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23/23)

episode 3.

콜록, 콜록. 거친 기침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상체를 들썩거리는 노아에게 몸을 숙이는 알렉스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지금이라도 병원 갈래? 차라리 병원에 있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냥 감기예요. 선생님도 푹 쉬면 나아진다고 했잖아요.”

“역시 내가 옆에 있어야겠어.”

“그러지 마…, 콜록. 콜록. 전 괜찮아요. 알렉스야말로 괜찮겠어요? 클로에 혼자 돌보는 건 처음이잖아요.”

열이 올라 눈가를 빨갛게 물들인 노아가 걱정스레 되묻자,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면서 알렉스는 툭, 하고 이마를 가볍게 눌렀다.

“걱정하지 마. 클로에 돌보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푹 쉬기나 해.”

“하지만….”

“어제도 나 혼자서 클로에 돌봤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육아에 관한 건 내 머릿속에 모두 저장되어 있고, 오늘은 외부 일정도 없어서 어차피 종일 사무실에 있을 거야. 클로에 먹일 이유식이랑 분유도 정확하게 계량해서 다 준비했고 좋아하는 인형도 챙겼어. 걱정 안 해도 될 정도로 육아 상식이 풍부한 매디슨도 오늘은 종일 내 옆에 붙어 있을 거야.”

알렉스는 걱정하는 노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몸을 일으켰다.

“클로에가 보챌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

“난 클로에보다 네가 더 걱정돼. 고작 10개월 된 그 녀석조차 요구사항이 확실한데, 넌 자꾸 괜찮다고 말하잖아.”

“죄송해요…. 이 정도는 정말 괜찮….”

“내가 안 괜찮아. 네가 아프면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알면서 그래? 감기라 클로에에게 옮길 수 있어서 열이 떨어지기 전까진 무조건 쉬라는 닥터 리건의 당부도 있었고.”

몸을 일으킨 알렉스는 가습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히터 온도도 조금 더 올렸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에 환절기 감기에 제대로 걸린 노아가 앓아눕자 제일 먼저 문제가 된 건 이제 10개월 차에 접어든 클로에였다.

보모인 셀라 부인이 하필이면 어제부터 집에 일이 생겨 내일까지 휴가였다. 임시로 보모를 구하기엔 시간이 촉박했고, 보모를 까다롭게 고르는 그들 부부에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델슨 부부에게 맡기자니 두 분은 나이가 많아 한창 호기심이 충만하고 잠시도 눈을 못 떼는 10개월 아기의 육아를 하기엔 체력적으로 무리였다.

거기다 클로에는 비교적 돌보기 쉬운 아기였으나 그건 부부 중 한 사람이라도 곁에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충족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제는 알렉스가 집에서 쉬면서 클로에를 혼자 돌보았지만, 오늘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내일까지 쉬는 건 무리니 차라리 클로에를 데리고 출근을 하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편이 노아도 아이 걱정을 하지 않고 온전히 쉴 수 있을 테니까.

“루시에게 종종 들여다보라고 할 테니까 조금이라도 안 좋다 싶으면 말해. 그리고 나한테 전화해서 꼭 알려 주고. 알았지?”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푹 쉬어. 다녀올게.”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가 평소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알렉스는 노아를 두고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아이 따윈 루시에게 던져 주고 노아 곁에 있고 싶었지만, 자기 몸보다 남을 더 신경 쓰는 제 오메가의 성정을 아는 탓에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때때로 느려지는 걸음을 재촉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방으로 들어서자 클로에를 보고 있던 루시가 알렉스를 발견했다.

“도련님. 이제 출근하시는 거예요?”

“네. 클로에는 얌전히 있었나요?”

“아바!”

루시 품에 안겨 있던 클로에가 몸을 뒤채며 알렉스에게 팔을 허우적거렸다.

능숙하게 아이를 품에 안아 들자 루시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클로에는 그냥 맡기고 출근하세요. 하루 정도는 내가 볼 수 있어요.”

“그럴 수야 없죠. 나나 노아가 없으면 심하게 보채잖습니까.”

방한용 아기 양 후드 우주복이 더운 모양인지 클로에가 자꾸 후드를 뒤로 넘기려고 버둥거렸다. 알렉스는 뒤채는 아이를 한쪽 팔로 어르고 루시가 준비해 준 아기용품이 가득 담긴 커다란 가방을 들었다.

“베이비 카시트는 헨리가 설치해 놨어요. 운전은 직접 하시게요?”

“곧 매디슨이 올 겁니다. 클로에 데리고 제가 운전할 수야 없죠.”

알렉스가 기어이 클로에를 데리고 출근할 거라는 걸 확인한 루시는 준비한 담요를 클로에에게 둘렀다.

“밖이 추워요. 클로에 감기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죠.”

“우우!”

담요 속에 폭 파묻힌 클로에가 당장 옹알이를 하며 이거 싫다고 바둥바둥 난리였다.

“요 녀석. 가만히 있어. 오늘도 온종일 아빠랑 같이 있을 거야. 얌전해야 한다, 알았지?”

“우?”

동그란 동물 귀가 달린 우주복 안에서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아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클로에는 너무 예뻤다. 머리색은 알렉스를 닮았지만 새파란 눈동자는 노아의 맑은 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루시는 클로에가 알렉스와 꼭 닮았다고 하지만, 알렉스가 보기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노아를 쏙 빼닮았다.

“이 안에 클로에 먹을 이유식이랑 분유도 계량해서 넣었어요. 분유는 온도 맞춰서 잘 타 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아뿌뿌. 아바!”

루시의 주의사항이 이어지는 내내 못 기다리고 클로에가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품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내려가고 싶다고? 어딜 가려고. 너는 아빠랑 회사 간다니까.”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아이를 다독이는 사이 운전기사 노릇을 할 조엘이 도착했다.

“클로에!”

얼굴 가득 웃음을 피우며 등장한 조엘은 제 고용주 따위 보이지도 않는지 단번에 클로에 이름부터 불러 댔다.

“아부!”

조엘을 반기기라도 하듯 클로에가 팔을 쭉 뻗으며 옹알거렸다.

“어쩜 이리 이쁠까. 대표님은 정말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 봐요. 이리 예쁜 아기를 얻다니!”

클로에를 마주 안으려는 조엘을 무시하고 알렉스는 루시에게 마지막 당부를 했다.

“루시, 노아 종종 들여다보고 먹기 싫다고 해도 꼭 식사는 챙겨 주세요.”

“노아 씨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클로에도 아빠랑 잘 다녀와.”

바바.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클로에를 보듬어 안고 알렉스가 먼저 움직였다. 아기 물품이 잔뜩 담긴 가방은 조엘의 몫이었다.

밖으로 나온 알렉스는 아이가 찬바람을 맞지 않도록 담요를 더욱 꽁꽁 싸맸다. 우우우. 클로에가 답답하다며 항의 섞인 옹알이를 했다.

“어서 타세요.”

아기용 시트가 장착된 뒷좌석 문을 조엘이 열어 주자, 알렉스는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놨다. 아이의 몸을 카 시트에 고정했다.

“우아. 우우웅.”

한참 호기심이 넘쳐나는 아기는 팔을 파닥대며 머리를 이리저리 휙휙 저었다. 열심히 뭔가 옹알거리긴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문장은 아닌 클로에의 옹알이에 알렉스는 가슴을 한번 토닥거리고는 반대쪽으로 돌아가 차에 탔다.

조엘은 아이가 흔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차를 출발했다. 팔다리를 파닥거리는 아이를 백미러로 확인하며 조엘은 말을 걸었다.

“노아 씨는 좀 괜찮답니까?”

“오늘 하루 정도 푹 쉬면 나아질 거라는데…. 하여튼 몸이 약해서 걱정이야.”

“병원은 안 가신대요?”

“일단 주치의가 어제 들러서 필요한 조치는 취했어. 링거도 맞았고.”

“클로에 데리고 일하시려면 고생하시겠어요.”

“별수 있나. 어제 집에 있었더니 아픈 몸으로 클로에만 내내 신경 쓰느라 푹 쉬지를 않으니 차라리 내가 데리고 나오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

“하긴, 그래요. 노아 씨 성격에 아프다고 가만히 누워 있을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참 타이밍이 그러네요. 일이 생기려면 이렇게 꼬여요. 하필이면 셀라 부인이 처음 휴가를 떠난 날 노아 씨가 감기에 걸릴 게 뭡니까.”

클로에가 태어나고 벌써 10개월. 남성 오메가의 몸에서 태어나 몸집이 좀 작았던 것만 빼면 클로에는 그 흔한 잔병치레조차 없었다. 그런데 노아는 아니었다. 본래도 페로몬 문제가 있어서 아이를 낳고 기력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나마 임신 중에는 비교적 안정적이던 페로몬 수치도 다시 형편없이 낮아졌고.

때때로 불안정한 페로몬 때문에 노아는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알렉스는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무리하게 먹었던 억제제 탓이 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제 머리를 깨 버리고 싶었다.

세 번의 러트도 억제제로 버텼다. 완전히 회복하지 않은 노아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노아는 그 결정에 반대했지만, 알렉스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각인 상대와 함께 보내는 러트에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혹여라도 노아를 다치게 하면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부부.”

알렉스의 상념을 깨 버리는 클로에의 옹알이에 그는 옆을 돌아보았다. 카 시트가 답답한지 클로에가 한껏 눈살을 찌푸리며 팔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안 돼. 도착할 때까진 안 풀어 줄 거야. 얌전히 있어.”

“아우우우.”

클로에가 탁탁, 팔을 휘젓더니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알렉스에게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이거 싫어. 싫어, 내려갈래. 아마도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말하려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확실한 몸짓이었다.

“클로에는 정말 어쩜 저렇게 똑 부러지게 의사 표현을 한대요? 우리 애들 어릴 때랑 너무 다르네요.”

“클로에랑 누굴 비교해? 얘는 천재야. 지금보다 더 어릴 때도 자기표현이 확실했거든.”

뻐기듯 어깨를 쫙 펴고 투정 부리는 클로에의 보들보들한 뺨을 어루만지며 알렉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노아를 닮은 푸른 눈에 짜증이 가득했다. 콧구멍을 씰룩거리다 입술이 삐죽삐죽대기 시작했다.

“아, 네…. 누구나 다 제 자식은 천재라고 말하죠.”

팔불출을 유감없이 뽐내는 알렉스의 대답에 조엘은 그래요, 그렇죠. 하며 영혼 없이 대꾸했다. 회사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뒷좌석에서 칭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클로에의 인내심도 이제 다한 모양이었다.

“이제 다 왔어. 조금만 참아.”

부부부.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에 알렉스는 착실하게 대답해 주며 차가 주차장에 들어가는 걸 기다렸다.

“적당히 세우고 넌 클로에 짐 챙겨서 올라와. 애가 보채서 나 먼저 올라가야겠다.”

“네. 그러세요. 짐은 제가 챙길게요. 클로에, 이따 보자.”

베이비 시트에서 꺼내 주자마자 클로에가 까아, 소리를 내질렀다. 알렉스는 팔로 아이를 안고 담요로 그 위를 덮었다. 클로에가 암팡지게 작은 손으로 알렉스의 슈트 상의를 꽉 움켜쥐었다.

“아빠 잘 잡아. 괜히 버둥대지 말고.”

“아바! 아우웅.”

체격이 큰 알렉스 품에 안긴 아이는 몹시도 작았다. 너무 작아서 아이를 덮고 있는 담요가 왜 저기 있지? 싶을 정도로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알렉스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주변 광경이 신기한지 클로에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살이 올라 빵빵한 볼이 발그레해졌다.

“우?”

엘리베이터가 상승하기 시작하자 기묘한 부유감이 낯선지 클로에가 알렉스 품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알렉스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보들보들한 머리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금방 도착해. 이상해도 좀 참아.”

잠시 등을 토닥이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땡 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다.

아이를 안은 알렉스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대표실로 향해 갔다. 복도에서 마주친 이들이 알렉스를 발견하곤 가볍게 허리를 숙이다가 평소와 다른 고용주의 모습에 의아한 듯 걸음을 멈췄다.

“오셨습니까. 대표…. 어머.”

일찍 출근한 비서실 직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보다시피 오늘은 내가 육아 담당이라 클로에와 함께 있을 테니 서류 결재 외엔 일정 잡지 마세요.”

비서실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알렉스 품에 완전히 파묻힌 아이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쭉 뺐다.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알았지만, 알렉스는 냉큼 몸을 돌려 사무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안겨 있던 아이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아바. 우?”

작은 머리통이 또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여긴 아빠 사무실이야. 오늘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았지?”

등을 토닥이며 알렉스는 사무실을 쭉 눈으로 훑었다. 생각해 보니 클로에가 있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긴 하지만 아이를 내려놓기엔 위생적으로 좋지 않았고, 소파에 두기엔 너무 위험했다.

호기롭게 자신이 애를 보겠다고 데려오긴 했는데 여기는 절대로 아이가 있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알렉스는 어쩔 수 없이 조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저 지금 사무실로 들어갑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에서 챙겨온 커다란 짐을 든 조엘이 들어섰다.

“왜 전화하셨습니까?”

“지금 나가서 아이용 바닥 매트랑 볼 풀장 좀 사 와. 그리고 보행기도.”

시간이 좀 넉넉했다면 쇼퍼에게 최고로 좋은 물건으로 골라 오라고 했을 테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거라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예? 아아…. 집에서 다 챙겨 오시지 그러셨어요.”

“그 많은 걸 어떻게 다 챙겨? 금액은 신경 쓰지 말고 최고로 좋은 것들로 사 와. 지금 내려가겠다고 엉덩이 들썩거리는데 먼지 풀풀 날리는 카펫 바닥에 애를 내려놓을 순 없잖아.”

“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봐서 필요하다 싶은 건 다 쓸어 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육아에서는 또 베테랑 아닙니까.”

하하하. 호기롭게 소리친 조엘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아이가 내려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 안 돼.”

항의하듯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클로에가 또 한껏 눈썹을 찌푸리며 팔다리를 바둥거렸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알렉스는 챙겨 온 짐 가방을 열었다. 입술을 쪽쪽대는 걸 보니 벌써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건강한 아이는 식욕도 왕성해, 최근엔 이유식도 주는 대로 잘 받아먹었다. 노아도 클로에처럼 잘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알렉스는 입이 짧은 제 오메가를 떠올리며 한 손으로 능숙하게 클로에의 이유식을 꺼냈다.

“우리 맘마 먹을까?”

“맘마?”

“그래, 맘마. 잠시만.”

말귀를 알아들은 클로에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팔을 휘적거렸다. 맘마. 맘마 외치며 보채는 아이를 능숙하게 안고 아이의 턱받이를 챙겨 소파로 향했다. 푹신하고 널찍한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이유식을 올려 두었다. 알렉스는 무릎 위에 모포를 깔고, 몸을 두툼하게 감싼 방한복을 벗겼다. 보드라운 내복 차림의 아이의 턱에 턱받이를 둘렀다.

“얌전히 먹어야 한다. 알았지?”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힌 상태로 이유식이 담긴 용기 뚜껑을 열었다. 클로에가 눈앞의 음식에 반응하더니 팔을 쭉쭉 뻗었다.

“얌전하게 먹어. 너 또 지난번처럼 음식 집어 던지면 아빠가 안 줄 거야.”

뺘아! 빨리 달라며 빽 소리를 지르더니 클로에가 짧은 다리를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아이가 앞으로 튀어 나가지 않도록 꼭 붙잡고는 이유식을 아이 앞으로 끌어 왔다.

요즘 한창 씹는 것에 재미 들린 아이가 벌써부터 입을 오물오물 대며 옹알이를 했다.

오븐에 구운 고구마와 잘게 자른 사과, 그리고 블루베리가 담긴 이유식에 아이가 팔을 뻗었다. 클로에의 손에 아기용 포크를 쥐여 주었다. 장난치듯 쿡쿡 포크를 휘두르다 운 좋게 고구마를 찍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작은 입을 크게 벌리고 오물거리고 잘도 씹어 먹었다.

“오늘은 얌전하네.”

야무지게 콕콕 이유식을 찍어 부지런히 입으로 나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작은 아이가 벌써 이만큼 자란 것에 감탄했다. 하루하루가 늘 새로웠다.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아이를 볼 때마다 알렉스는 이 모든 것에 감사했다.

한참 잘 먹던 아이는 슬슬 집중력이 떨어졌는지 먹을 걸 가지고 장난치기 시작했다. 포크를 내던지고 손으로 블루베리를 집어 입에 넣더니 오물거리다 퉤 뱉었다.

“음식 뱉지 말라고 했지, 아빠가.”

“뺘!”

손으로 블루베리를 뭉갠 탓에 금세 손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클로에. 그럼 안 돼. 아빠 화낼 거야.”

엉망이 된 입 주변을 닦아 주는데 아이가 고개를 흔들어 손을 피했다. 혼자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까르르 웃어 대더니 알렉스의 바지에 손을 뭉갰다.

“이 녀석. 이게 뭐야. 아빠 옷 다 망치고.”

과즙이 잔뜩 묻은 손을 잡아 닦으니 팔을 버둥거리며 빠빠, 소리를 질러 댔다. 알렉스의 단호한 태도가 싫었는지 아이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볼을 부풀렸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이거 치운다.”

알렉스는 단호하게 이유식 뚜껑을 닫았다. 아이가 무릎 위에서 버둥대더니 빼액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다. 얌전한 아이라도 가끔 뭐가 수틀리는지 성질을 부릴 때가 있었다. 알렉스는 그럴 때마다 육아의 고단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 클로에가 버둥거리는 탓에 대충 자리를 정리하고 아이를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트림이나 해라. 응?”

빼액 소리 지르며 아이가 팔다리를 휘젓더니 이내 불만스레 입을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도 아이의 항의는 이어졌다.

“갑자기 왜 그래, 응? 클로에, 뭐가 불만인데?”

짧은 사이에 알렉스의 셔츠는 온통 구겨졌고, 머리도 헝클어졌다. 출근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알렉스의 얼굴에 피로가 쌓였다.

조엘이 필요한 물건을 사 올 때까지 보채는 클로에를 달래느라 알렉스는 진땀을 뺐다. 기어이 아빠가 자기 말을 안 들어주자 푸른 눈에 눈물이 몽글몽글 맺히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클로에가 울자 알렉스는 더더욱 곤란해졌다. 노아와 꼭 닮은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꼭 우는 노아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를 안고 팔을 움직이며 달랬다. 그러다 엉덩이 부근이 뜨끈해지는 걸 확인하고는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클로에 손에 좋아하는 토끼 인형을 안겼다. 젖은 뺨을 손수건으로 조심스레 닦고는 으앙으앙 울어 대는 클로에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심부름 보낸 조엘이 나타난 건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금방 설치하겠습니다.”

눈가가 빨간 클로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조엘이 의욕에 차 바삐 움직였다.

알렉스가 아이를 달래는 사이 조엘이 서둘러 볼 풀장을 창가에 펼쳤다. 알록달록한 볼을 풀장에 풀고 그 옆에는 아이용 폭신한 매트를 쫙 깔아 주변을 펜스로 막았다.

앙앙 울던 클로에도 어느 틈엔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조엘이 바닥을 기어 다니며 설치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내려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들썩 난리가 났다.

클로에가 또 폭풍처럼 옹알이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까 그렇게 앙앙대고 울더니, 장난감 보니까 좋아?”

“한창 움직이는 데 재미 붙인 아이가 계속 안겨 있으니 얼마나 지겨웠겠어요. 자, 이제 다 됐습니다. 클로에 내려놓으셔도 돼요.”

풀장 설치와 매트를 까느라 형편없이 구겨진 바지를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면서 조엘이 일어났다.

므아아, 바바. 클로에가 목청 높여 옹알이했다.

짧은 팔을 버둥버둥, 엉덩이는 들썩들썩하며 알렉스에게 열심히 내려 달라고 어필했다.

“클로에 놀게 두시고 대표님도 이제 일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결재 서류 올리라고 할까요?”

“그래.”

알록달록한 볼이 가득한 풀장에 내려놓자마자 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토끼 인형은 품에 꽉 끌어안고 엉덩이로 철퍼덕 주저앉아 주변에 공을 잡으려고 팔을 휘저었다. 공이 잡히든 안 잡히든 상관없는 모양인지 클로에는 그저 까르르 까르르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10개월짜리 아이 한 명 안고 있었다고 팔이 뻐근했다. 알렉스는 출근한 지 한 시간 만에 간신히 자기 자리에 앉았다.

어제 갑작스레 쉬었던 바람에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서류가 많았다.

알렉스는 클로에가 혼자 노는 동안 눈앞에 쌓인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해외 사업까지 커지면서 봐야 할 서류가 무척 많았다. 사업부를 분리하고 전문경영인을 두는 일도 함께 진행하는 터라 쌓인 일이 한가득하였다. 한동안은 조엘이 클로에 옆에 붙어서 종알거리는 소리와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사무실에 울렸다.

조용히 아무 문제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알렉스에게 만족감을 안겼다.

한참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때, 알렉스의 안쪽 주머니가 짧게 진동했다.

[클로에는 잘 놀고 있어요? 저 찾진 않아요?]

어째 좀 오래 참았다 했어.

메시지는 노아에게서 온 거였다. 알렉스는 메시지를 보내려다 마음을 바꿨다.

신호가 울리더니 금세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푹 쉬라고 했더니 왜 문자야? 점심은 먹었어? 좀 잤고?”

-네. 아까 좀 자다가 일어났어요.

“목 아픈 건 괜찮아? 목소리는 아침보단 괜찮은 거 같은데.”

-많이 좋아졌어요. 클로에는요?

“잘 놀고 있어. 사진 찍어서 보여 줄까?”

라고 말하다 알렉스는 “아니다, 내가 영상통화로 다시 걸게. 끊어 봐. 너도 클로에 얼굴 봐야 안심할 거 같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노아 씨예요? 좀 괜찮답니까?”

“클로에가 걱정되나 봐. 지금 걱정해야 할 게 누군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참.”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알렉스는 영상통화를 걸었다. 대기하고 있던 노아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작은 화면으로 노아가 침대에 등을 기대고 있는 게 보였다. 알렉스는 화면에 비치는 노아의 안색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열이 조금 내린 모양인지 혈색이 좀 돌아왔다.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내 얼굴 잘 보이지?”

-네.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의 얼굴에 어색함이 가득했다.

“잠깐 기다려 봐.”

알렉스는 핸드폰을 클로에 쪽으로 돌렸다. 볼 풀장에서 까르르 노는 아이의 모습이 화면 가득 들어왔다.

-클로에.

노아의 목소리에 바닥을 기어 다니던 클로에가 멈칫했다. 작은 머리통을 갸우뚱하더니 머리를 이리저리 돌렸다.

“클로에. 자 봐. 노아야. 노아 아빠가 너 보고 싶대.”

알렉스는 핸드폰을 가까이 가져갔다. 클로에의 눈동자가 화면에 비친 노아를 확인하곤 커다래졌다.

“아바!”

짧은 팔을 쭉 뻗어 핸드폰을 잡으려 했다.

-혼자 잘 놀고 있었어?

아우우! 클로에가 화면을 향해 팔을 뻗으며 항의했다. 화면으로 비치는 노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손으로 화면을 만졌다.

-클로에. 알렉스 아빠랑 잘 놀고 있어. 보채지 말고 울지 말고, 알았지?

아부부. 아바! 뭐라고 옹알이하며 자꾸만 화면을 만지는 클로에에게 알렉스는 핸드폰을 잡아 주었다. 무거운 핸드폰을 혼자 들지 못해 툭 하니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금세 울상을 지었다.

“자, 여기 있어.”

알렉스는 한 손으로 받쳐 아이가 핸드폰을 만질 수 있도록 했다. 클로에의 머리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손으로 화면을 만지더니 고개를 들어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우?”

조엘은 왜 노아가 화면 속에 있냐고 묻는 듯한 클로에의 행동에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녹아내렸다.

알렉스는 아이가 마음껏 노아와 통화할 수 있도록 팔로 아이를 안아 올렸다.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내밀자 아이가 폭풍처럼 옹알이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빠가 미안해. 감기에 걸려서 클로에를 만나러 갈 수가 없어. 빨리 나아서 금방 안아 줄게. 알았지?

아우우! 안아 달라는 듯 팔을 내밀었지만 화면 속의 노아는 너무 작았다. 클로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빠를 안을 수 없자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화면을 보았다가 하며 작은 머리통이 바쁘게 움직였다. 화면을 작은 손으로 톡톡 건드려도 보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자 아이가 금세 울상을 지었다.

-클로에, 울면 안 돼. 알렉스 아빠가 힘들잖아. 오늘 꼭 나아서 안아 줄게. 조금만 참아. 응?

“아바…. 히잉….”

입술을 비죽 비죽대기 시작하더니 금세 푸른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클로에. 어쩌지…. 울지 마. 응? 울지 마….

알렉스는 쯧, 혀를 차며 핸드폰을 자신이 받았다.

“안 되겠다. 넌 쉬어. 이러다 클로에가 너 보겠다고 보채겠네.”

-죄송해요. 얼굴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마음 쓰지 마. 금방 잘 놀 거야. 그러지 말고 너 이제 점심 먹을 때지? 식사 꼭 하고 쉬어. 네가 빨리 나아야 클로에 안아 줄 거 아니야.”

으애앵. 기어이 클로에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클로에, 울지 마. 이거 봐. 재밌지? 귀엽지 않아?”

조엘이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클로에 앞에서 딸랑이를 흔들어 댔다.

“이런…. 노아, 끊어야겠어. 이 녀석 달래고 밥 먹여야겠어.”

-네. 죄송해요.

노아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저 아이를 보고 싶어 했던 것뿐인데 저 때문에 아이가 울어 버린 게 마음이 쓰였다.

“클로에. 노아 아빠는 이제 쉬어야 해.”

-클로에, 안녕.

화면으로 비치는 노아에게 팔을 뻗으며 우는 아이를 보듬어 안은 알렉스는 핸드폰을 제 쪽으로 돌렸다.

“이제 정말 끊을게. 저녁때 괜찮아졌는지 내가 확인할 거야. 푹 쉬어.”

-네, 그럴게요.

여전히 표정이 어두워진 노아를 물끄러미 보던 알렉스는 핸드폰을 가까이 대고는 쪽, 입을 맞췄다.

“사랑해.”

낮게 속삭이는 말에 노아의 뺨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저두요.

듣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답가에 알렉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여운에 젖을 사이도 없이 으아아앙. 목청 높여 우는 아이의 울음에 알렉스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자, 맘마 먹자.”

우는 아이를 둥기둥기 어르며 알렉스는 조엘에게 짐 가방에서 클로에 젖병을 꺼내 달라고 손가락으로 지시했다.

“제가 분유 타 올까요?”

“너 애 키운 지 오래돼서 온도 맞출 수 있겠어? 그냥 내가 다녀오지.”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다른 손엔 분유가 담긴 젖병을 들고 알렉스는 집무실을 나갔다. 일하던 비서들의 시선이 알렉스를 따라 움직였다.

능숙하게 아이를 안은 알렉스가 긴 다리로 척척 움직여 냉온수 정수기가 놓인 곳으로 향했다.

알렉스는 젖병에 적절한 양의 뜨거운 물을 붓고 뚜껑을 닫아 분유가 녹도록 흔들었다. 분유가 어느 정도 녹자 이번엔 차가운 물을 부어 온도를 맞췄다. 손등에 톡톡 분유를 떨어뜨려 적절한 온도인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알렉스는 여전히 눈물을 퐁퐁 쏟아 내는 클로에를 안고 팔을 흔들며 속삭였다.

“자, 이제 맘마 먹자.”

으앙으앙 울던 클로에도 어느덧 지쳤는지 눈물을 멈췄다. 양 볼이 빨개 알렉스는 젖병을 내려놓고 아이의 뺨을 큰손으로 문질렀다.

“맘마?”

“그래, 맘마. 자.”

클로에가 또 금세 까아, 하며 즐거워했다. 아이는 단순해서 참 좋다. 희로애락이 확실한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알렉스는 모든 게 다 잘될 거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노아의 감기는 금방 나을 거고, 아이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랑스러운 웃음을 보여 주겠지.

자신에게 이런 날이 있을 거라고는 노아를 만나기 전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오메가를 싫어하던 자신이 오메가인 노아에게 각인하고 정식으로 결혼식까지 올렸다. 아이 따윈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있었는지도 이젠 가물가물하다.

젖병을 야무지게 양손으로 잡고 클로에가 분유를 쪽쪽 빠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알렉스는 클로에의 보들보들한 머리칼을 큰 손으로 쓰다듬으며 사랑스러운 아이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쫍쫍, 힘차게 분유를 빠는 클로에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하고 자애로웠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런 알렉스에게 모였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능숙하게 안고 젖병을 물린 아빠의 모습은 사람들의 호감을 듬뿍 사기에 충분했다.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에도 어느덧 미소가 어렸다.

알렉스의 시간은 매우 평화롭고 즐겁게 흘러갔다. 점심을 먹은 클로에가 커다란 두 눈을 껌뻑거리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때만 해도 말이다.

아이를 유모차에 눕히고 알렉스는 남은 서류를 처리하던 중이었다. 다급한 발걸음이 잠시 후 사무실 밖에서 들려왔다. 어째선지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오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알렉스가 뻑뻑한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다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지?

쌕쌕 잠이 든 클로에가 혹시라도 깰까 봐 알렉스는 이마를 찌푸렸다. 유모차 안을 확인하자 아이는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었다.

알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로에를 깨우기 전에 밖을 확인해야 했다.

문을 막 열기 직전,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먼저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피어에 있는 물류센터에 불이 났습니다.”

“뭐? 상황은!”

“현재 소방대가 화재 진압 중이고, 다친 직원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관계자들 호출하고, 인명 피해가 얼마나 있는지부터 파악해. 그리고 회의 준비해. 언론에서 엉뚱한 기사 내보내기 전에 미디어팀이 소방 관계자와 먼저 접촉하라고 해.”

“네. 지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내가 직접 현장으로 내려간다고 전해. 혹시 모르니까 헬기는 미리 대기시켜 놓고.”

빌어먹을. 인명 피해라니.

갑작스러운 비보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을 수습하려면 오늘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른다.

필요한 사항을 비서실에 전달하고 관계자들이 모이는 사이, 알렉스는 상황 파악을 위해 해당 사업부를 총괄하는 이사와 먼저 통화했다. 다행히 화재는 크지 않아 곧 진압이 완료될 거라는 정보를 확인했으나, 센터 내 작업장에서 난 불이라 일하던 직원 스무 명 정도가 중, 경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피해 보상 문제부터 피해액 산출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알렉스가 총수로 취임한 후 발생한 첫 사고였다. 이미 벌어진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 후속처리가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되는지에 따라 리더십을 평가받게 될 것이다.

“대표님. 회의 준비 다 끝났습니다. 지금 바로 가시죠.”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알렉스는 멈칫했다.

클로에!

큰일이 터지는 바람에 클로에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이를 어쩐다.

심각한 논의가 오가는 자리에 클로에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알렉스는 초조한 얼굴로 여전히 잠들어 있는 클로에를 내려다보았다.

“클로에는 제가 보고 있겠습니다. 무슨 일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저만 믿으시라면서 자신만만해하는 조엘을 못 미덥게 바라보던 알렉스도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지.”

알렉스는 뒷덜미를 잡아채는 듯한 기분을 애써 털어 내며 회의실로 바삐 움직였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화재는 금방 진압했다지만 하필이면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피해 숫자도 예상보다 꽤 큰 상황이었다.

“사고 난 직원들 상태는 어떻습니까.”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었고요, 대부분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다만….”

“뭡니까.”

“두 명 정도가 유독 가스를 흡입하는 바람에 상태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병원 측에다 해당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달라고 전해 주시고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집중적으로 관리하세요. 자, 이제 사고 원인으로 넘어갑시다. 시설 문제인지 인적 사고인지 파악이 됐습니까.”

“화재 원인 조사는 현재 진행 중입니다만, 현장에 나가 있는 직원 말로는 전기 합선일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겨울이라 난방기기 가동을 풀로 돌리다 보니 내부 전압 과부하가 일어나면서….”

“일 년에 두 번씩 시설 점검을 하지 않습니까. 분명 내가 기억하기로는 피어에 있는 물류센터의 경우 10월에 전체 점검을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때 확인이 안 됐던 겁니까.”

“확인했습니다. 검사 결과도 이상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이런 사고가 일어났다고? 나더러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화가 난 알렉스가 비웃었다. 자신의 계열사에서 사고가 터졌다. 시설 관리가 철저했다면 이런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고가 한번 터지면 처리해야 할 일이 늘어난다. 알렉스는 모인 이들에게 경고했다. 그 자리를 지키고 싶으면 맡은 일 똑바로 하라고.

알렉스의 서슬 퍼런 기세에 사람들이 쩔쩔맸다. 이후로 강도 높은 추궁이 이어졌다. 손실된 물건이 얼마나 되는지, 피해액은 얼마나 나올지에 관한 보고가 이어졌다.

피어의 물류 센터에서 취급하는 물건은 대다수 고가의 큰 물건들이라 피해액은 상당했다.

회의가 길어질수록 알렉스의 표정은 나빠졌다. 기분 나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는 페로몬도 회의실 공기를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사람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실질적인 피해 산출 보고가 이어지고 나서 이번엔 법무팀의 차후 대응 관련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법률적으로 이번 사고에 걸리는 부분은 없는지, 앞으로 대응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그룹 법무팀이 꼼꼼하게 확인해 알렉스에게 보고했다.

알렉스의 서늘한 기세에 사람들은 어깨 한번 제대로 쭉 펴질 못했다. 꼼짝없이 두 시간이나 쉬지 않고 회의가 이어졌다.

잠깐이라도 숨 돌릴 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 낮게 속삭이던 찰나.

똑똑똑.

누구 하나 얼씬대지 않던 회의실 문을 누군가가 노크했다.

날이 바짝 선 긴장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뭐야.”

알렉스가 툭, 하니 말을 꺼내는 순간 회의실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조엘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 대표님…. 그게…….” 조엘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으아아앙…! 어디선가 멀리 아이 울음 소리가 회의실로 파고 들어왔다.

“클로에!”

알렉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밖으로 튀어 나갔다.

“얼마나 울었어?”

“일어난 지는 한 시간 되었고요, 한 30분은 그래도 얌전히 놀았습니다만, 대표님 찾기 시작하더니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질 않아서….”

유모차 근처에는 아이를 달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알렉스는 단숨에 아이에게 달려갔다.

유모차에 누운 아이는 온 뺨을 흠뻑 적신 채로 앙앙 울어 대고 있었다.

“아바! 아바!”

눈가가 빨개질 정도로 울어 댄 아이에게 몸을 숙였다. 알렉스는 팔을 뻗어 아이를 안아 올렸다.

“클로에. 왜 울고 있어? 아빠 여기 있어. 울지 마. 뚝.”

“아바…. 으애앵….”

제 아빠를 확인하자마자 히끅히끅 울어 대며 알렉스의 셔츠를 작은 손으로 암팡지게 꼭 잡았다. 자기 놔두고 어디 갔냐며 항의라도 하듯 클로에가 옹알대며 떠들기 시작했다.

“쉬. 괜찮아. 아빠 어디 안 가. 여기 있잖아.”

알렉스는 아이의 눈물을 훔치고 안은 채로 둥기둥기 얼렀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빨갛게 짓물렀다.

“울면 바로 나한테 데려왔어야지. 애가 이렇게 울게 그냥 둔 거야?”

“중요한 회의 중이셨잖습니까. 운다고 어떻게 냉큼 애를 데리고 옵니까.”

“중요한 회의고 뭐고, 애보다 중요한 건 없어.”

“네에네에. 다 제가 잘못한 거지요.”

조엘은 억울해 죽을 것 같았지만,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는 고용주를 보니 불만을 터트리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다.

알렉스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조곤조곤 낮게 속삭였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얼굴을 한 알렉스는 아이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 주며 빨갛게 달아오른 뺨에 입을 맞췄다.

“기저귀는 갈았어? 물 먹였고?”

“네. 물 먹였고, 기저귀도 갈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알렉스는 아이를 안은 채로 회의실로 돌아갔다. 회의 도중 뛰쳐나왔으니 상황설명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고개를 쭉 빼고 밖을 보던 이들이 알렉스가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똑바로 앉아 허리를 세웠다.

“30분만 쉬었다 합시다. 그동안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알아보시고요.”

알렉스의 지시에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날 선 고용주의 시선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기뻐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회의실에서 알렉스는 클로에의 항의를 가만히 들었다. 간간이 아이에게 맞장구를 치며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30분이란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바짝 날이 서 있던 알렉스의 기분도 어느덧 누그러졌다. 아이의 사랑스러운 몸짓에 날카롭던 그의 기운은 봄날의 햇살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그리고 회의가 재개되었을 때, 알렉스의 품에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안겨 있었다.

클로에가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알렉스의 셔츠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의는 결국 아이를 대동한 채로 이어졌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거기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다녀오셨어요?”

유독 길었던 하루를 마치고 귀가한 알렉스 앞에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이가 자신을 맞이했다.

아바! 알렉스의 품에 안겨 있던 클로에의 반가운 손짓을 노아가 확인하기도 전에, 알렉스는 제 오메가를 끌어안았다.

“알렉스…?”

의아해하는 노아의 물음은 곧 입안에 삼켜졌다. 뜨거운 살덩이가 입안에서 엉켰다. 놀란 듯 잠시 움츠렸던 노아의 것도 이내 점막을 휘젓는 알렉스의 혀를 수줍게 얽어 왔다.

알렉스는 노아의 허리를 좀 더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달콤한 숨결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이것이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언제나 저를 충만한 행복 속에 가둬 두는, 수줍고 때로는 녹아내릴 듯이 진득하게 달라붙는 페로몬.

알렉스는 종일 긴장했던 피로가 싹 풀렸다. 질척하게 뒤섞이는 두 사람의 혀는 이제 누구 것인지 모를 정도로 하나가 되어 엉켰다.

다디단 타액을 흠뻑 빨고 나서야 알렉스의 다급한 움직임은 느슨하게 바뀌었다. 가지런한 치아를 훑자 노아가 셔츠를 꽉 쥐어 온다. 읍, 읍. 목 안으로 숨을 삼키는 이 요령 없는 제 오메가의 사소한 몸짓에 알렉스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붙은 입술 안에서 미소가 번졌다. 나른하게 입천장을 슥, 하고 핥아 올리자 노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와 동시에 알렉스의 턱에 탁, 하고 작고 따스한 손이 닿았다.

“아바! 아우우!”

고개를 내리자 눈을 동그랗게 뜬 클로에가 알렉스와 노아를 번갈아 본다. 설핏 기울어지는 머리통을 보는 순간 알렉스는 이번에야말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

“클로에….”

쑥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노아가 아이의 손을 잡아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알렉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양팔로 꼭 끌어안았다. 똑같이 작고 사랑스러운 머리통에 쪽쪽 대며 입을 맞췄다.

“오늘 힘드셨어요?”

“아니. 무척 즐거웠지.”

“아바!”

클로에가 크게 동의하며 팔을 파닥거렸다.

알렉스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신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노아와 클로에를 더욱 제 품 안에 가두었다.

[결혼 계약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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