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인기배우 C가 모 레스토랑에서 과거 결혼설이 나돌았던 H 대표와 조우한 것을 두고 항간에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거 아니냐는 설이 나돌았다. H 대표는 얼마 전 비밀리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날 H 대표는 결혼한 파트너와 함께 레스토랑을 찾았다고 관계자는 말했다.
두 사람이 사전에 약속이 있었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으며, 인기배우 C를 취재하던 연예기자의 카메라가 H 대표에 의해 파손된 것으로 알려졌다.
예전부터 언론사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H 대표는…(하략)』
노아는 읽고 있던 가십지를 내려놓았다.
역시 그날 일이 기사에 떴구나.
괜히 가슴이 답답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함께 있던 모습이 떠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왜 헤어졌을까. 그렇게 잘 어울렸는데…. 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단한 경력을 가진 사람.
국내 최고의 배우. 스크린으로 보는 것보다 실물이 훨씬, 아니 백배쯤 아름다웠던 그녀.
오메가를 싫어하는 그가 사귀었던 전 애인. 베타만 사귀었다는 말만 들었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그의 전 애인과 마주치고 나니 머리가 복잡했다.
사실 그가 과거에 누구를 사귀었건 자신과는 관계없는 얘기였다. 이 결혼은 어차피 가짜에 불과하고 6개월이면 깨어질 관계니까.
잠깐 마주쳤지만, 그들은 헤어졌던 사람이라고 보기엔 제법 친밀했다. 자연스러운 그녀의 신체 접촉에도 알렉스는 싫은 내색 따윈 보이지 않았다. 아직… 좋아하는 걸까.
혹시 불편한 이 관계가 깨어지고 나면 그는 코트니와 결혼할까?
순간 지끈, 가슴 속이 아렸다.
묵직한 돌덩어리가 가슴에 얹어진 것 같았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감각을 깨트릴 것처럼 노아는 제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가만히 있질 못하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불안한 듯 걸음은 초조했다. 노아는 자신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는 줄도 몰랐다.
“아…!”
불현듯 두통이 시작되었다. 노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때 노아의 시야가 이지러졌다. 마른 몸이 휘청했다. 쓰러지려던 찰나, 순간적으로 노아는 팔을 뻗어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붙잡았다.
갑자기 짙은 단내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헉…!”
카우치를 움켜쥔 채로 노아는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어, 어째서…?
자신의 페로몬이 징조도 없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온몸이 참을 수 없는 열기로 뜨거워졌다.
“하아. 하아.”
노아의 가슴팍이 쉴 새 없이 바쁘게 오르내렸다. 카펫을 움켜쥐며 어떻게든 페로몬을 갈무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두통이 너무 심했다. 눈앞이 뿌예졌다. 노아는 바닥을 기어 억제제를 넣어 둔 협탁으로 다가갔다.
페로몬이 날뛰는 탓에 순식간에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뇌 속을 가득 채운 자신의 페로몬이 온몸을 들쑤시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감각이 연신 노아를 강타했다.
아, 아파…….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손으로 서랍을 더듬어 약병을 찾았다.
풀썩 바닥에 주저앉아 노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열었다.
노랗고 작은 알약 두 개를 그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물 없이 꿀꺽 삼키자마자 알약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스스로는 이 페로몬을 어쩌지 못하니 결국 약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노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힘겹게 침대에 등을 기댔다. 오한과 발열이 동시에 찾아왔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약효가 돌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몸은 계속 부들부들 떨려 왔다.
열이 오른 몸이 식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가쁜 숨이 조금씩 본래의 속도로 돌아오기까지 이십여 분이 걸렸다. 제멋대로 날뛰던 페로몬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뇌 속까지 단내로 절인 것 같던 느낌도 사라졌다.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던 노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땀으로 젖은 몸이 찝찝해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서 욕실로 갔다.
몸에 남은 페로몬을 씻어 내고, 실내 가득 퍼진 제 페로몬을 지우기 위해 발코니도 활짝 열어 환기까지 끝냈다.
갑자기 왜 그런 거지…? 히트 사이클인가 했지만, 약으로 금세 가라앉은 걸 보면 히트 사이클은 아니었다.
노아의 시선은 협탁 위에 나뒹구는 약병을 손에 쥐었다.
이게 원인이었던 걸까.
전에 억제제를 먹었을 때는 이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칫하다간 페로몬이 폭주할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찌르는 듯한 두통은 페로몬이 가라앉고 나서 사라진 상태였다.
최근에 신경 쓰는 일이 많아서 그런 걸지도 몰라.
노아는 애써 부작용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설사 부작용이라고 해도 억제제를 끊을 수는 없었다.
바닥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실내의 공기가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야겠다.
노아의 걸음은 빨랐고, 정원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탁 트인 밖으로 나오자마자 노아는 크게 숨을 터트렸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비친 안색은 몹시 창백했다.
새파란 하늘을 가만히 올려 보다 노아는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마음이 내내 술렁거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주변을 걷고 있는데도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뭐라도 하고 있다면 나을 텐데….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별채 근처에 도착했다. 때마침, 공구를 들고 나오던 헨리가 노아를 발견하곤 알은체를 했다.
“여기까진 무슨 일입니까?”
“그냥 걷다 보니 여기네요. 뭐 하는 중이세요?”
“아, 이거요? 일이 바빠 집안일에 손을 놨더니 칠이 벗겨진 곳이 여러 곳이라 오랜만에 페인트칠을 좀 할까 싶어서….”
손에 든 페인트 통을 들어 올리며 헨리가 말했다.
“그거…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페인트칠 정도면 저도 할 수 있는데….”
“아유. 그럴 수야 없지요. 도련님이 알면 난리 날 텐데….”
“괜찮아요. 그는 제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당장 할 일도 없고…. 힘들면 그만할게요.”
설레설레 손을 내젓는 헨리에게 매달렸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좋았다. 오히려 몸을 움직이고 나면 답답함이 좀 가실지도 모른다.
끈질기게 부탁하자 헨리가 결국 노아에게 페인트 통과 롤러를 건넸다.
옷에 튀면 안 된다면서 헨리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작업복을 들고 나왔다. 작업복이 통으로 된 터라 옷 위에 그냥 껴입어도 품이 넉넉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칠하면 될까요?”
“이쪽 울타리만 하면 됩니다. 힘들면 꼭 얘기해 주십시오.”
맡겨만 주세요. 노아는 크게 외쳤다.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
노아는 팔을 걷어붙이고 페인트칠을 시작했다. 울타리가 제법 낡아 몇 군데 손 봐야 할 곳이 있는 것도 확인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때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하기엔 어려운 일은 죄다 노아 몫이었다. 부엌 찬장의 선반을 달고, 낡은 싱크대 수납장의 문을 떼어 내 페인트칠도 했다. 그때의 즐거웠던 추억이 떠올라 노아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낡은 울타리가 흰색으로 점점 바뀌는 것을 보는 게 좋았다. 햇살이 제법 강하게 내리쬐는 터라 노아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 갔다.
중간중간 흐르는 땀을 대충 소매로 닦아 가며 열심히 롤러를 문질렀다. 전체적인 칠이 끝나자, 롤러로는 미처 칠하지 못한 세세한 곳을 칠하기 위해 이번엔 붓을 들었다. 붓에 페인트를 묻히고 적당히 덜어 낸 후 꼼꼼하게 빈 곳을 메꿔 나갔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루시가 레모네이드를 가지고 왔다.
“아유, 이 땀 좀 봐. 얼른 이거 마셔요.”
루시가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며 레모네이드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이런 일 안 해도 되는데 도련님이 아시면 화내실 거예요.”
“힘들지 않았어요. 별거 아닌데요, 뭐.”
“그래도요…. 어유. 이것 봐. 얼굴에 페인트가 다 묻었네.”
뺨을 문지르는 그녀의 손길에 노아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어딘가 위축되어 있고 무기력하던 일상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그의 생각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런 일은 오늘만이에요. 노아 씨가 고집을 하도 피우니까 그이가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지, 내가 알았으면 무조건 말렸을 거예요. 도련님이 알면 이렇게 예쁜 부인 고생시켰다고 화낼 거예요.”
그는 절대로 그런 생각 안 해요.
노아는 꺼낼 수 없는 말을 목 안으로 삼키며 쓰게 웃었다.
“이거 더는 안 지워지네요.”
어쩌지? 걱정하는 그녀에게 노아는 씻으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쯤인가? 손바닥으로 뺨을 벅벅 문지르자 루시가 어머, 하며 까르르 웃었다.
“이게 뭐예요. 겨우 지웠더니 도로 묻었네. 아유, 참.”
“아…. 저, 많이 묻었어요? 지금 씻어야 할까요?”
“얼굴에 페인트를 덕지덕지 묻히고도 어쩜 이렇게 예쁠까?”
너무 지저분하면 남 보기에 흉할까 봐 물은 질문에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곤란한 듯 눈썹을 늘어뜨리던 노아는 눈을 반짝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루시의 활기참에 웃음을 터트렸다.
뺨과 콧잔등에 흰 페인트를 묻힌 노아의 뺨은 생기로 가득했다. 즐거움이 온몸 가득 흘러넘쳤다. 펑퍼짐한 작업복을 입고 있어도, 아름다움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자그마한 루시를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는 반짝였고, 입술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기사가 뜨자마자 득달같이 회사로 달려온 해리스를 상대하느라 피곤을 덕지덕지 붙인 채로 귀가하던 알렉스는, 루시를 찾으러 별채로 왔다가 웃음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주변을 둘러싼 푸른 잎이 서로 부딪치며 파스스, 소리를 내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노아가 있었다.
알렉스는 눈을 찡그렸다. 눈이 부셨다. 갑작스레 쏟아진 빛이 노아만을 비추고 있는 듯했다. 순간, 심장이 조여들었다.
눈앞이 빙글 회전하는 것처럼 잠시 어지러웠다. 저릿한 감각이 등을 지나 손끝으로 전해졌다.
쿵. 쿵. 쿵.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렸다. 북소리는 귀를 타고 전신으로 퍼지고 이윽고 알렉스 주변의 공기까지 울렸다.
알렉스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건 제 심장 소리임을.
알렉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어딘가 고장이 난 게 분명하다. 눈앞의 오메가가, 어쩔 수 없이 결혼한 상대가 지나치게 아름답게 느껴졌다.
심장 박동이 점점 거세어졌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낯선 감각에 알렉스는 당황했다. 못이 박힌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웃고 있던 노아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다.
알렉스를 부르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알렉스의 시선은 붉고 탐스러운 입술에 내리꽂혔다.
노아의 반응에 등 돌리고 있던 루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렸다.
“어? 도련님! 이 시간엔 어쩐 일로? 언제 오셨어요?”
주문이 풀린 것처럼 그제야 알렉스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일찍 오셨……, 도련님?”
알렉스는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했다.
의아해하는 루시의 부름을 알렉스는 무시했다.
아무래도 어딘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조만간 병원엘 들러야겠다.
그전에 타는 듯한 이 갈증부터 해소하고 나서.
* * *
오지 않았으면 하던 취임식 아침이 밝았다. 노아는 전날부터 너무 긴장한 탓에 밤새 잠을 설쳤다. 그 때문에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괜찮겠어요?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 네. 괜찮아요. 조금 긴장해서 그래요.”
도와주러 새벽같이 저택으로 출근한 조엘이 걱정스레 되물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그냥… 잠을 좀 설쳐서 그래요.”
걱정하지 말라며 노아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긴가민가하던 조엘도 연신 노아가 괜찮다고 말하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노아는 이 정도로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은 정말로 몸이 안 좋았다. 잠을 못 잔 것도 있지만, 어제부터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노아는 눈 뜨자마자 억제제를 정량보다 좀 더 많이 먹었다.
“그나저나 대표님이랑은 싸웠어요?”
알렉스 얘기가 나오는 순간 노아는 손끝을 움찔했다.
“아, 아니요…. 그건 왜요…? 혹시 그분이 무슨 말씀하셨어요?”
싸우기는커녕, 우연히 별채에서 마주친 이후로 그의 그림자조차 보질 못했다. 시간이 안 맞아서 그런가 했더니 알고 보니 그가 아예 저택으로 귀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틀 후에나 전해 들었다.
노아가 오히려 묻고 싶었다.
역시 별채에서 페인트칠했던 게 싫었던 건지, 아니면 뭔가 노아가 모르는 또 다른 잘못이 있었던 건지.
“혹시나, 하고 물은 거예요. 갑자기 일에 미쳐서 퇴근을 안 하지 뭡니까. 거기다 직원들을 들들 볶아 대니, 노아하고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거지. 왜 그러냐고 물어도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만 하고.”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인지 조엘은 숨도 안 쉬고 알렉스를 욕하기 시작했다. 회사가 대표님 때문에 살얼음판이라고, 적어도 사람이 숨은 쉬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불만을 터트렸다.
“많이 바쁘신 가 봐요.”
“바쁘지 않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열흘 넘게 집에도 못 갈 정도로 바쁜 건 아니에요. 문제는 그게 아니라, 같은 보고서를 열 번씩 다시 쓰라고 하질 않나, 사소한 거에 태클을 걸어대고 단어 하나하나 물고 늘어지니까, 책잡힐까 봐 사람들이 지금 벌벌 떨고 있다니까요.”
보란 듯이 조엘이 한숨을 푹 내쉬며 하소연했다.
그러고 보니 조엘의 눈 밑이 거뭇한 게 피로가 누적된 게 한눈에 보였다.
“아! 혹시 며칠 전에 병원에 다녀오더니 문제가 생긴 건가?!”
갑자기 생각났다면서 조엘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병원이요?! 아, 아파요?”
노아는 병원 소리에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컥거렸다.
노아의 반응에 조엘이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변명했다.
“통상적인 건강검진이라고 했고, 이상은 없다고 했어요. 별거 아닐 겁니다. 그냥 상황이 짜증 나서 또 심통을 부리는 거겠죠, 뭐. 그보다 준비는 다 된 거죠? 이제 출발할까요?”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노아는 안도했다. 별일 아니겠지. 그를 안 본 지 오래된 탓에 괜한 걱정이 든 모양이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행여나 옷이 구겨질세라 상의를 손바닥으로 슬슬 문질러 폈다.
민망한 치수 재기를 하면서까지 맞추었던 정장은 몸에 딱 맞았다.
톤 다운된 청색 슈트는 노아의 흰 피부와 잘 어울렸고, 다소 마르고 길쭉한 팔다리를 늘씬하게 감싸 체형의 단점을 보완했다.
몸에 딱 맞는 데도 움직임에 불편함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노아는 대기한 차에 올라타며 무심코 감탄했다.
“그분은…, 연회장으로 직접 오시나요?”
“그분요? 아아, 대표님이요? 네. 거기로 바로 가신다고 했어요. 그리고 호칭 말인데요, 사람들 앞에서는 대표님 이름 부르세요. 그 애매한 호칭 때문에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으니까요.”
“네….”
조엘의 타박에 노아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곧이어 걱정이 밀려왔다. 자연스럽게 굴 수 있을까? 아직도 여전히 어색한데…. 날카로운 잿빛 눈동자만 보면 온몸이 긴장감으로 꽉 조여들었다.
알렉스의 페로몬을 느낄 때면, 절로 목덜미가 저릿하고 손끝이 떨린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도 한다.
그런 상태로 태연하게 남들 앞에서 부부인 척해야 한다.
잘할 수 있을까….
노아는 애써 걱정을 털어내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기자도 많이 참석할 겁니다. 초대객들과 인사를 나누게 될 텐데, 중요한 인물은 제가 옆에서 알려 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노아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조엘이 부드러운 말투로 안심시켰다.
“기자 인터뷰는 그룹 홍보팀에서 직접 상대하니 노아가 그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그냥 대표님 옆에 딱 붙어 계세요. 나머지는 대표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겁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조엘은 차창 밖을 잠시 확인하더니 곧 도착하겠네요. 라고 말했다.
“파티가 늦게 끝날 걸 대비해서 오늘은 호텔에서 묵을 겁니다. 대표님도 마찬가지고요.”
“오늘 저택으로 안 돌아가요?”
“네. 공식 행사가 끝나면 축하 파티가 열리는데, 그게 아마도 새벽이나 되어야 끝날 거예요. 물론 기자들은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이건 좀 더 사적인 자리에 가까워서요.”
“그렇군요….”
파티에도 참석해야 하나, 싶어 물끄러미 조엘을 쳐다보자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늦게까지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적당한 때를 봐서 제가 언질 드릴게요.”
“네. 감사해요.”
“아직 인사 받을 일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아니에요. 계속 도와주셨잖아요. 매디슨 씨가 없었다면 저 혼자 어째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제가 해야 할 일인 걸요. 인사 받으니 괜히 쑥스럽네요.”
하하하.
쑥스러움을 가리듯 조엘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리고는 몇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딱딱하게 거리 두지 마시고, 그냥 조엘이라고 부르세요. 성으로 불리는 건 대표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친근한 표정의 그에게 노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게요. 조엘.”
“이제 다 왔네요. 자, 그럼 가실까요?”
때마침 차는 취임식이 열리는 호텔 앞에 도착했다.
조엘을 따라 차에서 내리는 노아의 얼굴은 잊고 있던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행사가 열릴 화려하고 넓은 연회장은 취임식 준비를 마쳤다.
케이터링 서비스는 업계 최고를 불렀고, 연회장 내의 고급스러운 장식 역시도 전문가에게 의뢰해 지나치게 무겁지 않으면서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준비된 테이블에는 초대객들의 성향과 인맥을 고려해 세심하게 배치했다.
그들을 시중들 서버들은 정장 바지와 흰 셔츠, 그리고 검은색 조끼를 갖춘 차림으로 대기 중이고, 호텔 측에서 준비해 준 경호 인력은 연회장의 구석진 자리와 연회장 밖의 적절한 위치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이어 마이크로 쉴 새 없이 의견을 주고받았고, 행사 담당자는 초대 객 명단이 기재된 파일을 들고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인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연회장에서 서서히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할 즈음, 펜트하우스에서 준비 중이던 알렉스도 마지막 옷맵시를 점검했다.
신중하게 커프 링크스를 고르는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빳빳하게 다려진 흰 드레스 셔츠.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회색 조끼 아래, 좀 더 짙은 색의 회색 정장 바지가 긴 다리를 강조하며 쭉 뻗어 있었다.
고심하던 그는 사파이어 커프 링크스를 골라 능숙하게 커프를 채웠다. 커프 링크스 다음에는 바셰론 콘스탄틴에 커스텀한 시계를 차고, 가장 마지막으로 슈트 상의를 입었다.
옷과 액세서리를 전부 갖춰 입고 거울 앞에 선 알렉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피로함은 감출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거칠어진 뺨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파우더 룸 밖에서 노아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알렉스는 몸을 돌려 문을 쳐다보았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저택에 가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저택으로 차를 몰다, 돌리기를 수십 번. 자신이 왜 일부러 피하는지도 모른 채로 알렉스는 그동안 일에 파묻혔다.
파우더 룸 너머 노아가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알렉스는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
“대표님. 준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곧 식이 시작될 겁니다.”
은테 안경을 추켜올리며 조엘이 준비 상황을 알려왔다.
비서의 브리핑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눈으로 노아를 찾았다.
“노아는?”
“같이 도착했습니다. 응접실에서 지금 대기 중인데요, 왜요?”
되묻는 비서의 말에 알렉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데리러 간 놈이 혼자만 내 눈에 보이니까 묻는 거지. 그 태도는 뭐야?”
고용주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간파한 조엘은 단박에 자세를 낮추며 조심스레 물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없어.”
알렉스는 조엘을 지나쳐 그대로 응접실로 향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아니 조금은 다급한 듯 움직인 그는 순식간에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의 눈앞에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채로 소파에 앉은 노아가 있었다.
넓디넓은 펜트하우스의 응접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 알렉스를 뒤흔들었다.
알렉스는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주변의 풍경 따윈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림처럼 정자세로 앉은 노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림이 아닌 실제라는 걸 알 수 있는 건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때뿐이었다.
느리게 깜빡대는 눈꺼풀을 바라보자 타는 듯한 갈증이 목구멍을 바짝 태웠다.
열흘이 넘도록 원인을 알 수 없던 불유쾌함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렉스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은 저 얼굴이 보고 싶었던 거다.
설탕처럼 달콤할 것 같은 붉은 입술이, 빨려들어 갈 것 같은 저 푸른 눈동자가, 그립고 그리워서 그랬던 거였다.
미친 거군. 미친 게 틀림없어.
그는 방금 깨달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정면을 응시하던 노아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사실은 느리게 움직인 건 알렉스의 눈에만 그랬을 뿐이었다.
잿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알렉스를 발견한 노아가 파드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렉스…?”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닫혔다. 알렉스의 목마름은 한층 더 심해졌다. 심장은 마치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사납게 요동쳤다.
불현듯 호텔 전용 디퓨저 향이 아닌, 달짝지근하고 못 견디게 간질거리는 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알렉스의 모든 감각이 세상에서 가장 뾰족한 바늘이 된 것처럼 자신을 찔러 댔다.
“괜, 괜찮으세요? 안색이 창백한데…….”
노아가 걱정스러운 듯 말을 우물거렸다.
“거기서 멈춰!”
알렉스에게 다가가려던 노아는 그의 고함에 놀라 멈칫했다.
그의 안색이 너무 창백했다. 무언가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노아는 목을 움츠렸다. 묵직하면서도 서늘한 향이 슬금슬금 그에게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페로몬이 노아의 뒷덜미를 감싸는 듯 번졌다. 그 순간 뒷덜미가 오싹 저렸다.
움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알렉스…. 혹시… 러, 러트가…….”
“제길!”
그가 잇새로 욕설을 내뱉자마자, 막 응접실로 들어서던 조엘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러트요?! 대표님이요?”
큰일 난 거 아니냐고 조엘이 안절부절못하며 알렉스 주변을 정신 사납게 서성거렸다.
주치의를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지금 당장 약이라도 사 올까요? 라며 횡설수설했다.
하필이면! 아니, 하필이면 이때 러트가 올 건 뭐란 말이야!
조엘이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뒤늦게 고개를 번쩍 들더니 외쳤다.
“노아! 노아는 괜찮아요?! 지금 대표님 러트면, 노아가 위험한 거…!”
“시끄러워! 아니야!”
“아니에요?”
“내가 내 러트도 모를 것 같나? 아니야.”
“정말 아닙니까? 근데 왜 노아가 러트라고….”
“피곤해서 잠시 페로몬이 불안정해진 거야. 러트 아니니까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마.”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조엘이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노아에게 시선을 보내고는 정말일까요? 하고 눈짓을 보냈다.
노아는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알렉스를 살폈다. 러트 같았는데, 또 지금은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좀 더 농밀하고 어딘지 위험한 느낌이 났었다.
하지만 러트라고 하기엔 그는 지나치게 이성적이었다. 알파의 러트를 지척에서 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니겠지…?
노아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괜한 생각을 지웠다. 조금 전 저를 감싸던 그 느낌도 지워 버렸다.
“정말 아니시죠? 전 대표님 페로몬 못 맡는단 말입니다. 취임식 도중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수습이 안 돼요.”
“그럴 일 없어.”
그럼 다행이고요…. 영 미심쩍은 표정으로 조엘이 중얼거렸다.
“옷은 잘 맞나?”
“네? 네…. 잘 맞아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노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따라 그가 이상했다. 아까는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지금은 또 그런 낌새는 깨끗이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성큼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코앞에 다가온 그가 손을 들었다.
“넥타이가 삐뚤어졌어.”
“아….”
긴 손가락이 턱을 스쳤다. 간지러움에 노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한 손으로 노아의 넥타이를 단번에 잡아 뺀 알렉스가 상체를 숙였다.
“제, 제가… 할게요.”
“얼굴 좀 들어 봐. 이 슈트는 하프 윈저노트로 매는 게 어울려.”
고개를 들자 시선을 내리깐 알렉스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짙은 눈썹과 곧게 뻗은 콧날이 남자다운 얼굴을 강조했다. 바로 코앞에서 보는 조각 같은 얼굴 때문에 노아는 숨을 멈췄다. 가슴 속에서 나비가 수만 마리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간지러운 감각이 안에서부터 밖으로 번져 나갔다. 팔랑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에 정신이 팔릴 것처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능숙하게 움직이는 긴 손가락이 넥타이를 휘감을 때마다 노아의 목덜미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노아의 손가락이 그때마다 잔 경련을 일으켜 파르르 떨렸다.
노아의 뺨은 어느덧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노아가 숨을 토해 냈다.
“잠깐 있어 봐.”
그대로 몸을 돌려 안쪽 침실로 들어간 알렉스가 잠시 후 손에 빌로드 상자를 들고 나왔다.
“왼손 내밀어.”
그는 상자를 열어 클래식한 디자인의 가죽 시계를 꺼냈다.
알렉스는 노아가 우물쭈물 팔을 드는 듯 마는 듯 망설이자, 왼손을 확 끌어다 손목에 시계를 채웠다.
“액세서리가 하나도 없어서 채우는 거야. 우선 급한 대로 이거라도 차고 있어.”
“감, 감사합니다.”
노아는 제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행사 진행 상황을 체크하던 조엘이 그 모습에 안경을 추켜세우며 눈을 의심했다.
대체 무슨 변덕이야? 미친 듯이 일만 하더니 진짜 미친 건가?
가만히 노아를 내려다보는 알렉스의 표정이 지나치게 다정했다. 설마… 이제 와 반하기라도 했나? 하고 중얼거리던 조엘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 오메가 혐오증인 대표가 그럴 리가.
그냥 곧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니까 미리부터 연습하는 거겠지.
아무렴. 그렇겠지. 그렇고말고.
조엘은 자신이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면서 가볍게 몸을 떨었다. “대표님. 초대 손님이 전부 도착했다고 합니다. 곧 식이 시작될 겁니다.”
“그래.”
볼일을 끝났다는 듯 알렉스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었다.
“노아 씨도 가요.”
여전히 뺨을 붉힌 채로 제 손목을 만지작거리던 노아를 이끌고 조엘이 그 뒤를 따랐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기분이 된 것처럼 노아의 얼굴에 잔뜩 긴장이 어려 있었다.
상류층 인사들과 헌트 그룹의 각 사업부 임원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초대된 사람들과 대주주들까지, 연회장 안은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했다.
초대객들은 자신의 이름이 있는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고 헌트 회장이 헌트 그룹을 최고의 기업으로 일구어 낸 만큼 그 후계자에게 기대하는 바도 크다.
반대로 족벌 경영을 비판하는 세력도 존재했다. 그들은 알렉스 헌트가 자그마한 실수라도 하기를 바라며 비난하기 일쑤였지만, 헌트 회장이 작고하기 전부터 굵직한 사업을 맡아 경영하면서 뚜렷한 성과를 내자 비판도 조금씩 사라지는 추세였다.
어쨌거나 명실상부 알렉스 헌트가 헌트 그룹의 최고 경영자 자리에 오르는 것에 이견을 표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나저나 알렉스 헌트가 몰래 결혼을 했다면서요? 그것도 오메가와.”
“그렇다네요. 기사 보고 알았지 뭐예요?”
“상대는 누구래요?”
“주변에 아무리 물어봐도 노아 헌트가 누군지 모르더라고요. 이력도 없고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쉽게 나오는 얘기는 결국 가십이었다.
신랑감 1순위였던 알렉스가 조용히 결혼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상류층 부인네들의 최대 관심사는 그 상대에게 있었다.
“오늘 취임식에 파트너도 참석하겠죠?”
“그렇겠죠?”
“난다 긴다 하는 그 수많은 명문가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선택한 사람이 누군지 정말 궁금하네요. 더군다나 알렉스 헌트는 베타하고만 사귀었잖아요?”
유명한 모바일 회사의 최고 경영자 부인과 글로벌 식품 회사의 경영자 부인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는 소곤거렸다.
“우리 딸애 얘기로는 알렉스 헌트가 페로몬에 문제가 있어서 지금까지 베타만 사귀었대요.”
“내가 살롱에서 듣기로는 페로몬은 문제가 없는데 그냥 개인 취향이 그렇다고 들었는데….”
“에이, 모르는 소리 마세요. 알파가 어떻게 오메가를 거부해요? 특이형질자들의 페로몬은 매우 강력한 최음제나 마찬가진데 페로몬에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이성적으로 거부하진 못하죠.”
“그런가요?”
시시덕대는 그녀들의 눈앞에 두툼한 손이 턱, 하니 놓였다.
“시시한 소리 그만하고, 저기 주인공이 등장하네.”
식품 회사 경영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갯짓을 했다.
그의 고갯짓에 따라 그녀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연회장 입구로 향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알렉스가 다크 그레이의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연회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와 훤칠한 체구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뽐내며 당당하게 걸어들어 오는 그의 곁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금발 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장내가 순식간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소곤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진행자가 알렉스 헌트의 입장을 알리자,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이어졌다.
초대객들의 호응에 알렉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아 쪽으로 허리를 숙여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배우자가 먼저 자리에 앉자 그제야 자기 자리에 앉는 그의 신사적인 태도는 사람들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남겼다.
식순에 따라 취임 축하를 위해 초대된 사람들이 먼저 연단에 올랐다.
사람들은 의례적인 칭찬과 알렉스의 업적을 읊어 대는 연설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공식 석상에 처음 등장한 노아 헌트에 관해 얘기 나누기 시작했다.
“알렉스 헌트가 왜 결혼했는지 알겠네요.”
“얼굴 보니까 더더욱 누군지 모르겠어요. 저렇게 눈에 띄는 얼굴인데 우리가 몰랐던 거 보면 외국에서 살다가 온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운송회사 임원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임원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 아들놈이 몇 주 전에 있었던 승마 클럽에서 헌트 부부를 봤다던데, 출신이 불분명하다더군요.”
“어떻게 알았대요?”
“왜, 그때 기사가 나지 않았습니까? 세토라사 오너의 막내아들이 승마 클럽에서 다쳤다던.”
“아…. 읽은 기억이 나네요.”
“그 막내아들이 알렉스 헌트가 부인을 데리고 승마 클럽에 나타나자 질투에 미쳐서 저 부인을 위협하는 바람에 크게 다칠 뻔했다더군요. 그 일로 알렉스 헌트가 불같이 화를 내며 막내아들을 다치게 했다고 하더군요.”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대요?”
“하여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승마 클럽에서 지켜본 바로는 말 타는 것도 완전히 초보였고, 그런 자리는 처음이라는 게 티가 났대요.”
“어디 출신인지도 아무도 못 알아낸 거군요.”
“출신이랄 게 딱히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보아하니 저 얼굴로 알렉스 헌트를 구워삶은 모양인데, 뭐… 저 정도 얼굴이면 안 넘어갈 놈이 없긴 하지요.”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노아를 힐끔댄 중년의 사내가 입맛을 쩝 다셨다.
조물주가 심혈을 기울여 빚어 낸 듯한 인형 같은 외모였다. 크고 푸른 눈. 거기다 윤기 나는 금발에, 저 도발적인 입술 하며.
어느 하나 못 나거나 삐뚤어진 구석 따윈 없었다. 작고 균형 잡힌 얼굴에 길쭉한 팔다리는 또 어떤가. 여느 사내놈의 가슴에 단박에 불을 지르고도 남을 아름다움이었다.
알렉스 헌트의 배우자만 아니었다면 맛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사내의 번들거리는 시선은 노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초대객들의 초미의 관심사인 노아는 노골적인 시선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 둔 손에는 연신 땀이 찼다.
연단 위의 노신사의 연설 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아는 다리를 꼬고 앉은 그를 곁눈질했다. 잘생긴 옆얼굴은 이 자리가 지루한 듯 보였다.
그는 조엘이 건네주었던 취임사를 간간이 뒤적거리며 때때로 손가락으로 종이를 툭툭 쳤다.
노아의 시선은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으로 옮겨 갔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었다. 큰 체구만큼이나 손도 큰 편이라 제 손을 완전히 감싸고도 남을 것 같았다.
전문가의 관리를 받는 손은 궂은일이라곤 해 본 적 없는 티가 났다. 손톱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고, 영양 상태도 좋아 거스러미 따윈 보이지 않았다.
노아는 끝이 뭉툭하고 다소 거친 제 손을 말아 쥐었다.
시선을 내리깐 노아의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취임사를 머릿속으로 되뇌던 알렉스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옆자리를 확인했다.
조용히 눈을 내리깐 채로 자꾸만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게 보였다.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안 그래도 흰 피부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지나치게 창백한 안색에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뭘 그렇게 긴장해?”
시선을 내리깔던 노아가 이내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실수할까 봐… 요.”
“네가 저 위에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실수할 일이 뭐가 있어? 긴장 풀어.”
툭 던진 말에 노아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자리에 익숙한 알렉스는 긴장 따윈 하지 않겠지만 노아는 이렇게 화려하고 격식 있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 있어 본 적이 없어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얌전히,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있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다였다.
어깨에 힘을 빼려 심호흡을 하려던 찰나였다.
불쑥 뻗어온 손이 뺨을 어루만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접촉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노아의 반응에 잠시 손을 멈춘 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여기, 속눈썹이 빠져서 잠깐 확인한 거야.”
그가 손끝을 가볍게 털어 내더니 다시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진행자가 알렉스 헌트 대표의 취임사를 듣겠습니다, 며 소리쳤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고, 그는 당당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 위로 올라갔다.
키가 남들보다 큰 그가 마이크 높이를 조정하며 이내 연설을 시작했다.
“이 자리를 빛내 주신 귀빈 여러분께 먼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알렉스 헌트입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깨를 쫙 펴고, 좌중을 훑은 그는 단 몇 마디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기 모인 사람 중 누구도 알렉스만큼 존재감이 뛰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을 압도하는 존재감으로 그는 진지하고 날카로운 태도로 헌트 그룹을 세운 에드워드 헌트를 가장 먼저 언급하며 서두를 열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났다. 그는 앞으로 헌트 그룹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지, 목표는 무엇인지. 어떤 기업으로 키우고 싶은지 명확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장 내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모두 알렉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취임식에 참석한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알렉스에게 쏠린 그 시점, 노아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부드럽게 뺨을 쓸던 그의 손길이 지워지지 않았다. 닿았던 감촉이 너무 생생했다.
노아는 제 뺨을 문지르고 싶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도통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달아오른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손가락을 움찔대다 고개를 들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의 취임사가 이제 막 끝난 참이었다.
알렉스를 향해 보내는 축하의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박수는 끊이지 않았고 그에 답례하듯 알렉스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그는 어느 때보다 빛났다. 확신에 찬 눈빛은 좌중을 훑었고 당당한 체구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노아의 눈에는 그가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자신과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사무치게 와 닿았다.
쿵쾅거리던 심장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뺨에 남은 그의 감촉도 어째선지 아픔으로 다가왔다.
노아는 어쩐지 울고 싶었다.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울적함에 눈을 깜빡거렸다. 초조한 듯 입술을 핥으며 주먹을 꼭 쥐었다.
사람들의 함성에 호응을 마친 그가 연단에서 내려왔다.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는 노아의 시선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노아는 제 앞에 우뚝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가슴 떨림이 이어졌다.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집어삼킬 듯한 강렬한 잿빛 눈동자가 똑바로 노아에게 내리꽂혔다.
맑고 투명하리만큼 깨끗한 푸른 눈동자도 젖은 채로 그를 보았다.
숨이 막힐 듯한 농밀한 감각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허공에 마주한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를 핥듯이 더듬어 대던 그때,
“취임식 잘 들었습니다. 헌트 대표가 제시한 비전이 무척 흥미롭더군요.”
누군가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깨뜨렸다.
알렉스의 시선이 이내 말을 건 사내에게 옮겨갔다.
취임사를 지켜보던 선박 회사의 오너가 싱글거리며 알렉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방해받은 게 짜증 났지만, 알렉스는 표정을 숨기고 상대와 악수했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갔다. 선박 회사 오너는 알렉스의 젊은 패기를 칭찬하며, 앞으로의 발전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아무도 모르게 결혼까지 하셨더군요.”
오너의 시선이 노아에게 향했다. 딱히 이렇다 할 교류가 없는 자가 굳이 왜 다가오나 했더니 목적이 정해진 접근이었다.
알렉스의 기분은 그 즉시 나빠졌다. 노아를 훑는 저 눈깔을 파 버리고 싶었다.
“소개는 안 해 주시나요? 하긴, 저렇게 미인인 배우자를 두셨으니 경계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요.”
하하하. 넉살 좋게 웃음을 터트린 상대의 은근한 압박에 알렉스의 이마가 불쾌감으로 꿈틀했지만, 그 표정은 찰나의 순간에 지워졌다.
오늘 이 자리는 자신의 취임식이기도 하지만 노아를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알렉스는 노아에게 몸을 숙였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노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보란 듯이 노아의 허리를 팔로 감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 알렉스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달링. 인사해.”
“안녕하십니까. 스테판 클락입니다. 작은 선박 회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지요. 제 앞에 계신 미인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노아…, 노아 헌트입니다.”
노골적인 칭찬에 노아는 뺨을 붉혔다. 상대가 내미는 손을 어설프게 잡으려는 순간 알렉스가 노아의 손을 낚아채고는 깍지를 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저 저는 인사를 나누려던 것뿐입니다.”
대놓고 노아를 싸고도는 걸 보자, 스테판이 쓴웃음을 지었다.
“오해하지 않습니다. 그저 악수를 받아 주면 오늘 내 파트너의 손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사전에 차단한 것뿐입니다.”
은근슬쩍 돌려 말하고는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악수하는 게 싫다는 말이었다.
저 미인에게 단단히 빠졌군.
아쉽긴 했으나 헌트사의 대표에게 밉보일 순 없는 일이니 스테판은 노아에게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교 활동의 베테랑인 스테판은 금세 알렉스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들의 대화 도중에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이 인사하기 위해 다가왔다.
알렉스는 노아를 옆구리에 끼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는지 얼굴과 이름이 전부 머릿속에서 뒤섞여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핑거 푸드가 아닌 제대로 된 파티 음식과 술이 테이블에 차려지기 시작했다. 공식 행사는 끝나고 진행 요원들의 안내에 기자들은 파티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서빙을 하는 인원도 한층 늘었다.
웨이터는 쉬지 않고 샴페인이 든 트레이를 들고 다니며 파티를 즐기는 이들에게 제공했다.
취임식과는 달리 분위기는 한층 편안해졌다.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파티장 안에는 은은한 클래식이 울려 퍼졌다.
알렉스 옆에 붙어서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던 노아는 벌써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들 옆에 붙어서 보조를 하던 조엘이 중간중간 노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정신없죠?”
업무 얘기가 한창인 알렉스와 잠시 떨어진 노아가 테이블에 앉자, 잠시 짬을 낸 조엘이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요. 물 마셔요. 노아 씨, 술은 안 하죠?”
“네. 물이면 돼요. 감사합니다.”
조엘이 건네는 물 잔을 받아 천천히 목을 축였다.
“오늘 인사한 모든 사람을 다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노아 씨가 그들을 상대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노아는 여전히 사람들과 인사 중인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친 기색 따윈 없었다. 대외적인 미소를 띠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그때 옆자리에서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저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조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해를 구했다.
다녀오시라고 눈짓을 보내기 무섭게 그는 “응, 말해도 돼. 무슨 일이야? 애들은?” 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집에서 온 전화구나.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상대와 통화하는 조엘이 급하게 사라지자 노아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다시 알렉스 곁으로 가기엔 너무 지쳤다.
노아는 천천히 물을 마시며 숨을 돌렸다. 알렉스와 함께 인사를 다닐 때는 너무 긴장한 탓에 못 느꼈던 시선이 그제야 느껴졌다.
힐끔대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삼삼오오 모인 무리의 사람들이 샴페인을 홀짝대며 자기들끼리 뭔가 속삭이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노아는 그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그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티를 내긴 싫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고급스러운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이 반쯤 식어 있었다.
“…아무도…?”
“어느 집 자식인지 모르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거 아닐까요?”
“그거요?”
듣고 싶지 않은 대화가 노아의 귀에 꽂혔다.
“아시면서…. 알 만한 가문에선 아무도 저 사람을 모르잖아요. 그렇다는 건 상류층 출신이 아니라는 거고… 얼굴을 보아하니 우리랑은 인연이 없는 뒷세계에서 굴러먹던 사람 아닌가?”
“말조심해요. 출신이 미천하다고 해도 지금은 알렉스 헌트 배우자예요. 헌트 대표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우리끼리 하는 얘긴데 뭐 어때요? 알잖아요. 우리 같은 상류층과 인연을 맺기 위해서 갖은 수를 다 쓰는 작자들이 있는 거. 저 얼굴 보세요. 알파라면 저 얼굴에 혹하지 않겠어요? 오메가 싫어하는 헌트도 결국 저 반반한 얼굴에 넘어가 결혼까지 했잖아요.”
“그보다 놀랐어요. 오메가하고는 절대로 결혼 안 할 거 같더니, 출신도 모호한 저런 골드 디거에게 넘어가다니. 신중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더니 헌트도 별수 없나 봐요?”
숫제 들으라는 듯이 이젠 대놓고 깔깔대고 웃었다.
모욕감에 손이 덜덜 떨렸다. 저 때문에 알렉스까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자 견딜 수 없었다.
노아의 안색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달달 떨리는 손을 꼭 말아 쥐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통화하러 나갔던 조엘이 다급하게 뛰어들어 왔다.
“노아 씨. 대표님은 어디? 아, 저기 있네요.”
알렉스를 찾던 조엘이 노아에게 묻다 말고 바로 그에게로 뛰어갔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그대로 알렉스에게 다가간 조엘은 그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고는 금세 노아에게 달려왔다.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갑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저한테 연락 주시고요, 파티 분위기 봐서 적당히 빠지셔도 됩니다. 이제 인사는 다 끝났으니까 힘들면 지금이라도 대표님께 말씀드리고 펜트하우스로 먼저 올라가 쉬세요.”
저 먼저 갑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조엘은 그대로 파티장을 떠났다.
무슨 일이지?
조엘이 저렇게 당황해하는 걸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걱정스레 그가 떠난 방향을 지켜보던 노아는 잊고 있던 불안이 불쑥 찾아왔다.
조금 전 노아 근처에서 웃고 떠들어 대던 무리는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
노아의 시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회장 안을 배회했다.
그냥 지금 쉬러 간다고 해도 될까.
여기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은 이미 끝난 거 아닐까. 오히려 이곳에 있는 게 더 알렉스에게 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견딜 수 없었다.
노아는 용기를 끌어모아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상대와 잔을 부딪치던 알렉스가 노아를 발견하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오. 미인 파트너께서 친히 이곳에 와 주셨네요.”
알렉스와 대화하던 남자가 활짝 웃으며 노아에게 술 한잔 어떠시냐고 권했다.
살짝 고개를 가로저은 노아는 알렉스의 팔에 손을 올리고는 발끝으로 섰다. 키 차이가 크게 나서 그의 귓가에 속삭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저… 알렉스. 좀 피곤해서 그런데 먼저 가도 될까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꺼낸 말에 알렉스가 상체를 슬쩍 낮췄다.
“그럴래? 잠깐 기다려. 얘기만 끝나면 데려다줄게.”
사뭇 다정한 어조였다. 아직 연기 중이구나.
꾸며진 행동임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가슴이 떨렸다.
“아니에요. 얘기, 나누세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이런. 헌트 대표는 미인 파트너를 혼자 보내기 싫은 거군요.”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빈 잔을 넘기고 알렉스가 자연스럽게 노아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흠칫.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자, 그가 고개를 숙였다.
“자연스럽게 굴어. 이렇게 뻣뻣하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죄, 죄송해요. 그런데… 안 데려다주셔도 돼요.”
“파티장 입구까지만 같이 가. 그래도 나름 신혼인데 이 정도 시늉은 해야지.”
“네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은 빨리 입구에 도착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밀착한 탓에 그를 지나치게 의식했다. 허리에 감긴 그의 팔을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허리 쪽으로 시선이 갔다.
“뭘 좀 먹었어?”
“네? 아, 아니요. 배고프지 않아서….”
쯧. 그가 낮게 혀를 찼다.
“뭘 먹으라고 혼자 뒀더니 매디슨이 너 밥도 안 챙겼어? 펜트하우스 올라가면 룸서비스 시켜. 아니, 그러지 말고 매디슨한테….”
말을 꺼내다 말고 그가 입을 다물었다. 이내 쯧, 하고 다시 혀를 찼다.
“근데 무슨 일 있어요? 많이 당황하셨던데….”
“누구? 아아…. 애가 갑자기 열이 난다고 먼저 퇴근했어.”
“네? 많이 아프대요?”
“낸들 알아? 급한 건 거의 다 끝났고, 나머지는 호텔 측에서 파티 뒤치다꺼리하면 되니까 먼저 보낸 거지.”
“그렇군요….”
상태가 심각한 건 아니겠지. 괜찮을까? 전화라도 해 볼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고민하는 사이, 입구에 도착했다.
“난 아직 할 일이 좀 남아 있으니까 먼저 가서 쉬어. 룸서비스 시키는 거 잊지 말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갑자기 상체를 숙여 왔다.
그의 입술이 노아의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좁혔다.
따스한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긴장하지 말고 적당히 내 어깨에 팔을 올려. 대충 이 각도면 사람들 눈엔 뺨에 키스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심장이 떨렸다. 머뭇거리며 팔을 올려 그의 어깨에 살그머니 감았다. 심장이 쿵쾅대며 터질 것만 같았다. 제 쪽으로 몸을 숙인 알렉스가 그 순간 힘을 주어 노아를 꽉 끌어안았다.
흡. 숨을 들이켜자마자, 허리에 감겼던 팔은 이내 노아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곧장 올라가.”
노아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사이도 없이 알렉스는 이미 파티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멍하니 입구에 서 있던 노아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파티장에서 멀어졌다.
어깨가 넓었어. 가슴은 노아의 마른 몸을 전부 감쌀 정도로 크고 두툼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와 닿았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갑자기 확, 하고 몸이 뜨거워졌다. 노아는 제 얼굴이 볼썽사나울 정도로 뜨거워졌다는 걸 알았다.
펜트하우스로 올라가는 승강기 앞에 섰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얼굴에 오른 열이라도 식혀야 했다.
다급하게 화장실을 찾은 노아는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확인했다.
눈 밑이 붉었다. 두 뺨은 사과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헤, 벌어진 입술은 번들거렸고, 두 눈은 꿈꾸듯 몽롱했다.
노아는 손으로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목덜미와 귓불에 뜨끈뜨끈 열이 올랐다.
미쳤나 봐.
노아는 고개를 숙였다. 수전 아래 손을 대자 금세 차가운 물이 손바닥에 고였다. 뜨거운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아도 열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자신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게 될 게 뻔했다.
노아는 문을 힐끔거리다가 결국 비어 있는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조금 앉아 있다가 괜찮아지면 나가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뚜껑을 내린 변기 위에 앉아 노아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호텔은 화장실도 되게 고급이구나,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십여 분이 흐른 후 겨우 화끈거리던 열이 가라앉았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때, 바깥에서 문이 열리며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일은 역시 모르는 거야, 안 그런가?”
“뭐가?”
화장실에 들어온 건 두 명이었다. 목소리로 노아는 남자들이 나이가 다소 있는 편이라는 알았다.
“알렉스 헌트 말이야.”
막 밖으로 나가려던 노아는 멈칫했다. 알렉스 얘기를 하는 거 보니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대로 나가면 저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서 노아는 가만히 숨죽이고 그들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아, 자네는 모르겠군. 알렉스 헌트의 모친 레일라 헌트를.”
“나야 모르지. 내가 입사했을 땐 이미 알렉스 헌트의 부모는 사고로 사망한 뒤였으니까.”
“레일라 헌트가 골드 디거였잖은가.”
“뭐?”
깜짝 놀란 남자는 이내 말을 덧붙였다.
“그런 얘기 어디에도 없지 않았나? 그냥 자네 생각 아니야?”
“이건 전 회장님이 사정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 함구했던 얘긴데, 로버트 헌트가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레일라 헌트에게 홀딱 반해서, 회장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둘이 결혼했거든.”
“레일라 헌트가 웨이트리스였다고?”
“그랬다니까. 당시 레일라가 회사 근처 카페에서 일해서 알아. 나도 몇 번 봤거든. 여하튼 일개 웨이트리스에 불과했던 레일라 헌트는 로버트 헌트의 구애를 받으면서 현대판 신데렐라가 되었지. 겉보기엔 두 사람은 완벽한 부부였어. 회장님이 결혼을 반대하긴 했지만, 레일라가 임신한 걸 알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지. 레일라는 출신이 그랬던 것치고는 미인인 데다 묘하게 상류층 예절이나 태도가 완벽했어. 그녀는 자기 능력으로 금세 상류층에 합류했고 적응도 빨랐어. 사람들은 로버트가 그녀의 외모만이 아니라 성품에도 반한 거라고 생각했지.”
“뭔가 다른 게 있는 거군?”
“더 들어 봐. 혼전 임신을 한 레일라의 배가 불러올 때쯤 로버트가 레일라에게 각인했지. 뭐, 레일라에게 그렇게 홀딱 반한 것치곤 각인이 좀 늦은 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지. 그런데 알렉스를 낳고 나서 레일라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어.”
얘기를 주도하던 남자의 목소리도 달라졌다.
“한창 육아에 전념할 시기에 레일라는 사교계 파티에 참석했고, 씀씀이도 점점 커졌지. 그즈음 일간지엔 레일라의 쇼핑 목록이 매번 실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써 댔어.”
“설마, 애 낳을 때까지 본성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상황을 보니 딱 그랬지 뭐. 로버트 헌트가 각인했으니 본심이 드러났다고 해도 그녀로서는 버림받을 일이 없으니 안심한 거 아니겠나.”
“허어… 그런 일이…. 나는 몰랐네.”
“여하튼 알렉스 헌트가 자기 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될 줄은 몰랐지 뭐야. 난 그가 그리 오메가를 꺼렸던 것도 자기 어머니 영향이라고 봤거든. 그런데 어떻게 자기 모친과 똑같은 조건의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할 수 있느냔 말이지.”
노아는 그들의 얘기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알렉스가 오메가를 싫어하는 이유를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일이 있었던 거구나.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연민 때문에 자신이 알렉스 모친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은 뒷전이었다.
뒤이어 물소리가 들렸고, 누군가가 손을 씻었다.
“그리고 헌트 부부의 그 사고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어.”
얘기는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고? 그 화재 사고 말이야?”
“그래. 사고 직전에 분위기가 묘했거든.”
“어떻게?”
“당시 로버트 헌트는 회장님의 지시에 인수합병을 책임지고 있었어. 회사가 막 커지던 시점이라 무척 중요한 자리였는데, 알렉스가 태어나고 5년 동안 레일라와 로버트 사이가 점점 악화 일로를 달리고 있었거든.”
“하지만 로버트가 각인했다지 않았는가.”
“그게 문제였지. 레일라는 로버트에게 각인하지 않았거든.”
“설마….”
“그래. 로버트의 일방적 각인이었지. 알다시피 일방적 각인은 부작용이 따라오지 않는가. 각인을 한 로버트는 레일라에게 점점 집착했고, 레일라는 점점 밖으로 돌았지. 로버트는 일과 가정은 칼같이 분리하던 사람이었는데, 결혼 6년 차엔 그 균형도 무너졌지. 레일라가 바람을 피우고 있었거든.”
핸드 페이퍼를 북북 뜯어내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남자는 말을 이어 갔다.
“그때쯤 로버트는 시시때때로 집으로 달려가기 일쑤였어. 일 따윈 내팽개치고 말이야. 일방적 각인 부작용이 그때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라, 그게 부작용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지. 그저 사랑하는 부인이 바람을 피우니 화가 난 거구나, 이렇게만 생각했지.”
“정신이 무너지고 있었던 거군.”
“그랬지. 그러던 차에 화재 사고가 일어난 거야. 당시 경찰 발표로는 낡은 합선으로 인한 사고였다고 했지만,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불이 난 그 펜트하우스가 오래된 건 맞지만, 전체 수리를 다 한 상태였단 말이지.”
“그럼 누가 일부러 불을 지르기라도 했다는 건가?”
“속사정을 누가 알겠느냐마는, 그 화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알렉스는 당시 너무 어렸고 심지어 그 일을 겪고 1년이나 실어증에 걸려서 경찰에서도 유일한 목격자이자, 생존자인 알렉스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 거기다 회장님은 살아남은 알렉스를 보호하는 데 혈안이 되어 언론이고 뭐고 힘닿는 데까지 이 사건을 묻어 버리는 데 최선을 다하셨지.”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노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 어린 나이에 알렉스는 부모를 모두 잃었다. 심지어 충격으로 실어증까지 앓았다.
가슴 아픈 사연에 노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가 지금까지 자신을 냉대하고 비난했던 건 어릴 적 기억 때문이었다.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그리 똑똑하게 굴던 알렉스 헌트도 결국 제 부친의 전철을 밟게 되는 건가.”
“이것도 유전적인 영향이 있는 거겠지?”
“글쎄? 그런가?”
나란히 혀를 쯧쯧 차며 남자들이 드디어 화장실을 나갔다.
그들이 떠나는 소리에 노아는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알렉스….
그가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노아의 눈동자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가슴이 미어졌다. 저를 향해 쏟아진 비난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린 그가 겪었을 그 모든 일이 믿기지 않았다.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 그의 모친에게 원망이 들 정도로.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어린 시절로 가서 꼭 안아 주고 싶었다.
휘몰아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팠다.
감정을 추스르러 노아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노아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서 일어났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나치게 충격적인 얘기를 접한 탓에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알렉스를 향한 연민과 안타까운 마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화장실을 나와 승강기로 가려다 발을 멈췄다. 파티장으로 가는 방향을 쳐다보던 그때, 노아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조슈아. 그가 여기 왜?
본능적으로 노아는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조슈아도 이 파티에 초대된 걸까? 하지만 이내 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이 파티에 초대되었더라면 진작 그를 봤을 것이다.
노아는 고개를 쭉 빼고 그를 보다 조슈아가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대는 웨이터 복장을 한 키가 훤칠한 남자였다.
저 옷은, 파티장에서 서빙하던 사람들 복장인데….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대화 중이었다. 대화 내용이 드문드문 귓가에 들려왔다.
“일은 제대로 한 거지?”
“응. 마시는 것까지 확인했어. 그런데… 정말 문제없는 거 맞지?”
“내가 몇 번을 설명해? 임상실험은 완료했고 식품의약국의 승인허가도 떨어진 거야.”
“하지만 알렉스 헌트잖아. 만약 샴페인에 약을 탄 걸 알아채기라도 하면 그땐 우리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거야.”
“아무도 몰라. 약효는 30분이 지나야 나타날 거고, 러트 촉진을 도와주는 약일 뿐이야. 원래 가끔 주기가 불안정하기도 하잖아? 의심할 리가 없어. 대단한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야. 그냥 저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는 게 보고 싶을 뿐이야.”
내가 당했던 걸 똑같이 갚아 주는 거야. 조슈아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난 너만 믿고 한 거야. 확실하게 전했으니 이제 나랑 사귀는 거지?”
“달링. 왜 그렇게 조급해해? 나 못 믿어? 이제 난 네 애인이야.”
대화 내용에 노아는 눈을 크게 떴다.
약을 탔다고? 알렉스에게 알려야 해.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버티고 선 두 사람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노아는 초조해져서 발만 동동 굴렀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렉스가 약을 언제 먹었는지 저들은 말하지 않았다. 10분? 20분?
어쩌면 지금 일이 벌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웨이터는 애가 단 얼굴로 조슈아를 끌어안았고, 감기듯 그에게 안긴 조슈아가 그의 입술을 몇 번 핥아 주며 그를 달랬다.
노아는 그들이 빨리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한참을 그러고 길목을 가로막았던 그들이 드디어 헤어지자 노아는 다급한 걸음으로 파티장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알렉스를 찾았다.
노아는 무작정 그에게 달려갔다.
“알렉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에 모였다. 술잔을 손에 든 채로 알렉스가 의아한 듯 노아를 쳐다보았다.
“왜 도로 왔어? 쉰다고 하지 않았나?”
“급, 급한 일이 생겨서….”
말해야 해. 지금 당장, 그에게 파티장을 떠나야 한다고 말해야 해.
입속에서 맴도는 말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잠깐만, 시간 내주세요.”
알렉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터라 더더욱 중요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노아의 시선은 알렉스를 훑었다. 아직 시간이 있는 건가? 괜찮은 걸까? 얼마나 시간이 남았지?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은 알렉스의 흥미를 잡아끌었다.
“잠시 실례. 내 파트너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요.”
알렉스는 노아의 등에 손을 올리고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올라가 쉰다고 하지 않았어? 왜 내려왔어?”
“지금 당장 올라가야 해요. 일이, 일이 생겼어요.”
“일? 무슨 일? 어딜 올라가라는 거야?”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곧 아플 거예요.”
두서없는 말에 알렉스가 이마를 찌푸렸다. 얘가 왜 이래?
노아의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시선은 연신 알렉스를 훑는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노아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이렇게 오래, 길게 쳐다본 적이 있던가?
푸른 눈동자가 불안하다는 듯 연신 떨리고 있었다.
“너 왜 그래? 아픈 거야?”
노아의 몸을 확 끌어당겼다. 팔과 허리를 쓰다듬자 잘게 떨리는 게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아픈 건 제가 아니에요!”
“무슨 일이야? 지금 말해.”
“여, 여기서는 안 돼요. 사람이… 너무 많아요.”
호기심 어린 시선이 너무 많았다. 누군가는 이 대화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남의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아도 들었던 것처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른다고요!”
노아는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의 팔을 잡았다. 어쩔 수 없어. 억지로라도 그를 끌고 가야 해.
그러나 그의 팔을 잡은 것으로는 그를 밖으로 끌어낼 수가 없었다. 단단하게 버티고 선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노아는 울상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 여길, 벗어나야 해요. 펜트하우스로… 지금 당장 가야 한다고요.”
실랑이하는 사이 어느새 사람들이 다가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어머, 지금 싸우시는 거예요? 부부싸움?”
“원래 신혼 초에 제일 많이 싸우는 법입니다. 허허허.”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농담 삼아 말을 얹었다.
“제 파트너가 원래 보챔이 심합니다. 혼자 뒀다고 서운했던 모양이네요.”
태연하게 대꾸한 알렉스는 노아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지 말고 두 분 얘기 좀 해주세요.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성이 탐색하듯이 노아를 훑으며 물었다. 그녀의 말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이 기회에 출신이 불분명한 노아가 어떻게 알렉스와 결혼했는지 캐낼 모양이었다.
노아는 빠져나갈 수 없는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 갇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러다 알렉스에게 러트가 오기라도 하면 어쩌지? 이 생각만이 가득했다.
어떻게든 그가 이 자리를 자발적으로 떠나야 했다.
노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주변을 살폈다. 조슈아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있으니 대놓고 말할 수도 없고 어떡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 분의 연애사를 듣는 데 술이 빠질 수야 없지.”
이미 얼큰하게 취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레드와인이 담긴 잔을 쟁반을 든 웨이터가 다가왔다. 그때 퍼뜩 노아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는 것이 있었다.
억지로 그를 데려갈 수 없다면, 그가 자발적으로 이 자리를 떠나게 만들어야 한다.
웨이터가 일행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웨이터가 바로 알렉스 곁을 지날 때였다.
노아는 그때를 노려 허리를 비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우연인 척, 쟁반을 건드렸다.
“어?”
“앗!”
한 손으로 쟁반을 받치고 있던 웨이터가 당황할 새도 없이 쟁반이 휘청거렸고 잔에 담긴 와인이 출렁거리며 쏟아졌다.
쏟아진 와인은 그대로 알렉스의 상의를 적셨다.
“이…!”
그의 시선이 단박에 노아에게 내려 꽂혔다.
“미, 미안해요.”
순간 그의 이마가 꿈틀하는 듯했지만, 그 표정은 곧바로 지워졌다.
“괜찮아. 실수잖아.”
어쩔 줄 몰라 하는 노아를 달래며 알렉스가 팔을 꽉 움켜쥐었다.
“이봐! 자네. 똑바로 들었어야지! 지금 이분이 누군 줄 알아?”
웨이터를 불러왔던 남자가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곁의 사람들도 동조하며 허리를 숙이는 웨이터에게 항의했다.
“괜찮습니다. 실수라면 내 파트너가 한 거니 그 정도로 하세요. 옷이야 세탁 맡기면 그만인 것을. 아무래도 갈아입고 와야 할 것 같네요.”
부드러운 태도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알렉스는 노아의 팔을 움켜쥔 채로 빠르게 파티장을 나섰다.
“지금 무슨 짓이지?”
“옷, 갈아입으셔야 하잖아요. 일단 펜트하우스로 가요. 가서 설명할게요.”
승강기 앞에 도착하자 노아는 점점 초조해졌다. 괜찮은가? 아직은 시간이 있는 걸까?
잔뜩 화가 나 입매가 단단히 굳은 그를 보니 괜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무슨 수작질인지 모르지만 대수롭지 않은…,”
알렉스는 그 순간, 몸이 휘청했다.
“알렉스! 괜찮아요?”
이번엔 노아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이게 뭐….”
또다시 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갑자기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다. 순식간에 온몸이 차가워졌다. 한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듯하더니, 곁에 선 이의 체취가 그대로 자신에게 쏟아졌다.
뒷덜미가 오싹 저렸다. 오한이 드는 듯하더니, 이내 몸이 뜨거워졌다.
눈 깜짝할 새 그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알렉스? 알렉스! 괜찮아요? 지금 엘리베이터 왔어요. 빨리 타요.”
노아는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떠밀다시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최상층을 눌렀다.
“조, 조금만 참으세요. 러트가 시작될 거예요. 아, 아까 로비에서 조슈아가 웨이터와 나누는 대화를 들었어요. 러트를 앞당기는 약을 탔대요.”
“뭐, 뭐라고…?”
그는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고 이마를 부여잡았다. 내장이 온통 뒤섞이는 기분이었다.
“조, 조엘한테 사정 설명하고 파티는 어떻게든 수습할게요. 그리고 저는 저택으로 돌아갈게요. 알렉스. 제, 제 말 들리세요?”
“빌어먹을…!”
더웠다. 온몸이 자글자글 타는 듯했다.
알렉스는 승강기 거울에 기대, 한 손으로 넥타이를 풀었다.
“알렉스, 조, 조금만 참으세요. 다 왔어요.”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순간 알렉스의 코끝으로 미칠 듯이 달콤한 냄새가 파고들었다.
단숨에 참을 수 없는 기분이 솟구쳤다.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흐릿해지는 이성을 안간힘을 다해 붙잡았다. 아주 자그마한 자극이라도 가해지면 금세 끊어질 것 같았다.
“너…, 페로몬….”
잇새로 내뱉은 말에 노아가 화들짝 놀라 그와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제, 제 페로몬이 새고 있나요? 죄송해요. 억제제 먹었는데….”
노아는 엘리베이터가 유독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다며 바뀌는 숫자를 초조하게 노려보았다.
벽에 기대선 알렉스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풀어 버린 넥타이를 한 손에 감아 쥔 그는 날뛰려는 페로몬을 안간힘을 다해 억누르는 중이었다.
노아가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도착했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노아는 구르듯 밖으로 뛰어나왔다.
“알렉스! 도착했어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괜찮으세요?”
노아는 그를 부축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제 페로몬 때문에 자극받을까 봐 망설였다. 그사이 비틀거리며 알렉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가 무사히 내리는 것을 확인한 노아는 그대로 달려가 조엘이 주었던 출입 카드로 문을 열었다.
알렉스는 온 힘을 다해 페로몬을 누르고 비틀거리며 간신히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매디슨한테, 연락해서… 상황 설명하고, 너는 당장 여기서…, 나가….”
알렉스는 자신의 모든 인내심을 총동원해 노아에게 전했다. 뇌를 녹이는 것 같은 열기가 곧 폭발할 것만 같았다. 정신이 흐려지고 있었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통증이 시작되었다.
지금 당장 전신을 감도는 이 열기를 해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억지로 내리누르던 페로몬은 한계에 도달했다.
노아가 조엘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하는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알렉스는 침실로 발길을 돌리는 데 남은 의지를 다 썼다.
“…전 이제 갈게요. 조엘이 알아서 수습하신대요. 그리고 출입 통제하니까 걱정하지 마시래요.”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비틀거리며 안쪽 방으로 사라지는 알렉스의 뒤통수에 대고 노아가 소리쳤다.
시간 맞춰서 다행이다.
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잔뜩 굳었던 어깨를 주물렀다.
이제 가야지. 그의 페로몬이 완전히 폭발하기 전에 여기를 떠나야 해.
그는… 괜찮을까?
노아는 힐끔 침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메가가 곁에 있으면 오히려 더욱 괴로울 뿐이다. 자신이 사라져 주는 게 그를 도와주는 일이다.
노아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폭풍처럼 그의 페로몬이 순식간에 노아를 덮쳤다.
“읏!”
온몸의 힘이 빠졌다. 그와 동시에 찌르는 듯한 두통이 노아를 강타했다.
안 돼. 지금은 안….
몸이 휘청거리며 쓰러지려는 찰나, 노아는 팔을 잡아당기는 힘에 끌려갔다.
“알렉스!”