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3)

13.

머리가 순간 멈췄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임신?”

“네. 혈액 검사 결과가 이상해서 정밀 검사를 해 보니 임신이더군요. 자세한 건 오메가 전문병원에 가셔서 진단받으셔야 합니다. 임신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임신이라니? 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알렉스는 젊은 의사를 위아래로 훑으며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 돌팔이가 무슨 허무맹랑한 얘기를 지껄이는 거지?

불온한 시선을 눈치챈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배우자분이 불임이었나요? 불임 판정 받았던 거라면 기적이 일어난 거겠죠. 축하드립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어요. 확률적으로 불임이라 하더라도 그 어려운 확률을 극복하고 임신하는 경우가….”

“아니라고! 절대로 아니야! 임신일 리가 없어요! 당장 퇴원하겠어! 말도 안 되는 진단이나 내리는 병원에 더 있을 수 없어.”

“저기, 헌트 씨….”

의사가 그를 불렀으나 알렉스는 이미 노아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노아의 안색이 더없이 창백해졌다.

“일어나. 움직일 수 있지? 전문의한테 검사 다시 받으면 돼. 말이 안 되잖아. 그렇지?”

일으켜 세운 노아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도톰한 입술이 몇 번이고 달싹거리다 다물어졌다.

핏기가 가셨다. 손끝까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지만, 알렉스는 노아의 반응을 모른 척 외면했다.

“헌트 씨! 적어도 링거액을 다 맞을 때까진 기다리셔야….”

알렉스는 의사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링거액이 연결된 손등의 바늘을 잡아 뺐다.

“알, 알렉스….”

노아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알렉스의 불안은 한층 커졌다.

노아가 손을 달달 떠는 건 물에 빠졌던 후유증 때문이다. 그래, 그래야 할 것이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가능성을 떠올리자마자 알렉스는 미칠 것 같았다.

아니어야 한다. 무조건 아니야. 알렉스는 피어오르는 불안을 애써 지웠다.

“대표님. 레너드 씨 치료는 끝났…, 어? 무슨 일입니까? 왜 이러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던 조엘은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노아를 끌어안고 선 알렉스와 의사가 그를 말리는 것 같은 상황에 놀라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노아 씨 상태가 안 좋답니까?”

“매디슨! 지금 당장 헬기 대기 시켜. 시티 메모리얼로 옮긴다.”

“알렉스, 잠, 잠깐만, 제, 제가 설명을….”

“입 닥쳐! 한마디도 하지 마!”

노아가 입을 여는 순간 알렉스가 소리쳤다. 알렉스의 품에 안겨 있던 노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대표님, 이게 무슨…….”

“내 말 안 들려?! 지금 당장 헬기 부르라고!”

병실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는 알렉스의 명령에 조엘은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냈다. 근처에서 대기 중인 헬기가 5분이면 이곳 착륙장에 도착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대로 전달했다.

알렉스의 강경한 태도에 의사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한발 물러섰다.

알렉스가 노아를 데리고 헬기 착륙장으로 올라가는 동안, 퇴원 수속을 조엘이 도맡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고용주의 태도가 몹시 불길하고 음산했다. 다년간 알렉스 곁에서 비서 노릇을 하며 쌓아 온 촉이 꿈틀거렸다.

이건 무조건 피해야 한다.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된다. 라고 말이다.

조엘은 휴가라도 받을까? 받을 수 있나? 아니, 꼭 받아야 할 것 같은데. 하고 중얼거리며 뒷수습을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 하룻밤으로 아이가 생겼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페로몬은 날이 바짝 서 있다. 응축된 분노가 몸 안에 쌓여 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알파 페로몬이 생생했다.

압박감에 본능적으로 노아는 몸을 움츠렸다.

아이라니. 단 하룻밤이었는데…, 고작 하루였는데….

노아는 그날 있었던 일을 차라리 먼저 말할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헬기에 탑승한 후로 알렉스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의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난 당신을 배신한 게 아니에요.

노아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두 눈을 꼭 감은 그의 얼굴을 노아는 계속 바라보았다. 그에게 애정을 바란 적은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홀로 커 버린 마음은 온전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음에도 노아는 온몸으로 자신을 거부하는 그의 몸짓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에게 매달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 밤에 생긴 아이라고, 지금 당장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온몸으로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그에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노아가 할 수 있는 건 외면하는 그를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시티 메모리얼 병원의 오메가 전문의 셰먼은 위협적인 기운을 풀풀 풍기며 들어서는 알렉스 헌트의 기세에 눈살을 찌푸렸다.

“헌트 씨. 그 무서운 기운은 거둬 주세요. 공공장소에서는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게 예의입니다. 더군다나 여기엔 환자가 있는 병원입니다.”

주의를 시켰음에도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닥터 리건의 급한 연락을 받고 일부러 시간을 뺐는데 이게 뭐람. 닥터 셰먼은 한숨을 내쉬었다.

“닥터 리건에게 듣기로는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굳이 주치의인 닥터 리건이 아닌 왜 저한테 요청한 건지….”

닥터 셰먼은 알렉스의 커다란 체구에 가려져 있던 노아를 뒤늦게 발견했다.

“닥터 리건에게 듣기론 오메가 치료에는 박사님이 최고라고 하더군요. 내 파트너를 검사해 주세요.”

닥터 셰먼은 노아를 살폈다. 안색은 창백했고, 어째선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상태가 무척 나빠 보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환자분 성함이….”

닥터 셰먼이 차트를 뒤적거리기도 전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아 헌트입니다.”

“어디가 안 좋으셔서…,”

“검사해 주십시오. 임신이 아니라는 결과만 나오면 됩니다.”

닥터 셰먼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알렉스가 대답했다.

“네?”

“내 말 못 알아듣습니까? 임신이 아니라는 검사를 해 달란 말입니다.”

“헌트 씨. 검사야 할 수 있는데 결과는 무조건 임신이 아니어야 합니까?”

“내가 닥터와 문답하려고 여기 온 줄 압니까? 지금 당장 검사하세요.”

고압적인 태도에 셰먼의 시선은 창백한 안색의 노아에게 향했다.

아, 이건 아무래도… 닥터 리건이 골칫덩이를 나한테 넘긴 거 같은데. 뭐, 어쩔 수 없지.

닥터 셰먼은 부부의 사생활에 괜한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검사해 달라고 했으니 하면 되겠지.

“노아 헌트 씨. 이쪽으로 오세요. 그리고, 그쪽 헌트 씨는 좀 나가 계시죠. 헌트 씨의 폭력적인 페로몬이 환자분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으니까.”

셰먼은 이 무례한 알파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정확하게 문을 가리켰다.

“문은 저쪽입니다. 보다 정확한 검사를 위한 조치이니 따라 주시죠.”

미간이 구겨진 채로 알렉스는 마른 등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몸을 돌려 진찰실을 나갔다.

“이제 겨우 살 것 같네요. 자, 그럼 노아 헌트 씨. 이제 제대로 시작해 볼까요?”

위압적인 알파 페로몬이 사라지고 나니 한결 숨 고르기가 쉬워졌다. 셰먼은 한껏 위축된 노아를 달래듯 부드럽게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 히트 사이클이 언제였죠?”

“제가 사이클 주기가 불규칙적이라, 정확한 건 잘….”

“평소에 복용하는 약이 있나요? 임신을 의심할 만한 증후는 있었나요?”

일상적인 질문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노아는 닥터 셰먼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페로몬 조절이 쉽지 않다는 것과 평소엔 억제제를 복용했다는 것도 셰먼에게 모두 말했다.

닥터 셰먼의 주도에 몸 상태를 설명하면서 노아의 떨림도 어느덧 잦아들었다.

“그럼 억제제는 일단 열흘 전부터는 끊었다는 거죠?”

“네. 닥터 리건이 억제제는 먹지 말라고 하셔서….”

“잘했어요. 함량 높은 약을 계속 복용했더라면 큰 문제가 생겼을 거예요. 심지어 지금 임신한 상태라면 더더욱.”

임신이라는 말에 노아의 안색이 다시금 창백해졌다.

“그럼 일단 검사를 진행해 볼까요?”

닥터 셰먼은 밖의 간호사를 호출했다. 필요한 검사를 위해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노아가 간호사를 따라 검사실로 이동하려 밖으로 나가자 복도 끝에 알렉스가 등 돌리고 서 있었다. 두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었고 여전히 헝클어진 차림이었다.

자신을 거부하는 듯 이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의 모습에 노아는 가슴이 먹먹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가만히 멈춰선 노아를 간호사가 재촉했다. 천천히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울 것 같은 기분을 노아는 꾹꾹 내리눌렀다.

그에게 제대로 설명하기 전엔 울고 싶지 않았다.

알렉스의 어린 시절은 온통 불행뿐이었다.

알렉스의 모친은 천박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유일한 인생 목표는 끝내주게 부자인 알파를 낚아서 상류층에 진입하는 거였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집안에서 오메가로 태어난 그녀가 성공하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라고 믿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웨이트리스에 불과했던 그녀가 한참 주가를 올리는 헌트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를 꿰찬 건 인생에서 가장 성공한 배팅이었다.

잘난 얼굴 하나 믿고 상류층 알파가 있는 사회에 끼어들려 무던히 노력했지만 그녀를 만족시키는 상대를 찾기란 어려웠다. 그녀는 상류층 알파의 정부 노릇을 하기엔 욕심이 너무 많았다.

그러던 그녀의 레이더망에 걸린 게 아버지였다. 아직 미혼이었고 승승장구하던 헌트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심지어 그 후계자는 미남에 미혼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일부러 수수한 차림을 했고, 무심한 듯 굴었다.

그게 일에만 푹 빠져 살던 아버지에게 신선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알렉스와 달리 고지식한 아버지는 그녀에게 금세 빠져들었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다른 알파들과 왕성한 교류를 했다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했을 테지만 불행히도 아버지에겐 그녀의 정체를 알려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조부는 그녀와의 만남을 격렬하게 반대했다고 들었다. 조부가 손을 쓰기도 전에 이미 그녀는 알렉스를 임신한 상태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녀가 본색을 드러낸 건 결혼 후 2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 천박한 성격을 버리지 못했다. 그녀에겐 돈과 권력까지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돈을 물 쓰듯 썼고 똑같이 천박하고 무식한 그녀의 지인들과 방탕하게 놀아 댔다.

그녀를 너무 사랑한 아버지는 그녀의 외유를 싫어하면서도 그녀를 내치지 못했다. 행여나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크게 화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알렉스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는 아버지를 끝없이 시험했다. 다른 남자의 흔적을 버젓이 달고 들어와서는 이래도 날 사랑하냐고 물었고 기어이 아버지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

각인한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그녀에게 종속된 존재였다. 그녀가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그 순간부터 불완전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전화기를 붙잡고 손에서 떼어놓지를 못했고 유령처럼 집 안을 서성거리며 불안해했다.

‘네 어머니가 돌아오겠지? 안 돌아오면 어쩌지?’

어린 알렉스를 끌어안고 네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도해 달라고 한 적도 많았다.

‘네가 있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널 사랑하니까 이곳으로 올 거야.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버지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릴 때마다 알렉스는 어머니 따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어머니는 알렉스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아주 가끔 기분이 내킬 때만 알렉스에게 상냥한 어머니 역할을 할 뿐이었다.

어린 아들을 앉혀 놓고 ‘아이가 생겨서 정말 다행이지 뭐야? 안 그랬으면 결혼 못할 뻔했어.’라고 친구와 태연하게 통화하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오만한 그 태도는 일방적 각인을 한 아버지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던 아버지는 그녀를 버릴 수 없었으니까.

그 비극이 일어난 건 예정된 일이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진실을 오직 알렉스만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점점 고통과 광기로 물들어 가는 과정을 어린 알렉스는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화재가 나던 날 알렉스는 아침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아버지는 몇 번이고 알렉스에게 오후 4시가 되기 전엔 집에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부친은 알렉스가 그녀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매개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되도록 알렉스가 집에 있기를 바랐다.

어렸던 알렉스는 유모와 함께 외출했다가 결국 핑계를 대고 예정된 시간보다 이르게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펜트하우스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집 안 가득한 낯선 냄새를 맡았다. 어린 알렉스는 그게 무슨 냄새인지는 몰랐지만, 가끔 자동차에서 나는 냄새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불길함을 알아챈 유모가 알렉스를 붙잡았지만, 그녀를 뿌리치고 응접실로 달려가 아버지를 불렀다.

알렉스의 부름에 침실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나왔다. 그는 알렉스를 뒤따라 들어온 유모를 향해 아이를 데리고 나가라고 소리쳤다. 아버지의 두 눈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기가 어려 있었다. 유모에게 안긴 알렉스는 아버지를 끝없이 불렀다.

‘네 할아버지가 널 보살펴 줄 거야.’

그리고 그는 침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그게 알렉스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건 수습은 조부가 다 알아서 했다. 방화였던 게 사고로 결론이 나기까지 조부가 얼마나 애썼는지 어렸던 알렉스는 몰랐다.

다만 자신이 아는 건, 아버지를 위해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닥터 셰먼의 권고에 노아는 입원하기로 했다. 억제제를 지속해서 복용한 탓에 페로몬 수치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게 이유였다.

사우스 트리아에서 뒷수습을 마치고 복귀한 조엘이 입원 절차를 밟는 사이 노아는 VIP 병실에 혼자 남겨졌다.

검사 결과를 아직 닥터 셰먼이 알렉스에게 전달하지 않았지만, 폭풍이 몰려오기까지 남은 기간이 그리 길진 않았다.

노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며 초조하게 문을 힐끔거렸다. 말해야 한다. 이 아이는 당신 아이라고.

두려움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가 믿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모는 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상처받을까 봐, 그럴까 봐 노아는 무서웠다.

불안으로 떨리는 마음을 어떻게든 추스르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저릿한 손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홀로 남겨진 병실에 있으니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마치 폭풍 전야처럼.

쿵쿵대는 심장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였다. 노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자신이 알렉스에게 찾아가 먼저 말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초조한 마음에 문으로 달려가던 노아는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발을 멈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몸이 굳혀 멈춰선 노아의 눈앞에서 문이 열렸다.

“노아 헌트 씨. 갈아입을 환자복 가져왔습니다.”

병실 한가운데 서 있는 노아를 발견하고도 베테랑 간호사는 놀라지 않았다.

“옷 갈아입고 나오시면 링거를 놔 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멍하니 서 있는 노아를 부드럽게 다독인 간호사는 노아의 품에 환자복을 안기며 욕실로 안내했다.

그가 아니라는 실망감과 함께 안도감이 밀려왔다. 느릿느릿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노아는 거울로 제 얼굴을 확인했다.

‘혈액검사상으로는 임신일 확률이 높습니다. 정확한 건 며칠 후에 한 번 더 혈액 검사를 하면 확실할 거 같고요. 초음파 확인은 시일이 좀 더 지나야 합니다. 2주 후에 초음파 예약을 잡아 놓을게요.’

‘한, 한 번이었어요…. 저는 히트 사이클도 아니었고…. 그랬는데도, 임신이 된 건가요?’

‘임신이 꼭 히트 사이클에만 되는 건 아니에요. 주기에 임신 확률이 올라간다는 거지, 다른 날이 0%는 아니거든요.’

‘그, 그래도…, 그래도요.’

‘헌트 씨. 헌트 씨는 지금 임신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요. 페로몬 수치가 임신한 것치고는 매우 낮아요. 아마 임신 전엔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낮았을 거예요. 최근엔 페로몬 조절이 쉬웠죠?’

‘네….’

‘임신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호르몬 분비가 왕성해지면서 페로몬 수치도 올라간 거예요. 그 덕분에 조절 능력도 상승했던 거고.’

닥터 셰먼은 노아에게 지금은 무조건 마음을 편히 먹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똑똑.

헌트 씨? 괜찮으세요?

“네! 금방 나갈게요.”

닥터 셰먼과의 대화를 떠올리던 노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허둥지둥 문을 열자 간호사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다.

간호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쾅. 문이 부서지는 듯한 큰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노아는 자리에서 멈춰 섰다. 알렉스가 흉흉한 얼굴로 들어왔다.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 비켜요.”

“네? 하지만 닥터 셰먼이 수액을 놓으라고….”

그의 태도에 간호사가 망설이자 알렉스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나가!”

화들짝 놀란 간호사는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알렉스가 노아를 죽일 것처럼 성큼 다가왔다.

노아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체념했다. 설명만 잘하면, 어쩌면 그가 믿어 줄지도 모른다고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건 노아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그 같잖은 고백은, 이걸 위한 연막이었군? 하. 내가 멍청했어. 너 따위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오메가를 믿다니.”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더니 노아 팔을 움켜쥐고 몸을 끌어당겼다.

“알, 알렉스, 아니에요. 그런 거,”

“내가 너를 과소평가했어. 이 정도로 영악할 거라고 미처 생각지도 못했어. 그래, 너도 결국 오메가였군. 그랬어, 그런 거야.”

자조하듯 읊조리는 말에 노아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 오해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여기에 오해가 어디 있지? 네가 다른 놈의 애를 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에요. 이, 이 아이는….”

“왜? 그 애가 내 애라는 말이라도 하려고?”

하하하. 갑자기 알렉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그는 한참을 웃어댔다.

“알, 알렉스. 제발….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당신, 당신 아이예요! 거짓말이 아니….”

“그 입 닥쳐!”

노아의 팔을 움켜잡고 몸을 숙인 그가 이를 악물었다.

“네 목숨이 아깝다면 더는 말하지 마. 네가 하는 말 따위 믿을 것 같아?”

“알렉스….”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는 상처받은 짐승 같았다. 심장이 덜컥거렸다. 그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이 노아를 고통스럽게 했다.

“알렉스, 아니에요, 거짓말 아니…. 그날…, 러트가 갑자기 온 그날에….”

더듬대며 어떻게든 그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가슴이 콱 막힌 것 같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그의 일그러진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기억이 없으니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어? 최악이군. 넌 정말, 저질이야. 상황 모면하려고 아무 말이나 지껄일 생각은 하지 마. 이젠 두 번 다시 안 속으니까.”

그에게 잡힌 팔이 아팠다. 통증으로 욱신거렸지만, 노아는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노아를 향해 상체를 완전히 숙인 알렉스가 으르렁거리며 속삭였다.

“잘 들어. 빌어먹을 네 알파가 누군지는 몰라도 내 눈에 띄지 않기를 기도해. 내 눈에 띄는 날, 그 자식의 장례를 치러야 할 테니까.”

그가 노아를 밀쳤다. 노아의 몸이 휘청하고 침대에 부딪혔다.

“알, 알렉스….”

알렉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노아는 휘청이는 몸을 추스르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알렉스! 제발…!”

쾅!

그러나 노아의 바로 코앞에서 문은 닫혔다.

고여 있던 눈물이 어느덧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몸이 무너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노아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상처가 제 가슴을 후벼 팠다.

어떡해…. 어떡하면 좋지….

처음부터 그에게 말했더라면, 피하지 말고 제대로 말했더라면 적어도 그를 상처 주지는 않았을 거다.

그가 줄 상처만 생각했던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이 고스란히 제게 되돌아왔다.

가슴이 턱턱 막히는 이 고통을 어째야 할지 노아는 알 수 없었다.

“어? 노아 씨!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수속을 마친 조엘이 문 앞에 주저앉은 노아를 부축했다.

“조엘! 알렉스는요? 그는 어디 있어요?”

“네? 대표님이요?”

“그에게 설명을, 설명해야 해요. 오해하고 있단 말이에요.”

“잠깐만, 노아 씨? 좀 진정하시고 일어나세요. 왜 이러고 있어요. 두 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조엘은 매달리는 노아를 부축해 침대로 이끌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일어나는 노아를 다시 눕혔다.

“내가 배신한 거 아니에요. 그날, 전 집으로 돌아간 게 아니에요. 가, 가려고 했는데…, 알렉스가 붙잡았어요. 그래서, 그래서…. 이 아이, 알렉스 아이예요. 하지만 그는 믿지 않아요. 어떡해요? 나 어떡해요?”

조엘에게 매달려 노아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띄엄띄엄 끊어지는 내용을 조엘은 간신히 알아들었다.

그럼 그날 노아가 집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대표님과 밤을 보냈다는 얘긴데….

덜덜 떨며 필사적으로 설명하는 노아를 다독이며 조엘은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를 불렀다.

“일단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진정해요. 흥분을 가라앉혀요. 임신했으니 조심해야죠.”

조엘은 노아의 병실로 오기 직전,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 스친 고용주의 이상한 행동을 이제야 이해했다.

불러도 못 들은 것처럼 굴더니 못 들은 게 맞았구나. 이런 소식을 들었으니 제정신일 리가 없지.

흥분한 노아를 눕힌 간호사는 닥터 셰먼을 호출했고, 잠시 후 의사가 달려왔다.

“지금 너무 흥분한 것 같습니다. 좀 진정시켜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조엘. 제발, 알렉스에게 알려 주세요. 당신 얘기라면 알렉스도 믿을 거예요.”

“헌트 씨. 일단 누우세요. 안정을 찾으셔야 합니다.”

의사가 자꾸만 일어나려는 노아를 억지로 눕혔다. 임신 초기에 큰 영향이 없는 안정제를 급히 주사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줄줄 눈물만 흘려 대던 노아도 잠시 후 눈꺼풀을 느릿하게 움직이더니 곧 잠이 들었다.

“임신했는데 안정제 괜찮은가요?”

“네. 극초기라 태아에는 영향 없는 걸로 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조엘은 잠이 든 노아를 내려다보았다.

“선생님. 근데 정말 이분이 임신했나요?”

“네. 보호자 분은 대체 어딜 가셨어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설명했는데.”

뾰족하게 날 선 닥터 셰먼의 추궁에 조엘은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갑자기 바쁜 일이 있으셔서…. 근데요, 임신한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열흘 정도 됐습니다. 초음파로는 아직 확인이 안 되고요.”

“아, 네. 열흘….”

열흘 전이면 취임식 때와 날짜가 겹친다. 노아가 바람피울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전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난 고용주를 설득해야 하는 건 제 역할이었다.

역시 휴가를 받아야 했어.

조엘은 밀려오는 피로감에 안경을 벗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한 잔 더.”

거칠게 잔을 내려놓으며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바텐더는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알렉스를 살피다가 다시 잔에 보드카를 따랐다.

벌써 한 병 가까이 보드카를 마셔 댄 손님의 얼굴에는 취기가 하나도 없었다.

채워진 잔을 알렉스는 말없이 단숨에 비웠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독주를 음미할 새도 없이 그는 다시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으며 더 달라고 말했다.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얼마나 더 마셔야 이 좆같은 일을 잊을 수 있을까.

바보 같았다. 노아를 순수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멍청한 자신은 또다시 오메가에게 배신을 당했다.

오메가가 얼마나 지독한 존재인지를 까맣게 잊고 노아를 믿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의 경계심을 허물어뜨렸다. 작고 연약하고 때로는 순수하고 소심한 노아에게 마음을 빼앗길 뻔했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백하던 그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떠올리는 순간 잔을 꽉 움켜쥐었다.

그건 거짓이었다. 제 어머니가 아버지를 농락한 것처럼 진심이라곤 한 톨도 없는, 그저 입에서 뱉어진 쓰레기에 불과했다.

속이 온통 진창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참담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없었다.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발끝까지 차가워졌다.

내 아이라고? 하.

헛웃음을 터트리며 알렉스는 또다시 잔을 비웠다.

기억하지 못하는 그 밤을 핑계 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떻게 감히 내 아이라고 말할 수가 있지?

가슴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노아가 딴 새끼의 아이를 뱄다.

순진하고 수줍어하는 얼굴로 정체도 모르는 알파 놈에게 안기는 걸 생각하자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자신이 그날 밤 노아를 안았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알렉스는 제 머릿속을 휘젓는 생각을 지워 버리려고 술을 마셨다.

온몸의 혈관이 술로 뒤덮이도록 그는 밤새 바에 앉아 술을 퍼부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 *

입원한 이후 노아는 알렉스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매일매일 혹시나 알렉스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가 실망하기를 수십 번. 노아도 이젠 서서히 지쳐 가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그의 페로몬이 은은하게 공기 중에 섞여 노아를 감쌌다. 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여기에 오지 않았으니까.

조엘이 곤란한 표정으로 병실로 들어오는 순간 노아의 어깨는 축 처졌다.

“미안해요. 오늘도 대표님은 바쁘셔서….”

“아니에요. 그보다 알렉스는 괜찮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요즘 너무 일만 하셔서 직원들이 죽는소리하긴 하는데, 일단 겉보기엔 건강상 문제는 없으세요.”

뭐, 매일 밤 술에 절어 있긴 하지만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지.

조엘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태연한 척 굴었다.

“네…. 다행이네요.”

길게 늘어지는 대답에는 실망만이 가득했다. 고개를 떨군 노아를 내려다보는 조엘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임신 초기에 조심해야 할 텐데, 환자의 안색이 너무 나빴다. 시트를 꽉 움켜쥔 손을 보면서 조엘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아! 혹, 혹시 말씀은 해 보셨어요? 제, 제가 거짓말 한 거 아니라고…. 그래도 조엘 얘기는 귀 기울여 들을지도 모르잖아요.”

노아는 퍼뜩 생각이 난 듯 얼굴을 들고 물었다. 물론 이 말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게…. 미안합니다. 저도 노력은 해 봤는데….”

“그래요…. 그렇군요….”

또다시 노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제 정말 희망이 없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영원히 알렉스를 볼 수 없는 건가.

노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침울한 노아를 내려다보는 조엘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노아의 결백을 밝히려면 제일 확실한 건 호텔 CCTV였다. 펜트하우스에는 프라이버시 문제로 고용주가 일부러 호텔 측에다 폐쇄하라고 한 터라 확인할 수 없지만,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CCTV는 멀쩡하므로 그것만 확인해도 노아가 언제 펜트하우스를 벗어났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고용주의 요구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일개 비서인 자기 능력으로는 호텔에다 CCTV 영상을 보자고 할 수가 없었다. 정작 이걸 허락 안 하고 있다는 게 문제지.

‘오메가 수작에 너도 넘어간 거야? 그딴 거짓말에 휘둘릴 거면 당장 때려치워!’

아…. 휴가가 절실하다.

한바탕 한탄을 늘어놓고 싶지만, 노아를 상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조엘은 노아가 걱정하지 않도록 부러 부드러운 표정을 했다.

“그보다 몸은 좀 어때요?”

“다들 잘 돌봐 주세요. 닥터 셰먼도 틈날 때마다 오셔서 말동무해 주시고….”

“다행이네요. 혹시 필요한 건 없습니까? 다음에 올 때 사다 드릴게요.”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괜찮다고 말하려던 노아는 돌연 조엘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퇴원하면 안 될까요? 지금은 딱히 아픈 곳도 없고, 괜히 병실 차지만 하는 것 같아서요….”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주치의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하지 않겠어요?”

“네. 그렇죠….”

노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하고 꺼내 본 것뿐이었다. 닥터 셰먼에게도 이미 물어봤지만 안 된다고 했다.

페로몬 수치가 안정될 때까진 퇴원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아! 혹, 혹시 이 일로 계약이 깨지거나, 이, 이혼하자는 얘기는 없으세요?”

혼전 계약서 내용을 상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나 분명 바람피우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왜 이제야 생각난 걸까. 알렉스가 이 일로 지금 이혼하자는 거면,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대로 영영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로 헤어지는 건가.

“그 얘긴 꺼내지 않으셨어요. 아마도… 생각 못 하고 계실 거 같은데요? 그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초조해하던 노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와 헤어지는 게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회장님의 유언 때문에라도 지금 고용주가 노아와 이혼할 수는 없었다.

혼전 계약서는 어디까지나 안전장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고용주가 혼전 계약서 따위를 떠올리기나 할까?

알렉스는 인정하지 않지만, 그는 노아에게 분명 남다른 마음이 있다. 정말 계약뿐인 관계라면 밤새 술을 퍼마실 게 아니라, 계약 불이행 명목으로 괴롭힐 방법을 모색했겠지.

오메가 혐오증에 걸린 고용주는 절대로 자기 마음을 인정하지 않을 거다. 그 때문에 노아는 수없이 마음을 다치겠지.

조엘은 앞으로 벌어질 일이 떠올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대놓고 내색하진 않지만 노아는 내내 알렉스를 기다리고 있다. 문밖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잔뜩 찬 얼굴이 그 증거였다.

어쩌나. 제발 호텔 건만이라도 허락해 줬으면 좋겠는데….

노아를 위해서라도 욕먹을 각오를 하고 한 번 더 물어봐야겠다.

조엘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이제 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머니에 넣어 뒀던 핸드폰이 타이밍 좋게 울렸다.

“네. 매디슨입니다.”

-어디세요? 얼른 좀 오세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보고서 올려야 하는데, 저흰 무서워서 못 들어가겠어요….-

또 알렉스가 아랫사람들 쥐 잡듯 잡아 대는 모양이었다. 조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 갈 겁니다. 30분만 기다리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이제 가시려고요?”라고 노아가 물었다.

“네. 일이 바쁘다고 하네요. 또 들를게요. 딴생각은 마시고 지금은 무조건 좋은 생각만 하세요. 임신 초기에는 스트레스가 치명적이니까요.”

아쉬움이 가득한 노아를 두고 밖으로 나온 조엘은 골치 아픈 고용주를 상대하기 위해 바삐 걸음을 움직였다.

병실이 텅 비어 버린 것 같다. 노아는 닫힌 문을 한참을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저 문을 아무리 보고 있어도 알렉스가 올 일은 없는데도 미련하게 구는 제 행동에 힘없이 웃었다.

문득 카일이 보고 싶었지만, 상냥한 제 친구가 얼마나 걱정할지 알기에 쉬이 연락할 수가 없었다.

노아는 내내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산책이라도 하고 와야지.

막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으려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아는 멈칫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다급하게 문으로 달려갔다.

“알렉스? 혹시 알렉스…,”

벌컥, 문을 열자마자 의외의 사람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이브…?”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 미안하네요.”

머쓱하게 웃는 그녀의 입가에 시퍼런 멍 자국이 선명했다.

“나, 들어가도 돼요?”

“아, 네. 들어오세요.”

멍하니 상대를 올려보던 노아는 허둥지둥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 이쪽으로….”

병실에 마련된 소파에 이브가 앉았다. 어색하게 그 앞에 서 있던 노아도 우물쭈물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여긴 어떻게….”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찾아온 거예요.”

“제 입원은 그때 그 일 때문이 아니에요.”

노아는 손을 내저었다. 물에 빠졌던 후유증은 이미 사라졌다. 자신이 입원한 건 오직 페로몬이 불안정했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제대로 인사도 못 했잖아요.”

괜찮다는 노아의 말에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벤자민은 알렉스의 손에 맞아 죽었을 거예요. 숨겨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네? 아, 아니… 그건….”

“죽을 뻔한 사람에게 찾아와 이러는 거 되게 뻔뻔한 거 아는데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어요. 너무 고맙고 미안해요. 뭐라도 보상하고 싶어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전, 다 잊었어요. 그러니 이브도 잊어버리세요. 전 괜찮아요.”

“어떻게 그래요. 내가 도움을 받았으니 당신의 어떤 요구라도 받아 줄 의무가 있어요.”

괜찮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브는 진심이었다. 노아는 이 곤란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저…, 벤자민은 어때요? 괜찮나요?”

씁쓸한 듯 입가를 꿈틀거리더니 이브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벤자민과는 헤어졌어요.”

“네?”

“나 때문이에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니까 예민한 벤자민이 그 성질을 당신한테 부린 거예요. 하지만, 벤자민은 몰랐어요. 당신이 수영 못 한다는 거. 정말로 죽일 의도 같은 건 없었어요.”

약혼자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쓸 정도로 좋아한 게 아니었나?

노아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그녀는 곧 말을 이었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알렉스의 배우자를 죽일 뻔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으니까요.”

“그럼 왜… 대신 나선 거예요?”

“그래도 한때나마 사랑했던 사람이니까요. 사랑이 식었다고 맹수 아가리에 벤자민을 밀어 넣을 수는 없잖아요. 그 애는 약하지만, 난 맷집 하나는 타고 났거든요.”

“엄청 아파 보이는데….”

“이 정도면 알렉스가 엄청 봐준 거예요. 그래도 친구라고 두 대로 끝났잖아요?”라며 이브가 웃었다.

알렉스가 끝낸 게 아니라 조엘이 필사적으로 말린 게 이유였지만, 노아는 그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아픈 사람 너무 오래 붙잡고 있네요.”

이브가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자요. 받아요.”

“이게 뭔가요?”

“은혜 갚겠다고 한 거 거짓말 아니에요. 우리 레너드가에서는 도움을 받았으면 은혜는 무조건 갚아야 한다고 가르치거든요. 뭐든 좋아요. 도움이 필요하면 나한테 연락 줘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사 달라고 해도 되고, 싫은 사람 망하게 해 달라고 해도 돼요. 어떤 부탁이라도 괜찮아요. 알렉스하고는 다른 분야지만 나도 꽤 능력 있거든요.”

받지 않겠다고 하면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아서 노아는 얌전히 그녀의 명함을 받았다.

“꼭 연락 줘요. 언제든 괜찮아요. 이 번호 비상연락망이니까.”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어쩐지 지쳐서 노아는 산책을 포기하고 창가로 갔다. 창밖의 풍경은 푸르고 화창했다. 어느덧 여름이 성큼 다가와 사람들의 옷차림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창턱에 엉덩이를 걸친 채 노아는 하염없이 밖을 내려다보았다.

오늘도 역시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은 어느새 병원 앞이었다. 낮 동안엔 괜찮았다. 일하다 보면 잡생각은 사라지니까. 하지만 밤이 되면 알렉스는 매일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배 속 가득 술을 들이붓고 마셔도 머릿속은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

얼굴도 모르는 알파 놈한테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가, 그다음엔 노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번 떠오른 형상은 아무리 술을 들이부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병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정을 넘긴 지 한참 지난 시간, 병원도 어느덧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는 시간이었다.

알렉스는 매일 왔던 익숙한 길을 걸었다. 이윽고 VIP 병실 앞에 멈춘 그는 문 앞에 서서 한참을 노려보기만 했다.

알렉스는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옆에 희미한 수면 등만이 켜진 병실은 고요하기만 했다. 숨죽인 채 그곳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노란 불빛 아래 노아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뒤틀리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한 손에 다 가려질 정도로 작은 얼굴, 조밀하고 섬세한 이목구비를 내려다보는 알렉스의 잿빛 눈동자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문득 치달아 오르는 분노가 알렉스를 부추겼다.

눈앞에 잠든 이는 자신을 기만한 오메가다. 아버지를 농락했던 제 어머니와 똑같은 오메가.

감히 제 앞에서 당신 아이를 가진 거라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내뱉던, 바로 그 오메가.

도톰한 저 입술로 좋아한다고 말해 놓고, 단숨에 저를 지옥에 처박아 버린 상대였다.

가슴이 찢기는 고통이 일었다. 깊이 잠든 노아를 내려다보는 알렉스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담겼다.

노아가 미웠다. 그리고 이 모든 게 거짓이기를 바랐다.

노아가 다른 이의 아이를 뱄다는 사실이 사정없이 그를 할퀴었다. 아이 아빠가 눈앞에 있다면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었다.

제가 느낀 이 고통을 그놈에게도 똑같이, 아니 이보다 더한 고통을 안기고 싶었다.

알렉스의 잿빛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평온한 노아를 흔들어 깨워 제 가슴 속에 가득한 분노를 쏟아내고 싶었다.

그의 상체는 점점 노아에게로 기울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내면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데 티 하나 없는 매끈한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왜. 왜 그랬어? 왜 날 배신했어?!

조심스럽던 손길은 이내 거칠게 변했다. 도톰한 입술이 밀리도록 엄지에 힘을 꾹 주었다.

“으….”

노아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잠시 몸을 뒤척이더니 천천히 긴 속눈썹을 말아 올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알렉스를 알아본 노아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알렉스…?”

그 순간 노아가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알렉스! 와, 왔어요?”

두 눈동자에 푸른빛이 감돌고 얼굴 가득 생기가 어렸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알렉스가 병실에 와 줬다는 게 믿기지 않아 노아는 제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언, 언제 오셨어요? 바쁘시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좀 괜찮아요?”

노아는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해 목소리를 떨며 말을 걸었지만, 상대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알렉스?”

무심코 그에게 손을 뻗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물끄러미 서 있던 알렉스가 닿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몸을 비켰다.

그를 잡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노아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기쁨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조명 빛에 그림자 진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음영 진 얼굴은 어둡고 한없이 무감정했다.

저를 향한 눈빛에 담긴 게 무엇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날카로운 눈빛에 노아는 서서히 표정이 무너졌다.

조금도, 그는 나를 믿지 않는구나.

마치 석상처럼 우뚝 선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숨 막힐 정도로 길고 긴 침묵이 이어지고 난 후 드디어 그의 입이 열렸다.

“누구야?”

성대를 긁는 듯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노아는 그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알렉스….”

“내 애라는 그딴 개소리 집어치워. 애 아빠가 누구야?”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노아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사실을 말하면 그는 더더욱 화를 낼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언제 만난 거야? 결혼 전에 만났어? 아니면 결혼 후에? 요트에서 애 가지고 싶다고 한 것도 다 알고 한 얘기지?”

“아니에요.”

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이 바짝 선 그의 눈빛이 사납게 일렁거렸다.

“그 새끼는 알아? 네가 임신한 거.”

“알렉스. 제발…, 제 얘기 좀…. 다른 사람은 없어요. 이 아이는….”

“누가 그딴 대답 듣고 싶다고 했어?! 그 새끼가 아느냐고 물었잖아!”

버럭 내지른 소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노아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알아요….”

“계약 끝나면 같이 살기로 했어? 이혼할 때까지 그놈은 기다린대? 하긴 그렇겠지. 조부가 줄 유산이 탐나겠지. 그 돈이면 아무것도 안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을 테니까.”

노아는 알렉스가 제 말을 믿어 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제 얘기를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심장이 아팠다. 너무 아파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 같았다.

“아니요…. 아마도, 그 사람은 그걸 바라지 않을 거예요.”

“하.”

노아의 대답에 알렉스가 짧은 비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들은 대답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알렉스는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깔끔하던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헝클어졌다. 이내 그는 병실을 서성거렸다. 그의 어깨는 잔뜩 화가 난 듯 딱딱했고, 내뱉는 숨은 거칠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분노가 묻어났다.

넓은 병실을 성난 사자처럼 서성대던 그가 돌연 노아에게 성큼 다가왔다.

“고작, 그딴 새끼 만나려고 날 속였어?! 제 새끼 밴 오메가를 버리는 놈을?!”

“버린 거 아니에요.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놈을 두둔하는 말에 알렉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는 노아에게 몸을 숙였다.

푸른 눈동자에 가득 고인 눈물이 알렉스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버린 게 아니면, 그럼 뭔데? 혹시 네 멋대로 아이 낳고 나면 그 새끼가 받아 줄 거 같아서 그래?”

아름다운 얼굴이 알렉스의 눈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애원하듯 매달리는 눈빛이 알렉스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좋아해요…. 알렉스, 좋아해요.”

달콤하게 들리는 이 말은 독약처럼 알렉스의 귀를 적시고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파도가 되어 알렉스에게 부딪쳤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노아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너는, 대체 날 어떻게 할 셈이야. 내가 고작 그딴 고백에 넘어갈 것 같아?”

크고 긴 그의 손은 노아의 뒷덜미를 완전히 감싸 목 뒤에서 교차했다. 저를 뒤흔드는 말을 쏟아내는 입술을 검지로 꾹 눌렀다.

노아의 고개가 위로 완전히 젖혀졌다.

노아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믿어 줘요. 다른 사람은 없어요.”

물기 가득한 눈동자가 알렉스의 마음을 흔들었다. 거짓인 걸 뻔히 알면서 알렉스는 믿고 싶었다. 오메가 따위 믿을 족속이 아닌 걸 아는데도, 이게 달콤한 독인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젖은 눈동자를 믿고 싶어졌다. 그런 제 마음을 부정하고 싶었다.

알렉스는 엄지를 움직여 노아의 아랫입술을 계속 문질렀다.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의 온기가 손가락을 통해 전해졌다.

이 달콤한 입술을 그 새끼는 맛보았겠지. 꺾일 듯 연약한 저 목덜미를 애무하고, 자신은 본 적도 없는 은밀한 곳을 그 자식은….

노아의 목을 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약한 신음이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노아의 배 속에 그 자식의 아이가 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노아의 몸에 부정의 증거가 남았다.

아이가 없다면, 이 모든 일을 없던 일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좋아. 믿어 주지. 네 말대로 그 아이가 내 애라면, 난 아이 따위 원치 않아.”

좆같은 이 감정을 털어 내야 한다. 불확실한 이 감정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온전히 알렉스를 보고 있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고여 있던 눈물이 기어이 뚝뚝 떨어졌다.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면, 선택해. 그 아이를 포기하든가, 날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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