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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뺨을 때렸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노아는 제 뺨을 두 손으로 가볍게 쳤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는 걸 알 정도로 뺨이 뜨끈했다.
조금 전 제 몸을 더듬던 손길과 감촉이 떠올랐다. 노아는 누가 볼세라 정신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노아의 걸음은 어느새 후미로 향했다. 요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반사되어 잔물결이 일렁거리는 풍경 속에서 누군가 난간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어? 노아. 방에서 쉬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담배 피우고 있는 이브였다.
“네…. 잠, 잠시 바람 쐬러 나왔어요.”
“다쳤다더니 괜찮아요? 많이 다친 건 아닌가 봐요? 알렉스가 심각하게 말하길래 아예 못 움직이는 줄 알았더니.”
“그냥 좀 찢어진 게 다예요….”
그녀가 말하기 전엔 아픈 것도 몰랐다.
노아는 머쓱함에 볼을 긁적거렸다. 손가락에 걸린 담배를 깊게 빨며 그녀는 다시 몸을 숙여 난간에 팔을 걸쳤다.
묵묵히 담배 피우는 이브의 얼굴이 어딘지 근심이 가득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탁탁 담뱃재를 털어 대며 이브가 고개를 돌렸다.
“뭐…. 그냥 이런저런 생각 하느라 나온 거예요.”
수면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옆모습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노아는 굳이 그녀의 사색을 더 방해하고 싶진 않아서 가만히 일렁이는 물결만 바라보았다.
한참을 두 사람은 후미에 서서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조용하던 그녀가 툭 하니 질문을 던졌다.
“평생 함께할 사람이라는 느낌이란 게 있을까요?”
“……?”
“알렉스랑 결혼 결심한 거요. 뭔가 확신이 있으니까 결혼한 거 아닌가요?”
그녀가 묻는 말에 노아는 멈칫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리 결혼은 그저 계약일 뿐이고 돈 때문에 덥석 결혼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노아가 망설이는 사이 이브가 말을 이었다.
“난 확신이 없어요. 벤자민을 사랑하는 건 맞는데… 평생 함께할 자신은 없거든요. 이런 얘기 친구들한테 하기엔 좀 어색하기도 하고….”
“저, 저는….”
노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대답하기를 포기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기엔 어려운 주제였다. 심지어 제 결혼은 진짜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어 노아는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내가 괜한 소릴 했네. 내가 한 말은 잊어요. 밤바다에 홀렸나 봐요.”
끝이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를 깊게 빤 이브는 마지막 담배 연기를 내뿜고 탁탁 손가락으로 불씨를 털었다.
“밤바람이 차니까 노아도 들어가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선실 쪽으로 이브가 움직였다. 그 뒷모습이 어째선지 몹시 쓸쓸해 보였다.
“저, 저기….”
노아는 충동적으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
“모든 사람이 같은 이유로 결혼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걸음을 멈춘 이브가 잠시 후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어딘가 후련한 표정으로 사라진 이브를 쳐다보던 노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울어진 초승달이 갑판을 비추고 있었다. 은은하게 달빛을 비추는 달을 감상하던 그때였다.
왼쪽 시야 끝에 누군가 나타났다.
시선을 돌리자마자 벤자민이 성난 표정으로 노아에게 달려왔다.
“아…? 벤자민? 이브는 방금….”
“너 뭐야?”
이브가 안으로 들어갔다고 말하기도 전에 벤자민이 먼저 말을 잘랐다.
“네?”
“왜 내 약혼자랑 단둘이 있어? 단둘이 만나 얘기할 정도로 두 사람이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
“무슨…? 오해예요. 그냥 밤 산책 나왔다가 이브와 마주친 거예요.”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방금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잠깐 마주쳐서 인사 나눈 것뿐이에요.”
“인사? 다쳐서 식당에 나오지 못한다던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는데 나더러 오해라는 거야? 아하. 다쳤다는 것도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 내려는 수작이지? 이것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남들은 속았을지 몰라도 난 이딴 수작에는 안 속아! 착한 이브가 널 걱정해 준 거에 우쭐해진 거야? 그런 거로 이브가 너한테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지?”
노아는 적대감이 가득한 그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이런 자리에 끼어 있다고 해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데, 넌 그래 봤자 골드 디거야. 돈에 몸이나 파는 남창 주제에.”
날카롭게 내뱉어지는 비난이 노아를 사정없이 할퀴었다.
“그 반반한 낯짝으로 알렉스 꾀고 나니까 이브도 어떻게 될 것 같았어? 웃기지 마!”
체격이 비슷한 벤자민이 위협하듯 가까이 다가왔다.
“천박한 너랑 달리 여기 모인 사람들은 고상해서 너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뿐이야. 사람들이 상냥하게 대해 준다고 네 급이 달라졌다고 생각해? 하. 착각도 가지가지야. 네가 알렉스랑 결혼한 게 아니라면 언감생심 이런 자리에 낄 수나 있었겠어?”
노아는 벌레라도 보는 것 같은 그의 시선에 상처받았다.
제게 상냥했던 사람들의 진심이 이런 것이었을까. 아니면 벤자민 혼자만의 진심일까.
웃고 떠들고 자신을 배려해 주던 알렉스의 친구 중 누군가는 벤자민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벤자민의 눈에 비친 노아는 버러지보다 못한 존재였다. 상처받은 마음이 욱신욱신 저렸다. 노아의 안색이 창백해져 갔다.
서슬 퍼런 그의 기세에 눌려 노아는 점점 뒷걸음질 쳤다.
“…….”
“순진한 표정으로 눈꺼풀 몇 번 나풀거리면 이 세상 알파가 다 네 것이 된 거 같지?”
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생각 같은 건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노아의 허리께에 차가운 금속 난간이 닿았다.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제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그런 상태로 벤자민이 입매를 비틀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창 주제에 욕심도 많지. 너 따위가 가진 게 얼마나 가치 있는 건지도 모르면서 남의 것이나 탐하고…. 내가 이래서 이런 것들을 싫어해. 멍청하면서 주제도 모르거든.”
그의 손가락이 노아의 이마를 툭툭 밀어내며 경멸 어린 말을 쏟아 냈다.
몸을 한껏 뒤로 빼는 노아를 보는 벤자민의 속이 뒤집혔다. 벤자민을 좀먹고 있던 불안이 그를 더욱 비틀리게 했다. 관계의 불안정함에 지쳐 있던 그는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다.
쥐뿔도 없는 이 볼품없는 골드 디거조차 제 알파와 결혼했는데, 왜 자신은 사랑하는 알파와 결혼하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다.
예쁜 얼굴로 이브의 관심을 끈 이 오메가에게 화풀이한 건.
갈 곳 잃은 이 분노를 누구에게든 풀어야 했다.
불안하게 난간에 기대선 노아를 확인한 벤자민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노아의 이마를 쿡쿡 찌르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뺨을 톡톡 두드렸다.
“네 처지가 뭔지 넌 좀 더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어.”
벤자민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손은 위태롭게 몸을 젖히고 있던 노아의 어깨를 툭 밀었다.
“찬물을 뒤집어쓰고 나면 정신이 들겠지.”
휘청, 노아의 몸이 기울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기도 전에 시야가 흔들렸고 그대로 추락했다.
노아가 떨어지든 말든 벤자민은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휙 몸을 돌려 멀어졌다.
첨벙―!
차가운 바닷물에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었다. 공포심이 노아를 일시에 덮쳤다.
“살, 살려…, 어푸, 누가 좀…!”
두려움에 사로잡힌 노아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알렉스가 낮에 가르쳐 주었던 수영 방법 따윈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만이 가득했다.
“제, 발…! 누…. 푸흐…! 살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몸은 점점 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입과 코로 바닷물이 사정없이 들어왔다. 콜록대기도 힘들었다. 숨을 내쉬려고 할 때마다 바닷물을 삼켰다.
온 힘을 다해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아무도 듣지 못할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제발 누구라도 도와줘요….
밤바다는 차갑고 어두웠다. 허우적댈수록 팔다리에 힘이 빠졌다. 몸은 점점 무거워졌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안간힘을 다해 발을 굴렀지만, 몸은 점점 가라앉기만 했다. 숨이 막혔다. 지나치게 많은 바닷물을 삼켰다.
노아는 살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광활한 바닷속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몸이 점차 바닷속으로 끌려 내려갔다. 팔다리를 허우적대기도 어려웠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간신히 뜬 눈 사이로 수면 위의 빛이 일렁거렸다.
알렉스….
눈을 점차 감겼다. 이렇게 죽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노아의 인생은 늘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죽음의 순간에 노아는 알렉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노아는 깨달았다.
자신은 알렉스를 좋아하고 있노라고.
차가운 바닷물에 잠겨 의식을 잃어 가며 노아는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그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노아…!-
완연한 암흑 속으로 의식이 가라앉기 직전, 그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병실을 지키고 앉은 알렉스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검은 머리에선 연신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가 앉은 자리 밑에는 젖은 옷에서 떨어진 물웅덩이가 고였다.
“저… 대표님. 우선 옷이라도 갈아입으시는 게 어떠십니까?”
걱정 어린 조엘의 권유에도 알렉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창백한 얼굴의 노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응급처치는 끝난 상태였다. 다행히 숨이 끊어지기 직전 노아를 구한 터라 심각한 손상은 없었다고 의사는 말했다.
급하게 시도한 심폐소생술로 폐에 차 있던 물을 어느 정도 토해 낸 게 노아를 살렸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때 일을 계속 떠올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노아는 죽었을 것이다.
그는 노아에게 밀쳐지고 난 후 잔뜩 흥분한 몸을 가라앉히려 욕실에서 한참이나 찬물을 뒤집어쓰느라 시간을 보냈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로 몸이 차갑게 식고 나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하마터면 노아를 안을 뻔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위스키를 꺼내 병째 들이켰다.
그러고 뛰쳐나간 노아가 꽤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가야겠다고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고 외치는 승무원의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가자 친구들이 무슨 일이냐고 하나둘씩 객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선장이 요트의 모든 등을 환하게 켰다.
밖으로 나오는 얼굴을 빠르게 확인하면서 알렉스는 묘하게 불안해졌다. 노아가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는 단박에 후미로 달려갔다. 빠르게 주변을 훑었지만 역시나 노아가 없었다.
그때였다. 이브가 달려와 노아가 물에 빠졌다고 말했다. 구조작업이 어쩌고 하는 말을 다 듣지도 않았다.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알렉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노아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요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바다를 비췄다.
알렉스는 그 빛에 의지해 필사적으로 잠수해 노아를 찾았다. 몇 번이고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길 반복했다. 마침내 노아를 발견하곤 깊이 잠수해 사지를 축 늘어뜨린 노아를 건져 냈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일었다.
그때의 기억이 또다시 밀려와 알렉스의 표정이 무너졌다.
손끝이 계속 저려 알렉스는 몇 번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는 노아를 바라보며 알렉스는 수건을 가져다준 조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봤어?”
“목격자를 수소문 중입니다만 근무하던 승무원이 첨벙 소리를 듣고 달려 나갔다고 합니다.”
일렁이는 알렉스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때의 상황을 몇 번이고 떠올렸다. 당시엔 그저 노아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엔 하지 못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요트, 무슨 일이냐고 방에서 나오던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그리고 갑판으로 달려갔을 때 가장 먼저 알렉스의 눈에 띈 사람은 이브였다.
“이브는 노아가 빠진 걸 언제 알았대?”
“레너드 씨는 노아와 후미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다시 밖으로 나왔다가 승무원의 외침을 듣고 갑판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방으로 들어간 이브가 왜 다시 밖으로 나왔지? 그 이유는 물어봤어?”
“아니요.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음산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알렉스는 고요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이브 불러와.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 전엔 아무도 못 돌아간다고 전해.”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알렉스는 노아를 데리고 헬기로 먼저 병원에 왔고 요트는 그대로 선착장으로 향했다.
다른 이들은 선착장 근처 호텔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조엘이 밖으로 나가고 알렉스는 여전히 노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눈을 안 떠?
알렉스는 팔을 뻗어 노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매끄러운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노아.”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그렇게 혼자 뛰쳐나갔을 때 뒤따라 나가지 않은 걸 후회했다.
자신의 요트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과실이었다. 언제 어느 때고 무슨 일이든 벌어지기 마련이다.
알렉스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더더욱 간절해졌다. 가슴이 욱신욱신 저렸다.
크고 푸른 눈동자를 보고 싶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할 말을 몇 번이고 삼켰던 모습도 보고 싶었다.
나붓대던 긴 속눈썹도 지금은 눈두덩이에 그림자를 만들어 낼 뿐, 병원에 도착하고서 쭉 감겨 있었다.
그나마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알렉스를 안심하게 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따스한 온기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왔을 것이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알렉스는 미칠 것 같았다. 당장 일어나라고 노아를 뒤흔들고 싶었다.
“노아. 일어나. 일어나기만 해. 그럼 돼. 화 안 낼게. 네가 원하는 거 다 들어줄게.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줄 알아? 그러니 어서 눈 떠. 빨리 눈 떠서 괜찮다고 나한테 말해.”
불안을 지우지 못한 손길이 연신 노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알렉스는 침대 곁에 바짝 붙어 앉아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쿵쿵 뛰는 심장박동이 귀를 통해 전해졌다.
그 울림이 알렉스의 불안한 마음을 아주 조금이나마 달래 주고 있었다.
* * *
“상태는 어때?”
“심각한 손상은 없다고 합니다만… 아직 깨어나질 않으셔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조엘과 함께 병원으로 들어서는 이브의 표정이 어두웠다.
알렉스가 부른다는 말에 그녀는 어느 정도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이건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져야 할 짐이었다.
“대표님. 레너드 씨가 도착하셨습니다.”
조엘의 뒤를 따라 병실로 들어간 이브의 시선은 침대 쪽을 향했다.
환자에게 몸을 숙이고 있던 알렉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두 눈이 시뻘게진 상태였다. 늘 깔끔하던 알렉스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바닷물에 뛰어들었던 차림 그대로, 옷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고 소금기 머금은 머리칼은 버석하니 축 늘어져 있다.
하지만 표정만은 흉흉한 게 누군가를 죽일 것만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이브는 여전히 누워 있는 노아를 쳐다보았다. 손에는 링거가 꽂혀 있고, 안색은 영락없는 환자의 그것이었다.
그 모습에 이브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갑판에서 노아와 마주쳤다고 들었어. 무슨 얘기 했어? 아니다, 내가 궁금한 건 이게 아니야. 물에 빠진 사람이 노아라는 거 어떻게 알았어?”
쉬지 않고 쏟아 내는 알렉스의 질문에 이브는 노아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똑바로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미안. 내가 말할게.”
알렉스의 질문에 이브는 빠르게 사과했다.
“사고였어. 노아가 수영 못 한다는 거 몰랐어.”
알렉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이내 눈빛이 사나워졌다. 전광석화처럼 알렉스는 단숨에 이브에게 다가갔다.
멱살을 틀어쥐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말해!”
“장난이었어. 다른 녀석들한테 하던 것처럼 장난으로 그런 거야. 하지만 정말 몰랐어. 노아가 그렇게 쉽게 뒤로 넘어갈 줄은. 수영을 못 한다는 것도 몰랐어.”
정말 미안해. 이브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알렉스가 주먹을 날렸다.
퍽!
문가에 서 있던 조엘이 놀랄 정도로 큰소리가 났다.
알렉스에게 얻어맞은 이브의 입가가 찢어졌다.
“장난? 지금 장난이라고 했어? 죽을 뻔했어! 조금만 늦었더라도 죽었을 거야!”
화를 참지 못한 알렉스의 흉흉한 모습에 조엘이 화들짝 놀라 그에게 달려들었다.
“대표님! 진정하세요!”
조엘은 알렉스의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아 제압했지만, 길길이 날뛰는 알렉스의 기세가 워낙 사나워 역부족이었다. 팔을 뻗지 못하도록 막는 게 고작이었다.
“미안해. 사과로는 네 기분이 안 풀릴 거라는 거 알아.”
“레너드 씨! 피하세요! 그러다 맞아 죽어요!”
“놔! 이거 못 놔?! 매디슨! 이건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당장 놔!”
“안 돼요. 대표님! 전 시체 치우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조엘이 주먹을 휘두르려는 알렉스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병실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못 박힌 듯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이브가 얼마든지 맞겠다고 말해 조엘의 복장을 터트렸다. 그에 더욱 흥분한 알렉스는 조엘에게 잡힌 팔을 떨쳐 내는 게 불가능해지자 발을 휘둘렀다.
“제발 피하세요! 레너드 씨!”
알렉스의 발길질에 허리를 맞아 비틀하면서도 그녀는 반격은커녕 여전히 그 자리에 못 박혔다.
“이거 놔! 죽일 거야! 죽여 버리겠어!”
필사적으로 알렉스를 막아 내던 조엘이 버티지 못하고 그에게 밀려났을 때, 내내 잠들어 있던 노아가 깨어났다.
“알렉스…?”
아수라장이던 병실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길길이 날뛰던 알렉스도, 그를 말리려던 조엘도, 그리고 알렉스에게 얻어맞아 입가가 찢어진 이브도, 마치 정지 상태가 된 듯 멈췄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고요한 침묵 사이로 노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알렉스가 그대로 달려갔다.
“깼어? 괜찮아? 아픈 데는 없어?”
노아의 시선은 찢어진 입가의 피를 손등으로 훔치는 이브에게 닿았다.
이브와 눈이 마주쳤다.
‘말하지 말아요.’
이브가 소리 없이 말했다.
“넌 신경 쓸 거 없어. 괜찮은 거지?”
확인이라도 하는 듯 알렉스의 손이 연신 노아의 뺨과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노아는 어깨를 움츠리며 여전히 이브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세 깨달았다.
“이브가 그런 게 아니에요. 오해예요.”
“저 녀석을 감쌀 필요는 없어.”
“감싸는 게 아니에요.”
‘제발, 말하지 마요.’
이브의 눈빛이 간절해졌다. 그녀가 소리 없이 외쳤다.
“제가 발을 헛디딘 거예요. 휘청하려던 걸 이브는 잡아 주려고 했어요. 그러니 이브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제 잘못이에요.”
노아는 알렉스의 팔을 잡았다. 정말 아니라고. 이브의 잘못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왜 저 녀석을 감싸는 거야. 너 죽을 뻔했어. 그런데도 저 녀석을 두둔하는 거야?”
“두둔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브는 그냥, 죄책감에 저러시는 거예요. 이건 제 잘못이 맞아요. 그러니 이브한테 화내지 마세요.”
알렉스는 노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노아는 막무가내로 이브가 아니라고 말했다.
결국 진 건 알렉스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흥분하지 마.”
알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노아를 달래 침대에 다시 눕혔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이브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썩 꺼져 버려. 네 얼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알렉스는 이브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노아와 이브 사이에 오간 미묘한 눈빛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노아는 침대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번 다시는 알렉스를 보지 못하는 줄 알았다.
항상 깔끔하던 그가 드물게 엉망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옷은 온통 구겨져 있었다.
다 마르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은 것 같은 행색이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 들렸던 그의 외침이 그저 저만의 착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살짝 흐트러진 노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멈췄다.
“뭐가?”
이내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의 방향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갈 때가 있다는 걸 노아는 이번 일로 깨달았다. 이번에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또 언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남겨 둔 채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노아는 다시 꾸물꾸물 상체를 일으켰다. 누운 채로 제 마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왜 일어나? 누워 있어.”
일어나지 말라고 타박하면서도 알렉스는 착실하게 노아가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도왔다.
알렉스 덕분에 편하게 기대앉은 노아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잿빛의 어두운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면 동공 주변에 푸른빛이 맴돌아 마치 우주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그를 향해 뛰었다. 아아…. 역시 그렇구나.
이따금 제 속을 꽉 채우고 저를 들뜨게 하던 그것의 정체가 이거였다.
이렇게 마주하고 앉아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는 순간, 노아는 제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메가 따위는 싫다고 경멸하며, 가끔은 화를 내고 어떨 때는 자신을 매도하기까지 한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어째서 이 사람을 좋아하는지 자신도 모르지만 깨닫는 순간 이미 좋아하고 있었다.
감정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좋아해요.”
노아의 목소리는 아주 작게 떨렸다. 그가 싫어하리란 걸 알지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뭐?”
이게 무슨….
알렉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얼떨떨함과 당혹스러움이 한 번에 밀려왔다가 서서히 기쁨이 차올랐다. 하. 주제에 날? 노아가 날?
알렉스는 믿기지 않아서 되물었다.
“다시 말해 봐.”
“좋아해요.”
“다시.”
“좋아해요.”
반복적인 알렉스의 요구에도 노아는 똑같은 대답을 꺼냈다.
“믿을 수가 없는데….”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알렉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씰룩거리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죄송해요. 이런 얘기 싫어하시는 거 아는데 그냥…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절 좋아해 달라는 거 아닙니다. 그냥 제 마음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시선을 맞추었던 노아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동시에 그에게서 터져 나올 비난을 기다렸다.
노아를 바라보는 알렉스의 진지한 표정은 금세 허물어졌다.
노아가 날 좋아한다고?
되뇌는 순간 왠지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었다. 크게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가슴이 온통 달콤한 솜사탕으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난생처음으로 알렉스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벙긋거렸다. 늘 제어하던 페로몬을 맘대로 확 풀고 싶었다. 온통 단내가 풀풀 날 것 같은 이 기분에 흠뻑 빠지고 싶었다.
뭐, 노아가 날 좋아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 아무렴. 어디서 노아가 나처럼 완벽한 알파를 만나겠어?
환호성을 내지르고 발을 굴릴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알렉스는 헛기침했다.
“크흠….”
오메가를 싫어하긴 하지만 그래도 노아라면 뭐… 불가능하지도 않을 거 같고, 마음 넓은 자신이 배려해 줘야겠다고 막 생각하려던 그때, 차트를 든 의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 깨셨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눈치도 없는 새끼.
알렉스는 튀어 나가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픈 데는 없으세요? 목이 따갑다거나 속이 울렁거린다거나?”
“네. 괜찮습니다.”
침상 가까이 다가온 의사는 링거액을 조절하고는 노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다행히 응급 처치를 잘한 덕에 큰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하니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꼭 말씀해 주세요.”
“네.”
“그보다 배우자분의 요청에 따라 검사를 진행했는데요, 호르몬 수치가 좀 이상해서….”
“뭡니까? 심각한 병이라도 걸렸습니까?”
깜짝 놀란 알렉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의사가 하하,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축하드릴 일이죠.”
의아한 표정의 두 사람을 향해 의사가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이에요.”
그 순간 알렉스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