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3)

15.

초여름의 해가 막 지면을 차고 올라와 잎사귀에 맺힌 아침 이슬을 비추며 사방이 반짝거렸다.

부지런한 관리인 부부가 이제 막 일어나 이른 아침을 준비할 즈음, 저택의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베이지색 중형차가 저택의 진입로로 들어섰다.

쭉 미끄러져 들어온 차량은 급하게 현관 앞에 멈춰 섰다. 차의 시동이 채 꺼지기도 전에 운전석이 열렸다.

새벽녘에 급히 걸려온 전화에 준비할 시간도 없이 허둥지둥 달려온 조엘이었다. 뒷머리는 몇 가닥 삐쭉 솟아 있고, 넥타이도 똑바로 매지 못한 모습이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하마터면 안경을 빼놓고 올 뻔했다.

긴급 연락을 받자마자 고용주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만 가고 전화를 받지 않아 결국 조엘이 직접 달려온 참이었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아무리 푹 잠들었대도 20번쯤 벨이 울리면 짜증 나서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꼭두새벽부터 고생시키는 고용주에게 욕설을 뇌까리며 조엘은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평소엔 그렇게 예민하면서 그 예민 떠는 성격이 왜 오늘은 발휘되지 않느냔 말이야. 사람 고생시키려고 아주 작정을 했지, 했어. 아무래도 올해 나한테 마가 꼈어. 매일매일 지옥이고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라니까. 정말 돈만 아니면 이놈의 직장 당장 때려치우는데! 내가 돈이 없어서!”

숨도 안 쉬고 욕을 다발로 쏟아 내던 조엘은 알렉스의 방 앞에 도착하자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두 손으로 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자아, 진정하자. 우선 급한 것부터 처리해야지.”

조엘은 구겨진 슈트 상의 끝자락을 잡아 탁탁 잡아당겼다.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는 크게 심호흡한 후 손을 들었다.

똑똑똑.

“대표님! 매디슨입니다! 급한 일이에요! 일어나셨어요?”

인기척이 나길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조엘은 문을 벌컥 열었다.

“윽! 이게 무슨….”

문을 열자마자 조엘은 코를 틀어막고 창으로 달려갔다. 방 가득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아니. 술을 대체 얼마나 드신 거야? 아주 방 전체가 술에 절여져 있네. 이러니 아무리 전화해도 안 받지.”

투덜투덜하며 조엘은 커튼을 걷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휙 몸을 돌리자 그제야 방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침대에 대충 엎어져서 잠이 든 알렉스 주변으로 대략 열 병이 넘어 보이는 술병이 텅 빈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어제 해리스 씨 저녁 초대에 간 거 아닌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니지,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고용주를 깨워야 한다. 과연 저만큼 술을 마시고 잠든 사람을 깨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안이 워낙 급해서 욕 들을 각오를 하고 조엘은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대표님! 대표님! 좀 일어나 보십시오.”

조엘은 알렉스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얌전히 깨울 시간이 없었다.

“대표님! 일어나세요! 급한 일입니다!”

그는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그를 흔들어 깨우는 강도도 높였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탓에 조엘의 얼굴은 한껏 구겨진 상태였다. 그렇게 알렉스를 흔들어 깨우길 오 분 남짓이 지나자, 미동도 없던 그가 뒤척거렸다.

“대표님! 일어나세요. 무슨 술을 이렇게 드셨어요?”

“…뭐야….”

잔뜩 잠긴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알렉스는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돌려 강제로 자신을 깨운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의 얼굴에 짜증이 잔뜩 서렸다.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몇 시나 됐지?”

“지금 새벽 5시 30분이 조금 넘었습니다. 대표님, 얼굴이 그게…. 아니지. 이럴 때가 아닙니다. 로넨 왕가에서 긴급 연락이 왔습니다. 미팅 시간을 앞당기자고요.”

그대로 몸을 일으킨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얼굴을 들었다.

“뭐? 왜?”

“왕가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4개월 후에나 스케줄을 뺄 수 있답니다.”

“얼마나?”

지끈거리는 두통이 뇌를 쾅쾅 울려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주일이요.”

“뭐?”

“이동하는 시간 생각하면 지금 바로 출발하셔야 간신히 미팅 시간을 맞출 수 있습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시라고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외 법인 설립은 알렉스가 공들여 왔던 일이었다. 입헌군주제인 로넨의 특수성 때문에 왕가의 승인 없이는 일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벌떡 일어났다. 미진하게 남아 있던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전용기 지금 당장 대기시키고 실무진들 호출은 다 끝났어?”

“네. 대표님만 연락이 안 닿아서 제가 이렇게 달려온 겁니다. 전용기는 이미 대기 중입니다. 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금방 씻고 오지. 그리고 내 짐 좀 챙겨.”

알렉스는 곧장 욕실로 달려가 몸에 남은 술기운을 재빨리 씻어 냈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일주일이 당겨진 미팅은 당장 내일이었다. 로넨 까지 비행기로 7시간. 현지 직원들을 만나 브리핑을 받을 시간도 빠듯했다.

알렉스는 대충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낸 후 드레스룸으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동안 출장에 필요한 짐을 다 싼 조엘이 캐리어를 옆에 세우고 준비가 끝나길 기다렸다.

물기를 다 닦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는 나중에 정리하면 될 터였다.

술독에 절여져 있던 모습은 말끔히 사라졌다. 눈에 여전히 핏발이 서 있지만, 가는 동안 수면을 취하면 될 것이다.

“가자.”

고요한 복도를 지나던 알렉스는 아주 잠시 발을 멈추고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대표님?”

의아해하는 조엘의 목소리에 알렉스는 멈췄던 걸음을 움직였다.

“차는 그냥 제 차로 가요?”

“시간 없어.”

차고로 가는 시간도 아까웠다. 뒷좌석에 이미 자리 잡은 알렉스를 확인한 조엘은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고는 곧바로 운전석에 올라탔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다행히 도로는 한산했다. 조엘은 가는 도중 실무진에게 연락해 대표님이 곧 도착할 거라고 알렸다.

조엘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는 알렉스를 백미러로 힐끔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노아 씨랑 무슨 일이 있었나….

2층 복도에서 잠시 발을 멈췄던 곳은 노아의 방문 앞이었다. 조엘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횡액을 당할 수는 없었다.

눈치껏 입을 다문 조엘은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이럴 때는 무조건 모른 척이야.

눈치껏 몸을 사리자고 결심한 조엘은 조용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한산한 도로를 달려 생각보다 빨리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수속을 끝마치고 실무진과 합류하기 직전이었다.

“넌 따라오지 마.”

막 알렉스와 자기 짐을 한꺼번에 챙겨 움직이던 조엘이 멈칫했다.

“네? 전 안 가요?”

알렉스는 제 캐리어를 챙겼다.

“경호원 두 명을 노아에게 붙이고 내 지시가 따로 있을 때까진 외출 못 하게 해.”

“네? 그게 무슨….”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네 할 일은 노아 감시야.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병원에 입원시키고 싶은데, 그건 출장 다녀와서 하지.”

“아니, 저기 대표님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노아의 일거수일투족을 나한테 보고해. 알아들었어?”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노아 씨 감시를 하라는 거야?

조엘이 경악하건 말건 알렉스는 자기 할 말을 다 끝내고 몸을 돌렸다. 대기 중인 실무진과 합류해 그대로 전용기에 올랐다.

평소라면 까다로운 알렉스의 뒤치다꺼리를 안 하게 됐다고 환호성을 내질렀을 조엘은 그저 황당함에 입만 떡 벌리고 서 있었을 뿐이었다.

로넨까지 비행은 최악이었다. 잠은 제대로 못 잔 데다 실무진과의 브리핑으로 쉴 틈도 없었다. 비행기에서 눈을 붙인 건 겨우 두 시간 남짓이었다.

몸 상태가 바닥을 치달은 탓에 페로몬이 몸 안에서 제멋대로 날뛰어 댔다.

비행기에서 내려 마중 나온 현지 직원이 알렉스의 난폭한 페로몬에 낯빛이 창백해졌다.

알렉스 주변의 사람들은 살얼음판 같은 냉랭한 기운에 숨조차 편히 쉬질 못했다. 실무진들은 고용주에게 페로몬이 지금 심하게 날뛰고 있다는 말을 누가 할 건지 눈치만 보며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 회의실에 모인 이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깨달은 건 알렉스였다.

“뭡니까? 할 말 있으면 하세요.”

브리핑 직전이었다. 한 시간 안에 브리핑을 끝내고 접견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눈치만 보던 사람 중 페로몬 영향이 없는 베타 직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는 베타라 잘 모릅니다만, 지금 페로몬이 너무 날이 서 있다고 합니다. 그 상태로 왕세자 저하를 뵙는 건 실례가 아닐까요?”

직원의 말에 알렉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페로몬이 지금 새어 나오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

“심합니까.”

알렉스의 물음에 그제야 봇물이 터진 듯 불만 어린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알렉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기운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누가 가서 억제제 좀 가져오세요.”

직원 한 명이 재빨리 회의실을 나가 잠시 후 약을 들고 왔다. 의무실에서 급히 받아 온 것이다.

알렉스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며 쓴 약을 물도 없이 한 번에 삼켰다. 아무래도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셨던 모양이었다. 페로몬 조절이 쉽지 않은 이유를 알렉스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브리핑 시작하세요.”

현지 법인 준비는 거의 막바지였다. 최종적으로 로넨 왕실의 승인만 떨어지면 법적 처리에 바로 돌입할 수 있는 단계였다.

오랜 시간 현지에서 발로 뛰고 노력했던 직원들은 그동안의 성과와 현지인들의 반응을 단계별로 분류해 헌트 그룹이 이곳에서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알렉스에게 보고했다.

곧 만나게 될 왕세자 저하의 성향 분석도 함께 보고했다. 왕가의 최종 승인이 없이는 일 년 동안 준비한 일이 물거품이 된다.

알렉스는 이번 일에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자했다.

이곳을 시작으로 주변 연합국까지 시장을 넓힐 좋은 기회였다. 이 일이 성사되면 헌트 그룹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가 있다.

브리핑이 끝나고 알렉스와 실무진은 서둘러 접견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움직였다. 로넨어를 유창하게 하는 통역사도 함께였다.

로넨은 대륙 한가운데 위치한 내륙 국가였다. 기후가 온화하고 토양이 비옥해 예부터 작물 재배가 수월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을 받았다.

주변 국가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으며 로넨은 점점 폐쇄적이 되어 갔고, 현대의 많은 국가가 왕정이 무너진 데에 반해 꽤 오랫동안 왕정제를 유지했던 국가이기도 했다. 절대왕정체제가 입헌군주제가 된 것은 겨우 반세기 남짓이었다. 입헌군주제가 되고서야 세계 시장을 개방했고, 많은 국가가 로넨으로 몰려왔지만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폐쇄성을 완전히 타파하진 못해 이곳에 자리를 잡은 해외 기업이 많지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젊은 왕세자가 적극적으로 시장 개방을 주도하고 있어 알렉스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좀처럼 일에 있어서 긴장하는 법이 없는 알렉스도 접견을 앞두고 긴장했다.

알렉스는 제 상태를 다시 점검하고 페로몬 조절에 특히나 더 신경 썼다. 알파인 왕세자를 혹여 페로몬으로 불쾌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알렉스 일행을 태운 차량이 왕궁으로 들어섰다. 철저한 보안을 거치고 나서야 왕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궁내부의 사람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엄숙한 분위기에 실무진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화려한 궁정 복도를 지나고 접견실로 들어섰다.

고풍스러운 접견실 안에는 스무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화려한 실내 장식을 느긋하게 감상했을 테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누구도 그것을 감상할 만한 여유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곧 저하께서 오실 겁니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제복을 입은 궁내부 사람이 깍듯이 인사하고는 입구에 대기했다.

알렉스가 기다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잠시 후 궁내부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위협적인 덩치의 경호원들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각 잡힌 그들의 움직임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고, 접견실 안을 훑는 눈매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일리아스 페르시 로넨 왕세자 저하 납시오.”

궁내부의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화려한 예장 차림의 남자가 접견실로 들어섰다.

공식 자료로 얼굴은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본 왕세자는 꽤 화려한 외형의 소유자였다. 접견실 조명 아래에서도 햇볕을 받은 듯 반짝거리는 백금발에 달콤한 미소를 지닌 미인인데 눈빛이 날카롭고 서늘한 기운이 있어, 절대로 호락호락한 인상은 아니었다.

예상보다 키가 훤칠하니 커서 알렉스와 눈높이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알렉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왕실 예법으로 인사를 건넨 알렉스 일행은 왕세자의 권유에 모두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엔 왕세자 측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미소를 띤 왕세자와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탐색했다.

알렉스는 짧은 대화만으로 왕실에서 실질적으로 시장 개방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왕세자의 넓은 식견에 감탄했다.

그저 온실 속 화초처럼 고이고이 보호받으며 자란 왕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알렉스가 왕세자를 탐색하는 만큼 상대도 빈틈없이 알렉스를 탐색하고 있었다.

알파들의 미묘하고 치열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알렉스는 오늘 협상이 쉽지 않으리란 걸 금세 깨달았다. 그리고 알렉스의 깨달음은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하자마자 체감했다.

알렉스 측이 제시한 조건은 왕세자에 의해 많이 빠지고 덧붙여졌다. 알렉스는 이해득실을 따져 가며 무엇을 내줘야 하는지를 기민하게 파악했다.

왕세자가 원하는 걸 파악한 후엔 그가 흡족해할 만한 조건을 제시하며 협상을 이어 나갔다.

이득을 좇는 기업인과 나라의 국익을 바라는 왕세자 간에 길고 긴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협상은 당초 예상보다 더 길어졌다. 알렉스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만만치 않은 왕세자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 나갔다.

치열한 줄다리기 끝에 양측 모두 만족할 만한 협상이 드디어 타결되었다. 알렉스가 예상했던 것보단 좀 더 많은 예산이 들어가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코 손해가 아닌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고생 많았소. 앞으로 헌트사에 기대하는 바가 크오.”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하께서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알렉스의 인생 통틀어 오늘만큼 힘겨운 협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만큼 왕세자의 혜안이 대단했다.

왕세자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을 거느리며 접견장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진땀을 뺐던 실무진들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풀었다.

“돌아가시는 길 안내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긴장이 풀려 축 늘어질 틈도 없이 대기하던 궁내부 사람이 알렉스 일행을 재촉했다.

밖으로 나오자 그들이 타고 온 차가 앞에 대어져 있었다.

“대표님. 어디로 갈까요?”

“회사로 갑시다. 수정안에 맞춰서 새로 다시 짜야죠.”

고용주의 말에 7시간 비행에 시차 적응도 아직 안 된 실무진들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오늘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 사항은 물 건너갔다.

대표님은 몸이 철로 만들어졌나 보다며 속으로 다들 불만을 터트렸지만, 겉으로 내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용주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간파한 것이다.

알렉스가 차에 오르자, 다른 이들도 각자 나눠서 차에 탔다.

차는 궁정을 빠져나와 도로를 내달렸다. 뒷좌석에 깊이 몸을 묻은 알렉스는 찌르는 듯한 두통에 관자놀이를 계속 문질렀다.

왕세자와 있는 동안에는 억제제 덕분에 괜찮은 것 같더니, 긴장이 풀려서인지 페로몬이 몸 안에서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제 안에서 날뛰는 페로몬을 억누르기 위해 집중했다. 평소보다 조절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제어하려고 할 때마다 몸을 뒤집어 대는 페로몬이 손안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있어야 할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었다. 알렉스는 리무진에 마련된 생수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병을 다 비우고도 갈급함은 가시질 않았다.

알렉스는 목을 죄는 넥타이를 한 손으로 거칠게 풀었다. 피부가 따끔거리며 몸에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익숙한 감각이 밀려왔다.

하. 시발.

“호텔로 가.”

운전석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떻게 러트라는 걸 까맣게 잊을 수가 있지.

알렉스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실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먼저 호텔로 갑니다. 오늘 하루는 쉬시고 내일부터 현지 인원들이랑 수정안에 맞춰 설계를 다시 짜세요. 3일 후에 봅시다.”

-네? 대표님? 그게 무슨….

“러트입니다. 나 방해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하세요.”

러트가 몰아치기 전에 알렉스는 지시를 내렸다. 아직은 견딜 만했다. 단지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 하필이면 이때.

알렉스는 생수 한 병을 더 꺼내 들이켰다. 안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때문에 몸이 사막이 된 것 같았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면 된다.

견딜 수 없는 감각이 점점 차올랐다. 페로몬 제어에 한계를 느꼈다.

몸이 지나치게 뜨거워졌다. 알렉스는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차 내부는 진작 알렉스의 페로몬으로 가득 찼다. 운전기사가 베타라 영향을 받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다급하게 호텔 앞에 선 리무진에서 알렉스가 뛰쳐나왔다. 알렉스의 연락에 현지 직원이 미리 체크인을 끝내 놓았다.

“대표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등과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펜트하우스의 카드키를 받아 든 알렉스는 직원의 부축을 받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시하신 대로 3일 동안 펜트하우스에…… 없을 겁니다. 대표님 연락이… 진 아무… 방해하지 말… 해 두었습니다.”

직원이 떠드는 소리가 중간중간 끊겼다.

윙윙 귀가 울리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등을 기대고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이마를 쓸었다. 이를 악물었다. 날뛰는 페로몬 때문에 몸 전체가 아팠다.

땡.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펜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알렉스는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두 다리에 힘을 줬다. 이성을 잃기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그만 가 봐.”

알렉스는 손을 내저어 여기까지 안내를 도와준 직원을 쫓아냈다. 카드키로 문을 열고 펜트하우스로 들어가자마자 알렉스는 거추장스러운 슈트부터 벗어 던졌다.

그는 욕실로 달려갔다. 아프도록 자신을 찌르는 열기부터 가라앉혀야 했다.

차가운 물줄기 아래 서자 피부가 한층 따끔거렸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살갗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내장을 뒤집어 대는 열기가 잠시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밀려오는 강한 부추김에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페로몬은 오히려 더 날뛰기 시작했다.

“큿.”

벽을 짚은 채로 알렉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머리 위로 뼛속까지 얼릴 듯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손등에 돋아난 핏줄이 선연했다. 아랫배로 열기가 몰려왔다.

빳빳하게 발기한 제 것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불끈거렸다. 알렉스는 거칠게 그것을 잡고 빠르게 손으로 훑었다. 손안에 감긴 성기는 지나치게 뜨겁고 단단했다. 강하게 쥐고 흔들어도 저를 찌르는 성욕은 가라앉질 않았다. 페로몬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직 분출하고 싶은 욕구뿐이었다.

알렉스의 손은 점점 빨라졌다. 강하게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아랫배가 단단해지고 허벅지의 근육이 쩍쩍 갈라졌다. 절정을 향해 내달리는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저릿한 감각이 몸을 관통했다.

“…!”

짧은 절정 끝에 사정했다. 뿌연 정액은 물줄기에 뒤섞여 희석되었다. 이를 악문 탓에 아래턱과 목덜미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아니야.

여전히 제 몸을 찔러 대는 욕구에 알렉스의 눈동자는 번들거렸다.

발산하지 못한 페로몬이 욕실 가득 넘실거리다 못해 알렉스를 덮쳤다. 자신의 페로몬에 질식할 것 같았다. 매번 겪으면서도 갑갑하고 미칠 것 같은 감각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정했음에도 발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핏줄이 곤두서고 더한 자극을 갈구하며 단단해졌다.

한가득 남은 이성으로 알렉스는 비틀거리며 샤워 부스를 나왔다. 거칠게 가운을 몸에 두르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있어야 할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감각이 알렉스를 덮쳤다.

달짝지근하고 은은한 페로몬이 어디선가 풍기는 듯했다. 그 순간, 눈앞이 점멸했다.

‘알, 알렉스…. 저, 노아… 예요. 지, 지금 돌아갈게요. 그러니 잠시만….’

‘가? 어딜 간다고? 이런 몸으로?’

제 손에 감기는 가는 허리. 손바닥에 닿는 보드라운 피부의 감촉, 혀끝을 자극하는 다디단 입술.

곧게 뻗은 등줄기를 바라보며 정신없이 박아 댄 장면과 더는 못 한다고 울고 있는 이를 달래 다시금 제 것을 처박았던 기억.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장면이 수없이 플래시백 되고 있었다.

‘안, 안 돼요…. 알, 렉스. 나 아직….’

뺨을 흠뻑 적시고 우는 노아를 달래 그 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힘겨워하면서도 제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던 작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기억났다. 농밀하게 짙어진 제 페로몬과 미칠 듯이 달콤하고 수줍어하던 페로몬이 뒤섞이던 그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알렉스는 머리를 감싸 쥐고 비틀거렸다. 짙어진 페로몬이 알렉스를 옥죄어 왔다.

‘내 오메가.’

“노아….”

벼락같이 모든 게 떠올랐다. 가려던 노아를 붙잡은 건 자신이었다. 짐승처럼 달라붙어 싫다는 노아를 강제로 안은 것 역시 자신이었다.

“윽!”

쉼 없이 재생되는 기억과 함께 발정기를 맞이한 육체는 고통 속에 허물어졌다. 피부가 불타는 듯 뜨거워졌고 내장이 뒤집히는 고통이 이어졌다. 오메가 페로몬을 갈구하는 알파의 본능이 알렉스를 뒤집고 해체하며 다시 세포 하나하나를 달구었다.

노아. 노아….

제 오메가를 부르는 알렉스의 숨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고통으로 아득해지는 정신 사이로 알렉스는 깨달았다. 자신은 줄곧 외면하고 있었다.

노아에게 향하는 마음을 거짓이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편견이라는 이름의 아집이 자신의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을.

“크읏.”

순수한 제 오메가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진실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듯 기지개를 켰다.

알렉스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 푸른 잎이 바람에 흩날리며 그 생명력을 뽐내던 그 속에서 얼굴 가득 페인트를 묻힌 채 웃고 있던 노아에게 심장이 사로잡혔다.

노아의 배신이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것도, 얼굴도 모르는 애 아비에 대한 격렬한 증오도 결국 가리키는 건 하나였다.

어째서 몰랐을까.

어째서 듣지 않았을까.

할 수만 있다면, 돌이킬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제 심장을 내어 줄 텐데.

가슴이 찢기듯 아팠다. 몸의 고통과 함께 정신이 무너져 내렸다. 괴로움이 일시에 알렉스를 덮쳤다.

노아를 향해 수도 없이 내뱉었던 경멸과 모욕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상처받을 때마다 흔들리던 푸른 눈동자와 창백하던 얼굴이 떠올라 알렉스를 헤집어 댔다.

“노아.”

자신의 인생에 유일한 오메가인 노아를 제 손으로 벼랑 끝으로 밀어 버렸다.

노아에게, 가야….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던 알렉스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러트에 무릎이 꺾였다.

중화시켜 줄 오메가 페로몬이 없는 알파의 러트는 오직 고통만이 존재했다.

“으… 아악…!”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한 괴로운 감각이 이어졌다. 두툼한 팔뚝에 푸른 핏줄이 돋았다. 치골에서 생식기로 이어지는 서혜부에도 핏줄이 선연하게 불거졌다. 모든 근육이 꽉 조였다가 풀어지길 반복하며 경련했다.

“크, 헉!”

오직 고통만이 가득한 러트에 알렉스는 몸을 뒤틀고 괴로워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끊임없이 노아의 이름을 외쳤다.

가장 러트가 심했을 땐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간신히 몸을 일으킬 정도로 잔열만 남았을 때 알렉스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간신히 욕실로 향했다.

격렬했던 러트의 흔적으로 끈적거리는 몸을 씻어 내었다.

아직 페로몬 제어가 완벽하지 않을 시기였다. 하지만 알렉스는 무리하게 계속 몸을 움직였다. 움직임은 더뎠고 옷을 갈아입는 내내 몇 번이고 헛손질했다.

이 정도면 억제제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노아에게 돌아가야 한다.

알렉스의 머릿속엔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내 오메가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노아가 용서해 준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어느 때보다 불안했다. 태어나 이렇게 불안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다급했다.

그는 내팽개친 핸드폰을 찾았다. 업무 중일 누군가를 호출해 지금 당장 전용기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할 생각이었다.

다급하게 응접실을 훑던 그는 어디선가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소파로 다가갔다. 소파 안쪽 쿠션 사이에 끼어 있는 핸드폰을 찾았다.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었다. 발신자는 조엘이었다.

불길한 생각이 번뜩 들었다.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왜 전화했어? 나 지금 그쪽으로 갈…,”

-대표님! 노아 씨가, 노아 씨가 사라졌습니다!

알렉스는 얼음을 뒤집어쓴 것처럼 표정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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