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3)

14.

“…트 씨? 헌트 씨?”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노아를 깨우는 소리에 눈을 깜빡거렸다.

“괜찮으세요?”

“네…. 죄송해요. 잠깐 딴생각을 좀….”

“검사 끝났어요. 일어나셔도 됩니다.”

걷어 올린 옷을 내리고 차림새를 가다듬은 후에 일어났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으며 닥터 셰먼의 진료실로 이동했다. 검사실에서 받은 초음파를 모니터로 확인하고 있던 그녀가 노아를 반겼다.

“이거 보이세요?”

노아는 닥터 셰먼이 가리키는 작은 점을 쳐다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작은 점이었다.

“아직 시일이 얼마 안 되어서 형태가 제대로 보이진 않아요. 하지만 몇 주만 지나면 제대로 식별할 수 있을 겁니다.”

“네….”

노아의 시선은 모니터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실감 나지 않았던 임신이 갑자기 현실로 다가왔다.

“지금 페로몬도 안정적이고 검사 결과도 좋아요. 퇴원은 해도 좋습니다만,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꼭 병원에 오셔야 해요.”

노아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닥터 셰먼의 당부는 계속 이어졌다.

“임신 초기에는 건강한 사람도 문제가 생기기 쉬워요. 헌트 씨는 특히나 다른 오메가보다 페로몬 수치가 떨어지는 편이라 특별히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임신 중에는 히트 사이클이 없다는 건 알고 계시죠?”

“알고 있어요.”

“당연히 임신 초기에는 부부 관계도 하시면 안 됩니다. 다만 아이 아빠의 페로몬을 주기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심리 안정에 도움이 될 거예요.”

주치의의 말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부부 관계는커녕 알렉스의 페로몬을 주기적으로 받아들일 일 따윈 아마도 평생 없겠지.

닥터 셰먼의 주의 사항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노아는 생각에 잠겼다.

이 아이는 알렉스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한은 절대로 인정받지 못할 아이였다. 제 배 속에 그의 아이가 있다는 걸 실감하기도 전에 노아는 무거운 선택을 해야 한다.

“어때요? 몸은 괜찮대요? 퇴원은 해도 된다고 합니까?”

진료실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조엘이 다가왔다.

“네. 퇴원해도 된대요.”

“잘됐네요. 그럼 병실에서 좀 기다리고 계실래요? 퇴원 수속 금방 하고 오겠습니다.”

조엘이 퇴원 수속을 하는 동안, 병실로 돌아온 노아는 조엘이 갖다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요트에서 바로 이곳으로 실려 온 터라 제 물건이랄 게 없었다.

아, 이거…. 사용한 개인 물품을 정리하다 이브가 두고 간 명함을 발견했다. 가만히 명함을 만지작거리던 노아는 그걸 주머니에 넣었다.

벗은 환자복은 얌전히 개켜 침대 위에 올려 두었고, 시트도 정리했다. 할 일을 다 끝내고 나니 쓸쓸함이 밀려왔다.

며칠 전에 불쑥 나타났던 알렉스는 그 후로 병원에 오질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아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가슴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아이에게 애착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애착이 생길 만큼 노아 자신이 임신했다는 자각이 그다지 없었다.

그런데도 노아는 섣불리 낙태하겠다고 결정할 수가 없었다. 알렉스에게 용서받는 방법이 오직 이것뿐이라면 낙태하는 게 맞는데도,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노아는 지끈거리는 제 심장을 가만히 눌렀다.

초음파로 확인한 아주 작은 점. 아이라는 기분도 그다지 들지 않은, 그저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사라질 수 있는 작은 점에 불과했다.

아이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점이 사라지는 거라고 생각하면 결정은 좀 더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노아는 오히려 그 점을 확인하고 나자 더더욱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만약에, 나중에라도 알렉스가 그날을 기억하게 되면, 그의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잖아.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조엘이 돌아왔다. 그가 준비한 차를 타고 저택으로 이동했다.

“부탁이 있어요.”

차가 저택의 육중한 철문을 막 지날 때였다.

“네? 뭔데요?”

“일하는 분들께는 제 임신 사실 안 알렸으면 좋겠어요.”

아…. 짧은 탄식과 함께 조엘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그래도 임산분데 조심해야 할 것도 있고, 그분들도 알고 계신 게 좋지 않을까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요. 제 입원은 그냥 건강 문제라고만 얘기하고 싶어요. 알렉스도 그걸 바랄 거고….”

그건 그렇네요. 조엘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트가에서 오래 일한 분들은 알렉스와 노아의 속사정 같은 건 잘 모르는 데다 나중에 이혼할 때에 괜한 걱정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분들은 알렉스에게 있어 회장님과 비슷한 분들이니까.

근데 대표님이 과연 때 되면 제대로 이혼이나 할까? 나중에 노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냥 보내진 않을 거 같은데.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바삐 돌아갔지만, 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제가 먼저 얘기하진 않겠습니다.”

“고마워요….”

“제가 뭘요. 노아 씨는 다른 생각은 하지 마시고, 지금은 그저 아이만 생각하세요. 부탁하신 건 어떻게든 제가 대표님 설득해 볼게요.”

조엘은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노아가 안타까웠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지는 걸 보는 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루시에게 노아를 인계하고 조엘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요즘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라 자기라도 가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

대표님은 왜, 대체 CCTV 확인을 안 하겠다는 거야! 하물며 나중에 아이의 유전자 검사만 해도 사실 확인이 될 텐데, 뭐 하러 노아가 거짓말을 하겠냔 말이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고용주가 답답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일할 때는 모험도 감행할 정도로 과감한 성격이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융통성 따윈 눈곱만큼도 없는 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렉스의 그 밑도 끝도 없는 오메가 혐오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자세히 모르는 조엘은 그저 답답한 고용주를 욕하며 회사로 돌아갔다.

* * *

회의실을 나오는 임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고용주의 괴롭힘이 오늘따라 유독 강도가 높았던 모양이었다.

“요즘 같아선 그만두고 싶은 생각뿐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오늘 아침엔 글쎄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빠졌단 말일세.”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으니 미칠 노릇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오던 해외 마케팅 담당 이사가 조엘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다가왔다.

“매디슨. 온종일 대표님이랑 함께 있잖은가. 혹 뭐 아는 거 없나?”

“죄송합니다. 전 아는 게 없어요.”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한테 귀띔이라도 좀 해 주게. 이건 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니 살 수가 있나.”

마케팅 담당 이사를 필두로 다른 이사들도 우르르 조엘에게 몰려와 물어 댔다.

조엘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자기 입으로 대표님 신변을 나불대는 순간 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한참이나 정보를 캐내려던 이사들을 어르고 달래 겨우 돌려보내고 나자 진이 쪽 빠졌다.

대체 얼마나 갈궈 댄 건지.

오늘따라 유독 그들의 표정이 어두운 게 심상치가 않았다.

상황 보고를 위해 대표실로 들어가야 하는 조엘은 각오를 다졌다.

그는 비서실 직원들의 안쓰러운 눈길을 받으며 대표실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확인하는 알렉스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뭐야.”

“퇴원은 무사히 잘 끝났고요, 저택에 모셔다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주치의 얘기로는 큰 문제는 없지만,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보고서를 넘기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다른 얘긴 없었고?”

“네? 네. 임신 초기이니 조심하라는 얘기만 듣고 왔습니다. 참, 초음파 사진도 찍은 거 같던데 그건 노아 씨가 아마도 갖고 있을 겁니다.”

보고서를 쥔 그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 종이 끝이 구겨졌다.

“누가 그딴 거 궁금하다고 했나?”

쏘아보는 눈빛에 조엘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 그리고 해리스 씨의 식사 초대는 어떻게 할까요? 아무래도 초대에 응하셔야겠죠?”

조심스러운 물음에 알렉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조부의 상속대리인인 해리스가 유언 집행을 확인하기 위해 부르는 거니 거절하는 건 어려웠다.

“간다고 연락해.”

“네. 그럼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바로 나가야 할 조엘이 머뭇거리자, “뭐야?” 하고 알렉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노아 씨 말인데요…, 얼굴이 많이 상했더라고요. 아무리 봐도 거짓말한 거 같지는 않은데…, 그냥 호텔 측에다 CCTV 열람 요청하시면… 어떨까요?”

어깨는 긴장한 채로 잔뜩 굳어 있고, 눈동자는 데굴데굴 굴리면서도 조엘은 기어이 할 말을 끝냈다. 물론 뒤이어 쏟아지는 서슬 퍼런 눈빛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두 번 다시 그 일은 입 밖으로 꺼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노아 씨가 바보도 아니고 CCTV만 봐도 금방 들킬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거기다 아이가 태어나면 유전자 검사도 있고요. 대표님께서 호텔 측에 열람 요청만 하시면 확인은 제가 하겠습니다. 만약 정말 거짓말이라고 밝혀지면 이 일에 대해서는 저도 두 번 다시 꺼내지 않겠습니다.”

“뭐야? 왜 네가 노아를 두둔하고 나서? 설마, 그 순진한 척 살랑거리는 눈짓에 반했나?”

“네? 아니, 왜 얘기가 그리로 튑니까. 쉽게 확인할 방법이 있는데 그걸 안 하겠다고 하시니까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말을 내뱉는 순간 조엘은 제가 또 입방정을 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민하게 움직인 그는 날아드는 무거운 메모 박스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퍽!

메모 박스가 문에 부딪히며 무거운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제법 두꺼운 문에 선명하게 자국이 남았다.

어휴. 저기에 맞았으면 최소 중상이야.

재빨리 뒤를 확인한 조엘의 귀로 어마어마한 고성이 들려왔다.

“당장 나가!”

미안해요. 노아. 또 실패예요. 아마 두 번 다시 이 얘기는 못 꺼낼 거 같아요.

알렉스의 화를 있는 대로 돋운 조엘은 더는 고용주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일신의 안위를 위해 재빨리 도망쳤다.

순식간에 알렉스의 공간은 고요한 침묵 속에 잠겼다. 그러나 공간 안에 갇힌 공기는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사나운 페로몬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조엘이 특이형질자였다면 압박감에 쓰러졌을 것이다.

알렉스는 제 페로몬이 날뛰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갈무리하지 않았다. 갈 곳 잃은 이 분노를 어째야 할지 몰랐다.

손등의 핏줄이 터질 정도로 주먹을 쥔 그는 끓어오르는 화에 이를 악물었다.

애써 잊으려던 사실을 떠올리게 한 조엘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뻔히 들킬 사실을 속일 리가 없다고?

아니. 뻔히 들킬 줄 알면서도 태연하게 거짓을 말하는 게 오메가다.

오메가의 가증스러운 거짓말에 아버지는 수없이 놀아났다. 아버지가 화를 내면 그녀는 눈물을 쏟아내며 사랑한다고 외쳤다.

애처로운 그녀의 눈물에 매번 속아 넘어간 아버지는 결국 광기에 휩싸여 제 손으로 그녀와 함께 지옥 불에 뛰어들었다.

증거? 확실한 방법?

확인한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지. 노아의 배신을 맞닥뜨렸을 때의 감각을 알렉스는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감정이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으로 한없이 추락했다. 몸속의 피가 모두 빠져나가 얼어붙고 그 무엇도 들리지 않는 암흑에 갇혀 있던 기분.

찰나의 순간, 알렉스는 절망을 경험했다.

그걸 또다시 겪으라고?

거짓말에 휘둘려 확인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아버지와 다르다. 오메가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래. 나는 오메가 따윈 믿지 않아.

그러나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하얀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이 제 가슴을 쥐어 짜내는 것 같았다.

알렉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를 악문 탓에 턱이 단단해졌다. 그는 온통 제 머릿속을 차지한 얼굴을 지워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들끓어 대는 페로몬은 여전히 공간을 가득 채우고 넘실거리고 있었다.

“웬일로 일찍 오셨네요.”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손이 멈췄다. 노아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등 뒤로 들리는 낮은 발걸음 소리에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식사하셔야죠? 바로 준비할게요! 미리 연락 좀 주시지…. 이리 일찍 오실 줄 알았으면 식사시간을 같이 맞췄을 텐데….”

주방으로 달려가려던 루시를 불러 세운 알렉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괜찮으니 루시는 볼일 보세요. 노아랑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아무도 들이지 말고.”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 하지 않느냐는 루시의 말에 알렉스는 생각 없다고 대답했다.

머뭇거리던 루시도 알렉스의 단호함에 결국 식당을 나갔다.

단둘이 남게 되자 노아는 그나마도 있던 식욕을 완전히 잃었다.

“왜 안 먹어? 임신한 몸으로 그거 먹고 되겠어? 소중한 아이 아닌가?”

빈정거리는 말이 칼날이 되어 노아를 할퀴었다.

“초음파 사진을 찍었다고? 어때? 보니까 막 애틋하고 지켜 주고 싶고 그래? 그 자식 새끼를 꼭 낳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왜… 그렇게 말해요.”

“그럼 내가 어떻게 말해? 남의 새끼 밴 부인한테 상냥하게 대해 줘야 하나? 내가 그렇게 만만하고 쉬운가 보지?”

“알렉스. 제발….”

“제발. 뭐?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네 결백을 증명하려면 애를 지우라고. 그건 못하겠나 보지?”

차갑게 식은 알렉스의 시선이 노아에게 내리꽂혔다. 이죽거리는 표정에 드러난 경멸에 가슴이 아렸다. 노아의 안색은 단번에 창백해졌다.

“왜 말을 안 해? 그 이쁘장한 얼굴로 또 한 번 나한테 고백해 보시지. 아니면 눈물이라도 떨구어서 약한 척이라도 해 보든가.”

노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화내는 그를 보는 게 괴로웠다. 조금도 자신의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건 고통이었다.

그가 순간 식탁을 쾅, 내리쳤다. 큰소리에 흠칫 놀란 노아가 그를 쳐다보았다.

“입이 붙었어?! 잘도 나불거리더니 이젠 묵비권이라도 행사하려고? 나 혼자 떠들든 말든 이제 상관 안 하겠다, 이거야?”

노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라는 말은 목 안으로 삼켜졌다. 이제 무슨 말이든 그에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어떤 것도 믿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도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슬픔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어떤 말로도 그를 설득할 수 없으리란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저로 인해 오메가에 대한 불신만 더욱 커졌다.

절망에 잠긴 노아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벌떡 일어난 알렉스가 사나운 얼굴로 팔을 뻗었다. 끼익, 의자가 뒤로 밀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는 노아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왜 그런 얼굴이야? 왜 네가 그런 표정을 하느냔 말이야! 배신당한 건 나잖아. 왜 네가 피해자 얼굴을 하고 있어?”

체념과 고통이 뒤섞인 푸른 눈동자가 알렉스의 내면을 찔러 댔다. 윽박지르고 화낼수록 고통은 고스란히 알렉스에게 되돌아왔다.

눈동자에 담긴 슬픔이 알렉스의 마음을 할퀴었다. 가녀리고 작은 어깨의 떨림이 손으로 전해졌다.

숨이 턱 하고 막히는 이 낯선 감정을 알렉스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물기 어린 눈두덩이를 어루만지고 달래고 싶은 충동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가증스러운 표정 따위 집어치워!”

알렉스는 잡고 있던 노아의 어깨를 밀쳤다. 가녀린 몸이 휘청하고 흔들렸다가 간신히 선다.

“곧 해리스를 만날 거야. 네가 계약을 어겼다고 해도 아직 우리 계약은 유효해. 그 빌어먹을 임신 얘기는 하지 마. 그랬다간 유산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받게 될 거야.”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노아는 가만히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자꾸만 뻗으려는 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우리 사이가 틀어진 걸 해리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 알았어?”

그는 노아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노아만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로 눈을 깜빡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서 오게.”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알렉스는 가져온 와인을 해리스에게 건넸다.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걸 다 사 왔어? 고맙네.”

“어서 와요. 알렉스. 정말 오랜만이네.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어.”

머리가 하얗게 센 단발머리의 노년 여성이 알렉스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이쪽이 알렉스의 배우자군요. 반가워요. 우리 처음이죠?”

“안, 안녕하세요. 노아 헌트입니다.”

잔뜩 긴장한 노아는 더듬거리며 인사했다. 스스럼없이 다가온 그녀는 노아를 가볍게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그리 긴장할 거 없어요. 그나저나 평생 결혼 안 할 거 같던 알렉스가 어떻게 결혼했나 했더니 이제야 이해가 가네.”

장난스레 알렉스의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글로리아 해리스예요. 노아라고 불러도 되죠?”

“네? 네. 부인.”

“부인이 뭐예요. 그냥 글로리아라고 부르세요. 자, 이쪽으로 와요.”

생활감이 듬뿍 묻어나는 아기자기한 집이었다. 노아는 긴장한 채로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부부의 안내로 푹신하고 넓은 소파가 있는 응접실을 지나 시야가 탁 트인 식당에 도착했다.

“앉아 있어요. 금방 준비할게요.”

글로리아가 움직이자 해리스도 그녀를 도와 다 된 음식들을 하나둘씩 식탁에 차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했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이 사람이 자네들 온다고 아침부터 준비한 거라네. 자네들 덕에 나도 오랜만에 이 사람 요리를 맛보는 거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미안해 노아가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도와줄 필요 없다면서 글로리아가 손을 내저었다.

“글로리아는 가정식 요리의 대가야. 그녀가 낸 요리책도 열 권이 넘어.”

차려지는 음식들이 하나같이 휘황찬란해 눈을 휘둥그레 뜨자, 알렉스가 그녀의 이력을 간단하게 얘기해 주었다.

“아유. 대가는 무슨. 그냥 집에서 해 먹는 거 좀 알려 주는 것뿐이야.”

“단독 프로로 최장기 출연하셨고 출간하신 책은 밀리언셀러에 들었으니 대단한 거 맞습니다.”

쏟아지는 칭찬에 쑥스러운 듯 그녀가 별거 아니라면서 웃었다.

“와…. 대단하세요.”

입을 떡 벌린 채로 노아는 감탄했다. 글로리아를 돕던 해리스가 오히려 뿌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오가는 다정한 부부의 모습에 노아는 부러웠다. 그들 사이엔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사람들 특유의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해리스가 글로리아와 함께 주방을 드나드는 모습은 어색함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적당히 차렸어요. 좋아했으면 좋겠네.”

먹음직스럽고 푸짐한 음식을 한가득 식탁에 차려놓고는 글로리아가 걱정 어린 말을 꺼냈다.

“엄, 엄청 푸짐해요. 굉장하세요.”

육즙을 가득 머금은 로스트비프와 오븐에서 막 꺼낸 라따뚜이, 상큼한 소스를 곁들인 샐러드, 그리고 폭신폭신해 보이는 식전 빵 말고도 치즈를 얹어 구운 해산물 요리도 있었다. 고기에 곁들일 소스는 심지어 네 종류나 되었다.

엄청 기교를 부린 호텔식 요리가 아니라, 화목한 대가족이 둘러앉아 마음껏,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가정적인 메뉴였다.

“많이 들어요.”

글로리아는 능숙하게 접시에 음식들을 덜었고 해리스가 그것을 노아와 알렉스에게 주었다.

음식들이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웠다. 먹는 것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노아도 진수성찬을 앞에 두니 아주 조금이지만 입맛이 돌았다.

“에드워드와 이이는 막역한 사이니까 어려워하지 말아요. 40년 넘는 친구였으니 가족이나 마찬가지예요. 어려워 말고 종종 놀러 와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노아가 망설이는 사이 해리스가 시선을 모았다.

“자자, 그러지 말고 우리 건배나 하지. 이런 자리도 종종 가지고. 알렉스. 자네도 일이 바쁜 건 알지만 시간 좀 내어 보게. 사람이 너무 일만 하고 사는 건 재미없지 않은가.”

알렉스가 선물로 가져온 비싼 와인을 호기롭게 딴 해리스가 잔을 가득 채웠다.

건배를 외치는 그에게 맞춰 잔을 들었지만 노아는 입만 살짝 대고 잔을 내려놓았다.

“노아는 술을 안 마시나?”

잔을 그대로 내려놓는 걸 본 해리스가 물었다.

“아, 저….”

“노아는 술을 잘 못 합니다. 아주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해서요.”

노아가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자 알렉스가 대신 나섰다. 그는 노아의 와인 잔을 옆으로 밀고 물을 건네주었다. 그러더니 슬쩍 몸을 기울였다.

“억지로 안 마셔도 돼.”

입가에 은은하게 미소를 띤 채로 그가 짐짓 다정한 어조로 속삭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다정한 두 사람이었지만, 정작 알렉스와 거리가 좁혀지자 노아는 바짝 긴장했다. 미소 띤 그의 눈동자가 몹시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가 매우 가까워졌나 보군. 자네 조부가 봤다면 정말 기뻐했을 거야.”

맞은편에 앉은 해리스가 흐뭇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려. 에드워드가 보는 눈이 있었네.”

“난 처음에 에디의 유언을 들었을 땐 솔직히 반신반의했다네.”

“뭐, 그건 저도 그랬죠.”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노아에게 시선을 보냈다. 곡선을 그린 입가의 미소가 노아에겐 마치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졌다.

태연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이가 좋은 척하라는 그런 압박.

“그래도 역시 에디가 사람 보는 눈은 있어. 이렇게 좋은 사람을 찾아냈지 않은가. 두 사람 지금 너무 보기 좋다네.”

“알렉스도 이렇게 미인 배우자를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아?”

흐뭇해하는 해리스 부부의 대화를 들으며 노아는 점점 고개를 떨구었다. 이렇게 좋은 분들을 속이는 게 괴로웠다.

거짓으로 쌓아 올린 관계를 들키는 게 두려웠다. 두 사람은 이 결혼이 진짜라고 믿고 있었다.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는 죄책감이 노아를 괴롭혔다. 행여나 자신의 기분이 드러날까 두려워 노아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때였다.

“그보다 이제 두 사람, 아이는 언제 가지기로 했나? 헌트가에도 이제 새 생명이 태어날 때가 되지 않겠나.”

해리스가 꺼낸 말에 놀란 노아는 그만, 물 잔을 건드렸다.

“아!”

잔이 넘어지면서 물이 쏟아졌다. 가득 차 있던 물은 그대로 테이블 아래로 쏟아져 노아의 바지를 적셨다.

가장 빨리 반응한 건 알렉스였다. 물 잔이 넘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난 그는 냅킨부터 집어 들었다.

“쯧.”

“죄, 죄송해요.”

“가만있어 봐.”

재빨리 알렉스가 냅킨을 집어 젖은 부위를 꾹 눌렀다. 흠칫.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깜짝 놀라 그를 뿌리치기도 전에 해리스와 글로리아가 동시에 일어났다.

“저런. 괜찮은가!”

“괜찮아요, 노아?”

“알렉스, 제가, 제가 닦을게요.”

냅킨으로 허벅지를 문지르는 손길에 당황해 노아는 말을 더듬었다.

“그러지 말고 이걸로 우선 닦아요. 많이 젖었어요?”

글로리아가 건네주는 수건을 받은 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금방 마를 거예요.”

“마르긴 뭐가 금방 말라? 다 젖었는데.”

냅킨으로 물기를 닦아내던 알렉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이 괜한 얘기 꺼내서 노아가 당황했잖아요.”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부부니까 아이 얘기 꺼내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

눈을 흘기는 글로리아의 핀잔에 해리스가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래요. 그러는 게 좋겠다. 저기 오른쪽 복도 끝이 화장실이에요. 그동안 난 테이블 정리 좀 해야겠어요.”

물기가 가득한 테이블과 떨어진 나이프를 확인한 글로리아가 팔을 걷어붙였다.

노아는 그녀가 알려 준 대로 복도를 따라 화장실로 갔다. 오른쪽 허벅지가 반 이상 젖어 있었다.

노아는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한 탓에 작은 자극에 그만 지나치게 깜짝 놀랐다. 해리스가 아이 얘기를 꺼내는 순간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노아는 걸려 있는 수건을 잡아 빼 바지에 대고 꾹꾹 눌러 댔다. 허벅지에 냅킨을 대고 문지르던 손길이 떠올랐다. 그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연기라는 걸 아는 데도 그의 사소한 손길에 흔들렸다. 그는 그저 해리스 앞에서 우리 부부에게 아무 문제 없다는 걸 보여 주고 있는 것뿐인데.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그의 손길이 제게 향할 때마다 심장이 덜컥거렸다. 해리스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노아는 알았다.

그의 미소는 조소였고, 눈빛은 차가웠다. 허튼 소리하지 말라는 그의 경고가 잿빛 눈동자 가득 담겨 있었다.

아마도 이 아이는 영원히 알렉스에게 인정받지 못하겠지.

환영받지 못하는 이 아이가 안쓰러웠다. 심지어 아이를 가진 자신도 알렉스의 통보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노아는 납작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겨우 작은 점에 불과한 아이. 자신이 결정을 내리면 테도 갖추지 못한 채 사라질 수도 있는 존재였다.

에디. 전 어떡하면 좋을까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에디가 원망스러웠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았을 텐데….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서러움에 노아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 가족계획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것까진 관여하실 수 없어요.”

“뭘 그리 날카롭게 굴어? 그냥 궁금했을 뿐이네. 에디였더라도 2세 계획을 궁금했을 거고.”

글로리아가 디저트를 준비하는 사이 정리가 끝난 자리에서 알렉스는 해리스에게 통보했다.

“결혼까진 할아버지의 뜻대로 됐지만 아이는 제 뜻대로 할 겁니다. 그러니 그 화제는 더 이상 꺼내지 마십시오.”

선을 긋는 알렉스의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해리스는 아직 두 사람이 결혼한 지 그리 길지 않았으니 이쯤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처음보단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아 다행이네. 그거면 된 거야. 이제 겨우 부부로 보이더군.”

흐뭇한 얼굴로 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대로만 쭉 간다면 에디의 유언대로 상속 진행을 해도 되겠네. 앞으로 3개월이면 조건도 끝이 나니 말이야.”

“주식 양도는 기간이 끝나는 즉시 진행해 주십시오.”

“그 주식이 그리 급하진 않을 텐데? 듣자 하니 자네 취임에 불만을 가진 이들도 거의 없고, 이미 자네가 최대 주주 아닌가. 대표로서 입지도 제대로 다지고 있다고 들었네만?”

“2세 얘기를 하시니 제가 모르는 조건이 더 있나 싶어서요.”

“에이. 아무리 자네 조부라도 그런 것까진 조건을 걸 수야 없지.”

“할아버지한테는 처음 보는 사람이랑 결혼하라고 한 조건은 ‘그런 것’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다 자네를 생각해서 한 결정 아니겠나. 다소 무리한 조건이 붙어 있긴 했지만, 그 덕에 노아라는 좋은 배우자를 얻었으니 결국 잘 된 거 아닌가. 그리고 상속 문제는 걱정하지 말게. 무탈하게 결혼 6개월이 지나면 착오 없이 주식은 자네에게 양도될 거네.”

알렉스의 예민한 태도에도 해리스는 허허,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그를 다독였다.

“그보다 취임식은 잘 끝났다고 들었네. 자네 조부가 봤다면 매우 자랑스러워했을 거야. 그날은 내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네만, 내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지?”

“네.”

해리스가 보낸 신진작가의 작품은 대표실에 잘 걸려 있다. 알렉스의 취향 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조부의 오래된 친우이자 법적대리인의 선물을 홀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해외 법인 설립은 어찌 돼 가고 있나.”

“유럽 연합의 주축인 로넨 왕실과 최종 협의만 남았습니다. 며칠 후에 출장 갑니다.”

잘됐군, 잘됐어. 고개를 끄덕이며 해리스가 흡족해하는 사이 디저트 준비를 끝낸 글로리아가 라즈베리 케이크를 내어 왔다.

“아직 노아는 안 왔어요? 내가 부르러 갈까?”

노아가 자리에 없는 걸 확인하자마자 글로리아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에구머니나! 노아. 언제 왔어요?”

복도에 서 있던 노아를 뒤늦게 발견한 글로리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동도 없이 서 있던 터라 하마터면 놀라 자빠질 뻔했다면서 글로리아가 농담처럼 말했다.

“왜 그러고 있어요? 이쪽으로 와서 앉…. 노아?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은가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테이블로 다가온 노아를 확인한 글로리아가 깜짝 놀랐다.

“괜찮습니다. 조금… 어지러워서요…. 금,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두통인가요? 약이라도 갖다 줄까요? 우리 애들이 자주 아파서 웬만한 약은 다 있어요. 잠깐 기다려 봐요. 금방 갖다 줄 테니.”

“아,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냥 좀 긴장했었나 봐요.”

별일 아니라고 손을 내젓는데 갑자기 옆자리의 알렉스가 벌떡 일어났다.

“가야겠습니다.”

“음? 이렇게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어? 벌써 가게? 아직 디저트도 안 먹었는데….”

“노아가 피곤해 보여서요. 바지도 불편해 보이고.”

의아해하는 부부에게 노아 핑계를 댄 알렉스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노아의 허리를 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저녁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노부부가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으나, 노아의 안색을 살피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노아 상태도 안 좋아 보이니 그렇게 하게.”

“노아,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병원 꼭 다녀와요.”

다정한 글로리아의 말에 노아는 상황 파악도 못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짝 끌어당기는 그의 강한 힘에 노아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정말로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알렉스는 그대로 현관으로 움직였다.

“잠깐만! 이거라도 갖고 가.”

어느새 글로리아가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를 포장해 노아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헤어져서 아쉽긴 하네만, 오늘만 날도 아니고. 이런 자리는 다음에도 또 만들면 되지.”

“그러죠.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배웅은 안 나오셔도 됩니다.”

“건강 괜찮아지면 꼭 다시 봐요. 다음에 봤을 땐 어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다정하게 선 노부부를 힐끔거리며 노아는 알렉스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다시 저분들을 볼 수 있을까?

노아는 알렉스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단단하게 굳은 턱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지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한 알렉스는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앞으로 3개월 남짓 남은 기간. 남들 앞에서 사이좋은 척하는 것도 이젠 한계였다.

노아의 시선은 또다시 뒤를 향했다.

저분들을 다시 볼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죄송해요. 노아는 그들이 들을 수 없는 사죄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미적거리지 말고 타.”

여전히 그들을 지켜보고 서 있는 부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알렉스는 조수석 문을 열어 노아가 먼저 타도록 했다.

노아는 글로리아가 준 케이크 박스를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 두었다. 알렉스가 뒤이어 운전석에 타 곧장 시동을 걸었다.

해리스의 집을 빠져나온 차는 그대로 대로로 달려갔다.

급작스레 나온 이후로 알렉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감돌았다.

노아는 무릎에 놓인 케이크 박스를 응시했다.

조금 전 본의 아니게 듣게 된 대화가 떠올랐다. 알렉스가 이 결혼을 승낙한 이유.

노아는 그가 단순히 에디 할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의 결혼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우연히 듣게 된 그들의 대화로 노아는 비로소 이 결혼의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별로 충격 받을 일도 아닌데, 이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인데도 동요했다.

“무슨 생각해? 또 어떤 개수작을 부리려고?”

거친 언사에 노아는 고개를 들었다.

“해리스 앞에서 아픈 척하면서 임신했다는 거 알리려고 했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런 생각 한 적도 없었지만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곳에서 끌고 나오더니 알렉스는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행여나 누구에게라도 임신했다는 말 꺼낼 생각 따윈 하지 마. 어차피 그 아이, 넌 못 낳아.”

아이…. 그래, 아이가 있구나. 나한텐 알렉스의 아이가 있어.

“알아들었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알렉스가 으름장을 놓았다.

“애 가졌다는 말로 한몫 잡아 보려던 계획 따위 물 건너갔으니까 아이 낳을 이유 없지. 난 그 애, 절대로 인정 안 할 테니까.”

분노에 가득 찬 그의 선언을 노아는 그저 듣기만 했다. 쏟아지는 말은 노아의 가슴 깊이 파고들어 생채기를 만들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믿어 주길 바라던 마음이 파스스 부서져 내렸다.

자신은 어쩌면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알렉스가 제게 화내는 건, 아주 조금쯤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닌가, 하고.

알렉스는 제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가 지켜야 할 건 우리의 결혼이 아니라 자신이 받게 될 유산이었다.

위태롭게 쌓아 올렸던 감정의 댐은 밀어닥친 파도에 속절없이 부서졌다.

깨닫고 나자 견딜 수 없었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정말 멍청하게도, 자신은 그걸 다른 이유라고 여겼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랬더라면 좋았을걸. 그랬더라면…, 이리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을 텐데….

“당분간 동반 외출은 안 할 거야. 네가 그 아이 뗄 때까진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마.”

“네. 그럴게요.”

“혹시라도 내 귀에 딴 놈 만난다는 소리라도 들리는 날엔,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물어내야 할 거야.”

보잘것없던 마음이, 간신히 붙잡고 있던 희망이 조각조각 산산이 부서져 내린다.

처음부터 이 마음은 가져서는 안 되는 거였다.

노아는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창백한 얼굴 위로 가면이 덧씌워졌다.

핏기라곤 없는 얼굴은 그저 담담했다. 모든 것을 완전히 소진하고 탈진할 것처럼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놓인 현실만이 노아에게 남았을 뿐이었다.

꽃도 피워 보지 못한 작은 마음은 그렇게 허무하게 노아의 안에서 시들어 버렸다.

알렉스는 넥타이를 끄르던 손을 멈췄다. 문득 조금 전 방으로 들어간 노아의 얼굴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뒤에 뭔가를 남겨 놓은 것 같은 이 불쾌하고 찝찝한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임신 사실을 해리스에게 들킨 것도 아닌데 기묘한 위화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

옷을 벗다 말고 멈춰선 채로 알렉스는 점점 미간을 구겼다.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돌아오는 길을 차근차근 반추하다가 번뜩 깨달았다.

노아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색이 나쁘기는 했으나 침착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응이 없었던 것에 가까운 고요함.

어떤 방법도 안 먹힌다는 걸 노아도 드디어 깨달았나 보다, 라고 넘어가기엔 석연치 않았다.

노아는 아직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이를 어쩔 건지 알렉스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설마, 그 자식이랑 연락하고 지내는 건가? 얼굴도 모르는 알파 새끼와 얘기 중인 거 아니야?

구겨졌던 미간이 이번엔 완전히 일그러졌다.

알렉스는 그 즉시 움직였다. 내 집에서 감히, 노아가 그 새끼랑 내통한다고?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넥타이는 풀다 말았고, 셔츠는 반쯤 단추가 열린 채로 알렉스는 분기탱천해 달려갔다.

알렉스는 단숨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는 벌컥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침대에 걸터앉은 노아였다. 멍하던 눈빛이 알렉스를 발견하곤 두어 번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알렉스?”

알렉스는 주위를 날카롭게 훑었다. 누가 들어온 흔적 같은 건 없었다. 이 방엔 노아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걸 이성적으로는 알면서도 알렉스는 경계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주춤거리며 노아가 일어섰다. 흡사 사냥감을 찾는 듯, 매서운 눈빛으로 사방을 훑는 알렉스가 이상해 노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자식이랑 통화했어?”

질문을 못 알아들은 듯 노아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논한 거 아니야? 그 자식은 알고 있다며. 너 임신한 거.”

“아….”

“왜 대답을 안 해? 그 자식이 뭐라고 했을 거 아니야.”

“그런 거… 상의한 적 없어요. 그리고 상의할 생각도 없습니다.”

알렉스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디서 그런 쓰레기랑 엮였어? 좋아. 그럼 간단하네. 병원 예약은 내가 하지.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 줄 수 있어. 네 의료기록에도 낙태 사실은 아예 없는 것으로 만들어 주지.”

그래. 애만 떼면 이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다. 노아의 배 속에 남은 증거만 없애면…이 터질 것 같은 분노도 사그라질 수 있….

“애, 낳을 거예요.”

화를 삭이며 알렉스 나름대로 다음 절차를 떠올리던 그때, 믿기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노아는 알렉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알렉스와 상관없는 아이예요. 이 아이는 저 혼자, 낳아서 기를 거예요. 낙태는 하지 않을 겁니다.”

노아는 담담하게 선언했다. 결정을 내리고 나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바스러진 마음은 이제 아프지도 않았다. 환영받지 않는 아이를 자신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너는 신이 내려 준 보물이야.’

다정하고 상냥한 어머니의 속삭임을 떠올렸다. 뜻밖에 찾아온 아이. 이 아이는 임신을 포기했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던 나와 같았다.

노아의 선언에 알렉스가 달려들었다. 그는 무심히 서 있는 노아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에게서 폭발적으로 페로몬이 쏟아져 나왔다. 농도 짙은 페로몬이 노아를 위협하듯 자극했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숨이 턱 막혔다. 몸이 절로 덜덜 떨렸다.

“나하고 상관없다고?!”

“네.”

“뻔뻔하게 감히 그딴 소리를 지껄여?!”

알렉스가 움켜쥔 양팔이 아팠다. 숨통을 틀어막을 듯이 들이치는 페로몬에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식은땀이 온몸을 푹 적셨지만, 노아는 무섭도록 굳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3개월이면 우리는 헤어집니다. 아이는… 그 후에 태어날 거고요. 이 아이에 대한, 어떤 얘기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을 거예요.”

숨이 막혀 드문드문 말이 끊겼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왜 나하고 상관이 없어?! 넌 지금 나와 결혼했어! 너는 혼전 계약서에 서명했고, 이혼하기 전까진 내 배우자야!”

폭발하듯 터져 나온 페로몬이 노아를 압박했다. 검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노아를 죽일 듯이 내려다보았다. 노아는 눈앞에 거대한 짐승을 마주한 것 같았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숨통을 틀어막는 페로몬의 압박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노아는 이를 악물었다.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더는 그의 앞에서 매달리고 싶지도, 울고 싶지도 않았다.

흥분한 알렉스가 노아의 양팔을 더욱 움켜쥐며 몸을 숙였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헤어지기 전까진 넌 내 소유야. 절대로 허락 못 해! 내가 그 아이 낳게 둘 것 같아?!”

그에게 잡혀 몸이 반쯤 딸려 올라갔다. 발끝이 간신히 바닥에 닿을 정도로 들렸다.

“당, 당신은…, 권, 리가 없어요. 이 아이는,”

노아는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을 강하게 압박하는 페로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어떻게든 제 의지를 전하려고 했다.

“제, 아이… 입니다.”

“헛소리하지 마! 내가 그냥 둘 줄 알아?! 넌 아이 못 낳아! 절대로!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니까!”

알렉스가 붙잡았던 팔을 던지듯 놓자마자 노아가 휘청하고 그대로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숨이 막혀 헐떡거리며 노아는 제 목을 감싸 쥐었다.

노아가 페로몬에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도 알렉스는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거세게 일어난 불은 알렉스의 뇌를 태울 것처럼 집어삼키고 있었다.

“당장 내일 병원 예약할 테니 꼼짝할 생각도 하지 마. 내 허락이 없이는 넌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여기 있다간 저 가녀린 목을 부러뜨릴 것 같았다. 알렉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쾅!

온 집 안이 울릴 것처럼 큰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흉포한 알렉스의 페로몬 때문에 노아는 상체를 숙인 채로 숨을 헐떡거렸다. 묵직하고 폭력적인 페로몬이 노아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몸을 수그리고 있던 노아는 힘겹게 발을 내디뎠다.

“헉.”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내장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노아는 어떻게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바닥을 기었다. 욕실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변기를 올리고 먹은 것을 모조리 게워 냈다.

“우욱…! 읏…!”

속이 완전히 빌 때까지 몇 번이고 토했다. 나중엔 시큼한 위액만 나왔다. 제 속을 뒤집어 놓았던 알렉스의 페로몬도 점점 옅어졌다.

노아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욕실 벽에 기대 숨을 할딱거렸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 노아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고통이 지나치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걸 실감했다. 괜찮았다. 아무렇지 않았다. 알렉스는 영원히 자신을 믿지 않을 거고, 그와의 계약은 이제 고작 3개월 남짓 남았을 뿐이다.

이혼하면 영원히 보지 않을 사이니까, 이 시간도 곧 끝이 날 거다.

그런데 어째서 가슴이, 심장 어딘가가 막힌 것처럼 갑갑한지 모르겠다.

무엇도 보고 있지 않은 눈동자에 천천히 물기가 차올랐다. 타일 무늬가 점점 일그러졌다.

창백한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갑갑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노아는 주먹 쥔 손으로 몇 번이고 가슴을 두드렸다.

“흐윽. 으윽… 윽. 흑….”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그동안 쌓였던 모든 것이 한 번에 쏟아져 나왔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온 얼굴을 적셨고, 뺨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렸던 적이 없었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괴로웠다. 모든 게 원망스럽고 무서웠다.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

여기에 더 있을 수 없었다. 알렉스와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멍하니 눈물만 뚝뚝 흘리던 노아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허둥지둥 욕실을 나와 정신없이 협탁을 뒤졌다.

“여기, 어디에…. 어디 있지?”

정신없이 서랍을 뒤지던 노아는 손끝에 걸리는 작은 명함을 꺼냈다.

노아는 손바닥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 냈다.

핸드폰, 핸드폰이 어디 있지?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탁자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을 발견했다.

노아는 명함에 찍힌 번호를 꾹꾹 눌렀다. 여전히 뺨에 남은 물기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훔쳤다.

신호가 울렸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받아요.

-여보세요.

한참 울리던 신호가 뚝 끊기고 원하던 사람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저, 저 좀…, 도와주세요.”

-노아? 노아예요? 무슨 일이에요?

다급한 이브의 목소리에 노아는 그만 울먹거리고 말았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나 좀 데리고 가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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