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Chapter 1. 다섯 용사들 (1/43)

Chapter 1. 다섯 용사들

나는 양이다. 그러니까, 양 계열의 수인족이다.

수인족은 저마다 고충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양 수인족은 특히 머리카락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가느다랗고 곱슬곱슬한 머리가 빽빽하게 자라서 관리하기 어려운 탓이다. 그렇다고 짧게 잘라버리면 머리가 중구난방으로 엉켜 돌이킬 수 없게 되므로, 아예 삭발을 하거나 단단히 묶어 고정시키는 수인족이 많았다.

나는 양 갈래로 땋아 길게 늘어뜨리는 방법을 택했다. 머리는 한 달에 한 번만 감지만 매일 정화수를 뿌려 노폐물을 없애고 있다.

왜 한 달에 한 번 감느냐고? 감은 직후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내 머리를 보면 아마 그 질문은 쏙 들어갈 거다.

그뿐이랴? 뿔도 관리를 해줘야 했다.

수인족마다 모양이 다르지만 내 건 뒤로 둥글게 말린 모양이라 기름 바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매일 솔로 뿔을 문질러 닦아주고 향기가 나는 기름을 발라줘야 했다.

오늘은 더 고약한 날이었다. 솜처럼 엉킨 머리가 도통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깨, 목, 팔뚝, 결리지 않는 곳이 없고 허리도 찌뿌둥했다.

이를 벅벅 갈면서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 점검을 했다. 하얀 피부에 진노랑의 눈망울을 가진 수인족이 비쳤다. 살굿빛이 도는 땋은 머리가 엉덩이까지 늘어져 있다. 이제 슬슬 무거워지고 있어서 조만간 잘라야 할 것 같다.

‘머리 감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언제 자르고 앉았담…….’

구시렁거리며 빨간색 목도리를 매고 펑퍼짐한 원피스 위에 두툼한 코트를 입었다. 밖은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뿔 구멍이 뚫려 있는 털모자를 조심스럽게 쓴 뒤 갈색 부츠를 신었다. 오늘은 겨울초를 캐러 가는 날이었다. 바닥을 기던 기분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나는 방싯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으악!”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닫아버렸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뭐지?”

심각한 표정으로 문을 노려봤다. 식은땀이 미끈하게 흐르며 입술이 말라왔다. 얕고 빠르게 뛰는 심장고동이 불쾌감을 고조시켰다. 이렇게 놀란 건 숲에서 몬스터를 봤을 때를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내가 잘못 봤나?’

나는 진지하게 우리 집 앞마당에 손님이 찾아올 가능성을 계산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잘못 본 게 분명했다.

우리 집 앞마당은 몬스터는 물론이고 숨이 붙어 있는 생명체라면 들어올 수 없도록 조치해 놨다. 이를테면, 한 모금만 숨을 들이켜도 치명적인 독초를 심어놨다든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했다.

‘그래,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다시 문을 열었다. 사람 비슷한 인영이 서 있었다.

보자마자 문을 닫으려 했으나,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굵고 커다란 손이 문이 닫히지 않도록 잡아챘던 것이다.

나는 바짝 얼어서 앞마당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인간을 쳐다보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 모두 사람이었다. 내가 수인족이라는 걸 알면 잡아서 노예로 갖다 팔아버릴.

수인족은 제국에서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취급을 받았다. 몸이 너무 떨려서 문고리를 잡은 손가락까지 덜덜거렸다.

제정신이었다면 그들이 모두 피가 튄 옷을 입고 있고, 그중 한 명은 뿔을 가진 수인족이며, 몰골이 당장 쓰러질 것처럼 초췌하다는 걸 알아챘겠지만 나는 이미 그런 것을 볼 여유 따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생판 모르는 사람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않은 지 몇 년은 됐다.

“저기.”

“헉…….”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성이 한 걸음 다가왔다.

덩치가 곰처럼 크고 뻣뻣한 황토색 머리카락을 짤막하게 기른 남자다. 왼쪽 뺨에 흉악해 보이는 짐승의 발톱자국이 나 있었다. 오래된 흉터인 듯 하얗게 도드라져 있었다.

뼈대는 어찌나 굵직한지 손에 한 대 맞기라도 하면 살이 터지거나 뜯겨 나갈 것 같았다. 탄탄한 근육 탓에 옷이 팽팽했다. 뒷골목깨나 들쑤시고 다녔던 사람 특유의 난폭함이 느껴졌다. 그는 습관적으로 전신에 무거운 기백을 두르고 있었다.

나는 남자의 주황색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가, 불에 덴 사람처럼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저주파 섞인 호랑이 특유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뒷목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가까이 오지 마.”

벼랑 끝에 몰린 초식동물처럼―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한껏 몸을 부풀리며 경고했다. 머릿속으로는 저들을 어떻게 죽일지 재빨리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긴장하지 않으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일단 그들은 가장 치명적인 건 피했지만, 혹시 몰라서 집 앞 화단에 심어놓았던 독초에 중독된 상태였다. 보라색 기운이 도는 눈자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방치하면 어차피 죽는다.

문제는 잠긴 문을 부수고 집으로 침입하면 어떻게 하냐는 거다.

‘바늘로 찔러 죽이자.’

나는 침술에 능통했다. 사람이든 수인족이든 혈자리를 모두 꿰고 있었다. 침통에 보관 중인 장바늘로 요혈자리를 푹 찌르면 그대로 사망이다.

그래, 희망이 있어.

겁먹지 마.

최대한 험상궂게 보이도록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그를 노려봤다. 나는 순한 인상이지만 한 번 화난 표정을 지으면 제법 인성이 파탄 나 보이는 신기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여태 이 사나운 기세로 어렵지 않게 기선제압을 해왔다.

그러나 남자는 하나도 겁을 먹지 않았다. 나는 그 반응에 되레 기가 눌린 것을 숨기고 그를 윽박질렀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목적을 말하지 않으면 죽이겠어!”

“할릭, 내가 얘기할게.”

뒤에 서 있던 늘씬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창끝 같은 시선으로 그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자 블루사파이어를 연상시키는 순수한 파란색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마주친 남자의 눈은 마치 투명한 물 같아서 무슨 색인지 가늠이 안 되었다. 옅은 남색을 띠고 있는 것도 같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눈썹은 가는 붓으로 그린 것처럼 길고 유려했다. 머리와 마찬가지로 바다 빛깔을 띤 속눈썹이 섬세하고 풍성했다. 그래서 색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눈과 기이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창백한 낯빛 때문인지 그가 가지고 있는 색감이라곤 방금 짠 물감처럼 선명한 파란색뿐인 것처럼 느껴졌다.

깊은 바다를 닮은 냉미남.

인어 같은 사람이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품위 있는 어투를 사용하며 물었다. 꼿꼿하게 편 허리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귀족인가?’

뜨거운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거칠었던 구릿빛 피부의 남자와는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나는 긴장이 풀리는 걸 경계하며 그를 꼼꼼하게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어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딱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모르겠는데요.”

“그러면, 이 약병은 기억하십니까?”

남자가 다 해져 실밥이 풀린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초록색 코르크 마개가 끼워져 있고 가느다란 원기둥 모양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살피다가, 깜짝 놀라 달려들었다. 장인에게 특별히 주문제작한 내 휴대용 약병이었다. 이 귀한 게 왜 그의 손에 들려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먹이를 낚아채듯 약병을 가로채 품으로 가져온 나는 돌연 싸한 기분을 느끼고 굳었다. 입술을 씰룩이며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다섯 쌍의 눈이 보였다.

‘이런 미친.’

약초에 관한 일이라면 눈을 까뒤집으며 달려들고 보는, 이 빌어먹을 습관이 언젠가 날 죽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제 발로 적군 한가운데에 뛰쳐 들어왔으니 회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리도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하지 마세요.”

인어를 닮은 남자가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을 잡아주었다. 서늘한 체온과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물뱀 같은 감촉이다.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저희는 당신을 해치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럴 처지도 안 되고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여기가 어딘가. 이곳은 죽음의 숲이다. 사람이라곤 없는 곳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무슨 이유로?

남자가 작게 미소 지었다. 차가운 인상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낸 미소라기엔 놀라울 정도로 따뜻한 미소였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혹시, 디카타 산맥을 아시나요?”

“디카타……?”

나는 먼 과거의 기억 언저리를 더듬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네. 당신은 5년 전, 디카타 산맥을 헤매다 어떤 좁은 동굴로 들어오신 적이 있습니다.”

디카타 산맥이면 희귀 약초를 구하기 위해 간혹 들르던 곳이었다. 사람이 좀처럼 출입하지 않는 마산인데, 그곳을 갑자기 왜 언급하는 걸까.

“그 동굴과 이어져 있던 지하시설을 기억하시나요? 거기서 절 만났습니다.”

나는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린지 잠시 고민했다.

“난 당신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그럴 겁니다. 그때 제 몰골이 말이 아니었던지라.”

“디카타의 지하시설……. 헉!”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에 헛숨을 들이켰다. 거지 같았던 5년 전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닫고 숨을 멈췄다. 일시에 다량의 피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 그때 갇혀 있었던 사람?”

나는 어마어마했던 제국의 황실 마법사와, 보초병들과, 수많은 노예들과, 누가 봐도 제국이 뒷배인 듯했던 비밀시설을 떠올렸다. 이 남잔 그 모든 비밀시설의 원인이자 중심에 있었던 자다.

도망치면 제국이 지옥 끝까지 쫓아올 것 같은, 그런 무시무시한 감옥에 갇혀 있던 남자. 그런 그가 눈앞에 있다. 내가 준 빈 약병을 들고.

뒷골이 오싹해졌다.

“네, 맞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비슷한 사정으로 잡혀 있었던 자들이에요.”

“뭐라고요?”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당신 한 명만으로 이미 감당이 안 될 것 같은데, 뭐?’

“저희를 도…….”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나는 쌩하니 집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이중 삼중으로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심장은 아까와 비교도 안 되게 뛰고 있었다.

마른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피가 머리로 몰리며 골이 띵하게 아파왔다.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담이 오기 직전인 근육을 풀어주었다.

‘망할! 내가 디카타 산맥에 발길을 끊은 이유가 뭔데!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와? 말이 돼?’

나는 ‘그 일’을 겪은 후로 찝찝한 나머지 기억도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나름 성공적으로 잘 해내고 있었다. 남자가 날 찾아와 기억을 들쑤시기 전까진 말이다.

‘이상하긴 했어. 영 범상치가 않았다고. 그래서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고 한 거잖아. 그런데…….’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충격을 받은 의식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의 그날로 날아갔다.

5년 전.

그날은 유난히 운이 나쁜 날이었다. 그토록 찾길 바랐던 약초는 코빼기도 구경하지 못했고,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몬스터와 마주쳤다.

그러다 양을 만났다.

양 수인족 말고, 진짜 양 말이다.

몬스터가 득시글거리는 마산에 초식동물 ‘양’이 산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 동안 디가타를 누비면서 발견한 적 또한 없었다. 그런데 ‘양’이 짙푸른 숲에 홀로 서 있었다.

하얀 솜뭉텅이처럼, 덩그러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양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웬 양이야……?”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가, 곧 묘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양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선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면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내가 멈추면 저도 멈춰서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나는 홀린 듯 그 양을 쫓았다. 저건 예사 양이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양이 향한 곳은 내 아담한 몸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동굴이었다. 입구는 좁았으나 내부는 넓었다. 양은 동굴 깊숙한 곳으로 계속 들어가고 있었다.

슬슬 무서워져서 앞으로 열 걸음만 더 들어가면 돌아가겠다고 막 마음먹었을 때였다. 발이 아래로 빠졌다. 동시에 몸이 밑으로 훅 꺼졌다.

기겁하며 고개를 숙였던 것 같다. 지독한 어둠에 잘 보이지 않았던 가파른 경사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럼 저 양은 뭐야?’

떨어지는 순간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양은 허공에 떠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공포 소설이 따로 없는 경험이었다.

“아아아아악!”

그렇게 끝없이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그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나는 한없이 굴러 떨어진 후 어떤 바위에 머리를 대차게 처박고 이상한 공간으로 뚝 떨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연신 증기를 뿜는 이상한 시설로 가득 찬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진 쥐구멍 같은 동굴과 이 지하시설이 우연히 이어져 있었다는 황당한 추측뿐이었다. 그것도 알면 좋을 게 하등 없을 것 같은, 수상한 지하시설로 말이다.

남자는 그 지하시설에 갇혀 있던 사람이었다.

기억이 난다. 강렬한 사건이었다.

그는 사지가 포박당한 채로, 거대한 기계에 둘러싸여 있었다. 기계가 하도 많아 말이 지하시설이지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몰골이 심각해서 머리가 파란색인 줄은 몰랐지만.

피해자라는 건 목도하자마자 알았다.

“이 정도의 마나석을 하루 만에 만들었다고?”

“특이체질이래. 마나가 끊임없이 나온다나 뭐라나. 마나석 비싼 거 알지? 마나 뽑아서 돌에 넣고 판다나 봐. 황금알을 낳는 거위지 뭐.”

결계 밖의 노예들은 내가 굴러들어온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어댔다. 나는 그제야 내가 있는 곳에 결계가 쳐져 있고, 결계를 유지하는 마법진 중 하나를 엉덩이로 깔고 앉아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일방향성 결계였다. 보자마자 감이 왔다.

삼엄한 경비와 보안.

마법진.

언뜻 보이는 황실 소속 보초병의 갑주.

제국이랑 관련이 있는 비밀시설.

‘들키면 죽는다.’

코흘리개 어린애라도 이 정도는 알 것이다.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 그 대가는 목숨으로 치르게 될 터였다.

결계 중 하나가 망가졌으니, 조만간 마법사가 온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누가 오기 전에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야 했다. 내가 굴러떨어진 동굴의 구멍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거기로 도망가서 바위로 구멍을 도로 막아놓으면 티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꼭 누가 인위적으로 파 놓은 것 같은 쥐구멍이었다.

‘저 사람은 어쩌지?’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쌩하니 지나치자니 약제사로서의 사명감이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래서 나는 딱, 분수에 넘치지 않을 정도의 짓만 하고 왔다. 언젠가 도움이 될까 싶어 그의 바짓단에 별거 아닌 약물을 숨겨준 것이다.

마나혈이 비정상적으로 엉켜 있길래, 마나를 축출당할 때 덜 고통스러우라고 그걸 도와주는 약병을 놓고 왔다.

한참 도망치고 나서야, 사지가 포박되어 있어서 그가 약을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아니, 가만있어 봐.’

생각해보니 열이 뻗쳤다.

내 불안과 두려움, 개고생이 담긴 약을 먹고 도망칠 수 있었던 거면 다른 나라로 튀든가 하지 왜 나한테 온단 말인가?

왜 우리 집 앞마당으로 오냔 말이다.

그것도 ‘죽음의 숲’ 한가운데에 있는 위험하기 짝이 없고 수상한 집으로, 도대체 왜?

그들이 내 집에 있다는 걸 제국이 알면 난 죽은 목숨이었다.

나는 그 일을 겪은 후 찝찝해서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이곳에 왔다는 건, 지하시설에서 일하고 있던 제국의 보초병이고 뭐고 싹 쓸어버린 뒤 여기로 튀었다는 뜻이 된다.

“아아아악!”

화가 나서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미친 거 아냐? 여길 왜 와?!”

특단의 조치로 수면제를 먹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으나 그들은 여전히 앞마당에 서 있었다.

“아아아, 이러지 마. 제발 가버리라고.”

나는 다리를 끌어안고 소파에 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앞으로 이틀이면 저들은 독초의 중독 증세로 죽는다. 후회하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설상가상 바깥은 오랜만의 눈 폭풍으로 바람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불고 있었다. 그들은 뺨을 쳐대는 칼바람에도 꿈쩍하지 않은 채, 마치 나무처럼 앞마당에 뿌리를 내리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한숨도 자지 않았을 텐데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나는 일반 사람들도 저런가 생각해봤다가 고개를 저었다. 신체능력이 일반인보다 뛰어난 걸로 알려져 있는 수인족도 저러는 건 못 봤다.

하기야, 그 삼엄한 보안을 무너트리고 ‘죽음의 숲’ 가운데까지 온 자들이다. 평범한 인물일 리 없었다.

나는 초조하게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위가 쓰리고 입맛이 없어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속에서는 나 자신과 끊임없는 말싸움이 벌어졌다.

‘그러게 약을 왜 줬어!’

‘나는 그거 마셨다고 탈출할 줄 몰랐지! 그냥 고통만 줄여주려고 한 거라고!’

‘하지만 쟤들은 네가 준 약을 마시고 여기까지 왔잖아!’

‘단언컨대 그 정도의 효능을 가진 약은 아니었다니까? 수중에 그렇게 좋은 약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어!’

정말로 그랬다. 내가 준 약은 효능이 큰 약이 아니다. 그저 엉망으로 엉켜 있는 남자의 마나혈을 ‘일시적으로 완화해 주는’ 약을 줬을 뿐이었다.

‘일시적’이라는 건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다. 그 시간 안에 모두를 죽이고 여기까지 도망 온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애초에 사지가 포박된 상태인데 약은 어떻게 마셨으며, 내 거처는 무슨 수로 알아냈고, 독초의 숲으로도 알려진 죽음의 숲 가운데까지 어떻게 살아서 들어왔단 말인가. 풀을 잘못 밟거나, 꽃가루를 들이켜는 것만으로 중독되어서 죽기 일쑤인 곳이었다.

그때쯤 되어서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방관으로 저들이 죽기라도 하면 편하게 발 뻗고 자긴 글렀다는 사실이다. 내 성격상 그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다. 나는 죽을상을 하고 거실 소파에 놓여 있는 양 인형을 퍽퍽 때렸다.

‘젠장, 젠장, 젠장!’

한참을 때리고 나자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 뒤에 찾아오는 것은 지독한 우울과 무기력이었다. 분노가 빠져나간 자리가 휑하니 시렸다.

반쯤 체념한 얼굴로 자물쇠를 풀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추위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들이 일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문을 한 번도 안 두드렸네. 내가 열어주길 기다린 건가.’

최소한의 양심은 있나보다고 생각하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일단 들어와요…….”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안내했다. 눈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안으로 짓쳐들어왔다. 옆으로 비켜서자, 다섯 명의 장정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홧홧했던 거실의 온도가 바닥에 짙게 깔리는 냉기로 금세 싸늘해졌다.

나는 벽난로에 마른장작을 몇 개 집어던졌다. 불길이 화르륵 치솟으며 새빨간 불똥이 튀었다. 세상의 종말을 지켜보듯 그것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소파로 돌아와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그리고 멀뚱멀뚱 서 있는 다섯 명의 남자들에게 소파를 턱짓했다.

“앉아요.”

내 언짢은 기색을 느낀 그들이 엉거주춤하며 자리에 앉았다. 두 명은 자리가 부족해서 서 있었다. 딱히 자리를 새로 만들어주거나 내 옆자리에 앉으라고 첨언하진 않았다. 서 있으라지, 뭐.

나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우선, 이거부터 묻죠. 왜 우리 집으로 왔어요?”

“당신이 준 약 때문입니다.”

바다를 닮은 남자가 대답했다. 나는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게 뭐요?”

그러자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자각이 없었군.”

너무 작은 음성이라 잘 안 들렸다. 인상을 찡그리며 밑으로 처진 양의 귀를 손으로 잡아 세웠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니에요. 잘 모르실 테니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한 번 마시면 돌이킬 수 없다고 알려진 독약을 복용했습니다.”

“그 마나 엉킨 거 말하는 거예요?”

마나 이야기가 나오자 다섯 명의 남자들이 동시에 나를 주시했다.

‘왜 저렇게 쳐다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눈치를 살폈다. 나는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고, 말투에 솟아난 가시를 조금 죽이며 말을 이었다.

“좀, 큼, 심각하게 엉켜 있긴 하던데.”

“예, 맞습니다. 그래서 제국이 보초병과 마법사를 조금 배치한 것만으로 방심을 한 거예요. 저희가 도저히 반항을 하거나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조금 배치한 것만으로?”

조금 배치한 거라니 무슨 소리란 말인가.

‘대놓고 요새였구만.’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을 짓자 그가 말을 받았다.

“네. 저희는, 조금…….”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가늠하는 사람처럼 눈을 위로 굴린 남자가 한참 후에 이어 말했다.

“조금…… 강하거든요.”

“아, 예.”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뭐가 저리 자신만만한지 우습기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딱히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까처럼 진지하고 고요한 얼굴로, 뭘 모르는 사람을 지켜보듯 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위로 비뚜름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당신이 준 약은 그걸 해냈죠. 제국 소속의 모든 황실 치료사들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열을 올렸던 그 일을 말이에요. 마나를 일시적이나마 풀어…….”

“응? 아닌데요.”

나는 손을 절레절레 휘저으며 말을 잘랐다.

“푼 거 아니에요. 독기를 조금 눌러준 거예요.”

“예?”

“그거 별 거 아닌 약이라고요.”

약 이야기가 나오자 내 목소리가 서서히 높아졌다.

남자는 자신 있게 이어지는 내 말을 진중하게 경청하는 태도로 상체를 기울였다. 나는 더 신나서 떠들었다. 약초 얘기만 나오면 흥분하는 성격 탓에 더했다.

“누가 보면 엄청난 약인 줄 알겠네요. 마나 꼬인 거요, 그거 그냥 해독만으론 안 돼요.”

그 정도는 남자도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약은 1년 정도 복용해야 되고요, 침도 계속 맞아야 해요. 침술 알아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마나혈이라고 마나가 흐르는 길이 있는데, 거기를 바늘로 찔러주는 걸 침술이라고 해요. 그러면 막혔던 길이 뚫리거든요. 침은, 아마, 2년? 3년? 그 정도 맞으면 나을걸요? 봐요, 엄청 복잡하죠? 제가 준 약은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내 긴 설명을 들은 남자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기색이 이상했다. 앉아 있는 자들도, 서 있는 자들도 하나같이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저걸 어떻게 조리해 먹을까 구상하는 요리사로 오해할 정도로 투지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나는 괜스레 겁을 집어먹고 자라목을 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았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태풍의 눈에 갇힌 기분이다.

“왜, 왜, 왜 그렇게 봐요?”

“그 말씀은…….”

“치료할 수 있다는 건가? 이 답도 없는 몸을?”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인어를 닮은 남자의 말을 가로막으며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찌나 기척이 없었는지 그곳에 서 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가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내게 걸어왔다. 재를 연상시키는 회색 머리카락과 검은색 눈을 가진 남자다. 먹으로 그린 수묵담채화처럼 외양이 담백하고 품위 있는 데 반해 말투는 거칠고 불량배의 느낌이 난다.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잘 벼린 칼을 품고 있는 듯 날카로웠다.

검붉은 체리빛 입술이 둥글게 호선을 그리고 있어 화가 난 건지 아니면 호의를 품고 있는지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고 있자면 자동으로 아리송한 표정이 지어졌다.

‘대체 뭐하는 인간이지?’

나는 남자의 군더더기 없는 행동거지를 살폈다. 엄격한 훈련을 받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구릿빛 피부의 남자처럼 근육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다. 호리호리한 몸이 묵직한 무게감을 가지고, 그러나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표범이나 퓨마처럼.

소리 없이 다가온 남자가 내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말, 치료할 수 있다고?”

“그만, 아다르.”

인어를 닮은 남자가 차분한 어조로 그를 말리자, 내게 다가온 남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설득이 안 되면 어떻게 하려고? 물러서시게?”

“아다르.”

“알았어, 그만 하면 되잖아. 내가 언제 협박한댔어?”

‘설마 협박할 생각이었나?’

나는 몸을 최대한 소파에 파묻으며 그와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리려 애썼다. 아다르가 그런 나를 곁눈질로 살펴보더니 눈가를 찡그렸다.

“네가 그러니까 아가씨가 더 겁을 먹잖아, 스노아.”

인어를 닮은 남자, 스노아가 피곤한 기색으로 바다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죄송해요, 아가씨.”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요.”

스노아가 새삼스러운 부분을 지적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저는 스노아 칼리시스라고 해요. 편하게 스노아라고 불러주세요. 이름을 여쭤도 될까요?”

“다른 사람들 먼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차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가 아다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쪽은 아다르 아로아. 그는 성으로 불리는 걸 싫어하니, 아다르라 부르시면 돼요.”

표범 같은 남자, 회색 머리의 아다르가 고개를 까딱 숙였다.

“황토색 머리카락에 덩치가 큰 남자는 할릭 갈로프사.”

“아깐 겁준 것 같아서 미안. 할릭이라 불러.”

맨 처음 문이 닫히지 않도록 막았던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방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의 밝은 표정이 왼뺨에 난 험상궂은 흉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색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금발 머리의 남자는 첼러스 밀라다스.”

“만나서 반갑습니다. 첼러스라 부르셔도 좋습니다.”

환한 백금발을 가진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푸른 머리의 스노아가 귀족인지 아닌지 헷갈린다면, 이쪽은 완벽하게 귀족이다.

무뚝뚝한 표정과 예법이 완벽하게 스며들어 있는 행동, 흔들림 없이 우직한 눈빛, 말끔한 중저음의 목소리에서 빠듯한 교육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는 할릭보다는 작지만 아다르, 스노아보다는 큰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선한 호수색 눈망울을 천천히 깜박인 첼러스가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아까 서 있던 자세 그대로 섰다. 그러자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하는 태산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너무 무거워서 아다르와는 반대로 존재감이 뚜렷했다.

‘하늘에서 갓 강림한 천사처럼 생겼는데 어떻게 저렇게 위협적이지?’

나는 깊은 의문을 느끼며 마지막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남자들 무리에 수인족이 껴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그야말로 눈알이 빠지도록 놀라서 입을 떡하니 벌렸다.

“마지막으로, 뿔이 난 자는 아르모어 다오르입니다.”

나는 남자의 뿔을 바라보며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크기의 뿔이 마치 나뭇가지처럼 복잡한 모양으로 뻗어있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저걸 지금 발견했나 싶었다. 밖에 서 있을 때는 전경에 있는 나무라고 착각한 듯했다.

‘관리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대신 그는 찰랑찰랑한 검은색 직모를 가지고 있었다. 나처럼 빗느라 개고생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눈망울은 진한 핏빛이어서 계속 보고 있으면 어딘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수인족에게 기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고개를 까닥였다. 남자는 내게 고개 숙이거나 따로 인사하는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러나 살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지된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핏빛 눈망울이 천천히 가늘어지고, 입이 아주 희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 모습이 과거의 사람을 보고 있는 것처럼 아스라이 멀게 느껴졌다.

인간 귀족과는 다른 느낌이다.

게다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몸에 휘감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고귀한 피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어떤 수인족이지?’

궁금함을 억누르며 다양한 얼굴들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인어 같은 스노아, 표범 같은 아다르, 호랑이 같은 할릭, 천사 같은 첼러스, 수인족 아르모어. 사람이 다섯이나 되는지라 외우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았다.

‘부대끼다 보면 외워지겠지 뭐.’

나는 당장 외우는 것을 포기하고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은 카카나 페아예요. 양 수인족이고요. 카카나라고 부르면 돼요.”

“양? 그래서 머리가 그렇게 귀여웠구나.”

아다르가 날씨 얘기를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었다. 나는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다르가 아,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이거 혹시 실례인가? 땋은 머리가 복슬복슬하길래.”

“딱히 실례는 아닌데, 보통 초면에는 말을 삼가지 않아요?”

“나는 보통이 아니라.”

“아, 네.”

뭐하는 인간이지. 차게 식은 목소리로 대답하자니, 스노아가 몸을 앞으로 빼 앉으며 본론을 꺼냈다.

“카카나 씨. 괜찮으시다면 저희를 치료해주시겠습니까?”

결국 올 것이 왔다. 나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한숨 소리를 들은 아다르가 나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이상하게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뭔가 잘못 말하면 큰일 날 것 같은 분위긴데…….’

아다르는 목이 뎅겅 날아갈 것 같은 살기가 몸에 배어 있어서 그런지, 웃어도 순수한 의도로 와 닿지가 않았다.

할릭이 숨 막히는 기백을 몸에 두르고 있다면, 그는 날카로워서 베일 것 같은 기운을 휘감고 있었다. 하여튼 여러 이유로 얽히고 싶지 않은 작자들이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이 중요한 대화가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치료를 해주는 건 상관없었다. 문제는 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제국이랑 얽혀 있는데. 미치겠네, 진짜.’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부디.”

스노아가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이 그냥 평범한 노예였으면 거리낌 없이 도왔을 거예요. 그 마나 엉킨 거요, 황실 치료사들이 엄살을 좀 부린 것 같은데 귀찮을 뿐이지 어려운 일은 아니거든요.”

그들이 기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근데 당신들은 누가 봐도 황실이 관리하는 곳에 비밀리에 수용되어 있었잖아요.”

지하시설의 규모를 떠올린 나는 잠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심지어 다 죽이고 여기까지 도망쳐 온 거 아니에요? 그거 저보고 죽으라는 소리예요. 알죠?”

“지켜드리겠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첼러스가 진중하게 말을 막았다.

저 천사 같은 얼굴로 잘도 말한다. 나는 콧방귀를 뀌고 싶은 걸 간신히 눌러 참고 말을 받았다.

“아, 네. 첼러스 씨. 제국으로부터 절 지켜주시겠다고요?”

“예.”

“다시 여쭤볼게요. 잘 들으세요. 제국으로부터, 그러니까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와 귀족과 황실로부터 절 지키겠다고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가 깊은 호수빛 눈망울로 나를 지긋이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엉킨 마나를 풀 수 있다면, 아주 쉬운 일이 될 겁니다.”

나는 도저히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머리가 어떻게 되셨나요?”

“저는 소드마스터입니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방금 뭐라고요?”

내가 귀를 의심하는 얼굴을 하자 첼러스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시원하게 트인 호수빛 눈매가 부드러운 반달을 그린다. 그 광경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워서 황당했던 심정이 날아갔다. 나는 만개하는 꽃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넋을 놓았다.

내가 잠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틈을 타 그가 와르르 말을 쏟아냈다.

“스노아 칼리시스는 대마법사입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선 그가 가장 강한 마법사일 겁니다. 마탑의 현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 말에 이성이 황급히 되돌아왔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네? 아니, 잠깐만요.”

“아다르 아로아. 그는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범죄를 추적해 숨통을 끊어놓는 청부살인업체 ‘여명’의 두목을 맡았던 자입니다.”

청부살인업체?

휙 고개를 돌려 아다르를 쳐다보자 그가 찡긋 윙크했다. 전신으로 소름이 돋았다.

“뒷공작과 암살에 관해선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죠. 한때는 어떤 흑사회도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자, 잠깐만요.”

“할릭 갈로프사. 그는 바다의 용병왕입니다. 지금쯤 전설 정도로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겠군요.”

“……바다의 용병왕? 음유시인의 노래에 등장하는……?”

“그리고 아르모어 다오르. 그는 동양의 마지막 여의주의 주인이자 용 수인족의 왕입니다. 여의주를 되찾을 수 있다면…….”

“잠깐! 잠깐잠깐잠깐!”

나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집 안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첼러스가 침착하게 입을 닫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그의 말간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자기를 소드마스터라고 소개한 것이 메아리처럼 머리에서 울리고 있었다.

‘소드마스터?’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게 어디 쉽게 뱉을 수 있는 칭호인가.

이제까지 단 한 명만 올랐다는, 검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부여되는 칭호가 바로 소드마스터다. 마나를 제 몸처럼 다루면서, 검질 한 번이면 산도 가르고 바다도 가른다는 존재. 적군을 홀몸으로 상대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존재.

근데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대륙에 단 한 명뿐인 바로 그 소드마스터라고?

그런 사람이 무력하게 잡혀서 마나나 뽑히고 있었다고?

갑자기 웃음이 터져버렸다. 도저히 참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소드마스터면 손에 이백 킬로그램짜리 수갑이 달려 있어도 맨손으로 으깰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무리 숲에 틀어박힌 촌구석 양 수인족이라지만 순진한 애를 속여먹더라도 좀 성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허접한 구라를 대체 누가 믿는단 말인가? 당최 믿을 수 있는 말을 해야 듣는 척이라도 하지.

“그 말을 지금 저보고 믿으라고요? 농담이었다면 아주 성공적이네요. 이렇게 웃은 거 오랜만이거든요.”

웃음을 간신히 갈무리 지은 뒤, 열이 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많이 봐줘서 첼러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누가 믿을 수 있겠어요? 그렇게 강한 사람이 감옥에 얌전히 잡혀 있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지나친 무력은 독이 되지.”

여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용 수인족, 아르모어가 돌연 이야기했다. 재미없고 지루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처럼 지독한 권태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귀를 사로잡는 어투여서,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의 핏빛 눈망울이 진득하게 날 살폈다.

“제국은 천박하고 탐욕스러워서 권력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했지. 그들에게 우리처럼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자들은 눈엣가시였다.”

아르모어가 소파 팔걸이에 비스듬하게 기대앉으며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다.

“제국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마나를 고도로 다룰 줄 아는 자들이라는 거였지. 그 말은, 마나를 막으면 우리를 인간의 범주로 끌어내릴 수 있다는 뜻이 된다.”

“…….”

“그래서 제국은 당시 천재라 불리던 인력을 동원해 치밀한 계획을 짜고, 그걸 실행에 옮겼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게 독으로 몸을 망가트려버린 거다. 첼러스, 스노아, 할릭, 아다르. 이들은 한때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용사들이다. 여느 전설이나 신화가 그렇듯이 이름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지. 제국이 노린 것도 그거였다.”

나는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괴상하게 얼굴을 구겼다.

“용사들은 180년 전 차원전쟁 때 활약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기록되어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차원전쟁!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나조차 알고 있는 유명한 전쟁이다. 나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이어지는 아르모어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의 힘에 겁먹은 제국이 나라에 충성하는 용사의 약점을 파고들어 독약을 먹이고 지하 감옥에 가둔 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2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가 숨을 거두자 용사를 향한 공포도 서서히 잊혀 갔다. 안락하고 평화로운 시대를 영위한 세대만이 남았지. 차원전쟁은 머나먼 옛이야기가 된 거다.”

그가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달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용사의 활약으로 가장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제국 귀족의 부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고, 우매한 황제는 귀족의 사치로 돈이 부족해지자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몸에 쌓인 마나로 거의 영생이나 다름없는 삶을 사는 쓸모없는, 그러나 죽여버리기엔 아까운 자들을 대상으로 평생 돈을 뽑아낼 수 있는 비열한 묘안이었다.”

나는 불현듯, 디카타의 지하시설에서 들었던 노예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특이체질.

마나가 끊임없이 나오는 인간.

용사.

“간단한 건 아니었어. 조건이 까다로웠거든.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하고, 한 번에 큰돈을 벌 수 있어야 했지. 그리고 생각해낸 거다. 우리들을 이용해서 더 큰 돈을 쥘 수 있는 일을.”

“그게 마나석이었다는 건가요?”

“잘 아는 군.”

아르모어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황제의 묘안은 성공적이었지. 우리는 마나의 제4자각을 넘어선 초월자들이다. 숨만 쉬어도 마나를 빨아들이지. 몸에 보유한 마나량 때문에 오래 살고, 마나가 빠져나가도 금방 채워지니 금광이나 다이아광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마나가 꼬여 있어 초월적인 힘을 내지 못하는 일반 인간의 손발을 구속해 지하감옥에 가두고, 병사와 마법사로 감시하며, 다른 독까지 먹여 매주 중화제를 먹지 않으면 죽는 몸으로 만들어 놨다. 그러니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거야. 그래……. 제국은 용사가 어떤 자들인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쯤 발칵 뒤집혔겠지.”

아르모어 다오르가 아주 미개한 것을 보았을 때 떠오르는 경멸을 눈에 담았다.

그 업신여기는 눈빛은 금방 사라지고 다시 평온하게 돌아왔지만, 나는 아르모어의 숨겨진 표정을 잠깐 발견한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농담이죠?”

다섯 명의 남자들이 모두 침묵했다.

그들의 고요한 정적이 어떤 대답보다도 명백한 진실이 되어 심장을 콱 틀어쥐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주저앉았다. 정보는 가득 들어왔는데,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지켜드릴게요, 카카나. 저희를 도와주시겠어요?”

스노아가 간절한 눈으로 호소했다.

“저희가 다시 마나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당신만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나는 가늘게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용사라고? 차원전쟁을 종식시킨 바로 그? 근데 사실은 제국에게 배신을 당해 갇혀 있었고…….’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다 필요 없어. 단순하게 생각하자. 그들은 환자야. 좀 까다로운 환자.’

사실을 고하자면, 그들이 계속 도움을 요청하면 언젠가 승낙하고 말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오갈 데가 없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부터 마음이 약해진 상태였다.

마침 그 ‘양’도 수상하고, 이상한 일에 휘말린 것 같으니 뒤를 캐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죽음의 숲은 설사 제국이라 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었다. 그러니 치료만 해주고 얼른 돌려보내면 괜찮을 지도 몰랐다.

머리 한구석으로는 이미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차피 정체를 숨기고 숲에 틀어박혀 살던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비슷하게 살면 별 문제가 없을 터였다.

나는 약제사이자 침술가다. 직접적으로 부탁하면, 피할 방도가 없는 의무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건이 클 줄은 몰랐다.

도저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약초에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

그때, 아다르가 은밀하게 말을 건넸다.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처럼.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가지고 싶은 약초도 많겠네?”

두말하면 잔소리다.

‘약초…….’

생각만 해도 몽롱해지는 단어에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가, 헉 숨을 들이켜며 정신을 차렸다.

‘안 돼. 정신 차려야 해.’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약초는 내 삶의 의미와 목표를 넘어서서, 내 삶 그 자체가 된지 오래였다. 약초만 보고 살아왔고, 약초가 뿜는 희망의 빛으로만 숨을 쉬었다. 약초가 없었다면 지난 과거의 늪에 빠져 악몽만 꾸다 죽어버렸을 거다. 약초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다.

내 반짝이는 눈을 본 아다르가 샐쭉하게 웃었다.

“뒷골목에선 꽤 다양한 물건들이 드나들거든. 위험하고 희귀한 것부터 흔한 것까지. 자리를 잡으면, 내가 온갖 진귀한 약초를 무상으로 구해다주지. 어때?”

“지, 진귀한 야, 약초를? 정말로?”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몸이지.”

아다르가 어딘가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생각은 착실하게 통제 불능 상태로 돌입했다.

‘약초, 약초……. 진귀한……. 죽음의 숲에서도 구할 수 없는…….’

여태 구하지 못했던 진귀한 약초의 리스트가 좌르륵 뽑혔다. 절로 군침이 돌았다.

“카카나 씨께선 약초를 구하기 위해 주기적인 산행을 하시는 걸로 압니다.”

첼러스가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넸다.

무슨 약초를 부탁할지 손가락까지 굽히며 고르고 있었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첼러스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맑아지는 선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호위를 해드리겠습니다. 몬스터나 야생짐승이 위협이 되지 않게끔.”

“오, 좋아. 나도 거들게. 자리를 잡으면, 용병들을 무료로 고용할 수 있도록 해주지.”

할릭이 호쾌하게 웃으며 거들었다.

“무상으로 마도구를 지원해드릴게요. 저는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거든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스노아까지 물빛 눈망울에 웃음을 머금으며 이야기했다. 하나같이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는데, 첼러스가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카카나 씨가 싫어하신다면 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갚을 다른 방법을 알아보는 건 저희의 몫입니다. 평생 봉사해도 다 갚지 못할 빚이겠지요.”

“사, 상관은 없지만.”

“그래, 카카나. 원하는 건 모두 들어줄게!”

용병왕 할릭이 그 흉기 같은 팔뚝으로 내 목을 휘감으며 웃었다. 본래 용병이어서 그런지 스킨십에 망설임이 없고 거칠었다.

“켁!”

숨 막히는 소리를 내니 어이쿠 하면서 물러선다. 그는 자신의 온몸이 무기라는 걸 인식할 필요가 있었다. 그를 흘끗 째려보면서 목을 어루만졌다.

호위, 용병 무상 고용, 마도구…….

‘일단 치료 후 내보내고 필요할 때만 은밀하게 도움을 얻으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 약초 수집이 훨씬 편해질 수 있어. 약재가 없어서 못한 연구들도 걱정 없이 진행할 수 있고. 치료해주는 걸로 이 정도까지 해준다면…….’

정말 별 거 아닌 치료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나는 꿀단지를 발견한 사람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마나. 치료해준다면, 나 또한 그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제국을 그대의 발밑에 무릎 꿇릴 수도 있겠군.”

제법 즐거워 보이는 기색의 아르모어마저 느릿한 어조로 한마디 얹었다.

“그대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보게 되겠지.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다.”

그리곤 나를 향해 예의 그 지독하게 귀족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 걱정 말고 우리를 치료해주는 건 어떤가. 내겐 그대도 그걸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나는 여기서 말문이 완전히 막혀버리고 말았다.

***

내가 살고 있는 목조 건물은 당시 최고가로 팔리던 저택 스크롤을 구매한 결과물이었다. 저택 스크롤은 사용법이 몹시 간편했다. 집이 알맞게 들어갈 넓은 공터만 준비해놓으면, 스크롤을 태우는 것만으로 원하는 자리에 소환된 저택을 세울 수 있었다.

이 무식하게 큰 목조 건물은 그런 경로를 밟아 이곳, 죽음의 숲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원래는 10개나 되는 방을 약초를 말리고, 숙성시키고, 연구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려 했지만 뒤늦게 그것이 나의 욕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몸이 하나였던 터라 약초방이 4개가 넘어가면 도저히 혼자서 관리를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저택에는 공교롭게도, 5개의 방이 딱 알맞게 비어 있었다. 1층과 지하는 전부 약초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마법사 스노아 칼리시스와 암살자 아다르 아로아는 2층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소드마스터 첼러스 밀라다스는 3층인 내 바로 오른쪽 방에, 용병왕 할릭 갈로프사는 바로 왼쪽 방에, 그리고 그 옆방에는 용 수인족 아르모어 다오르가 묵게 되었다.

나는 이른 아침 햇살이 눈가를 간질이자마자 잠에서 깨어났다. 화단에 있는 독초의 해독은 어제 해결했지만, 그보다 더 큰 산이 앞에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잠을 줄여가며 일해야 했다.

오늘은 그들이 정확히 무슨 독을 복용했는지 피와 침으로 분석하는 날이었다.

분석이 끝나는 대로 매일 해독약을 만들어 가져다 바치고, 침도 한 사람 한 사람 정성을 들여 놓아줘야 했다.

마나혈은 피가 흐르는 혈자리보다 복잡하고 자리도 제각각이었다. 심지어 유동적으로 움직이기까지 해서 몹시 까다로웠다. 별로 짜증나게 느껴지진 않았다. 치료하는 것이 본래 내 일이니까.

사람을 기피하고 은둔 생활을 하는 것에 케케묵은 죄책감을 끌어안은 채 여태까지 살아왔다. 이처럼 달콤한 속죄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간단하게 몸을 씻은 뒤 장롱을 열었다. 반은 활동하기 편한 펑퍼짐한 원피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이불보를 잘라 만든 것 같은 하얀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털실로 꼼꼼하게 짜인 따스한 스웨터를 그 위에 끼워 입었다.

거울 앞에 서서 옷차림을 확인하고 꼴 보기도 싫은 머리에 정화수를 뿌려 노폐물과 냄새를 없앴다. 그리고 근사하게 구부러진 뿔에는 기분 좋은 향이 나는 기름을 발라주었다.

‘완벽해.’

기합을 잔뜩 넣고 방문을 열었다. 시간은 아직 아침 6시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일어난 사람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

“으아악!”

“카카나, 일찍 일어나네?”

막 방 밖으로 나온 할릭이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는 기겁한 내 얼굴 따윈 안중에도 없는 표정으로 커다랗게 하품을 했다. 그의 진한 주황색 눈망울에 눈물이 옅게 배어 나왔다.

“할릭, 일어났으면 나가서 나무 좀 베어 와주겠어요?”

“알았어.”

아래층에서 스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병왕 할릭이 설렁설렁 대답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어리벙벙한 눈으로 그의 등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가출했던 정신은 할릭이 막 2층 층계참에 도착했을 때쯤 돌아왔다.

나는 중요한 사실을 떠올리고 굴러가듯이 밑으로 내려갔다. 맨몸으로 집을 나서는 할릭을 상상하자 시체로 돌아올 그의 운명이 손에 잡히듯이 보였다.

어금니를 악물고 계단을 2개씩 겅중겅중 뛰어 내려갔다. 우리 집 계단은 폭이 넓은 편이다. 당연히 속도조절이 어려웠다. 결국 벽만큼이나 넓고 단단한 그의 등에 얼굴 안면부를 강하게 들이받고 나서야 멈춰 설 수 있었다.

‘무슨 사람 몸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손끝으로 올망졸망한 콧방울을 더듬었다. 필히 코피가 터졌으리라 예상했으나―나는 흰 옷을 입고 있다!― 멀쩡했다.

“응? 카카나?”

“맨몸으로 나무 패러 갔다가 죽을 일 있어!”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다가 돌연 너무 친한 친구에게 대하듯 말했나 싶어졌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는 표정이 아니었다.

‘사람을 하도 안 만나서 그런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되네.’

심지어 과거의 인간관계는 동갑내기 친구가 전부였다. 한 지붕 아래에서 가깝게 지내는 낯선 사람은 이들이 최초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친해지는지 전혀 몰랐다. 죽음의 숲에 틀어박힌 후로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내 방식대로 행동해야겠다.’

이것저것 챙기기엔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나는 친구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할릭이 어리둥절하게 날 따라왔다.

착잡한 심정으로 1층의 거실까지 걸음을 옮겼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맛있는 냄새가 났다. 부드러운 빵 냄새와 레몬향이 강하게 섞인 상큼한 야채샐러드 냄새가 났다.

들어 처먹을 생각이 없는 주인에게 아우성치지 않은 지 오래인 배때기가 슬그머니 배고플 기미를 보였다. 끼니에 무감한 내가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는 냄새였다. 달걀을 익히고 있던 아다르가 의아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심지어 요리하고 있는 사람이 아다르였어?’

암살자가 요리라니, 그것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어둠에 몸을 담은 사람이면서 양지 기운이 함빡 느껴지는 요리에도 재능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천사랑 악마가 절반씩 섞이면 저런 인간이 탄생하는 걸까.’

의아하게 생각하며 거실을 쭉 둘러보았다. 용 수인족 아르모어가 소파에 반쯤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대마법사 스노아와 소드마스터 첼러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다.

복작복작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묘한 감상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용했는데.’

“모두 모여 봐요.”

거실 선반에서 약초를 그릴 때 쓰던 종이와 연필을 꺼내들며 얘기했다. 그리고 앉은뱅이 걸상에 종이를 펼쳐놓은 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주변으로 모인 용사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림을 살폈다.

“내가 심은 풀이에요. 세이피지아라고, 원래는 독초가 있는 환경에서 잘 자라지 못하는 앤데 제가 손을 좀 봤어요.”

나는 연필로 이파리 부분을 콕콕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 하트 모양의 잎이 크고 넓적한 애는 모두 제가 심은 세이피지아예요. 작은 애들은 제가 개량한 애들이 아니니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앞으로 혼자 숲으로 나갈 일이 있다면, 물론 혼자 나가지 않는 걸 제일 추천하지만, 이 우량 세이피지아를 따라 걸으세요.”

“꼭 그래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아다르가 물었다.

나는 시원하게 웃으며 답했다.

“신경독으로 즉사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도 상관은 없지.”

할 말을 잃은 아다르에게서 고개를 돌린 뒤, 할릭을 쳐다보았다.

“아시겠죠, 곧 나무를 패러 나가야 하는 할릭 씨?”

할릭이 억지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 나갔다 온 사람은 자기 전에 저 꼭 보고 주무셔야 해요. 혹시라도 독에 중독됐으면 치료해야 하니까. 그리고 여러분 저에게 피 좀 주고 가요.”

나는 어젯밤 걸상 밑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가방 안에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는 다섯 개의 길쭉한 플라스크와 장침이 나타났다. 설명을 요하는 의아한 눈들을 무시하고 제일 만만한 첼러스에게 다가갔다. 순종적인 대형견처럼 온화한 ―소드마스터― 첼러스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검지 끝을 가볍게 찌르자 붉은 피가 봉긋 솟아올랐다.

준비해둔 플라스크를 그 밑에 받치고 손가락을 쥐어짜면서 한 방울의 피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같은 작업을 모두에게 반복했다.

나는 소독 솜으로 장침 끝을 멸균해서 전용 침통에 보관한 뒤, 플라스크가 꽂힌 받침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식사는?”

아다르가 물었다.

“나중에.”

밥 먹는 데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저으며 홀연히 거실을 떠나 1층 가장 구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내 연구실이었다.

연구실에선 오래된 종이 냄새와 진한 약초 냄새가 났다. 오른쪽 벽엔 자주 사용하는 약초만 선별하여 보관해놓은 약초함이 열을 맞춰 가득 들어서있었다.

왼쪽에는 플라스크와 약사발을 열댓 개쯤 올려놓아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넓은 작업 책상이 있다.

유리 접시나 연고판, 가루약체 같은 조제도구들을 보관해놓는 특수 진열장이 책상 가에 세워져 있는데, 멸균상태를 유지해주는 마법이 걸려 있어 유용했다. 약초 배율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약물을 만들 때 특히 애용하는 중이었다.

진열장 옆엔 칸이 넓고 깊은 책장이 들어서 있었다. 생각해둔 것이나 예전에 진행하던 연구 과정을 그대로 기록해놓은 누런 기록용지가 들어 있었다.

이 연구실이 무식하게 넓은 우리 집의 핵심이자 심장이었다. 나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티크목으로 만든 의자를 빼 자리에 앉고 다섯 개의 플라스크를 노려보았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첼러스, 스노아, 할릭, 아다르, 아르모어의 피가 담겨 있었다.

무슨 독초를 복용했는지 알아내는 것은 많은 재료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피에서 나타나는 반응으로 범위를 대폭 줄이는 요령이 많았다.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독을 우선적으로 선별해서 반응을 지켜볼 계획이었다.

“호락호락할 리가 없겠지. 너희처럼 섬세한 애들은 한 번 뿌리를 박으면 좀처럼 뽑히지 않으니까.”

나는 플라스크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의 몸을 잠식하고 있는 독초에게 건네는 굿모닝 인사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독도 마찬가지다. 몸속에 기생하면서 명을 유지하고 있는 애들이니 인사는 필수다.

으흐흐, 흥분과 즐거움이 섞인 웃음소리를 흘리며 다섯 명의 피가 들어 있는 각각의 플라스크로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내가 살살 달래서 빼내 줄게.”

그리고 광기가 윤택하게 미끄러지는 음성으로 인사를 끝맺었다. 나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듯 두 손을 맞비빈 후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했다.

***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밤 11시였다.

“엥?”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어깨를 으쓱이며 독초 목록이 나열된 노트를 소중히 품에 끌어안고 일어섰다. 무릎에서 우득, 소리가 났다.

“아고고, 아고고고.”

하루 종일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았더니 허리와 어깨, 목이 비명을 질렀다. 결리는 부분을 주먹으로 통통 두드리면서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뼈에서 거의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몸이 예전 같지 않네. 하루 종일 연구해도 멀쩡했는데.’

할머니처럼 생각하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딱딱하게 굳은 근육에서 심한 통증이 올라왔으나, 머릿속은 어떤 해독제를 만들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 온통 꽃밭이었다.

몸이 아픈데도 기분 좋은 웃음이 스멀스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연구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코앞에 선 아다르와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응?”

“안녕, 카카나? 연구는 끝났을까?”

100년은 훌쩍 넘게 산 용사들이니 반말해도 괜찮은데 괜히 저 의미심장한 말투가 불편했다. 목소리가 상당히 살벌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설사 사실이라 해도 연구가 끝났냐는 질문에 대충 대답할 순 없지.

“아니죠.”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절대 아니죠. 이제 시작이에요. 오늘 여러분 몸에 쓰인 독을 알아내는 작업을 했거든요. 마나를 꼬이게 하는 것 말고도, 다른 독약 성분이 검출되더라고요. 그것까지 모두 해독해 줄 거예요.”

이것 좀 보세요, 그에게 종이를 들이밀며 속사포처럼 설명을 이었다.

“나무와 흙처럼 어우러져 시너지를 내는 해독약을 만들 건데, 어때요? 굉장하죠? 마나를 꼬이게 만드는 독초도 희귀한 것만 쓰여 있어서 조만간 마을을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희귀한 독초는 희귀한 걸로 달래주지 않으면 삐져서 화를 내거든요.”

나는 검지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특별한 독이에요. 아주 특별하죠. 잘못하다간 여러분이 죽을 수도 있을 정도예요. 상냥하게 다뤄줘야 해요. 들어봐요. 독초 중에 사이코파이탄이라는 게 있는데요, 얘가 얼마나 콧대가 높은 독초냐면…….”

“응응, 그렇구나. 알았어, 카카나.”

아다르가 지독히 염세적인 어투로 말을 잘라냈다.

“그런데 식사는?”

“식사?”

나는 아주 뜬금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표정을 구겼다.

“그건 갑자기 왜요?”

“아침에 ‘나중에’라고 하고 연구실에 들어간 건 기억나?”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 기억도 안 떠오른다.

“제가 그랬나요?”

“그랬지, 그럼. 그래서 10분쯤 있다가 나와서 아침밥 먹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지금 시간이 밤 11시야. 오늘 하루 종일 굶은 거지.”

“아아, 괜찮아요. 가끔 이래요. 이게 좀 흥미로운 거여야 말이죠. 이렇게 희귀한 독초를 대체 어디서…….”

“카카나.”

아다르가 한기가 느껴지는, 그러나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로 허리를 숙여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존중하지만,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건 조금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내일은…….”

“아다르가 절 걱정 안 하면 되죠.”

나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제가 애도 아니고,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는 먹어요. 나 참.”

“카카나 친구 없지?”

아다르가 싱긋 웃으며 얘기했다.

나는 딱딱하게 굳어 그를 바라보았다가, 턱을 위로 치켜들며 큰 목소리로 반박했다.

“저도 친구 있거든요? 못 만나고 있을 뿐이에요!”

“알았어.”

아다르가 내 말을 콧구멍으로도 들은 척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연구하는 게 너무 재미있는 모양이니까 간편식을 만들어볼게. 그 정도는 먹을 수 있지?”

지금 먹을 수 있다고 대답 안 하면 죽일 기센데요, 아다르.

“먹으면 되잖아요.”

“응, 친절하네. 고마워. 식사도 해주고.”

가시가 느껴지는 말로 대화를 마친 아다르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선 자리에서 어이가 없어진 얼굴로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몰래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미워하면 섭섭한데.”

2층에서 아다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인간은 등에도 눈이 달렸나!’

나는 기겁을 하며 가운뎃손가락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기분이 싸해졌지만 애써 주의를 돌렸다. 약초를 생각하면 쉬웠다. 약재들이 극도로 섬세한 과정을 거쳐 만나고, 전혀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약재들끼리 잡아먹도록 만들 것인지, 변화시킬 것인지, 소멸시킬 것인지 싸움을 붙이는 배합의 방법도 가지가지다. 그러자면 신의 섭리를 살짝 엿보는 기분이 들곤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 정도로 피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도전 상대는 요 몇 년간 없었다. 제국이 음모를 꾸몄다 했던가? 과연 그 말이 맞다. 이토록 정성을 들인 독약은 흔치 않았다. 독초도 하나같이 어렵고 까탈스러운 아이들만 쓰였다. 그래서 더 기대가 됐다.

뫼비우스의 띠를 어디쯤에서 끊어낼지 고민하는 건 쾌감을 부르는 일이다.

‘진짜 끝내주네.’

나는 거하게 약을 한 눈으로 킬킬거렸다. 대충 머릿속으로 구상만 하고 자려 했는데 계획이 바뀌었다. 좀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연구실에 도로 들어갔다. 최상의 약초 배합을 꿈꾸는 욕심이 기록 용지를 향해 뻗었다.

‘이 정도는 들고 가야지.’

나는 기록용지를 양껏 집어서 품에 끌어안았다.

허리부터 빗장뼈까지 쌓인 두꺼운 기록 용지가 굉장한 무게로 내 두 다리를 짓눌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거워서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아도 마냥 좋기만 했다. 그러나 내 전반적인 이성을 마비시켰던 몰입 현상은 계단을 열 걸음 정도 올라가자 바로 수그러들었다.

나는 기록 용지를 계단에 내려놓고 고민에 빠졌다.

생각해보건대, 이대로 들고 올라가다간 무릎이 부러지거나 허리가 부러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저 징그럽게 쌓여 있는 분량을 보라.

자기 전에 가볍게 훑어야겠다고 생각할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는가.

‘연구실에서 읽을까?’

좋은 생각이라 생각하며 기록 용지를 들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와, 미친.”

올라올 땐 별 생각이 없었던 계단이 낭떠러지처럼 보였다. 이대로 넘어지면 기록용지 무게 때문에 어디 뼈 하나 부러지는 건 일도 아닐 듯 했다.

멍청하면 손발이 고생한다며 우울하게 구시렁대고 있으니 갑자기 뒤에서 깍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투하며, 점잖은 목소리하며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다. 첼러스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 나 말고 다섯 명이나 있지.’

뒤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기록용지 때문에 거동이 쉽지 않았다. 낑낑 대고 있으니, 첼러스가 용지를 넘겨받으려는 듯 사르르 웃는 얼굴로 손을 뻗었다.

“방까지 가져가면 됩니까?”

“네, 그렇긴 한데 그거 무거우니까 도로 연구실에 가져다주세요.”

“예?”

기록 용지를 넘겨받은 첼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눈썹을 구기고 그의 손을 쳐다봤다. 손목, 팔목, 팔뚝이 첼러스의 몸통과 확실하게 이어져 있었다. 확실히 그의 손이 맞다. 그가 든 게 얇은 메모지 한 장이 아닌 것도 확실하다.

그런데 그걸 한 손으로 든 첼러스가 미간 한 번 안 찌푸리고 여유롭게 날 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넘겨준 게 몇백 장이 넘어가는 기록용지가 아니라 빈 상자는 아니었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안 무거워요?”

“전 훈련을 한 몸이니까요.”

그가 유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것을 두어 번 더 살핀 나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로 했다.

계단을 오르며 핏줄이 불거져 나온 첼러스의 팔뚝과 손등을 훑어보던 나는 문득 그가 입은 옷을 살폈다. 낡고 해진 하얀 상의의 소매를 팔뚝까지 말아 올려 입고 있었다.

“어라.”

“왜 그러십니까?”

“그러고 보니 여러분 모두 옷이 없겠네요?”

생각해보니 아다르도 해지거나 닳은 부분은 칼로 도려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보기 불쾌하십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안 불편해요?”

“투정을 부릴 순 없는 일이지요.”

첼러스가 곧게 대답했다.

나는 새삼 그가 세상에 고개 숙일 일이 없는 대륙에 단 한 명뿐인 소드마스터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 눈꺼풀을 여러 차례 깜박였다.

“그래도 옷이 두 벌은 있어야죠. 진작 말하지. 어차피 약초를 사러 조만간 마을로 내려가거든요? 그때 여러분 것도 사올게요. 사이즈는, 음, 나중에 따로 물어보죠, 뭐.”

“감사합니다만, 카카나 씨. 저희의 마력이 조금이나마 풀렸을 때 함께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첼러스가 진중하게 덧붙였다.

“저희와 연루되지 않으셨습니까. 제국은 마나 추적으로 스노아의 텔레포트가 죽음의 숲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조만간 알아낼 겁니다. 정확한 위치를 밝혀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혼자 움직이는 건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숨어 산 세월이 몇인데. 도망다니는 거 잘해요, 저.”

“카카나 씨, 이곳에 있는 누구도 당신을 혼자 보내진 않을 겁니다.”

첼러스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나는 이상하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괜히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오르다가, 할릭이 생각나 번쩍 얼굴을 들었다.

“할릭!”

“예?”

“할릭 밖에 나갔다 왔어요?”

“그렇습니다.”

“근데 왜 저한테 안 와요? 미치겠네! 할릭 지금 어딨어요?”

“방에서 쉬고 있을 겁니다.”

“그거 제 방 책상에 놔주세요. 저 먼저 올라가볼게요!”

나는 계단을 후다닥 올라가 할릭이 있는 방문으로 달음박질 쳤다. 노크도 없이 다짜고짜 문을 열어젖히자,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린 할릭이 나를 바라보았다. 덩치가 덩치인지라 그 넓은 방에서 할릭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는데, 아랫도리는 이불로 칭칭 감고 있었다.

옹골지게 뭉쳐 있는 탄탄한 근육과 구릿빛 피부에서 억지로 시선을 뜯어낸 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하게 살폈다. 색채가 진해 형광빛이 도는 것 같은 쨍한 주황색 눈망울이 어리둥절하게 날 살폈다.

“할릭! 왜 나한테 안 왔어요?”

“응?”

“근데 옷은 왜 벗고 있어요? 설마 밑에 아무것도 안 입은 거예요?”

“방금 빨아서 말리는 중이거든. 근데 웬일이야?”

“웬일? 방금 웬일이라고 했어요?”

열이 뻗쳐서 열려 있던 문을 쾅 닫고 할릭에게 뛰어갔다. 그리곤 선이 굵직한 턱을 콱 붙들고 이리저리 돌려댔다. 할릭이 내가 움직이는 대로 얌전히 따라줘서 그런지 딱딱한 석상을 잡은 느낌과 다르게 고개가 부드럽게 좌우로 꺾였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색 반점이 서서히 올라오는 뒷목이 포착되었다.

나는 웬수를 노려보듯 할릭을 바라보며 호통을 쳤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저 찾아오라고 했죠!”

“맞네. 까먹어버렸어.”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순박하게 웃었다. 속이 터진다.

“이게 웃을 일이에요? 그냥 잤으면 죽을 뻔했잖아요!”

“제국이 먹인 독약이면 몰라도, 독초 때문에 금방 죽진 않을 거야. 걱정 마.”

할릭이 태평하게 얘기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몸에 마나가 많아서 잘 안 죽거든.”

“무슨 바보 같은 소리예요. 안 죽으면 고통도 안 느껴져요?”

“…….”

유유자적 태평한 미소를 짓고 있던 할릭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눈치마저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 개밥으로 주고 없는 나는, 그의 표정 따위 상관도 안 한 채 잔소리를 퍼부었다.

“보니까 살라스마레 독에 중독됐어요. 팔다리가 저렸을 텐데 미련하게 참고 있었어요? 나아지겠지, 하고?”

그의 무거운 팔을 두 손으로 받쳐 위로 들어보고 허리춤을 살피고, 이불을 들추어 무릎 뒤편까지 확인하며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할릭은 내가 하는 양을 고요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당신 같은 환자들이 제일 문제예요, 자각이 없다니까! 안 그래도 온갖 약 때문에 몸도 무거웠을 텐데.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괴로운 거 알아요. 이상할 정도로 티를 안 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참기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제 말은 좀 듣고요! 알겠어요?”

그의 커다란 손을 다 쥐기 힘들어 검지와 중지만 꼭 쥔 채 끌어당겼다. 할릭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내 방으로 가요. 평소에 자주 쓰는 해독약은 전부 방에 있어요.”

“카카나, 왜 혼자 사는 거야?”

나를 빤히 바라보던 할릭이 문득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않다가 방문을 열며 대답했다.

“그건 왜 물어요?”

“아니, 그냥.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별 이유 없어요. 혼자가 좋아서요.”

“혼자가 좋다고?”

나는 와락 신경질을 냈다.

“왜 그러는데요?”

“아무것도 아냐.”

그가 히히, 웃으며 대답했다.

“참 다정하다 싶어서.”

나는 콧방귀를 뀌며 복도를 걸어갔다. 마침 옆방이 바로 내 방이라 편했다.

“다정은 무슨.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 봤어요?”

“왜 그렇게 생각할까?”

그가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왠지 그 낯짝이 얄미워져서 그의 정강이를 발로 차버렸다. 내 발만 아팠다.

“안 아프니까 쓸데없는 걱정 마요!”

나는 할릭이 묻지도 않은 것을 서둘러 대답하며 있는 힘을 다해 표정을 관리했다. 속에서 온갖 쌍욕이 터져 나왔다. 통뼈도 저런 통뼈가 없다. 건물 기둥이라도 맨발로 찬 것 같았다.

나는 절뚝거리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방문을 열었다. 할릭이 장난마저 제쳐두고 날 걱정하는 게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했다. 나는 아주 멀쩡한 얼굴로 방을 한 차례 훑었다. 책상 위에 기록용지가 쌓여 있는 것 빼고는 오늘 아침과 똑같았다. 첼러스는 자기 방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 옆에 있는 키 낮은 수납장에서 하얀색 통에 담긴 알약을 손바닥에 털어 할릭에게 들고 갔다.

“이거 씹어 먹어요.”

“으, 쓴 거 싫은데.”

“투덜대지 말고 먹어요.”

할릭이 질색하는 얼굴로 알약을 받아들었다. 그가 약 먹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나는 문득 피로가 몰려와서 침대에 걸터앉아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기운이 쭉 빠졌다.

기록 용지를 2층까지 배달하느라 고생해준 첼러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할릭 때문에 끊겨버린 맥이 다시 돌아올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침대에 풀썩 드러누우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 것 같다…….”

내 몸도 할릭처럼 좀 튼튼했으면. 한숨을 푹 내쉬자 약을 씹어먹던 할릭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뭉쳤어?”

“엄청.”

몸에 스스로 침을 놓을 수도 없어서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혼자 어깨를 쥐어짜며 낑낑대고 있자니 할릭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주물러 줘?”

나는 가물가물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랫도리 이불로 감싸고 그런 말 하니까 되게 변태 같네요.”

낄낄거리면서 웃는데 할릭이 별로 타격을 입지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그런 면이 좀 있긴 하지.”

“으아악! 진짜 변태예요?”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그래? 그리고 말 놔.”

“지하 감옥에 180년 정도 갇혀 있었다면서요. 그런 사람한테 어떻게 말을 놔요?”

“지금 놀리는 거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또 낄낄거렸다. 할릭이 피식 웃었다.

“아무튼 말 놔.”

“그러면 뭐. 나중에 딴소리 하지 않기.”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제대로 앉아 봐. 그대로 방치하면 머리도 안 돌아가.”

“요즘 목까지 아픈 기분이에요.”

“많이 뭉쳤나보네.”

“안마는 아파서 별론데.”

“안 아프게 해 줄게.”

대답한 할릭이 돌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머릿속이 투명한 물처럼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서, 나는 대놓고 놀리는 표정을 지었다.

“변태.”

“흠.”

그는 마찬가지로 별로 타격을 입지 않은 낯짝이었다. 놀리는 재미가 없어서 입술을 삐죽이고 있자니, 내 표정을 본 할릭이 푸스스 미소 지었다. 놀랍도록 순수한 얼굴이어서, 나는 잠깐 그를 말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얘기했다.

“정말 말 놔도 돼?”

“벌써 놨잖아.”

“어깨 잘 주물러?”

“동료들 근육통 풀어주는 건 모두 내 몫이었지.”

“그럼 살살 주물러 줘.”

그의 솥뚜껑 같은 손을 곁눈질하며 말을 덧붙였다. 나무도 팰 것 같은 저 손으로 내 어깨를 주물렀다가 뼈까지 바스러지는 건 아닐까. 망설이고 있자니 할릭이 원목 의자를 침대 근처로 들고 왔다.

아니 잠깐.

당신 방금 그거 너무 가볍게 들지 않았어?

첼러스처럼? 메모지 한 장 들고 있는 사람처럼?

“잠깐.”

나는 정색하고 그를 저지했다.

“역시 안 할래. 뼈 부러지면 어떡해.”

“아귀힘만으로 어떻게 뼈를 부러트려? 마나 사용도 못하는데.”

“멍들 것 같아.”

“살살 할게. 토끼 안마한다는 생각으로.”

“토끼라니!”

내 충격 받은 표정을 본 할릭이 멋쩍은 얼굴을 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설마 지금 토끼라 해서 자존심 상한 거 아니지?”

“양과 토끼는 엄연히 다른 동물이야. 하여튼 인간이란 섬세하지 못해서 탈, 으악!”

내 등허리로 구렁이 같은 팔뚝을 쑥 집어넣은 할릭이 나를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급히 어깨를 움츠리니 등 뒤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할릭은 덩치가 컸다. 그 무게감이 푹신한 침대 매트리스를 통해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힘주면 더 뭉쳐. 확실히 풀어줄 테니까 좀 믿어 봐.”

의심을 거두기 힘들었으나 상냥한 목소리에 애써 어깨에 힘을 뺐다. 할릭의 굵은 손가락이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그의 손끝은 두툼하게 묶인 밧줄의 끄트머리처럼 뭉툭하고 딱딱했다. 그러나 움직임은 하나하나 신중하게 현을 뜯는 음악가의 선율처럼 섬세했다.

그는 어느 부위를 어느 정도의 세기로 눌러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용병들은 대개 몸을 험하게 굴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병이 금방 골병이 들어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고려하지 못한 점이 하나 있다. 그들에겐 몸뚱어리가 유일한 자산이라는 사실이다.

용병은 남들이 기피하는 험한 일을 도맡아 하기에 더욱 건강에 관심이 많았다. 그건 내가 주기적으로 약을 팔러 바깥세상으로 나갈 때마다 느끼는 바이기도 했다.

할릭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근육을 푸는 데 도가 텄네.’

허리 끝까지 들러붙어 있던 불안과 긴장이 액체처럼 녹아 몸에서 흘러나갔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온몸이 노골노골 풀어졌다. 뜨거운 물에 팔팔 끓인 면발처럼 정신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고 입을 헤, 벌렸다. 상상 이상으로 황홀했다. 쉽게 오는 법이 없던 수마마저 눈꺼풀 위로 까맣고 고요한 어둠을 펼치고 있었다. 이성의 끈이 실낱같이 가늘어졌다.

“졸려?”

“누워도 돼?”

“네가 괜찮으면.”

나는 대답 대신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그리고 어이가 없게도, 이불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어제의 충격과 긴장, 그리고 과로의 말로였다.

***

할릭은 색색 숨을 내쉬며 자는 카카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양 갈래로 땋은 폭신폭신한 살굿빛 머리카락이 검은 솜이불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예요. 안 죽으면 고통도 안 느껴져요?]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를 떠올린 할릭이 눈을 접으며 순박하게 웃었다.

찌르는 듯한 말투와 불퉁한 얼굴로는 도저히 가릴 수 없는 그녀의 말간 생각이 퍽 기꺼웠다.

“정을 안 줄 수가 없는 타입이네.”

졌다는 투로 중얼거린 할릭이 이불을 덮어주고 방을 나왔다. 문을 열자 가지런한 자세로 서 있는 첼러스가 나타났다.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린 할릭이 그를 위아래로 훑다가, 돌연 헛웃음을 터트렸다.

“얀마, 날 뭐로 보고.”

“우리는 모두 제정신이라 볼 수 없는 상태니까요.”

첼러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할릭의 차림도 차림인지라.”

첼러스의 유순한 호수빛 눈망울이 할릭의 아랫도리를 응시했다.

“걱정이 되어 그만.”

“네가 검으로 사람 팰 때도 그런 얼굴이라는 걸 카카나가 알아야 할 텐데.”

“별로 보여드리고 싶진 않군요.”

그가 여전히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할릭이 몸을 부르르 털며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마. 걔네가 먹이는 정신착란 약물은 진작 내성이 생겼잖아. 네가 유난히 약이 안 듣는다고 매일 밤마다 한 양동이 들고 와서 네 입에 퍼붓지 않았나? 그걸 생각하면 나보단 네가 더 위험한 것 같은데.”

첼러스가 한쪽 눈을 짜증스럽게 일그러트렸다.

“한 양동이 수준은 아니었습니다만.”

“그게 그거지. 아다르처럼 싸게싸게 정신 나간 척이라도 하지. 그러면 더 먹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들이 편하게 일을 하게 만들 순 없죠.”

“그건 그래. 난 그래서 네가 좋아. 말했었나?”

“글쎄요.”

할릭이 첼러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크게 웃었다. 어정쩡하게 목덜미를 잡힌 첼러스가 할릭의 걸음걸이에 덩달아 껄렁한 자세로 1층으로 향했다. 거실엔 이미 아다르, 스노아, 아르모어가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팔걸이에 한쪽 팔을 불량하게 걸치고 하품을 하던 아다르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왔어?”

“그래.”

“카카나는?”

“자.”

할릭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피곤했나 보더라.”

“그럴 수밖에 없죠. 갑자기 주변에 사람이 늘었잖아요. 그런 것치곤 적응을 무척 잘하고 계시지만요. 본래 집단생활을 하셨던 분일까요?”

“알 수 없지.”

스노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우리를 거둬준 것만으로 기적이에요. 대체 왜 이곳에 숨어 살고 계신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좋은 사정은 아닐 거다.”

아르모어가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얘기했다.

“겸사겸사, 그녀의 꼬인 과거를 더듬어 올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우리와 함께 떠나야 할 테니.”

그러고는 입을 벌리며 나른하게 웃는다. 아르모어는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성격이었으나, 은혜와 복수만큼은 분명한 남자였다.

스노아는 잠시 카카나를 힘들게 만든 사람들에게 묵념을 올렸다. 아르모어의 무자비한 성정을 생각하면 편하게 죽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면 노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야. 어쩔래?”

아다르가 말문을 트자, 스노아가 파란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답했다.

“신변보호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해두는 게 좋겠어요. 제국이 곧 눈치챌 거고, 그녀는 천재니까요. 탐하려는 자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거예요.”

“심지어 카카나는 자각도 없잖아?”

아다르가 새카만 눈망울을 일그러트리며 맞장구쳤다.

“주기적으로 마을로 나가 약을 팔았던 것 같은데, 그 정도 실력이면 효능이 대단하다고 입소문이 났을 거야. 의문의 천재 약사 정도? 이 집을 봐. 돈도 제법 만졌을 거라고.”

아다르와 마찬가지로 오랜 길거리 생활을 한 할릭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야 어떻든, 은둔 생활이 목숨을 연장해준 걸로 보이는데. 그렇지 않아?”

“분명히. 숨어 살지 않았다면 흑사회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어. 그녀는 수인족이니까.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지.”

스노아가 냉정한 눈을 날카롭게 내리떴다.

“그녀는 조만간 약초를 구하러 마을로 내려갈 거예요. 호위가 필요해요. 감히, 제국이 손대게 할 순 없으니까.”

“호위는 내가 하면 되겠네.”

아다르가 자신 있게 나섰다.

“나는 암살자니까, 우리 중에서 마나의 영향이 제일 적기도 하고. 존재감 지우고 은밀히 움직이는 건 식은 죽 먹기거든. 카카나 신변보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도 되지 않겠어?”

마나가 돌아온 후에 떠날 거 아니야. 아다르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거리낄 게 없지. 안 그래?”

그러자 모두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제국이 본다면, 가히 간담이 서늘해질 미소를.

정작 폭풍의 눈에 있는 카카나는 침을 흘리며 자고 있었다. 몹시 달콤한 꿈을 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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