 들켰는데, 괜찮겠어?”
아다르가 양옆으로 길쭉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볼을 긁적였다.
“이미 팔린 얼굴이니까 상관없지. 너만 들키지 않으면 됐어.”
“나 안 들켰어?”
“문이랑 등지고 앉아 있었잖아. 로브 모자도 쓰고 있었고. 내가 병사의 시선을 계속 확인하고 있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푸르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됐어?”
“안 될 건 뭐야.”
발이 땅에 붙었으면 됐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부어 있는 눈두덩을 손등으로 몇 차례 짓눌렀다.
“원래 높은 곳을 무서워했어?”
아다르가 부러 가벼운 투로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날 빤히 쳐다보는 듯싶더니 화제를 돌렸다.
“일단, 병사들이 우리 위치를 파악하기 전에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다.”
“무슨 수로?”
“여기 마법 스크롤 파는 곳 맞지? 간판에 그렇게 적혀 있던데.”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건물을 살폈다. 이 정도 규모를 가지고 있는 건물이면 마을에서 마법 스크롤 가게밖에 없었다. 나는 수상쩍은 눈으로 아다르를 올려다보며 계획을 가늠해보았다.
“설마 훔치자는 건 아니지?”
“내일이면 마법 스크롤 못 사.”
아다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황실마법사와 병사가 팔지 못하게 할 거야. 그러면 이 마을에 진짜 발이 묶여. 희귀한 약초를 사려면 큰 도시로 가야 한다며.”
“그렇긴 하지.”
“어디로 가야 하는데?”
“베샤.”
아다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화폐주머니 줘 봐. 맞는 값을 데스크에 얹어 놓고 나올 테니까. 이러면 되지?”
내가 대답하지 않고 시간을 끌자, 아다르가 재촉했다.
“곧 있으면 병사들이 골목까지 뒤질 거야.”
나는 망설임 끝에 마법배낭에서 작은 화폐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들려주었다.
“가격은 스크롤이 보관된 함에 적혀 있을 거야.”
“알았어.”
아다르가 휙 사라졌다. 아닌 게 아니라,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자리에 없었다. 나는 근처에 쌓여 있는 상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마을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가만히 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니 오늘 점심도 산에서 내려오면서 씹어 먹은 사과 두 개가 전부였다. 저녁 식사는 아예 하지도 못했다. 곯은 배를 움켜쥐고 울상으로 기다리는 동안 아다르가 돌아왔다.
그가 베샤로 향하는 텔레포트 스크롤 두 장을 내게 건넸다. 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스크롤부터 찢었다.
‘내가 없어지면 알아서 쫓아오겠지.’
마법 스크롤의 좋은 점은 마나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스크롤에서 튀어나온 마법이라 종이를 누가 찢었는지 찾아내지 않는 이상 시전자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단점도 있었는데, 마법 스크롤을 만드는 데는 같은 종류의 마법을 사용할 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나가 소모되었다. 스크롤에 마나를 정착시키는 데 따로 마나가 든다나 뭐라나.
이 단점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다르가 아닌 스노아와 마을로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참 편했을 텐데…….’
아쉽게 생각하는 동안 멀리서 들리던 군중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왔다. 나는 기이한 부유감이 끝나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겁을 먹고 움츠러든 이전 마을의 분위기와 상반되는 대도시의 백색소음이 귀를 꽉 채웠다. 나는 호롱불을 켜고 음식을 파는 길거리 상인과, 웃음을 터트리며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수도와 가까운 도시여서 그런지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난한 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 시간대면 도시 외곽의 빈민촌에 숨어 있을 것이다.
죽음의 숲에서 제법 떨어진 도시라 병사는 없었다.
나는 베샤의 이오니 광장 중앙분수대 근처에 서 있었다. 환한 불빛이 쏟아져 나오는 건물과 거리 곳곳에 설치된 벽등이 휘황찬란해서 눈이 어지러웠다. 개방된 공간과 수많은 사람이 불편감을 줬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광장에서 가장 인적이 드물고 구석진 곳으로 걸어갔다.
“여기서 뭐해?”
잠시 뒤, 베샤에 도착한 아다르가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짙은 포도주 향이 물씬 풍겼다. 아다르 특유의 체취다.
‘향이 짙어지고 있어.’
예정보다 발정기의 시기가 앞당겨지고 있었다. 본래라면 다음 주여야 맞을 발정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건 결코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이 정도로 이성의 체취가 강하게 느껴지면 적어도 2, 3일 후에 시작될 가능성이 높았다.
‘죽음의 숲으로 돌아가는 것도 문제인데…….’
발정기까지 겹치면 최악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갑자기 정신적으로 몹시 피로해졌다.
“하아…….”
한숨을 내쉬자, 아다르가 손을 잡아끌었다.
“얼른 밥 먹고 쉬는 게 좋겠다. 여관은 식당도 겸하니까……. 저기 어때?”
아다르의 제안에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규모가 작아 초라해 보이지만, 외부 장식이 단정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다행히 식사 때가 지나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갖가지 요리를 시켰다.
배가 터지도록 입에 음식을 욱여넣은 뒤, 배를 통통 두드리며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쉴 요량으로 침대에 엎어졌다.
***
눈을 떴을 땐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일어났어?”
아다르가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그가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다르의 상체에 그어진 각종 흉악한 상처를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조각 같은 몸에 스크래치처럼 흠이 있었다.
“카카나?”
대답을 해야 하는데 성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말을 듣지 않는 몸뚱어리를 무슨 수로 움직이게 만들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응.”
한 박자 느린 대답에 아다르가 굵은 눈썹을 겹겹이 접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별안간 기척 없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침대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그쪽으로 기울었다. 내 몸도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머릿속에, 질척거리고 진득한 포도주 향이 풍성하게 퍼졌다. 알싸하고 몽롱한 체취.
‘얜 하필이면 체취도 이런 냄새여서…….’
안 그래도 정신 차리기 힘든데, 깊고 그윽한 레드와인의 향이 날 혼미하게 만들었다. 북슬북슬하게 일어난 잔머리를 뺨에서 치워낸 아다르가 손등으로 열을 쟀다. 방금 씻고 나온 탓에 그의 손은 적당히 뜨끈하고 촉촉했다.
아마 열이 조금 느껴질 것이다. 발정기가 가까워지면 수인족은 으레 체온이 높아지곤 한다. 특히 나는 무기력해지고 몸에 힘이 없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 아파?”
“음.”
“말해 봐.”
“그냥. 그뉵, 큼, 근육통이야.”
발음이 꼬부라진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대로 계속 퍼져 있을 수는 없었다. 어금니를 악물고 허벅지를 움직였다. 연체동물처럼 덜렁거리는 관절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켰다. 이것만 했는데도 약간 죽을 것 같은 기분이 엄습했다.
어제 열심히 뛰었던 여파가 발정기 전조증상이랑 겹치면서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피곤했다.
“그냥 근육통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다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약이라도 한 것 같잖아. 해롱해롱.”
“약?”
“마약 말이야.”
“해본 사람처럼 말하네.”
“해 봤으니까.”
어이가 없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 재미로.”
나는 내 상식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아다르가 이상한 건지 짧게 고민했다.
“범법 행위지만 뭐, 난 원래 뒷골목 사람이니까. 이건 됐고, 네 몸 상태나 말해 봐. 열이 조금 있는 것 같은데…….”
아다르가 괴상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나는 곤란하게 눈을 굴렸다. 별로 말해 주고 싶지 않았지만 이대로면 아다르가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기세였다.
“발정기.”
그는 내 말을 이해하는 데 3초 정도의 시간을 소모했다. 아다르가 깊게 심호흡하듯, 느린 숨을 쉬며 내 눈을 깊숙이 들여다봤다. 기색이 달라지니 그의 검은 눈자위가 더욱 새까맣게 보였다.
아다르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그 은근한 질문이, 낮게 떨리는 어조가 돌연 심장을 꽉 쥐어짜는 것 같아서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기이하게 미끄러지는 허스키한 음성을 내 몸뚱어리가 대관절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숨이 조금 가빠지려고 했다.
나는 저릿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안 돼. 진짜 이건 아니야. 정신 차려.’
“네가 원한다면 도와줄 수 있어.”
아다르가 답지 않게 상당히 신중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가 내게 고개를 가까이 숙이고 있는 터라 취하게 만드는 체취가 더욱 진하게 나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며 홀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전환해야 할 것 같았다.
뭘 어떻게 도와줄 거냐고, 애써 장난스럽게 되물으려는데 날 쳐다보는 아다르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그 짙은 시선에서 야릇한 분위기를 읽어낸 심장이 밑으로 쿵 떨어졌다.
입술이 딱 달라붙는다.
“응?”
아다르가 작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몸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나는 제멋대로 날뛰려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리고 최대한 멀쩡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이, 이틀 후가 본격적인 시작이야. 이건 전조증상이고.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예리한 눈으로 날 관찰하는 아다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가서 얼른 약초나 사자.”
그는 나를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로브의 모자를 눌러썼다. 나는 로브를 몸에 걸치며 그 몰래 작게 숨을 삼켰다.
‘잡아먹히는 줄 알았네.’
어째선지 위기감이 느껴져서, 빠른 걸음으로 여관을 나섰다. 차가운 공기를 맞자 정신이 들었다. 언제 그런 끈적한 분위기가 흘렀냐는 듯, 아다르의 기세도 평소와 똑같아졌다.
내심 안도하며, 다섯 남자의 생필품을 구매하러 거리 곳곳을 누볐다. 후에는 이번 나들이의 본래 목적인 약초 가게로 향했다.
약초상은 두 번째로 큰 상가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희귀한 약초는 그만큼 쓰임새가 일반적이지 않아서 자주 다룰 일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질릴 만큼 만져 보고 싶었다.
내가 손짓하자 약초상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맨 왼쪽에 진열된 상자를 가리켰다.
“여기부터.”
그리고 맨 오른쪽에 진열된 상자를 가리켰다.
“저기까지 열 묶음씩 주세요.”
“예?”
약초상은 당황한 것 같았다.
“괘, 괜찮으시겠습니까요? 이, 이것들은 전부 다루기 어려운 것들뿐인뎁쇼.”
“괜찮으니 줘요.”
나는 혹여 그가 의심할까 무거운 화폐주머니를 통째로 그에게 던졌다. 약초상이 날아오는 칼이라도 잡는 사람처럼 기겁하며 그것을 받았다.
“그거 다 줄게요. 어서 담아 줘요.”
“아, 알겠습니다요!”
나는 그가 그 많은 것들을 포댓자루 여러 개에 옮겨 담는 것을 흐뭇하게 구경했다. 아다르가 질린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눈을 부라리며 응수해 주자 이내 고개를 돌렸다.
모든 짐을 싸 들고 밖에 나왔을 때, 우리 손에는 약초 가게 하나를 통째로 턴 것 같은 양의 포댓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모두 마법배낭에 쑤셔 넣고 마차를 구하기 위해 도시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길목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지?’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줘? 제국에 도망치는 노예가 한둘도 아닌데 말이야.”
시끄러운 잡음 중에서도 선명하게 박혀 들어오는 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멈춰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지나치면 안 된다는 강렬한 직감이 주의를 잡아끌었다.
뭐에 홀린 듯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빈틈없이 서 있는 통에 뭘 보고 수군거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목을 위로 쭉 빼고 상체를 좌우로 흔들고 있으니, 마침 옹기종기 모여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거 빠져나갔다.
일시적으로 탁 트인 공간에 오크나무로 만든 오래된 목재 게시판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게시판을 살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 위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두툼한 종이가 새로 붙어 있었다. 황금빛이 번쩍거리는 황가의 인장이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다.
‘수배지?’
금전감각에 둔한 나조차 딸려 있는 0의 개수를 세고 눈을 비벼 다시 확인했다. 내 몇 년 치 생활비를 방불케 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적혀 있었다.
“자네, 소식 못 들었나?”
그때, 옆에 서 있던 행상인 차림의 남자가 일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
“저놈들이 도망치면서 제국의 병사와 마법사를 죽였다고 하는구먼.”
일행이 그의 등짝을 거세게 후려쳤다.
“예끼, 이 사람아! 벌써 노망이 왔나, 왜 이래! 한낱 노예가 무슨.”
“아니라니까, 글쎄! 듣자 하니 마나석까지 훔쳐 달아났다는데! 캬, 겁도 없지! 그게 하나에 얼마짜린데!”
‘마나석?’
나는 기겁을 하고 현상수배지를 살폈다. 급하게 그리느라 그림이 조금 어수선한 감이 있었지만, 꼼꼼하게 뜯어보니 확실히 내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나는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 쳤다.
“어서 마차를…….”
시간을 더 끌어 좋을 게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최대한 빨리 그를 데리고 자리를 뜨려는데, 돌연 아다르가 손을 뻗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쉿.”
아다르가 내 손을 낚아채고 인파 깊숙이 헤치고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