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3)

11.

조엘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노아는 바짝 얼어붙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알렉스가 언제 제 방문을 열고 들어와 화를 낼까 벌벌 떨며 이틀 내내 밤을 지새웠다.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제 방에 콕 처박혀 외출도 하지 않았다.

헨리와 루시가 종종 걱정스러운 얼굴로 방으로 찾아왔지만, 노아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피하는 것도 이제 끝이었다.

알렉스가 오지 않은 게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노아는 목을 가리는 니트를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안색은 더없이 창백했고, 끼니를 몇 번 거른 탓에 뺨도 한층 여위었다.

1층 응접실로 내려가는 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조엘은 아마도 알렉스의 전언을 가지고 온 거겠지. 계약을 어겼다고 배상하라고 하는 것일지도 몰라.

혼전 계약서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서로의 히트 사이클과 러트는 피하는 게 원칙이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노아 씨. 오랜만입니다.”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조엘이 환한 표정으로 노아를 반기다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요 며칠 새 왜 얼굴이 반쪽이 됐어요? 어디 아픕니까? 주치의는 불렀어요?”

“아…. 괜찮아요…. 그, 그냥 감기 기운이 좀….”

“날이 이렇게 따뜻한데 감기라니…. 역시 속 썩이는 대표님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 거죠!”

알렉스를 언급하는 순간 노아는 손가락을 움찔 오므렸다.

“그날. 그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습니까. 당신이 고생 많이 했어요. 대표님이 러트 때가 되면 엄청 예민하고 까탈스럽게 굴거든요. 얼마나 고생했을지 안 봐도 훤하네요.”

다 이해한다면서 조엘이 안쓰러운 시선으로 노아를 위로했다.

“그날은 감사했습니다. 노아 씨 덕분에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넘어간 거예요. 대표님은 감사 따위 안 하실 테니 제가 대신하는 겁니다.”

“예? 아, 아니….”

조엘의 태도에 노아는 당황했다. 예상했던 그런 반응이 아니었다. 혼전 계약서를 어겨서 온 게 아닌가?

“자. 거기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요. 당신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 대표님이 지금 화가 단단히 났거든요.”

“화… 가 많이 났어요?”

역시 아니구나…. 알렉스가 조엘에게 자세한 얘기를 안 한 모양이었다.

조엘은 그날 밤의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펄펄 날뛰었죠, 뭐. 철부지 없는 도련님인 줄은 알았는데, 어떻게 대표님한테 그딴 수작을 부릴 생각을 하죠?”

“네?”

“이번 기회에 그 철부지 도련님은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겁니다.”

“저…, 조엘…. 알렉스가…, 화 많이 냈어요?”

“네? 뭐. 많이 났죠. 일어나서는 머리가 깨질 것 같다고 저한테 얼마나 짜증을 내던지, 원. 아무래도 약으로 러트를 앞당긴 게 몸에는 별로였나 봐요. 기억도 통째로 날아가고 없다고 하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기억 못 해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며 되물었다.

“그날 일, 정말 기억 못 한대요…?”

“네. 아무래도 약 때문인 거 같은데, 펜트하우스에 들어간 것도 기억이 안 난대요. 엘리베이터에서 당신한테서 조슈아 얘기 들은 건 어렴풋이 기억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이틀 내내 그가 언제 화를 낼까 두려워하며 잠까지 설쳤다. 무섭기도 하고 서럽기도 했다.

자신을 붙잡은 건 알렉스면서 자기 탓만 할까 봐 억울했었다. 그러면서도 노아는 알렉스를 기다렸다.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가 괜찮은지 묻고 싶었다.

그날 밤의 일을 화낼 거라고 생각했지 설마 깡그리 잊을 줄은 몰랐다.

노아는 충격받았다.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 일을 기억하기조차 싫은 걸까.

그 정도로 그는 자신을 미워하는 걸까. 라고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짐승처럼 자신에게 달라붙던 그를,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던 그를 자신의 기억 속에만 묻어 둬야 한다.

그와 나누었던 더없이 친밀한 교감은, 이제 영영 자신만의 것이 되었다.

“노아? 괜찮아요?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왜 이렇게 몸을 떨어요? 주치의를 불러야…!”

벌떡 일어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괜, 괜찮아요. 좀… 긴장했었나 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호들갑을 떨며 일어나는 그를 말렸다. 노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조엘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요? 몸이 안 좋은 거면 오늘은 돌아갈게요.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지만, 급한 건 아니니까.”

“저 정말로 괜찮아요. 제가 도울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조엘은 노아의 표정을 살피며 잠시 고민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도 노아는 계속 괜찮다고만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가기도 그래서 조엘은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목격자가 당신뿐이라 확인 좀 하려고요. 조슈아 세토라랑 얘기 나누던 웨이터 얼굴 기억하세요?”

“네.”

“그 사람 인상착의 좀 알려 주세요.”

조엘의 질문에 노아는 자신의 기억을 최대한 떠올렸다. 웨이터의 머리카락 색과 체격을 기억나는 대로 떠듬떠듬 설명했다.

웨이터의 인상착의를 다 들은 조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은 거면 꼭 주치의를 부르라고 신신당부하고 저택을 떠났다.

그를 보내고 난 후 노아는 비척비척 일어나 제 방으로 올라갔다.

가슴이 먹먹했다. 어딘지 머리가 멍했다.

기억을 못 하는구나…. 알렉스는 그날 밤을 전혀 모르는 거야.

마음이 스산하고 아릿하게 저렸다. 노아는 제 가슴을 꾹 눌렀다.

이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제게 화를 낼 일도 이젠 사라졌다.

이제 편히 잘 수 있다. 두려워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째서, 이리도 가슴이 아픈 거지? 어째서 이렇게 울적하고 기분이 가라앉는지 모르겠어.

노아는 먹먹해지는 제 가슴을 몇 번이고 툭툭, 두드렸다.

그렇게라도 해서 터질 듯 꽉 막혀 있는 제 속을 다스려야 했다.

안 그러면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으니까.

* * *

알렉스가 저택으로 들어섰을 때 사위는 이미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다.

예상치 못한 러트를 겪은 탓에 잔뜩 밀린 일정을 소화하느라 한숨 돌릴 틈도 없었다.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나서야 겨우 짬을 내어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빌어먹을 두통. 러트 촉진제라더니 두통 유발제군.

진통제를 들이부어도 지끈거리는 두통이 가실 줄을 몰랐다. 알렉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주황빛의 조명만이 그를 반겼다.

뻐근한 목 주변을 꾹꾹 누르며 그는 2층으로 올라갔다. 긴 다리로 성큼 걷던 그는 문득 발을 멈췄다.

도톰하게 깔린 카펫이 그의 구둣발 소리를 흡수했다. 거침없이 발을 내딛던 그는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췄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공기가 평소와 달랐다. 조부가 쓰던 콜리나 저택은 지은 지 오래된 터라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한 참나무와 마른 풀냄새, 그리고 마치 서리가 내려앉은 것 같은 찬 공기가 뒤섞인 오묘한 향이 저택에 짙게 배어 있다.

그 익숙한 향 사이로, 은은한 단내가 복도 여기저기 살금살금 퍼져 있었다.

코앞에서 오메가 페로몬을 뒤집어쓴 적이 있는 알렉스에게는 희미하다 못해 페로몬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연약한 향이었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연약하고 희미한 단내가 살그머니 내부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향은 너무도 미약하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부족해서 오히려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굳게 닫힌 노아의 방 앞에서 멈춰 섰다.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스며든 이 달짝지근한 향을 지닌 상대가 문 너머에 있다.

불현듯 알파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 저 안의 오메가를 당장 취하라고.

아랫배가 단단해지고 하반신에 곧장 자극이 왔다. 삽시간에 뒷덜미를 꿰뚫는 저릿한 감각에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새하얀 뺨이 온통 눈물로 젖어 제게 매달려 있는 게 곧장 떠올랐다. 상상은 지나치게 생생하고 자극적이었다. 미칠 것 같은 갈증과 함께 속옷 안의 성기가 단숨에 단단해졌다.

알렉스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저 방에 있는 오메가는 자신의 것이다. 제게 속한 존재였다. 그렇다면 제가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주 단순하고, 몹시도 마음에 드는 이유였다.

그는 입 끝으로 웃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불에 덴 듯 손을 내렸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가 미친 거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래도 러트가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페로몬에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하다.

거기다 특정한 상대를 만들지 않은 지도 오래됐다. 그런 탓에 고작 바람에 금세 흩날릴 것 같은 희미한 향에 홀린 거지.

알렉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내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자신이 조금 전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잠시나마 휩쓸렸던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터무니없고 절대 있을 수 없는, 그리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낱 페로몬의 농간일 뿐이었다.

그래, 그 이유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새벽부터 내린 비는 오후가 되어도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창밖 풍경은 온통 흐리고 진한 먹구름에 가려져 낮인데도 어둑하기만 했다.

흘러내리는 빗줄기가 유리창에 물결무늬를 만들었다. 일렁거리는 물결에 가려져 마천루는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옜다.

전면 창 앞에 서 있는 그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아침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가던 중 1층에서 마주친 노아의 안색은 형편없이 창백했다.

약을 잘못 먹은 건 알렉스인데 후유증을 앓고 있는 건 노아 같았다.

‘얼굴은 왜 그래?’

‘네? 제, 얼굴이요?’

불에 덴 듯 깜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리는 노아를 보는 순간 이유 모를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안색, 눈 밑은 거뭇하게 가라앉았고 하얀 두 뺨이 며칠 전보다 한층 여윈 모습이었다.

내려 꽂히는 시선에 안절부절못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시선을 내리까는 상대가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괜히 속이 답답해졌다.

‘식사는 제대로 챙기는 거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알렉스가 좀 더 다그쳐 물으려던 그때, 루시가 주방 쪽에서 나왔다.

‘도련님. 지금 출근하시게요? 오늘도 늦어요?’

‘요즘 일이 바쁩니다.’

‘일찍 좀 다녀요. 아직 신혼인데 두 사람 너무 떨어져 있는 거 아닌가요? 노아 씨도 쓸쓸한지 자꾸 식사도 거르고 방에만 있고. 신혼집에 부인 데려다 놓고 나 몰라라 하는 건 나쁜 짓이에요.’

걱정이 많은 루시의 잔소리를 흘려듣던 알렉스는 그 순간 멈칫했다.

‘식사를 걸러요? 너 일부러 굶는 거야?’

‘네? 아, 아니에요. 그냥, 요즘 속이 좀 안 좋아서….’

‘말도 마요. 이틀 동안 뭘 먹는 걸 통 본 적이 없다니까요. 두 분 데이트도 좀 하고 그래요.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날 시기에 왜 그리 서로 내외해요?’

불성실한 태도라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루시의 말을 흘려들으며 알렉스는 노아를 쳐다보았다.

‘루시…. 알렉스는 지금 출근해야 하잖아요. 제대로 챙겨 먹을게요. 정말 속이 좀 불편해서 그랬던 거예요. 쓸쓸하다거나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잔소리가 길어지자 노아가 루시를 말리며 눈치를 보았다.

제 앞에서 쩔쩔매는 노아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을 들킨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저를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러트를 겪는 저를 챙긴 게 노아다 보니 껄끄러운 것일 수도 있고.

뭐가 되었든 알렉스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아주 나빴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쾌한 기분에 표정이 절로 딱딱해졌다.

거기 계속 있다가는 저도 모르게 화를 낼 것 같아서 알렉스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피했다.

회상에 잠겨 있던 알렉스는 삐, 하는 작은 인터폰 소리에 몸을 돌렸다.

-매디슨 씨가 오셨습니다.

“들여보내.”

“와아. 무슨 비가 이렇게 내린답니까?”

젖은 어깨를 손으로 탁탁 털며 조엘이 들어왔다. 빗속을 제법 누비고 다닌 모양인지 바짓단도 젖은 채였다.

“용건.”

조엘이 툴툴대는 걸 듣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지난번에 조사하라고 하신 거요.”

그게 뭔지 생각나지 않아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노아 친구분이요. 하는 말에 알렉스는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서류를 받아 재빠르게 살폈다. 노아에 관한 기본 인적사항은 대충 넘겼다. 몇 장을 술술 넘기고 나자 교우 관계가 나왔다.

노아와 관련된 사람이라곤 가족이랑 카일이라는 친구가 다였다.

대체 어떻게 생활한 거야?

학창 시절을 샅샅이 훑어도 조사에 걸릴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이게 다야?”

“네. 최대한 상세하게 조사한 결과라고 하더군요.”

미간을 찌푸린 알렉스는 노아의 인생에 카일이 등장한 시기의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노아가 다녔던 하이스쿨 교사 중에는 노아를 모르는 이가 더 많았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그나마 노아를 기억하는 이들은 노아보다는 카일을 더 선명하게 기억했다.

부끄러움이 많고, 늘 움츠러든 노아를 바로 곁에서 챙겼던 사람이 카일이었다. 급우들의 말에 따르면 카일과 노아는 지나치게 친밀했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이 노아에게 접근이라도 할라치면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사자처럼 날을 바짝 세웠다는 얘기가 꽤 많았다.

당시 급우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카일을 기억하는 이들은 입을 모아 둘은 사귀는 사이였다고 말했다.

학창시절 조사는 이 내용이 다였다. 그 후 노아는 어머니가 쓰러지고, 홀로 병원비를 벌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직장 세 곳에서 일했으며 그 생활을 한 지 1년 만에 집을 처분하고 카일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종이를 구겼다. 역시 두 사람은 사귀던 사이였다. 아니, 지금도 사귀고 있는지도 모르지.

머리에 피가 몰렸다. 배 속에 뜨겁고 단단한 불덩이가 뭉쳐 꿈틀대는 것 같았다.

알렉스는 서류를 다급하게 넘기며 카일의 조사 기록을 빠르게 훑었다.

카일의 기록은 노아와는 완전히 달랐다. 형제자매가 많은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성격은 활달하고 친구도 많았다. 심지어 애인이 끊이지 않았다는 주변인들의 인터뷰에 알렉스는 이맛살을 한껏 찌푸렸다.

그 건방지고 입이 험한 동급생은 노아를 사귀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바람까지 피워 댄 모양이었다.

그 순하고 모지리 같은 오메가는 저딴 바람둥이가 좋다는 거야?

읽던 서류를 탁, 내던지자 조엘이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있으면 안 되는 그런 기록이라도 있나요? 아니면… 노아 씨에게 숨겨진 비밀이라도?”

“숨겨진 비밀은 무슨. 그딴 게 있을 거 같아?”

“그럼 왜….”

되묻는 조엘에게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가진 것도 없고, 거기다 같은 오메가 자식은 왜 좋아하는 거야. 심지어 바람둥이잖아.

두 사람의 관계는 학창시절부터 이어진 사이였다. 그 긴 세월 사귀면서 이런저런 짓도 했겠지.

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알렉스는 벌떡 일어났다.

뭐라도 부수고 싶은 기분이었다.

순진한 노아를 꼬드긴 그 개자식에게 당장 달려가 반반한 낯짝을 엉망으로 짓밟으면 이 기분이 나아질까.

개자식의 실체를 알고 나면 노아도 그딴 새끼에게 미련을 버리겠지.

아니지. 알면서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어.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뇌가 폭발할 것처럼 머리가 뜨거워졌다.

두 사람이 사귀었던 사이, 혹은 현재도 사귀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알렉스를 돌게 했다.

방 안을 서성거리는 그는 숫제 성난 사자처럼 위협적이기 그지없었다.

조엘은 슬금슬금 문 가까이 도피했다. 저런 표정의 대표님은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까딱하다간 화풀이 대상이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어쩌지. 용건은 저것 말고도 또 있는데….

하필 날을 잘못 골랐다며 속으로 구시렁댄 조엘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저… 대표님?”

“왜!”

알렉스는 눈을 번뜩이며 조엘을 돌아보았다.

“아까 홍보실에서 전해 달라고 했는데, 투데이 매거진에 실린 오늘 자 기사를 어떻게 할 건지 확인해 달라던데요.”

“투데이 매거진? 거긴 또 어디야?”

“가십이나 스캔들을 주로 다루는 작은 인터넷 신문사인데요, 노아에 관한 기사가 실린 모양입니다. 대응하자니 워낙 자극적인 기사만 실어 대는 곳이라 어차피 사람들이 가십이라고 여기고 그냥 넘기거든요.”

“그런 것까지 내가 알려 줘야 해? 알아서 하라고…. 아니야, 기사 확인해.”

굳이 홍보실에서 확인해 달라고 하는 거면, 자체적으로 처리하기 곤란한 기사라는 말이었다.

조엘이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내 오늘 자 기사를 검색했다.

『알렉스 헌트의 비밀 신부는 누구?』

노골적인 타이틀에 알렉스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 길지 않은 기사였다. 취임식에 참석한 알렉스 헌트와 노아에 관해 서술한 내용을 시작으로, 기사는 점점 원색적이고 저질스러워졌다.

내용인즉슨, 노아가 외모 하나로 알렉스를 꾀었으며 결혼까지 성공했다는 거였다.

변변한 이력조차 없는 오메가가 상류층에 진입하려고 부유한 알파를 꾀는 건 예전부터 자주 있던 일이었다면서, 대중에게 꽤 많이 알려진 골드 디거인 다른 사람과 비교까지 했다.

그리 길지 않은 기사를 읽는 내내 알렉스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

쥐고 있는 스마트폰을 당장 우그러뜨릴 것처럼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홍보실에서 어째서 확인해 달라고 했는지 알았다. 유명하지도 않은 비주류 인터넷 신문사의 모욕에 가까운 기사를 가지고 대응하면 과잉 반응이라는 말이 나올 게 뻔하고 오히려 대응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더 컸다.

예전 같았으면 꿈쩍도 하지 않았을 알렉스였지만, 지금 그의 기분은 당장 뭐라도 망가뜨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불쾌함을 넘어서 화가 난 상태였다.

“감히 이딴 기사를 실어?”

기사를 다 읽은 알렉스가 스마트폰을 던지려는 찰나, 조엘이 냉큼 그것을 받아 챙겼다.

“어떻게 할까요…?”

조엘은 이미 대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 물었다.

“다신 이딴 기사 못 싣게 제대로 보여 줘야지. 법무팀 소환하고 여기 자금줄이 어딘지 알아봐. 숨통을 끊어 놔야지.”

“알겠습니다.”

기사를 확인한 조엘은 알렉스가 지나치게 화를 낸다고 생각했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지시 사항을 메모했다.

처음 노아 존재를 확인했을 때 가장 먼저 골드 디거라고 길길이 날뛰었던 알렉스가 떠올랐지만, 눈치 빠른 조엘은 거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괜히 건드렸다간 그 불똥이 자기한테 튈 게 뻔했으니까.

몸을 사리며 대표실을 나가려던 조엘의 등 뒤로 알렉스가 그를 불렀다.

“노아 불러. 네가 데리러 가든, 다른 사람을 보내든 제대로 차려입고 오라고 해.”

* * *

쏴아아―.

무섭게 내리는 비가 유리창에 거센 물결을 만들어 냈다. 거센 빗줄기에 가려져 창밖의 정원이 온통 안개 낀 것처럼 뿌옇고 흐리게 비쳤다.

비 때문인지 공기는 무겁고, 기분은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카우치에 앉아 창밖을 응시하는 노아의 형상은 마치 고전 명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같았다. 이따금 깜빡거리며 흔들리는 긴 속눈썹이 그림이 아닌 인간임을 드러낼 뿐이었다.

밖을 응시하고는 있지만 푸른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핏기 없는 뺨 아래로 걱정스러운 한숨이 섞여 있었다.

늘 먹던 억제제가 듣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노아가 하는 일은 억제제를 챙겨 먹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 억제제를 먹자마자 그대로 게워 냈다.

몸이 억제제를 거부하는 느낌이 강했다. 쓴 약을 삼키는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왜 그러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억제제를 바꾼 이후로 가끔 두통이 있긴 했지만 약을 아예 못 삼키는 일은 없었다.

노아는 자기가 약을 잘못 먹었나 싶어, 약병을 다시 확인까지 했다.

몇 번이고 약을 먹으려고 시도하다 결국 아침 약을 포기하고 내려온 참에 알렉스와 마주쳤다.

페로몬이 샐까 걱정했던 것도 그를 보는 순간 잊었다. 그는 정말로 그날 일을 까맣게 잊었다.

피곤한 기색이 어린 얼굴에는 경멸도, 비난도 없었다. 그저 노아가 못마땅한 듯 슬쩍 눈썹을 찡그릴 뿐이었다.

어차피 없는 일인데, 그는 모르는 일인데 왜 이리 서운한지 알 수 없었다.

노아는 팔을 들어 제 목덜미를 문질렀다. 옷 안에 감춰진 피부에 생생하게 남은 흔적들이 그날의 기억을 되살렸다.

커다란 손이 제 몸을 쓸어내리던 감촉. 뜨겁게 부딪혀 오던 입술과 제게 온전히 쏟아 부어지던 강렬한 감각. 그가 제 몸을 내리누르던 달콤한 무게감, 틈 하나 없이 밀착되어 비벼지던 살갗의 느낌까지 생생했다.

노아는 부질없는 생각을 지워 버리려 머리를 흔들었다.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일이 되었다. 그가 잊은 것처럼, 저도 잊어야 한다.

기분이 울적하고 침울해지는 건, 날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다.

노아는 한참을 창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았다. 비가 언제 그칠까. 하며 애써 생각을 딴 데로 돌렸다.

“왜 그러고 있어요? 차 한잔해요.”

때마침 루시가 트레이를 들고 왔다. 루시는 차가 담긴 포트와 간식거리가 소복이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차곡차곡 내려놓았다.

창가에 앉아있던 노아는 응접실 중앙에 놓인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뭘 이렇게 많이 준비하셨어요.”

“많이 준비하지도 않았는데요, 뭘. 노아 씨는 좀 더 많이 먹어야 해요. 너무 말랐어요.”

그녀의 타박에 노아는 엷게 웃었다. 어떻게든 먹이겠다면서 단단히 벼르던 루시 덕에 아침도 점심도 꼬박꼬박 먹었던 터라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노아는 테이블에 놓인 샌드위치와 쿠키를 곤란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비가 온종일 오네요. 아무래도 밤까지 내릴 모양이에요.”

“네. 그런가 봐요.”

“비 내리는 건 좋은데, 적당히 멈췄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많이 내리면 화단이며, 산책길이며 죄다 진흙 범벅이 되어서 다시 손을 봐야 하거든요.”

그녀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도울게요.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무슨 소리예요. 사람 부를 거니까 노아 씨가 일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사람 부리는 것도 꽤 피곤한 일이라서 걱정하는 것뿐이에요.”

온종일 멍하니 앉아 그날 일을 떠올리는 게 괴로워서 꺼낸 말이었다. 돕겠다고 말하자마자 그녀는 대번에 거절했다.

“하지만….”

“노아 씨는 이런 일 하는 거 아니에요. 도련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전에 일한 것도 미안해 죽겠는데, 그러지 마요. 뭣 하면 도련님이랑 외출이라도 하세요.”

얼른 간식이나 드시라며 그녀는 샌드위치를 권했다. 노아는 어쩔 수 없이 그걸 받아 들었다.

별로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어, 천천히 샌드위치를 먹었다.

노아의 시선은 다시금 창밖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자신은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온종일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기는 것 외는 제게 허락된 게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을 받아들일 때만 해도 6개월은 짧다고 여겼다. 하지만 겨우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마치 1년은 된 것 같았다.

시간은 너무 더디게 흘러갔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노아는 알 수 없었다.

“손님이 온 모양이네요.”

급하게 밖으로 나간 그녀는 잠시 후 낯선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노아. 도련님이 데이트 신청을 했나 봐요. 모시고 오라고 했다네요.”

잘 됐다면서 외출 준비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알렉스가요?”

“네.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무뚝뚝한 남자의 말에 노아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억제제를 먹지 않았다.

언제 페로몬이 새어 나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던가요?”

“모시고 오라는 연락만 받았습니다.”

데리러 온 사람은 무슨 일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노아가 응접실에서 움직이지 않자, 막 밖으로 나가려던 루시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잠깐 전화 좀 할게요.”

노아는 급히 제 핸드폰을 찾았다. 조엘에게 연락했다. 페로몬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이해해 줄 것이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어? 노아 씨? 웬일입니까?

“저…, 혹시 제가 꼭 가야 하는 일이 생긴 건가요?”

-네? 왜요? 혹시 데리러 간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

노아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겨 핸드폰을 귀에 바짝 대고 속삭였다.

“꼭 참석해야 할 일이 아니라면 오늘은 못 갈 거 같아요…. 제, 제가 지금 페로몬 조절이 안 되어서….”

-몸이 안 좋은 건가요? 병원은 다녀왔어요? 아니면 혹시 그… 주기라도…?

“그건 아니지만…. 여하튼 오늘은 안 될 거 같아요. 알렉스한테 전해 주시겠어요?”

-그럼 할 수 없죠. 대표님께 전해 드릴…. 앗! 아, 왜요!

버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너 히트 사이클이야?

대놓고 묻는 목소리는 알렉스였다. 왠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그가 떠올랐다.

“아, 아니에요. 그건 아닌데….”

-그럼 왜 못 나온다는 거야?

불쾌한 듯 어조가 날카로웠다. 노아는 그가 눈앞에 있는 게 아님에도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페, 페로몬 조절에 문제가 있어서요….”

-그게 뭐? 억제제 먹었을 거 아니야?

“오늘은 안 먹었어요…. 그래서 언제 페로몬이 샐지 몰라요.”

-이유가 고작 그거야? 별로 강하지도 않은 페로몬에 내가 영향이라도 받을까 봐?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구는 그의 태도에 노아는 저도 모르게 욱, 했다.

“싫어하시잖아요.”

-…….

“오늘은 별로 나가고 싶지 않아요. 나와야 한다고 명령하시면 가겠지만 그게 아니면 오늘은 집에 있을래요.”

-너….

알렉스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 노아는 전화를 끊었다.

* * *

“방금 뭐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를 끊었어?!”

알렉스는 갑자기 끊겨 버린 전화에 소리를 질렀다. 손에 들린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에 황당함이 가득했다.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리자마자, 이내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는 곧바로 재통화를 눌렀다.

-지금은 고객의 핸드폰이 꺼져 있어….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이게 전화까지 껐어?!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당해 본 적이 없는 알렉스였다.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이성 따위 깡그리 날아갔다.

알렉스는 머리 꼭대기까지 솟아오른 열에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손에 쥔 핸드폰을 던졌다.

따닥!

테이블 모서리에 맞고 떨어진 핸드폰의 액정이 파삭, 하고 깨졌다.

“으악! 대표님, 그거 제 건데…….”

부서진 핸드폰을 황망하게 쳐다보던 조엘이 원망 섞인 시선을 보내다 이내 포기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진이 너무 안 좋아. 불길한 날이야. 고용주의 심상치 않은 태도에 조엘은 무조건 몸을 사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정신 사납게 사무실을 서성거리며 알렉스는 몇 번이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반드시 참석해야 할 약속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무시해도 될 인터넷 기사에 화가 나 일부러 보란 듯이 둘이 외출할 생각이었다.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될 일정이었다. 지금까지 알렉스가 하자는 대로 얌전히 따라오던 노아라 안 나온다고 그쪽에서 거절할 줄을 몰랐을 뿐이었다.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바짝 열을 올리며 이리 화를 낼 필요도 없는데, 알렉스는 노아가 거부했다는 사실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충격을 받았다.

고작 페로몬이 뭐라고. 어차피 바람 한번에 사라져 버릴 그 희미한 페로몬이 뭐가 어떻다고?

알렉스는 기가 막혀 몇 번이고 바람 빠진 듯한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 대표님? 데리러 갔던 사람은 그냥 돌아오라고 하면 되… 겠죠?”

알렉스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 조엘은 슬금슬금 문 쪽으로 피신했다.

사납게 사무실을 배회하던 알렉스가 갑자기 딱 발을 멈췄다. 그러더니 휙, 고개를 돌려 조엘을 쳐다보았다.

“이대로 퇴근하니까 남은 일정은 뒤로 다 미뤄.”

“예? 잠, 잠깐…, 대표님! 세토라사의 사장님과 미팅까지 30분밖에 안 남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알렉스는 질주하는 사냥개처럼 문을 가로막고 선 조엘을 옆으로 밀어 버리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잡을 사이도 없이 쏜살같이 사라진 고용주의 뒤꽁무니를 조엘은 황당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망했다…. 나더러 뒷수습을 어찌하라고!

조엘은 무책임한 고용주에 대한 욕을 오늘도 삼키며 고단한 직장인의 삶을 한탄했다.

어쩌지. 어쩌지.

노아는 핸드폰을 품에 안고는 방 안을 서성거렸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순간적으로 내질렀던 용기는 현실을 자각하자마자 쪼그라들었다.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덜덜 떨렸다.

…사, 사과해야겠지? 지금이라도 직원을 따라가면 그가 용서해 줄지도 몰라.

초조한 걸음으로 문 앞까지 걸어간 노아는 멈칫했다.

사과한다고 받아 줄까? 만약 그의 앞에서 페로몬이라도 샌다면, 더욱 화를 내지 않을까.

차라리 이대로 조용히 넘어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불쾌한 오메가 페로몬을 맡는 게 오히려 그에게는 더 싫은 일일 수도 있다.

머릿속이 온통 엉망이었다.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노아는 결국 문을 등지고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흐릿하니 초점이 맞지 않았다.

별로 세지도 않은 그깟 페로몬에 영향 따위 받을 거 같냐는 그의 말에 윗입술을 즈려 물었다.

영향받았으면서…. 미치게 만드는 향이라고 했으면서….

그날 밤 자신이 했던 말을 까맣게 잊은 주제에 별거 아니라고 무시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울컥해 버렸다.

왜 그랬지.

노아는 무릎을 꼭 끌어안으며 그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잊어야 할 일에 왜 이리 미련을 두는 거야.

그건 없었던 일이야. 내게 벌어지지 않았던, 꿈이었을 뿐이야.

주문처럼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가슴이 지끈 저렸다. 노아는 애써 그 감각을 무시했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은 채로 노아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꾹꾹 제 속에 눌러 담았다.

-노아 씨. 도련님이 보낸 사람은 돌아갔어요. 나와도 괜찮아요.

루시의 다정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노아가 외출하기 싫어 도망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정하게 어르는 노부인의 권유를 무시할 수는 없어 방에서 쉬고 싶다고 조용히 대답했다.

루시가 문밖에서 잠시 서성거리는 듯하더니 저녁 먹으러 꼭 내려오라고 신신당부하고 사라졌다.

노아는 바닥에 한참이나 주저앉아 있다 일어났다.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가 그대로 털썩 누웠다.

초조하고 긴장했던 탓인지 머리가 무거웠다. 비 때문인지 방 안 공기가 묵직하고 진득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노아는 꾸물꾸물 침대로 파고들었다. 억제제를 먹지 않아서인지 제 페로몬이 눅진한 공기와 뒤섞여 달짝지근한 향을 퍼트렸다.

노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노아의 손에서 핸드폰이 툭, 시트 위로 떨어졌다.

창을 때리는 거센 빗줄기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 * *

끼이익!

지면을 때리는 거친 바퀴 소리와 함께 저택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운전석이 벌컥 열리자마자 알렉스가 내렸다.

쾅! 하고 문을 닫는 손길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표정이 단단하게 굳은 그는 우산도 없이 곧장 현관으로 질주했다.

빗줄기가 잦아들기는 했으나, 여전히 내리는 비에 세팅된 머리카락과 각이 진 그의 어깨가 순식간에 젖었다.

현관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간 그는 몸이 젖은 것 따위 신경 쓰지도 않고 그대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도련님? 왜 이 시간에…?”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가 몸을 돌렸다.

“노아는?”

“방에서 쉬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왔어요?”

“얘기는 나중에 할게요.”

몸이 안 좋은 거 같으니 쉬게 두라는 루시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알렉스는 긴 다리로 두 계단씩 밟아 재빠르게 올라갔다.

단숨에 알렉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노크할 생각 따위 없었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문 앞에서 망설였던 다른 날과는 달랐다. 오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문 앞에 섰다.

알렉스는 망설이지 않고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나랑 얘기 좀…,”

방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알렉스는 멈칫했다.

습도가 높은 방 안 가득. 눅진한 공기 사이, 뒷덜미를 간지럽히는 달콤한 향이 곧장 그에게 달라붙었다.

주인을 닮은 연약하고 조심스러운 페로몬이 수줍은 듯 피부에 살며시 엉겨들었다. 뒷덜미가 저릿해졌다. 한순간 하반신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희미한 페로몬에 알렉스는 성욕이 끓어올랐다.

곁을 맴도는 페로몬에 오감이 날뛰었다. 그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본능적으로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잠든 노아에게 다가갔다.

동그랗게 몸을 만 채로 잠이 든 페로몬의 주인은 알렉스가 방문한 것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침대가에 선 채로 알렉스는 노아를 내려다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마치 자신을 유혹하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하얗고 매끈한 뺨을 훑는 시선에는 노골적인 정욕이 일렁거렸다.

단단한 복부가 꿈틀거렸다. 그의 두툼한 가슴팍이 끓어오르는 성욕에 오르락내리락했다.

알렉스의 상체는 새근거리며 숨을 내쉬는 노아에게로 기울어졌다. 팔을 접어 옆으로 누운 노아의 길고 가는 목덜미에 시선을 고정했다.

끓어오르는 열기를 부추기는 이 농밀하고 다디단 페로몬을 더 깊이, 마음껏 음미하고 싶은 욕구가 알렉스를 부추겼다.

그의 두 손은 어느새 침대 시트를 꾹 눌렀다. 몸이 점점 기울어졌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자신을 감질나게 만드는 페로몬이 조금 더 짙어졌다.

알렉스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가슴팍이 좀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더 진한 페로몬을 음미하고 싶은 본능에 그의 오감이 날뛰었다.

매끄러운 피부도 향만큼이나 달짝지근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길게 뻗은 저 목덜미를 핥고, 내뱉는 숨결을 모조리 삼키고 싶었다.

갈증이 일었다.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옷 속에 감춰진 알렉스의 모든 근육이 바짝 조여들었다.

덮치듯 몸을 숙인 상체는 이제 노아와 겨우 한 뼘 거리로 좁혀졌다. 눅진하게 엉겨드는 단내가 진해졌다. 시트를 내리누르는 그의 손에 핏줄이 바짝 섰다.

아랫배가 단단해졌다. 바지 앞섶이 불룩해졌다. 속옷이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로 알렉스는 완전히 흥분했다.

그때였다.

‘알, 알렉스….’

긴 속눈썹이 눈물로 엉겨 붙은 노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앗. 아아…!’

곧게 쭉 뻗은 등줄기가 꿈틀거리며 휘어지는 모습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이건 뭐야!

알렉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불에 덴 듯 재빠르게 몸을 바로 세웠다. 제 머릿속을 휘젓는 상상에 그의 눈은 크게 뜨였다.

그는 한 걸음 크게 뒤로 물러났다.

미쳤군.

그는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욕으로 일렁거리던 눈빛은 대번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빌어먹을 페로몬 때문이야.

감질나게 살금살금 달라붙은 이 달짝지근한 페로몬이 저를 실제와 같은 망상에 빠뜨린 게 분명하다.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입매를 굳히며 싸늘하게 노아를 내려다보았다.

세상모르고 잠이 든 노아를 깨워 당장 억제제를 먹으라고 말하려 했지만, 선뜻 그를 깨우기는 망설여졌다.

여전히 달라붙는 페로몬을 떨치려면 이 방에서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알렉스는 못이 박힌 듯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꼼짝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알렉스의 등 뒤로 루시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도련님? 여기 계셨어요? 곧 저녁 시간인데 노아 씨는…. 어머. 잠이 들었네요.”

곧장 침대로 다가간 그녀가 몸을 숙이더니 곤란한 듯 중얼거렸다.

“많이 피곤한가? 오늘 내도록 울적해하는 것 같더니…. 노아 씨?”

루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아의 이름을 불렀지만, 노아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나…? 그녀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내려다보더니 어쩔 수 없지,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깊이 잠들었네요. 저녁은 먼저 드셔야겠네요.”

루시는 흐트러진 이불을 노아의 목까지 끌어올렸다. 이리 선잠을 자면 밤에 못 잘 텐데…. 애정이 담긴 잔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이불을 덮어 주던 그녀는 헝클어진 노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멈칫했다.

“저런. 열이 있네.”

이마를 짚으며 루시가 혀를 찼다.

“열이 있다고요?”

다소 떨어져 있던 알렉스가 단번에 다가와 손을 뻗었다.

노아의 이마에 손을 대자, 뜨끈뜨끈한 열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루시. 주치의 부르세요.”

알렉스의 지시에 루시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잰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이 좀 있긴 한데 심각한 건 아닙니다. 해열제를 처방해 드릴 터이니….”

소곤대는 목소리에 노아는 눈꺼풀을 떨며 미간을 찌푸렸다.

보드라운 시트에 파묻힌 몸이 평소보다 한층 무거웠다.

“병원엘 안 가도 되는 겁니까?”

대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해열제만으로도 충분합니다만….”

“뭔가 걸리는 게 있습니까?”

아…. 알렉스네.

여전히 잠에 취한 노아는 익숙한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알렉스가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를 맞았는지 알렉스의 어깨와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있는 게 보였다.

“페로몬이 좀 불안정한 게 느껴지는데 정확한 건 오메가 전문 병원에서 검진을 받으셔야 할 것 같네요.”

병원? 검진?

그들의 얘기에 노아는 잠시 의아했다. 왜 낯선 사람과 알렉스가 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잠들기 전에 저지른 짓이 뒤늦게 떠오르자마자, 노아는 슬금슬금 걱정이 밀려들었다.

아직 자신이 일어난 걸 저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대로 모른 척 다시 잠든 척할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가 노아는 이내 포기했다. 알렉스를 영원히 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아는 일부러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오메가 전문 병원…, 깼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던 알렉스가 곧바로 기척을 알아챘다. 순식간에 그가 성큼 다가왔다.

“몸은 괜찮아? 아픈 곳은 없고?”

다급하게 물어 대더니 낯선 사람에게 “닥터 리건. 환자가 깼으니 제대로 봐 주세요.” 하고 말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의사는 이미 진료를 끝냈음에도 별다른 불평 없이 노아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헌트 씨 배우자분은 처음 뵙네요. 헌트가의 주치의 로버트 리건입니다. 닥터 리건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 안녕하세요…. 노아 칼…, 헌트예요.”

습관적으로 본래 성을 말하려다 급히 정정했다.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인사 받는 게 어색했지만 어쩐지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혹시 어지럽거나 구토감이 든다거나 더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

“전… 괜찮은데요. 열이 나는 줄도 몰랐어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몸이 안 좋다고 했잖아. 그것 때문에 외출도 못 한다고 하지 않았나?”

괜찮다는 말에 발끈한 알렉스가 곧장 노아의 말을 정정했다.

“헌트 씨가 걱정 많이 하셨나 보네요. 정말 아픈 데 더 없습니까? 페로몬이 좀 불안정하다고 듣긴 했는데, 그건 괜찮으신가요?”

억제제가 안 듣는다는 걸 말해야 하나 싶었지만, 알렉스가 있는 자리에서는 내키지 않았다. 노아는 표정을 굳히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환자를 보아 왔던 닥터 리건은 곧장 노아의 불편한 시선을 눈치챘다.

“헌트 씨. 잠시 나가 계시겠습니까?”

“왜요? 내가 있으면 안 됩니까?”

“아무리 배우자라도 환자분의 개인 진료를 다 오픈할 순 없지 않습니까? 배우자에게 개인적으로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을 수도 있고요.”

“비밀이라고요?”

알렉스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노아를 내려다보았다.

“헌트 씨가 알아야 할 사항은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환자분의 동의하에.”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시선은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노아는 마음을 졸이며 조용히 기다렸다. 제 몸 상태에 대해 알렉스가 알게 되는 건 원치 않았다. 아직도 몸에는 흔적이 남아 있다. 괜한 일로 오해를 사고 싶진 않았다.

“헌트 씨?”

닥터 리건이 재촉하듯 그를 부르자, 알렉스가 낮게 혀를 찼다.

“자리를 비켜 드리죠.”

내키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지만, 결국 알렉스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잔뜩 긴장했던 노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청객도 사라졌으니 환자분의 얘기 좀 들어 볼까요?”

부드러운 미소를 띤 닥터 리건이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

말해도 되는 걸까. 헌트가의 주치의면 진찰 결과가 그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헌트가의 주치의라고 해도 환자분의 몸 상태에 관해 마음대로 남에게 전달하지 않습니다. 걱정하는 부분이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노아는 깜짝 놀라 닥터 리건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 되물을 틈도 없이 그가 말했다.

“제가 헌트가의 주치의라고 해도 다른 환자분을 안 보는 건 아니니까요. 표정이 무척 솔직하신데요?”

“아….”

노아는 제 뺨을 문지르며 그렇게 티가 났나, 하고 중얼거렸다.

“페로몬이 불안정하다는 얘기는 들었다고 말씀드렸죠? 간단한 진찰로는 자세한 걸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환자분께서 말씀을 해 주셔야 제가 보다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습니다.”

“저… 그게…. 제가 억제제를 복용하는 중인데요, 오늘은 도저히 억제제를 삼킬 수가 없어서….”

“삼킬 수가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정확한 증상을 말씀해 주세요.”

의사의 물음에 노아는 페로몬 조절을 어려워해 전부터 억제제를 먹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최근에 억제제를 바꿨다는 것과 오늘 아침엔 이유 없이 억제제를 먹고 바로 토했다는 것까지 설명했다.

“드시는 억제제 좀 꺼내 주시겠어요?”

“저기 협탁에….”

노아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의 서랍을 열어 약병을 꺼낸 의사는 금세 눈살을 찌푸렸다.

“이 약은 임시방편으로 쓰이는 약이라, 매일 복용하시기엔 적합하지 않을 텐데요. 이걸 의사가 처방해 준 건가요?”

“알아요. 제, 제가 괜찮다고 처방해 달라고 한 거예요.”

“왜 굳이 이 약을…?”

“그건….”

노아는 알렉스 때문이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알렉스는 그저 억제제를 먹으라고 했을 뿐이었다. 페로몬을 조절하라고. 함량이 높은 약을 선택한 건 자신이었다. 자신이 좀 더 페로몬 조절이 수월했다면 굳이 이 약을 먹을 필요는 없었다.

“부작용은 없었나요? 약효가 센 편이라 자주 복용하면 부작용이 있었을 텐데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자, 닥터 리건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두통이 좀… 있었어요. 그리 심한 건 아니었어요….”

두통이라…. 닥터 리건이 약병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통상적으로 가장 많이 있는 부작용이긴 하죠. 그럼 지금까진 복용하는 데 문제가 없었는데 오늘은 먹을 수가 없었다는 거죠?”

“네.”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던 닥터 리건이 잠시 누워 보라고 말했다.

노아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반듯하게 누웠다.

닥터 리건은 가지고 온 가방을 열어 청진기를 꺼냈다. 양해를 구하고 노아의 상의를 살짝 들추어 청진하고, 그는 체온도 다시 쟀다. 그리고는 꼼꼼하게 노아의 상태를 기록했다.

“현재 호흡이 불안정하고 미열이 계속 있네요. 두통도 있었다고 했죠?”

닥터 리건의 물음에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저 억제제는 당분간 끊으시고 해열제를 처방해 드릴게요. 그리고 오메가 전문 병원에 방문해 꼭 혈액 검사와 페로몬 수치 검사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다니던 곳에 가면 안 될까요?”

“저 억제제를 처방해 준 의사 말입니까? 별로 추천해 드리고 싶지 않네요.”

단번에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가로젓는 닥터 리건의 대답에 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는 병원이 없다면 제가 추천해 드려도 될까요? 오메가 전문 병원이고, 이쪽 분야에선 유명한 전문의가 많은 병원입니다. 노아 씨가 방문하시면 바로 진료받으실 수 있도록 제가 미리 연락을 해 두겠습니다.”

닥터 리건은 안주머니를 뒤져 명함을 꺼내 뒷면에 병원 주소와 연락처를 기재하고 노아에게 주었다.

“병원은 여기로 가시면 되고, 닥터 셰먼을 찾으세요. 이건 셰먼의 연락처입니다.”

노아는 닥터 리건에게 받은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주소는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진찰을 끝낸 리건이 진료 가방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헌트 씨에겐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몸에 남은 그 흔적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럼 이만.

깔끔하게 인사하고 닥터 리건이 나가고 잠시 후 알렉스가 들어왔다.

“왜 일어나? 몸도 안 좋으면서. 누워 있어.”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기대고 앉았다. 노골적으로 저를 살피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알렉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열이 있다면서 안색은 왜 저리 창백한 거야.

자고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탓에 뒷머리가 살짝 헝클어져 있었다. 긴 속눈썹이 이따금 깜빡거리기만 할 뿐, 노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겨우 며칠 새 형편없이 야윈 뺨이 심히 거슬렸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은 가늘기 짝이 없었다.

페로몬 문제일 수 있다는 주치의의 소견 외에는 일체 다른 얘길 듣지 못했다.

배우자로서 상대의 건강상태에 대해 들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주치의는 환자 개인이 동의하지 않은 정보를 배우자에게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하고는 쌩하니 가 버렸다.

“그래서. 어디가 아픈 건데?”

“드릴 말씀이 있….”

한참 침묵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각자 말을 꺼내던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멈췄다.

노아가 말을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자, 답답함에 알렉스가 결국 되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먼저 말해.”

노아는 몇 번 입술을 달싹거렸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힐끔, 곁눈질하다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답답하게 굴지 말고 말해.”

“당분간… 저하고 안 만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무슨 말이야, 그게.”

짜증 섞인 어조에 노아는 서둘러 덧붙였다.

“억제제를 당분간 먹지 말라고 하셨어요. 페로몬 조절을 못 하니까… 마주치고 그러면….”

“그러니까 네 페로몬 때문에 나더러 접근하지 말라고?”

“네.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시잖아요.”

긴장하긴 했지만 끝까지 자기 말을 끝낸 노아를 알렉스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지금도 눅진한 공기에 뒤섞인 페로몬 향이 맴도는 중이었다. 이 미약할 정도로 연약한 페로몬에 자신이 흔들릴 거라 믿는 건가?

“내 기분을 어떻게 안다고 마음대로 재단하지?”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안타깝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는 기각이야. 내 파트너로 기사 난 게 고작 며칠 전이야. 우리 결혼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과시해도 모자랄 판에 각자 생활하자고? 그렇게는 못 하지. 아니면 페로몬 핑계 대고 다른 짓이라도 하려고?”

“다른 짓이라니요?”

진심으로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 가소로웠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이 기회에 친구인지 애인인지 하는 그 새끼랑 시간이라도 보내려고?”

“애인…, 아…. 카일이요?”

“이름 따위 알게 뭐야. 그 새끼랑 애틋한 감정 쌓는 건 내 알 바 아니지만 너는 나하고 부부야. 적어도 이 결혼이 끝날 때까진 너는 내 배우자라고.”

노아는 갑자기 화내는 알렉스를 이해 못 하겠다는 듯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더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계약은 지킬 거예요. 공식적인 자리가 있다면 참석할게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같이 있기는 곤란….”

“페로몬 핑계는 그만 대. 네 페로몬은 나한테 아무런 영향도 안 주니까.”

알렉스는 우물거리는 노아의 말을 딱 잘랐다. 그놈의 페로몬 핑계는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알렉스를 올려다보던 노아는 한참 후에 고개를 떨구었다.

알렉스는 문득 노아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삼킨 말이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저 부러질 듯 연약한 손목을 낚아채서 채근하면 도발적인 저 입술을 열까?

긴 속눈썹이 눈두덩이 아래 그늘을 만들어 낸 탓인지 울적해 보이는 노아의 심경이 궁금했다.

아래로 향한 시선을 제게로 되돌리고 싶었다. 고개를 숙인 노아의 얼굴을 붙잡아 눈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우울한 표정으로 너는 누구를 생각하고 있나. 설마 그 자식을 떠올리고 있는 건가.

불현듯 손끝이 차가워졌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신경질적으로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욱, 하고 성질이 올라왔지만 창백한 뺨을 확인하는 순간 화내고 싶은 생각은 사라졌다.

그래, 아프니까 오늘은 넘어가지.

“억제제를 먹든 먹지 않든 상관하지 않겠어. 하지만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은 사람 앞에, 공식적으로 부부로 서게 될 테니까 몸이나 잘 추슬러.”

할 말을 끝마친 알렉스는 휙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신경을 갉아 대는 거슬림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렉스는 알 수 없었다.

비에 젖어 버린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 부스에 들어가고 나서 카일이 애인이냐는 말에 노아가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 * *

폭우로 엉망이 된 정원을 정리하느라 인부들이 쉼 없이 저택을 들락날락했다.

여름이 곧 시작될 모양인지 한낮의 태양이 지면을 달구고 빛을 사방에 뿌려 댔다.

“이번엔 여름이 빨리 오려나 보네요.”

내리쬐는 태양 아래 일하는 인부들에게 대접할 레모네이드를 만들던 루시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주방에서 그녀를 돕던 노아는 눈이 부신 햇살에 슬쩍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날씨면 낮에 수영장을 개방해도 되겠어요. 수영장 물도 채워야겠네.”

“수영장이요?”

“네. 도련님이 수영을 즐기시거든요. 여름에는 쉬는 날이면 종일 물에서 사신답니다.”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유리 저그에 와르르 쏟아 넣은 그녀는 다 만들어진 레모네이드를 저그에 옮겨 담았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트레이에 유리잔을 빼곡히 담아 들자 그녀가 먼저 주방을 나섰다.

“노아 씨는 수영 좋아해요?”

“할 줄 몰라요. 배울 기회가 없어서….”

“어머. 수영을 못 해요? 잘됐네. 도련님한테 나중에 가르쳐 달라고 해요.”

즐거운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말에 노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알렉스가 저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고 싶어 할까??

별로 가능성 없는 얘기였다. 노아도 굳이 그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고.

노아가 어떤 마음인지 모르는 그녀는 신나게 알렉스의 어릴 적 일화를 얘기했다.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수영장에서 놀았다는 거나 수영뿐만이 아니라 승마도 수준급이라든가, 뭐든 못 하는 게 없었다는 그녀의 말 속에는 알렉스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노아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사장님 부부가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한참 과거의 한때를 떠올리던 그녀는 문득 말을 흐렸다. 멈칫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노아는 곤란한 화제라는 걸 알아채고는 굳이 묻지 않았다.

잠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회한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어른거렸다. 루시의 시선이 먼 과거 어딘가를 헤매는 동안 노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알렉스의 부모님 얘기는 노아도 본의 아니게 들었던 터였다. 그들에게 벌어진 비극은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는 화제였다.

“에구머니. 내 정신 좀 봐. 넋을 놓고 있었네. 인부들이 목말라 하겠어요.”

퍼뜩 정신을 차린 루시는 허둥대며 바삐 움직였다. 이내 평소처럼 활기찬 태도로 정원까지 움직인 그녀는 인부들에게 레모네이드를 나눠 주고 일이 얼마나 진척됐는지 확인했다.

그늘 하나 없는 곳에 서 있으니 정수리가 뜨거워졌다. 노아는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여름이 아닌데도 기온은 여름과 다른 바가 없을 정도로 더웠다.

몸을 데우는 온도에 눈앞이 잠시 이지러졌다.

“이제 다 됐다. 들어가요. 노아.”

인부들이 남은 음료를 더 마실 수 있도록 저그와 잔을 화단 아래 내려두고 루시가 돌아섰다.

그녀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오던 중, 조엘과 마주쳤다.

“조엘. 어쩐 일이에요?”

“오랜만입니다.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아니,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네요. 지금 당장 짐 챙겨서 저랑 가요.”

“네?”

조엘은 시간 없다면서 노아를 재촉했다. 어딜 가느냐고 물어도 일단 짐부터 챙기자면서 방으로 올라갔다.

“뭘 챙겨야 할지….”

무엇을 챙겨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노아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조엘은 드레스룸을 열어 적당한 옷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대표님 때문에 내가 진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갑자기 요트는 왜 타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요즘 기분도 내내 안 좋아 보이고, 살얼음판이 따로 없다니까요.”

조엘은 옷을 골라내면서 참았던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요트요?”

“네! 요트요, 요트! 주말에 울 귀염둥이들이랑 놀아 주기로 했는데, 주말이고 뭐고 다 반납하라지 뭡니까?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요? 내가 진짜 연봉만 아니었다면 이 일자리 당장 때려치웠다니까요.”

입은 쉴 새 없이 불만을 터트리는데 손은 마치 기계라도 된 듯, 일사천리로 짐을 쌌다.

“수영복은 없겠죠? 괜찮아요. 거기에 다 준비되어 있을 테니까. 웬만큼 필요한 건 요트에 다 갖춰져 있으니까 이틀 동안 입을 옷이랑 속옷만 챙기면 되겠네요.”

자문자답에 말이 어찌나 빠른지 노아는 대답할 틈도 없었다. 프로페셔널한 그의 동작에 무심코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원래도 가끔 미친 것처럼 변덕스럽게 굴긴 했는데 요즘 그 빈도수가 너무 많아요. 이러다 정말 스트레스로 쓰러지겠어요.”

“조엘도 요트 여행에 따라가는 건가요? 내일 휴일이니까 쉬셔도 될 텐데….”

“제 말이요! 그러겠다고 했더니 영원히 쉬고 싶냐고 그러잖아요! 어찌나 간담이 서늘하던지! 가까운 지인들까지 초대하는 자리라 전체 총괄할 사람이 필요하다네요. 어휴. 내가 진짜 그놈의 사표. 언젠가는 던지고 만다!”

어디서 찾았는지 노아는 알지도 못하는 작은 여행 가방까지 꺼내 옷을 옮겨 담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조만간 이러다가 이혼당할지도 몰라요. 어젯밤엔 글쎄 아내가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하지 뭡니까? 토라진 아내 달래느라 제가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다시 생각해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모양인지 조엘이 가슴을 턱턱 두드렸다.

“저런…. 휴가라도 달라고 하시면 안 돼요?”

“휴가 얘기 꺼냈다간 그대로 해고 통지서를 받게 될 겁니다.”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가족분들과 보낼 시간이 없는 건….”

“제 아내가 저를 무척 사랑하지만, 제 연봉도 무척 사랑하거든요. 그만뒀다고 하면 아예 집에는 발도 못 들이게 할 겁니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라 노아는 그저 안타까운 얼굴만 했다.

방 안을 휘휘 둘러보던 그는 준비가 다 끝났다는 걸 확인하고는 먼저 방을 나갔다.

“일단 갑시다. 대표님이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노아 씨. 병원은 다녀왔어요? 그날 아프다고 하셨잖아요.”

조엘의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노아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당장은 아픈 데도 없고… 어쩌다 보니까 아직 못 갔어요.”

억제제를 안 먹어도 된다고 생각해서 인지 몸도 한결 편안해졌고, 간헐적으로 있던 두통도 사라졌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페로몬 조절도 평소보다 쉬운 기분도 들고.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처음 볼 때보다 좀 말랐어요. 물론 사람 속 썩이는 데 일가견이 있는 대표님이랑 함께 지내다 보면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뭔가 이상이 있는 걸 수도 있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럴게요.”

“에이, 이게 뭐 감사할 일인가요? 그냥… 괜한 일에 노아 씨가 고생하는 거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아요.”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 진짜였다면 노아가 저리도 주눅 들지는 않겠지. 차라리 골드 디거인 편이, 노아 본인에겐 더 나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부자 남편에 어마어마한 유산을 받게 되었고, 심지어 육체적인 위협조차 없는 상대가 아닌가.

고용주의 거지 같은 인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노아에게 이 결혼은 매우 좋은 기회이고 앞으로 남들만큼, 아니 남들보다 더 핑크빛 미래가 펼쳐진 상황이었다. 겨우 6개월 아니 이젠 4개월 조금 넘는 시간 동안만 이 불편한 관계를 참으면 된다.

조엘은 당당함이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조용한 노아를 힐끔거리며 안타까움에 탄식을 터트렸다.

노아가 좀 더 뻔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얌전하고 수줍은 성격의 사람에겐 그런 말조차 부담이 될 테니 그저 목 안으로 꿀꺽 삼킬 뿐이었다.

칼밴시를 관통하는 디콘강의 남쪽 끝, 바다와 맞닿아 있는 사우스 트리아는 솔리스만을 중심으로 형성된 클레멘스주의 중심도시로 무역이 활발하던 항구 도시이자 관광,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과거 유럽과의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주축 도시로써 반도 모양의 클레멘스주의 가장 끝자락에 있다.

주도인 칼밴보다 남쪽에 자리해 비교적 온화하고 따뜻한 날씨라 휴양지로 인기가 좋은 데다, 아름다운 해변이 많기로 유명해 시 안팎으로 호텔과 레스토랑,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공원과 규모가 큰 유원지까지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바다와 맞닿은 지역의 특성상 선착장이 매우 많은데, 값비싼 요트가 즐비한 선착장 주변에는 상류층이 주로 머무는 최고급 호텔과 개인 별장이 곳곳에 세워져 있어 클레멘스주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다소 이르게 찾아온 여름 날씨에 벌써부터 도시는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고급 요트가 정박한 선착장 주변에도 이른 항해를 준비하는 이들이 많았다.

분주한 도시의 소란스러움은 상공에서도 훤히 알 수 있었다.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에도 노아는 발아래 펼쳐지는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에 빠져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우스 트리아는 칼밴시보다 훨씬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꾸며진 요트가 즐비한 선착장과 크고 푸른 야자수 잎이 늘어선 가로수, 눈이 부시도록 새파란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넋이 나간 듯 아래를 내려다보는 노아의 두 눈은 여느 때보다 반짝거리고 있었다.

입을 다문 채 노아를 바라보던 알렉스는 이내 뒷좌석의 조엘에게 말을 건넸다.

“준비는 다 끝났나?”

“네. 손님들도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 그리고 조나스 모드 씨는 급히 잡힌 출장 때문에 불참하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헤드셋을 통해 흘러나오는 대답에 알렉스는 고개만 까딱했다.

요트 모임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노아가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보기 싫었다. 우리 결혼에 관해 쓸데없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걸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결혼 후 대외적인 활동이 극히 부족했던 것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노아 성격상 공식 행사는 부담스러울 게 뻔하니 비교적 가벼운 사교 모임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결혼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늘 초대 손님도 가까운 대학 동기 위주로 적은 인원만 불렀다.

여전히 밖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노아를 보니 데리고 나오길 잘한 것 같았다.

푸른 바다를 가로지른 헬기는 십여 분을 더 날아 다이빙 포인트에 정박하고 있는 요트에 도착했다.

선미에 마련된 헬기 착륙장에 도착하자, 미리 도착한 이가 마중을 나왔다.

“알렉스!”

프로펠러 바람에 머리가 흩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이슨이 다가와 알렉스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노아 씨! 이제 내려요!”

여전히 시끄러운 프로펠러 소음을 뚫고 조엘이 쩌렁쩌렁 고함을 내질렀다.

조엘을 따라 주춤거리며 내리자, 헬기는 곧 다시 이륙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가 잦아들었다.

노아는 알렉스가 친구와 인사하는 걸 지켜보다, 제 짐을 들고 있는 조엘에게 다가갔다.

“짐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

“아닙니다. 제가 침실에 갖다 놓겠습니다.”

양손에 짐을 든 조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선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낯선 환경에 놓인 노아는 뭘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알렉스의 어깨를 장난스레 툭툭 치던 제이슨의 시선이 이내 노아에게 향했다.

“아, 이쪽이 알렉스와 결혼하신 그 행운의 신부님이시군요. 이야. 엄청난 미인인데요?”

스스럼없이 성큼 다가온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제이슨 윌라스입니다.”

“아, 네…. 노아 헌트예요.”

내민 손을 잡으려던 찰나, 불쑥 끼어든 알렉스가 노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지.”

제이슨이 잠시 기가 막힌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고작 인산데, 그것도 못 하게 하냐? 결혼식에도 안 부르고 서운하게 하더니 이러기야?”

“식 안 올린 건 사정이 있다고 했잖아.”

“네에네에. 그 사정이 뭔지 나도 알지. 하지만 네 파트너랑 인사도 못 하게 막는 건 심한 거 아니야? 너 보기보다 좀 심하다? 물론 이렇게 미인 배우자를 얻으니 불안해하는 건 이해하는데… 이 정도면 좀 심각한 의처증 아닌가?”

“쓸데없는 소리.”

제이슨의 농담을 단칼에 부정하고 알렉스는 노아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먼저 움직였다.

“그나저나 오늘 다른 녀석들도 오는 거야?”

“조나스는 일 때문에 못 온다고 했고, 아이작이랑 랜달은 저녁쯤에 도착할 거야.”

“네 덕분에 오랜만에 보네.”

더 도착할 이가 누구인지 잠시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노아는 조금 당황했다.

반쯤 끌어안기다시피 한 터라 알렉스와 지나치게 가까웠다. 움직일 때마다 어깨에 부딪히는 그의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제이슨과의 대화가 즐거운 모양인지, 낮게 웃을 때면 닿은 어깨를 통해 미세한 진동도 느껴졌다.

별 의미 없는 접촉이었다. 의식할 필요조차 없는. 친구 앞이니 일부러 가까운 척 군다는 걸 누구보다 노아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자꾸만 그가 의식되었다.

맞닿는 육체의 단단함을 애써 모른 척 외면하고 노아는 즐겁게 얘기 중인 두 사람을 살폈다.

알렉스가 누군가와 이렇게 허물없이 구는 건 처음 보았다. 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알렉스가 편안하게 웃고 떠들며 가끔은 툭툭 장난치듯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이 생소했다.

“자, 그럼. 난 짐 좀 풀고 노아한테 피닉스호 구경 좀 시켜 줄 테니 이따 메인 응접실에서 보자.”

“나도 그럼 객실에서 좀 쉬어야겠어. 이렇게 느긋하게 쉰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이따 봐요, 노아. 하며 산뜻하게 인사하고 안쪽 객실로 제이슨이 사라지고 나자 조용한 침묵만이 흘렀다.

“따라와. 주말 동안 지낼 곳을 봐야 하니까.”

목재 바닥의 복도를 쭉 지나자 시야가 확 트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기는 후미. 메인 덱이자 수영장이 있어. 바다가 거칠 때는 이곳에서 수영을 즐기기도 해.”

요트 안에 수영장이 있었다.

전혀 상상도 못해 본 광경이라 노아는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수영장 주변에는 해를 가리는 파라솔이 덱 체어가 늘어선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뒤돌아 봐.”

멍하니 수영장을 바라보던 노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저 위에 조타실이 보여?”

그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저긴 출입금지니까 되도록 가지 않도록 해. 항해를 책임지는 선장과 항해사들은 방해받는 걸 싫어하거든.”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따라와. 다른 데도 봐야지.”

메인 덱을 떠나 선실이 있는 안쪽으로 이동했다. 피닉스호는 총 3층으로 구성된 요트였다. 메인 덱에 있는 수영장 외에도 당구와 카드놀이를 즐길 수 있는 게임 룸이 있었고, 승무원 총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선실이 아래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전망이 좋은 2층에는 커다란 응접실과 메인 침실, 그리고 사업적 용도로 사용이 가능한 세미나실이 갖춰져 있었다.

1층에 손님용 객실이 총 10개였고 객실에는 개별 욕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알렉스의 설명을 들으며 노아는 요트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보는 것마다 놀라웠다. 시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웠고 가전제품은 최신식이었다.

부자들은 이렇게 사는 거구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가 노아의 눈앞에 펼쳐졌다.

“가끔 필요한 이들에게 대여해 주기도 해. 보통은 사우스 트리나에 정박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럼 세워 놓기만 해요?”

이렇게 좋은데 사용하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놀라웠다.

“내가 배에서 생활할 순 없잖아.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매번 요트만 타고 다니겠어.”

자주 쓰지도 않는 요트를 굳이 소유하고 있다는 게 노아는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부자들은 원래 이런 식으로 돈을 막 쓰는 건가? 내가 너무 소시민으로 자라서 이해 못 하는 건가.

“그리고 오늘 여기 초대한 녀석들은 내 대학 동기들이야. 사적인 자리니까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실수하더라도 웃고 넘어가 줄 녀석들이니까.”

머무는 동안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덧붙인 알렉스는 짐부터 정리하자면서 2층 객실로 올라갔다.

덱으로 연결된 계단 바닥도 고급스러워서 노아는 내딛는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메인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엘이 미리 가져다 놓은 짐 가방 두 개가 문 안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왜 두 사람의 가방이 다 여기에 있지?

노아는 왠지 모를 불안함에 그걸 내려다보았다.

“수납장은 저쪽 쓰면 돼.”

알렉스는 아무렇지 않게 침대 맞은편에 놓인 벽을 가리켰다.

“알렉스 방은 어딘가요?”

설마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넌지시 물어보자,

“내가 말 안 했던가? 여기선 같은 방 써야 해. 친구들한테 우리가 계약 관계라고 말할 순 없잖아.”

라는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한 노아는 입을 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알렉스가 이내 눈썹을 추켜세웠다.

“왜 그런 눈이야? 설마 내가 널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하나? 계속 말하지 않았던가? 난 오메가랑 안 잔다고.”

마치 평가하듯 노아를 위아래로 훑더니 그가 비꼬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 관심도 없는 사람 붙잡고 자는 취미는 없거든.”

하지만 당신은 이미 저랑 잔걸요.

노아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이 이상 그에게서 관심 없다는 말을 듣는다면 자기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낼 것 같았다.

“네. 걱정하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다른 사람과 함께 잔 적이 없어서….”

그 말을 끝으로 노아는 조엘이 챙겨 준 옷을 옷장 안에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기분이었지만 무시했다.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이유는 없을 테니까.

해가 저물면서 요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명 빛에 바다 빛깔이 바뀌었다. 일렁이는 바다는 주황빛이나 노란색으로, 때때로 푸른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친구와 먼저 한잔하겠다면서 알렉스가 객실을 나가고 노아는 혼자 방에 머물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방 안에 머물러 있어도 요트에 점점 사람이 늘어나는 건 알 수 있었다. 때때로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고, 가끔은 소형 보트의 엔진 소리도 창 너머로 울려 퍼졌다.

밖으로 향했던 노아의 시선은 침대를 훑었다. 성인 남자 넷은 너끈히 누워 잘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침대였다.

이 방에서 알렉스와 이틀을 머물러야 한다. 그의 말대로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노아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자꾸만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기억조차 하지 못 하는 그날 밤의 일이 생각났다. 어른어른 뇌리를 스치는 농밀한 밤의 기억을 털어 내듯 노아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똑똑.

“노아 씨. 방에 있어요? 곧 저녁 만찬이 시작될 거예요.”

문밖에서 들리는 건 조엘의 목소리였다.

멍하니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노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을 더 두드리려는 듯 오른손을 들고 있던 조엘이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대표님이 찾으세요. 손님들과 인사도 나누시고, 저녁도 함께 드셔야죠.”

“혹시 옷을 갈아입어야 할까요?”

노아는 제 차림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격식을 차리는 자리가 아니니까요. 아! 혹시 뱃멀미하시나요? 약이라도 챙겨 드릴까요?”

“괜찮아요.”

“그럼 그대로 가죠.”

걱정할 게 뭐냐 있냐면서 노아 씨 얼굴이면 아무도 당신 옷차림 같은 건 안 보일 거라고 추켜세웠다.

조엘과 함께 1층 식당으로 들어서자, 대화하던 목소리가 그 순간 뚝 끊기고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갑자기 몰려든 시선들에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어쩔 줄 모르고 식당 입구에 우뚝 선 노아 곁으로 정적을 깨뜨리듯 알렉스가 다가왔다.

“푹 쉬었어?”

자연스럽게 노아의 허리를 감싸며 그가 상체를 숙였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긴장 좀 풀어. 친구들이 다 보고 있잖아.”

작게 속삭이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틈도 없이 부드러운 감촉이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심장이 높게 뛰었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내 목덜미와 뺨으로 열이 치솟았다.

노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에게 의지하듯 몸을 기댔다. 안 그러면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이야…! 알렉스! 너… 이 자식!”

“이런 미인은 어디서 찾은 거야?”

알렉스의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노아는 자신보다 큰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둘러싸였다.

“안녕하세요. 아이작 브릭이라고 합니다. 아이작이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알렉스의 미인 배우자를 이제야 보네요. 난 랜달 베이커입니다.”

경쟁이라도 하듯 다가온 두 사람의 어필에 노아는 눈만 휘둥그레 떴다.

먼저 악수하는 대회라도 치르는 듯 두 사람은 서로를 은근슬쩍 밀어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노아는 뻗은 손을 난감하게 쳐다보았다.

“뭐가 그리 급해? 인사는 식사하면서 천천히 하자.”

자리로 가자는 알렉스의 권유에 위기를 모면한 노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두 놈은 일상생활이 늘 경쟁이야. 별것도 아닌 거로 다툰다니까.”

알렉스가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자신이 먼저였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늘 있는 일상인지 다른 사람들은 그저 즐겁게 웃기만 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배정된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테이블에는 이미 한가득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깔끔한 흰색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 서빙을 돕기 위해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알렉스가 아직 인사하지 않은 사람들이 앉은 맞은편 의자를 뒤로 빼 주었다.

“고, 고마워요.”

알렉스의 에스코트를 처음 받은 노아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별말씀을.”

누군가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린 모양인지 콜록댔다.

“알렉스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에릭 블레어입니다. 이쪽은 내 아내 아이리스입니다.”

알렉스의 다정한 태도에 적응할 새도 없이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옆의 미인은 부인이구나….

흑발의 인상 차가운 미인이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안녕하세요. 노아 헌트예요.”

얼떨결에 노아는 꾸벅 그에게 인사했다.

“나하고도 인사해요. 이브 레너드예요. 이쪽은 내 약혼자 벤자민.”

대각선 방향에 앉은 짧은 갈색 머리 미인이 믿기 어려운 표정으로 인사를 해 왔다. 그 곁에 있는 약혼자가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는 걸 보니 아까 사레들린 사람이 이브였던 모양이었다.

“자, 다들 인사는 그쯤하고 우선 먹자. 얘기 나눌 시간은 많으니까.”

알렉스가 상황을 정리하자 친구들도 식사하기 시작했다.

호텔 메인 셰프 경력이 있는 주방장이라 음식이 매우 화려하고 풍성했다.

싱싱한 해산물을 이용한 플래터와 토마토가 베이스인 랍스터 스튜 외에도 연한 송아지고기를 이용한 스테이크가 푸짐하게 차려져 보는 이들에게 식욕을 돋게 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맛있는 음식이 있는 저녁은 즐거웠다. 사람들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성인이 된 지 오래된 사람들은 오랜만에 대학 시절 이야기로 웃고 떠들며 마셨다.

커플이 함께 참석한 이들은 연인이 대화에 소외되지 않도록 간간이 추가 설명을 곁들였다.

노아는 알렉스가 대학 시절, 배낭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에 놀랐다. 또한, 조정 선수로 활약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랜달과 아이작이 학점을 가지고 서로 끝없이 경쟁했던 이야기와 심지어 애인 숫자를 가지고 겨루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낄낄대며 두 사람의 바보 같은 경쟁을 비웃던 이브의 화려한 연애 편력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물론 이 때문에 약혼자인 벤자민의 표정이 굳어 버리는 바람에 잠시 분위기가 얼어붙기도 했다.

그들의 끈끈한 관계는 한두 해 이어져 온 게 아니었다.

노아는 알렉스가 편안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에 저까지 기분이 들떴다.

“잠깐, 잠깐. 우리 얘기 좀 그만하고 이제 두 사람 얘기 좀 들어 보자.”

들뜬 분위기를 잠시 가라앉히고 에릭이 알렉스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맞아! 난 알렉스가 평생 독신으로 지낼 줄 알았거든? 결혼 따위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짓이라는 표정으로 무게 잡더니 저렇게 눈이 번쩍 뜨이는 미인을 배우자로 맞이하다니. 저 능구렁이 같은 자식!”

“그래서, 어떻게 만난 거야?”

사람들의 시선이 알렉스와 노아에게 쏠렸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노아는 알렉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곤란한 듯 노아가 시선을 내리깔고 긴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알렉스는 손을 뻗어 노아의 왼손을 꼭 쥐었다. 노아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알렉스가 안심하라는 듯이 노아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는 이내 싱긋 웃으며 대답을 바라는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조부의 소개로 알게 됐지.”

“뭐? 회장님 소개?”

“그래. 조부하고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노아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숨이 턱 막히더라고.”

물론 그때 알렉스가 숨이 막힌 건 조부의 계략에 분노하느라 그랬던 거지만, 사소한 사실을 친구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를 속이려고 할 때는 진실과 거짓을 섞어야 하는 법이다.

“조부의 소개도 있고, 한눈에 맘에 들기도 해서 다른 놈이 채어 가기 전에 냉큼 내가 찜한 거지.”

알렉스의 시선은 이내 노아에게 향했다. 토닥토닥 두드리던 노아의 손을 잡아 올렸다. 긴장한 듯 잘게 떨리는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푸른 눈동자가 동요하고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노아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알렉스의 잿빛 눈동자가 한층 진해졌다. 달짝지근한 페로몬이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하리만큼 선명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집어삼킬 듯 꽂히는 시선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알렉스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입술이 닿았던 손등에서 시작된 열기가 온몸을 타고 돌았다.

“흠흠.”

갑자기 들리는 헛기침 소리에 노아는 화들짝 놀라 손을 잡아 뺐다. 알렉스가 이마를 찌푸리며 제이슨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자리 비켜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주 활활 타오르다 못해 여길 태우겠어.”

“어… 음. 우리가 눈치 없이 이 자리에 있는 것 같네.”

“왜들 그래? 한창 좋을 때잖아. 우리가 이해해 줘야지, 안 그래?”

잔을 탁 내려놓으며 이브가 랜달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위로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뭘 핀잔을 놓고 그러냐.”

“핀잔은 아니고 알렉스가 노아한테 반한 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 근데 우리는 노아 얘기는 안 들어 봤잖아? 안 그래요?”

에릭의 질문에 노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때요? 노아는 알렉스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서 결혼까지 했어요?”

흥미진진한 얼굴을 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노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눈치 보듯 알렉스를 힐끔대자, 말 잘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좋, 좋은 분이세요…. 제, 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셨고… 저한테 잘해 주시고… 또…, 듬직하고…. 어…, 그리고….”

뭐라고 더 말해야 하지? 어떻게 말하지?

당황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노아는 횡설수설해 댔다. 긴장을 너무 해서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찼다.

사람들이 의심하면 안 될 텐데, 하는 걱정만 가득했다. 어떻게든 알렉스의 장점을 쥐어짜 내느라 쩔쩔매던 그때 풋,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자 랜달이 미안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미안, 미안. 너무 귀여워서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해 얼굴이 시뻘게진 랜달이 탁자를 탁탁 치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듬직하대. 알렉스 장점이 고작 듬직이라니! 너는 노아한테 좀 더 잘 보여야겠다.”

푸하하하하. 제이슨이 이내 박장대소했다.

상황을 몰라서 노아는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노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불쌍한 알렉스! 제 파트너에게 고작 체격이 좋다는 평밖에 못 받다니!”

아이작이 이것 참 쌤통이라며 놀려 댔다.

진중한 표정의 에릭조차 피식피식 웃음을 흘려 댔다. 이브는 아예 깔깔대며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놀려 대기 시작하자 노아는 더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자신이 실수한 걸 깨달았다. 그냥 좋아한다고 할걸. 알렉스가 믿지 않아도 그렇게 말해야 했는데….

“다들 그만해. 뭐가 그리 재미있어? 노아는 그저 당황한 것뿐이야.”

“노아 진짜 귀엽다.”

이브의 농담에 노아는 휘둥그레 눈을 떴다. 장난스레 찡긋 윙크를 보내는 그녀의 눈길에 허둥지둥 고개를 떨구었다. 이브의 곁에 있던 벤자민이 입술을 깨물었지만 아무도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당황스러움에 노아의 뺨은 발그레 물들었다.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우리 알렉스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다 함께 건배나 하자.”

왁자지껄한 자리를 정리하자며 아이작이 건배를 제안했다.

모인 친구들은 와인을 가득 채운 잔을 높이 들고 결혼 축하 인사를 외쳤다.

표정을 굳히던 알렉스도 이내 친구들의 축하에 화답하며 저녁 식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너도 적당히 마무리하고 들어가 쉬어.”

“네, 그럼 대표님도 쉬십시오. 노아 씨도 푹 쉬어요.”

손님들이 각자 객실로 사라지고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조엘도 속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상큼하게 쉬러 가 버리자 메인 침실에는 이제 알렉스와 단둘뿐이었다.

노아는 침실 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선 채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앞서 걷던 알렉스가 발을 멈췄다.

“뭐? 듬직해? 좋은 분?”

그 순간 그가 몸을 휙 돌렸다. 노아는 똑바로 내리꽂히는 시선에 어깨를 움츠렸다.

“할 말이 그것뿐이야? 나 참.”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그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우물우물 말을 꺼내자마자 그가 성질을 버럭 냈다.

“계약 결혼이라고 아예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그랬어? 거짓말이라도 하면 됐잖아. 첫눈에 반했다든가 아니면 좋아서라든가!”

버럭 하고 내지른 소리에 노아의 고개는 더더욱 바닥으로 향했다.

“나한테 장점이 그렇게 없어? 어처구니없는 핑계를 대야 할 정도로? 네가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어디 가서 빠지는 사람이 아니야. 나 좋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친구들에게 놀림당한 게 뒤늦게 떠오른 알렉스는 화가 점점 더 치솟아 올랐다.

자신은 그래도 최대한 좋게 말해 주었다. 적당히 진실을 섞어서.

어디서도 이런 취급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자신만큼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고작 그딴 핑계를 대는지 기가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알렉스는 미니 바에서 위스키를 꺼내 잔에 따라 한 번에 들이켰다.

탁! 바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자마자 노아가 화들짝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기가 팍 죽은 모습을 보니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알렉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 눈치 없고 요령도 없는 노아에게 화내 봤자 오히려 저만 손해였다.

“다음번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연습이라도 해. 알았어?”

바닥만 내려다보던 노아의 고개가 아주 작게 끄덕끄덕 움직였다.

고작 제 어깨 밖에 안 닿는 저 작은 체구의 오메가가 여기서 더 쪼그라들기 전에 알렉스는 위스키 한 잔을 더 입에 털어 넣고 발길을 돌렸다.

“나 먼저 씻는다.”

딸깍.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긴장이 풀린 노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놀란 심장이 쿵쿵거리며 울려 댔다. 잘게 떨리는 손을 꼭 말아 쥐었다.

연습이라니. 뭘 연습하라는 거지….

그가 하도 펄펄 뛰어 대서 고개는 끄덕였지만 어째야 할지 몰랐다.

노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곤혹스러움에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알렉스의 장점이라니. 그에게 장점이 있을지는 모르나, 노아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다.

노아가 아는 알렉스는 자주 화를 내고, 눈빛이 차가우며 때때로 못 견딜 정도로 사람을 괴롭게 한다.

하지만 가끔 예상치 못한 친절을 베풀 때도 있다. 승마장에서 혼비백산해 제게 달려오던 그는 한 번도 제게 보여 준 적 없는 얼굴을 했었다. 안심하라고 어르는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다정했는지를 노아는 기억하고 있다. 단단하게 자신을 끌어안아 주던 그의 품이 얼마나 따스했는지도 기억한다.

그리고,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그 밤.

온전히 저 혼자만 기억하는 그 밤에 약물로 인해 러트가 왔음에도, 그는 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노아는 그의 페로몬을 허락했다. 괴로워하는 그를 달래 주고 싶었다.

서릿발처럼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한없이 무너져 내린 걸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동정이었을까? 어쩌면 그 직전에 그의 부모님 얘기를 들어서였는지도 모르지.

뭐가 되었든 노아는 이미 그에게 흔들렸다.

그의 장점 같은 건 모른다.

하지만 냉정한 사람이 적선하듯 가끔 보여 주는 사소한 친절에 노아는 종종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드는 동시에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쳤나 봐….

노아는 무릎을 세웠다.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는 두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왜 그러고 있어? 어디 아파?”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그가 성큼 다가왔다.

얼굴을 번쩍 들자, 반라의 그가 몸을 숙이고 있었다.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카락은 젖은 채로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지 왜 그러고 있어. 사람 놀라게.”

넓게 떡 벌어진 맨 어깨가 바로 코앞이었다. 방금 샤워하고 나온 탓에 샤워클렌저의 은은한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순식간에 얼굴로 열이 몰렸다.

“괜, 괜찮아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난 노아는 후다닥 그를 피했다.

“저, 저 샤워할게요!”

어? 하고 알렉스가 반응하기도 전에 노아는 이미 욕실로 도망쳐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뒤에 남겨진 알렉스는 설핏 눈썹을 찌푸리며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려는데 무언가 콱 틀어막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천천히 눈을 뜨긴 했지만, 노아는 여전히 반쯤 잠에 취한 상태였다.

흐린 시야 너머로 단단한 무언가가 비쳤다. 볼록 솟은 목울대와 칼라 사이로 언뜻 보이는 빗장뼈가 노아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저게 뭐지?

반쯤 잠에 취한 노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물을 명확하게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긴 속눈썹이 나붓대길 수십 번, 잠을 완전히 털어 내고 나자 노아는 급히 숨을 삼켰다.

알렉스가 왜….

제 몸을 사슬처럼 꽁꽁 얽고 있는 건 알렉스의 긴 팔다리였다. 그가 내쉬는 숨결이 정수리에 느껴질 정도로 밀착한 상태였다.

분명 지난밤 노아는 알렉스와 사이에 사람 한 명은 더 잘 수 있는 공간을 두고 떨어져 누웠다.

꾸물대며 침대 가장자리에 찰싹 달라붙는 노아를 보고는, 네 가까이 절대로 안 가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 큰소리 땅땅 친 건 알렉스였다.

오히려 자긴 잠버릇 따윈 없으니 너만 얌전하게 자면 닿을 일은 없을 거라고 했었다.

그랬는데… 왜 내가 알렉스 품에 있는 거지?

노아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아, 아니지. 이럴 때가 아니야. 알렉스가 깨기 전에 먼저 일어나야 해.

팔을 빼내려고 꼼지락거렸다. 알렉스가 눈을 뜨면 화를 낼 거 같았다. 노아는 그가 깨지 않을까 걱정하며 슬며시 눈을 치켜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깊이 잠이 든 그는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얼굴을 찌푸리거나 눈썹을 꿈틀거리지 않는 평온한 표정의 그를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어느 한 군데 삐뚤어진 곳 없이 반듯한 얼굴이었다.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검고 진한 눈썹은 다듬은 것처럼 반듯하고 도드라진 눈썹 뼈와 대조적으로 깊이 팬 눈매는 그윽하기 그지없다.

쭉 뻗은 콧날과 각이 진 턱 선은 조각도로 깎아 낸 듯 완벽하다.

항상 못된 말만 쏟아 내는 저 입술도 다물고 있을 때만큼은 예쁜 모양이었다.

노아는 그가 일어나기 전에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도 까맣게 잊은 채 멍하니 넋을 놓고 그를 감상했다.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조각이 아닌지 확인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콩닥콩닥 심장이 뛰어 댔다.

아…. 페로몬이….

알렉스의 페로몬이 후각을 자극했다. 흉포하거나 서릿발처럼 차가운 느낌이 아닌, 봄날의 따스한 햇볕처럼 포근한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향이었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그의 페로몬이 제 안에 닿을 수 있도록 노아는 숨을 한껏 크게 들이마셨다.

아주 조금만…. 그냥 짧은 시간이면 족하다. 온전히 그를 느낄 수 있는 시간. 한낮의 꿈처럼 금방 깨어질 이 평화가 조금이라도 오래가기를 잠시 바랐다.

“…음….”

몽롱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노아는 그가 뒤척이는 순간,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허리를 꽉 조이고 있는 그의 팔을 억지로 떼어 냈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듯 입매가 씰룩거리더니 이내 그가 눈을 떴다.

“…뭐야….”

잠에 취한 듯 낮게 깔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노아는 버둥거리며 그를 밀어냈다.

그 순간 그가 벌떡 일어났다.

“너, 뭐야? 아니 지금….”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알렉스가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일어나려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 자는 사이에 무슨 짓 하려고 했어? 아니 그보다 왜 이렇게 바짝 붙어 있어?”

오히려 자신을 비난하는 그의 어조에 노아는 억울했다.

“저, 전 그냥 가만히 누워 있었어요. 여긴 제 자리고….”

이거 보라며 노아는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가리켰다. 노아의 손짓에 따라 가장자리를 한 번, 그리고 노아 얼굴을 한 번. 그다음엔 천천히 제가 누웠던 자리를 살피던 알렉스가 이내 표정을 구겼다.

노아 말대로 노아는 여전히 침대 가장자리에 있었고, 오히려 알렉스가 노아 자리를 침범한 상태였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렉스는 잔뜩 눈썹을 찌푸린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이제 일어나도 되죠?”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보며 노아는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막 침대를 빠져나가려던 찰나, 갑자기 몸이 당겨졌다.

“아….”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자 알렉스가 오히려 놀란 표정으로 잡은 노아의 팔을 확 뿌리쳤다.

마치 붙잡은 건 자기 의지가 아니었다는 듯,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노아는 잠시 어째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천천히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가 왜 자신을 잡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물을 용기가 없었다.

힐끔 그를 곁눈질했다. 뭔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노아는 그가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욕실로 향했다.

노아가 욕실로 사라진 방 안에서 알렉스는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왜 그랬지?

제 품에서 빠져나가는 노아를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잡아챘다. 몹시 아끼는 소중한 무언가가 제 손을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 익숙함은 대체 뭐지? 마치 언젠가 겪었던 일처럼.

노아와 함께 누운 일 같은 게 있을 턱이 없는데 어째서 이리도 익숙하지.

알렉스의 미간은 한층 더 구겨졌다. 머릿속에 감춰진 무언가가 안개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았다. 기분 나쁜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착각이겠지? 착각이 아니면 내가 돌았거나.

손바닥에 남은 감촉을 지우기라도 하듯이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터무니없는 착각에 빠져 엉뚱한 생각을 한 게 분명하다.

그래. 엉뚱한 상상이야.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 거지.

알렉스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별일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 * *

짙푸른 바다가 드넓게 펼쳐졌다. 바람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이르게 찾아온 더위는 쨍하게 내리쬐는 햇볕과 함께 요트를 뜨겁게 달구었다.

가벼운 아침 식사 후 알렉스의 친구들은 갑판에 모여 오랜만의 여유를 각자 즐기는 중이었다.

이브는 피닉스호에 비치되어 있던 스킨스쿠버 장비를 빌려 약혼자와 함께 물속으로 들어갔고, 랜달과 아이작은 손바닥만 한 수영복을 입고 바다로 다이빙하며 수영을 즐겼다.

나머지 사람들은 메인 갑판에 마련된 수영장 근처 덱 체어에 비스듬히 누워 승무원이 가져다주는 칵테일을 마시며 일광욕을 즐겼다.

“이게 얼마만의 여유인지 모르겠네.”

“종종 이런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

여유로운 표정으로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에릭의 곁에서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수영장에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쟁하고 있는 제이슨과 알렉스를 바라보던 아이리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기를 구경하는 노아를 불렀다.

“노아는 수영 안 해요? 술도 안 마시는 거 같고….”

“아…. 수영을 못 해서요….”

노아는 괜히 쑥스러워 머쓱한 표정으로 목 뒤를 문질렀다.

“미안해요. 당연히 할 거라고 생각했네요. 그래요. 못 할 수도 있죠. 괜한 걸 물었네요.”

잠깐 놀란 표정을 했지만 이내 아이리스가 사과했다.

노아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리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물길을 가르던 소리가 멈췄다.

“내가 이겼다니까.”

“무슨 소리야, 내 손끝이 먼저 닿았어.”

막 경기를 끝낸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물 위로 올라왔다.

“어이. 알렉스! 노아가 수영을 못 한다는데 네가 가르쳐 주지그래?”

막 물 밖으로 나와 승무원이 건네는 수건을 받아 몸을 닦던 알렉스가 멈칫했다.

“어? 노아! 수영 못 해요? 내가 알려 줄게요! 저 잘 가르쳐요.”

제이슨이 냉큼 손을 번쩍 들더니 달려왔다. 물기도 닦지 않은 채 달려온 터라 그가 지나온 목재 바닥에 물 얼룩이 잔뜩 졌다.

“아, 아니… 괜찮아요….”

당황한 노아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지만, 제이슨은 막무가내였다.

“왜요? 수영은 미리 배워 두면 좋아요. 혹시 제가 못 가르칠까 봐 그런 거예요? 조금 전 내 실력 못 봤어요?”

“보긴 봤는데….”

“내가 알렉스 이긴 것도 봤죠?”

그건 못 봤지만, 제이슨에게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적극적으로 자기 어필을 시작한 제이슨에게 단호하게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노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제이슨. 그만해. 알렉스가 있는데 왜 네가 나서?”

“무슨 소리야? 원래 가까운 사람에게 배우는 게 더 힘든 법이라고!”

에릭의 핀잔에 제이슨이 열성적으로 항변했다.

“내가 잘 가르쳐 줄게요. 이리 오실래요?”

손을 내밀며 재촉하는 제이슨의 등 뒤로 불쑥, 몸을 내민 알렉스가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제이슨. 호의는 고맙지만 내 파트너의 수영 강습은 내가 알아서 할게.”

“어? 왜? 내가 해도 돼.”

포기 못 한 제이슨이 아쉬움에 구시렁댔지만, 알렉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노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알렉스에게 바짝 다가섰다.

“노아도 내가 더 편한 것 같은데 그만 포기하지?”

잘난 척 턱을 치켜든 알렉스의 말에 제이슨이 실망했다.

“하…. 어쩔 수 없네. 노아. 알렉스가 못 가르친다 싶으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줘요. 그땐 내가 가르쳐 줄게요.”

“감, 감사합니다.”

아쉬워하는 그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자마자 휙 하고 몸이 뒤로 딸려 갔다.

“저 녀석한테 감사할 게 아니라 앞으로 나한테 감사해야지. 네 수영 강습은 내가 해 주는데.”

그가 제 허리를 감은 탓에 맨몸의 그에게 밀착한 채였다. 물기가 남은 그의 피부에 맨살이 닿자 몸이 절로 딱딱하게 굳었다.

“다른 애들이 보니까 긴장 풀어.”

그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그의 숨이 닿자 뒷덜미가 간지러웠다.

“그동안 수영도 안 배우고 뭐 했어?”

“배울 기회가 없었어요.”

“보통 학교에서 배우지 않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알렉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릴 때는 아빠 품에 안겨 물장구 몇 번 친 게 다였고 학창시절엔 카일의 충고로 다른 핑계를 대고 수영 수업에는 빠졌다. 노아는 이런 얘기를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저 때문에 굳이 안 그러셔도 돼요. 수영, 안 배워도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아니면, 저 녀석에게 배우고 싶은 거야?”

알렉스가 눈을 번뜩였다. 노아는 재빨리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릿발처럼 날카롭던 그의 눈빛이 금세 누그러졌다.

노아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지시에 따라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조심스레 물에 들어갔다.

“우선 여기 바를 잡고 몸에 힘을 빼고 다리를 쭉 뻗어 봐.”

노아가 바를 잡고 어설프게 몸을 띄우자 그가 옆으로 다가와 섰다.

“……!”

알렉스의 손이 허리를 잡고는 강제로 몸을 띄웠다. 그 순간 깜짝 놀란 노아는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다리를 내렸다.

“몸에서 힘을 빼라니까. 빠질 거라고 생각하고 버둥거리면 오히려 더 가라앉아.”

“죄, 죄송해요.”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제게 닿은 그의 손길이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노아는 어떻게든 표정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가르치겠다는 생각 외엔 다른 의도가 보이지 않는 그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목을 쭉 빼려고 하지 마. 그럼 더 힘이 들어가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얼굴의 반을 물에 담근다고 생각하고 엎드려.”

알렉스의 손은 또다시 노아의 허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놀라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그가 만지고 있는 부분이 신경 쓰였다.

노아는 그의 설명대로 몸에서 힘을 빼려고 해 봤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에 자꾸만 발을 바닥에 디디려 했다.

몇 번 더 실랑이하다, 겨우 뜨는 것까지 하고 나자 시원한 물속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아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뜨는 게 됐으니까 반은 왔네. 이다음은 쉬워. 물에 뜬 상태로 발차기만 제대로 하면 돼.”

말은 쉬웠다. 발차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막상 물에 뜬 채로 발차기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다시 힘이 들어가 자꾸만 몸이 가라앉았다.

노아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알렉스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자세를 바꿨다.

이번에는 아예 양손으로 노아의 배와 가슴을 받쳐 가라앉지 않도록 했다.

노아가 또다시 움찔 몸을 파드득대더니 거의 울상이 되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처음엔 하나도 못 알아듣더니 지시에 따라 조금씩 따라오는 노아를 알렉스는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얼굴에 땀이 맺혀 있었다.

힘이 드는 모양인지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팔랑대는 긴 속눈썹 끝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매달렸다가 떨어졌다. 땀방울이 발그레 달아오른 뺨을 타고 쪼르륵 흘러내렸다.

색색 숨을 내쉬는 입술은 살짝 벌어져 이따금 분홍빛 혀가 살짝 보였다가 모습을 감췄다.

단전 깊숙한 곳이 뜨거워졌다.

노아에게 닿은 손바닥이 저려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에서 노니는 노아의 길고 하얀 몸이 빛을 받아 물과 함께 반짝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일순 머릿속이 멍해졌다.

온전히 제게 몸을 맡긴 노아만이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온 세상에 마치 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쳤군. 알렉스는 방금 떠올린 생각을 털어 내듯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는 눈을 돌렸다.

길게 쭉 뻗은 다리가 곧았다. 물장구치는 긴 다리가 쉼 없이 움직였다. 노아가 차 대는 물방울이 몇 번이고 수면 위로 우수수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

객관적으로 취향도 아닌 마른 몸인데 어째서 눈을 뗄 수 없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노아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노아가 언제 또 꼬르륵 가라앉을지 모른다는 핑계를 속으로 중얼대면서.

신나게 물장구치던 움직임이 느려졌다.

“왜? 계속 차.”

알렉스는 갑자기 멈춰 버린 노아에게 이마를 찌푸렸다. 가만히 멈춰 선 채로 숨을 할딱거리며 노아가 얼굴의 물기를 닦았다.

“조, 조금만 쉬면 안 돼요?”

때마침 그들을 지켜보던 제이슨이 덱 체어에 앉아 외쳤다.

“알렉스! 초심자를 첫날부터 죽일 참이야? 적당히 해!”

“노아. 이리로 와서 음료수 좀 마셔요.”

이때다 싶었는지 아이리스가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노아를 불렀다.

갑자기 짜증이 났다. 친구들을 괜히 불렀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쯧. 알렉스는 혀를 찼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다음엔 저택 수영장에서 연습하면 되겠네.”

“다, 다음에요…?”

“겨우 이 정도로 수영 배웠다고 하는 거 아니지? 아직 혼자 헤엄도 못 치잖아.”

그건 그렇지만…. 노아는 실망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해야 하나. 벌써부터 걱정이 밀려왔다.

노아가 고민하는 사이, 수영장 밖으로 먼저 나간 알렉스가 머리에 남은 물기를 손으로 털어냈다.

노아는 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사다리로 걸어가 발판을 디뎠다.

“아….”

물의 저항 때문인지 발판을 딛고 올라가는 게 힘들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힘주는 것도 어려웠다.

탁탁, 손으로 머리카락 물기를 털어 내던 알렉스가 왜 그래? 하며 다가왔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다.

“죄송해요. 다리가….”

“겨우 그걸로 근육통이야? 참나.”

어이가 없다는 듯 알렉스가 헛웃음을 짓더니 손을 내밀었다.

“잡아. 내가 도와주지.”

우물쭈물 망설이던 노아는 어쩔 수 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알렉스의 손을 잡자마자 그가 팔에 힘을 주어 당겼다.

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노아는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와 허벅지가 아주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알렉스는 혀를 쯧쯧 차며 노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리 펴 봐. 이럴 땐 바로바로 풀어야 해.”

“아!”

알렉스가 노아의 발목을 붙잡아 자기 무릎 위에 올렸다. 망설임 없이 이내 그는 발바닥의 아치를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괜, 괜찮…. 앗.”

낯선 둔통에 발가락이 오므라졌다. 노아는 온몸을 파드득대며 그를 붙잡았다.

“정, 정말 괜찮아요. 금방 풀릴 거예요.”

“너무 한사코 거절하면 친구들이 이상하게 볼 거야. 얌전히 있어.”

그의 말대로 덱 체어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의 눈에 가득한 게 호기심인지 흥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여기서 그를 거부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만은 분명했다.

노아는 반쯤 울상을 지으며 그에게 몸을 맡겼다.

발바닥 아치를 꾹꾹 누르던 그의 손길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왼손으로 가느다란 발목을 말아 쥐고 오른손으로 복숭아뼈를 쭉 타고 오르더니 단단한 종아리를 손 전체를 이용해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노아의 어깨도 움찔움찔 떨렸다. 갑작스러운 운동에 놀란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그가 누르는 곳마다 아팠다.

하지만 처음에는 꽤 아팠던 곳이 점점 부드럽게 풀리면서 통증은 줄어들었다. 힘을 줘 꾹꾹 누르던 강도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부드럽게 바뀌었다.

피부를 스치는 손길에 노아는 주먹을 꼭 쥐었다. 발가락이 오그라들 정도로 간지러웠다. 야릇한 감각이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는 마사지하는 것뿐이야.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노아는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알렉스의 손이 어느 틈엔가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자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며 숨을 토했다.

“으….”

입 밖으로 내뱉어진 신음에 노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던 알렉스의 손도 멈췄다.

그의 미간이 한순간 확 구겨졌다. 갑자기 불에 덴 듯이 황급히 손을 뗐다.

“이 정도면 된 거 같네.”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툭 내뱉은 알렉스가 벌떡 일어났다. 휙 몸을 돌려 덱 체어로 가려던 그가 발을 멈추더니 다시 몸을 돌렸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비치타월을 들더니 그대로 노아의 어깨에 그것을 둘러 주었다.

“몸이 차가워질지도 모르니까 이거 감고 있어.”

할 말을 끝낸 알렉스가 먼저 친구들 쪽으로 움직였다.

노아는 꾸물꾸물 일어나 어깨에 감긴 비치 타월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친절하게 굴고 있는 이유는 역시 친구들 때문이겠지.

“노아! 이쪽으로 와요.”

가만히 알렉스를 쳐다보던 노아는 아이리스가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약혼자와 둘이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던 이브도 다이빙 슈트를 입은 채로 나타났다.

“후아. 오랜만에 물질했네. 나도 칵테일 줘! 진한 걸로!”

수영장이 아닌 바다에서 놀던 랜달과 아이작도 함께 돌아왔다. 모든 친구가 다 갑판에 모이자 금세 분위기는 왁자지껄해졌다.

노아도 어느 틈엔가 그들 사이에 끼어 승무원이 가져다주는 음료수를 홀짝거렸다.

알렉스와는 다르게 그의 친구들은 노아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거나 탐색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노아는 낯선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그들이 흘리는 자신이 모르는 알렉스의 얘기를 듣는 것도 좋았다.

서로의 일상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화제가 어느 순간 커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에릭이랑 아이리스가 결혼한 지도 벌써 3년이었던가?”

“그렇게 됐지.”

“진짜 세월 빠르다. 네 결혼식 본 게 엊그제 같은데.”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는지 랜달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이브는? 넌 언제 결혼해? 약혼한 지 좀 되지 않았어?”

제이슨의 질문에 이브가 어깨를 으쓱했다. 벤자민의 시선이 이브에게 머물렀지만 그녀는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벤자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 이런저런 문제로 아직 미루고 있어. 내가 너무 바빠서 말이야.”

“저런…. 벤자민이 실망했겠네.”

“아. 전 괜찮아요. 이브에게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까. 그냥…,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벤자민의 애절한 눈빛이 이브에게 닿았다.

“이야. 이브 넌 진짜 벤자민한테 잘해. 벤자민만큼 널 위해 주는 사람도 없어.”

아이작의 말에 이브는 대답 대신 칵테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벤자민의 애절한 눈빛이 더욱 간절한 빛으로 바뀌었다. 벤자민은 초조한 듯 그녀의 곁에 더욱 찰싹 달라붙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했지만 아무도 그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다. 커플 사이의 문제에 섣불리 끼어들지 않는 게 좋았다.

“나도 빨리 결혼하고 싶다….”

아이작이 부럽다는 듯 턱을 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하고 결혼할 상대가 있긴 하냐? 너 그 바람둥이 기질을 일단 버려야 될 거 같은데?”

늘 그랬든 랜달이 장난치듯 아이작을 건드리며 도발했다.

“왜 남 말 해? 너도 만만치 않잖아.”

“난 아직 결혼 생각은 없거든. 좀 더 솔로 생활을 즐길 거야.”

“결혼도 결혼이지만 아기 갖고 싶어. 왜 우리 중엔 아무도 애 낳은 놈이 없어? 두 사람은 가족계획 없어?”

아이작의 시선이 이번엔 알렉스에게 향했다.

“가족계획?”

“그래! 노아가 오메가니까 아기 낳을 수 있잖아. 노아는 아이 좋아해요?”

“네? 저, 저요?”

아이작이 두 눈을 반짝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식 성격은 별로라도 겉가죽은 멀쩡하니까. 거기다 노아 닮으면 엄청난 아기가 나올 텐데!”

“좋아해요, 아이….”

“오. 그래요? 잘됐다! 언제쯤 아이 갖기로 했어요? 알렉스랑 그런 얘기는 나눠 봤어요?”

신이 난 아이작이 질문을 쏟아 냈다.

노아는 대답 없이 슬쩍 웃기만 했다.

아이. 알렉스와 저의 아이라니…. 아이작은 절대로 보지 못할 존재였다.

진짜가 아닌 이 관계에서 아이는 바랄 수도, 꿈꿀 수도 없는 존재였다.

아이가 있는 가정을 꿈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꿈을 알렉스와는 이루지 못하겠지.

노아는 음료수 잔만 만지작거렸다.

“우리 가족계획을 왜 너한테 알려 줘야 해? 신경 꺼.”

“아, 왜? 결혼도 몰래 하더니 혹시 2세도 몰래 낳을 거냐?”

“몰래 낳든 안 낳든,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잖아. 지금 선 넘은 거 알고 있지?”

갑자기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알렉스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호기심으로 말을 꺼낸 아이작은 이 자식 갑자기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됐다, 내가 괜한 호기심을 부추겼나 보네. 오케이. 이 얘기는 다시 꺼내지 않을게.”

다른 친구들까지 가세해서 아이작이 호기심이 지나쳤다고 달래자, 알렉스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눌렀다.

아이가 갖고 싶다고? 누구랑? 설마 그 자식이랑?

둘 다 오메가라 아이 따윈 못 가진다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알렉스는 자신이 왜 이리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 따위 무슨 상관인가. 노아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저 대답이 신경을 긁어 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물에 젖은 금빛 머리카락이 작은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고개 숙인 탓에 긴 목덜미가 한눈에 들어왔다. 자주 움츠러드는 어깨는 의외로 곧게 일자로 쭉 뻗어 있다.

알렉스의 시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수영복 아래 드러난 다리가 미끈하다. 오메가라 그런지 체모도 거의 없었다. 한 손에 잡히는 가느다란 발목은 연약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자처럼 말랑하지는 않았다.

알렉스는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손아귀에 잡히는 노아의 살결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딱딱하게 굳은 근육을 주무르던 손길에 파르르 떨던 피부의 감촉이 떠올랐다.

노아가 딴 놈의 아이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낳을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아이를 좋아하니 분명 낳게 되겠지.

심지에 불이 붙은 듯 내부가 뜨거워졌다. 불길은 애초에 꺼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알렉스를 활활 태우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열기의 정체가 이제 짜증인지 욕망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노아 곁에 달라붙어 속살거리는 친구 녀석들을 죄다 쫓아내고 침실에만 가둬 두고 싶은 욕망이 불쑥 치달아 올랐다.

즐겁게 대화를 즐기던 이들이 심상치 않은 표정의 알렉스를 확인하곤 조금씩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에릭은 아이리스를 데리고 좀 쉬어야겠다면서 방으로 사라졌고, 이브는 샤워나 해야겠다면서 일어났고, 벤자민도 제 약혼자를 따라갔다.

제이슨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괜히 나 때문인 거 같다고 미안해하면서 갑판을 떠났다.

랜달과 아이작은 내기 포커 한 판 어때? 하며 게임룸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갑판이 텅 비었다.

얼음이 반쯤 녹은 잔을 만지작거리며 노아는 알렉스의 눈치를 살폈다.

왜 기분이 나빠진 걸까.

별로 화낼 만한 일도 아니었는데 알렉스가 지나치게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아이 얘기가 문제였나? 하고 혼자 갸웃거리다 노아는 이내 깨달았다.

알렉스는 오메가를 싫어한다. 알파가 아이를 가지려면 오메가와 관계해야 한다. 그의 취향은 베타이고, 알파와 베타 사이에 아이가 생길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알렉스는 자신의 취향 때문에 아이를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그랬는데 제이슨이 아이 얘기를 들먹거리니 그게 거슬렸던 거겠지.

아. 그렇구나.

그렇게 이해한 노아는 고개를 들다가 깜짝 놀랐다.

그의 시선이, 새까맣게 가라앉은 무거운 눈빛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심코 흠칫 어깨가 떨릴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었다.

“알, 알렉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에 노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목소리가 떨렸다.

석상처럼 미동도 없는 그의 모습이 이상했다. 어째서 뒷덜미가 오싹오싹한 걸까.

본능적으로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을 꽉 움켜쥔 채로 노아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노아가 한 걸음 물러서는 만큼 그가 성큼 다가왔다. 그 때문에 오히려 두 사람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아이, 낳고 싶어?”

낮게 속삭이는 말을 처음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네?”

“아이 말이야.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 좋, 좋아해요, 아이는. 다, 다들 좋아하잖아요.”

“아니, 내가 묻는 건 아이 낳고 싶냐는 거야.”

“……?”

노아는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아이는… 혼자 낳을 수 없잖아요.”

오메가로 발현한 후, 제 몸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걸 구체적으로 떠올린 적은 없었다.

“그래. 아이는 혼자 낳을 수 없지.”

마치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그가 노아의 말을 되뇌었다.

“그럼 상대가 있다면 아이를 낳겠다는 거군?”

노아는 그가 왜 저렇게 누군가를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렉스…. 괜찮아요? 어,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지금은 아니겠고…. 언제? 이 결혼이 끝나면 곧바로 다른 상대를 찾을 건가? 아니면 인공 수정이라도 해서 네 소중한 친구와 함께 키우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알렉스, 정말 아픈 거 아니죠?”

“대답해!”

그의 고함에 깜짝 놀라 노아는 들고 있던 잔을 놓쳤다.

쨍강! 놓친 유리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어졌다.

“아! 잠, 잠깐만요. 이거 깨졌…. 앗!”

그에게 팔이 잡히고 잡아끄는 힘에 몸이 휘청했다. 단단한 그의 가슴에 얼굴이 부딪쳤다.

“왜 자꾸 말을 돌려? 애 낳을 거냐고 물었잖아!”

“놔, 줘요. 아파요…….”

그에게 잡힌 팔이 아팠다. 팔을 떨쳐 내려 몸을 버둥거렸지만 팔을 움켜쥔 손은 오히려 더욱 세게 자신을 압박하기만 했다.

무섭게 일렁거리는 눈동자가 똑바로 노아를 쏘아보았다.

“똑바로 들어. 이 결혼이 끝나기 전까진 넌 내 배우자고 알렉스 헌트의 부인이야.”

“알,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설사 이 결혼이 끝난 후라도 네가 알렉스 헌트의 부인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이혼 후의 네 행적도 결국 헌트의 일이 된다는 거야. 알아들었어?”

노아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딴 새끼 애 가지는 건 절대로 내가 용납 못 해.”

뭐가 되었든 노아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상하게 굴고 있는 게 무서웠다. 사나워진 태도에 노아는 빨리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놔주세요….”

알렉스는 그제야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 자리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에 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가 팔을 놓자마자 노아는 서둘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노아가 발을 내디딘 그곳에는 조금 전 깨어진 유리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야!”

발바닥이 찢기는 통증에 휘청하는 순간 알렉스가 깜짝 놀라 노아를 잡아당겼다.

“노아!”

괜찮다고 말을 꺼낼 사이도 없이 알렉스가 노아를 번쩍 안아 올렸다.

“의료진 불러와!”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에 안쪽에서 승무원이 달려왔다. 알렉스는 노아를 덱 체어에 내려놓고 곧바로 노아의 발을 살폈다.

발바닥 뒤가 찢어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비켜 주십시오. 확인하겠습니다.”

안쪽에서 응급 키트를 들고 온 간호사가 알렉스를 밀어내고 상처를 살폈다.

“무슨 일 있어요?”

선실에서 쉬고 있던 조엘이 소란에 밖으로 나왔다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노아 씨! 다쳤어요? 아니, 어쩌다가.”

말을 하다 말고 서슬 퍼런 알렉스를 확인하곤 조엘은 뭔진 모르지만, 원인은 고용주라고 짐작했다.

“헬기 부를까요? 병원으로 가야 할 정돕니까?”

상처 부위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소독과 치료를 마친 간호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짝 찢어진 겁니다. 꿰맬 정도는 아니네요. 처치는 했으니까 당분간 물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 됩니다.”

“다행이네요.”

조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알렉스를 힐끔거렸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그는 간호사가 노아의 발에 붕대 감고 있는 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작 다친 당사자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다지 아파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노아, 괜찮아요?”

“네. 좀 쓰리긴 한데… 많이 다친 건 아니에요. 그냥 좀 따갑네요.”

“어쩌다가….”

하고 물으려던 조엘은 바닥에 떨어져 깨진 유리잔을 확인하고는 승무원에게 치워 달라고 말했다.

“크게 다친 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처치를 끝낸 간호사가 응급 키트를 들고 일어났다.

“오늘 하루 정도는 욱신거릴 수 있으니까 약 드릴게요.”

간호사가 건네는 약을 받아 든 노아는 감사하다며 인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꾸물거리는 순간, 알렉스가 성큼 다가왔다.

노아가 흠칫 놀라는 사이 알렉스가 몸을 숙였다.

“알렉스!”

“가만히 있어. 괜히 움직이다가 덧나지 말고.”

알렉스가 노아를 안아 올리자 조엘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노아가 내려 달라고 버둥거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대표님이 무슨 일이야. 왜 저래?

선실로 사라지는 고용주를 바라보며 조엘은 모를 일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후 내도록 침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알렉스가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은 탓이었다.

걸을 때 발바닥이 조금 욱신거리긴 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닌데 잠시라도 일어날라 치면 알렉스가 눈을 번뜩이는 통에 종일 침대에 기대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식사를 가져오겠다며 알렉스가 나가고 나서야 노아는 뻣뻣한 어깨를 주물렀다. 시종일관 그의 시선을 받고 있어서인지 저도 모르게 긴장한 모양이었다.

오늘 알렉스는 종일 이상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로 화를 내더니 자신이 다친 걸 알자마자 대하는 태도가 확 바뀌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곰곰이 오늘 일을 떠올려 보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녔다.

헤어지고 나서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닌가?

노아는 혹시 제가 혼전 계약서 내용을 너무 대충 읽었나 걱정했다.

조엘이 내 계약서를 갖고 있을 텐데 달라고 할까.

노아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핸드폰을 찾다가 그만뒀다. 주말까지 알렉스 뒤치다꺼리하느라 바쁜 조엘을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가서 보여 달라고 하면 되겠지.

침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막 침대에서 발을 내릴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내일은 예정대로 돌아가는 걸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시간 맞춰 헬기 대기시켜.”

“알겠습니다.”

두런두런 들린 목소리는 조엘이었다.

노아는 침대를 벗어나 문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노아 씨. 발은 좀 어때요?”

막 인사하고 나가려던 조엘이 노아를 발견하곤 걱정스레 물었다.

“발은 괜찮아요. 그보다 우리 내일 돌아가요?”

“네. 짐은 놔두세요. 제가 빠짐없이 챙길게요. 몸도 안 좋은데….”

“짐 정도는 제가 정리할 수 있어요.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요, 뭐.”

“네가 하긴 뭘 해? 놔둬. 조엘이 하는 일이 그런 거야. 왜 남의 일을 뺏으려고 해?”

별거 아닌 일로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 사양했더니 대번에 알렉스가 딴지를 걸었다.

“넌 그만 가 봐.”

그가 고갯짓으로 조엘을 쫓아내더니 테이블에 음식이 든 쟁반을 내려놓고 성큼 다가왔다.

“왜 움직여? 그러다 덧나면 어쩌려고.”

“네? 아니, 괜찮….”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알렉스가 번쩍 노아를 안았다. 당황할 틈도 없이 단 두 걸음 만에 노아는 푹신한 일인용 소파에 앉혀졌다.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힐끔거렸다.

고작 발이 좀 찢어졌을 뿐인데, 마치 다리라도 부러진 것처럼 대하는 알렉스가 적응되지 않았다.

“뭘 그렇게 멀뚱히 보고만 있어?”

“네? 아, 아니요.”

“먹어. 아픈 것도 잘 먹어야 금방 아무는 법이야.”

발의 상처와 먹는 게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아는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접시 위의 음식에선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있었다. 치즈를 잔뜩 올린 구운 랍스터와 막 구워 여전히 따끈한 식전 빵. 거기다 고소한 냄새가 폴폴 풍기는 소고기 스튜까지.

음식은 하나 같이 푸짐하고 먹음직스러웠다.

작은 커피 테이블이 꽉 찰 정도로 양이 많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감시하는 듯한 그의 시선이 제게서 떠나질 않았다.

부담스러움과 긴장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언제까지고 지켜볼 것 같은 알렉스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노아는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손톱 끝이 조금 헤진 노아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나이프를 움직여 랍스터를 조금 잘라 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작게 벌린 입술 사이로 언뜻 내보이는 분홍색 혀가 알렉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맛을 음미하듯 턱과 볼이 아주 조금씩 꿈틀대더니 푸른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맛있는 모양인지 표정이 부드럽게 바뀌었다. 느릿하던 손놀림이 아주 약간이지만 빨라졌다. 랍스터 구이를 맛있게 다 먹고 나서는 이번엔 스튜를 살짝 맛본다.

수저로 살짝 진한 국물을 떠 입으로 가져간다. 그 역시 맛있어 보였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식욕이 당겼다.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배 속이 꿈틀거리며 알 수 없는 욕망이 치달아 올랐다.

알렉스는 잔에 물을 콸콸 따르고는 그대로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하지만 미칠 듯한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다. 알렉스는 연거푸 물 두 잔을 들이켰다.

“알렉스는 안 먹어요?”

의아한 듯 노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난 먹고 왔어.”

대답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오물대는 노아의 입술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찌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먹는 건 쉽지 않았다. 알렉스의 시선이 닿는 곳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처럼 맛있는 식사였으나 한번 그의 시선을 의식했더니 더는 음식을 즐기기가 어려웠다.

결국 먹는 둥 마는 둥 음식 대부분을 남기고 노아는 물을 마셔 입안을 헹궜다.

“왜 안 먹어? 설마 다 먹었어?”

“네…. 배불러요.”

“그렇게 먹으니까 살이 안 찌는 거 아니야. 손목은 또 그게 뭐냐.”

막 포크를 내려놓은 노아의 손을 알렉스가 건드렸다.

노아가 깜짝 놀라 멈칫했다.

이내 손을 거둔 알렉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페로몬이….

묵직하면서도 진한 페로몬이 노아의 후각을 자극했다. 노아는 손을 오므린 채 가만히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슬며시 제게 감겨드는 페로몬이 평소와 다르게 달콤했다.

노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점점 고개를 떨구었다.

어쩌지….

뺨이 달아올랐다. 몸속 어딘가에 작은 불꽃이 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말해야 할까? 페로몬이 새어 나오고 있다고.

노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한참을 망설였다. 노골적인 시선이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게 느껴졌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망설이던 찰나, 그의 손이 불쑥 시야로 들어왔다.

“다 먹었으면 치우지.”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리고는 그는 아무렇지 않게 음식이 남은 접시를 치우고, 포크와 나이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 저도….”

노아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둬.”

“아니요. 이건 제가….”

노아가 비어 있는 잔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그도 노아가 건드린 잔으로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이 겹쳐졌다.

흠칫 놀라 손을 빼려는데, 어째선지 손등을 덮은 채로 알렉스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손에 힘을 주었다.

“알렉스…?”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일렁거리는 그의 깊은 눈동자가 노아의 시선을 붙잡았다.

알렉스의 긴 손가락이 노아의 손등을 타고 점점 가는 손목으로 올라왔다.

느릿한 그 움직임에 노아의 얼굴은 점점 빨개졌다. 잠잠하던 불씨가 단숨에 기름을 부은 듯 활활 타올랐다.

그의 손은 노아의 팔꿈치를 지나고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그가 지난 자리마다 열기가 피어올랐다.

깊숙하게 파고드는 그의 짙은 페로몬에 숨이 막혔다.

노아는 잿빛 눈동자에 사로잡혔다.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깊이에 점점 빠져들었다.

내뱉어진 숨이 달았다. 알렉스의 두툼한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생각을 해 봤는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남들 앞에서 좀 더 그럴싸하게 보이려면 연습이 필요해.”

알렉스가 바짝 몸을 붙였다.

그의 페로몬은 점점 더 진해졌고 어느새 노아의 숨도 조금씩 가빠졌다.

그의 시선은 노아의 입술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알렉스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남들이 믿지 않겠어?”

알렉스는 엄지로 노아의 입술을 쓸었다.

읏. 달뜬 신음이 터져 나왔다.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그가 눈을 번뜩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엄지를 밀어 넣는다.

푸른 눈동자에 온전히 알렉스만이 담겨 있었다. 달짝지근한 페로몬은 알렉스의 후각을 강타하고 이내 몸속으로 번져 나갔다.

크게 숨을 몰아쉰 그는 그대로 상체를 숙였다.

그에게 홀린 듯 노아는 꼼짝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밀어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사로잡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서로의 페로몬이 공기 중에 눅진하게 뒤섞이고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의 얼굴이 흐려질 정도로 가까웠고 노아는 차라리 눈을 감는 쪽을 선택했다.

따스한 숨결이 가장 먼저 닿았고, 곧이어 축축한 혀가 입술을 핥았다.

흡. 노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의 혀가 뱀처럼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알렉스의 이성 따위 다디단 입술에 닿는 순간 사라졌다. 정신없이 안을 탐하고 노아를 제 품에 가뒀다. 숨결이 뒤섞이고, 누구 것인지도 모를 타액이 질척하게 얽혔다. 자꾸만 도망치려는 혀를 감고 빨았다.

노아의 숨을 모두 삼킬 것처럼 안을 무자비하게 휘저어 댔다.

잠시 떨어진 입술은 숨을 삼키는 동시에 다시금 맞닿았다. 미끈한 혀가 엉키고, 숨결이 뒤섞이며 그들은 현실을 잊었다.

두 사람의 페로몬이 이제 방 안 가득 농밀한 향을 퍼트리며 뜨겁게 스며들었다.

노아의 목덜미를 받친 왼손은 이내 등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가느다란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복부가 단단해지고 하반신이 뜨거워졌다. 불룩하게 솟은 그의 하체가 노아의 배에 비벼졌다.

노아는 본능적으로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뒤꿈치가 절로 들렸다.

빌어먹을. 낮게 뇌까린 거친 욕설이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드러냈다.

알렉스가 발끝으로 선 노아의 허리를 그대로 안아 올리는 순간, 쨍그랑! 접시가 바닥에 떨어지며 큰소리를 냈다.

농밀하던 공기가 단숨에 깨어졌다.

욕망에 휩쓸렸던 두 사람의 정신을 깨우는 소리였다.

노아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어냈다.

헉헉. 숨을 몰아쉬던 노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밖으로 튀어 나갔다.

[3권에 계속]

결혼 계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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