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3)

16.

대기 중인 조엘은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다. 곧 도착할 고용주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노아가 사라졌다는 걸 알자마자 수도 없이 고용주에게 연락하려 했으나 연락은 닿지 않았고, 결국 현지 직원에게 연락해 러트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후 조엘은 발 빠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노아의 행방을 찾았으나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조엘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제자리를 빙빙 맴돌았다.

출장 전 고용주가 노아를 감시하라고 했을 때 잽싸게 튀었어야 했는데!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사달이 났냐.

조엘은 다 내팽개치고 그저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급하게 귀국하는 고용주의 일정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공항에 협조를 구해 전용 게이트 주변에는 공항 보안 직원과 조엘이 데리고 온 직원뿐이었다.

입국장 주변을 내내 서성거리던 조엘은 다급한 발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는 바짝 긴장한 채로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곧이어 알렉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저게 누구야? 대표님이야?

조엘은 휘둥그레 눈을 떴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알렉스는 지금까지 조엘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슈트 상의는 형편없이 구겨져 있고, 머리카락은 제대로 넘기지 않아 이마를 가린 채 흐트러져 있었다. 무엇보다 얼굴이 형편없었다.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고 고작 며칠 만에 광대가 두드러져 보일 정도로 피폐해져 턱이 한층 날카로웠다. 눈 밑은 거뭇거뭇하고 깎지 못한 수염이 턱 주변에 돋아 있었다.

“대표님…, 괜…. 컥!”

“어떻게 된 일이야!”

순식간에 다가온 알렉스가 조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핏발이 잔뜩 선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노아가 왜 사라져? 어떻게 된 일이야? 찾아는 봤어? 흔적은? 대체 뭐 했길래 노아가 사라진 거야!”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분노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엘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대, 대표님, 이것 좀 놓고….”

숨이 턱 막힌 조엘은 알렉스의 팔을 두드리며 놓아달라고 빌었다.

“제, 제가 설명을….”

헐떡거리며 더듬더듬 말을 꺼내자마자 알렉스가 손을 놓았다.

“똑바로 설명해.”

조엘은 콜록대며 숨을 몰아쉬고는 허리를 폈다.

“우선 여기를 벗어나죠. 가면서 설명하겠습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알렉스를 달래 빠르게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대기 중인 차에 오른 알렉스는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알렉스는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노아에게 내뱉었던 말이 잊히지 않아 속을 뒤집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말해.”

바짝 긴장한 채로 조엘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 지시하신 대로 경호원 두 명과 함께 저택으로 갔죠.”

조엘은 기억을 더듬어 세세한 것까지 하나하나 얘기하기 시작했다.

* * *

경호원과 함께 저택으로 찾아간 조엘이 당분간 경호원과 함께 다녀야 한다고 말해도 노아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침착했다. 마치 이런 일이 생길 걸 예상했다는 듯이 말이다.

조엘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았지만 조용히 침묵했다.

고용주가 급한 출장으로 출국했다는 걸 알려 주자 노아는 고개만 끄덕였다.

조엘이 종일 저택에 있는 내내 노아는 아예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었는데도 몸이 안 좋다는 얘기로 식사도 걸렀다.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던 노아가 이틀이 지나자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갑자기 회장님의 묘에 조문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마음이 복잡하겠지. 대표님과 싸웠을 테니 회장님께 하소연이라도 하려나 보다, 고 조엘은 가볍게 여겼다.

대표님의 허락 없이는 밖에 나갈 수 없다고는 했으나 노아가 큰 사고를 칠만한 사람은 아니니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어차피 조엘과 경호원이 따라다니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헌트가의 가족묘가 있는 곳까지 차로 이동했다. 노아를 경호하는 차량은 따로 움직였다. 낯선 사람들과 가까이 있는 걸 노아가 불편해했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회장님의 묘비에 꽃을 올리고 노아는 그곳에 한참 머물렀다. 조엘은 노아의 하소연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경호원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았다.

거기까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조엘이 경계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문을 끝내고 다가온 노아의 눈가가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조엘은 그것을 모른 척했다.

“그리고?”

“그게 돌아가는 길에 시청에서 환경단체의 시위가 열리는 중이었는지 도로를 점거한 시위 때문에 중간에 멈춰 섰습니다.”

“시위? 설마, 노아가 시위에 휘말렸어?!”

“많은 수의 경찰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어서 금방 정리될 거라고 생각하고 대기 중이었는데….”

알렉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조엘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기다리면 금방 정리될 거라 여겼던 시위의 인원이 점점 불어났습니다. 도로에 발이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때에 갑자기 시위자들 안에서 누군가 쓰러져 인파가 그쪽으로 몰렸습니다. 한곳에 사람이 몰리자 주변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평화 시위가 금세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피켓을 든 이들이 도로에 발이 묶인 차들 위로 뛰어오르고 구호를 외쳐대기 시작하자 경찰은 통제하려 그들 사이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던 조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구호를 외쳐대는 시위대와 진압하려는 경찰의 대치가 이어졌다. 무분별하게 차 위로 뛰어오르며 발을 굴러 대는 자들도 생겨났다.

노아가 탄 차도 시위대의 표적이 되어 흔들리기 시작하자, 뒤에 서 있던 차에서 경호원들이 내려 그들을 끌어내렸다. 가벼운 몸싸움이 벌어지면서 차가 계속 흔들렸다. 노아가 불안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차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노아가 뛰쳐나간 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조엘이 노아를 외쳐 부르며 부랴부랴 뒤따라 내렸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야에 보이던 노아가 순식간에 군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노아가 시위에 휘말렸어?! 제정신이야?”

“아니요! 제 얘기 좀 끝까지 들으십시오. 곧장 노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것처럼 팔을 뻗는 알렉스를 피하며 조엘이 다급하게 말했다.

“노아가 받았어요!”

멱살이 잡히기 직전 조엘이 소리쳤다. 그렇다. 전화를 받았다. 노아는 의외로 침착했다. 걱정하는 조엘을 오히려 위로한 건 노아였다. 문제는….

“왜 그런 얼굴이야! 똑바로 말해! 노아가 전화를 받아서 뭐라고 했어?”

조엘은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흉흉한 눈빛의 알렉스를 힐끔거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유산은 필요 없대요. 그리고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알렉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어질 뒷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아니 너무도 분명하게 알 것 같았다.

“말하지 마!”

“대, 대표님께… 작별 인사를 전해 달라고….”

알렉스가 외치는 동시에 조엘이 노아의 말을 전했다.

알렉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심장이 부서지는 고통에 그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대표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기어이 자신이 제 손으로 제 오메가를 떠나게 했다.

노아. 노아.

누군가 제 심장을 움켜쥐고 쥐어 짜내는 것 같았다. 알렉스는 허리를 숙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병원으로 가요! 지금 당장!”

조엘의 다급한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갔다.

* * *

노아는 뒤에 무언가를 남겨 놓은 사람처럼 뒤돌아보았다.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른 것 같았다.

“괜찮아요?”

조용한 물음에 노아는 몸을 돌렸다. 부드러운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는 이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한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이브에게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럴 거 없어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그 보다 골라 봐요. 바다가 좋아요, 산이 좋아요?”

질문의 의도를 알지 못해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무사히 도망쳤으니까 이제 살 곳을 정해야죠. 어느 쪽으로 갈까요?”

바다는 싫었다. 푸르게 빛나는 바다를 보면 그와의 추억을 떠올릴 것 같았다.

“산으로 할게요.”

“산이요? 꼭 거기로…. 아니에요. 좋아요. 그럼 타요. 출발하죠.”

이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도와달라는 노아의 부탁에 그저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을 뿐이었다.

세세한 계획은 이브가 다 알아서 했다. 시위를 이용하자고 한 것도 이브의 의견이었다.

시위대에 둘러싸여 있던 그때, 노아는 수많은 고민을 했다. 알렉스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노아를 옥죄어 왔다. 하지만 군중 속에서 이브가 말한 사람을 확인하는 순간, 노아는 결심을 굳혔다.

차 문을 열고 군중 속에 뛰어들어 이브가 보낸 사람과 합류하고, 혼란스러운 시위대를 지나며 노아는 상대가 건네는 모자를 쓰고 겉옷을 바꿔 입었다.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버리려던 그때 조엘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행여 그가 알렉스에게 문책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서였다. 작별인사를 알렉스에게 직접 건넬 수 없어 조엘에게 대신했다.

아주 짧은 통화를 끝내고, 노아는 상대가 시키는 대로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하고 근처 쓰레기통에 핸드폰을 버렸다.

그를 떠나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떠날 수 없을 거라고 겁먹었던 것과는 달리.

차는 칼밴시의 외곽 도로를 달렸다. 운전대를 잡은 이브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노아를 힐끔거렸다.

“챙긴 짐이 하나도 없네요?”

차창 밖을 바라보던 노아가 고개를 돌렸다.

“네. 원래 짐이 없었어요.”

중요한 건 부모님의 사진과 몇 개의 유품뿐이었다. 그건 노아의 주머니에 얌전히 들어있다. 모아 두었던 얼마의 현금도 지갑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당분간 지낼 곳을 마련했어요. 잘 쓰지 않는 오두막인데 명의는 나랑 전혀 상관없는 사람 집이니까 마음껏 써도 돼요. 그리고 뒷좌석에 필요한 것들 좀 준비해 왔어요.”

이브의 고갯짓에 노아는 몸을 돌려 뒷좌석에 놓인 가방을 가져왔다.

가방을 열자 신분증과 얼마의 현금. 그리고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알렉스가 절대로 모르게 해 달라면서요. 그러려면 당신 신분도 감춰야 해요. 신분증 이름은 제가 적당한 거로 골랐어요. 핸드폰은 제 번호랑 근처 사는 친구 번호를 넣어 뒀으니 언제든 연락 주세요. 그리고 눈에 띄는 그 외모부터 좀 손봐야 하는데, 염색하는 건 어때요?”

“염색은 안 돼요!”

임신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약품을 머리에 바르는 게 아이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격렬한 반응에 이브가 잠시 놀랐으나 곧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외출할 때는 되도록 얼굴을 가리는 게 좋겠어요. 모자를 쓴다거나, 아니면 안경을…. 아니. 됐어요. 일단 거기 도착하고 나서 생각하죠.”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안 돼요. 내가 마음이 안 놓여요. 알렉스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알렉스의 배우자예요. 친구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덩그러니 홀로 놔둘 순 없어요.”

“이 정도로도 충분한걸요.”

“당신을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마지막까지 내가 책임질게요.”

이브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노아 혼자 놔둘 수 없다고 말했다.

이브는 책임감이 강했다. 잘못을 저질렀던 벤자민을 감쌌던 것처럼 고작 한 번 본 노아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차는 외곽도로를 한참 달려 광활한 숲이 펼쳐진 포지아시로 들어섰다.

“그리고 당신이 지낼 오두막 근처에 내가 아는 목수가 살아요. 거기가 완전히 외진 곳은 아닌데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이거든요. 필요한 식료품은 친구가 주에 한 번씩 사다 줄 거예요. 물론 사는 게 불편하면 언제든지 시내로 나와도 돼요. 시내에서 지내고 싶으면 살 곳을 다시 알아볼게요. 우선은 은신하는 게 필요할 거 같아서 중심가에선 좀 떨어진 곳을 마련했어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지금은… 사람 많은 곳은 피하고 싶어요.”

“네. 그럼 당분간 거기서 지내요. 그래도 여름이라 다행이에요. 겨울엔 눈 때문에 걸핏하면 고립되거든요. 지내기 나쁘지 않을 거예요.”

이브의 말에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어느새 중심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칼밴시보다는 덜 번화하지만 그리 소도시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브는 제법 큰 백화점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여긴 왜…?”

“당신 갈아입을 옷도 없잖아요. 필요한 물건 좀 사야죠. 따라와요. 아, 그리고 선글라스 잊지 말고 쓰세요. 혹시 모르니까.”

이브의 지적에 노아는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꼈다. 그녀를 따라 백화점으로 들어가 필요한 물건을 샀다. 노아가 계산하겠다고 했으나 부득부득 그녀가 내겠다고 우겨서 어쩔 수 없이 모든 걸 맡겼다.

“나중에 다 갚을게요. 제가 꼭….”

“그럴 거 없어요. 내가 당신에게 갚아야 할 빚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걸요.”

겨우 그녀의 거짓말에 동조해 준 거로 노아는 이미 너무 많은 걸 받았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했다. 곤란해하는 걸 알아챘는지 이브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아요. 레너드가는 은혜는 두 배로 갚는다고. 이건 우리 가문의 신념이니까 노아가 미안해할 부분이 아니에요.”

미안해하지도, 고마워하지도 말라면서 그녀는 장난스레 엄포를 놓았다.

“자, 이제 가요.”

고맙다고 말할 새도 없이 이브가 움직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노아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들은 산 물건을 차에 싣고 다시 이동했다. 번화가를 벗어나 점점 한적한 도로를 내달리던 차는 이제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가까이에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창을 열어 둔 덕분에 나무와 풀 냄새가 차 안 가득 퍼졌다.

싱그러운 여름이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내내 긴장하고 가라앉았던 마음이 아주 조금 편안해졌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눈에 담고서야 겨우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이내 절절히 실감했다.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다시 개척해야 한다는 걸.

일순 어깨가 움츠러들고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노아는 애써 드는 생각을 한쪽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직 태동조차 없는 편편한 제 배를 내려다보는 노아의 눈동자에 아주 작은, 그렇지만 굳건한 의지가 새겨졌다.

숲을 내달린 차는 아주 소담하고 작은 집 앞에 멈춰 섰다.

“다 왔어요. 잠깐만 기다릴래요?”

통화를 시작한 이브를 두고 노아가 먼저 내렸다. 앞으로 지낼 곳을 올려다보았다. 알렉스의 저택에 비하면 무척 초라하고 작은 집이지만, 혼자 살기엔 딱 좋은 곳이었다.

마당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 웃자란 잡초들이 무성했다. 울타리가 망가진 곳이 여럿이었다. 당분간은 바쁘게 지내야 할 것 같았다.

“좀 휑하죠? 사람이 안 산 지가 좀 되어서 망가진 데가 많아요. 그래도 근처 사는 친구한테 부탁하면 수리는 어렵지 않을 거예요.”

“마음에 들어요.”

미안해하는 이브에게 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당하지 못할 빚을 진 채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 때보다 훨씬 상황이 나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친구한테 연락했으니까 곧 올 거예요. 여기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살거든요. 미리 얘기해 뒀으니까 부탁이 있으면 그 친구한테 말하면 돼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다니까 그러네. 이보다 훨씬 좋은 시내 아파트에서 지냈으면 더 내 마음이 편했을 텐데 당신이 그건 싫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여길 찾은 거예요.”

지금도 중심가로 나갈 생각 없냐고 넌지시 이브가 물었지만, 노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가 만약 바다를 선택했으면 어쩌실 생각이셨어요?”

문득 궁금해졌다. 충동적으로 준비했다기엔 이브는 막힘이 없었으니까.

“해변 근처에 안 쓰는 별장이 있어요. 물론 명의는 내 건 아니고, 나한테 신세 진 사람이 마음껏 쓰라고 한 곳이 있거든요.”

“아….”

“당신이 바다를 선택했으면 이렇게 걱정하지 않았을 거예요. 거긴 꽤 좋은 곳이거든요. 이렇게 초라하지도 않고.”

“저한텐 여기도 과분합니다.”

“노아는 전에도 느꼈는데 너무 사람이 욕심이 없어요. 나한테 빚을 지운 사람들은 어떻게든 더 얻어 가려고 난린데, 사람이 어쩜 그리 소박해요?”

핀잔 아닌 핀잔에 노아는 쓰게 웃었다. 제 것이 아닌 걸 욕심냈다가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아프게 웃는 노아의 얼굴을 보며 이브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사생활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브였지만, 결국 못 참고 질문을 꺼냈다.

“이런 질문, 당신이 불편해할 거 알고 있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알렉스가 무슨 잘못을 한 거죠?”

안으로 들어가려던 노아는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잘못 없어요.”

그날 밤의 일을 숨긴 건 자신이었다. 차라리 알렉스가 깨어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면 나았을까.

아니. 애초에 알렉스를 호텔 방에 데려다 놓고 바로 나왔으면, 처음부터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어쩌면, 만약에, 그래도, 혹시. 하는 가능성에 매달리다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가 가진 불신을 더욱 부추기기만 한 결과를 낳았다.

“그럼 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아는 문고리를 꽉 잡았다. 아무런 미련조차 가지지 말자고 생각했던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밀려오는 고통을 제 안으로 다시 꾹꾹 눌러 담으며 노아는 아프게 웃었다.

“…닿지 않는 메아리를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 * *

파르르 속눈썹이 떨리더니 이내 알렉스가 눈을 번쩍 떴다. 눈에 들어온 하얀 천장을 확인하고는 확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곧장 일어나려던 그때,

“대표님! 깨셨어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곧 주치의 불러오겠….”

호들갑 섞인 외침이 곧장 귀로 파고들었다. 조엘이 깜짝 놀란 얼굴로 재빨리 문으로 달려간다.

“멈춰.”

“네?”

“주치의 부르지 마. 이게 다 뭐야?”

알렉스는 손등에 꽂혀 있는 바늘을 확 잡아 뺐다.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나자 조엘이 화들짝 놀라 달려오며 말렸다.

“대표님! 그거 다 맞으셔야 합니다! 대표님 실신하셨다고요. 무조건 안정을 취하시라고….”

“잠깐 기절한 거로 안 죽어. 내가 지금 이런 거 맞고 있을 시간이 없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쓰러지시고 4시간 좀 지났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안 깨셨다고요.”

4시간이라니.

알렉스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대로 일어났다. 강제로 바늘을 잡아 뺀 탓에 손등에 살짝 피가 비쳤지만, 알렉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노아 흔적은 찾았어? 그리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아니, 우선 해외로 출국했는지부터 확인해.”

“대표님, 일단 주치의 선생님 오시면 그때 설명을 듣고 움직이시는 게 어떠세요? 상태가 정말 안 좋아 보인다고요.”

“난 아무렇지 않아! 노아를 찾아야 한다니까!”

조엘이 아무리 기다려 보라고 사정을 해도 알렉스는 막무가내였다. 자신이 지금 이러는 시간에도 노아는 점점 제게서 멀리 도망갈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졌다. 노아가 사라진다고? 영원히 내게서 멀어진다고?

눈앞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누군가 심장을 강제로 잡아 뜯는 고통이 밀려왔다.

“대표님!”

조엘이 휘청거리는 알렉스를 부축했다.

“이거 놔!”

알렉스는 조엘을 뿌리쳤다. 사나운 태도에 조엘의 몸이 휘청했다.

질주하는 사냥개처럼 그대로 문으로 내달리던 알렉스의 눈앞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주치의였다.

“헌트 씨?”

“비켜. 닥터 리건.”

“왜 벌써 깨셨습니까? 이러고 계시면 안 됩니다. 우선 들어가세요.”

“난 멀쩡해. 중요한 일이 있어서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수 없어.”

“중요한 일이 있다면 더더욱 제 얘기 듣고 가셔야지요. 그 상태로는 얼마 못 가 또 쓰러질 겁니다.”

제 앞을 가로막은 닥터 리건의 냉정한 태도에 알렉스가 비웃음을 보냈다.

“안 막으면 어쩔 거지? 지금 비키지 않으면 피를 보게 될 거야.”

닥터 리건은 한숨을 푹 내쉬며 알렉스의 등 뒤를 향해 말했다.

“노아 헌트 씨는 어디 있습니까? 그분을 모셔 오세요.”

“네? 왜, 왜요?”

알렉스는 닥터 리건의 말에 멈칫했다.

“왜긴요. 지금 헌트 씨는 각인한 상태니까요.”

“네? 뭐라고요?!”

외침은 조엘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닐 텐데요? 그보다 어서 그분 모셔 오세요. 그래야 헌트 씨의 상태가 그나마 나아질 겁니다.”

조금 전부터 미동도 하지 않는 고용주를 힐끔거리며 조엘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뭔가 잘못 검사한 거 아닙니까? 각인이라니…. 대표님이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설마… 각인 상대가 노아 헌트 씨가 아닌 겁니까?”

닥터 리건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아니, 제 얘기는 그게 아니고요. 각인했다면 당연히 그 상대는 노아 씨겠죠. 근데 그게 아무래도 믿기지 않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조엘과 닥터 리건의 시선은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알렉스에게 향했다.

그는 마치 생명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밀랍인형처럼 서 있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 알렉스는 차라리 웃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자식이 나였다니.

각인 상대도 알아보지 못한 머저리가 저였다.

노아가 사라졌다는 사실 만으로도 시커먼 무저갱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쉬지 않고 심장을 할퀴어 댔다. 노아가 없다. 제 곁에 더 이상 노아가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순간 알렉스는 사방이 꽉 막힌 밀실에 갇힌 기분이었다.

벽은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숨조차 편히 내쉴 수 없는 압박감이 자신을 내리눌렀다.

각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아를 찾아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노아의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

“약 주세요.”

“헌트 씨.”

“각인불안증을 억누르는 약이 있잖아요. 처방해 주세요.”

“그 약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헌트 씨는 지금 심각한 불안증이에요. 더군다나 러트 때도 노아 헌트 씨와 떨어져 있었죠?”

닥터 리건은 굳이 쉬운 방법을 두고 왜 약을 먹냐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조엘이 그때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각인 상대와 계속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혹시 많이 심각해지나요?”

“왜 그런 질문을…. 혹시 당장 노아 헌트 씨와 만나지 못할 사정이라도 있습니까?”

머뭇거리다 조엘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 놀란 닥터 리건이 잠시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우선은 약 처방을 드립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이 약을 복용하더라도 부작용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 약은 어디까지나 불안정한 페로몬만 억누를 뿐이니까요.”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3개월. 최대 3개월이니 그 전엔 배우자분과 만나셔야 합니다.”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길게 설명한 닥터 리건은 급히 쓴 처방전을 건넸다. 알렉스 대신 처방전을 받은 조엘이 약을 받으러 방을 나섰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

알렉스는 몸을 돌려 나가려던 닥터 리건을 불러 세웠다.

“각인한 걸 어떻게 내가 모를 수가 있습니까. 왜, 어째서,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겁니까. 미리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후회로 점철된 알렉스의 독백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제 오메가의 가슴에 수도 없이 많은 상처를 주었다. 제 아이를 밴 오메가를 제 손으로 내쫓았다.

노아 얘기를 조금이라도 귀담아들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어째서 자신은 그렇게도 필사적으로 노아를 몰아세우기만 한 걸까.

“각인의 징조는 여러 번 있었을 겁니다. 그걸 헌트 씨가 외면한 게 아닐까요?”

알렉스의 표정은 회한과 체념, 그리고 후회가 뒤섞인 듯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알렉스가 홀로 생각에 잠겨 후회를 곱씹을 수 있도록 닥터 리건은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목구멍을 옥죄어오는 자기혐오에 신물이 났다. 이를 악문 알렉스의 턱이 몇 번이고 꿈틀거렸다.

사나운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폭풍우 한가운데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결국은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날카로운 칼날에 심장이 도려지는 아픔이 느껴졌다. 알렉스는 가슴을 움켜잡고 휘청거렸다.

“대표님, 약 받아 왔습니다!”

병실로 뛰어 들어온 조엘의 외침에 알렉스는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노아를 찾아야 해.

알렉스는 조엘에게서 약을 빼앗아 곧바로 먹었다. 몸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고통은 금세 사그라질 것이다. 노아만 찾아낸다면. 내 아이를 가진 노아만 이 품에 다시 안을 수 있다면 고통 따윈 아무렇지 않았다.

“어디까지 조사했어?”

조금 전까지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던 고용주의 표정이 바뀐 것을 알아챈 조엘은 바짝 긴장했다.

“관할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해 시청 주변의 교통 카메라를 확인했으나 잡힌 건 없었습니다. 혹 시위대와 노아 씨가 연관되지 않았나 샅샅이 뒤졌으나 그런 흔적은 없었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감쪽같이 사라질 순 없어. 분명 누군가 도움을 줬을 거야. 노아 주변 인물….”

알렉스는 말을 멈췄다. 퍼뜩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곧바로 병실을 나갔다.

“대표님? 어딜 가십니까?”

“노아에게 친구가 있잖아. 그놈한텐 가 봤어?”

알렉스는 노아에 관한 모든 것을 조사했다. 노아에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은 카일뿐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제발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기를 바랐다. 노아가 그 친구의 도움으로 어딘가에 피신한 거라면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버려도 친구를 버릴 순 없었을 테니까.

알렉스는 또다시 욱신거리는 심장을 꾹 눌렀다.

병원을 빠져나온 알렉스가 운전석에 오르려 하자 조엘이 말렸다. 지금 대표님 상태로는 운전하기는 위험할 거라고 말했다.

“설마, 그 친구분께 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노아의 유일한 친구잖아. 홀몸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무작정 사라지지는 않았을 거야. 분명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았겠지. 그래. 그래야지. 차라리 그게 나아.”

임신한 몸으로 홀로 도망치겠다고 결심할 정도면 보통 각오는 아니었겠지.

몸도 안 좋은 노아에게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했다.

그 친구에게 도움을 구했겠지. 어쩌면 그 자식이 도망칠 곳을 마련했을지도 몰라.

학창시절 노아의 보호자 노릇을 한 놈이었다.

자신에겐 절대로 주어지지 않을 자리를 그 자식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이제는 인정한다.

자신은 질투하고 있었다. 노아가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길이 인 듯 머리가 뜨거워졌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알렉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화를 억눌러야 한다. 그 자식을 달래 노아가 간 곳을 알아내야 한다.

혼자 몸으로 아이를 낳는 건 위험하다. 더군다나 노아는 페로몬이 불안정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몸이 약한 노아에게 만약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그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가는 걸 느꼈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두지 않아.

차는 어느덧 허름하고 낡은 거리에 들어섰다.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거리를 눈으로 훑으며 알렉스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이제 다 왔습니다. 대표님, 어떡하실….”

조엘이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알렉스가 밖으로 튀어나갔다.

쾅 쾅 쾅 쾅.

문이 부서지든 말든 알렉스는 계속 두드렸다. 시끄러운 소리가 연신 이어졌다.

“대표님, 안에 사람이 없는 거 아닐까요?”

알렉스를 말리려 조엘이 다가갔을 때였다.

“누구야? 남의 집 문을 부수려고 작정이라도 했어?!”

벌컥, 문이 열렸다. 짜증이 잔뜩 난 카일이 문 앞에 선 이를 확인하자마자 눈썹을 확 찌푸렸다.

“뭐야?”

불청객이 여길 왜 와? 카일이 문을 가로막았다.

알렉스는 마음을 다스리려고 했다. 도움을 구해야 하는 상대이니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카일을 보는 순간 분노를 참지 못했다.

알렉스는 단숨에 카일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 너 뭐야! 왜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 당장 나가!”

“어디 있어? 여기 왔던 거 맞지?”

“무슨 소리야! 당장 나가라고! 너 지금 무단 침입한 거야!”

“대표님! 잠깐만요. 설명할 시간이라도 주셔야죠!”

알렉스는 성난 얼굴로 응접실을 훑고 닫힌 문을 죄다 벌컥벌컥 열어 안을 확인했다. 겨우 몇 걸음이면 확인할 수 있는 작은 집 안에서 알렉스는 눈에 불을 켜고 노아의 흔적을 쫓았다. 하지만 없었다. 이곳에 남은 건 집주인의 흔적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어디 있냐고! 노아, 어디 있어!”

“시발!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노아를 왜 여기서 찾아?”

흡사 미친 사람처럼 집을 샅샅이 뒤지는 알렉스에게 카일이 달려들었다.

체격 차이 따위 상관없다는 듯 카일은 알렉스의 앞을 막아서고는 멱살을 잡았다.

“너! 노아한테 무슨 짓 했어?! 제대로 말해!”

“대표님, 진정 좀…. 저기 밀러 씨. 제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진정들 하시고, 그 손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

조엘은 당장이라도 주먹다짐을 할 것처럼 바짝 붙어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러다 유혈 사태라도 벌어지면 큰일이었다.

“당신은 또 뭐야?”

이를 드러내는 카일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성격이 보통이 아니구나.

“일단 얘기를 나누시려면 두 분 다 마음을 좀 가라앉히시고….”

“저리 비켜! 노아 얘긴 뭐야?”

알렉스의 멱살을 움켜쥐고 바짝 독기가 오른 카일이 으르렁거렸다.

알렉스는 끌어당기는 카일의 손목을 잡아 뿌리쳤다. 밀려난 카일이 휘청하다 곧바로 다시 달려들었다.

조엘이 말릴 틈도 없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주먹을 날려 댔다. 키는 크지만 호리호리한 체구의 카일은 알렉스의 큰 키와 단단한 육체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노기를 불태우며 악착같이 알렉스에게 달려들었다.

조엘이 그만하라고 소리치는 게 들리지도 않는지 카일은 몇 번이나 알렉스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노아한테 무슨 짓 했어! 이 새끼야!”

알렉스는 카일의 공격을 몇 번이나 피했다. 싸움이라곤 쥐뿔도 모르는 조엘이 보기엔 공격할 의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일의 흥분이 알렉스에겐 절망이었다. 노아가 설마 친구에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그럼 노아를 어디서 찾아야 하지?

알렉스는 눈앞이 막막해졌다.

퍽!

눈을 번뜩이며 달려드는 카일이 내지른 주먹에 알렉스가 턱을 맞았다. 고개가 휙 옆으로 젖혀졌다.

“대표님!”

알렉스의 눈빛이 사나워지더니 팔을 뻗어 카일의 손목을 잡아 꺾었다.

“악! 이거 놔! 시발, 안 놔?!”

단번에 제압당한 카일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힘 한번 못 써 보고 제압당하자 카일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지금까지 알렉스가 적당히 봐줬다는 게 확연하게 드러났다.

분하고 짜증 난 카일의 눈에 핏발이 바짝 섰다.

“이 새끼야! 이거 놔! 무슨 짓 했는지 똑바로 말하라고!”

등 뒤로 잡힌 손목을 털어내려 아무리 힘을 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일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상체를 버둥거렸다.

“정말…, 넌 몰라?”

“아프다고! 이거 놓고 말해!”

“연락 없었어? 정말 노아한테서 연락 온 거 없었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결혼 소식 들은 게 마지막이야! 노아를 왜 여기서 찾아? 노아가 도망가기라도 했어?”

카일의 외침이 떨어지자마자 알렉스는 뒤로 꺾었던 그의 팔꿈치를 놓으며 밀었다.

버둥거리던 카일이 그 순간 휘청하고 몸이 흔들렸다. 이내 균형을 잡고는 휙 몸을 돌려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노아가 사라졌어? 당신이 무슨 짓 했길래 그 얌전한 애가 도망을 쳐?”

알렉스를 다그치던 카일은 멈칫했다. 재수 없을 정도로 오만하고 위압적으로 굴던 알렉스의 얼굴에 서린 절망이 심상치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어두운 감정을 모두 모아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오만한 알파가 손을 떨고 있었다.

유심히 살피다 보니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턱은 한층 날카로웠고 눈 밑이 푹 꺼진 게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카일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노아가 어떻게 됐는데? 말 좀 해!”

그나마 정신을 좀 차린 조엘이 입을 열었다. 알렉스의 상태를 보아하니 제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게… 노아 씨가 집을 나가 버려서, 대표님이 찾고 있는 겁니다. 밀러 씨와 친하니 혹시라도 이쪽에 찾아오지 않았나 했는데, 오지 않은 모양이군요.”

알렉스는 비틀거리며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제 얼굴을 감쌌다.

“노아가 왜 집을 나가? 저 새끼가 무슨 짓을 했길래 나가? 걔가 얼마나 얌전하고 착한 앤데.”

“그건… 두 분 사이 오해가 좀….”

조엘이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얼버무리자, 알렉스가 나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믿지 못했어. 노아의 말을 잠시라도 귀담아들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임신한 몸으로 혼자 어딜 간 걸까. 너는 알지 않나? 노아가 갈 만한 곳. 알면, 제발 알려 주겠어?”

남에게 숙이는 법을 모르는 알렉스가 카일에게 부탁했다. 어조는 탄식에 젖어 있었고 후회와 걱정이 뒤섞였다. 일그러진 그의 표정에 조엘이 깜짝 놀라기도 전에 카일이 소리쳤다.

“임신?! 노아가 임신했어?!”

“그래. 내 아이를 뱄지. 그 몸으로 노아가 사라졌어. 넌 노아랑 오래된 사이잖아. 아는 곳이 있다면 부디 나한테 말해 줘.”

알렉스의 말에 조엘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그를 휙 돌아보았지만, 충격에 휩싸인 카일은 눈치채지 못했다.

허. 믿기지 않는 듯 카일이 부엌을 서성거렸다. 천장을 보았다가, 알렉스를 노려보았다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갑갑한 듯 머리카락을 손으로 몇 번이나 쓸어 넘기던 카일이 우뚝 자리에서 멈췄다.

“내가 지금 너무 충격받아서 그런데, 지금 노아가 임신한 몸으로 도망쳤다 이거지? 그 잘못은 당신한테 있는 거고. 내가 알아들은 게 맞아?”

“네. 맞습니다.”

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 만한 곳을 너는 알지 않나?”

“걔가 갈 만한 곳이 어딨어?!”

카일이 버럭 고함을 쳤다.

“하, 내가 진짜, 당신 첨에 볼 때부터 맘에 안 들었어. 임신한 노아한테 얼마나 스트레스를 줬으면 그 얌전한 애가 도망을 쳐? 하. 차라리 잘됐네, 잘됐어. 노아가 기왕 도망친 거 아주 멀리멀리 갔으면 좋겠네.”

그거 쌤통이다. 카일이 변죽을 올리며 이죽거렸지만,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준비하고 튀었겠지, 그치? 당신 돈 많잖아. 돈이 있으니까 그렇게 고생은 안 할 거야, 그치?”

확인하듯 카일이 물었고, 조엘은 그게… 하며 머뭇거렸다.

“제가 어쨌든 할 수 있는 한 다 찾아 봤는데요…, 대표님이 주신 카드는 그대로 있고, 현금은 단 한 푼도 쓴 게 없습니다. 다 놓고 가셨어요….”

“와. 미친!”

그럴 줄 알았어! 이 융통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분통이 터져 가슴을 퍽퍽 두드리던 카일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쨌거나 지금 노아는 임신한 몸으로 혼자가 됐단 말이지?

“내가 진짜 당신 때문이 아니라 노아가 걱정돼서 알려 주는 거야. 노아에게 의미 깊은 장소라곤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 말고는 없어. 설마 노아가 거기 갔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거기 가 봐. 나는 주변 친구들한테 수소문 좀 해 볼게.”

카일은 알렉스에게 꼴도 보기 싫으니 내 집에서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조엘은 명함을 건네주며 하찮은 소식이라도 괜찮으니 뭐라도 알게 되면 이쪽으로 연락 달라고 말했다.

노아가 살던 집으로 출발한 알렉스는 상체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곳에서 노아의 흔적이 발견되기를 바랐다.

“괜찮으세요?”

전방을 주시하던 조엘은 뒷좌석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알렉스의 안색이 또다시 나빠졌다.

“괜찮아. 운전해.”

고용주가 어떻게 자기 아이인지 알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자기 호기심을 채울 때가 아니었다.

“만약 거기 갔는데도 흔적을 못 찾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실종 신고해야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해리스 씨가 알게 되면 법적 처리에 문제가 생길 수가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게 문제야, 지금?!”

“알겠습니다.”

조엘은 표정을 굳혔다. 이 대답으로 고용주가 얼마나 이 일에 진심인지 알게 되었다. 제발 그곳에 조금이라도 흔적이 남았으면, 하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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