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
부드럽게 온몸을 감싸 내부로 파고드는 페로몬에 노아는 달콤한 숨을 내뱉었다.
나른함에 젖어 드는 그때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아….”
“왜? 어디 아파? 페로몬 거둘까?”
“아니, 그게 아니라….”
배 속을 부드럽게 유영하듯 부르르 떨리는 느낌에 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도 기분이 좋은가 봐요.”
임신 8개월째로 잔뜩 부른 노아의 배를 매만지던 알렉스가 잠시 멈칫하더니 상체를 숙였다.
“노아 힘들게 하지 말고 얌전히 자.”
배 속 아이에게 으름장을 놓는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겉으로도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이의 발길질이 노아의 뱃가죽을 뚫을 것처럼 꿈틀거렸다. 알렉스는 발길질해 대는 아이의 움직임을 진정시키듯 천천히 배를 문질렀다.
“힘든 거 아니에요.”
“넌 늘 그렇게 말하잖아. 배 속에서 애가 움직이는데 안 괜찮을 수가 있어?”
거짓말하는 거 뻔히 안다는 얼굴로 알렉스가 가볍게 노아의 뺨을 톡 건드렸다.
“정말 괜찮은데….”
아이의 태동을 공유할 수 있다면 알렉스도 걱정하지 않을 텐데. 노아는 조금 아쉬웠다.
부드럽게 배를 쓰다듬는 손길에 몸을 맡겼다. 발길질하던 아이도 금세 얌전해졌다. 나른한 행복감에 노아는 팔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알렉스의 부드러운 페로몬이 흔적을 남기듯 노아의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숙였던 몸을 일으킨 알렉스가 노아를 꼭 감싸 안았다. 넓고 단단한 가슴에 완전히 몸이 파묻혔다. 결혼 직후 알렉스의 부작용도 어느 정도는 완화되어 예전 체격을 되찾은 그의 두툼한 가슴팍에 노아는 안정적으로 몸을 기댔다.
노아는 그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는 이때가 좋았다. 부드러운 페로몬의 향기 속에 문득문득 성마르게 파고드는 그의 손길이, 자신을 욕심내는 것 같아서.
알렉스의 손이 등줄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의 페로몬이 좀 더 짙어졌다. 노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셔 자신의 깊숙한 곳까지 그의 페로몬이 스며들도록 했다. 아랫배가 꿈틀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몸이 점점 나른해졌다. 노아는 느릿하게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이마에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내 쪽, 하고 가벼운 키스가 이어졌다.
속눈썹에 내려앉은 입술은 발그레한 뺨으로 내려왔다. 그가 좀 더 몸을 바짝 붙여 왔다.
고개를 든 노아는 그 순간 빠르게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배를 쿡쿡 찌르는 묵직한 질감에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페로몬이 짙어졌네.”
“이, 이건 알렉스가….”
우물거리며 대답하는 입술을 가로막듯 그의 입술이 닿았다. 쪽쪽, 가볍게 닿은 입맞춤은 금세 노아를 달뜨게 했다.
그의 혀가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을 핥았다. 도톰한 살덩이는 이내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등을 쓰다듬던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와 맨살을 더듬는다.
달뜬 신음이 그의 혀에 먹혔다. 속절없이 그에게 휩쓸린 입맞춤은 한층 깊어졌고, 맨살을 더듬는 손길은 좀 더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쉽게 달아오르는 건 임신 때문일까. 알렉스는 문득 그게 궁금해졌지만 이내 자신을 미치게 하는 다디단 향기에 정신을 빼앗겼다.
“네 몸은 설탕으로 만들어졌나 봐.”
“으, 읏….”
제 오메가의 신음에 알렉스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아랫배가 단단해졌고 발기한 성기는 바지를 밀어내며 존재감을 뽐냈다.
알렉스에게 매달리듯 노아가 팔을 뻗어 목에 감았다. 감겨 오는 노아에게서 좀 더 농도 짙은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양 뺨을 빨갛게 물든 노아의 푸른 눈동자가 열감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알렉스….”
그 순간 알렉스는 완전히 흥분하고 말았다. 그는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이제 제 아래에서 젖은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노아를 내려다보며 알렉스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러지 않으면 임신한 노아를 엉망으로 안아 버릴 것 같았다.
“싫으면 언제든 말해. 참지 말고, 응?”
말투는 다정하지만 그의 눈엔 욕망이 그득했다. 노아가 대답할 새도 없이 알렉스는 재빠르게 노아의 상의를 벗겼다. 눈 깜짝할 새 파자마 바지도 벗겨 침대 아래로 내던졌다.
온몸을 빨갛게 물들인 노아가 부끄러운 듯 잠시 몸을 움츠렸다.
먹잇감을 앞에 둔 짐승처럼 그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로 노아가 알렉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넘어가지 않을 알파가 있을까.
알렉스는 순식간에 뒷덜미가 오싹 저렸다. 욕망은 강렬한 자극이 되어 알렉스를 부추겼다.
그는 곧장 긴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었다. 혀로 살갗을 길게 핥고 가볍게 입술로 모아 쪽쪽 빨아 당겼다.
“읏.”
달짝지근한 페로몬이 진득하게 녹아들었다. 알렉스는 숨을 크게 흡 들이마시며 감질나는 페로몬을 음미했다.
“아, 알렉….”
농밀한 신음을 터트린 노아가 알렉스에게 달라붙었다. 살점이 딸려오도록 거세게 살갗을 빨고 잘게 떨리는 옆구리를 더듬었다. 쭉 올라간 그의 큰손은 유독 도드라진 유두를 엄지로 비볐다.
“흐읏.”
쾌감에 녹아든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알렉스는 제 오메가의 온몸을 손으로 더듬고 꼬집었다. 손바닥을 이용해 보드라운 살결을 마음껏 주물렀다.
손이 지난 자리에 어김없이 입술이 내려왔다. 녹진하게 녹아내리는 몸을 알렉스는 혀로 맛보았다. 노아의 허리가 뒤틀렸다.
“아. 아! 으….”
신음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노아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할딱거리는 숨이 알렉스의 귓가를 쉼 없이 때렸다.
점점 치달아 오르는 성감에 알렉스는 후, 숨을 한번 내쉬었다. 살짝 부풀어 오른 배를 문지르자 노아의 허벅지가 잘게 떨렸다.
“알렉스! 아, 아아.”
배를 내리누르지 않으려 몸을 살짝 띄웠다. 입고 있던 잠옷을 다급하게 벗어 던졌다. 속옷을 끌어 내리자 성난 성기가 튕기듯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알렉스는 노아의 허벅지를 갈라 그사이에 자리 잡았다.
귀두는 한껏 부풀었고 핏줄이 불거진 기둥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딱딱하게 발기했다.
임신 때문에 유독 도톰한 유두를 한입 가득 물고 쪽쪽 빨았다. 노아의 허리가 금세 튀어 올랐다.
“아, 아앗.”
달짝지근한 향이 진득하게 알렉스에게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침실 공기가 묵직하고 농밀한 향으로 가득했다.
“앗. 앗.”
알렉스가 손을 대고 혀로 빨 때마다 노아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매끄럽고 하얀 육체가 금세 알렉스의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복부가 단단해졌다. 척추를 따라 꾹꾹 더듬던 손은 볼록 솟은 엉덩잇골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침입을 거부하듯 꽉 닫힌 주름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자, 구멍이 왈칵 젖었다.
“물이 흥건해. 언제 이렇게 젖었어?”
“아, 아니…. 흐, 아아. 아앗….”
“아니긴. 임신해서 그런가? 살짝 건드렸는데도 금세 이렇게 물을 흘리잖아.”
부끄러운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노아가 눈가를 적셨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발기한 노아의 것이 질금질금 정액을 흘리고 있었다.
제 눈앞에서 흐트러진 노아의 모습에 온몸이 짜릿해졌다. 사나운 알파의 본능이 당장 눈앞의 반려를 제 것으로 하라고 아우성쳤다.
후. 짧게 숨을 토해 낸 알렉스는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쾌락에 젖어 가는 걸 감상하다간 제 반려의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알렉스?”
“조심해야 하니까.”
노아의 등이 가슴에 닿도록 끌어안았다.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알렉스는 발딱 서서 질금질금 정액을 흘리는 노아의 것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 아아. 아! 아!”
미끌거리는 성기를 위아래로 몇 번 쓸어 주자, 금세 울음 섞인 신음을 토해 냈다. 불끈 솟은 제 성기를 엉덩잇골 사이로 밀어 넣어 허리를 앞뒤로 흔들어 주었다. 주름이 움찔움찔 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아…!”
손안의 성기가 순간 파르르 경련하며 정액을 토해 냈다. 노아가 여운에 젖을 사이도 없이 알렉스는 곧바로 흥건한 구멍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방금 노아가 토해 낸 정액이 윤활제가 되어 금세 손가락 두 개를 집어삼켰다.
“아. 아직, 나, 아직…! 아아!”
알렉스는 먹음직스러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혀로 목덜미를 길게 핥고 살갗을 빨았다. 구멍을 푹푹 쑤시는 손가락은 금세 세 개로 늘어났다. 구멍에서 흘러내린 애액이 손가락을 타고 하얀 허벅지 사이로 흘러내렸다. 알렉스의 성기는 금세 터질 것만 같았다.
“읏.”
알렉스의 턱이 단단해졌다. 구멍을 쑤시던 손가락을 슥 잡아 빼자, 내벽이 딸려 나오듯 움찔거렸다.
욕망은 한계에 다다랐다. 성기는 당장이라도 구멍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알렉스는 노아의 왼쪽 무릎 뒤를 잡아 올렸다.
“아, 알렉스, 아, 아기….”
“심하게 안 해. 조금만, 조금,”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알렉스는 다른 한 손으로 제 성기의 뿌리를 잡고 흥건하게 젖어 번들거리는 구멍에 귀두를 맞추고 천천히 밀어 넣었다.
“하아앗!”
손가락으로 풀었다고 해도 큰 성기를 품기엔 구멍이 빠듯했다. 귀두를 압박하는 조임에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파들파들 떠는 노아의 목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성기를 느릿하게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힉. 흐. 아. 아아!”
노아의 고개가 휙 뒤로 젖혀졌다. 알렉스는 땀으로 젖은 노아의 이마에 키스를 해 대며 쫄깃하게 달라붙는 내벽으로 성기를 파묻었다. 성기 뿌리를 감싼 손 덕분에 완전히 넣진 않았다. 제 것은 너무 크고 노아의 안은 지나치게 좁았다. 깊은 안쪽까지 쑤셔 넣고 싶은 욕망에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뒷덜미가 저릿저릿했다.
“아아…!”
노아의 귓불을 잘게 씹어 대며 알렉스는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구멍은 황홀할 정도로 성기를 씹어 댔다. 당장이라도 거칠게 내달리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알렉스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왼쪽 무릎을 들어 올렸던 손을 놓았다. 노아의 배를 감싸듯 뒤에서 끌어안고 알렉스는 느릿하게 허릿짓을 했다.
“알렉, 깊, 어…. 아, 아기…, 아기가….”
“쉬이. 괜찮아. 다 안 넣었어. 끝까지 닿지 않았어.”
시트를 쥐어뜯고 있는 노아의 팔을 잡아 뒤로 제 것을 만지게 했다. 알렉스의 오른손이 성기의 뿌리를 잡고 있는 걸 확인시켰다.
노아의 몸은 이미 축축하게 젖었고, 쾌락으로 잘게 떨렸다. 알렉스는 여전히 한 손으로 제 성기의 뿌리를 잡고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볼록 솟은 유두를 잡아당기자 노아가 참지 못하고 교성을 내질렀다.
“알, 알렉…, 아아.”
울음 섞인 신음이 알렉스의 뒷덜미를 강타했다. 후욱. 알파의 흥분이 고스란히 담긴 거친 숨소리가 이어졌다.
알렉스는 거칠게 성기를 잡아 빼고는 노아의 몸을 잡아 돌렸다.
잔뜩 굶주린 짐승처럼 알렉스는 제 오메가의 페로몬이 가장 짙은 부분으로 달려들었다.
“아! 아, 아니…. 거기, 싫…! 아아!”
뭘 쌌는지도 모를 정도로 흠뻑 젖은 성기를 덥석 물자 노아가 자지러졌다. 허리를 들썩거리며 눈물을 퐁퐁 쏟아 냈다.
설탕을 졸이고 졸인 듯한 진득한 단내가 비강을 후드려치며 알렉스의 뇌를 녹여 냈다. 정액마저 달았다. 알렉스는 몸서리치는 노아의 허벅지를 쫙 옆으로 벌리고 허리를 뒤틀 때마다 흔들리는 고환을 주물 거리고 파들파들 떨며 질금질금 정액을 흘리는 성기를 쪽쪽 빨았다.
“아앗…! 으, 흐읏. 아, 안 돼…, 거기, 더러워. 으웃!”
“너한테 더러운 곳은, 한 군데도 없어.”
성기를 문 채로 웅얼거리자, 노아가 또다시 교성을 내지르며 허리를 비틀었다.
“아, 이, 이상, 해…. 떼, 주…! 나, 나왓…! 알렉, 스! 제, 제발…! 아아아아!”
그 순간 입안의 성기가 단단해지더니 핏핏, 묽은 체액을 토했다. 비릿한 맛이 입안 가득 찼다. 꿀꺽.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그것을 삼켰다.
“하아앗! 흐, 흐윽. 나, 싸, 쌌는…, 그, 그걸 왜…!”
히끅. 히끅 눈물을 터트린 노아가 엉엉 울었다. 발가락을 오므리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꿈찔 거리는 사이, 알렉스는 흠뻑 싼 노아의 것을 샅샅이 핥았다.
그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못 참겠어. 아프면 말해.”
잇새로 으르렁대며 알렉스는 노아를 안아 제 허벅지에 앉혔다. 제 것은 이미 핏줄이 바짝 돋아, 위협적으로 커졌다.
양손으로 움찔, 경련하는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꺼떡거리는 성기에 구멍을 맞추었다.
“아. 아앗! 흐으응, 읏. 으….”
목이 꺾일 정도로 노아의 몸을 높게 띄운 알렉스는 흥건하게 젖은 구멍으로 굵은 남근을 삽입했다.
“알렉스!”
울음 섞인 신음이 곧장 터져 나왔다. 이미 한 번 제 것을 품었던 곳은 오물거리며 성기를 꽉꽉 물어 댔다. 뇌수까지 녹아내릴 것 같은 강렬한 쾌감이 밀려왔다. 발끝까지 찌릿한 감각에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좁고 습한 내벽을 가르며 꾸욱,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아아. 아, 으, 읏…! 알, 알렉…! 나, 나 힘들…! 흐윽….”
허우적대는 두 팔이 알렉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눈물을 퐁퐁 쏟아 내는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제 오메가의 애원이 알렉스에겐 쾌락을 부추기는 노래였다. 그의 잿빛 눈이 한층 어둡게 빛났다. 눈동자에 일렁이는 욕망은 이미 제어를 잃었다.
“하아앗!”
노아의 몸이 크게 뒤척였다. 알렉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노아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노아의 것이 또다시 발기해 알렉스의 단단한 배에 탁탁 부딪혔다.
알렉스는 노아의 허리를 받친 채로 힘 있게 허릿짓을 시작했다.
“아, 흐흣. 으. 으읏! 깊, 깊…! 아아!”
그의 두툼한 가슴팍이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힘껏 허릿짓을 할 때마다 그의 단단한 엉덩이가 움푹 팬 보조개 자국을 드러냈다. 꽉 죈 등 근육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듯 꿈틀거렸다.
“아, 읏. 읏!”
그에게 꿰뚫린 채 노아는 그저 바르작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아래를 쑤시는 성기가 내벽을 찌를 때마다 발가락 끝은 쉴 새 없이 오므라들었다가 쫙 펴지길 반복했다.
퍽퍽. 안을 쑤시는 행위가 강해질 때마다 밀려드는 쾌감을 어쩌질 못하고 노아의 몸은 그저 잔 경련을 할 뿐이었다. 구멍이 오물대며 알렉스의 크고 단단한 성기를 물어 댈 때마다 그의 허릿짓은 한층 빨라졌다.
힘 있게 허리를 밀어 넣고 잡아 빼길 수차례, 노아의 발끝이 쫙 펴지더니 발기한 성기가 점도도, 색도 없는 묽은 액을 핏, 핏, 쏟아 냈다. 알렉스의 가슴과 턱까지 체액이 튀었다. 쾌감에 넋을 놓은 노아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눈물범벅이 된 노아의 두 눈이 감겼다. 절정까지 내달리던 알렉스가 그제야 화들짝 놀라 제 것을 잡아 뺐다.
“노아?”
천천히 노아를 침대에 눕혔다. 절정을 코앞에 둔 성기는 흉흉하게 불거진 채로 꺼떡거렸다. 알렉스는 제 것을 손에 쥐고 거칠게 훑었다. 손에 압박감을 더해 빠르게 훑어 내자, 척추가 오싹 저리는 감각이 밀려왔다. 곧이어 복부가 단단해지며, 노아의 배 위로 하얀 정액을 토해 냈다.
“하아.”
알렉스는 몸을 숙였다. 완전히 탈진한 노아의 몸을 누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부둥켜안았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그곳에 입을 맞췄다.
오똑한 콧날에도, 눈물범벅이 된 젖은 속눈썹에도 입술을 대었다. 오동통한 뺨과 귓불에도 쪽 입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그 입술은 도톰하고 붉은 입술에 꽤 오래 머물렀다.
한 번 쏟아 냈음에도 여전히 제 것은 수그러들지 않았으나, 알렉스는 제 오메가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끈따끈 열기를 품은 노아를 한참 끌어안고 있던 알렉스는 잠시 후 기절한 노아를 안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아쉽지만 이제는 제 오메가를 씻기고 재워야 할 시간이었다. 물론 이미 잠이 든 것 같지만 말이다.
“예정일이 언제라고?”
“이제 6주 남았어.”
루시가 준비해 준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먹으며 노아가 대답했다. 산달이 다 되어 가는 배는 이제 옷으로도 감춰지지 않을 정도로 부풀었다.
부풀어 오른 배가 걸려 비스듬히 기댄 노아를 신기한 듯 카일이 바라보았다.
“터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만져 볼래? 요즘 아이가 자주 발차기를 해. 축구선수가 되려나 봐.”
카일은 조심스레 팔을 뻗어 볼록 솟은 배를 살살 문질렀다.
“아이 성별은 확인했어? 뭐래? 여자아이? 남자아이? 난 여자아이였으면 좋겠어. 남자아이는 키우기 힘들다고 하더라고.”
“성별은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어. 난 그냥 건강하기만 하면 돼.”
“그놈도 같은 의견이야? 그 자식이야 후계자도 필요할 거고….”
알렉스를 부르는 호칭에 노아의 눈이 뾰족해졌다. 제 알파를 욕하는 말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너한테야 소중한 알파지만, 나한텐 아니거든?”
“왜 그렇게 알렉스가 싫어? 알렉스도 너 탐탁지 않아 하고…. 난 둘이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절친의 배우자랑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별로 없어. 그리고 난 그렇게 거만하고 잘난 체하는 놈들은 딱 질색이거든?”
“알렉스는 거만하지 않아. 얼마나 다정한데….”
“그거야 당연히 네가 각인한 상대니까 그렇지! 너한테 다정하다고 좋은 사람인 건 아니잖아.”
“좋은 사람 맞는데….”
기어이 꿍얼거리며 알렉스 편을 드는 절친에게 배신감마저 든 카일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에 퍽퍽 가슴을 쳤다.
“너 고생시킨 과거는 아주 잊었지? 이 답도 없는 호구야. 잘 들어라, 꼬맹이. 넌 네 아빠 같은 호구로 태어나면 안 된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배 속 아이에게 카일은 당부에 또 당부했다. 사람은 적당히 약고 이기적으로 굴어야 한다며 진지하게 충고했다.
노아는 그런 카일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둘이 가까워지는 건 무리인가.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들이라 좀 더 편안한 관계가 되었으면 했다. 한쪽만이라도 노력하면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알렉스 쪽도 카일 얘기만 나오면 마음에 안 든 티를 내며 이마를 찌푸려 대니 아무래도 둘이 가까워지는 건 요원한 듯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육아는 네가 해? 되게 힘들다던데….”
습관적으로 쿠키를 집어 든 노아는 그게…, 하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데 알렉스가 반대해.”
노아는 아이를 남에게 맡겨 키운다는 걸 단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육아는 제 몫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익히기 위해서 닥터 셰먼이 알려 준 육아교실에 등록해 이수까지 했다. 이건 알파도 함께 교육받는 게 좋다고 해서 알렉스와 함께 육아 수업을 받았는데 그게 잘못됐던 걸까.
안 그래도 알렉스는 노아가 깨어질까, 부서질까 노심초사하는 사람이었다. 육아가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 제대로 알게 되자 노아가 직접 육아하는 것에 결사반대를 외쳤다. 상류층 사람들은 원래 전담 보모를 두고 아이를 기른다면서 굳이 직접 육아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며칠째 팽팽하게 대립하던 찰나, 결국 노아가 한발 물러났다. 그러면서 겨우 합의한 게 입주 보모가 아니라 낮 동안 봐줄 보모를 구하자는 거였다. 아무래도 아이를 온전히 남의 손에 맡겨서 키우는 건 내키지 않았다. 낮 동안 육아를 도와줄 전문가를 고용하고 밤에는 두 사람이 함께 아이를 키우자는 것까지 의견 일치를 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그럼 보모를 두는 거야? 하긴, 상류층 사람들은 자기들이 직접 애 안 키운다더라. 아예 육아 전문가를 둔다며? 그러기로 한 거야?”
“그게…. 일단 지원서를 다 받았거든. 다들 대단한 경력이고 추천서도 어마어마하더라고. 근데….”
“왜? 뭔가 내키지 않아?”
“그래도 우리 아이를 봐줄 사람이잖아. 적어도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구하고 싶거든. 알렉스는 철저히 이력서와 추천서 위주로 사람을 추렸는데… 나는 그게 좀 인간미도 없고…, 확신이 들질 않아서…….”
“인터뷰는 했을 거 아니야. 개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어?”
“응…….”
다들 너무 대단한 이력이고, 경력증명서도 엄청 화려했다. 간호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유명한 정치가의 자식을 키웠던 사람도 있었다. 유명한 셀럽의 보모로 일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추천서는 하나같이 좋은 얘기가 적혀 있었고, 알렉스가 알아본 바로는 추천서에도 거짓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력서만 보면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의욕도 넘쳤고 성격도 다들 좋아 보였지만 딱 이 사람이다, 하고 결정을 내릴 만한 사람은 없었다.
“너 너무 네 기준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 자식이 대충 사람을 골랐을 리도 없고 다들 경력은 좋을 거 아니야. 넌 그냥 네가 키우고 싶으니까 다 싫다고 어깃장 놓고 있는 거 같은데….”
“알렉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 그거 아닌데….”
육아 초보인 자신이 우왕좌왕하는 것보단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다는 건 노아도 인정했다. 아이에게 최고의 환경을 만들 수 있다면 보모를 몇 명이나 두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내키지 않으면 하지 마. 그러다 정 힘들면 나중에라도 구하면 되지. 그리고 어차피 지금은 아직 시간이 있잖아?”
“응. 참! 샘이 아기 침대 보내 주셨는데 볼래? 엄청 튼튼하고 좋아.”
“결혼식에도 참석했었지? 목수라고 했던가?”
“실력이 엄청 좋아. 주문제작 가구를 만드는데, 주문이 항상 밀려 있다고 하더라고.”
노아가 일어나려 낑낑거리자 카일이 부축했다. 배가 무거워지고 나서부터는 제 몸인데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노아는 카일과 함께 아기방으로 올라갔다. 아기방은 알렉스의 침실 바로 옆방에 꾸몄다.
“2층은 처음 올라오네.”
“응. 바로 옆방은 침실이고, 여기가 아기방이야.”
노아는 아기방의 문을 열었다. 푸른색의 벽지와 알록달록한 모빌, 그리고 온갖 장난감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물건이 왜 이리 많아?”
“으응…. 알렉스가 퇴근할 때마다 자꾸 뭘 사 와서….”
“아….”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 머쓱해하며 노아는 아늑하게 꾸며진 아기 침대로 다가갔다.
“이것 봐. 엄청 근사하지?”
샘이 만들어 준 침대는 단순한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곳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곳이 없었다. 빈틈없이 꽉 맞물린 나뭇결과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촘촘한 기둥. 커다란 몸체는 우직하지만 단단하고 심지어 실용적이어서 노아의 마음에 쏙 든 물건이었다.
“아이가 쓸 거라 못질이 된 곳이 하나도 없대. 다 구조를 짜고 끼워 맞추는 식으로 만들었다고 했어.”
“아, 그래? 뭐… 보기에 엄청 튼튼해 보이긴 한다.”
아기 침대가 대단해 봐야 뭐가 그리 대단하겠냐는 얼굴로 카일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곧 아이를 낳을 노아야 아이가 쓸 물건 하나하나에 감탄하겠지만, 아이 낳을 생각 따윈 없는 카일에겐 그다지 와 닿지 않는 얘기였다. 하지만 신이 나 눈을 반짝거리는 노아 앞에서 굳이 산통을 깨고 싶진 않아 적당히 맞춰 주며 카일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아이에게 위험한 건 하나도 없었고, 딱 알맞게 공간을 꾸려 놓았다.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웠고 일관성을 갖춘 훌륭한 공간이었다. 카일는 여전히 신이 난 노아를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내내 고생만 하던 제 절친이 결혼만큼은 잘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 자식은 마음에 안 들지만, 적어도 돈에 쪼들리며 늘 몸을 쪼그리고 살 때와는 다르겠지.
뽀얗게 살이 오른 얼굴만 봐도 흐뭇하네.
“이건 아기 그넨데, 요즘은 이것도…. 왜 그런 눈으로 봐?”
아이가 쓸 물건 하나하나 소개하던 노아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되게…, 엄마가 나 보면서 웃는 거 같아.”
“엄마가 뭐야? 나더러 엄마 같다는 거야?”
“아니, 네 표정이 그래서….”
노아는 금세 눈을 뾰족하게 세우는 카일에게 배시시 웃었다. 늘 제 걱정만 하던 카일이 이제야 조금 안심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나 비웃지 마. 나중에 너도 애 가지면….”
“그럴 일 없다.”
뒷말을 채 잇기도 전에 카일이 냉큼 말을 잘랐다.
“왜? 아이, 낳을 생각 없어?”
“상대도 없는데 무슨 애야? 그리고 난 서른 전엔 결혼 생각도, 애 낳을 생각도 없어. 인생은 즐기는 거야. 세상에 내 취향의 알파들이 그렇게 많은데 뭐 하러 한 명한테 얽매여?”
마음껏 연애하며 살겠다고 호기롭게 외치는 카일의 말에 노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연애주의자인 카일다운 대답이었다. 인기가 많았던 카일이 스테디한 상대를 만든다는 게 사실 잘 상상이 안 가기도 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카일이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입 밖으로 꺼내면 당장 눈을 뾰족하게 하고선 자신을 노려볼 거 같아서 노아는 목구멍으로 꾹 눌러 삼켰다.
“잘 꾸며 놨네. 근데 너 애 낳고 나면….”
카일이 뭔가 말하려던 그때, 노아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하자마자 노아가 활짝 웃었다.
“미안. 나 전화 좀….”
괜찮다면서 카일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알렉스.”
-뭐 하고 있었어?
“카일이 놀러 와서 아기방 구경 중이에요.”
-그 자식은 일도 안 갔대? 한가한가 봐?
퉁명스러운 말투에 노아는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알렉스는 여전히 카일을 못마땅해했다. 왜 그렇게 못마땅해하냐고 물었더니, 내 오메가 곁에 붙어 있는 이물질을 신경 안 쓰는 알파가 어디 있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카일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켰더니, 다행인 줄 알라면서 툴툴거렸다.
결혼식 후 알렉스의 각인부작용도 서서히 나아졌다. 입덧도 점차 사라져서 지금은 본래의 건강을 되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알렉스는 잠을 자지 못했다. 배가 당겨서 끙끙거리다 잠에서 깨어나면 잠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가 노아를 보살펴 주었다.
그런 밤이면 노아는 그를 끌어안고 페로몬을 개방해야 했다. 물론 그러다 잠들기 일쑤라 제대로 그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몸은 괜찮아? 아픈 데는 없어? 배는 안 당겨?
“네. 괜찮아요.”
-아, 그리고 주말에 보모 인터뷰를 할 거야. 해리스가 추천한 사람인데 신원은 확실하다고 하니까 한번 보자고 했어. 이력은 지금까지 본 사람들에 비하면 보잘것없긴 한데, 경험은 확실히 많더군. 나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 제일 중요한 건 네 의사니까, 만날 약속을 잡았어.
“잘됐네요. 해리스 씨가 추천하신 분이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오늘은 7시쯤 퇴근할 거야. 그보다… 먹고 싶은 건 없어?
“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없어요.”
-잘 생각해 봐. 새벽에 먹고 싶다고 하지 말고.
노아는 곰곰이 생각하다 문득 전에 다니던 직장 근처 카페에 진열된 큼지막한 시나몬 롤이 떠올랐다. 늘 빠듯한 돈으로 생활했던 터라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다.
“전에 일하던 물류센터 근처에 허니 앤 슈가 베이커리라는 카페가 있는데요…. 거기서 파는 시나몬 롤이 있어요. 아이싱이 듬뿍 뿌려진 시나몬 롤이에요.”
-알았어. 사 가지고 들어갈게. 그것 말고는 없어?
“네. 없어요.”
-입맛도 참….
쯧, 짧게 혀를 차더니 알렉스가 알았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노아는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매일 벌어지는 일상이었다. 퇴근 전 먹고 싶은 걸 확인하는 알렉스의 전화에 노아도 처음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특히나 알렉스가 자신을 대신해서 입덧을 겪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선 더더욱.
하지만 모두가 잠든 새벽, 불현듯 뜬금없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들이 떠오르는 날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알렉스가 새벽에 달려나가는 일을 몇 번 반복하자 노아는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알렉스를 도와주는 거라는 걸 깨닫고는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
“통화는 끝났어?”
물끄러미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노아의 등 뒤로 카일이 다가왔다.
“응.”
“이제 곧 들이닥치겠군. 난 가야겠다. 그 자식하고 마주치고 싶지 않아.”
“벌써…? 저녁 먹고 가지.”
모처럼 만난 카일이 벌써 돌아간다고 하자 노아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왜 그런 얼굴이야? 곧 네 파트너가 올 텐데 그 자식이랑 놀아. 난 부부 사이에 끼어서 노는 취미는 없어.”
시무룩한 얼굴을 톡 건드리며 카일이 이마를 찌푸렸다.
“무거운 몸으로 뭘 나와? 배웅 안 해 줘도 돼.”
“그래도….”
배웅하는 노아를 거절하지 못한 카일은 어쩔 수 없이 노아를 부축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이제 들어가.”
“너 출발하는 거 보고 들어갈게.”
노아는 현관 앞에 세워둔 카일의 낡은 차까지 따라나섰다. 추운데 괜히 나온다며 카일이 차 앞에서 노아의 옷깃을 여며 주며 툴툴거렸다.
“너 감기라도 걸리면 그 자식 볼 면목이 없어지니까 빨리 들어가.”
“응. 조심해서 들어가.”
노아는 금방 들어갈 거라고 답하며 꿋꿋하게 버티고 섰다. 이내 시동이 걸리고 카일이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그럼 나 간다. 나중에 또 봐.”
“응.”
출발이 지연될수록 노아가 밖에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질 걸 아는 카일은 지체하지 않았다.
털털거리며 고물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멀어지는 고물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노아는 아쉬움에 한숨을 삼켰다.
카일이 모는 차는 이미 수명이 다한 지 오래였다.
자신이 어려울 때 아낌없이 도와준 친구에게 노아는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알렉스가 준 쓰지 않는 아파트에 머무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다가 카일이 불같이 화를 내는 바람에 더는 말도 못 꺼냈다. 차라도 바꿔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거절할 게 뻔해서 홀로 마음만 삭였다. 전에는 여유가 없어 도와주고 싶어도 못 도와줬는데 지금은 도와줄 여유가 있는데도 카일이 거절해서 아무것도 못했다.
안타까움에 발만 동동 구르던 노아에게 들러리용 슈트를 고급으로 맞춰 주자고 한 건 알렉스였다.
들러리 의상 비용은 신랑 측에서 준비하니 이건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알렉스가 알려 줬다. 결국 노아가 카일에게 선물한 건 들러리용 슈트 한 벌이었다.
카일은 이 옷 비싼 거 아니냐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상류층 결혼식이니 이 정도는 하나 보다, 며 적당히 넘어갔다.
탈탈거리며 달리는 고물차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노아는 서늘한 어깨를 양팔로 감싸 안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차가 저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본래 퇴근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날이 추워지면서 해가 짧아져 붉은 노을이 저택을 감싸고 있었다.
알렉스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나몬 롤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내딛는 걸음이 어쩐지 다급하다.
곧 제 오메가를 품에 안을 수 있으리라. 오직 그 사실 하나만이 알렉스의 가슴을 뛰게 했다.
노아를 되찾고 나서도 알렉스의 목마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 오메가를 저택에만 가두고 오로지 저만 바라보게 하고 싶은 욕구로 속이 뒤집혔다. 허나 노아는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행여나 미움이라도 받았다간 겨우 저를 받아 준 노아를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다.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고 숨이 턱 막혀 왔다. 미칠 듯 끓어오르는 소유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알렉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제 오메가가 겁내지 않도록 말이다.
알렉스는 두 계단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갔다. 어서 빨리 제 오메가를 끌어안고 그 달짝지근한 향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싶었다.
다급한 걸음은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노아.”
알렉스는 문을 벌컥 열었다. 제 오메가를 찾는 시선이 바빴다. 넓은 방을 눈으로 쭉 훑자, 찾던 이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스는 금세 노아가 어디 있는지 찾아냈다. 방의 오른쪽, 욕실에서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는 가져온 시나몬 롤을 탁자 위에 두고 욕실 문을 두드렸다.
“노아. 안에 있어?”
상대가 대답하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문을 열었다.
“알렉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던 노아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퇴근 시간이 아니었으니 놀랄 만했다.
“아직 퇴근 시간이 안 됐…. 아.”
성큼 내딛는 걸음은 순식간에 노아 앞에 도착했다. 알렉스는 종일 그리워했던 노아를 끌어안고 놀란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놀라서 멈칫하던 노아가 팔을 뻗어 허리를 마주 안았다.
성급한 입맞춤은 이내 부드럽게 바뀌었다. 보드라운 점막을 느리게 훑자 노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다디단 타액을 부드럽게 빨았다. 젖은 혀가 서로 뒤엉켰다. 헐떡거리는 노아의 숨결마저 모조리 삼킬 것처럼 알렉스는 집요하게 입안을 핥고 빨아 댔다.
욕심껏 진탕 안을 휘젓고 나서야 목구멍이 갈라질 것 같은 갈증이 가라앉았다.
알렉스는 여린 살을 부드럽게 핥고는 마지막으로 입천장을 훑었다.
“하아….”
쪽. 쪽. 키스로 촉촉하게 젖은 입술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다녀왔어.”
입술이 맞붙은 채로 알렉스는 속삭였다. 가슴을 씨근거리며 노아가 뺨을 붉혔다.
“어서 오세요….”
속삭이듯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쩍쩍 갈라지던 제 심장을 살살 녹였다. 비로소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도달한 알파는 만족의 웃음을 지었다.
일이고 뭐고 당분간 육아 핑계 대고 한 몇 년쯤 쉬어 버릴까. 알렉스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알렉스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노아의 볼록 솟은 배를 내려다보며 부축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일찍….”
“네가 보고 싶어서. 그럼 안 돼?”
태연하게 내뱉는 말에 노아의 뺨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알렉스를 잡은 손이 부끄러움에 꼼지락거렸다.
노아는 괜히 민망해져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탁자 위에 둔 허니 앤 슈가 베이커리 빵 봉지를 발견했다.
시나몬 향이 은은하게 풍겨 코를 자극했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노아를 내려다보며 알렉스는 웃었다.
“지금 먹을 거야?”
“그래도 돼요?”
빵 봉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노아가 냉큼 팔을 뻗었다.
“안 될 건 뭐야. 너 먹으라고 사 온 거야.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어?”
알렉스는 서 있는 노아를 잡아끌어 의자에 앉혔다. 다른 의자를 끌어다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가게 앞을 지나면 갓 구워 나온 시나몬 롤 냄새가 엄청 고소했거든요. 근데, 단 한 번도 거길 들어가 보질 못했어요.”
노아는 이른 아침 시나몬 롤과 커피를 들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항상 눈으로만 보았다. 늘 빠듯하게 살았던 노아에게는 점심으로 사 먹는 싸구려 샌드위치보다 가격이 비싼 시나몬 롤은 사치일 뿐이었다. 일상의 작은 사치조차도 그 당시 노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큼지막한 시나몬 롤을 꺼낸 노아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 자식은 언제 갔어?”
알렉스의 날카로운 눈빛이 침실을 쭉 훑었다. 퉁명스러운 말투에 노아는 가볍게 웃었다.
“당신하고 통화 끝나고 바로요.”
“곧장 갔네. 근데 요즘 그 자식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니야?”
“자주는 아니에요. 한 달 만에 만난걸요.”
살금살금 눈치 보더니 그럼 만나지 말까요? 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은 노아의 콧잔등을 툭 건드리며 알렉스는 말했다.
“네 유일한 친구를 못 만나게 할 수야 없지. 그냥 이건 질투야. 너한테 소중한 사람은 나 하나였으면 하는, 알파의 치졸한 질투.”
“저의 소중한 사람은 당신이에요. 카일은 친구고.”
“됐어. 이건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이야. 내가 모르던 시절의 널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난 평생 그 자식을 질투할 거야.”
알렉스는 노아의 학창시절을 함께한 카일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도 예쁘지만 십 대 때는 더 예뻤겠지.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동급생들이 둘이 사귀는 사이라고 입을 모아 말할 정도면 얼마나 붙어 다녔다는 거야.
이 생각만 하면 속이 뒤집히고 이가 갈렸다. 하지만 노아의 교유 관계를 자신이 제한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로 비이성적인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왜 안 먹어?”
아까부터 시나몬 롤을 손에 들고만 있는 노아가 이상해 묻자, “나중에 먹어도 될까요?” 한다.
“왜? 먹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알렉스의 물음에 노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할 말을 골랐다.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눈앞에 두니까 그다지 당기지 않네요. 왤까요?”
글쎄? 턱을 잠시 쓰다듬던 알렉스는 나름대로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너는 그 사람들의 여유가 부러웠던 거 아닐까?”
“여유요?”
“그래. 너는 빚에 시달리고 있었고, 한 푼의 돈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사실 그 정도 빚이면 이거 하나 사 먹는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하지만 어깨에 커다란 짐을 얹은 상태에서는 시나몬 롤 하나 값이 엄청난 부담이 됐겠지. 이걸 사 먹던 사람들한텐 ‘겨우’ 시나몬 롤이지만 너에겐 아니었던 거야.”
알렉스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노아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너에겐 그만한 여유도 없었던 거야.”
알렉스는 제 오메가의 힘들었던 시기를 떠올리며 꼭 안아 주었다. 나고 자라면서 단 한 번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는 그에게는 고작 5달러 남짓한 돈을 고민하며 쓴 적은 없었지만, 노아에게는 달랐을 테니까.
“그렇군요…. 여유…. 그게 부러웠던 거구나….”
이제 깨달았다는 듯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알렉스에게 한껏 제 몸을 기댔다.
“앞으로는 그런 거 부러워할 필요 없어. 네가 원한다면 그 베이커리 가게 내가 인수할게.”
아무렇지 않게 꺼낸 그의 말에 노아는 낮게 웃었다. 알렉스의 말버릇이 또 나왔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마음에 든다는 기색을 보이면 당장 사 주겠다는 말부터 꺼내는 알렉스였다.
뭐든 해 주지 못해 안달 내는 자신의 알파가 사랑스러워 노아는 고개를 들고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가게는 됐어요. 전 알렉스만 있으면 돼요.”
“노아….”
입술을 비비는 노아의 얼굴을 감싸더니 이번엔 알렉스가 온 얼굴이 키스를 퍼부었다.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입술이 하나가 된 것처럼 엉겼다. 금세 혀와 타액이 뒤섞이는 짙은 키스로 바뀌었다. 숨 막힐 듯 뒤섞이는 깊은 키스는 루시가 식사하러 내려오라고 문을 두드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노아는 자꾸만 땀이 차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곁에서 서류를 뒤적거리며 보던 알렉스가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뭘 그렇게 긴장해? 인터뷰가 처음도 아닌데.”
“그래도요…. 매번 긴장돼요.”
인터뷰 상대가 곧 도착할 시간이었다. 해리스가 추천해 준 사람이니 신원은 확실하다고 알렉스가 여러 번 강조했다. 그가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서류도 인터뷰 대상자의 이력이었다.
현재 16살짜리 딸 하나를 둔 편모로 12년 전 남편과 사별 후 간호사를 그만두고 보모 일을 시작한 40대 중반의 베타 여성이었다. 보모 경력은 이미 충분했고, 일했던 곳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 몇 가지 질문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알렉스는 여전히 긴장한 노아의 손을 끌어다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긴장하지 마. 우선 마음 편히 먹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그의 부드러운 격려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이던 때, 응접실 밖에서 손님이 오셨다는 루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나 봐요!”
긴장하지 말자고 방금 결심해 놓고 노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 무거운 몸 때문에 비틀거렸다.
“조심해야지.”
알렉스가 재빨리 노아를 부축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오늘의 면접자가 들어왔다.
잘 다림질된 흰 셔츠와 검은색 바지 정장을 입은 여성은 큰 키에 짧은 금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노아는 들어서는 여성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긴장한 듯 마른 입술을 축이며 들어선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노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알렉스의 손짓에 그녀가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던 노아도 알렉스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아비게일 셀라 씨죠?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단답형의 대답을 하는 목소리는 부드러운 울림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그리 활달한 성격은 아닌 듯 보였다.
이미 수차례 이런 인터뷰를 진행해 온 알렉스는 자연스레 노아를 그녀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노아의 얼굴에서 볼록 솟은 배를 확인했다.
“지금 8개월이 조금 넘었어요.”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노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그렇게 보이네요. 그럼 예정일은 내년 초쯤이 되겠군요.”
“네! 바로 아시네요. 예정일이 2월 초에요.”
어떻게 이걸 바로 알지? 노아는 신기한 마음에 눈을 반짝거렸다. 어딘지 들뜨기 시작한 노아를 진정시키고 알렉스는 본격적으로 면접을 진행했다.
그녀가 제출한 이력을 확인하는 차원의 질문이 몇 차례 오갔다.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처음엔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곧 그녀도 편안한 분위기에 적응을 한 모양인지 자주 머리를 쓸어 넘기던 행동이 사라졌다.
“경력은 뭐, 흠잡을 데 없으신데…, 궁금한 게 좀 있네요.”
“네. 말씀하세요.”
“간호사면 전문직인데 굳이 보모 일을 시작한 계기가 뭡니까.”
예상했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아빠가 갑자기 사고로 죽고 나니 제게 4살짜리 딸 아이가 남았습니다. 간호사 일이라는 게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다 보니까 베이비시터 구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거기다… 갑자기 아빠를 잃은 상황이니 아이가 저와 떨어지는 걸 힘들어했고요. 근무하던 병원에서 많이 배려해 주셨지만 불안해하는 아이를 매번 데리고 일할 수는 없었지요.”
그녀의 표정은 당시의 어려움을 떠올리는 듯 회한에 젖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지요. 곤란해하는 제게 당시 남편의 사망 처리를 도와주시던 변호사 분이 입주 보모 일을 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어요. 아동전문병원 간호사 경력이면 좋은 보모 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입주를 원하는 곳에서 일하게 되면 아이와도 떨어질 필요가 없지 않겠냐고요.”
“혹시 그 변호사가 해리스 씨인가요?”
알렉스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노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해리스 씨 추천이 있었던 거구나.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랐을 텐데도 계속 보모 일을 하시는 거 보니까 적성에 맞았나 보군요.”
“네. 보모 일이라는 게 어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미 제 아이를 키워 보기도 했고, 비교적 시간 여유도 있는 편이어서 육아와 병행하기에 좋았습니다. 그리고 딸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는 출퇴근이 가능한 곳 위주로 일을 했습니다.”
노아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그녀가 친근하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외모도 체격도 달랐지만 그녀에게서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았다. 갑작스런 남편의 사고 이후 그녀가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말투와 행동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전문직이던 아비게일이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위해 보모 일을 택했듯 노아의 어머니도 노아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했다.
노아를 위해, 궂은일이라곤 해 본 적도 없는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는지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과의 인터뷰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노아는 인터뷰가 끝나기도 전에 마음을 정했다.
저분이라면 우리 아이를 맡길 수 있노라고.
“같이 일해요, 우리. 셀라 부인과 함께 일하고 싶어요.”
뜬금없는 노아의 외침에 알렉스는 눈을 돌렸다. 두 눈을 반짝거리는 노아를 살폈다. 푸른 두 눈이 아련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두 뺨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알렉스는 노아가 어째서 이 부인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젖은 두 눈을 확인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감성적인 제 오메가가 아비게일을 누구에게 투영했는지 기민하게 알아챘다.
“제 파트너가 선택했으니 그럼 이제 급여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알렉스는 고민하지 않았다. 누구를 봐도 내키지 않은 얼굴을 하던 노아가 단번에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알렉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아비게일에게 연봉과 근로 조건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돌아가고 나자 노아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좋은 분인 거 같아요.”
“그래. 네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서 다행이야. 이번에도 못 정하면 내가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했어.”
“알렉스는 셀라 부인이 마음에 안 드세요?”
깜짝 놀란 노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자신이 제멋대로 결정한 게 아닌가 걱정했다.
“그럴 리가. 네가 선택한 사람이잖아. 아무 불만 없어.”
몸을 숙인 알렉스는 걱정하는 노아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보모도 구했으니 출산 전 준비는 다 끝난 건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게 믿기지 않아요.”
“나도 믿기지 않아.”
알렉스는 노아를 뒤에서 끌어안고서 창가에 서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꽃과 나무로 가득했던 정원의 풍경은 계절에 맞게 바뀌어 있었다. 저 멀리 전나무가 풍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뽐내며 추위에 맞서 꼿꼿하게 서 있었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네.”
“올해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눈이 왔으면 좋겠어?”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풍경을 보고 싶어요.”
저 넓은 정원 가득 눈이 쌓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겨울이라 해도 눈이 내리는 일은 많지 않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노아는 이 행복이 오래 지속되기를 빌고 싶었다.
“작년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냈지?”
노아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무 걱정 없이 명절을 보냈던 게 언제였더라?
“그날도 일했어요. 휴일에 일하면 수당이 두 배거든요.”
알렉스가 노아의 대답에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정수리에 닿았다.
“그래도 괜찮았어요. 그날 저녁엔 카일이 만들어 놓고 간 라자냐를 먹었거든요. 카일이 이탈리아 요리를 정말 잘해요. 엄청 맛있었어요.”
“혼자 보낸 거야? 그 자식은?”
“카일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해 주셨는데, 제가 일 때문에 거절했어요. 카일이 명절에는 쉬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거든요. 카일도 안 가겠다는 거 겨우 설득해서 보냈어요.”
알렉스는 안타까움에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널 그렇게 홀로 두지 않았을 텐데.”
꼼지락대며 그의 품에서 벗어난 노아가 몸을 돌렸다. 아름다운 눈동자가 알렉스를 빤히 올려다본다.
“전 지금 행복해요. 그렇게 힘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당신을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반짝거렸다. 알렉스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노아를 꼭 끌어안고 쪽쪽 키스를 퍼부었다.
“우리끼리 크리스마스 파티할까? 현관 로비에 커다란 트리를 세우고 저택을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 채우는 거지. 어때?”
“좋아요!”
신이 나 방방 뛰는 노아의 밝은 표정에 알렉스도 처음으로 어린아이처럼 들뜨는 기분을 느꼈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알렉스는 즐거워하는 노아를 끌어안고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 *
노아가 상상한 크리스마스 준비와 알렉스가 계획한 크리스마스 준비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다음날 알렉스가 출근하고 나서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수많은 크리스마스 장식 도구와 함께 조엘이 들이닥쳤다.
“이게 다 뭐예요?”
“뭐긴요. 크리스마스 준비죠. 자, 지금부터 이 기획서 보시고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세요.”
응접실 탁자에 두꺼운 책자를 턱 내려놓은 조엘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시간 없습니다. 이 넓은 저택과 정원을 꾸미려면 빨리 결정하셔야 해요. 준비되셨나요?”
어안이 벙벙해 그저 눈만 깜빡거리던 노아는 조엘이 재촉하듯 다시 안경을 추켜올리자 허둥지둥 그 앞에 앉았다.
“우선 트리용 나무부터 골라 볼까요?”
“저… 알렉스가 보낸 거예요?”
“네. 할 일이 많습니다. 노아 씨가 다 정해 주셔야 해요. 대표님이 그렇게 지시하셨습니다.”
정말 바쁜지 조엘은 연신 시간을 확인했다.
노아는 그냥 평범한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설마 이렇게 본격적으로 진행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는 그냥 소소하게 트리 꾸미고 그럴 줄 알았어요. 괜히 조엘한테 일거리만 늘렸네요.”
“대표님이 어디 그러실 분입니까? 노아 씨는 아직도 대표님을 그렇게 모르세요? 노아 씨가 좋아한다면 저 하늘의 별도 따다 주겠다고 하실 분인데.”
소소라니, 가당키나 하냐면서 조엘이 코웃음 쳤다.
“자, 이럴 시간이 없다니까요? 트리용 나무 고르고 나면 저택 외부 장식 어떤 디자인으로 할 건지 정하셔야 하고요, 정원 장식도 결정하셔야 합니다. 워낙 크고 넓은 곳이라 빨리 정해야 사람도 부르고 필요한 물품도 구매할 수 있어요.”
영 시작할 생각을 안 보이는 게 답답했는지 조엘이 책자를 폈다. 노아는 재촉하는 그에게 밀려 책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아는 조엘이 왜 그리 재촉했는지 깨달았다. 크리스마스 트리용 나무가 이렇게 종류가 많은지 처음 알았다. 수십 개의 모델 중에서 겨우 하나 고르고 나자, 이번엔 저택 외부 장식 포트폴리오가 펼쳐졌다. 건물 외벽을 어떤 식으로 꾸민다는 건지 감이 안 잡혔던 노아는 사진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구와 야외용 오너먼트로 꾸민 디자인부터 화려한 조명과 전통적인 장식이 어우러진 디자인까지, 결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엄청 다채로웠다.
“이걸 다 제가 결정해야 해요?”
“네. 그냥 노아 씨 취향대로 고르세요. 실행은 다른 사람이 합니다. 이벤트 업체 직원들이 알아서 잘 꾸밀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노아는 의욕적으로 포트폴리오를 살피기 시작했다. 알렉스와 처음으로 맞는 크리스마스였다. 알렉스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줬는데 대충 결정할 수는 없었다.
노아는 포트폴리오 여러 개를 두고 좀 더 마음이 가는 쪽을 고르는 방식으로 선택했다. 정원 장식 디자인도 똑같이 포트폴리오를 펼쳐 놓고 개중 가장 눈이 가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이걸 언제 다 정하느냐고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의욕을 부리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자, 그럼 다 정한 거죠? 마음을 바꾸시려면 지금 바꾸셔야 합니다. 작업 들어가고 나면 변경이 어려우니까요.”
“네, 그대로 해 주세요. 아, 그리고….”
온 집 안을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알렉스의 선물이었다.
“부탁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널브러진 탁자 위의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일어나려던 조엘이 멈칫했다.
“알렉스 선물을 골라야 하는데…, 제가 센스도 없고 어떤 걸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아, 그리고 선물은 이런 카탈로그가 아니라 직접 제 손으로 고르고 싶어요.”
“대표님 선물이요?”
잠시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린 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가 적당한 사람을 수배해서 내일 이쪽으로 보내겠습니다.”
“알렉스한테는….”
“네.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저도.”
눈을 찡긋하고는 조엘이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당분간은 제가 여기로 출근할 겁니다. 이벤트 업체 사람들 관리 감독을 제가 할 거거든요.”
“바쁘실 텐데 저 때문에 죄송해요.”
“노아 씨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요? 일을 크게 벌인 건 대표님인데요, 뭐. 정말 미안하시면 저 휴가 받는 거나 도와주세요.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요.”
“그거면 돼요? 알렉스한테 얘기할게요.”
아싸. 낮게 환호성을 내지른 조엘이 상큼하게 웃었다.
“전 그럼 바빠서 오늘은 돌아가겠습니다. 이벤트 업체 수배하려면 할 일이 많아서.”
조엘이 허둥지둥 돌아가고 나서 루시가 차를 가지고 응접실로 찾아왔다.
“어머. 매디슨 씨는 벌써 가셨나요?”
“네. 바쁘대요. 루시도 같이 와서 마셔요.”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루시와 마주 앉아 티타임을 가졌다.
“얼마 만에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전에는 안 하셨어요?”
“회장님 살아 계실 때는 이렇게 못 했죠. 도련님이 명절이라고 회장님 뵈러 오는 건 아니어서…. 그러다 보니 회장님도 명절을 그냥 넘기셨죠.”
평소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얘기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지금이라면, 알렉스도 에디 할아버지에게 좀 더 마음을 열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에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활기차고 좋네요. 이 저택에도 이런 좋은 일이 생기다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노아 씨가 오고 나서부터 좋은 일만 생기네요.”
“제가 뭘요….”
쑥스러움에 노아는 찻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야말로 알렉스를 만나고 나서 모든 게 좋았다. 잠시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그 일로 인해 노아는 알렉스의 사랑을 깨달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모든 게 힘들고 어렵기만 했었다.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고, 하루하루 그저 버텨 내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 제 인생에 알렉스가 끼어들면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지, 아직도 종종 믿기지 않아 뺨을 꼬집어 보고는 한다.
누군가 인생은 등가교환이라고 했다. 백 만큼의 행복을 얻으면 백 만큼의 불행도 찾아오는 법이라고.
자신의 기나긴 고통과 불행의 시간이 알렉스를 만나기 위한 등가 교환의 조건이라면, 결국 그 지난한 과거도 자신에겐 필요했던 과정이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그 힘들었던 시간이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크나큰 행복을 얻기 위해 거쳐야 했던 시련이니 마땅히 자신이 감당했어야 할 일이었으니까.
따끈한 차 한 모금을 머금은 노아는 꽤 오랜 시간 창밖을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 준비는 순조로웠다. 대대적인 준비를 위해 동원된 사람들은 분주하게 저택 외벽을 꾸미고 정원에 인공 기둥을 세워 야트막한 토대를 마련했다. 조엘은 그 모든 과정을 감독하며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노아도 도와주고 싶었지만 무거운 몸으로 괜히 얼쩡거리다간 방해만 될 거 같아서 조엘이 소개해 준 쇼퍼와 함께 쇼핑에 나섰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준비가 순항 중인 것과는 반대로 알렉스의 선물 고르기는 난항을 거듭했다.
쉬이 피곤해지는 노아를 배려해 쇼퍼는 VIP룸에 추천하는 물건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도록 진열했다. 좀 더 다양한 품목을 보이기 위해 태블릿으로 따로 목록을 추려서까지 준비했다.
넥타이나 커프 링크스부터 액세서리, 패션 잡화 등 엄청나게 많은 물건을 구경하고 확인했지만, 어떤 것도 노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선물 고르기는 실패했다. 노아는 최선을 다하는 쇼퍼에게 너무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제가 좀 더 찾아보죠. 혹시 원하는 게 따로 있으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음…, 그냥 알렉스가 실제로 자주 쓰는 물건이었으면 좋겠어요. 실용적이고 그냥 장식적인 역할만 하는 그런 거 말고요….”
노아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이게 뭘 말하는 건지 몰랐다. 그냥 누구에게나 받는 선물보다는 저만의 특별함이 있는 걸 주고 싶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노아는 슬쩍 쇼퍼의 눈치를 보았다.
비웃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의외로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 정말 적당한 게 있어요! 마침 제가 그 물건을 확보해 놓은 게 있거든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녀는 양해를 구하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노아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건을 가져오라는 걸 보니까 다른 곳에 보관된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확인까지 끝낸 그녀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노아에게 말했다.
“한 30분이면 된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건 괜찮은데…, 그 물건이 뭔가요?”
“만년필입니다. 작년에 한정판으로 제작된 건데 혹시 몰라 물량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구하려야 구할 수가 없거든요.”
“만년필….”
“네. 알렉스 헌트 씨가 자주 사용하고 실용적인 선물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에 그게 떠올랐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말 잘 만들어진 만년필이에요.”
아, 일단 사진으로라도 보시겠어요? 하며 그녀가 태블릿을 열어 확인시켜 주었다.
은색 몸체에 블랙의 띠를 두른 듯한 모양의 만년필이었다.
“18K 화이트 골드와 로듐으로 장식된 겁니다. 플랜저 방식의 만년필로 애호가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좋아요.”
노아는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만년필에 관해 잘 모르는 문외한인 자신이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우아해 보였다.
“와… 좋아 보여요.”
“마음에 드세요? 다행입니다.”
보면 볼수록 좋은 선물이 될 거 같았다. 만년필이면 알렉스도 자주 사용할 수 있을 테고 이걸 쓸 때마다 자신을 떠올리겠지.
드디어 마음에 드는 걸 찾았다. 선물을 골랐다고 생각하자 너무 기뻤다. 이제 실물을 확인하고 계산하면 되겠지? 알렉스가 선물을 받고 좋아할 얼굴이 떠오르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렜다.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제일 고민이었던 알렉스 선물을 고르고 나자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떠올랐다. 마침 쇼퍼가 골라 온 좋은 것들이 많았다.
노아는 만년필이 도착하기 전에 루시를 위해서는 캐시미어 카디건을, 헨리에게는 가죽장갑, 그리고 카일 선물로는 지갑을 골랐다. 늘 자신을 위해 수고해 주는 조엘에게는 그와 잘 어울릴 것 같은 안경을 골랐다.
의욕적으로 선물을 다 골랐을 때 원하던 물건이 도착했다. 고급 케이스에 담긴 만년필을 확인하자, 사진보다 훨씬 좋았다.
“이걸로 할게요.”
노아는 만년필을 보자마자 결정했다. 그러나 고른 물건의 포장을 다 끝마치고 계산서를 확인했을 때 노아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생전, 단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금액이 찍혀 있었다. 특히 이 자그마한 만년필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사만오천 달러라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노아 헌트 씨? 계산서에 혹시 문제라도…?”
계산서를 든 채로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노아가 이상했는지 쇼퍼가 그를 불렀다.
“아, 아, 아니에요. 계, 계산할게요.”
노아는 알렉스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쓸 물건이니까 이 정도 가격은 문제가 안 된다고 애써 자신을 이해시켰다.
돈이 없는 건 아니니까 이 정도 지출은 괜찮아. 노아는 자신을 위로하며 가져온 카드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단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거액을 쓰게 된 노아의 심장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쿵쾅거렸다.
손을 떨며 카드를 긁은 노아가 선물을 사 들고 저택에 복귀했을 때, 크리스마스 준비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노아 씨! 오셨어요? 선물 잘 고르셨나 보군요.”
노아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확인한 조엘이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마침 잘됐어요. 이거 조엘 거예요. 미리 드릴게요. 크리스마스 때 못 전해 드릴 거 같아서….”
“어? 제 것도 있어요? 와, 감사합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네요!”
희희낙락 쇼핑백을 받은 조엘이 내용물을 확인했다. 잘 포장된 선물 박스를 열어 보더니 안경인 걸 확인하고는 기뻐했다.
“정말 좋은 선물이에요! 안 그래도 안경 바꿀 때가 됐는데, 저한테 딱 필요한 걸 주셨네요. 와아…. 잘 쓸게요.”
안경을 꺼내 프레임을 확인하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잠깐만 이거 들고 계세요, 라며 끼고 있던 안경을 벗어 노아에게 건넸다. 새 안경을 써 보고는 어때요? 하고 묻는다.
“잘 어울려요!”
“노아 씨는 안목이 있으시네요. 당장 내일 이걸로 바꿔야겠어요.”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조엘이 노아를 칭찬했다. 눈앞에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노아는 그래도 잘 골랐다며 스스로 뿌듯했다.
알렉스도 이렇게 좋아해야 할 텐데…. 다시금 가격이 떠올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보다 이제 공사도 다 끝나 가네요.”
“네. 내일이면 마무리 작업까지 끝날 겁니다. 며칠 동안 시끄러웠을 텐데, 고생 많으셨어요.”
“저야 뭐…. 조엘이 고생했죠.”
“알아봐 주시는 건 노아 씨뿐이에요. 대표님은 빨리 끝내라고 저 닦달하기만 하시고….”
이마를 찌푸리며 불만을 한참 토로하더니 여전히 쇼핑백을 줄줄이 든 노아를 보고는 아차, 하며 정신을 차렸다.
“피곤하시겠어요. 올라가 쉬세요. 선물 얘기는 당분간 비밀로 해 드릴게요.”
“고마워요. 그럼 수고하세요.”
무거운 몸으로 며칠 외출했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노아는 느릿하게 2층으로 올라갔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선물을 숨길 데를 찾다가 전에 자신이 쓰던 방 드레스 룸에 쇼핑백을 안 보이게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품이 넉넉한 옷으로 갈아입고 씻자마자, 무겁게 내려앉는 아랫배를 받치고 조심스레 침대에 누웠다. 고작 이 정도 움직였다고 다리가 벌써 팅팅 부었다.
후…. 쉽지 않네. 조금만 쉬어야지.
나른하게 축 늘어졌다. 느리게 깜빡거리던 눈꺼풀이 어느 순간 꾹 닫혔다. 노아는 금세 잠이 들었다.
“…아. …노아?”
따스한 입김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혼곤한 잠 속을 헤매던 정신이 천천히 깨어났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귀찮은 듯 미간을 찌푸리다 서서히 눈을 떴다.
“낮에 뭐 했길래 이렇게 피곤해해?”
“알렉스….”
눈을 뜨자 다정한 눈빛을 한 알렉스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그가 노아의 입술에 쪽, 하고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언제 오셨어요?”
이제 막 퇴근한 모양인지 그는 슈트 차림이었다. 비스듬히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눈두덩이 아래를 엄지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조금 전에. 끙끙거리던데 어디 아파? 병원 갈래?”
“일어날래요.”
자연스럽게 그에게 팔을 뻗었다. 그가 능숙하게 노아를 부축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낮에 외출을 했어요.”
“그래? 어딜 갔는데?”
넌지시 던지는 질문에 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밀이에요.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나 몰래 비밀 만드는 거 싫은데.”
“조금만 참으시면 돼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알렉스가 노아를 응시했다.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더니 “그래?” 하며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노아는 그가 혹시 눈치챌까 봐 시선을 피했다. 그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기왕이면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한참 머물렀던 시선이 마침내 떨어지자 노아는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이 몸으로 돌아다녔으니 그리 끙끙댔던 거군.”
곁에 앉아 있던 그가 노아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슈트 상의를 벗어 옆에 던지고, 손가락을 걸어 넥타이를 한 번에 잡아 내렸다.
목 끝까지 잠겼던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흐트러짐 없던 그의 차림새가 순식간에 느슨하게 바뀌었다. 그가 하는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던 노아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알렉스는 커프 링크스를 떼어 소매를 둘둘 말아 올렸다. 남성적인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 굵은 팔뚝이 눈앞에 나타났다. 손등에서 손목으로 이어지는 핏줄이 선연하게 보였다.
“자, 다리 뻗어 봐. 주물러 줄게. 이런 건 바로바로 풀어야 해.”
“괜찮….”
괜찮다고 거절하기도 전에 알렉스에게 발목이 잡혔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뱀처럼 노아의 발목을 휘어 감았다.
“뭘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해?”
알렉스가 망설임 없이 바짓단을 위로 올렸다. 부끄러웠는지 노아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알렉스는 훤히 드러난 발등과 발목을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간, 간지러워요….”
“있어 봐. 바로 풀어야 한다니까. 왜 이리 꼼지락거려?”
종아리가 꾹꾹 눌러질 때마다 노아의 발가락이 꼬물거렸다. 배가 부르고 나서는 알렉스가 다리 근육을 풀어야 한다면서 종종 안마를 해 주었던 터라 그의 손길은 매우 능숙했다.
악력을 조절하며 딱 아프지 않을 정도로 딱딱해진 종아리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손가락을 이용해서 종아리를 쭉 훑어 내리다가 이번엔 발바닥을 꾹꾹 눌렀다.
“읏.”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뭉쳐 있던 근육이 풀리면서 몸의 긴장이 점점 풀어졌다.
“엄청 굳어 있네. 많이 돌아다녔어?”
“그건 아닌데…, 배가 무거워서 그런 가 봐요.”
“그런데 진짜로 말 안 해 줄 거야?”
은근슬쩍 물어 오는 알렉스를 보며 노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눈썹을 추켜올리더니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하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어? 뭔가 좀…. 하는 순간 그가 손가락으로 발바닥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알, 알렉스! 간, 간지러워요. 꺄아.”
“말 안 해? 이래도? 응?”
“그, 그만! 간, 지럽…. 아앗.”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노아는 몸을 비틀었다. 그에게 벗어나려고 발을 버둥거렸지만 단단하게 발목을 잡힌 터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아! 알렉스, 꺄하하하. 그만, 하… 꺄아…!”
간지러운 감각에 오금이 저렸다. 몸을 뒤채며 그에게 벗어나려 했지만, 알렉스는 오히려 상체를 숙이더니 옆구리까지 건드렸다. 노아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웃어 댔다. 온몸을 비틀며 그의 손길을 피하려고 버둥거렸다.
“말하는 게 좋을 텐데.”
그만하라는 소리도 제대로 말 못 할 정도로 노아는 몸을 뒤틀며 헐떡거렸다. 긴 속눈썹 끝에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덮치듯 노아를 위에서 살짝 누르며 알렉스는 옆구리와 가슴을 공략했다.
장난처럼 시작된 손길은 잠시 후 음란하게 바뀌었다. 웃느라 몸을 뒤척이던 노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짓궂던 표정도 진지하게 바뀌었다. 알렉스의 잿빛 눈동자가 어느덧 열기로 일렁거렸다. 숨을 할딱거리는 노아의 입술을 한입에 먹어 치우듯 덮쳤다. 뜨거운 입안을 혀로 희롱하며 알렉스는 노아의 옷을 능숙하게 벗겼다.
으, 으읏. 목 안으로 삼켜진 신음이 알렉스를 부추겼다. 버둥대던 노아의 팔이 알렉스의 가슴을 어설프게 더듬다가 어깨로 올라왔다.
배를 누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알렉스는 질척하게 혀를 섞었다. 열기가 순식간에 방 안을 데웠다. 달짝지근한 노아의 페로몬과 알렉스의 묵직한 페로몬이 뒤섞였다.
어느새 젖어 든 눈가를 핥고 알렉스는 상체를 세워 자신의 옷을 빠르게 벗었다.
멍한 눈으로 알렉스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음란하게 젖어 있었다. 알렉스는 뒷덜미를 잡아채는 욕망에 미간을 찌푸렸다.
“알렉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욕구가 담겨 있었다. 그 사실이 알렉스의 이성을 달아나게 했다.
뻐끔거리는 입술을 단숨에 물었다. 혀와 타액이 누구 것인지 모를 정도로 하나로 엉켰다.
본능적으로 부딪혀 오는 노아의 움직임에 알렉스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두툼한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오감이 활짝 열리는 감각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내 오메가.
자신을 부추기는 미칠 듯한 향기가 최음제가 되어 알렉스를 부추겼다. 더운 열기와 질척한 욕망이 방안 가득 묵직하게 내려앉은 페로몬과 뒤섞였다.
알렉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의 오메가를 품에 안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를 기쁘게 받아 안으며 노아도 동조했다.
그들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짝 눈을 뜬 노아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깊게 잠이 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크리스마스였다. 어젯밤에 미처 선물을 트리 아래에 두지 못해서 지금 일어나야 했다.
노아는 그의 얼굴 앞에 대고 손을 휘휘 저어 보았다. 그가 깨지 않은 걸 확인한 후에 조심스럽게 허리에 감긴 그의 팔을 떼어 냈다.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는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살금살금 걷는 걸음이 마치 한밤의 도둑고양이 같았다. 다만, 몸이 무거운 탓에 중간중간 기우뚱거리는 게 어설펐다.
노아는 한 번 더 잠이 든 그를 확인하고 나서 방을 나섰다.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가 드레스 룸에서 선물을 꺼내 왔다. 알렉스가 깨기 전에 빨리 놓고 와야지.
노아는 아랫배를 한 손으로 받치고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해도 뜨지 않아 내부는 은은한 빛만이 가득했다.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커다란 트리가 높은 천장을 뚫을 것처럼 우뚝 서 있었다. 알록달록, 다양한 전구가 커다란 트리를 칭칭 감았고, 각종 오너먼트가 대롱대롱 매달려 반짝거렸다. 노아는 알렉스가 말리는데도 자신이 직접 단 아기천사 오너먼트 아래 가지고 온 선물을 내려놓았다.
후. 무사히 임무 완료.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확인하고는 뿌듯함에 가슴을 쭉 폈다. 그때였다. 가만히 그것을 감상하던 노아의 등 뒤로 따스한 기온이 확 들이쳤다.
“노아.”
“알렉스! 언, 언제 왔어요?!”
깜짝 놀라 몸을 돌리자 뒷머리가 삐죽 솟은 알렉스가 노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깼, 깼어요? 언제…?”
“음…, 네가 살금살금 침대를 빠져나갈 때?”
“뭐예요. 설마 다 봤어요?”
알렉스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왜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냐면서 부끄러워하는 노아를 꼭 끌어안았다.
“귀여워서 그랬어. 잘 잤어?”
쪽,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잠시 몸을 뒤척거리던 노아도 이내 몸에 힘을 빼고 그에게 안겨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도 잘 잤어요?”
“그래. 그보다 내 선물 놓아둔 거지? 내가 봐도 돼?”
“네? 네. 알렉스 거니까요.”
알렉스는 노아를 놓아주고 트리로 다가가 자신의 선물을 집어 들었다. 힐끔 고개를 들자, 노아가 긴장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뭘 준비했길래 그렇게 꽁꽁 숨겨 두었을까.
알렉스는 궁금함에 서둘러 포장을 풀었다. 포장 아래 드러난 건 긴 사각 프레임의 상자였다. 케이스를 보아하니 만년필 같았다.
노아가 고민을 많이 했네. 알렉스는 나직이 웃음을 터트리며 케이스를 열었다.
“어,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아무런 말도 없이 만년필을 보는 알렉스의 반응에 노아가 먼저 초조한 마음에 물었다. 마음에 안 드나? 역시 별로였나?
저절로 기분이 울적해졌다. 잘못 골랐나 봐. 노아는 시무룩하니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마,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걸로….”
“마음에 들어. …고마워. 어떻게 이걸 구했어?”
그대로 노아를 와락 끌어안은 알렉스가 축 처진 눈매에 키스를 쪽쪽 해 댔다.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해 우울한 마음이 단번에 사라졌다.
“마음에 들어요? 진짜?”
“그래. 네가 골라 준 건데 마음에 안 들 리가. 고마워.”
부둥켜안은 그의 팔을 풀었다. 노아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며 표정을 살폈다. 자신이 우울할까 봐 좋아하는 척하는 게 아닌지 걱정했지만, 그 걱정은 활처럼 휘어진 그의 눈웃음에 눈 녹듯 사라졌다.
“이거 한정판인 걸로 아는데, 노아 능력 있었네. 나도 못 구한 걸 선물로 받게 되다니.”
“응. 응. 이거 알아요? 쇼퍼가 추천해 준 건데…, 한정판이라고 그랬거든요. 이거 다 18K화이트 골드예요.”
“알아. 고마워.”
다시금 그의 입술이 얼굴에 내려앉았다. 신이 나 눈을 반짝거리는 제 오메가를 끌어안고 알렉스는 즐거워했다.
큰 결심으로 냅다 지른 선물이 알렉스를 기쁘게 해서 노아는 즐거웠다. 심장이 벌렁거리긴 했지만, 역시 잘 샀어.
“내 선물도 풀어 봐야지.”
알렉스는 소중한 만년필을 다시 케이스 넣고 손에 꼭 쥐었다. 노아의 손을 잡아끌며 자신의 선물을 안겨 주었다.
“이거 제 거예요?”
“응. 풀어 봐.”
노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의 선물을 풀었다. 금색 포장지를 다 풀자, 반듯한 상자가 나왔다. 뭔가 딱 봐도 엄청 고급스러웠다.
노아 옆에 철퍼덕 주저앉은 알렉스가 어서 보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노아는 상자를 열었다. 얇은 티슈페이퍼를 들춰내자 진회색의 모포가 보였다. 노아는 모포에 손을 대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엄청 부드러워요!”
“꺼내 봐. 비쿠나 울로 만든 모포야.”
모포를 꺼내 펼쳤다. 깃털처럼 가벼운데 질감은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우와. 이런 감촉은 처음이에요. 비쿠나 울이라는 게 뭐예요?”
“그런 게 있어. 캐시미어보다 좋은 거야.”
알렉스는 노아에게서 모포를 빼앗아 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얇은데 엄청 따뜻해요.”
어깨에 두른 모포의 감촉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노아는 감탄했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부들부들한 감촉이 기분을 좋게 했다.
“이제 박스 아래 좀 볼래?”
모포의 감촉을 확인하는데 정신이 팔린 노아에게 알렉스는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이 상자 바닥을 가리켰다.
“더 있어요?”
“일단 봐.”
노아는 바닥에 깔린 서류 봉투를 꺼냈다. 이게 뭐지?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자, 빳빳한 증서와 서류 몇 장이 있었다.
“읽어 볼래?”
알렉스의 권유에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들췄다. 조용히 눈으로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노아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 이게 뭐예요? 위도, 경도가 뭐고 아르쿠스 제도는 또 뭐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네 이름으로 무인도를 하나 샀어. 전 소유자가 별장으로 쓰던 곳인데, 지금 거길 리모델링하고 있거든. 나중에 아이 낳고 나서 몸 괜찮아지면 그때 가 보자.”
마치 지나치는 길에 꽃이 예뻐서 샀다는 듯이 너무 태연하게 말하는 바람에 노아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섬? 섬이라고?
“섬이요…?”
“네 여름 별장으로 쓰라고. 왜. 별로야?”
실망한 듯 알렉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노아는 말도 안 되는 그의 선물에 얼이 빠졌다.
“별, 별로인 게 아니라…, 너무 당황해서….”
알렉스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노아를 일으켜 세웠다. 모포로 몸을 꽁꽁 싸매더니 그가 말했다.
“아직 놀라기는 일러. 잠깐 밖에 나갈까?”
어안이 벙벙한 노아는 그의 품에 안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눈앞에는 은회색의 벤틀리 차량이 커다란 리본을 달고 바로 현관 앞에 놓여 있었다.
“짜잔. 어때? 이건 마음에 들어?”
노아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은 그의 만년필 하나 고르는 데 손을 벌벌 떨었는데, 알렉스는 하나도 아니고 심지어 섬이랑 차를 준비했다.
노아는 쉴 새 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안 갔다. 기쁜데, 너무 큰 선물을 받은 터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설마…, 이것도 별로야?”
알렉스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노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에요! 기뻐요! 너무 감사해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라 당황했을 뿐이에요. 전 만년필 하나밖에 준비 못 했는데…, 이러면 제 선물이 너무 초라해지잖아요.”
“네가 준 첫 선물인데 초라하다니. 그렇게 말하지 마. 오히려 네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느껴져서 좋은데?”
따스하게 건네는 말에 노아는 마음이 녹아내렸다.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긴장한 듯 내려다보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발끝으로 섰다. 당연한 듯 그의 팔이 허리를 감았다.
노아는 잿빛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알렉스. 고마워요.”
다정한 인사에 알렉스도 화답했다. 도톰한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보내며 속삭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노아.”
그리고는 이내 깊게 허리를 숙인 알렉스의 입술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그들의 첫 성탄절 아침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3주 후 예정일보다 일주일 이른 날짜에 노아는 건강한 여자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알렉스의 검은 머리와 노아의 섬세한 이목구비를 빼닮은 예쁜 아기였다.
아기인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미모가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으며, 주변 사람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세간의 관심을 한몸에 받은 아이의 이름은 클로에 노아 헌트. 그날은 드물게 칼밴시에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