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계약 외전.-1화 (19/23)

 결혼계약 외전.

1.

다시는 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저택은 노아가 떠나 있던 동안 풍요로운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저택을 둘러싼 숲은 온통 푸르렀고 튼튼하게 뻗은 나뭇가지에 초록의 잎사귀는 물결을 자아내듯 흘러넘쳤다.

숲에서 나는 상쾌한 향기와 화단에선 흐드러지게 핀 알록달록한 꽃들이 달콤한 향을 뿜어내며 코끝을 자극했다.

차에서 내린 노아는 가만히 서서 물끄러미 풍경을 바라보았다. 떠날 땐 모든 게 차갑기만 하던 곳이 지금은 사뭇 다른 감상을 안겨 주었다.

“왜 그러고 섰어?”

등에 와 닿는 알렉스의 손길에 노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냥… 새삼 여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 네가 없는 동안에도 착실히 계절은 바뀌었지.”

무척 긴 시간이었어.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우울함이 담겨 있었다.

가라앉은 표정이 안쓰러워 노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야윈 그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알렉스….”

미안한 마음에 노아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알렉스는 노아의 손에 얼굴을 비비다 손바닥에 꾹 입술을 눌렀다.

“노아 씨! 돌아오셨군요!”

그에게 바짝 다가서던 그때, 등 뒤에서 반기는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 갔다가 온 거예요? 도련님께 물어도 통 말을 안 해 줘서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이제 어디 안 가는 거죠?”

“루시,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제가 잘 지냈겠어요? 노아 씨는 갑자기 사라졌지, 도련님은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식사도….”

“루시. 노아도 피곤할 텐데, 밀린 얘기는 나중에 하시죠.”

쓸데없는 소릴 하기 전에 알렉스가 루시의 말을 잘랐다.

“아이참. 내 정신 좀 봐. 그래요. 어서 와요.”

알렉스의 지적에 루시가 화들짝 놀라 노아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이곳까지 운전기사 노릇을 한 조엘이, 자긴 보이지도 않냐면서 툴툴대며 짐을 들고 움직였다.

“일단 좀 쉬고 계세요. 다과라도 준비할게요.”

뭐라도 해 주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사람처럼 노부인은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우선 짐부터 풀어야지. 피곤하진 않아?”

“전 괜찮아요.”

걱정 어린 물음에 노아는 비현실 속에 놓인 기분이었다. 행여나 자신이 넘어질까 부드럽게 등을 받치는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두 달 만에 다시 돌아온 저택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자신의 마음이 바뀌어서 그런 게 아닐까.

떠날 때만 해도 늘 불편하고 잘못된 장소에 있던 것 같은 느낌을 주었던 저택이 지금은 자신을 반기는 듯 보였다.

그 느낌은 노아가 주로 생활하던 2층에 올라오고서도 계속 이어졌다. 노아는 습관처럼 자신이 머물던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도망치기 전, 이곳으로 되돌아올 거라고는 그때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노아는 아까부터 입을 다물어 버린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노아를 내려다보던 알렉스가 이내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왜?”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아무렇지 않아. 이제 들어갈까?”

어깨를 으쓱하더니 노아가 뭐라고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그가 문을 활짝 열었다.

노아는 열린 방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은 예전과 똑같았다. 자신이 머물렀던 그대로였지만, 딱 하나 다른 게 있었다.

“…여기서 머물렀어요?”

방 안 곳곳에 알렉스의 페로몬 향이 배어 있었다. 침대 근처로 가자 향은 더욱 강해졌다. 자신이 베고 자던 베갯잇에도, 자신이 덮고 자던 이불에도, 은은하게 풍기는 그의 향은 그가 자신이 없는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노아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가 몸을 숙여 노아를 끌어안았다.

“네 향기가 남아 있는 곳이 여기뿐이었어.”

알렉스는 제 품에 쏙 들어오는 노아를 더욱 팔 안에 가두고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깊이 들이마신 숨 사이로 노아의 옅은 페로몬이 제게로 스며들었다.

“알렉스.”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아? 억제제를 먹으라고 윽박질렀던 나를 죽이고 싶었어. 어디에도 네 향기가 남아 있지 않았지. 심지어 네가 머물렀던 이 공간에서조차 네 향기는 날 미쳐 버리게 할 만큼 약하고 미약하기만 했어.”

노아가 없는 공간이 그렇게나 황량한 줄 처음 알았다. 노아가 없는 곳은 끝없는 지옥이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짝 말려 버리는 삭막한 사막이었다.

알렉스는 노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불안한 마음을 토로했다. 이렇게 제 품에 노아를 꽉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불안함은 가시질 않았다. 아무리 깊게 들이마셔도 자신을 완전히 채울 수 없는 페로몬처럼.

“이제, 다시는, 억제제 같은 거 먹지 마.”

슬그머니 팔을 올린 노아가 알렉스를 꽉 끌어안고 대답했다.

“그럴게요. 다신, 안 먹을게요.”

착실한 대답에 알렉스는 더욱 노아를 제 품 안에 가두었다.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름다운 얼굴이 알렉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키스해도 돼?”

질문을 내뱉는 동시에 알렉스는 점점 고개를 숙였다. 콧잔등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얼굴이 슬며시 붉어지는 게 보였다. 긴 속눈썹이 그 순간 파르르 떨리더니 살포시 눈을 감는다.

부드러운 입술이 살짝 닿았다. 갈증이 인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알렉스는 다디단 숨결을 들이마시며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쪼듯이 닿은 입술은 곧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하아. 낮게 숨을 토해 내며 벌어진 입술 안으로 알렉스는 제 혀를 밀어 넣었다.

숨결이 입안에서 서로 뒤섞였다. 보드라운 입안 점막을 느리게 훑자, 노아가 더욱 제게 꽉 매달렸다.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알렉스는 노아의 입술을 탐했다. 이내 그는 다디단 타액을 모두 빨아먹을 듯이 노아를 몰아붙였다. 헐떡거리는 노아의 숨은 목 안으로 삼켜졌고, 수줍은, 아니 조금 놀란 듯한 노아의 살덩이가 움찔 뒤로 물러섰다.

알렉스는 더욱 깊숙한 곳에 혀를 밀어 넣어 노아의 것을 제 쪽으로 얽었다.

“읍…, 으….”

숨이 막힌 듯 노아가 알렉스의 허리를 꽉 움켜쥐며 어깨를 움츠렸다. 알렉스는 노아의 가는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싸 쥐고 깊이, 더욱 집요하게 입안을 훑고 숨을 모조리 삼켰다.

달짝지근한 페로몬이 살금살금 알렉스의 뒷덜미를 간지럽혔다. 알렉스는 손가락을 노아의 머리카락 속으로 밀어 넣었다. 목덜미를 감싼 손이 점점 아래로 향했다.

키스는 깊었고, 두 사람의 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붙었다. 아랫배가 욱씬 조여 왔다. 그리도 오래 기다려 왔던 제 오메가의 페로몬에 알렉스는 눈앞이 아찔했다.

“으, 응….”

노아의 허리를 움켜쥐고 부풀어 오른 하반신을 비볐다. 아아. 헐떡거리는 노아의 신음에 욕망이 들끓었다.

지금 당장 제 오메가를 침대에 쓰러뜨리고 다리를 벌려, 잔뜩 발기한 제 것을 처박고 싶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욕망을 억눌렀다. 질척하게 뒤섞이던 혀는 이내 부드럽게 바뀌었다. 노아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드럽게 입안 점막을 혀로 쓸고, 치열을 슥 훑으며 진탕 맛보았던 입술을 떼었다. 그러는 순간,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어흠. 흠. 방해해서 죄송합니다아…. 이 짐 가방을 어디에 놓아둘까요?”

“아…!”

조엘의 목소리에 노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부끄러운 듯 알렉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노아를 끌어안으며 알렉스는 숨을 골랐다. 잿빛 눈동자가 욕망으로 새까맣게 물들었다. 끓어오르는 열기를 잠시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넌 눈치도 없어?”

“저도 별로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요…, 노아 씨, 아직 임신 초기인 거 아시죠? 초기엔 특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조엘의 지적에 노아의 귓불이 빨갛게 물들었다.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 노아는 그저 알렉스가 제 모습을 가려 주기만을 바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짐은 어떡할래? 여기에 둘까? 여기서 지낼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노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알렉스가 물었다. 떨어져 지낼 생각 따윈 없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노아가 전과 마찬가지로 방을 따로 쓰겠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어요. 알렉스는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알렉스는 지금이라도 당장 노아를 들어 제 방에 가두어 두고 싶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아무도 만날 수 없도록, 오직 저만 보게 하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노아는 어째야 할지 고민했다. 알렉스와 앞으로 함께 하기로 했지만, 당장 같은 방을 쓰는 건 조금 쑥스러웠다.

노아는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짙은 눈을 마주하자 괜스레 발가락이 가려웠다.

“짐은, 여기다가 놔주세요.”

슬쩍 고개를 내밀어 조엘에게 말했다. 그러느라 노아는 보지 못했다. 알렉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하지만 노아가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땐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럼 짐 여기다 두겠습니다.”

짐을 들고 척척 방 안으로 들어온 조엘은 아무렇지 않게 침대 옆에 노아의 가방을 두었다.

이브가 사 준 옷들은 필요 없다면서 알렉스가 죄다 거기다 빼놓은 터라 갈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올 때도 짐은 단출하기 짝이 없었다.

노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두 달 전과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다. 알렉스와 자신의 관계만이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노아는 어딘지 감회가 새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일이 제게 벌어졌다. 손끝과 발끝을 괜스레 꼼지락거렸다.

“대표님은 어떡하실 거예요? 혹시 출근하십니까?”

여전히 방에서 나가지 않은 조엘이 가만히 서서 노아만 바라보는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회사고 뭐고 내팽개친 게 제법 오래된지라 처리할 일이 산더미였다.

“아, 그리고 주치….”

“잠깐 쉬고 있을래?”

알렉스는 조엘의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곧장 눈짓을 보냈다.

“일 얘기만 좀 하고 돌아올게.”

노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자마자 알렉스는 조엘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대표님? 왜, 왜요?”

“입 다물어. 일단 내려가자.”

왜요? 심상치 않은 고용주의 표정에 조엘은 몸을 사렸다. 왜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거냐.

조엘은 영문도 모른 채로 그에게 이끌려 1층 주방으로 끌려 내려갔다.

“어머, 도련님. 마침 잘 왔어요. 다과 준비가 끝났는데 어떡하실래요? 가지고 올라갈까요? 아니면….”

“매디슨, 그리고 루시. 할 얘기가 있어요.”

“네? 무슨…?”

“뭘요?”

두 사람이 동시에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노아한테 제 상태에 대해선 함구해 주세요.”

의아한 표정의 두 사람이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표님 상태에 대해서라면….”

“내가 쓰러졌다는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마. 각인부작용을 심하게 겪었다는 것도.”

“네? 하지만, 노아 씨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맞아요. 도련님. 노아 씨도 알아야죠. 도련님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결국 노아 씨랑 떨어지는 바람에 생긴….”

“루시. 하지 마요. 그냥 좀 힘들었다는 정도로 괜찮습니다. 겨우 여기로 돌아올 마음을 먹은 사람에게 내가 자기 때문에 심하게 아팠다는 얘길 들으면 얼마나 걱정하겠습니까. 거기다….”

알렉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조부를 지척에서 보살폈던 루시 델슨 부인에게 아직도 밝히지 않은 얘기를 꺼냈다.

“노아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임신 초기라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나중에 안정기에 접어들고 나면 그때 내가 직접 말하겠습니다.”

노아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 노아를 되찾는 데에만 정신을 쏟아붓느라 지금까지 신경 쓰지 못했던 사실이 말을 꺼내는 순간, 사실로 확 다가왔다.

그래, 노아는 내 아이를 가졌다.

“어머! 정말요?! 노아 씨가 도련님 아이를 가졌어요? 세상에, 세상에…! 아니, 잠깐, 이럴 때가 아니지. 울 그이한테 말해야, 아니, 우선 노아 씨한테 축하부터….”

노부인은 충격적인 소식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했다. 호들갑을 떨어 대며 당장이라도 노아한테 달려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진정하세요. 지금은 쉬고 있으니까, 괜한 부담 주지 마시고요.”

“그렇지. 그래요. 내가 흥분하면 안 되지. 도련님! 축하드려요! 아이라니…, 도련님의 아이라니….”

흥분한 루시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돌아가신 회장님께서 아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방방 뛰는 루시 곁에서 조엘이 걱정스레 되물었다.

“대표님. 정말 말 안 하실 겁니까? 그래도 노아 씨가 나중에 알게 되면 서운해하실 텐데요….”

“할 필요 없어. 그리고 노아를 되찾았으니 부작용은 금세 가라앉을 거야. 괜한 일로 수선 피우지 마.”

“대표님이 그러라면 그러긴 할 테지만….”

영 미심쩍은 표정으로 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용주가 그러기로 결정한 거라면 자신이 뭐라고 할 일이 아니었다.

“몇 주나 됐어요? 초음파 사진은 찍었어요?”

“11주예요. 초음파 사진은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말을 꺼내는 순간 알렉스는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떨어져 있는 동안 노아의 건강 상태부터 확인해야 한다. 그동안 노아 혼자, 아이 아빠도 없이 병원에 다녀왔다. 자신이 좀 더 일찍 정신을 차렸더라면, 아니 조금이라도 노아의 얘기를 믿었더라면 노아가 홀로 쓸쓸하게 병원에 다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욕지기가 치밀어 오를 것 같아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과거의 자신에게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다.

“너는 이대로 회사로 복귀해. 난 노아 데리고 닥터 셰먼에게 다녀와야겠어.”

“네. 그럼 내일부터는 정상 출근하시는 거죠?”

“해야겠지….”

사실은 일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되찾은 노아 곁에서 단 한 순간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능력한 모습 따위 제 오메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노아에게 언제든 멋진 사람이고 싶었다.

다시는 노아가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 같은 건 만들지 않을 거다. 겨우 되찾은 이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다.

“보이세요? 여기가 머리, 그리고 이쪽이 몸통입니다.”

초음파로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알렉스는 눈을 떼지 못했다. 닥터 셰먼은 기기를 조작해, 아이의 크기를 확인했다.

“11주 차 아이 치고 조금 작습니다만, 남성 오메가의 아이는 좀 작게 태어나는 일이 많아 이상이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몇 가지 더 기기 조작을 하며 그녀가 덧붙였다.

“일단 초음파상으로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헌트 씨의 페로몬이 일반 오메가에 비해 수치가 낮아서 걱정을 했었습니다만, 문제없이 자라고 있네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던 알렉스가 노아의 손을 꽉 쥐었다.

“조심해야 할 건 없습니까.”

“이때가 가장 유산 위험이 큽니다. 스트레스는 받지 마시고요, 건강에 유의하세요. 아파도 약을 쓸 수가 없으니까요.”

“페로몬 샤워는 괜찮습니까.”

“지나치게 강한 자극은 안 됩니다. 안정을 위해 알파 분의 페로몬을 풀어 주는 건 좋지만, 어디까지나 긴장을 푸는 정도로만 페로몬을 맡게 해 주셔야 합니다. 두 분 페로몬 수치가 지나치게 차이가 커요. 특히 알파 페로몬이 보통 사람보다 수치가 높은 편이라 수치가 낮은 임산부에게 강한 페로몬은 자칫하다간 아이가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아, 그리고 부부관계는 하셔도 됩니다만 조심하셔야 해요.”

노골적인 이야기를 사무적으로 꺼내는 닥터 셰먼의 말에 노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얀 목덜미가 붉게 물들었다.

“조심이요? 살살하라는 겁니까.”

그만 물으라는 듯 노아가 알렉스의 손을 잡아당겼다.

“배를 짓누르거나 지나치게 압박하는 자세는 안 좋습니다.”

섹스를 살살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으려던 알렉스는 부끄러워 땅으로 꺼질 것 같은 노아의 표정에 애써 질문을 눌러 참았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더 주의사항은 없습니까.”

“입덧은 없죠?”

“네.”

노아가 고개를 끄덕했다.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빈혈이 있거나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꼭 오셔야 합니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더 확인하고 다음 진료를 2주 뒤로 잡았다. 이 시기엔 본래 자주 검진해야 한다고 닥터 셰먼이 몇 번이고 강조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초음파에서 눈을 못 떼던 알렉스는 냉큼 출력한 사진을 챙겼다.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믿기 어려운 걸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그런 감정이었다.

“되게 작죠?”

“이 조그만 게 머리도 있고 몸통도 생겼다는 게 신기해.”

멍청하게도 하마터면 이 아이를 영영 보지 못할 뻔했다. 자신이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노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더라면, 그랬더라면 알렉스는 아마도 자신을 평생 용서하지 못했을 거다.

“알렉스? 왜 그래요?”

손가락 끝으로 초음파 사진을 가만히 매만지던 알렉스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갈까?”

알렉스는 사진을 안주머니에 넣고 침대에서 내려오는 노아를 부축했다. 병자도 아닌데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에 노아는 웃었다.

“저 혼자서 걸을 수 있어요.”

“조심하라는 말 못 들었어? 걷다가 발이라도 걸려 넘어지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말로는 사양하면서도 노아는 슬그머니 그에게 기댔다. 알렉스가 자신을 챙겨 주는 게 좋았다. 일거수일투족에 전전긍긍하는 그의 태도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차에 올라타고서도 알렉스의 과한 애정은 계속 이어졌다. 안전띠를 대신 매어 주고 괜찮냐고 또다시 물었다.

행여나 차가 덜컹거릴까 운전을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노아는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코끝으로 그의 페로몬 향이 조심스레 자신을 감쌌다. 나른하고 편안한 기분에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날갯짓을 했다. 긴장이 풀린 노아에게서 슬금슬금 페로몬이 새어 나왔다. 희미하리만큼 옅고, 감질날 정도로 달짝지근한 페로몬에 알렉스는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갈증이 단숨에 알렉스의 목구멍을 긁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온몸의 수분이 다 말라붙을 정도로 심한 갈증에 시달릴 때, 겨우 잎사귀에 맺힌 이슬 한 방울 삼킨 기분이었다.

힐긋 옆을 보자 노아는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보기 좋게 살이 오른 두 뺨이 발그레했다. 도톰한 윗입술이 도발하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알렉스는 전방을 주시하며 노아의 얼굴을 연신 돌아보았다.

성급한 욕망이 단전 깊숙한 곳에서 치달아 올랐다. 알렉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참아야 한다. 자신은 짐승이 아니다. 지금은 아이를 가진 제 오메가를 극진히 보살피고 보호해야 할 때였다.

알렉스는 뺨 안쪽 살을 씹었다. 비릿한 맛이 입안으로 번졌다. 노아의 페로몬을 갈구하는 욕망이 찌릿한 고통에 조금 가라앉았다.

노아는 자신을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다. 조엘이 짐을 들고 왔을 때, 알렉스는 당연하게도 노아와 같은 방을 쓸 거라고 생각했다. 전과는 다른 관계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마음이 서로 통한 사이에 굳이 방을 따로 쓸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노아는 전과 같은 방식을 선택했다. 짐을 그 방에 두라고 했을 때, 내색하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노아가 아직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여전히 제 발밑에는 암흑이 도사리고 있었다. 언제든 입을 벌리고 자신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절망의 구렁텅이가.

노아가 받아 주었을 때, 제 세상은 온통 빛으로 가득했다. 그 빛은 자신을 그 구렁텅이에서 꺼내 주었지만,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게 아니었다. 단지 빛에 가려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알렉스는 순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노아가 언제든 자신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목구멍을 조여 왔다. 핸들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진정하기 위해 숨을 천천히 쉬었다.

괜찮아. 노아가 내 곁에 있어.

알렉스의 시선은 편안하게 잠이 든 노아를 향했다. 희미하지만 달짝지근한 페로몬을 깊게 들이마셨다. 불안감이 조금씩 사그라졌다.

알렉스의 각인부작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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