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헬기가 하늘을 날아올랐다. 포지아시까지 헬기로 대략 1시간 남짓.
알렉스의 시선은 정면을 향했다. 초조함이 밀려와 그는 몇 번이나 자세를 바꾸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잘못된 제보일 수도 있다. 희망에 잔뜩 부풀었다가 실망하길 수차례.
조사관이 잘못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지만, 알렉스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찾은 것이길 바랐다.
연락이 온 건 포지아시를 뒤지던 조사관에서 온 거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지명에 잠시 놀라긴 했으나 알렉스는 일단 움직였다.
하루와 같은 1시간이 지나고 헬기는 포지아시 외곽의 헬기 착륙장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고 나와 있던 조사관이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다.
“어디죠?”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지역 경찰의 도움으로 병원에 협조를 구한 상황입니다.”
“갑시다.”
알렉스는 조사관과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이미 여러 번이었기에 서로 불필요한 얘기는 나눌 이유가 없었다.
알렉스와 함께 이곳에 도착한 조엘은 운전석에 앉아 연신 고용주를 힐끔거렸다. 이번엔 제발 뭐라도 건졌으면 좋겠는데….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알렉스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허탕 치게 될 경우를 대비해 조엘은 알렉스의 약도 챙겼다.
알렉스가 긴장한 만큼 조엘도 긴장했다. 조사관이 알려 준 길을 따라 십여 분을 달리자 아담하고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숲과 가까운 도시라 그런지 온통 주변이 푸른 나무로 가득했다.
조사관이 알려 준 병원은 마을에 있는 유일한 오메가 병원으로 3층짜리 오래된 건물이었다.
알렉스의 시선이 건물 외부를 훑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 확인만 하면 되는데, 쉬이 걸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또다시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긴장감으로 손끝이 저릿해졌다.
“대표님?”
조엘이 병원 입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알렉스를 불렀다.
“가자.”
두려움을 잠시 뒤로 미루고 알렉스는 출입문을 열었다. 접수대에는 제복을 입은 지역 경찰 두 명이 안내직원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실종자를 찾으신다고요?”
조사관의 얼굴을 알아본 경찰이 먼저 말을 걸었다.
“네. 해당 환자분의 차트와 CCTV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조사관의 요청에 경찰은 미리 받아 두었던 차트를 건네주었다. 조사관이 받기도 전에 알렉스가 재빨리 그것을 가로챘다.
“영상은 보안실에서 확인됩니다. 그런데 실종자분이 무척 중요한 분인가 봅니다?”
“아, 네. 뭐….”
조엘이 적당히 경찰을 상대하는 사이 알렉스는 환자의 신상명세를 확인했다.
나이는 25살에 제임스 바론이라 적힌 신상 명세는 노아와 전혀 맞지 않았다. 일부러 가명을 썼을 수도 있으니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알렉스가 확인한 건 신체 사이즈였다. 일단 키는 노아와 같았다. 임신 주수도 맞았다. 혈액형과 눈동자 색, 그리고 머리카락 색 모두 노아의 정보와 일치했다. 심장이 뛰었다. 이 정도로 외적인 조건이 모두 동일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어쩌면, 진짜 노아를 찾은 걸 수도 있다.
보호자로 새뮤얼 윌슨이 적혀 있었는데 이 사람도 가짜로 적었을 확률이 높았다.
“영상 확인하러 가시죠.”
담당자의 안내를 받아 접수대 안쪽의 사무실로 이동했다. 보안실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모니터 두 개가 다인 방이었다.
좁은 탓에 알렉스와 조엘, 그리고 담당자 한 명만 방으로 들어갔다.
“보여 주시겠어요?”
담당자가 녹화된 당일 로비 영상을 켰다.
“환자분 방문 시간이 언제입니까?”
“오전 열 시경부터 봐 주시겠어요?”
기기를 조작해 해당 시간대를 찾은 담당자가 그 시간대의 영상을 재생했다.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방문자가 많지는 않았다.
병원 관계자 몇이 로비를 가로질렀고 간호사와 의사가 사이좋게 잡담을 나누는 장면이 이어졌다. 잠시 후 모자를 눌러쓴 자가 병원으로 들어섰다. 곁에는 제법 체격이 나갈 것 같은 이가 함께였다.
알렉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들어서는 환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더운 여름에 푹 눌러쓴 모자와 얼굴의 반을 가린 마스크가 눈길을 끌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필사적으로 얼굴을 숨겨야 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알렉스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매의 눈을 하고선 모니터를 노려보던 그는,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이브…?”
“대표님, 저분…!”
알렉스가 놀란 건 얼굴을 가린 환자의 뒤로 조금 늦게 다가온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접수대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그는 접수대에 앉은 직원에게 물었다.
”노아, 아니 제임스 바론 환자랑 함께 온 사람 중에 갈색 머리 알파가 있지 않았습니까.”
다그치는 질문에 접수 직원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 네. 있었어요. 알파는 그분인데 윌슨 씨가 보호자라고 해서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었는데….”
알렉스는 보호자를 아는 듯한 뉘앙스에 멈칫했다.
“윌슨이라는 사람을 알아요?!”
“네. 마을에서 유일한 목수인 걸요. 늘 혼자 있던 윌슨 씨가 먼 친척이라고 바론 씨를 데리고 와서 다들 깜짝 놀란걸요.”
“그 사람 어디 삽니까?!”
드디어 찾았다. 얼굴을 다 가린 환자 옆에 자신이 아는 이가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알렉스는 드디어 제 오메가를 찾았음을 확신했다.
노아는 무사해. 그 사실이 알렉스를 기쁘게 했다. 환희가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왔다.
노아는 제 손에 있는 초음파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고작 콩알 같던 그 작은 아기가 어느새 곰 인형 같은 형태를 갖추었다. 남성 오메가의 신체 특성상 아이가 매우 작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정말 작네요.”
이브가 감격한 듯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볼 건가. 음식이 다 식겠어.”
두 사람이 머리를 딱 붙이고 사진 구경에 빠지느라 주문한 음식이 식어 가자, 샘이 팔을 뻗어 사진을 가렸다.
“아….”
“맞아요. 음식 식겠어요. 많이 먹어요. 배고프죠?”
이곳에 와서 처음 나온 외출이었다. 병원에 온 김에 점심을 먹고 들어가기로 해 근처 레스토랑에 들른 참이었다.
노아는 사진을 소중히 지갑 속에 꽂아 두고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으로 눈을 돌렸다.
육즙을 잔뜩 머금은 두툼한 스테이크를 보자 잊고 있던 허기가 밀려왔다.
“잘 먹겠습니다.”
포크와 나이프를 쥔 노아는 두툼한 스테이크를 툭툭 잘라 그대로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씹을 때마다 육즙이 입안에서 터져 나왔다.
한시도 쉬지 않고 고기를 먹어 대는 노아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이브가 물었다.
“입덧은 없나 봐요?”
“네. 다행이죠. 대신, 항상 배가 고파서 곤란해요.”
“그럼 매번 당신이 요리해서 먹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시내 스튜디오로 가요. 최고급 요리사까지 모셔올 수 있어요.”
“전 이대로 좋아요.”
“그러지 말고 이브 제안을 좀 심사숙고하는 게 어때? 나도 영 마음이 안 놓이고….”
이브의 말에 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노아는 입안에 있는 고기를 꼭꼭 씹어 삼켰다.
“두 분 마음은 잘 알겠지만, 제가 조심할게요. 그리고 어차피 출산할 때가 되면 싫어도 오두막을 나가야 해요. 그때까진 그냥 오두막에서 지내고 싶어요.”
“하지만 정말 잘 생각해 봐요. 아무래도 문제가 생겼을 때 빠르게 대처하려면 도시에 있는 게 나을 텐데…. 의사는 뭐라고 안 해요?”
노아는 슬쩍 시선을 내리깔고 나직이 말했다.
“그런 말씀은 없으셨어요. 아기는 잘 자라고 있다고 했고, 저도 큰 이상 없다고 하셨고요.”
“내가 미혼이라 이런 일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오메가 임신은 아이 아빠가 곁에 없으면 힘들다고 들었는데…, 정말 아무 문제 없어요?”
이브의 걱정 어린 말에 노아는 잠시 멈칫했다. 아기 아빠의 페로몬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이미 의사로부터 들은 상태였다.
‘검사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긴 합니다만 지금 환자분의 페로몬 수치가 매우 낮아요. 보통 이런 상태면 아이가 제대로 자랄 환경이 안 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 페로몬 수치를 빼고는 다른 건 다 정상이라 뭐라 말하기는 어려운데…, 아무래도 환자분 얘기처럼 늦게 발현한 탓에 다른 오메가들과는 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 같네요.’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혹시,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나요?’
‘지금으로선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되도록 한 달에 한 번은 정기검진 받기를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아이 아빠의 페로몬을 주기적으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브와 샘에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아직 큰 이상은 없고, 단지 자신의 페로몬에만 문제가 있는 거니까.
노아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얼굴을 들고 말했다.
“제가 발현이 늦어서 다른 오메가하고는 좀 다르대요. 그래서 큰 영향 없는 것 같다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이브가 영 미심쩍은 얼굴을 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정말 전 괜찮아요. 아이가 잘못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알렉스를 버리고 선택한 아이였다. 이 아이가 만약 잘못된다면…. 생각만으로도 등줄기가 오싹했다.
노아는 애써 웃으며 남은 스테이크를 다 먹어 치웠다. 언뜻 밀려오는 두려움은 맛있는 음식 앞에서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잘 먹는 노아 앞으로 이브는 제 몫의 스테이크도 덜어 주었다.
“먹어요. 임산부가 잘 먹어야지. 입덧 없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노아는 그녀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샘이 자기 몫의 라자냐를 덜어 주었다.
“정말 잘 먹네요.”
“저렇게 먹는데 바짝 말라서 어디 아픈 줄 알았지 뭐야.”
“죄송해요. 저 혼자만 다 먹어서….”
“아니야. 배 속에 애를 품고 있는데 잘 먹어야지. 여기 디저트도 괜찮아. 주문할까?”
노아가 말릴 틈도 없이 샘이 서버를 불러 디저트를 주문했다. 괜찮다고 사양해야 하는데, 오랜만에 먹는 디저트였다. 이브가 가끔 오두막에 들를 때 사다 주는 에그타르트가 생각나 라자냐를 우물거리고 있는데도 입안에 침이 고였다.
“온 김에 장을 봐서 들어갈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이럴 땐 참으면 안 되니까.”
“지금도 충분히 잘 먹고 있습니다.”
“에이. 그래도 때때로 먹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샘이 이래 봬도 엄청 다정해요. 지금도 노, 아니, 제임스에게 어떤 걸 먹이면 좋을까 고민하는 얼굴인데요, 뭐.”
“내가 언제 그랬다고….”
괜히 머쓱해진 샘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때마침 서버가 초콜릿 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거의 2인분의 식사를 해치우고도 노아는 디저트를 보자마자 눈을 빛냈다. 초콜릿 향이 어찌나 진한지 테이블에 내려놓았을 뿐인데도 군침을 삼키게 했다.
포크를 꾹 누르자 묵직한 질감이 느껴졌다. 입안으로 가져가자 엄청 진한 맛이 느껴졌다.
노아는 행복한 얼굴로 눈 깜짝할 새 초콜릿 케이크를 다 먹어 치웠다.
어느새 비어 있는 접시를 내려다보자 그제야 노아는 말 한마디 안 하고 먹기만 했다는 걸 깨달았다. 민망함에 슬쩍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자 흐뭇해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보다 오두막 수리할 때까진 샘 집에서 머무는 거 어때요? 샘도 상관없다고 하는데.”
“그건….”
“난 괜찮아. 혼자 두는 것도 걱정이고. 아, 같이 지내는 게 불편하다면 내가 최대한 조심하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샘이 불편하시잖아요. 전 괜찮아요. 수리하는 동안 방해 안 할게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무래도 몇 가지 수리하다 보면 먼지도 많이 날리고, 소음도 심할 텐데 그게 임산부한테 좋은 환경은 아니잖아.”
“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샘이 지적했다. 곤란한 표정으로 노아는 고민했다.
“난 역시 걱정이에요. 지금이라도 도심지로 나갈 생각 없어요? 그쪽 준비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맛있는 디저트도 매일 먹을 수 있어요. 근처에 엄청 유명한 베이커리도 있고, 웬만한 건 다 갖춰져 있으니까.”
“이브…. 그 얘기는 다 끝났잖아요….”
노아는 여전히 포기 못 한 이브에게 불만 섞인 목소리로 항의했다.
“미안해요. 여전히 걱정돼서 그만…. 그럼 거기 가자고 안 할 테니까, 수리 끝날 동안에만 샘 집에서 머물러요. 이 정도는 해야 내가 안심할 거 같아요.”
두 사람이 똑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자 어째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지금까지 신세 진 거로도 모자라 폐까지 끼치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노아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자신을 응시하는 두 사람에게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대신, 딱 일주일만 신세 질게요. 수리는 그쯤이면 끝난다고 하셨으니까.”
“그래요. 그럼 됐어요. 그 김에 나도 일 좀 미루고 며칠 더 있다가 돌아갈게요. 샘, 나도 머무를 거야, 괜찮지?”
“뭐, 그러든가.”
관심 없다는 듯 샘이 퉁명스레 툭 말을 내뱉었다.
“잘됐다, 그쵸?”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지만 환하게 웃는 이브의 표정에 노아의 입가에도 슬그머니 미소가 어렸다.
“자, 이제 장 보러 가요!”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그 길로 마을에서 가장 큰 마켓으로 갔다. 이 지역에서 나는 농작물을 신선한 상태로 유통해 판매하는 곳이라 재료가 하나같이 싱싱했다.
일주일치 식재료와 필요한 생필품을 잔뜩 카트에 쓸어 담고, 마켓에 딸린 베이커리에도 들러 빵과 디저트도 잔뜩 담았다.
이런 곳에서 장 보는 건 처음이었던 모양인지 이브도 어쩐지 신이 난 상태였다.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터무니없는 걸 카트에 담다가 샘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
모처럼 즐거운 시간이었다.
장 본 물건들을 픽업 트럭에 잔뜩 싣고 그들은 다시 오두막으로 향했다. 노아는 딱 두 달 전에 지났던 그 길을 다시 지났다. 그때보다 한층 더 가로수는 푸르렀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고작 지낸 지 두 달밖에 안 됐지만,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아이를 낳고 이곳에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다 친절했고 풍경도 마음에 들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게 좀 어려울 것 같은 게 가장 걱정이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노아는 이내 걱정을 털어 버렸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천천히 생각하면 되겠지.
노아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픽업 트럭은 오두막의 진입로에 들어섰다.
“어? 웬 차지?”
차창 너머 시야 끝에 근사한 세단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두 사람이 서 있는 게 먼발치에서 보였다.
“가구 의뢰라도 하러 왔나?”
작업실로 직접 의뢰를 하러 찾아오는 고객이 간혹 있어 대수롭지 않게 샘이 중얼거리던 그때, 이브가 탄식을 터트렸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노아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작업실 쪽을 바라보던 두 사람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두 사람의 얼굴이 몹시 익숙했다.
어째서, 여기에…?
노아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알렉스….”
“저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요. 절대로 나오지 마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브가 밖으로 튀어나갔다. 잠시 어리둥절했던 샘도 어찌 된 일인지 빠르게 눈치채고는 이브의 뒤를 따라 내렸다.
노아의 시선은 차로 다가오는 알렉스를 향했다.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점점 온몸으로 퍼졌다.
“노아!”
“무슨 염치로 여기 온 거야?! 저리 꺼져!”
“비켜. 이브 레너드!”
곧장 제게로 달려오던 알렉스가 이브에게 가로막혔다. 이브가 알렉스를 붙잡았다. 알렉스가 팔을 뿌리치자, 이번엔 샘이 큰 덩치로 알렉스를 막았다.
“저리 비키라고! 노아!”
막으려는 사람들과 필사적으로 뿌리치려는 알렉스의 거친 몸싸움이 이어졌다.
노아의 푸른 눈동자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매끈하던 얼굴 윤곽이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턱선은 한층 더 날렵하고 광대 아래 양 뺨이 움푹 팼다. 슈트를 입고 있어도 단단하던 몸이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그의 안색이 너무 창백했다. 왜 그런 모습이에요. 어디가 아파요?
노아는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나갈 뻔했다.
“뻔뻔하게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당장 나가!”
“비켜. 이브! 내가 지금 널 때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참고 있는 줄 알아?!”
“때려 보라고! 개자식아! 넌 아빠 자격도 없는 놈이야!”
“이 자식이야? 애 아빠가? 여긴 내 땅이야! 썩 꺼져!”
싸워 대는 두 사람의 형상이 흐려졌다. 노아의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노아는 저리는 가슴을 꾹 누른 채로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귓가로 그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노아! 제발! 얼굴만 확인할게.”
알렉스가 제 이름을 외쳐 불렀다. 노아는 두 귀를 꽉 막았다. 절절 끓는 애절한 목소리가 자꾸만 심장을 아프게 찔러 댔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확인이고 뭐고 노아는 너 안 보고 싶어 해. 네가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준 건지 알아?”
“제발… 확인만 하게 해 줘. 무사한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해.”
“노아는 여기서 잘 지내. 너 없이, 이런 곳에서도 행복해하며 즐거워해. 네가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오늘도 노아는 이곳에서 웃고 있었을 거야.”
“아빠 자격도 없는 놈이 무슨 낯짝이 있다고 여길 찾아와?! 당장 꺼져!”
샘의 외침이 들렸다.
“노아! 노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제발, 얼굴만 보여 줘. 응?”
알렉스의 절절한 외침도 뒤이어 들렸다. 노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귀를 더욱 꽉 틀어막았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웅웅대는 소리가 공기 중에 퍼지고 뒤섞였다.
노아는 귀를 꽉 막고 몸을 웅크렸다. 뇌리에 남은 그를 지우려 애썼다. 야윈 얼굴과 절절한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냥 가요. 제발…, 날 내버려 둬요.
노아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무릎에 거의 얼굴을 파묻을 정도로 깊이 몸을 숙였다. 귀를 막아도,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가 미칠 것 같았다.
그때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조엘의 비명 섞인 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대표님…!”
휙 얼굴을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노아는 눈을 크게 떴다. 손을 떨며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그만, 그만해요!”
샘과 알렉스가 서로에게 주먹을 휘두르다 멈췄다. 야윈 얼굴로 알렉스는 애타게 찾아 헤매던 노아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흔들리는 잿빛 눈동자는 반듯한 이마와 젖은 눈가를 훑었다. 붉어진 뺨으로 미끄러진 시선은 도톰한 입술을 훑고, 찬찬히 시선을 내렸다.
노아의 안위를 눈으로 그가 확인하고 있었다. 무사히 잘 지내는 모습에 안도하는 동시에 기뻐하고 있었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시선이 노아에게 쏟아졌다. 애달픈 시선과 그의 야윈 얼굴을 보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그, 그만하세요….”
“노아, 그러지 말고 들어가 있어요. 알렉스는 내가 쫓아낼게요.”
“그래. 들어가. 여기는 우리가 해결할게.”
이브와 샘이 동시에 노아를 보호하듯 둘러쌌다.
“노아….”
조엘이 알렉스를 말리듯 팔을 붙잡았다.
노아는 벽처럼 자신을 가로막은 사람들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얘기할게요.”
“노아! 하지만…!”
“괜찮아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울컥,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눈꺼풀을 깜빡였다. 이브의 안쓰러운 시선과 샘의 걱정 어린 눈빛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 사람들에게 이 이상 폐를 끼치면 안 된다.
그들을 슬쩍 밀어냈다. 노아를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들은 노아의 의지대로 밀려났다.
노아 앞에 알렉스가 있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노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꾸만 속을 헤집어 대는 감정을 꾹꾹 눌렀다.
“노아, 나는….”
“돌아가세요.”
알렉스가 입을 떼기 전에, 그가 자신을 흔들어 놓기 전에 솔직하게 말했다.
“보고 싶지 않아요. 더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돌아가세요.”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야윈 얼굴을 보는 게 괴로웠다. 바닥만 바라보며 노아는 돌아가라고 중얼거렸다.
시선 끝에 걸린 검은 구두코가 움직였다. 시선을 들자 어느 틈엔가 성큼 다가온 알렉스가 팔을 뻗었다.
노아는 불에 덴 듯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손을 피하자 알렉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들었던 손을 내리며 그가 말했다.
“미안해. 다 기억났어. 넌…, 아니, 바보같이 내가 잊었어. 까맣게 잊어버리고 널 상처입혔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온전히 혼자만의 밤이었던 그날이, 그에게도 찾아왔다. 노아는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네가 사라졌다는 걸 알고 나서, 한시도 편히 쉬지 못했어. 눈을 감으면 네 우는 얼굴이 보였어.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어.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우는 건 아닐까, 내가 모르는 곳에서 사고라도 당한 게 아닐까…, 온통 나쁜 생각뿐이었어.”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슬픔으로 젖어 갔다. 핏발이 잔뜩 선 눈동자가 일렁거렸고 노아의 심장도 함께 흔들었다.
“돌아버릴 것 같아. 온통 네 생각뿐이었어. 네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날 짓눌러 질식할 것 같아. 날 미워하겠지. 아니 틀림없이 그럴 거야. 아는데, 잘 알겠는데….”
알렉스는 미친 사람처럼 쉼 없이 감정을 쏟아 내며 숨을 골랐다.
“그냥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돼? 용서해 주지 않아도 돼. 평생 날 미워해도 괜찮아. 그냥, 옆에만 있어. 제발…, 나 좀 살려 줘….”
쏟아져 나오는 말은 온통 믿기지 않은 소리였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가 저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할 리가 없는데….
노아는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몽롱했다. 뭉클해지는 심장을 꾹 눌렀다. 그리고는 이내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 어 하시잖아요…. 저, 오메가에요. 알렉스가 경멸하던 오메가…. 착, 각일 거예요. 알렉스는 지금 아픈 거예요. 그렇죠? 어디가 아픈 거예요?”
노아는 한발 물러서 있는 조엘에게 눈을 돌렸다.
“알렉스 아픈 거 맞죠? 어디가 아파요? 병원에 가야….”
“노아! 제발…, 나 좀 봐.”
알렉스는 머뭇거리는 노아를 끌어당겨 안았다. 품 안에서 바스락대는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커다란 몸을 숙여 노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디단 살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알렉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숨겨진 노아의 페로몬을 찾는 알파의 본능이었다. 꿈틀거리는 본능이 욕심 사납게 노아를 휘감았다.
노아는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혼란으로 가득 찬 시선이 알렉스를 올려다본다.
“유산… 때문에 그래요? 유산 못 받을까 봐 그러는 거 다 알아요.”
“그게 아니야!”
“아니면, 그날 밤 기억이 났으니 이 아이가 당신 아이라고 주장하려고요? 이 아이… 뺏으러 온 거예요? 아이는 당신하고 상관없어요! 내가 낳기로 했고, 나 혼자서 기를 거예요!”
“그런 거 아니야. 아이는 상관없어!”
“난…, 못 믿어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믿어요.”
“제발 노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바보였어. 편견으로 똘똘 뭉친 내 머릿속이 널 받아들이질 못했던 거야.”
“그 편견이 이젠 사라졌다는 거예요? 난 하나도 모르겠어요. 잘못했다고 하면 내가 용서해 줘야 해요? 난 아직 이렇게 아픈데…. 더는 그렇게 안 살 거예요. 난, 이제 못 해요. 마음 없는 결혼 같은 거…, 내가, 내가 견딜 수 없어요. 돌아가세요. 얼굴 안 보고 싶어요.”
“노아!”
팔을 뻗으려는 그를 피해 노아는 집으로 도망쳤다. 그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온통 달콤한 말을 내뱉는 그에게 매달려 좋아한다고 말할 것 같았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마음 같은 건 다 사라졌다고 믿었다.
온 마음을 다해 그에게 외쳤던 진심이 거부당했을 때, 모든 건 끝났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을 거부했던 그가 절절히 내뱉는 고백을 듣는 순간 혼란이 밀려왔다.
그가 미웠다. 미워서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런데도 그가 하는 말을 믿고 싶었다. 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노아는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오메가를 싫어해. 날 경멸한다고.
두 달 전에 받은 상처로 여전히 심장이 너덜너덜했다. 그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아물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또다시 그가 헤집어 댄 자리가 욱신욱신 저렸다.
노아는 양팔로 자신의 무릎을 꼭 껴안았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웅크린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욱신거리는 고통을 어째야 할지 몰랐다.
알렉스는 노아가 사라진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제 오메가의 거부가 제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놨다. 그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 다시 제 오메가를 되찾으려면 이 정도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 진짜 뻔뻔한 새끼야.”
이브가 진저리치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알렉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경멸 어린 눈빛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만큼 했으면 됐지 않아? 넌 양심도 없어?”
감정 따위 한 톨도 없는 시선으로 알렉스는 입을 열었다.
“내 오메가를 내가 되찾는 건 당연해. 그보다 이브. 어째서 네가 노아와 함께 있는 거야? 이곳으로 달려오는 동안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만은 알 수가 없더라고. 넌 노아를 죽일 뻔했잖아.”
눈앞에서 노아에게 거부당한 알렉스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노아를 되찾는 건 되찾는 거고, 한때는 친구라고 여겼던 알파를 어째야 할지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 절절하게 감정을 호소하던 알파는 깨끗하게 사라졌다. 냉정함을 되찾은 알렉스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위협하듯 두 알파가 서로의 페로몬을 개방했다. 같은 형질의 페로몬이 뒤섞이며 서로의 호승심을 부추겼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울면서 내게 도와달라고 연락한 건 노아였어. 난 그에게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았을 뿐이야.”
“빚을 갚았다고?”
“그래.”
“그랬군. 그래서였어. 아무리 흔적을 찾아도 보이지 않길래 이상하다 했지. 레너드가 나섰으니 그림자조차 못 찾았던 거군. 좋아, 이해했어. 그런데….”
알렉스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어째서 내 오메가 옆에 아직도 있는 거지? 설마 노아한테 반했나? 감히 내 오메가를 탐내고 있는 거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네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밖에 없냐?”
어떻게 그런 소릴 할 수 있냐면서 이브가 화를 냈다.
“내가 지금 널 참아 주는 이유는 딱 하나야. 널 죽여 버렸다간 노아가 싫어할 테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온 힘을 다해 널 망가뜨렸을 거야.”
“허세 따위 작작 부려. 노아한테 미움받을까 봐 걱정되었다면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면 안 되지. 그리고 넌 착각하고 있어. 지금 네가 조심한다고 해서 노아가 널 받아 줄까? 그 얌전하던 사람이 도망치겠다고 필사적으로 내게 도움을 구했어. 웬만한 각오로 벌인 일은 아니라는 거야.”
“닥쳐.”
폐부를 찌르는 말에 알렉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게 진작 네 오메가 잘 챙기지 그랬어? 이미 넌 늦었어. 그러니 이곳에서 썩 꺼져 버려, 개자식아!”
들어가, 샘. 저 개자식은 놔두고.
행여나 싸움이라도 벌어질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샘을 끌고 이브가 안으로 들어갔다.
시야에서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알렉스는 휘청했다.
“대표님….”
조엘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노아가 자신을 받아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그는 절망했다.
부지런히 포크를 움직이며 노아는 끊임없이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샘이 만들어 준 파스타는 맛있었다. 샘의 오두막 뒷마당에서 직접 재배한 토마토를 오랜 시간 졸여 만들어서인지 풍미도 좋았고 감칠맛도 돌았다.
맛있는 파스타를 가득 입안에 넣어 씹고 삼키며 노아는 애써 바깥으로 향하는 관심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노아. 좀 천천히 먹어요. 그러다 체하겠네.”
샘이 슬그머니 노아 앞으로 물을 내밀었다.
“맛있어요.”
웅얼대며 노아는 제 앞에 놓인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춥진 않을까. 살이 많이 빠졌던데, 건강은 괜찮을까. 저녁도 못 먹고 어떻게 해.
연달아 떠오른 생각을 노아는 애써 지우려고 다시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음은 심란하고 생각은 온통 밖으로 향하는데 배가 고파 먹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알렉스와 재회하고 한바탕 눈물을 쏟아 내고 나서도 어김없이 식사 때가 되자 배가 고팠다. 식욕이 왕성한 아이 때문에 노아는 방 안에 틀어박혀 있지도 못했다.
두 사람은 힐끔힐끔 제 눈치만 살폈다. 노아는 애써 그들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계속 먹어 댔다.
해가 저물고 사위가 온통 어둠에 잠길 때까지 알렉스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적당히 물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바쁜 사람이고, 온전히 제게만 시간을 쓸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돌아가라고 했음에도 밖에서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여긴 산속이라 밤에는 추운데 슈트로 괜찮을까.
고작 두 달 동안 엄청 야위어 버린 얼굴이 떠올랐다. 대체 어디가 아픈 걸까. 내가 떠나고 병이라도 걸렸나. 혹시 심각한 건 아닐까.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도 멈췄다. 정말 그런 거라면….
노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손끝까지 피가 식었다. 포크를 쥔 손이 잘게 떨렸다.
“노아? 괜찮아요?”
드륵.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이브가 다가왔다.
“몸이 안 좋아요? 체했어요?”
이브가 시선을 맞추면 몸을 낮추었다. 샘도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왔다.
“…아, 아니요. 전 괜찮아요. 하지만….”
차오른 두려움이 목 끝까지 가득했다. 불안함을 누르며 노아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알렉스가…, 아파 보여서…. 너무 야위었어요. 살도 엄청 빠진 것 같고…. 두 달 사이 그 정도 살이 빠지는 거면, 큰 병에 걸린 게….”
말을 꺼내다 말고 노아는 숨을 몰아쉬었다. 상상만으로도 겁이 더럭 났다.
그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그가 자신을 찾아 헤맸다는 말에 마음이 들떴다.
상처받을까 봐 두려운 마음 한구석엔 기뻐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 먼 곳까지 찾아와 준 알렉스를 반기는 마음이 있었다.
도망친 건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의 인생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건 상상도 해 보지 않았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이브도 봤죠? 그게 정상은 아니잖아요. 어디가 아픈 걸까요? 큰 병일까요? 왜 병원엘 안 가고 저러고 있는 거죠? 저러다 진짜 큰일 나면 어쩌려고….”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말에는 두려움과 걱정이 가득했다. 노아는 불안감에 손을 달달 떨었다.
“노아, 노아. 진정해요. 아무 일도 없어요. 자요, 진정하고 물 마셔요. 응?”
이브가 억지로 노아 손에 잔을 쥐여 주었다.
“그룹 대표의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면 벌써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요? 고생하느라 야윈 거겠죠.”
이브는 알렉스가 각인부작용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각인 얘기를 하면 노아는 쉽게 알렉스를 받아 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과연 노아에게 좋은 일일까?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브는 침묵하는 걸 선택했다. 각인 때문이 아니라 알렉스가 진정으로 노아를 되찾으려면 그만한 각오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렉스 걱정은 그만 해요. 노아가 그렇게 걱정하면 배 속 아이에게도 안 좋아요. 아이 생각을 해야죠.”
“그래.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왜 하나? 자, 그러지 말고 마저 먹어. 이러다 밤에 배고파하면 어쩌려고 그래?”
샘도 아이만 생각하라면서 이브를 거들었다.
“정말, 괜찮은 거겠죠? 아무 일 없는 거겠죠?”
“그냥 스트레스 좀 받아서 살이 빠진 거예요.”
확신에 찬 그녀의 말에 목 끝까지 차오르던 불안감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래, 그도 사람이니까 스트레스받을 수 있지.
자신도 스트레스받으면 잘 못 먹었으니까 알렉스도 그런 거겠지.
그래, 일시적인 거야. 만약 건강이 안 좋았다면 조엘이 저대로 두지는 않았을 거야, 뭐라도 했겠지.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수척해진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조금 전처럼 몸이 떨릴 정도는 아니었다.
멈췄던 노아의 식사가 시작되자 이브와 샘은 겨우 안도했다.
19.
“오늘이 벌써 며칠 째죠?”
“일주일 됐네.”
창밖을 내다보던 이브의 얼굴에 짜증이 잔뜩 어렸다. 레모네이드를 홀짝거리며 마시던 노아가 그에 반응하듯 어깨를 잠시 움츠렸다.
알렉스와 만나고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노아는 여전히 샘의 집에 머물렀다.
차갑게 그에게서 돌아선 후 돌아갈 줄 알았던 알렉스는 그날 이후로 매일 아침이면 샘의 오두막으로 찾아왔고 모두가 잠이 들고 나면 그제야 돌아갔다.
이브가 화내고 샘이 호통을 쳐도 알렉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까운 마을에 숙소라도 정한 모양인지 매일 옷을 갈아입고 깔끔한 모습으로 차를 끌고 나타났다.
금세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로 목석처럼 샘의 마당 한가운데 서서 오로지 집만 바라보는 알렉스의 행동에 노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일부러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와 마주하고 서서 돌아가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 안에 있으면서도 노아는 알렉스가 오직 제 모습을 눈으로 좇는 걸 느꼈다.
노아의 머릿속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가는 그의 모습만 떠올렸다.
일은 어쩌고 여기 있는 걸까. 식사는 제대로 하는 걸까. 뭘 먹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조엘이 그래도 간단한 간식이라도 챙겨 주는 거겠지? 그런데 조엘은 어디 갔지?
이곳에 함께 왔던 조엘이 둘째 날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넌 이제 돌아가야 하지 않아?”
“저 꼴을 보고 내가 어떻게 가? 저 녀석 쫓아내기 전엔 안 가.”
샘의 말에 이브가 짜증을 부렸다.
“노아는 괜찮아요?”
멍하니 알렉스를 떠올리던 노아는 이브의 부름에 얼굴을 들었다.
“네?”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자 이브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노아.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죠?”
“…그냥… 계속 식사도 안 하고 저러고 있어서….”
“이거 봐. 역시 신경 쓰고 있죠? 저놈도 이걸 노렸다니까요.”
“하지만… 일주일 새 안 그래도 야윈 얼굴이 더 핼쑥해졌어요.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노아의 시선은 어느새 밖을 향했다. 집에 있어도 신경은 온통 그를 향해 있었다.
“저 정도 고생은 해 봐야 해요. 당신을 고생시켰는데 겨우 이 정도로 걱정하는 거예요? 아직 버틸 만하니까 저러고 있는 거예요. 당신한테 용서받으려고 하는 짓이에요.”
“알렉스가 왜 저한테 용서받으려고 해요? 그 사람이라면 그냥 절 무시하면 될 텐데….”
일주일 내내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했던 말과 행동 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노아는 여전히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알렉스는 자신을 믿지 않았다. 제 말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들어 준 적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비난했었다.
에디 할아버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비난했고, 다른 알파의 아이를 가졌다며 경멸했다. 알렉스가 했던 그 모든 행동에 노아는 끊임없이 절망하고 아파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아무리 외쳐도 자신의 진심이 그에게 전해지지 않아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오직 아이 하나만 지키자는 생각에 도망쳤다.
자신이 사라졌다고 해도 화를 좀 내고 나면 깨끗이 잊을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알렉스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이 강제 결혼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랬는데, 두 달 동안 자신을 찾았다고 한다.
이젠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를 믿지 못해 거부했더니 용서받기 위해 매일 이곳에 찾아와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그의 행동에 노아는 자꾸만 헛된 희망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그의 고백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희망이.
“노아…, 설마… 저놈 받아 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이렇게 쉽게?”
노아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살금살금 피어오르는 희망이 자꾸만 두려움을 꾹꾹 눌러 대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알렉스에게 달려가 그때의 고백이 진심이었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외면했다.
“곧 돌아갈 거예요…. 바쁜 사람이잖아요. 온전히 여기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자신이 말을 꺼내 놓고도 노아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맞아. 그는 바쁜 사람이잖아. 곧 칼밴으로 돌아가겠지….
단번에 표정이 시무룩해지는 노아를 보며 이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텄다. 노아는 이미 반쯤 저놈한테 넘어갔다.
좀 더 제대로 충고해야 하나? 생각하던 이브는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괜히 두 사람 일에 끼어들어 노아를 힘들게 할 필요는 없지.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한 마음을 타인이 바로 세울 수는 없는 법이다.
어쨌든 제일 중요한 건 노아의 마음이니까.
차가운 밤바람이 한차례 알렉스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그의 시선은 오직 저 안에 있을 제 오메가만 응시했다.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놓고, 제 오메가를 코앞에 두고 안을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막막했던 적이 있었던가.
몇 십억 달러가 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로넨 왕가와 협상할 때도 알렉스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그런 건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매일 같은 길을 달리고, 같은 곳에 서서 얼굴 한번 비치지 않는 노아를 기다렸다.
외면당하는 심정이 이토록 괴로운 것인 줄 몰랐다. 매시각, 시시때때로 심장이 갈라지고 피가 철철 흐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이 아픔을 노아가 겪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자신이 했던 모진 말들이 알렉스를 찔러 댔다. 할 수만 있다면 그때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놈이 바로 저였다.
잘못된 판단으로 제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은 건 자신이었다.
저 문 너머에 자신을 구제해 줄 사람이 있음에도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된 것도 결국 제가 저지른 짓의 결과였다.
할 수만 있다면 저 문을 열고 들어가 무릎 꿇고 빌고 싶었다.
하지만 노아가 다시 자신을 거부할까 봐 무서웠다. 이렇게 무서웠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두려웠다.
견딜 수 있을까. 영영 이대로 노아를 놓치고 자신이 살 수 있을까.
지금도 하루하루가 지옥인데.
까마득한 암흑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알렉스는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직은 안 돼.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한다.
노아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유산 때문에 찾아왔다고 오해하는 걸 바로잡고 싶었다.
지금 조엘이 유산 문제를 해결하러 칼밴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유산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깟 주식이 뭐라고.
해리스에게 이 결혼은 가짜였다는 걸 밝히고 조건부 유산은 받지 않겠다고 통보한 상태였다. 곧 조엘이 관련 서류를 가지고 올 것이다.
일단 그걸 보여 주고 유산 때문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키고 나면, 노아가 조금은 자신을 달리 봐 줄지도 모른다.
어느새 사위가 깜깜해졌다. 오두막의 불도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순식간에 주위가 깜깜해졌다.
알렉스는 형체만 어렴풋이 보이는 오두막을 응시했다. 이제 돌아가야 할 때인가. 밤새 이곳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내일도 여기에 멀쩡한 정신으로 찾아오려면 잠시라도 숙소에 들러야 한다.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고 곁에 없는 제 오메가의 허상이라도 붙잡고 위로하려면 가야 한다.
노아에게 꾀죄죄한 모습 따윈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야윈 뺨을 더듬은 알렉스는 붙잡아 대는 미련은 애써 떨쳐내고 몸을 돌렸다.
차 문을 열려던 그때, 끼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가느다란 빛줄기가 알렉스를 비추었다.
“노아.”
가느다란 빛줄기 한가운데 노아가 서 있었다. 환희가 단숨에 차올랐다. 단번에 그 앞으로 달려갔다.
딱 한 걸음.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노아가 있었다. 조명을 등진 채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거기서 멈춰요. 더 가까이 오지 마세요.”
뱉어진 말에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애타는 마음이 들끓었다.
“노아.”
환희에 찬 목소리가 노아를 불렀다. 노아는 그의 부름에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그가 눈으로 노아를 핥고 있었다. 이마에 닿은 시선은 이내 눈꺼풀을 훑고 오똑 솟은 콧날을 더듬었다. 알렉스의 페로몬이 비강을 거세게 치고 안으로 거침없이 흘러들어 왔다.
노아는 자신의 페로몬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정신을 붙들어 매야 했다. 기쁨으로 넘실대는 페로몬이 노아를 감쌌다. 생생하게 손에 잡힐 듯 느껴지는 그의 감정이, 이것이 진짜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해요. 여긴, 제집도 아니고…, 그분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네가 여기 있잖아.”
“일은 어쩌고 여기 있는 거예요? 바쁘시잖아요. 이럴 시간도 없는 분이…, 어째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을 위해 여기 있는 거야.”
“무슨 말이에요. 그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너를 되찾는 일. 나한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어.”
확고한 믿음이자 신념과도 같은 즉답이었다. 노아는 할 말을 잃었다. 동시에 내면이 술렁거렸다. 오직 기쁨에 겨운 페로몬을 제 안에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적당히 하고 돌아가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이쯤 했으니 화가 풀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본래 하려던 말은 그늘진 그의 얼굴을 가까이 보는 순간 사라졌다. 일주일 전에도 초췌했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대체 뭘 하면 이렇게 나빠질 수 있을까.
임신한 건 난데, 왜 알렉스가 곧 죽을 것 같은 안색일까.
살짝 열어 놓은 현관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노래 더욱 안색을 나빠 보이게 했지만 지금 노아에겐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흔들렸다. 생생하게 제게 쏟아지는 페로몬과는 달리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이 지나치게 약해 보인 탓이었다. 마음을 다잡기가 힘들었다.
“어디가… 아파요? 얼굴이 왜 그래요.”
기어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내 얼굴이 왜? 그렇게 별로야? 그래도 아침에 면도도 했고 깨끗하게 씻고 나왔는데….”
제 뺨을 문지르며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날 걱정하는 거야? …다행이야. 그래도 날 걱정할 정도로는 마음이 남아 있구나.”
“알렉스.”
자꾸 엉뚱한 소리만 하는 게 더더욱 불안했다. 혹시 정말로 큰 병이라도 걸린 걸까. 그래서 마지막을 정리하려 이곳에 온 건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야. 괜찮아. 불안해하지 마. 네가 지금까지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말은….
일부러 거리를 벌린 이유 따위 까맣게 잊고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어, 어디가 아픈 거예요? 많이 안 좋아요? 그럼 왜 여기에 있어요? 병원을 가야죠!”
“말했잖아. 네가 여기 있는데 내가 가긴 어딜 가.”
“장, 장난하지 말아요! 지금 나 괴롭히는 거예요? 마지막 인사라도 하려고, 그러려고 온 거예요? 말해 주세요. 어디가 아픈 거예요? 나을 순 있는 거죠?”
슬금슬금 발목을 타고 오른 불안이 이제 상체를 뒤덮었다. 까딱하다간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이젠 그의 모든 말이 그저 자신을 안심시키는 거짓말처럼 들렸다.
“아니야. 정말, 그런 거 아니야. 네가 돌아오면 다 괜찮아져. 네가 없어서, 너를 놓쳐 버려서 힘들어서 그래.”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알렉스가 숨을 토했다. 불안해하는 노아의 얼굴을 그는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을 눈동자에 새길 듯이 알렉스는 신중하게 살폈다.
그의 커다란 손은 노아의 뺨을 완전히 감쌌다. 불안해하는 노아를 달래고 싶었다. 이대로 제 오메가를 꽉 끌어안아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참았다.
“내가 한 말, 하나도 안 믿지? 믿을 수 없겠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
“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어떤 말로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거 알아. 널 믿지 못했던 과거와 네게 퍼부었던 모욕적인 말들이 얼마나 널 상처입혔는지 알아.”
고통이 뒤섞인 말들이 흘러나왔다. 절절한 어조가 노아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하면, 나한테 돌아와 줄래?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날 다시 받아 주기만 한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원하는 걸 말해. 제발…, 노아. 네가 원하는 걸 말해 줘. 나한테 꺼지라는 말만 아니면, 다 들어줄게.”
애절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점점 격정적으로 변했다.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 같이 매달리는 듯했다. 아니 조금은 울먹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노아는 표정이 흐려지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제 뺨을 더듬는 손길은 노아의 어깨를 잡았다. 그가 노아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
그가 내뱉는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목덜미에 닿은 이마가 뜨거웠다.
“내가,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심장이 높게 뛰었다. 거세게 울리는 심장박동의 진동이 점점 위로 아래로 번져 발끝까지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제게 기댄 알렉스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손가락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돌아와. 나한테 제발 돌아와 줘. 무릎이라도 꿇을까? 아니면, 속이 풀릴 때까지 날 때릴래? 뭐든 괜찮아. 말만 해. 다 들어줄게.”
“…뭐든지?”
“그래, 뭐든지.”
“내가 당신 곁에 머물렀으면 좋겠다고요?”
“그래. 내 곁에 평생.”
어떤 물음에도 알렉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노아는 자신이 울고 싶은지 웃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난 이제 가짜 결혼은 못 해요. 그렇게 안 할 거예요.”
“사랑해.”
속삭이듯 흘러나온 말에 노아는 숨을 멈췄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의 두 팔이 허리를 슬그머니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닿는 건 이제 그의 입술이었다. 부드럽고, 한없이 뜨거운 입술.
“사랑해, 노아. 사랑하고 있어….”
노아는 그 순간 코끝이 시큰거렸다. 눈앞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입술이 조금씩 떨렸다.
“다시, 말해 주세요….”
넘실거리는 그의 페로몬이 노아의 온몸을 감쌌다. 후각을 자극하는 여름과도 닮은 향기가 부드럽게 안으로 번졌다.
“사랑해, 노아.”
“다시.”
“사랑해.”
“한 번 더요.”
“사랑하고 있어.”
노아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입술을 덜덜 떨며 노아는 말했다.
“정, 정말?”
“그래. 진짜로.”
목석처럼 가만히 그에게 서 있던 노아는 그 순간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후두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한테 돌아와 줘. 평생 내가 속죄할 수 있게 해 줘. 아무것도,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을게.”
부둥켜안은 노아를 꽉 끌어안고 알렉스는 끊임없이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나한텐 너뿐이야.
“흐으윽. 흑. 흐어엉.”
알렉스는 오열을 쏟아 내는 노아를 끌어안았다. 제 오메가의 눈물이 가슴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사랑해….”
노아의 정수리에 입술을 비볐다. 비로소 제 오메가를 품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끝없는 추락을 지속하던 마음이 온통 노아로 가득 찼다. 두려움과 절망이 환한 빛으로 가득했다.
노아를, 제 오메가를 안는 순간 회색빛이던 제 세상이 색을 찾았다. 사방이 가로막힌 상자 안에 한 줄기 빛이 제게로 쏟아져 내렸다.
오열하는 노아를 꽉 끌어안고 알렉스는 정수리에 쪽쪽 입을 맞췄다. 희미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향기롭고 다디단 페로몬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노아, 노아. 얼굴 좀 보여 줘. 응? 울지 마. 제발….”
어깨를 떼어 내려 했으나 노아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가슴에 비볐다.
알렉스의 손가락은 노아의 머리카락으로 파고들었다. 정수리를 비비던 입술은 이제 노아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고, 매끄러운 이마에, 그리고 젖은 눈가에 닿았다. 혀끝에 느껴지는 눈물은 짜고 달았다.
얼굴로 쏟아지는 입맞춤에 노아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정말 날 사랑해요? 바람결에 스치듯 속삭이는 말에 사랑해. 라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언제까지?”
“영원히.”
더는 노아가 의심하지 않도록 알렉스는 젖은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사랑해. 내 오메가. 내 인생의 유일한 오메가.”
이 많은 눈물이 어디서 흘러나올까, 싶을 정도로 노아는 또다시 눈물을 퐁퐁 쏟아 냈다.
얼굴로 쏟아지는 키스의 비에도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어떻게 달래야 이 눈물을 그칠지 알 수 없었다.
알렉스는 노아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잿빛 눈동자는 음영 진 얼굴을 뜨겁게 내려다보았다. 젖은 속눈썹을 엄지로 살짝 건드리자, 노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평생 네게 속죄할게. 내게….”
알렉스는 잠시 말을 골랐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한테 돌아와 줄래?”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귀한 것을 대하는 것처럼 알렉스는 목소리를 떨었다.
눈물을 매단 젖은 속눈썹이 깜빡깜빡, 알렉스의 눈앞에서 팔랑거렸다. 도톰한 입술이 잠시 달싹거리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파르르 속눈썹이 떨리고, 다시 또 입술이 열렸다. 숨을 멈추고 대답을 기다리던 찰나,
“아….”
노아가 알렉스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노아? 왜 그래?”
“아, 배가….”
두려움을 가득 담은 눈동자가 알렉스를 올려보았다.
“알렉스, 나, 배가,”
“노아!”
알렉스는 쓰러지려는 노아를 번쩍 안았다.
“병원에, 병원에 가자! 조금만 참아!”
구름 위를 걷던 기분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떨어졌다. 노아가 잘못된 거면, 그런 거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안긴 채로 몸을 웅크린 노아의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노아를 안고서 차로 달려갔다. 조수석을 열고 노아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괜찮아, 노아. 아무 일도 아닐 거야. 괜찮아.”
알렉스는 끊임없이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불안에 떠는 노아가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병원에 금방 도착할 수 있어. 너한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주문처럼 끝없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아무 일도 없어. 무슨 일이 생기게 내가 두지 않아.
알렉스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급하게 출발한 차는 깜깜한 어둠 속을 내달렸다.
* * *
“아무 이상 없습니다.”
의사의 진단에 벌떡 일어난 알렉스가 소리쳤다.
“이상 없다고요?! 배가 아팠다고요! 식은땀도 저렇게 많이 흘렸는데!”
고작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알렉스의 얼굴빛이 거무죽죽했다. 눈 밑은 퀭하니 푹 꺼졌고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알렉스…. 나 이제 괜찮아요.”
“괜찮은 게 아니잖아. 네가 아파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니. 일단 여긴 못 믿겠으니까 당장 칼밴으로 돌아가서 닥터한테 다시 검사하자.”
침대에 기대앉은 노아는 당장이라도 의사한테 달려들 것 같은 알렉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화내지 마요.”
알렉스보단 한결 침착함을 되찾은 노아가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흥분으로 길길이 날뛰던 알렉스는 노아의 시선에 씩씩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왜 그런 거예요?”
“일시적으로 알파 페로몬을 과도하게 받아들이느라 자궁이 자극받아서 생긴 현상입니다. 아랫배가 살짝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까?”
“네, 맞아요.”
처음 아랫배가 당기는 듯한 느낌에 과도하게 놀라 겁에 질렸었다. 물론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그 느낌은 가라앉았지만, 아이가 잘못됐을까 봐 불안에 떠느라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통증이 그다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 아빠의 페로몬을 그동안은 제대로 못 받았었죠?”
“네….”
알렉스가 노아의 손을 꽉 쥐었다.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든 겁니다. 임신 초기에 꾸준히 부친의 페로몬에 노출되어 있었더라면 느낌도 없었을 거예요.”
“아이에겐 문제없는 거죠?”
“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다행이다.”
의사의 최종 진단을 듣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의사는 하루 동안 상황을 지켜보자는 말 외엔 별다른 지시사항 없이 병실을 나갔다.
“미안해.”
노아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감싸며 꺼낸 알렉스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나 때문에 생긴 일이야. 내가 진작 내 감정을 인정했더라면 겪지도 않았을 일을 네가 겪었잖아.”
제 손에 얼굴을 비비는 그의 어조에 후회가 잔뜩 묻어났다. 자신이 힘든 시간을 겪은 만큼 알렉스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노아는 왼손을 뻗어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내가 처음부터 믿었더라면 네가 덜 괴로워했을 텐데…, 미안해.”
“아무 이상 없대요. 그리고…, 앞으로는 늘 같이 있을 거잖아요. 그럼 돼요.”
노아의 위로에 알렉스는 고개를 들었다. 손을 뻗어 우느라 빨개진 눈가를 엄지로 쓸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그의 손에 노아는 얼굴을 비볐다. 외롭고 괴로웠던 날들이 꿈이었던 것처럼 금세 희미해졌다.
구름 위를 나는 것처럼 마음이 들뜨고 행복하기만 했다.
“그래. 우리는 이제 같이 있을 거니까.”
“네.”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담고서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스러운 노아의 미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알렉스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노아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노아가 그에게 매달렸다.
온 세상이 제 것이 된 기분이었다. 알렉스는 이제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떨어져 나갔던 조각이 비로소 완전해졌다. 불완전하던 저라는 존재가 완성된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경이로웠다.
노아를 품에 안고서야 지금까지 자신은 결핍에 시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일한 자신의 오메가만이 결핍을 채워 주는 존재였다.
“노아.”
다디단 노아의 페로몬을 한껏 들이마신 알렉스는 감격에 겨워 노아를 불렀다.
그러나 품 안의 몸은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 버린 상태였다.
늦은 밤부터 이른 새벽까지 그 난리를 겪은 터라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사랑해.”
깊이 잠이 든 제 오메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며 알렉스는 노아의 곁을 지켰다.
* * *
“대표님!”
“쉿. 조용히 해.”
병실로 들어서던 조엘이 멈칫했다. 알렉스는 잠들어 있는 노아를 확인하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는 가져왔어?”
침대를 가로막듯 선 알렉스의 어깨 너머로 노아를 곁눈질하며 조엘이 서류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대표님이 여기 계신 거 보니까 노아 씨가 용서해 준 모양이네요.”
고용주가 이곳에 죽치고 있는 터라 중간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한 조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하니까 노아만 깨어나면 돌아갈 준비 해야지. 그보다 내가 지시했던 건 다 처리됐나?”
“네. 서류 준비는 다 끝났고 대표님과 노아 씨 서명만 있으면 됩니다.”
두툼한 서류 뭉치를 받아든 알렉스는 여전히 잠든 노아를 바라보았다. 녹아내릴 듯 다정한 시선에 조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보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어째 일주일 전에 뵈었을 때보다 얼굴빛이 안 좋은데요.”
“잠깐 잤어.”
사실은 불안해서 거의 못 잔 것에 가까웠지만 알렉스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눈을 감으면 노아를 잃었던 그때로 돌아갈까 봐 잘 수 없었다.
아마도 한동안은 이런 상태가 계속되지 않을까.
“그래도 다행이네요. 이 정도로 끝나서….”
취임한 지 고작 몇 달도 안 되어 그룹 대표가 일 따위 내팽개치고 지방에 내려와 모든 걸 뒷전으로 미루는 게 길어졌다면 문제가 커졌을 것이다. 안 그래도 알렉스 헌트의 건강에 관한 얘기로 업계가 한번 들썩거렸던 터라 그룹 차원에서 대응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이었다.
그나마 도저히 미룰 수 없는 긴급 건은 늦은 밤에 화상 회의와 전자결재로 대체했다지만 대표가 직접 처리하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돌아가실 교통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헬기를 대기시킬까요?”
“임신 초기이니 이번엔 차로 이동해야지. 헬기가 빠르긴 한데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니.”
“아… 하긴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차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거요.”
손바닥에 올려진 상자를 가만히 쓰다듬던 알렉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상자를 주머니에 넣었다.
“깼어?”
노아의 긴 속눈썹이 남은 잠을 털어 내듯 몇 번 깜빡거렸다.
단숨에 노아 곁으로 돌아간 알렉스는 곧장 몸을 숙여 노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
순간이지만 노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던 알렉스가 멈칫하며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미안. 놀랄 줄 몰랐어. 다음부턴 꼭 양해를 구할게.”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현실 같지 않아서 잠깐 놀랐을 뿐이에요.”
왠지 알렉스가 상처받은 것 같아서 노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조엘을 발견했다.
“조엘? 언제 왔어요?”
“일어나셨어요? 괜찮으세요?”
“네에….”
쑥스러운 듯 노아의 뺨이 살그머니 붉어졌다. 알렉스를 힐끔거리다 노아는 그의 손가락을 슬그머니 잡았다. 그러자 이내 그가 손가락을 얽어 왔다.
“곧 돌아갈 준비하겠습니다. 혹 불편하시면 꼭 말씀해 주세요. 리무진을 수배해야겠어요.”
시간을 확인하더니 조엘은 바쁜 걸음으로 병실을 나갔다.
“우리 돌아가요?”
“계속 여기 있고 싶어? 네가 원한다면 좀 더 있어도 돼. 난 이제 뭐든 네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정함을 한껏 머금은 눈동자가 자신을 보았다. 이런 시선을 받는 날이 오리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 낯설었다.
“왜?”
“그냥. 그냥요…. 왠지 현실이 아닌 것 같아서….”
낯설고 어색한데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내면이 온통 몽글몽글한 솜사탕으로 꽉 찬 기분이었다.
“네가 그런 말 하면 무서워. 역시 깨어나니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할까 봐 걱정돼.”
불안한 속내를 드러내듯 알렉스는 노아의 손을 끌어다 손등에 입을 맞추고 커다란 몸을 깊게 숙여 온몸으로 꽉 끌어안았다.
제게 매달리는 그의 단단한 어깨를 노아는 마주 안았다.
“저야말로, 이게 꿈일까 봐 무서워요.”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알렉스가 더더욱 노아를 꽉 끌어안았다. 한 몸이 된 것처럼 두 사람은 한참이나 부둥켜안고 있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순간,
“뭐야. 결국 이렇게 된 거야?”
이브가 들어서며 꼭 끌어안은 두 사람을 향해 혀를 내둘렀다.
화들짝 놀라 노아가 몸을 버둥거리자 마지못해 알렉스가 일어났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아 기분 나쁜 기색을 풀풀 풍기며 그가 말했다.
“왔어?”
“나도 왔네.”
“이브! 샘!”
볼을 물들인 채로 노아가 두 사람을 반겼다.
“죄송해요. 연락도 못 드렸는데….”
“알렉스가 연락했어요. 노아 병원에 있다고.”
“짐을 챙겨 왔어. 돌아가는 거지?”
샘의 손에 커다란 가방이 들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미안. 네 의사도 안 물어보고 돌아갈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해서.”
“아니에요. 안 그래도 두 분께 들르자고 할 생각이었어요. 어머니 유품도 챙겨야 하고….”
금세 둘만의 세계로 빠진 듯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걸 보던 이브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너무 방해꾼이 된 것 같네. 몸은 괜찮아요, 노아?”
“네? 네. 괜찮아요. 도와주셨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죄송해요.”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준 이브의 노력을 마치 배반하는 것 같아서 미안함에 어쩔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브를 고생시키지 않았을 텐데….
“아니에요. 노아가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과잖아요. 나야 뭐, 빚 갚았던 거고. 당신이 미안해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미안해해야 하는 건 저 뻔뻔한 얼굴로 날 노려보는 놈이죠. 이브의 뒷말은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알렉스의 매서운 시선이 이브를 향했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이브도, 샘도요.”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에이. 내가 뭐 한 게 있나.”
샘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노아. 혹시라도 알렉스가 또 당신을 괴롭히면 언제든 나한테 연락해요. 그땐 정말 알렉스가 절대로 찾지 못할 곳으로 데려가 줄게요.”
농담이라고 생각한 노아는 재밌다는 듯 웃었지만, 알렉스는 그렇지 못했다. 노아가 당장 사라지기라도 하는 듯 노아를 꽉 끌어안고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로 이브를 노려보았다.
알렉스는 흉포해지려는 페로몬을 간신히 억눌렀다. 노아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고 저 이브 레너드에게 제대로 쓴맛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돌아가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두 분 초대할게요. 그때 꼭 와 주세요.”
죽일 듯 노려보는 알렉스의 눈빛에도 이브는 싱글 웃으며 “아기, 무사히 낳길 바라요. 그리고 꼭 초대해 주셔야 해요, 알았죠?”라며 능청을 떨었다.
꼭 그러겠다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두 사람은 돌아갔다.
“노아, 잠깐 앉아 봐.”
알렉스는 병실에 두 사람만 남자, 노아의 팔을 잡아 침대에 앉혔다.
비장한 알렉스의 표정에 노아는 조금 긴장했다.
알렉스는 노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긴장한 알렉스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나는 네가 오해할 만한 어떤 것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아.”
“알렉스…?”
오해? 어떤 걸 말하는 거지? 노아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노아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알렉스는 팔을 뻗어 조엘이 갖고 온 서류를 노아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무릎 위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며 노아가 물었다.
“할아버지의 조건부 유산을 포기한다는 문서야. 해리스에게 사실을 말했어. 우리 결혼은 계약이었다고. 해리스는 법적 절차에 따라 내 몫의 유산을 재단으로 양도한다는 확인서야.”
“알렉스. 이러면 당신 유산이….”
“말했잖아. 난 너 말고 중요한 건 이제 없어. 그깟 유산 때문에 네가 날 오해하는 건 참을 수 없어. 그런 요소 따위 남겨 두고 싶지 않아.”
“전, 괜찮아요. 이제 오해하지 않아요. 우리 이제 같이 살 거잖아요. 그렇죠?”
가짜 결혼이라는 걸 알렸으니 이제 우리는 부부가 아니라는 걸까?
불안함이 밀려왔다. 혼란에 젖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당연한 말은 할 필요가 없어. 누구보다 떳떳하게 너하고 함께 하기 위한 거야. 자, 불안해하지 말고, 다른 서류도 좀 봐 줘.”
알렉스는 노아의 떨리는 손을 꼭 잡으며 눈짓을 보냈다.
두툼한 서류는 한 종류가 아니었다.
“조부의 유산을 포기하면서 네 몫의 유산도 사라진 걸 보상하고 싶어.”
“저는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유산은 안 받아도 돼요.”
“아니. 내가 필요해. 너한테 주고 싶어. 자 봐. 이건 우리가 살던 저택의 명의가 너로 바뀌었다는 문서고, 헌트 인더스트리의 주식 5%를 노아 헌트에게 양도한다는 문서야. 그리고 이건 네 앞으로 된 사천만 달러의 신탁이야. 언제든 네가 마음껏 쓸 수 있도록 이미 필요한 절차는 다 끝냈어. 그리고 이건 곧 완공이 끝나는 썬 스트리트에 있는 콘도의 소유권이고 이건 네 명의의 차 목록들이야. 그리고….”
알렉스가 끝도 없이 목록을 읊어 댔다. 들으면서도 이게 무슨 얘긴지 반도 못 알아들었다. 노아는 머리가 멍해졌다. 콘도니 주식이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말리지 않으면 더한 것들을 추가할 것 같아서 노아는 계속 떠들어 대는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더 필요한 건 언제든 나한테…. 응? 왜?”
“알렉스. 저….”
노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무 놀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런 거 말고… 우리 결혼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자신이 무얼 받는지 노아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잿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노아는 바짝 긴장했다.
더없이 귀하고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눈빛에 노아는 또 한 번 심장이 술렁거렸다.
“미안. 사실은 이런 곳이 아닌, 좀 더 근사하고 멋지게 하고 싶었는데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널 불안하게 했네.”
알렉스는 주머니를 볼록 채우고 있던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은은한 광택이 나는 벨벳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노아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눈앞에 촘촘하게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 반지가 놓여 있었다.
“노아 칼튼. 나와 결혼해 줄래?”
노아는 숨을 멈췄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배 속이 아릿해졌다.
“이, 이거….”
“내 세계가 온통 너로 가득 찼어. 네가 없는 세상은 내게 무의미해. 노아, 나와 진짜 결혼을 하자. 알렉스 헌트의 배우자로 평생 함께해 줄래?”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다. 노아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사랑해, 노아. 평생토록 너만 사랑할 수 있게 허락해 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기어이 노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도 눈물로 흐려졌다.
노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제 대답은 오직 하나였다.
“네. 결혼, 할게요! 결혼해요.”
노아는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그의 청혼으로 노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결혼해요. 결혼할게요. 좋아해요. 사랑해요, 알렉스.”
쏟아지는 고백에 알렉스는 노아를 더욱 꽉 안았다.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잃었던 노아를 되찾으며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조각을 완성했다.
“이제 넌 내 거야. 절대로 떠나지 마.”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노아의 젖은 뺨에 쪽쪽 입 맞추며 알렉스는 말했다.
“네가 떠나면 난 죽을 거야. 난 너한테 각인했으니까.”
“알렉스.”
깜짝 놀란 노아가 몸을 떼자 그는 다시 말했다.
“그래, 너한테 각인했어. 내가 널 배신하는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거야.”
“어, 어떻게….”
“널 사랑하니까. 그래서 각인한 거야. 이제 넌 내 목줄을 쥔 거야.”
“그, 그것 때문에 이렇게 야윈 거예요?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동정심으로 널 되찾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 준 게 아니에요.”
“알아. 아니까 말한 거야.”
그의 진심 어린 말에 노아는 그가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노아의 두 손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늘 깔끔하고 단정하던 그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제게 청혼한 것만으로도 꿈만 같은데 그런 알렉스가 각인까지 했다니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노아의 마음 한구석엔 기쁨이 넘실거렸다. 알렉스는 이제 평생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확신이 노아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노아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치켜들고 있는 그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사랑해요. 알렉스.”
“노아, 기왕 뽀뽀하는 김에 내 입술에도 해 줄래?”
장난 같은 그의 말에 노아는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그리곤 키스를 바라는 제 알파의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외롭고 슬프던 날들은 이제 노아의 과거가 되었다. 노아의 미래에는 사랑하는 알파와 함께할 날들만 가득할 것이다.
배 속에 찾아온 행운과 함께.
[결혼 계약 끝]
결혼 계약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